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60)

-가까이서 보다-

며칠째 내리던 봄비가 그치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초록빛이 무성했다.

비가 막 그친 터라 바닥은 아직 축축하고 질퍽거렸지만, 오가는 발길을 막을 순 없었다. 마차 한 대가 질주하면서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자 다들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은화가 수놓아진 갈색 비단 장포를 입은 사내도 말 위에서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한발 늦어 신발 위로 흙탕물이 몇 방울 튀었다. 사내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고는 말을 재촉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높게 세워진 깃대에 꽂힌 깃발이 바람을 맞으며 펄럭거리고 있었다. 금색으로 수놓은 ‘태평거’ 세 글자가 사내의 눈에 보였다.

점심때라 점포 앞에는 마차 몇 대가 서 있었고, 걷어 올린 대나무 발 사이로 손님 네다섯 명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장사가 썩 잘 되는 것 같진 않은데?

점포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몇 없었고,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오히려 태평거의 편액 아래였다.

사내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문 앞에 벽돌이 쌓여 있고 차와 말린 과일 등을 차린 탁자와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들은 뭐에다 쓰는 거지?

사내가 말에서 내리자 말과 마차를 관리하는 점원이 다가와 말을 끌고 갔다.

“손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사내가 막 대답하려는데,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유 형 말씀이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무리 중 한 사람이 주인장을 부르자, 점원 하나가 식당 안으로 급히 뛰어나왔다.

“가서 주인장한테 좀 말해 주시오. 이 글씨를 식당 안으로 옮기는 것은 어떻겠냐고. 귀한 글씨가 이렇게 밖에서 비바람을 맞는다는 게 정말 마음 아파 그렇소.”

한 서생이 손으로 편액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에서 내렸던 사내는 서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태평. 저게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태평인가 뭔가 하는 글씨인가? 저게 뭐 그리 좋다고.

사내는 인상을 쓰고 사람들 무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점원 세 명이 있었고, 계산대에는 기운이 없는 건지 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말은 제대로 하지만 손님을 상대할 때 갖춰야 하는 영리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음식이 나오는 속도는 빠른 편이지만, 딱히 특별하다고 볼 순 없다. 손님이 적었으니까. 음식 맛은…….

경성 주점에서 파는 유명한 요리들을 많이 먹어 본 사내였다. 여기 음식도 그냥 그 정도였다.

사내는 음식을 천천히 먹었다. 사내가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앉아 있던 손님들이 자리를 뜬 후로는 더 이상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 앞에는 아직 글씨를 보며 떠들어대는 서생들이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와 주문하는 이는 없었다. 서생들은 직접 식기까지 챙겨 와 이젠 누구나 다 아는 낙득자재를 만들어 먹고 있었다.

태평거는 서생들에게서 단 한 푼도 벌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차까지 내어주고 있었다.

허세만 가득하고 궁상맞은 서생 놈들은 어딜 가나 다 똑같군. 저들이 저 글씨 하나에 굽실거리면서 여기를 치켜세워줄 리가 있나. 도리어 속으로는 여길 욕하고 있겠지? 이런 누추한 곳에서 저 귀한 글씨가 썩고 있다고 말이야.

“여기 계산.”

사내의 말에 졸고 있던 관리인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여덟 푼입니다.”

사내가 계산을 마치고 문밖으로 나오자, 말과 마차를 맡아 주던 사람이 말을 몰고 왔다. 다른 식당의 말 관리인과는 달리 말고삐를 잡지도, 연신 소리를 질러대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과 나란히 걸어왔다.

이 사람, 말을 좀 부릴 줄 아는군.

아니, 여기는 경마장이 아니라 식당이지.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사내는 생각을 떨치고 휙 몸을 날려 말에 오른 후 출발했다. 큰길에 다다른 사내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봄빛이 만연한 주위에 비해, 홀연히 선 태평거는 유독 적막해 보였다.

사내가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거두는데, 마차 한 대가 그의 옆을 지나 태평거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사내는 다시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마차는 태평거 앞에 멈춰 섰고, 곧 승려 하나가 내렸다.

승려? 사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날 태평거가 선다회에서 쓴 돈이 부족했나? 그래서 저 승려가 돈을 받으러 직접 온 건가?

하긴, 명해선사가 직접 나섰는데 만 관 정도는 내야지.

사내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노승들은 하나같이 약아 빠지고 탐하는 것이 많아 속세에 물들기 쉽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재촉해 떠나갔다.

사내는 한 시진 내내 쉬지 않고 달려 신선거에 도착했다.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식당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내가 걸어 들어오자 식당 안에 있던 점원들이 그를 살갑게 맞이했다.

“돌아오셨습니까, 관리인.”

사내는 그들을 무시하고 곧장 복도로 향했다. 손님들 한 무리가 언짢은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뭐가 이렇게 비싸.”

무리 중 한 사람이 투덜거렸다.

누가 너희 같은 가난뱅이들더러 먹으라고 했나? 돈이 없으면 오지를 마! 사내는 표정을 굳힌 채 그들 무리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던가?”

자리에 앉아 있던 두칠이 자세를 고쳐앉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다지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관리인도 앉아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두칠에게 상세히 이야기했다.

“보수사에서 그 광경을 본 백성이 몇 없긴 했지요. 두부를 시켜 먹어 봤는데, 확실히 맛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그깟 음식 하나를 위해 머나먼 성 밖까지 나갈 리 없죠. 집집마다 한 솜씨 하는 숙수들이 있는데, 굳이 멀리까지 나와서 먹는 이유는 여가를 즐기기 위함입니다. 태평거가 깔끔하게 꾸며 놓긴 했지만, 귀한 분들 눈에는 영…….”

관리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두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그 무능한 놈들 둘이 붙어서 무슨 좋은 수를 내겠나. 뭐?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 저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두칠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염치도 없는 것들. 취봉루에서 내쳐지자마자 홀랑 태평거로 가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태평거의 주인이 타향에서 온 사람들이라 초반에 멍청하게 우리한테 큰돈을 뜯기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우둔한 사람들이라면, 늙은 오씨와 이대작의 꼬임에 넘어갔을 수도 있지요.”

관리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두칠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멍청한 타향 놈들이 두부를 잘 만드는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런데 이대작의 손재주가 그렇게 좋았을 줄이야. 예전엔 왜 몰랐지?”

“주인어른, 조공은 모양새만 냈을 뿐이지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습니다.”

관리인이 서둘러 말했다.

“어쨌거나 이번 일로 놈은 명성을 좀 얻게 됐어.”

두칠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 이대작을 다시 불러오게나.”

관리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자를요?”

“다른 식당에선 음식 모양새가 좋아도 쓸모가 없지만 여기는 신선거잖아. 모양새도 다 쓸모가 있다고. 앞에 놓인 음식이 맛도 좋고 모양까지 예쁘다면 먹는 사람 기분도 좋겠지. 똑같은 요리여도 돈을 더 쳐서 받을 수도 있고.”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이대작이 거절한다면 어쩌지요?”

“돈 몇 푼 더 주면 될 거 아니야. 무슨 큰일이라고.”

두칠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긴, 돈을 준다는데 누가 거절하겠어? 관리인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몸을 일으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더니 순간 무언가 생각난 듯 멈칫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주인어른. 돌아오는 길에 보수사의 승려 하나가 태평거로 가는 걸 봤는데,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땡중이 기녀 끼고 술 마시러 가는 걸 뭐하러 신경 써.”

두칠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보수사 공양은 점점 할 맛이 안 나네. 돈을 그렇게나 썼는데 인기가 많아지는 것도 잘 모르겠고.”

그건 관리인도 잘 알고 있었다. 현장에서 인기가 많긴 했지만, 그날은 공양이라 돈을 받지 않은 것일 뿐 사람들이 가게로 오면 당연히 돈을 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신선거에 온 사람 중에는 가격을 묻고는 그냥 가 버리는 사람이 반이고, 한 번 먹고는 돈이 아까워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사람이 반이었다. 결국 신선거에는 다시 단골들만 남게 되었다.

“이대작이 다시 들어오면 새로운 요리 몇 가지를 내보죠.”

두칠은 관리인의 말이 못마땅했다. 누가 그 무능한 놈더러 인기를 얻어달라고 했나.

“됐다, 가 봐라.”

두칠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정교랑은 몸종을 장 노태야에게 보내기 위해 태평거를 찾았다. 막상 태평거를 떠나려니 몸종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정교랑이 말했다.

“장 노태야는 마음씨가 착한 분이야. 마음씨가 착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하늘이 주신 복이지. 반근, 사람은 자기의 복을 알아야 해.”

몸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널 내치는 게 아니야.”

정교랑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너도 훌륭하고, 저 아이도 훌륭해.”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태연한 척 미소를 보였지만 눈빛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다들 훌륭해. 다만, 전부 내 곁에 두는 건 너무 낭비야. 사람은 제 복을 알아야 하고 복을 아낄 줄도 알아야 해.”

몸종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저도 알아요. 아씨께서 제가 필요가 없으신 게 아니라, 제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려는 거죠. 아씨,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주아주 잘 지낼 거예요.”

정교랑과 시녀, 몸종이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서무수가 들어왔다.

“잠깐만, 누이. 보수사에서 온 사람이 장사를 해 보자고 하네.”

보수사에서 온 사람이 장사를 하자고 했다고? 시녀와 몸종이 놀란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시녀가 무언가 깨달은 듯 짧게 탄성을 냈다.

“아씨, 설마 저들이 말하는 장사가 두부예요?”

“그래, 두부 때문이야. 보수사에서 우리가 만든 두부를 정기적으로 사고 싶대.”

서무수가 시녀의 말에 대답하면서 손가락 세 개를 꺼내 보였다.

“그것도 매달 삼백 근을.”

시녀와 몸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삼백 근! 매달! 태평거에선 반년 내내 써도 다 못 쓸 정도의 양인데, 역시 큰 사찰이라 씀씀이도 어마어마하네.

“나까지 나설 필요 없어요. 오라버니와 오 관리인이 알아서 하면 돼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 관리인이 협상한 가격,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서무수가 다시 손가락 몇 개를 내밀어 가격을 알려주었다. 시녀와 몸종은 더욱 놀라며 쩍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역시 보수사는 경성에서 제일가는 사찰이네요. 묘당이며 불전이 금은보화로 이루어져 있다더니.”

시녀가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몸을 돌려 서무수 쪽으로 걸어갔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려 사락사락 소리가 났다.

“보수사는 경성에서 제일가는 사찰이고, 뭇사람이 떠받드는 곳이죠. 아무나 다 먹을 수 있는 속된 것이라면, 보수사를 욕보이게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정교랑이 시선을 서무수 방향으로 천천히 옮겼다.

“가격을 2할 더 올리세요. 앞으로 우리가 만든 태평 두부는, 보수사에만 공급합니다.”

보수사 외에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경로로 들어올 수 있는 돈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렇게까지 한다면 당연히 가격을 더 올려야지.

서무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좋아. 내 지금 당장 가서 말하지.”

서무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누이 말은, 이 두부의 이름이 태평 두부란 거지?”

태평거에서 만든 두부이니, 당연히 태평 두부라고 해야지. 시녀는 당연한 말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있던 몸종은 정교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쿡 웃음을 터뜨렸다.

태평 만두, 태평관, 태평거, 태평 두부……. 아씨께선 태평 만두를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서무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시녀와 몸종은 그제야 정교랑의 말을 깨달았다.

“아씨, 부처님께 성심을 보여드린다는 게 이 뜻이었군요!”

* * *

사월 말의 봄빛이 만연한 경성에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니, 날씨가 더없이 화창했다.

주씨 가문, 주 부인의 거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주씨 집안의 여식들이 옹기종기 모여 새로 지을 여름옷을 위한 치수를 재고 있었다.

딸들에게 둘러싸인 주 부인은 춘곤증이 조금은 가신 듯 팔걸이 책상에 기대어 재잘거리는 딸들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노야께서는 지금쯤 강주에 도착하셨겠지?”

주 부인이 옆에 있던 여종에게 말을 걸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얼추 시간이 맞습니다. 다만, 돌아오시는 일정은 장담을 못 하겠네요.”

돈 달라는 일인데, 그쪽에서도 호락호락하지 않겠지.

“어디 한번 해 보라지. 우리 주씨 가문의 혼수인데, 어디 정씨가 남겨 먹으려고.”

“다만 부인, 어찌 됐든 정 아씨는 저쪽 집안의 딸이니 혼사를 치르고 말고는 저쪽에서 결정할 일이에요. 노야께서도 한바탕 입씨름을 하셔야 할 거예요.”

여종이 조심스럽게 알렸다.

“저쪽에서 혼사를 결정한다고? 그럼 저 사람들이 우리 교교를 아무 데로나 시집보내도 가만히 있어야 해? 친어미의 외가 사람들이 멀쩡하게 눈뜨고 살아 있는데, 그렇게는 못 하지.”

주 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렸다. 진흙탕 싸움이 되더라도 거저먹을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진씨 가문이랑 혼례를 올렸으면 딱인데. 진씨네 사주단자를 들고 찾아가면 찍소리도 못 낼걸!”

진씨 가문과의 일을 생각하니 주 부인은 화가 나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종이 서둘러 주 부인을 달래며 웃었다.

“부인, 진씨가 아니어도 다른 좋은 집안이 많잖아요. 교랑 아씨께선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니셨으니, 부인께서 말씀을 꺼내시면 설마 혼처 하나 못 구하겠어요?”

“죽은 사람을 살려? 흥, 그 재주가 다했을지 누가 알아.”

정교랑이 이사 나간 날짜를 세어보니, 족히 두 달이 넘었다. 그동안 정교랑은 병을 핑계로 진료를 받지 않으며 지금껏 조용히 있었다.

“재주가 다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진 노태야와 동 내한을 교랑 아씨께서 치료하신 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걸요.”

여종이 웃으면서 주 부인을 달랬다. 하긴, 저 두 집안과의 관계가 있으니, 이미 많은 사람이 혼담을 고려하는 거겠지.

주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조카가 보통 이상한 게 아니니, 솔직히 이제 나도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주 부인이 짧게 한숨을 토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신경을 안 쓰면 누가 신경 쓰겠어? 방법이 없지. 피는 물보다 진하단 말이 괜히 나왔나? 됐다, 됐어. 내가 전생에 그 애한테 진 빚을 갚는다 치고 살아야지.”

“부인께서는 정말 자애로우세요.”

여종이 웃는 얼굴로 알랑거렸다.

경성에서 시집보내기 좋은 집안이 누가 있나 생각해 보려는데, 치수를 다 잰 딸들이 우르르 주 부인에게 몰려왔다.

“어머니, 우리 보수사에 향 피우러 언제 가요?”

딸들 중 하나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묻자 주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부처님을 보러 가고 싶은 게야, 절에서 주는 밥을 먹으러 가고 싶은 게야?”

“어머니, 예불도 올리고 밥도 먹고 겸사겸사죠.”

딸들이 재잘대며 주 부인을 둘러쌌다.

“급할 거 없어. 네 오라비에게 보수사에서 양두부를 몇 근 사 오라고 했으니, 오늘은 집에서 먹자꾸나.”

주 부인의 말에 소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경성에도 두부를 만드는 집이 몇 생기긴 했는데, 다 보수사만 못해요.”

“보수사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태평 두부가 좋은 거야.”

“이렇게 맛있는 두부를 보수사랑 태평거에서만 팔다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들어가거나 길이 너무 멀어서 못 간다는데, 왜 다른 곳에는 안 팔지? 정말 답답하네.”

“애초부터 태평거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고 한 거니까, 당연히 다른 집한테는 안 팔지.”

“태평거도 너무 멍청하네.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안 벌겠단 건지.”

“아휴, 태평거 말이 나와서 그런데. 육낭 말로는 그 바보가 연 거라고…….”

방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마지막 말을 한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말을 뱉은 당사자도 깜짝 놀랐다.

“뭐라고? 태평거가, 그 강주 바보 거라고?”

자매들이 물었다. 정교랑 거라고? 주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딸들을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니?”

말을 했던 딸은 불안해졌다.

“저, 저도 육낭이 말하는 걸 얼핏 들었을 뿐, 진짜인지는 잘 몰라요.”

안에 있던 자매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럴 리가?

“육낭은?”

주 부인이 물었다.

“부인, 잊으셨는지요. 진 공자와 함께 보수사에 가셨습니다.”

여종이 주 부인에게 나지막이 고했다.

따로 향을 피우지 않아도 별실에는 은은한 단향목의 향이 공기 중에 스며들어 있었다.

진 공자가 숟가락으로 양두부를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두부가 입으로 들어가자 진 공자는 곧 감탄을 쏟아냈다.

“이 태평 두부만의 요리 비법이 있는 게 확실해. 이제 두부를 만드는 집도 경성에 한둘이 아닌데, 여전히 떫기만 하고 이런 부드러운 맛이 안 난단 말이지. 이걸로 보수사가 또 차정사를 이겼네.”

차정사는 몇 대째 번영을 누리며 늘 승록사(僧錄司: 불교 사무를 맡기 위해 설치한 관서) 명부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유서 깊은 대사찰이었다. 보수사 역시 황실 사원이긴 하지만, 역사가 짧아 명해선사가 독창적인 선다법을 선보인 후에야 차정사의 명성을 넘어서게 됐다.

그러다 연말에는 이름 모를 이가 차정사의 벽에 훌륭한 글씨를 남겨, 수많은 사람이 글씨를 감상하러 몰려든 덕에 차정사의 인기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이번엔 보수사에서 또 두부라는 새로운 맛으로 절밥을 제공하여 불과 달포 만에 보수사의 예불 올리는 가격이 급등했다.

진십삼의 반대편에 앉은 주육낭은 수저도 들지 않고 눈앞의 두부만 보고 있었다.

“태평거가 정말 그 애 거라고?”

“그럼, 태평거의 주인장도 만났었잖아.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진 공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태평거가 날이 갈수록 유명해지자 주육낭과 진 공자도 호기심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하게 서무수 형제들을 보았다.

주점이나 식당, 찻집은 주인장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관리인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게에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여럿 있어, 누가 진짜 주인인지 알아내기 힘들 때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그냥 거기서 숙식하면서 밥벌이만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주육낭이 인정하기 싫은 듯 퉁명스레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그런 식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그날 본 서무수 형제들은 뒷마당에서 여유롭게 걸어 다닐 뿐이었다. 주육낭이 무심코 창문을 통해 보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서무수를 한눈에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건장한 체격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스물 몇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뒷마당에 서서 점원 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대화 같았지만, 두 점원은 그를 몹시 깍듯하게 대했고, 서무수의 행동거지에서도 가게의 주인과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요즈음 정 낭자가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이유가 여기 있었네. 여인 혼자서 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어딜 봐서 혼자야? 그 애한텐 혈육이 있다고, 혈육이. 주육낭이 쥐고 있던 나무젓가락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낭자는 누구를 써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잘 아는 걸세.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것도 정이 없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자네 집안 사람들도 아무렇게나 추측하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게나.”

진 공자가 탁자를 똑똑 두드리며 주의를 주자, 주육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의기소침해졌다.

“천 리 길을 혼자서 돌아왔는데, 조그마한 식당 하나 차리는 건 어려울 일도 아니지.”

진 공자가 다시 웃어 보였다.

“경성에서는 어려운 일이야.”

주육낭이 잠시 침묵하다가 곧 말을 이었다.

“마음씨를 매섭고 독하게 쓰는 사람이 한둘인가. 차리는 건 쉽지만, 지키는 게 어렵단 말일세.”

진 공자가 진지한 주육낭을 보며 미소지었다.

“태평거가 어려워질 때쯤 자네 주씨 집안에서 눈길을 주면 되지. 순조로울 때는 굳이 나서지 말게나.”

이 여인은 허구한 날 골칫거리만 만들어내는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재주를 가지고도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면 고치지 않겠다고 하질 않나. 이제는 태평거를 차려서 태평 두부를 만들질 않나. 또 무슨 골칫거리를 만들어 낼지 누가 알아.

“부디 우리가 평생 태평거 쪽을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

주육낭이 퉁명스레 말했다.

봄이 가고 초여름이 되자, 서서히 여름의 열기가 느껴졌다. 마차에 달린 무거운 방한 휘장도 대나무 발로 바뀌었다. 마차가 달릴 때마다 대나무 발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어와 마차 안이 더욱 시원해졌다.

태평거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문 앞에 즐비한 마차와 말들이 보였다. 걷어 올린 식당 창문의 대나무 발 사이로 식당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보였다. 위층은 별실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창문의 휘장은 열려 있고 어떤 창문의 휘장은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문 앞에 길게 늘어진 줄을 보아서는 위층 역시 만석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가게가 만석이라 다른 곳을 찾아보셔야겠습니다. 그래도 기다리시겠습니까? 반 시진은 되어야 들어가실 수 있는데요.”

마차가 앞을 지나가자, 점원들이 새로 오는 손님들에게 웃는 얼굴로 사과하는 것이 들려왔다.

“여기서 기다리신다면 저희가 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밥을 먹으러 온 손님들 외에, 식당 한편에서도 사람들이 바삐 오가며 움직였다. 마차는 식당의 옆쪽을 통해 뒤쪽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좌우에는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벽돌과 목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큰길 쪽에서 마차 두 대가 뒷마당을 향해 달려오자, 구매를 담당하는 사내들 몇이 걸어 나와 물건을 살폈다.

식당의 앞뒤로 사람이 넘쳐났지만 어수선하지 않았고, 소란스럽지만 시끄럽지는 않았다. 뒷마당은 어느새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쪽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이 썼고, 다른 한쪽은 손재의 두부방이었다.

식당 앞쪽에 비하면, 뒷마당은 조용한 편이었다. 두부의 비법을 지키기 위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방을 몇 개만 더 지으면 새로 들어온 점원들도 여기서 살 수 있겠어. 창고도 더 여유롭게 쓸 수 있고. 그리고 마구간도 한번 손을 봐야 할 텐데. 좁은 곳에 마차와 말이 너무 많아지면 말들이 서로 발길질할 수도 있으니까.”

서무수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반쯤 묶은 머리에 작은 은빗을 꽂고,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긴 소매를 조여 맨 정교랑이 손끝의 활시위를 놓았다. 활시위에서 텅 하며 튕기는 소리가 나더니, 긴 화살 한 발이 날아가 열 몇 보 떨어진 곳에 있는 과녁을 스쳐 땅에 떨어졌다. 주위에는 이미 화살 네다섯 발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두부방 안에서 손재가 밖을 내다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에 숨어 있는 게 제일 안전해.

“오라버니가 알아서 해요.”

정교랑이 손을 내밀자 서무수가 옆에서 화살 하나를 들고 정교랑에게 다가가 건넸다. 그리고 정교랑이 다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교랑의 진지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꽉 조여 맨 소매 사이로 보이는 양손의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정교랑은 과녁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몸을 올곧게 폈다.

다시 한번 텅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날아간 긴 화살이 과녁의 가장자리를 맞혔다.

“와! 아씨, 대단해요!”

시녀가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마음 같아서는 춤이라도 추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교랑은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이고 활을 잡고 있던 손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주인어른의 누이는 단정하게 생겨서는 왜 저런 걸 좋아한담.”

손재의 조수가 두부방 안에서 까치발로 밖을 내다보면서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수사에서 제공하는 두부는 점점 더 유명해졌고, 태평거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서무수 형제들만으로는 끊이지 않고 밀려 들어오는 손님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현재 태평거는 새로운 점원을 구했고, 손재의 두부방에도 조수를 세 명이나 두었다. 두부방에서는 주야를 교대하며 쉬지 않고 두부를 만들어냈다. 두부를 만드는 집은 경성에 여럿 생겼지만, 떫은맛 없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두부를 만들어내는 곳은 오직 태평거뿐이었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조수를 썼지만,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는 항상 손재가 직접 나섰다. 단언컨대, 염라대왕이 와서 두부의 비법을 물어도 손재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비법을 알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손재가 옆에 있던 조수를 노려보며 호통쳤다.

“어디 감히 주인어른의 누이를 훔쳐보고 있어. 얼른 가서 콩이나 갈아.”

사부님과 사형들에게 온갖 착취와 구박을 받았던 나 손재가, 이제는 앉아서 남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사람이 되다니. 비법을 손에 쥐고 있으니 몸도 편하고 마음도 날아갈 듯 가볍네. 게다가 돈까지 이리 많이 벌 수 있다니. 며칠만 더 있으면 내 쓰러져가는 초가집도 새집으로 바꿀 수 있겠어. 집이 다 지어지기만 하면, 혼담을 넣으러 오는 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오겠지…….

손재가 혼자 히죽거렸다. 조수는 혀를 내두르고 서둘러 일하러 갔다. 수시로 이렇게 히죽거리는 사부가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손재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어여쁜 시녀가 초록색 손수건으로 윗전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시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얇은 봄옷 소매가 살짝 흘러내려 하얗고 가녀린 손목이 드러났다. 손재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창가로 바짝 다가섰다.

주인어른의 누이는 감히 넘볼 수 없지만, 시녀는 몇 번 봐도 괜찮잖아.

정교랑이 활을 서무수에게 건네자, 서무수가 화살을 능숙하게 집어 들었다. 서무수는 바른 자세로 서서 여유 있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활시위를 놓는 진동 소리가 나더니, 긴 화살은 조금 전 정교랑의 화살과 달리 매섭고 정확하게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군자는 육예에 능하죠. 오라버니의 궁술은 글을 배울 때 다진 실력이군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는 멋쩍게 웃었다.

“철없던 어릴 땐 군자가 되고 싶어서 뭐든 배우려고 했지. 하지만 천성이 게을러 뭐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어.”

서무수가 잠깐 생각하더니 정교랑에게 말했다.

“누이는 기본기가 좋아 보이니 힘을 조금 더 길러. 더 연습하면 분명 좋은 궁술을 익힐 수 있을 거야.”

남아로 태어난다면, 책을 읽고 말을 타며 활을 쏘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이것들을 잘하는 게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인들은 보통 칠현금을 타고 바둑을 두며,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하는 편이지, 이렇게 기마와 활쏘기를 배운 이들은 몇 없었다.

누이가 기본기를 어디서 배웠지?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과녁을 쳐다보았다. 햇빛이 과녁을 비추자 빨간 원심 안에 꽂힌 화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하지만 그저 눈이 부실 뿐이었다. 처음 경성으로 와 차정사의 담벼락에 글씨를 남길 때와 눈을 맞았을 때 외에, 오랜 기간 옛 기억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몸도 좋아졌고 말하는 것도 많이 호전됐지만, 마음은 여전히 못 찾았다.

서무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정교랑이 생각을 멈추고 다시 서무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 다 되어가니 새 옷을 입을 때가 됐어.”

서무수가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시녀에게 건넸다.

“우리 옷을 좀 부탁할게.”

서무수는 정교랑에게 처음 새 옷을 받았을 때처럼 황송해하지 않고, 심지어는 먼저 입을 열어 새 옷을 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장자와 같은 모습으로 편히 돈을 건넸다.

“이 돈은 가져가서 살림에 보태.”

서무수가 일부러 오라버니 노릇을 하는 걸 보고 시녀가 쿡 웃었다.

이게 바로 참된 오라버니의 모습이지. 아씨께서 화살을 보고 넋을 놓으니 이걸로 위로하시는 거겠지?

“네, 도련님. 감사합니다.”

시녀가 예를 표하고 돈을 받았다. 시녀는 옷감과 모양을 서무수에게 설명하면서 원하는 바를 소상히 물었다.

“오라버니들이 바쁘니, 그만 가 볼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서무수가 정교랑과 시녀를 문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자주 오지 않아도 돼. 긴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내가 저택으로 가마. 시킬 일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날 불러도 좋고.”

서무수가 걱정되는 투로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안간 서무수가 인상을 찌푸리고 한 곳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한 여인이 허둥대며 식당 뒷문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 뒤로 사내 하나와 여인 하나가 따라가고 있었다.

“아씨, 기억나세요? 저 사람, 이대작의 부인이에요.”

시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기 송씨댁, 다시 좀 생각해 봐.”

뒤따르던 여인이 송씨의 소매를 붙잡았다.

“일단 내 얘기부터 좀 듣고…….”

이대작의 아내는 송씨였다. 처녀 시절에는 송 낭자라고 불렸고, 시집을 간 후로는 송씨댁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 송씨 할멈이 될 터였다.

겁을 먹은 얼굴의 송씨댁은 잡힌 손을 얼른 빼냈다.

“대, 댁들이랑 할 얘기 없어요. 어, 어서 가세요.”

“무슨 일 있소?”

서무수가 성큼성큼 걸어와 물었다. 송씨댁은 서무수를 보자 더욱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주인어른. 남, 남편한테 뭐 좀 갖다 주는 길이에요.”

서무수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송씨댁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서무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따르던 사내와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씨댁이 난처해 보여 도와주려고 나선 건데 송씨댁은 도리어 더욱 당황한 기색이었다. 오히려 놀라야 할 두 사람은 전혀 겁먹지 않고 태연하게 서서 거만한 표정으로 서무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은 채 서로 눈빛만 주고받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서무수는 두 사람의 눈에서 원망과 독기를 봤다. 난 저 둘을 본 적도 없는데, 왜들 저렇게 원망과 독기가 가득한 눈빛이지?

“셋째 도련님.”

시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서무수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볼게요.”

시녀는 서무수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 휘장을 내렸다. 마차는 천천히 태평거를 떠났다.

이대작이 언짢은 표정으로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한창 바쁠 땐데 여긴 왜 왔소?”

송씨댁은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두씨네 사람들이 또 찾아왔어요.”

송씨댁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는 것을 보고 이대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 그 사람들한테 단호하게 말하면 그만이지.”

“딱 잘라서 말한 게 벌써 몇 번째인데요.”

송씨댁이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폈다. 부엌으로 이어지는 뒤쪽 통로로 점원 여럿이 분주하게 오갔다. 몇몇은 이대작 부부가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송씨댁은 사람이 많이 오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이대작을 더욱 가까이로 잡아당겼다.

“당신 지금 벌벌 떨면서 뭐하는 거야.”

이대작은 성가신 눈치였다.

“이번엔 우리 땅을 되돌려주러 왔다니까요.”

이대작이 병상에 앓아누웠을 때, 돈이 부족해 가지고 있던 기름진 땅 두 필을 팔았었다. 문서 정리까지 끝내 되사고 싶어도 되살 수 없게 된 땅이었다. 놀란 이대작이 부인에게 물었다.

“뭐, 그 땅을 다시 받겠다고?”

송씨댁은 이대작을 보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한 공자 같은 은공께서도 나서서 도와주시고, 지금의 주인어른께도 태산과 같은 은혜를 입었는데, 어떻게 신의를 저버리고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이대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우리도 돈이 모일 테니, 그때 더 좋은 땅을 많이 삽시다.”

송씨댁이 다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일을 주인어른께 귀띔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대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집안일인데, 괜히 귀찮게 말씀드려서 뭐에 쓰려고.”

“요즘 두씨네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잖아요. 사람들이 괜히 헛소문을 퍼트려서, 주인어른께서 오해하시는 일이 생기라도 하면…….”

“음, 지금 주인어른께 말씀드리는 것도 또 다른 오해를 사지 않겠어?”

처음 온 날, 이대작은 일을 시작한 지 반년 뒤부터 품삯을 받기로 약속했다. 그 때문에 태평거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이대작은 땡전 한 푼 받지 않은 채 일하고 있었다. 따로 품삯을 받지 않아도 서무수 형제의 보살핌 덕에 이대작 일가가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고, 선다회 일로 조금이나마 명성까지 얻게 됐다. 지금 시점에 주인어른한테 두씨네 사람들이 자신을 원한다는 말을 하는 건, 거드름을 피우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

송씨댁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대작이 덧붙였다.

“그만 가시오. 두씨네 사람들은 무시하면 돼. 우리가 절대로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사부님.”

부엌 쪽에서 어린 점원이 고개를 내밀고 이대작에게 외쳤다.

“생선 두 마리를 구우셔야 합니다.”

부엌에 새로 들어온 숙수들은 재료 손질이나 잡일만 하고, 정식 요리는 모두 이대작이 직접 조리했다. 이대작이 금방 가겠다고 대꾸했다.

“당신도 그만 가 보시오.”

부부는 각자 일을 보러 갔다.

서무수와 범강림이 이층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갖다 줄 물건이 있다고 했는데, 꺼낸 건 없군.”

서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들한테 말 못 할 급한 집안 사정일지도 모르지.”

서무수가 범강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요즘 장사도 잘되는데, 품삯을 좀 미리 주는 건 어떻겠나?”

범강림이 물었다.

“누이가 약속과 규칙을 지키라고 했소. 당초 문서로 박아 놓은 내용이니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요.”

장사가 안 될 때도 누이의 말대로 일가를 잘 보살펴 주었으니, 잘 될 때도 규칙을 따르는 게 옳았다.

범강림이 알았다고 하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창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비켜, 비켜.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먹을 것이지, 무슨 글씨를 그렇게들 쳐다봐!”

무례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내 몇 명이 거들먹거리면서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점원들의 인사도 무시하고 곧장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다.

앉아서 차를 마시고 글씨를 감상하며 기다리던 손님들이 화들짝 놀랐다. 한눈에 보아도 무뢰한처럼 생긴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손님들은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섰다.

“손님, 안쪽에는 벌써 자리가 다 차서요.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점원 하나가 미소를 짜내며 거친 사내들의 앞을 막아섰다. 사내 중 하나가 한 손으로 점원을 밀치고는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 찼다고? 내 눈으로 봐야겠다.”

뒤따르던 사내들도 가게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식당 안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입구 쪽으로 몰렸다. 미간을 찌푸려 언짢은 티를 내는 손님도 있었고, 지레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의 손님도 있었다.

식당이나 주점을 운영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모르는 이에게 협박을 받거나, 싸움을 벌이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그래도 태평거는 경성 밖에 있으니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술맛이 좋으면 골목 끝자리에 있어도 찾아오는 이가 있다던 옛말이 틀리지 않는군.

이런 일이 생기면, 가만히 앉아 있던 손님에게도 불똥이 튀기 마련이다.

“다 먹었나? 시간이 몇 시인데 여태 먹고 있는 거야?”

앞장선 사내가 입구 쪽의 손님들을 향해 외치자, 근처에 앉아 있던 복스럽게 생긴 손님들 몇이 서둘러 일어났다.

“다 먹었소, 다 먹었어.”

사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님들은 입구 밖으로 몸을 내뺐다.

“저기 손님, 아직 계산 안 하셨는데요!”

점원 하나가 손님을 쫓아가려 입구로 뛰어가자, 사내들은 문을 막아서고 점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빨리 자리나 치워. 여기 귀한 몸이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이 쭈뼛거리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손님들도 상황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말과 마차를 빨리 내어 달라 아우성쳤다.

오 관리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손님들,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럼 여기 변 보러 왔게?”

사내가 거칠게 대답하자, 손님 몇은 그의 말에 역겨워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흘겼다. 거친 사내들은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요리 좀 내와 봐.”

“뭐가 있나? 뭐야 이게? 이걸 사람 먹으라고 내오는 거야?”

오 관리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이렇게 하다가는 오늘 장사를 다 말아먹겠네. 모양새를 보니 오늘 하루만 올 건 아닌 거 같은데, 앞으로 장사하기는 글렀군.

“손님들, 다 고향 사람이고 아는 처지인데, 할 말 있으면 좋게 이야기합시다.”

사내 중 한 명이 손을 치켜들더니 한 대 칠 기세로 일어섰다.

“썩을 노친네가 입만 살아서는. 누가 고향 사람이야? 얻다 대고 친한 척이냐고!”

사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사내가 정말 주먹을 휘두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힘없는 노인이 저 우락부락한 사내의 힘을 어찌 당해내겠는가.

오 관리인은 피하기엔 늦었다 판단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감쌌다. 몸은 다쳐도 치료하면 그만이지만, 이 나이에 머리를 다치면 끝장이다.

손바닥으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헉 소리를 냈다. 이어 육중한 무언가가 땅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사내의 외마디 비명이 울리고 탁자가 밀려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오 관리인은 예상했던 통증이 없자,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머리를 감쌌던 손을 내려놓았다. 좀 전까지 눈앞에 있던 거구의 사내가 탁자 하나에 깔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음식과 접시들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뜨거운 탕과 음식들이 사내의 몸에 쏟아져 있었다.

식당 안에 욕설이 울려 퍼졌다. 손님들은 더욱 불안한 얼굴로 식당 구석을 비집고 들어가 숨어버렸다. 무뢰배들이 입구를 막아 당장 도망칠 수 없는 게 한이었다.

“주인어른.”

오 관리인이 어느새 옆에 와 있는 서무수를 쳐다봤다. 서무수는 주먹을 거두고 몸을 풀면서 굳은 얼굴로 앞에 선 사내들을 노려봤다.

“여기까지 왕림하여 소란을 피우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시오?”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내는 코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항상 먼저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방에게 앞으로 어쩔 셈이냐 물어보는 게 사내들의 일이었는데, 오늘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쓰러져있던 사내가 목소리를 쥐어짜며 외쳤다.

“어서 쳐!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저 촌뜨기를 때려눕히라고!”

씩씩거리며 서 있던 사내 셋이 한꺼번에 서무수에게 달려들었다.

식당 구석에 숨어 있던 손님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감쌌다. 귓가에는 둔탁한 주먹질 소리와 몸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처참한 비명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식당은 곧 조용해졌다.

하긴, 세 명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 건 금방이겠지. 싸움 소리가 멈추자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뜻밖에도 눈에 들어온 건 멀쩡하게 서 있는 한 사내와 바닥을 구르며 연신 신음을 내는 네 사내였다.

코피를 흘리던 사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력이 대단한 놈이야! 그리고 독해! 우리도 싸움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데, 저놈이 저렇게 강할 줄이야. 간단해 보이는 초식이지만 아주 사납고 악독해. 주먹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너 죽고 나 죽기로 달려드네.

고작 몸싸움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달려들 일이야?

이때 소식을 들은 건장한 사내 서너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더니 곧바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서무수가 손을 들어 사내들을 제지했다.

“내쫓아 버려.”

짤막한 우당탕 소리가 지나간 후, 흉악하기 짝이 없던 사내들이 태평거 밖으로 내던져졌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손님들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혀를 찼다.

우두머리인 사내가 피를 토하며 문 앞에 서 있는 다섯 사내를 쳐다보았다. 계산을 잘못했구나. 이 코딱지만 한 식당에 이렇게 많은 무림고수가 숨어 있었다니!

“우리 아직 안 끝났어! 당신들,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대장부라면 대책 없이 덤비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법. 사내는 서무수를 향해 외치고는 다른 사내들과 함께 우르르 말에 올라타 급하게 도망쳤다.

무뢰배들이 없어지자 태평거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즐겁고 여유롭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식당 안과 밖의 손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남아서 밥을 먹고 간다 해도, 이대로 그냥 간다 해도, 이미 흥이 깨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손님 여러분, 별일 아닙니다.”

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님들을 향해 연신 공수의 예를 표했다.

“식당을 연 지가 꽤 됐는데, 소란을 피우는 이들이 없어 사실 가게가 잘 안 되는 줄 알고 괜히 불안했습니다. 근데 오늘 일을 보니 걱정거리가 싹 사라지는군요.”

사람들이 관리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장사 잘되는 식당 중에 협박 한 번 안 받아본 곳이 있나? 큰 식당은 관부 관리들이 뒤를 봐주니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지만, 조그마한 식당은 거리의 무뢰배들에게 관리비를 주면서 지내는 게 일상이지. 아무런 소란이 없는 가게들도 있다만, 거긴 뜯어낼 돈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시원치 않으니 안 건드리는 것 아니겠어.

“아까 그 몇 분께서 가게를 치켜세우러 오셨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 관리인이 웃으면서 문밖을 향해서도 공수의 예를 올렸다. 식당 안에는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고 어색한 분위기는 일순간 사그라졌다.

“오늘 많이 놀라셨지요? 놀란 마음 진정시키시라고, 오늘 드시는 술과 요리들은 모두 무료로 제공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밖에 서 있던 사람들도 웃으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점원이 일사불란하게 바닥을 쓸고 탁자를 닦아 제자리에 두었다.

“주인장, 저런 무뢰배들은 전부 소인배요. 군자가 원수를 갚는 건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지만, 저런 무뢰배들은 당장 복수하겠다고 뻔질나게 찾아올 것 같구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소.”

손님 중 하나가 걱정되는 말투로 말하자 오 관리인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트집이나 잡는 부랑배인걸요. 관아는 뭐 괜히 있습니까? 감히 또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간 국법대로 처벌해야죠.”

관리인이 무서울 것 없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정말 관아에서 무뢰배들을 잡아간다면, 거리에 무뢰배가 왜 돌아다니겠나. 사람들은 관리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수사의 선택을 받아 두부를 단독으로 제공하고, 편액에는 이름 모를 고수가 남긴 글씨까지 있는데, 여기가 어디 보통 식당과 같을까.

“자, 어서들 들어오시죠.”

오 관리인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금세 걱정을 떨쳐내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무뢰한들이 들이닥치기 전만 못했지만, 그래도 영업은 꽤 순조로웠다.

손님들과 점원들을 안심시킨 후, 뒷마당으로 들어선 오 관리인과 서무수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는 그들의 눈빛에 서린 근심은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신선거의 관리인이 종종걸음으로 두칠의 저택에 들어갔다. 사내 한 명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태평거까지 송씨댁을 쫓아갔던 사내였다.

두칠의 저택은 본디 두씨 집성촌에 있었는데, 경성으로 신선거를 옮긴 후로 두칠은 경성 부근에 큰 저택을 마련해 첩실 두 명과 함께 거주했다.

두칠은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나려던 차였다. 그때 마침 관리인과 그를 뒤따르던 사내가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됐어?”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내젓고 두칠에게 땅문서를 건넸다.

“퉤, 제 분수도 모르는 것이 감히.”

두칠이 욕을 하고 사내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물러가라고 했다. 사내가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시녀도 차를 올리고 물러나자, 대청에는 두칠과 관리인만 남았다.

“그놈이 워낙 고집불통이지 않습니까. 전에는 노태야만 보고 쭉 따랐지만, 지금은 그 집 주인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더군요.”

두칠이 다시 바닥에 침을 뱉었다.

“뻔뻔한 놈.”

문밖에서 사환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회랑 아래에 꿇어앉은 사환은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도련님, 주오가 그러는데 왕대 일행이 그 집에서 한껏 두들겨 맞고 내쫓겼답니다.”

두칠과 관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대 말로는 태평거에 싸움꾼들이 숨어 있어서, 자기들은 적수가 안 된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두칠이 자기 성에 못 이겨 눈앞에 있던 탁자를 뒤엎어 버렸다. 사환은 그런 두칠에 놀라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리고 뭐!”

두칠이 눈을 크게 뜨고 호통쳤다.

“그리고 일을 사주한 사람이 이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서 자기들이 크게 다친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자기네들 약값을 대주지 않으면, 다 떠벌릴 거라고…….”

사환은 고개를 숙인 채 숨도 쉬지 않고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사환의 말이 끝나자 예상대로 두칠은 엎어졌던 탁자를 주워 마당으로 세게 내던졌다.

“썩 꺼져!”

두칠이 욕을 하자 사환은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관리인에게 붙잡혔다.

“주인어른, 그 무뢰배들 입단속을 단단히 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겁니다.”

관리인이 두칠을 달래자, 두칠이 씩씩거리며 대청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싸움꾼을 숨겨 둬? 고작 타지인 몇 명이고, 기댈 친족들도 없어 보이는데 그 자식들을 뭐하러 겁내?”

두칠이 손으로 사환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돈을 두둑하게 챙겨가서 주오한테 전해라. 그 무뢰배들이 허풍치고 다닐 땐 언제고, 체면을 구기니까 이제 와서 싸움꾼이 있네 없네 핑계를 대느냐고! 딱 보니까 죄다 겁쟁이들이로구나!”

관리인이 잠시 주춤했다.

“일을 크게 벌이시려고요? 아직 태평거의 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습니까. 다른 건 모르지만 문 앞에 내건 편액의 글씨만 해도 아주 대단한 사람이 쓴 거라던데요.”

두칠이 냉소를 지었다.

“붓질이나 좀 하는 문인이겠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설령 태평거에 뒷배가 있다 한들, 무뢰배들이 심심해서 벌인 일 따위가 무슨 큰일이 되겠어?”

관리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일이 아니라면, 왜 굳이 일을 벌이는 거지?

“일이 커져서 태평거 사람들도 관아에 끌려가면, 놈들도 따끔한 교훈을 얻겠지. 놈들한테 뒤에 연줄이 있거나 놈들의 목숨이 질기다면 고생 좀 하는 거로 끝나는 거고. 이참에 그 연줄이 누군지 알아내면 좋잖아. 만에 하나 연줄이 없다면…….”

두칠이 음흉하게 웃어 보이고 말을 이어갔다.

“나두채(癩頭蔡) 손에 넘겨버려야지.”

나두채는 경성에서 악랄하기로 유명한 감옥 관리였다. 그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겠다고 죄수들이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사람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게끔 고문하여 죽이는 방법을 백 가지도 넘게 알고 있다고 했다.

기회를 봐서 눈에 거슬리는 그 타지 놈들을 감옥으로 들여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거기서 살아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두칠의 손에 달린 일이 될 터였다. 이 정도는 뒤를 봐주는 의조부의 도움 없이도 두칠 혼자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우리 두씨 가문이 일궈낸 자리에서 돈 버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두칠이 콧방귀를 뀌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의 태평거도 도로 내 손에 들어오겠네. 두칠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콧김이 뜨거워졌다.

주육낭은 진십삼과 보수사에서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막 대문을 들어서던 주육낭은 바로 주 부인에게 불려갔다.

대청 안에서는 먼 길을 돌아온 듯한 행색의 여종 두 명과 주 부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는 길에 노야를 뵈었습니다. 노야께서 부인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강주로 데려간 사람들이었나? 왜 벌써 돌아왔지? 주육낭도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다.

주 부인은 주육낭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주 노야의 안부를 물었다. 부인은 주 노야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랑 아씨의 이야기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 왔습니다.”

이제 막 입을 열려던 주육낭은 그 말에 멈칫했다. 정교랑의 일?

“뭐라더냐?”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정교랑이 집을 나간 후로는 집안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고 일상의 평온을 되찾은 터라, 주 부인도 전처럼 정교랑의 이야기만 나오면 긴장하진 않았다.

“부인께서 말씀하셨던 대로입니다. 그 집에서도 집안에 난리가 나서 내쫓았다지 뭡니까.”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하자 주 부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주 부인은 손을 뻗으며 더 말하려는 여종을 제지했다.

“그 아이 얘기는 더 궁금하지도 않구나. 모처럼 마음이 좀 여유로운데 복잡한 생각은 더 하고 싶지도 않아.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서 가서 쉬게나.”

여종이 예를 올리고 서둘러 물러났다. 주육낭이 여종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 부인에게 물었다.

“어머니, 저를 찾으셨다고요.”

“칠랑이 그러던데, 태평거가 교교 거라고 했다면서?”

“전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주육낭이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누이가 잘못 들은 거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머뭇거리던 주육낭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애를 태평거에 데려가 두부 맛이나 보여 줄까 하고…….”

아들이 남사스러운 꼴로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주 부인은 또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어디 그러기만 해봐라!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작살내 버릴 것이야!”

주육낭은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됐다, 가 봐라.”

주 부인은 성가시다는 듯 주육낭에게 손을 내저었다. 태평거가 누구 건지 물어볼 기분도 아니었다.

주 부인의 거처에서 물러난 주육낭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주육낭의 대청에서는 진십삼이 시녀 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진십삼은 주육낭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도 바둑 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종 둘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자, 그제야 진 공자도 주육낭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말해라.”

주육낭이 말하자 여종이 입을 열었다.

“그럼 소인, 어디서부터 말씀드리면 될까요. 교랑 아씨께서 오셨던 첫날부터요?”

진십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여종 둘을 쳐다봤다.

“그날 초저녁 즈음에 교랑 아씨께서 북정의 다리를 건너셨지요.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던 이들이 아씨를 봤다는데, 걸음걸이가 아주 느리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대요.”

주육낭은 여종이 묘사하는 대로 당시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늘색이 짙어질 무렵에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 정씨 가문의 대문 앞에 멈춰 서고, 고개를 들어 편액에 쓰인 글자를 쳐다봤다. 드디어 집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 정씨 집안의 이노야 내외께서 대노야의 거처에서부터 싸움을 벌이셨어요. 입단속을 하긴 했지만 들은 사람이 여럿이었죠. 소인이 대부인의 시중을 드는 어멈한테 다섯 푼을 주고 들은 정보예요.”

진십삼과 바둑을 두고 있던 시녀가 이야기를 듣다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집은 정말 가난한가 보네요. 윗전이 가난하니 아랫것도 가난해서 겨우 돈 다섯 푼에 다 말해 주다니요.”

여종도 따라서 웃었다.

“그렇다고 돈을 밝히는 건 아니었고, 일부러 밖에 말을 흘리는 거였어요. 정씨 가문 동서지간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바둑을 두던 시녀가 아예 몸을 돌리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요? 북정은 사이가 좋아서 분가도 안 했잖아요. 집안을 맡은 동서끼리 사이가 안 좋다니요?”

“이것도 말하자면 교랑 아씨와 관련됐죠.”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슨 헛소리야. 바보가 어떻게 웃어른의 동서지간까지 간섭할 수 있어. 정씨네 사람들도 참 쓸모없군. 그런 헛소리나 만들어내고.”

주육낭이 언짢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

“교랑 아씨께서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집안에서 좋은 것을 먹이면서 몸보신을 시켰다고 해요. 그때부터 정씨네 자식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오면서…….”

여종 둘은 방 안에 바른 자세로 앉아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진십삼도 서서히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사실 정교랑이 정씨 저택에 있던 시간은 길지 않으니, 여종들이 이야기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 후에는 주육낭이 직접 정씨 저택으로 찾아갔던 시점이라 여종들의 이야기는 금세 끝났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육낭과 진십삼은 이야기를 들으며 넋이 나간 듯했다. 여종 둘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자신들이 말한 것들은 고작해야 시녀와 몸종이 정교랑에게 뭘 해먹인 자잘한 이야기밖에 없는데, 공자들이 이렇게 깊이 생각에 빠질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니. 역시 육공자께서 정교랑을 마음에 두고 있다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육공자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됐다, 그만 가 봐라.”

여종이 서둘러 물러나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찬합 하나를 주육낭 앞으로 내밀었다.

“강주에서 유명한 간식입니다. 특별히 사 온 것이니 공자님도 한번 맛보셔요.”

주육낭이 손을 뻗어 건네받았다. 작은 상자 위에는 ‘현묘관’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현묘관?”

주육낭이 작은 소리로 읊조리자 여종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네, 맞아요. 강주에서 제일 영험하고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관이에요. 간식도 어쩜 그렇게 잘 만들어내는지…….”

여종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십삼이 불쑥 끼어들었다.

“정 낭자가 묵었다던 그 현묘관?”

“아, 교랑 아씨께서 계셨던 곳은 소현묘관이에요. 거기가 정씨 가문의 가산이었는데 벼락을 맞아 다 타 버렸죠. 그래서 산 아래에 있던 대현묘관이 그곳까지 도맡아 관리하고 있어요. 소현묘관이 없어졌으니 대현묘관과 합쳐서 지금 그냥 현묘관이라고만 부르고요.”

잠시 침묵하던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그만 가 봐라.”

주육낭의 말에 여종 둘과 시녀까지 다 물러났다. 주육낭이 눈앞의 작은 찬합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진십삼도 눈길을 줬다.

“현묘, 태평이라.”

“자네 말은 이것도 정교랑이 지은 이름이라고?”

주육낭이 진십삼에게 불쑥 물었다.

“아마도? 나도 모르지.”

진십삼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자네 집 누이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주육낭이 그를 쳐다보자 진십삼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보였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어도 둘은 돼. 정 낭자 때문에 팔려간 두 여종과 몸종의 가족 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있다면, 그 수는 더 많아지겠지.”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 걔가 목숨이니 뭐니 할 사람으로 보여? 벼락 맞았다잖아! 천재지변! 잘 지내다 말고 남의 목숨을 빼앗아 뭐하게!”

진십삼은 말없이 주육낭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내가 요즘 터무니없는 생각을 점점 많이 해.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봐.”

진십삼이 찬합을 끌어오며 말했다.

“어디 현묘한 맛이나 좀 볼까.”

달빛이 드리워질 때쯤, 서무수, 범강림과 서봉추는 옥대교 저택 안에 앉아 있었다.

“무뢰배들이 어딜 감히!”

이야기를 들은 시녀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씨, 제가 지금 당장 가서 노태야께 말씀 올릴게요.”

그런 시녀의 모습을 보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무뢰배 따위로 장 노태야를 귀찮게 해선 안 되지.”

시녀는 이전에도 같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주육낭이 강제로 정교랑의 마차를 빼돌려 주씨 가문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다. 그때도 시녀는 장 노태야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했지만, 정교랑이 거절했다.

“필요 없어. 아직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잖아.”

정교랑은 또 이렇게 말했었다.

“난 희망을, 남에게 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뿐이야.”

“더구나, 지금은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 있고.”

설마, 지금의 모든 것도 아씨의 뜻대로인 건가?

서무수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별일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그 인간들을 봐서는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

범강림도 서무수의 말에 동의했다.

“잡배들이 구걸하러 온 거면 모르겠는데, 배후에 있는 자가 작심하고 꾸민 짓이라면 곤란하지.”

옆에 있던 서봉추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말이 착하면 탈것이 되고, 사람이 착하면 괴롭힘을 당하오. 아까 무뢰배들이 소란 피웠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때려죽였어야지! 내가 거기 있었으면 벌써 이 주먹으로 싹 다 죽여 버렸을 거요. 지금도 늦지 않았소. 우리가 그 몹쓸 놈들을 찾아내 혼쭐을 내주자고.”

서봉추는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다. 무뢰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다른 형제 한 명과 함께 장을 보러 갔었다. 태평거로 돌아온 뒤에야 이야기를 들은 서봉추는 제 손으로 그 몹쓸 것들을 패 죽이지 못했다며 분한 듯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헛소리하지 마라.”

서무수가 서봉추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이렇게 사리 분별을 못 해? 여기는 경성이다. 사람을 죽이면 관아로 끌려간다고. 가게를 망치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났어?”

서무수가 이번에 굳이 서봉추를 데려온 것도 그래서였다. 혹시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뢰배들이 찾아왔다가 서봉추와 마주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맞아요, 관아에 끌려가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치자 서봉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씩씩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일곱째 오라버니가 한 말도 맞아요.”

서봉추가 고개를 번쩍 들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며 목청을 높였다.

“그렇지, 누이? 내가 한 말이 맞지? 그런 몹쓸 것들은 때려죽여야 해.”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때려죽여야죠.”

서봉추가 흥분해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풀이 죽은 모습을 했다.

“누이, 위로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어디 사람을 마음처럼 때려죽일 수 있겠나.”

정교랑이 그런 서봉추를 보며 웃었다.

“오라버니, 그럴 용기는 없나 봐요?”

사내대장부의 자존심이 걸린 질문에 서봉추가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용기가 없긴 누가! 나 서봉추가 죽인 나쁜 놈들만 해도 여덟은 되는데, 고작 무뢰배 따위가 뭐라고!”

“그럼 죽여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서봉추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이, 진담이야?”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서봉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무수와 범강림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누이가 서봉추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나? 어쩌려고?

“일을 관아로 끌고 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죠.”

관아로 이 일을 끌고 가게 된다면, 다들 관부로 잡혀들어갈 것이다. 관부가 어떤 곳이고, 감옥은 또 어떤 곳인가? 그곳이라면 관리들 마음대로 일을 키울 수도 덮을 수도 있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허비하는 곳인데, 서무수 형제들은 그럴 시간도, 돈도 없었다.

하지만 일을 관아로 끌고 가지 않기 위해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이 좀 앞뒤가 안 맞는데?

서무수는 자신의 머리가 좀 모자란다고 생각했고, 범강림과 서봉추는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럼, 누이의 말은 아예 일을 키우자는 거야?”

서무수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살인은 동네 패싸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다.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이잖아.

서무수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앞의 열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여인, 아니 소녀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단정한 자태, 조곤조곤한 투로 말하고 있는 정교랑의 행동과 표정에서는 한 치의 무례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입으로는 살인을 말하고 있다. 날씨가 어떤지 묻는 게 아니라! 살인!

서무수는 순간 자신이 처음으로 이 소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병상에서 깨어나 고맙다고 인사했던 때가 아니라, 다 죽어가던 어두운 밤이었다. 남들 눈에는 의식을 잃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이고 잘 들렸다. 어쩌면 죽기 직전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서무수는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칠흑처럼 새카만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통증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게 운명일 테지.

단지 병일 뿐,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닌데, 못 고치긴요.

죽어가는 그의 앞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던 여인의 쉰 목소리가 일순간 새카만 밤하늘을 가르는 듯했다.

서무수가 고개를 들자, 어두운 밤 등불에 비친 맑고 부드러운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한번 이야기해 봐, 누이.”

서무수는 회상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튿날 오후. 옥대교 저택의 마당은 조용했다. 정교랑은 여전히 낮에 잠시 눈을 붙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회랑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반근에게도 졸음이 몰려왔다.

반근이 하품을 하며 옆에 앉아 있는 시녀를 쳐다보았다. 시녀는 손에 바늘과 실을 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반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녀를 부르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똑똑 소리에 시녀는 화들짝 놀랐다.

“누구세요?”

시녀는 손에 있던 바늘과 실을 바닥에 떨구고, 문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야, 반근.”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당 한쪽에서 뛰어나온 금가아는 이제 헷갈려 하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반근이 세 명 있고, 둘은 이 저택에, 하나는 다른 집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아씨께서는 주무셔?”

몸종이 회랑 아래에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찬합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간식 몇 개를 만들어서, 아씨께 가져다드리려고.”

이런 건 여기서도 만들 수 있는데. 반근이 웃으며 찬합을 건네받았다.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며칠 있다가 노태야를 따라서 먼 길을 나서거든. 그래서 핑곗김에 아씨 뵈러 왔어.”

몸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시녀가 갑자기 퍼뜩 고개를 들고 몸종에게 물었다.

“노태야께서 떠나신다고?”

시녀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어디로? 며칠 뒤에 바로 떠나? 며칠 동안 가는 거야?”

몸종과 반근이 시녀를 쳐다봤다.

“응. 근데 언니, 무슨 일 있어?”

시녀가 침착한 척 다시 자세를 고쳐앉았다.

“아니야.”

시녀가 무언가를 숨기는 듯 대답하자 몸종과 반근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씨께선 아직 주무시는 것 같은데, 우리끼리 먼저 간식 좀 먹을까?”

몸종이 화제를 돌리려고 웃으면서 찬합을 열었다. 그새 반근이 차를 끓여와, 반근 세 명이 나란히 회랑 아래에 앉았다. 금가아도 함께 불러 넷이서 오붓하게 간식을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직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듯한 시녀에게 몸종이 대놓고 물었다.

장 노태야께서 경성을 잠시 떠나있는 사이에, 아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어 저러는 건가? 노태야 외에는 기댈 곳이 없어서?

시녀가 주춤하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너희,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있어?”

반근과 몸종이 시녀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반근이 고개를 가로젓고 이어 몸종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멈칫했다. 얼굴에 공포감이 서렸다.

사람을 죽인다니……. 마른하늘에 갑자기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몸종은 순간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하늘에서 벼락이 한 번 내리치자, 몸종의 눈앞에 있던 두 사람이 불덩이가 되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몸종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악 내지르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갑자기 내지른 비명에 반근과 시녀까지 덩달아 비명을 지르면서 회랑 아래서 꽁꽁 부둥켜안았다.

“무슨 일이야?”

천둥소리가 지나가고, 정교랑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반근 셋이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자, 머리도 묶지 않은 채 겉옷만 대충 걸친 차림의 정교랑이 태연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천둥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마당도 다시 조용해져서 대나무 통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놀라서 바닥에 자빠져있던 금가아가 몸을 일으키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간식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천둥소리에 그렇게들 놀라!”

소년은 비명 소리에 놀라 자빠진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서 더욱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먹구름이 몰려와 초저녁쯤이면 비가 올 것 같았다.

“밤은 되어야 비가 올 거야.”

정교랑이 돌아가려는 몸종에게 말했다.

“아씨, 놀라셨죠. 죄송해요.”

몸종이 자책하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시녀도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반근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 천둥 번개 같은 건 무서운 것도 아니지.”

반근이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괜찮아, 이미 깨어 있었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인사를 올렸다.

“제가 배웅하러 갔다 올게요.”

시녀가 먼저 말하자 반근은 멈칫했다. 문 앞까지 배웅하는 일은 원래 내가 하는 일인데. 반근은 층계를 내려가는 시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씨, 제가 서재를 정리해 두었어요. 글씨 쓰러 가시겠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몸종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언니, 그만 나와. 어서 들어가 봐.”

몸종이 웃으면서 말하자, 시녀가 몸종의 손을 잡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며칠씩이나 경성을 비우는 거야?”

또 같은 질문이네. 몸종은 의아한 듯 시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니,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시녀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라니까.”

시녀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노태야께서 경성에 계시면 아씨도 기댈 곳이 있으니 좋잖아. 가업은 점점 더 커져 가는데, 아씨의 친족들은 썩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못 되니까.”

시녀의 말에 몸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친족이 못 미더우면 또 어때? 도관에서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한들 또 어떻고?

“겁내지 마.”

몸종이 시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씨의 말만 잘 들으면 돼. 그럼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어.”

시녀가 몸종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언니,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있지?”

몸종이 어린아이도 아닌데, 천둥소리 따위에 그리 새파랗게 질릴 리가. 반근의 말처럼,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죄를 지은 사람을 하늘이 벌하는 건 본 적 있어.”

몸종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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