-각자 다른-
진안 군왕이 대전에 있던 대인들의 빗길 안전 문제를 염려하고 있던 무렵, 다른 이들은 대전 안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두 시진에 걸친 조회가 파하고 나서야 진 노태야는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은 사환의 손에서 서찰을 건네받았다. 헉헉 숨을 몰아쉬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환의 모습에서 급히 달려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서찰의 글씨에서도 급히 휘갈겨 쓴 티가 역력했다.
병사는 무기와도 같으니 그리 써서는 안 되오. 남아도는 병사는 재편하고 실력이 출중한 자는 발탁해서 써야 하지. 단번에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소? 천천히 도모해야 하는 법이오. 한 번 패배에 모든 병사에게 그 죄를 물으면, 사기가 떨어지고 기반이 무너질 거요.
어지럽게 흘려 쓴 글씨는 내용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진 노태야는 조금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황궁의 조당 안에서 오가는 말을 딱히 비밀스럽다고 할 순 없지만, 천자와 대신들 사이에서 오간 말이 이렇게 빨리 전해지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 노태야는 서찰의 내용에 더 관심이 갔다.
장강주가 나섰단 말이지? 장강주가 나서서 말을 해? 한꺼번에 두 명을 탄핵하다니!
본디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두 가지 결과밖에 없었는데, 세 번째 결과가 생겼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것! 오랫동안 대치 국면이었던 정세가 바뀌게 됐다. 하지만 이 변화는 양측 모두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원치 않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갑자기 왜 나선 거야?
강주, 서원, 정교랑.
진 노태야의 손이 떨려 왔다. 진 노태야 자신도 그 생각에 놀란 눈치였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그 어린 낭자가 무슨 일을 한 거지? 그러고 보니 둘 다 강주 출신이었어.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부류인데.
한 사람은 강주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는 대유학자였다.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도 ‘강주’라는 이름이 들어가긴 했다. 뒤에 두 글자가 더 붙었지만. 강주 바보.
강주 선생을 생각하는데 왜 갑자기 강주 바보가 떠오르지? 강주 바보가 강주 선생의 서원에 찾아갔던 일로, 강주 선생이 조당의 일에 개입하게 된 건가? 웃기지도 않은 소리지.
대로변에 있는 찻집 안.
엄숙한 표정의 주 노야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말단 관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초나라 왕이 허리 가는 미인을 좋아하자, 궁중 여인들이 굶기를 반복하다 죽기도 했다지요. 폐하의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일이 지속되면, 변방 관리들도 불안에 떨고 변방도 안녕할 날이 없을 겁니다.”
굳어 있던 주 노야의 얼굴이 차츰 펴지는가 싶더니 미소까지 번졌다.
“그렇지, 그렇지!”
주 노야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 편에 있던 말단 관리가 놀라 얼른 손으로 탁 치며 쉿 소리를 냈다. 주 노야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유 교리 하나가 풍질에 얻은 건 놀라울 일도 아니지. 두 명, 세 명은 돼야 얘깃거리가 돼. 그 바보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군. 매번 놀라움을 안겨 주니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주 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 놀라운 일이 나한테서 벌어지는 건 절대 안 되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다른 찻집 안.
동 노야도 말단 관리와 마주 앉아 있었지만, 앞의 몇 명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동 노야는 다른 이들과 다른 행동을 하나 더 했다. 상대에게 비전을 찔러주는 일이었다. 말단 관리는 비전을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군사 상황과 전장의 형세는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오. 그러니 전장에 나간 장수는 군주의 명에 불복해도 용서한단 말이 있는 법이지. 그대들은 멀리 조당에 있으면서 변방의 전황에 대해 이래라저래라하고 있군. 군사 상황도 모르고 군영의 고통도 모르고 있소. 그러면서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고 묻는 꼴이니…….”
“다들 말로는 천하를 위해 기강을 바로 세우고, 죄지은 자를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떠들지만, 군의 폐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그저 정쟁을 위한 정쟁과 싸움을 위한 싸움, 벌을 위한 벌만 중시하며 사건 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일밖에 할 줄 모르지. 대체 군을 위해 이러는 거요? 아니면 서북의 군권을 잡아 그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거요?”
평생 가도 조정 대신들의 언쟁을 직접 볼 일은 없을 말단 관리였지만, 전해들은 말만으로도 어떤 장면이 펼쳐졌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따라서 저도 모르게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고, 현장에서 얘기를 듣고 그 말을 외우기라도 한 듯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똥지게로 가업을 이룬 동 노야로서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동 노야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그런 얘기는 됐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먼. 이것만 말해 주게. 그 탈영병들은 죽인다던가, 안 죽인다던가?”
동 노야가 물었다.
“대인들께서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소이까!”
말단 관리는 눈을 부라리며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이젠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는 누구한테 맡겨야 하는지, 서북 전선에 있는 장병을 남겨 둘 것인지 불러들일 것인지, 그 자릴 대체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논하고 있소이다.”
“그런 일은 내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난 그 탈영병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알고 싶을 뿐일세.”
말단 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금 제정신이오? 그런 거나 알아내자고 이 큰돈을 쓰게?”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 어디에다 쓰든 뭔 상관이야!”
동 노야도 눈을 부라리며 받아쳤다.
똥내를 하도 맡아 정신이 나갔나……. 말단 관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눈치였다.
“아마 죽진 않을 거요.”
동 노야는 눈빛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여 재차 확인했다.
“정말 죽지는 않는 거지?”
“폐하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진 아직 모르겠으나, 왕보당의 죄는 명백하니 그 일은 다신 거론치 않는 것으로 중론이 모아졌소. 또 왕보당의 측근들을 해임하고, 진 상공이 천거한 강문원이 어명을 받은 감찰사로 나가게 됐지. 강문원이 서북으로 가서 군사 상황을 살펴보고, 문제와 폐단을 엄히 조사할 거요.”
“아니, 그래서 그 탈영병은 어찌 되는데?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동 노야가 또다시 소리쳤다.
“이 늙은이가 정말 똥내에 정신이 나갔나! 각자 한발씩 양보했잖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다가 간신히 마무리되어 각자 대응책을 마련하기 바쁜 상황에, 그깟 탈영병 일에 누가 신경이나 쓰나? 애초부터 아무도 신경 안 썼어. 그자들이 죽든 말든 대인들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냥 좋은 구실이었을 뿐이지.”
말단 관리도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인들이 마당을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크고 작은 짐들을 챙겨 마차에 싣느라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아버지, 왜 이리 서둘러 떠나는 거예요?”
동 낭자가 물었다.
“서두르기는? 지금이 딱 좋은 때야.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때지.”
동 노야는 어서 짐을 마차에 실으라며 하인들에게 손짓을 했다.
“서 오라버니 형제들이 아직 석방된 것도 아니잖아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요. 만에 하나라도 사형으로 판결이 나거나 처형은 안 되더라도 감방 신세를 지게 될지 몰라요. 그럼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성을 빠져나가게 둘 리 없다고요.”
“만에 하나 같은 건 없다.”
동 노야는 확신에 찬 어투였다.
“대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어. 그 낭자로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여지인데 무슨 문제가 생긴단 말이냐. 그러니 당장 떠나야 한다. 그 낭자는 우릴 내버려 둘 거야.”
“아버지.”
동 낭자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 그럼 서 오라버니가 나오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요.”
“보긴 뭘 봐!”
동 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이게 다 너희가 다시 만나 벌어진 화인데 뭘 더 보겠다는 거냐! 보기는 뭘 봐, 뭘! 저들이 그동안 벌어진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다가, 분풀이하러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일은 향칠이 저지른 거지 우리와는 상관없잖아요. 서 오라버니는 우릴 탓하지 않을 거예요!”
동 낭자의 말에 동 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사람이 못된 마음을 먹은 게 죄가 된다면, 넌 그 못된 마음이 생기게 부추긴 장본인이야. 향칠이 주범이라면 넌 공범이지. 주범이든 공범이든 죄를 지은 건 매한가지니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법이다! 이번에 서무수가 아무 일 없이 풀려나더라도, 긴긴 세상인데 한평생 아무 일도 없으리라 누가 장담해? 아무 탈 없이 지내면 괜찮겠지만, 일이 생기면 또다시 이번 사건이 떠오를 테고 우리한테 불똥이 튈 수밖에 없어.”
“아버지, 억지 좀 부리지 마세요. 앞으로 일어날 일인데 왜 우리한테 불똥이 튄단 거예요!”
동 낭자가 인상을 썼다. 이번 일로 아버지께서 너무 크게 놀라셨나?
“불똥이 안 튀긴?”
동 노야는 콧방귀를 뀌며 딸을 노려보았다.
“네 진흙 인형, 아직 기억하지?”
동 낭자가 멈칫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인형을 내던져 깨뜨렸잖아요.”
동 노야가 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을 이었다.
“망가지지 않았으면 또 사러 갈 일도 없었겠죠. 또 사러 가지 않았다면 비 맞을 일도 없었을 테고요. 비를 맞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병이 나지 않으셨겠죠. 병이 나지 않았다면 돌아가지도 않으셨을 테고. 그럼…….”
“그만하세요, 아버지.”
동 낭자가 동 노야의 말을 끊었다. 동 노야가 빤히 쳐다보자 동 낭자는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넷째야,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핑곗거리를 찾고 싶어 하는 법이다. 핑곗거리를 찾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믿으려 하고, 이건 운명이라고 여기려 하지.”
“아버지.”
동 낭자는 목이 멘 듯했다.
“그만하자꾸나.”
동 노야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딸을 쳐다보았다.
“그만 마음 접어라. 단념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해치고 남을 해치게 되는 법이야. 네 것이 아니면, 네 것이 아닌 게야. 다 운명이다.”
동 낭자는 눈물이 떨어지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만 가자. 다 잊어라.”
동 노야는 뒤돌아 앞장서서 걸어갔다.
다 운명이라고? 동 낭자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춤에 드리운 장식을 살폈다. 금도, 은도, 옥도 아닌 돌을 갈아 만든 것이었다. 동 낭자는 장식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서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선물한, 유일한 물건이었다. 아니, 선물했다고 할 순 없지. 강제로 빼앗은 거니까.
동 낭자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와 부딪치며 넘어졌다. 동 낭자의 손에 들려 있던 돌 장식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두 동강이 났다.
“이 녀석들!”
동 낭자가 인상을 쓰며 옆을 쳐다보았다. 어린 두 아들이 겁에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머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아이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을 쳐다보던 동 낭자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아니다.”
동 낭자는 손을 뻗어 아이들을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어서 마차 타러 가자. 할아버지께서 우리 데리고 놀러 가신대.”
모친이 화를 내기는커녕 놀러 가겠다고 하자 두 아이는 기뻐 환호하고, 동 낭자의 손을 잡은 채 폴짝폴짝 뛰며 밖으로 나갔다.
분주하게 마당을 오가는 인파 속에서 바닥에 떨어진 돌 장식은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똥지게꾼 일가가 도망쳤어. 쫓아가서 붙잡아 올까? 아니면 거기서 해치워 버려?”
주육낭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알아서 해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일인데 왜 내가 알아서 해?”
정교랑이 손에 든 붓을 내려놓자 시녀가 종이를 펼쳐 그늘진 곳에서 말렸다.
“내 일이라면서, 뭘 그렇게 캐물어요?”
“좀 좋게 말할 순 없어?”
주육낭이 노려보며 대꾸했다.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 좋은 말을 건네지 않는 건 그쪽이죠.”
또 생트집이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럼 진십삼은 너한테 좋은 말 해주냐?”
주육낭이 뒤에서 물었지만,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서재를 나왔다. 시녀는 오늘 쓴 글씨를 잘 걸어 둔 후 그 뒤를 따랐다.
정교랑의 오랜 습관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글씨를 쓰고 활을 쏘며 낮잠을 자는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런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풍진 세상사를 다 겪은 노인뿐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본인 말마따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그저 할 일을 할 뿐 누군가를 위한 일이 아니니, 아무 감정도 없는 거겠지.
“진십삼이…… 너희 또 은밀히 무슨 짓을 꾸민 거야?”
주육낭이 따라오며 물었다.
“우린 그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대화?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조정의 일이 뒤바뀐단 말이냐?”
“정말 우습네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힐끔 보며 말했다.
저 눈빛! 그래, 저거야! 당초 정씨 저택에 앉아 있던 바보도 저런 눈빛으로 날 봤었어!
주육낭은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떴다.
“마차를 준비해.”
정교랑의 말에 금가아는 네, 하고 마차를 빌리러 나갔다.
“어디 가려고?”
“대장간에요.”
주육낭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대장간? 그런 곳엔 뭐 하러?
“넌 그 탈영병들의 일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아? 그 사람들 아직 나오지도 않았잖아. 그렇게 자신만만하단 거야?”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쪽 아버지가 해결해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 믿는 거예요. 우리 외숙부님이 곧 해결하실 테니까.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뭐랬어요. 나한테 좋게 말하라니까요.”
정교랑은 한마디 툭 내뱉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
결국 쓸데없는 말밖에 안 하는군. 아무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는 말. 저 강주 바보가!
주육낭은 이를 갈며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이, 진십삼이랑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주육낭이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같은 시각, 진 시강은 막 문을 나서려던 진십삼을 불러 세웠다.
“십삼,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민 것이냐?”
진 시강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니요?”
진십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관청에 몇 번이나 가지 않았느냐.”
진 시강은 아들이 시치미를 떼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또 주씨 가문의 일 때문이더냐?”
진십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태평거가 주씨 가문과 관련이 있거든요. 그 탈영병들은 문서상 태평거와 신선거의 주인이잖습니까. 혹여라도 일이 생기면, 주씨 가문도 연루될 수밖에 없죠. 딱히 다른 일을 한 건 아니고, 조정 대인들의 소식을 좀 알아봤을 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십삼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누를 끼친 건 아니죠?”
진 시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들을 쳐다봤다.
“누를 끼친 건 없다.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말씀하십시오, 아버지.”
진십삼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진시강은 아들을 빤히 쳐다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뜸을 들였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진 시강이 불쑥 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진십삼은 멈칫하여 물었다.
“무얼 어떻게 했느냔 말씀입니까?”
영문을 모르는 듯한 아들의 모습에도 진 시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명 승부가 날 일이었는데, 왜 갑자기 장강주 선생이 개입하여 승부가 안 나게 만든 거지?”
진십삼이 부친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진십삼은 눈을 껌뻑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제 생각엔 모든 게 폐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진 시강은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말 이상하구나. 지난번엔 네가 주씨 가문의 일로 관청에 몇 번 드나들더니, 유 교리가 갑자기 풍질을 얻었지. 이번에도 주씨 가문의 일로 네가 관청을 몇 번 드나들더니, 진소와 고능준이 오랫동안 별러 왔던 일이 갑자기 뜻밖의 방향으로 결론이 났으니…….”
진 시강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진십삼도 따라 웃었다.
“아버지, 우연일 뿐입니다. 매일 관청을 드나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게 따지면 그런 능력이 있는 이가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진 시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이 안 되는 소리지.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는.
“주씨 가문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진 시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다고 하기엔 번번이 사건이 일어났고, 운이 나쁘다고 하기엔 매번 아슬아슬한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런 생각을 하던 진 시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따지면 넌 주씨 가문엔 행운을 가져다주고, 조정 대신들에겐 불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로구나. 이러다간 관청 사람들이 너더러 오지 말라고…….”
진 시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십삼은 표정을 바꾸며 말을 잘랐다.
“아버지!”
진 시강도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내 아들이 조정 대신들에게 불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라니.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아들의 벼슬길이 평생 막힐 터인데! 조정 대신은 귀신에 관한 일을 금기시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벼슬길이라……. 아들의 벼슬길.
진 시강은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다리가 나아서인지 키도 훌쩍 큰 것 같고, 똑바로 서면 꽤 늠름한 모습이기도 했다.
“십삼, 네가 올해 몇이지?”
진 시강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십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소자 팔월이 지나면 열일곱이 됩니다.”
“열일곱이라, 과거를 치를 때가 됐구나.”
진 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한 내용을 가져와 보거라.”
전에는 진십삼이 불구인 탓에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여겨, 과거를 대비한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진 시강의 아들은 준수한 외모에 영민하고 가세도 번듯하니 앞길은 탄탄대로일 터였다.
진십삼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네, 아버지.”
진 시강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십삼.”
진 시강이 다시 아들을 불러 세우자, 진십삼이 돌아봤다.
“정말 네가 한 거 아니지?”
진 시강의 물음에 진십삼은 억울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소자한테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없겠지. 아들은 관두고 나한테도 없는 능력인데. 진 시강은 또다시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아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사흘 후, 주 노야는 탈영병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알아 왔다.
“사건을 대조 확인했다. 범강림 형제가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게 맞더구나. 그자는 싸우다가 저 혼자 발을 헛디뎌 죽은 거래. 기껏해야 과실 치사 정도지.”
주 노야가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죄는 씻게 됐다.”
“그럼 탈영한 죄는요?”
정교랑이 물었다.
“살인죄의 누명을 벗은 마당에 탈영병이든 아니든 알 게 뭐냐.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병사가 아니니, 탈영병이고 할 수도 없지.”
주 노야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망할 유규 놈. 사리 판단을 못 하고, 감히…….”
“유규요? 그 사람이 또 어쨌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다, 교교. 그 일은 신경 쓰지 마라. 윗선에서 덮는다는데, 일개 대장 나부랭이가 뭘 어쩌겠느냐. 내 따끔하게 혼쭐을 내줄 것이야!”
비록 외조카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는 건 못 한다지만, 일개 순성갑기 대장 하나를 혼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탈영죄를 시인했는데, 서북으로 돌려보내진 않나요?”
정교랑이 물었다.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치고 나갔다.
“그 사람 말이 맞아요. 도망친 건 엄연한 사실이죠. 그럼 서북 군영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죠.”
주 노야가 멈칫했다.
“그럴 필요 없다, 교교. 이건 아무 일도 아니야. 얼마든지 빼낼 수 있어.”
이 외조카가 날 너무 깔보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서북 군영으로 돌려보내요.”
정교랑의 단호한 말에 주 노야는 다시 멈칫했다. 서북 군영으로 돌려보내려면 경성을 떠나야 할 터. 그들을 내쫓으려던 거였군. 주 노야는 퍼뜩 깨달았다.
하긴, 이런 사고를 쳤는데 여기 붙잡아 두면 뭘 하나. 그들을 구한 일로 체면을 지키고 도의도 다한 셈이니, 안 보고 사는 게 속 편하지. 아주 먼 곳으로 썩 쫓아내는 게 나아.
“그래, 교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
주 노야는 무슨 심정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같은 시각, 진 노태야도 이 일에 대해 묻고 있었다.
“탈영병은?”
진소는 피곤한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끌어왔던 일의 결과가 나왔건만, 그 결과는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이 얘길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부친의 질문엔 대답을 하는 게 도리였다.
“제가 그간 병부에 일러 각별히 살펴 주라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진 않았을 거예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고능준 쪽 사람도 제가 저들을 두둔하도록 유도하려고 기필코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진 않겠죠. 다들 서북에서 저지른 죄의 증거를 없애는 일로 바쁘기도 하고요. 위에서 따져 묻지 않으면, 별일 아닌 채로 넘어갈 겁니다. 머지않아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빼내겠죠.”
진 노태야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그 탈영병 일에 왜 그리 관심을 보이십니까?”
진소가 물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여러 사람에게 확인을 받고 싶구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요? 무엇이 말씀입니까?”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진 노태야는 피식 웃었다.
“장강주가 갑자기 튀어나와 너희 둘을 탄핵한 것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야.”
“아버지, 그 일이 이해 가지 않을 게 뭐 있습니까.”
진소가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분명 승부가 날 일이었는데, 갑자기 끼어들어 일을 망쳐 놨다. 수양이 뛰어난 진소였지만 다시는 장강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너도 그자를 보고 싶지 않고, 고 대인도 그자를 보고 싶지 않을 거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아마 보고 싶어 하시겠지.”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는 잠자코 있었다. 관료 사회에서 오래 있었던 터라 황제의 의중은 잘 알았다. 천자가 신하들끼리 견제하도록 두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였다.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일이니, 그런 유학자가 빠질 수 없었겠지요!”
진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랫동안 공들여 가꾼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을 순간이 왔는데, 누군가와 그 열매를 나눠 갖게 됐다. 그것도 날 밟고 빼앗아 간 것이렷다. 입장 바꿔 그 누구라 해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정이란 원래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를 밟지 않고는 위로 올라갈 수 없는 법, 그 점은 진소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이것도 나쁘지 않아.”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버지, 이번 일은 중용의 도에도 어긋납니다!”
진소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제 결정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이었어요.”
“좋은 일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은 법이지. 이번에 네 뜻대로 고씨 가문의 세력을 서북에서 말끔히 뽑아 버리게 됐다고 치자. 오랫동안 뿌리내린 세력을 뽑아낸다는 게 좀 어려운 일이냐. 그리되면 서북 지역이 흔들릴 테니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순 없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입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죠.”
진소가 말했다.
“서북 지역이 흔들리면 오랑캐들이 그 틈을 노릴 거다. 너희가 그곳의 병권을 인수받는다 한들, 병사와 장수가 서먹한 사이니 제대로 명을 따르지 않겠지. 또 고씨의 세력도 절치부심할 거다. 원한이 사무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오랑캐가 쳐들어온 틈을 타 반격이라도 하면 전투에서 패할 테고, 그 죄를 너희에게 돌리며 물고 늘어질 게야.”
진 노태야가 말했다.
“소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나도 네가 죽는 게 두렵지 않아. 다만 그리 죽는 게 무슨 가치가 있어? 네가 죽으면 고씨 가문에서 다시 서북의 병권을 쥘 텐데, 그럼 지금껏 행한 모든 일이 아무 의미도 없지 않느냐.”
진소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한발 물러서게 됐으니 고씨 가문에서도 한숨 돌릴 거다. 아직 기반이 남아 있으니 눈이 벌게져서 너한테 달려들 일도 없고, 너도 한숨 돌릴 수 있어. 어쨌거나 네 사람이 발탁됐으니 앞으로 천천히 시간을 갖고 일을 도모하면 될 일이다. 그럼 서북 지역도 안정될 테고 기강도 바로잡을 수 있어. 한 걸음 물러나는 게, 오히려 한 걸음 나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것 같구나. 장강주 선생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다시 진소를 쳐다봤다.
“이 생각은, 폐하의 생각이기도 하다. 너희도 알았을 게야.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진소는 한숨을 내쉰 후 부친께 예를 표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친히 차를 우려 주었다.
“너도 피곤할 텐데 한숨 돌리도록 해라.”
두 부자는 마주 앉아 잠시 차를 마셨다.
“장강주 선생이 갑자기 나선 일이, 그 탈영병과 관계된 것 같진 않으냐?”
진 노태야가 불쑥 물었다. 진소는 그 말에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아버지, 장강주 선생이 나서게 만든 사람이 정 낭자란 말씀입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진소의 목소리가 커졌다.
“말도 안 됩니다!”
장강주 선생이 어떤 사람인데! 이런 조정의 대사에, 어린 낭자의 말을 귀담아들을 리가!
“정 낭자가 장강주를 압니까?”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복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난 오라비를 보러 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 노태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소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말도 안 됩니다!”
진소가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장강주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남의 부탁 때문에 움직일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그 낭자의 말이 장강주의 신념과 딱 맞아떨어졌다면?”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린 낭자의 눈에도 똑똑히 보이고 세상 사람 모두가 똑똑히 보는 걸 너희만 못 보고 있었다면, 실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진 노태야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장강주 선생으로서는 조정이 그런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겠지.”
그런가? 진소는 놀라면서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서북의 군사에 관한 일을 두고 반년 가까이 양측으로 갈려 싸우던 일이, 여인 하나의 개입으로 승부도 못 가르고 끝났다? 그 여인이 탈영병 몇 명을 구하기 위해? 그 낭자가 장강주 선생을 찾아가 몇 마디 한 일로?
웃기지도 않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그럴 리 없지!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진소는 단호한 말투였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노태야를 설득하려는 건지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낭자의 운이 좋았을 뿐이죠.”
운? 진 노태야는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다. 운이지.”
진 노태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이제 보니 정 낭자가 장강주 선생을 알고 있었군. 참으로 뜻밖이야.”
이 낭자는 경성에 딱히 아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장강주 선생이 튀어나왔다. 경성에 온 지 꽤 됐지만 지금껏 이에 관한 얘기는 전혀 들은 바 없었고, 평소에도 왕래가 없었던 터였다.
정 낭자는 번번이 예상을 벗어나는군. 또 어떤 예상 밖의 인물을 알고 지내는지 모를 일이야.
기병 무리가 쏜살같이 달려 지나가자 연무장에 뽀얀 먼지가 일었다. 시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너울을 쓴 정교랑은 미동도 않은 채로 서 있었다.
“이제 충분히 봤어?”
“아직이요.”
주육낭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더 보든가.”
주육낭은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쨍쨍 내리쬐는 가을 햇볕 아래, 먼지가 뽀얗게 일고 말똥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여인이 한나절 넘게 미동도 않고 서 있으니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여인을 의식했다.
“뭐 하는 거지?”
“낭군을 찾나?”
저속한 농담들이 오갔지만, 어린 낭자 옆에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소년 때문에 감히 큰 소리로 떠들진 못했다. 어린 낭자가 옆에 있는 소년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는가 싶더니, 소년이 자신들 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어이, 거기 몇 명, 이리 와!”
주육낭이 소리치자 말을 타고 있던 기병들은 깜짝 놀랐다.
“정말 자네가 마음에 든 거 아니야?”
병사들이 농담을 주고받자 옆에서 상관이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다가가자 여인은 사람을 보는 대신 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어린 낭자가 설마 말을 좋아하는 건가?
“이래 봬도 천금은 나가는 준마입니다.”
병사들이 웃으며 말을 건네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옆에 있는 자신의 말을 가리키며 턱짓을 했다. 눈길을 돌리던 병사들은 진정한 준마란 무엇인지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장 가문에서 키우는 말이니 여느 말과는 비교도 안 될 수밖에.
“뭐 어쩌라고. 여기 낭자는 우리 게 좋다는데.”
병사 하나가 투덜댔다. 그 말을 들은 주육낭이 병사를 죽일 듯 노려봤다.
“여기 말들, 다 이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말을 쳐다보던 이들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이러지 않으면, 뭐가 어때야 하는데요?”
병사 하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정교랑이 몸을 구부리고 말발굽을 가리켰다.
“발굽의 상처가 심각해 보여서요.”
“이 정도는 심각한 축에도 못 끼죠.”
병사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경성 같은 곳에서는 달릴 일도 별로 없잖습니까. 변방에 가서 기병들의 말을 한번 보십시오. 특히 척후병의 말은 천 리도 넘게 달리다 보니, 발굽이 아주 썩어 문드러졌어요.”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여기 있는 말이 다 이렇단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이러지 않은 곳도 있습니까?”
누군가가 되물었다.
“내 기억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교랑이 말했다.
“그럼 어떤데요?”
누군가가 또 물었다.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병사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뒤돌아 자리를 떴다.
주육낭은 상관에게 작별을 고한 후 서둘러 정교랑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의 뒤에서 병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여기서 이틀이나 봤잖아. 대체 뭘 본 거야?”
주육낭이 물었다.
“말을 봤죠. 보면 몰라요?”
정교랑의 대꾸에 주육낭은 눈을 부라렸다.
“봐도 모르겠다! 진작 알았으면 내가 여기서 너랑 같이 이러고 있었겠냐! 다음부턴 이런 시시한 일로 나 찾지 마!”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그 눈빛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보긴 뭘 봐!”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나랑 같이 나와서, 엄청 기뻐하는 것 같던데.”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 아니, 너, 너,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내, 내가 뭘 기뻐해!
주육낭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아무 대꾸도 못 했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시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주육낭을 힐끔 보고는 정교랑을 따라갔다. 그 웃음이 주육낭을 더욱 궁색하게 만들었다.
“차, 차, 착각하지 마!”
주육낭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대꾸했다.
그래도 주육낭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정교랑 마차의 뒤를 따랐다. 성문으로 막 들어왔을 즈음, 집안 사환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환이 이쪽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부친을 모시는 사환인데…….
“넌…….”
주육낭이 막 입을 열려는데, 사환이 정교랑의 마차 옆에 멈춰 서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아씨.”
사환이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말을 달려 앞으로 갔다.
“노야께서 아씨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범 공자 형제들께서 오늘 석방되신대요.”
시녀가 기뻐하며 휘장을 들어 올리고는 돈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자, 가져가서 사탕 사 먹어.”
사환이 기뻐하며 받았다. 얼마나 묵직한지 제대로 받기도 힘들었다. 세상에, 사촌 아씨께선 통도 크시네! 다른 이들은 푼돈이나 주는 정도인데, 사촌 아씨는 아예 주머니를 통째로 주시잖아! 통째로!
“감사합니다, 아씨!”
사환은 기뻐 소리치고는 곧장 말을 타고 달려갔다. 달려가던 사환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더니 말 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공자님, 분부가 있으신지요.”
사환은 굳은 얼굴로 옆에 있던 주육낭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꺼져라.”
주육낭이 소리치자 사환은 얼른 네, 하고 말을 달려 달아났다.
주육낭은 말을 재촉해 서둘러 앞으로 갔지만 정교랑의 마차는 집 방향으로 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느릿느릿 움직였다. 방향도 집 쪽이 아닌 듯했다.
“어이, 너 또 어디 가려고?”
결국 주육낭이 다시 달려와 물었다.
“대장간에요.”
정교랑이 차창을 통해 말했다.
대장간에 간다고?
“며칠 전에 가지 않았어? 화살은 대장간에서 만드는 거 아니야. 진짜 좋은 화살은 관에서 만들지. 필요하면 무기 점포에 가 봐.”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화살 만들러 가는 거 아니에요. 다른 일이에요.”
정교랑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차는 앞쪽으로 멀어져갔고, 주육낭은 그 자리에 선 채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일이라고? 그 사내들의 석방보다 더 중요한 일이 대체 뭐길래? 요 며칠 이 일로 바쁘게 돌아다녔잖아. 드디어 바라던 대로 됐는데 이젠 별 관심도 없어 보이네. 하여간 허세 부리는 덴 도가 텄다니까!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거리로 나와 선 서무수 등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거리를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자 햇살이 눈을 찔렀고, 귓가에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모든 게 생생히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꿈은 아니지요? 정말 나온 거 맞지?”
서봉추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다섯째 형님, 날 왜 꼬집소?”
“꿈인지 아닌지 알려 주려고.”
옥신각신 떠드는 형제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서무수를 쳐다봤다.
“자네도 꿈 같나?
“아니요.”
서무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이는 해야 할 일을 꼭 해내고야 말죠. 절대 꿈일 리 없어요.”
누이 얘기가 나오자 범강림은 잠시 침묵했다. 감옥 밖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들을 마중 나온 이는 없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지? 곧장 군영으로 가?”
나지막이 묻는 범강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들이 고개를 돌리자 노기등등한 유규의 모습이 보였다.
“도망칠 작정이냐?”
서무수 등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말단 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 시랑 대인께서 특별히 비준하셨습니다. 군영에는 내일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어째서? 탈영병들한테도 특별 대우를 해 주란 말이냐! 한 번 탈영했던 자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번번이 탈영하려 들 거다. 내일? 내일이면 이미 도망치고 없을 텐데?”
“제기랄 놈.”
서봉추가 더는 못 듣겠는지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가 무슨 도망을 쳐? 모함을 받은 게 아니었으면 우리가 도망쳤겠냐?”
유규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모함? 그거야 너희 주장이고. 아주 수완이 대단하더구나. 뒷배도 든든하고. 그래, 뭐든 너희 말이 다 맞다!”
유규가 비꼬며 소리쳤다. 불같은 성격의 서봉추는 당장이라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 태세였다.
“너희 같은 자식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된 거다. 그런데도 뭘 나불거려!”
서무수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형제 두 명이 서봉추를 말렸다.
“저자가 우릴 해치려 한 게 아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리 된 거야. 우리가 깨끗했다면 그 누구도 우릴 못 건드렸을 거다.”
서무수가 유규를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대인, 저희는 내일 반드시 군영으로 갈 겁니다.”
유규는 콧방귀를 뀌며 형제들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네놈들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도망칠 생각은 어림도 없어!”
유규가 떠난 후 걸음을 옮기던 서무수 형제는 곧 다시 걸음을 멈췄다.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던 경성이 불과 며칠 만에 더 낯선 곳이 되어 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형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요?”
형제 하나가 물었다.
“집으로 가야지.”
서무수가 대꾸했다.
집으로 간다고? 형제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집으로 가도…… 될까요? 마중 나온 이도 없는데…….”
누군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슨 낯으로 거길 가나.
서무수가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자기 집에 가는 건데, 누가 마중을 나와! 가자.”
자기 집에 갈 땐, 마중 나올 이가 필요 없긴 하지. 형제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래, 집으로 가자. 자기 집으로 가는 건데 걱정할 게 뭐 있어!”
범강림도 동조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형제들도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다가 따라나섰다.
그럼 집으로 가자.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지만, 옥대교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형제들의 발걸음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다리 어귀에서는 마차와 말을 빌리는 이들이 흥정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변함없었다. 정말 모든 게 변함없을까?
“도련님들 오셨네요!”
소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서무수 형제의 귀에 꽂혔다. 서무수 형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트렸다.
금가아와 반근이 달려와 반갑게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한참 기다렸잖아요.”
“마중을 나가려니 집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요.”
“서둘러, 금가아. 화로 갖다 놓고 보수사에서 가져온 향도 피워.”
두 사람은 조잘조잘 쉬지도 않고 떠들었다. 형제들은 대답할 틈을 못 찾은 채 허허 웃으며 반근과 금가아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형제들은 나뭇가지로 몸을 털고 화로를 넘은 후에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산석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고, 가을날의 대숲은 한층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대청의 문이 열려 있어 그 안에 있는 병풍과 탁자가 보였다. 탁자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게 변함없었다. 다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만 빼고.
서무수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서무수도 그녀를 보는 게 두려웠다.
“아씨는 출타하셨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반근의 말에 서무수는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 데워 놨어요. 도련님들 우선 씻으세요. 옷도 준비해 놨어요.”
금가아가 소리쳤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면도한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마당에는 두 명이 늘어 있었다.
“주인어른.”
이대작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일어섰지만, 오 관리인은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미소만 지었다.
“어째 체격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매일 먹을 거며 입을 거 갖다 바치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기만 했으니 살이 안 찌는 게 더 이상할 거요.”
서봉추가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큰일이군. 며칠 안 움직였더니 근육이 다 굳은 것 같소.”
그러면서 옆에 있던 형제들에게 소리쳤다.
“자, 자. 어서 단련하러 갑시다. 몸을 움직여야지.”
형제들도 웃으며 뒷마당으로 갔다. 얼마 안 가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사람이 많은 게 시끌벅적하고 좋습니다.”
오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성가신 일도 많고.”
범강림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성가신 일이요? 뒤죽박죽 뒤얽혀 사는 게 사람 사는 인생인데, 성가신 일이 없을 수야 없지요. 하루 푹 쉬고 어서 점포로 가 보십시오.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범강림과 서무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네, 맞습니다.”
이대작도 거들고 나섰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신선거 장사가 하루가 다르게 잘됩니다. 아주 바빠 죽겠어요. 주인어른들까지 안 계시니 관리인이 사람 수를 제한해서 받을 정도라니까요.”
오 관리인이 껄껄 웃었다.
“사람 수를 제한하는 건 바쁜 것과 상관없는 일일세.”
오 관리인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종의 장사 수완이지. 귀한 것일수록 값은 올라가는 법…….”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왜 안 번다는 겁니까? 매일 오십 탁자만 받으니 너무 아깝잖습니까. 겨울이 되면 못 먹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먹고 싶으면 일찍 와서 자리를 맡아야지.”
두 사람이 장사에 대해 떠드는 동안 범강림과 서무수는 웃으며 듣기만 했다.
“주인어른, 안 그렇습니까?”
오 관리인이 이들을 보며 물었다.
“관리인이 좋다면 좋은 거겠지.”
범강림이 말했다.
“주인어른, 참 속 편하게도 말씀하십니다. 주인어른의 식당이 아닙니까.”
오 관리인이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범강림과 서무수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오 관리인, 우리는…….”
서무수가 막 입을 열 때였다. 대문 쪽에서 금가아가 아씨께서 돌아오셨다고 외치자, 다들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문이 열리고 마차가 멈춰 서더니, 시녀와 너울을 벗은 정교랑이 모습을 보였다. 꽃을 수놓은 무채색 치마에 푸른 비단옷을 입은 정교랑의 얼굴은 백옥처럼 고왔다.
“오라버니들, 돌아왔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뒷마당에 있던 형제들은 부르는 소리에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정교랑과 서무수, 오 관리인 등은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사는 댁에서 하시겠습니까? 점포에서 드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집에서 드시는 게 좋겠지요? 음식 준비할 것 없이 점포에서 가져다 드십시오.”
오 관리인이 말했다.
“내가 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오라버니들이 고초를 겪고 돌아왔는데, 누이로서 이 정도는 해야죠.”
“아, 아냐. 누이가 밖에서 고초가 많았지. 고생스럽게 그러지 마.”
“고생스럽지 않아요. 마침 오늘 다들 모였잖아요.”
정교랑은 오 관리인과 이대작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작별 연회인 셈 치죠.”
작별? 오 관리인과 이대작이 흠칫 놀랐다.
서무수 형제들이 오늘 석방된 것은 여인의 공이 분명했다. 군영으로 돌아가라는 명이 떨어진 사실을 여인이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형제들보다 더 먼저 알았으리라.
서무수 등은 잠자코 있었다.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실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아니, 떠나시다니요?”
이대작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우린 탈영병이오. 목이 잘릴 대죄를 지었는데 목숨을 건진 것만도 행운이지. 억울함을 풀고 누명을 벗어 이젠 그냥 병사가 됐소. 병사라면 돌아가야겠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이대작과 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니요. 원랜 안 돌아갈 수도 있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 말에 안에 있던 이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오라버니들을 위해 큰 선물을 세 개 준비했어요. 이게 첫 번째 선물이에요.”
다시 군졸 노릇이나 하라고 군영으로 돌려보내는 게 큰 선물이다?
“그래. 정말 고마워, 누이.”
서무수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서무수에 이어 다른 형제들도 감사를 전했다. 감사 인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어떤 의구심도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묻지도 않아요?”
도리어 정교랑이 물었다.
“누이가 우릴 위해 하는 일은 다 옳아. 우린 누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서무수가 대답했다.
“오라버니들한테 묻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어요. 오라버니들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오 관리인과 이대작은 저도 모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경성에서 풍족하게 사는 대신 변방으로 가 말단 군졸 노릇을 하게 생겼는데, 마음에 들 수가 있나?
“아씨, 밖에 누가 물건을 가져왔답니다.”
마당에서 금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선물이 왔네요.”
시녀가 웃으며 일어났다.
“어서 들여보내.”
“아씨께서 좋은 물건들로 준비하셨으니, 한번 보십시오.”
오 관리인과 이대작도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어디 가 보자.”
서무수도 웃었다. 다들 우르르 밖으로 나가 회랑 아래에 섰다. 점포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일꾼 네다섯 명을 인솔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활이네!”
점원들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형제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경주(慶州)의 활이야!”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주인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목이 훌륭하십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린 후,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점원들이 들고 오는 장궁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내가 득의만면한 얼굴로 자랑했다.
“저희 점포의 활은 경주의 관(官)에서 만든 겁니다. 여기 이 화살들은 각각 양석궁과 삼석궁으로…….”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나갔다.
“삼석궁은 내 겁니다!”
서봉추가 괴성을 지르며 활을 향해 달려들었다.
“삼석궁은 내 거요. 다른 것들 쓰시구려.”
그 말에 형제들도 아우성을 치며 달려갔다.
“봉추 네가 삼석궁을 당길 수나 있어? 아서라, 그러다 허리 나가.”
마당이 시끌벅적해졌고, 형제들은 서로 뺏고 빼앗으며 장난을 쳤다. 마음에 쏙 드는 활을 손에 넣은 서봉추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
서봉추는 늘 지니고 다니던 구리반지를 끼고 활시위를 힘껏 당겨 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하, 끝내주는 활이네. 진짜 좋구먼, 힘이 단단히 들어가.”
별 힘도 안 들이고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주인도 깜짝 놀랐다.
“세상에, 호걸이십니다. 힘이 장사예요!”
주인이 서봉추를 치켜세웠다.
“이 삼석궁은 군에 있는 나리들도 제대로 못 다뤄요.”
서봉추는 더욱 우쭐하여 본격적으로 활을 쏘기 위해 뒷마당으로 가려 했다.
“우쭐할 것 없어. 경성에나 없지, 우리 형제 중 이거 하나 못 다루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른 형제들이 서봉추를 진정시켰다. 마당은 웃고 떠드는 소리로 분위기가 한층 달아올랐다.
“셋째 오라버니는 안 골라요?”
정교랑이 물었다. 한쪽 옆에 서서 형제들을 보고 있던 서무수가 미소를 지었다.
“안 골라도 돼. 활이기만 하면 다 쓸 수 있으니까.”
“실력만 출중하면, 좋은 활이든 나쁜 활이든, 다 쓸 만할 테니까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는 웃음을 터트렸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활을 나눠 주고 확인을 마친 주인은 돈을 받고 싱글벙글하며 예를 올린 후 작별을 고했다.
“저 물건이 그리 비싸다니!”
오 관리인이 옆에서 혀를 내둘렀다.
활 하나가 자그마치 이십 관이었다. 거기에 쇠뿔로 만든 반지까지 합치면, 화살 일곱 개 값이 웬만한 집에서 일 년 동안 먹고살 돈과 맞먹었다.
“이보시오, 어르신.”
주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경주산 활은 구하기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아무나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 관리인은 잘 모르는 분야기도 했거니와, 돈을 얼마를 쓰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아씨는 돈을 중시하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에게 돈은 장난감과 같은 것이었다. 오 관리인은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주인 사내가 돌아간 후에도 형제들은 소란스러웠다.
“누이가 돈을 많이 썼네. 군에서도 활을 나눠 줄 텐데.”
범강림이 말했다. 정교랑은 잠자코 있는데 옆에 있던 서봉추가 입을 열었다.
“군에서 주는 활은 너무 형편없잖소. 어째 매년 날이 갈수록 후진 걸 주니 말입니다. 그런 거 들곤 싸우기도 힘들어요.”
서무수가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고 누이 돈을 쓸 건 없잖아.”
서봉추가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내가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소. 그냥 한 말인데 셋째 형님은 왜 군대 편을 들고 그러시오?”
“돈 별로 안 썼어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들은 이제 돈이 많잖아요. 이십 관짜리 활이 아니라 삼십 관, 사십 관짜리라 해도 별거 아닐걸요.”
“맞아, 맞아.”
서봉추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범강림이 눈을 부라렸다.
“다만, 활의 가치는 돈에 있는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들은 왜 관에서 만든 좋은 활을 안 사고, 나뭇가지와 노끈으로 직접 만들었죠?”
시끄럽던 마당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돈이 아까워서 그랬던 건 아니야. 우린…….”
누군가가 입을 열었지만,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라버니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를 거예요. 하지만 난 알아요. 내가 말해 줄게요.”
천천히 층계를 내려온 정교랑은 기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활을 들고 있는 형제들을 죽 둘러봤다.
“오라버니들은, 늘 반지를 지니고 다니죠.”
정교랑이 앞에 있는 한 형제의 엄지손가락에 있는 구리 반지를 보며 말했다. 이미 누렇게 마모되어 반들거리는 반지였다.
“나, 난 습관이 돼서…….”
형제가 쑥스러워하며 쭈뼛쭈뼛 말했다.
“네, 습관이 됐겠죠.”
정교랑이 형제들의 앞을 쭉 걸었다.
“오라버니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단련하는 데 습관이 됐어요. 무기를 손에 들고 언제든 싸울 태세를 취하는 게 습관이 됐죠. 춤과 노래가 있는 곳에 누워 있어도, 공격을 알리는 징과 북소리가 들리진 않는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는 데 습관이 됐어요.”
그 말에 서무수 형제는 물론이고 오 관리인과 이대작도 호흡이 거칠어져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뼛속 깊이 흐르는 혈기야말로 가장 없애기 힘든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는, 군영의 소집 명령도 없고, 동포들이 싸우고 맞서며 내지르는 비명도 없는 곳이에요. 적군이 쳐들어올 때 나는 말발굽 소리도 안 들리죠.”
정교랑은 서봉추 앞에 서서, 그가 꼭 쥐고 있는 장궁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여기에서 활은 벽에 걸어 두는 장식품일 뿐이고, 누이인 나와 함께 갖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에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활을 손에 넣었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죠.”
정교랑이 손을 풀고 돌아서서 천천히 돌아왔다.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 맹수고, 용은 깊은 못에 있어야 영물인 법이죠. 오라버니들의 활은, 전장에 있어야 해요. 전장에서 적의 가슴을 쏴야, 천금의 가치가 있는 활이 되죠. 그래서 오라버니들은 값비싼 활을 사러 가지 않았던 거예요. 그 활을 여기 걸어 두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호랑이는 산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우리 속에서 배불리 먹는 걸 원치 않아요. 그래서 오라버니들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금산에 앉아 한평생 태평하게 사느니, 가서 공훈을 세우고 치욕을 씻어요. 오라버니들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거기서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 버려요.”
정교랑은 층계 앞에 똑바로 서서 서무수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오라버니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이게 선물이었구나. 이게 선물이었어.
형제들은 정교랑의 말에 심취해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여인의 갈라지고 거친 음성이 계속해서 귓가에 메아리쳤다.
탈영병.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도망쳤다고는 하나, 도망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도망치는 길에 싸우다 다쳐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에도, 겁이 난다기보다는 꺼림칙한 마음이 컸다. 병사라면 전장에서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지낼 땐 그렇게까지 마음에 걸리진 않았다. 언젠가는 가난을 벗어나리라는 생각에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돈이 풍족해지자, 밤에 자다 깨기라도 하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어느새 도망자 신세가 됐다.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이. 도망치기 시작한 그날, 형제들의 혼은 반쯤 서북에 두고 왔는지도 몰랐다.
호랑이는 산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우리 속에서 배불리 먹는 걸 원치 않아요.
그래서 오라버니들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금산에 앉아 한평생 태평하게 사느니, 가서 공훈을 세우고 치욕을 씻어요.
오라버니들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거기서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 버려요.
실패한 곳에서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자.
마당 안은 고요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전부 새로 시작하는 거야! 죄를 씻고, 다시 시작하자!
본디 도망친 것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돈도 권력도 의지할 곳도 없는 일개 병정이 어디 가서 억울함을 푼단 말인가. 이제 억울함을 풀고 누명도 벗었다. 다시 군영으로 돌아가게 됐다.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
이번엔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죽기는커녕 소원을 이루게 됐다. 인생에 어찌 이리 놀랍고 기쁜 일이 많은지.
서무수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어쩌다가, 이렇게 운이 좋아진 걸까? 우리 따위가 뭐라고, 하늘이 이리 어여삐 여기시는지.
“선물 두 개가, 다들 마음에 들어요?”
정교랑이 재차 물었다.
“마음에 들어.”
서무수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정교랑은 제대로 못 들었다는 듯 서무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요?”
“좋다고.”
서무수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뭐라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서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무수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따라 웃었다.
“좋아!”
“좋아!”
“좋아!”
마당에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이대작은 코끝이 찡한지 코를 비볐다.
“주인어른들께서 정말 떠나시네요. 이거 섭섭해서 어쩝니까.”
이대작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울긴 뭘 울어. 못난 사람 같으니.”
옆에서 오 관리인이 대꾸했다.
“이건 큰 경사야. 주인어른들께서 무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게 생겼잖아.”
이대작이 네, 네, 하며 끄덕이고, 고개를 들어 오 관리인을 쳐다봤다.
“형님, 뭐 하는 겁니까? 왜 고개를 그리 들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닐세. 하늘을 보는 거야.”
오 관리인은 뒤로 돌아서더니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참 좋네…….”
날이 어둑해지자, 마당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권하던 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점심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탓에, 주량이 뛰어난 형제들도 거의 만취해 곯아떨어졌다.
“술이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거야.”
취기가 오른 오 관리인은 알딸딸한 채로 중얼거리며 이대작, 금가아와 함께 곯아떨어진 형제들을 방 안으로 옮겼다. 이들은 형제들의 얼굴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혀 준 다음에야 밖으로 나왔다.
정교랑이 회랑 아래에 서서 배웅했다.
“고생이 많아요, 관리인.”
“고생은요. 아닙니다. 고생할 수 있는 것도 복이죠.”
오 관리인이 껄껄 웃었다. 방금 전 형제들을 방으로 옮긴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앞으로 식당을 운영할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 말이 통한 듯했다.
이대작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아니지, 고생도 아니야. 이런 걸 고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진짜 복이지.
정교랑 저택의 연회가 파할 무렵, 주씨 저택의 연회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주육낭의 짐은 벌써 서북으로 떠난 후였다. 주육낭은 서북으로 새로 부임할 이들과 함께 사흘 후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내일은 주육낭이 군영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어린 아들과 떨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모친과 달리 주씨 가문 사내들은 딱히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주씨 가문에선 이런 작별이 대대로 이어졌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는 겪을 운명이었고, 이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 가면 숙부님과 백부님 말씀 잘 듣고.”
“전장은 연무장과 달라. 많이 보고 익히도록 해라.”
부친과 사촌들이 경험을 나눠 주었다.
“이거 내가 비싸게 주고 산 병서입니다. 천금을 줘도 못 구한다고요.”
“오라버니, 이거 오라버니를 위해 구한 호신용 부적이에요.”
형제자매들이 작별 선물을 건넸다.
푸짐하게 차린 연회 음식에 술과 노래가 곁들어지면서 주씨 저택의 대청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고, 연회는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씻고 나자 취기가 어느 정도 가신 주육낭은 쉬러 가는 대신 대청에 앉았다.
“공자님, 늦었습니다. 일찍 쉬세요.”
시녀들이 말했다.
주육낭은 대청에 놓인 선물들을 죽 훑었다. 형제자매가 준 것도 있고, 친구들이 준 것도 있었다. 대부분 평안과 축복을 비는 뜻을 담은 것이어서 굳이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 있는 게 전부냐?”
주육낭이 물었다. 시녀들은 영문을 모르겠는 듯 대답했다.
“네, 공자님. 요 며칠 받은 건 전부 여기 있어요. 가져가시려고요?”
주육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시녀들은 더 묻지 않고 예를 표한 후 물러났다.
잠시 홀로 앉아 있던 주육낭은 탁자 앞으로 와서 크고 작은 선물들을 하나씩 뜯어 보았다.
없군, 없네, 없어.
저번에 가장 마음에 드는 화살을 고르라 하지 않았다고, 토라져서 이젠 왕래도 안 하겠단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주육낭이 손을 멈췄다. 그건 아니겠지.
더는 왕래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한 건 자신이었다. 그 똑똑한 사람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주육낭은 팔베개를 하며 천장을 보고 누웠다. 회랑 아래에 있던 시녀가 고개를 들이밀고 쳐다보며 근심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공자님께서 많이 취하셨나? 왜 여기서 주무시지…….”
“일단 좀 기다리자.”
다른 시녀가 말했다. 하지만 대청에 있던 소년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앉더니 계속해서 선물들을 열었다. 두 시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으며 눈짓을 주고받고는 회랑 아래에 앉았다.
주육낭의 손이 멈췄다.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여인은 내가 떠나는 것도 모르는데. 안다 해도, 모르는 것처럼 굴겠지.
주육낭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벌러덩 누웠다. 발을 휘둘러 탁자와 선물들을 차 버리고는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안에 있는 소년이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자 시녀들은 가볍게 불러 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시녀들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누운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울 수도 없고 옮길 수도 없어 시녀들은 이불을 가져다 덮어 주고, 안에 있는 불을 전부 끈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실내에서 눈을 뜬 소년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깊은 밤, 만물은 고요하기만 했다.
한편 정교랑의 대청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안에서 시녀가 소곤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약 냄새도 났다. 얼마 안 가 종이 문이 열리더니, 시녀와 반근이 각자 바구니를 끼고 정교랑을 따라 나왔다.
통로를 지나 뒷마당으로 가자 산석처럼 우뚝 서 있던 사람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셋째 도련님, 깨셨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깜빡 잠들었네.”
서무수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멋쩍게 웃다가 곧 흠칫 놀라며 물었다.
“아니, 누이는 왜 안 자고?”
“차를 말리려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녀와 반근이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서무수에게 보여 주었다.
“아씨께서 직접 하신 거예요.”
“진 공자께서 가져다주신 차나무에서 마침 잎을 딸 때가 됐거든요.”
시녀와 반근의 말에 서무수는 고개를 숙여 바구니에 있는 찻잎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래. 누이는 정말 대단해.”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이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마음 푹 놓고 가서 자요. 이 누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서무수가 따라 웃으며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
정교랑은 잠자코 있는데, 서무수가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사실 걱정 안 해도 되는 거 알아.”
서무수가 말했다.
그래서 걱정을 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몇 걸음 뒤에 있던 시녀와 반근이 눈을 마주치며 입을 삐죽거리고 웃었다.
“저기, 앞으론 밖에 자주 놀러 나가. 갑갑하게 혼자 집에만 있지 말고.”
“난 외롭지 않아요.”
정교랑이 돌아보며 씩 웃었다.
“걱정 마요, 오라버니.”
서무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금가아가 깔아 놓은 대나무 자리 앞에 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서무수가 손을 뻗자 시녀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건넸다.
“남들 눈엔, 내가 가엾어 보이겠죠.”
정교랑은 소매를 걷고 서무수가 건넨 바구니에서 차를 꺼내 널며 말했다.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무서울 수도 있고요. 그건 그 사람들 생각일 뿐, 내 삶이 아니에요.”
그래. 그건 남들 생각이지. 이 여인은 스스로가 가엾지도, 무섭지도 않으리라.
서무수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틀에 박힌 사람이라 그래.”
“그러니까 걱정 마요, 오라버니. 잊지 마요. 오라버니들을 만나기 전에도, 난 늘 이렇게 지냈어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들이 떠나도 변함없이 이렇게 지낼 것이다. 어쩌면, 오라버니들이 없는 삶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지.
너무나도 솔직한 말이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솔직한 말. 그 사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변함없는 사실이리라.
오라버니들을 만난 것도 기껏해야 일 년밖에 안 되지 않았는가. 일 년은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일 년 동안 그녀에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지만, 서무수 형제들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서무수는 말이 없었고 정교랑 역시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은 차를 널고, 한 사람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두 바구니에 있던 찻잎을 금세 다 널었다.
“그래. 앞으로의 일은, 누이 혼자 해. 이 오라비는 못 도울 것 같아.”
서무수가 손을 털며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어서 가서 자. 요 며칠 많이 고단했겠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시녀와 반근도 예를 올린 후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등롱을 들고 밝아졌다 흐려졌다 하며 멀어지는 여인의 모습을, 서무수는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 올 무렵, 문을 열던 시녀는 깜짝 놀랐다.
“공자님은?”
시녀가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공자님 못 봤어?”
나머지 시녀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대청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이불은 한쪽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연무장에 가셨나?”
“왜 못 들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계셨는데.”
“오늘 군영으로 들어가시는데도 연무장에 가시다니, 정말 열심이시네.”
같은 시각 주육낭은 옥대교 저택의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공자님, 새벽부터 웬일이세요?”
금가아가 졸린 눈으로 문을 붙잡고 말했다.
“새벽은 무슨. 대문 앞이나 쓸지, 아직도 자빠져 자냐!”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금가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빗자루를 손에 쥐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육낭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한참을 서성일 때처럼, 주육낭은 마당에서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데요? 다들 일어나지도 않으셨다고요.”
금가아가 따라와 기분 나쁜 투로 물었다. 주육낭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한 마당을 둘러본 후, 뒤돌아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너희 아씨한테, 나 떠난다고 해라.”
주육낭은 걸어가며 금가아에게 말했다.
“앞으론…….”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주육낭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앞으로 뭐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심호흡을 하고 돌아섰던 주육낭은 여인이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문 앞에 선 모습을 보고 얼른 다시 돌아섰다.
“앞으로, 앞으론 말썽 그만 피워.”
뒤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육낭이 발을 들어 두 걸음쯤 옮겼을 때였다.
“아, 나한테 작별 인사를 하러 왔군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경성은 만만치 않은 곳이야. 조심하는 게 좋아.”
웃는 듯 아닌 듯한 여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반근, 간식 좀 가져와.”
정교랑이 말했다.
망할 여인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홱 돌아서서 정교랑을 노려봤다.
대청 안은 어두웠고, 밝아오는 새벽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소녀는 짙은 무채색 옷차림에, 머리는 칠흑처럼 새카맸다. 소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주육낭은 자신이 거기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대로변에 서 있었고, 손에는 간식이 든 함이 들려 있었다.
주육낭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서 빨리 함에 든 간식을 길가의 거지들에게 던져 주거나 냇물에 처박아 버려야 했다.
벌써 성문이 열린 후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수레를 미는 사람, 말을 끄는 사람, 말을 탄 사람 등등이 분주하게 오갔다.
주육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은 함을 품속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이야.”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뭘 그렇게 주섬주섬 챙겼어?”
당황하던 주육낭은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고개를 들어보니 훤칠한 공자가 말을 탄 채 휙 지나가고 있었다.
“어이.”
주육낭이 저도 모르게 소리치자 진십삼이 고개를 돌렸다.
“왜?”
진십삼이 놀란 듯 물었다. 주육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십삼을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일 보러 나가.”
진십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간다.”
말하면서도 진십삼은 말고삐를 당기지 않았다. 말을 마쳤을 때 진십삼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고, 고개를 돌리며 말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주육낭은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먼저…… 간다니…….
진십삼과 말은 인파 속을 헤치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저 자식이, 저 망할 자식!”
주육낭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고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인지라 진십삼의 말은 빠르게 내달릴 수 없었기에,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육낭에게 따라잡혔다.
“아니, 뭐가 그리 바빠? 빨리도 뛰었네.”
진십삼이 말 위에서 웃으며 물었다. 주육낭은 진십삼 옆에 멈춰 서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시치미 작작 떼고, 냉큼 내려와.”
주육낭이 노려보며 말하자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욕을 하고 이래?”
“욕이 대수냐? 팰 수도 있어!”
주육낭은 진십삼을 움켜잡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사람을 팬다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그래, 그래. 내가 알아서 내려갈게. 어휴, 이 창피한 인간.”
두 소년이 싸우기는커녕 어깨를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고, 거리의 행인들은 실망스러운 듯 흩어졌다.
“나 진짜 바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바쁜 사람이 꼭두새벽부터 날 미행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얼씨구, 꿈도 야무지네. 내가 자네를 미행해서 뭐 하려고?”
진십삼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만해. 난 거짓말 못 하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본인이 잘난 줄 아나 본데, 전엔 내가 비위 맞춰 줬던 것뿐이야.”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내게 네 마차랑 부딪쳤을 때 웃으며 괜찮다고 하면서도 너 속으론 나 엄청 욕했잖아. 그게 안 보일 줄 알아?”
진십삼이 하하 웃었다.
“아, 진짜 그게 보였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약조대로 한 거야?”
“일개 절름발이를 내가 무서워하기라도 할까?”
“절름발이라. 전엔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었는데.”
“널 속인 거였어. 그걸 믿냐?”
그러더니 주육낭이 손을 내밀었다.
“얼른 내놔. 나 바빠, 빨리.”
“무슨 소리야? 내놓으라니 뭘?”
진십삼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주육낭은 퉤 하고 침을 뱉은 후 손을 훅 뻗어 진십삼의 허리춤에 있는 비수를 낚아채려 했다. 진십삼이 얼른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내 거야, 내 거.”
다리가 다 낫긴 했지만 걸음마를 떼자마자 무예 단련을 시작한 주육낭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진십삼은 금세 비수를 빼앗겼다.
눈에 띄는 비수는 아니었다. 칼집도 수수하고 보석이나 금은을 박아 둔 것도 아니었다. 주육낭이 비수를 뽑아 보더니 혀를 찼다.
“위주(涠洲) 단(段)씨의 칼이네.”
주육낭은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었다.
“쓸만하군. 선물에 성의도 있고.”
옆에 있던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 건?”
주육낭은 비수를 잘 집어넣고 진십삼을 힐끔 쳐다봤다.
“내가 선물 받아주는 게 자네한텐 최고의 선물 아닌가?”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주먹을 뻗어 주육낭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누이를 닮아 점점 영악해지네!”
“잘 나가다가 그 애 얘긴 왜 꺼내? 단념하는 게 좋아. 종일 그 애 생각만 해 봤자, 소용없다고.”
진십삼은 웃으며 대꾸하지 않고 배를 두드렸다.
“급하게 나오느라 밥도 못 먹고 나왔어.”
진십삼이 주육낭을 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런데 자네는 간식까지 싸 왔군. 좋아, 좋아. 어서 꺼내 봐.”
진십삼이 손을 뻗었지만 주육낭이 한발 먼저 몸을 피한 후였다.
“먹긴 뭘 먹어.”
“그 낭자가 준 건 별로라며? 눈에 거슬려서 심란하기만 할 텐데, 내가 대신 처리해 줄게.”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피했다.
“나 가면, 그 애 잘 보살펴.”
주육낭의 말에 진십삼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살필 필요나 있나. 난 은혜를 갚을 수도 없는 사람인데.”
주육낭이 걸음을 내디뎠다. 진십삼이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진십삼은 아직 주육낭처럼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몰랐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도 없고 믿음도 안 가. 자네밖에 없어.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맡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지.”
진십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치켜세우는 거야? 깔보는 거야?”
진십삼이 주육낭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주육낭이 팔을 들어 막고, 다시 진십삼에게 주먹을 날렸다.
“부실한 몸이나 좀 단련해. 나중에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쯤엔 내 주먹을 막을 수 있나 봐야겠다.”
“걱정 붙들어 매. 난 자네보다 십 년 늦었을 뿐이야. 자네가 돌아왔을 때 누가 누구한테 맞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주육낭이 입을 삐죽거렸다. 어느덧 길 어귀에 다다르자 진십삼이 걸음을 멈췄다.
“그럼 이만 갈게.”
주육낭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일이 있는 거야?”
“응, 아버지께서 선생을 소개해 주셨어. 근데 이 선생을 모시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말이지. 매일 아침 일찍 가서 문 앞에서 대기해야 해.”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자네를 배웅 나온 것도 사실이고.”
진십삼은 웃으며 주육낭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진십삼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급제하길 기도할게.”
“기도까진 필요 없어.”
진십삼이 웃음을 지었다. 아침 햇살 속에서 소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주육낭을 향해 공수했다.
“적진을 휩쓸며 하루빨리 전공을 세우길 기도할게.”
“뭘 기도씩이나. 당연한 일인데.”
주육낭이 턱을 치켜들며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몸을 훌쩍 날려 말 위에 올라탄 진십삼은 서쪽으로 향했고, 주육낭은 동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말을 타고 시끌벅적한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날이 잔뜩 흐려지자 경성 군영에 있던 몇 사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비가 오면 출발이 지체될 텐데.”
“며칠 지체되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근심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 멀리서 환호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영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군졸들이 한곳에 모여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훌륭한 궁술이군!”
“전장에 나가면 혼자서 열 명은 죽이겠어.”
여기저기서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오자 서봉추는 득의양양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정도 실력이야 뭐. 당초 이 궁술로 군공을 세웠는데, 그 망할 자식이 공을 가로채려 했지 뭔가. 열 받아서 활을 쐈더니 그놈이 지레 겁먹고 놀라 자빠져 죽었지…….”
서봉추가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데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이 무슨 짓이냐!”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노기등등한 유규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 탈영병을 잡은 공을 세운 유 대장이라지만, 집안에서도 조정에서도 성가신 존재였다. 결국 유 대장은 바람대로 다시 서북으로 가게 됐다.
일개 대장에 불과했지만 엄연히 관청 소속이라 평범한 군졸들보다는 신분이 높았다. 모두가 유규에게 예를 표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긴 경성 군영이다!”
유규는 특히 서봉추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묘기를 보이려거든 거리에 나가서 해!”
서봉추는 콧방귀를 뀌고 활을 거둔 후, 다른 군졸들과 함께 자리를 뜨려고 했다.
“서라. 활은 두고 가야지.”
유규의 말에 서봉추는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뭐요?”
“군에서 활을 나눠 주지 않았느냐? 누가 그걸 쓰라 했지? 사사로이 무기를 소지하면 군의 기강이 어지러워진다. 냉큼 내놔라.”
이제 서봉추에게 삼석궁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잘 때도 끌어안고 잘 정도였으니까. 좀 거칠긴 해도 바보는 아닌지라 서봉추는 유규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며칠 굶었다가 살찐 양을 만난 늑대처럼 눈을 반짝이는 유규의 모습을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퉤. 좋은 무기를 소지하지 말란 말은 못 들었소이다. 군의 돈을 아낄 수 있는 좋은 일을 왜 막으려 하는지 모르겠소.”
“좋은 무기? 좋은 무기도 너희 손에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놓으라면 내놔.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겠단 거냐? 이리 안하무인인 자를 누가 써? 노역도 못 시켜 먹겠다!”
안하무인인 자를 누가 쓰냐고?
서봉추 같은 일개 병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어제 경성 군영으로 들어온 후, 서무수는 형제들에게 강조했다. 다시 군영으로 돌아온 건 치욕을 씻고 공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공을 세우려면 전장에 나가야 한다. 군에서는 전장에 나가서든 후방을 지킬 때든 상관의 명에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안하무인으로 굴며 명에 불복한다는 소문이 나면, 아무도 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봉추는 자리에 선 채 눈을 부릅떴고, 유규는 우쭐한 표정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당장이라도 활을 낚아챌 자세를 취했다.
볼 필요도 없이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경주의 장궁, 그것도 삼석궁이었다.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피에 굶주린 듯 기운을 풍기는 활이었다. 우리에 갇힌 맹수 같은 활.
이렇게 훌륭한 무기는 그의 집에도 물론 있었다. 다룰 자격은 없었지만.
나도 감히 못 다루는 활을, 이 쓸모없는 탈영병들은 뭔데 죄다 하나씩 갖고 있는 거야! 이리 내라. 진정한 주인의 손으로 와야지.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자기가 살 돈이 없다고 남의 걸 빼앗으면 쓰나.”
누군가가 옆에서 말했다.
“남의 무기까지 빼앗을 정도면, 무엇인들 못 빼앗을까? 이런 사람을 누가 쓰나?”
유규는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듯 발을 탁 구르며 돌아섰다.
“어떤 새끼가 입을 나불…….”
고함을 지르던 유규는 말이 목에 턱 걸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 위에 있는 대여섯 명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유규보다 어렸지만 엄연히 전전사(殿前司) 소속의 군관들이었다.
“유 대장, 위세가 대단하군.”
주육낭이 말 위에서 유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유규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일단 예를 표했다.
“당치 않습니다.”
유규가 홱 뒤돌아 자리를 떴다.
“훌륭한 활이구나. 네 궁술도 훌륭하고.”
옆에 있던 군관들이 서봉추를 보며 말했다. 칭찬을 들은 서봉추는 기분이 좋아 입이 헤 벌어졌다.
“활은 훌륭하다만, 여기서 자랑하라고 준 건 아니지.”
주육낭이 냉랭한 얼굴로 말하자 서봉추의 얼굴도 굳어졌다.
“여기서 열 명한테 잘한단 소리를 듣느니, 적진에서 적군 한 놈을 죽이는 게 나아. 전장에 안 나가 본 나도 아는 이치인데, 무슨 낯으로 병사 노릇을 하는지 모르겠군.”
말을 마친 주육낭은 말을 몰아 자리를 떴다.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웃더니 서봉추를 힐끔 쳐다본 후 뒤따라 자리를 떴다. 서봉추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거 성질은.”
서봉추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거렸다.
“따지고 보면 나한테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봉추!”
멀리서 서무수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서봉추는 움찔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유규가 막아섰다.
“왜 이러시오?”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유규는 서봉추의 손에 들린 활을 뚫어져라 보더니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시선을 거뒀다.
“내가 네놈들 똑똑히 지켜볼 거다!”
유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서봉추는 퉤 하고 침을 뱉은 후 유규를 밀치고 달아났다.
서봉추는 서무수 등에게 따끔하게 혼났다. 범강림은 활을 압수하며 서북에 도착하면 돌려주겠다고 했다. 서봉추는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내일이면 출발이다. 가는 길에 아무도 말썽 피우면 안 돼. 누가 비웃고 시비를 걸든 우리가 할 일만 생각해야 한다.”
서무수가 말했다.
“그래. 누이는 우리가 길에 오르게 해 주었어. 앞으로 어떻게 걸어갈지는 우리한테 달렸지. 이제 망신을 당하면, 우리 체면만 깎이는 게 아니야. 누이의 체면도 깎인다고!”
범강림이 서봉추를 노려보며 말했다.
“날 왜 노려보시오? 난 망신당할 짓 안 합니다.”
서봉추가 대꾸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누이가 선물을 세 개 준비했다지 않았소? 두 개밖에 안 줬는데, 하나는 뭐지?”
서봉추가 화제를 돌리자 나머지 형제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잘났다. 딴소리하는 건 아주 도사야.”
서무수도 실소를 터트렸다.
“그건 또 잘도 기억했네.”
“누이 손으로 직접 술상을 차려 줬잖아. 그것도 선물이지.”
누군가가 해명했다. 서무수도 선물이 몇 개인지 따지려던 게 아니라 그저 화제를 돌리려던 것뿐인지라 웃어넘겼다. 서무수는 고개를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 경성 방향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자고.”
범강림이 서무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거뒀다.
시끌벅적한 경성 군영과 달리, 경성에 있는 한 객잔의 오후는 한가로웠다. 계산대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점원은 낮고 어지러운 걸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비단옷을 입은 공자가 발소리를 죽여 대청을 살금살금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왕 공자님.”
점원이 입을 열자 소년 공자가 돈주머니를 훅 던졌다.
“입 다물어.”
소년은 목소리를 낮춘 채 으름장을 놓았다. 점원은 졸음이 쏟아져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도 돈을 안정적으로 받아들고, 문을 나서는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난 그냥 인사하려던 거다. 누가 잡아가라고 소리치기라도 한댔나.”
점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혼잣말을 하고는 손에 든 돈주머니의 무게를 헤아려 보며 흡족해했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며칠 더 묵으면 좋으련만.”
한달음에 객잔을 빠져나온 왕십칠은 좌우를 두리번거린 후, 한 방향으로 뛰었다.
“왕 공자님.”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자 왕십칠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뒤따라 달려오던 어린 몸종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왕 공자님, 객잔 문 앞에 있었는데, 못 보고 바로 달려가시더라고요.”
왕십칠이 웃음을 터트렸다.
“놀라서 그랬지. 춘령, 어쩐 일로 왔어? 주 낭자가 날 보고 싶다더냐?”
겨우 한 번 본 걸 가지고. 주 낭자는 네가 누군지도 잊었을 거다. 춘령이 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얼간이네. 얼간이일수록 좋긴 하지만……. 춘령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아니요. 한동안 안 보이시기에 보러 왔죠. 전 또 떠나신 줄 알았네요.”
“아니야. 집안사람들한테 감시를 받았어. 날 데려가려고 하지 뭐냐.”
왕십칠은 분한 듯 씩씩거렸다.
“경성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지. 주 낭자와 술도 한잔해야 하고 말이다.”
“며칠 후면 8월 15일이라 경성에서 꽃등 놀이가 열려요. 저희 덕승루 사람들은 다 구경 갈 거예요. 꽃등 구경도 하고, 꽃등을 띄우기도 하겠죠. 공자님도 같이 놀러 오세요.”
다들 구경을 간다면, 간판 기녀인 주 낭자도 가겠지. 순간 눈빛을 반짝이던 왕십칠은 곧 고민에 잠겼다.
“저놈들이 안 보내줄 텐데.”
“공자님, 정혼자가 경성에 있으시다면서요?”
춘령이 눈을 찡긋거렸다.
“정혼자와 함께 경성 구경을 하시는 게 어때요? 황제 폐하와 대신들도 다 구경 간대요.”
정혼자! 아, 맞다. 정혼자가 있었지!
왕십칠은 몹시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는 정 낭자와 정혼한 사이였다.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나 상대가 정혼자라면 명절을 맞이하여 함께 놀러 나가는 것 정도는 가능한 세상이었다. 정말이지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래, 그래. 잘됐다. 내가 말해 봐야겠다.”
왕십칠은 신이 나서 자리를 떴다.
춘령은 급히 걸어가는 소년 공자를 보며 얼굴에 있던 웃음을 싹 걷었다. 입가에 남은 건 냉소뿐이었다. 춘령이 휙 뒤돌아 총총 걸어갔다.
잔뜩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가 내리진 않았다. 밤이 지나자 날이 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금가아는 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았다.
“주 공자는 떠난 거 아니었나? 누가 또 아침부터 문을 두드려?”
금가아는 투덜대며 문틈으로 밖을 쳐다봤다.
“금가아, 너희 낭자 안에 계시냐?”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시녀는 차를 올리고, 반근은 간식을 한 접시 내왔다.
“이젠 대우가 정말 좋네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도 좋았어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네, 네. 낭자는 늘 좋았죠. 제 마음이 문제입니다.”
진십삼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낭자한테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내가 요즘 선생을 새로 청해 글공부를 배우느라 집을 비울 때가 많습니다. 날 찾을 일이 생기거든 우리 집 문간으로 와서 전하면 돼요. 내가 당부해 두었습니다.”
정교랑은 진십삼을 보기만 할 뿐 잠자코 있었다.
“물론, 낭자는 내 도움이 필요 없겠지만요. 그래도 말은 해 놔야죠.”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론 모르겠지만, 지금은 도움을 청할 일이 하나 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은 멈칫했다.
“정말 있어요?”
진십삼은 웃음기를 거두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낭자, 말해 봐요. 이번엔 누굴 해치우려고요?”
옆에 있던 시녀는 하마터면 눈을 흘길 뻔했다.
옥처럼 고운 소년이 얌전하고 단정한 낭자 앞에 앉아 다과를 즐기고 있지 않았던가. 하늘도 맑고 공기도 상쾌한 가을날, 이 좋은 때에 좋은 생각 좀 하면 안 되나? 아씨께서 무슨 입만 열었다 하면 남의 목숨을 빼앗는 산적이나 토비, 살인마라도 돼?
어둠이 짙어지자, 발 빠른 전령병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영내에 소식을 전했다. 온종일 말과 함께 길을 재촉하던 사람들은 막사를 치고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다지 멀리 온 것도 아니었다.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성은에 감사드리는 의식을 치르고, 점심때가 지나서야 출발했기 때문이다.
백 명이 채 안 되는 행군 부대였지만, 그들의 주요 임무는 서북 참전이 아니라 서북에 새로 부임하는 조정 관리들을 안전하게 호송하는 것이었기에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경략사와 새로 부임한 무장들은 기존 주둔 지역에서 곧장 서북으로 이동했다. 경성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북의 군무를 조사하러 가는 감찰관이었다.
물론 주육낭, 서무수와 같이 서북 전선을 보충하기 위한 병력이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조정의 고위급 관리나 무장들 앞에서 그들의 존재는 한 톨 먼지에 불과했다.
행군이 지체되는 이유도 천천히 가려는 관리와 서두르려는 관리들끼리 은연중에 기싸움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반나절이 지나도록 행렬은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밖에 당도하지 못했다.
“에라이, 대체 오늘은 뭣 하러 야영하겠다는 거야? 사나흘을 꼬박 달려서 온 것도 아닌데, 쉴 게 뭐 있다고.”
모닥불 옆에 앉아 있던 서봉추가 투덜거렸다.
“토 달지 말고 입 다물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서무수가 서봉추를 노려봤다.
“마음이 급하니 그렇잖소.”
서봉추는 기가 죽은 듯 한마디 대꾸하고는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큰형님, 큰형님. 형님 혼자 활을 세 개나 들고 다니긴 힘드니까, 내가…….”
“힘들긴 힘들구나. 그럼 군에서 나눠 준 활은 네가 메고 다녀라.”
범강림의 말에 서봉추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다른 형제들은 그런 서봉추의 모습에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들의 활도 서봉추에게 건네려 했다.
“넷째 형님, 내 말 좀 봐 주시오.”
서봉추가 고개를 돌리며 서사근을 찾았지만, 그는 모닥불 근처에 없었다.
“넷째 형님은 벌써 말들을 돌보러 갔어. 형님이 말발굽을 수리하는 솜씨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까, 사람들이 죄다 형님을 찾아와서는 말발굽을 수리해달라잖아.”
형제들이 잡담을 나누던 중, 갑자기 서무수가 미간을 찌푸린 채 벌떡 일어나더니 한곳을 응시했다.
“누가 왔어.”
범강림이 재빨리 곁에 두고 있던 활을 집어 들고 일어서자, 다른 형제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부대의 앞뒤에서 정찰과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소식을 전했다.
“괜찮습니다. 우리 사람입니다.”
전령병이 뛰어다니면서 외치자, 자리에 서서 경계하고 있던 병사들이 중앙의 막사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군관 몇 명이 이미 막사 밖으로 나와 있었다.
별로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경성에서 그리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고, 관로로 행군하고 있던 데다 깃발만 보아도 조정의 군대임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이런 관로에서 누군가가 소란을 피운다면 경성에 있는 수많은 관리가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던 군관이 전령병의 문서를 쓱 훑어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옆에 있던 다른 군관에게 건넸다. 전령병의 문서를 죽 돌려 본 군관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황당한 노릇이군.”
군관 중 한 명이 불만스러운 듯 투덜대고는 소매를 휙 내치며 자리를 떴다. 문서를 본 다른 무관들도 고개를 가로젓거나 말없이 각자의 막사로 돌아갔다. 팽팽했던 긴장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자, 일어섰던 병사들도 경계를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구래?”
“여기 와서 뭘 한다는 거지?”
다들 경성을 떠나온 방향을 내다보며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렸다. 야외의 밤은 경성의 밤보다 훨씬 어두워서, 아무리 목을 빼고 쳐다보아도 새까만 하늘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듣자니 배웅하러 온 거라던데?”
이 말을 듣자마자, 서무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한쪽 옆에서 새 소식을 공유하던 병졸들에게 물었다.
“누굴 배웅한단 말이오?”
“이 야밤에 쫓아오는 것도 모자라서 관청의 전령병을 길잡이로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보통내기는 아닐 거요. 그러니 댁이나 나 같은 사람을 배웅하러 온 건 당연히 아니겠지.”
대답하던 병졸은 군관들의 막사를 향해 눈짓하고는 입을 삐죽였다.
“이번 행군에 젊은이들이 많잖소. 다 관가의 자식들이니, 집안에서 얼마나 응석받이로 키웠겠어? 가족들이 아쉬워서 그냥은 못 보내겠지.”
그런 말을 나누는 사이, 새까맣던 하늘 아래에 횃불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 꽤 많은가 보네. 영지에 있던 병졸들은 다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일어서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내다보았다.
멀리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영지 가까이 다가오자, 바람에 일렁이는 횃불이 말을 타고 오던 열댓 명의 사람과 마차 한 대를 비췄다. 열댓 명의 호위 뒤로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도 몇 필 보였다.
“어느 가문이길래 호위한테도 말을 두 필이나 붙여주는 게야?”
병졸들은 놀란 얼굴로 감탄했다.
장거리 이동에서 제일 크게 상하는 게 말이었다. 이동에 가장 좋은 방법은 말 두세 마리를 번갈아 가면서 타고 가는 것인데, 말이 귀한 중원 지역에서는 이런 사치스러운 일이 극히 드물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서북 군영이라고 해도,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말 두세 마리를 동시에 배정받을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능력이 뛰어난 척후병에게만 주어졌다.
미리 전령병이 소식을 전한 덕에, 행렬은 병사들의 제지를 받지 않고 영지 밖에 말을 세웠다. 마차의 휘장이 들리더니, 여인 한 명이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 영지에 있던 병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거 보시오. 내가 뭐랬소? 어느 집 여인이 가족을 배웅하러 오는 거라니까.”
병졸 하나가 서무수에게 으스대며 말했지만, 서무수는 대꾸 없이 놀란 눈으로 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병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무수 옆에 있던 형제들을 쳐다보자, 형제들도 눈알이 떨어질 모양새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놀랄 게 뭐 있다고 저러는 거야?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내들이네!
병졸이 서무수 일행을 비웃으려는 찰나, 서무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다름 아닌 배웅 온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자네를 찾으러 온 것도 아닐 텐데, 괜히 가까이 구경 가서 얻어맞지 말게나!”
병졸이 서무수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봉추가 외마디 함성을 지르고는 서무수와 같은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어서 다른 형제들도 서봉추의 뒤를 따랐다.
떠들던 병졸은 깜짝 놀랐고, 다른 사람들도 서무수 일행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배웅을 나온 사람들의 호위가 서무수 일행을 때리거나 제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놀랐고, 서무수 일행이 마차 앞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내렸던 여인이 그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는 점에서 두 번 놀랐다.
예를 올리다니! 구경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 비렁뱅이 병졸들을 배웅 온 건 아니겠지?”
방금 전의 병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반근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누이,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생겼어?”
일곱 형제는 걱정스럽고 다급한 마음에 중구난방으로 물었다.
“배웅 왔죠.”
정교랑이 가볍게 대답하자, 일곱 형제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정말로 세 번째 선물이 있는 거야?”
서봉추가 소리쳤다.
“당연하죠.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나요?”
정교랑이 손으로 한쪽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예요.”
정교랑이 가리키는 곳에는 말 일곱 필이 콧김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말을 선물하러 왔던 거구나.
“콧등이 하얀 건 내 거야!”
서봉추가 제일 먼저 외치면서 말을 향해 뛰어갔다. 다른 형제들도 웃으며 서봉추의 뒤를 따라갔다.
“정말 이럴 필요 없어. 급히 행군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기마병도 아니니, 서북에 도착하면 써먹지도 못해. 왜 이 야밤에 달려온 거야? 혼자 왔어?”
서무수가 미간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 호위들, 주씨 가문 사람들이었나?
서무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커다란 두봉을 걸친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낭자와 함께 왔습니다.”
말에서 내린 사람이 두모를 걷자, 횃불 아래로 소년의 준수한 용모가 드러났다.
수하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공자님, 공자님!”
이 막사는 네 명이 묵는 곳이지만, 다른 세 명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러 갔기에 지금은 주육낭 혼자만 막사에 남아 있었다.
“웬 호들갑이야!”
횃불 아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주육낭이 호통을 쳤다.
“공자님, 공자님. 정 낭자께서 오셨어요!”
수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주육낭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
“정 낭자요. 정 낭자께서 배웅하러 오셨어요!”
수하가 연이어 외쳤다.
배웅을? 배웅을 왔다니!
주육낭은 온몸에 가시가 돋아 바닥에서 한껏 뒹굴어야 직성이 풀릴 듯한 심정이었다.
이게,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주육낭은 시뻘게진 얼굴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하가 주육낭의 등에 대고 한마디 더 외쳤다.
“아, 진 공자님도 오셨어요.”
눈빛을 반짝이며 막사를 뛰쳐나온 주육낭은 저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여럿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횃불도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지만, 주육낭은 커다란 두봉으로 몸을 싸맨 채 마차 옆에 서 있는 정교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어서 두모를 벗어 손에 쥐고 누군가와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는 듯한 진십삼의 모습도 주육낭의 눈에 들어왔다.
저 인간들이!
“정말로 저들을 배웅하러 온 거래?”
“뭘 선물로 줬다고? 말 일곱 필?”
“얼마나 좋은 말이길래 이 밤중에 쫓아왔대?”
막사 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가는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육낭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나 싶더니 결국 멈추어 섰다.
“듣기로는 누이랑 매부가 배웅 온 거라던데?”
누이랑 매부는 무슨! 주육낭이 고개를 홱 돌려 떠들던 병졸들을 노려보다가 병졸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리 구경하는 게 규율에 어긋나긴 하지. 그래서 저 어린 군관이 언짢은가 보네. 더 있다간 눈에서 불이 나오겠어.
병졸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주육낭은 그 자리에 서서 정교랑이 있는 곳을 내다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잡히는 느낌이 들어 손을 내려다보니, 조금 전 막사 안에서 읽고 있던 책이 여전히 손에 쥐어진 채였다.
“누이, 인제 그만 돌아가.”
말하고 보니 밤길에 돌아가는 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서무수가 잠시 후 다시 말했다.
“아니면 마차에서 하룻밤만 쉬고 가는 건 어때? 괜히 밤길 서두르지 말고.”
범강림도 형제들에게 지시했다.
“모닥불 피워.”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말을 선물하러 온 거예요. 이제 돌아가야죠.”
“앞으로는 이렇게 무모하게 굴지 마. 누이가 이렇게까지 해 주면, 우리가 뭐가 돼.”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말했다. 정교랑이 몸을 낮춰 사과했다.
“원래는 더 일찍 주려고 했는데, 계속 완성이 안 돼서, 시간이 지체됐어요. 오라버니들한테 걱정을 끼쳤네요.”
옆에 있던 진십삼이 미소를 짓고는 서무수에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있잖습니까. 정 낭자가 그리 경솔하고 위험을 무릅쓰는 성격도 아니고요.”
서무수와 범강림이 진십삼을 향해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보였다.
“그럼 공자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영광이지요.”
진십삼이 서무수와 범강림에게 가볍게 답례했다.
쳇, 정말 누이와 매부 같잖아. 주육낭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꽉 쥐었다.
누이와 매부라고 해도, 정작 피 섞인 오라버니는 여기 있는데!
“넷째 오라버니.”
정교랑이 갑자기 서사근을 부르자, 서사근이 서둘러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왔다.
“사실 이 세 번째 선물은 오라버니를 위한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서사근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 둘 바를 몰랐다.
“나 말이야?”
서사근이 물었다.
“넷째 오라버니, 이 말들을 잘 돌봐 줘요. 시간이 지나면, 이 말들의 능력이 눈에 보일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말? 능력? 서사근은 정교랑이 데려온 일곱 필의 말을 쳐다보았다. 좀 전에도 말들을 훑어봤지만 사실 그다지 좋은 말이라 할 순 없었다. 적어도 누이가 야밤에 쫓아와 선물할 정도로 특출나게 좋은 말은 아니었다.
물론 가격으로 따졌을 땐 값지다고 할 만한 선물이 아니었지만, 누이의 성의가 듬뿍 담겨 있는 선물인 건 분명했다.
그런데 이 말들에 다른 능력이 있다고?
“그게 뭔데?”
서사근이 물었다.
“말들을 얼마나 잘 돌보느냐가 관건이에요. 넷째 오라버니가 가는 길에 잘 보살펴 준다면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말은, 필요 없어요. 설명할 수도 없고요.”
정교랑이 싱긋 웃고는 서무수 형제에게 예를 올리며 작별을 고했다.
“군영이라 여인이 있기 불편하니, 이 누이는 이만 갈게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 가지 마.”
서무수 형제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재차 만류했다.
“걱정 마십시오. 호위도 많이 데려왔고, 경성으로 가는 관로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진 공자께 잘 부탁드립니다.”
서무수 형제들이 진십삼에게 예를 표했다.
이쪽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돌리는 것을 본 주육낭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저 두 인간이!
“여러 장병 여러분, 부디 가는 길 순조로우시길 바라며, 가는 곳마다 성공이 따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진십삼이 양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진십삼의 호령에 따라 열댓 명의 호위들도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를 배웅하든 축복의 말은 언제나 사람을 즐겁게 한다. 영지에 있던 장병들이 모두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누군가가 말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진십삼의 축복에 화답하자, 더 많은 사람이 좋다고 외치며 영지 안이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진십삼은 공수의 예를 표하고 말 머리를 돌려 천천히 멀어져 갔다.
정교랑 일행이 떠나자 영지 안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많은 이들이 서무수 형제에게 몰려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보고 있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주육낭은 멀어져 가는 행렬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쉿.”
누군가가 외쳤다.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던 사람들이 순간 멈칫했다.
“들어 봐!”
소리쳤던 이가 다시 한번 말했다.
뭘 들으라는 거야? 영지의 소란스러움이 차츰 잦아들자, 밤공기를 타고 흘러오던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제후에 봉해져야지(丈夫出世兮, 當封侯)…….”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여인의 쉰 목소리가 북소리와 함께 전해져 왔다.
“……사내라면 이 한 몸 바쳐 공을 세워야지(男兒立命兮, 有功業)…….”
서무수가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는 행렬이 멀어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 노래,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데.
익숙한 건 비슷한 광경을 어디선가 보아서였기 때문이고, 낯선 건 여인의 호흡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져 노랫소리가 길고 멀리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누이가 우릴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어!”
서봉추가 큰 소리로 외치자, 주위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동작을 했다.
“거, 시끄럽게 하지 마시오. 안 들리잖소!”
서봉추는 머쓱했는지 허허 웃고는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누이가 우릴 위해 부르는 노래야.”
서봉추도 다른 이들을 따라 목을 길게 빼고는 간간이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밤하늘 아래 보이던 횃불들이 점점 더 멀어져갔다.
“나라의 명을 받아 계문으로 달려오니, 군사로 동원되어 머무를 수 없구나(召募赴薊門, 軍動不可留).”
“천금으로 말 채찍을 꾸미고, 백금으로 칼자루를 장식하네(千金裝馬鞭, 白金裝刀頭).”
“만인의 마음 하나 되니, 하나의 원수는 모두의 적이 되리(萬人一心兮, 子同仇).”
“충성과 의리는 무소의 뿔처럼 하늘을 찌르니(忠與義氣沖斗牛).”
“일당천으로, 필사의 각오로 적군에 맞서리라(一个擬當千, 視死亦如眠).”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를지니, 적을 죽이고 봉작을 받으리(報國救黔首, 殺賊覓封侯).”
처음에는 여인의 목소리만 들려오다가, 조금 지나자 사내의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분명히 여인 하나, 사내 하나, 북 하나의 소리일 뿐인데,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기세였다. 북 치는 소리는 고조에 달했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들렸다. 하지만 노래를 듣는 이들의 마음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쪽 영지 안에 있던 장병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천지를 진동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병장들의 노랫소리는 오래도록 영지 안에 울려 퍼졌다. 노랫소리를 듣던 주육낭은 씩 웃고는 책으로 가슴을 팍 치고 막사 안으로 돌아갔다.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를지니, 적을 죽이고 봉작을 받으리…….
영지 내의 소란이 차츰 잦아들자, 밤빛을 닮은 고요함이 영지를 뒤덮었다.
중앙 막사 안에서, 자색 장포를 두른 무관이 오랫동안 영지를 맴돌던 가사를 나지막이 읊었다. 이 사람이 바로 이번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북으로 향하는 감찰사, 주봉상(周鳳祥)이었다.
“그 탈영병들을 배웅 왔던 거라고?”
주봉상의 질문에 수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같은 시각, 주봉상이 말한 탈영병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밤새 그간의 내력에 관한 질문 세례와 함께 부러움의 눈빛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주 대인은 이런 일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가서 좀 알아보거라.”
주 대인이 명했다. 수하는 막사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했다.
“말 일곱 필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주 대인이 저들의 내력을 묻지 않는 이유는, 주 대인과 수하가 저 탈영병들의 내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태평거의 주인이자, 순성갑기 대장 유규가 잡아들인, 숨어 지내던 탈영병들이다. 탈영병은 천지에 널렸지만 주 대인이 기억하는 탈영병들은 저 일곱 사내가 유일했다.
저 탈영병들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유명무실한 감찰사 따위를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경략사까진 아니더라도 병마 부총관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주 대인은 생각했다.
이번 일로 승급이 지체되는 바람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공과 노력을 쏟아야 할지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일을 전부 저 탈영병들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저들을 너무 치켜세우고 자신을 낮추는 것 같았다. 갑자기 끼어든 장순 때문에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믿는 수밖에.
주봉상이 한숨을 내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몸에 지니고 다니던 활은 경주의 중궁(重弓)이던데, 저 태평거 주인장들이 이번에는 또 얼마나 값진 말을 타려나?”
“대인, 그저 군목감(群牧監)의 평범한 군마라고 합니다.”
수하가 대답하자 주봉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범한 거라고?”
“예, 소인이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주봉상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드렸다.
“천금으로 말과 채찍을 사 줬군. 값비싸진 않아도, 성의를 듬뿍 담아 선물하겠다는 뜻이야.”
주봉상이 성가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부산스러워 죽겠군. 저런 식으로는 서북에 가서 봉작을 받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거다.”
“대인, 가서 더 알아볼까요?”
수하의 물음에 주봉상이 고개를 내저으며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됐다. 저들한테서 멀찍이 떨어져 상종하지도 마라. 괜히 재수 없는 기운 옮겨붙을라.”
수하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막사 안에 있는 또 한 명의 자색 장포를 두른 관리, 강문원(姜文元)도 바깥의 일을 묻고 있었다. 원래 왕보당의 자리를 이어받아 경략사가 될 예정이었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경략사가 아닌 병마 부총관이 된 경우라 강문원은 주봉상보다 더욱 험상궂은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들에게 알리거라. 여기는 태평거가 아니라 군대라고! 알아서 얌전히 기어야 할 곳이라고!”
연배가 있어 보이는 강문원은 혐오감을 전혀 숨기지 않고 외쳤다.
강문원이 이토록 저들을 혐오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덕으로 관직을 얻었고, 관리가 된 후로는 관운이 제대로 트여 탄탄대로로 전전사를 거쳐 유주(維州) 자사(刺史)까지 올라갔다. 게다가 동향인 고능준의 지지로 서북경략사에 발령이 나려던 참이었다. 무탈하게 경략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면, 사서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장 출신의 관리로서 일생일대의 염원을 다 이루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내 앞길을 망친 자들은 장순과 진소지만, 저 재수 없는 탈영병들도 한몫했지. 저들이 경성에서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여기서 함부로 나대다가는 모조리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야.”
강문원이 어금니를 악물며 내뱉고는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귀한 말들이 아니라고? 귀한 말들이면 당장 징발하거라. 병졸들 따위가 어딜 감히! 무기와 말을 직접 마련하겠다고 나대다니, 조정의 체면에 따귀를 때리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
“대인, 귀한 말이 아니고 평범한 말이 확실합니다.”
수하의 대답에 강문원은 탁자를 쾅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아주 배가 불렀구나! 그러면 군에서 배정한 말들을 회수해 오거라. 직접 가져온 말이 있다니 그거나 타라고 해.”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던 수하가 잠시 주저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그럼, 주 대인께도 말씀을 올릴까요?”
“내 병마의 일인데, 그자에게 말해서 뭐 해?”
강문원이 눈을 부릅뜨면서 대꾸했다. 수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알겠다고 한 뒤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강문원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됐다, 관둬라. 고작 말 몇 필인데, 가지고 있으라고 해. 알아서들 하라지. 가는 길에 말썽이나 안 피우면 다행이다. 일단 서북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생각하자.”
수하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교랑은 자신이 선물한 말들 때문에 두 대인이 화가 났다는 것을 몰랐다. 물론 알았다 하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겠지만.
노랫소리는 멈춘 지 오래였지만, 진십삼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북을 장난스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북소리에 놀란 새들이 수시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낭자는 또 무엇을 할 줄 압니까?”
진십삼이 물었다.
“몰라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북을 칠 줄 알 줄이야. 그럼 칠현금이나 피리는요? 이럴 줄 알았으면 칠현금도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진십삼이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북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공자님, 그만 두드리세요. 야밤에 행인들이 놀라겠어요.”
진십삼의 북소리를 참지 못한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진십삼이 웃으며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앞쪽을 내다보며 물었다.
“낭자, 곧바로 성으로 갈까요? 아니면 어디 들러서 하룻밤 쉬고 갈까요?”
“편할 대로 해요. 난 마차를 타고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잘 수 있다는 말이로군.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럼 야경 운치도 좋고 하니, 길을 서두르죠.”
시녀는 진십삼의 말에 내심 놀랐다. 진십삼이 쉬자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야밤에 쉬지도 않고 오가다니, 고단하지도 않나?
“낭자, 그 노래는 전해져 부르는 겁니까, 아니면 즉석에서 만든 겁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에게 물었다. 설마 저렇게 아씨와 밤새 대화하려는 건 아니겠지? 시녀는 입술을 삐죽이고 자세를 바로 앉았다.
“전해져 불리는 곡일 거예요.”
정교랑이 말하고는, 잠시 뒤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져 불리는 곡이에요.”
정교랑의 머릿속에 좀 전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제후에 봉해져야지. 사내라면 이 한 몸 바쳐 공을 세워야지…….
정교랑의 머릿속을 맴도는 노랫말에 호응하듯, 북소리가 동동 울려 퍼졌다. 정교랑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마차와 나란히 가고 있던 진십삼이 손에 든 북을 가볍게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좋네요.”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래요.”
정교랑도 대답했다. 거센 밤바람에 흔들리는 횃불 아래에 비친 소년의 환한 미소는 더없이 눈부셨다.
일행은 동이 틀 즈음 성문 앞에 도착했다. 성문은 이미 열려 있어서, 진십삼이 특별히 구해 온 통행패를 쓰지 않아도 됐다.
“고생했어요.”
마차에 있던 정교랑이 진십삼에게 예를 표했다. 진십삼이 두모를 벗었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해 얼굴에 피곤한 기색과 야밤의 한기가 남아 있었지만, 두 눈만큼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럼, 이번엔 내게 신세를 진 겁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물었다.
“맞아요. 내가 신세를 졌죠. 원하는 게 있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십삼이 감탄을 뱉었다.
“하! 정말 놀랍고 기쁜 일이네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게요.”
정교랑이 미소를 짓고는 휘장을 내렸다. 마차는 천천히 옥대교 저택 앞으로 움직였다.
“생각이 났습니다.”
진십삼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마차에서 내린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8월 15일에, 같이 꽃등 보러 갈래요?”
진십삼의 제안은 신세를 갚는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제안이었다. 정교랑은 진십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선약이 있어요.”
진십삼은 잠시 놀라나 싶더니 이내 미소지으며 물었다.
“선약이요? 진(陳)씨요, 주씨요?”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니에요. 정혼자와의 선약이에요.”
정혼자! 진십삼은 잠시 넋이 나갔다. 이렇게나 낯선 단어를 저 여인의 입에서 듣게 되다니.
“진짜로요?”
진십삼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정교랑은 이미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진십삼의 말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가짜일 게 뭐 있죠?”
가짜일 리가 뭐 있겠나.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혼례를 올려서 남편과 아내를 가지게 될 텐데. 다 생기기 마련이지.
진십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간 후 대문이 닫히는 걸 바라보았다.
정혼자라……. 당연히 진짜지. 그 왕씨 가문 공자. 내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있으니까, 가짜일 리가 없지.
진십삼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만인의 마음 하나 되니, 하나의 원수는 모두의 적이 되리. 충성과 의리는 무소의 뿔처럼 하늘을 찔러.”
진십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에 탄 진십삼의 몸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말 머리를 틀고 큰길가를 따라 말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