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60)

-정혼자-

마차가 천천히 거리 사이를 지나갔다. 해가 차츰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인파로 북적였다. 경조부 관청에 다다랐을 때, 몰려있는 인파 때문에 길이 막혔다.

“무슨 일 있어요?”

시녀가 몸을 밖으로 내밀며 물었다.

“무슨 일 났소?”

마부도 얼른 행인들에게 소리치며 묻자 한 행인이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 낭자가 경조부 관청 앞에 꿇어앉아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오!”

주 낭자? 경성에 대해서 잘 아는 시녀였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주 낭자는 재작년에 덕승루에서 뽑힌 명기입니다. 재색을 겸비하여 천금을 줘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던 그 명기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억울함을 호소하다니!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나 모르겠네요.”

마부도 흥분해서 목청을 높였다.

명기는 창녀가 아니라 기녀를 가리켰다. 기생들은 대부분 교방사 소속으로 그곳에 들어가서 몸을 파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배 가는 대신 들어간 여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집안사람 전부가 줄줄이 연루된다. 그런 여인들이니 억울함이 없을 수야 없겠지.

시녀는 다시 마차에 앉았다. 마차를 내팽개치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마부에게, 시녀는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우리랑 별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시녀가 잘못 짚었다. 실은 그들과 아주 가까이 얽혀 있던 일이었다.

닷새 후, 주 노야는 옥대교 저택을 다시 찾았다. 지난번처럼 공손하면서도 다소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대청에 앉은 주 노야는 대뜸 계약서 한 장을 정교랑 쪽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죠?”

“네 이춘당이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계약서를 받아와 꼼꼼히 확인했다.

“이렇게 빨리요?”

정교랑의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묻어났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는 티가 났다.

“벌써 유 교리의 권력에 도전한 사람이 있다고요? 심지어 무너뜨렸고요?”

“예전에 유 교리가 한 관원의 집안을 모함한 적이 있어. 그 관리는 모함을 받아 남주로 귀양을 가게 됐는데, 가던 길에 숨을 거뒀지. 관리의 아내는 겁…… 큼큼, 목숨을 끊었고, 여덟 살 먹은 어린 딸아이는 교방사로 팔려갔어. 그런데 당시 관리의 부인이 혀를 깨물고 자결하기 전, 억울함을 호소한 혈서를 아이의 품에 증거로 남겨 줬다더구나. 유 교리가 방심한 탓에 화근을 남긴 게야. 그 아이는 그동안 복수만을 다짐하며 칼을 갈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오자 북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 폐하께선 유 교리의 상태를 측은하게 여기셨지만, 어사대에서 이 일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주 노야는 신이 나서 득의양양한 투로 설명했다.

“아, 뭔지 알겠네요. 그날 거리에서 마주친 덕승루의 명기 주 낭자가, 그 아이였군요.”

시녀가 문득 그날 거리에서 본 광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주 낭자는 교방사에서 불평 한번 없이 말 잘 들으며 얌전히 지냈다더구나. 칠현금, 서화, 가무 뭐 하나 열심히 배우지 않는 게 없었고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지. 그날 그렇게 울며불며 하소연한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일을 널리 알려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부모의 복수를 하려고 했던 거야. 정말 강직한 여인이지.”

주 노야의 말투에 감탄이 묻어났다.

“강직함만으로는 부족했겠죠. 외숙부님께서 힘을 많이 쓰셨지요?”

죄를 지은 관원의 식솔이 명기의 유명세로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진 몰라도, 황제의 측은지심까지 얻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주 노야는 껄껄 웃으면서 더욱 어깨가 으쓱해졌다.

“유 교리도 뒤에서 수작을 부릴 줄 아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 있나? 내 편의 사람들을 선동해 폐하께서 못마땅해하시는 죄명을 덮어씌우면 그만이지. 풍질을 얻어 몸이 마비된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자를 두둔하러 나설 사람은 더더욱 없어.”

정교랑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딱하게 여기시기도 하고 유 교리가 병중이기도 하니, 그자를 직접 단죄하긴 힘들다. 하지만 그자의 아들들은 벌써 하옥되어 조사를 기다리고 있고, 가산도 모조리 확인 절차에 들어갔어. 아니 글쎄, 그놈이 숨겨둔 재산과 땅이 그렇게 많을 줄은…….”

주 노야는 말을 이으며 눈을 반짝였다.

많은 재산을 숨겨두었다는 말에 주 노야처럼 눈을 번뜩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유 교리의 처지를 설상가상으로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난 그 숨긴 재산에 숟가락 얹을 정도의 직위가 못 된다. 그래도 내가 이춘당은 어떻게든 너한테 가져왔어.”

주 노야가 다소 멋쩍어하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예를 올렸다.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해요, 외숙부님.”

“아니다, 아니야. 당연한 일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여긴 너한테 가는 게 제일 알맞아.”

정교랑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계약서를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기쁘게 계약서를 건네받아 잘 보관했다.

“이번에 수확이 꽤 괜찮네요. 태평거 하나를 내주었더니 신선거를 덤으로 온 것도 모자라 약포까지 얻었어요.”

시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태평거를 탐내는 사람이 누구 또 없으려나? 또 무슨 좋은 게 들어올지 모르겠네.”

주 노야는 시녀의 혼잣말에 내심 겁이 더럭 났다. 저택을 나와 마차에 올라탄 주 노야는 휘장을 들고, 천천히 닫히는 저택의 대문을 뒤에서 바라봤다. 소녀의 고운 뒤태와 소녀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시녀의 모습은 더없이 평온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아무도 모르게 이리 많은 것들을 해내는 게 저 아이에게는 일도 아니었겠군.

이게 어디 신선거 하나와 약포 하나만의 일이더냐. 조정에서 수십 년간 일해 온 경성 관리의 앞길을 영영 끊어버렸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강주에서 온 바보가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고 그 누가 믿겠는가. 저 강주 바보가!

경성 남문에 위치한 보천루(寶泉樓)에서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천루는 경성의 유명한 식당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문 밖에 지은 건물이라 널찍하고 쾌적했다. 게다가 운치 있는 정원까지 있어서 여름날 피서에 제격이었다.

낚싯대를 휙 들어 올리자, 진십팔랑 주변의 몸종들은 기뻐서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또 한 마리 잡았어요, 또 한 마리.”

진십팔랑이 팔딱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를 도자기로 된 대야에 넣었다. 대야 안에는 이미 크고 작은 물고기 두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진단랑이 발을 굴렀다.

“시끄러워. 너희 때문에 정 언니의 물고기들이 놀라서 도망가 버렸잖아.”

몸종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삼키면서 정교랑 쪽을 쳐다보았다.

낚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정교랑이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반 시진이 지나도록 단정히 앉아 있기만 할 뿐 낚시대는 한 번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정 언니, 아니면 우리 다른 데로 자리 옮길래요? 여기 있는 물고기들은 다 배가 부른가 봐요.”

진단랑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단랑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텅 빈 대야를 보다가 진십팔랑 옆에서 웃고 떠드는 몸종들을 쳐다봤다.

“근데 십팔랑은 물고기를 많이 잡았잖아요.”

진단랑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물고기 잡을 생각 없어.”

정교랑의 말에 진단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가 낚시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바위 옆에서 앉아 실뜨기를 하던 반근이 손을 멈추고는 웃음을 보였다.

“아씨께서 낚시를 하시는 건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낚싯대를 드리우기 위해서죠.”

시녀가 반근의 실뜨기를 이어받아 꽃 모양을 만들며 물었다.

“아씨께서 전에도 이렇게 낚시하신 적 있어?”

반근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하셨다마다. 집안의 공자 하나는 아씨께서 귀신인 줄 알고 죽을 뻔하기도 한걸.

반근과 시녀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저쪽에서는 또 한 번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진단랑이 분한 듯이 발을 탕 구르고는, 고개를 돌려 정자에서 차를 마시던 형제자매들을 쳐다봤다.

“십육 오라버니!”

진단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정자를 향해 외쳤다.

검은 장포를 입은, 청량하고 준수하게 생긴 소년이 담소를 멈추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단랑과 함께 그 옆에 돌아앉아 있는 정교랑이 시야로 들어왔다.

“십육 오라버니, 와서 우리 좀 도와줘요.”

진단랑이 자그마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소년이 머뭇거리자 주변에 있던 형제자매들이 놀렸다.

“십육, 얼른 가봐. 정 낭자가 있는데도 십구랑이 도와달라는 걸 보면, 아주 큰 골칫거리가 생긴 모양이야.”

소년은 그제야 진단랑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일인데?”

소년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묻자, 진단랑은 소년의 손을 붙잡고 연못 근처로 끌고 갔다.

“오라버니는 낚시를 잘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좀 도와줘요. 오늘 물고기들이 좀 이상해요. 하나도 안 낚인다고요.”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진단랑의 손에 끌려와 정교랑 옆에 섰다. 인기척을 느낀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를 비추면서 얼룩덜룩 그늘이 졌다. 큰 눈망울이 햇살에 반짝이자, 소년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 이걸 어떻게 도와? 별거 없어. 그냥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거지.”

정교랑이 손으로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진단랑은 신나서 소리를 질렀지만, 낚싯대의 끝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단랑은 곧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인내심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물고기를 낚아야 할지, 잘 안 되네요.”

정교랑이 낚싯대를 소년에게 건네며 말했다. 소년은 상기된 얼굴로 낚싯대를 받으며 대답했다.

“사실 요령 같은 건 없어요. 물고기가 모이게 먹이를 던진 후, 낚싯대를 드리우면 되는데…….”

진십육낭은 몸을 숙여 먹이를 한 움큼 쥐어서 연못에 세차게 흩뿌리고는 바로 낚싯대를 휙 던져 갈고리를 연못 속으로 넣었다.

진단랑은 신이 나서 웃음을 터뜨렸고, 정교랑도 진지하게 쳐다봤다.

날 보는 게 아니라 낚싯대를 보는 건데 뭘 긴장하고 그래. 소년의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관음보살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우와.”

진단랑의 환호가 들리자 진십팔랑이 웃으며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년이 들어 올린 낚싯대에는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펄떡이고 있었다. 정교랑도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해요.”

소년이 긴장한 기색을 숨기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이죠.”

흥분한 진단랑은 몸종이 물고기를 대야에 넣는 것을 빤히 쳐다봤다.

“우리 진짜 잘한다, 우린 진짜 대단해.”

진단랑이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그러고는 우쭐하며 진십팔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 물고기 한 마리가 언니네 다섯 마리보다 더 커.”

“거긴 세 명이고 나는 혼자인데, 혼자보다는 대단해야지.”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받아쳤다.

“그건 아니죠. 이 공자가 대단한 거예요.”

정교랑이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진씨 저택에 몇 번 가 본 일은 있지만, 진 노태야만 보고 나오느라 진십팔랑의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소년을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노야 댁의 십육공자예요.”

옆에 있던 몸종 하나가 영리하게 말했다. 십육공자가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정교랑도 평절로 예를 올렸다.

진씨 집안의 자녀들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예절이었다. 평소에 부모에게 가정교육을 받기도 했고, 소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스승에게 따로 가르침을 받으며 수많은 종류의 예절을 배웠기 때문이다.

예의범절에 대한 풍습은 대갓집의 풍모를 갖추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사람을 대할 때나 물건을 받을 때 각각 갖춰야 할 예의범절이 따로 있기에, 그에 맞는 예절을 몸에 밴 듯 행동하는 건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바보였다던 이 여인은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주고받을 때의 예절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진씨 가문 자제들이 일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뿐더러, 심지어는 더 기품 있어 보이기도 했다.

“차정사에 있는 비석에 관한 얘기 잘 들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몸이 회복되자, 그녀는 딱 한 번 본 것도 잊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졌다.

진씨 가문의 초대에 응해 차정사에 갔던 날에도 이 소년이 있었다. 어찌나 거리감이 느껴지는지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 속을 종잡을 수도 없을 것처럼 보이던 이 낭자가 뜻밖에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년은 기뻐 얼굴이 환해졌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이죠.”

소년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공자님께서 재주가 많으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시녀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낚시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어가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주고받는 모습을 멀찍이서 쳐다보던 진십팔랑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오라버니와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던 진십팔랑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때 가슴이 떨린 사람은 진십팔랑만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연못을 향해 걸어오던 진소의 부인과 동서인 진 사노야의 부인도 이 장면을 목격했다. 진 사노야의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더위를 피해 정자에 앉은 진소 부인과 진 사부인은 시중을 드는 측근 몸종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놀러 가라며 자리에서 물렸다.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연못에서 낚시를 하던 소년과 소녀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정원의 다른 쪽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형님, 전에도 한 번 물어봤던 얘긴데, 정 낭자는 아직 혼담이 안 나왔죠?”

천천히 부채질을 하던 진 사부인이 불쑥 얘기를 꺼내자, 진소 부인이 동서를 힐끔 쳐다봤다.

몇 년을 바보로 살았던 여인인데, 누가 혼담을 꺼내겠어. 물론 진 사부인이 무슨 뜻에서 꺼낸 말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정교랑의 이야기만 나오면 진소 부인은 고마운 한편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여인으로 태어나 시집만 잘 간다면 평생의 안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딸들의 혼사를 챙길 때면, 정교랑 생각이 절로 났다.

정 낭자의 부모와 가족들이 인륜지대사를 어떻게 다룰지 모르겠네. 우리 집에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문이라면 좋을 텐데. 그런데 아무래도 정 낭자가 조금은…….

“농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물어보던 찰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까워져 대화가 끊겼다.

“돌아가서 이야기하죠.”

진 사부인은 이쪽으로 오는 소년과 소녀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앉아서 좀 쉬다가 밥 먹으러 가자꾸나.”

정오가 지난 뒤, 정교랑은 진씨 가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교랑이 막 대문을 들어서는데 담벼락 너머에서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몸을 내민 소년은 마당으로 걸어온 정교랑을 쳐다보며 헤헤 웃었다.

시녀와 반근은 이제 그러려니 하며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

“요즘 바쁜가 봐요? 몇 번이나 왔는데도 없어서, 오늘도 없는 줄 알고 이만 가 보려고 했어요.”

“네, 요즘 바빠요. 나한테 볼 일 있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묻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모처럼 나와도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거든요.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낭자라 보러 왔죠.”

진안 군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썹을 꿈틀이며 물었다.

“아 참, 혼사 얘기로 바쁘죠? 어느 가문이랑 하기로 했어요? 내가 대신 알아봐 줄까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점포 여느라 바빴어요. 점포가 두 개 더 늘었거든요.”

“점포요?”

진안 군왕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몸을 좀 더 앞으로 뺐다.

“장사도 할 줄 알아요?”

“아니요. 하지만 장사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하는 법은 알죠.”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바빠요. 요즘에는 책을 두 권씩이나 더 외우느라.”

진안 군왕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정말 대단하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진안 군왕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경사가 생긴 김에, 같이 축하하는 건 어때요?”

축하? 무슨 축하? 시녀가 손에 있던 옷을 내려놓고 밖을 내다보았다.

반근과 금가아는 마당에서 바삐 움직이면서 쉼 없이 떠들어댔고 담벼락의 소년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공명등(孔明燈: 종이풍선에 촛불을 밝혀 하늘로 띄우는 등. 성공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 만들어 봤어요?”

담벼락 너머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나무 참빗을 쥐고 있던 정교랑이 멈칫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 만들어 봤을걸요.”

“만들 줄 아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죠?”

“네.”

정교랑은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놀렸다.

“난 만들어 본 적 없어요.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는데,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럼, 우리 둘 다 기억을 못 하는 거네요.”

정교랑의 말에 담벼락 너머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맞아요. 우린 정말 동병상련이군요.”

소년의 말을 들은 시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네. 대낮에 공명등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저 호색한은 정말 맛이 간 게 분명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햇볕 속에서도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다리 밑 나무 그늘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엇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거 봐, 누가 공명등을 날리고 있어.”

그 소리에 여러 사람이 시선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의 저택에서 흔들거리면서도 나란히 떠오른 공명등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 다소 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뉘 집 애들인지 장난을 치나 보네.”

공명등이 그리 희귀한 물건도 아니다 보니,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마당에 서서 고개를 들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공명등을 바라봤다.

“누굴 위해 복을 빌었어요?”

담벼락 너머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은 멀어져가는 공명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몰라요.”

웃음소리가 마당 안까지 전해졌다.

“신기하네요. 나도 모르거든요.”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저택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해졌다.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날아간 공명등은 점점 멀어져갔고, 대낮인지라 하늘이 밝다 보니 금세 보이지 않게 됐다.

서원의 대문이 열리자 제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왔다. 오래 가두어 놓았던 새들이 새장을 탈출하는 모습 같았다.

“공자님, 드디어 밖에 나와서 바람 쐴 수 있게 됐어요!”

사환이 싱글벙글 신이 나서 외쳤다. 사환은 고개를 돌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자리한 서원을 힐끔 쳐다보며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 몸을 떨었다.

“장강주 선생께서는 정말 무서운 분이네요. 다음번에 수업하실 때는 이런 식으로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을 열흘, 보름씩이나 가둬 놓고 수업을 하다니요. 정말 사람 잡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스승님께 불경하구나.”

정사낭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자 사환은 멋쩍은 듯 혀를 날름거렸다.

“저 안에 갇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필요한 걸 사러 나오는 게 아니었다면, 나 역시 서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을 게다.”

마지막 한마디에 깜짝 놀란 사환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정사낭이 지금 서원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그 안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사낭!”

익숙한 고향 사람의 말씨가 귓가를 스치자, 왁자지껄한 인파 속에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정사낭과 사환은 멈칫했다. 길가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던 마차에서 소년 공자 하나가 부채를 들고 폴짝 뛰어내렸다.

“경성은 번화하다지 않았어? 근데 왜 이렇게 휑하고 외진 곳에 있는 거야?”

소년 공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평했다. 정사낭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소년 공자를 쳐다보다가,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니, 너, 십칠, 네가 여긴 웬일이야?”

별실 안. 냉채와 과일, 그리고 술이 식탁 위에 순서대로 올라왔다.

“됐어, 충분해.”

정사낭이 서둘러 말했다.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왕십칠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앞가슴이 훤히 보일 정도로 노출된 옷에 청화포로 허리를 꽉 졸라매 더없이 가녀려 보이는 요염한 여인이 술을 따르던 손을 멈췄다. 여인은 왕십칠이 던져준 돈을 받고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교태를 부렸다.

“감사드려요, 공자님.”

여인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한 후 몸을 일으켜 나갔다. 여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향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경성은 재미있는 곳이야. 술 파는 여인네조차도 저리 눈치가 빠르니.”

왕십칠이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정사낭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참 복도 많다. 이리 좋은 곳에 오다니. 살살 놀아, 몸 상하지 않게.”

정사낭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왕십칠의 부채를 쳐냈다.

“난 공부하러 온 거야! 여기 올라온 후로 지금까지 경성 안으로 들어온 건 이번이 두 번째라고!”

왕십칠은 정사낭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웃으면서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입에 넣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건데? 어쩌다 경성까지 온 거야?”

왕십칠은 정사낭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은 채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넣고 연신 감탄을 해댔다. 그러고는 정사낭의 술잔을 채워주며 함께 마시자고 권했다.

“나? 나야 뭐, 정혼자를 데리러 왔지.”

왕십칠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그 말에 정사낭은 입에 머금었던 술을 내뿜어버렸다.

“뭐? 네 정혼자?”

정사낭은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

왕십칠이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봐서 뭐해.”

정사낭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술잔을 채웠다. 왕십칠이 가지고 다니던 그림 통에서 족자 하나를 꺼내면서 웃었다.

“에이, 그래도 한 번 봐.”

정사낭이 술잔을 든 채 흘겨보았다. 그림?

왕십칠이 손으로 족자를 털자 그림이 천천히 펼쳐졌다. 정사낭은 다시 한번 풉 소리를 내면서 입에 있던 술을 모조리 뿜어냈다.

“너, 너, 너.”

사레가 걸린 정사낭이 콜록대면서 왕십칠을 향해 삿대질했다.

“맞아, 맞아. 이게 바로 내 정혼자야.”

왕십칠이 웃으면서 족자를 조심스레 돌돌 말았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왕십칠! 그 애한테 병이 있긴 하지만, 네놈이 이리 함부로 모욕할 수 있는 여인은 아니라고!”

부아가 치민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쳤다.

“누가 모욕했다고 이래?”

왕십칠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우리 집안과 네 숙부 선에서 이미 끝낸 혼담이야.”

정말인가? 정사낭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진짜라니까. 네 누이 어디 있어? 내가 가서 좀 봐야겠는데.”

왕십칠이 정사낭 쪽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정사낭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왕십칠이 평소에 철없는 짓을 많이 한다 해도, 혼인 같은 인륜지대사에 대해 멋대로 지껄일 린 없는데. 설마 진짜로 집에서 이 혼사를 동의한 건가?

“너희 집에서도 허락하겠대? 그 여인이 어떤…….”

정사낭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농담하는 거 아니라니까.”

왕십칠은 웃으며 족자를 조심스럽게 그림 통에 담아 넣고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누이 어디 있냐고. 내가 가서 얼굴 좀 봐야겠다니까.”

정사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나도 아직 못 만났어.”

“경성에 온 게 언젠데 아직도 못 만났다고? 그럼 지금껏 뭐 했어?”

왕십칠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나 공부하러 왔다니까!”

똑같이 왕십칠을 노려보던 정사낭은 창피한 듯 말을 이었다.

“실은 누이가 어디 있는지 몰라.”

“외조모 댁에 있는 거 아니었어?”

놀란 왕십칠이 되묻자 정사낭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혼담을 넣을 수라도 있으면 차라리 괜찮지. 그 사이에 원래의 새장에서 다른 새장으로 옮겨진 건 아닐지 모르겠네.

“그럼 주씨 가문으로 가 보자!”

왕십칠은 남은 술과 음식들을 내팽개치고 곧장 문을 나섰다.

낮에는 손님이 별로 없는 가게여서 그런지, 쿵쾅대며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십칠, 천천히 좀 가.”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천천히는 무슨. 또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얼른 가서 구해야지.”

급하게 모퉁이를 돌던 두 사람이 마주 오던 이들과 부딪쳤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노을 빛깔을 닮은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오며 맑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두 사람은 황급히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사각사각 옷자락 소리를 내며 걸어오던 이들은 가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든 왕십칠은 잠시 넋이 나갔다. 두 몸종이 각각 비파와 칠현금을 하나씩 안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녀를 사이에 끼고 지나갔다.

수려한 옷차림에 가벼워 보이는 몸짓, 흰색 옥비녀로 곱게 감아올린 머리카락까지, 여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분칠하지 않은 청초한 얼굴에 깊은 눈매를 가진 여인은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연스럽게 그들을 훑으며 지나갔다. 여인의 일행은 순식간에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왕십칠과 정사낭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성이란 곳은…… 과연 신선들이 사는 곳이야.”

여인의 일행이 지나간 지 한참 후에야 왕십칠이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여인은 구름다리를 꺾어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무거운 부담을 이제야 벗어던진 듯 무릎을 꿇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 언니.”

뒤따르던 몸종은 거울 앞에 앉은 여인을 보며 다급한 투로 물었다.

“정말 기적(妓籍: 기생들을 등록해 놓은 대장)에서 이름을 빼지 않으려고요? 경조부 관리께서 직접 처리해 주겠다고 하시던데요.”

주 낭자는 구리거울에 비친 청순하고 수려한 얼굴을 보며 주홍색으로 물들인 손톱이 돋보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조금씩 쓸어내렸다.

“이미 몸을 더럽혔는데 뭐하러 그래. 강직하지만 불결하단 비웃음을 들으며 사느니, 노리개로 살지언정 강직하단 소리를 듣는 게 낫지.”

주 낭자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언니는 깨끗한 몸이잖아요. 누가 비웃는다고 그래요?”

몸종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여기서 날 비웃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야지.”

주 낭자는 고개를 돌려 어린 몸종을 바라봤다.

“여기선 나를 비웃지 않는 사람을 기다릴 수 있어. 밖으로 나간다면 그런 사람을 평생 못 찾을걸.”

몸종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곧 문이 열리더니 다른 몸종이 신선한 생화를 품에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언니, 새로 가져온 꽃이에요.”

몸종이 예의 바르게 말하자 주 낭자가 몸종을 보며 미소 지었다.

“춘령,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네가 아니었다면 난 소식을 듣자마자 억울함을 호소하러 무턱대고 달려갔을 거야. 그랬다면 그 나쁜 놈은 죗값을 치르지 않았겠지.”

춘령은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소인은 뭣도 모르고 한 말인걸요. 예전에 제가 살던 마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분명히 나쁜 짓을 저지른 악인이었는데, 병에 걸리자 사람들이 그자를 동정했죠. 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원한을 갚으러 달려갔지만, 사람들의 동정 때문에 그자는 무사히 빠져나갔죠.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죄를 물었다면, 결과는 훨씬 좋았을 거예요.”

주 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세상 사는 이치인데, 내가 너무 성급했어.”

주 낭자가 손을 내밀고 미소를 지으며 춘령에게 일어나라고 하자 춘령이 예를 표하고 일어났다.

“춘령, 넌 정말 가족이 아무도 없니?”

주 낭자의 질문에 춘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내가 널 속량(贖良: 노비가 몸값을 치르고 양민이 됨)하여 내보내 주려 했는데, 어차피 나가봤자 의지할 곳도 갈 곳도 없다면, 날 따르는 건 어때?”

춘령은 몹시 기뻐하며 엎드려 연신 큰절을 올리고 감사를 표했다.

“아씨의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씨의 큰 은혜에 감사드려요.”

“이게 무슨 대단한 은혜라고.”

주 낭자가 웃으면서 시선을 밖으로 옮겼다.

“듣자니 그 유가 놈은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이런 응보를 받았대. 그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큰 은혜라고 한다면 내가 그분께 큰 은혜를 입었지.”

주 낭자는 말을 마치고 합장하며 눈을 감고 절을 올리기 위해 천천히 엎드렸다.

주육낭의 발길질에 대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다. 금가아가 아이고 소리를 내면서 뒤로 몇 걸음 밀려 나갔다.

“이봐요, 뭐하자는 거예요!”

금가아는 마당으로 걸어들어오는 소년을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 이렇게 나오시겠다? 하긴,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지.

“정교랑!”

주육낭이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질렀다.

“공자님, 또 무슨 약 잘못 먹었어요?”

시녀가 회랑 아래에서 주육낭을 향해 소리쳤다. 시녀 뒤에서 정교랑이 돌아섰다. 소매는 끈으로 동여맨 채 손에 활을 들고 있었다. 귀밑머리에 맺힌 땀이 아직 마르지 않은 모습을 보니, 이제 막 활쏘기를 끝낸 듯 보였다.

정교랑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은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서며 정교랑을 노려보았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으니 편히 지내나 보네. 근데 잊어버린 일이 하나 있지 않나?”

“무슨 일이요?”

정교랑이 주육낭에게 물었다. 또 바보인 척을 해? 주육낭이 어금니를 세게 깨물고 외쳤다.

“십삼의 다리 말이다. 언제쯤 고쳐 줄 작정이야?”

정교랑은 주육낭을 빤히 쳐다보다가 잠시 후 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참, 그 일이 있었지. 깜빡했네.”

깜빡하기는 개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있네! 주육낭은 이를 갈았다. 고작 몸종 하나 데리고 간 걸 지금껏 두고두고 기억하는 사람이 누군데!

“정교랑, 바보인 척하지 마. 남들이 너한테 빚진 것만 기억하고, 네가 남에게 빚진 건 기억 못 해?”

“내가 누구에게 빚을 졌죠?”

정교랑이 도리어 주육낭에게 되묻자, 주육낭은 눈을 크게 떴다.

“너!”

“내가 언제 그쪽한테 빚을 졌어요? 이렇게 내 집에서 야단법석을 떨 정도로? 내가 설사 빚을 졌다고 한들, 정작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왜 그쪽이 난리죠?”

시녀가 웃음을 꾹 참으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시녀의 시선을 느낀 주육낭은 수치스러운지 소매를 털고 뒤돌아서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하지만 주육낭은 곧 되돌아왔다. 사람을 하나 더 데리고.

“이 녀석이 또 낭자한테 결례를 범했나 봅니다. 이젠 기어이 나까지 끌고 오네요. 원체 이렇게 괴팍한 성격이니, 낭자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진 공자가 못 말린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주육낭은 언짢은 표정을 한 채로 진 공자의 옆에 앉아 시녀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 역시나 그때 그 차였다. 주육낭은 단숨에 찻잔을 비웠다.

정교랑이 진 공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쪽은 억울하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과 진 공자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지만, 진 공자는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정교랑, 할 말이 있으면 좀 좋게 말하면 안 돼?”

주육낭이 말했다.

“그럼 그쪽이 해봐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빤히 쳐다보며 어서 말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너!”

주육낭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눈을 번뜩였고, 진 공자는 웃으며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아닙니다. 애당초 내가 이런 친구를 둔 일에 대해 후회 없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자가 그 죄책감에 지금껏 나보다 더 조바심을 내지 않았겠지요. 말하고 보니 내 잘못이 아주 크네요.”

진 공자는 주육낭이 끼어들기 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요즘은 조용히 뒷일을 정리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낭자 역시 점포가 늘어 더 바빠졌을 거란 생각에 굳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내 잘못이지요.”

“사실 제일 급한 사람은 당신이겠죠. 다만 당신은 자제할 수 있는데, 옆에 앉은 이 가엾은 바보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 당신 때문에 더욱 조급해하는 거예요.”

“정교랑, 날 위한답시고 그리 말할 필요 없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뭘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주육낭이 목청을 높이며 끼어들자 정교랑은 주육낭을 쳐다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알고 있었군요. 이 사람이 가식적이고 허세를 부린단걸.”

정교랑이 진 공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주육낭이 발끈하며 고함을 쳤다.

“정교랑!”

진 공자가 웃는 얼굴로 주육낭을 저지했다.

“낭자도 이 녀석 그만 놀려요. 낭자, 소생의 다리를 고쳐 줄 수 있겠습니까?”

진 공자가 몸을 숙여 예를 올리며 말했다.

“다리를 고치고 싶죠?”

정교랑이 진 공자를 보며 묻자 주육낭은 다시 이를 부득 갈았다.

“당연한 말을! 그럼 너는 한평생 바보로 살고 싶어?”

“그러고 싶을지도 모르죠. 바보일 때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으니까요. 바보의 눈에, 누가 바보로 보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주육낭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럼요, 맞습니다. 다리를 꼭 고치고 싶습니다.”

진 공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솔직히 말하면, 좋잖아요. 굳이 거드름 피울 필요 있나요.”

정교랑이 진 공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누가 거드름을 피웠다고 그래? 정교랑, 정도껏 해. 그만 좀 하라고.”

주육낭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만 못 하겠다면, 뭘 어쩔 건데요?”

정교랑은 턱을 치켜들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주육, 자네 미쳤어?”

진 공자가 다급하게 주육낭의 뒤를 따라 나가며 외쳤다.

“저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저택에 대고 소리쳤다. 금가아는 주육낭 쪽으로 침을 칵 뱉고 재빨리 문을 걸어 잠갔다.

“이런 걸 배은망덕하다고 하는 거지?”

주육낭이 말고삐를 손에 꽉 쥐었다.

“고쳐 주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자네는 뭐 때문에 자꾸 낭자와 입씨름을 하고 그래?”

진 공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 꼭 사람이 꿇어앉아 빌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 저렇게 잘난 척을 해야만 하냐고! 양심이 있긴 한 거야?”

주육낭이 이를 갈며 말했다.

“애초부터 우리가 낭자한테 부탁하는 입장이잖아. 자네 말대로면, 낭자가 도리어 나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진 공자가 지팡이로 주육낭의 어깨를 내리치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는 겉으로 희로애락이 표가 나서 참 다행이야. 저 집에서 차를 얼마나 많이 마셨어? 풍질에 걸려도 몇 번은 걸렸을걸!”

등골이 서늘해진 주육낭은 자신을 때리던 진 공자의 팔을 붙잡았다.

“십삼, 기분이 안 좋으면 말을 해. 맨날 왜 그렇게 싱글벙글한 표정으로만 있는 거야? 화가 나면 제발 참지 말고 화를 내라고. 아니면, 저 여인이 주는 거 먹지 마.”

“무슨 말이 그래. 난 본디 성격이 급하지도 않고 화도 별로 없어. 십수 년을 기다려왔는데, 고작 열흘, 보름이 무슨 대수라고.”

주육낭은 의심의 눈초리로 진 공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진 공자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잡힌 팔을 빼내며 주육낭의 어깨를 한 대 쳤다.

“자네나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괜히 나서서 일 꼬이게 하지나 말라고.”

주육낭은 깊은 한숨을 토한 후 굳게 닫힌 옥대교 저택을 잠시 노려보다가 말에 올라탔다.

등잔불이 흔들리자, 진 공자는 모친이 온 걸 알고 몸을 돌렸다.

“십삼, 저번에 다리를 고쳐준다던 일은 어찌 됐니?”

“잘 되어 갑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진 공자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다리를 한 손으로 몇 번 두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 부인이 기쁜 얼굴로 다가와 진 공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말? 정말 걸을 수 있는 거야? 십삼, 이 어미를 위해 몇 걸음 걸어 보면 안 되겠니?”

진 부인은 감격스러운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머니, 아직 안 나았어요. 서두르지 마세요.”

“난 서두르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아. 어미는 기다릴 수 있어. 한평생이라도 얼마든지 기다리지.”

진 부인이 눈물을 보였다.

“네가 걷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어미는 당장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어.”

진 공자는 미소를 지었지만, 쓰린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실, 모두가 여전히 그의 다리를 신경 쓰고 있었고, 진 공자 자신도 다른 이들이 자신의 다리에 신경을 쓰는지 의식하고 있었다.

“좋아요. 제가 한 번 걸어 보죠.”

진 공자는 말을 마치고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 보았다.

“십삼, 십삼! 정말로 걸을 수 있게 되었구나!”

놀란 진 부인이 입을 가리며 외쳤다. 그 소리에 진 공자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진 공자는 그제야 자신이 지팡이 없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걸을 수 있네? 진 공자는 잠시 넋이 나갔다.

“십삼, 또 걸어 보렴. 어미가 보게 또 걸어 다오.”

진 부인이 다른 한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진 공자가 아주 어렸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거 꿈이겠지? 그런 생각이 진 공자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자 별안간 발밑이 허공으로 쑥 빠지며 눈이 번쩍 떠졌다.

어느덧 깊은 밤, 방 안에는 여름밤 벌레 우는 소리와 사환이 코 고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보아하니, 마음이 급해졌나 보네.”

진 공자가 중얼거리며 가슴팍에 손을 얹자 쿵쾅대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진 공자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날이 밝자,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진소는 부인의 말에 옷을 갈아입던 손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부인을 쳐다봤다.

“농담하는 게 아니고?”

“농담 아니래요. 이제 막 나온 이야기긴 하지만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진소가 찻잔을 들고 읊조렸다.

“왜요?”

늘 정 낭자를 좋게 봐 온 남편인지라, 진 부인은 남편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남의 일일 때는 상관없지만, 막상 자신과 관련된 일이 된다면 다르다는 건가?

“정 낭자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오.”

진소가 서둘러 덧붙이고는 잠시 고민했다.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소.”

“뭐가 적합하지 않은데요? 정 낭자는 어릴 적 병에 걸리기도 했고, 모친을 잃은 데다 집안이 썩 훌륭한 건 아니라지만, 넷째 동서네는 관직에 나간 것도 아니고 십육도 적장자가 아니잖아요. 고향 논밭을 지키며 평온히 살면 좋을 텐데, 누가 비웃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진 부인이 썩 내키지 않은 말투로 말하자 진소가 허허 웃었다.

“내 말은, 낭자가 원치 않을 것 같단 뜻이오.”

진 부인은 예상치 못한 말에 멈칫했다.

“정 낭자가, 원치 않는다고요?”

가만있자, 아까 했던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낭자는 전에 병에 걸렸고 모친을 잃은 맏딸에다 집안도 보잘것없는 처지다. 거기에 대면 십육은 적장자가 아니니 가문을 위해 분주히 움직일 필요도 없고, 논밭을 지키며 평온히 살 수 있는데, 뭐가 어때서 원치 않는단 거야?

진소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부인을 쳐다봤다.

“아마 그래서일 거요.”

그래서라니? 진씨 가문에서 낭자를 깔보고 이 혼사로 시혜를 베푼다고 여겨서? 말도 안 되지!

“동서는 좋은 뜻에서 혼담을 꺼낸 거예요.”

진 부인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기왕 동서가 말을 꺼냈으니, 우리가 한번 물어볼 순 있잖아요. 우리 추측만으로 혼사를 거절하기에는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네요.”

진소는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진소가 정 낭자를 유심히 지켜본 것은 사실이었다. 정교랑이 여인이 아니라 사내의 몸이었다면, 부인이 먼저 나서기 전에 자신이 벌써 움직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집에 있는 또래의 여식들을 죽 늘어놓고 살폈겠지.

명석한 데다 뛰어난 의술까지 가진 사내였다면,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이는 이가 많았을 것이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가 있어 혼담을 넣었다고 하면 훌륭한 미담으로 남았겠지. 하지만 여인의 몸이라면,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좋소.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혼자 넘겨짚지 않겠소. 내 가서 물어보리다.”

남편도 결국 동의하자 진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여읜 데다 아버지는 아이를 내팽개치고 몇 년이나 방치했다는 게 맘에 걸리네요. 다행히 외숙이 있긴 한데, 그 외숙이란 자도 썩…….”

진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혼담을 넣으려면, 그 집안사람 중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까요?”

혼례는 인륜지대사인지라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라야만 했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했다. 진소가 다시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부인, 별걱정을 다 하는구려. 당연히 낭자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혹 낭자가 다른 이에게 결정권을 주겠다 하면, 그 결정을 따르면 될 일이오.”

날이 서서히 밝아올 무렵, 태평거 부엌에서 탁탁탁 채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부방 사람들만 깨어 있고, 식당의 다른 사람들은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이대작이 오른손으로 수건을 들어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았다. 이대작은 도마 위에 놓인 채소를 응시하며 왼손으로 물을 한 사발 들이켠 다음 다시 오른손으로 도마 위의 채소를 붙잡고 왼손으로 칼을 들어 채를 썰기 시작했다.

해가 뜨자 식당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을 시작했다. 조수들이 부엌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이대작은 칼질을 멈췄다.

“형님, 벌써 채를 다 썰어 두신 거예요? 이러면 우리가 할 일이 없잖아요.”

“이런 일이 나한텐 딱이야. 채소만 몇 개 썰었을 뿐이지, 어차피 고기는 자네들이 썰어야 하잖나.”

아무도 없을 때 해야 남들한테 걸리적거리지 않기도 하고.

분주해진 부엌을 보며 밖으로 나간 이대작은 잠시 쉬면서 왼손에 호두 두 알을 쥐고 굴리기 시작했다.

“대작 형님.”

손재가 다가와 쭈그려 앉더니 이대작을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오른손으로 굴리지 않고요? 오른손을 단련해야 빨리 회복되잖아요.”

이대작은 호두를 굴리며 허허 웃었다.

“내 오른손은 예전만큼 회복될 수 없어. 채소나 고기를 누르고, 솥이나 그릇을 들 수 있는 정도면 돼. 괜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깔끔하게 버리려고. 대신 온 마음을 다해서 왼손을 단련할 거야. 난 워낙 남들보다 더딘 사람이니 다시 처음부터 하려면 온 정성을 쏟아야 해.”

손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형님. 예전엔 형님을 무시했는데, 이제 보니 호걸이군요.”

“호걸은 무슨.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이대작이 웃어 보였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굳이 호걸이 될 필요 있나?”

손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저도 먹고사는 걱정만 없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고 싶다니까요.”

손재가 헤헤 웃자 이대작도 호탕하게 웃었다.

“재수 없는 소리 좀 그만해. 난 가서 칼질 연습이나 더 해야겠다.”

이대작이 몸을 일으켰다.

“저도 간수를 치러 갈 때가 됐네요.”

두 사람은 웃으면서 각자 부엌과 두부방으로 향했다. 뒷마당에는 이제 막 장을 보고 돌아온 마차와 두부를 옮기는 마차 여러 대가 있었지만, 어수선하게 뒤엉키지 않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같은 시각, 경성의 신선거에서는 문패와 편액을 떼어내고 있었다.

“여기 또 새로 열어요?”

지나가던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주인도 바뀌었고 일손도 준비되었으니, 앞으로 많이들 찾아 주세요.”

오 관리인이 문 앞에 서서 미소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과로신선만 팔 거요?”

어떤 행인의 물음에 오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과로신선만 팝니다.”

“과로신선은 낙득자재보다 맛도 없고, 비싸기만 하던데요.”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듯 외쳤지만 오 관리인은 개의치 않고 계속 눈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신선에게는 신선만의 장점이 있는 것처럼, 각자가 가진 색다름이 있지요. 한 가지 맛만 먹으면 무슨 재미입니까. 다들 오셔서 한번 드셔 보세요”

관리인은 온화한 태도였지만,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자부심이 드러나 도리어 호감을 샀다.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러 오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한편 이춘당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가 신의 낭자가 진료하는 곳 맞아요?”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 물어보자 점원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원칙은 그대로예요. 방문 진료는 하지 않고, 죽을병이 아닐 경우 치료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던졌던 이는 그 대답에 더욱 기뻐하면서 목을 쭉 빼고 안쪽을 살피려고 했다.

“정 낭자는 지금 안 계세요. 치료 받을 사람을 데려오면 저희가 바로 모셔 오겠습니다.”

점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정 낭자가 직접 만든 약도 팔고 있긴 해요.”

상대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게 무슨 약이오?”

점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문을 밀고 들어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약 어딨소? 정 낭자가 만든 약을 내가 다 사겠소!”

뭐에다 쓰는 약인지도 모르면서 다 사겠다고? 앞서 물었던 사람이 아직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 낭자의 약이라고?”

“내가 다 사겠소! 다 줘요, 다!”

“거, 시끄럽게 소리 좀 지르지 마시오. 내가 먼저 왔잖소!”

“먼저 온 게 대수요? 돈을 먼저 내는 사람이 우선이지.”

이춘당으로 잔뜩 몰린 사람들의 모습에 주위 다른 약포들은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다.

“신의가 있어 좋겠구먼. 이춘당이 예전엔 저리 문전성시를 이루지 않았는데.”

“그 신의라는 사람이 죽을병 아니면 치료하지 않겠다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우린 벌써 길바닥에 나앉았을 거야.”

말을 끌며 걸어오던 왕십칠은 약방 앞에 몰려있는 인파를 보고 쯧쯧거리며 눈을 흘겼다.

“저거 봐라, 저거 봐. 저런 게 바로 경성이지.”

왕십칠은 몸을 빼고 약방을 흘깃 쳐다봤다.

“약 하나 사는 일에도 저렇게 앞을 다투어야 하다니.”

왕십칠을 따라 힐끔 쳐다보던 정사낭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정사낭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왕십칠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어디 가는 거야? 주씨 저택은 이쪽 길로 가야 해.”

“급할 게 뭐 있다고. 먼저 덕승루부터 가봐야겠어. 모처럼 경성까지 왔는데, 세상 구경 한번 제대로 하고 가야지.”

정사낭이 초조해하며 물었다.

“거기 가서 뭐 하려고? 누이를 데려가려던 거 아니었어?”

“급할 거 없잖아. 어차피 네 누이는 외조모 댁에 얌전히 있을 텐데.”

간신히 인파를 뚫고 나온 왕십칠이 말에 올라탔다.

“며칠 지나고 데리러 가면 그만인 것을. 난 일단 주 낭자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야겠어.”

가지지 못한 미인이 더 중하지.

말을 달려 유유히 사라져 가는 왕십칠의 모습에 정사낭은 초조한 마음에 부아가 치밀었다. 정사낭도 서둘러 말을 타고 왕십칠을 쫓아가려는데, 옆에 있던 사환이 갑자기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왜 그래?”

정사낭의 물음에도 사환은 멍하니 한 방향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금가아를 본 것 같아서요.”

사환은 경성으로 출발하기 전, 춘란 누나가 몇 번이고 당부했던 일이 생각났다. 금가아에게 안부를 전하고 잘 지내는지 물어봐달라고. 가능하다면 공자님께 부탁해 금가아를 데려와 달라고.

“금가아?”

정사낭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어디?”

거리는 행인과 마차들로 빈틈없이 메워져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잘못 본 걸지도 몰라요.

사환이 중얼거렸다. 정사낭운 고개를 내젓고는 서환을 내버려 둔 채 서둘러 왕십칠을 쫓아갔다.

금가아는 마차 앞에 앉아 신나게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아니지, 아니지. 말을 그렇게 부리면 안 돼, 금가아.”

옆에 앉은 마부의 지적에 금가아는 혀를 날름거리고는 마부의 동작을 지켜봤다.

마차는 저택 앞에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정교랑이 바짝 뒤따라오던 마차를 쳐다보자, 진 공자가 마차 안에서 정교랑을 향해 공수의 예를 올렸다.

“덕분에 관부의 술을 팔 수 있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정교랑이 말했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진 공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정교랑도 미소를 지었다.

“아닐걸요. 내가 다리를 고쳐주게 하려고, 당연한 일이라 말하는 거잖아요.”

진 공자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건, 낭자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낭자가 기뻐하면 된 거죠.”

다시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되찾은 진 공자는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을 보였다.

“내가 아직 덜 기쁘다면요? 다리를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데요?”

정교랑이 진 공자를 빤히 보며 묻자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낭자의 기분을 따라야죠.”

“그럼, 내 기분이 좋아진 뒤에 다시 얘기해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금가아가 문을 달칵 잠그는 소리가 났다. 문밖에 혼자 남겨진 진 공자는 마차 안에서 미소를 지은 채 다소 굳은 얼굴로 있다가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막 출발하려던 찰나, 마차 한 대가 오더니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멈추어 선 마차 안에서 진소 부인이 내리자, 진 공자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대문을 다시 연 금가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성에서 정교랑과 왕래가 가장 잦은 가문을 꼽으라면 단연 진씨 가문이었다. 하지만 진십팔랑이나 아랫것들만 저택을 자주 찾았을 뿐, 안주인인 진 부인이 직접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옷감을 사러 나온 김에 낭자한테도 가져다주려고 왔어요.”

대청에 앉은 진 부인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여종이 보따리 하나를 건네자 시녀가 받으며 감사를 전했다.

차를 두어 모금 정도 마신 진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집안에서 혼담을 꺼낼 때가 됐죠?”

시녀가 멈칫했다. 설마…….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우리 집에서도 생각해 둔 혼담이 있는데, 누구한테 얘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요?”

정교랑은 진 부인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느 집안이죠?”

자기랑 얘기하자는 건가? 진 부인이 속으로 역시를 외쳤다.

“다른 집은 아니고, 우리 집이에요. 우리 가문의…….”

진 부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돌연 말을 끊었다.

“부인의 댁이라면,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 부인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왜요?”

남편 말이 맞았나? 낭자가, 원치 않아서? 우리 가문이 눈에 차지 않아서?

“치료했던 이들의 가문과는 혼인을 맺지 않거든요. 세 번째 원칙이죠.”

정교랑이 손가락 세 개를 내밀며 말했다.

치료했던 가문과는 혼례를 올리지 않는다고? 무슨 원칙이 그래?

진 부인은 놀란 표정이었다.

정교랑에게는 의술을 행하며 세운 원칙이 있다. 첫째, 방문 치료를 하지 않는다. 둘째, 죽을병이 아니라면 고치지 않는다.

이제 보니 세 번째 원칙도 있었네.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진소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웃었다.

“거절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정말로 원칙일 테지.”

진 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원칙이 그래요? 그런 원칙이 어디 있다고.”

“그럼 곧 죽을 사람 아니면 안 고치겠다는 말은 전에 들어본 적 있소?”

진소의 장난기 어린 말에 진 부인이 남편을 탓하듯 흘겨보았다.

“그게 이거랑 같아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목숨을 구해주면 몸으로 보답한다고. 근데 정 낭자는 왜 정반대의 원칙을 세운 거죠? 그 정도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집들이라면 분명 권력이 있는 집안이거나 부유한 집일 텐데, 이런 원칙을 세우면 그런 가문과 연을 맺을 수 없게 되는 거잖아요. 여인한텐 일생일대의 일이 바로 혼사인데, 어찌 자신의 앞길을 막는 짓을 하는 건지.”

진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길 하나를 막긴 했지. 의술에 힘입어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는 길을. 그래 봤자 길 하나뿐인걸. 이 세상 길은 천 갈래, 만 갈래 수없이 많다. 고작 길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당돌한 아이긴 하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게 참으로 아까울 뿐이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진소는 다시 내저은 후 아쉬운 투로 말했다.

영민한 사내였다면, 기꺼이 도와주며 공명을 쌓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의 몸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 한들, 병을 고치는 것 외에 무슨 일을 더 하겠는가.

세 번째 기침 소리가 들리자 정교랑이 손을 멈추고 담벼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방해한 거예요?”

진안 군왕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물었다.

“병이 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병은 아니고 목이 좀 아파서요.”

진안 군왕은 말을 끝내자마자 연달아 또 기침을 하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병이 맞는 것 같네요. 그, 그럼 이만 갈게요.”

“잠시만요.”

정교랑이 약을 빻느라 쥐고 있던 절굿공이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진안 군왕이 주춤하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담벼락이 높아 저택 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킨 정교랑은 시녀와 반근을 불러 화로와 주전자를 가져오게 했다.

“차를 좀 우렸는데, 마시면 좋을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와서 차 한잔할래요?”

“난 병이 난 것 같은데.”

진안 군왕이 당황하며 대꾸했다.

그래서 담 넘을 힘도 없다 이거야? 시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소년을 노려봤다.

“난 아직 바보인걸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건 또 무슨 대답이람? 시녀는 혼란스러워하며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담벼락 위에 있던 소년은 도리어 환하게 웃었다.

“가서 사다리 좀 가져와. 어서.”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여 아랫것에게 명했다. 위에서 사다리가 내려오자 금가아와 반근이 달려가 붙잡았다. 소년이 내려왔을 때쯤, 정교랑도 차를 얼추 다 우렸다.

보수사에서의 만남 이후,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호기심 어린 얼굴의 진안 군왕이 작은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위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은 다른 느낌이네요. 낭자가 꾸민 겁니까?”

정교랑이 주전자에 소금과 식초를 한 숟갈씩 넣자 시큰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내가 한 건 조금밖에 없어요. 시녀가 거의 다 했죠.”

“훌륭하네요.”

진안 군왕은 산석 아래로 흐르는 물에 손을 뻗어 튕겼다.

“나중에 내 집이 생기면 나도 이렇게 꾸며야겠어요.”

진안 군왕은 고개를 돌려 나무 그늘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땐 나도 차 한잔 같이 마시자고 낭자를 초대할게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찻잔을 들어 보였다.

진안 군왕이 얼른 다가와 시녀가 깔아둔 방석 위에 꿇어앉았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에게 가볍게 예를 표하고 양손으로 찻잔을 받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알싸하고 시큼한 맛에 일순간 정신이 또렷해지고 몸에 열기가 돌았다.

“이건 무슨 차죠?”

진안 군왕은 놀란 듯 묻고는 찻잔에 남아 있던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좀 전까지만 해도 간지럽고 아프던 목이 더없이 편안해졌다. 정교랑이 빈 찻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내가 만든 차예요. 사실 차는 아니고, 차 대용으로 마시는 거죠. 열네 가지 약재로 만든 거예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따라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은 후,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와, 다 나았어요. 진짜 다 나았습니다! 목도 이제 괜찮아요. 효과가 대단하네요. 역시 낭자는 신의예요.”

“잔재주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옆에 놓아둔 차 꾸러미를 건네며 말했다.

“가져가요. 오장육부에 좋고 기를 보하는 거예요.”

진안 군왕이 찻잔을 내려놓고 꾸러미를 건네받았다. 진안 군왕은 손에 쥔 꾸러미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가 입을 꾹 닫고,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좋네요. 이제 병에 걸릴 일 없겠어요.”

진안 군왕이 끝내 말을 뱉었다.

“그럼 난 더 이상 신선이 아니겠네요?”

정교랑이 다기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아부를 떨 때는 사람 좀 봐줍시다.”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은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공자가 신선이 되겠네요.”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가 곧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시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면서 옆에 있던 반근을 팔꿈치로 툭 쳤다.

“네가 듣기에도 웃겨?”

반근 역시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네, 반근은 아씨가 웃으면 같이 웃는 거였어. 웃긴 이야긴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없이.

“아냐,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시녀가 말하고는 먼저 풉 하고 웃으며 반근의 어깨를 두드렸다. 반근이 조용히 웃으며 시녀에게 말했다.

“반근 언니, 걱정하지 마. 아씨가 모처럼 아씨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잖아. 아씨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시녀도 피식 웃었다.

“나쁜 사람이라 한들, 무서울 게 뭐 있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차라리 신기하지.”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벼락에서 또다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전, 아니, 공자님…….”

고개를 내민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댁에 누가 오셨는데요.”

진안 군왕은 흠칫 놀라며 서둘러 일어났다.

“이만 가 볼게요.”

진안 군왕은 서둘러 사다리를 타고 담벼락을 올랐다. 허둥지둥 담벼락을 오르는 소년의 모습에 시녀는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시녀는 투덜대면서도 얼른 금가아와 반근을 도와 사다리를 반대편으로 넘겨주었다. 진안 군왕은 서둘러 돌아가는 와중에도 담벼락에서 정교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이게 뭐예요?”

사환 둘이 나무 한 그루를 들고 들어오자 시녀가 놀라 물었다. 곧이어 진 공자가 지팡이를 짚으며 뒤따라 들어왔다.

“낭자가 구해 달라던 보수사의 차다.”

진 공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시녀는 더욱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의 나무까지 캐 온 거예요?”

“이래야 오래가지. 낭자, 다른 분부는 없습니까?”

진 공자가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요 며칠간 정교랑은 진 공자에게 두 가지 일을 부탁했다. 신선거와 태평거에서 관부의 술을 판매할 수 있게끔 하는 것과, 보수사의 차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일은 복잡해 보여도 막상 실행에 옮기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리어 두 번째 일은 얼핏 쉽게 들려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진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진 공자는 보수사의 차를 구해 왔다. 무려 차나무 한 그루를 캐 온 것이다.

이 차나무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명해선사가 직접 재배한 것으로 귀하디귀한 보물이었다.

“일단은 없어요.”

정교랑은 몸을 일으켜 감사를 표했다. 진 공자가 웃으며 예를 표하고 고개를 들자, 정교랑 앞에 놓인 다기가 눈에 들어왔다.

“차를 마시고 있었군요?”

무심코 질문을 던지고는 시선을 조금 더 옮기자, 탁자 뒤쪽에 놓인 방석이 보였다. 정교랑과 마주하고 앉을 수 있는 자라면 분명 시녀나 사환은 아니었을 것이다.

손님이 왔었나?

“이건 무슨 차죠?”

진 공자가 킁킁 냄새를 맡으며 물었다. 여태 마셔왔던 차와 다른 향이었다.

“그쪽이 마실 차는 아니에요.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요.”

손님을 내쫓는 정교랑의 말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진 공자는 웃으며 알겠다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아, 참.”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진 공자를 불러 세우자 진 공자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활을 쏠 줄 안다고 했죠? 내일 태평거에서 한번 겨뤄 보는 건 어때요?”

정교랑의 초대에 진 공자는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답했다.

“좋죠.”

사환들이 가져온 차나무를 후원에 다 심고 나서야, 진 공자는 사환들을 데리고 저택을 떠났다.

거리에 있는 찻집에서 이를 지켜보던 주육낭은 저택을 떠나는 마차를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손님, 차를 좀 더 드릴까요?”

점원이 다가와서 물었다. 주육낭은 찻잔을 물끄러미 보다가 일어나며 고개를 가로젓고, 흥이 다한 듯 찻값을 치른 후 거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큰 소리로 친구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노인을 부축하며 걷는 이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지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다들 저마다 정겹게 담소를 나누며 거리를 오갔다.

주육낭은 말을 끌지도 길을 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뒷짐만 진 채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새벽빛이 어슴푸레 비출 무렵, 사환은 지팡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사환의 눈에 진 공자가 실내에서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도련님, 필요한 거 있으세요?”

사환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활 두 개를 챙겨야겠다. 저번에 배나무로 만들었던 활은 어디 있지?”

사환이 진 공자와 함께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활을 찾았다.

“근데 정오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시간이 이른데요.”

사환이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물시계를 보며 말했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뜨긴 했지만, 아직 묘시밖에 안 된 시각이었다. 그 말에 진 공자도 손을 멈추고 물시계를 쳐다봤다.

“아직 이르구나.”

진 공자는 아득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고, 지팡이를 짚으며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는 날이 다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 가지?”

정오가 가까워졌다. 진 공자가 서둘러 문을 나서려는데, 진 부인이 불러세웠다.

“요새 뭐가 그렇게 바쁘니?”

“하하, 노느라 바쁘죠.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니?”

진 부인이 막 입을 떼려는데 진 공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지 다음에 하세요. 늦으면 안 될 약속이 있어서요.”

걸음을 재촉하는 진 공자의 뒷모습을 보며 진 부인은 실소를 터트렸다.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는데.”

둥글부채를 흔들던 진 부인은 아들이 나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옆에 있던 여종에게 말했다.

“뭐라 둘러대고 빠져나가나 보려고 일부러 온 거야.”

곁에 있던 여종들이 쿡 웃었다.

“뭐하러 도련님을 놀리세요. 안 그러셔도 마음이 붕 떠 있을 텐데.”

“내 아들이 처음으로 여인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 아니더냐. 어미가 되어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진 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도련님께서 잘 보이려 하시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다리를 고치기 위해서잖아요. 부인께서 도와주시지는 못할망정, 구경하느라 바쁘시네요.”

여종들은 탓하듯이 종알거렸다. 진 부인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도와줘야지, 도와주고말고. 여봐라, 진 상공 댁으로 가자꾸나.”

진 상공 댁에 가신다고? 여종들이 서로 눈짓을 했다. 진 상공 댁에 가서 무얼 하시려고?

“공자님, 뭐로 가져다드릴까요?”

주육낭은 점원의 물음에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충 있는 거로 주시오.”

식당 안으로 들어왔으면서 무슨 음식을 파는지 묻는 게 아니라, 가만히 창가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이라니. 식당을 찾는 이들이 많아 별별 사람을 다 본지라 점원도 딱히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점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고기 요리 하나, 채소 두 접시, 식전 과일 네 가지를 올려 드리고, 마실 것으로는 옥당춘의 술과 보수사의 차를 올리는 게 어떨까요?”

보수사의 차까지 들여왔다고? 주육낭은 잠시 멈칫했다.

보수사의 차라면 단순히 태평 두부로 바꿔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십삼한테 이런 일까지 시키다니, 아주 당당하게도 요구하네!

아니지,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하는 것보단 도움을 청하는 게 훨씬 나아. 그래도 주육낭은 어딘가 찜찜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공자님?”

점원이 멍하니 앉아 있는 소년을 다시 불렀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쩜 저리 수심이 가득한지.

정신을 차린 주육낭이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주시오.”

주육낭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리며 게슴츠레 뜨자, 마차 두 대가 태평거 뒷마당으로 줄지어 들어서는 게 보였다.

무뢰배를 화살로 쏘아 죽이고, 신선거를 박살 낸 후로도 무사평온한 날들이 이어지자, 부처님이 태평거를 지켜준다는 소문이 사람들 마음속에 더욱 깊이 자리하게 됐다.

뒷마당은 아무나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뒷마당을 거리낌 없이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태평거 사람들뿐이었다.

텅 하는 진동 소리와 함께 긴 화살이 활시위를 벗어나 열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다. 과녁에는 각각 위아래로 네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가히 전부 명중이라고 할 만했다.

“나쁘지 않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정교랑의 소매를 동여매고 있었다. 진 공자가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잘 서지도 못하면서 용케도 활을 쏘는군요.”

이어지는 정교랑의 말에도 진 공자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긴 소매를 깔끔하게 정돈한 정교랑은 활을 들고 꼿꼿하게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또 한 번의 진동 소리와 함께 긴 화살이 날아갔지만, 화살은 과녁을 빗나갔다.

손재는 얼른 문 옆으로 몇 걸음 옮겼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실력은 전혀 안 느셨네.

진 공자가 하하 웃었다. 정교랑은 분하고 열 받는 듯한 표정으로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물론, 그저 진 공자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웃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무뚝뚝한 표정만 짓는 여인이니 말이다.

정교랑은 곧이어 화살을 세 개나 더 쏘았지만, 과녁에는 겨우 두 개만 위태롭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낭자는 아직 힘이 부족한가 봅니다.”

진 공자는 다시 자신의 활을 들며 말했다.

“그럼 뭐 어때요. 난 내가 보통 사람과 같다는 걸, 이런 거로 남들한테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는데.”

정교랑이 활을 내리고 진 공자를 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진 공자는 팔을 올리다가 멈칫하고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가 과녁을 명중했다.

“큰오라버니.”

정교랑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회랑 아래 서 있던 범강림이 얼른 대답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큰오라버니도 한번 해 봐요.”

정교랑의 말에 범강림은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진 공자가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활을 건넸다.

“내 활을 쓰십시오. 반곡궁(反曲弓)입니다.”

범강림이 굳이 사양하지 않고 활을 건네받은 후, 손에 들고 한번 움직여 본 후 곧장 활시위를 당겼다.

“큰오라버니, 망신당하면 안 돼요.”

정교랑의 말과 함께 매섭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다. 힘이 어찌나 셌는지,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을 뚫어버렸다.

깜짝 놀란 손재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 숨어버렸다. 궁술은 좋지 않아도 위험하고, 너무 좋아도 위험하네.

시녀가 환호성을 질렀다.

“큰도련님, 정말 대단하세요!”

시녀가 손뼉까지 치면서 외치는 모습을 보니, 일부러 놀란 척을 하는 건 같진 않았다. 진 공자도 웃으면서 감탄했다.

“역시 한밤중에 늑대 떼를 물리칠 정도의 호걸이군요.”

범강림은 쑥스러운 듯 아니라며 몸을 낮췄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봤어요? 이게 바로 진정한 사내대장부의 모습이죠. 당신은, 아무리 연기를 해도 이렇게 안 돼요.”

정교랑의 말에 뒷마당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저 녀석, 아씨께 원수를 졌나?”

안에 있던 손재는 조수 쪽에 대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을 너무…….

어린 낭자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트리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진 공자는 어린 낭자가 아닌지라 잠시 당황하다가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연기한 적 없습니다.”

“연기한 적 없다고요? 그럼 절름발이 주제에 뭐하러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우죠? 절름발이면 분수에 맞게 가만히 마차에 앉아서, 남들이 활 쏘고 말 타는 걸 구경하면 되잖아요. 뭘 배운다 한들, 당신이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바꿀 순 없어요.”

누군가의 발길질에 뒷마당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거칠게 열렸다. 범강림이 화들짝 놀라며 즉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주육낭이 손에 젓가락을 꽉 쥔 채 달려들었다.

“정교랑! 그만하라고 했잖아!”

주육낭이 고함을 질렀다. 범강림은 정교랑 앞에 서서 돌진해 오는 주육낭을 막았고, 진 공자 역시 얼른 지팡이를 짚으며 주육낭을 저지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만 못 한다고 했잖아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빤히 보며 대답하자 주육낭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바닥에 세게 내팽개쳤다.

“정교랑! 뭘 어쩌고 싶은 건데?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셈이야! 너처럼 이렇게 끝도 없이 모욕을 주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

“뭘 어쩌고 싶은 건 아니에요. 둘이 이러는 걸 보면, 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정교랑의 담담한 말에 주육낭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도 터질 듯 붉어졌다. 진 공자는 주육낭을 잡아 세우며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 낭자, 난 믿지 않습니다.”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뭘 안 믿는다는 거지? 다들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정교랑도 진 공자를 따라 미소지었다.

“사실 나도 믿지 않아요.”

정교랑은 진 공자를 쳐다보며 한 손으로 주육낭을 가리켰다.

“정말, 저 사람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주육낭은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떨었다. 누가 보아도 미칠 듯이 분노가 차오른 모습이었다.

“사실 난 한마디면 돼요.”

정교랑이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 주육낭을 가볍게 무시하고 진 공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계속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할래요? 아니면, 본심을 인정할래요?”

진 공자가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못 믿겠습니다.”

뭘 못 믿는다는 거야, 도대체?

“정교랑, 내가 죽어야 끝내겠다는 거지? 빌어먹을, 대체 얼마나 더 들볶을 생각이야? 진십삼이 그동안 도와준 게 얼만데. 왜 이렇게 양심이 없어?”

주육낭이 정교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입 다물어!”

급작스러운 우렁찬 고함이 주육낭의 말을 끊었다. 마당에는 다시 한번 적막감이 맴돌았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진 공자에게 시선을 모았다.

언제나 온화한 문인의 분위기를 풍기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온 저 소년이 이렇게나 거친 소리를 낼 수 있었다니.

“맞습니다. 원망하죠, 원망하고말고요.”

진 공자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원망하는 건 저 녀석이 아닙니다. 이 일은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 없어요.”

그는 팔을 벌리고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아무와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게, 내 운명일 뿐이죠.”

진 공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난 절름발이예요. 절름발이로 점쳐진 운명이라고요. 근데 또 딱히 방법이 없잖습니까. 내가 울고불고 욕한다 해서, 절름발이가 아닐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진 공자가 마지막 한마디를 외쳐내자, 한쪽에서 씩씩거리던 주육낭은 화난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진 공자를 쳐다봤다.

“맞아요, 난 절름발이죠.”

진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연기하고 있는 것도 맞습니다. 연기를 안 하면 어떡합니까! 남들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엉엉 울까요? 아니면 어디로 숨을까요? 숨는다 한들, 어디로 숨을 수 있겠습니까? 죽지 않는 한, 내가 어디로 숨을 수나 있냐고요!”

진 공자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제 만족합니까? 무릎 꿇고 빌라고 하면, 지금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빌겠습니다. 어차피 낭자 한 사람 앞에 꿇으면 될 일 아닙니까. 아무렴 평생을 꿇어 있는 것보다는 낫지요!”

진 공자의 외침이 멈추자 마당은 일순간 고요해졌다.

“십삼, 그만 가자.”

주육낭이 진 공자를 잡아끌려 하자 진 공자가 곧바로 소리쳤다.

“자넨 저리 비켜. 이건 자네와 상관없는 일이야!”

주육낭은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서 긴 한숨을 토했다.

“정 낭자, 난 믿지 않습니다. 낭자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아요.”

진 공자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믿지 않아요. 못 믿겠다고요.”

정교랑은 아무런 표정 없이 진 공자를 바라봤다.

“맞아요.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잘못한 걸 깨달았다고요.”

잘못? 마당의 모든 사람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난 내가 거짓말을 못 하는 줄 알았어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물론입니다. 낭자가 거짓말을 할 리 없죠!”

진 공자는 웃음기를 거둔 지 오래였다.

“이대작을 불러와요.”

정교랑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범강림은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이대작을 불렀다. 곧이어 이대작이 조각에 쓰인 칼을 쥔 채 뒷마당에 나타났다.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된 이대작은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씨께서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정교랑은 이대작을 쳐다보지도 않고 진 공자에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저 사람의 손을 봐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대작의 손으로 쏠렸다. 이대작의 손은 몸 앞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고 별다른 특이점도 없었다. 멀리에서 본다면, 오른손에 남아 있는 흉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 지금은 왼손을 써요.”

정교랑이 진 공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덧붙였다.

정교랑의 말을 듣고 나서야, 주육낭과 진 공자는 이대작이 칼을 쥔 손이 습관적으로 쓰던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진 공자가 휘청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뒷걸음질 쳤다.

“믿을 수 없습니다.”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해내지 못했어요.”

정교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 공자가 또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만!”

하지만 진 공자의 외침은 정교랑의 말을 끊지 못했다.

“내가 해내지 못했다고요!”

정교랑이 힘을 주어 목청을 높이고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갔다. 갈라진 목소리로 목청을 높이니 말이 더욱 날카롭게 들렸다.

“내가 당신을 속였어요! 애초에 당신의 다리를 고치는 건 불가능했다고요!”

“난 믿지 않아요.”

진 공자가 정교랑을 보며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주육낭의 머리가 웅웅 울렸다.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 그렇지. 유 교리가 어떻게 발작했는지, 진 공자가 말해줄 때였던 것 같네.

“난 딱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글쎄, 유 교리가 펑 터지듯이…… 미쳐 버린 거야.”

진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손으로 폭죽 터지는 시늉을 했었다.

주육낭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말은, 진 공자가 했다고 하기보다는 정교랑이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오늘, 정교랑은 또 한마디를 던졌다.

애초에 당신의 다리를 고치는 건 불가능했다고요. 그 말 한마디에 또 한 사람이 쓰러졌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구나! 세 치 혀야말로 가장 악랄하지!

그리고 그 차! 일찌감치 알아봤지. 그건 차가 아니다. 그건 독이었어!

저 여인을 믿은 게 한스럽군! 십삼이 그동안 어찌 대했는데!

주육낭은 울부짖으며, 쓰러진 진 공자를 향해 뛰어갔다.

진 공자 주변에 있던 사환들은 겁을 먹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예 대성통곡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공자님의 숨이 끊어졌어요!”

주육낭은 다리를 휘청이며 진 공자 앞에 털썩 꿇어앉았다.

진 공자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채로, 입을 앙 다물고 있었다. 손을 뻗어 진 공자의 호흡을 확인하던 주육낭은 순간 온몸에서 오한이 나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교랑!”

시녀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씨, 제가 틀렸어요.”

우리 노야께서 언쟁을 벌이며 욕으로 생사람을 잡을 땐 그 모습이 제일 대단한 줄 알았는데, 그건 적수조차 될 수 없겠구나. 욕하고 싸울 필요도 없이, 두세 마디 말로 사람이 분통 터져 죽게 만드는 것에 비하면. 전에는 아씨께서 말씀하시는 게 서툴다 여겼는데, 이게 어딜 봐서 서툴다 할 수 있을까.

손재는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고, 옆에 있던 조수 두 명도 겁에 질려서 얼어붙었다.

“또 한 명이 죽었어, 또 한 명이. 이게 어딜 봐서 식당이야, 저승의 염라전이지.”

바닥에 주저앉은 손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같은 시각 진소의 저택에서는 진소 부인과 진(秦) 부인이 사이좋게 마주 앉아 부채질을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왜 왔는지 맞혀 보시겠어요?”

진 부인의 장난에 진소 부인이 난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십일랑, 내가 좀 둔한 거 알잖아. 그만 놀리고,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 봐.”

진 부인이 웃으며 둥글부채를 내려놓았다.

“언니는 어머니가 되고 나서부터 영 재미가 없어졌네요.”

“우린 벌써 아이를 여럿 둔 어미가 됐어. 소싯적과 같을 순 없잖아, 십일랑.”

진소 부인이 가볍게 꾸짖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언니는 여전히 내가 아는 언니고, 나도 여전히 나인걸.”

진 부인은 잠깐 헛기침을 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그 신의 낭자에 대해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왔어요.”

진소 부인은 아, 하며 금세 진 부인이 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진씨 가문에 방문하는 사람 중 대부분은 정 낭자에 대해 대놓고 혹은 암암리에 알아보려는 사람들이었다.

“십삼 때문에 그래?”

진소 부인이 묻자 진 부인이 장난스럽게 눈을 굴렸다.

“부인, 내가 십삼이 마음에 둔 사람 때문에 이럴까요? 아니면 십삼의 다리 때문에 이럴까요?”

진소 부인이 흘겨보며 대꾸했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는 알려줄 수 있어. 만약 십삼의 다리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포기하고, 십삼이 마음에 둔 사람을 위해서라면 다리를 포기해.”

진 부인이 멈칫하더니 이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말장난 한번 기가 막히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들을 뻔했잖아요.”

근데, 왜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어디서 들었더라?

“정 낭자가 이 혼인에 동의하더라도 제 다리를 고쳐 줄 리는 없죠.”

“정 낭자가 이 혼사를 거절했으니, 제게는 아직 다리를 고칠 기회가 있습니다.”

문득 귓가에 소년의 목소리가 맴돌자 진 부인은 퍼뜩 깨달았다.

“참 공교롭네요, 우리 십삼도…….”

진 부인이 입을 막 열려는데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리 예의도 없이?

진소 부인과 진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환 하나가 허둥지둥 구르다시피 뛰어 들어오며 울부짖었다.

“부인, 부인, 큰일 났습니다. 십삼…… 십삼공자께 일이 났습니다…….”

진 부인이 몸을 휘청이자 진소 부인이 재빨리 옆으로 가 부축했다.

“입 다물지 못할까!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진소 부인이 사환에게 호통을 쳤다.

“십삼이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하긴 하지만, 옆에 붙어 다니는 사환은 감히 못 그래요.”

진 부인은 진소 부인의 손을 잡으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환을 쳐다보았다.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 났는데?”

사환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부인, 부인. 십삼공자께서, 십삼공자께서 분을 못 이겨 숨을 거두셨습니다…….”

방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진소 부인은 심장이 얼어붙은 듯 다리가 후들거려 털썩 주저앉았지만, 도리어 진 부인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건 몰라도, 십삼이 분통 터져 죽을 아이는 절대 아니야.”

진소 부인이 얼른 손을 뻗어 등을 쓸어 주었다. 이런 엄청난 시련 앞에선 웃는 것보다 차라리 속 시원히 우는 게 나을 텐데.

“부인, 십삼공자께서는 주씨 가문의 신의 정 낭자 때문에 열 받아 돌아가셨다고요!”

사환이 울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진 부인의 웃는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등을 쓸어주던 진소 부인의 손도 허공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사환을 쳐다보았다.

“누구라고?”

진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의 정 낭자 말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그 신의요.”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정 낭자라면……. 죽은 사람도 살려 낸다면, 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겠지. 더군다나 주육낭의 일로 십삼에게도 불똥이 튀었을 텐데.

분통이 터져 죽은 거라면,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니 죄로 다스릴 수도 없고. 소문이 새어 나가더라도, 남들은 마음이 좁아 그런 거라고 십삼을 비웃겠지.

낯빛이 새하얘진 진 부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리 없어!”

진소 부인도 진 부인의 팔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분명 오해가 있을 것이다, 정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진 부인이 진소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휘청거리며 일어서자 여종들이 서둘러 진 부인을 부축했다.

“부인, 우리 둘 다 어미가 됐다 하더라도, 예전과 변함없는 사이지요?”

진 부인이 진소 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소 부인 역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십일랑,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

“오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묻는 말에 대답해 줘요. 여전히 우린, 어릴 때처럼 좋은 사이 맞죠? 누가 날 괴롭히면 언니가 도와주고, 언니가 괴롭힘을 당하면 내가 나서서 도왔던 것처럼요.”

눈물이 진소 부인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십일랑…….”

진소 부인은 진 부인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난 그 아이를 꼭 도와야 해.”

진 부인이 진소 부인을 향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알겠어요. 그럼 우린 더 이상 예전 같은 사이가 될 수 없다는 뜻이네요.”

진 부인이 그 말만을 남긴 채 나가 버리자, 진소 부인이 서둘러 쫓아갔다.

“십일랑, 분명 오해가 있었을 거야, 정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진 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쭉 걸어갔다. 진소 부인은 뒤에서 몇 걸음 쫓아가다가 다시 몸을 돌려 손짓했다.

“노야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진소 부인은 같이 쫓아 나온 여종과 몸종을 죽 훑어보더니 무언가 생각났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진십삼이 정 낭자 때문에 분통이 터져 죽었다는 말은, 절대 새어 나가면 안 돼.

진소 부인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여종과 몸종은 잽싸게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몸으로 부인의 명을 기다렸다.

“아까 들은 일을 발설했다가는, 가문의 법도에 따라 곤장에 맞아 죽을 것이야!”

여종과 몸종들은 벌벌 떨면서 알겠다고 했다. 진소 부인은 그제야 다시 몸을 돌리며 걱정스럽고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정 낭자가…….

“아까 한 놈이 빠져나갔어.”

범강림이 걱정스러운 투로 조용히 말했다.

“누이, 먼저 가. 우리가 막고 있을게.”

태평거 뒷마당에는 아직도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진 공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주육낭도 그 옆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두 사환은 벌써 입을 틀어막힌 채 우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제압당해 있었다. 무원산 형제들은 바짝 긴장한 채로 현장을 지켰다.

정교랑이 걸음을 옮기자, 시녀도 얼떨결에 활을 안고 뒤를 따랐다.

“하나가 빠져나가 소식을 전한들, 달라질 게 뭐 있다고.”

천천히 입을 연 주육낭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몽땅 여기에 묶어 놓는다 한들, 이번에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아?”

“혼자 분을 못 이겨 죽은걸요. 우리가 때리기라도 했어요? 우린 두려울 거 없다고요.”

시녀의 말에 주육낭이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노려봤다. 주육낭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정교랑, 이제 됐어?”

“죽었어요?”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죽었어.”

주육낭은 미칠 듯이 분노를 드러내는 대신,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정교랑을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요. 죽이는 게 퍽 힘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쉬울 줄이야.”

주육낭이 벌떡 일어서자 시녀는 악 소리를 지르면서 정교랑을 껴안았다. 범강림이 막은 덕분에 주육낭의 주먹은 정교랑에게 닿지 못했다.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 공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쓱 훑어봤다.

“거의 다 죽은 것 같네.”

정교랑은 진 공자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안으로 들고 가요. 이제 치료할 수 있겠어요.”

치료한다고? 뒷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넋이 나갔다.

오후가 되자, 태평거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계산하고 나가는 손님들은 전부 기분 좋게 배가 부르고 취기가 올라 있었다. 몇몇은 손에 찬합을 들고 있기도 했다. 태평거에서만 특별히 판매하는 다과였다. 다과가 입맛에 맞는 이들은 태평거에 들를 때마다 몇 개씩 포장해 집에서 차와 함께 곁들여 먹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은 다급한 말발굽 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뽀얀 먼지가 이는 큰길로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로 밥을 먹으러 온다고?”

손님들이 놀라 떠드는 사이, 열댓 마리 말과 마차 한 대가 태평거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말과 마차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하지 않고 태평거 뒷마당 앞에 멈춰 섰다.

손님들은 먼지가 다 걷힌 후에야,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뒷마당의 문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무슨 일이 난 건가?

“걱정할 거 없다네. 여긴 부처님이 지켜 주시잖던가.”

놀라 불안에 떠는 손님들 사이에서 단골 하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알고 있다는 듯이 득의양양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큰일이 일어나도 여기서는 다 해결된다니까.”

진소 상공 댁 자제들이 급히 말에서 내리고 진소 부인도 여종의 부축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뒷마당 문가를 지키는 주육낭의 모습이 진소 부인의 눈에 들어왔다.

주육낭 앞에 서 있던 진(秦) 부인이 말했다.

“주육낭, 난 은혜와 원한을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야. 지금 비켜서면 이 일은 주씨 가문과 무관한 일로 해 둘게.”

“부인, 지금은 치료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럼 네가 대답해 봐. 우리 십삼이, 정말 죽었느냐?”

진 부인이 물었다.

죽었냐고? 진 공자의 호흡은 내가 직접 확인했는데. 주육낭은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육낭, 난 네가 거짓말을 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다. 네가 뭐라고 하든 다 믿어 줄게.”

“정교랑은, 죽을 사람이 아니면, 고치지 않습니다.”

진 부인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네 말은 일단 내 아들을 죽여 놓고 다시 목숨을 구하고 있다는 게야? 그럼 난 살려 줘서 고맙다며 무릎 꿇고 빌어야겠네?”

주육낭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문 앞을 지켰다.

“십삼한테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주육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자 진 부인은 혀를 찼다.

“네깟 목숨이 뭐라고! 네 집안 모든 사람의 목숨을 바친다 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러고는 주육낭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놈을 매우 쳐라!”

진 부인은 서둘러 오느라 사환과 호위를 두세 명밖에 데리고 오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부 여종들과 몸종들이었지만, 진 부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주육낭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육낭은 비처럼 쏟아지는 주먹질을 견디며 문 앞을 굳건히 지켜냈다.

“그만 때려라.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야지!”

진소 부인이 뒤에서 외치면서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진소 상공 댁의 두 아들도 데려온 이들과 함께 문 쪽으로 다가섰다. 진소 상공 댁에서 데려온 이들이 더 많다 보니 진 부인의 사람들은 금세 밀려났다.

“부인.”

진 부인은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진소 부인을 노려봤다.

“저 악인을 도우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요!”

“십일랑, 정 낭자는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니야. 이번 일에는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

진소 부인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지금 치료하고 있다잖아. 목숨을 살리는 게 제일 중요하지. 만약 네가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가 마지막 기회조차 잃어버리면……. 십일랑, 설령 저들 열댓 명을 다 죽인다 해도 십삼 하나만 못하지 않은가.”

진 시강이 손을 떨며 관청에서 뛰쳐나왔다. 진 시강을 모시던 사환은 종종걸음으로 간신히 뒤쫓아왔다.

“대인, 대인, 말은 여기 있습니다.”

수발을 드는 하인들이 곧장 문을 나서려는 진 시강을 보며 외쳤다. 진 시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 쪽으로 뛰어갔다.

우리 십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우리 십삼한테?

떨리는 손으로 말고삐를 쥔 진 시강은 말에 올라타는 데 몇 번이나 실패했다. 사환들이 진 시강을 도와 말을 잡고 부축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올라탈 수 있었다.

어렵사리 올라탄 말인데, 누군가가 진 시강의 말고삐를 휙 낚아챘다.

“진 대인,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진소는 초조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진 시강은 단호하게 말고삐를 낚아챘다.

“어서 길을 안내해라, 어서.”

진 시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같은 말만 읊조렸다. 진소는 말고삐를 빼앗아 꽉 잡고 놓지 않으며 더욱 다급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 대인, 제발 내 말 좀 들으십시오.”

문 뒤에 있던 하급 관리들이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리 없었다.

“대인 말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진 시강이 이내 진소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 아들이, 아직, 내가 보러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늦으면, 못 봅니다. 못 본다고.”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진 시강의 모습에 다들 코끝이 찡해졌다. 그런데도 진소는 고집스레 말고삐를 놓지 않으며 도리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듣기로는, 분을 못 이겨서라고 합니다. 진 대인, 정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십삼이 정 낭자를 도와준 게 있으니, 절대로 그 사람을 해칠 리 없습니다.”

진 시강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 십삼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얼마나 가엾은 아이인데, 누가 그 애를 해친단 말입니까!”

진 시강이 진소를 내려다보았다.

“정 낭자가 어떤 사람이든 내 알 바 아닙니다. 고의든 아니든, 신선이든 요괴든 상관없어요. 십삼을 해친 자라면, 내 기필코 그 낭자를 죽이고 말 겁니다!”

진 시강이 말고삐를 다시 가져가려 하자 진소는 안간힘을 써서 고삐를 더욱 세게 쥐었다.

“대인, 기억하십니까. 전국 시대에 지극한 충심으로 인해 죽은 문지(文摯)의 이야기를요?”

진소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자 진 시강이 멈칫했다.

말 여러 필이 태평거를 향해 달려오자, 뒷마당 문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진소 부인과 진 부인은 이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진 부인은 말 대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진소 부인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진소가 문 앞을 내다보자 족히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들 둘과 사환들, 그리고 주씨 가문의 철부지인 주육낭과 누군지 모를 사내들 몇 명이었다.

저 사내들이 정교랑의 의남매인가 보군. 진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날 말릴 셈이에요? 저 사람들의 말을 들으라고요?”

한쪽에서 진 부인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진소 부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진 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진 시강을 쏘아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진 시강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정말 오해일지도…….”

“오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우리 십삼이 죽었다고요!”

진 부인이 울며불며 외쳤다. 진 부인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지 진 시강의 옷깃을 힘껏 잡았다.

“우리 십삼이 죽었다는데…….”

그 모습을 본 진소 부인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모습으로 위태롭게 서 있기는 진소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 낭자가 꼭 고칠 수 있을 거야. 꼭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진소 부인이 진 부인에게 몇 걸음 다가가 진 부인의 어깨를 쓸어주며 흐느꼈다. 진 부인이 갑자기 홱 밀쳐내며 문 앞으로 달려들었다.

“십삼을 봐야겠다. 내가 아들을 죽음으로 몬 게야. 내가 그 아이를 해쳤어. 죄는 나한테 있는데 왜 우리 십삼한테 벌을 내리는 거야! 관음보살님, 눈이 멀고 절름발이가 될 사람은 전데, 왜 우리 십삼을 해치신 겁니까!”

갑자기 달려온 진 부인 때문에 문 앞의 대오가 살짝 무너졌지만, 사내들은 금방 중심을 되찾았다. 여종들은 윗전이 사내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진 부인을 부축하며 말렸다.

연달아 이어지는 소란에 태평거를 찾은 손님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리한 몇몇은 진소와 진 시강을 대번에 알아봤다. 뒷마당에 점점 더 많은 구경꾼이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진소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자 서무수는 재빨리 나서서 길을 안내했다.

“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희가 평소에 쓰는 방입니다.”

진 시강은 여럿이 에워싸고 있는 문과 웅성거리는 구경꾼을 차례로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손짓을 했다. 여종들이 거의 혼절 직전인 진 부인을 부축해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진소가 초조하게 물었지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환과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뒷마당에 갇혀 있었고, 중간에 빠져나온 사환은 진 공자가 죽었다는 말만 들었지,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방 안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 법한 사람은 주육낭이 유일했다.

하지만 방 안으로 불려온 주육낭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얘야, 어서 무슨 일인지 말 좀 해. 그래야 진 부인도 마음을 놓지.”

진소 부인이 주육낭을 재촉했다.

“말을 해도, 하지 않아도 똑같습니다.”

드디어 입을 연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방 안의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요.”

맞아. 말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말 오해라고 한들, 이 일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방 안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설령 목숨을 도로 살려낸다 해도, 이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다만…….

고개를 들던 진 시강이 무심코 진소를 쳐다봤다. 진소 또한 진 시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복잡했다.

그 일이, 가능할까?

정말로 가능할까?

주씨 가문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주육낭이 집에 안 들어오자, 주 부인은 사람을 보내 알아보던 중 주육낭이 태평거에 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평거는 그 애가 운영한다고 했지. 마음이 불안해진 주 부인은 다시 태평거로 사람을 보냈고, 결국 주육낭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됐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 부인은 거의 혼절 직전이었다.

“또, 또 한 명을 죽였어.”

주 부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떨리는 목소리로 주 노야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 그 애는 도대체 어디서 온 요괴기에…….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는 아니겠죠?”

주 노야는 어이가 없는 듯 주 부인의 팔을 뿌리치고 나무랐다.

“허튼소리 마시오! 치료 중이라고 하지 않소!”

“세상에 그렇게 치료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주 부인은 온몸을 벌벌 떨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노야, 노야. 우리 얼른 도망쳐요. 섬주로 돌아가자고요.”

흐느끼던 주 부인은 주육낭이 떠올리고 통곡했다.

“우리 아들이 아직 그 요괴 손에 있는데…….”

주 노야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딱히 도리가 없어 여종들에게 부인을 잘 보살피라 당부하고는 급히 마차를 준비해 성 밖의 태평거로 향했다.

태평거에 있던 사람들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늘색이 밝아질 때 즈음, 문이 열렸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서무수가 가장 먼저 벌떡 일어섰고, 주육낭도 뒤따라 일어섰다.

“나, 나는 채소를 썰러 가야 해서.”

이대작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어제 벌어진 소란 때문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마당에 갇혀 있었으니, 자연스레 이대작도 마당 안에 있어야 했다. 차라리 마당에 갇힌 게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모두 하나씩 불려가 심문을 받았을 것이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소리를 듣고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맨 앞에 서 있던 진 부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귀부인의 기품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반근이 문을 열어도 된다고 해서…….”

이대작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 해도, 지금만큼은 숨어야 할 때라는 정도는 잘 알았다. 이대작은 진 부인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냅다 도망쳤다. 진 부인이 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 사이로 또 한 명이 빠져나왔다.

“오늘은 두부를 보내야 하는 날이라…….”

손재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마, 마차는? 어서 불러와라.”

이 와중에 두부를 보낸다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어젯밤 그 소란 속에서 두부를 만들었다고?”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불려 둔 콩은 묵히면 안 돼서…….”

손재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 부인이 손재를 우악스럽게 밀쳐냈다.

“십삼!”

진 부인이 울부짖으며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하자, 서무수와 주육낭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막아 세웠다. 문 앞에 있던 손재는 나가지도 들어가지 못하는 꼴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진 부인을 말리느라 서로 뒤엉켰다.

“들어오세요. 이제 데리고 가셔도 돼요. 아씨께서 다 고치셨어요.”

시녀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문 앞에 엉켜있던 사람들이 멈칫했다. 진 부인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막아서는 사내들을 밀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부랴부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대청 문은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 가만히 누워 있는 진 공자가 보였다.

“십삼.”

헐레벌떡 다가간 진 부인이 무릎을 꿇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진 시강은 말없이 대뜸 손부터 뻗어 진 공자의 호흡부터 살피고는 진이 쪽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살아 있구나, 살아 있어.”

진 시강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 번째로 들어선 주육낭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재빨리 문을 붙잡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이제 그만 데려가세요. 이 약은 네 시진에 한 번씩 꼭 먹이시고요.”

시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 부인이 벌떡 일어섰다.

“그 몹쓸 것은? 어디에 있어? 나와, 나오라고!”

진 부인이 눈물을 쏟으며 외쳤다. 시녀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진 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 공자를 치료하시느라 아씨께서 심신이 많이 지치셨어요. 아씨께서는 휴식을 취하러 가셨으니, 감사의 말씀을 전하시려는 거라면 다음 기회로 미루시지요.”

내 아들의 분통을 터트려서 죽여 놓고, 다시 되살려 놨으니 고마워하라고? 진 부인은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사의 말씀? 감사? 퉤!

“부인, 부인. 지금은 십삼이 더 중요하오.”

진 시강이 뒤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뒤따라 들어온 서무수와 형제들이 시녀 앞을 막아서며 경계의 눈빛으로 진 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 부인이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고 외쳤다.

“네놈들, 한 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진 부인은 옷소매를 뿌리치고 다시 진 공자 앞에 엎드려 아들을 붙잡고 대성통곡했다.

진 시강 가문의 마차가 떠나가자, 뒷마당의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진소 부인이 시녀를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별일 아니에요. 원래 서로 얘기가 된 일이었어요. 진 공자가 아씨께 다리를 고쳐달라고 했거든요.”

근데 왜 분통을 터트려 죽였어? 진소 부인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진소가 부인을 제지했다.

“부인, 그만 물으시오. 다들 많이 피곤할 텐데, 일단 좀 쉬게 둡시다.”

이어 진소는 시녀와 서무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 낭자에게 편히 푹 쉬라고 전하고.”

시녀와 서무수가 예를 표하자 진소는 몸을 돌려 대청을 나섰다. 진소 부인은 바로 가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뒷마당은 더욱 조용해졌다.

대청에 서 있던 주 노야는 서무수와 시녀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불쑥 입을 열었다.

“손을 쓰지 않았다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둘은 멈칫했다. 곧이어 시녀가 먼저 웃음을 보였다.

“네. 아씨께서는 말만 몇 마디 하셨을 뿐이에요.”

말 몇 마디로 저렇게 사람을 분통 터트려 죽인다고? 주 노야는 잠깐 의구심이 들었지만 곧 뭔지 알 것 같았다.

가만, 유 교리도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주 노야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색하게 말했다.

“손을 쓰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어찌 됐든 말싸움이니, 사달이 나더라도 제 속이 좁은 걸 탓하는 수밖에.”

혹시 이 일이 소송으로 이어진다면, 이걸 물고 늘어져야겠구나. 다만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그대로 무마되지는 않을 터인데.

“노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시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정교랑이 경성 땅을 밟은 그날부터, 온 집안이 생과 사의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아니지. 저 아이가 이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주씨 가문은 이미 저 아이의 손아귀에 꽉 잡힌 거야. 절대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고!

운명이겠지! 따라야만 하는 운명!

주 노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젓고는 별말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녀는 하품을 하며 서무수에게 말했다.

“셋째 도련님, 저도 눈 좀 붙여야겠어요.”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여긴 내가 있을게.”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주육낭은 꼼짝달싹하지 않고 회랑 아래 우뚝 서 있었다.

밤하늘이 다시 한번 짙게 물들고 만물이 고요해졌다.

진 시강의 저택.

조용하게 등불만 일렁이는 가운데 갑자기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여종 하나가 진 부인이 떨군 것을 조심스럽게 줍고는 의자에 쓰러져 눈을 감고 있는 진 부인을 유심히 살폈다.

“어서, 어서.”

여종이 속삭이듯이 말하며 손짓하자, 건장해 보이는 여종 넷이 다가와 진 부인이 앉아 있던 의자를 통째로 들어 올려 조심스레 안으로 옮겼다.

여종들은 휘장 옆을 지나가면서 침상 앞에 꿇어앉아 진 공자를 보고 있는 진 시강을 쳐다봤다.

“노야, 부인께서는 약효가 돌아 잠드셨습니다.”

여종이 진 시강에게 고하자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께서도 가서 좀 쉬세요.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셨으니, 더 버티시기엔 무리예요.”

진 시강은 잠자코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의원 말로는 십삼공자께서 무탈하시답니다. 걱정하지 마셔요.”

여종이 거듭 권하자 진 시강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일어설 때 몸이 휘청였다. 여종들이 서둘러 부축했다.

진 시강은 곧 중심을 잡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갔다.

“노야.”

여종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진 시강을 불러 세웠다.

“저기, 이 약을, 공자님께 계속 올릴까요?”

약? 진 시강이 고개를 돌리자 탁자 위에 놓인 약병 몇 개가 보였다.

그 낭자가 당부했던 거구나. 여종이 기억하고 있었군. 의원한테도 물었지만 무슨 약인지 몰라 결정을 못 내렸지. 돌아와서 두 번 정도 먹인 것 같은데, 계속 먹여야 하나?

잠시 침묵하던 진 시강이 입을 열었다.

“먹여라.”

진 시강은 말을 끝내고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전의 꿈들과는 달리 고단했다. 기지개를 쭉 켠 진 공자는 회색 천장을 올려다본 후 고개를 돌려 여느 때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사환을 확인했다.

익숙한 광경에 진 공자는 미소를 짓고 지팡이를 찾으려고 손을 뻗어 더듬거렸지만, 손에 만져지는 게 없자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침상에 앉았다.

침상 옆에 있어야 할 지팡이가 없어졌다. 지팡이는?

잠시 불안해하던 진 공자는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꿈인데 뭐 어때. 꿈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에, 진 공자는 꿈꾸는 것을 좋아했다. 오직 꿈을 통해서만 지팡이 없이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자유로움은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진 공자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수없이 스스로 되뇌며 감정을 억제했다. 그렇기에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긴장을 푸는 것도 나쁘진 않지.

진 공자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다리를 쳐다봤다. 파란색 잠옷을 입은 다리는 정상인들의 다리와 똑같아 보였다. 물론 일어서면 다리가 곧게 펴지지 않았지만.

한숨을 푹 내쉬며 다리를 천천히 침상 밖으로 뻗던 진 공자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남 보기 부끄럽게 굽어진 다리가 정상인처럼 올곧게 펴져 있었다. 역시 꿈이라서 그런가.

멈칫했던 진 공자가 다시 천천히 발을 내려 힘껏 땅에 디디자,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일어섰어! 진 공자는 깜짝 놀라 침상에 도로 앉아버렸다. 진 공자의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댔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그렇게 앉은 자세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발치에서는 사환의 잠꼬대 소리가 들려왔다.

꿈일 뿐인데, 왜 이렇게 놀랐지. 진 공자는 웃으며 한 손으로 침상을 지탱하고 몸을 훅 일으켰다. 잠시 똑바로 서 있던 그는 고개를 숙여 발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두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드네. 앞으로 또 한 걸음 내디디던 진 공자는 대자로 뻗어서 자고 있던 사환을 가뿐히 뛰어넘기까지 했다. 나무 바닥에 맨발만 닿으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진 공자는 세상 모르게 잠든 사환을 빙긋 웃으며 슬쩍 보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깥방에 있는 여종 둘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여럿이 자고 있다 해도 걱정할 게 없었다. 지팡이가 아닌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니, 얼마든지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주육낭이 말했듯이, 정상적인 소년은 누구나 그러듯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잠옷만 걸친 소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새벽녘 안개 속을 걸었다. 이때 갑자기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이 마당의 평온을 깼다.

진 부인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십삼, 십삼, 십삼이…….

“부인, 도련님이 사라졌습니다!”

아랫것들이 외치는 소리에 진 부인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진 부인은 잠시 주춤하고는 흐릿해진 시선으로 침상을 확인했다.

침상에는 차갑게 식은 시신은커녕,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사라졌다고? 사라질 리가 있나? 누가 귀신도 모르게 숨어들어와 사람을 훔쳐 가기라도 했단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게 아니라면 가능성은 하나뿐. 자기 발로 침상을 걸어 나갔다는 것.

“지팡이는?”

진 부인이 묻자 사환은 허둥지둥 탁자 뒤에서 지팡이를 찾아냈다. 어젯밤엔 너무 정신이 없기도 했고 진 공자가 의식을 잃은 탓에 지팡이를 쓸 일은 없겠다 싶어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탓이다.

“지팡이를, 쓰지 않았다고?”

방문 앞에서 진 시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들 일제히 고개를 돌려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잠시 넋이 나간 듯 보이던 진 시강은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이내 몸까지 떨기 시작했다.

“노야.”

진 부인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진 시강은 몸을 휙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팡이를 쓰지 않았다고!”

진 시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지팡이를 쓰지 않았어. 지팡이를 쓰지 않았다고!

“십삼!”

십삼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깼다.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도 손을 멈췄다. 어제 도련님께서 들것에 실려 오셨는데, 설마…….

진 시강은 이곳저곳을 빠르게 훑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들이 자주 가는 곳은 저택의 뒷마당이지 정원이 아니었다. 뒷마당에는 주씨 저택에 있는 것과 같은 작은 연무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뒷마당에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안개 너머로 어렴풋이 사람 형체가 보였다.

“십삼!”

십삼을 부른 진 시강은 별안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넋이 나간 채로 앞에 있는 이를 빤히 보기만 했다. 앞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진 시강을 쳐다보며 웃었다.

“아버지, 왜 나오셨어요?”

앞에 있던 사람이 진 시강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걸어온다, 걸어오고 있어. 진 시강은 숨이 멎을 것 같고, 몸도 얼음이 된 듯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혹여나 숨을 쉬었다가는, 몸을 움직였다가는, 눈앞의 모든 게 거품처럼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역시 지극한 충심으로 인해 죽었던 문지의 이야기가 맞았어, 그 이야기가 맞았다고…….”

진 시강은 제자리에서 멍하니 선 채 중얼중얼 되뇌었다.

“십삼!”

진 부인이 울부짖으면서 진 시강을 지나쳐 미친 사람처럼 진 공자에게 달려갔다.

“십삼! 우리 십삼!”

진 부인은 진 공자를 와락 잡아채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걸을 수 있는 거야? 이제 걸을 수 있어? 다리가 다 나은 게야?”

진 공자는 진 부인이 너무 세게 흔드는 통에 살짝 휘청거렸다.

“다 제 잘못입니다. 꿈에서도 어머니께서 이런 추태를 보이시게 하다니요.”

진 공자가 웃으면서 진 부인을 토닥였다.

“네, 네. 이제 걸을 수 있습니다.”

진 부인은 진 공자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눈물이 진 공자의 손등에 떨어졌다.

따뜻하네. 진 공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꿈이 아닌가?”

진 공자의 형제자매들도 소식을 듣고 우르르 몰려왔다.

“세상에, 세상에! 십삼! 십삼이 이제 걸을 수 있어!”

다들 흥분해서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진 공자는 얼빠진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귓가가 웅웅 울렸다. 시끄러운 것 같다가도,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 것 같았다.

꿈이 아니라고? 꿈이 아닌가?

진 공자는 푹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딛고 선 다리를 확인했다.

꿈이 아니야. 진 공자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진 공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진씨 저택에는 다시 한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죽었다 살아나고, 살아났다 다시 죽고. 짧은 이틀간 진 부인의 심정이 그랬다.

침상으로 옮겨지는 아들을 보면서 진 부인은 차라리 자신도 함께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서, 어서 정 낭자를 모셔 와라!”

진 부인은 소리치며 급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야지, 내가 직접 가겠다.”

옥대교 저택의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지만 나오는 사람이 없자 마차는 태평거로 방향을 돌렸다.

태평거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손님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진 부인이 울면서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뒷마당 문 앞에 서 있던 주육낭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정 낭자.”

진 부인은 비틀거리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문 앞을 향해 걸어갔다. 진 부인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여종들은 잰걸음으로 뛰다시피 따라가야 했다.

문 앞을 막아선 주육낭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낭, 육낭. 정말 고맙구나.”

진 부인이 흐느끼면서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은 일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도 어서 가서 보거라, 어서. 십삼이 이제 걸을 수 있어, 십삼이 걷는다고.”

주육낭은 진 부인의 말을 듣자마자 뛰쳐나갔다. 하지만 몇 걸음 채 가기도 전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진 부인은 벌써 정교랑이 있는 대청 앞까지 갔다가 저지당했다.

“아씨께선 아직 안 깨어나셨어요. 여긴 왜 오셨죠?”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소리쳤다.

아직 안 깨어났다고? 진 부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씨께서는 그 댁 공자를 치료하느라 심혈을 쏟으셨어요. 그만 울고 저리 비키세요.”

시녀는 인상을 쓰며 부인을 향해 외쳤다. 진 부인은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울음을 삼켰다.

“울지 않을게. 시끄럽게 안 할 거야.”

그러고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어서 그래. 우리 십삼이 정말 걸을 수 있게 된 건지 묻고 싶을 뿐이야.”

“그럼 당연하죠. 아씨께서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어요. 고친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고치셨을 뿐이죠.”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주육낭은 대청을 바라보며 정교랑의 담담한 표정을 떠올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주 노야는 방 안 가득 쌓인 짐보따리를 발로 걷어찼다. 주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노야, 이제 막 정리가 끝났는데 뭐하시는 거예요? 더 늦으면 안 돼요!”

주 부인은 주 노야가 걷어찬 짐보따리를 다시 정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 안 가면, 못 갈지도 모른다고요.”

“가긴 어딜 가. 누가 감히 우리 주씨 가문을 쫓아낸다고!”

주 노야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치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깜짝 놀랐다.

“노야께선 부아가 치밀다 못해 실성을 하셨어!”

주 부인은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벼슬자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부랴부랴 돌아왔더니 아무 일도 없었고, 이제 막 안심했는데 또 곧바로 멸문의 위기에 처했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견디겠어!

같은 시각, 누군가가 진 노태야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버지! <여씨춘추>에 나오는 이야기가 맞았습니다. <여씨춘추>의 지충(至忠: 지극한 충절) 이야기가 맞았다고요! 신공(申公) 자배(子培)나 문지의 이야기처럼요!”

진소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애초에 진소가 용기를 내어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은 이유는 단순히 진 시강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세한 내막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지껄인 말이었지만, 상황은 결국 진소의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정말 치료를 하고 있었던 거야. 모욕하여 격노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정말 치료를 해냈어.

진 노태야의 거처에 앉아 있던 진소의 딸들은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진소를 쳐다보았다. 진소는 딸들 앞에서 추태를 보인 듯해 멋쩍어하며 곧 점잖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여씨춘추>의 지충이 뭐예요?”

진단랑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진소는 자리에 앉으며 딸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옛날이야기란다. 오래전 제나라 왕은 병을 얻자 송나라에 사람을 보내 문지(文摯)라는 의원을 모셔 왔지.”

진 노태야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들여다보았다.

<여씨춘추>. 그는 책의 제1부 11기 중동기(仲冬紀第十一) 편을 펼쳤다.

“……제나라에 당도한 문지는 왕의 병세를 살펴보고 태자에게 말했어. ‘대왕의 병은 고칠 수 있사오나, 병이 나으면 필경 저를 죽이실 겁니다.’”

진소의 말에 진단랑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왜요?”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향해 쉿 하는 손짓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께서 이야기하시잖아. 끼어들지 마.”

진단랑이 혀를 날름거리고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진소를 바라봤다.

“문지의 말은 왕의 병을 고치려면 왕을 격노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럼 자기가 죽는다는 뜻이었지. 태자는 무릎까지 꿇고 제발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다. 설령 문지의 말대로 왕이 그를 죽이려 한다면, 왕후와 자신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문지를 지켜주겠노라 약조했지. 대왕이 왕후와 태자를 아끼니 당연히 문지도 무사할 거라며 안심을 시켰어.”

“그래서 문지가 고쳐 준댔어요?”

진단랑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신의 목숨을 보장해주는 태자가 있으니, 문지가 왕의 병을 고쳐 주기로 했어.”

하지만 왕의 병을 고쳐 주기로 한 날, 문지는 세 번씩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제나라 왕은 이미 격노한 상태였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문지는 신도 벗지 않은 채로 왕의 침상에 올라가 왕의 옷을 거침없이 밟아댔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왕의 병세를 묻자, 왕은 대꾸도 하기 싫어 입을 꾹 닫았다. 문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불경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왕을 더욱 진노케 했다. 결국 왕은 소리소리 지르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고,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진 노태야가 손에 든 책을 천천히 따라 읽자, 진단랑이 흥분해서 외쳤다.

“사람을 모욕해서 화나게 하는 것도 치료법으로 쓰일 수 있네요.”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고, 심지어는 괴상할 때도 있죠. 생각해 보면 정 낭자도 이 방법을 썼을 수 있겠네요.”

진십팔랑이 잠시 고민하고 진소에게 말하자, 진소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후로는요?”

진단랑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후 크게 분노한 제나라 왕은 문지를 솥에 넣어 쪄 버리겠다고 했지. 태자와 왕후가 그 결정을 반대하고 나서며 격렬하게 언쟁을 벌였지만, 끝끝내 왕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어. 결국 문지는 커다란 솥으로 들어가게 됐다.”

진단랑이 깜짝 놀랐다.

“왜, 왜요?”

“왕을 모욕하고 분노케 했으니까.”

진십팔랑이 대신 대답했다.

“그래도 병을 치료해서 목숨을 구해 준걸요.”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고 했다. 그러니 너희도 명심하거라. 충언을 들었을 때는 화를 내지 말고 마음을 침착하게 가다듬어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해.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충언을 듣기 싫어하면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 수 있으니까.”

딸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문지가 너무 억울하게 죽었어요. 왕의 병을 고쳐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요!”

진단랑이 여전히 울상인 얼굴로 말했다. 진소가 딸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다들 잠자코 있었지만 진단랑의 말에 동의하는 티가 났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 목행(穆行)이라는 말의 뜻을 아느냐?”

진단랑이 고개를 저었다.

“목행의 의미는 남이 자신을 알아준다고 해서 칭찬을 바라지 않고, 남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오해를 받는 게 무섭다고 해서 할 일을 일부러 안 할 수는 없단다. 문지의 고사 앞에 신공 자배가 초나라 장왕을 대신해 괴수를 가로채 죽인 이야기도 나오니, 읽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에게 가르침에 대한 예를 표했다.

“내일 선생에게 <여씨춘추>의 중동기(仲冬紀) 편을 가르치라고 일러라.”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소의 딸들이 물러가고 나자, 방 안에는 진소와 진 노태야만 남았다.

“내가 살아서 문지의 치료법을 다 보는구나. 옛사람들의 헛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이런 치료법이 있을 줄이야.”

진 노태야가 미소를 지었다. 이루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과 감탄이 섞인 말투였다.

진 공자의 분통을 터트려 죽인 건, 과연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죽을 사람이 아니면 치료하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혹은, 둘 다려나?

이유가 어찌 됐든 더 이상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진 공자가 걸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이젠 그 어떤 질문도 의미가 없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두고두고 신경 쓰이던 근심 덩어리가 덜어지는 느낌에 진 노태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토했다.

정말 트집잡힐 만할 것이 없도록 원칙을 지켜 깔끔하게 행동하는 낭자로군.

“남이 자신을 알아준다고 해서 칭찬을 바라지 않고, 남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서운해하지 않으리니, 역시 정 낭자는 현자의 도를 깨쳤구나.”

진 노태야는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매번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하니,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도 안 잡히군!

진 노태야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보였다.

“그 강주 바보가!”

“아버지, 아직도 정 낭자를 강주 바보라고 부르십니까?”

진소가 웃으면서 말하자 진 노태야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당사자는 신경도 안 쓰는데. 뭐라고 부르는지는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지. 주씨네 사람들만 봐도 그래. 처음에 그 낭자를 강주 바보라고 부를 때의 심정과 지금 강주 바보라고 부르는 심정은 확연히 달라지지 않았느냐?”

짙은 밤, 진십삼의 방 안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침상 옆에 앉은 늙은 의원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무탈하십니다. 아직 기혈이 완벽하게 통하지 않을 뿐입니다. 천천히 지켜보십시오. 요양만 잘하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회복될 겁니다.”

의원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듣는 말이지만, 진 시강 부부는 여전히 감격을 주체하지 못했다.

“십삼, 십삼. 너도 들었느냐?”

진 부인이 눈물을 보였다. 이미 깨어 있던 진십삼이 침상에서 미소 지었다.

“어머니, 들었고말고요. 벌써 귀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들었습니다.”

진 부인은 실소를 터트리고며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 소자는 정말 괜찮으니 어서 가서 눈 좀 붙이세요.”

진십삼의 말에 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웃었다.

“알겠다. 지금 쉬러 가마. 지금 갈게.”

진 부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일으켰다. 여종들이 그 뒤를 따라 방을 나갔다.

“가서 좀 자야지. 좀 자야겠어. 제대로 된 잠을 못 잔 지 한참 되긴 했구나.”

진 부인은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리며 걸어 나갔다. 비틀거리며 나가는 진 부인의 뒷모습에 진 공자는 코끝이 찡해졌다.

“너도 푹 쉬거라. 이렇게 많은 의원이 다 네가 무탈하다고 하고, 정 낭자의 시녀도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이젠 네가 잘 회복하는 일만 남았다.”

진 시강이 말했다. 등불이 하나씩 꺼지고 사람들이 다 나가자 방 안은 이내 조용해졌다.

진십삼은 침상 위에 누워서 아직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진십삼은 몸을 웅크린 채 종아리를 천천히 만져보았다.

진짜…… 나았어. 진짜 꿈은 아닌 거지?

“됐다, 됐어. 그만 걷고 조금 쉬거라.”

진 부인이 사환을 양쪽에 끼고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는 진 공자를 보며 말했다.

진 공자는 꿈에서 걸었던 것만큼 순조롭게 걷지 못했다. 부축이 있어야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다리를 내디딜 때 들어가는 힘과 다리의 촉감은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진 부인은 다시 한번 정 낭자를 만나러 갔지만, 아직 쉬는 중이라 손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약을 꾸준히 잘 챙겨 먹으라는 당부만 받았다.

“욕심내면 안 된다고 했다. 천천히 해, 천천히. 이제 급하지 않아.”

여종들이 해맑게 웃는 진 공자의 땀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며 진 부인이 말했다.

가망도 없이 기다려 온 것을 이루지 않았나. 오랜 희망이 현실이 되었는데, 이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리지.

약병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 침상에 누운 진 공자에게 먹인 뒤에야 방 안은 조용해졌다. 진 공자는 조용히 요양하고 싶었기에 방에 사람이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조용히 쉬고 싶다는 진 공자를 막아선 사람이 없었다. 이젠 늘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직은 비틀거리긴 하지만,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니 혼자서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덕이었다.

진 공자는 머리 뒤로 손을 받쳤다. 아직도 웅웅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고,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언제부터였던 거지?”

진 공자는 천장을 빤히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기절한 뒤 빠르게 깨어난 진 공자는 그만큼 빠르게 현실을 인지했다.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그러게 내가 못 믿는다고 했잖아. 당신이 사람을 속일 리가 없지.

진십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침상에서 다리를 꼰 채 천천히 다리를 흔들어 봤다.

이젠 나도 이 동작을 할 수 있구나. 이 동작뿐만 아니라 다른 동작도 할 수 있다. 남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도 이젠 할 수 있게 됐어.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이야.

진 공자가 쓰러진 날, 진 시강은 태평거에 모인 사람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진소의 설득을 들었을 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책에서 그런 치료법을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여씨춘추>에서 문지가 제나라 왕을 모욕하고 격노케 하여 치료한 방법. 맞아, 틀림없어. 확실히 그런 방법이 있긴 해.

진 공자는 일찍부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정 낭자는 악독한 말을 하는 편이 아니었고,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된 거지?

첫 마디인 너 같은 절름발이부터가 악독한 말의 시작이었나?

그리고 그녀가 준 차를 천천히 마셨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고, 그래서 그녀의 계획대로 독에 중독되어 일부러 자극하려고 내뱉은 말들을 그대로 믿은 게로군.

“생각해 보니 내가 유 교리와 다를 바 없네. 나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남을 비웃은 꼴이 됐군.”

차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는 병을 얻었고, 다른 하나는 병을 고쳤을 뿐.

진 공자는 혼자 피식 웃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벌떡 일어난 진 공자는 무의식적으로 지팡이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이젠 더 이상 지팡이가 필요하지 않다.

진 공자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았다. 아직 힘이 달려서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진 공자는 힘을 주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엉성하게 내디딘 걸음이지만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걸은 걸음이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선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주육낭은 이미 예상했던 바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눈치였다.

“왜 이제야 날 보러 온 거야?”

진십삼이 웃으며 주육낭을 나무랐다. 주육낭은 말없이 진십삼을 빤히 바라보았다. 입꼬리를 올린 진십삼은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어때? 더욱 사내답고 멋있어지지 않았나? 자네보다 더 멋있어졌으니 자네가 부끄럽겠어.”

무뚝뚝한 표정으로 있던 주육낭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곧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 사람은 좀 어때?”

진 공자가 물었다.

“몰라.”

아무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려 할 일도 없겠지만, 주육낭도 차마 그녀를 만나러 갈 낯짝이 없었다.

주육낭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집에 있는 부모님은 연신 교교, 교교를 외치며 환호했다. 주육낭이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리라.

주씨 가문도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진씨 가문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문득 그런 광경이 꼴 보기 싫어진 주육낭은 줄곧 혼자 있다가 오늘에서야 바깥으로 나왔다.

주육낭은 표정이 구겨진 채 자리에 앉았다. 진 공자가 웃으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또 이러네. 전에는 정 낭자가 자네 때문에 내 다리를 고쳐주지 않는다고 했지. 내가 속상해야 할 일이었는데, 난 오히려 자네를 위로하느라 바빴어. 이번엔 내가 다리를 고쳐서 한창 기분 좋을 때인데, 또 자네를 위로하게 생겼군. 주육낭, 내가 전생에 자네한테 빚을 많이 졌나 봐.”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말하는 게 자네 다리를 고치기 위함이라고, 나한테 귀띔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

주육낭은 진 공자의 말을 무시하고 웅얼거렸다.

“자네의 그 강직한 성미로 어떻게 연기를 했겠나? 자네에게 미리 말했더라면, 자네의 행동을 보고 내가 눈치 못 챌 것 같아? 자네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께 알렸다 하더라도,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인 이상, 정 낭자가 언질을 줬다면 분명 티가 났을 걸세. 이렇게 똑똑한 날 어떻게 속였겠어.”

진 공자가 웃으면서 대꾸하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그렇게 똑똑한 자네는 어쩌다 분통이 터져 죽을 뻔했나?”

진 공자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천천히 걸어 다녔다.

“이번에도 자네에게 참 고마워. 자네가 일희일비하며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렇게 빨리 중독돼서 분통을 터트리지 못했을 거야.”

“거 왔다 갔다 하는 것 좀 그만하면 안 되나?”

주육낭이 눈앞에서 걸어 다니는 진 공자를 보며 말했다.

“안 되지. 요 며칠 난 아무것도 안 하고 걷기만 하고 있어. 십수 년 동안 못 걸은 거 한 번에 다 걸어버리려고.”

주육낭은 잠시 침묵했다.

“정교랑이 똑바로 얘기 안 해 줘서 그런 거지, 내 잘못이 아니야.”

주육낭이 혼잣말을 하는 건지, 진 공자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맞아, 자네는 잘못이 없어. 자네가 잘못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

진 공자는 웃으며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일부러 버선이나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걸어 다녔다.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만끽하던 진 공자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기뻐하며 소리쳤다.

“이거 봐, 내 다리에 바늘구멍이 엄청 많아. 하, 정말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원.”

진 공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육낭이 벌떡 일어섰다.

“둘 다 잘났다, 둘 다 훌륭해. 너희는 똑똑하고 뭐든 잘 아는데 나만 바보네! 웃음거리가 되는 바보! 나 같은 바보의 말 따윈 들을 필요도 없겠지! 나 같은 바보는 너희와 대화할 자격도 없다고!”

갑작스러운 주육낭의 고함에 진 공자는 놀란 표정으로 멈춰 섰다.

“사실 정교랑이 잘못 말한 게 있어. 자네 다리를 치료하지 않을 때는 우리 사이에 틈이 없지만, 자네의 다리를 고치면 틈이…….”

주육낭은 뒷말을 삼킨 후 몸을 휙 돌려 방을 나갔다.

저 멍청이가! 또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드네.

진 공자는 주육낭을 두어 번 불렀지만, 주육낭은 벌써 저만치 가고 없었다. 주육낭을 뒤따라가려고 문가로 갔던 진 공자는 결국 문밖까지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문을 잡고 멈춰 섰다.

다리가 이제야 막 회복되고 있는지라, 더는 무리할 수 없었다. 진 공자는 멍하니 마당을 쳐다봤다.

맞아. 이제야 조금 나아졌는데…….

그럼 정 낭자를 만나러 가야겠군. 또 어떤 당부의 말이 있을지 확인해야지. 아, 당부의 말을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감사의 말을 전하러 가야지.

진 공자는 몸이 많이 나아졌으니 직접 가서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봐라, 마차를 준비해라.”

“아니, 말을 준비해.”

“아니지, 말도 필요 없다. 내 발로 걸어서 가겠다.”

주변의 만류로 진 공자는 결국 옥대교 저택까지 걸어서 가지 못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여종의 귀띔 덕에 진 공자는 모친이 벌써 정교랑을 만나러 간 사실을 알게 됐다. 오늘은 정교랑이 손님을 맞이할 수 있다고 진소 부인이 알린 덕이었다.

진 상공 댁에 도착한 진(秦) 부인이 진소 부인을 마주했다. 두 사람 모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됐어, 됐어. 좋은 일인데 울지 마. 부처님과 보살님이 살펴 주신 덕에 드디어 마음속 응어리를 풀었네.”

진 부인은 더욱 소리로 통곡했다.

“십사 년이에요, 언니. 무려 십사 년이요.”

그 모습에 본 진소 부인도 더는 못 참겠는지 진 부인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안에 있던 여종들도 눈앞의 광경에 눈물을 훔치다가, 각자 윗전을 위로하며 간신히 울음을 그치게 했다. 몸종이 세숫대야와 수건, 그리고 단장할 거리를 챙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진 부인은 분을 바르다 말고 갑자기 진소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결국 언니는 내 편이 아니었네요.”

진소 부인이 멈칫하더니 귀밑머리를 넘기며 미소 지었다.

“너희가 잘못될 리가 없으니까 그랬지.”

“만에 하나 정말 잘못됐으면요?”

진 부인이 꽃 위에 앉은 잠자리 모양의 비녀를 머리에 꽂았다.

“정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 낭자만큼 마음이 넓고 은혜에 보답하려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진 부인은 진소 부인을 잠깐 보더니 옥으로 만든 연지함에 손가락 하나를 넣어 콕 찍은 다음 입술에 발랐다.

“아무튼 알겠어요. 난 언니의 마음에서 그 낭자만 못하다는 걸요.”

“네가 몇 살인데, 아직도 애들처럼 질투하는 거야?”

진소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의 환심을 앗아간 사람을 오늘 드디어 볼 수 있겠네요. 얼마나 말을 잘하길래 고작 몇 마디로 내 아들의 분통을 터트렸는지도 봐야겠어요.”

진 부인이 따라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진소 부인도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잘못 짚었어. 정 낭자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말하는 거야.”

진 부인이 진소 부인을 쳐다보며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차가 옥대교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진소 부인이 왔다는 말에 시녀가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다.

“부인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듣고 아씨께서 저희한테 마중 나가라고 분부하셨어요. 아씨께서는 아직 주무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녀가 대청에 마련해 둔 자리로 안내했다.

“힘들어 죽을 뻔했지?”

진소 부인이 따뜻한 말투로 물었다.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쳐줄 때도 그랬으니, 진소 부인은 이 상황이 익숙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진 부인에게 돌렸다.

“부인께서는 치료비를 주러 오신 거죠?”

진 부인이 시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고는 여종을 향해 손짓하자 여종이 얼른 상자 하나를 시녀 앞으로 건넸다.

“낭자의 원칙은 나도 들은 게 있지. 이 2만 관은 목숨값이야.”

진 부인의 말에 시녀가 상자를 건네받아 열어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나머지 2만 관은 다리를 고쳐 준 값이란다.”

진 부인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시녀는 진 부인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고 상자를 잘 보관해두었다.

반근이 차를 올리러 왔을 때 즈음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씨께서 깨셨나 봐요.”

시녀가 말하며 얼른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 부인이 고개를 들어 시녀가 간 방향을 쳐다보니, 휘장 뒤로 여인의 형체만 어렴풋이 보일 뿐 걸어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부인. 용모를 단정히 하고 뵙겠습니다.”

목이 잠긴 여인의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진소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진소 부인이 진 부인에게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라고 했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던 진 부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흠칫했다.

“맛있네. 조금 연한 것만 빼면.”

진소 부인도 저택에 방문하여 차를 마신 적이 많지 않아 그 말에 차를 한 모금 들었다.

“차를 바꿨니?”

진소 부인이 옆에 있던 반근에게 물었다.

“네. 집에 차나무를 한 그루 심어 두어서 아씨께서 며칠 전에 직접 덖으셨어요.”

“낭자가 다재다능하네요.”

진 부인이 말했다.

그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휘장 쪽으로 시선을 옮긴 진 부인은 창백하고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에 순간 멈칫했다.

“교랑.”

진소 부인이 정교랑을 향해 손짓하고는 진 부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진씨 부인, 십삼낭의 모친이에요.”

진 부인이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자 정교랑도 시선을 진 부인에게로 옮겼다.

자세히 보니 날렵한 콧대와 오목조목 수려하게 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뚝뚝한 표정 때문인지 어딘가 어두운 느낌이 들어 가까이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진 부인이 치료비를 가지고 오셨어요.”

시녀가 조용히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잠시 넋이 나갔던 진 부인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렸다.

“목숨을 구해 준 낭자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은 황송하거나 불편한 기색 없이 담담하게 절을 받고,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 앉으며 답례를 표했다.

“워낙 놀랐다 보니 혈육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만 추태를 보이고 말았네요. 무례를 범한 게 있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괜찮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짤막한 정교랑의 대답에 진 부인은 당황했다. 정교랑에게 말을 더 이어 나갈 뜻이 없어 보이자 진 부인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의 신묘한 의술이 우리 십삼을 고쳤네요. 그동안 아무리 훌륭한 명의를 수소문해 봐도 소용이 없어서 가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진 부인이 눈물을 떨구며 말을 이어갔다.

“낭자, 정말 이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치료비면 충분해요.”

정교랑이 또 짧게 대답했다.

무슨 대화가 이래? 진 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앞에 무표정한 채로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언변이 뛰어난 진 부인이었지만, 열 글자도 안 되는 짤막한 대답만 하는 정교랑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여 뭐라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진 부인은 감격스러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지 며칠 동안 밤낮없이 고민했다. 그런데 막상 여인을 만나 보니 준비했던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도 없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진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여인의 모습에 도리어 진 부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미치겠네. 내가 어떤 가문의 여식이고, 어떤 집안의 며느리냐고. 항상 남들이 내 앞에서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만 봤거늘, 어쩌다 딸 또래의 어린애 앞에서 이리 긴장을 하는 거야.

아니면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런가.

진 부인은 진십삼의 다리를 고치는 사람이 있다면, 한평생을 부처처럼 모시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신과 부처 앞에서 공손하고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창피한 일이 아니야.

“우리가 어제 범한 무례한 행동 때문에 아직 화가 안 풀린 거죠?”

진 부인이 아예 까놓고 물었다.

“아니에요. 인지상정이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지나친 걱정이라고 말했잖아.”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진 부인을 나무랐다. 그리고는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오늘 감사의 말을 전하러 온 것도 있고, 진십삼이 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

“그 약만 다 먹으면 돼요.”

“그게 다예요? 진십삼은 십수 년간 다리를 못 썼는데…….”

진 부인이 놀란 듯 되물었다.

“병은 별거 없어요. 다만 마음의 병이 깊었을 뿐이죠. 이제 기가 통하게 됐으니 요양만 제대로 하면 괜찮을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마음의 병?

“우리 십삼은 그릇이 넓어 매사에 의연한데, 무슨 마음의 병이 있죠?”

진 부인이 서둘러 묻자 정교랑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의연하게 받아들이겠어요?”

진 부인은 흠칫했다.

그래. 이런 일을 어떻게 의연하게 받아들여…….

그랬구나. ‘통즉통(痛則通)’이라 했으니 아프면 뚫리는 게지.

다들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면서 대청은 조용해졌다.

이젠 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도 없고, 보아하니 이 낭자도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없어 보이네.

“그럼 푹 쉬어요. 우리는 이만 가 볼게요.”

진소 부인이 깔끔하게 일어나며 작별을 고했다. 붙잡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교랑의 모습에 진 부인도 하는 수 없이 예를 표하고 따라 나갔다.

마차에 탄 진 부인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팍을 몇 번 쳤다.

“낭자가 참…… 재미있네요.”

그런 진 부인의 모습을 보며 진소 부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할 말 있으면 숨기지 말고 얘기해. 내가 정 낭자를 아끼긴 하지만 네가 흉보는 것을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야.”

진 부인이 실소를 터트리고 마차의 휘장을 올려 저택의 대문을 내다봤다.

“저리 이상한 낭자를, 십삼은 도대체 왜 좋아하지?”

“십삼도 별나긴 하지.”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밖을 내다보던 진 부인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럼 별난 사람들끼리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 마. 예전에 내가 이야기했었잖아. 십삼의 다리를 원한다면, 다른 건 생각하지도 말라고. 정 낭자가 병을 고치는 데에는 원칙이 있어.”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알고 있죠. 찾아가서 치료하는 법이 없고, 불치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거요.”

“또 있어.”

진소 부인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치료한 가문의 사람과는 혼인하지 않는다.”

진 부인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진소 부인을 쳐다봤다.

“치료한 가문과 연을 맺지 않는다고요? 언니가 한 말이에요?”

“낭자의 말이야.”

진 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말없이 진소 부인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라니까. 난 이미 거절당해서 잘 알아.”

진소 부인이 진 부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 부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그렇담 어리석은 우리 아들이 정말 아쉬워하겠네요.”

진소 부인도 진 부인을 따라 저택을 내다보는데, 대문 앞에 서 있는 진십삼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고 선 소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넘쳤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기대와 감동과 흥분과 환희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봐요, 보라고요.”

대문 안으로 들어온 진 공자는 마당에 우뚝 서서, 자신을 부축하던 사환을 밀어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회랑 아래 서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봐요.”

진 공자는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낭자는 어차피 결과를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 주고 싶어서 왔어요. 직접 봐요. 이게 낭자가 해낸 겁니다.”

정교랑은 음,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낭의 일은 너무 나무라지 말아 줘요.”

진 공자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진 공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 아니지, 아니지.”

진 공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다리가 다 나았더니 머리가 고장 났나 보네요.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낭자가 어찌 육낭을 탓하겠습니까. 다 괜한 걱정이죠.”

눈앞의 여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진 공자는 뭐라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주기 위해서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하지만 낭자의 말이 다 맞았어요. 난 연기를 아주 잘했을 뿐, 그 누구보다도 다리를 신경 쓰고 있었죠. 남들이 내 다리를 어떻게 보는지 죽도록 신경 쓰였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유유자적하게 보이도록 애를 썼습니다.”

진 공자가 다시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며 웃었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였죠.”

“인지상정이에요. 괜찮아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 공자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사실 정신을 차렸을 때 깨달았어요. 다 알게 되었다고요.”

진 공자는 다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다리도 나았는데, 낭자가 시킬 일은 더 없습니까? 아, 차를 좋아하면, 내가 보수사 외에 좋은 차나무를 키우는 다른 사찰도 몇 개 아는데…….”

“경성 일대의 차는 다 비슷하니, 하나면 충분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지만 진 공자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똑같은 경성이지만, 성 남쪽과 성 북쪽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럼 이건 어때요? 내가 낭자와 함께 가서 차나무를 보는 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십삼은 아, 하는 말을 내뱉은 후 잠시 뒤에 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건요? 뭐, 먹는 거라든지, 천천히 걸어야 한다든지.”

“없어요. 정상인처럼 행동하면 돼요.”

진십삼은 다시 한번 아, 하고는 손을 뻗어 허벅지를 쳐보았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네요.”

정교랑은 그저 예, 하고 대답하고는 달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른 일 없으면, 난 이만 가볼게요.”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삼이 예를 표하고 잠시 머뭇거리자 사환이 얼른 와서 부축하며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던 진십삼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회랑 아래서 가만히 서 있었다.

“정 낭자, 전에 나한테 했던 행동과 말들, 그 많던 말들은 모두 내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서였던 겁니까?”

진십삼의 물음에 정교랑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게 아니면요?”

그게 아니면요?

정교랑은 본디 말이 없고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사람이다. 정교랑의 습관이 바뀐 게 아니라, 요 며칠 진십삼이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교랑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변한 사람은 정교랑이 아니라 진십삼이었다.

“그래서 낭자는 일부러 내 본심을 일깨워 준 건가요?”

진십삼의 질문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신조차도 정상인과 다를 바 없다고, 절름발이가 아니라고, 병이 없다고 믿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병을 치료해 주겠어요?”

그 말에 진 공자는 웃으며 다시 정교랑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마음을 써 줘서 고맙습니다, 낭자.”

정교랑은 다시 가볍게 예를 표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진 공자도 가볍게 목례하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가 나가자마자 대문이 굳게 닫혔다.

진십삼랑은 대문 앞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저 봐, 두세 마디 나누고 벌써 쫓겨났네. 허구한 날 네 아들을 붙잡아 두고 부려 먹는다더니, 그래 보이진 않는데?”

진소 부인이 휘장을 손에 쥐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이고, 그러게요. 저것 좀 보세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요.”

진 부인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맞장구쳤다. 진소 부인이 못 말린다는 듯 손으로 진 부인을 살짝 밀쳤다.

“울기는. 세상에 이런 어미가 어디 있어? 아들이 슬퍼하는 걸 보면서 이리 기뻐하다니.”

진소 부인은 핀잔을 주고 나서 다시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속상한 건 우리 집 십육도 마찬가지야. 글쎄, 낚싯대까지 연못에 빠트려 버렸다니까.”

진 부인은 진소 부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진소 부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가요, 가. 어서 가서 십삼이랑 인사나 나눠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서린 진 부인의 얼굴을 보며 진소 부인은 다급하게 진 부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됐어, 그만해. 꼭 아들이 딱한 처지일 때만 골라서 놀리지.”

진소 부인이 마부에게 서둘러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걱정 마요. 우리 십삼은 내가 잘 아는데, 그렇게 속 좁은 애가 아니에요.”

진 부인의 말에 진소 부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속 좁은 애가 아닌데, 말 몇 마디에 분통이 터져서 죽을 뻔할 수가 있으려나?”

“그거야 정 낭자의 약을 먹어서 그렇죠.”

진 부인은 본인이 생각해도 웃긴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 부인은 부채를 들어 입을 가리고 말을 이었다.

“근데, 저 여인한테는 누구 하나 분통 터트려 죽이는 일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겠죠?”

마차가 움직이자 휘장이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 일렁이는 휘장 사이로 진십삼이 마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십삼은 똑똑한 아이예요. 남녀 간의 연정 따위로 고민할 리 없죠. 누가 저런 꼴을 보고 비웃는대도 난 걱정 안 해요.”

더군다나 지금의 십삼은 예전과 비하면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앞으로 더욱 아름답고 다채로운 생활이 펼쳐질 것이다.

절름발이일 때도 유유자적하며 잘 지냈는데, 이제 걱정할 게 뭐 있어?

* * *

칠월 초, 늦여름의 밤공기는 아직 후덥지근했다. 불이 켜진 덕승루는 무릉도원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시끌벅적한 잡담 소리와 휘황찬란한 불빛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바깥쪽으로 트인 회랑 다리에는 각양각색의 미녀들이 미모를 뽐내며 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기분 좋게 웃고 떠드는 사내들이 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주 낭자가 왔어!”

대청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왕십칠이 그 말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인파 속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뒤처진 정사낭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왕십칠을 따라가려 했지만, 인파가 워낙 붐비다 보니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치였다.

회랑 다리 위에는 여종 둘이 소녀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아래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아래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아름다운 여인이 금세 회랑 다리를 지나 자취를 감추자, 아래에 있던 사내들은 못내 아쉬운 듯 한참이나 위를 올려다보다 겨우 흩어졌다.

왕십칠은 자신의 신발 한 짝을 찾느라 아직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사낭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무렇게나 짓밟힌 왕십칠의 신발을 집어 던졌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숙부님과 숙모님은 너 이러는 줄 알고 보내신 거야?”

왕십칠이 자리에 앉아서 신발을 신었다.

“그러게 먼저 가라니까 왜 안 가고 여기서 오지랖이야. 우리 부모님은 내가 뭘 하든 다 괜찮으시다는데, 왜 네가 나서서 이래? 고모님과 고모부님께 일러바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시겠다? 정사낭은 왕십칠 옆에 앉아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챙기겠어? 누, 누이를 데리러 온 거 아니야?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좀 봐!”

“안 잊었거든!”

왕십칠이 주전자를 들어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주 낭자의 얼굴만 보면 바로 갈 거야.”

정사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네가 이런 식인데, 앞으로 누이한테 잘해 줄 수 있겠어?”

“당연하지.”

왕십칠이 눈을 흘기며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잔소리 좀 그만하고, 얼른 돈이나 좀 꿔 줘.”

“돈을 벌써 다 썼다고?”

정사낭이 놀라서 소리쳤다. 큰 소리에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쳐다봤다.

“이봐.”

취기가 잔뜩 올라 헤실거리는 사내가 흐느적거리며 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여긴 돈 쓰러 오는 기생집이야. 여기서 돈은 더 이상 돈이 아니지. 돈을 다 쓴 게 신기한 게 아니라, 못다 쓴 게 신기한 곳이라고.”

사내의 옆에는 분칠을 진하게 한 남창(男娼)이 붙어있었다. 남창은 교태를 부리며 사내에게 과일을 한입 먹여 주고는 정사낭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정사낭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재빨리 왕십칠 쪽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미쳤어? 어디에 다 썼는데?”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추고 왕십칠을 꾸짖었다.

“별거 없어. 주 낭자한테 선물하려고 진귀해 보이는 것들 좀 샀는데, 경성 물가가 좀 비싸야 말이지.”

왕십칠이 다시 정사낭을 재촉했다.

“빨리 돈 좀 꿔 줘. 집에서 돈 부쳐 주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야.”

“그딴 식으로 쓰라고 줄 돈은 나한테 없어.”

정사낭의 말은 왕십칠은 자신의 턱을 쓸며 말했다.

“하긴. 주 낭자는 경성 사람이니 온갖 진귀한 것들도 벌써 다 봤겠지. 관리 집안의 출신이기도 하고, 악기면 악기, 바둑이면 바둑, 서화면 서화,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뛰어나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왕십칠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정사낭의 어깨를 툭 쳤다.

“네가 시를 그렇게 잘 짓잖아. 어서 시 하나만 지어 주라. 네 시가 주 낭자의 마음에 들면, 내가 덕분에 주 낭자 얼굴 한번 볼 수 있잖아.”

“시는 정을 표현하는 건데, 어떻게 이런 용도로 써?”

정사낭이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시를 쓰는 건 관두고, 이런 기루에 드나들었다는 사실만 집안에 알려져도 다리 몽둥이가 분질러질 것이다. 물론 이번은 왕십칠을 감시하러 온 것이니 예외로 쳐야겠지만.

“쓸데없는 소리. 주 낭자를 향한 동경의 마음도 정이야. 얼른, 얼른.”

정사낭은 고민에 빠졌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정말 얼굴만 보고 바로 갈 거지?”

“그럼 아예 여기 살게? 주 낭자가 무슨 창기(娼妓)냐?”

관기는 잠자리 시중을 들지 않는 규칙이 있기 했지만 그저 세간에 떠도는 말일 뿐이다. 밤을 보낸다 하더라도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관기가 같이 밤을 보낼 정도의 자격이 되는 사람인지가 관건이었다.

그 정도는 왕십칠도 잘 알았다. 정사낭이 아, 하고는 재차 강조했다.

“그럼, 내 누이한테도 꼭 잘해 줘야 해.”

왕십칠이 웃음을 터트렸다.

“미처 몰랐네. 바보 누이를 이렇게나 아끼고 있었다니.”

“가엾이 여기는 것일 뿐이야. 누이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평안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지.”

왕십칠이 그 말에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걱정 마. 내가 잘해 줄 테니까. 네가 주 낭자를 만나게 해 준다면 말이야.”

시끌벅적하던 덕승루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덕승루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규방에서는 주 낭자가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주 낭자는 원래 화장을 짙게 하는 편이 아니었다. 진주 비녀를 풀고 볼의 연지를 가볍게 닦아 내자, 물기를 머금은 연꽃처럼 청초한 소녀의 미모가 거울 속에 나타났다.

문이 열리더니 몸종이 크고 작은 상자들과 두루마리를 가득 안고 들어왔다.

“아씨께 드리는 선물이 또 이렇게나 많이 들어왔어?”

춘령이 서둘러 몸종을 도와 들어주면서 말했다.

“그러게, 이 사람들 정말 귀찮아 죽겠어.”

몸종이 어깨를 주무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주 낭자의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침상 하나, 탁자 하나, 화장대 하나만 해도 방 안이 꽉 찰 정도였다.

몸종 둘은 크고 작은 상자들을 창가 쪽에 가득 쌓여 있던 선물더미 사이로 밀어 넣었다. 금은보화나 명인의 그림이든, 비싼 악기나 바둑이든 구분할 것 없이 아무렇게나 쌓아둔 모습을 보면 선물의 주인은 이런 선물들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몸종 둘이 선물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잡담을 나누었다.

“춘령, 이 사람이 보낸 옥패가 너무 예뻐.”

“당연히 그래야지. 주 언니한텐 세상 최고의 옥패가 어울리잖아.”

“춘령 언니는 항상 말을 예쁘게 해서 아씨의 환심을 사.”

“아씨의 환심을 굳이 살 필요 있어? 아씨는 모든 사람의 환심을 얻으셔도 부족하지.”

몸종들의 잡담을 들으며 주 낭자도 설핏 웃음을 지었다.

“춘령, 내일 다회(茶會)에 가져갈 것들은 다 챙겼어?”

주 낭자의 물음에 춘령이 몸을 돌려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챙겨 두었어요.”

춘령은 덕승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주 낭자가 다니는 다회와 연회를 따라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교방사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똑똑하고 영민하여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주 낭자를 살뜰히 챙긴 덕분에 주 낭자의 시중을 들어주는 몸종 중 가장 늦게 들어왔으면서도 가장 아끼는 시종이 되었다.

주 낭자가 거울을 보며 눈썹을 지웠다.

“춘령, 이것 좀 봐. 누가 달랑 종이 한 장만 보냈어.”

몸종이 속삭이며 웃자 춘령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돈 쓰는 데 인색한 서생이 쓴 거겠지.”

춘령은 글씨를 모르다 보니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지만 몸종은 교방사 교육을 받은지라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몸종은 종이를 펼치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글솜씨가 제법이네. 음? 춘령, 네 고향 사람인가 봐.”

사자 머리가 조각된 짐승상을 들여다보고 있던 춘령이 몸종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고향 사람?

“……강주, 정…….”

몸종이 천천히 읊고 있는데 방 안에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춘령이 손에 들고 있던 짐승상을 바닥에 떨군 것이다. 몸종은 화들짝 놀랐고 주 낭자도 춘령을 쳐다봤다.

눈빛을 반짝이던 춘령은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강주야? 강주 맞아? 나 글씨 모른다고 속이지 말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어찌 잊을까. 주 낭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니까. 내가 널 속여서 뭐해.”

몸종이 종이를 건네며 글씨가 쓰인 곳을 가리켰다.

“여기에 강주, 정문유(程文兪)라고 쓰여 있어.”

춘령은 눈을 크게 뜨고 몸종이 가리키는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몸종이 가리킨 글씨를 천천히 만졌다.

강주, 정…….

강주, 정…….

정!

“정 낭자! 이렇게 일찍 외출하려고요?”

진십삼이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시녀도 진 공자를 보며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께서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셨잖아요.”

진십삼이 시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너무 기뻐서 그런지 평소다울 수 없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시녀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마당 쪽으로 걸어 나오며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긴 어쩐 일로?”

“아, 어떻게 된 거냐면.”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내 다리로 즐겁게 자축하러 다녀도 되나, 아직은 조심조심 요양해야 하나 몰라서요. 어쩐지 불안해서 낭자한테 물어봐야 안심이 될 거 같아요.”

“평상심을 유지하면 돼요.”

정교랑의 말에 진 공자가 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오르는 정교랑을 보며 진 공자가 물었다.

“낭자는 어디 가는 길이에요?”

정교랑이 말없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공자님, 또 다른 용무가 있으세요?”

시녀가 물었다.

“아니, 이젠 없어.”

진 공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예를 표했다.

“낭자를 귀찮게 했네요.”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저택의 대문이 닫혔다.

진십삼도 잠시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유유히 떠났다.

진십삼이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선 사실을 알게 된 진 부인은 아들을 놀리려고 일부러 대문 앞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진십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얘가 어딜 간 거라니?”

진 부인의 질문에 여종들이 재빨리 수소문했다.

“주씨 저택에 갔다고 합니다.”

그 시각, 진십삼은 주씨 집안의 대문 앞에 막혀 못 들어가고 있었다.

“집에 없다고?”

진 공자에게 말을 전하러 온 주씨 집안의 사환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예. 육공자께선 출, 출타하셨습니다.”

진 공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사환을 지나 대문 안으로 발을 옮겼다.

“공자님.”

사환이 당황해하면서 외쳤다.

“너도 네 윗전한테 거짓말을 배웠느냐?”

진 공자는 사환을 무시한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문 앞에서부터 주육낭의 거처까지 가는 길은 진 공자에게 익숙하면서 낯설었다. 몇 년 동안 숱하게 지나다닌 길이기에 익숙했고, 그 길을 자신의 두 발로 걷는 건 처음이기에 낯설었다.

주육낭은 마당이 아니라 연무장에 있었다.

웃통을 벗은 주육낭의 상체는 땀으로 흥건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창술은 신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주육낭을 상대하고 있는 군졸 두 명은 주육낭의 창을 간신히 받아냈다.

주육낭이 군졸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졸들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서북에서 온 병사라 말하기도 민망하지 않나?”

주육낭이 창을 멈추지 않고 외쳤다.

“탈영병이겠지!”

주육낭의 비아냥에 군졸들은 당황하여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군졸들은 각자 좌우로 흩어지더니 손에 쥐고 있던 창의 방향을 휙 틀어 맹렬한 기세로 주육낭의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탕 소리와 함께 창 두 자루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군졸 둘은 얼얼한 손을 쥐며 힘에 부쳐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감정을 못 다스리니, 그냥 푹 쉬라고 경성으로 보냈겠지.”

주육낭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군졸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진십삼을 향해 걸어왔다.

“한 번 겨뤄 볼래?”

주육낭이 진십삼을 보며 묻자 진십삼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불공평하지. 내가 십 년이나 늦게 시작하는 셈인데, 자네를 어떻게 따라잡으라고.”

주육낭은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진십삼을 보며 웃었다.

“왜 웃는 건데?”

진십삼이 물었다.

“자네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역시…….”

주육낭은 말끝을 흐리고 시녀가 건넨 겉옷을 걸쳤다. 진십삼이 주육낭의 마지막 말을 이어받았다.

“역시,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거지? 전엔 정말 내 일이었으니 농담도 못 했지만 이젠 다리가 멀쩡해졌으니 능청 떠는 말도 서슴없이 하는 거잖아.”

주육낭이 미소지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나? 그리고 내가 말을 하든 안 하든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자네들이 나보다 훨씬 잘 아는데.”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지팡이가 없으니 자네를 때리는 게 힘들어졌네.”

그러고는 주육낭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이며 말을 덧붙였다.

“어때, 이 말은 좀 더 마음이 쓰리지?”

주육낭은 진십삼을 흘겨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십삼이 웃는 얼굴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사람이야. 사람에게는 오욕칠정이 있는 법이지. 차이가 있다면, 그 감정을 숨기고 절제할 수 있는지 여부야. 나는 숨기고 절제하는 편이고, 자네는 굳이 숨기지 않는 사람인 거지. 이건 그냥 차이일 뿐이지, 옳고 그름이나 뭐가 더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천성일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나 같은 경우엔 어쩔 수 없이 터득하게 된 거지.”

진십삼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사환의 부축 없이 걸으려 했지만 아직 안정감 있게 걸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그래야만 했던 건 아닐세. 그렇게 살면 꽤 좋거든. 적어도 주위 사람들을 걱정시키지 않고 기쁘게 해 줄 수는 있잖아. 그럼 내 존재가 덜 가여워지고, 나 스스로도 웃으면서 지낼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고 해도, 난 나를 포함한 내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며 살았을 거야. 그렇게 사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 지금도 나는 예전의 나를 기특하고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네.”

주육낭은 고개를 숙여 말없이 허리끈을 천천히 조였다. 진십삼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운명이란 게 어디 예측이 가능한 건가. 아니,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운이 따른다고 볼 수도 있겠지.”

진십삼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자네 같은 친구를 두고, 정 낭자라는 사람도 알게 되니 전혀 다른 삶을 얻게 됐어. 보통 사람과 같은 삶을 말이야.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기쁠 수밖에. 아니, 기쁘다 못해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야. 어쩌면 한평생 동안 못 해 봤을 말들을, 잘난 체하고 뻐기며 괜히 푸념하듯 하는 말들을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어. 육낭, 난 지난날의 내가 치욕스럽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난 정말 기쁘고 즐거워. 거칠고 저속하게 추태를 부리고 싶을 만큼 기쁘다고.”

주육낭은 잠자코 들으며 한쪽에 앉았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생각에 내가 변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가 변한 거야. 바로 자네의 심경이 변했다고.”

주육낭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진십삼은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뭐, 자네가 그러는 것도 정상이지. 꼭 예전의 나처럼 말이야. 내가 자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정상인 행세를 했지만, 그래 봤자 나는……. 이젠 난 정상인이 됐는데, 자네는…….”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자네는 날 정상인으로 본 적이 없으니, 지금의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그러고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어때? 항상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갑자기 내가 자네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

주육낭이 풉 웃음을 터트리고는 옆에 있던 창을 진십삼에게 던지며 외쳤다.

“잘난 척은.”

진십삼이 소매를 털며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나같이 풍류를 즐기는 사람 옆을 졸졸 따라다니게 되면, 자네가 그저 병풍이 될까 봐 그러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오늘부로 나와 연을 끊겠다고 해도, 다 이해하겠네.”

“네놈의 주둥이는 내 앞에서나 나불거리지. 분통 터져 죽을 때는 언제고!”

주육낭이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어허, 욕을 하더라도 약점은 들추지 말게나.”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이 바로 대꾸했다.

“그럼 욕할 때도 체면은 지켜 줘야지. 잘난 척은 거기까지 하고, 이제 걸을 수 있게 된 거 알겠으니까 앉아서 좀 쉬어. 괜히 누구처럼 과하게 기뻐하다가 한 방에 가지 말고.”

진십삼이 웃으면서 주육낭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자네 집에는 뭐 볼 것도 없는데, 나가서 좀 걸으세.”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진십삼을 흘겨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해.”

“자네 사촌 누이나 보러 갈까?”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감사의 말을 전할 생각이면 혼자 가.”

“그건 벌써 갔다 왔지. 자네 사과하는 거 같이 가 주겠다고.”

주육낭이 진공자를 노려봤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사과할 게 뭐 있어?”

진십삼이 그를 보며 웃음 지었다.

“역시 내 말이 맞았네. 자네가 변한 게 맞아.”

주육낭이 침을 뱉으며 몸을 일으키자 진십삼도 따라 일어났다.

“그래도 자네가 좋아지니, 나는 좋아.”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술이라도 마실 수 있으니까 말이야. 자네 지금 술 마실 수 있나? 못 마시면 차라도 마시러 가고.”

“술을 마실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마침 자네 누이한테 물어볼 겸…… 갈까?”

진십삼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누가 떠난다고?”

주육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역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군. 자네 다리가 좋아지더니 머리가 예전만 하지 못해졌어. 당연히 내가 떠나는 거지.”

진십삼은 그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고작 이 일 때문에? 주육, 자네 정말 변했어.”

“변하기는. 원래 떠나기로 돼 있었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아버지께서 음보로 관직 한자리를 마련해 주셨어. 친족이었던 이십칠 형님이 서북에서 병사하셨거든. 그 자리를 메꿔야 해서 내가 가는 거야.”

주씨 가문은 무장 가문이다. 가업이 여태 이어질 수 있는 건 주 노야가 경성에서 관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씨 가문 자제들이 서북에 있는 군영에서 전공을 세우고 있는 덕분이다.

주육낭이 떠나는 건 주씨 가문에서 내정되어 있던 일이기도 하고, 주육낭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가서 한번 물어볼게.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하면, 우리끼리 한 번쯤은 거하게 취해 봐야지. 뭐, 굳이 술이 아니어도 돼. 차를 마시고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어.”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시각 덕승루에서는 두 젊은이가 먼지 나게 구르며 기다시피 쫓겨났다.

“썩 꺼지거라.”

그들을 끌고 나온 네다섯 명의 건장한 사내가 젊은이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손가락질했다.

“돈도 없는 주제에 감히 덕승루 음식을 공으로 먹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금세 구경꾼들이 거리에 몰려들자 정사낭은 창피함을 숨기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공으로 먹었다고 그러시오? 잠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뿐이지.”

왕십칠은 분한 듯이 대꾸한 것도 모자라 한마디를 더 덧붙이려 했으나, 정사낭이 손을 뻗어 간신히 제지했다.

“창피하니까 그만해. 어서 가자!”

왕십칠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손을 뿌리쳤지만, 결국 정사낭의 손에 이끌려 덕승루 앞을 벗어났다.

“퉤, 남쪽에서 온 촌뜨기들까지 서생들처럼 공으로 먹으려 드네!”

덕승루 대문 뒤에 숨어 있던 몸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애티가 나는 몸종의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복잡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몸종은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두 젊은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품에 있던 보따리를 꼭 안아 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잽싸게 그들의 뒤를 밟았다.

“넌 어서 집에나 가. 창피한 짓거리 좀 그만하고.”

“창피한 게 누군데? 집에서 어떻게 자랐기에 고모님이 그런 푼돈을 쥐여 보낸 거야? 첩의 자식만도 못하네.”

“왕십칠, 지금 누굴 욕하는 거야?”

“공자님, 공자님.”

티격태격 말씨름을 하며 걷고 있던 두 젊은이의 뒤에서 익숙한 고향 말씨가 들려왔다. 정사낭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몸종이 두려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꼬마 낭자, 날 부른 것이냐?”

정사낭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공자께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강주 분이신지요?”

몸종은 흥분과 불안이 섞인 표정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물었다. 기대에 가득 찬 몸종의 커다란 눈이 반짝거렸다.

고향 말씨를 쓰는 꼬마 낭자의 기대에 가득 찬 모습을 본 정사낭은 곧바로 사정을 눈치채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너도?”

정사낭도 고향 말씨로 꼬마 낭자의 말에 대답했다.

“네.”

몸종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디서 본 계집 같은데.”

왕십칠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몸종을 위아래로 훑었다.

“설마 주 낭자 옆에서 칠현금을 들어주던 몸종?”

춘령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안한 기색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 소인은 여기로 팔려 왔어요. 공자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실례했습니다.”

춘령은 자신의 처지가 창피한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이렇게 먼 곳까지 팔려오다니. 게다가 그런 곳으로. 정말 딱하네.

“우리가 도와줄…….”

흥분한 왕십칠이 정사낭을 밀쳐내면서 정사낭의 말을 끊었다.

“네가 정말 주 낭자의 몸종이라고? 거참 잘됐구나. 주 낭자를 잠깐 보게 도와준다면, 내가 당장 너를 사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말발굽 소리가 다그닥 울리며 마차가 멈춰 섰다. 급작스러운 정차에 반근의 몸이 흔들렸다.

“앞에 또 무슨 일 났어요?”

반근이 마차 휘장을 올리며 물었다.

“덕승루에서 공짜 밥을 먹은 놈들이 쫓겨났다네요.”

마부가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서생 같아 보이는데요? 하여간 서생들은 돈도 없으면서 꼭 저런 꼴을 자처한다니까요.”

별일 아니라는 마부의 말에 시녀가 그를 재촉했다.

“할 일이 있으니, 그만 보고 가요.”

시녀의 말에 마부가 재빨리 자세를 고쳐앉고는 사람들 사이로 마차를 몰았다. 마차의 휘장을 내리자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차단됐다.

물론 마차가 두 서생 앞을 지날 때, 마부는 잊지 않고 고개를 돌려 웃으며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생긴 건 나쁘지 않은데…….”

마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두 젊은이를 향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도 덕승루의 아가씨들한테는 얼굴이 다가 아니지.”

마부의 말을 들었는지 젊은이 하나가 마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부가 일개 서생을 두려워할 리가.

“시골 촌뜨기들!”

마부는 콧방귀를 뀌며 큰 소리로 외치고는 말을 향해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그는 일부러 마차를 두 청년 바로 옆으로 몰면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경성 사람들은 참으로 무례하구나!”

왕십칠이 마차를 향해 침을 뱉고는 고개를 돌려 몸종을 쳐다봤다.

“내가 널 사서 강주로 데려간다니까, 어때?”

왕십칠의 말은 이미 떠나간 마차의 안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의 소리에 묻혔다.

“이 마부는 이제 못 쓰겠어요.”

시녀가 조용히 정교랑에게 말했다.

“아씨, 우리도 이제 마차를 사야 되지 않을까요? 금가아도 다 컸으니까, 그냥 놀게 놔두지 말고 뭘 좀 가르쳐야겠어요. 말 길들이기 고수인 넷째 도련님에게 한 번 부탁해 볼까요? 금가아한테 말 다루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요.”

“넷째 도련님께서 말을 훈련시킬 줄 안다고?”

반근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시녀에게 묻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응, 처음엔 나도 잘 몰랐는데 태평거에 유독 마차와 말이 많았던 날이 있었어. 말 몇 마리가 서로 뒤엉켜 물어뜯고 싸우는 통에 마부랑 사환들이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었거든. 그때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넷째 도련님이 달려와 두어 바퀴 돌며 말들을 향해 몇 번 소리치셨더니 말들이 다 순한 양처럼 얌전해지더라니까.”

반근이 시녀의 이야기를 듣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야?”

“진짜라니까?”

시녀가 정교랑을 살짝 흔들며 재촉했다.

“아씨, 아씨께서도 보셨죠?”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뒤로 넷째 도련님이 말을 끄는 걸 유심히 지켜봤어. 넷째 도련님께서 말을 데려올 때는 단 한 번도 말고삐를 쥔 적이 없더라고. 말들이 제 발로 넷째 도련님을 따라온 거야. 전에 노야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들었었는데, 서북의 기병 부대에는 유능한 목감(牧監)이 있어서 말들을 제대로 길들일 수 있대. 평범한 말도 그들 손에 들어가면 하서 지역의 명마로 변하지.”

반근이 시녀의 말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넷째 도련님이 엄청 대단하신 거구나.”

“모든 일엔 경지가 있는 법이야. 뭐든 얕잡아 보면 안 돼.”

시녀가 반근을 향해 말했다. 시녀와 반근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마차는 저잣거리를 지나 신선거 앞에 멈춰 섰다.

“누이, 순찰 나온 거야?”

마중을 나온 서봉추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정교랑이 서봉추를 향해 진지하게 예를 올렸다.

“누이는 꼭 이걸로 날 놀려먹더라.”

서봉추가 꽁무니를 쓱 빼며 도망갔다. 서봉추가 가장 겁내는 게 이런 예법이었다.

“약포에 갔었어?”

서무수가 미소지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의원 두 분을 모셨어요.”

이춘당에 진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넘쳐났지만, 정교랑이 진료를 보는 일은 없었다. 단지 약포의 관리인에게 정성을 다해 약포를 관리하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좋은 약재를 써야 하고, 좋은 의원을 둬야 한다고. 물론 처우도 당연히 좋은 편이었다.

“죽을 정도의 병이 흔하지는 않죠. 이 기세가 그리 오래 갈 것도 아니고요. 치술(治術)과 의술(醫術)을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의술이 더 중하죠. 큰 걸 중심으로 하고 작은 건 보조로 둬야 해요.”

“누이는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잘 아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실은, 돈이 모자라지 않아서죠.”

서무수가 잠시 멈칫하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웃고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복도는 조용했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복도 끝자락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연꽃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라 복도 전체에 은은한 향이 스며들었다.

신선거는 과로신선만 팔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했다. 하지만 신선거 요리에 쓰이는 식재료는 특등급이었다. 고기는 모두 당일 도살한 것만 쓰고, 채소도 당일 사 온 것만 사용했다.

신선거에서는 하루 안에 다 쓰지 못한 채소와 고기를 과감하게 버렸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밤에 거리로 나와 신선거 앞에서 버려지는 채소와 고기를 주워가려고 기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선거의 영업시간이 길어지면서 버려지는 채소와 고기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정갈한 요리와 금은으로 정교하게 만든 식기, 그리고 기품 있게 꾸며진 별실이 있으니, 신선거의 손님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비싼 게 무슨 대수냐며, 도리어 값이 싼 것을 싫어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었다.

신선이 달리 신선인가. 모두가 누릴 수 있으면 신선이 아니지.

“지출이 너무 컸습니다. 일 년은 지나야 흑자가 나겠어요.”

오 관리인이 장부를 가져오며 말했다.

“흑자든 아니든 뭔 상관이에요. 그냥 두고 노는 거죠, 뭐.”

정교랑의 말에 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고로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만 돈을 벌 수 있다. 금덩어리는 줘야 백은으로 바꿀 수 있지, 돈에 있어서는 어떤 꼼수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관리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주인어른이 돈 한 푼 들이지 않으면서 큰돈을 벌고 싶어 하는 것과 끽해야 한 푼을 쓰고는 곧바로 두 푼을 내놓으라 하는 것이다.

정교랑처럼 돈이 있지만 돈을 욕심내지 않는 사람만이 옥돌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질 기회가 있고, 가늘고 길게 갈 수 있다.

이런 주인어른을 만나는 일은 장인에게 최상급 옥돌과 손에 딱 맞는 도구를 쥐여주고 충분한 시간을 준 것과 같다. 온 정성을 들여 옥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대대손손 전해질 명품을 만들 기회가 온 것과 다름없었다.

정교랑이 창밖을 내다보자 뒷마당에 세워진 과녁이 보였다.

“누이가 활쏘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우리도 심심풀이용으로 쓰려고 하나 만들었어.”

서무수가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고는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누이는 너무 허약해. 열심히 수련해 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번엔 오라버니의 활을 쓸래요.”

뒷마당에서 시녀가 정교랑의 소매를 동여매는 동안 정교랑이 말했다.

“아이고, 누이의 그 가녀린 팔뚝과 몸으로 우리가 쓰는 활을 어떻게 들어.”

서봉추가 옆에서 하하 웃었다.

“봉추 오라버니는 처음부터 삼석궁(三石弓: 활시위를 당기는 데 450근의 힘을 써야 하는 활)을 썼어요?”

서봉추가 멋쩍게 웃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서무수가 자신의 활을 가져와 정교랑에게 건넸다.

“삼석궁은 생각도 하지 마. 나도 이제야 겨우 활시위를 당기는 정도야. 누이는 지금 팔두궁(八斗弓)만 당길 수 있어도 대단한 거야.”

정교랑은 몸을 올곧게 펴고 활시위를 당기려고 했지만 역시나 지금 수준에서는 무리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서봉추가 고소하다는 듯 낄낄 웃어댔다.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심호흡을 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힘에 부쳐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활을 내려놓았다.

“이게 다 셋째 형님 때문이오. 자기가 쓸 것만 가져다 놓고 애들이 쓸 만한 건 준비를 안 했으니.”

서봉추가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서무수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서봉추를 노려본 다음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쪽에 힘을 주고.”

서무수가 직접 손을 뻗어 활을 꽉 잡고 다시 말했다.

“자, 이제 활시위를 당겨봐.”

정교랑이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기자, 팽팽하던 명주실에 드디어 곡선이 그려졌다. 정교랑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곧바로 힘이 빠져서 활을 놓칠 뻔했다. 서무수가 재빨리 정교랑의 손을 잡고 화살을 끼워 더욱 세게 활시위를 당겼다.

텅 소리와 함께 깃털 달린 화살이 날아가 과녁을 맞혔다.

“역시 아직은 안 되네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서무수에게 말했다.

햇살 아래 비친 소녀의 맑은 얼굴은 솜털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서무수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놓고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당황하여 어찌나 서둘렀는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실례했네, 실례.”

서무수가 다급하게 말하자 정교랑이 싱긋 웃었다.

“내가 실례한 거죠.”

정교랑의 가벼운 말에 서무수도 그제야 미소지었다.

“천천히 하면 돼. 누이가 벌써 오두(五斗,) 육두(六斗)짜리 활을 들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과 시녀는 신선거에서 식사를 마친 뒤, 오 관리인과 서무수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손님들도 떠날 시간이라 다들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가 신선거 안으로 허겁지겁 걸어 들어왔다.

급히 들어온 젊은 여인은 몸종 하나와 고개를 푹 숙인 채 졸래졸래 따라오는 사환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서무수와 오 관리인이 재빨리 옆으로 길을 비켜 줬지만, 그들 앞까지 오기도 전에 어느 별실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젊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시치미를 왜 떼요? 무슨 돈이 있다고 당신이 여기 와서 밥을 먹어요?”

여인은 사내를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뜨고 바락거리며 화를 냈다.

“나, 나도 이렇게 비싼 곳일 줄은 몰랐지.”

사내가 풀이 죽은 듯 조용히 말했다.

“남한테 부탁하는 자리이니 체면 좀 차리려던 건데…….”

“당신 체면만 체면이에요? 이제 나는 무슨 낯짝으로 아버지를 뵙겠어요. 당신 돈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겁도 없이 써요?”

부아가 치민 여인이 언성을 높이자 사내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사내는 한쪽에 서 있는 서무수와 오 관리인을 흘깃 쳐다보고는 더욱 곤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소리치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사내가 조용히 여인을 타이르듯 말하자 여인도 그제야 서무수 쪽을 쓱 보고는 별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무수와 오 관리인이 다시 대문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별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서 오라버니?”

긴가민가하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서무수는 일순간 몸이 얼어버린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무수 오라버니 맞죠?”

여인이 별실 밖으로 한 걸음 나오며 재차 물었다. 사내가 여인의 뒤를 따라 나오면서 언짢은 표정으로 여인을 제지했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마시오. 잘못 본 거겠지.”

사내가 서무수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랬구나.

정교랑이 서무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은 서무수가 좀 전에 고개를 살짝 돌리며 무심코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댄 것을 눈치챘다.

서무수는 몸을 돌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젊은 부부를 바라보았다.

“향(向) 아우, 너희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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