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9권
-원칙-
서무수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고개를 돌리려던 서봉추가 어색하게 멈칫했다. 서봉추는 어색한 자세 그대로 서무수를 따라서 또 다른 푸줏간 앞에 멈춰 섰다.
“이건 얼마요?”
서무수가 가게를 하나씩 돌며 잡담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골목을 이리저리 꺾은 뒤, 벽에 바짝 기대면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형님, 따돌렸어요?”
서봉추가 속삭이자 서무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확실하지 않아.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 같다. 아주 노련한 놈이야.”
서무수가 손짓을 하자, 서봉추는 그의 뒤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저잣거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말을 탄 무리가 정면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내가 붙인 이들을 모조리 따돌리다니!”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갑옷 차림의 사내가 외쳤다. 서무수와 서봉추는 그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려고 했지만, 그쪽은 이미 다른 병사들로 길이 막힌 상태였다.
“무엄하구나. 순순히 체포에 응해라!”
왁자지껄했던 거리에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님. 어째 다 관부 쪽 사람 같아 보입니다.”
설마 유 교리 일에 차질이 생겼나?
누이가 말했었다. 자신이 옥에 들어가라고 한 게 아닌 이상, 절대로 하옥되면 안 된다고. 절대로 저들 손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고.
서무수는 말없이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서봉추도 얼른 서무수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병사들 사이를 뚫어 길을 텄다.
“무예가 대단하군!”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던 유 대장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 뛰어난 무예를 닦았으면서, 적을 죽이는 일에 쓰지 않고 도망치는 데 쓰다니!”
유 대장이 손짓했다.
“궁수를 준비해라! 서무수, 서봉추! 순순히 투항하지 않으면 즉시 사살하겠다!”
이미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던 서무수와 서봉추는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서무수와 서봉추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형님, 궁수가 몇 놈 없으니, 각자 한 놈씩 붙잡아 방패 삼아 뚫고 갑시다. 열 걸음만 따돌리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서봉추의 말을 들은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유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 무리로 돌진했다.
병사들은 두 사람이 굴복하기는커녕 이쪽으로 돌진해오는 모습을 보고 뒷걸음질을 쳤다. 기합 소리가 몇 번 울리자, 서무수와 서봉추는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 각자 한 명씩 붙잡아 인간 방패로 삼았다.
“대장, 저, 저 두 놈, 너무 강합니다!”
두 사람이 고강한 실력을 보여 줄수록 유 대장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썩을 놈들. 강하기는 무슨! 못난 놈들이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유 대장은 궁수의 활을 빼앗아 들고 서무수를 겨냥했다. 유 대장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면서 외쳤다.
“못난 놈들아! 탈영할 배짱도 있고, 형제를 방패로 삼을 배짱도 있다면, 이리 나와서 나와 한 판 붙자!”
탈영? 서무수가 흠칫하고는 외쳤다.
“탈영이라니요?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시오?”
유 대장은 땅에 침을 탁 뱉고는 활시위를 당긴 채 한 걸음씩 내디뎠다.
“위주(渭州) 개석보(介石堡) 수비군 소속 갑대(甲隊) 감용(敢勇) 서무수, 서봉추는 명을 받들라!”
유 대장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서무수는 이런 칭호를 일 년이 넘도록 듣지 못했다.
감용들이여, 앞으로 나아가 적을 죽이자!
서무수의 귓가에 군령이 울려 퍼지고, 선두에 있는 병사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서무수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병졸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렸다.
“감용이란 무엇이더냐?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장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자 아니더냐! 너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아라.”
유 대장이 호통을 쳤다.
“지금 네놈들은 형제를 방패 삼고 있다. 제길, 나더러 네놈들을 죽이라고 해도 내 손이 더러워 차마 못 죽이겠다! 네놈들을 살려 줄 테니, 썩 꺼지거라! 여봐라,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감용들을 공손히 보내 주어라!”
유 대장의 말을 들은 병사들은 정말로 무기를 거두고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서무수와 서봉추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손에 목덜미가 잡힌 병졸들조차도 그들을 보며 히죽대고 웃었다.
“감용, 꽉 붙잡으시오. 내 비록 보잘것없는 병졸이라지만, 죽을지언정 목숨을 걸고 싸울 거요. 절대 댁한테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빌거나 도망칠 리 없소.”
순간 서무수는 맥이 탁 풀렸다.
의지를 잃은 서무수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서봉추 또한 유 대장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씩씩대고 있었다.
“우리는 탈영병이 아니오! 우리는 빌어먹을 탐관오리한테 모함당한 거란 말이오!”
서봉추가 눈을 부릅뜨고 외치자 유 대장도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모함이든 아니든, 난 관심 없다. 내가 아는 건, 네놈들이 바로 추포 명단에 이름이 오른 탈영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몸이 해야 할 일은 바로 네놈들을 체포하는 것뿐이야! 억울한 일은 네놈들이 알아서 해결해! 구차하게 이리저리 숨어 살면서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느냐!”
서무수가 깊이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단지 탈영병을 잡으러 오신 겁니까?”
유 대장이 뭐라고 외치자, 부하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펼쳤다.
“그렇다면!”
서무수가 문서를 펼치는 부하를 보며 외쳤다.
“형님.”
서봉추가 고개를 돌려 서무수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서무수는 조금씩 좁혀져 오는 포위망을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탈영의 죄는 용서할 수 없지요. 여기 있는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서무수가 손을 풀자, 서봉추도 그를 따라 병졸을 놓아주었다. 목덜미를 오래 잡혀있던 두 병졸은 연신 캑캑대며 기침을 했다.
유 대장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서무수와 서봉추를 에워싸며 창을 겨눴다.
“이제야 좀 사내대장부답구나!”
서무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던 유 대장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했다.
“응? 자네, 였나?”
서무수와 유 대장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섰다. 유 대장의 반응에 서무수도 멈칫했다.
“그때 그……!”
유 대장이 눈앞의 서무수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였군. 일면식의 인연이 있으니, 체면만은 지켜주겠네.”
유 대장이 손을 휘휘 저으며 부하에게 명했다.
“사지를 부러트릴 필요는 없고, 밧줄로 묶어 데려가라.”
거칠기 짝이 없던 두 사람이 순순히 굴복하는 모습에, 병사들이 서둘러 그들을 밧줄로 묶고 등을 떠밀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유 대장은 도리어 좀 전의 흥분이 가신 듯 보였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니, 오랫동안 가슴속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풀린 듯했다.
하필 저 사내라니. 유 대장은 미간을 좁히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이 잘렸던 사내를 한동안 쭉 지켜봤다. 손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손을 못 쓰게 된 것은 매한가지였다. 유 대장은 그 사내가 더 이상 오른손을 쓰지 않고 왼손을 쓰는 모습을 태평거에서 직접 목격했다.
태평거는 돈이 있으니 그 사내가 천천히 기술을 다시 연마하도록 기다릴 수 있겠지만, 군에는 그만한 돈이 없다. 손이나 발이 절단된 병사가 생기면, 손발을 이어붙인다고 한들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한다. 더군다나 궁술, 검술, 창술 같은 것은 하루아침에 다시 연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 대장은 더 이상 그 숙수를 지켜보지 않았고, 일부러 태평거를 찾아가는 일도 없어졌다.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은 모두 경조부 소관이었다. 유 대장도 괜히 오지랖 떨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날 밤의 사건을 잊고 없던 일로 쳤다. 그런데 오늘 다시 만날 줄이야. 그것도 이런 상황으로.
저 사내, 태평거에서 신선거로 옮겨갔구먼.
“나머지는 못 봤느냐?”
유 대장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옆에 있던 부하에게 물었다.
“예. 신선거에서 나온 건 저 둘밖에 없었습니다.”
유 대장이 익명의 투서를 다시 펼쳤다. 종이에는 일곱 명의 이름만 쓰여 있었고, 이들이 숨어 있는 장소로 지목한 곳은 신선거뿐이었다.
“설마 태평거에 있는 건가?”
유 대장이 무의식적으로 툭 내뱉었다.
“대인, 저희가 가서 체포하겠습니다.”
부하의 말에 유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샅샅이 뒤져라!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유 대장은 매섭게 소리친 후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 관아 앞은 한산했다.
“이보시오, 지금 뭐 하는 거요?”
누군가가 소리치자 향칠은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관청에서 나오는 말단 관리들을 쳐다봤다. 점심을 먹으러 삼삼오오 나오는 듯 보였다.
“저는 감문 관아 소속입니다. 문서를 가지러 왔습니다.”
“됐고, 오후에 다시 오게나.”
말단 관리들이 귀찮다는 듯 향칠에게 손을 내젓자 향칠이 머리를 조아리며 알겠다고 했다. 웃으며 말단 관리들을 배웅한 향칠은 고개를 돌려 관아를 힐끔 쳐다봤다. 관아의 바로 옆은 경성의 감옥이었다. 요 며칠 내내 저곳을 지켜봤지만, 새로 하옥되는 이는 보지 못했다.
이래서 익명의 투서를 넣어 봤자, 망망대해에 돌을 던지는 꼴이라고들 하는구나.
어차피 향칠도 예상했던 바였다. 본인도 말단 관리인지라, 관아에서 거들떠보지 않는 것 중 제일이 익명의 투서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고발이 바로 탈영병 고발이었다.
향칠은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분풀이라도 하기 위해 익명의 투서를 넣었다. 향칠은 고개를 휙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큰 길가에서 갑자기 말발굽 소리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썩 비켜!”
선두를 달리던 병사가 채찍을 휘두르며 길을 트자, 사람들은 재빨리 길을 비켜서며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인파 사이에 끼어 있던 향칠은 중심도 잡지 못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모자가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향칠은 믿기지 않는 눈길로 입을 떡 벌린 채, 병사들 사이에서 압송당하고 있는 두 사내를 쳐다보았다.
길을 비켜섰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도적이겠지?”
“행색을 봐서는 아닌 것 같던데.”
압송을 당하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인파를 훑어보다 갑자기 눈빛을 번뜩였다. 향칠은 재빨리 사람들 뒤로 숨어 들어갔다.
소란스럽던 병사 무리가 금세 지나갔다. 경성에서는 흔한 광경인지라, 모여 있던 구경꾼들도 금방 흩어졌다.
향칠은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진짜, 진짜 잡혔어!
향칠은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핀 향칠은 바닥에 떨어진 모자도 잊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경조부 관아. 시끌벅적한 소리가 정오의 적막을 깨뜨렸다.
“이게 웬일이냐. 너희 대인이 도둑을 다 잡고…….”
공조(功曹) 서리(胥吏)들이 웃으면서 병사가 건네는 문서에 서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체포된 사람이 달랑 둘인 걸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고작 두 명이 전부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머지는 조금 뒤에 도착할 겁니다. 어서 서명이나 좀 해 주십시오. 빨리 감옥에 넣어야 우리도 병부에 보고하러 가죠.”
서리가 문서를 훑으면서 의아한 듯이 물었다.
“병부? 병부엔 뭐하러 보고해? 고작 도둑 몇 놈 잡은 거 가지고.”
“탈영병입니다.”
병사는 서두르라며 다시금 서리를 재촉했다.
“어서요, 어서. 당장 대장을 도와 나머지 놈들도 체포하러 가야 합니다.”
병사의 재촉에 못 이긴 서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재빨리 서명해 주었다. 병사들은 서명한 문서를 들고 감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탈영병이라……. 어디서 들어 본 거 같긴 한데.
관청에 앉아 있던 서리는 한참을 되짚으며 생각했다.
역시 나이를 먹으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가 않네.
서리는 생각을 떨치고 몸을 돌려 차를 우렸다.
역시 쉴 때는 좋은 차가 있어야 해.
잠시 뒤, 향긋한 차향이 올라왔다. 서리가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다 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치며 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한 서리는 언짢은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관청으로 뛰어 들어온 자는 감옥을 관리하는 옥리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서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형님, 태평거에서 또 무슨 일이 난 겁니까? 그자들이 왜 또 하옥된 거예요?”
“태평거?”
서리가 화들짝 놀랐다.
오늘날 태평거는 경성에서 유명한 식당이 되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만으로 경조부 관아에까지 소문이 나기는 힘들고, 태평거의 명성이 경조부 관아와 감옥까지 전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감옥에 몇 사람이 들어올 테니, 잘 좀 부탁한다고 누군가가 했을 때부터였나?
감옥에서 잘 부탁한다는 말은, 좋은 술과 음식으로 잘 대접하라는 뜻이 아니라 곤봉으로 사정없이 매우 쳐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끝끝내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히려 잘 부탁한다고 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그 일이 우연이었다면, 그저 그들의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있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정말로 옥에 잡혀 들어왔다. 그 사람들을 잘 부탁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적당히 알아서 봐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감옥까지 잡혀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졸개에 불과한 법이었다. 졸개의 뒤에는 항상 든든한 뒷배가 있으며, 뒷배들끼리 이와 같은 기 싸움을 하는 것은 감옥 관리들에게 매우 흔한 일이었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풀려났다. 이번에 그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던 사람은 전처럼 죽진 않았지만, 죽은 사람과 다름없게 되었다.
이것도 과연 우연이었을까? 정말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걸 단지 우연이라고 믿는 자라면, 지금껏 경성 바닥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자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연루된 사건까지도 관리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평거. 범강림, 범석두, 서무수, 서사근,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
서리는 감옥 관리가 건넨 문서를 다시 들여다보며 그 이름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서무수, 서봉추!
“생각났다!”
서리가 문득 깨달은 듯이 소리쳤다.
“그걸 굳이 기억해 낼 필요가 있습니까? 형님, 우리 모두 똑똑히 기억하고 있잖습니까. 어떻게 그걸 잊어요?”
감옥 관리가 말했다.
“아니, 탈영병 일이 어찌 된 건지 알겠다고!”
서리가 말하면서 다급하게 문서 더미를 파헤쳤다. 서리는 탁자 위를 다 뒤지고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젖히면서 무언가를 찾아댔다. 서두르는 통에 찻잔이 엎어졌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문서 몇 개를 찾아내 탁자 위에 펼쳤다.
감옥 관리도 가까이 다가가 문서들을 보았다. 전부 익명의 투서였다.
대인, 또 익명의 투서입니다.
언젠 없었나? 신경 쓰지 말게나.
대인, 그때 그 태평거 사람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태평거? 그럼 더 신경 쓰지 말아야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
역시 대인께서는 현명하십니다. 태평거는 정말 불운 덩어리군요. 살짝만 스쳐도 불구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까. 유 교리를 좀 보세요.
맞아. 태평거는 조심해야 해. 자칫하면 패가망신이라고.
익명의 투서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누가 그걸 거들떠본다고.
이 익명의 투서들을 보면서 했던 대화가 서리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때는 웃자고 했던 말들인데, 설마 정말로 누가 이걸 가져다 볼 거라고는! 심지어 태평거 사람들이 잡힐 거라고는! 게다가 자신이 서명한 문서 때문에 하옥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또 한 번 거친 풍랑이 일겠구나!
“도대체 또 무슨 일이길래.”
서리는 문서를 손에 쥔 채 부원 대인의 관청으로 뛰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태평거의 뒷마당은 순식간에 병사들로 가득 찼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범강림이 뒷마당에서 채소를 말리고 있던 삼태기를 엎었다. 그가 뒤따라오던 병사 둘을 가로막았다.
다른 한쪽에서는 형제 두 명이 한꺼번에 달려든 병사들에게 제압당했다.
“관부에서 탈영병을 추포하러 왔다. 순순히 투항하지 않으면 즉살하겠다!”
병사들의 외침과 함께 궁수들이 자리를 잡고 활시위를 당겼다. 무시무시한 화살의 표적이 된 무원산 형제들은 닥치는 대로 손에 무기를 쥐고 싸울 태세를 취했다.
바닥에 제압당했던 형제 두 명도 포효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던 병사 몇 명을 가볍게 물리쳤다. 두 사람이 막 자세를 잡으려던 찰나, 활시위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긴 화살 하나가 형제 한 명의 어깨를 관통했다. 화살의 힘이 어찌나 센지, 어깨를 맞은 형제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창가에 있던 시녀와 반근의 날카로운 비명이 평온하던 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정교랑은 미동도 없이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한결같이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위주 개석보 수비군 소속 갑대 감용 범강림, 범석두, 기병 서사근, 서납월, 교용 범삼축!”
“못난 놈들아! 탈영할 배짱도 있고, 형제를 방패로 삼을 배짱도 있다면, 이리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감용이란 무엇이더냐?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장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자 아니더냐! 너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아라.”
정교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바들바들 떨며 얼싸안고 있던 시녀와 반근은 눈물이 나오던 차에 그 미소를 보자 멍해졌다.
지금, 웃음이 나온다고?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창을 통해 마당을 내다보는 정교랑의 시선은 강궁을 든 건장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거칠고 사나워 보이면서도 말 한마디로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주도면밀한 사내였다. 얼핏 협박으로 들리지만 실은 아픈 곳을 찌르며 범강림 등의 마음을 후벼 파고 있었다.
범강림 등이 멈칫했다가 하나둘 손을 아래로 내려뜨리자 정교랑은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시녀와 반근은 눈물을 닦고 얼른 뒤따랐다.
태평거 밖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댔다.
“순성갑기가 탈영병을 체포하는 중이다. 성가시게 굴지 말고 물러가라.”
관군들은 긴 창을 세우며 밀려드는 인파를 막고 호통을 쳤다.
뒷마당에서 앞쪽 대청으로 향하는 통로도 관군들이 막고 있었다. 처음엔 범강림 등이 도망치는 걸 막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손님과 태평거의 점원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이대작도 껴 있었다. 이대작은 왼손에 호두 두 알을 꽉 쥐고 있었다.
“사람 잘못 봤소!”
이대작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더니 관군의 긴 창을 붙잡았다.
“사람 잘못 잡았다고!”
“썩 꺼져라. 겁도 없이 덤볐다간 한패로 간주하겠다.”
관군들이 호통을 치며 이대작을 밀쳤다. 이대작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자 점원들이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점원들은 이대작을 진정시키며 놀란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예전에 부랑배들이 소란을 피울 때 같았다면 일단 달려들어 맞서 싸우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관부였고, 처음부터 탈영병을 추포하러 왔노라고 공언했다. 소란을 피우러 온 것도, 사적인 보복을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비켜요.”
뒤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두 몸종에게 둘러싸인 여인 하나가 뒤쪽에 서 있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도 모두가 아는 사람이었다. 주인어른들의 누이였으니까. 물론, 친누이는 절대 아닐 것이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니었고 어느 집 낭자인지, 어쩌다 그 사내들과 남매가 되었는지도 아는 바 없었다.
점원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아씨.”
이대작이 따라오며 소리쳤다.
관군들은 사람들이 길을 터주면서 어린 낭자가 이쪽으로 걸어오자 멈칫했다. 이젠 여인들까지 겁도 없이 구경하려 드네?
“물러서시오!”
관군들이 소리쳤다.
“내가 태평거의 진짜 주인이에요.”
정교랑이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당신들의 윗전을 봐야겠어요.”
태평거의 진짜 주인이라니! 뭐라고? 이렇게 어린 낭자가?
눈이 휘둥그레진 건 관군들만이 아니었다. 태평거의 점원들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주인?”
유 대장도 그 말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선 어린 낭자가 보이자 그의 두 눈도 휘둥그레졌다.
그 여인이군!
시녀와 반근은 눈물을 쏟으며, 어깨를 다친 사내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다들 탈영병이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우린, 우린 모함을 받았어. 망할 놈이 우리의 공훈을 가로챘지. 그러다 싸움이 났어. 그러다 그놈이 저 혼자 자빠져 죽었는데, 우리가 죄를 뒤집어쓰게 된 거야. 우린…….”
형제 하나가 소리쳤다.
한쪽에 선 유 대장은 팔짱을 낀 채 오묘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불호령을 내리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딱한 사정 하나 없는 탈영병이 어디 있으랴. 유 대장은 사내의 이어지는 말을 대신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망쳤다고요?”
정교랑이 사내의 말을 끊으며 묻자 사내는 멈칫했다.
“그래, 하지만 애초에…….”
“탈영병이었군요.”
정교랑이 다시 말을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범강림이 제지했다.
“그래, 우린 탈영병이야.”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교랑이 유 대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탈영병을 잡으러 왔어요?”
유 대장은 손에 든 문서를 탁 털었다.
“그렇습니다. 문서 대조 결과 틀림없습니다. 우리 순성갑기는 도적을 잡고 탈영병을 추포하는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가 많네요.”
정교랑이 물러났다.
“대조 결과 틀림이 없다면 법대로 집행하세요. 우리 태평거에서 협조할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시고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말에 멈칫했다.
“아씨…….”
이대작은 저도 모르게 초조해져 입을 열었다. 유 대장은 정교랑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낭자, 낭자는 우리가 이들을 잡아가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국법에 따라 직무를 이행하는 건데, 뭐가 잘못됐죠?”
정교랑이 반문했다.
왜 내가 추궁을 당하는 것 같지? 유 대장은 헛기침을 했다.
“왜 탈영병이 됐냐고 묻지도 않습니까? 정말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으면요?”
정교랑은 엄숙한 얼굴로 유 대장을 쳐다봤다.
“아무리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어도, 저들은 탈영병이에요. 안 그런가요? 탈영병이라는 건, 원칙을 어겼단 뜻이죠. 안 그런가요?”
유 대장은 또다시 멈칫하며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렇죠.”
상관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는 보잘것없는 관군이 된 것 같았다.
뭐야, 이거. 곧 정신을 차린 유 대장이 속으로 욕했다.
이 정도로 당당한 건 연루될까 봐 지레 겁먹어서가 아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지. 다른 계산이 선 거야!
원칙을 지킨다니, 이 세상에 원칙을 지키는 사람 따윈 없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원칙을 지킨다는 핑계로 이익을 꾀하려는 것일 뿐이지.
“데려가라.”
유 대장은 손을 휘저은 후 뒤돌아 걸어갔다. 호령에 떠밀리며 앞으로 움직이던 범강림 등은 정교랑 옆을 지나치게 되자 걸음을 멈췄다.
“누이, 미안해. 그동안 누이를 속였어.”
범강림이 말했다.
“난 현재의 당신들을 오라비로 삼은 거예요. 과거는 나와 상관없어요. 내가 알 필요도 없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앞으로는? 범강림이 속으로 물었다.
“누이, 몸조심해. 우리 때문에 힘들겠네.”
“힘들지 않아요.”
정교랑이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오라버니들, 몸조심해요.”
관병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는데도 태평거를 에워싼 구경꾼들은 흩어지지 않고, 삿대질과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수군댔다.
이쪽에서는 새로 모셔 온 관리인이 점원들을 시켜 마당을 정리한 후, 웃으며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이보시오. 여기 주인장이 붙잡혀 갔는데, 밥은 먹을 수 있는 거요?”
어수선한 가운데 손님들이 물었다.
태평거는 정말 이름값을 못 하는군. 부랑배들이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지 않나, 이 자리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질 않나, 이제는 관부에서 나와 사람을 잡아가기까지.
무슨 식당이 이래? 무시무시한 대도(大盜)나 비적, 강도의 소굴이라면 몰라.
관리인이 껄껄 웃었다.
“오해일지도 모르죠. 숙수가 붙잡혀 간 것도 아니고요.”
관리인이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진짜 주인께서 저리 떡하니 버티고 계시는데, 무슨 일이 생겨요?”
사람들의 시선이 마당으로 향했다. 여인은 꼿꼿하게 선 채 점원들이 분주하게 식당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차분하고 느긋한 표정이었다.
생김새며 차림새와 꾸밈새가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하긴, 식당을 열고 연이어 벌어진 사건들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정도면 배후에 있는 인물도 보통내기는 아니겠지.
이제 보니 저 여인이 태평거의 진짜 주인이었군.
“아무튼 괜히 가슴이 철렁했으니 좀 깎아 주시오.”
누군가가 소리치자 관리인이 껄껄 웃었다.
“아무렴요, 그래야지요.”
태평거는 차츰 평상시 모습을 되찾았다. 손님들이 우르르 자리를 뜬 후, 다음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오면서 사건은 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듯 흐려졌다.
관리인 말마따나 숙수가 잡혀간 것도 아니었거니와 진짜 주인이 버젓이 버티고 있으니 평온하지 않을 필요도 없었다. 관부에서도 탈영병을 조사하는 것일 뿐, 태평거를 겨냥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대작은 자신이 마당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었을 무렵, 주변은 이미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간 후였다.
왁자지껄한 식당에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분주하게 오가는 점원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재촉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걱정 마요.”
언제 온 건지 손재가 옆에 서 있었다.
“아씨가 있는 한, 별일 없을 겁니다.”
이대작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하루하루 조용할 날이 없구먼.”
“죽으면 조용하겠죠.”
손재가 웃으며 대꾸했다.
“근데 죽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대작이 피식 웃었다.
“네놈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지!”
하지만 울적했던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진 후였다.
“걱정 마요. 분명 전화위복이 될 겁니다.”
손재가 웃으며 말하자 이대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호두를 굴렸다.
“아씨께서도…….”
이대작이 고개를 들어 밖을 쳐다봤다.
“쉽지 않으실 텐데.”
이번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씨는 절대로 모른 척 손 놓고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
정교랑의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 서자, 벌써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주육낭과 진십삼이 서둘러 달려왔다.
“또 어디 갔었어?”
주육낭이 마차에서 내리는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병 걸렸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주육낭이 눈을 부라렸다.
“병 걸린 건 너지!”
정교랑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병도 안 걸렸으면서 날 왜 찾아왔죠?”
하여간 진지하게 대하는 법이 없다니까!
“네 혼사 때문이잖아.”
주육낭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말하는 사이 이들은 벌써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정교랑은 곧장 대청으로 향했고, 진십삼과 주육낭도 자연스레 따라 들어갔다.
“누나! 울었어?”
금가아가 시녀와 반근을 보며 깜짝 놀랐다.
시녀와 반근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무슨 일이야?”
금가아가 놀라 물었다.
“이따 얘기해 줄게. 아씨 시중부터 들고.”
시녀가 말했다.
“어머니께선 동의하셨습니다. 조만간 강주로 사람을 보내신대요. 당장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워, 일단 나를 쓰기로 했죠. 최소한 낭자의 집안과 왕씨 가문의 혼사에 시간을 끌 순 있으니까요.”
“걱정 마. 아버지께서도 동의하셨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자네 가문에 마땅한 사람이 있나? 설마 또 자네가 나서려고?”
진십삼이 씩 웃으며 물었다.
“내가 어때서? 자네가 그랬잖아. 일단 시간부터 끌고 보자고.”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받아치며 곁눈질로 정교랑을 힐끔 쳐다봤다.
안으로 들어온 후 줄곧 말없이 있던 정교랑이 팔걸이 책상에 몸을 기댔다. 언제나 단정히 앉아 있던 모습과는 달랐다.
편하고 익숙한 사람들 앞에서야 나오는 자세겠지. 도와주고 챙겨 주는 사람이 생기니 편해진 건가.
시녀가 차를 내주며 주육낭의 시선을 가렸다.
“내가 적당한 사람을 몇 골라 놨어. 우리 집 누이들과 혼담이 오가서 여럿 골랐지.”
“자네 집안과 혼사를 맺으려는 이들이면 보통 대단한 이들이 아닐 텐데! 그 사람들이 자네 어머니처럼 자네 말을 들을 줄 알아?”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머니처럼 내 말을 잘 들어주진 않겠지. 그건 내가 그 사람들 눈에 별 볼 일 없어서야. 하지만 낭자는 아니잖아.”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혀를 찼다.
“말만 들으면 뭐해.”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일단 후보를 고르고 낭자가 직접 확인하는 게 어떨까?”
진십삼이 물었다. 정교랑이 돌연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반근.”
차를 올린 후 한쪽 옆으로 물러나 있던 시녀가 얼른 대답했다.
“반근한테 간식 좀 내오라고 해.”
정교랑이 말했다.
태평거의 다과와 태평거의 편액, 그리고 태평 두부는 이제 태평거의 세 보물이란 뜻에서 ‘태평삼보(太平三寶)’로 불렸다.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세 보물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것이었다. 솜씨 좋은 숙수를 청해 오고, 두부를 만들 줄 아는 도사를 거두었으며, 문객에게 귀한 글씨를 얻었으리라.
하지만 진십삼과 주육낭은 그 세 보물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는 걸 잘 알았다. 이곳에 몇 번 와 봤지만 매번 차만 마셨을 뿐, 간식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고맙습니다, 낭자.”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낭자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정씨 가문더러 고르게 하고, 최종적으로 낭자가 골라요.”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한테 고르라고 한 건, 성가신 일을 줄이기 위해서예요. 별일도 아닌 일에, 내가 마음 쓸 필요 없잖아요.”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야? 평생이 걸린 대사지.”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들한테나 평생이 걸린 대사죠.”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하려 했지만, 반근이 간식을 들고 들어왔다.
“낭자의 간식은 차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진십삼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챙겨요.”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멈칫했다. 진십삼의 손도 허공에서 멈췄다.
“챙겨 가서 먹으라고요.”
정교랑이 두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난 일이 있어서, 두 사람과 놀아 줄 수 없어요.”
진십삼이 손을 거두고 정교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교랑, 누가 누구랑 논다는 거야!”
주육낭이 눈을 부라렸다.
“본인들이 잘 알지 않나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알았으니까, 이만 가요. 난 일이 있으니까, 돌아가라고요.”
그러면서 정교랑은 반근이 벌써 싸 놓은 간식을 가리켰다.
“저거 가져가서 먹어요. 마음은 고마운데, 다른 데 가서 놀아요.”
진십삼과 주육낭은 어리둥절한 채로 정교랑을 보고, 이어 어느새 건네받은 간식을 봤다.
그래, 그래. 사탕 줄게 가서 놀아.
옳지, 착하구나.
어릴 적 집안 어른들이 사탕을 쥐여주며 어르고 달래던 때 같았다.
내가 뭐랬어. 하여간 이 여인은 독설가라니까!
대문이 쾅 닫혔다.
“네가 시집가고 싶은 데로 시집가 버려!”
주육낭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진십삼은 빙긋 웃었다.
“낭자는 원래부터 자기가 혼인하고 싶은 이와 혼인할 사람이었어. 우리가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한 거지, 낭자가 원한 건 아니었잖아.”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던 주육낭의 눈에 간식이 든 찬합이 들어오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걸 가져가란다고 진짜 가져오냐!”
주육낭이 손을 뻗어 빼앗으려 하자 진십삼이 얼른 몸 옆쪽으로 숨겼다.
“자네 가져가라고 준 건 안 가져와 놓고, 왜 내 걸 빼앗으려고 이래.”
주육낭이 진십삼에게 주먹을 날렸다.
“우릴 갖고 노는 게 그리 재미있어?”
진십삼은 씩 웃으며 간식이 든 찬합을 소중히 챙겼다.
“낭자가 우리를 갖고 논 게 아니야. 우리가 우릴 갖고 논 거지.”
진심삼은 걸음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낭자가 그러는데 병이 나으면 사람이 달라진대. 시간이 꽤 흘렀으니, 나도 정상으로 돌아가야지.”
“우린 저 애를 위해서…….”
“자네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진십삼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난 아니야. 낭자를 알고 낭자의 은혜를 입었어. 낭자와 서로 알아가면서 내가 낭자의 친구란 생각이 들었지. 도와줘야 할 것 같고,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았어. 도와주면 낭자가 좋아하고 고마워하겠지. 그러니 내가 돕는 건 낭자가 아니야. 바로 나 자신이지. 나도 은혜라는 걸 베풀어 보고 싶어. 전에는 본인이 한 일에 스스로 감동하는 이들을 비웃었는데, 병이 나아 정상인이 되고 보니, 나도 그 꼴이더라고.”
주육낭은 걸음을 멈추고 진십삼을 쳐다봤다. 진십삼은 한숨을 내쉰 후 손에 든 찬합을 던지려다가 다시 손에 꼭 쥐었다.
“됐어. 내가 낭자의 마음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려니 좀 잔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어린애처럼 매달리며 떼를 쓸 순 없는 노릇이지.”
진십삼이 씩 웃었다.
“가자.”
진십삼은 천천히 마차에 올라 휘장을 내렸다. 마차가 꾸물꾸물 움직여 차츰 멀어질 때까지, 주육낭은 그 자리에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주육낭은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저택의 대문을 쳐다본 다음, 손가락을 구부려 휘파람을 불었다. 한쪽 옆에서 버들잎을 먹고 있던 말이 즉시 다가왔다.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탄 주육낭은 질풍처럼 말을 내달렸다.
정교랑의 대청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조심스레 다구와 쟁반을 정리해 밖으로 나온 시녀와 반근은 회랑 아래에 멍하니 앉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기다리다 지친 금가아가 냉큼 다가와 소리 죽여 물었다. 말을 안 하고 있을 땐 그래도 괜찮았는데, 말이 나오자 반근은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도련님들이 잡혀가셨어.”
금가아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왜?”
“탈영병이었거든. 이미 감옥에 갇히셨어.”
금가아에게 감옥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지난번 서무수 등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몸에 남아 있던 상처를 보며 몸서리친 기억이 생생했다. 진 공자가 뒤에서 힘을 써 줬는데도 그 정도였으니 소름이 끼칠 수밖에.
“그럼 방금 진 공자께서 계실 때, 왜 도와달라고 안 하신 거야?”
금아가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소리쳤다. 시녀와 반근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오는 내내 정교랑은 말이 없었다. 신선거에 들렀을 때도 오 관리인을 만나 서무수가 잡혀간 과정을 물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리 큰일은 아니야. 살인이나 방화처럼 엄청난 일도 아니고, 벌써 한참 된 일이니까. 전장에서 도망친 것도 아니고, 도련님들이 무슨 조정 중신이나 이름난 명장도 아니잖아. 일개 졸병이었다가 싸움이 벌어져 도망쳤을 뿐이야. 조정 대신들이 신경 쓸 리 없어. 사람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면 아무 일 없이 무마될 거야.”
시녀의 말에 반근과 금가아가 시녀를 쳐다봤다.
“정말?”
두 사람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육공자 혼자 나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유 교리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간단한…….”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봐. 아씨께서 벌써 대책을 세우셨나 보네.”
시녀가 소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반근과 금가아도 얼른 문가로 다가갔다.
“출타해야겠어.”
“네. 곧장 외숙을 찾아가시겠어요? 아니면 육공자께 가시겠어요?”
“외숙부님한테 가야지. 넌 너희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는지 알아봐.”
장 노태야도 뵙겠다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장 노태야께서 나서실 정도란 말이야?
지금껏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장 노태야를 찾아가겠다고 한 일은 없던 아씨였다. 그런데 이 별것도 아닌 탈영병 일에 장 노태야의 도움을 청한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나?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저택의 마당까지 새어 나왔다.
“부인, 그만하시오! 그만!”
사내가 나지막이 소리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마당에 있는 여종과 몸종은 이미 익숙한 광경인 듯 신경도 안 쓰고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
“대답해. 당신이 그런 거 아니야?”
동 낭자는 한 손에 도자기를 높이 들고 한 손으로 향칠에게 삿대질을 했다. 매섭게 소리소리 지르는 동 낭자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대청 안은 난장판이었다. 화분대며 깨진 도자기 파편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그랬으면, 이리 서둘러 달려와 알렸겠소? 다들 죽든 말든 내버려 두지!”
향칠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어쨌거나 내 형제기도 한데, 내가 그런 일을 했겠소?”
동 낭자가 냉소를 지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고? 진작부터 하고 싶어 안달이었잖아. 서 오라버니를 죽여야 당신이 발 뻗고 자지 않나? 우리 집에서 쫓겨날까 걱정도 안 하고? 향칠, 분명히 말하지만, 서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당신 같은 인간은 내쫓아도 진작 내쫓았어!”
사내로서 참고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나도 분명히 말하지만, 날 내쫓더라도 서 형님은 당신 안 쳐다봐!”
향칠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버럭 소리쳤다. 휙 소리와 함께 동 낭자 손에 있던 도자기가 허공을 날았다. 향칠은 잽싸게 몸을 피했고, 문밖으로 날아간 도자기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나랑 당장 관부로 가. 당장 관부로 가자고! 내가 가서 물어볼 거야. 당신이 한 일이 맞는지, 아닌지! 당신이 한 일이면 당신 절대 용서 안 해!”
동 낭자가 눈물을 쏟으며 향칠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물론 향칠이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
“무슨 억지를 부리는 거요!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
향칠이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두 부부는 대청에서 밀고 당기며 실랑이를 했다.
“아니, 사람을 잡아도 분수가 있지! 그 사람들이 경성에 와서 우릴 찾아오지 않은 것도 내 잘못이고, 경성에 왔다가 잡혀간 것도 내 잘못이라니! 이건 뭐 죄다 내 잘못이잖아!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
“웬 소란이냐!”
밖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뒤엉켜 싸우던 부부가 밖을 쳐다봤다. 갈색 옷을 입은 노인이 침통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버지.”
동 낭자는 향칠을 밀치고 달려가 노인의 팔을 붙잡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아버지, 서 오라버니 형제들이 잡혀갔어요!”
향칠도 밖으로 나왔다.
“아버님, 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강림 형님네가 잡혀갔답니다. 탈영죄로요.”
향칠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들이 탈영한 걸 누가 알아? 관부에서 그 사람들을 신경이나 써? 그 사람들이 누군지 누가 아냐고! 관부 사람들이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 사람들을 잡아갔겠어? 차라리 도적을 잡는 게 더 도움이 되지.”
동 낭자는 울고불고하며 삿대질을 했다.
“당신 짓이야. 당신이 남몰래 관부 사람들을 부추긴 게 틀림없어! 당신 말고, 서 오라버니네 형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무슨 수로? 내가 관부에 가서 잡아가라고 하면 잡아가? 그리고 형님들을 찔러서 나한테 좋을 게 뭔데?”
향칠도 씩씩거렸다.
“뭐가 좋냐고?”
동 낭자가 다시 향칠에게 달려들었다.
“서 오라버니가 있으면 내가 당신이랑 이혼할 거 아냐! 서 오라버니만 있으면 당신은 없어도 그만이야!”
“서 형님 끌어들일 거 없어. 지금 당장 나가 주지!”
향칠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동 낭자를 뿌리쳤다.
“입 다물어라!”
동 노야갸 호통을 치며 굳은 얼굴로 동 낭자를 나무랐다.
“망할 것, 그걸 말이라고 해!”
동 낭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서서 통곡했다. 향칠의 눈에 언뜻 기쁜 눈길이 스쳤지만, 향칠은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해? 네 지아비고, 애들 아비가 되는 사람이 아니냐! 엄연히 혼례를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동씨 가문으로 들어온 사람이야. 왜 아무 근거도 없이 생사람을 잡아!”
동 낭자는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기만 했고, 향칠은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근거가 있다면, 나 역시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노인은 돌연 향칠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향칠은 뜨끔하며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봤다.
“아버님, 아버님도 절 의심하세요?”
향칠이 섭섭하다는 투로 물었다.
“일이 너무 갑작스럽지 않느냐. 경성으로 와 지금껏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우리와 다시 만나자마자 잡혀가다니.”
노인이 향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칠낭, 예전의 원한을 훌훌 털어버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
향칠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님까지 그리 말씀하시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버지, 서 오라버니가 잘못되면 저도 못 살아요!”
동 낭자가 울며 소리쳤다.
“입 다물어!”
노인은 동 낭자를 보며 호통쳤다.
“누가 그들이 죽도록 내버려 둔다 했느냐?”
노인이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관아로 가서 확실히 물어보자!”
동 낭자는 얼른 네 하고 대답하며 노인을 따라나섰다.
관아로 간다고……. 향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딱 잡아떼는 수밖에 없었다. 익명으로 보낸 투서이니 의심이 가더라도 증거가 없을 터였다.
향칠도 두 사람을 뒤따라갔다.
“유규!”
같은 시각 경조부 관아의 순성원에서 들린 고함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안색의 경조부 부원 대인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부원 대인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유 대장은 나른한 듯 탁자를 한쪽 옆으로 밀치고 느릿느릿 일어나며 예를 표했다. 부원 대인은 예를 받지도 않은 채로 바짝 다가갔다.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얌전히 순찰이나 돌 것이지, 탈영병을 왜 잡아!”
부원 대인이 나지막이 호통을 쳤다.
유 대장이 조소 어린 눈길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줄 알았지. 원칙을 지킨다고? 벌써 뒷배를 찾았으면서 원칙은 무슨!
“살인 사건이 얽힌 탈영병들이라 비적에 못지않습니다. 그런 놈들을 체포하는 건 제 직무입니다.”
부원 대인은 여전히 조소 어린 눈길을 짓고 있는 유 대장을 쳐다보았다.
“자네에겐 체포할 책임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내겐 가부 결정 권한이 있어. 조사해 보니 일곱 명의 죄명이 분명치 않더군. 그만 석방하게.”
유 대장이 발끈했다.
“부원 대인! 문서에 똑똑히 쓰여 있는데 어찌 진실을 외면하십니까!”
유 대장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문서를 들어 탁탁 치자 부원 대인이 보며 씩 웃었다.
“그래서 내 명에 불복하겠단 건가? 순성갑기의 일개 대장 따위가 오품 부원한테 따지고 드는 게야?”
문관과 무관의 차는 현격했고, 무엇보다도 좌천되는 바람에 지위가 낮아진 유 대장이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는 문관에게 대드는 건 절대적으로 승산이 없었다.
원칙 좋아하네! 유 대장은 눈을 부릅뜬 채 이를 갈았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대장, 병부에서 문서가 내려왔습니다!”
소교(小校) 하나가 문서 꾸러미를 받쳐 들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 말에 유 대장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고 부원 대인은 멈칫했다.
무슨 문서가 내려왔단 거지?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 부원 대인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이미 문서를 펼친 유 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부원 대인.”
유 대장은 뒤돌아 손에 든 문서를 흔들었다.
“저 같은 순성갑기의 일개 대장 따위는 대인께 따질 수 없겠지만, 병부 관청에서 판결 문서가 내려왔습니다. 의심 가는 게 있거든 병부에 가서 따지십시오!”
보잘것없는 탈영병 때문에 병부시랑씩이나 되는 인물이 나서다니, 뭔가 수상하잖아! 역시 그랬군. 거물들이 뒤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게야.
이렇게 된 이상 이대로 무마시킨 힘들겠군. 저들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수밖에.
얼마 전 서북 전선의 일로 왕보당(王步堂)이 물러나고 유준(劉俊)이 처형된 일이 떠올랐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조정에서는 서북 군영의 일로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싸움을 벌일 태세였다.
일개 경조부 부원은 천자 앞에서 상소를 올리는 조정 대신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쓸데없는 일에는 연루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원칙에 따라 일이 커지는 걸 막고자 했을 뿐이지, 뒤엉켜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진짜 칼이 오가는 싸움 아닌가.
“그렇다면 병부 소관이니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겠네.”
깔끔하게 말을 자른 부원 대인은 문서도 살피지 않은 채 곧장 뒤돌아 나갔다. 유 대장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하여간 문인들이란. 발 빼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문서를 쳐다보는 유 대장의 얼굴에도 의혹이 번졌다.
“어쩌다 진짜로 허락한 거지?”
그저 찔러나 보자는 심산으로 문서를 올린 터였다. 서북의 작은 군영에서, 그것도 일개 보루에 주둔하던 병사가 도망친 일이었다. 이치대로라면 병부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맞았다.
근데 외면을 안 했단 말이지? 게다가 이렇게 잽싸게 움직였다고?
유 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죄다 원칙을 안 지키고 있어.
한편 병부 관청의 한 방에서는 하급 관리가 홍포를 입은 관원에게 차를 올리고 있었다.
“대인, 정말 탈영병 일에 개입하시려고요?”
하급 관리가 나지막이 물었다.
홍포를 입은 관원은 차를 단숨에 비웠다. 전차(煎茶)의 정수는 한입에 털어 넣어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나가게 하는 데 있었다.
“그자들 때문은 아니지.”
관원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말했다. 네모지고 커다란 얼굴에 단정한 차림새의 관원에게선 높은 자리에 있는 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탈영병들이 너무 제멋대로 날뛰고 있어. 감히 경성으로 도망쳐 오다니. 서북 군영에선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엄히 조사해야 한다!”
이것 때문이었군. 하급 관리는 바로 알아들었다.
“왕보당이 파면되었다고는 하나 그 뿌리는 아직 건재해.”
홍포를 입은 관원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고가 놈은 어떻게든 왕보당을 복권시키고자 애쓰고 있지. 전투에서 졌고 군의 기강도 흐트러졌다. 엄히 조사해야지,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야!”
하급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를 당해낼 관료는 이 세상에 없었다. 핵심은 조사할 기회를 잡느냐는 데 있었다.
하급 관리는 그래도 미심쩍은지 고개를 숙이고 문서를 쓱 쳐다봤다.
문서는 급하게 쓴 티가 역력했다. 대필을 시키긴 했지만, 내용을 읊어준 무장이 명석하지 않아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조리가 없어 보였다.
이 글 속에 언급된 세 글자를 대인께서 제대로 보신 건지 모르겠네…….
“대인, 탈영병들이 태평거에 숨어 있었답니다.”
하급 관리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홍포를 입은 관원은 이미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디 숨어 있었든 무슨 상관이더냐. 태평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관원이 돌연 말을 끊으며 눈을 부릅떴다.
“태평거?”
하급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보여 주었다.
“아니, 이런…….”
문서를 낚아채 자세히 들여다보던 관원의 낯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역시 주의 깊게 안 봤군. 탈영병과 앞으로의 계획에만 너무 집중한 게야. 하급 관리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태평거는 진(陳) 대인과 연줄이 있는 듯했습니다.”
하급 관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유규 이 자식! 어찌 이리 경솔해!”
홍포를 입은 관원은 문서를 탁자 위로 내팽개치며 벌떡 일어섰다가 도로 앉았다.
“관두자. 이렇게 된 이상, 지켜보는 수밖에.”
“그랬군.”
동 노야가 중얼거렸다.
“유 대장의 손에 넘어갔던 거였어.”
“유 대장이 병부에 고한 거지. 아주 오래전에 서북에서 내려온 문서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지 뭐요. 적을 죽여 나라에 충성할 순 없지만, 변절한 장병들은 기필코 없애겠다는 각오였지.”
거기까지 말한 말단 관리가 입을 삐죽였다.
“유 대장이 저 잘난 맛에 나선 거 아니겠소이까. 누가 이런 일을 시키겠냐고.”
“아무튼 누가 고발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동 낭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말단 관리가 동 낭자를 힐끔 보며 미소를 지었다.
“조카님, 고발이 들어왔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말뿐이지. 그런 탈영병 조무래기들의 일에 누가 신경이나 써?”
말단 관리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는 말투였다. 동씨 부녀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윗선에서 끼어든 거죠.”
말단 관리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부원 대인께서 살펴 주고 싶으셔도 역부족이에요.”
그리 심각하다고? 동씨 부녀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던 향칠도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얼굴 근육까지 씰룩거렸다. 향칠은 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마음속 흥분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가르쳐 준 게 누군데! 보잘것없는 익명의 투서가 그 일곱 놈을 사지로 몰아넣을 줄이야! 허점도 전혀 없이 이리 완벽하게!
이미 병부에서 나섰고 순성갑기의 대장이 비분강개하여 나선 꼴이니, 성문이나 지키는 말단 관리를 떠올릴 사람은 없었다. 이 하찮은 말단 관리가 당긴 불씨라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 불씨는 바람을 타고 거센 불길이 되어 타올랐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어! 하늘이 무심하지 않으시네!
그러게 누가 경성으로 오래? 저 죽을 길 찾아온 게지!
그래, 죽어라! 내 자릴 노리고 내가 가진 걸 빼앗으려 들었으니 죽어야지!
“탈영의 죄가 이 정도로 무겁진 않지 않나? 우리가 돈을 낼 테니 보석은 안 될까?”
동 노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돈이요? 이건 돈 문제가 아니오.”
말단 관리가 웃으며 말했다.
“노야, 저들은 돈이 없는 줄 아시오?”
“그 사람들한테 무슨 돈이 있어요?”
동 낭자가 말을 빼앗자, 말단 관리가 껄껄 웃었다.
“그 사람들, 가진 건 돈뿐이야. 태평거와 신선거의 주인이니, 돈밭에 구르는 거나 다름없지.”
태평거? 신선거? 뭐가 어쨌다고? 동씨 가문 세 사람이 놀라 눈짓을 주고받았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인? 일꾼이 아니고?”
동 노야가 물었다.
“일꾼은 무슨. 그 사람들이 주인이올시다.”
말단 관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진짜 주인이 배후에 있긴 하지만, 문서로 박아 놓은 명목상 주인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최소한 진짜 주인이 그만큼 중시하고 신뢰한다는 뜻이었으므로.
이번엔 동 노야와 동 낭자뿐 아니라 향칠까지도 놀라 눈에 휘둥그레졌다. 범강림과 서무수 형제가 태평거와 신선거의 주인이었다고? 말도 안 는 소리! 웃기지도 않아!
동 노야가 사정을 알아보고 돌아오자, 동 낭자와 향칠이 서둘러 뛰어나갔다.
“뭐래요? 서 오라버니 형제들은 어떻대요?”
동 낭자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자리에 앉은 동 노야는 복잡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어이구, 아버지.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요. 어서 말씀 좀 해 보세요!”
동 낭자가 재촉하는 가운데 향칠이 차를 올렸다.
“아버님도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셨잖소.”
향칠이 나지막이 말했다. 동 낭자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쏘아보고는 찻잔을 빼앗아 동 노야한테 건넸다. 동 노야는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신 후 한숨을 토했다.
“정말 뜻밖이다. 강림네 형제가 경성에서 그리 많은 일을 벌였을 줄이야.”
“태평거와 신선거의 주인이 맞대요?”
동 낭자의 물음에 동 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로 딱 박아서 관부에도 등록해 놨더구나.”
동 낭자는 멈칫하며 처음 재회했던 날을 떠올렸다.
여기서 일을 구한 겁니까?
그래, 그렇지.
바쁜 게 좀 정리되면 꼭 갈게.
자신이 노인에게 돈을 찔러주며 서무수를 자르라고 했을 때, 그 노인이 웃으며 했던 말도 떠올랐다.
이 정도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돈 몇 푼 쥐여주며 주인을 내쫓으라고 하다니, 안 될 말이었다.
동씨 가문도 돈이 많다고는 하나, 그건 일을 하며 힘들게 모은 돈이었다. 신선거나 태평거 같은 곳은 가 본 적도 없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았다. 점포 하나만 해도 손님들로 문정성시를 이루는데 하물며 두 개니 그 이윤은 보통 많은 게 아닐 터였다.
어쩐지, 그날 아버지가 주신 돈을 한사코 거절하며 돈은 부족하지 않다고 하더라. 그냥 예의상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 정도 돈은 눈에도 안 들어왔던 거였어.
“돈뿐만이 아니다. 그냥 단순히 장사만 하는 게 아니었어.”
동 노야는 수염을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 노야가 고개를 들어 딸과 사위를 바라보았다.
“태평거에서 부랑배들이 죽었다는 소문은 들었지?”
집에만 있는 동 낭자도 아는 소식이었다. 향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한 짓이었어.”
동 노야가 말했다. 동 낭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묻기도 전에, 동 노야는 그 일을 소상히 말해 주었다. 숙수의 손이 잘린 일이며, 신선거에서 깽판을 친 일이며, 신선거의 주인이 바뀐 일 등을 줄줄이 늘어놓자 동 낭자 내외는 바짝 긴장한 채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불과 반년 남짓한 시간에 그 많은 일을 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동 노야가 탄식했다.
“서 오라버니의 능력은 진작 알아봤어요. 그런 사람이니 우리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게 눈에 안 찼겠죠.”
동 낭자가 중얼거렸다. 함께 넋이 나가 있던 향칠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능력이 있긴 하지. 대단한 뒷배를 둔 걸 보면.”
향칠의 말투는 냉담했다.
“서 오라버니가 유능한 게 아니면, 뒷배가 있었어도 진작 무너졌겠지!”
동 낭자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당신이었어 봐. 그런 일을 못 하는 건 고사하고, 뒷배도 못 찾을걸!”
“뒷배도 대단하고 능력도 대단하네. 감옥도 두 번이나 들어가다니 말이야.”
향칠이 냉소를 지었다.
“고소해하는 것 좀 봐! 이번엔 당신이 서 오라버니를 해치지 않았을지 몰라도, 조만간 해칠 생각이었잖아!”
동 낭자는 향칠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서 오라버니가 잘못되면, 당신이랑 갈라설 거야!”
“차라리 지금 당장 나갈게! 뭐하러 서 형님네를 저주해!”
향칠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조사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 켕길 게 없는 향칠의 말투가 강경해졌다.
“그만해라!”
동 노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호통을 치자 대청이 조용해졌다.
“싸우긴 뭘 싸워, 싸우긴! 지금이 싸울 때더냐!”
동 노야가 동 낭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 말다툼 때문에 집안이 망하게 생겼다. 네가 입을 잘못 놀려 강림네 형제한테 그런 일이 닥친 걸지도 몰라!”
그 말에 향칠은 뜨끔했다.
“아버지, 이건 집사람과 무관한 일입니다. 형님들의 잘못으로 벌어진 화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동 노야는 온화한 눈길로 향칠을 본 다음, 다시 동 낭자를 노려봤다.
“좀 배워라! 향칠이 너랑 잘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만족할 줄을 몰라!”
동 낭자는 동 노야와 향칠을 쳐다보다가 발을 탁 구르고는 흐느껴 울며 얼굴을 가리고 뛰어갔다.
“자네도 그만 가 봐.”
동 노야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향칠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버님, 서 형님네가 이번엔 도저히 방법이 없겠습니까?”
향칠이 근심스러운 듯 묻자 동 노야는 한숨을 쉬었다.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부귀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원수를 잘못 건드려 잡혀간 게 분명해. 별일 아니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가겠지만, 트집을 잡으려 들면 큰일이 될 테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향칠은 잠자코 들으면서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가도 이번 일로 따끔한 교훈이 될 것이다. 혹여 일이 커지는 날엔, 흐흐흐……. 어쨌든 향칠로서는 남는 장사였다.
생각지도 못했다. 남들은 물론이거니와 향칠 본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보잘것없는 자신이 아무렇게나 써 보낸 투서가 이런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줄이야!
역시 하늘이 무심하지 않구나.
“태평거와 신선거라……. 이름을 잘못 지었구나.”
동 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한시도 태평할 날이 없고, 신선처럼 유유자적할 겨를이 없으니…….”
반근이 마차에서 내리자 금가아는 보따리와 찬합을 챙겼다.
“감옥은 중요한 곳이다. 너희가 말한 이들은 순성갑기의 소관이라 우리 멋대로 결정할 수 없어.”
감옥 문을 지키는 옥졸들은 반근과 금가아가 면회할 사람의 이름을 대자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네, 알겠어요.”
반근은 전혀 실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금가아가 가져온 보따리 하나와 찬합 두 개를 건넸다.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겨 왔으니, 안으로 넣어 주세요.”
옥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건 오라버니들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사양하지 말고 받아 주세요.”
반근이 그중 한 찬합을 내밀었다. 옥졸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태평거 것이냐? 아니면 신선거 것이냐?”
옥졸이 못 참고 물었다.
태평거와 신선거는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주점이고 식당이었다. 옥졸 같은 말단 관리는 먹고살기 힘든 경성에서 얼마 안 되는 녹봉으로 간신히 살고 있었다. 백성의 고혈을 짜낸다 한들, 가족을 건사하고 지인이나 친척과 왕래하는 정도만으로도 빠듯해서 주점이나 찻집을 드나드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식당에서 거하게 한번 먹는 게 그나마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호사였다.
“날씨가 쌀쌀해져서 감옥도 춥겠다며 특별히 과로신선을 보내라 하셨어요.”
반근이 찬합을 열며 말했다.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던 옥졸들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신선한 고기며 채소뿐 아니라 함께 쓸 화로와 질솥, 그릇까지 들어 있었고, 작은 도자기 그릇에는 양념장도 있었다.
“이건 태평거에서 만든 다과고요. 오라버니들, 사양하지 말고 받아 주세요.”
반근이 또 다른 찬합을 열며 말했다. 안에는 열 가지나 되는 간식이 들어 있었다. 옥졸들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사환과 몸종을 쳐다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사환이 돈주머니까지 쥐여주었다.
“급히 오느라 차를 깜빡했네요. 이거로 형님들이 좋은 차와 함께 드세요.”
죄수를 면회하러 올 때는 수고비를 따로 챙겨야 하고, 가져온 물건도 셋 중 하나는 옥졸들의 몫이 되는 게 관례였다. 다만 다른 이도 아니고 태평거에서 그 관례를 따르다니 뜻밖이었다.
지난번엔 이런 규칙을 안 지켰잖아.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면회도 안 오고 음식이나 돈을 보내는 일도 전혀 없었는데, 이번엔 무슨 일이지?
정말 사람들 말대로 태평거가 이번에 단단히 잘못 걸렸나 보군. 그러니 전처럼 고압적인 자세로 나가지 않고, 관례대로 먹을 것과 돈을 싸 들고 왔겠지.
“또 일이 났다고?”
진 노태야가 놀라 묻자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수까지 대동했는데, 하마터면 태평거를 부술 뻔했답니다. 그 사내들도 죄다 잡혀갔고요.”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대체 누구인데?”
진 노태야는 무슨 일인지 묻는 대신 누구인지 물었다.
“탈영병을 잡아들인 거랍니다요.”
노복이 먼저 말했다.
“탈영병?”
진 노태야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영병이라면 별일도 아닌데, 그런 일로 사람을 잡아들여 풀어주지 않는다니…….”
이곳은 변방의 군영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도망쳐 온 이상 탈영병이라 해도 일반인과 다를 게 없건만, 그런 죄를 누가 신경 쓴다고!
“정말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관군들이 그리 소리쳤어요.”
노복이 말했다.
“그냥 말뿐일 테지.”
진 노태야가 말했다.
“누가 투서를 보내 고발했답니다.”
노복은 자신이 알아 온 소식을 전했지만, 진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지. 익명의 투서 하나에 관군을 동원해 그 많은 사람을 전부 잡아갔다? 그리 간단할 리가 없어!
“노야한테 가서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
노복은 알았다고 하고 물러갔다. 진 노태야는 손을 바꿔 머리를 괴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탈영병? 그런 사소한 일로?”
얼마 안 가 사환이 급히 달려왔다.
“노태야, 노야께서 손님을 뵙고 계십니다.”
“손님? 누가 왔더냐?”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병부시랑 최 대인이십니다.”
병부? 진 노태야는 자세를 바로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사소한 일이 아닌 것 같군.
같은 시각, 주씨 저택의 주육낭 거처.
마당 문 밖에서 사환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대청 밖에 선 주육낭은 모친과 시녀들이 옷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모친은 이것도 가져가야 하고, 저것도 가져가야 한다며 수시로 눈물을 닦았다.
“우선 섬주로 갈 겁니다. 조부님과 조모님께서 잘 챙겨 주실 테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 짐도 이리 많이 챙겨 갈 필요 없습니다.”
주육낭이 말했다.
“그분들이 챙겨 주시는 게 어디 우리만 하겠느냐.”
주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하고는 주변을 둘러보고, 몸종을 시켜 겨울철 털옷을 몇 벌 더 챙기게 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내젓는데 문가에 있는 사환이 보였다. 저 앞에 있는 사환이 설마…….
“교랑 아씨께서 오셨어요.”
사환이 주육낭을 향해 벙긋거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 망할 여인이! 주육낭이 주먹을 쥐며 이를 갈았다.
그 여인을 알기 시작한 날부터, 조금도 맘 편할 때가 없었다. 오거나 말거나, 어차피 난 눈에도 안 차잖아!
주육낭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육낭, 이건 옷이 너무 작아졌구나. 몇 벌 더 지어서…….”
주 부인이 옷을 들어 주육낭 쪽으로 대 보며 말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인이…… 왜 온 거지? 아무 일 없이 그냥 올 린 없잖아. 그 여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혼사도 신경 쓰지 않는 여인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왔다. 더 신경 쓰이고 중요한 일이 있단 뜻인가?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자 사환이 또 다시 손짓을 했다.
“육낭.”
주 부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주육낭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선 주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너희 뭐 하는 게야?”
주 부인이 주육낭과 사환을 쳐다보며 묻자 사환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육낭이 말했지만 주 부인은 믿지 않았다.
“말해라. 뭔데 이리 수상쩍게 굴어?”
주 부인이 사환을 보며 호통을 치자 사환이 놀라 벌벌 떨었다.
“교랑 아씨께서 오셨습니다.”
사환의 대답에 이번에는 주 부인이 깜짝 놀랐다.
“그 애가 왜? 혼인하자는 거 아냐?”
주 부인이 주육낭을 보며 물었다.
예전의 주육낭이었다면 그 말에 가슴이 쿵쾅댔겠지만, 지금은…….
“다른 건 몰라도 그 이유는 절대 아닙니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주 부인은 옷 정리를 제쳐두고 몸종을 시켜 무슨 일인지부터 알아보게 했다. 얼마 안 가 몸종이 돌아왔다.
“노야께서 교랑 아씨와 함께 출타하셨어요.”
“출타?”
주 부인은 더욱 놀랐다.
“어디 갔는데? 뭐 하러?”
“일이 생겼다고만 하셨어요.”
주 부인과 주육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또 일이 생겨? 또 무슨 일이 생겼기에?”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주 노야는 금방 돌아왔다. 정교랑이 찻집에 앉아 차 두 잔을 마셨을 즈음, 주 노야가 들어왔다.
“누가 익명의 투서를 넣었는데 일이 공교롭게 됐다. 널리고 널린 게 투서인데 그게 하필 유규의 손에 들어간 거야.”
주 노야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유규란 놈이 밥 먹고 그렇게 할 짓이 없는지 그걸 문제 삼은 거지. 방금 그 녀석을 못 만났는데, 좀 이따 찾아갈 생각이다. 교랑, 걱정할 것 없어. 이 일은 나한테 맡겨라.”
주 노야는 의분에 찬 모습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감히 태평거에서 사람을 잡아가다니.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게야. 거긴 태평거라고! 내…… 큼큼.”
속으로는 태평거와 신선거가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짜 주인 앞에서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정교랑 본인이 아무 말 없이 있는 마당에.
“이번에 내가 가서, 네 얘길 꺼내도 되겠느냐?”
주 노야가 완곡한 말투로 물었다. 정교랑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 노야는 괜히 찔리는지 헛기침을 했다.
“군사 문제로 요즘 조정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유규가 이런 일을 벌였으니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된통 당하고 후회할 거다. 멋대로 지껄이며 윗선에 보고한 게 틀림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병부에서 재가했을 리 없지.”
주 노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병부에서 왜 재가를 안 하는데요?”
정교랑의 물음에 주 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당초 진 노태야가 태평 두부를 명해선사에게 추천한 일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태평거가 진씨 가문과 관계가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알아. 태평거 배후의 진짜 주인은 진씨 가문이 아닐까 추측하는 이도 많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해는 정교랑도 알고 있었고, 기꺼이 즐기기도 했다. 어쨌든 사실이었으니까.
“병부시랑 최기(崔起)와 진 상공은 같은 당이야. 그러니 그 탈영병이 태평거의 사람인 걸 알았다면, 재가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걱정 말라는 거다. 네가 나설 필요도 없이 내가 가서 말하기만 해도 이 일은 해결될 거다.”
정교랑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주 노야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당이라니요?”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갑자기 무슨 당?”
주 노야도 멈칫했다.
“병부시랑과 진 대인이 같은 당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죠?”
정교랑의 물음에 주 노야가 껄껄 웃었다. 규방 여인이니 조정 일은 잘 모르겠지.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을 테고.
“같은 일파란 뜻이다.”
주 노야는 이렇게 말해도 어린 낭자가 못 알아들을 것이라 여겨졌는지 보충 설명을 했다.
“이를테면 왕보당을 처벌했으니 이제 서북 경락안무사를 새로 임명해야 하는데, 둘의 의견이 같아.”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 생각해 봐라. 탈영병을 문책하면 태평거까지 연좌로 걸릴 텐데, 그럼 진 대인이 난처해지지 않겠느냐. 요즘 같은 때에 최 대인이 그런 일을 벌일 리는 없지.”
주 노야가 씩 웃었다.
“넌 마음 푹 놓고…….”
“왜 요즘 같은 때에 그러면 안 되는데요? 요즘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요?”
정교랑이 주 노야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얘는 웬 참견을 이리 좋아하는지. 그래도 제 발로 날 찾아온 걸 보면 날 혈육으로 여기기는 하는 게야.
주 노야는 은근히 뿌듯해하며 우쭐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
“그것도 말하자면 길어. 지난번에 내가 그 유가 놈한테 당했던 일은 기억하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사실 별것도 아니었어.”
주 노야는 말할수록 열이 받는 눈치였다.
“그 유가 놈이 시기를 잘 잡은 거지. 서북 전선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폐하께서 진노하신 틈을 타 조정의 문신들이 왕보당을 물고 늘어졌어. 그 일을 폐하 앞으로 가져가 왕보당을 탄핵했지. 고 통사의 지지에도 버티지 못 하고 진상 조사에 들어갔고, 결국 왕보당의 수하 유준은 참수 후 효시됐다. 요즘이 그런 때야. 무슨 일이 생겨 폐하께 주청을 올리면 군사에 관한 대죄가 되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엄청난 일이 되지. 그러니 아무도 도와주려 나서지 못해. 그나마 교교 네 덕을 봤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우리 주씨 가문도 진작 하옥됐을 거다.”
교교 네가 없었다면, 저번 같은 일도 안 일어났겠지만 말이다.
물론 주 노야는 이 말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푹 내쉬고, 언제쯤 좋은 날이 오려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조정의 싸움이 그치지 않고 있어. 너 죽고 나 살기로 전부 쓸어 버리고…….”
“왕보당이 누구죠?”
정교랑이 물었다.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뭘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본디 숙주(肅州) 지주(知州: 주를 맡아 다스리는 지방관) 겸 서북 경락안무사였어. 추밀원 원사를 역임했으니 무장 중 최고 관직에 올랐다고 할 수 있지. 그 누구도 그 위치까지 간 사람은 없었어. 왕보당이 든든한 뒷배를 찾지 않았다면, 그 자리까지 가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게다.”
“그 뒷배가 고 통사죠?”
정교랑이 물었다.
꼼꼼히도 들었네.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어떤 사람인데요?”
정교랑이 또 물었다.
거참.
“귀비의 성이 고씨다. 태후도 고씨지.”
주 노야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보당을 물고 늘어진 사람 중에 병부시랑 최기와 진 상공이 있댔죠?”
정교랑이 다시 물었다.
아, 그래. 말 안 해도 잘 짚는구나.
“그래.”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둘이 같은 당이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주 노야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렇다니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왔구나. 이렇게 돌고 돌아서…….
정교랑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그러니 걱정 마라. 별일 아니야.”
주 노야도 다시 맨 처음의 화제로 돌아가 말했다.
“내가 유규를 찾아가 말하마. 병부 쪽에도 내가 가서…….”
“외숙부님.”
정교랑이 말을 끊었다.
“됐어요.”
주 노야는 멈칫했다.
“됐다니?”
“외숙부님은 이미 절 도와주셨어요. 나머지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성가신 일에 나서는 게 안쓰러워서 이러나? 아님 내가 나설 필요 없다는 뜻인가?
주 노야는 어쩐지 후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씨 가문과의 관계가 있으니 직접 가서 말하려고 그러나?
“진 상공한테 알릴 필요 없다. 이만한 일은 내 선에서 해결하면 돼.”
주 노야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은 일이 아니에요. 처음엔 작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죠.”
주 노야는 멈칫했다가 곧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여전히 어린 낭자였구나.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조심성이 지나쳐.
“조심성이 지나친 게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 최악의 경우부터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죠.”
주 노야는 눈앞에 있는 여인의 능력이 떠올랐는지 저도 모르게 진지해졌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게 뭔데? 누구한테 밉보였는지 생각이 난 게냐?”
주 노야가 물었다.
애초에 정교랑이 찾아와 서무수 등이 잡혀갔다고 했을 때, 주 노야는 또 누구한테 밉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딱히 밉보였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주 노야더러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보고 얘기하자고 했다.
이제 생각난 모양이군.
“사람한테 밉보인 것 같진 않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사람이 아니라고?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주 노야는 따귀부터 올려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이 말하니…….
찻집은 조용했다. 햇빛이 차단되어 더욱 음침해 보였다. 짙은 옷을 입고 눈앞에 단정히 앉은 여인은 무뚝뚝한 표정에 창백한 낯빛이었고, 두 눈엔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녀에게 벌어진 일들이 떠올랐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말이 있지만, 벼슬아치 중에도 상당수가 귀신에 관한 설을 믿었다.
사람이 아니라면……. 주 노야는 저도 모르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럼 뭔데?”
주 노야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운이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운? 이 무슨 괴상한 소리야? 굳이 밉보이지 않아도 딱히 좋을 때가 없었거늘.
주 노야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 바보도 감상적일 때가 있나? 아직 어린 나이니 연이은 사건들에 버티기 힘들 만도 하지.
“어쨌거나 사람이 한 일 아니냐. 사소한 일이야. 괜한 생각 말고…….”
주 노야가 웃어른답게 여유를 보이며 말했다. 정교랑이 주 노야를 빤히 쳐다봤다.
“사소한 일이 아니에요. 당초 유 교리가 기세를 몰아 외숙부님을 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죠.”
이번에는 주 노야도 대번에 알아들었고, 주 노야의 표정 역시 어두워졌다.
뭐라고? 이 일이?
“그때 운이 안 좋았던 건 유 교리였어요. 그러니, 우린 무사히 넘어갔죠. 하지만 이번엔, 제가 운이 안 좋아요.”
“교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구나. 탈영병 몇 명의 일일 뿐인데, 그게 조당의 싸움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더구나 진 상공이 있지 않느냐. 괜한 걱정을 하는 건 아니고?”
“저도 괜한 생각이길 바라요. 하지만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죠.”
“그, 그러니까 조정의 싸움 때문에, 특별히 태평거 사람들을 조사했고, 그들이 탈영병인 게 밝혀진 거다? 저기, 내, 내가 이런 말 해도 너무 노여워하지는 말고…….”
주 노야는 정교랑을 빤히 보다가 말을 이었다.
“교교, 네가 태평거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러니 운에 밉보였단 거죠. 처음엔 분명 사소한 일이었어요. 유규의 손에 들어간 것도 예상 밖의 우연이었죠. 하지만 그다음…….”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다음이라…….
“그다음엔 병부로 올라갔다. 탈영병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이걸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
주 노야도 따라서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손에 넣거나 무언가를 행하는 일도, 결국은 시기의 문제다. 당초 내 일도 사소한 일이었다만, 관료 사회에선 사소한 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지. 작은 도랑에도 배가 뒤집힐 수 있는 법이니…….”
주 노야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말 그런 거라면,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데?”
익명의 투서 한 통 때문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눈길 한번 못 받은 채 폐지로 팔려 말단 관리들이 술 퍼마시는 돈으로 쓰일 투서였다. 술값이 되는 게 투서가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성취였으므로.
하지만 이번 성취는 가히 전복적이라 할 만했다. 투서 한 장이 조정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어느 쪽이 이기든, 패한 쪽은 죽거나 먼 곳으로 유배될 터였다.
이 모든 일이 익명의 투서 한 장 때문이라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맞아요. 이번엔 정말 재수가 없었죠.”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재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어쨌든 탈영병인 건 사실이니까요. 탈영병이 아니었다면, 운이 아무리 안 좋아도, 별일 없었겠죠.”
주 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교교,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해결할 수 있겠느냐.”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일을 이루겠어요.”
정교랑은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외숙부님. 이 일엔 이제 개입하지 마세요.”
정교랑을 보는 주 노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교교, 사실, 이 일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우리로서는…….”
정교랑은 주 노야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 봐라. 탈영병을 잡은 거다. 그저 탈영병을 체포했을 뿐 태평거를 노리진 않았어. 진 상공이 있는 한, 태평거는 무사할 거다. 네가 추측한 게 맞더라도, 서북 군영의 기강이 흐트러져 탈영병이 경성까지 와 활개를 치고 다니니, 서북 군영을 조사하면 될 일이야. 그럼 왕보당 일파는 완전히 뿌리 뽑히겠지. 이건 전부 조정의 일이다. 너나 나 같은 사람은 저들 눈에 아무것도 아니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왕보당의 일파가 반격을 하더라도, 태평거는 적당히 둘러대고 넘어갈 수 있어. 그들은 본디 내력도 불분명한 자들인데, 도와주고 거두어 썼을 뿐이야. 더구나 너한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도 있고, 보수사 명해선사의 비호도 있으니 아무 일 없을 게다.”
주 노야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러니 이 일은, 여기서 관두자.”
이 일은, 여기서 관두자.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이고, 알고 지낸 시간도 짧다. 본디 죄를 지은 몸이었으니 재수가 있든 없든 국법대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쥐었다. 몸이 저도 모르게 미세하게 떨렸다.
“감사합니다, 외숙부님.”
정교랑은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불과 반나절 만에 돌아온 주 노야의 얼굴에서 집을 나설 때의 가볍고 밝은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 노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초조한 표정으로 대청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주 부인과 주육낭이 서둘러 맞이했다. 주 노야의 뒤를 힐끔 쳐다보던 주육낭의 눈빛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뭐래요? 혼인하재요?”
주 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혼인은 무슨!”
주 노야는 언짢은 듯 호통을 쳤다.
“그럼 왜 온 건데요? 갑자기 또 후회가 돼서, 우리 집으로 시집오고 싶다는 거 아니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절대 수락하면 안 돼요.”
주 부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게요! 혼인이 무슨 대수라고 그걸 일삼고 있어?”
주 노야가 노기 띤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요?”
주 부인이 물었다. 주 노야는 주 부인을 노려보다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주육낭이 물었다.
“별일 아니다.”
주 노야는 손을 내저으며 다 귀찮다는 투로 대꾸했다.
“더 물어볼 것도 없다. 넌 어서 짐 챙겨서 서둘러 떠나도록 해라.”
주육낭이 무거운 표정으로 주 노야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 난 게 틀림없어.
사람들은 늘 그랬다. 별일 아닐 땐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정말 큰일이 벌어지면 도리어 별일 아니라고 했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마차 안은 고요했다. 반근 한 사람만 따라오고, 잘 웃고 잘 떠드는 시녀는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망설이던 반근이 결국 입을 열었다.
“아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난 슬프지 않아. 전에 말했잖아.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고. 단지 화가 날 뿐이야.”
같은 시각 신선거에 앉아 있는 동 노야 일행도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여기 주인장을 봐야겠소.”
동 노야가 오 관리인을 보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 거요.”
오 관리인은 미소로 응대했다.
“그런데 저희 주인어른께서 안 계셔서요. 제가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전할 것 없소. 내가 직접 만나 몇 마디 해야겠소.”
동 노야가 말했다. 오 관리인은 계속해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딱 잘라 거절했다.
“뭐예요. 일이 터지니까 숨으려고? 서 오라버니 형제가 경성에서 고립무원인 줄 알아요? 그 사람들을 희생양 삼아 빠져나가려나 본데, 어림없어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오 관리인이 말했다.
“못 알아듣겠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요! 내가 직접 말할 테니까.”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냐. 좋게 말로 해라.”
동 노야가 나지막이 주의를 주었다.
“그래요. 너무 소리 지르지 마시오. 지금은 소리 질러 봤자 소용도 없고. 좋게 말로 해요.”
향칠도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나랑 말하겠단 사람이 없잖아요!”
동 낭자가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오 관리인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여긴 장사하는 곳입니다. 그러지 말고 우선 돌아가셨다가…….”
“장사는 무슨 장사요? 이 판국에 무슨 장사를 하겠다는 거예요? 사람이 잡혀갔는데 주인장이란 인간은 어디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면서 무슨 장사를 해? 벌써 도망친 거 아니에요?”
동 낭자는 눈물까지 보였다.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오 관리인이 말했다.
“농담?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요? 농담을 하더라도 당신네 주인장이랑 하겠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동 낭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나랑 농담을 하겠다는 거죠?”
안에 있던 이들은 전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모를 어린 낭자가 거기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이 왔나 보군.
동씨 가문 세 사람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손님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동 낭자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 낭자네.”
동 낭자가 속삭였다.
“누구?”
향칠은 어리둥절했다.
“서 오라버니를 만났던 날, 서 오라버니가 배웅했던 손님요.”
동 낭자가 대꾸했다.
아마도 여인의 타고난 능력이리라. 동성, 특히 자신보다 예쁘고 어린 상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상이 깊이 남기 마련이었다.
향칠이 다시 힐끔 쳐다봤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서무수와 마주치면서 너무 놀라는 바람에 미처 주변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 관리인이 나가 맞이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죠?”
정교랑이 물었다. 아씨께서 잊으셨나? 반근이 앞으로 나서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에 마주쳤잖아요. 셋째 오라버니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요.”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 왜 찾아왔죠?”
정교랑이 동 낭자를 보며 묻자 동 낭자는 멈칫했다.
“댁 찾아온 거 아니에요. 여기 주인을 찾아왔지.”
“내가 여기 주인이에요.”
정교랑의 말에 동 낭자는 깜짝 놀랐다. 동 노야와 향칠도 놀라 쳐다봤다.
이 어린 낭자가 주인이라고? 이 낭자의 가문이 여길 소유했나 보군.
“누구시죠? 무슨 일로 날 찾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댁이랑 말해야 무슨 소용이에요.”
동 낭자가 놀란 표정을 거두며 대꾸했다. 동 노야는 동 낭자를 제지하고,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낭자, 우린 범강림, 서무수 형제들의…… 고향 사람이오.”
정교랑도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 형제들한테 일이 생겼다기에 마음에 걸려 무슨 일인가 물으러 왔소. 그 형제들은 좀 어떻소?”
“그건 관부에 가 물으셔야죠. 탈영병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난 잘 몰라요.”
동 노야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동 노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동 낭자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댁들이 원한을 산 건데, 왜 우리 서 오라버니 형제들을 희생양으로 삼아요?”
“이 일은, 내가 원한을 산 게 아닐 거예요.”
동 노야 부녀는 잠자코 있는데 이번에는 향칠이 발을 구르며 나섰다.
“가소롭군. 서 형님네는 경성에 아무 연고도 없소. 댁들 때문에 불똥이 튄 게 아니면 누구겠소?”
동 낭자가 그 말에 반색을 했다.
“이제야 좀 사내다운 말을 하네. 맨날 뒤로 빠지기만 해서 난 또 내가 사내인가 했지.”
동 낭자가 정교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서 오라버니가 왜 잡혀갔는진 댁이 잘 알 거 아니에요!”
눈앞에 있는 어린 낭자는 몹시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멍한 모습이었다. 특히 자신의 말을 들은 후로는 더욱 그랬다. 멍한 눈빛으로 꼼짝도 않고 선 채 자신을 빤히 보기만 했다.
내가 내 남편 칭찬한 게 뭐 어때서? 동 낭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서 오라버니와 처음 만났을 땐 나도 열네다섯 남짓한 어린 낭자였건만, 어느새 십 년이 훌쩍 흘렀네. 고왔던 얼굴도 이젠 찾아볼 수 없고, 청춘은 가 버렸으니…….
“아, 둘이 부부였군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제야 알아본 거야? 이래서 지체 높은 사람들은 아무도 안중에 없다니까. 동 낭자가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아는 사이였다고요? 고향 사람이에요? 친구? 아니면 지인?”
동 낭자는 동 노야의 손짓에 입을 다물었고, 동 노야가 나서서 대답했다.
“이 늙은이와 그 여덟 형제는 동향이오. 서무수는 우리 가문을 구해 준 은인이지. 난 육 년 전 식솔들과 함께 무원산을 떠나 경성으로 옮겨 왔소.”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동 낭자를 바라보았다.
“서무수를 연모하면서, 왜 그 사람과 혼인하지 않았죠?”
정교랑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동 낭자는 더욱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향칠이 소리쳤다.
“헛소리가 아니에요. 이 사람의 언행 하나하나가, 말하고 있잖아요.”
정교랑이 동 낭자를 보며 말했다.
서무수를 향한 내 연정이 숨길 수 없을 정도라, 누구든 금방 알아본다고? 그럼 서무수한텐 왜 안 보인 거지? 아니지, 안 보인 게 아니라 눈에 안 찼던 거야.
“그래요, 그게 뭐요? 그게 무슨 창피한 일도 아니고. 난 서 오라버니를 연모했지만, 오라버니는 날 맘에 들어 하지 않았어요. 그게 뭐요?”
동 낭자가 창백해진 낯빛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꾸했다.
“여덟 형제라고 했나요? 그중 하나는 어디 있죠?”
* * *
작가의 말: 관리들이 폐기할 문서를 폐지 삼아 팔았다는 이야기는 <송사(宋史>에 나옵니다. 소식이 진주원에 임직할 당시 진주원의 폐지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작은 건물을 짓고 기녀를 불러 술을 마셨다가 어사에게 탄핵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10여 명이 축출됐죠. 이들이 사사로이 건물을 지어 먹고 마신 일이 어사의 눈에 거슬렸던 게 아닙니다. 소식이 범중엄의 신정(新政)을 지지하면서 수구파의 원한을 사 벌어진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