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8권
-물음-
진 노태야는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을 편히 가지랬다고?”
진 노태야는 다시 한번 말을 곱씹으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독한 말이로구나, 아주 악랄해! 분을 못 이기고 원한을 품은 채 폐인이 된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편히 가진단 말이냐! 신선이 와도 그건 힘들지!”
진소 역시 따라 웃었지만, 그 웃음은 다소 억지스러웠다.
“가엾긴 합니다.”
진소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리되다니요. 병이 서서히 진행됐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이건 너무…… 차마…….”
사람은 약하디약한 존재다. 순풍에 돛 단 듯 아무 장애물 없이 순항하던 사람도, 작은 손가락의 지목을 받으면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도 된 듯 산산조각 난다.
그 손가락은 헤아릴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아서 언제 자신의 몸을 가리킬지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 여인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손가락처럼 움직이고 있다. 그녀의 가벼운 손놀림에 강주에서부터 경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생사의 변화를 겪었다. 참으로 무서운 이가 아니던가.
진 노태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자가 가엾어 보이느냐? 정 낭자는 못됐고? 유 교리와 정 낭자는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다. 저쪽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이지. 전쟁이 시작되면 인의와 도덕, 염치 따위는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이기면 왕이고 지면 역적이 되는 법인데, 어찌 이긴 자는 악하고 패한 자는 선하다는 말이 나와? 넌 이제 정사당에 들어가 일할 사람이다. 위선자가 될 생각은 집어치워.”
진소가 얼른 예를 표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소자는 유 교리가 가엾다는 뜻도, 정 낭자가 악하다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만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지 않습니까. 같은 관료로서 연민이 들었을 뿐입니다. 정 낭자는, 정말이지…….”
진소는 말을 끝맺지 않고 삼켜 버렸다.
정말 독하고 악랄하다. 모질고 잔인하다. 앞길에 걸림돌이 있어 힘들어지면 보통은 뒤로 물러나거나 피해서 가기 마련인데, 정 낭자는 눈앞에 놓인 걸림돌을 깨부수거나 박살을 내 버린다. 어찌나 깔끔하게 치워 버리는지 흔적도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였다. 아마 그녀 손에 죽은 이조차도 자신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 이제 훤히 아는 사람이 하나 생기긴 생겼구나. 입을 움직여 말할 순 없으니, 모르느니만 못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고 먼저 도발한 건 저쪽이라 해도, 이토록 독하고 악랄한 이라면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면서 말실수를 하거나 누군가에게 밉보이는 일이 없을 거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정말이지……. 무엇보다도, 아직 소녀가 아닌가.
진 노태야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선함보다는 다들 악함에 더 신경을 쓰기 마련이지. 한 번 악한 것이 백 번 선한 것을 덮는 법이다.”
“아버지, 그 낭자가 벌인 일이란 걸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내막을 알면 사람들은 진소 부자처럼 그 여인의 가엾은 처지를 동정할 리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부터 생각하는 법이니까.
그녀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고, 어떤 어려운 일에 처했는지는 보지 않을 것이다. 본다 해도 딱히 느끼는 바가 없겠지. 대신 그녀가 남에게 당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해치려던 사람을 해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했고, 모든 계획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은 것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으며, 조금의 빈틈도 없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피를 보지 않고도 살인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이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위험이다. 위험한 사람을 마주하면 보통은 물러서거나 피한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쥐었다면 위험을 없애는 길을 택할 것이다.
힘이 막강하고 능력이 대단한 사람일수록 그리 위험한 인물이 주변에 있도록 용납할 리 없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위험을 제거할 능력이 있지 않은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도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게다. 그러니 치밀하게 움직였겠지. 신중하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진 노태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세히 알아봤느냐? 빈틈은 전혀 없었어?”
“유 교리는 발병 당시 ‘내가 시랑이 됐다’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승진하면서 이부시랑 자리를 놓고 관청에서 말이 많이 돌았는데, 유 교리가 가장 유력했답니다. 다들 웃고 떠드는데 진 시강의 아들이 지나가다가 웃으며 축하를 건네자, 유 교리가 바로 쓰러졌답니다.”
“진 시강? 그 댁 아들이 거길 왜 갔는데?”
“듣기론 귀덕낭장 주씨 가문의 일 때문이랍니다.”
진소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진 공자는 주 공자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 일로 들렀다가 관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축하를 건넨 것이니, 이상할 일도 아니죠.”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할 건 없지, 이상할 건 없어.”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힘주어 말했다.
“아주 적절하구나, 적절해. 치밀했어.”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유 교리가 참으로 억울하겠구나. 평생 몸을 바짝 엎드리고 신중하게 움직인 자다. 그자 손에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닌데, 결국 어린애 둘한테 당하다니. 유 교리는 명석한 사람이라 지금쯤 진상을 알았을 게야.”
그 여인이 유 교리의 병을 진단하며 했다는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마음을 편히 가져야 빨리 낫는다고 했으렷다. 염병, 참으로 악랄하구나. 진 노태야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십삼.”
대청 안. 진 시강은 문후를 올리고 물러가려는 진십삼을 불러 세웠다.
“네, 아버지.”
진십삼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진 시강은 말없이 잠자코 아들을 쳐다봤다.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요 며칠 관청에 드나든 게 주씨 가문의 일 때문이냐?”
진 시강이 한참 만에 물었다.
“네 아버지. 역시 아버지 눈은 못 속이겠네요. 아버지께 누가 된 건 아니겠지요?”
진 시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이다.”
진 시강이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유 교리가 시랑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을 누구한테 들었느냐?”
진십삼이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사당에 있는 사람들한테요. 아버지, 소자가 괜히 입을 놀렸습니다. 웃고 떠드는 자리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랬으면 유 교리께서도…….”
진십삼은 괴로워하며 자책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니?”
방 안에서 진 부인의 소리가 들렸다.
“승진하고 좌천되는 관료는 셀 수 없이 많아. 기뻐하는 이도 있고 슬퍼하는 이도 있지만, 유 교리처럼 풍질을 얻었단 소리는 금시초문이야. 견문이 없어 도량도 좁은 게지. 정말 우스워 죽겠어.”
진 부인은 말재간이 뛰어났고 잘못을 두둔하는 일에 도가 튼 이였다. 진 시강은 부인과 입씨름하는 대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가 봐라, 괜찮아.”
진 시강이 진십삼에게 손짓했다.
“소자가 내일 유 교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필요 없다.”
진 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필요 없어.”
다 같은 관료라고는 하나 그런 자와 진 시강 같은 명문세족은 결이 달랐다. 조정에서 함께 관료로 지낼 때에는 예의상 왕래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진십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지팡이를 짚고 사환의 부축을 받아 나갔다. 벌써 십수 년이나 본 일인데도, 아들이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진 시강은 눈이 찌르는 듯 아팠다.
“됐어요, 그만 보세요. 사람만 좋으면 됐죠.”
진 부인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진 시강은 표정을 수습하고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로 환히 밝힌 실내에는 꽃이 그려진 자리가 깔려 있고, 쌍육과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수하미인도(樹下美人圖: 나무 아래에 여성을 배치한 그림. 풍요와 다산을 상징)가 그려진 육곡 병풍도 있었다. 하지만 탁자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 교리의 병이 수상하긴 하오.”
진 시강이 바둑판 앞에 앉으며 말했다. 사락사락 옷자락 소리가 들리더니 진 부인이 병풍 뒤에서 부채질을 하며 나왔다.
“뭐가 수상한데요?”
“진소의 영전은 이상할 게 없는데, 유 교리가 후임이라는 소식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소.”
진 시강은 바둑돌을 들고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오늘 물었더니 누군가는 내가 말했다고 했다더군.”
“당신이 말했어요?”
진 부인은 맞은편에 앉아 소매를 털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그 얘기가 나온 적이 있긴 한데, 그건 십삼이 얘기를 꺼냈을 때였소. 남들이 물을 땐 대충 둘러댔지, 유 교리라고 말한 적 없어. 내가 폐하를 곁에서 모신다고는 하나, 나도 누가 후임인지는 몰랐거든.”
진 시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다들 떠들어대는데 어디서 나온 말이면 뭐 어때요. 근거 없이 나온 말도 아니잖아요. 누가 말했든 뭔 상관이에요. 원래 모든 일은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인걸요.”
진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 후,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진 시강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관둡시다. 그자의 도량을 탓해야지.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운이 참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오.”
진 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승진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스스로를 해친 거죠. 누굴 탓하겠어요.”
진 부인이 웃으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겼네요.”
밤새 내린 비로 무더운 여름 날씨가 서늘해졌다. 비는 날이 밝을 무렵까지도 부슬부슬 쉬지 않고 내렸다.
말에서 내린 정사낭은 삿갓을 고쳐 쓰고 대문을 쳐다봤다. 주씨 저택의 현판이 보였다. 그래, 바로 여기다. 정사낭은 고개를 돌려 선물 상자를 들고 있는 사환을 보며 당부했다.
“젖지 않게 잘 간수해라.”
사환은 정사낭의 말대로 선물 상자를 꼭 껴안았다. 또 다른 사환이 앞으로 다가서며 문을 두드렸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문간방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 이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정사낭이 예를 표했다.
“강주 정씨 가문의 넷째가 인사차 들렀소.”
“누구라고?”
주 부인이 물었다.
“강주 정…….”
여종이 대답했다. 이번엔 제대로 들은 주 부인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창백해진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어서 내쫓아라!”
눈 아랫부분이 검게 변한 주 부인의 얼굴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서, 어서 내쫓아. 우리 주씨 가문은 정씨 가문과 불구대천이야! 그, 그 사람들은 우리 교교를 괴롭혔어! 절대 용서 못 한다!”
여종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얼떨떨했지만 주 부인의 호통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원수인 건 맞으니, 왕래할 필요도 없겠지. 내쫓으라니 내쫓자.
정사낭은 당황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매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는 주씨 가문 문지기의 모습에 난감한 표정이었다.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다. 정교랑 모친의 장례 때 대놓고 싸운 일은 이후 강주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오르내렸다. 하지만 당시 정사낭은 아직 어릴 때라 사환들에게 업혀 사람들 뒤로 숨어 구경했기에 이미 기억이 흐릿했다.
“나, 나는 누이를 보러 왔소.”
“글쎄, 누이가 누군데?”
문지기가 손을 허리에 대고 말했다.
“이 인간이 제정신이야?”
사환이 보다 못해 앞으로 나서서 눈을 부라렸다.
“우리 공자님의 누이면 당연히 정 아씨지.”
아, 맞다. 잊고 있었네.
“그 사람 여기 안 살아요!”
문지기는 손을 휘두르며 이들을 내쫓았다.
“가라고요, 가.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여기 안 산다고? 깜짝 놀란 정사낭이 물었다.
“그럼 지금 어디 살고 있소?”
대답 대신 쾅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 밖에 남겨진 정사낭과 사환이 눈을 마주쳤다.
“공자님, 여기서도 똑같나 봅니다. 도관 같은 곳으로 보내졌겠죠.”
사환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사낭은 한숨을 내쉰 후 주씨 저택의 대문을 힐끔 쳐다봤다.
“가자. 천천히 알아봐야지.”
이쪽에서 정사낭과 사환이 자리를 뜰 무렵, 저쪽의 주 노야는 옥대교 앞에 와 있었다. 마차가 멈췄지만 주 노야는 마차 안에서 꼼짝도 않은 채 창 너머로 보이는 저택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이 세 번째로구나. 처음엔 교랑을 집에서 내쫓을 때 데려다주는 시늉을 하러 와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두 번째엔 진씨 가문의 혼담을 전하러 신이 나서 왔다가 들어오란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거절을 당했지.
“아버지?”
주육낭이 밖에서 부르자 주 노야는 심호흡을 하고 휘장을 들어 올린 다음 마차에서 내렸다.
금가아는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옆에 있는 주육낭이 아니었다면 금가아는 주 노야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선은 주 노야가 찾아온 일이 드물었고, 금가아 역시 주씨 저택엔 가 본 일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 늙은이의 태도가 몹시 공손하고 온화해졌기 때문이다.
“정 낭자를 좀 볼 수 있을까?”
주 노야가 고개를 들으며 묻자, 반쯤 열린 대문 너머로 회랑 아래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여인이 보였다. 안개비가 내리고 있어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녀가 차를 내주자 주 노야는 놀란 눈치였다.
“괜찮다, 괜찮아.”
시녀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차 한잔 정도는 저희도 대접할 수 있어요.”
주 노야는 멋쩍은 듯 마른기침을 했다.
“이번에 교교 네가 정말 고생 많았다.”
머뭇거리던 주 노야는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했다.
“외숙부님을 놀라게 해 드렸네요.”
더욱 놀란 주 노야는 하마터면 찻잔을 엎을 뻔하며,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예를 표했다? 감사도 전하고? 사과까지? 무슨 생각이지? 대문에 들어선 후로 지금까지 내가 말실수를 하거나 뭐 잘못한 건 없지? 얘가 원래 이렇게 예의 바르고 철이 들었었나?
“교교, 나머지 일은 걱정 말거라. 유가 놈이 내 약점을 잡을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놈의 약점을 잡을 수 있어. 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죗값을 받아야지!”
“폐하의 성정은 어떤 편이세요?”
정교랑의 물음에 멈칫했던 주 노야는 곧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멋쩍어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선 관대한 분이지. 놈이 풍질을 얻었으니 틀림없이 측은하게 여기실 게야. 더구나 그 늙은이가 평소에 사람 좋은 시늉을 많이 했거든.”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지금 자신이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유 교리의 죄를 추궁하려 들면 도리어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이다.
“그냥 두자니 그놈만 좋은 꼴 아니냐.”
“순리에 맡기죠.”
달리 도리가 없거나 포기할 때 쓰는 말이 이 여인의 입에서 나오자 주 노야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시선이 절로 정교랑을 향했다.
이 강주 바보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집에서 유명한 스승을 청해 가르치고 훈육한 여식들보다 훨씬 품위가 있어 보였다. 외모는…… 점점 누이를 닮아가는군. 아니지, 누이와는 별로 안 닮았어. 훨씬 날카로운 얼굴이야. 정씨 가문의 피가 섞여서겠지. 그렇다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저 기개는 어디서 왔으려나?
어젯밤 밤새 한숨도 못 자며 일을 반복적으로 곱씹어보았다. 흉악하고 독한 놈들을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 독하고 기민하게, 흔적도 남기지 않고 피도 안 보며 사람을 죽이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아직 소녀가 아닌가. 아직 이렇게 어린데. 어떻게 그런 일을?
패배를 인정하고 공손하게 사죄하는 일만으로 한 사람을 풍질에 걸리게 할 수 있나? 그렇다면 이제부턴 만사 내팽개치고 눈에 거슬리는 놈들을 찾아가 비위를 맞추며 살갑게 굴 테다.
의술에 정통한 여인이니 혹시 독을 썼으려나? 하지만 태의들이 진단한 바에 따르면 유 교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기혈이 막힌 것이라고 했다. 판단력 상실은 풍질의 증세였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풍질에 걸리게 하는 독이 있나?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으니, 제아무리 불가능한 일도 이 여인에겐 불가능이 아닐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 노야의 시선은 찻잔으로 향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빼게 됐다. 아무 흔적도 없이, 언제 어디서나…….
“교교, 염려 마라. 나머지 일은 나한테 맡기고, 신경 안 써도 된다.”
주 노야가 급히 덧붙였다.
“물론 잘못된 게 있으면 얼마든 얘기하고. 어쨌든 한 가족이니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야지. 남한테 무시받는 건 절대 안 돼. 우릴 해치려던 놈들한텐 인정사정을 봐주지 말아야지.”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당치도 않아.”
주 노야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네가, 네가 늘 수고가 많구나.”
대청의 문 근처에 앉아 있던 시녀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주 노야가 적잖이 놀랐나 보네.
“그리고 교교, 정씨 가문에서 네 혼사를 정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거기 맞서 싸우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그러다 경성에서 전갈이 와서 하는 수 없이 부랴부랴 돌아왔지.”
주 노야는 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교교, 걱정 말거라. 이 일은 염려 안 해도 돼. 내가 있는 한 저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그 일은 상관없어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그래, 다 네 뜻대로 해. 우린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주 노야가 얼른 말을 받자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예는 그만 됐다, 예는 됐어. 내가 응당 해 줘야 할 일이야.”
서둘러 일어서던 주 노야는 또 무언가 생각났는지 도로 앉아서 정교랑을 쳐다봤다.
“교교, 뭐 당부할 일은 없고?”
“없어요, 별말씀을요.”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한 후 일어서자 주 노야도 그제야 일어섰다.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
밖으로 걸어 나가던 주 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봤다.
“교교, 집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와. 다 네 뜻대로 하거라. 절대 어려워하지 말고.”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 노야는 그제야 따라 웃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첫 방문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 그랬는지 주 노야는 하마터면 대문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시녀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교랑은 시녀와 함께 대문까지 나와 마차를 타고 떠나는 주 노야를 배웅했다.
“공자님.”
시녀의 시선이 옆쪽을 향했다. 삿갓을 쓴 주육낭이 채찍을 들고 서 있었다. 이슬비에 몸이 젖은 걸 보니 한참 동안 서 있었던 듯했다.
“공자님, 왜 안 들어오셨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아버지가 무서워서요?”
주육낭이 시녀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
솔직하고 명쾌한 대답에 도리어 시녀가 머쓱해졌지만 곧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부친은 아들의 눈에 경외감이 드는 존재인데, 지금 주육낭의 부친은 어린 낭자한테 놀라 겁을 먹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으로는 이해한다지만 차마 그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공자님, 남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도 실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에요.”
헌신짝처럼 버림받던 존재에서 이제는 독사를 보듯 무서워하는 존재가 됐다. 이 세상에 그런 대우를 원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대문 앞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슬비만 소리 없이 내렸다. 정교랑은 둘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벌써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마당으로 들어간 정교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촉촉이 내리는 이슬비가 좋은지 손을 뻗고 고개를 살짝 들어 비를 맞았다.
“이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린 게 적절치 않았던 것이냐?”
따라 들어온 주육낭이 물었지만, 정교랑은 대답 대신 자기 얘기를 했다.
“내가 보기엔, 남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남들한테 멸시받는 존재보단 나은 것 같아요. 아무리 무서워도, 어쨌든 혈육이잖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괜한 생각 마요. 처음부터 숨길 생각 없었으니까. 알아도 좋고, 몰라도 상관없어요. 적절치 않을 게 뭐 있어요.”
멸시든 공포든 그녀에게는 별일 아니었다. 주육낭은 한숨을 토했다.
자리에 앉자 시녀가 차를 올렸다. 반근이 깨끗한 수건으로 정교랑의 손을 닦아 주었다. 주육낭도 수건을 들었지만 시녀가 따로 시중을 들진 않았다. 주육낭은 대충 두어 번 쓱쓱 닦은 후 수건을 던졌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별거 안 했어요. 다 봤잖아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혀를 찼다.
“그럼 네가 좋은 걸 갖다 주며 패배를 인정하고, 십삼이 소식을 알려 준 일로, 그자가 너무 기뻐서 풍질을 얻었다고? 그자는 바보가 아니야!”
“그자는 바보가 아니죠. 똑똑하고 신중하며 성실한 사람이죠. 늘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고요.”
“언제 독을 쓴 건데?”
주육낭은 정교랑의 말을 받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일이 발생한 후로 주육낭은 줄곧 생각해 왔다. 독을 쓰거나 약을 넣으려면 접촉이 있어야 한다. 유 교리와 만날 때는 항상 주육낭도 함께 있었고, 언제나 유 교리의 공간에서 만났다. 먹고 마시는 것에 손을 쓰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혹시 형태도 없고 무색무취한 것인가?
주육낭은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반근이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흰 목이 가늘고 길어 보였다.
주육낭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 여인은 향을 쓰지 않는다. 실내에서도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형태로 보이지 않는 접촉. 대체 뭘까?
“난 독을 쓰지 않았어요. 의술은 사람을 구하고 돕는 데 써야지, 어떻게 사람을 해쳐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차에서는 맑은 향이 났고 목으로 넘어가자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주육낭의 머리에 번뜩 생각이 스쳤다.
“처방전이구나!”
주육낭은 찻잔을 손에 꽉 쥔 채 정교랑을 봤다. 비밀을 푼 희열이 얼굴에 드러났다.
“넌 그자에게 비술을 건넸어. 향낭 말이다. 향낭에 독을 썼지?”
“공자님, 아둔하시네요. 그때 유 대인은 그 향낭에 손도 안 댔잖아요. 그 신중한 사람이 남이 준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겠어요?”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으면서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비술! 그 비술이 쓰여 있던 종이! 종이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먹물이구나!”
주육낭이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날, 글씨를 쓰면서, 아랫것이 먹을 갈 때 뭘 넣은 거지?”
그 말에 정교랑이 머리 빗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정교랑의 표정을 보며 주육낭은 확신했다.
“별건 아니었어요.”
정교랑의 시선은 주육낭이 여전히 손에 꽉 쥐고 있는 찻잔으로 향했다.
“방금 마신 그런 차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남아 있던 찻물이 쏟아졌다.
당황하여 일어선 주육낭은 정교랑을 분노로 쏘아봤다.
“너, 너.”
주육낭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주육낭을 보던 정교랑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어댔다.
정교랑의 웃음은 늘 옅은 미소뿐이어서 얼굴엔 웃음기가 드러나도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까지 웃고 있었다. 차마 오래 쳐다볼 수 없었던 두 눈도 지금만큼은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끄는 긴 속눈썹이 웃음에 따라 미세하게 떨리면서 나비의 날개처럼 보였다.
오색찬란한 나비의 날갯짓에 소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북을 치는 듯 가슴이 쿵쾅댔다.
웃음을 터뜨렸는데도 소리가 없는 걸 보면 아직 완치된 건 아닌 듯했다. 다 낫지 않았는데도 이토록 악독할 정도면, 앞으로 볼 만하겠네. 또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주육낭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주육낭의 이야기를 들은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대청을 가득 채웠다. 소년의 웃음소리는 샘물처럼 맑고 청량했다. 몸이 다 나으면 그녀는 어떤 웃음소리를 내려나?
그녀의 목소리는 늘 잠겨 있었다. 선천적인 바보라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완치가 안 돼서 그런 것일까? 바보의 병도 나았으니 목소리도 좋아지겠지. 처음엔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차츰 좋아지고 있지 않은가.
기다리다 보면 목소리도 고모님처럼 좋아질까? 고모님의 웃음은 딱히 인상에 남아 있지 않지만, 목소리는…….
“육낭, 고모한테 와 보렴.”
누가 팔을 탁 치자 정신을 차린 주육낭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내가 묻잖아.”
진 공자가 말했다.
“뭐를?”
주육낭은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진 공자는 주육낭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갈 거야? 자네한테 무슨 약을 넣었는지 물어보러 갈 건데.”
진 공자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정교랑의 저택에서 나온 주 노야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 교리의 집으로 갔다. 유씨 저택은 문병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어수선했다.
“왜들 이렇게 어수선하지? 아주 엉망이군.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했나.”
“하늘이 무너진 셈이지.
“어제 이 태의가 태후를 찾아가 유씨 가문의 일을 고했다더군. 자신의 의술을 모욕했다며 귀향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나 보오. 태후께서도 심기가 불편해져 폐하를 부르셨고.”
“폐하께선 뭐라 하셨다는데?”
“뭐라 하시긴. 갑자기 중병에 들어 마음이 초조해 결례를 범한 듯하니 이 태의더러 이해해 달라고 하셨지.”
“이 태의는 받아들였고?”
“아니오. 이번엔 무슨 일인지 이 태의가 폐하께 완강하게 버텼소. 죽어도 유 교리의 병은 돌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그럼 폐하께서 진노하셨을 텐데?”
“폐하는 진노하셨지만 태후가 이 태의를 두둔했소. 아무리 병이 위중해도 의원한테 화풀이해선 안 되는 거라고 말이오.”
거기까지 들은 주 노야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유 교리의 운이 안 좋긴 안 좋은가 보군.
주 노야는 의관을 정돈한 후 한담을 나누던 관료들과 인사하고 그들과 함께 유 교리를 보러 왔다. 불과 이틀 만에 유 교리의 방에는 벌써 쿰쿰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목만 간신히 가눌 뿐 다른 부위는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 노야는 침상 앞에 서서 유 교리를 바라봤다. 무관인 주 노야는 유 교리 같은 문관과 딱히 왕래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유 교리는 늘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었다. 주 노야와는 성격이 딴판이다 보니 더더욱 교제할 일이 없었다.
심지어 주 노야는 유 교리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조차 기억이 흐릿했다. 어쨌든 침상 위에 누운 지금 이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누렇게 뜬 얼굴에 안 그래도 수척했던 얼굴이 더욱 홀쭉해져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볼은 움푹 팼고 수염은 까끌까끌해 보였으며 두 눈엔 초점이 없었다. 침을 흘리진 않았지만 목구멍에서 가쁜 숨소리가 났다.
주 노야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배후의 인물이 유 교리인 걸 안 후로 유 교리를 쓰러뜨리기까지, 그 여인은 불과 열흘 만에 해냈다.
열흘, 나라면 어땠을까. 문관을 상대하려면 아마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는 일에만 열흘은 썼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일의 순서를 계획한 다음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상상도 안 된다. 일 년 안에 해낸다면 가히 기적이겠지.
부인의 말대로 그런 여인을 만난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그 여인의 재물을 빼앗으려 한 적이 없으니.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마침 정신이 든 유 교리는 옆에 누군가 있는 걸 알고 간신히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흐릿했다.
기억력도 감퇴한 건가? 이 사람이 누군지 왜 못 알아보겠지?
“유 대인.”
주 노야는 노인을 보며 몸을 숙이고, 공손한 태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 주월(周鉞)입니다.”
주월? 누구지?
주 노야는 유 교리 외엔 아무도 주 노야의 표정을 볼 수 없도록 다시 몸을 숙였다.
“대인께서 살펴 주신, 귀덕낭장 주월이요.”
주 노야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번졌다. 유 교리는 돌연 눈을 부릅뜨고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대인, 대인.”
주 노야는 얼른 유 교리의 손을 잡고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고 너무 심려 마십시오. 소장을 살뜰히 보살펴 주신 일은, 가슴 깊이 기억하겠습니다. 마음 푹 놓으시고 요양에 전념하십시오.”
주 노야는 움직일 수 없는 유 교리의 손을 힘주어 꽉 쥐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이 퍽 감동적이고 슬퍼서, 유 교리의 눈 속에 담긴 분노와 공포와 절망을 읽지 못했다. 주 노야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뜰 때까지도.
“노야께서 왜 또 혼절하셨지?”
몸종들의 말에 유씨 일가 사람들은 또다시 몰려들어 울며 소리쳤다. 유 교리는 한참 만에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유 교리는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혀가 말을 듣지 않아 가족들은 한참 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냉큼, 가.”
가라고? 가족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가라고 하시지? 어딜 가라는 거야? 병으로 미래가 암담해졌으니 자식들과 후손들의 앞날이 걱정되시겠지. 병이 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더니.
“노야, 염려 마세요. 마음을 편히 가지셔야 해요”
가족들은 눈물이 글썽한 채로 웃음을 지으며 유 교리를 달랬다.
“우리 집은 괜찮아요. 큰애와 둘째도 소식을 듣고 상경하는 중이에요. 셋째와 넷째는 벌써 음보로 조정에 나갔고요. 노야는 그간 열심히 일하기도 했고, 관청에서 쓰러졌잖아요. 폐하께선 인자한 분이니 우리 일가를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유 교리는 점점 심하게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혀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신 오지 마라. 냉큼 가! 다 가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주육낭이 다시 돌아왔는데도 정교랑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놀랐어도 얼굴에 티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시녀가 차 두 잔을 내왔다.
“공자님, 똑같은 차예요. 차라리 물을 드릴까요?”
시녀가 웃으며 묻자 주유낭이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 버렸다. 진 공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마시고 물었다.
“무슨 차입니까?”
“머리에 좋고, 마음을 편하게 하며, 기를 보하는 차예요.”
정교랑의 대답에 주육낭은 의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라고?
“아, 그렇다면 정말 좋은 차네요. 세상살이가 쉽지 않잖아요. 생각할 것도 너무 많고요. 기를 보하고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긴 하죠.”
“둘 다 말 돌리지 마. 이 괴상한 차에 대체 무슨 독을 쓴 거야?”
주육낭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차엔 독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근데 어떻게 풍질이 걸리게 했지?”
주육낭이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건 그 사람 자신한테 물어야죠. 병은 자고로 마음에서 오는 거니까요. 자신을 해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죠.”
“유 대인은 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심한 사람이었어. 사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마음 편히 자기 뜻대로 통쾌하게 굴 때도 있어야 해. 웃고 싶을 땐 웃고,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하지. 사람에겐 누구나 희로애락이 있기 마련이야. 속 시원히 울거나 배가 찢어지도록 웃는 것도 치료의 일종이라고 하잖아. 유 대인은 오랫동안 자신에게 너무 엄격했어. 그러니 마음에 응어리가 맺힐 수밖에.”
진 공자가 웃으며 설명했다.
마음에 응어리가 맺혀 있는데,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기를 보해 주는 묵차 향을 썼다. 한쪽은 꽉 막히고 한쪽은 확 트였다. 그 긴장과 흥분, 숨길 수도 드러낼 수도 없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현이 어느 순간 뚝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 단순하다고? 정교랑의 짧은 말과 진 공자의 장황한 설명을 다 듣고 난 주육낭은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건 좋은 차야. 자네 부친의 일을 알아보려고 내가 좀 많이 사서 특별히 정사당 이부와 중서문하성 사람들이 다 먹도록 보냈어. 따로 남겨 둔 것도 좀 있는데, 가져가서 더 먹을래?”
주육낭은 진 공자를 노려봤다.
“자네한텐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자네는 성격이 더러워서 걸핏하면 발로 차고 소리소리 지르잖아. 그러니 자네의 희로애락을 온 세상 사람이 다 알지. 아마 죽을 때까지 풍질은 안 걸릴 거야.”
진 공자가 웃으며 말하자 시녀도 따라 웃으며 입을 가렸다. 주육낭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일어섰다.
“가자.”
주육낭은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진 공자도 웃으며 따라 일어섰다. 대문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올랐는데도 주육낭은 말고삐를 쥔 채 출발하지 않았다.
“왜 그래?”
진 공자가 물었다. 주육낭은 이미 닫힌 저택의 대문을 보며 잠자코 있었다.
“급할 것 없어.”
왜 그러는지 눈치챈 진 공자가 웃으며 휘장을 내렸다.
말과 마차는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갔다. 웃고 떠드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뒤섞인 거리는 변함없이 시끌시끌했다. 경성 사람들에게 누가 아프고 누가 죽거나 누가 오고 누가 간 일은 강물로 떨어진 물 한 방울과도 같았다. 물보라조차 일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일이었다.
떠들썩한 거리와 달리 덕승루는 고요하기만 했다. 곱게 차려입고 밖으로 나와 웃으며 호객행위를 하는 기녀도 없었고, 술을 사 가는 손님들도 없었다. 덕승루는 오직 밤에만 번화한 곳이었다.
방 안에 있는 휘장 뒤로 가늘고 여린 여인이 단정히 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몸치장을 하는 듯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속옷만 입은 채 새하얗고 깡마른 어깨를 드러내고 있어서, 뒷모습만 봐도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여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역시, 역시 그랬구나. 진짜지?”
여인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언니, 진짜예요! 그 유가 놈이 풍질에 걸려서 아무도 못 고친대요. 죽기만을 기다린댔어요.”
여자아이는 구리거울을 손에 들고 흥분한 채로 꿇어앉아 이를 갈았다.
거울 속에 비친 고운 얼굴은 열여섯쯤 되어 보였다. 분을 바르기 전인데도 피부는 희고 고왔다. 그윽한 두 눈은 호수처럼 반짝여 절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세상에…….”
미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어머니. 그날이 드디어 왔네요.”
울음소리는 문밖까지 들렸다. 구리 대야를 든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안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커졌고, 급기야 두 사람은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주저하면서 문에 귀를 갖다 댔다.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뒤에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춘령!”
아이가 기겁하며 돌아섰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기녀 하나가 하품을 하며 보고 있었다.
“언니, 뭐 시킬 거 있으세요?”
아이는 얼른 웃으며 공손하게 물었다.
“주(周) 언니는 씻었니?”
“아직이요.”
아이는 얼른 대답한 후, 기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은 채 얼른 덧붙였다.
“미(眉) 언니의 물을 새로 길어 올게요.”
기녀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서 가 봐. 난 네가 영리해서 마음에 들어. 나중에 어멈한테 말해서 내 밑으로 오게 해 줄게.”
기녀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를 훑어봤다.
“얼굴도 반반하니 잘 가르치면 나쁘지 않겠어.”
아이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기녀가 하품을 하며 안으로 들어간 후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걷혀 있었다. 오히려 같잖다는 표정이었다.
“네 밑으로…….”
아이는 혼잣말을 하며 입을 삐죽였다. 아이의 시선은 다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문으로 향했다.
어디에서든 누군가의 밑으로 갈 거라면 남보다 뛰어난 사람 밑으로 가야 하고, 무언가가 되려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날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후회하게 만들 테니까. 이건 나를 위한 일이자 동생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반짝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흘이 지났다.
태평거는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서무수 형제가 옥에 갇혀 있었을 때도 오 관리인은 혼자서 잘 버텨냈다. 휴업했던 사흘을 제외하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영업한 터라, 딱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태평거 문 앞에는 말과 마차가 끊임없이 오갔고, 식당 안은 손님으로 꽉 찼다. 대기 중인 손님들은 문 앞에 마련해 둔 차양 아래에 앉거나 서서, 무료로 나온 다과를 먹기도 하고 편액의 글씨를 보기도 하며 담소를 나눴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태평거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 앞에 서 있던 서무수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실내를 돌아보는 눈빛엔 근심이 서려 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 하나가 간신히 젓가락을 쥐고 접시 안의 음식을 집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젓가락은 곧 타닥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흰 천으로 감싼 손은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옆에 앉아 있던 송씨댁이 얼굴을 가리고 울먹거렸다.
“다시.”
정교랑의 말에 이대작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다시 손을 들었다.
젓가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시 한번 실내에 울렸다. 문밖에 서서 안쪽을 지켜보고 있던 오 관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급히 걸어오는 범강림이 보였다.
범강림이 실내를 가리키며 눈짓하자, 오 관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은 옆으로 몇 걸음 옮겨 섰다.
“그 일은 이야기해 보았소?”
범강림이 물었다.
“바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주인어른 세 분이 안쪽에 같이 계셔서 아직 말을 못 꺼냈습니다.”
오 관리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대작만 생각하면, 다들 한숨을 내쉬며 수심에 잠겼다. 손을 붙이긴 했지만 무언가를 쥐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부엌일은 이제 못하게 된 셈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그나마 손이 붙어 있으니 다행이라 여기겠지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손은 이대작으로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젓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이대작의 손까지 탁자 위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이대작은 그 위로 무너져 내리듯 엎드렸다.
흐느껴 우는 사내의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서무수는 그 모습을 차마 보고 있기 힘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씨, 아씨께서 고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송씨댁이 무릎을 꿇은 채 정교랑 앞으로 엎드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송씨댁,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시녀가 기분 나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진정해.”
시녀가 네, 하고 한발 물러섰다.
“손을 붙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회복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어요. 천천히 요양하는 수밖에.”
요양해도 소용없으면? 지금 상태로 봐서는 무언가를 쥐는 것까진 가능할지 몰라도, 현란한 칼질 솜씨를 선보이던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방 안엔 침묵이 감돌았고, 송씨댁이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이대작, 요리는 몇 살 때부터 배웠어요?”
정교랑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울먹이던 이대작이 멈칫했다.
몇 살? 이대작의 표정이 멍해졌다.
너무 배고파.
부엌 구석에 선 작고 왜소한 아이가 손가락을 빨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숙수들을 바라보았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자 아이는 군침을 흘렸다.
밥하는 걸 배우면 먹을 게 생기겠지. 밥하는 걸 배워야겠어. 그럼 평생 배곯을 걱정 없이 살 수 있잖아.
어른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은 사람은, 누에를 기르는 사람이 아니라네(遍身羅綺者, 不是養蠶人).”
정교랑의 말에 시녀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아씨, 이래도 시를 못 짓는다고 하실 거예요? 정말 훌륭한 시네요.”
“내가 지은 게 아니야.”
“그럼 누구 시예요?”
정교랑이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려 시녀에게 말했다.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이 상황에서 갑자기 시 이야기를 한다고?
문밖에 있던 오 관리인과 서무수가 서로 눈짓을 했다. 다행히도 방 안의 화제는 곧 이대작에게로 돌아왔다.
“여섯 살 때부터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했으면, 제대로 된 숙수가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죠?”
이미 지나버린 옛일을 이대작은 빠르게 기억해 냈다.
“전 아둔하여 배움이 느렸습니다.”
이대작이 코가 막힌 소리로 대답했다.
“스물셋이 돼서야 요리를 맡아 하기 시작했죠. 그마저도 두 노태야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거기까지 말한 이대작은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성공할 수 있게 만든 것도 두씨네 사람이고, 불구로 만든 것도 두씨네 사람이라니. 두씨 덕분에 성공하고, 다시 두씨 때문에 망했다. 그러니 이대작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없었을지도.
“십칠 년이 걸려서, 지금의 요리 기술을 연마했군요. 그 시간이 길다고 생각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이대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오른손으로 요리를 배웠죠?”
이대작이 주춤했다. 당연지사인 것을.
“지금의 오른손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왼손이 있잖아요.”
정교랑은 이대작을 쳐다보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내가 십칠 년을 줄게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어때요?”
왼손으로? 처음부터? 이대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봤고, 방 안의 다른 사람들도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 관리인, 큰오라버니.”
정교랑이 문 쪽을 향해 외쳤다. 부름을 들은 오 관리인과 범강림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셋째 오라버니한테 듣자니 나와 상의할 게 있다고 했다면서요.”
화제가 또 이렇게 갑자기 바뀌는 건가? 이대작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고, 오 관리인과 서무수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서무수가 오 관리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칠이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직접 절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주인어른께 무릎을 꿇고 울며 매달리기도 했고요. 신선거를 우리에게 주겠답니다.”
오 관리인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태평거는 우리 거였으니, 다시 가져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신선거는 우리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왜 준다는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신선거도 아씨의 과로신선 덕분에 잘 된 것이니,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라고 하더군요.”
오 관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씨, 두칠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으니 목숨만 살려 달라네요.”
“우스운 사람이네요. 아무 이유도 없이, 누가 목숨을 빼앗는다고.”
정교랑은 고개를 내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유가 있어야, 목숨을 빼앗는 거로구나.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거저 준다는 건 아니고 팔겠답니다.”
“어차피 시간문제 아니오.”
오 관리인의 말에 서무수가 웃었다.
유 교리라는 뒷배가 쓰러졌는데, 두칠이 신선거를 지킬 수 있으려나? 헐값에 넘길 바에야 사과를 명목으로 넘기려는 것이다.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네.
“매매라면, 관리인이 결정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렇게 끝낸다고? 그렇다면 두칠을 봐주겠다는 건데? 서무수가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누이, 그럼 두칠 좋은 일만 해주는 거 아니야? 이게 다 그자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서봉추 등 몇 사람은 이미 야음을 틈타 두칠을 마대에 넣어 강물 속으로 내던지기 위한 준비를 한 터였다.
“잘못을 알고 뉘우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죠.”
누가 들어도 따뜻하고 평온한 말이 정교랑의 입에서 나오자, 다들 왠지 어색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낭자의 마음씨가 원래 이런 보살 같았나? 행동으로 봐서는 나찰(羅刹: 지옥에서 죄인을 못살게 구는 식인귀)과 다름없이 군 일이 더 많았는데.
정교랑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서무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누이 말대로 하지.”
오 관리인도 기쁘게 알겠다고 했다. 장사는 크게 벌일수록 좋은 법이다. 지금껏 성가신 일을 숱하게 겪었으니, 이젠 보상을 받을 때가 되기도 했다.
정교랑은 아직도 얼빠진 모습을 한 이대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보다시피, 내게 식당이 하나 더 생겼어요. 두씨의 취봉루가 당신한테 십칠 년을 줬다면, 내 두 식당도 그 정도는 줄 수 있죠. 다만, 감당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
왜 원하냐고 묻지 않고 감당할 수 있냐고 물어보지?
다들 정교랑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대작은 정교랑을 쳐다보며 입술만 두어 번 달싹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전의 십칠 년 동안도 고생을 많이 했겠지만, 앞으로의 십칠 년이 당신한텐 더욱 힘들 거예요.”
정교랑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전의 고생과는 차원이 달라요. 예전의 십칠 년은, 먹을 게 없고 입을 게 없는 생활고로 인한 고생이지만, 앞으로의 고생은 의식주에 문제가 없고, 노모와 처자식 걱정을 안 해도 돼요. 하지만 예전의 십칠 년보다 더 고생스러울 거예요. 이런 고생은, 마음으로 하는 고생이죠. 부담감과 절망, 그리고 무시와 조롱을 감당해내야 할뿐더러, 생활이 편안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태해지는 자신을 이겨내야 해요.”
맞는 말이다. 품삯을 받고 남의 밥을 먹으면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건, 밥값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루 이틀 정도야 뭐라 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일 년, 이 년이 지나면? 삼 년, 사 년이 지나면?
그런 부담감은 사람을 미칠 지경으로 내몰 수도 있다. 이대작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런 고생은, 생활고로 인한 고생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견디기 힘들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이 고통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정교랑의 말이 끝난 방 안에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다들 나라면 어땠을까, 이런 고통을 감당할 자신은 있을가, 감당해 낼 수 있긴 할까 하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병을 치료하지 않아도 되고, 운명 역시 안 고쳐도 돼요.”
정교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사실, 모든 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줄게요. 그러니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예요.”
이대작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정교랑을 바라봤다.
“아씨께 감사드립니다. 소인, 하고 싶습니다.”
이대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두 번이나 새사람으로 탈바꿈했지만 두 번 모두 무너진 이대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절대 바꿀 수 없거나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깟 십칠 년, 다시 하면 되지!
송씨댁이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었다.
정오가 지난 시간, 정교랑이 일어나 작별을 고하자 서무수가 배웅하러 나갔다.
“오라버니가 집에 오는 길이 더 가까워지겠네요.”
방금 전 신선거의 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나누었다. 범강림과 서무수는 형제들을 나눠 각자 한 곳씩 맡아 관리하기로 했다. 태평거에는 두부 공방이 있어서 사람을 좀 더 많이 남겨야 했으므로, 서무수가 두 사람만 데리고 성 안의 신선거로 옮겨 가기로 했다.
“그러게.”
서무수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들 상처는 괜찮아요?”
정교랑의 물음에 서무수가 웃었다.
“괜찮아, 살가죽이 까져서 겉보기에 좀 흉할 뿐이지.”
“무서워요?”
정교랑이 쳐다보며 묻자 서무수는 다시 웃어 보였다.
“누이가 말했잖아. 마음으로 하는 고생이 밖으로 보이는 고생보다 훨씬 고통스럽다고. 마찬가지야. 마음속으로 느끼는 두려움은 겉으로 보이는 두려움과는 비교도 안 돼. 누이가 있는데 우리가 무서울 게 뭐 있나?”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예를 표했다.
“어서 가 봐, 이상한 생각 그만하고.”
서무수가 웃으며 손을 뻗어 휘장을 내려 주었다.
* * *
작가의 말: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은 사람은, 누에를 기르는 사람이 아니라네.’
정교랑이 읊은 이 시의 출처는 송나라 시인 장유(張兪)의 <잠부(蠶婦)>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