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선-
마당은 매미 소리로 시끄러웠다. 날이 추울 땐 따스한 봄날만 기다렸건만, 따스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여름이 왔다.
주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매미가 왜 이렇게 극성이야!”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있던 여종과 몸종이 그 말에 얼른 뛰어나갔다. 마당의 매미는 더욱 요란하게 울어대다 이내 잠잠해졌다.
주 부인은 부채를 내려놓고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서찰을 쳐다봤다.
“퉤, 어디서 감히! 자기네 친정 사람을 찾다니, 그 의도가 뭔지는 바보도 알겠다!”
“부인, 지금은 화내실 때가 아니에요. 노야께 뭐라 회신을 보내지요?”
여종이 옆에서 타일렀다.
“뭐라고 하긴?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해야지! 우리 주씨 가문 아직 안 망했어. 재취 주제에 감히 우리 가문 낭자를 망치려 들다니! 노야는 옛날 성미 어디 가신 게야? 그 뻔뻔하고 천박한 부부를 그 자리에서 흠씬 두들겨 패시지 않고! 알아보긴 뭘 알아봐!”
주 부인이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마차를 준비해라. 내 강주로 가야겠다.”
여종들이 다급히 말렸다.
“부인, 이번에 거절하더라도 다음번에는요? 그냥 혼담일 뿐입니다. 두 다리 달린 사내를 찾는 게 어려울 건 없잖아요. 한 번 거절하고, 두 번 거절하고, 세 번 거절하면, 정씨 가문에서 우리를 의심할 거예요. 어쨌거나 교랑 아씨는 정씨잖아요.”
그 점은 주 부인 역시 똑똑히 알았다. 부채질하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부인,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다른 여종이 웃으며 나섰다.
“정씨 가문에서 교랑 아씨의 혼처를 찾았다면, 우리라고 못 할 건 없죠. 누가 고른 혼처가 더 나은지 비교해 보면 되잖아요.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정한걸요.”
주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한텐 내 체면을 구기려 드는 친정이 없어서 말이다. 가난해서 정신이 나간 친척도 없고.”
“부인, 사실 교랑 아씨가 그리 안 좋은 상대는 아니에요.”
여종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전에는 병을 앓으셨다지만 지금은 다 나으셨잖아요.”
“맞아요, 부인. 잊지 마세요. 전에 여러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왔잖아요.”
다른 여종도 거들었지만 주 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탐냈던 거고, 지금은 재주가 다하여 찾아오는 이도 없잖아! 그때 바로 응낙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응낙했으면 지금쯤 틀림없이 혼인을 물렸을 텐데 그게 웬 망신이야! 진(秦)씨 가문을 봐라. 우리가 응낙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을 번복했잖아.”
여종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 큰 경성에 마땅한 상대 하나 없겠어요?”
주 부인은 부채를 흔들며 냉소했다.
“그러게 누가 바보로 태어나랬나. 지금은 나았다지만, 바보였던 과거는 지워지지 않아.”
바보로 태어났고, 모친이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둘 중 하나만 해도 눈총을 받을 텐데, 두 가지를 다 갖췄으니. 제대로 된 집안에서 이런 아이를 며느리로 들일 리가 없지.
“좋은 집이면 그쪽에서 눈에 안 찰 테고, 떨어지는 집이면 정씨 가문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멀쩡한 사람을 당장 어디 가서 찾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주 부인은 부채를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으며 화를 냈다.
마당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있던 몸종들이 예를 올렸다.
“공자님, 오셨어요?”
주 부인이 고개를 들자 성큼성큼 들어오는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연무장에서 막 돌아오는 길인지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어머니, 아버지께 서찰이 왔다고요? 무탈하시답니까?”
안으로 들어온 주육낭은 옷을 털고 꿇어앉아 문후를 올렸다. 잠자코 주육낭을 쳐다보던 주 부인의 눈이 꿈틀했다.
해가 바뀌면서 열일곱이 된 주육낭은 또 키가 많이 컸다. 게다가 오랫동안 무예를 수련하여 그런지 또래보다 훨씬 늠름해 보였다.
“어머니?”
주육낭은 영문을 모르겠는 듯 다시 한번 불러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자신을 쳐다봤다. 어디가 이상한가?
주 부인이 시선을 거뒀다. 다소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겠어. 일단 정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하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는 수밖에.
“육낭, 진 공자는 요즘 잘 지내고?”
주 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주 부인의 말에 주육낭은 당황한 눈치였다. 진 공자의 몸이 불구인 탓에 주 노야 내외는 진 공자에 관한 질문을 일부러 피해 왔다. 그런데 오늘은 왜 갑자기 진 공자에 대해 물으시지?
“요 며칠 못 봤습니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그 망할 계집이 큰소리를 치며 사람을 갖고 논 바람에, 괜히 너한테 화가 미쳤을까 그러지.”
주육낭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아닙니다. 십삼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 속은 아무도 몰라.”
주 부인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주육낭을 보며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가엾은 내 아들, 그 바보한테 당해 이 꼴이 됐구나.”
바보라……. 세상 어느 바보가 소리 소문도 없이 점포를 열고, 또 세상 어느 바보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람을 죽여 버린단 말인가.
주육낭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그 애는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니다 뿐인가. 똑똑하고 독하기까지 하지. 평소에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손만 뻗으면 쉽게 부러질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뱀이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독사.
그 뱀한테 호되게 물린 사람만 해도 벌써 알게 모르게 여럿이었다. 그녀를 바보라 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바보일 것이다.
“어머니, 그 애는…….”
주육낭이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주 부인이 말을 끊었다.
“그 애가 바보든 아니든 우리가 그 애를 맡아야 해.”
주 부인은 앞에 있는 서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 부친도 단단히 화가 나셨어. 정씨 가문 사람들이 참으로 뻔뻔하더구나. 네 고모의 혼수가 탐나 그 애를 아무한테나 시집보내려고 한다.”
아들은 여전히 잠자코 앉아 있었다. 자신의 말에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기는커녕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그 바보한테 정이 깊다면, 이런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어머니,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주육낭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점포에 와서 소란 좀 피웠다고 아예 깔끔하게 죽여 없애는 사람인데, 감히 본인을 건드렸다간…….
주육낭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을 너무 쉽게 죽이는데.
“육낭.”
주 부인의 부름에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모친의 눈빛이 보였다.
“아버지께 그 사람들이랑 그만 싸우라고 하십시오. 혼수를 탐낸다면 내버려 두세요. 우린 사람한테나 잘해 주면 됩니다.”
주 부인은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네 아버지도 아실 거야. 그만 물러가거라.”
주육낭이 물러갔다.
“노야께 회신을 보내야겠다.”
여종이 팔걸이 책상을 옮기자 몸종이 붓을 들었다.
“우선, 육낭의 사주단자부터 써라.”
몸종이 팔을 움찔하는 바람에 먹물이 떨어져 종이에 얼룩이 생겼다. 여종도 놀란 얼굴로 주 부인을 쳐다봤다.
“부인! 안 되는 일이옵니다!”
“괜찮다. 일단 정씨 가문의 그 뻔뻔한 바보들부터 달래야지. 혼사가 성사되고 말고는 우리한테 달렸고.”
“그래도, 그래도 소문이 새어 나가면 육공자께 안 좋아요.”
여종이 말렸다.
“안 좋을 게 뭐 있누. 모질고 뻔뻔한 부친의 손에서 외조카를 구하려고 외숙부가 갖은 수를 쓰는 건데. 소문이 새어 나가도 다들 우리 편을 들걸.”
그렇다. 혼처는 그다음에 천천히 찾으면 된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도 아니고 도리에 어긋나는 혼사도 아니다.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찾아 둘러대면 된다. 병이 났다고 해도 되고, 띠가 맞지 않아 상극인 팔자니 도사가 혼인은 절대 안 된다 했다고 해도 된다. 무슨 말인들 못 지어낼까. 그다음엔 그 바보를 고향 섬주로 보내 평생 돌보면 될 일이다.
“노야께 말씀 올리거라. 어쨌든 우린 두려울 게 없고, 관아에 가서 심문을 받는대도 당당하다고. 정씨 가문에서 당초 교랑을 익사시켜 죽이려 한 일을 잊지 마시라고 해. 그 도관에 가서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사계절 내내 쌀값을 공양한 게 누군데!”
주 부인은 눈썹을 치켜떴다.
“아버지입네 하고 우리 주씨 가문의 혼수에 눈독을 들이나 본데, 그리 쉽지는 않을 게야!”
주육낭은 마당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지난번에 현묘관 간식을 보냈는데 알아들었나 모르겠네. 그런 생각이 들자 코웃음이 나왔다. 그 여인이 얼마나 교활한데, 모를 리가 없지!
“말을 준비해라!”
주육낭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치면서 성큼성큼 문을 나섰다.
“왜 또 왔어요! 우리 아씨 주무신다고요!”
옥대교 저택. 금가아가 손으로 대문을 밀며 말했다.
“자긴 뭘 자!”
주육낭은 호통을 치며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에 시녀와 반근이 모두 뛰어나왔다.
“왜 또 왔어요?”
시녀는 손을 허리춤에 대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내 간식이 입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물어보러 왔다!”
주육낭 역시 불쾌하게 대꾸했다.
거 핑계 하고는!
“관아에 발고할 거예요.”
시녀가 소리쳤다.
“괜찮아. 물어보러 왔다니, 대답해 줘야지.”
안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 나왔는지 정교랑이 벌써 대청에 꿇어앉아 천천히 빗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육낭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회랑 아래에 선 채, 안에 있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네 부친이 네 혼사를 정하셨다.”
주육낭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 말에 시녀와 반근은 대경실색했다.
“그쪽 아버지는요?”
정교랑은 표정 변화 없이 손에 든 빗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주씨 가문에서 정씨 가문의 결정을 절대 윤허하지 않으리라는 뜻일 터였다.
“아버지께선 아직 마땅한 혼처를 못 찾으셨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대꾸하자 정교랑이 말했다.
“곧 찾으실 것 같네요.”
언제, 무슨 말을 하든 주육낭은 정교랑이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비웃는 듯 느껴졌다. 진십삼은 주육낭의 환각일 뿐이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했지만, 들어 보란 말이다. 분명 비아냥거리며 비웃고 있다! 주씨 가문에서 자신을 욕심내기라도 한다는 듯이!
“우리가 괜히 오지랖을 부려서, 네 잘난 아버지가 구한 좋은 인연을 망칠지 모르겠다.”
주육낭은 냉소한 후 옷소매를 뿌리치며 휙 뒤돌아 가 버렸다.
대문에서 쾅 소리가 나자 마당에 있던 시녀와 반근, 금가아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여간 저 자식은 멀쩡할 때가 없다니까. 시녀는 상대하지 않고 금가아에게 문을 닫으라고 한 후 정교랑 앞으로 가 앉았다.
“아씨, 어쩌죠?”
시녀는 초조하게 물었지만 정교랑은 여전히 빗질만 하고 있었다.
“뭘 어떡해?”
“아휴, 아씨의 혼사요.”
시녀는 초조하게 고개를 돌려 대문 쪽을 쳐다봤다.
“어느 댁인지 묻는 것도 깜빡했네요.”
“괜찮아. 서두를 것 없어. 언젠가는 말해 주게 돼 있어.”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지금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아씨, 아씨는, 초조하지 않으세요?”
시녀가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정교랑의 얼굴에서는 시녀와 같은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어쩌면, 본디 감정이라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정교랑이 어마어마한 혼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시녀도 알았다. 여인이 혼수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시집갈 때 든든한 자본이 된다. 하지만 정교랑 본인에게 결함이 있다 보니 혼수가 화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재주가 뛰어나면 도리어 시샘을 받아 화를 입는 법, 특히 바보였던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시집가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틀림없이 정씨 가문에서 혼수를 노려 술수를 부리는 게지.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중매인의 말과 부모의 명으로 이루어지는 법인데, 이를 어쩐다?
정교랑은 반근에게 머리를 묶어 달라는 뜻을 전하고, 시녀를 쳐다봤다.
“초조할 게 뭐 있어.”
시녀는 멈칫했다.
“아씨, 아씨는, 화도 안 나세요? 노야께서 혼처를 구하신다잖아요.”
시녀가 물었다. 시녀는 ‘노야’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실었다. 어릴 때 자식을 버린 부친이 자식을 위해 진심으로 좋은 혼처를 구해 줄 리가.
“당연한 일 아니야?”
정교랑이 눈을 찡긋하며 시녀를 보고 물었다. 정교랑과 시녀의 눈이 마주쳤다.
하긴. 혼인은 인륜지대사니 부모의 명을 따라야 하지.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달리 무슨 수가 있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당연한 일이니 초조한 거죠. 만에 하나 이상한 사람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시녀가 한숨을 쉬자 정교랑은 시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좋을지 나쁠지 어떻게 알아?”
뒤에서 정교랑의 긴 흑발을 빗어 위로 올리고 은빗을 꽂던 반근 역시 그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지? 부친은 떠나고 도관엔 불이 났다.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외로운 처지의 소녀와 힘없는 몸종이 어떻게 살았던가. 어찌어찌 지내다 보니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에게 멸시를 받고 도관으로 쫓겨나며 잊혀졌지만, 또 어떻게 살았던가. 어찌어찌 지내다 보니 경성으로 왔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어떻게 살지 어떻게 지낼지, 전부 아씨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씨가 지금껏 딱히 좋은 날을 보낸 적도 없지 않은가. 혼인 따위야 생각해 보면 딱히 대수로울 것도 없다.
“그럼 아씨, 소인이 노야께서 구한 혼처가 어딘지 알아볼까요?”
시녀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 눈치였다.
“급할 것 없어.”
정교랑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 노야와 주 노야가 고르고 나서, 물어도 늦지 않아.”
시녀는 한숨을 토하고 바로 앉았다. 무사태평한 표정의 정교랑과 반근을 보니 실소가 나왔다.
“어쩐지, 그래서 우리 이름을 전부 반근이라고 지으셨군요.”
시녀가 웃었다. 이번에는 반근이 알아듣지 못했다.
“어째서인데?”
반근이 마지막 남은 정교랑의 머리칼을 묶으며 물었다.
“반근 넌 똑똑하고, 우린 너무 아둔하니까. 반근한테 배우라는 뜻으로 지으신 거지.”
반근은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반근 언니, 또 농담을 하네.”
“농담하는 거 아냐. 전에는 내가 꽤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다들 그렇다고 했거든. 근데 아씨를 모시면 모실수록 점점 내가 아둔하단 생각이 들어. 갑자기 이해가 안 가는 일이 너무 많아.”
“그럼 생각하지 마.”
반근은 정교랑의 덧옷을 정돈해 주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시녀를 보며 웃었다.
“머리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생각을 안 한다는 게 가능해?”
시녀가 한숨을 쉬었다. 정교랑이 책을 집어 들었기에 두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나 회랑으로 나왔다. 마당에 있던 금가아가 시녀의 말에 헤헤 웃었다.
“그럼 물어봐.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지.”
금가아의 말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르는 건 물어보고 이해해야지.”
시녀가 반근을 잡아끌며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귓가에 쾅쾅 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누가 왔나? 시녀가 고개를 돌렸다. 금가아 역시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쾅쾅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여기다, 여기.”
소년의 목소리였다. 시녀와 금가아가 쳐다보니 소년이 노을빛을 받으며 담벼락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너희 아씨 계시냐?”
소년은 담벼락을 붙잡고 웃음을 지었다.
또 저 사람이네!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계세요.”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말을 할 거면 좀 그럴듯하게 해라. 방금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집에 없을 수가 있나.”
“댁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그쪽은 손님도 아니고요.”
시녀는 씩씩거리며 퉤 하며 침을 뱉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엄연히 이 집을 찾아온 손님이야.”
진안 군왕이 목청을 높였다.
“단지, 문으로 드나들기 불편할 뿐이지.”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여 뒤쪽을 보며 눈짓을 했다. 쾅쾅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이것 봐라, 문도 두드렸잖아.”
시녀가 막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정교랑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또 그 사람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궁금해서 왔어요. 내가 준 간식, 먹을 만하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뭔 날이야? 경성의 인삿말이 언제부터 간식 얘기로 바뀌었어?
“괜찮았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입에 맞는 거예요? 또 가져다줄게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뭔지 알겠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냥 간식이니까요. 확실히,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긴 하죠.”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교랑을 보고 또다시 웃었다.
“아, 방금 그 소년이랑 관계가 어떻게 돼요?”
아니, 이 호색한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아는 사이야? 뻔뻔하게 그건 왜 물어!
시녀가 눈을 부라렸다.
“외숙부님 집안의 오라버니예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까 화난 것 같던데, 싸웠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시녀는 그 말에 또다시 눈을 부라렸다.
“아니요. 알려 줄 일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일인데요?”
진안 군왕은 담벼락 위에 팔을 걸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혼담이요.”
정교랑의 대답에 시녀는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아는 사이야? 어떻게 있는 그대로 대답하지?
“그래요? 어느 가문인데요?”
진안 군왕은 담벼락을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빛을 반짝였다.
“아직 몰라요. 어느 가문으로 정해졌는지.”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하하 웃었다.
“대단하네요. 혼담을 넣는 가문이 많은가 봐요.”
“혼기가 찼을 뿐이죠.”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렇진 않아요. 나도 혼기가 찼지만 난 없거든요.”
소년은 자기 얘기를 하며 웃었다. 이번 웃음은 이전의 명랑한 웃음과 달랐다. 부드러운 웃음이었지만 소년의 말과 더해지자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시녀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정말인가? 저렇게 생겼는데도 혼담이 안 들어온다고? 행색을 보아하니 가난해서 아내를 맞이하기 힘든 것 같지도 않은데.
“있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꼭 나쁜 것도 아니에요. 있고 없는 건, 우리 뜻대로 안 되지만, 좋고 나쁜 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죠.”
진안 군왕은 웃으며 손을 들어 담벼락 위를 탁 쳤다.
“너무 많아서 못 고르는 거 아니에요? 내가 좀 도와줄까요? 경성 사람들은 내가 훤히 알거든요.”
하나는 회랑 아래에 서서, 하나는 담벼락 위에서 주거니 받거니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년과 소녀를 보며, 시녀는 또다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녀는 일찌감치 물러나 회랑 한쪽에서 빨래를 개키고 있는 반근을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반근의 표정에 시녀는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난 정말이지, 점점 아둔해지는 것 같아.”
시녀가 중얼거렸다.
진안 군왕은 자신의 생각이 마음에 드는지 눈빛을 빛내며 다시 담벼락을 붙잡고 몸을 앞으로 뺐다.
“결정을 못 내리겠거나 알아보기 힘들면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확실히 알아봐 줄게요. 중매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절대 못 속이게 한다고 장담합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진안 군왕이 손을 내저었다.
“벌써 고맙다고 하긴 이르죠. 내가 좋은 인연을 골라 주면, 고맙다는 말은 그때 해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보며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아래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듣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느덧 마당에는 노을빛이 물러나고 밤의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만 가야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말했다.
금가아는 마당에 있는 등에 불을 하나씩 켜고 있었다. 등불이 비추는 마당은 한층 더 어두워 보였다.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의 모습이 희미해지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몸을 살짝 굽혀 예를 표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정교랑.”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어둠 속에 선 여인은 단정한 모습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은 방백종(方伯琮)입니다.”
방백종.
시녀는 그 이름을 속으로 다시 한번 곱씹으며 경성 인사 중 방씨 성을 가진 인물을 재빨리 떠올려 보았다. 너무 흔한 성씨라 문무백관 중 방씨 성을 가진 이는 차고 넘쳤다. 황실 역시 방씨 성을 가졌으니…….
“난 내 이름이 뭔지 몰라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일인지 그 우스운 말이 진안 군왕의 귀에는 짠하게 들렸다. 슬픔이나 안타까움일 수도 있고.
어릴 때부터 바보였던 여인, 자기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 어쩌면 이름을 지어 주려는 사람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르지.
사다리가 흔들리자 진안 군왕이 담벼락을 꽉 붙잡았다.
“가셔야 합니다.”
사다리를 붙잡고 있는 시위가 초조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고했다.
그래, 가야지. 아직은 내 멋대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때가 아니니. 진안 군왕이 담벼락을 붙잡았다.
“이만 갑니다. 간식이 마음에 들었다니 기쁘네요.”
정교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몸을 일으켜 보니 담벼락 위에 있던 소년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등불이 환히 비추는 마당이 아름답게 빛났다.
“아씨, 저 사람한테 전혀 경계를 안 하시네요.”
곁으로 다가온 시녀는 이해할 수 없고 근심이 되는 듯 까놓고 말했다.
“내가 뭐랬는데?”
정교랑이 시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집안의 사적인 일을 말씀하셨잖아요. 혼담이 오간다는 얘기 같은 걸 어떻게 남한테 그리 편히 말씀하세요.”
“사적이라고? 내가 말 안 한들, 저 사람이 궁금하면, 못 알아볼 것 같아?”
시녀가 멈칫했다.
저 소년은 경성 사람을 훤히 안다고 했다. 저 소년은 아씨에 대해 쭉 알아봤다. 저 소년은 아씨께서 진씨 저택을 사들인 일을 알고 있으며, 아씨의 아명까지 불렀다.
주육낭과 진(陳) 부인 역시 경성에서 이름이 없는 이들이 아니었다. 주육낭이 왜 왔는지 궁금하다면, 이보다 더 사적인 일이라 해도 금방 알아낼 것이다.
방금 두 사람이 나눈 대화만 해도 그렇다. 간식 맛있게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혼담이 오간다고요? 그래요. 내가 알아봐 줄까요? 좋아요. 이름이 뭐예요? 몰라요…….
사실 딱히 별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잡담일 뿐. 시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뭔가 이상한 느낌이지? 머릿속에 무언가가 달라붙은 느낌이네.
“망했다. 정말 점점 아둔해지고 있어.”
시녀가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얼마 가지 않아 아씨께서 날 노태야께 돌려보내실지도 몰라.”
“다 똑같은 거였구나. 있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꼭 나쁜 것도 아니야.”
진안 군왕이 웃었다.
뭐가 다 똑같아? 옆을 따르는 내시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사람 말이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사람이 뭐? 내시는 더욱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넌 왜 말을 못 따라와?”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자 내시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전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인은 못 알아듣겠나이다.”
정 낭자였다면 틀림없이 알아들었을 텐데.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시를 내버려 둔 채 뒷짐을 지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시는 뒤를 바짝 따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낭자를 한 번 봤을 뿐인데, 전하께서 저리 이상해지시다니.
두 사람이 앞뒤로 걷고 있던 중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내시도 얼른 걸음을 멈췄다. 앞쪽에서 누군가가 유유자적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복을 입은 중년 사내였다. 호사스럽고 귀티 나는 얼굴에 상냥한 표정으로 늘 웃음을 짓는 인상이었다. 진안 군왕을 보자 사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전하, 출타하셨습니까?”
사내는 멀찌감치에서 예부터 올렸다. 진안 군왕도 짙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고 대인, 입궐하셨습니까?”
“네. 귀비마마를 뵈러 왔지요.”
중년 사내는 웃으며 진안 군왕을 훑어봤다.
“해가 바뀌면서 또 많이 크셨습니다.”
자애로운 눈빛이었다.
“무료하거든 제 집으로 오십시오. 전하께서 어릴 때 머무시던 방을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진안 군왕은 더욱 친밀한 표정을 지었다.
“좋죠. 내년에 경성을 떠나면 언제 또 올지 모르잖습니까. 대인 댁의 나무에 있는 석류 생각이 간절합니다.”
“전하, 저희 집 석류 때문에 된통 당한 것으로도 부족하십니까.”
중년 사내가 껄껄 웃었다.
“그때는 전하께서 어리셨지요. 고 대인, 지금 가면 아마 나무에 올라가실 필요도 없을 겁니다.”
내시도 옆에서 거들자 중년 사내는 또다시 껄껄 웃었다.
“그래요, 그래요. 나중에 태후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전하를 모셔 가겠다고요.”
사내는 웃으며 바짝 다가와 말을 이었다.
“폐하를 모시고 여기저기 둘러봐도 좋을 테지요.”
진안 군왕의 눈엔 한결같이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고 대인, 잊지 마십시오.”
중년 사내는 공수하여 예를 표한 후 물러났다. 진안 군왕은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얼굴에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걷히더니 어둡고 쓸쓸한 기운이 대신했다.
고능준(高凌俊).
뒤돌아 궁 밖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년 사내가 걸음을 멈추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에 있던 상냥한 표정은 역겹다는 표정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쭉 뻗은 길에 소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송자동자(送子童子) 좋아하네. 중년 사내는 콧방귀를 뀌었다.
월말이 되어 또다시 태평거의 장부를 정리하는 날이 돌아왔다. 수를 셈할 때 쓰는 산가지로 몇 번 계산을 맞춰 본 오 관리인이 장부를 내려놓고, 서무수와 범강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경하드립니다, 주인어른.”
이 말은 지난달부터 오 관리인이 계산을 마치고 나서 가장 먼저 하는 말이었다.
“이윤이 남았소?”
범강림이 긴장하며 물었다.
“태평 두부에 이윤이 남았고, 태평거도…… 이윤이 남았습니다.”
오 관리인은 일부러 말을 길게 늘이며 말했다. 범강림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무수는 자제하고 있었지만 얼굴에 번지는 웃음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태평거에 이윤이 남았다. 점포를 연 지 석 달 만에 드디어 이윤을 남기게 된 것이다.
“돈은 진작부터 많이 벌지 않았소? 뭘 그리 흥분들 하시오?”
옆에 있던 서봉추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보수사에서 매달 가져가는 태평 두부 덕에 오 관리인은 이미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그건 두부고, 태평거는 아니었지.”
서무수의 대꾸에 서봉추가 입을 삐죽였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다 누이 건데.”
그 말에 범강림은 얼른 어허, 소리를 내며 말을 잘랐다.
“말조심해.”
정교랑과 태평거의 관계는 쭉 숨겨져 있었다. 서봉추는 얼른 손가락을 입에 대며 입을 다물겠다는 동작을 취했다.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큰형님, 셋째 형님, 누이 왔습니다.”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무뢰배들을 쏴 죽인 후로 정교랑은 태평거를 찾아오지 않았다. 서무수 등 역시 옥대교 저택으로 찾아가지 않고, 아침에 장터에서 장을 보러 나온 반근을 만나 말을 전해 온 터였다.
갑자기 누이가 찾아왔다는 말에 범강림 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어?”
서무수가 일어나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이 데리고 밥 먹으러 왔대요.”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진단랑은 정교랑의 손을 놓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더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래층 대청을 둘러봤다. 대청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점원들은 탁자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주문을 전달했고, 손님들 역시 웃고 떠들며 북적북적한 분위기였다.
“낙득자재 하나요.”
“날도 더운데 무슨 낙득자재야. 여기 맛있는 거 많아. 이보게, 여기 쌀국수 가져와. 탕면보다 맛있는 쌀국수 말일세.”
진단랑은 그 말에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언니, 나도 쌀국수 먹을래요.”
“그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위층으로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문발이 들어 올려지더니, 사내 둘이 나왔다.
“도련님들.”
시녀가 웃으며 인사하자, 서무수와 범강림도 웃으며 다가왔다.
별실에 있는 탁자 위로 요리가 하나둘 차려졌다. 진단랑은 신이 나서 젓가락을 들었다. 시녀는 웃으며 요리를 나눠 주었다. 한쪽 옆에는 정교랑과 서무수, 범강림, 오 관리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장부는 내가 안 봐도 돼요.”
정교랑이 장부를 도로 밀었다.
“얼마든 난 관심 없어요.”
오 관리인이 웃으며 물었다.
“돈인데도 관심이 없다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엔, 관심 없어요. 나한테 필요할 땐, 돈이 돈이지만, 나한테 필요 없을 땐,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서무수와 범강림도 그 점은 이해했다. 이 낭자에게는, 돈이라는 게 정말 쉬운 상대니까.
“그럼 지금처럼 관리인이 알아서 하시오. 반년에 한 번씩 이윤만 배당하면 될 거요.”
서무수가 말했다.
일이 생기면 나서서 책임지고 막아주고 해결해 주면서, 장사와 경영, 금전에 대해서는 시시콜콜 따지지 않으니, 이 세상 모든 관리인이 꿈에도 그리던 주인이었다.
오 관리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별다른 말 없이 장부를 정리했다.
“누이, 이제 와도 괜찮은 거야?”
서무수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왕대 등 무뢰배가 살해되고 주오가 자결하면서, 협박을 받던 위기를 넘기고 호시탐탐 점포를 노리던 악당들까지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끝난 일이지만, 이들을 계략에 빠뜨린 태평거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무뢰배를 도발한 일은 별것 아닐지 몰라도, 주오를 자결로 내몬 걸 보면 아주 독하고 악랄한 이가 틀림없다.
“괜찮아요. 올 일은 오고야 말죠.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어요.”
정교랑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딱히 두려울 것도 없고요.”
서무수와 범강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놓았다.
“전부 정 언니의 오라버니들이에요?”
옆에서 맛있게 먹고 있던 진단랑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아씨, 음식이 입에 맞으십니까?”
서무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입에 잘 맞아요.”
진단랑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자주 오세요. 싸게 드릴게요.”
서무수가 웃으며 말했다.
“진짜요? 다른 사람들 데려와도 싸게 해 줄 거예요?”
진단랑은 신이 나서 물었다.
“당연히 진짜죠.”
서무수가 오 관리인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관리인, 기억해 두시오. 여기 진씨 가문 아씨가 오거든 우리 손님이라 여기고 대접하시구려.”
오 관리인이 웃으며 알았다고 하자 진단랑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너무 잘됐다. 다들 날 부러워할 거예요.”
다들 웃고 떠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일부러 남들 눈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일부러 눈에 띄게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난 후 정교랑은 진단랑을 데리고 나왔다. 서무수 등은 위층까지만 나와 배웅했다.
“형님, 저기 좀 보시오. 저 사람…….”
형제 하나가 바깥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불쑥 입을 열었다.
주육낭은 정교랑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말에서 내렸다.
“왜 계속 시치미를 떼지 않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자 진 공자가 웃으며 대꾸했다.
“계속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됐으니까 어서 가자고. 쓸데없이 걱정할 것 없어. 오라버니들도 있잖아.”
주육낭이 진 공자를 노려봤다.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지팡이를 짚고 시종의 부축을 받아 앞으로 걸어갔다. 잘 닦아 놓은 돌바닥 위에서 딱딱 소리가 났다. 발걸음 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소리였고,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주육낭은 귓가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주육낭은 시선을 옆으로 옮기며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정교랑이 가까워졌다.
“낭자, 오랜만입니다.”
진 공자가 웃으며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진단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진 공자를 살폈다.
“그 일은 어쩔 생각이야?”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 너희 집에서 네 혼사를 정하길 기다리려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그 댁에서 정하길 기다릴까요?”
“그야 너한테 달렸지.”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모처럼 나한테 달린 일이 있네요.”
정교랑이 웃었다. 주육낭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진 공자가 옆에서 하하 웃었다.
“당신 말인데.”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진 공자를 쳐다보자 진 공자도 웃으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뭐하러 초연한 척 연기를 하죠?”
정교랑은 냉담한 표정으로 진 공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절름발이로, 평생 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 말이 떨어지자 진 공자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굳어졌다.
“정교랑!”
주육낭이 벌컥 성을 냈다.
말이 전보다 유창해지긴 했지만, 이 여인의 말은 어째 갈수록 악독해졌다.
어떻게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해! 그래도 여인이면서! 하긴, 여인이면 뭐? 사람도 손쉽게 죽이는 여인인데…….
주육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내였다면 주먹을 날려 패 죽였을 텐데!
“저 사람 친구로 지내는 게 좋은가 봐요.”
정교랑이 진 공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진 공자는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지만, 주육낭은 여전히 이를 갈며 눈을 부릅떴다.
“정교랑, 적당히 해. 네가 대단하다는 건 알아. 이젠 이 태평거도 있고…….”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이를 갈고 말했다. 하지만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 공자가 말을 잘랐다.
“태평거 음식도 딱히 별다를 건 없잖아. 다른 데로 가자고.”
마침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많은 시간대고, 식당 앞이다 보니 드나드는 손님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 서서 대화를 나눈다 한들 딱히 눈길을 끄는 일은 아니었지만, 주육낭이 두 번이나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행인들도 호기심에 다들 쳐다봤다.
진 공자가 주육낭을 제지하자, 정교랑이 그 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벌써 조그마한 받침대를 내려놓은 시녀가 정교랑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해 주었다. 마차의 휘장이 내려지고 마차가 흔들거리며 출발했다.
“아직도 저 애를 감싸? 저리 악독한 여인을?”
주육낭이 냉소를 지었다.
“말다툼을 해서 뭐해.”
진 공자는 웃으며 주육낭을 재촉했다.
“어서 가자고. 밥 먹는 게 중하지.”
주육낭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태평거는 수많은 사람이 음으로 양으로 주목하는 곳이 됐다. 주육낭은 더 말하지 않고 발을 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주육낭에 이어 진 공자도 태평거로 들어갔다. 수레를 밀다가 잠시 쉬어 가려고 태평거 입구에서 자리를 기다리는 듯 보이는 젊은이가 일어섰다. 젊은이는 태평거 안과 정교랑이 탄 마차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차례로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제는 이 태평거도 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젊은이가 중얼거렸다.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경성인데도 신선거 앞은 한산해 보였다. 입구에서는 점원 몇 명이 서서 나른한 듯 웃고 떠들었다.
후원 별실에 있던 두칠은 눈앞에 꿇어앉아 있는 사환을 귀찮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시끄럽다!”
두칠이 말을 자르며 소리치자 사환은 깜짝 놀라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며 옆에 있는 관리인을 쳐다봤다.
“시간 있으면 어떻게 해야 장사가 잘될지 그 생각이나 해!”
두칠은 쥘부채로 관리인을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태평거 장사가 얼마나 잘되는지 하루가 멀다고 나한테 전하는 이유가 뭐야? 나 망신 주려고 이래?”
“아닙니다, 주인어른. 저는 그저 태평거의 배후에 있는 진짜 주인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요.”
사람들 앞에서 무뢰배 다섯 명을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태평거의 일은 경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다들 태평거가 어마어마한 거물을 뒷배로 두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태평거에는 신비감이 더해졌고, 신비감이 더해질수록 태평거에 경외심을 갖는 이가 많아졌다. 무뢰배들이 시비를 걸기는커녕 관졸들조차 감히 못 건드리는 곳이 됐다.
배후에 있는 진짜 주인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벌써 며칠째 태평거의 배후를 수소문하던 두칠은 유 교리를 통해 그날 보수사의 명해선사 앞에서 이야기를 꺼낸 게 진 노태야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조사해 보니 진씨 가문은 태평거의 진짜 주인이 아니었다.
진씨 가문까지 나서서 도와줄 정도라면 평범한 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제 생각에 주인이라면 태평거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자취를 남기게 돼 있죠. 그래서 제가 사환들을 시켜 태평거를 지키게 했습니다. 뭐 알아낼 게 없을까 하고요.”
두칠이 쥘부채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래서 알아낸 건?”
사환이 쭈뼛쭈뼛 고개를 가로젓자, 두칠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데려올 숙수는 알아봤고?”
두칠이 관리인을 보며 물었다.
“솜씨 좋은 숙수로 데려와. 지금 숙수처럼 고기 써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 말고. 그나마 그 고기 써는 것도 남한테 배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사환이 그 말에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외쳤다.
“생각났습니다!”
말하고 있던 두칠은 사환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놀라 욕을 해댔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관리인, 주인어른, 생각났습니다. 그 두 사람이에요!”
사환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두 사람이라니?”
관리인이 물었다.
“그 두 사람이요.”
사환은 손짓을 해 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가게에서 숙수한테 고기 써는 법을 알려 주던 그 사람! 그, 신선 말입니다!”
신선? 관리인과 두칠이 사환을 쳐다봤다.
“주씨 가문 사람 말이냐?”
두칠의 물음에 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년과 소녀 말입니다. 과로신선을 자기네가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당시 두칠은 그 두 사람을 지켜봤지만, 그 후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둘이, 밥 먹으러 갔나 보지.”
두칠은 탁자에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태평거는 이름이 난 곳이니 특별히 거기까지 밥을 먹으러 간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밥 먹으러 간 건 맞습니다.”
두칠이 또 욕을 해댔다.
“밥 먹으러 간 게 무슨 대수라고!”
두칠은 손을 들어 한 대 칠 기세였다. 사환이 얼른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피했다.
“그런데 옆에서 들어 보니 그 사내가 ‘이제는 태평거도 있고’ 어쩌고 하는 말을 하더라고요.”
두칠이 들어 올린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뭐라고?”
두칠이 물었다. 관리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환을 쳐다봤다.
“그때 옆에 앉아 있다가 소년과 소년이 그런 말을 나누는 걸 들었습니다. 근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을 끊었어요.”
사환은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어 쳐다봤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습니다. 통 생각이 안 나더니 방금 갑자기 떠올랐어요. 바로 그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칠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그자들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말해 봐라. 한 자도 빼놓지 말고.”
같은 시각, 강주 정씨 저택.
주 노야는 부인이 보낸 서찰을 읽은 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돌고 돌아서 결국 이리되는군. 그러게 몇 달 전에 결정을 내렸으면, 이리 성가실 일도 없었을 텐데.”
문밖에서 사환이 급히 들어왔다.
“노야, 알아봤습니다.”
사환은 밝은 표정이었다. 주 노야는 들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누구라더냐?”
“팽씨 가문의 방계인데, 글공부를 한 서생인 건 맞습니다.”
사환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병을 얻었답니다.”
밥 먹고 사는 사람인데 병이 날 수도 있지.
“무슨 병인데?”
주 노야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노야, 화류병(花柳病: 성병)이래요.”
사환은 목소리를 낮추고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화류병? 순간 주 노야는 눈을 부릅뜨고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주 노야는 벌떡 일어나 한쪽 벽에 걸어 둔 보검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동! 가만두지 않겠다!”
발치로 떨어진 서찰이 아무렇게나 밟혔다. 아비란 사람이 저리 뻔뻔하니, 굳이 내 아들까지 고생할 필요도 없겠군.
소란스러운 소리가 대부인 쪽까지 들렸다.
“어서 가서 살펴봐라. 주씨 가문은 무인이라 얼마나 사나운지 몰라. 괜히 일 벌이면 큰일이야.”
대부인이 회랑 아래에 서서 말했다. 마당에 있던 몸종들과 여종들이 얼른 대답하고 뛰어갔다. 대부인은 회랑 아래에서 밖을 쳐다보며 합장을 하고 염불했다.
“고모님, 정말 웃겨 죽겠습니다. 여긴 고모님 댁인데 여기서 어떻게 남한테 맞아 죽어요?”
안에서 몸종에게 안마를 받고 있던 십칠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뭘 안다고. 이쪽에서 먼저 틈을 줬으니 그렇지. 남을 탓할 수도 없어.”
대부인이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주씨 가문 노야가 패 죽인다 어쩐다 난리를 칠 만도 하지. 그런 불치병에 걸린 이한테 교랑을 주려 했으니. 입장을 바꿔서 나였다 해도 동의 못 했을 거야.”
대부인이 한숨을 쉬는데, 십칠공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고모님, 정말입니까? 그 미인을 곧 죽을 사람한테 준다고요?”
“미인은 무슨!”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냉큼 그 그림 가져다 태워 버려!”
십칠공자는 헤헤 웃어넘기고 대부인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지. 이제 이방 내외가 교랑의 혼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됐으니.”
대부인이 여종에게 말했다.
“간섭이요? 이혼이나 안 하면 다행이죠.”
여종이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방금 노부인 앞에서 억울하다며 울었어요. 화류병이 아니라 홍역인데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다나요.”
대부인이 부채를 흔들었다.
“뭐라 하든 이미 늦었어. 그러게 유곽의 기녀를 왜 들여?”
대부인은 냉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틈을 줬으니 남을 탓할 수도 없지.”
본인이 적당히 분수를 지켰다면 오늘 같은 처지로 떨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친정 사람을 데려다 그 바보와 혼인을 시키려 하다니, 자기들끼리 다 해먹겠다는 뜻 아닌가. 이부인 본인이 정씨를 자기 식구로 여기지 않는데, 나라고 이부인을 자기 식구로 여길 필요는 없지.
여종이 웃으며 차를 따랐다.
“부인, 이제 이노야는 교랑 아씨의 혼사에 개입할 수 없게 됐으니, 백부와 백모께서 나서시는 수밖에 없겠네요.”
대부인이 찻잔을 들었다.
“힘만 들고 좋은 소리 못 듣는 일이야. 애가 그 모양인데, 좋은 신랑감을 어디 가서 찾누?”
그 말을 들은 십칠공자는 손짓하여 몸종을 물린 후, 웃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고모님, 제가 고모님의 근심을 덜어 드릴게요.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인이 십칠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아유, 우리 십칠이 다 컸네. 이 고모의 근심을 덜어줄 줄도 알고. 그래, 누군지 들어나 보자.”
대부인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십칠공자는 또다시 웃으며 대부인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고모님, 저예요.”
십칠공자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대부인은 마시던 차를 내뿜었다.
마당에서 들리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대청 안이 시끄러워졌다.
“고모님, 고모님. 때리지 마세요, 저 아직 아프다고요!”
십칠공자가 머리를 감싸 쥐고 요리조리 피하며 소리치는데도 대부인은 손을 들어 힘껏 내리쳤다.
“그냥 병이 아니네!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어! 정신 차리도록 흠씬 패 줘야겠다! 어디서 그런 망발을 해! 어디서!”
십칠공자는 웃으며 대부인의 팔을 잡았다.
“고모님, 저 멀쩡해요. 멀쩡하다고요.”
대부인이 휙 뿌리쳤다.
“짐 챙겨서 당장 돌려보내고, 너희 노야와 부인한테 보름간 외출 못 하게 하라고 해라.”
대부인이 옆에 있던 여종에게 명하자 여종이 얼른 대답했다. 십칠공자는 딱히 대꾸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저 이만 갑니다, 고모님.”
십칠공자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듯 냉큼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부인이 소리를 질렀지만 십칠공자를 붙잡을 순 없었다. 화가 나는 한편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가서 너희 부인에게 전해라. 저 아이 잘 감시하라고, 괜히 사고 치지 않게.”
대부인이 여종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자, 여종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물러났다.
“부인, 노부인께서 잠깐 오시래요.”
문밖에서 여종 하나가 들어와 말했다.
“이제 다 싸웠나 보구나.”
대부인이 말했다.
“부인, 노부인께서 교랑 아씨의 혼사를 부인께 맡기실 거래요.”
여종이 웃으며 말을 전했다.
“집안 관리하는 게 어디 쉽나?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애쓰고도 좋은 소리 못 듣고. 집안 자식들의 혼사를 다 합쳐도 그 애 하나 보내는 것보단 덜 힘들 것 같구나.”
“세상에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은 없다잖아요. 부인께서 마음을 쓰시면 다 잘 풀릴 거예요.”
여종들은 웃으며 대부인을 둘러싸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내렸다. 진십삼은 자신이 줄곧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등불이 눈앞을 밝게 비췄지만, 어쩐 일인지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지금 꿈을 꾸는 거구나. 진십삼은 스스로에게 말하며 걸음을 멈춰 섰다. 등불이 사라지더니 사람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이 절름발이.”
“저 절름발이 좀 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꿈을 꾸다니? 에라, 모르겠다. 내면의 어둠을 까발리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진십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진십삼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귓가에 울리던 수군대는 소리는 점점 환각으로 변했다.
진십삼은 현실을 알았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현실에 겁내지 않고, 도리어 현실을 즐기려 했다.
“뭐하러 초연한 척 연기를 하죠?”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십삼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한쪽 옆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짙은 색깔의 옷이 어두운 밤과 어우러져 하나가 된 듯 보였다.
“절름발이로, 평생 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진십삼은 돌연 눈을 떴다. 동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진십삼은 한동안 조용히 휘장을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는 침상 옆에 놓여 있고, 휘장 밖에는 사환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사환이 딱딱거리는 지팡이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진십삼 역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지팡이를 쳐다봤다.
“어릴 땐 몰래 빠져나와 놀러 가곤 했어.”
“여종과 몸종은 침상 옆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지.”
“실컷 놀고 돌아와도 다들 전혀 몰랐다니까.”
주육낭이 웃으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재미있게 들리는 사소한 일들이었지만, 진십삼은 영원히 경험할 수 없는 재미였다.
절름발이로, 평생 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공자님, 일어나셨어요?”
사환이 눈을 비비며 졸린 눈으로 물었다. 진십삼이 응, 하고 대꾸했다.
“잠시 나갔다 오마. 따라올 필요 없어.”
진십삼이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날이 밝긴 했지만 아직 이른데, 어디 가시려고요?”
사환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냥 좀 나가겠다는데 네가 웬 참견이야?”
진십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환은 놀라 잠이 싹 달아났다. 늘 온화하고 기품이 있으며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던 공자께서 갑자기 화를 내시다니…….
진십삼은 지팡이를 잡은 손을 꽉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안 와서 마당이나 둘러볼까 한다. 넌 따라올 필요 없다.”
진십삼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환은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진십삼은 딱딱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날이 훤히 밝았을 무렵 이대작이 문을 나섰다. 송씨댁은 벌써 나귀를 끌고 나왔다.
“요 며칠은 찬거리 안 싸 와도 돼요. 집에 있는 것도 못다 먹었어요.”
“못다 먹겠으면 친정에 갖다 주구려. 여름이라 채소며 고기며 오래 둘 수 없으니.”
이대작이 말했다. 송씨댁의 친정은 평범한 집안이었다. 이대작이 별 볼 일 없었던 과거에는 친정에서도 무시를 받았지만, 지금은 이대작이 태평거에서 잘나가고 가정 형편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상황이었다. 아직 돈은 못 벌지만 돈을 쓰지 않으니 돈을 버는 것과 진배없었다.
집에 있는 찬거리를 친정으로 가져가면서 송씨댁도 면이 서고, 형제자매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게 됐다. 친정에 가서도 전처럼 쭈뼛거릴 필요가 없으니 목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작이 나귀를 타고 대문을 나서자 이른 아침부터 나와 밭일을 끝낸 마을 사람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마을 촌장까지도 걸음을 멈추고 이대작과 인사를 나눴다. 이대작이 이십여 년을 사는 동안 꿈도 못 꿨던 일이었다.
“우리 집 여섯째가 이제 만 열 살인데, 집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어. 태평거에 심부름꾼이 필요하거든 데려다 써.”
촌장이 웃으며 말하자 이대작이 웃으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이대작은 태평거의 숙수에 불과했지만 보수사의 불상 앞에서 솜씨를 뽐낸 숙수는 많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태평거의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 눈에는 이대작 역시 태평거에서 남다른 지위에 있는 듯 보였다.
특히 태평거에서 점원을 구할 때 이대작이 이웃집 아이를 데려간 후로, 그 지위는 더욱 탄탄해졌다. 태평거의 품삯이 적지 않았을 뿐더러 집에서는 밥이나 축내는 이들이었으니 돈은 얼마가 됐든 상관없었다.
길에서 시간을 지체한 후에야 이대작이 마을을 빠져나왔다. 막 마을 어귀를 나오다가 다른 마을에서 오던 사내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멈칫했다.
“류 관리인.”
이대작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상대는 신선거의 관리인이었다.
“이씨였군.”
류 관리인은 선웃음을 짓고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땅까지 돌려주겠다는 걸 단칼에 거절한 후에도 두칠은 사람을 시켜 이대작을 두 번이나 찾아왔었다. 두칠은 당초 할아버지의 약조대로 지분을 배당하겠다고 했지만 이대작은 결국 거절했다.
옛 상사와의 만남인지라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바쁘신가 봅니다.”
이대작이 인사를 건넸다.
“바쁘기는. 바쁘기로 따지면 이씨가 요즘 많이 바쁘겠지.”
관리인이 선웃음을 지었다. 이대작 저자는 늘 과묵했는데, 이제는 반어법을 쓰며 비웃을 줄도 아는군.
이대작은 자신의 말에 딱히 잘못된 게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일 보십시오. 전 이만.”
관리인은 이대작이 나귀를 몰며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대작은 여전히 예전처럼 수척한 모습인 데다 차림새도 소박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관리인은 이대작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가 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귀를 타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지, 나한텐 말이 있는데!
관리인은 침을 퉤 뱉고 고개를 돌렸다. 말을 끄는 사환이 멀리 뒤처져 있었다.
“서둘러라!”
관리인이 호통을 쳤다.
말을 타고 질풍처럼 내달린 끝에 해가 높이 떴을 무렵, 성으로 들어왔다. 거리가 북적북적한데도 신선거는 여전히 한산했다. 대청에 손님 몇 명이 앉아 있긴 했지만, 이들 앞에 놓인 음식은 과로신선이 아니었다.
“여긴 음식이 이게 다요? 너무 적은 거 아니오?”
“다른 건 없고?”
손님이 점원에게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관리인은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들어 봤자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욕하며 나가 버리거나 마지못해 요리 두세 개 시켜 먹을 테지.
관리인은 곧장 후원으로 갔다. 일이 잠잠해지자 두칠은 성 안에 있던 저택을 팔고 신선거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제길! 역시 그놈들이었어!”
관리인이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두칠의 욕설이 들렸다.
“주인어른, 무슨 말씀입니까?”
두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탁자를 걷어차자 그 위에 놓여 있던 종이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평거! 그놈들이었어! 내가 뭐랬냐고, 이 세상엔 좋은 사람이 없다니까. 똑똑하거나 아둔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지! 이 두칠이 두 애송이들 손에 놀아나다니! 그때부터 놈들의 계략에 당한 거야!”
두칠은 길길이 날뛰며 몸을 흔들어댔다.
“주인어른, 무슨 일인데요?”
관리인은 더럭 겁이 났다. 두칠이 충격을 못 견디고 아예 미쳐 버린 건가?
“태평거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냈다고!”
두칠이 고개를 돌려 관리인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알아냈다고?
“누군데요?”
관리인이 얼른 물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
두칠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범강림, 서무수 등 몇 사람이야.”
“그자들이 전에는 옥대교의 저택에 살았는데…….”
“지금은 정교랑이 살고 있지. 정교랑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닌 주씨 가문의 낭자로, 일찍이 우리 점포에서 처음으로 과로신선을 만들어 먹었어. 진 상공 댁에서 강주로 내려가 그 낭자를 데려오던 게 그때인데…….”
관리인은 손에 든 종이를 넘기며 쭉 나열된 정보를 훑는 한편 두칠의 말을 들었다.
“주인어른, 태평거가 정교랑의 것이란 말씀입니까?”
관리인의 물음에 두칠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럴 리가 있나!”
두칠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명목상 내세운 자일 뿐이지. 정교랑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으니 그 체면을 봐주는 사람이 좀 많겠냐고.”
두칠은 이리저리 서성이며 말을 이었다.
“당초 보수사에서 진씨 가문 노태야가 태평거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래서였어!”
두칠은 이를 갈며 말하고는 주먹을 꽉 쥐고 휘두르기도 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왜 그 생각을 못 해! 주씨 가문에서 돈을 쓸어 모을 기회를 그냥 놓칠 리 없지! 우리 신선거를 그냥 둘 리가 없잖아! 이제 보니 오랫동안 뒤에서 칼을 갈고 있었어!”
관리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어른, 보십시오. 여기 낙득자재가 가장 먼저 나온 곳이 태평거라고 쓰여 있습니다!”
관리인이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두칠도 이미 확인한 후였지만,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간사한 놈들! 뻔뻔하구나! 비열한 소인배 같으니라고!”
두칠은 이를 갈며 욕을 해댔다. 손에 든 종이를 다 확인하고 난 관리인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주씨 가문이었다니!
그럼 그때 이후로 신선거를 노리기 시작했던 건가? 이제 보니 유 교리를 앞세웠는데도, 전혀 겁먹지 않았군.
“사람은 재물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쓰는 법이지.”
두칠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정 낭자가 있으니 믿을 만한 뒷배를 찾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니 의조부님도 안중에 없었겠지.”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믿을 만한 상대긴 하죠.”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으니 쉽사리 건드리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죽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두칠은 냉소를 지었다.
“저들은 암암리에 술수를 부리는데, 나라고 못 할까 봐? 주씨 가문은 태평 두부의 비법을 훔치려 했다는 핑계로 사람을 죽였으면서도 이치를 따졌다. 난들 이치를 못 따질 줄 알아? 그까짓 이치가 무슨 대수라고. 잊었나 본데, 저들도 벼슬아치야!”
두칠이 손을 뻗었다.
“종이를 이리 다오. 의조부님을 찾아가야겠다.”
관리인이 얼른 대답하고 손에 든 종이를 건넸다. 관리인은 두칠이 휙 몸을 돌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얼른 두칠을 불렀다.
“주인어른, 돈은 안 가져가십니까?”
유 교리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한 번 보려면 한몫 단단히 챙겨 줘야 했다. 두칠은 냉소를 지으며 손에 든 종이를 흔들었다.
“때로는 체면이 돈보다 더 요긴할 때가 있지. 체면을 잃었는데 돈이 대수야!”
주씨 가문은 유 교리가 뒤에 있는 걸 명백히 아는 상황에서 신선거를 계략에 빠뜨렸다. 이는 곧 유 교리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었다.
주씨 가문을 이대로 둔다는 건 유 교리의 뒤를 건드리도록 내버려 둔단 뜻이었다. 이번에는 뒤만 건드렸다지만 다음번에는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 주씨 가문을 눈감아줬다가는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손을 뻗칠 것이다.
이번에 주씨 가문을 내버려 두면 유 교리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텐데, 돈 따위가 대수겠는가. 남들이 우러러보는 일도 없을 터였다.
이번 일은 두칠이 당했다기보다는 유 교리가 당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당하고도 갚지 않는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는데, 돈까지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귀덕낭장, 두고 보자!”
두칠은 이를 갈았다.
더운 여름날, 멀리 강주에 있는 주 노야는 재채기를 하며 코를 비볐다.
어찌 된 일인지 요 며칠 계속 재채기가 나오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누가 뒤에서 내 얘길 하나. 하긴, 주씨 가문 말고 누가 있겠나. 근 한 달간 주씨 가문은 계속 주 노야 얘기를 화제에 올렸다. 행여 뭘 어쩌기라도 할까 봐.
“적응이 안 되시죠? 푹 쉬는 게 좋아요. 괜히 병나십니다.”
정 대노야가 아리송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교교의 아버지가 무슨 비열한 짓을 했는지는 우리 둘 다 똑똑히 봤소이다. 대노야, 이렇게 우리끼리 실랑이해 봐야 무슨 소용이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단칼에 매듭을 짓는 게 낫지. 관부로 갑시다.”
대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주 노야, 그럴 필요까지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죠. 이번엔 우리 쪽에서 착오가 있었다지만, 그쪽에서도 착오가 없으리라 장담할 순 없잖아요. 나중에 고생하느니 제대로 고르는 게 중요하죠.”
“제대로 골라요? 댁들이 어떤 사람을 골랐는데! 내 아무리 눈깔이 삐었어도 유곽의 기녀한테 빠진 서생 나부랭이를 교랑과 짝지어 줄 순 없소이다!”
정 대노야 부부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직접 보지 않고서야 모를 일이죠.”
그런 말을 나누는 사이 밖에서 여종이 들어왔다.
“부인, 정주(汀州)의 왕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정주 왕씨 가문은 대부인의 친정이고, 왕 부인은 대부인의 올케였다.
전갈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로 왔지? 대부인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왕 부인을 만난 후에는 놀란 정도가 아니라 경악을 했지만.
“뭐라고?”
대부인은 펄쩍 뛰며,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인을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둥근 얼굴에 가는 눈썹, 위로 올라가는 눈초리를 가진 여인은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치장한 차림이었다.
“형님, 우리 십칠이 이 댁 교랑 낭자한테 혼담을 넣겠다고요.”
여인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대부인이 경악을 하든 말든 전혀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올케, 미쳤어?”
정신을 차린 대부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애를 오냐오냐 키우는 건 그렇다 치지만, 혼인 같은 인륜지대사가 무슨 애들 장난이야?”
“십칠이 좋아한다잖아요.”
왕 부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좋아하면 뭐! 그 애가 살인을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을 죽이게 그냥 둘 거야?”
대부인이 씩씩거렸다.
“걔가 좋아하는 건 살인이 아니잖아요. 좋아하는 걸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사람을 죽이러 갈지도 몰라요.”
대부인은 기가 막혔다. 동생네 부부가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건 진작 알았고, 자신 역시 오냐오냐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 애는 바보라고! 바보! 우리 왕씨 집안에 바보를 들이다니! 체면도 없어?”
“형님, 남들이 뭐라고 한다고 우리 왕씨 집안 체면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왕 부인은 여전히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 초상화 봤어요. 십칠한테 얘기도 들었고요. 전혀 바보 같지 않던걸요.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던데. 물건 하나 사서 놓아두는 셈 치면 되죠. 그 낭자를 통해 대를 이을 생각도 없고요.”
“얌전하고 조용해 보여?”
대부인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바보는 화근덩어리야. 어딜 가든 그 애가 가기만 하면 재수가 없어. 아주 난장판이 되고 불운이 끊이지 않는다고.”
“형님, 솔직히 말해서 십칠이 떼를 쓰기 시작하면 그게 더 난장판이에요.”
왕 부인은 부채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난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고, 십칠은 신선한 걸 원할 뿐이에요. 어차피 오래 가지도 않아요. 싫증 나거든 다른 곳으로 보내 돌보면 되죠.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어요.”
대부인은 올케의 모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방 사람들을 비웃었더니, 이제 보니 나도 똑같이 됐네.”
대부인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왕 부인도 따라 웃었다.
“형님, 팽씨 가문을 어디 우리 왕씨 가문과 비교해요. 한 가지만 봐도 알 수 있죠. 내 말을 듣는 순간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알 거예요.”
대부인은 또 무슨 기절초풍할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왕 부인을 쳐다봤다.
“저쪽 팽씨 가문에선 교랑의 혼수를 탐내는 거잖아요.”
왕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부채질을 했다.
“주씨 가문도 교랑의 혼수를 노리는 거고요. 그렇다면 간단해요. 우리 왕씨 가문은 이 혼사에서 사람만 원해요. 혼수는 필요 없어요.”
사람만 원하고, 혼수는 필요 없다!
순간 대부인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정씨 저택의 대청에 모두가 모여 앉았다. 대부인의 말이 끝난 후 침묵이 이어졌다. 다들 각자 머리를 굴리기에 바빴다.
주씨 가문이 눈에 불을 켜고 정씨 가문을 감시하는 게 행여 그 바보를 학대하기라도 할까 봐 겁나서일까?
아니다. 혼수 때문이다.
정씨 가문이 주씨 가문과 진 빠지게 입씨름을 하며 싸우는 게 그 바보를 양육할 권한을 가져오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혼수 때문이다.
바보를 원한다는 말은 곧 혼수를 원한다는 말이며, 이 둘은 결코 떼어 놓고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사실 이 둘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바보가 시집을 가지 않으면 혼수는 영원히 바보의 것이 된다. 바보가 시집을 가면 당연히 혼수도 따라갈 것이다. 그런 여인이 혼수도 없이 시집가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혼수가 있어도 상대를 찾기 힘든데, 혼수가 없으면 누가 원할까.
“세상사는 역시 알 수 없구나.”
노부인이 중얼거리며 손에 든 염주를 굴렸다.
그래, 세상사에 절대적인 일은 없지. 다들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자네 올케는 정녕 그리하길 원하는 게야? 자네 부모님도 동의했고?”
노부인이 재차 묻자 대부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애를 오냐오냐 키우다 못해 이 지경이 되다니. 하늘의 별이라도 따 달라 하면 따 줄 작정인데, 동의하지 않으면 어떨 텐가.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너무 근본 없는 집안으로 보일 것 같아서였다.
“같은 마음이세요. 제 친정에서도 우리 근심을 덜어 주고 싶어 하거든요.”
대부인이 말을 얼버무렸다. 지금이야말로 이부인을 잡고 늘어질 최적의 시기였다. 예상대로 노부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 애 얘긴 꺼내지도 마라! 덜어 줘? 보태지나 말라지!”
정 이부인은 이미 금족령으로 발이 묶여 있었기에 이 자리에서 욕을 먹는 건 정 이노야뿐이었다.
“너희 십칠공자는 사정이 다르지.”
노부인은 감탄하는 투였다. 부잣집 귀공자면서도 파락호는 아니었다. 더구나 귀공자 노릇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쪽에서 그러고 싶다 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래? 우리가 어떻게 멀쩡한 애의 신세를 망치느냐 말이다.”
노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지켜보니…… 교랑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더라고요.”
대부인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말하는 걸 좀 안 좋아한다 뿐이죠. 어차피 시집가도 그 애가 나서서 누굴 접대할 필요는 없어요. 또…….”
또 그 애가 대를 이을 필요도 없고요. 말하자면, 그냥 장식품으로 갖다 놓겠단 거죠.
“정말, 혼수는 필요 없대?”
노부인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정말, 필요 없대요.”
대부인이 대답했다.
노부인은 다시 탁자에 기대앉았다. 염주를 돌리는 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혼수는 필요 없고 사람만 원한다니, 고난에 처한 중생을 구하고자 보살님이 나타나셨구나.
“주씨 가문에 말을 전해라.”
노부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대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지.
정 대노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잘됐군, 잘됐어. 정 이노야는 의기소침한 표정이었지만 이 방법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혼수는 필요 없다니, 아버지로서 딸의 남은 생애를 보살펴 주려면 딸의 혼수도 최선을 다해 살펴 주어야겠지. 그게 딸을 도와주는 길이니까.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정 대노야의 말을 들은 주 노야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교랑한테 바보 하나 구해 주는 것으로 매듭지을 생각은 접어 두시오!”
주 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바보라니요. 정주에 가서 알아보시구려. 왕씨 가문 십칠공자도 걸출한 인물이니까.”
정 대노야 역시 콧방귀를 뀌며 주 노야를 노려봤다.
“남들도 다 주씨 가문처럼 바보를 낳는 줄 아시오?”
순간 울컥한 주 노야는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섰다.
“정자주(程子洲), 지금 뭐라고 했소? 그 바보의 성은 정씨야. 주씨가 아니라.”
“주 노야도 그 바보의 성이 주씨가 아니라 정씨인 건 알고 계시나 봅니다.”
정 이노야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분위기가 어찌나 굳어 있는지 양옆에 꿇어앉은 몸종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죽였다.
“3 대 7.”
정 이노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좋소이다. 우리가 7, 그쪽이 3.”
주 노야가 즉시 말을 받자 정 이노야가 발끈하여 노려봤다.
“어디서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주 노야가 정 이노야의 팔을 홱 잡았다.
“정동! 우리 교교의 성이 정씨인 걸 생각해서 그나마 3할이라도 나눠 주는 거요! 어디서 7할을 가지려고!”
정 이노야가 팔을 뿌리쳤다.
“이 주가 놈아, 정도껏 해. 그럼 관아에 가서 이치를 따져 보자고. 우리 교랑을 좋은 집에 시집보내는데 그쪽에서 혼수는 필요 없다고 호의를 베푼 거야. 댁이 응당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고. 외조카의 혼수가 탐나서 아주 정신이 나갔구먼. 저의가 뭐야! 당장 관아로 가! 사람들 앞에서 한번 따져 보자고!”
“따져 보자면 겁낼 줄 알아? 저쪽에서 혼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우리 교교를 빈손으로 보내? 우리가 혼수를 가져가겠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교교를 위해서야. 당신 손에 맡겨 봐, 결국 팽씨한테 넘어갈 텐데.”
주 노야도 지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며 냉소했다.
“4 대 6.”
정 대노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쪽이 4, 내가 6이오.”
주 노야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쪽이 4, 내가 6이지!”
대노야가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한창 싸우고 있는데 밖에서 주 노야의 사환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노야, 노야. 부인께서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한데 뒤엉켜 눈을 부라리며 밀고 밀치던 세 사람이 각자 소매를 털며 물러섰다.
“어느 집 공자가 어떤지는 당신네 말로 결정되는 게 아니오. 전부 당신네 처가 사람들이잖소. 또 무슨 말 못할 더러운 일이 얽혀 있는지 누가 알아? 우리 집에서 알아보고 있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주 노야는 말을 마친 후 서찰을 건네받았다.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얼마든지 알아보시구려.”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놀라 소리치는 주 노야의 목소리가 들려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손에 든 서찰을 노려보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경악한 표정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주 노야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마음 같아서는 주 노야가 당장 뒈졌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정 대노야는 그래도 멀리서 여기까지 온 사람에 대한 예의를 챙겼다. 정신을 차린 주 노야는 정 대노야를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정씨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입을 삐죽이고는 자리를 떴다.
저녁 무렵, 주 노야가 경성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아무리 용을 써도 떨어지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제 발로 훌쩍 떠나겠다니.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의 귀에 소식이 들어갔을 무렵, 주 노야는 이미 마차에 앉아 있었다. 정교랑의 혼사를 어떻게 할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사환만 데리고 성문이 닫히기 전에 부랴부랴 밤길을 재촉했다.
대체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기에? 정씨 가문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또 무슨 다른 꿍꿍이로 사람을 들볶으려고 저러지?
정 대노야는 사환을 시켜 알아보도록 했다. 주 노야가 자신이 데려온 사람을 쓰긴 했지만 정씨 저택에 묵었다 보니 소문을 숨기기란 힘들었다. 곧 사환이 정보를 알아 왔다.
“좌천됐다고? 갑자기 좌천이라니?”
소식을 들은 정 대노야는 몹시 놀란 눈치였다. 주 노야 정도 위치라면 더 이상 딱히 공을 세우지 않아도 앞길은 순탄할 터였다. 관운이 좋아 높은 자리에 오르진 못하더라도 나이가 들어 이력이 쌓이면 벼슬도 차츰 위로 올라갈 것이다.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 이상, 갑자기 좌천이라니?
“주 노야의 표정을 보니 뜻밖이라는 눈치였습니다. 아무런 조짐도 없어 몰랐나 봅니다.”
집사가 말했다.
“당연히 몰랐겠지. 알았다면 강주까지 와서 이리 오래 머물 수 없을 텐데.”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이노야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거기도 누가 뒤에서 칼을 꽂았나 봅니다.”
정 이노야는 거참 고소하다는 듯 싱글벙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분명 누가 뒤에서 칼을 꽂은 거야. 나도 전에 그렇게 당했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지만, 정 이노야는 아직도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직첩(職牒: 임명장)을 받아 기뻐하며 펼쳐 보면 속이 백지인 꿈이었다. 그럴 때면 정 이노야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정 이노야는 손을 뻗어 가슴을 쓸어 보았다.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일이고, 가슴을 답답하게 옥죄는 일이었다. 대체 누가 칼을 꽂은 건지 지금껏 모른다는 사실이 특히 답답했다.
대체 누가 뒤에서 칼을 꽂은 거지? 누구야? 누구냐고!
주육낭이 대청으로 급히 들어왔다.
“어머니,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 부인은 손을 비비며 대청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초조한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동 대인도 잘 모르겠대. 중서문하성의 결정인 것만 안다더구나. 네 부친은 어디까지 오셨다던?”
“형님 말로는 이미 무양(武陽)을 지나셨답니다.”
주육낭이 주 부인을 위로했다.
“어머니, 우선 진정하세요. 대인들 몇 분이 힘을 써 주신다니 아직 만회할 여지가 있습니다.”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는 하나,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관직 생활에 뭔가 일이 생겼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여태 아무 일 없었고, 명절에도 여기저기 잘 챙겼어. 평소에도 세심하게 챙겼고. 순탄히 잘나가다, 갑자기 이게 무슨 변고라니?”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 이번 일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소리 소문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닥쳤다. 해묵은 원한은 절대 아니다. 갑작스럽게 뭔가 일이 생긴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일로? 아무 조짐도 없이.
“아버지께서 요즘 누구한테 밉보이기라도 하셨습니까?”
주육낭이 물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네 아버지가 이제 막 벼슬길에 나선 신출내기도 아니고, 경성에서 지낸 게 벌써 몇 년이야? 인맥도 여러 방면으로 탄탄히 쌓아 놨고, 쌓인 원한 같은 건 진작 처리해 놨으니, 그 사람들이 뒤에서 수를 썼을 리는 없어. 그리고 요즘엔 그 바보 일 때문에 강주에서 바쁘신데, 밉보이긴 누구한테 밉보여!”
거기까지 말한 주 부인은 순간 더욱 울컥했다.
“이게 다 그 강주 바보 때문이다! 역시 화근덩어리야! 그 애랑 얽힌 후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어! 애초에 이 집으로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어머니, 이게 그 애랑 무슨 상관입니까?”
주육낭이 인상을 썼다.
“글쎄 관계가 있대도! 냉큼 그 계집을 경성에서 내쫓아라.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해!”
“어머니!”
주육낭이 더는 못 참고 소리를 빽 질렀다.
“일단 아버지 일이 중요하잖습니까. 아무 데로나 화살을 돌리지 마세요. 일의 경중을 따져야죠.”
주육낭은 초조해하는 주 부인을 간신히 달래 놓고 마당으로 나왔다. 여전히 무거운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자네 집 누이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진 공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주육낭의 눈앞에 진 공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 공자가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어도 둘은 돼. 정 낭자 때문에 팔려간 두 여종과 몸종의 가족 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있다면, 그 수는 더 많아지겠지.”
그 여종과 몸종은 입을 놀렸을 뿐인데, 일격에 화를 입었다. 주씨 가문이 여인에게 저지른 일은 입을 잘못 놀린 정도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뒤끝 있고 속 좁은 여인이야.”
설마, 진짜, 그 여인의 짓일까?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주육낭은 손을 휘휘 내저어 눈앞에 있는 진 공자의 모습을 없애 버렸다. 괜히 사서 걱정할 필요 없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주육낭은 즉시 문을 나서며 소리쳤다.
“말을 준비해라!”
주육낭은 늘 그랬듯 옥대교 저택으로 다짜고짜 쳐들어왔다. 금가아는 이미 습관이 됐는지 더는 전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지지 않고 문에 기대 분노로 노려보기만 했다.
“혼자 왔어요?”
주육낭이 자리에 앉자 정교랑이 언제나처럼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주육낭의 뒤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절름발이는요?”
막 자리에 앉던 주육낭은 방석에 있는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서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교랑! 말을 꼭 그리 독하게 해야겠어?”
주육낭은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정교랑은 변함없는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며 물었다.
“둘이, 드디어 사이가 틀어진 거예요?”
주육낭의 얼굴은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미안하지만 네 뜻대로 될 일은 없을 거다. 우린, 아주 잘 지내거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할 것 없어요. 천천히 하죠.”
주육낭은 씩씩거리면서도 말문이 막혀 깊은 한숨과 함께 분노를 눌렀다.
“정교랑, 너랑 입씨름하자고 온 거 아니다. 하나만 묻자.”
주육낭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 일, 네가 그런 것이냐?”
편하게 앉아 주육낭을 쳐다보던 정교랑이 그 말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는데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주육낭은 그 눈빛에서 진지함을 읽었다.
이 여인은, 모르고 있어……. 이 여인은 아니다, 아니야.
주육낭은 한숨을 토하고 말없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정교랑의 옆에 꿇어앉아 있던 시녀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저 자식이 종잡을 수 없는 인사라는 건 진작 알았다만,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따지니 답답할 수밖에.
“이봐요, 제정신이에요? 툭하면 찾아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서 정작 말해 주는 것은 없다니, 대체 뭐하자는 거죠? 여기 놀러 와요?”
주육낭은 아랑곳하지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시녀는 뒤에서 몇 걸음 따라가며 발을 굴렀다.
“진짜 재수 없어. 어떻게 당신네 같은 친척을 만났는지! 아주 성가셔 죽겠네!”
쫓아가면서 외치는데도 주육낭은 유유히 가 버리자 시녀는 분노하며 대문을 쾅 닫아 버렸다.
“진짜 열 받아 죽겠어.”
시녀가 대청으로 돌아왔다. 정교랑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멍해 보이기도 했다. 이럴 땐 정말 아씨가 보통 사람과 다른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다른 여자들이었다면 벌써 울고불고했을 테니까.
“아씨, 집을 지킬 가노들이라도 구해야겠어요. 매번 저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오게 둘 순 없잖아요.”
시녀가 꿇어앉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괜찮아.”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신경 쓸 것 없어.”
아씨는 언제나 이렇게 환경에 잘 적응했다. 하늘이 무언가를 주면 기꺼이 받으며,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시녀는 짠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짜 성가신 일이 생기겠네.”
정교랑은 손가락으로 탁자 윗면을 가볍게 치며 말을 이었다.
진짜 성가신 일? 시녀는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요즘 별 일 없었는데? 성가신 일이라니? 아씨의 눈에 성가신 일이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술잔을 단숨에 비운 두칠은 탁자 위로 잔을 내던지며 통쾌한 듯 웃어댔다.
“주씨 가문 그 늙은이, 이젠 끝났어.”
우쭐한 표정이 감춰지지 않았다.
“일개 무관 주제에 겁도 없이 문관에 맞서려 들어? 그것도 중서문하성 관료한테? 발탁해서 키워 주는 건 힘들어도, 꼬투리를 잡으려 들면 어려울 게 뭐 있나? 떳떳하게 대놓고 말한들 누가 어쩌겠어?”
관리인이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럼요, 맞습니다. 이번에 의조부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어요.”
“일개 벌레 새끼가 호랑이 털에 올라타니 제가 호랑이라도 된 줄 알았나 보지? 다른 호랑이의 피까지 빨아먹으려 하게?”
두칠은 냉소를 지었다.
“뱃가죽이 얇아 어차피 배 터져 죽을 텐데.”
두칠이 이번에도 술잔을 단숨에 비우자 관리인이 또 술을 따라 주었다.
“유 교리께서 경성에 오래 계신 덕에 움직임이 빨랐습니다. 뜻밖에도 진씨 가문이나 동씨 가문은 물론 그 누구도, 병이 있든 없든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죠.”
거기까지 말한 관리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무 간단한데? 두칠은 또다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본디 간단한 일이었어. 의조부님께선 수십 년간 명성을 쌓아 오셨고, 여기저기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 많으니 함부로 못 나서지. 주씨 가문이 아둔하여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야!”
관리인은 의혹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싱글벙글 웃었다.
“주씨 가문만 불쌍하게 됐네요. 돈을 크게 쓰지 않는 이상, 무사히 빠져나오긴 힘들 텐데요.”
“자업자득이지!”
두칠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태평거의 주인이 곧 두씨로 바뀌겠습니다.”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그럼 설마 유 교리가 그저 화풀이나 하자고 나섰을까 봐? 화풀이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이익이 더 중하지. 명석한 사람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다.
“한 가지가 남았다.”
취기가 오른 두칠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더해졌다.
“의조부님이 나서셨으니, 나도 분풀이를 해야지.”
두칠이 손을 뻗어 탁자를 두드리자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사리 분별도 못 하는 이대작 놈 말이다.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해.”
두칠이 냉소를 지었다.
성문이 닫히자 어둠이 내린 큰길에 인적이 드물어졌다. 태평거의 등불도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종일 시끌벅적했던 식당도 조용해졌다. 바쁜 하루를 보낸 점원들 역시 웃고 떠들며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이대작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대작,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가지 마.”
오 관리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벌써 며칠째 못 간걸요. 오늘은 가 봐야 해요. 더위도 식힐 겸 다녀와야죠.”
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랑 채소, 쌀국수 챙겨 놨으니 가져가게.”
“아닙니다. 집에 있는 것도 못다 먹었어요.”
하지만 이미 점원 하나가 꾸러미 두 개를 나귀 등에 실어 놓은 후였다.
“이건 규칙이야. 자네 몫이니 가져가야지. 규칙을 어기면 쓰나.”
오 관리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대작은 허허 웃으며 더는 사양하지 않고 모두에게 인사한 후 나귀를 타고 출발했다.
여름인데도 바람이 불어 무더위를 식혀 주었다. 이대작은 등롱을 들고 나귀를 끌며 천천히 걸어가면서 쌀국수와 고기, 채소를 어느 친척에게 나눠 줄지 생각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댁에는 지난번에 보냈으니 이번엔 됐고, 한동안 외숙과 연락이 뜸했으니 한번 뵈러 가야겠네. 이모님 댁도. 힘겨울 때 딱히 도와준 건 없지만 그래도 피붙이 아닌가. 이제 살 만해졌으니 힘껏 끌어주며 도와야지.
뒤에서 낮고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밤길을 다니는 마을 사람들인가? 이대작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장정 네다섯 명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순간 이대작에게 자루가 씌워졌다.
“당신들 뭐야!”
이대작이 소리쳤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면에서 몽둥이가 날아왔다. 처참한 비명이 밤하늘을 가르자 사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목숨은 붙어 있게 해라.”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몽둥이세례가 멈췄다. 이대작은 축 처진 채 몸을 웅크리고 신음 소리만 간신히 냈다.
“그렇지만.”
사내가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도 헛걸음할 수야 없지.”
말뜻을 알아들은 사내들이 음흉하게 낄낄거렸다.
“형님, 어느 쪽 손으로 할까요?”
누군가가 묻자 먼저 말했던 사내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듣자니 숙수라던데, 궁금하군. 오른손이 없는 숙수도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정신을 잃어 가던 이대작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며 버둥거렸다.
“살려 주십시오…….”
이대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애원하고, 손을 뻗어 기어가려고 했다. 도망쳐야 해, 어서…….
하지만 곧 누군가가 몸뚱이를 밟았다. 동시에 앞으로 뻗었던 손도 밟혔다.
안 돼. 살려 줘…….
밤은 어두웠고, 마대 자루로 덮인 탓에 더욱 시야는 더욱 캄캄했다. 누군가가 땅바닥을 나뒹굴며 꺼져가던 등롱을 들더니 단도를 꺼내 빛을 비췄다.
처참한 비명이 또다시 밤하늘을 갈랐다. 옆에 있던 등롱으로 피가 튀면서 마지막 남은 불씨를 꺼뜨렸다. 천지는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밤이 깊자 태평거는 고요해졌다. 문 앞에 내건 등롱 외에는 뒷마당에 있는 두부방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두부방의 등은 밤마다 켜져 있었다.
손재는 두부에 간수를 친 후 열쇠로 안에서 문을 따고 나왔다. 문밖 회랑 아래에서 웃고 떠들던 점원들이 얼른 일어났다.
“다들 정신 단단히 차려. 일하는 시간에 술 훔쳐 먹었다가는 내쫓을 줄 알아.”
손재는 문을 나오며 점원 둘에게 훈계를 했다.
“사부님, 하루에 세 번씩 말씀하시잖아요. 잘 알겠으니 그만하세요.”
점원 하나가 웃으며 말하자 손재가 벌컥 성을 냈다.
“열 번을 말해도 마음에 안 담아 두면 소용없어! 모처럼 온 좋은 날이야. 너희도 모처럼 운수가 트이게 됐고. 누구든 열심히 안 하면 비렁뱅이로 살게 도로 내쫓을 줄 알아!”
“사부님, 염려 마세요. 사부님이 열심히 안 하셔도 저희는 열심히 할 겁니다!”
두 점원이 대답했다. 손재는 두부 틀을 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스갯소리를 하려던 손재는 돌연 동작을 멈추고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점원 하나가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여럿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손재의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다.
깊은 밤이라 벌레 소리도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두 점원도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흐느끼는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직 칠월 보름도 안 됐으니, 귀, 귀신은 아닐 텐데…….”
점원 하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손재가 화를 버럭 냈다.
“귀신은 얼어 죽을!”
손재는 눈을 부라리며 앞쪽 식당과 뒤쪽 두부방을 차례로 가리켰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 태평거와 태평 두부라고. 부처님이 드시는 두부를 만드는 두부방! 대체 어느 귀신이 감히 여길 와?”
그건 그렇지. 두 점원은 자세를 바로 하고 똑바로 섰다.
“오늘은 날이 더우니 난 마당에 자리 깔고 자야겠다.”
손재가 고개를 쳐들고 몸에 힘을 주며 말했다. 손재가 마당으로 걸어가자 밖에서 들리던 여인의 흐느낌이 한층 가깝게 들렸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울음소리라고 할 순 없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의미 없는 절규 같기도 했다. 그런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람이 저런 소리를 내지? 아니면, 사람이 아닌가…….
손재가 으악 비명을 지르자 회랑 아래에 있던 두 점원도 놀라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태평거의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창문과 문이 열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손재, 무슨 일이야?”
서봉추가 위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마당에 있던 손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손을 덜덜 떨며 밖을 가리켰다.
“귀신이 울어요!”
손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밖을 쳐다봤다. 사방이 소란스러워진 통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서무수가 걸어 나왔다.
두부방이 워낙 특수한 곳이었기에 서무수 형제는 두부방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잤다. 만일의 경우 가장 신속하고 빈틈없이 두부방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손재가 신경 쇠약이 있나 봐요.”
서봉추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게 아닙니다. 밖에 누가 운다니까요!”
손재가 소리쳤다. 신경 쇠약이라는 누명을 쓸 순 없었다. 그랬다간 밥그릇이 날아갈 텐데.
서무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들 조용!”
시끄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뚝 그쳤다. 동시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날카롭고 긴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들려왔다. 마당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저기 좀 봐요. 횃불이야!”
위층에 서 있던 사람이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횃불? 위층에 서 있던 사람들은 까치발을 들었고,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우르르 문 쪽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타오르는 횃불 서너 개가 뱀처럼 이어져 빠르게 움직였다.
“송씨댁이에요!”
위층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송씨댁? 이 대작의 부인?
서무수가 고개를 들어 소리친 사람을 쳐다봤다. 이대작이 데려온 점원으로, 이대작의 식구와 잘 아는 사이였다. 점원은 놀란 표정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전부 우리 마을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들고 오고 있어요.”
서무수와 범강림의 눈이 마주치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 났구나!
경성 성문은 미시(未時)에 북이 울리면 닫혔다가 오경에 북이 울리면 다시 열렸다. 지금은 여름이라 날이 일찍 밝아 사경으로 바뀌었다. 한밤중인 삼경에 문을 두드려대자 성문을 지키는 위병의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행패야! 밤길 다니는 귀신이면 우릴 부를 필요도 없을 텐데.”
위병들이 고개를 빼고 소리쳤다. 성문 앞에는 열댓 명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횃불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사이로 이들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귀신과 다를 바 없는 몰골이었다.
위병들은 성문을 지키며 산전수전 다 겪은지라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저기 좀 봐.”
누군가가 팔꿈치로 동료를 툭툭 찌르며 말했다.
“피야.”
고개를 숙여 쳐다보니 횃불 아래에 선 사람들의 몸이 피로 얼룩덜룩했다. 성문을 지키는 위병은 순간 몸을 뒤로 뺐다.
“관졸 나리, 저희는 성으로 들어가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급병이니 사정을 봐주십시오!”
서무수가 소리쳤다. 법령에서는 병이나 출산, 장례에 관한 일일 경우 예외적으로 성문을 열게 되어 있었다.
급병이라고? 어쩐지. 성문 위병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통행증은 있소?”
서무수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통행증을 꺼내 들었다.
성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위병 몇 명이 다가왔다. 이들도 사람을 확인하고는 기겁을 했다. 들것 위에 누운 사내는 이미 원래의 용모를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다. 여기저기 멍들고 퉁퉁 부었으며 얼룩덜룩 핏자국까지 있었다. 구타를 당한 흔적이 틀림없었다.
성문 위병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서무수가 얼른 돈을 찔러줬다.
“관졸 나리,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거로 차나 한잔하시죠.”
신체 건장한 서무수는 단출한 옷차림에도 신중하고 듬직해 보였다. 위병들은 손짐작으로 돈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고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이쪽 길에 있는 의원이 용하오.”
위병이 길을 가리키며 다른 위병 둘에게 따라가라고 했다. 통행증을 확인하긴 했지만 오밤중에 사람을 통과시키려니 불안하여 사람을 붙이기로 한 것이다. 서무수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쪽이다, 빨리.”
서무수가 앞장서서 달리며 외쳤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서무수가 이끄는 방향으로 우르르 달려가자, 두 위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따라나서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또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온몸에 얼룩덜룩 핏자국이 남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무언가를 싼 꾸러미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 꾸러미에도 피 얼룩이 있었다. 성문에 걸린 등불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귀신과 다를 바 없었다.
“아직 있어요, 아직 있어.”
여인이 중얼거렸다.
“뭐가 아직 있단 말이오?”
위병이 물었다.
“아직 있어요, 아직 있어.”
여인은 정신이 나간 듯 대꾸하지 않고 자기 말만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갔다.
위병들은 갑작스러운 변고를 겪은 사람을 숱하게 봐 왔다.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경우도 있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놓는 경우도 있었다. 보아하니 이 여인은 후자인 것 같았다.
“세상살이라는 게 참.”
위병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작은 변고에도 삶이 뒤바뀌곤 했다. 위병은 손을 내저으며 두 위병에게 냉큼 따라붙으라는 눈짓을 했다.
잠시 지체하는 사이, 서무수 일행은 벌써 저만치 간 후였다. 위병들이 얼른 뒤따라갔다.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밤의 거리에 울려 퍼졌다.
“아니, 아니. 의관은 이쪽이라고!”
서무수 일행이 방금 전 알려 준 방향으로 가지 않고 길을 따라 성 안으로 쭉 들어가자 두 위병이 뒤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서무수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인은 맨 뒤에서 따라왔다. 몇 걸음에 한 번씩 넘어지면서도 개의치 않고 다시 일어나 비틀비틀 걷고 또 걸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다시 일어났다.
폭도들인가? 서무수 일행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에서 종적을 감추자 위병들은 흠칫 놀랐다.
“그 많은 사람이…….”
위병이 중얼거렸다.
만에 하나 폭도들이라면, 위병 둘 정도는 단칼에 죽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폭도가 맞는다면 지금 요행히 목숨을 건진다 해도 추궁하는 과정에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찰나, 말발굽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자 두 위병은 안도하며 기뻐했다. 삼경이면 거리를 나다니는 것만으로도 죄인데 하물며 말을 타다니. 말을 탄다는 것은 곧 그만한 명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리를 순찰하는 금오위였다.
“대인들!”
위병들이 말발굽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갔다. 거리를 순찰하던 열댓 명은 경계 태세를 취하며 칼을 빼 들었다.
“누구냐?”
우두머리인 사내가 물었다.
“대인, 대인. 저희는 성문을 지키는 위병입니다.”
두 위병이 소리치며 가까이로 다가갔다. 등불 덕에 우두머리인 사내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자, 위병들은 크게 기뻐했다.
“유 대장(大將: 무관 말단 품계. 여기서는 금오위 소속 좌우가사左右街使를 가리킴)이셨군요!”
위병의 말에 금오위 병사들이 그제야 병기를 거두었다.
“성문은 안 지키고 왜 거리를 쏘다니느냐?”
유 대장이 물었다.
“대인, 방금 누가 병을 치료해야 한다며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저희가 호송 중이었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위병이 얼른 대답했다.
그런 일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아주 대담한 놈들이군!
유 대장은 벌컥 성을 내며 방금 전에 넣었던 칼을 도로 빼 들었다.
“다들 나를 따르라. 놈들을 놓쳐선 안 된다!”
거리를 순시하던 기병 열댓 명이 퍼붓는 소나기와 같은 말발굽 소리를 내며 질풍처럼 내달렸다. 성문을 지키던 위병 두 명만 뒤로 처져 비틀비틀 따라갔다.
“이건 공을 세울 기회야! 어서 쫓아가자고!”
한 위병이 모자를 제대로 고쳐 쓰며 외쳤다. 저 기병들이 있으니 직접 나서서 도둑을 잡으며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두려움을 떨치고 용맹하게 나선 공은 자신들의 몫이었다. 두 사람은 잽싸게 뒤따라갔다.
서무수 등은 정교랑의 저택 문 앞에서 막혔다.
“우린 병을 치료하러 왔습니다! 폭도가 아니에요!”
서무수가 들것 위에 누운 이대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쪽으로 길을 따라 뛰어오던 사람들은 병졸들에게 막히자 더는 못 버티겠는지 혀를 빼고 숨을 헐떡였다. 체력이 달리는 이들은 아예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눕기도 했다.
꼴을 보아하니 폭도 같진 않은데. 유 대장은 뭔가 오해가 있었다고 여기면서 들것 위에 누운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럼 왜 의원한테 가지 않고, 이리 돌아다니는 게냐?”
“대인, 아무 의원을 찾아간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서무수가 대답했다. 유 대장은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맞아서 다친 상처지 않느냐. 타박상은 보기 흉측해서 그렇지 목숨을 잃는 것도 아닌데, 못 고친다니?”
서무수가 비통한 표정으로 유 대장을 쳐다봤다. 때로는 죽는 게 사는 것보다 쉬울 때가 있다.
“셋째 도련님! 정말 도련님이셨네요!”
시녀의 목소리와 함께 근방에 있는 저택의 문이 열렸다. 시녀와 금가아가 등을 들고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시녀가 다급히 묻자 서무수가 고개를 돌렸다.
“어서 누이를 불러와. 사람을 살려야 해.”
서무수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누이? 유 대장은 더욱 영문을 몰랐다. 누이가 사람을 살린다?
유 대장이 고개를 들어 저택을 쭉 둘러봤다. 마당에는 벌써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깔끔하고 정갈해 보이는 저택이었다.
찰랑 소리에 유 대장이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한쪽에 있는 석가산에서 대나무 통에 찬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여기가, 의관인가?
유 대장의 시선이 회랑 아래로 향했다. 들것에 있던 사내가 회랑 아래로 옮겨지자 곧 안에서 여인 하나가 나왔다. 뒤쪽 실내에서 나오는 불빛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품이 큰 옷소매를 털며 꿇어앉는 모습만 보였다.
“그냥 타박상이에요?”
정교랑이 들것 위에 누운 이대작을 보며 물었다.
“아니.”
서무수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녀와 반근, 금가아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이대작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다가 서무수의 말을 듣고 놀라 서무수를 쳐다봤다.
이 지경이 되도록 맞았는데, 다른 상처가 더 있다고?
정교랑은 서무수를 쳐다보지 않고 이대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의 시선이 차츰 아래로 향하다가 돌연 멈췄다. 문득 앉은 자세에 힘이 들어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몹시 놀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녀와 반근, 금가아도 얼른 이대작을 쳐다봤다.
반듯이 누워 있고 몸 옆으로 손이…… 아니, 손이 없었다. 천으로 꽁꽁 싸맨 손목만 피범벅이 된 채로 있을 뿐이었다.
“손은요?”
시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손? 유 대장이 한 발짝 다가서서 들것 위에 누운 사내를 쳐다봤다.
“아직 있어요, 아직 있어.”
여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유 대장의 몸을 쳤다. 유 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니 웬 여인이 옆을 지나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여인의 손에는 칭칭 싸맨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아직 있어요. 아직 있어.”
여인이 비틀비틀 층계를 오르다 넘어졌다. 시녀와 반근이 울며 달려가 부축했다. 송씨댁은 넋을 놓은 채 회랑 아래로 달려가 이대작의 곁에 꿇어앉았다.
송씨댁은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천으로 싸맨 꾸러미를 이대작 옆에 내려놓았다.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얼굴이었다. 송씨댁이 조심스레 꾸러미를 펼치자 허연 손 하나가 드러났다.
“아직 있어요, 아직 있어.”
송씨댁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손!
손이다!
잘린 손!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시녀와 반근은 손을 보고 기겁하여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금가아 역시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이들과 달리 유 대장은 앞으로 다가갔다. 뭔지 알겠다는 듯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거였어…….
아씨께서 말씀하신 성가신 일이 이건가? 세상에, 세상에나.
시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마당은 시녀의 울음소리와 사내들의 침통한 한숨 소리, 송씨댁이 웃으며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한데 얽혀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 난…….”
들것 위의 이대작은 정신이 드는지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벌려 뜨며 입술을 달싹였다.
“살려 주세요…….”
이대작의 목소리는 희미하고 힘이 없었지만 가까이 있는 서무수 등에게는 또렷이 들렸다.
“이보게, 걱정 말라고.”
서무수가 갈라진 목소리로 손을 뻗어 이대작의 팔을 잡았다.
“이제 살았소. 놈들은 다 도망쳤어. 이제 아무 일 없소.”
아무 일 없다니. 이대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내 목숨은 구했는데…….”
이대작이 중얼거리며 눈을 크게 떠 보려고 애썼다. 눈앞에 정교랑이 보이자 순간 힘이 났다.
“아씨, 아씨……. 고쳐 주실 수 있습니까?”
“고칠 수 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다친 곳이야 고칠 수 있다지만, 손은?
시녀와 반근은 입을 틀어막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이대작이 씩 웃었다.
“네, 아씨. 고쳐 주실 수 있지요. 그리고…… 제 목숨도…….”
이대작은 힘없이 말을 이으며 손을 들어 보려고 애쓰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게 있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내, 내…… 손이…….”
서무수는 차마 더는 못 듣겠는지 고개를 돌렸다. 한쪽 옆에서 계속 중얼거리던 송씨댁은 그 말을 듣더니 반색하며 잘린 손을 집어 들었다.
“아직 있어요, 아직 있어.”
송씨댁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반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엉엉 목놓아 울었고, 시녀는 꿇어앉아 송씨댁을 끌어안았다.
“송씨댁, 송씨댁. 차라리 울어요. 어서 울라고요.”
시녀가 송씨댁을 잡아 흔들며 외쳤다. 하지만 송씨댁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자신이 왜 울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듯이.
“아직 있어요, 아직 있어.”
송씨댁은 잘린 손을 꼭 쥐고 계속 중얼거렸다.
“기절시켜요.”
서무수는 정교랑에 말에 바로 손을 들어 송씨댁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송씨댁이 힘없이 쓰러졌다.
“부축해.”
정교랑의 말에 시녀와 반근이 송씨댁을 부축해 물러갔다. 잘린 손은 바닥을 나뒹굴었는데, 흔들리는 등불 때문인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이대작은 피가 섞인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없어…… 없어졌어…….”
손이 없으면, 목숨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손이 없으면 더는 숙수 노릇을 할 수 없다. 폐인이 될 것이다. 아무 쓸모도 없는 폐인.
취봉루에서 쫓겨났을 때처럼 폐인이 될 것이다. 침상에 누워 죽기만 기다릴 때처럼 폐인이 될 것이다. 아무 쓸모도 없는 폐인.
귀인의 도움으로 며칠 좋은 날을 보내는가 싶었는데 또다시 폐인이 됐다. 결국 폐인이 될 운명이었다.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아씨, 운명은 고칠 수 없나 봅니다…….”
이대작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