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하-
날이 훤히 밝자, 누군가가 주 부인의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침상을 물리던 여종들이 황급히 비켜섰다.
“어머니, 큰일 났습니다.”
사내 두세 명이 대청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식사를 마친 후 몸종이 올린 약을 먹던 주 부인은 약이 목에 걸려 기침을 했다. 주 부인은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가리키며 얼굴이 벌게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라버니들, 무슨 짓이에요. 어머니 놀라셨잖아요!”
안에서 주 부인과 함께 있던 여동생들이 소리쳤다. 주 부인은 한참 만에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너희 부친의 일이더냐?”
주 부인은 몸종이 올린 물을 받을 새도 없이 물었다.
“아니요.”
주씨 가문 공자들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게, 그 바보가…….”
주 부인은 성을 벌컥 내며 찻잔을 들어 내던졌다.
“그 바보가 뭐? 너희도 바보가 됐느냐! 그런 일로 뛰어 들어오게!”
“어머니, 그 바보가 이춘당에서 진료를 시작한답니다!”
공자들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뭐가 어째? 주 부인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네, 맞습니다. 저희가 방금 거리에 갔다가 봤어요. 폭죽을 마구 터뜨리며 이춘당이라는 간판도 크게 해 달았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의 낭자가 왔다며 구경하는 사람이 거리를 꽉 채웠더라고요. 얼마나 북적북적한지 모릅니다.”
공자들이 대답했다. 주 부인은 깃발이 나부끼고 폭죽이 팡팡 터지는 가운데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계집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하필 이런 때에! 집안에 어려움이 닥친 이런 때에! 모두가 근심에 잠겨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이런 때에! 그 계집은…….
“뻔뻔한 계집! 우리 주씨 가문이 망하게 생긴 걸 보고, 서둘러 제 살길 찾아간 게야!”
욕을 해대던 주 부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육낭은? 그 애는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구경하러 나간 게야?”
주 부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그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육공자께선 요 며칠 출타하지 않고 집에 계셨어요.”
“뭐 하고 있는데?”
주 부인이 물었다.
주육낭이 붓을 거두자 옆에 있던 몸종이 목을 빼고 들여다봤다.
“구(九).”
글씨를 읽은 여종은 무언가 떠오른 듯 빙긋 웃었다.
“‘구구귀일(九九歸一: 돌고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가다)’의 뜻이에요? 노야께선 내일 저녁쯤이면 경성에 당도하시겠네요.”
주육낭은 잠자코 고개만 가로저었다.
“뭘 하시려고요?”
책상을 정리하던 몸종은 창가 앞에 선 소년을 보며 급히 물었다. 주육낭은 금족령이 내려 집에 갇혀 있었다. 책도 읽고 글씨도 썼으니 이제 연무장에 가려나? 소년은 몸종을 등진 채 천천히 내뱉었다.
“기다린다.”
같은 시각 오전 공무를 마친 유 교리는 붓을 내려놓고 시큰한 눈을 꾹꾹 누르며 숨을 내쉬었다. 수하 관리가 차를 올리며 별다른 뜻 없이 물었다.
“대인, 오늘은 어째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유 교리는 고개를 들어 수하 관리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졌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유 교리는 반문을 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예의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억지스러워 보였다. 수하 관리가 웃음을 지었다.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 대인. 남이 해도 될 일은 남한테 시키세요. 대인께서는 대인이 되실 분 아닙니까.”
대인은 대인이 될 사람이다……. 그 대인은 상공 대인을 말할 테지. 상공 대인이야말로 이부 사람들 눈에 진정한 대인이니까.
유 교리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일세, 아직이야. 직첩을 받기 전까지는 진짜라 할 수 없지. 찻잔을 쥔 유 교리의 손에 툭 핏줄이 섰다가 한참 만에 들어갔다. 뭘 말하기엔 이미 늦은 때였다. 수하 관리는 이미 나간 후였기 때문이다.
유 교리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책상에 기대 숨을 토했다. 가슴이 쿵쾅댔다. 밖에서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정사당과 중서문하성이 가까운 이곳은 오가는 관리가 많아 늘 시끄러웠다.
유 교리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예상대로 진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소의 영전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부시랑의 자리가 공석이 되는 것도 확정됐을 테지…….
“유 교리가 틀림없어.”
그런 말이 귓가에 들리는데도 유 교리는 전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은밀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단순한 풍문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준비해 온 일이니 망상일 수 없었다. 이제 좋은 소식이 들릴 일만 남았다.
인맥이면 인맥, 자질이면 자질, 인품이면 인품,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는데 이보다 적임자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밟으려는 자가 있다면 장담컨대 말로가 좋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무슨 일로든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될 테지.
유 교리는 이를 악물다가 통증에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차를 마셨다. 벌써 차가 식었는데도 웃고 떠드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유 교리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정사당 쪽으로 향하는 통로는 바람이 잘 통하고 서늘해서 여름이면 더위를 피하려는 이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유 교리가 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다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교리 대인,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오늘은 뭘 드세요? 그러지 말고 저희와 함께 나가시죠. 만날 장아찌만 드시지 말고요.”
“안 갚으셔도 됩니다. 거저 얻어먹는 거 아니에요.”
유 교리는 언제나 상냥했고 아랫사람과도 농담을 잘했기에 놀리는 말도 웃어넘겼다. 그런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나무 막대 소리가 들리더니 사관 쪽에서 지팡이를 짚은 소년이 사환의 부축을 받아 나왔다.
준수한 외모에 기품이 느껴지는 소년이었지만, 손에 든 지팡이는 수려한 산수화에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처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진씨 가문 절름발이가 요즘 자주 보이네.”
“귀덕낭장의 일을 수소문하려는 거겠지.”
“그 ‘아둔 주씨’ 가문의 공자와 친하다던데.”
그랬군. 그럴 만도 하지. 유 교리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씨 가문의 아들과 진씨 가문의 아들이 가까운 사이인 건 유 교리도 알고 있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던 당시 예상했던 일이므로 놀랄 것도 없었다.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알아본들 어쩔 텐가? 합당한 근거가 있고 마침 폐하께서 격노하신 상태인데. 필사적으로 두둔해야 할 친 부자지간이 아닌 이상 선뜻 나서서 도울 이는 없었다.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에 누가 감히 나서겠는가.
물론,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조사를 시작한 이가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련자 중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일을 매듭지으면 된다. 근데 과연 그렇게 될까? 아무튼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유 교리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니 아둔 주씨는 내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경성 바닥에서 사라져야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고 난 기필코 해낼 것이다.
오늘 강주 바보가 이춘당으로 왔고 태평거도 유 교리의 재산이 됐다. 물론 태평 두부도 이제 정씨의 것이 아니다. 손을 대자마자 재산이 줄줄이 넘어오니 실로 통쾌했다. 호시탐탐 노리던 놈들에게도 경계가 됐을 것이다. 이 세상엔, 건드려선 안 되는 인물도 있는 법!
이제 승진의 기회가 왔고, 매사가 순조로울 것이다. 좋은 소식이 끊이지 않겠지.
“저거 봐, 이쪽으로 오네.”
“당연히 와야지. 사람이 이리 많은데 놓칠 수야 없지 않겠소.”
관리들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진십삼을 보고 웃으며 수군거렸다.
“공자, 오셨소?”
관리들이 인사를 건네자 진 공자도 웃으며 예를 표한 다음 유 교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유 대인.”
진 공자가 지팡이를 짚으며 가까이로 걸어오자 유 대인이 얼른 부축했다.
“공자, 이리 앉으시구려.”
유 대인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진 공자는 유 대인의 팔을 잡았다.
“유 대인, 경하드립니다.”
경하라……. 이 절름발이는 제 아버지의 관청에서 나왔으니 아버지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들었을 터, 그럼 확정된 건가?
유 교리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가 곧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공자, 농담도 잘하시오. 갑자기 경하라니?”
유 교리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다들 이 늙은이를 놀리는구먼. 당치 않소이다, 당치도 않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 교리! 교리 대인 계십니까?”
다들 웃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중서문하성 관청에서 하급 관리 하나가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 교리, 검정 대인께서 유 교리를 모셔 오라십니다. 어서요, 어서.”
하급 관리가 멀리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검정 대인! 중서문하성 검정 대인이 부르다니! 무슨 일로? 평소 공무로 왕래할 일도 없는데 갑자기 부른다고? 인사와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야 본인을 부를 리가…….
유 교리의 귓가에 소리가 웅웅 울렸다.
“대인, 경하드립니다!”
진 공자는 유 교리의 팔을 세게 내리치며 유 교리의 귓가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경하드립니다! 이제 이부시랑이 되는구나! 시랑이 된다고!
유 교리의 가슴속에서 맹렬한 기세가 솟구치는가 싶더니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귀가 울렸다.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 같은데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유 교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문득 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본심을 드러내는 건 절대 안 되니까. 유 교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자 손을 뻗었다. 그 초조하고 답답하고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누르려 했다. 손을 뻗으려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 하! 내가 시랑이 됐다! 시랑이 됐어!”
유 교리는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유 대인!”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며 태의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어서 흔들어 깨우세요!”
진 공자가 소리쳤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급 관리가 그 말에 곧바로 손을 들어 유 교리의 따귀를 후려쳤다. 유 교리는 순간 손뼉 치는 것을 멈추고 웃음도 뚝 그쳤다. 하지만 그대로 쓰러지면서 입이 돌아가고 눈에 초점이 흐려졌다. 입에서는 계속 침이 흘러나왔다.
관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태의원까지는 너무 멀었고 사람을 부르러 갔다 한들 시간이 오래 걸릴 터였다. 다들 유 교리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판단을 내렸다.
풍질(風疾: 중풍)이구나! 이건 태의가 온다 해도 소용없어!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이들의 소리와 유 교리의 측근들이 내는 울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이춘당으로 가십시오!”
진 공자가 소리쳤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의 낭자가 이춘당에서 진료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그리로 모셔 가세요!”
진 공자는 울고 있는 유 교리의 측근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춘당은 유 교리의 숨겨진 재산이었고, 이제 그곳엔 신의 낭자가 있으니 그곳이 제일 안전했다.
“이춘당으로 가자! 이춘당으로!”
측근도 울며 소리쳤다. 그래, 그래. 거긴 신의 낭자가 있어!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인간관계가 좋았던 유 교리였기에 갑자기 병을 얻었으니 다들 초조해하며 어떻게든 도우려 했다. 들것을 구해 오고 하급 관리들이 유 교리를 옮겼다.
이춘당 밖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두칠 역시 다친 팔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목에 힘을 주고 구경을 왔다.
“정 낭자,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좋을 게 뭐 있어? 신의 낭자의 얼굴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 좀 봐. 앞으로는 대청에 나와 진료를 받아야지 규방 여인처럼 들어앉아 있으면 못써. 어차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여야 하잖아.”
두칠은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닦달했다. 여인이 곧 목숨을 잃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두칠은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심기가 불편했다.
정교랑은 두칠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약포를 둘러봤다. 두칠은 그런 정교랑의 반응이 못마땅했다.
“약포가 꽤 괜찮지? 이제 정 낭자가 있으니 떼돈을 벌 수 있을 거야.”
“훌륭하네요.”
이번에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교랑이 약롱의 서랍을 열어 그 안에 있는 약재를 살피자 두칠은 콧방귀를 뀌었다.
“훌륭하든 안 훌륭하든, 낭자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난 걱정 안 해요. 누가 걱정한대요?”
정교랑이 서랍을 밀어 넣으며 대꾸하자 두칠은 속으로 침을 퉤 뱉었다.
뭐가 어째? 여기가 태평거인 줄 알아? 여기 주인은 네가 아니라고!
“그래? 아무튼 돈 많이 벌길 바랄게.”
두칠이 심두렁하게 대꾸했다. 정교랑은 더 이상 두칠을 상대하지 않고 다른 곳을 둘러봤다. 자신의 물건을 꼼꼼히 살피는 듯한 모습이었다. 두칠은 볼수록 속이 뒤틀려 비꼬는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는 아직도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그 시끄러운 폭죽 소리 사이로 마차 소리와 발걸음 소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비켜요. 신의 낭자, 어서 구해 주십시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두칠이 문가로 가자 거리에서 들것을 든 무리가 우르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칠은 절로 웃음이 났다.
“하하.”
두칠은 고개를 돌려 안을 보며 웃었다.
“정 낭자는 정말 복덩이야. 들어오자마자 목숨을 구해 달라는 사람이 찾아왔네!”
두칠은 안을 향해 소리친 후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어떤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었나 모르겠네.”
싱글벙글 웃으며 인파를 살피던 두칠은 순간 얼굴이 싹 굳어 눈을 부릅떴다. 저 맨 앞에 있는 시종의 모습이 어째 낯이 익은데?
“비키시오, 비켜. 노야를 구해야 하오.”
사람들에게 길을 열라고 소리치던 유 교리 측근의 눈에 두칠이 들어왔다.
“두칠, 어서 정 낭자더러 노야를 구하라고 해라!”
“어느…… 노야요?”
두칠이 얼떨떨한 채 물었다. 양조부께서 관청에 나갔다가 손님을 물고 오셨나? 양조부의 지인이면 거기도 노야겠지. 두칠은 곧 들것 위에 누운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도 여러 번 빨아 풀을 먹인 바람에 이미 나달나달해진 익숙한 관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이 아니라 쭈글쭈글 구겨지고 오물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 위에 누운 노인 역시 다정하고 온화한 모습이 아니라 눈에 초점을 잃고 입이 돌아간 모습이었다. 몸 위에 올려 둔 손은 쉴 새 없이 떨려 혐오감을 자아냈다.
두칠은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쪽 빠졌다. 귓가가 웅웅 울렸다. 주변 사람이 뭐라고 떠드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노인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 생각지도 못했네요. 여기 들어온 첫날, 처음으로 받는 병자가 유 대인일 줄이야.”
무뚝뚝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두칠의 귀에는 천둥이 내리치는 소리로 들렸다. 몸이 굳은 채로 두칠이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무표정한 여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복이 많은 걸까요? 재수가 없는 걸까요?”
정교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두칠을 보며 물었다.
“유 교리가 실성을 해?”
놀란 진 노태야가 서책을 내려놓으며, 방금 급히 돌아온 진소를 보며 물었다.
“네, 방금이요. 다들 약포로 달려가 봤습니다.”
진 노태야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매사 신중하고 자신을 끔찍이 위하는 사람 아니더냐. 식사는 변변치 않게 챙겨 먹어도 몸은 튼튼했는데. 아니, 어쩌다 갑자기 실성을 해?”
“실성이라고 볼 순 없고, 방금 진단한 바로는 풍질이랍니다.”
진소는 여전히 복잡하고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풍질이라면 실성만도 못한데. 진 노태야는 더욱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실성하여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다면 남들 눈엔 웃음거리로 보일지 몰라도 자신은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채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풍질이라면 속으로 정신은 멀쩡한데 몸만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속이 끓고 애가 닳는 것 역시 자신이었다.
“그 여인이, 그런 것이냐?”
진 노태야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천신도 아니고 사람의 생사를 관장하다니? 황당한지고.
“그 여인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소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춘당 약포로 들어가 의원까지 된걸요.”
그 일은 진 노태야도 알고 있었다. 진 노태야와 진소 역시 사태의 추이를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 교리와 화해하고 태평거를 배상했으며 의술로 협업을 하자고 제안한 것 역시 자발적인 일이었다. 두 부자는 혼란스러운 눈길로 상황을 지켜봤다. 어린 낭자가 가엾긴 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어 지난 일을 여러 번 곱씹던 차에 느닷없이 풍질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실내는 침묵에 잠겼고, 두 부자는 얼떨떨한 채로 있었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진 노태야가 불쑥 입을 열자 진소가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풍질은 불치병이지.”
진 노태야가 말했다. 그래,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진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진 노태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 낭자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
진소가 말뜻을 퍼뜩 깨달았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모든 게 이토록 공교롭다니, 모든 게 이토록 완벽하다니.
풍질은 불치병이지만 바로 죽는 병은 아니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병이었다. 차라리 그 무뢰배들처럼 단번에 목숨을 잃으면 속이라도 시원하지! 죽느니만 못한 삶 아닌가. 유 교리의 앞길과 미래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풍질에 걸린 사람은 폐인이다. 일개 폐인이 그 누구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까.
진 노태야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서가를 바라봤다. 거기에도 글씨가 걸려 있었다.
구(九).
“구 일째구나.”
진 노태야가 중얼거렸다.
구구귀일,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계략이 뛰어났던 걸까?
“정 낭자, 유 대인은 어떠시오?”
관리들 중 우두머리가 나서서 물었다. 이춘당의 대청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관리도 있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 교리의 가족들도 있었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대청에 끊이지 않았다.
정교랑이 들것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리자, 모두의 시선이 정교랑에게 집중됐다.
수수한 옷을 입은 소녀는 머리를 묶은 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모두를 쳐다봤다. 이 무겁고 침통한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인파 뒤로 밀려 한쪽 벽 모퉁이에 있는 두칠도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며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결코 우연이 아니야.
“괜찮아요, 괜찮아.”
정교랑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은 더욱 기쁨에 겨워 울음을 터뜨렸다.
“목숨엔 지장 없어요.”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그럼 어서 치료해 주십시오, 낭자.”
가족들이 소리치자 정교랑은 가족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내가 못 고쳐요.”
모두가 놀라 멈칫했다.
“다른 고명한 의원을 찾아가 보세요.”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이 자리를 뜨려 하자 가족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붙잡았다.
“낭자, 낭자는 도조 이 진인의 제자가 아닙니까. 낭자보다 고명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소리쳤다. 중요한 사실이 떠오른 듯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낭자, 치료비는, 치료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1만, 2만, 아니 3만 관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병이 중하면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고 마음이 급하면 만 관도 아깝지 않은 법,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유씨 일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검소하고 시집가는 여식의 혼수조차 마련하지 못하여 사위에게 혼수를 외상으로 달아 놓던 유씨 가문에서 지금 당장 3만 관을 가져오겠다고?
유씨 일가는 아우성을 쳤지만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첫째, 난 이 도조인지 뭔지의 제자가 아니에요. 그건 풍문일 뿐이죠.”
“누구의 제자든 상관없어요. 죽은 사람도 살린다면서요? 어서 우리 노야 좀 구해 줘요.”
유씨 일가의 사람이 초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를수록 눈앞의 여인은 더욱 침착하고 태연해 보였다. 여인은 법도를 지켜 다시 한번 천천히 예를 표한 후 대답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건 맞아요.”
고개를 든 정교랑은 가족을 쭉 훑어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들것 위의 유 교리를 보며 말했다. 유 교리는 실려 올 때의 모습에서 눈만 꼭 감은 채 계속 침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 대인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에요.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치는 게 내 원칙이죠. 그러니, 난 고칠 수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 괜찮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괜찮기에, 그녀는 고칠 수 없었다.
이건 풍질이다. 풍질을 고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뭔가 다행이긴 한데, 거참 낭패로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의 표정은 복잡했지만, 속으로 하는 생각은 다들 똑같았다.
죽을병에 걸린 것만도 못하게 됐네.
이춘당은 울음바다가 되어 아수라장이었고, 이춘당 밖에 모인 구경꾼들 역시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이 나도 어쩜 이렇게 시간대를 딱 맞춰 신의 낭자가 오자마자 났담.”
“그러니 운이 좋은 사람이지, 하하하.”
“대관절 누구기에?”
“관료들이 많이 온 걸 보니 거물이 틀림없어.”
시끄럽게 떠드는 인파 속에서 바구니를 들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열두세 살쯤 된 여자아이가 인파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춘당 밖은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벌써 병사들이 나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이자 병사들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아이는 겁을 먹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까치발을 들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아는 사람이라도 본 듯 눈빛을 반짝였다.
“어서 가라. 어서 집에 가서 가져와.”
대청 안에서 여인이 울며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노야, 무사하셔야 해요.”
울음소리와 함께 소박한 옷차림에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사내 둘이 뛰어나왔다. 사내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야윈 당나귀를 타고 인파를 가로질러 떠났다.
여자아이는 다소 흥분한 듯 들고 있던 바구니를 미세하게 떨었다. 곧이어 아이도 뒤돌아 인파를 헤치고 빠져나갔다. 잽싸게 달음박질치는 아이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아니, 저거 덕승루(德勝樓) 주 낭자의 몸종 아니야?”
옆으로 비켜서던 행인들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덕승루가 어딘데요?”
말을 끌던 사환 하나가 물었다. 경성 땅을 처음 밟아 호기심이 넘치는 눈빛이었다.
시골 촌뜨기로군, 덕승루도 모르다니. 행인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경성에서 제일 유명한 주점이라오.”
행인들이 대답했다.
“주 낭자가 연 곳이에요?”
사환의 물음에 행인들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둔하긴. 주 낭자는 덕승루의 간판 기녀지.”
왁자지껄 웃는 소리에 사환의 얼굴은 붉어졌고, 옆에 있던 소년이 사환을 노려봤다.
“괜한 말 지껄이지 마라.”
소년이 삿갓을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네, 공자님. 일단 묵어갈 곳부터 찾아보죠.”
정사낭이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은 역시 보통 화려한 곳이 아니구나.
“가자. 잠시 쉬었다가 장강주 선생을 찾아봬야지.”
정사낭과 사환 둘이 거리를 가로질러 떠났다.
날이 저물 무렵 마차 한 대가 주씨 저택의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말에 탄 사환들이 굳게 닫힌 대문을 보며 소란스레 떠들었다.
“웬 소란이야!”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던 문지기가 문을 열어보고 멈칫했다.
“노야!”
노야께서 돌아오셨다! 그 외침에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주씨 저택은 삽시간에 떠들썩해졌다.
“노야…….”
주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여종들의 부축을 받아 나왔고, 집에 있던 공자들과 낭자들 역시 흥분되면서도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뒤따라 나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주 노야는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노야, 우선 진정하고 좀 쉬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들어가서 얘기하죠.”
주 부인이 울며 말했다. 놀란 마음을 안고 먼 길을 쉴 새 없이 달려온 탓에 주 노야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더욱 마음이 아려 왔다.
“아니오, 벌써 알아봤소.”
주 노야가 손을 내젓자 안에 있던 가족들은 모두 멈칫했다.
“돌아오는 길에 곧장 관청부터 들렀는데, 아주 아수라장이 됐더군.”
주 노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방금 본 일을 떠올렸다.
“몇 사람을 붙잡고 대체 누가 내 등에 칼을 꽂은 건지 물어봤더니, 다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더군. 하나같이 축하한다는 말만 했소.”
축하한다고?
“그 인간들이 사람을 놀린대요?”
주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소리쳤다.
“그게 아니오.”
주 노야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니오. 이 일은 이제 끝났다는 뜻이었소.”
안에 있던 가족들은 또다시 멈칫했다.
“무슨 말이에요?”
주 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난 아무 일 없단 거요. 며칠 후면 정리될 거라고 하더군.”
주 노야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 일 없다고?
“그렇소. 지금 날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했소. 이부의 유 교리가 오늘 아침에 관청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다들 거기 신경 쓰기 바쁘다더군.”
대신들은 어서 돌아가라며 주 노야를 재촉했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며칠 후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술을 마시는 것은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함이 아니다.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주 노야한테 일이 생긴다면 행여 불똥이라도 튈세라 멀리 피했을 테니 말이다.
주 노야는 저도 모르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유 교리는 언제나 근면 성실하고 유능한 분이잖아요. 그리 올곧은 분마저 갑자기 병을 얻으니, 조정에서 대신들을 배려해 사건들을 관대하게 처리하기로 했나 봐요.”
그러면서 주 부인은 대체 무슨 병이냐고 물었다.
어찌 보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고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사대부를 우대하여 나이가 많은 관료는 황제 앞에서도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했다.
“이미 실려 나가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소. 같이 따라간 이들은 아직 안 돌아왔고.”
주 노야가 말했다. 솔직히 내 코가 석 자니, 무슨 병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쨌거나, 내 등에 칼을 꽂은 인간만 헛수고한 꼴이 됐군. 역시 계략이 아무리 뛰어나도 좋은 운엔 못 당하는 법이야.”
주 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막 안으로 들어서던 주육낭이 그 말을 들었다. 주육낭은 기쁘면서도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가족들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틀렸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운도 훌륭한 계략엔 못 당하는 법이죠.
“아버지.”
주육낭은 안으로 들어와 꿇어앉고 주 노야를 쳐다봤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 된 사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소식을 막 받았을 때처럼 위급한 일은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집에 있던 부인과 자식들이 사정을 몰라 일을 떠벌렸던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나?
주 노야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한시름 놓게 됐다. 차를 한 잔 마시며 걱정 어린 가족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환히 밝힌 등불과 고요한 여름밤의 정취는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육낭, 왔구나. 어서 앉아라. 요 며칠 너도 많이 놀랐지?”
주 노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육낭은 잠자코 있었지만 어린 낭자들이 입을 삐죽였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오라버니가 놀라긴요.”
미인의 환심을 사러 다니느라 바빴던걸요. 낭자들은 고자질을 하려 했지만 주 부인이 막았다.
“그 얘긴 그만해라.”
남도 아니고 가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게 할 순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육낭의 말에 주 노야와 주 부인은 눈을 마주쳤다. 주 부인은 짚이는 게 있는지 안색이 변했다.
“육낭, 네 아버지는 이제 막 돌아오셨어. 뭐가 중요한 일이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 일인지, 잘 판단해.”
주 부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천것이 요 며칠 주육낭을 또 어떻게 꼬드겼기에, 이렇게 한시라도 빨리 말하지 못해 안달인지, 원.
“알고 있습니다.”
주육낭이 예를 표했다. 형제와 자매가 모두 물러가고, 대청에 있던 몸종들과 여종들도 자리를 피했다. 대청에는 주 노야 내외와 주육낭 세 사람만 남았다.
“아버지, 유 대인은 풍질을 얻으셨습니다.”
주육낭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풍질? 거 안타깝게 됐군! 그런 병을 얻었다면 끝났다고 봐야지. 어차피 시간만 끌 뿐이야.
“세상에, 유 대인처럼 좋은 분이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누. 네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사람이나 그리돼야 할 텐데.”
주 부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모아 합장했다.
주육낭이 실소를 터뜨렸다.
“어머니, 소원을 이루셨네요.”
주 부인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무슨 소원을 이뤄?”
주육낭은 부모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어머니, 금족령이 내려 제가 요 며칠 집에만 있었는데, 유 대인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어찌 이렇게 잘 아는지 아십니까? 관청에 다녀오신 아버지도 모르는 일을요.”
주육낭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넌 발이 묶여 있었지만, 네 아랫것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녔잖아.”
주 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미인 내가 그만한 사정도 모를까 봐? 모르는 척 눈감아줬을 뿐이야.
“네, 제 아랫것이 계속 소식을 알아봤습니다. 유 대인에 관한 소식을 알아봤죠.”
주 부인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주 노야가 멈칫하며 무언가 눈치챈 듯 손을 들어 주 부인을 제지했다.
“네 말은, 그 사람이란 거냐?”
주 노야가 물었다.
그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군데? 주 부인은 어리둥절한 눈치였지만, 남편과 아들을 보며 잠자코 있었다.
“교랑은 두 병자를 치료했죠.”
주육낭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역시 그 계집 얘기였어! 주 부인이 화를 벌컥 냈다.
“그 바보가 또 뭐!”
“어머니, 그 애는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는 어머니와 저, 그리고 유 교리죠.”
주육낭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껏 크면서 모친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 부인은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소자가 무례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일단 제 말씀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다 듣고 나서 판단을 내려 주세요.”
주육낭은 모친을 향해 예를 표한 후 고개를 들었다.
“교랑은 두 병자를 치료했습니다. 그 일로 진씨 가문에서는 저택을 얻었고, 동씨 가문에서는 1만 관을 얻었죠.”
그건 다 알고 있는 일 아닌가. 그 얘길 왜 하는데? 주 노야 내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어머니께서는 동씨 가문에서 받은 1만 관을 대신 관리하려 하셨습니다. 교랑은 거절했고요.”
주 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교랑이 거절한 건, 돈을 써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육낭은 모친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그 돈으로 주점을 사들였죠.”
주점? 주 노야가 흠칫 놀랐다. 돈을 굴릴 생각이었나 보군. 그런데 연약한 여인 혼자서 주점을 연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옆에 있던 주 부인은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태평거!”
주 부인이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태평거? 주 노야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경성을 떠나기 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곳이오?”
주 노야가 부인의 놀란 표정을 보며 물었다.
“아주 유명하죠…….”
중얼거리던 주 부인은 다시 주육낭을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러고도 날 안 속였대?”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태평거를 열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전의 얘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그 애를 진씨 저택에서 데려온 후 얼마 안 됐을 때, 한번은 제가 밥을 사 주겠다고 데려간 일이 있습니다.”
주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였네. 허구한 날 그 계집을 데리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더니, 대체 나 몰래 얼마나 많은 짓을 한 거야! 일단 끝까지 들어나 보자. 다 듣고 따져야지!
“그땐 경성 밖에서 신선거가 막 떠오르기 시작할 때였어요. 그래서 데려갔죠.”
“그건 그래야지. 누이가 경성에 처음 올라와서 가 본 곳이 없을 테니, 견문을 넓혀 주는 게 당연해. 신나게 먹더냐?”
주육낭이 웃음을 지었다.
“신이 났는지는 모르겠고, 신선거의 주인과 숙수가 신이 났던 건 확실합니다. 과로신선을 알려 준 지나가던 신선이 바로 정교랑이거든요.”
뭐야? 주 노야 내외가 멈칫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과로신선의 내력에 대해서는 두 분도 아실 겁니다.”
알다마다. 그때 집안 식구들도 다 같이 가서 먹었잖아. 과로신선의 내력에 대해서는 신선거 벽에 큼지막하게 글도 쓰여 있고 그림도 걸려 있었으니 알지. 말은 신선이라지만, 그 말을 누가 믿누?
“내력은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신선이 아니라 사람이었죠.”
거기까지 말한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밖에 대고 소리쳤다.
“조 집사!”
문이 열리더니 조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예를 표하고 꿇어앉았다.
“자네와 진 사노야가 교랑을 데리고 경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러 밥을 먹은 곳에 대해 두 분께 말씀을 올리게.”
주육낭의 말에 조 집사는 네 하고 대답한 후,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주 노야 부부는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 집사의 이야기를 듣고 주육낭의 말을 곱씹어보자 대충 이해가 갔다. 너무 놀라운 일이라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그럼, 그 애가?”
두 사람이 놀라 물었다.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원래 음식을 잘하거든요.”
주육낭은 손을 내저어 조 집사가 물러가게 한 후, 말을 이었다.
“어머니, 교랑의 일을 알아보러 강주로 사람을 보냈을 때, 여종이 돌아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반근의 음식 솜씨가 좋아 정씨 저택에서 싸움이 났다고 했죠. 그런데 반근을 데려와 보니 그저 그런 솜씨였습니다. 아씨한테 배웠다는 말만 반복했고요.”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바보로 십수 년을 산 사람이니……. 주육낭이 한숨을 토했다.
“가장 가까운 예로 보자면, 진 상공 댁의 참새 요리도 있죠. 미심쩍거든 사람을 보내 물어보시면 알 겁니다. 교랑이 알려 준 조리법이었어요.”
“그 바보가, 세상에…….”
주 부인이 중얼거렸다.
“그 애는 바보가 아닙니다.”
주육낭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바보가 아니라고?”
주 노야는 생각난 게 있는지 허리를 곧추세우며 물었다.
“그럼 과로신선을 왜 공짜로 신선거에 넘겨?”
공짜로? 주육낭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선거 주인한테 양조부가 있었거든요.”
주육낭은 주 노야를 보며 말했다.
“유 교리입니다.”
유 교리? 화제는 다시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유 교리에게로 돌아왔다.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얼떨떨한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뭐가 뭔지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나중에 신선거가 경성으로 옮겨 온 후, 원래 있던 자리를 사들였습니다. 정교랑이 동씨 가문에서 받은 돈으로 거길 사서, 태평거로 바꿨죠.”
그 바보가 우리 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 많은 일을 꾸몄단 말이야? 주 노야 내외는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만날 밖으로 나돌았구나.
“그 후엔 두부를 만들었습니다. 정씨 두부엔 또 다른 이름이 있죠. 바로 태평 두부입니다.”
태평 두부! 주 부인은 또다시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태평 두부는 또 뭐요?”
주 노야가 물었다. 경성을 두세 달 비운 동안 무슨 일이 그리 많이 생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천상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십 년이라더니.
“돈이에요. 어마어마한 돈이요.”
주 부인이 중얼거렸다.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은 가치로 가늠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말에 주 노야는 바로 이해했다. 그 여인이 식당을 열고 명성까지 얻었군. 정말 뜻밖이야.
“그리 큰일을 벌이면서, 우리한텐 감쪽같이 속여?”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 혼자서 사업을 하겠다니, 빼앗아 가라고 기다리는 꼴 아니냐.”
“맞아, 혼자서 그걸 어떻게 관리해? 정말 양심도 없지. 우릴 뭐로 여기는 거야?”
주 부인 역시 화를 내며 주 노야를 쳐다봤다.
“잘 돌아오셨어요. 난 그 애 단속 못 하니까 당신이 가서 설득하세요. 태평거는 우리가 관리하겠다고요. 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러다 괜히 큰일 나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출가도 안 한 여인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벌인 일이 있었던가?
“어머니, 제 말씀을 끝까지 듣고 나서 그 애를 찾아갈 건지 결정하십시오.”
주육낭은 복잡한 표정으로 주 부인을 쳐다봤지만 주 부인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투였다.
“왜? 내가 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 집안이 아니면, 그 사업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부모를 잃은 고아는 관두고 부모며 처자식이 다 있어도 사내가 죽는 순간 그 재산을 노리고 눈이 벌게져 달려드는 게 인간사였다. 경성에서 허구한 날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딱히 신기할 것도 없어서, 다들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감는 지경이었다.
젊은 애들은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았다.
“두 분 말씀이 맞습니다. 식당과 두부로 돈이 벌리자 이를 시기하는 이들이 생겼죠. 무뢰배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요.”
“그럴 만도 하지. 세상이 그런 법이다.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에 순풍에 돛 단 듯 사업을 일궈 나가는 게 가당키나 하더냐.”
주 노야가 말했다.
“그래서 그 무뢰배들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습니다.”
“거봐라, 거봐. 성가신 일이 생긴다니까. 그러게…….”
혀를 차던 주 노야가 돌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육낭을 쳐다봤다.
“뭐라고? 쏴 죽여?”
주 부인 역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벌건 대낮에 모두가 보는 가운데, 그 자리에서 쏴 죽였습니다. 도합 다섯을, 활로 쏴 죽였죠.”
주육낭은 손으로 활을 쏘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다섯을, 대낮에, 그 자리에서, 쏴 죽였다. 사람의 목숨을, 다섯이나! 주 노야는 하마터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그런 일을 벌여? 그다음엔?”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그다음은 없습니다.”
그다음이 없다고? 주 노야 부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무뢰배들이 태평 두부의 비법을 훔치려 했으니, 죽을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수사가 나서서 증언을 해 주었습니다. 무뢰배들을 사주한 주오는 처벌이 두려워 자결했고요. 증거가 명확하니 태평거는 무죄일 수밖에요.”
주육낭이 말했다.
그리 간단한 일이라고? 보수사가 나서서 도울 정도라면 주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한 일은 아닐 터였다. 주 노야 내외는 얼떨떨한 얼굴로 도로 앉았다.
“간단하게 해결했죠.”
주육낭이 말했다.
“운이 좋았구나. 별일 없었으니 됐다.”
주 노야가 천천히 말했다. 무장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전장을 돌며 살육을 행한 주 노야였지만,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쿵쾅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여긴 전장도 아니고, 상대 역시 오랑캐가 아니었다.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한들 그리 쉽게 죽일 수는 없었고, 감히 그런 짓을 행할 사람도 없었다.
“누가 죽였는데? 그 애가 고용한 호위더냐?”
주 노야는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부정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주육낭이 주 노야를 쳐다봤다.
“아버지,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주인의 명이 아니라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 일로 사람을 죽일 이는 없습니다.”
주 노야는 흠칫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무슨 소리죠? 그 바보의 명을 받고 죽인 거라고요?”
주 부인은 뭐가 뭔지 모르겠는 얼굴로 물었지만 주 노야는 딱히 대꾸하지 않고 주육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계속해 봐라.”
주 노야는 복잡한 표정이었고 차츰 눈빛이 굳어졌다.
“무뢰배를 죽이고도 무사했으니, 태평거를 노리던 이들이 뜨끔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태평거의 배후에 엄청난 뒷배가 있다고 믿게 됐죠.”
주육낭의 말에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하지만 작정하고 알아보고자 하면, 막긴 힘들어.”
“네, 그래서 태평거의 진짜 주인은 정교랑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씨 가문의 존재도 알게 됐죠.”
주 노야가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랬던 게로군!”
주 노야가 허벅지를 탁 내리쳤다. 주 부인은 너무 놀라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 했다.
“내가 대신 표적이 됐어!”
주 노야가 분통을 터뜨렸다.
“내가 뭐랬느냐. 평소에 딱히 밉보인 사람도 없었고, 밉보였다 한들 내가 대비도 안 했겠느냐?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기습을 당하다니! 이제 보니 그런 내막이 있었군!”
주 부인이 그제야 이해했다.
“하여간 화근덩어리!”
주 부인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 오랫동안 전전긍긍하며 애태운 일이 뜻밖에도 그 여인이 불러온 화 때문이었다니! 벌써 내쫓은 지 오래인데, 그 불운이 달라붙어 아직까지도 안 떨어졌구나!
주씨 저택에서 병을 치료한다고 소동을 벌일 때와 상황이 똑같았다. 좋은 소리는 그 바보 차지고, 불평과 원성은 주씨 가문에게 돌아왔다.
“그러게 진작 내쫓고 강주로 돌려보내라고 했잖아요! 내 말을 안 듣더니만!”
주 부인은 손에 든 쥘 부채를 쾅 내리치며 분을 못 참고 눈물을 쏟았다.
“그 애가 무슨 일을 벌이겠냐고 했죠? 좀 보세요.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집안을 멸문으로 몰아넣을 일을 꾸몄어요!”
대청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마당까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얼른 마당 문 밖으로 물러났다.
“아버지, 어머니. 제 얘기 아직 안 끝났습니다.”
주육낭은 굳은 얼굴의 부친과 분을 못 참고 눈물을 흘리는 모친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
“더 들을 게 뭐 있어!”
주 부인은 주육낭의 말을 끊고 부채로 주육낭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넌 진작 알고 있었지? 네 부친한테 일이 생겼는데 초조해하기는커녕 허구한 날 밖으로 나돌더니, 이제 보니 진작 알았던 거였어! 그러고도 우릴 감쪽같이 속여? 이제는 그 바보의 편을 들려 하고? 분명히 말하지만 어림없어. 내가 가서 따끔하게 혼내 줄 거야. 무서운 게 뭔지 보여 줘야지!”
“가만히 계십시오, 어머니!”
주육낭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던 주 부인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모르십니까? 그 무뢰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막다른 길에 몰려 자결한 주오와 풍질에 걸린 유 교리도 생각해 보시고요.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대청이 고요해졌다. 주 노야와 주 부인은 멍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 부인이 물었다. 왜 알아듣지도 못할 일들을 한데 엮는 거지?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주육낭은 한숨을 토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육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의 속도를 높였다.
“작정하고 조사한 끝에 정교랑이 태평거의 주인이라는 걸 알아낸 이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씨 가문에 대해서도 파악했고요. 그래서 은밀히 수를 쓴 겁니다. 우선 부친을 좌천시켜 따끔한 교훈을 주고, 세상 사람들한테도 경고하려 했죠.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고, 분풀이도 한 겁니다. 동시에 태평거 숙수의 손도 잘랐습니다.”
손을! 여인인 주 부인은 그 말에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누구 짓이야? 그게 대체 누군데? 어찌 그리 무시무시한 짓을 해?”
“신선거의 주인 두칠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악연이었죠.”
그랬구나. 그런데 일개 식당의 주인이?
“두칠은 어떤 자더냐?”
주 노야가 물었다. 두칠에게 관심이 없는 주 부인은 주육낭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됐는데? 그깟 과로신선이 뭐라고 이렇게 성가신 일들이 줄줄이 생겨?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이미 수습했습니다. 전과 마찬가지로 그 애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그 애의 재산을 탐하려던 자는, 전부 죽거나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됐죠.”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어떻게 수습했다는 게야?”
“유 교리가 풍질에 걸렸잖습니까.”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얘기가 왜 또 유 교리로 돌아가?
“두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두칠에게는 양조부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 교리죠.”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아들의 말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
잠깐만, 잠깐만, 정리 좀 하자. 정교랑, 태평거. 두칠, 신선거. 유 교리, 두칠의 양조부.
두서없이 얘기한 이 모든 게 실은 세 사람과 점포 두 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언뜻 듣기엔 엄청난 격랑이 있었던 듯했지만 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진행됐다.
주 노야는 마침내 아들이 처음에 했던 말을 이해했다.
“아버지, 유 대인은 풍질을 얻으셨습니다.”
“어머니, 소원을 이루셨네요.”
관청에 갔을 때 예상과 달리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었던 게 그래서였군. 별일 없을 거라고 한 말이 이 뜻이었어. 엄중하다면 엄중하고 별일 아니라고 하면 별일 아닌 일이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문제였다.
이제 끝까지 물고 늘어질 사람은 풍질로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고, 아마 평생 일어나긴 힘들 것이다. 일어난다 해도 조정에서 쓰일 일은 없다.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한들, 쓰러지는 그 순간부터 조정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폐인 따위가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그랬던 게로구나, 그랬던 게야. 주 노야는 한숨을 토하고 자리에 앉다가 곧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니까 네 말은…….”
주 노야는 등불에 비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에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애가 그자를 해치웠단 뜻이냐?”
그 애는 누구고 그자는 또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애가 해치운 게 틀림없습니다. 그 애를 넘보는 사람은 모조리 해치워 버렸으니까요.”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주 노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어떻게 한 건지는 저도 모릅니다.”
주육낭은 곧 웃음을 지었다.
“남의 손을 빌려 무뢰배들을 쏴 죽였을 때나, 강주 소현묘관의 관주와 그 정부한테 벼락을 내리쳐 죽였을 때처럼 했겠죠.”
아무튼 그녀가 한 일이다. 아무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강주? 강주 얘기가 왜 또 나와? 주 노야와 주 부인이 아들을 빤히 쳐다봤다.
“어머니, 어머니는 강주로 사람을 보내 교랑의 일을 수소문한 후 자세히 듣지 않으셨지만, 소자는 꼼꼼하게 캐물었습니다. 당초 교랑은 강주의 정씨 저택에서 쫓겨난 후 정씨 가문의 도관에서 기거했는데, 거기가 소현묘관이었습니다. 지금의 현묘관과는 다른 곳이죠. 그 소현묘관에는 관주가 하나 있었는데 바람기가 있어 사내들을 끌어모았답니다. 평판은 형편없었지만 그럭저럭 먹고살았죠. 그러다가 정교랑이 들어간 후 보름 만에 벼락에 맞아 죽었습니다.”
주육낭이 부모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 이 세상에 우연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주육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안 믿습니다.”
느닷없이 벼락이 내리쳐 사람이 죽고, 느닷없이 풍질을 얻어 폐인이 됐다. 세상에 이렇게 느닷없는 일이 많이 생길 순 없었다. 더구나 한 사람에게만은 전부 좋은 쪽으로 느닷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주 노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그 강주 바보가, 정말, 도조 이 진인의 제자라고? 비바람을 부르고 사람의 생사를 틀어쥐었다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애의 재물을 노리거나 그 애의 사람을 노린 이들은, 전부…….”
주육낭이 주 부인을 쳐다봤다.
“어머니, 그래도 그 애의 것을 빼앗고 싶으세요?”
벼락에 맞아 죽은 이야기를 듣고 이미 넋이 나간 상태였던 주 부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떨어뜨렸다. 탁 하는 소리가 고요한 실내에 퍼지면서 귀를 찔렀다.
죽었다. 전부 죽었어. 다들 그 애와 싸우거나, 그 애의 재물을 노린 사람들이었다.
그냥 화근 정도가 아니다. 이건 액운이고 재앙이다. 재앙!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유씨 저택. 조용한 실내에 갑자기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야께서 깨셨어요!”
몸종들의 외침에 곁에 있던 가족들이 기뻐하며 몰려들었다. 정 낭자는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의식을 빨리 회복할수록 회복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 그래서 유 교리의 가족들은 서둘러 태의를 불러왔고, 예상보다 일찍 의식을 회복했다.
침상 위에 누운 유 교리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유 교리를 에워싼 가족들은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호전의 기미가 전혀 없어…….
“노야, 절 알아보시겠어요?”
가족들은 유 교리를 에워싸고 눈물을 쏟았다. 유 교리는 흐릿한 눈빛으로 몸을 떨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 태의.”
유씨 저택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던 이 태의가 소리를 듣고 옆방에서 건너왔다. 가족들이 이 태의를 에워쌌다.
“우리 노야를 살릴 방법이 없는 거죠?”
가족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본디 살릴 방법이 없다는 말은 고통스럽고 절망적으로 해야 하는 법인데, 가족들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환희가 섞여 있었다.
세상이 어쩌다 이리 괴이해졌는지! 이 태의는 잿빛이 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망할, 곧 죽는단 말을 듣고 싶어서 날 불러온 거야? 그 말을 앞세워 신의인지 뭔지를 불러오려고?
“못 구합니다!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부르십시오!”
이 태의는 불쾌한 듯 소리치고 옷소매를 뿌리치며 나가 버렸다.
다른 때였다면, 다들 벌벌 떨며 사과하고 서둘러 이 태의를 붙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둘러라, 어서. 어서 노야를 정 낭자께 모시고 가라!”
집 안은 금세 어수선해졌다. 서로 밀고 밀치며 우왕좌왕 소란이 일더니 곧 조용해졌다.
“사부님, 사부님.”
문 앞에서 약상자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사부를 찾던 아이는 병풍 옆에서 손으로 탁자를 짚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스승을 발견했다.
“사부님!”
아이가 달려왔다. 아이는 방금 전 소란 속에서 이리저리 밀쳐진 사부를 쳐다봤다. 머리를 고정했던 관이 떨어지면서 흰머리가 헝클어졌다. 이 태의는 관을 줍지 않고 도리어 웃음을 터뜨렸다.
“못난 놈!”
이 태의는 분을 참지 못했다. 아이는 얼른 이 태의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사부님, 다들 어디 간 거예요?”
“가자!”
이 태의는 비틀비틀 걸어 나가며 소리쳤다.
“유씨 일가에 대해 고할 것이다! 내게 치욕을 줬어! 치욕을! 이 길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농사나 지으면 그만이야!”
같은 시각 옥대교. 식사를 마친 정교랑은 실려 들어오는 유 교리를 쳐다봤다.
“난 못 고친다고, 말했잖아요.”
“정 낭자,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태의가 못 고친대요.”
유씨 일가는 울며 매달렸다.
“괜한 걱정 마세요. 안 돌아가실 거예요.”
유씨 일가는 그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살릴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칠 듯이 기뻐하더니, 안 죽을 거란 말에 비통해 어쩔 줄 몰라 하다니,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들것 위에 누워 있던 유 교리의 눈빛이 차츰 또렷해졌다.
정 낭자, 제발 부탁드립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정 낭자라면……. 정 낭자!
“나도 유 대인이 얼른 좋아지시길 바라요. 유 대인처럼 좋은 분이 계시면,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뻣뻣하고 갈라진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오자, 유 교리는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꿇어앉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이 느껴졌는지 여인도 고개를 돌렸다.
유 교리는 이 여인의 얼굴을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본 것 같았다. 짙은 청색의 치마와 덧옷을 입고, 긴 머리는 뒤로 넘겨 하나로 묶었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의 미인, 아주 대단한 미인이었다.
전에는 재물 생각에 사람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유 교리는 가진 것에 분수를 알고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꼼꼼히 보니 재물을 손에 넣고 난 후 가능하면 사람도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미인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미인의 두 눈은 크고 밝게 빛났다. 어찌나 하얗게 빛나는지 검은 눈동자가 깊은 늪이나 못처럼 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경성에서 어렵사리 입지를 굳히게 됐는데,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순 없어요. 유 대인, 유 대인도 알고 계실 거예요.”
어렵사리 입지를 굳히게 됐는데, 절대 남에게 빼앗기진 않을 것이다. 나를 망치려 든다면 너부터 짓밟아 버릴 것이다.
저 여인이구나! 저 여인이야! 어쩐지 어딘가 이상하다 싶었다. 왠지 이상하다 싶었어!
일이 이상하다 싶을 땐 틀림없이 이상한 곳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상대가 어린 소녀고 일개 바보라 방심했다. 이 강주 바보가!
“강주…… 바보…….”
속으로는 미칠 듯이 외쳐댔지만 유 교리의 입가에는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보세요. 대인께서 소리도 내세요.”
정교랑은 유 교리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인, 이 병으로는 안 돌아가세요. 다행이죠, 다행이에요.”
다행? 다행?!
유 교리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욕하고 울부짖으며 분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와 분노와 절망이 순식간에 엄습하여 질식할 것 같았다.
“죽여라!”
유 교리는 힘을 짜내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정교랑을 가리키며 말을 내뱉었다. 이번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모두 똑똑히 들었다. 유씨 일가 사람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교랑은 표정 변화 없이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노야께선 병으로 의식이 온전치 않으십니다.”
유씨 일가 사람들은 서둘러 정교랑에게 해명하고 다시 애걸했다.
“정 낭자, 정녕 고칠 방법이 없겠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돈을 벌 수 있는데, 나라고 안 벌고 싶겠어요?”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거두고, 유씨 일가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예를 표했다.
“다만, 운명에 없는 건, 억지로 바랄 수 없죠.”
유씨 일가는 실망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정교랑은 다시 고개를 돌려 유 교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병을 고칠 순 없지만, 이 병에 대해 아는 건 있어요. 이런 병은 마음을 편히 가지고,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 빨리 나을 수 있죠. 그걸 못 하면…….”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세가 점점 더 심각해질 거예요.”
마음을 편히 가져라? 유 교리는 여인을 쳐다보며 저주 섞인 욕을 웅얼거렸지만 뭐라고 하는 건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결국 유 교리는 손을 축 늘어뜨리고 정신을 잃었다.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는 일도 거의 없던 유 교리가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두 번이나 혼절했다. 차이가 있다면 처음엔 기쁨에 겨웠기 때문이고, 이번엔 분을 못 이겼기 때문이었다.
대청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지만, 이번에도 슬퍼하거나 비통해하는 이는 없었다.
“정 낭자! 이젠 돌아가시겠지요? 고칠 수 있습니까?”
소란한 와중에 사람들이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환희가 묻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마당에 있던 금가아는 저도 모르게 코를 비볐다. 경성은 정말 희한하고 기괴한 곳이야. 좋은 구경 많이 하네.
<교랑의경> 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