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60)

-옳고 그름-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사내 한 명이 비를 뚫고 저택 안으로 급히 들어와 삿갓과 도롱이를 벗었다.

“주오.”

안에 있던 사내 네다섯 명이 성난 말투로 못마땅하다는 투로 소리쳤다.

“빨리 돈 안 갖다 주면, 우리 형제들이 죽어 나가게 생겼소.”

주오라고 불린 사내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묵직한 돈주머니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들어보니 액수가 꽤 되는 듯했다. 사내들의 표정이 그제야 좀 풀렸다.

“거기에 그런 호걸들이 있었을 줄이야. 내 미처 살피지 못해 의도치 않게 자네들을 놀라게 했군. 이 돈으로 놀란 마음이나 좀 진정시키게나.”

주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공손한 말투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퉤. 호걸은 무슨. 우리가 순간 방심했던 거지.”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침을 뱉었다. 흰 천으로 얼굴을 칭칭 감고 코까지 가리고 있어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말하느라 상처가 벌어져 고통스러운지,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가슴속에서 더욱 열불이 솟구쳤다.

“내 하늘에 맹세코 그 녀석들을 이 경성 바닥에서 뼈도 못 추리게끔 할 테다. 그까짓 일도 못 해낸다면, 내가 경성을 떠야지.”

“왕대, 그렇게까지 해서 손해 보는 건 자네들이야. 괜히 무리하지 말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모욕적인 말이었다. 사내 몇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왕대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주오, 자네가 그렇게 비꼬지 않아도 돼. 내가 잃어버린 체면이니 내가 찾아오겠다는 것뿐이야. 이 돈을 받고 말고는 상관없이.”

돈을 안 받았다면 과연 네놈들이 움직이겠어? 체면? 무뢰배 주제에 언제부터 체면을 챙겼다고, 웃기는 소리 하고들 있군.

주오는 속으로 그들을 실컷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체했다.

“왕대, 자네가 오해했네. 내가 왜 그런 뜻으로 말했겠어. 내 말은, 체면을 되찾는 데 꼭 주먹을 써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왕대가 갸우뚱하면서 주오를 쳐다봤다.

“그럼 어떻게?”

“관부가 있지 않나.”

왕대가 멈칫하더니 짚이는 게 있는지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주오를 보내고 난 뒤, 사내들은 주오가 던져주고 간 돈주머니부터 서둘러 쏟아보았다. 바닥에 가득 쌓인 돈을 보는 사내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태평거가 눈엣가시이긴 한가 보군. 이렇게 돈을 많이 써서 손을 보다니.”

“내가 보기엔 그냥 손보는 정도가 아니야.”

왕대가 흰 천에 감긴 코를 만지면서 섬뜩하게 웃었다.

“아예 집어삼키겠다는 거지.”

작은 소란을 관부까지 가야 할 정도로 키워서 누구 하나는 옥살이를 시킬 작정인가 보군. 그런 곳은 들어가긴 쉬워도 나오긴 어려우니까.

“됐다. 챙길 거 챙기고, 애들 몇 명 더 불러라. 복수하러 가자!”

왕대가 땅에 쌓인 돈더미를 허공에 뿌리자, 사내들이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돈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대 일행은 큰비가 지나간 후 질퍽거리는 땅을 밟으며 점심시간에 맞춰 태평거 앞에 도착했다.

“이상하네, 왜 아무도 없어?”

사람이 북적거려야 할 식사시간인데, 태평거 앞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이 흘렀다.

왕대도 말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기녀가 불렀던 노래가 뭐였더라? 문 앞은 쓸쓸하고 마차와 말도 없어 찾는 이가 없네, 였던가.

인기척을 들었는지 태평거 위층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손님분들, 오늘은 사정이 있어 문을 열지 않습니다. 다른 식당으로 가시지요.”

사정이 생겨서 문을 안 열어? 왕대가 고개를 들어 위층을 쳐다봤다. 위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점원도 왕대를 빤히 쳐다보더니, 전에 왔던 무뢰배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내며 숨었다.

점원의 헉 소리는 선전포고의 신호가 되었다. 적들이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니, 지금 당장 기세를 몰아 싸워야 한다.

이 짓을 하루 이틀 한 게 아니었기에, 굳이 우두머리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무뢰배들은 손발을 착착 맞추어 움직였다. 왕대 일행은 순식간에 태평거를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문 열어!”

“사람을 때려놓고 숨으면 그만이냐?”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해놓고 무사할 줄 알아?”

태평거 대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큰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감히 무슨 일이냐고 물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흰 천에 감긴 커다란 돼지머리 같은 얼굴의 왕대가 열려 있는 위층 창문을 노려봤다.

“사람을 때려놓고 숨기만 하면 되나, 이 몸이 다친 건 어쩔 건데? 당장 주인장 불러와!”

위층 창문에서 누군가가 목을 빼꼼 내밀어 밖을 살피더니, 분위기가 더 험악해진 것을 확인하고 후다닥 숨었다. 그 후로는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려도 더 이상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

“형님, 저놈들이 숨기만 하고 우리랑 부딪치는 걸 피하니까,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관부 쪽 사람이 온다 해도 도리가 없소이다.”

사내 중 하나가 왕대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왕대는 태평거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땅에 퉤 침을 뱉었다.

“문을 부숴라! 쳐들어가야겠다!”

무뢰배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도구를 들고 대문, 측문, 후문을 향해 덤벼들자 둔탁한 마찰 소리와 문이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절대 패 죽이지는 말고 손이나 발만 부러뜨려. 알아서 눈치껏 바닥에 눕는 것도 잊지 말고…….”

왕대가 사내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형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오늘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사내의 대답과 함께 대문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무뢰배 무리는 욕설을 퍼부으며 동시에 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 망할 것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참한 비명이 들렸다. 앞서 들어갔던 세 명이 문밖으로 튕겨 나와 뒤따르던 무뢰배들을 깔아뭉개자 문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욕하는 이도, 소리를 지르는 이도, 웃는 이도 있었다.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죽었다고?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문 쪽을 향해 걸어가던 왕대가 우뚝 멈춰 섰다.

“제길, 그러게 좀 살살하라고 했잖아…….”

왕대는 욕을 해대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걸어간 그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수하들이 천천히 비켜서자, 문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더욱 또렷이 보였다.

무뢰배 세 명이 눈도 감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그들의 목에는 긴 화살이 각각 하나씩 꽂혀 있었으니, 대충 보아도 즉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문 안에서 세 사내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들은 손에 활을 하나씩 들고, 예리하게 갈지 않아 다소 투박해 보이는 화살촉으로 왕대를 겨눴다.

왕대가 중간에 서 있는 자를 알아보았다. 바로 그날, 자신의 코뼈를 부러뜨렸던 사내였다. 여전히 낡은 청색 장포를 두른 사내는 침착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너, 너희들 뭐하는 거야?”

머릿속이 새하얘진 왕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들에게 다급히 외쳤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을 죽이진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는데, 왜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애들이 화살에 맞아 죽은 거야?

“이 벌건 대낮에 감히 사람을 죽여!”

왕대 옆에 서 있던 한 무뢰한이 큰소리로 외쳤다. 서무수가 그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면, 안 되나?”

서무수는 말이 끝나자마자 손에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투박하게 만들어진 사냥용 활에서 나간 긴 화살은 무뢰한의 몸을 관통했다. 그 뒤에 있던 자는 무뢰한의 살과 피가 섞인 화살촉이 등을 뚫고 나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했다. 무뢰한은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쳤다.

왕대는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악몽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매일 하던 일이라 이번에도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거지? 고작 쌈박질에 살인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이 시골 촌뜨기들이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먼!

“사람을 죽이다니, 너희가 감히 살인을…… 감히 살인을…….”

흰 천 사이로 빨갛게 충혈된 왕대의 눈이 보였다.

“너희 같은 도둑놈도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서무수가 호통을 치고 화살 하나를 다시 활시위에 올렸다. 그는 정확히 왕대를 조준하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말해라. 누가 너를 보내서…… 우리 가게의 비법을 훔치라고 했는지!”

조용히 말하던 서무수는 누가 보냈느냐고 물을 때부터 목청을 높였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에 왕대 외 몇 사람은 귀가 먹먹해져 뒷말을 똑똑히 듣지도 못했다.

왕대 일행은 눈앞의 세 사내를 쳐다보았다. 급하게 만들었는지 투박하기 짝이 없는 사냥용 활을 쥐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심지어 화살촉도 달려 있지 않은 화살로 그를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모양새의 활에 사람들이 죽어 눈앞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확신했다. 저들은 얇은 나뭇가지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단지 무예만 뛰어난 게 아니라, 아주 흉악무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럴 줄 알았다면, 그깟 돈 몇 푼 벌겠다고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 무뢰배들의 혼비백산한 모습에 서무수가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말해. 누가 보냈지?”

서무수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주오, 주오입니다!”

왕대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무수가 활시위를 놓았다. 근거리에서 쏜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왕대의 목을 관통했다.

왕대는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허공을 휘젓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왜 배후를 말했는데도 죽임을 당했지?

또 한 사람이 쓰러졌다. 고꾸라진 몸뚱이에 아직 경련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였다.

“다섯.”

서무수가 눈앞의 시체들을 보며 말했다.

기세등등하게 왔던 열댓 명의 무뢰배들은 어느새 다섯이나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몇 명은 겁에 질려서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세 사내의 위압감에 압도되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연신 절을 하면서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큰길가에 있던 행인들이 하나둘씩 태평거의 일을 알아보고는 시끌벅적해졌다. 범강림과 서봉추가 서무수의 옆으로 다가왔다.

“형님, 아직 성이 덜 풀렸습니다. 난 고작 한 발밖에 못 쐈다고요.”

서봉추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눈빛을 빛냈다. 그러더니 손에 있던 활시위를 잡아당겨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무뢰배들을 조준했다.

“아예 이놈들까지…….”

“그만.”

서무수가 말을 잘랐다. 목숨 다섯이다. 이미 작은 사건이 아니야.

고개를 들어 보니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관졸 일고여덟 명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누이 말대로 일을 한껏 키웠어.

큰길에 갑자기 사람들이 이리저리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주육낭이 물었다.

“무슨 일 났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차를 끄는 사람들도 모두 한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자네도 참 오지랖이야.”

진십삼이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주육낭에게 핀잔을 주었다.

“내가 밥 한 끼 사겠다는데, 뭐가 어때서?”

주육낭은 휘장 너머를 내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람들이 뛰어가는 방향이 어째…….

“밥을 사? 태평거는 오늘 휴업이라던데, 거기서 뭘 먹겠다고.”

“내가 언제 태평거 가서 먹겠다고 했나? 쉴 만한 사정이 있겠지,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해.”

진십삼이 웃으면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내 누이인데,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고작 하루 문 닫은 건데, 자네는 장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안 거야?”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태평을 원하거든.”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사람들 무리에 더욱 가까워졌다. 허겁지겁 뛰어다니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들 그러는데?”

“어서 가 봅시다. 태평거에서 살인이 났대요!”

태평거? 살인!

주육낭과 진십삼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걔는 매번 골칫거리만 만들어낸다니까!

주육낭이 채찍을 휘두르자 마차는 인파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같은 시각 보수사. 두 승려가 명해선사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태평거에서 온 이가 뭐라고 하던가?”

명해선사가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듣기로는 누군가가 태평거의 두부 비법을 훔치려고 하다가 충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승려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명해선사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그건 피치 못할 일이지.”

실내에 침묵이 흘렀다.

“가 보거라. 우리는 속세를 떠났으니 속세의 예법을 따를 필요 없지만, 속세의 일에 얽혀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지.”

나서겠단 뜻이었다. 두 승려가 명해선사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물러났다.

“진만당, 이 사람아. 자네가 또 부처님께 빚을 지는군. 언젠가는 꼭 갚아야 할 것이야.”

노승의 웃음 섞인 혼잣말이 끝나자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경성의 관아에 소속되어 있는 관아 관졸들은 벌써 경성 바닥을 십수 년째 구르는지라 노련했다. 별별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대충 눈치껏 영민하게 처세해 왔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은 그간 그들이 봐 왔던 사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관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평거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모인 군중이 사방에 빽빽했고, 바닥에 누워있는 몇 구의 시체들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로 사람들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앞장서 있던 관졸이 외쳤다.

“나리, 좀 전에 이 도둑놈들이 우리 태평거의 비법을 훔치려고 쳐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손에 쥔 것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서무수가 관졸들의 앞으로 다가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헛소리, 저건 더 헛소리야. 관졸이 속으로 외치며 자신 앞에 서 있는 우람한 사내를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들이 와서 훔칠 게 뭐가 있다고.”

관졸이 저도 모르게 서무수의 말을 받아쳤다. 그 말에 서무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보고 있던 주육낭과 진 공자 역시 짚이는 게 있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현장을 살펴보지도 않고 대뜸 질문부터 던지는 모습을 보니, 관졸도 이 사건에 대해서 이미 아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누이 말이 맞았어. 감히 식당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자들이라면, 분명 배후가 있었을 터. 무뢰배를 시켜서 단순히 소란을 피우려던 게 아니라, 필시 우리를 관아로 끌고 가 옥살이를 시키려고 했던 게 틀림없어. 일단 감옥에 들어가면…….

귀신같이 시간을 맞춰 온 관졸을 보니 배후가 있다는 게 더욱 확실해졌다.

아무리 큰일이어도 남들 앞에서 공명정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의 뒤에 숨어 떳떳하게 설명할 수 없는 자만이 이 상황을 두려워할 것이다.

“나리,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서무수의 물음에 관졸은 험상궂은 얼굴로 대답했다.

“식당 아니더냐.”

본디 동네에서 종종 일어나는 패싸움처럼 가벼운 사안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살인 사건으로 바뀌었다. 예상했던 상황과 너무 달라진 나머지, 관졸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적어도 누구 하나를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으니, 돈만 받고 일을 제대로 못 했다는 소리는 안 틀을 터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식당 옆에 작은 공방이 있습니다. 태평 두부방이죠.”

공방!

공방이라 함은 진귀한 예술 공예나 대대손손 내려오는 비법을 지키고 계승해가는 곳이다. 공방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비법을 훔치거나 몰래 엿보는 것이다. 경성에서는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와도 공방에는 절대 들이지 않는 공공연한 원칙이 있다. 행여나 한밤중에 몰래 공방에 들어가려는 이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죽여도 된다는 게 관례였다.

관졸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모두가 아시겠지만, 태평거에서 만들어내는 태평 두부는 다른 두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특별합니다.”

주위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맞아, 맞아. 나도 안다고. 이 집에서 만든 두부는 남다르지.”

3월 20일의 선다회에서 이대작이 두부를 조각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접하기 어려울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보수사에서 양두부를 절밥으로 제공하기 시작하자 태평 두부는 금세 유명해졌다. 경성 안에서는 너도나도 두부를 팔기 시작해 두부를 만드는 집들이 순식간에 많아졌지만, 태평 두부만큼 맛있는 두부는 없었기에 태평거의 경쟁자가 되기는커녕 그 명성만 높여 줄 뿐이었다.

서무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했다. 그리 훌륭한 비법인데, 훔치려는 사람들이 많긴 하겠지.

“정말 못됐군. 대낮에 와서 훔치려고 하다니, 국법이 지엄한데!”

구경꾼 중 한 명이 목청을 높였다.

“그러게, 정말 몹쓸 놈들이군.”

“이 무뢰배들은 얼마 전에도 행패를 부리러 왔었다네. 역시 못된 심보를 가지고 있었어!”

아직 관졸들이 나서서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서너 마디로 벌써 죄가 판명 났다. 관졸들은 당황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쳤다. 사람이 너무 많아 구경꾼 중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찾아내기 힘들었다.

주육낭이 진십삼을 쳐다보자 진십삼은 눈을 찡긋하며 웃고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도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네 이놈! 허튼소리 마라. 설령 이들이 훔치려고 했다 한들, 누가 이 벌건 대낮에 오겠느냐!”

관졸은 서무수에게 호통을 치는 한편 다른 관졸들에게 사람들을 쫓아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동료를 더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항상 밥 먹듯이 해 오던 간단한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이야!

이 흉악한 놈들이 정말로 사람을 죽이다니! 무려 살인을, 감히 어떻게!

서무수는 냉소를 보이고 관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리, 소생이 어찌 감히 낮과 밤도 구분할 줄 모르고 헛소리를 지껄이겠습니까. 이는 도둑들에게 직접 물어 확인한 것입니다.”

서무수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쪽 구석에 모여 벌벌 떨고 있는 무뢰배 몇을 지목했다.

“못 믿겠다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서봉추가 무뢰배 중 하나를 발로 차면서 호통쳤다.

“네놈에게 묻잖아!”

겁에 질려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듯한 무뢰배는 좀 전에 자신의 눈앞에서 형제들이 차례로 화살에 맞아 죽는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을 발로 찬 사내가 아직 사람을 덜 죽였다는 듯이 자신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던 모습이 생생했다.

무뢰배는 허둥지둥 바닥을 기면서 서봉추를 향해 살려달라고 절하려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말해, 주오가 시킨 거 맞지!”

서무수가 외쳤다. 주오라는 이름이 나오자, 관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말해버린 거야? 그럴 리가!

“너희 우두머리한테 누가 훔치라고 시켰는지 물어보니, 분명히 그 입으로 주오라고 말했다. 네놈들도 똑똑히 듣지 않았느냐!”

서무수가 다시 고함을 치면서 물었다. 바닥에서 기고 있던 무뢰배들은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듣지 않았냐고? 듣지 않았냐고?

함께 어울려 다니던 세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뒤이어 왕대의 오른팔도 말 한마디 했다고 죽임을 당했다. 이어 활을 든 세 사내가 한 발 한 발 다가오며 그들을 압박했다.

“말해. 누가 보냈지?”

“주오, 주오입니다!”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살은 왕대의 목구멍을 뚫어버렸다. 오랜 세월 경성 일대에서 행패를 부리며 걱정 없이 살던 무뢰배의 우두머리가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뜬 채 죽어버린 것이다.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다섯 사람에게 서무수가 한 걸음 더 다가서서 눈을 치켜떴다.

“말해라. 도대체 누가 너희를 시켜 우리 비법을 훔치라고 했는지!”

“입을 열어라! 누구냐고!”

무뢰배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있는 힘껏 외쳤다.

“주, 주오입니다! 주오가 시켰어요!”

무뢰배들이 외치는 소리에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야유했다. 얼굴색이 잿빛이 된 관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벌건 대낮에 발생한 사건이다. 심지어 두 눈 부릅뜨고 현장을 둘러싼 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서무수의 질문에는 어떠한 협박이나 회유도 없었고, 대답을 한 사람은 왕대가 직접 데리고 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 주오라고 외치는 순간, 의심할 여지 없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셈이다.

이런 빌어먹을! 옥에 가두어야 할 사람들은 멀쩡하고, 도리어 저들은 반이나 죽은 데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실토까지 하다니?

서무수가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에 힘을 풀었다. 양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됐어, 해냈어!

무뢰배 몇 명쯤이 무슨 대수라고요. 그럼 때려죽이죠.

서무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 말을 뱉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무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뢰배 몇 명쯤이 무슨 대수라고, 때려죽이면 그만이지.

“할아버님, 할아버님.”

두칠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엎드리다 못해 기다시피 하며 유 교리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할아버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두칠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 교리는 성가시다는 듯 두칠에게 잡힌 소매를 휙 내뺐다.

“어찌하냐고? 네놈도 모른단 말이냐?”

굳은 표정의 유 교리가 비아냥대는 말투로 말했다.

“너 아주 유능한 거 아니었어?”

두칠이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아주 잘났더구나! 돈 써서 무뢰배들한테 사주하는 건 언제 배웠더냐? 네 놈은 아직도 경성 밖에서 구멍가게 장사하는 줄 알고 있는 게냐! 철딱서니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구나! 이 소문이 경성에 퍼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웃다가 아주 배꼽이 다 빠지겠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머리는 왜 달고 사느냐?”

유 교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더욱 치솟아 호통을 쳤다.

“할아버님, 할아버님. 도저히 울분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두칠이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으면서 호소했다.

“거긴 우리 집안의 땅이고 제가 일궈낸 곳이라고요. 이대작도 우리 집에서 배운 요리 비법을 태평거로 가져가서 명성을 날리는 겁니다! 태펑거는 제 덕에 거저 누리고 있다고요!”

유 교리가 두칠을 벌레 보듯 보면서 침을 뱉었다. 유 교리가 처음 두칠의 뒤를 봐주기 시작했던 것은, 두칠이 영리하고 자신에게 아부를 잘 떨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두칠이 운영하는 식당이 잘 되니, 자신에게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도 꽤 두둑하다는 점이 중요했다.

“네놈이 아주 돈에 눈이 멀었구나! 그게 어떻게 네 것이야? 그런 소인배의 심보를 가지고 있으니 일이 이 지경이 되지!”

분을 칠한 두칠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한 줄 한 줄 그어졌다.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엎어져서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은 퍽 우스꽝스러웠다.

“할아버님, 전 그래도 이 울분을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못 참겠어도 참아! 이 멍청한 것아, 생각을 좀 해 봐라. 경성에서 가게를 열 배짱이 있고, 명해선사가 직접 나서기까지 하는데, 어디 보통 사람들이겠더냐! 뒤를 봐주는 이가 없었다면 네가 나서기도 전에 탐욕스러운 대머리 땡중들이 벌써 태평거를 손안에 넣었겠지! 너 따위가 무뢰배들에게 이런 짓거릴 시킬 차례도 안 왔을 거다!”

눈물을 닦던 두칠은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겁이 더럭 났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다 알아봤는걸요. 관부 기록으로는 연고도 없는 타지인 몇 명이 태평거 주인장이라고만…….”

“그렇게 치면, 네가 나한테 주는 배당금은 기록으로 안 남겼으니, 앞으로 인정 안 할 셈이냐?”

유 교리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두칠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감히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네놈도 그럴진대, 그 타지인이라고 다르겠어? 이 멍청한 것아. 기록으로 박아 둔 게 무슨 대수냐. 글로 남기지 않은 게 핵심이지!”

두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두칠 역시 속으로는 배후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그게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려고 한 번 찔러본 것이었는데, 상대가 이 정도로 지독할 줄은 몰랐다. 그저 툭툭 쳐본 것일 뿐인데, 상대방은 단번에 팔을 물어뜯은 것도 모자라 아예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할아버님, 그럼, 그럼 이제 어쩌죠?”

두칠이 망연자실하여 물었다. 유 교리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허구한 날 말썽만 일으키지! 경성에서 관리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데, 내가 네놈 뒤치닥거리나 하려고 사방에서 호시탐탐 지켜보는 눈을 피해 버텨온 줄 알아? 네놈이 벌린 일이니 나한테 묻지도 마라!”

“할아버님, 소손은 기댈 곳이 없습니다.”

두칠은 다시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부짖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먹었으니 다행이다. 욕도 일종의 관심이니, 아예 무시하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두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후, 유 교리가 사람을 불렀다.

“지금 그자들은 어디에 있나?”

“반 시진 전에 모두 관아로 끌려갔습니다.”

하인이 대답했다.

“관아라…….”

유 교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왕 들어간 거라면…….”

“대인, 보수사 쪽 사람들도 같이 갔습니다.”

하인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속세를 벗어나 사찰에 틀어박혀 풀만 먹고 사는 승려들이라지만, 절 밖으로 나오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큰 사찰은 워낙 명성이 대단하다 보니, 여기저기 엮여 있는 복잡한 관계 또한 많을 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가진 땅이 더욱 많아지고, 들이는 범수(梵嫂: 중의 아내)가 그리 많아질 리가.

유 교리는 언짢은 듯 두칠을 노려보고 호통을 쳤다.

“이 멍청한 것아! 들었느냐?”

두칠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못했다.

“판관이 대질했지만, 왕대가 자기 입으로 주오의 사주를 받아 태평거의 두부 비법을 훔치러 갔다고 태평거 사람들이 말했답니다. 왕대가 데려온 수하들이 증언까지 했고요.”

하인이 이어서 설명했다.

“왕대가 인정할 리가 있나! 그리고 주오는 그런 일을 사주한 일 없어!”

두칠이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인정을 하고 말고는 중요치 않다! 왕대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하필 살아 있는 자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 않더냐. 주오가 왕대에게 큰돈을 준 것도 사실이고.”

유 교리는 말을 하다 보니 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기왕 사주를 할 거면 좀 제대로 된 사람들을 찾아 시켜야지. 조금만 겁을 줘도 천지 분간 못하고, 제 발등이나 찍을 줄 아는 무식한 무뢰배들을 시킬 생각을 해?

유 교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지금은 단칼에 잘라내는 수밖에.”

두칠과 하인이 고개를 들어 유 교리를 쳐다보았다.

“주오한테 본인 선에서 끝내라고 해라.”

유 교리가 말하자 두칠은 깜짝 놀랐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의 말씀은 그럼…….”

두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태평거 사람들을 혼내주려고 벌였던 일이, 어떻게 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되어 버린 거야?

“할아버님, 정녕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이미 관아까지 넘어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두칠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 기어갔다.

“다른 방법?”

유 교리가 고개를 돌려 두칠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네가 생각해 보든가.”

고작 시정아치 때문에 직접 나서야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로 싸우라고? 이놈이 장난하나!

“주오 선에서 자르면, 모든 책임을 그놈에게 떠넘기고 관부에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게 해줄 수는 있다.”

두칠은 아직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처음으로 가서 난리를 피울 때부터 오늘까지, 그쪽은 내내 흠 잡힐 곳 없이 행동하고 있어.”

유 교리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일이 일어난 지 벌써 세 시진이 넘어가고 있다. 네가 망설이는 동안 그들이 주오를 잡아낸다면, 얘야…….”

유 교리가 조용히 두칠을 부르자 두칠은 소름이 끼쳐 순간 몸을 떨었다.

“그때가 되면, 주오가 아니라 네가 힘들어질 게다.”

유 교리가 말을 마치자, 두칠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예, 할아버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놈들을 한 번 짓밟아보려다가 내 팔이 잘려나가다니. 이번 일은 손해가 막심하다.

두칠이 이를 꽉 깨물었다.

태평거!

하늘색이 짙어질 때쯤, 진 공자는 방 안에서 좌불안석이었다. 평소와 다른 진 공자의 모습에 같이 있던 시녀가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도련님, 저랑 바둑 두실래요? 저 요즘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시녀가 웃는 얼굴로 진 공자의 소매를 잡았다.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마음이 없구나, 마음이.”

“그럼 도련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데요?”

곱상하게 생긴 시녀 둘이서 쿡 웃었다.

“어느 아씨한테 가 있는 거죠?”

진 공자가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맞혔네, 어느 낭자에게 가 있다.”

두 시녀는 놀라서 서로 눈짓을 했다. 진짜로?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진 공자는 얼른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켜 마중했다. 주육낭이 한 손으로 두봉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시녀들이 주육낭의 두봉을 받아들며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어떻게 됐어?”

흥분한 목소리의 진 공자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주육낭은 자리에 앉아 소매를 걷어 올리고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주오가 한 시진 전에 성 남쪽 돌 골목에 있던 첩실 저택에서 멍석에 말려서 들려 나왔어.”

주육낭의 말을 듣은 진 공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훌륭하군.”

진 공자가 다시 반복해서 말했다.

“훌륭해.”

“그 사내들도 꽤 쓸모가 있어. 아주 독하고, 배짱도 있고.”

“그 사내들…….”

진 공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주육낭의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따라 하자 주육낭이 노려봤다.

“괴상하게 뭐하는 거야?”

진 공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 알면서 묻기는.”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고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 사내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긴 한 것 같네. 시키는 대로 할 배짱이 있으니, 쓸모가 있는 게 맞지.”

진 공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무려 살인이야, 대낮에 살인을 한 거라고. 아무리 확실한 빌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일에는 만일이라는 변수가 있는 법인데.

만일 왕대의 수하가 겁을 먹고 증언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보수사의 사람이 나서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무뢰배들을 사주했던 사람이 죽기 살기로 나왔더라면…….

어떤 상황이 됐든, 그때 가서 뒤늦게 수습하려고 해도 직접 살인을 한 그 사내들은 죗값을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 여인을 얼마나 신뢰하기에 생사조차 따지지 않고 덤빈다는 말인가. 그 여인의 말 한마디에 바로 움직이는 자들이라니.

실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무언가 생각난 듯 진 공자가 침묵을 깼다.

“육낭, 저번부터 자네가 계속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이런 게 바로 진심이야.”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진심! 자네는 계속 괴상한 말만 늘어놓는군. 이만 가겠네!”

주육낭이 소매를 매섭게 내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진 공자는 웃음기 담긴 얼굴로 주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웅했다. 그러더니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탁자에 놓인 붓을 들어 먹물을 찍고 옆에 있던 병풍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넣었다.

“또 하나…….”

진 공자는 붓을 쥔 채로 천천히 말하며 병풍을 바라보았다.

병풍의 한구석에 세로로 동그라미 세 줄이 그려졌다. 첫 행에는 동그라미 두 개, 둘째 행에는 다섯 개, 마지막 행에는 먹이 무겁게 찍힌 동그라미 하나가 있었다.

어둠 속 흔들리는 등불에 비친 동그라미들은 괴이한 아름다움을 빛냈다.

날이 환히 밝았을 무렵, 시녀는 마당을 벌써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반근 누나, 뭐 기다리는 거 있어?”

금가아가 물었다.

“반근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시녀가 되물었다. 두 질문에 같은 이름이 등장했지만 금가아는 더 이상 헷갈리지 않았다.

“반근 누나는 방금 나갔잖아. 반 시진은 있어야 돌아오지.”

“왜 일찍 나가지 않고.”

금가아의 대답에 시녀는 주먹을 쥐고 서성거리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반근 누나는 늘 이 시간에 나갔잖아. 왜 일찍 나가야 하는데?”

깨엿을 입에 문 금가아가 웅얼거렸다.

“지금은…….”

시녀는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그래, 지금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왜 내가 먼저 당황해서 이 난리야?

도련님들은 그날 밤 어둠을 틈타 한 번 다녀간 후로 다시 오지 않았고,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지도 않았다. 아씨도 금가아에게 태평거로 가 상황을 살펴보라는 말씀은 없으셨고, 반근은 여느 때처럼 장을 보러 나갔다.

식구들은 다들 평온한데 왜 나 혼자 이리 허둥대는 거야. 저 반근은 요리 솜씨가 날로 발전하고 있고, 이 반근은 거리거리 골목골목을 누비며 온갖 풍문과 뒷말을 수집해 오는데, 나 반근은 어째 진보는커녕 퇴보만 하는 것 같네.

명색이 아씨와 함께 늑대 떼와 싸워 살아남은 사람인데, 이만한 일로 정신이 나가 허둥대다니. 아니지. 어쩌면 사람이, 늑대보다 더 무서울지 몰라.

“반근 누나, 왜 그래?”

시녀가 말을 하다 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자 금가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반근이 금가아를 보며 웃었다.

“아씨 활쏘기 연습 하실 건데, 너도 같이 가서 할래?”

시녀가 물었다. 정교랑이 활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서무수는 집 안에 과녁을 걸어 주었다. 매일 오전,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난 정교랑은 서무수가 준 작은 활과 화살로 다시 반 시진씩 활쏘기 연습을 했다.

사내아이에게 칼이나 활 같은 무기는 언제나 흥미를 끄는 대상이었다. 금가아는 조악한 솜씨로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어 정교랑을 따라 놀았다.

“도련님이 한가해지면 저도 하나 만들어 주신대요.”

금가아가 정교랑의 활과 화살을 부러운 듯 쳐다보며 말했다.

주육낭은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연무장에서 무예 연습을 끝낸 후에도 웃통을 벗은 채 수통 옆에 한참을 서 있었다. 시녀들이 보다 못해 주의를 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주육낭은 시녀들이 땀을 닦아 주도록 몸을 맡긴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주육낭이 결국 문을 나섰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울긋불긋 꽃이 만발한 가운데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사실, 무뢰배 몇 명이 죽었을 뿐이다. 그것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무뢰배. 살아 있을 때는 여염집 백성보다 자유롭게 활개 치며 살았다지만, 죽고 나면 거리에서 얼어 죽은 비렁뱅이나 다를 게 없었다.

온 경성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 벌벌 떨기라도 할까 봐? 주육낭은 거리에 서서 실소를 터뜨렸다.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낯익은 계집이 바구니를 들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반근 누나, 왔구나.”

금가아가 손에 작은 활과 화살을 든 채 문을 열었다. 금가아가 반근을 보며 미처 웃기도 전에, 반근 옆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문을 홱 열어젖혔다. 금가아와 반근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주육낭은 벌써 이들 옆을 비집고 들어선 후였다.

작은 마당은 소박하면서도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푸른 대나무와 아름다운 꽃은 물론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까지 있었다.

산석 옆에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수수한 옷차림에 소매를 동여맨 여인은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를 가진 미인이었다. 여인이 손에 든 화살과 활로 주육낭을 겨눴다.

주육낭이 걸음을 멈춘 채 여인을 쳐다봤다. 투박하고 볼품없는 나무 활이었다. 현은 실을 꼬아 만든 듯했고, 윤이 나도록 다듬은 화살촉만 햇빛에 반짝였다. 화살은 금방이라도 활시위를 떠날 태세였다.

아무리 볼품없는 화살도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그 무뢰배들이 그리됐듯이.

시녀와 금가아는 숨을 죽인 채, 마주 보고 서 있는 소년과 소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정말로 쏘진 않겠지…….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리며 손의 힘을 풀었다. 텅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몇 장 밖에 있는 과녁의 정중앙에 안정적으로 꽂혔다. 마당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씨, 정말 대단하세요.”

시녀가 웃으며 환호했다. 정교랑이 손을 거두고 몇 걸음 걸어갔다.

“금가아, 네 차례야.”

시녀가 웃으며 금가아를 불렀다. 여전히 문 옆에서 넋을 놓고 있던 금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대답하고 신이 나서 달려왔다.

개구쟁이와 시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반근은 한쪽에 서 있는 주육낭과 다른 쪽에 서 있는 정교랑을 차례로 쳐다본 다음 고개를 숙인 채 채소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금가아의 화살은 계속 과녁을 빗나갔다. 시녀는 몸을 젖혀가며 박장대소했다.

“넌 저리 가서 아씨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봐.”

정교랑이 다시 활과 화살을 들었다. 정교랑의 동작은 신중했다. 옷소매를 위로 올려 동여맨 탓에 팔이 드러났다. 살은 없지만 결코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주육낭이 선 쪽에서는 정교랑의 옆얼굴이 보였다. 햇빛을 받은 소녀의 오뚝한 코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텅 소리와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아씨, 또 명중하셨어요.”

시녀가 환호했다.

“금가아, 금가아, 너 다시 한번 해 봐.”

주육낭이 뒤돌아 가 버렸다. 시종일관 말 한마디 없었고, 말을 건네는 이도 없었다. 애초에 주육낭이 안으로 들어온 적도 없다는 듯이.

“아씨, 저 사람 또 왜 저런대요?”

시녀는 수건을 들고 정교랑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면서 그제야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저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시녀에게 건넨 다음 손을 털고 옷소매를 내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반근, 오늘 거리에선 어떤 새로운 일이 있었는지 들려줘.”

물 한 잔과 정교하게 만든 찹쌀 정과 한 접시를 내려놓았다. 씻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정교랑이 정과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남쪽 거리에 있는 무뢰배들이 사고를 쳤나 봐요. 남의 기밀을 훔치려고 협박을 하다가 도리어 맞아 죽었대요. 관부에서 같은 패거리를 조사 중이고요.”

대청에 꿇어앉은 반근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늘 성문에서는 검문이 강화됐어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붐비다 보니 관부가 아무 쓸모도 없다며 원성이 자자했죠.”

정교랑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옆에 있는 시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죽인 거야? 그, 태평거에서…….

“오늘 시장에 싱싱한 생선이 들어왔는데, 제가 한발 늦어서 못 샀어요.”

반근은 아쉬운 목소리였다.

“성 밖에 있는 그 태평거에서 다 사 갔대요.”

거기까지 말한 반근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했다.

“아, 맞다. 그리고 보수사는 오늘 성 밖에서 태평 두부를 한 수레나 들여왔어요. 오늘 보수사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다들 두부 맛을 보겠네요.”

시녀는 자리에 앉았다. 멍한 표정이던 시녀가 문득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아씨. 그래서 부처님은 성심을 본다고 하셨군요.”

시녀가 중얼거렸다.

음식 공양이라고 했을 때 가장 처음 떠올린 것은 이름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떼돈을 벌게 됐다. 돈을 버는 일이려니 했더니 뜻밖에도 뒷배까지 얻게 됐다. 이다음엔, 또 뭐가 있으려나?

그깟 무뢰배 몇 놈들인데, 노태야까지 나서실 필요는 없지. 하긴, 그냥 무뢰배들인걸. 진작 그물을 펼쳐 놓고 기다리는데, 기세등등해서 횡포를 부리러 왔다가 도리어 황천길을 재촉하게 된 꼴이지. 별일도 아니야, 신경 쓸 것 없어.

경성 밖에서 하루 밤낮 사이에 일어난 이 일에 대해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여드레쯤 지난 후에야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남쪽 거리의 시정잡배 주오가 태평 두부의 비법을 눈독 들이고 무뢰배들을 돈으로 사 보냈다가 도리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유일하게 퍼진, 정확하면서도 확실한 진상이었다.

“관두자고. 점점 더 맛이 떨어지네. 먹을 것도 이게 전부고. 재미없어, 그만 가세.”

대청의 탁자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앞에 놓인 과로신선을 보며 떠들어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과로신선은 겨울철에 먹을 때처럼 별미가 아니었고 도리어 열이 올랐다.

“더워 죽겠네.”

다른 손님도 손을 내저었다.

“우리 차라리 태평거로 가세나. 거기 요리가 아주 끝내준다던데.”

“태평거? 며칠 전에 사람이 죽어 나간 태평거 말인가?”

나머지 손님들은 주저하는 눈치였다. 사람이 죽은 곳에서 밥을 먹는다는 건 왠지 께름칙했다.

“사람이 죽었으면 뭐? 감히 태평거에 와서 행패를 부리려 하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게지. 거긴 부처님께서 지켜 주시는 곳이라고.”

“맞아. 그때 여러 사람이 봤다더군. 그 무뢰배들은 부처님의 빛을 받은 화살에 맞아 죽었대.”

“그래? 그럼 어서 가세. 어디 한번 가 보자고.”

이 손님들마저 계산을 마치고 자리를 뜨자 대청에는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문발 뒤에 선 두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주오가 죽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앞으로도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부리기 위해 두칠은 최대한 슬픈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면서 거금을 들여 주오의 부모와 처자식이 앞으로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약조를 지켰다.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두칠은 음으로 양으로 적잖은 돈을 썼다. 당초 이 사건을 일으킨 것도 자신인데 부랴부랴 매듭지은 것 또한 자신이었다.

안팎으로 들어간 돈을 셈해 보니 불과 며칠 만에 1만 관에 가까운 돈이 나갔다. 그 결과 식당에서 쓸 현금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지만 건물이나 땅을 파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누가 눈치라도 채면 큰일이었다. 결국 유 교리에게 고리로 빚을 얻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역시 뼈를 깎는 돈이었음은 물론이다.

금전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가산도 절반은 잃었다. 이게 누구 때문이지?

태평거!

마음이 불안하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식당도 점점 파리만 날리고 있다. 이게 누구 때문이지?

태평거!

자신은 피를 토하며 돈까지 쓰고 있는데, 태평거는 부처님이 지켜 주시는 곳이라는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그놈의 태평거!

두칠은 두 눈이 새빨개진 채 쥘부채로 벽을 쾅 쳤다. 이 원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갚으리라.

“정 언니!”

잔꽃으로 수놓은 치마를 입은 진단랑이 웃으며 층계를 뛰어 내려왔다.

“아씨, 천천히요.”

시녀가 웃으며 무릎을 구부리고 붙잡아 주려 했다. 진단랑은 벌써 정교랑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정 언니, 정말 우리한테 식사 대접할 거예요?”

진단랑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우리한테 대접하는 게 아니라, 조부님한테 한다고.”

곧이어 걸어 나온 진십팔랑이 말했다. 자연스레 정교랑에게 팔짱을 끼던 진십팔랑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정교랑을 훑어봤다.

“엇, 전에는 나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며칠 못 본 사이에 나보다 더 큰 것 같네요?”

“정 언니가 언니보다 더 커.”

진단랑이 말했다.

진 노태야의 마당에는 초목이 무성했다. 초여름 햇빛은 소녀와 여자아이의 몸에 얼룩을 만들었고, 그 밝은 웃음은 눈부시게 빛났다.

진 노태야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경을 미소로 감상했다. 세 사람은 나막신을 벗고 버선만 신은 채 대청으로 들어왔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이 늙은이의 병이 나은 후로 정 낭자가 이리 찾아온 건 실로 오랜만이구려.”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미소로 받았다.

“꺼리는 건 아니어도 제가 피하는 게 옳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녀 또래의 소녀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매사 나아가고 물러섬에 이치가 분명했고,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으며 원망도 공포도 없는 듯했다.

아무리 떠들썩하고 시끌벅적한 자리에 앉아 있어도 소녀는 시종일관 홀로 고립된 모습이었다. 일찍이 의지할 곳 없이 살았으니 지금도 의지하지 않고 살려는 거겠지.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이렇게 특별히 찾아왔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팔랑과 진단랑이 영문을 모르겠는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우리 어머니가 보내 주신 옷 때문에요?”

진단랑이 묻자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노려봤다. 그건 노태야께 고마워할 일이 아니잖아. 그럼 뭐 때문이지?

진십팔랑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많았다. 모든 일에 왜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꼬치꼬치 캐묻는 건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를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십팔랑은 조부를 쳐다봤다. 진 노태야의 담담한 표정에는 미소가 살짝 어려 있었다. 이 낭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 게 분명했다.

감사라고? 은혜를 베푼 사람과 은혜를 입은 사람은 훤히 아는 일이건만,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만은 영문을 몰랐다.

그간 정 낭자와 조부님은 재진을 받을 때 한 번 본 게 전부인데, 혹시 그때 조부님한테 뭘 부탁드렸나? 요즘 정교랑과 관련된 일은 딱히 없었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일 리도 없고. 그럼 이렇게 미리 와서 감사를 표할 리 없으니.

“정 낭자, 별말을 다 하시오. 낭자는 내 생명의 은인 아니오.”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생명의 은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의원의 도를 행했을 뿐이죠. 더구나 노태야께서는 치료비를 주셨으니, 서로 빚진 것도 없고요.”

“그리 말하자면, 나 역시 이번에 딱히 도와준 게 없잖소. 낭자 스스로 자신을 구했을 뿐이지.”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도 미소를 지었다.

“세상살이란 건 힘드니까요. 누군가는 굳이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하지 않아도, 그저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 더없이 큰 도움이 돼요.”

진 노태야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경탄이 섞인 웃음이었다.

사실 진 노태야 역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적당히 말을 흘려 명성을 얻게 해 주었을 뿐인데, 눈 깜짝할 새에 태평거에서 사람까지 죽어 나가다니.

더구나 이 소식은 보수사의 늙은 승려가 직접 말해 준 것이었고, 겸사겸사 좋은 차까지 대접받았다. 사건이 벌어진 후 이미 닷새가 흐른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놀라 식은땀을 흘렸지만 내심 다행스럽고 기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다회에서 늙은 승려에게 이야기를 꺼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찾아갔다면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이 부족했을 터였다.

살인은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했다지만, 어쨌거나 진짜 주인은 정교랑이었다. 무려 살인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본인도 놀라지 않았으려나?

진 노태야는 눈앞에 있는 어린 낭자를 바라봤다. 무뚝뚝한 표정에서는 놀란 기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설마, 사람이 죽어 나갈 줄 알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이 낭자의 명으로 죽였을지도 모르지. 문제를 단번에 풀 수 있을 뿐더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하니까.

살인이라! 진 노태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쪽에서는 진단랑이 정교랑에게 무언가를 떠들고 있었다. 정교랑의 팔을 먼저 잡고 웃으며 재잘댔다. 정교랑 역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몸을 살짝 틀어 진십팔랑이 속삭이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해가 바뀌는 동안 저 소녀가 많이 컸구나. 여전히 여윈 모습이지만 백옥처럼 희기만 하던 피부에도 혈색이 돌아왔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 더없이 맑고 고와. 초롱초롱한 두 눈도 여느 소녀들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애야. 딱히 의지할 곳도 없는 어린애.

“언니, 우리 밥 사 주러 어디로 데려갈 거예요?”

질문을 던진 진단랑은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대답했다.

“난 태평 두부를 먹고 싶어요.”

“너한테 대접한다는 것도 아니잖아.”

진십팔랑이 웃으며 말했다.

“노태야는 조용히 요양하셔야 해.”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대접하려면 성의를 보여야지. 내가 직접 노태야께 탕을 만들어 올릴 거야.”

그 말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언니가 직접 만든다고요? 반근한테 시키지 않고요?”

전에 먹었던 간식도 정교랑이 만든 것이라고 하긴 했다. 몸종과 시녀는 주인의 것이므로 몸종과 시녀가 만든 음식은 곧 주인이 만든 음식을 뜻했다. 그러니 정교랑 본인도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쭉 바보로…… 지냈다고 하지 않았나? 먹고 마시는 것도 누가 시중을 들어야 한댔는데?

문가에 조용히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나서며 예를 올렸다.

“소인의 음식은 전부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반근이 웃으며 말하자 진 노태야는 퍼뜩 옛일을 떠올렸다.

“언니, 정말 맛있어요. 이거 이름이 뭐예요?”

“팥 춘권이야.”

“어린 낭자가 솜씨도 좋구려.”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아, 역시…….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오호, 그럼 기쁘게 받겠소이다.”

진소가 문을 나설 때였다. 몸종 몇 명이 웃고 떠들며 달려가는 모습에 진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 있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무슨 짓이냐? 버릇없이.”

겁을 먹은 몸종들이 쭈뼛쭈뼛 예를 표했다.

“노야께 아뢰옵니다. 정 낭자께서 직접 요리를 하신다기에, 저, 저희도 구경하러 가고 싶어서요.”

정 낭자? 진소 얼굴에서 불쾌한 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오늘 정 낭자가 왔느냐?”

과연 정 낭자라는 한마디에 진소는 화를 풀었다. 진씨 가문은 자녀의 법도에 엄격했지만 정 낭자는 진씨 가문에서 진씨 가문의 자식들과 같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법도를 엄격히 지키지 않아도 됐다.

세 몸종은 으쓱해져서 고개를 숙인 채 혀를 날름거렸다.

“네, 노태야를 뵈러 특별히 오셨대요. 지금은 노태야를 위해 요리하고 계시고요.”

몸종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직접 부엌에 들어갔다고? 이 낭자가…….

“알았다.”

진소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눈빛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몸종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인 채 쿡쿡 웃다가 까치발을 들고 달아났다.

대청 안. 진 부인이 남편의 옷을 받아 정리하며 웃었다.

“스스럼없이 구네요. 정중하게 답례를 전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진소가 웃으며 묻자 진부인이 웃으며 눈을 흘겼다.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진소가 자리에 앉아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아 천천히 마셨다.

“처음엔 많이 이상했어요. 좀 서먹하기도 했죠. 근데 오래 보다 보니까 오히려 좋더라고요.”

진 부인도 자리에 앉아 감상에 젖어 말했다.

“조용하고 쓸데없는 일을 안 하면서도 예절을 알고 도리에 밝아요.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워요. 그래서 단랑이 그리도 좋아하고 따르나 봐요. 좋은 사람은 아이들이 제일 잘 알아보잖아요.”

“그렇소. 사람의 좋은 점이 보이면 좋게 느껴지지.”

같은 시각 강주의 정씨 저택에는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봄에 새로 수리한 연못은 경치가 수려하여 사람이 살기 좋았다. 집안 낭자들은 다시 연못 근처로 거처를 옮겨 왔다. 비가 오자 자매들은 한데 모여 바둑을 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딸각딸각 나막신 소리가 들리더니 도롱이를 입은 정칠랑이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층계를 올라 회랑 아래로 온 정칠랑은 나막신을 벗어 던졌다. 회랑 아래에 앉아 있던 몸종들이 얼른 일어나 도롱이를 벗겨 주고 정칠랑을 안으로 안내했다.

“칠랑, 내 돗자리 젖잖아! 아버지가 남양에서 사다 주신 귀한 돗자리란 말이야!”

정육랑이 소리쳤다. 정칠랑은 콧방귀를 뀌며 비켜서기는커녕 돗자리에 두 번이나 힘껏 발을 굴렀다. 두 자매가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를 취하자 몸종들과 여종들이 얼른 말렸다.

“이게 중요한 게 아냐. 엄청난 소식이 있어.”

정칠랑이 눈을 반짝이며 자매들 앞에 앉았다.

“엄청난 소식을 네가 어떻게 알아.”

정육랑이 같잖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리며 대꾸하자 정오랑과 정사랑이 중재에 나섰다.

“칠랑이 왜 안 보이나 했더니, 엄청난 소식을 듣고 왔구나.”

정칠랑이 손을 내저었다.

“진짜라니까.”

정칠랑이 앞으로 나서며 세 언니를 쳐다봤다.

“그 바보가, 혼인을 한대!”

정칠랑이 상상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세 자매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누가 또 정칠랑의 심기를 건드려 바보라고 불리는 거지? 집안 자매? 아니면 자주 만나는 낭자들?

“어느 바보?”

정오랑이 물었다.

“어느 바보겠어? 집안에 바보가 하나밖에 더 있어?”

기분이 상한 정칠랑은 소리치며 입을 삐죽였다.

“다들 따라서 바보가 된 거야? 말도 못 알아듣고…….”

세 사람은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아, 그, 네 적장녀 언니!”

정육랑이 손짓을 하자 정칠랑이 발끈해서 일어섰다.

“그, 그건 네 언니지! 전에 백모님이 키우기로 하셨잖아! 가깝기로 따져도 너랑 제일 가깝고!”

진짜 어린애라니까. 지금이 말꼬리 잡고 늘어질 때야? 정육랑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고 질문했다.

“걔가 어떻게 혼인을 해? 바보와 혼인하겠단 사람이 있어?”

정칠랑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방금 아버지랑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거 들었어.”

정칠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주씨 가문에서 바보를 시집보낼 거라며 사주단자를 달라고 했다는데, 그럴 거면 우리가 아무한테나 시집보내버리면 되잖아.”

주씨 가문. 그 말에 정육랑 등은 사정을 대충 눈치챘다.

주씨 가문의 사람이 온 지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딸들인지라 직접 가서 방문 이유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조그마한 집안에서 소식을 숨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곧 시녀와 몸종을 통해 말이 전해졌다.

주씨 가문에서는 그 바보의 사주단자를 가지러 왔으며, 모친의 혼수도 가져간다고 했다. 정씨 가문에서 이 일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딱 잘라 거절하자 양쪽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외지로 부임한 정 이노야도 휴가를 청하고 불려왔다.

“주씨 가문에서는 그 바보를 시집보내려는 게 아니야. 혼수를 가져가려고 핑계 대는 거지.”

정육랑은 뭔지 알겠다는 투로 말했다.

“주씨 가문엔,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

주씨 가문엔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그러니 바보가 태어났겠지. 이는 정씨 가문 전체가 굳게 믿는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주씨 가문에서는 정씨 가문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서 자기네 딸이 바보를 낳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런 생각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머릿속 깊이 각인된 것이어서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누가 바보랑 혼인하겠어?”

정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과 불쾌함이 서린 표정이었다.

“혹시 상대도, 바보인가?”

정오랑의 말에 정칠랑이 까르르 웃었다.

“웃기지 좀 마.”

정칠랑이 깔깔대며 웃자 머리에 꽂은 황금 장식이 흔들거렸다. 정오랑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참 나, 바보가 혼인을 하긴. 주씨 가문에서 그 바보를 키우기 싫으니까 핑곗거리를 찾은 거야.”

정육랑이 정칠랑을 보며 말했다.

“숙부님도 참, 어떻게 그 말을 곧이들으신대? 숙부님이 그 바보의 혼처를 찾아준다고 하면 아마 주씨 가문에서 당장 그 바보를 데려올걸? 숙모님도 그래. 숙모님 눈엔 그저 돈만 보이시겠지. 그 바보가 돌아오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안 하시고.”

정사랑과 정오랑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이부인은 이들의 적모(嫡母)였지만 대부인은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서녀 처지인지라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못 들은 척했다.

아직 어린 정칠랑이지만 말귀는 잘 알아들었다. 정칠랑은 콧방귀를 뀌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받아쳤다.

“우리 어머니는 아니야. 눈에 돈만 보이는 건 백모님이지. 자기가 돈 끌어모으려고 우리더러 아끼라고 하시잖아.”

“살림을 안 맡아 봤으니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도 모르겠지!”

정육랑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에 돈만 보이는 게 아니고서야 어쩜 그리 생각이 짧아?”

몇 살 어린 정칠랑은 말문이 막히자 열이 받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울보야. 할 말 없으면 울기나 하지. 집에서는 부모님이며 조모님이 오냐오냐 받아주시지만, 나중에 시집가면 남편이랑 시부모님이 응석 안 받아줄걸!”

밖에 있던 몸종과 여종이 얼른 들어와 달랬다.

“우리 쟤랑 놀지 말자, 쟤랑 놀지 마.”

정칠랑은 울며 몸종과 여종에게 정사랑과 정오랑을 잡아끌게 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던 여종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잘 지내던 아씨들이 왜 또 싸우시지?”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잖아.”

“그게 아씨들이 싸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 바보 얘기가 나왔잖아.”

“아, 그렇지. 그 바보랑 얽히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

이부인은 손님과 함께 대청에 앉아 있었다. 손님은 서른 남짓으로 보이는 여인으로 얼굴이 희고 살집이 있었다. 여인은 이부인 앞에서 겸손한 웃음을 짓고, 정칠랑을 달래는 이부인을 보며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칠랑, 울지 말고. 이 여덟째 외숙모가 갖고 놀 거 줄게.”

여인은 손에서 금반지를 빼 정칠랑에게 주었다. 꽤 오래 낀 것으로 보이는 데다 딱히 눈에 띄지도 않는 실반지가 정칠랑의 눈에 들 리 없었다. 정칠랑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순금으로 된 꽃무늬 팔찌를 밖으로 보이게 한 후 통통거리며 뛰어나갔다.

머쓱해진 여인은 반지를 도로 챙기며 방석을 끌어당겨 엉거주춤 앉았다.

“칠랑은 참 말을 잘 듣네요. 달래니까 울음을 뚝 그치고.”

여인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말을 돌렸다. 이부인은 성가신 눈치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요. 보다시피 이 집안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요.”

이부인이 재촉하자 여인은 더욱 무안해했다.

“둘째는 원래 백부를 따라 입학하려 했는데 연말에 병을 얻어 크게 앓았어요. 애 아버지도 생계가 막막하고요. 농사도 잘 안 돼서 간신히 봄을 났죠. 성 동쪽에 있는 양어장에서 물고기를 길러 볼까 하는데…….”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더욱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요즘 살기 힘든 거로 따지면 누군들 안 힘들겠어요. 나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니에요. 집안 살림이 내 손에 없으니 춥고 배곯지 않을 정도로 버티는 것뿐이죠.”

이부인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여인이 창피한 듯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이부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칠랑과 아들이 아직 어리다지만 애들을 위해 준비는 해 둬야죠. 나이가 찬 딸도 둘이나 있고요. 아, 그 큰애는 마침 혼담이 나오고 있어요. 내가 계모라지만 그래도 남한테 얕보일 순 없잖아요. 어떻게든 제대로 해서 보내야지…….”

듣고 있던 여인이 놀라 입을 열었다.

“그 큰애요? 그 애도 혼담이 오가요?”

당초 대방의 노처녀 십구랑이 남의 집에 재취로 들어가게 됐는데, 전처 소생의 바보가 하나 있다는 말은 온 집안사람이 다 알았다.

“혼담이 오가지 않으면, 평생 집에 두란 말이에요?”

이부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또 울화통이 치밀어 돈이나 뜯어낼까 하고 온 친정 여인을 상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올케도 그만 가 봐요. 나중에 다시 부를게요. 집에 손님이 계셔서요.”

여인은 쫓겨나다시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 배웅하는 여종들도 마지못해 따라 나왔다. 바깥마당으로 나오자 사내들이 싸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여종들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대노야와 이노야께서 또 주씨 가문 사람과 싸우시나 보네. 이게 벌써 며칠째야, 끝도 없이.”

“그 바보의 혼수가 여간 많은 게 아니니 쉽게 끝낼 수가 없지. 주씨 가문에서 그걸 다 가져가려면 정씨 가문의 재산을 절반은 내줘야 할 텐데. 노야와 부인께서 동의하실 수가 없잖아. 안 싸우는 게 이상하지.”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여인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혼수?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

“어멈들, 그 주씨 가문이라는 게 누굴 말하는 게야?”

여인이 물었다. 두 여종은 같잖다는 듯 힐끔 쳐다봤다. 이부인의 친정에서 돈을 뜯어내러 온 가난한 곁가지임을 잘 아는 터였다.

“우리 이방 선부인의 친정이요. 우리 이방의 사돈이기도 하고요.”

여종은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조강지처는 죽어서도 정실이었다. 후처인 팽씨가 살아 있고 팽씨를 중심으로 왕래하며 정을 나눈다 해도 도리상 정씨 가문 이방의 정통 사돈은 영원히 주씨 가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인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정씨 가문이 누굴 중시하든 덕을 보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여인의 머릿속에는 혼수와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이라는 말만 계속 떠올랐다.

“그 바보가, 큰딸이죠? 주씨 가문에서 왜 그 혼수를 가져간단 거예요?”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큰따님이 혼인을 하려면 당연히 혼수를 가져가야죠.”

여종은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의 혼수는 무려…….”

옆에 있던 여종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살펴 가세요. 저희도 얼른 들어가 봐야 해서 이만.”

여종이 다른 여종을 잡아끌며 들어갔다. 여인은 들어가는 여종들의 모습을 아쉬운 듯 보다가 대문 근처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바보의 혼수가 정녕 그리도 많단 말이지?

저택의 다른 쪽 서재에 있던 정사낭이 서책을 내려놓았다. 옆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몸종 춘란이 얼른 다가가 물었다.

“또 싸우나 보네요.”

정사낭이 귀를 기울였다.

“책 읽는 데 방해가 되세요?”

춘란이 걱정하며 묻자 정사낭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건 방해가 되지 않아. 꽤 읽었으니 좀 쉬어야겠다.”

춘란이 안도하며 웃었다.

“그럼 차를 내올게요. 현묘관의 다과도 드디어 샀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탁자 앞으로 간 정사낭은 무늬 없는 명주로 덮어 놓은 종이를 쳐다봤다.

“현묘관 간식은 날개 돋친 듯 팔리는구나.”

정사낭이 감탄했다.

“아무리 날개 돋친 듯 팔려도 사려고 마음만 먹으면 살 수는 있죠. 근데 이상하게도 매번 우리 집에서 사러 가면 똑 떨어졌더라고요.”

쟁반을 들고 다가온 춘란이 탁자를 내려다보는 정사낭을 쳐다봤다.

“공자님, 그림을 그리시려고요?”

“붓질 몇 번만 더 하면 완성이야.”

정사낭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이 그림을 오래 그리셨는데 드디어 다 그리셨나 봐요. 소인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춘란이 웃으며 몇 걸음 다가섰다.

“안 된다. 절반밖에 안 그려서 아직 제대로 안 보여. 나중에 전체적으로 봐야 잘 보이지.”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몸종이 들어와 예를 표했다.

“공자님, 대부인께서 부르세요.”

정사낭이 나간 후 춘란이 다과를 정리하려는데 누가 문발을 들고 들어왔다.

“엇? 사낭은 없네?”

춘란이 몸을 돌리자 남색의 긴 소매가 달린 비단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보였다. 정사낭과 비슷한 연배로 용모도 준수했다. 다만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얼굴이 갸름해 다소 경박해 보였다.

사내를 본 춘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부채로 춘란의 얼굴을 톡톡 쳤다.

“이런 미인만 방에 홀로 남겨 두고?”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춘란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십칠공자.”

춘란은 예를 표하며 몸을 비켰다.

“공자님께선 대부인의 부름으로 방금 나가셨어요.”

십칠공자는 대부인의 친정 조카로, 학업 때문에 최근 정씨 저택에 기거하고 있었다. 말이 학업이지 실은 집에서 사고를 치고 피해 온 것이었다.

“아, 그럼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십칠공자는 춘란을 향해 눈썹을 찡긋거렸다.

“춘란, 차를 가져오너라.”

춘란은 못마땅했지만 차를 따르는 수밖에 딱히 도리가 없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십칠공자의 모습이 보였다.

“십칠공자, 드세요.”

십칠공자가 잔을 받았다. 잽싸게 피하려 했지만 춘란은 어느 틈에 십칠공자에게 꽉 잡혔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 찻잔을 들고 안을 서성이던 십칠공자가 탁자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게 뭐지?”

십칠공자가 물으며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세요. 저희 공자님의 그림인데 아직 못다 그리셨어요. 건드리시면 안 돼요.”

춘란은 다급히 외치면서 희롱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서서 막았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은 때였다. 십칠공자가 명주를 걷어치웠다.

“무슨 좋은 물건이기에 못 보게 해?”

명주를 걷자 탁자 위에 있던 그림이 눈앞에 드러났다. 십칠공자와 급히 달려들던 춘란 모두 멈칫했다. 마차에 앉아 휘장을 걷고 이쪽을 쳐다보는 미인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검은 눈썹에 길게 늘어뜨린 흑발, 하얀 피부의 여인은 아무 감정도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단한…… 미인이네…….”

십칠공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누구지?”

춘란은 짓궂은 십칠공자와 바짝 붙어 서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옷깃을 꽉 쥐며 눈앞에 있는 그림을 쳐다봤다. 그림은 전에 본 적 있는 한 사람의 모습과 겹쳐졌다.

산속 작은 도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손에 서책을 든 여인이 이쪽을 쳐다봤다. 늘 너울로 가리고 다니더니, 저리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을 줄이야.

“이노야 댁의 그 바보 낭자예요.”

춘란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넋이 나가 있던 십칠공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춘란이 중얼거리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뭐라고? 이런 사람이 정말 있단 말이냐? 게다가 너희 집 낭자라고?”

정신을 차린 춘란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피했다.

“소인이 잘못 봤어요.”

춘란이 말을 얼버무렸다. 십칠공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부채로 춘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누굴 바보로 아느냐! 어서 누군지 똑바로 말해! 안 그랬다간 고모님께 일러 널 팔아 버리겠다!”

십칠공자가 표독스레 말했다. 춘란은 순간 초조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대부인은 이 친정 조카를 아껴 늘 오냐오냐했고, 십칠공자는 매사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십칠공자가 작심하고 덤비기라도 하면, 눈 밖에 난 이에게 기필코 복수하고 마는 성격상 설령 팔려가진 않더라도 사공자의 시중을 드는 일은 관둬야 할 게 뻔했다. 힘없는 몸종인 춘란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소인은 정말 기억이 안 나요. 그저 보는 순간 이노야의 큰따님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춘란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이방의 자매들은 내가 다 봤다. 이만한 미인은 없었어.”

십칠공자는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더니, 자신의 옷깃을 잡으며 눈동자를 굴리고춘란을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냉큼 말하지 않았다간, 네가 날 유혹했다고 고모님께 이르겠다!”

춘란은 놀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십칠공자가 옷깃을 풀어헤치며 목을 드러내자 춘란은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고로 몸종이나 시녀 스스로 뭘 어쨌다는 일로 으름장을 놓는 건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몸종이나 시녀가 다른 사람을 어쨌다는 건 처음 보는 경우였다. 피해자는 달랐지만 시녀가 느끼는 효과는 같았다. 아니, 오히려 후자가 더 강력했다.

“이방의 큰따님이요. 바보라 어릴 적부터 밖에서 지내시다가 작년에야 돌아오셨어요. 지금은 다시 외가에서 데려가셨고요. 그러니 십칠공자께선 뵌 일이 없으시죠.”

춘란이 울며 말했다. 십칠공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정씨 가문 이방에 바보가 태어난 일은 십칠공자도 풍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바보?”

십칠공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그림을 쳐다봤다. 그림 속 미인 역시 선녀 같기도 하고 환영 같기도 한 모습으로 십칠공자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십칠공자가 막 입을 열려는데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정사낭이 들어왔다. 춘란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고, 십칠공자는 탁자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정사낭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십칠 왔구나, 어서 앉아.”

정사낭이 불쾌감을 감추고 말했다. 십칠공자는 정사낭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손을 뻗었다.

“형, 형의 그림은 둘째 숙부님 댁 바보와 하나도 안 닮았어.”

십칠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안 닮아. 이렇게 생겼는데.”

정사낭이 무심코 대꾸하자 십칠공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심 어이쿠, 끝장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정사낭이 걸려들고 만 것이다.

“아, 아니야. 그 애를 그린 게 아니라고.”

정사낭이 얼른 부인했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십칠공자는 정사낭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그림 앞으로 가 놀란 표정으로 미인도를 들여다봤다.

“바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십칠공자가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진 노태야의 부엌 밖. 여종과 몸종 여러 명이 안을 들여다보느라 서로를 밀고 잡아당기며 밟고 밟혔다.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기도 했다.

창살 너머로 안에 앉은 여인이 보였다. 머리를 천으로 덮고 커다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정성을 다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옆에 있는 두 몸종은 쟁반 세 개를 들고 있고, 그 위로 냉채와 요리, 밥이 놓여 있었다. 정교랑이 차를 곱게 갈아 불에 구우면 반근이 그 가루를 음식 위에 솔솔 뿌렸다.

“다 됐어.”

정교랑이 차를 다 뿌린 후 일어서며 말했다. 몸종 둘은 얼른 예를 표하고 정교랑과 시녀가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가 쟁반을 들고 따라 나갔다.

“정말 정교하게도 만들었네.”

“저게 무슨 생선이야.”

“과일을 제대로 튀겼네.”

“딱히 향은 별로 안 나는데, 먹으면 어떨지 모르겠네.”

문밖에 있던 이들은 몸종들이 음식을 들고 진 노태야의 거처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소곤거렸다.

같은 시각 이미 식사를 마친 진소와 진 부인은 자리에 앉아 아까 하던 얘기를 이어 하고 있었다.

“십팔랑이랑 비슷한 나이인데, 십팔랑보다 훨씬 철이 든 것 같아요.”

진 부인의 말에 진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을 수가 없지. 십팔랑이 어떻게 컸고 정 낭자가 어떻게 컸는데.”

진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저리 큰 걸 보면, 정말 잘된 일이죠. 정말 신선이 지켜 주시나 봐요.”

조용하고 온화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강하다. 조용하고 말수도 적고 움직임도 적지만 모든 일을 손아귀에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듯했다.

주씨 가문의 짓궂은 공자가 억지를 부려 강제로 데려간 일만 해도 결과가 어땠는가. 주씨 가문만 망신을 당하고 여인은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가게 됐다. 모든 게 여인의 계획 아래에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을 뿐.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버려진 채 의지할 곳도 없이 자라 독립적인 것일까?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는 세상에 많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총기를 타고난 이는 많지만 바보로 태어났다가 똑똑해졌다니. 하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진소는 초조해한 듯 자세를 바로 앉았다.

“소식이나 빨리 왔으면 좋겠구려.”

진 부인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무슨 소식이요?”

“병주로 간 사람 말이오.”

집안에서 정 낭자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낸 일은 진 부인도 알고 있었다. 알아봐야 마땅한 일이었다.

진소 내외는 이야기를 나누며 진 노태야의 거처로 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단랑의 말소리가 들렸다.

“더 없어? 한 그릇 더 먹을래.”

없다는 여종의 대답에 토라진 진단랑은 그릇과 젓가락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버릇이 없구나.”

진소가 호통을 치자 진단랑은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정 낭자가 이미 갔다는 소식에 진소 내외는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 언니가 우리한테 밥을 대접한다더니, 대접만 하고 바로 갔어요.”

진소가 웃었다.

“그래? 손님의 평가도 안 듣고?”

“성의를 충분히 보이지 않았느냐. 그리고…….”

진 노태야는 앞에 있는 두 손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들을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으니까.”

아직 어린 진단랑은 더 먹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으로 텅 빈 접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살 더 먹은 진십팔랑 역시 못내 아쉬운 듯 접시에 남은 부드러운 생선의 마지막 한 점을 천천히 먹었다.

“솜씨가 그리 훌륭합니까?”

진소의 물음에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웃으며 대답하던 몸종의 표정과 말이 또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래, 그렇구나. 전에는 윗전을 치켜세우기 위해 거짓으로 한 말이거나 아첨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 낭자 같은 이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한 말이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그건 진담이니까.

정교랑이 타는 마차는 이번에도 다리 어귀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정교랑과 시녀를 본 여종들이 우르르 배웅을 나왔다. 진씨 저택의 문간방에서 차를 한 잔 얻어 마시며 한참을 전전긍긍 기다리던 마부가 잽싸게 뛰어나왔다. 마차를 몰아 거리로 나와서야 마부는 물 밖에 있다 물속으로 들어간 고기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옥대교 저택에 살며 딱히 눈에 띌 게 없어 보이는 이 낭자와 시녀는 외출할 때면 늘 마차를 빌렸다. 그런데 이제 보니 놀랍게도 진 상공 댁의 귀빈이었다.

“경성의 다른 마차들보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우리 집 마차는 전부 깨끗합니다요. 한번 나왔다 들어가면 늘 깨끗이 닦거든요.”

마부가 말했다. 마차 앞에 앉은 시녀가 웃음을 지었다.

“알아요. 그러니 매일 이 집 마차를 이용하죠.”

마부는 위안이 되는 듯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마차를 한 대 사지 그러세요?”

마부가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진 상공 댁에 드나들 정도면 왜 마차 한 대 못 부릴 이유가 없을 텐데.

“그러려면 마부도 사야 하잖아요. 우린 여기서 얼마나 지낼지 몰라요. 자주 출타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필요 없죠.”

아씨는 남에게 행적을 들키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특별한 표식이 달린 마차를 싫어하기도 하고.

문 앞에서 값을 치르자 마부는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마차 소리를 들은 금가아가 문을 열고 신이 나서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옆쪽에서 누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옆으로 밀쳐지고 말았다.

“또 왔군요!”

눈앞의 소년을 본 시녀가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공자님, 대체 왜 이러세요! 따끔한 교훈으로도 부족하세요? 다른 친구는 없어요?”

사람을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남을 욕해도 아픈 곳은 찌르지 말라고 했는데, 그 주인에 그 노비 아니랄까 봐 똑같네. 하나는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어서, 하나는 하도 말주변이 똑 부러져서 밉상이었다.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손에 든 함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죠?”

주육낭이 건넨 함은 시녀가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손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시녀가 고개를 숙여 쳐다봤다. 조용히 정교랑 곁을 지키던 금가아와 반근도 쳐다봤다. 간식이 든 함 위에 도장으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태평거에서 만들어 파는 다과와 비슷하긴 한데, 위에 쓰인 글자가…….

“현묘관.”

글자를 읽은 시녀가 냉소를 지었다.

“이게 뭐라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금가아가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현묘관이라니! 현묘관이라니!”

금가아는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도 본 양 소리를 지르며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아씨, 현묘관이래요!”

반근이 떠날 때만 해도 강주에는 두 개의 현묘관이 있었다. 시녀가 온 후 현묘관은 차츰 명성을 얻었지만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기도 전에 시녀는 강주 땅을 떠났다. 말하자면 현묘관 간식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금가아였다. 금가아가 소리치자 시녀도 정신을 차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강주에 있는 거기요?”

시녀는 눈앞에 있는 소년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고향을 그리는 아씨의 마음을 달래 주려고 특별히 강주 특산물을 구해 왔다? 시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난 너와 혼인할 것이다…….

그 말이 귓가에 웅웅 울리자 시녀는 퍼뜩 눈치를 챘다.

주육낭은 휙 뒤돌아 나가더니 말에 올라 뒤도 안 돌아본 채 거리 속으로 멀어져 갔다. 시녀는 함을 든 채 뒤돌아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이건…….”

“요즘은 어떻게 만드나 모르겠네?”

정교랑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스쳤다.

아씨는 현묘관에서 지내셨잖아. 그때 자주 드셔서 반가우신가 보네. 주육낭도 참. 모처럼 그나마 사람다운 일 하나 했구나. 시녀는 웃으며 함을 들고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 먹어 봐요. 집에 있을 때 소문은 들었는데 먹어 본 적은 없거든요.”

모두가 안으로 들어갔다. 금가아는 대문을 닫은 후 빗장을 걸고, 반근은 물을 준비하러 갔다. 정교랑이 막 층계를 오르려는데 왼쪽 마당 담벼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서 손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다. 가늘고 긴 손이 햇빛을 받아 유달리 반짝였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 손으로 향했다.

“귀신이야!”

금가아가 가장 먼저 소리치며 머리를 감싸 쥐고 쪼그려 앉았다. 그 소리에 멍하니 있던 반근과 시녀도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손 역시 남녀의 비명 소리에 놀랐는지 움찔하며 담벼락 꼭대기를 간신히 붙잡았다. 이어 또 다른 손 하나가 올라오더니, 마지막으로 사람의 머리가 쑥 올라왔다.

검은 눈썹에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 높고 오뚝한 코와 얇은 입술, 백옥처럼 흰 피부의 소년이 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깜짝이야! 떨어질 뻔했네! 귀신이 어디 있어?”

소년은 눈썹을 꿈틀이며 정교랑을 빤히 쳐다봤다. 입가에 웃음기가 번지는가 싶더니 불평이 터져 나왔다.

“낭자 때문에, 또 놀랐잖소!”

<교랑의경> 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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