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 49화 (49/160)

교랑의경 7권

-무심결에-

정교랑의 저택은 번화가에 있어 위치가 아주 좋았다. 과거 모 재상의 소유였던 곳인데 재상이 실각하면서 조각조각 나뉘어 팔리게 됐다. 진씨 가문도 그때 한 자리 얻었고, 나머지 집들도 다른 관료들이 은밀히 사들인 터였다.

다들 임대로 생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집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예비용으로 남겨 두었다. 따라서 지금 정교랑의 저택 좌우 양쪽으로 딱히 이웃이라 할 사람은 없고, 집을 지키는 이들의 가족만 머무르는 상황이었다.

평소에 왕래도 없던 차에 갑자기 담벼락 위에서 얼굴을 내밀고 질문을 던지니, 안 놀라고 배겨?

“또 당신이군요!”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또 너구나!”

진안 군왕도 말했다.

“천것 같으니라고. 내 너희 아씨와 얘기 좀 하겠다는데, 넌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얘기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벼락 위쪽에 매달려 있던 소년은 비틀거리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마당에 있던 사환과 시녀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담벼락을 붙잡아 다행히 떨어지진 않았다.

“잘 붙잡아라.”

소년은 아래를 보며 명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정교랑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담을 너무 높게 지었잖아요.”

정교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시녀는 콧방귀를 뀌며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부축했다.

“아씨, 우리 들어가요.”

“이 천것이, 내 너희 아씨와 할 얘기가 있다는 말 못 들었느냐? 내 좋게 이야기하려고 특별히 이런 방법까지 쓴 건데.”

좋게 이야기한다는 게 이런 거야? 시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말문이 막혔다.

시녀는 똑소리 나는 말주변으로 각종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해 왔고, 늑대 떼의 기습을 받았을 때도 놀라 몸이 마비될 지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단 두 가지 상황만은 예외였다. 하나는 살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고, 다른 하나는 이 기괴한 소년과 마주쳤을 때였다.

사람이 맹수보다 더 무섭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소년이 준 느낌도 그런 것이었나? 시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담벼락 위의 소년을 쳐다봤다.

햇빛을 받은 소년의 얼굴은 백옥처럼 희고 고왔으며, 여인에게 없는 준수함도 느껴졌다. 소년의 얼굴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깊고 그윽한 두 눈은 웃음기로 인해 더욱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소년을 누가 죽이려 든다면 몰라도, 이런 소년에게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좀 이상한데?

시녀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한테 무슨 얘길 하려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팔을 담벼락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여길 샀어요. 우린 이제 이웃입니다.”

이런 뻔뻔한 호색한 같으니라고! 정신을 차린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군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은 다시 웃음을 짓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아래를 쳐다봤다.

“기다려요.”

진안 군왕이 손 하나를 아래로 뻗으며 말했다.

“가져오너라.”

손 하나만 담벼락에 걸쳐 둔 상태라 진안 군왕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마당에서 쳐다보고 있던 시녀와 금가아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반근은 정교랑이 소년의 말에 대답했을 때 이미 자기 일을 하러 떠난 후였다.

“확 떨어지면 쌤통이겠네!”

시녀가 중얼거렸다. 애석하게도 시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진안 군왕은 다시 중심을 잡고 섰다. 손에 작은 함까지 들고 있었다.

“낭자에게 줄 간식이에요.”

진안 군왕이 손에 든 함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죠.”

진안 군왕은 멍하니 서 있는 금가아를 손짓해 불렀다.

“너 꼬맹이, 이리 와.”

금가아는 갑자기 부르자 멈칫하여 머뭇거리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가 봐.”

정교랑의 말에 금가아는 네 하고 대답한 후 그제야 담벼락 옆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진안 군왕이 머뭇거렸다.

“너 괜찮겠냐? 받을 수 있겠어?”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리고 손짓을 하며 거리를 가늠해 봤다.

“밧줄로 묶어서 내려주는 게 낫겠다.”

그 말은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내린 분부였다. 곧 밧줄이 건네졌다. 법석을 떨고 있는 사이 정교랑은 이미 회랑 아래로 가 앉은 상태였고, 시녀 역시 아예 입을 다물었다.

“됐다.”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과 시녀가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이 밧줄로 삐뚤빼뚤 묶은 함을 내려주었다. 밧줄이 짧다 보니 금가아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대로 손을 놓아 버렸다.

함은 금가아의 품으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양측 모두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기라도 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식이 맛있더군요.”

진안 군왕이 회랑 아래의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내 것도 먹어 봐요.”

금가아가 들고 와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주육낭이 가져온 함을 일부러 꺼내 왔다.

“두 개나 되네요. 아씨, 어느 걸 먼저 드시겠어요?”

정교랑이 눈을 들어 시녀를 쳐다봤다.

“이 두 갠 달라. 하나는 먹으란 거고, 하나는 말을 전하는 거야.”

시녀가 멈칫하며 손에 든 두 함을 쳐다봤다. 다르다고?

“누가 강주에 갔었어.”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가 퍼뜩 깨닫고 고개를 숙여 현묘관이라고 쓰인 함을 쳐다봤다.

“그 사람들이 강주엔 왜 갔을까요?”

“혼사 때문이겠지.”

정교랑의 대답에 시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렇지. 진(秦)씨 가문의 일은 유야무야됐지만, 그 일은 주씨 가문에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씨를 원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라고. 진씨 가문이 아니어도 경성엔 아씨를 원하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고. 주씨 가문에 유리하고 흡족할 만한 상대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고.

정교랑과 시녀가 저희들끼리 소곤거리자 진안 군왕은 일부러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난 이만 갑니다.”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시녀가 눈을 흘겼다. 그쪽 붙잡는 사람 없네요. 시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보며 살짝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손을 내저었다. 너무 오래 서 있어선지 자신이 사다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젓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하더니 부랴부랴 담벼락을 잡았다. 시녀는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쳐다봤고 정교랑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높아요.”

진안 군왕도 따라 웃었다.

“못 믿겠으면 올라와 봐요. 제대로 서기도 힘드니까.”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난 이만 갑니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담벼락을 붙잡다가 또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아, 참.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햇볕이 쨍쨍하던 여름 날씨가 순식간에 바뀌는 듯했다. 담벼락에 서서 어깨만 간신히 보이는 소년이 해를 가리기라도 한 듯 엄청난 먹구름이 마당에 드리워졌다.

맑고 화창했던 여름날이 순식간에 스산한 가을날로 바뀐 듯했다. 옆으로 내려뜨렸던 시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산골짜기에서 맞은 새벽이 떠올랐다. 아씨와 소년은 가까이에서 나지막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때 소년이 짓던 표정이 아마 지금 자신의 표정과 비슷했으리라.

공포 그 자체였다.

시녀는 지금껏 아씨에게 뭘 말했는지 묻지 않았다. 속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해 봤지만 통 짚이는 게 없었다. 우연히 스친 인연이고 각자 갈 길 가면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건만 경성에서 재회하다니.

그때 아씨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구나. 그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한 것이었다니…….

역시 무서운 건 맹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소년의 일행이 노숙을 하는데 뒤에서 늑대 떼가 공격해 왔다면 이는 사람의 목숨을 노린 게 분명했다. 누가, 무슨 원한을 샀기에?

어쩐지, 어쩐지. 어쩐지 저 소년이 위험해 보인다 했어.

저 소년은 갖은 수를 써 가며 아씨에게 접근하고, 은밀히 염탐했다. 아씨를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얘길 들어 보니 저 소년은 그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했다. 하지만 아씨는 알았다.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당사자도 모르는 일을 알고 있으니 의심이 갈 수밖에.

시녀는 걱정되고 초조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씨, 뭐라고 말해야 하죠?

시녀는 문밖에서 나는 무거운 숨소리를 들었다. 담벼락 밑에서도 칼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갑자기 이들 앞에 나타난 이웃은 내력이 불분명하고 행적을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경성에서 사람 하나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할 방법은 많았다. 더구나 저택에 세 여인과 힘없는 사환 하나만 살고 있다면 더더욱.

불을 지른다거나 화살을 비처럼 퍼붓는다거나. 일이 일어난 후에 조사를 한들 어쩔 것이며 범인을 잡은들 어쩔 텐가.

아무리 주씨 가문의 외조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지녔다고 해도 아씨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아씨께서 늘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시는 것도 그래서겠지.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말도 이런 뜻이겠지.

순간 시녀의 마음속엔 엄청난 파도가 덮치는 듯했지만, 정교랑의 표정은 여전했다.

“책에서 봤는데, 늑대 떼는 야밤에 큰길에서 먹이를 찾지 않는대요. 사람이나 마차를 기습하는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말했다.

책에서 봤다고?

시녀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가 늑대 떼의 기습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지만, 정말 책에서 그런 내용을 보셨나? 사실이 그렇다고 한들 그 말을 누가 믿냐고!

아씨도 참 짓궂으셔. 사실을 간파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냐고. 스치는 인연에 딱히 알던 사이도 아닌데 죽거나 말거나 뭔 상관이라고. 괜한 말로 남의 비밀을 건드리다니.

어쩌면, 아씨가 너무 선량해서일 수도 있다.

시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오래 못 살던데.

“아, 참.”

담벼락 위의 소년이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쁨? 시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거긴 길이 나 있었고, 영리한 늑대 떼도 먹이를 구할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길에 오래 머물 린 없었어요. 타고난 천성이 후천적인 관성을 덮지 않는 한.”

소년은 의기양양했고 점점 생기가 넘쳤다. 아직 담벼락 위에 있다는 사실을 또 잊은 듯했다. 소년이 손 하나를 뻗어 손짓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피였어요. 그놈들이 뒤에서 말의 피로 유인했더라고요. 우린 밤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어둠에 덮여 눈치채지 못했지만요.”

시녀는 아연실색했다. 무슨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못 들은 것 같기도 한 채로 담벼락 위의 소년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소년은 여전히 담벼락에 걸친 상태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난 <밀림재사록(密林齋事錄)>을 봤는데, 낭자는 무슨 책에서 봤어요?”

소년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책이냐고? 무슨 책을 봤냐고 묻는 거야? 시녀는 귓가가 웅웅 울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한 것 같았다.

“<대주번성록>이요.”

“아, 그런 책도 있어요? 돌아가서 찾아볼게요. 낭자도 <밀림재사록> 읽어 봐요. 재미있고 흥미로운데…….”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묻고 답하는 말이 들렸다. 질문도, 대답도 분명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데, 어째서인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진짜 같기도 하고 환영 같기도 했다.

“반근 언니.”

누군가가 시녀를 부르며 손으로 살짝 밀자 시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맑은 여름날, 마당에는 대나무 통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고, 담벼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정교랑은 안에 앉아 있고 반근은 뜨거운 물을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냉면 만들어 먹을까요?”

두 사람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반근 누나, 멍하니 뭐하고 섰어?”

금가아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묻다가 입을 벌리고 씩 웃었다.

“누나가 멍하니 있는 거 처음 봐.”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 사람은?”

시녀가 고개를 들어 담벼락을 쳐다보며 물었다. 꿈을 꾼 건가?

“갔지.”

금가아는 한 손에 활과 화살을 든 채 대꾸하고는 담 모퉁이를 향해 핑 화살을 쐈다. 대나무 화살은 삐뚤빼뚤 날아가 대나무 숲에 떨어졌다.

“놀지만 말고, 뒷마당에 장작 팰 것도 있잖아.”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훈계했다. 금가아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삐죽거리더니 활과 화살을 들고 뛰어갔다. 시녀는 그제야 돌아서서 대청을 쳐다본 다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 담벼락을 쳐다봤다.

이게, 끝이라고? 이걸, 믿으라고?

말도 안 돼. 장난해?

책에서 봤다니, 그 말을 누가 믿어!

분명, 분명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 틀림없어!

이건 너무 위험해. 어떻게든 피해야 해.

시녀는 층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씨는 똑똑하신 분이잖아. 내가 일깨워 드릴 필요까지 있을까?

시녀는 강주에 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노태야께서 정씨 가문으로 가라 명하셨을 때, 누군가가 은밀히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은 바보라고. 강주 거리로 나가 수소문해 보니 돈 많고 권세 있는 정씨 가문에 바보가 태어났다는 일은 삼척동자도 알 정도였다.

그 반근이라는 몸종도 본 적이 있는데, 몸종은 아씨께서 바보가 아니라고 했다.

대체 바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남들이 말하는 것만으론 모르겠어. 내가 직접 봐야 알지.

따져 보니 아씨를 안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가 모시는 이 강주 바보는 바보가 아니었다. 굳이 바보라고 한다면 그건 대지약우(大智若愚)라는 말처럼 지혜가 너무 커서 어리석어 보이는 것일지도.

누군가가 시녀의 팔을 툭툭 쳤다.

“걱정 마. 아씨의 말씀만 들으면, 겁낼 것 없어.”

시녀가 고개를 돌리자 똑같이 반근이라 불리며, 지금은 장 노태야의 시중을 드는 몸종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 아씨를 따르며 아씨의 말씀만 들으면 돼. 그럼 겁낼 것 없어. 사람도 죽이는데 뭐. 죽이기까지 했는데, 뭐가 더 있겠어.

아씨는 마음이 착한 분이지만, 절대로, 마음이 여린 분은 아니다.

시녀는 치마를 살짝 들고 대청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에 메추라기 있지 않아? 지난번 메추라기탕 어땠어?”

시녀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너무 느끼했어. 차라리 지져 먹을까?”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이번 일은 기밀 유지에 만전을 기해 다행입니다. 전하, 다시는 이리 무모하게 굴지 마세요.”

뒤따르던 내시가 땀을 닦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난 답례를 한 것뿐이야. 겁낼 게 뭐 있어? 내가 매일 그 저택에 가 있겠다는 것도 아니고.”

진안 군왕이 웃었다.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시면 다행이고요. 내년에 궁을 떠나게 되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진안 군왕이 자리에 앉았다.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히고,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대신했다.

“어쩌면, 내가 그때까지 못 살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실내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전하, 지난번 같은 실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괜찮다. 지난번 같은 실수를 또 한다 해도, 난 멀쩡히 살아 있을 테니까.”

똑바로 앉아 아래턱을 살짝 들며 말하는 진안 군왕의 목소리에는 오만함과 싸늘함이 묻어 있었다. 사람들 앞에 있을 때의 따스하고 명랑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난, 저들보다 운이 좋거든. 봐라. 그리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하늘에서 사람 하나가 뚝 떨어져 빈틈을 메워 줬잖아.”

진안 군왕은 그 여인을 떠올렸다. 대담하게도 손짓하여 자신을 부르더니 그리 가까이 서서 낯선 자신에게 말했다.

“어젯밤, 늑대 떼는, 누군가가, 유인한 거예요.”

진안 군왕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면서 싸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전하, 그 낭자의 말을 믿으십니까?”

옆에 있던 내시가 나지막이 물었다.

“믿지.”

진안 군왕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째서? 책을 봐서? 책에 쓰여 있어서? 그리 간단한 일인가?

“전하, 소인이 <대주번성록>을 찾아오겠나이다.”

“필요 없다. 그 낭자는 날 속이지 않아.”

어찌 이리 단언하십니까? 내시가 진안 군왕을 보며 속으로 물었다.

“남을 속일 때보다 남을 구할 때 더 통쾌하거든.”

진안 군왕은 재차 웃었지만 내시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게 뭔 상관이야.

“아, 참. 그 낭자는 어떤 사람이라더냐?”

진안 군왕의 물음에 내시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출신을 조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군왕은 이들의 보고를 듣기도 전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가서 보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도 다 말해 버렸다.

이리 경솔하셔서야, 원. 본인이 바보 노릇을 하겠다는 건지 상대를 바보로 여기는 건지 모르겠네. 근데, 바보가 맞긴 했다.

“전하, 그 낭자는 강주 출신의 바보로…….”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은밀히 사방을 지키는 이들이 있으므로 안에서 나누는 말을 누가 듣지 않게 하려면 조심해야 했다.

강주 바보의 이야기는 딱히 할 것도 없었다. 14년 동안 존재감 없이 살아왔기에 내시의 얘기는 몇 마디 말로 끝나 버렸다.

“딱히 곡절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들 앞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죠. 거리와 골목에서 나누는 한담거리 수준으로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병이 나은 게 좀 기괴하긴 합니다. 사람도 좀 기괴하고요. 진 상공 댁에 물어보니 누군가를 만나긴 한 모양입니다. 신선이 아니라 은거하는 고인이라는데, 진씨 가문에서도 수소문해 본 듯했습니다. 지금 그자를 찾고 있다는데, 전하께서도 찾아보시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넋을 놓고 있기에 내시는 다시 한번 물어야 했다.

“진씨 가문에서 찾는다는데 우리까지 뭐하러 나서. 힘들이지 않고 알면 더 좋지.”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저은 후 팔걸이 책상에 기대 손에 머리를 괴고 생각에 잠겼다.

“진짜 병이 있었네.”

진안 군왕은 다시 웃었다.

“봐라. 그 낭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니까.”

내시는 입을 삐죽거렸다.

거짓말을 안 한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전하도 참. 정 낭자 얘기만 나오면 이상하게 변하시네. 그런 생각이 스쳐 깜짝 놀라는 사이, 대자전에서 본 그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궁에 차고 넘치는 게 미인이라지만 그 미인은 다른 미인과 달랐다. 어디가 다른지 설명할 순 없지만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탐구하고 싶게 하면서도 감히 무례하게 대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불과 열댓 살 먹은 어린 낭자가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장신구 하나 착용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토록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전하는 이제 열여섯이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이 정도 나이면 진작 혼담이 오가거나 혼례 준비에 들어갔을 터였다.

“이름은 뭐라더냐?”

진안 군왕이 불쑥 묻자 내시가 멈칫했다.

“그건 사주단자를 교환해야 알지요.”

진안 군왕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내시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여인의 이름은 가족만이 아는 터라 섣불리 알아보기 힘들어서요.”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답지 않은 내시의 모습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건 나도 안다. 그래도 뭔가 호칭이 있을 거 아냐.”

“있습니다, 있죠.”

내시는 정신이 번쩍 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랑’이라 합니다. 외조모께서 지어 주신 아명이고, ‘교교’라고도 부른답니다.”

강주, 정씨 저택.

여종들과 몸종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허둥대며 안팎을 오갔다. 약그릇을 들고 급히 회랑 아래로 걸어가던 두 몸종은 모퉁이를 돌다 큰 몸종과 부딪쳤다.

“똑바로 보고 다녀, 덜렁대긴.”

큰 몸종은 호통을 치며 몸종에게서 약그릇을 받아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반쯤 열리자 안쪽에서 대부인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게 뭔데? 십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 보렴. 이 고모가 구해 줄게.”

“교교 그림을 갖고 싶어요!”

십칠공자는 침상에서 고약을 바른 채 누워 소리치며 일부러 기운이 없는 척 기침까지 해댔다.

“고모님, 그게 없으면 제 병은 안 나을 겁니다.”

대부인이 침상 옆에 꿇어앉았다.

“십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부인은 십칠공자의 얼굴에 바른 고약을 문질러 주며 걱정스레 묻고는 이어 여종에게 물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병이 나? 의원은 뭐라고 하고?”

여종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우물쭈물했다. 옆에 있던 정육랑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의원이 그러는데 십칠 오라버니는 상사병을 얻은 거래요!”

정육랑은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침상에 누운 십칠공자를 쳐다봤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연못에서 뭘 본 건 아니죠?”

그 말을 듣자 안에 있던 여종과 몸종의 안색이 싹 변했다.

당초 정사낭이 별다른 이유 없이 병을 얻었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나은 일은 지금껏 미궁으로 남았다. 의원이 이런저런 말로 병증에 대한 해석을 내놓긴 했지만 집안 여인들 사이에서는 귀신을 만나 혼을 빼앗겼다는 게 최종 결론이었다.

보고 혼을 빼앗겼다가, 놀라 혼이 돌아왔다.

순간 여름철인데도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나 연못 옆에서 안 살래!”

정칠랑이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치마를 들고 뛰쳐나갔다. 정육랑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육랑!”

대부인의 호통에 정육랑은 얼른 웃음을 거두었다. 대부인이 주변을 쓱 둘러봤다. 여종과 몸종의 표정이 이상했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대부인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 바보를 내쫓았는데도 그 바보로 인한 불운과 재난은 여전히 집안에 남아 있었다. 한 번 재수 없으면 삼 년이 간다더니!

“모두 물러가라!”

대부인이 소리쳤다. 여종과 몸종이 모두 물러가고, 십칠공자의 시중을 드는 몸종과 여종만이 남아 약시중을 들었다.

“고모님, 저 이런 약 필요 없습니다. 제 약은 이게 아니에요.”

십칠공자는 약을 먹여 주려는 몸종을 물리며 말했다. 대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십칠공자를 달랬다.

“우리 십칠, 약부터 먹자. 약 먹고 나면 이 고모가 다른 약 찾아줄게.”

“그럼 제 약부터 먼저 가져오세요.”

“그 약이란 게 뭔데?”

대부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림이요.”

십칠공자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교의 그림이에요.”

“교교라니?”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고모님, 사낭이 그린 건데 이노야의 큰딸인 교랑의 초상화래요.”

대부인은 경악했다. 뭐라고?

“뭐라고?”

대부인은 바로 허리를 곧추세우며 다그쳤다.

교랑의 초상이라니! 그 교랑의 초상이라니!

정사낭의 서재에서는 두 사람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여기 숨기는 건 안 돼.”

정사낭이 그림 족자를 꺼내 들고 초조한 안색으로 말했다.

“공자님, 태워 버리세요.”

춘란이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태우는 게 제일 안전하지. 누가 뭐라든 증거가 없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정사낭은 고개를 숙여 손안에 든 족자를 쳐다봤다.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린 것만으로도 불경인데, 어찌 태운단 말이냐. 이는 저주나 다름없어.”

정사낭은 족자를 손에 꽉 쥐며 고개를 들었다. 춘란이 발을 동동 굴렀다.

“공자님,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에요.”

일개 바보잖아요.

정사낭은 족자를 꽉 쥔 채 말없이 있다가 춘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네가 장명한테 가져가거라. 나 대신 간수해 달라고 해. 절대 보지 말라고 하고. 봤다간 절교한다고 해라.”

“어서 가래도.”

춘란이 머뭇거리자 정사낭이 재촉했다. 춘란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족자를 끌어안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정사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막 몸을 돌리는데, 춘란이 도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치던 정사낭은 문 쪽을 보고 말을 멈췄다. 집사 부인 둘이 들어오더니, 새하얗게 질린 춘란의 품에서 족자를 빼앗았다.

“이거 맞지?”

집사 부인은 대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사낭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부인께서 부르십니다.”

여종 둘이 그림 족자를 잡아당기며 천천히 펼치자 대부인의 눈앞에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이었다.

또다시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정 이노야를 따라 대문 밖으로 달려나가자, 등불 아래에 선 여인이 너울의 가리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흔들거리는 등불 아래에 선 여인의 안색은 창백했고, 멍한 눈빛이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인상이었다.

순간 대부인은 시선을 옮겼다. 더는 여인의 모습에 눈길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대부인은 이 여인을 잘 알았다. 이 여인이 처음 울음 터뜨린 것도 대부인의 손에서 이루어졌고, 그 여인을 맨 먼저 안은 것 역시 대부인이었다. 귓가에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그 처량한 듯한 비명 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오랑, 오랑. 좀 더 힘을 줘, 힘을. 금방 나올 거야.”

그녀는 침상에 누운 여인의 손을 꽉 쥐고 초조해하며 말했다. 침상 위의 새댁은 안색이 창백했다. 물에서 방금 건져 올리기라도 한 듯 흠뻑 젖어 있었다.

“형님, 전 안 될 것 같아요.”

새댁은 힘없는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리석은 소리는! 자네 이름이 갈랑인 걸 잊었어? 무기를 이름으로 지었으면 이름값을 해야지! 어서 힘을 줘!”

그녀는 새댁의 손을 꽉 쥐고 소리쳤다.

“나왔다!”

그 말과 함께 새댁은 힘이 쪽 빠진 듯 그대로 혼절했다.

“부인, 부인. 아기씨가 안 울어요.”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혼절한 새댁의 시중을 드는 한편 아이를 에워싸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그녀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직 깨끗이 씻기기 전이라 얼룩과 혈흔으로 지저분한 아이가 쪼글쪼글한 모습으로 강보에 싸여 있었다.

“부인, 때리세요.”

산파가 소리쳤다. 그녀는 손을 떨며 아이의 다리를 잡아 거꾸로 들고는 다른 손으로 세게 때렸다. 방 안에 고양이 울음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 깜작할 사이에 실내는 조용하고 따스해졌다. 이제 막 해산한 터라 휘장을 내리고 문과 창을 꼭꼭 닫아둔 탓에 방 안은 어두웠다.

“형님, 얼굴 좀 보여 주세요.”

침상 위에 누운 새댁은 힘없는 표정이었지만 웃음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서며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아 보여 주었다.

“아주 순해.”

그녀는 웃으며 꿇어앉아 강보를 침상 옆에 내려놓았다. 두 여인이 고개를 숙여 쳐다봤다.

“너무 못생겼어요.”

새댁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못생기긴 어디가 못생겨!”

그녀는 기분이 나쁜 듯 대꾸하고는 쿡 웃으며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예쁘기만 한데.”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는 피부가 고왔다. 그녀는 쌔근쌔근 잠든 아이를 흡족한 표정으로 들여다봤다.

“걱정할 것 없어. 딸을 얻었는데 아들이라고 못 얻겠어?”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 이름을 지어 주겠다며 벌써 며칠째 서재에 계셔.”

새댁은 기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한 듯 생긋 웃었다.

실내에는 향이 타고 있었다. 휘장 밖에서 이따금 여종과 몸종이 지나다녔고, 두 동서는 고개를 바짝 대고 소곤거렸으며, 아이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모든 게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그때까지는…….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쳐다봤다.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대부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앞에 있던 두 여종은 순간 놀라 벌벌 떨었고, 손에 들고 있던 족자가 좌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고모님, 왜 그러세요?”

사내의 목소리였다. 대부인은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과 창은 활짝 열려 있었고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양옆에는 여종과 몸종이 꿇어앉아 있고, 두 소년이 좌우 양쪽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복잡한 표정이었다.

“부인, 이 그림은…….”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부인은 손을 뻗어 그림을 탁 쳤다. 이 화근덩어리가, 왜 하필 정씨 집안에 들러붙어서!

“고모님!”

“어머니!”

놀라 소리친 건 두 사람이었지만, 달려든 건 한 사람뿐이었다.

“고모님! 함부로 망가뜨리지 마세요!”

십칠공자가 여종의 손에서 그림을 낚아채며 외쳤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서자 출신의 조카가 하는 게 나았다. 정사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똑바로 꿇어앉았다. 어쨌거나 그림은 지켰으니 됐다.

“무슨 짓이야! 당장 찢어 버려!”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지만 십칠공자는 전혀 겁먹지 않고 도리어 웃음을 터뜨렸다. 병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고모님, 멀쩡한 그림을 찢으면 아깝잖아요. 이 조카가 갖겠습니다. 이건 제 거니까, 이제 고모님은 나서지 마세요.”

대부인은 씩씩거리며 노려보고는 여종들에게 빼앗으라 명했다. 여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다가가 빼앗으려 했지만 십칠공자는 이미 그림을 품에 고이 넣어 둔 후였다.

“난 너 못 데리고 있겠다. 네 어미더러 데려가라고 해야지.”

대부인의 말에 십칠공자는 아이고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앉았다.

“저 아파요. 머리가 어질어질하다고요.”

대부인은 깜짝 놀라 다가가서 확인하고는 아랫것들에게 방으로 옮기라 명했다. 십칠공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림을 끌어안고 부축을 받아 옮겨졌다.

대부인은 문가에 서서 십칠공자가 가는 모습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봤다.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대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정사낭이 얼른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넌 내년이면 과거를 봐야 한다.”

대부인이 고개를 살짝 돌려 정사낭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 부친더러 좋은 서원을 찾아 달라고 할 터이니, 가서 열심히 학문에 힘쓰도록 해라.”

정사낭은 고개를 숙인 채 알았다고 대답했다. 마당에 서 있던 춘란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뭘 우느냐.”

정사낭이 말했다. 서재로 돌아온 정사낭은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이었다. 정사낭은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우는 춘란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며칠밖에 안 남았구나. 어서 가져갈 물건을 챙겨라.”

“공자님…….”

춘란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그냥 그림이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정사낭이 웃었다.

“그림엔 심혈이 담겨 있다. 태어나서 지금껏 키워진 사람들도 심혈로 이루어져 있고. 심혈이라면 잘 대하는 게 맞아.”

그 바보도, 심혈로 이루어졌을까?

춘란은 쓸쓸한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그 바보를 떠올리니 금아가는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어머니께서 고의로 날 못살게 굴진 않으실 게다. 밖에서 서원을 찾으려면 장강주 선생만 한 분이 없지. 숙부님이 추천서를 써 주시면 난 경성으로 갈 거야.”

정사낭이 춘란을 보며 씩 웃었다.

“걱정 마라. 그림은 잃었지만, 진짜 사람을 만날지도 몰라.”

어쩌면 동생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환히 웃던 춘란은 곧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외지로 나가 공부하려면 집에서처럼 지낼 수 없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행장도 간소해야 하니 사환이나 데려갈 뿐 시녀는 데려갈 수 없었다.

“공자님, 밖에 나가 계시더라도 건강 잘 챙기세요.”

춘란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인은 대청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말하러 간 이는 왜 아직인 게야?”

대부인이 밖에 대고 소리쳤다.

“일이 생겼으니 대노야와 이노야더러 잠깐 오시라고 해라. 주씨 가문 사람이랑 다투는 건 관두시라고 해. 우리 집안일부터 챙기셔야지.”

네 하고 대답한 후 재촉하러 갔던 여종이 곧 허둥지둥 돌아왔다.

“부인, 부인, 이노야와 이부인께서 혼사를 정하신대요!”

여종이 꿇어앉아 다급한 목소리로 고하자 대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주씨 가문이 정한 혼사에 동의한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 둘이 그럴 린 없어.”

대부인은 같잖다는 투였다.

“그게 아니고요.”

여종은 무릎걸음으로 한 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이노야께서 그 바보…… 아니, 큰따님의 혼사를 정하신대요!”

뭐라고? 이노야가 그 바보 교랑의 혼사를 정해?

대부인은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요 며칠 정씨 가문은 교랑의 혼사를 두고 주씨 가문과 싸웠다. 바보 교랑의 혼사를 누가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주씨 가문에서는 현재 정교랑을 데리고 있으니 자신들이 혼사를 주관하는 게 맞는다고 우겼다. 혼사를 주관하는 쪽이 혼수를 관리하는 건 당연한 이치니 정씨 가문으로서도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양측의 대치가 계속되던 와중에 뜻밖에도 정 이노야가 바보 교랑의 혼사를 정한 것이다.

혼인은 인륜지대사이니 부모의 명을 따라야 한다. 정 이노야는 이와 같은 이치를 들어 주씨 가문의 논리를 반박했다. 그런데…….

대부인은 다시 천천히 편한 자세로 앉았다.

“이렇게 빨리? 아무 말도 없었잖아. 아무나 데려오면 더 곤란해질 텐데.”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가져가는 일을 막기 위해 장님이나 절름발이, 비렁뱅이, 무뢰한, 부랑배 중 아무나 하나 데려다가 혼사를 치르기라도 하려고? 그게 가능했다면 주씨 가문에서 막 사람이 왔을 때 이미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주씨 가문만 더 기가 살 터였다. 바보의 혼처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나가 아닙니다. 글 읽는 서생이래요.”

글 읽는 서생?

“어느 집인데?”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교랑의 혼사는 나도 숙고 중이었소. 교랑이 집으로 돌아온 그 순간부터.”

정 이노야가 엄숙한 얼굴로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대청에 있던 정 대노야와 주 노야 모두 표정이 기괴해졌다. 요 며칠 싸우면서 상대방과 자신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정도의 수준이라는 건 익히 파악했지만, 오늘만큼은 특히 정 이노야가 으뜸이었다.

“교랑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어쨌든 병을 앓은 아이요. 고관대작은 나도 감히 바랄 수 없지. 설령 혼인을 하더라도 질시와 냉대를 받을 테고.”

정 이노야는 한숨을 쉬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딸 앞에 펼쳐질 인생 역경이 몹시 근심되는 얼굴이었다.

“내 평생 다른 건 바라지 않소. 그저 그 애가 무사평온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지. 부귀영화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주 노야는 입을 삐죽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우리 교교야 당연히 무사평온하게 살아가야지요. 부귀영화는 남이 가져다줄 필요 없소이다. 제 모친이 남긴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우리 교교에게 기대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이가 있을까 걱정이지.”

“그래서, 고르고 또 골랐소이다. 가문의 인품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그냥 말씀하시오. 그렇게 고른 게 누구요?”

주 노야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사돈만 좋다고 하는 상대일지 모르니.”

“남이 아니라 속속들이 아는 집안입니다. 팽씨 가문의 사람이지요.”

팽씨 가문? 정 대노야의 눈썹이 움찔했다. 뭔지 알겠다는 눈빛과 조소 섞인 웃음이 언뜻 스쳤다.

팽씨 가문이라, 거참…….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느 팽씨 가문 말입니까?”

찻잔을 내려놓자 물방울이 조금 튀었다. 옆에 있던 몸종이 얼른 닦았다.

“팽씨 가문이라니.”

대부인은 비웃음 섞인 냉소를 지었다.

“아주 머리를 잘도 굴렸구나. 감히 그런 말을 해!”

다른 쪽 대청에서는 이부인이 어느 여인과 앉아 있었다.

“못 할 말도 아니죠. 오직 그 애를 위한 일인걸.”

이부인은 냉담한 투로 말하며 손에 든 부채를 흔들었다.

“그럼요, 그럼요.”

여인이 비위를 맞추며 웃어 주었다.

“우리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노야들께서 다른 뜻을 품으실까 걱정이죠.”

이부인이 피식 웃었다.

“가난하긴 하지만, 가난한 거 말고는 부족한 게 없잖아요. 둘째는 글공부도 했고, 출신도 걸릴 게 없어요. 우리 집안 역시 학자 집안이고, 동평주에서도 꽤 명성이 있죠.”

“그럼요, 둘째가 공부를 꽤 잘했어요. 병을 앓느라 좀 지체됐을 뿐이죠. 대백부님 말씀으로는 틀림없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할 거래요.”

여인이 얼른 거들었다.

“그 애는 벼슬을 하든 말든 신경 안 쓸 거예요. 그저 그 애한테 잘해 주기만 하면 되죠.”

이부인은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여인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린 남이 아니라 친정이잖아요. 우리가 잘 대해 주지 않으면 아가씨의 체면을 깎는 일인걸요! 남들 일엔 관심 없지만, 아가씨가 누군지는 잘 알죠.”

이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며 부채질하는 손놀림이 경쾌해졌다.

“나도 아가씨 생각 많이 해요.”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계모 노릇이 좀 어렵나요. 그런 애는 그냥 집에 두는 게 제일 좋은데 혈육들이 그러기 싫다니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죠. 주씨 가문이 혼사를 정하게 해 봐요. 좋은 데로 가면 그만이지만, 나쁜 데로 가면 부모들만 오명을 뒤집어쓰는걸요. 이노야는 아버지고 사내니까 좀 소홀했다 치고 넘어가겠지만, 아가씨는 계모잖아요. 친딸이 아니라 소홀했다고 괜히 아가씨만 안 좋은 소릴 듣죠.”

이부인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딱히 방법이 없잖아요. 내 팔자인걸.”

“내가 다른 건 못 도와도 그 아이 돌보는 건 어렵지 않게 도울 수 있어요. 남의 집으로 보내 봤자 결국 남의 집이에요. 처음엔 잘해 주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 누가 알아요? 나중에 태도가 바뀌어도 아가씨가 나서긴 힘들고요. 하지만 우리 집은 다르죠. 아가씨의 친정이니까,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잖아요.”

이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요. 우리가 가난하니 그 낭자의 혼수를 노린 게 아니냐는 말들이 나올 수 있죠.”

여인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의 선의를 증명하기 위해 그 낭자의 혼수는 아가씨 내외가 대신 관리하게 하면 어떨까 싶어요.”

이게 바로 핵심이지. 이부인은 점점 마음이 놓이는 듯 미소를 지었다.

대어를 못 낚으면 어떤가. 사람이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을 알아야지. 욕심을 냈다가는 아무것도 못 건지는 수가 있다.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이라면 조금 새어 나간다 해도 이방 일가가 먹고살기엔 충분했다.

여인도 싱글벙글하며 웃었다.

“퉤.”

대부인은 침을 뱉으며 언성을 높였다.

“돈에 눈이 멀어 대를 끊으려고! 바보를 얻어다가 또 바보를 낳으려고 저래?”

“대가 끊어지긴요.”

옆에 있던 여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인, 돈을 얻었는데 첩실 몇 들이는 게 어렵겠어요? 교랑 아씨만 잘 먹이고 입히면 돈이 나오는데, 돼지 새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낫죠.”

안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대부인도 따라 웃었다가 곧 정색을 하고 부채질을 했다.

“따지고 보면, 그 바보랑 혼인하는 게 남는 장사긴 해. 체면이 깎이는 게 문제지.”

“뻔뻔한 사람들이야 차고 넘치죠. 그런대로 무난하기도 하고요.”

바보와 혼인하는 비웃음을 감당할 수 있으면서도 학자 집안이라니, 이부인이 혼처를 제대로 고른 셈이었다.

“부인, 정말 그리되면 혼수가 이부인의 손에 넘어갈 텐데요.”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부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부채를 쥔 채 잠자코 있었다.

“우리 교랑은 다른 사람과 다르니, 혼사에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해. 가서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라.”

대부인은 ‘제대로’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실었다. 여종들은 기민하게 눈치채고 대답했다.

여종들이 물러가자 곧 정 대노야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주씨 가문에선 뭐래요?”

대부인이 급히 물었다.

“알아보겠다고 하더군.”

정 대노야가 대답했다. 부인이 이 일을 아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현재 온 집안의 관심사가 온통 이 일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만 해도 온 집안사람이 다 알게 되니,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 혼수 때문이죠, 뭐. 신선을 골라 온대도 주씨 가문에서 순순히 물러서진 않을걸요.”

대부인이 웃었다.

“바로 물러서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평생 고집부릴 순 없지 않겠소.”

정 대노야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냉소했다.

“잊지 마시오. 교랑은 정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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