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쓰다-
가랑비가 마당을 적셨다. 빗방울은 정원 한쪽에 만들어진 석가산을 따라 흘러 물줄기가 되었다. 물줄기는 한쪽이 비스듬하게 잘려나간 대나무 통으로 흘러내렸다. 통 안에 빗물이 가득 차면 대나무 통은 무게에 못 이겨 빗물을 한꺼번에 쏟아냈고, 그때마다 대나무 통과 그 아래 돌덩이가 부딪혀 맑은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가랑비를 뚫고 건물 안으로 전해졌다. 회랑 아래에 있던 반근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확인하고는 입을 가리고 혼자 웃었다.
정교랑이 들어오고 나서부터야 이 저택이 정말 집 같아졌다. 다들 집 안을 더욱 깨끗이 하고 정성 들여 장식했다.
마당에 있는 작은 정원도 시녀가 손수 만들었다. 경성에서는 샘물을 길어 올 수 없으니, 어디선가 대나무 통 하나를 얻어와 정원에 있던 물로 조경을 꾸민 것이다.
“우리 노태야께서 이런 걸 좋아하셨어. 선음(禪音)을 들을 수 있다고 하셨지.”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조용한 마당에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니, 사찰에서 들리는 목탁 소리와 비슷하여 과연 선음 같았다.
반근은 다시 한번 생긋 웃고 표정을 수습한 다음 문 앞으로 걸어갔다. 안에는 정교랑과 서무수가 마주 앉아 있었다.
“도련님, 차 드세요.”
반근이 무릎을 꿇고 서무수에게 차를 건넸다. 정교랑이 서무수 앞에 놓인 차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차, 나쁘지 않지요.”
반근이 정교랑에게 건네려던 물잔을 손에 들고 멈칫했다. 아씨께서도 차를 드시려나?
“그렇지, 나도 오 관리인의 생각이 좋다고 생각해. 선다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지.”
서무수가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자, 반근은 얼른 정교랑에게 물을 건넸다. 반근은 정교랑이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반근.”
이제 막 문을 나서던 반근은 정교랑의 부름을 듣고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정교랑 뒤에 앉아 있던 시녀가 대답한 뒤였다.
“진십팔랑이 말했던 법회가 이 법회니?”
반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서둘러 문을 나왔다. 비가 그쳐가자, 마당을 가득 채운 봄빛이 무르익은 상쾌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반근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입꼬리를 올린 채 쟁반을 팔 사이에 끼고 회랑을 따라 걸어갔다.
“맞아요, 아씨. 진 아씨께서 같이 가자 말씀하셨던 게 바로 그 법회예요. 오 관리인 말씀이 맞아요. 그런 소문이 돌긴 했어요. 그 수조 상인이 한동안 꽤 유명했죠. 나중엔 주점까지 열었고요. 지금은 인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가 봐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다만, 만 관이 드는 음식 공양까진 필요 없을 것 같네.”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면 충분해.”
“한 가지?”
서무수가 물었다.
“신기한 것 한 가지면, 충분해요.”
정교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두부로 하죠. 일거양득이겠네요.”
서무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알겠다고만 했다.
“참, 누이. 요즘 장사는 잘되는데, 딱히, 남는 건 없어.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서무수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이제 돈이 얼마 안 남았어요.”
시녀가 대답했다. 서무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 급하진 않아. 우선 이 선다회부터 지나고 다시 얘기하자. 누가 알아, 선다회를 마치면 돈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수도.”
서무수가 빠르게 덧붙여 말하고 웃자 정교랑도 따라 웃었다.
“오라버니, 걱정 안 해도 돼요.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한 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라버니한테 고마워할지 모르겠네요.”
서무수는 정교랑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웃었다.
“반근.”
시녀가 얼른 네 하고 대답하고 분부를 기다렸지만, 정교랑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 반근을 불러와.”
시녀는 멈칫했고 서무수 역시 멈칫했다. 반근이 또 있어? 누이는 대체 반근을 얼마나 많이 수집한 거야?
시녀의 말을 전해들은 반근은 믿을 수 없어 하며 쭈뼛쭈뼛 들어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내 기억으로는, 예전에 네가 날 위해 환자를 데려오곤 했지?”
정교랑이 물었다.
예전에……. 아씨께서 예전을 기억하시다니. 반근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지려 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물론 아냐. 그 공책에 그렇게 쓰여 있길래.”
정교랑이 말했다.
“네, 아씨. 아씨께서 소인더러 매일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병자들의 증상을 아씨께 전하라 하셨어요. 아씨께서 고치겠다고 하시면, 다시 우연인 척 그 병자의 가족한테 접근해 아씨께 치료를 받도록 했고요.”
반근이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 안 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지금, 다시 거리로 나가 봐. 내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돌아와서 들은 것들을 내게 알려 줘.”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감격하여 예를 표했다.
“네.”
반근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고개를 들 때 방석으로 눈물 몇 방울이 툭 떨어졌지만, 이번 눈물은 달콤한 것이었다.
비가 멈추자, 편전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책 읽는 소리도 따라 멈췄다.
문밖에 서 있던 궁녀 둘이 서로 눈짓을 했다. 궁녀 하나가 입을 삐죽이고 웃으면서 손을 내젓더니, 꿇어앉아 문틈으로 몸을 빼고 안을 들여다봤다. 편전에는 팔걸이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소년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고, 바닥에는 책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실내에는 빛이 들지 않았다.
하품하던 소년은 시야가 흐린지 손을 뻗어 부싯돌로 불을 피웠다. 불이 번쩍이며 소년의 오목조목 잘생긴 이목구비를 비췄다. 희고 고운 얼굴에서도 그윽한 눈동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진안 군왕은 태조의 칠세손답게 외모가 준수했다. 태종의 후손인 지금의 황제 혈통과는 외모에 꽤 차이가 있었다. 태조의 혈통은 대대로 효자고양황후(孝慈高陽皇后)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고양황후의 단정하고 고운 외모는 건장하고 우락부락한 방씨 일가의 외모를 중화시켜 주었다.
진안 군왕께서는 어떤 왕비를 맞이하시려나.
부싯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감상에 빠져 있던 궁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에 있던 소년은 부싯돌 놀이도 싫증이 나는지, 부싯돌을 내려놓고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궁녀가 자세를 바로 앉고 다른 궁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역시나 또 주무시려나 봐.”
궁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들어가서 말씀을 올릴까? 폐하와 태후께서 책을 외우라는 벌을 내리셨는데, 다 못 외우시면 어떡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두 궁녀는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쾅 소리와 함께 소년이 문을 걷어찼다. 문밖으로 나온 소년은 기지개를 켜며 심호흡을 했다.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구나.”
두 궁녀가 얼른 일어나 나지막이 고했다.
“전하, 지금은 나가실 수 없어요. 폐하와 마마께서 금족령을 내리셨잖아요.”
진안 군왕은 김이 새는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며칠 남았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궁녀에게 물었다.
“아직 이틀 남았습니다.”
궁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다시 짧게 아, 하고 대꾸하고는 긴 옷소매를 휙 털고 뒷짐을 졌다.
“그럼, 책 같이 읽을 사람 좀 불러줘.”
책을 읽는 일에 같이 읽을 사람이 왜 필요하나, 그저 같이 놀아줄 사람이 필요한 거겠지.
궁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시가 불려 왔다. 내시가 안으로 들어간 후로 책 읽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바둑 두는 소리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내가 본 건 다른 사람이었어.”
진안 군왕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바둑 한 알을 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내시도 조심스럽게 한 수 두며 대답했다.
“하지만 진소, 진십팔랑은 한 명밖에 없습니다.”
진안 군왕은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고민했다.
“그날 입궐한 사람도 진십팔랑이고요.”
내시가 덧붙여 말했다. 진안 군왕이 다음 수를 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그날 성에서는 틀림없이 봤어. 그 낭자였다고. 분명 진씨 가문이었어. 진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면, 필시 진씨 가문과 연관이 있을 거야.”
“다만 군왕께서 지금 궁 밖을 나가지 못하시고, 나가실 수 있다 하더라도 진씨 가문의 부녀자를 보러 가긴 어렵습니다.”
내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혹은, 그 낭자가 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진씨 가문 사람들과 같이 있다고 해서 꼭 진씨 가문의 사람인 건 아니잖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군왕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왔다가 떠날 수도 있는데. 그날 잠시 왔다가 바로 떠났을 수도 있잖아.
진안 군왕은 자세를 고쳐 앉고 그날 문 앞에서 고개를 돌리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군왕이 입을 떼려던 찰나, 문 앞에 있던 궁녀가 아뢰었다.
“군왕, 이 태의께서 오셨습니다.”
진안 군왕은 얼굴에 있던 초조한 기색을 싹 거두고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꿨다. 바둑판 뒤에 앉은 진안 군왕은 안으로 걸어오는 이 태의를 쳐다봤다. 이제 막 일을 마쳤는지 이 태의는 아직 관복을 입고 있었고 뒤따라오는 아이의 손에는 약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 대인께서 어찌 시간을 내어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맞이했다.
“현비마마께서 회임으로 헛구역질이 심하시다 보니, 태후께서 마마를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은 궁에서 지내고 있지요.”
이 태의가 예를 표하고 군왕 앞에 꿇어앉았다.
“요즘 밖에서 사부님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 귀찮아 죽겠어요.”
뒤에 있던 아이가 덧붙였다.
“이 대인의 의술이 고명해서 그렇겠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이 태의의 의술이 고명하다는 말은 아첨이나 허언이 아니었다.
“무슨요, 그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못 고친다고 말씀하시길 기다리는 거예요. 애초에 사부님한테 병을 봐 달라고 하려는 게 아니고요.”
아이가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못 고친다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이 태의는 언짢은 듯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아이를 꾸짖었다.
“무례하구나. 언제부터 군왕 앞이 네가 함부로 낄 수 있는 자리더냐?”
아이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아니, 괜찮다, 괜찮아. 계속 말해 보거라.”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심심해 죽을 뻔했는데, 재밌는 얘깃거리구나. 어서 말해봐라. 어쩌다 못 고친다는 말을 들으려 다들 안달이 났을까?”
아이는 뜸을 들이면서 사부님의 눈치를 살폈다. 사부를 모시는 것은 평생의 아버지로 섬기는 일과 같다지만, 충과 효는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법이다. 군왕께서 하문하시는데 답을 안 해드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게, 그 사람들은, 정 낭자한테 치료받고 싶어 하거든요.”
아이가 쭈뼛쭈뼛 말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스러운 말에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 낭자가 누군데?”
“진 노태야와 동 내한의 병을 고친 사람이에요.”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며 눈빛도 반짝거렸다. 아이는 손까지 이리저리 휘저어가며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는데, 죽을 정도의 불치병이 아니라면 절대 치료를 하지 않는대요. 듣자니 이 진인의 제자래요!”
“닥쳐라!”
이 태의의 호통에 아이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사정을 눈치챈 진안 군왕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된 일이군!”
군왕이 손으로 이 태의를 가리켰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만 고친다니, 진 노태야와 동 내한도 전부 이 대인이 못 고친다는 진단을 내린 후에 그 낭자가 고쳤겠군요. 그래서 다들 하나같이 대인한테 못 고친다는 말을 들으려고 찾아가는 거고요. 정말, 정말 너무 재밌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와, 급기야 군왕은 체면도 내던진 채 박장대소했다.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이 태의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진안 군왕이 서둘러 이 태의를 붙잡았다.
“아,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진안 군왕은 이 말을 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풉 웃었다.
이 태의를 붙잡고 한참 동안 좋은 말로 달랜 끝에 이 태의가 겨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아이를 밖으로 내쫓은 후, 진안 군왕과 이 태의는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군왕의 바둑 상대가 내시에서 이 태의로 바뀌었다.
바둑 두 판을 끝내자, 이 태의는 별 재미가 없는지 예를 표하고 물러나려 했다.
“요 며칠 군왕께 금족령이 내렸다기에, 심심해하실까 싶어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이 태의가 수염을 쓰다듬고 놀리는 웃음을 지으며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도 따라 웃었다.
“맞습니다, 맞아요. 서로 위안 삼을 수 있으니 좋네요.”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이 태의가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떴다. 이 태의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진안 군왕은 다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진짜 뜻밖이네. 그토록 궁에 있기 싫어하던 이 태의가 궁에 숨어들게 할 정도라니. 정 낭자라는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하네.”
“소인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진씨 가문이 특별히 강주에서부터 모셔온 신의라고 합니다. 이 진인을 만나 신선의 비방을 얻어 죽은 사람도 살린대요. 병을 치료하는 원칙이 좀 독특하지만요.”
진안 군왕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독특하지 않으면 이 넓은 땅에서 어떻게 돋보이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 낭자는…….”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진안 군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생각났어, 그 저택.”
내시는 멈칫하며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했다.
“어떤 저택이요?”
“그날 내가 본 저택.”
진안 군왕이 몸을 돌려 내시들을 쳐다보면서 명했다.
“가서 알아봐라. 그 낭자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시들이 동시에 네, 하고 대답했다.
“다만, 물어야 할 것만 물어보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은 함부로 묻지 말아라.”
진안 군왕이 다시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본왕이 어떤 오해도 받아서는 안 된다.”
내시들이 다시 황급히 대답했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긴밀하게 찾으시다니.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군왕께서 한 번 보고 저토록 못 잊으실까.
반근은 진십팔랑의 시녀가 준 보따리를 받아 들고 연신 감사를 표했다.
“20일에 열릴 선다회 때문에 집에 친척들이 와 계시거든. 십팔랑 아씨께서 손님을 맞이하느라 며칠간은 집을 비우시기 어렵다며 아씨께 말씀을 전하라 하셨어. 정 아씨께서도 동행하신다 하니, 진 부인께서 집안 아씨들 옷을 새로 지으면서 정 아씨의 옷도 한 벌 지어주셨어.”
“마음 써 주신 부인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
반근이 재차 감사를 표했다.
“그럼 언니, 얼른 들어가, 20일이 되면 마차를 타고 정 아씨를 모시러 올게.”
진십팔랑의 시녀와 반근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반근은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였어?”
서무수가 회랑 아래 서서 물었다. 반근이 설명하자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
“또 뭘 까먹은 게 있나?”
대문을 연 반근은 깜짝 놀랐다. 문밖에는 웬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반근을 보자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오랜만에 왔더니 이 집 찾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구려. 하마터면 못 찾아올 뻔했어.”
반근은 다급하게 문을 가로막았다.
“누굴 찾아오셨어요?”
서무수도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자 사내는 흠칫 놀란 듯했다.
“여기 진씨 저택 아닙니까?”
사내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들고 편액을 올려다봤다. 편액은 글씨가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여긴 진씨 저택 아니에요. 정씨 저택입니다.”
사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들여다보려 했다. 서무수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반근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도련님, 진씨 저택을 찾아온 분이 계시네요.”
서무수를 본 사내는 저도 모르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여기는 진씨 저택이 아니오, 정씨 저택이지. 잘못 찾아왔으니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구려.”
사내는 서무수를 훑어보더니 곧 예를 표하며 사과했다.
“제 기억이 틀렸나 봅니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물러났다. 사내는 좌우를 살피며 중얼거리다가 옆집의 문을 두드리러 갔다.
“사람을 찾아왔으면서 제대로 묻지도 않고, 저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한담.”
반근이 투덜거렸다. 두 사람은 시선을 거두고 대문을 닫았다.
길을 묻던 사내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다시 이쪽을 쳐다보더니 꾸부정했던 자세에서 허리를 곧게 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사내의 얼굴에 가득했던 타향 사람의 초조함 같은 것이 일순간 걷혔다. 사내는 미간을 좁히고는 가던 방향을 틀어 성큼성큼 떠나갔다.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반근과 서무수는 이런 그의 모습을 알 길이 없었다. 시녀가 방문을 열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아니다. 사람을 찾는 이였어. 누이는 일어났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이미 대청에 앉아 있었다.
“관리인은 일단 두부를 조각할까 생각 중이야.”
서무수가 말했다.
“조각이요? 조각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정교랑의 대답에 서무수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손재는 밤낮없이 두부를 만들고 있고, 이대작이랑 그…… 반근 낭자도 쉴 새 없이 시도 중이야.”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겠지요. 성공할지 모르겠네요, 불과 네댓새 만에.”
“이대작의 칼솜씨가 꽤 쓸 만해. 이렇게 부드러운 것을 조각해 본 게 생전 처음이니 좀 어색해하지만 말이야.”
정교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조각할 때, 물에 넣고 조각하라고 해요.”
물에 넣고? 서무수는 되묻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억해 둘게.”
정교랑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서무수는 정교랑이 생각 중이라는 걸 알았기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있었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마당에서 대나무 통과 돌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반근, 적어.”
정교랑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시녀가 서둘러 붓과 종이를 들고 탁자 앞에 앉았다.
“버섯탕 끓이는 법. 팽이버섯과 목이버섯, 얇게 썬 죽순을 넣고…….”
시녀는 정교랑이 말하는 것들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황궁 안. 태후가 앞에 앉은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냐. 외운 것을 다 썼느냐? 벌써 향을 한 대 다 피웠구나.”
대황자가 붓을 내려놓았다.
“마마, 소손은 다 썼습니다.”
태후가 기뻐서 손을 뻗자, 내시가 대황자의 종이를 들어 태후에게 올렸다. 하얀 종이 위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듯한 정교한 글씨가 보였다.
“첫째가 아주 잘 썼구나.”
태후는 앉아있던 다른 두 사람을 쓱 쳐다보더니 엄한 얼굴로 물었다.
“너희들은?”
진안 군왕도 해맑게 웃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마마, 저도 다 썼습니다.”
내시가 종이를 태후에게 올리자, 태후가 쓱 훑어봤다. 태후의 얼굴색이 점점 잿빛으로 변했다. 종이는 반밖에 채워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씨였다.
“<공양전(公羊傳)>은 이미 배우지 않았더냐? 폐하께서 외울 시간을 사흘이나 주었는데, 어떻게 문공(文公) 반 장도 못 써 내?”
진안 군왕은 헤헤 웃었다.
“마마, 스승님께서 제게 1년이면 배울 거라 하셨는데, 지금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년은 더 기다려야 욀 수 있어요.”
옆에 있던 대황자의 얼굴에 조소의 빛이 스쳤다. 대황자는 같잖다는 듯 입을 삐죽이고는 턱을 치켜들고 의기양양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마마, 마마, 저도 다 썼습니다.”
이황자도 급히 붓을 내려놓고 자기 앞에 놓였던 종이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태후에게 걸어갔다.
“아유, 우리 둘째도 다 썼어?”
태후는 종이 위에 대문짝만하게 쓴 두 글자를 보면서 칭찬했다.
“위낭 형님이 잘 가르쳐 준 덕분이에요.”
이황자가 태후의 옷깃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태후는 입을 삐죽이고, 여전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진안 군왕을 노려봤다.
“네 꼴을 좀 봐라. 어린 이황자까지 나서서 널 도와주잖아. 돌아가서 공부 열심히 하거라. 매일 허튼짓만 벌이려 들지 말고.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래.”
“네, 마마.”
진안 군왕의 웃음기 가득한 모습에 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그만 물러가거라.”
세 사람은 자세를 바로 한 후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문을 나서자, 이황자가 한 손에는 진안 군왕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대황자의 손을 잡았다.
“형님, 우리 버드나무에 활 쏘는 놀이 하러 가요.”
“난 아직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대황자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손을 휙 놓아버리자 이황자가 무안해했다.
“우리끼리 가요, 우리끼리.”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보며 말했다.
“군왕, 이황자는 아직 어려 근면이 뭔지 잘 모릅니다. 괜히 이황자까지 물들게 하지 마십시오.”
대황자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심한 말을 뱉었다. 내시들은 낯빛이 하얗게 질렸지만 감히 나설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못 들은 척 입을 다물었다. 진안 군왕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네, 네. 나도 근면해져야죠.”
“책 읽으러 가자.”
대황자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황자에게 말했다. 이황자는 입을 삐죽이고는 손으로 대황자를 밀어냈다.
“형님이랑 안 가요!”
이황자가 소리치고 도망쳤다. 내시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둘러 이황자를 따라갔다.
대황자는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구겨지자 부아가 치밀었지만 몇 살배기 어린아이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미소를 짓고 있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보였다.
“쓸모없긴.”
대황자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가자 내시들도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홀로 남은 진안 군왕은 두 사람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고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갔다.
“싸우는 자들이 모두 군자인데, 누구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백주리가 손을 높이 들며 ‘이분은 왕자 위(围)로 군주께서 아끼는 동생이시다’ 하고, 다시 손을 아래로 내리며 ‘이분은 초나라 변방을 다스리는 현감 천봉술이다. 둘 중 누구에게 생포됐느냐?’하고 물으니 포로가 이르되 ‘나는 왕자를 만나 패했소이다’ 하였다(<좌전 양공 26년>의 한 구절).”
진안 군왕이 중얼중얼 읊조리며 유유자적 걸어갔다.
근처를 지나던 뚱뚱하고 새하얀 피부의 늙은 내시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좌전>?”
늙은 내시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멀어져 가는 소년의 꼿꼿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어디로 가려고 좌회전을 해요?”
옆에 있던 어린 내시가 물어봤다.
“좌회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책을 읽지 않으니 아무것도 모르지 이 녀석아.”
늙은 내시가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치자 어린 내시는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할아버지, 소손은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할아버지처럼 폐하를 모시지 못해요.”
늙은 내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대황자께서는 이제야 <주례(周禮)>를 배우고 계시고, 진안 군왕은 내년이 돼야 <좌전>을 배우실 텐데, 벌써 백주리가 포로를 심문하는 편까지 외웠다니?”
중얼거리던 늙은 내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상하기수(上下其手: 위와 아래로 손을 들어 신호한다는 뜻. 의도를 갖고 사실을 왜곡시킬 때 쓰는 말), 상하기수.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그런 모습이겠지.”
“할아버지, 상하기수가 뭐예요?”
어린 내시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뭐긴, 개소리지!”
늙은 내시가 어린 내시를 걷어차며 노려봤다.
“냉큼 가지 않고 뭐해?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마. 하여간 오지랖도.”
앞에 선 어린 내시가 재빨리 길을 안내하자 두 사람의 뒷모습도 금세 멀어져갔다.
진안 군왕이 편전 바닥에 앉아 시선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쉼 없이 읊었다. 책은 펼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을 쉬지 않고 읊는데,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돌아왔습니다.”
내시의 말에 진안 군왕이 일어났다. 시위 한 명이 들어왔다. 얼굴을 보니 옥대교 정교랑의 저택을 잘못 찾아갔던 그 사람이었다.
“어찌 됐느냐?”
“진씨가 아니라 정씨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에서 일곱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고 서북 말투를 썼습니다. 문을 열었던 시녀 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시위가 군왕에게 답했다. 아닌데, 하긴 이런 식으로 찾기에는 가망이 없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직접 진 대인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게 빠르겠구나.”
“군왕, 아니되옵니다.”
시위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렸다.
“그래, 안다. 급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세상에 아무 방법도 없는 일이 어디 있어? 어떻게든 해결이 되지.”
진안 군왕의 마지막 말은 혼잣말 같았다. 시위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밖으로 걸어 나오던 시위가 별안간 인상을 쓰며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시위는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시위가 또다시 멈춰 섰다.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옥대교에서 본 그 정씨 사내, 어딘가 낯이 익단 말이야. 분명 그 눈빛을 본 것 같은데. 아니야, 잘못 본 걸 수도 있지. 경성에 오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시위가 한숨을 깊이 내쉬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오가 다 되어 가는 무렵, 말을 탄 주육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옥대교 근처에 도착했다.
“공자님?”
사환이 물었다. 주육낭이 심호흡을 하고 말에서 내려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또 왔어요? 왜 왔는데요?”
금가아가 문틈 사이로 소리쳤다. 왜 왔냐고? 내가 왜 또 여길 왔는지 난들 아나!
“아직 돈은 남았고?”
주육낭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돈 있어도 댁한테는 안 꿔 줘요!”
금가아가 경계하며 말했다. 주육낭이 홧김에 문을 발로 걷어차자 금가아가 화들짝 놀라 문에서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나온 반근이 금가아의 만류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공자님, 아씨는 집에 안 계세요.”
“또 나갔다고?”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허구한 날 밖에서 뭐 하는 거야?
“네.”
반근이 대답했다.
“필, 필요한 건 없고? 있으면 말만 해.”
반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공자님,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아씨께서는 필요한 게 없으세요.”
주육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주육낭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문을 닫으면서 금가아와 환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반근의 옆모습이 보였다.
저 아이가, 언제부터 내 앞에서 다시 웃기 시작한 거지? 말할 때도 고개를 들고 하네? 허리도 곧게 펴고…….
문이 서서히 닫혔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뿐이다. 사람도, 이름도 그뿐이다.
시선을 거둔 주육낭은 사환이 건넨 말고삐를 붙잡고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탄 후 질풍처럼 내달렸다.
부드럽고 하얀 두부를 조심스레 물그릇에 넣었다. 크기와 재질이 다양한 칼들이 이대작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대작은 그중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집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참고 이대작이 물그릇 안에 손을 넣어 칼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대작의 칼질에 두부는 눈송이처럼 물그릇 안에 천천히 퍼졌다.
정교랑과 관리인, 서무수는 멀리 떨어진 회랑 아래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작이 허리를 곧게 펴고 멍하니 물그릇을 바라봤다.
“다시.”
이대작의 말에 시녀가 두부 한 모를 다시 가져다주었다. 이대작이 집중하느라 새빨개진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다시 허리를 숙여 물그릇에 손을 넣었다.
“꽃을 조각해내는 것 정도는 이제 문제없습니다.”
관리인이 그릇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정교랑 뒤에 서 있던 시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와, 세상에나! 꼭 진짜 모란꽃 같아요! 이게 정말 두부로 조각한 거예요?”
“그럼, 그럼. 불과 이틀 만에 해냈다니까.”
서무수가 이대작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딱히 특별한 능력은 없어 보이던 숙수에게 이리 섬세한 손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사람이 참 성실합니다. 아둔하다 보니 우직하게 손재주를 익혔죠. 사부의 문하에서 배울 땐 제자 중 가장 못났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새로운 요리며 새로운 맛 하나 못 만들어 냈죠. 그래도 기본기 하나는 최고였습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죠, 다 가질 수는 없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오 관리인도 감탄하면서 이대작 이야기를 했다.
“그럼 꽃을 조각하면 되겠네요. 뭘 더 하려는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음식 공양이기도 하고 부처님 앞에 올리는 게 아닙니까. 이대작이 꽃은 새로울 게 없다며 좀 더 알맞은 걸 연습하겠답니다. 꼭 불상을 조각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네요.”
시녀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다시 이대작 쪽을 쳐다봤다. 그 사이에 이대작은 또 두부 한 모를 가져다 고개를 박은 채 칼질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나흘 남았는걸요?”
시녀는 걱정되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정 안 되면, 모란꽃을 조각하기로 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두부의 맛이고, 조각은 금상첨화를 위한 것이니까요.”
정교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시선은 다시 이대작에게 향했다.
한편, 반근은 바구니를 팔에 걸고 저잣거리로 나섰다. 벌써 반근과 인사를 주고받는 상인들이 생겼다.
“오늘 싱싱한 배추가 들어왔는데 반근 낭자 주려고 특별히 남겨 놨어요.”
“반근 낭자, 여기 양고기도 좀 와서 봐요.”
“반근 낭자, 저번에 말한 심장이랑 간, 허파 같은 것들도 다 구해왔어요.”
반근이 웃으며 일일이 대답하고는 장 볼 것들을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이번이 고작 네 번째 방문이라는 걸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푸줏간 앞에 모인 사람 중에 비교적 좋은 원단으로 옷을 지어 입은 두 여자가 대화하고 있었다.
“장 주인.”
반근이 푸줏간을 향해 외치며 걸어왔다.
두 여자가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장을 보러 나오거나 허드렛일을 주로 하는 큰 부잣집의 여종들은 집안에서는 한없이 겸손하지만,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우쭐하며 기세등등해졌다.
기름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두른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반근을 본 사내가 헤헤 웃었다.
“낭자 왔어요? 물건은 준비해 뒀습니다. 근데 낭자는 차림새도 말끔해 보이는데, 어찌 이런 걸 구해 달라고 해요?”
“약에 쓸 수 있거든요.”
반근이 자연스럽게 두 부인을 슬쩍 훑으며 말했다.
“약에 쓴다고요? 심장이니 간이니 하는 것들로 무슨 약을 지어요?”
사내가 놀라 물었다. 반근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반근 낭자, 지금 날 놀리는 거죠?”
사내가 웃으며 반근을 쳐다봤다.
“주인장을 놀려서 뭐해요. 정말 약에 쓰는 거라니까요.”
“뭐에 좋은데요?”
“뭐, 별거 없어요, 몸을 튼튼히 하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도 까맣게 만드는 거죠.”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반근을 쳐다보다가 크게 웃었다.
“그런 약이 어디 있다고.”
사내와 반근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점포 밖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두 여자가 다시 반근을 유심히 쳐다봤다.
“다른 집엔 없지만 우리 집엔 있죠.”
반근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손을 뻗어 점원이 종이로 싸둔 꾸러미를 받아 바구니에 넣고 점포를 나섰다.
“저게 누구예요?”
반근이 나가자 한 여자가 물었다. 막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주인장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옥대교에 사는데, 정씨 집안이래요. 집에 몇 명이 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매일 장을 많이 봐 가요. 무슨 심장, 간, 폐 같은 것도 사가고…….”
사내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설마 진짜 약에 쓰는 건가?”
두 여자가 서로 마주 보았다. 정씨라면…….
정씨 성에 대해서는 집에서도 자주 이야기가 나왔기에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알았다. 노야와 부인이 매일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완치된 동 내한이 손님으로 방문하여 그 유능한 낭자에 대해 말한 후로는 더욱 그랬다. 노야는 입맛을 다지면서 병이라도 얻고 싶다고 했다.
그나마 부인이 옆에서 말리며 정 낭자는 이제 병을 치료하지 않는다고, 진짜 불치병이라도 걸렸다간 정말 목숨을 잃을 거라고 말렸으니 망정이지. 근데, 그 정 낭자는 주씨 댁에 산다지 않았나?
두 여자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한 명이 무언가 결심한 듯 바구니 가득 장을 보고 돌아가는 여자애를 쫓아갔다.
“고 어멈, 아까 달라고 한 양고기 여기 나왔어요. 응? 어디 갔지?”
점원이 문앞에 서서 두리번거렸다.
하늘색이 점차 어두워지자, 정교랑과 시녀는 태평거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흔들흔들 저잣거리를 지나갔다.
“아씨, 저기 신선거 좀 보세요.”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작은 소리로 쿡 웃었다.
정교랑이 휘장 밖을 내다보았다. 신선거의 오색찬란함은 여전했지만, 가게 앞으로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점원이 부쩍 늘어나 보였다. 마차가 그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뭐가 보여?”
정교랑이 묻자 시녀가 헤헤 웃었다.
“불과 며칠 만에 인기가 예전만 못하네요.”
“또?”
“또요? 음, 사람은 됨됨이가 훌륭해야 해요.”
“또?”
정교랑이 다시 묻자, 시녀가 갸우뚱하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또 뭐가 있죠?”
“또.”
정교랑이 다시 한번 밖을 내다보았다.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은 아니었지만, 경성에서는 손에 꼽는 저잣거리라 양쪽으로 점포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힘겨움이지.”
“힘겨움이요?”
시녀가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
“일을 하나 하려면, 일을 제대로 해야 해. 자리를 잡으려면, 자리를 제대로 잡아야 하지. 힘겨운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야.”
두칠의 신선거는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썰렁해졌다. 경쟁자가 한둘이 아니라 무리로 맞서니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지. 본래 경쟁자들이란 평소에는 웃으며 술잔을 건네지만, 뒤에서는 호시탐탐 짓밟을 기회를 엿본다. 드디어 기회가 왔으니 합심하여 확실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사람이 착하거나 못된 것을 떠나서, 천지의 도리는 무정하고, 세상살이는 힘겨운 법이다.
시녀는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온 거리의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쉼 없이 지나다녔다. 옆에 보이는 주점에서는 호객꾼 몇 명이 나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고, 화려한 장식과 옷으로 꾸민 기녀들이 술 단지를 안고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교태 가득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세상살이가 이토록 쉽지 않으니, 만사 조심해야지.
“아씨, 이제야 보여요.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둘게요.”
시녀가 정교랑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마차는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옥대교 저택에 도착했다. 정교랑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반근이 식사를 들여왔다.
“아씨, 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아씨께서 만드신 약을 사고 싶대요. 듣기로는 동 내한 가문과 교분이 있다는데, 그 집 어르신도 금석 단약을 드신다고 하셨어요.”
“팽씨? 세 왕조를 거치며 재상을 역임했던 팽연 집안?”
시녀가 물었지만 반근은 이런 것들에 무지했다.
“최근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몇 사람이 그 가문 이야기를 해서 장 보러 나오는 여종들을 찾아냈어요. 대화하는 걸 들어보니, 그 집 주인어른께서 하루도 빠짐없이 이 태의를 찾아가서 제발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해 달라고 한대요. 아씨의 비방을 처방받고 싶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그들 근처를 무심한 척 맴돌았더니 오늘 저를 따라와서는 말을 흐리며 어느 집 시녀인지 묻더라고요. 딱히 숨기지 않고 대답했더니, 기뻐 어쩔 줄 몰랐어요. 아, 아씨께서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아직 치료를 직접 하실 수는 없어서 남는 시간에 약을 만드신다고 했더니, 무슨 약을 만드냐길래 저도 모른다고 얼버무렸어요. 그랬더니 더 이상 묻지 않고 싱글벙글하며 급히 돌아갔어요. 아마 며칠내로 찾아올 거예요.”
시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손뼉을 쳤다.
“이 태의를 붙잡고 그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 데다가 동 내한과 교분이 있는 걸 보면, 팽연 집안이 분명해!”
시녀가 반근을 보면서 기쁘게 말했다.
“세상에, 반근 언니.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을 물었네.”
비록 팽연은 이미 세상을 떴고, 그 자손들도 조정에서 높은 자리에 있진 않았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집안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명문대가로, 황제는 여러 번 바뀌어도 이런 집안은 망하는 법이 없었다.
반근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나, 난 별로 한 게 없어. 그냥 사람들이 하는 쓸데없는 말이나 주워듣는 것뿐인걸.”
동네방네 소문내지도 않으면서도, 짧은 시간에 새로운 손님을 정확히 찾아오는 능력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물고기에겐 물고기만 다니는 길이 있고, 새우에겐 새우만 다니는 길이 있는 것처럼 각자의 길이 있지.”
시녀가 감탄했다.
물고기와 새우에게도 각자 다니는 길이 있다. 최하층 말단 여종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빠른 속도로 주인어른 귀에까지 들어갔다.
“정말이더냐?”
배 나온 중년 사내가 외쳤다. 팔걸이 책상을 짚으며 일어나려던 사내는 순간 기력이 딸려 넘어질 뻔했다. 옆에 있던 부인과 시첩들이 얼른 부축하자, 사내는 불쾌한 얼굴로 밀어냈다.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던 단약 병을 손에 쥐려 했지만, 부인이 저지했다.
“노야, 안 돼요.”
부인은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정 낭자라는 사람이 환자도 안 받고 있잖아요. 이걸 드셨다가 행여 잘못되면 어쩌시려고요.”
사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손을 거뒀다.
“정 낭자 댁에서 장을 보는 시녀가 직접 말한 거예요. 제가 따로 알아보니, 얼마 전 정 낭자가 한밤중에 주씨 댁을 떠났다고 합니다. 주씨 집안 사람들이 나서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요.”
대청 안에 꿇어앉아 있던 집사는 땀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정 낭자가 옮겨갔다던 저택에도 저희가 찾아가 봤어요. 원래는 진 상공 댁의 저택이었기에 진씨 가문에 알아보니, 쉬쉬하는 눈치였지만 정 낭자에게 판 게 분명했습니다.”
“그럼 진짜가 맞네! 노야, 우리 어서 가요.”
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어딜 가잔 거요? 아직 죽을 때가 된 것도 아닌데, 가 봤자 헛걸음이지.”
사내가 언짢은 듯 인상을 썼다.
“약이요!”
부인이 다시 외쳤다.
“약?”
“그 시녀가 말하기를, 지금은 정 낭자가 치료를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남는 시간에 약을 만든다고 했대요. 바로 치료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약 하나 지어 달라는 것뿐이니 괜찮잖아요?”
부인의 말에 집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연습 삼아 만들어보는 약이라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럼 빨리 가야지! 늦었다간 우리 몫이 없을 수도 있잖아!”
사내가 이번에는 손을 정확히 짚고 일어나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어서, 마차를 준비해라!”
밤이 가까워지자, 정교랑의 방문이 열렸다. 회랑 아래 앉아있던 여종들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부인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심히 가세요.”
시녀가 뒤따라 나오며 인사했다.
“나오지 않아도 돼.”
팽 부인이 품 안에 소중하게 넣어둔 약병을 꼭 쥐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진귀한 보물을 얻은 듯 감격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부인, 저희 아씨의 당부를 잊지 마세요.”
시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럼.”
부인의 대답을 듣자 시녀는 예를 표하고 더 이상 걸어 나가지 않았다.
팽 부인이 문가에 다다르자, 금가아가 밖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짙어진 밤하늘 때문에 등불 없이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종 하나가 먼저 문을 나가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무 표식 없는 마차를 불러왔다.
팽 부인은 그제야 두 여종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급하게 올라탔다. 여종은 부인이 제대로 앉기도 전에 마부에게 서둘러 출발하라고 재촉했다.
마차가 바로 내달리는 바람에 팽 부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벌러덩 뒤로 넘어갈 뻔했다. 두 여종이 깜짝 놀라 부인을 붙잡았지만, 부인의 신경은 온통 약병에 쏠려있었다.
“다행이다, 멀쩡하구나.”
팽 부인이 약병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건 노야의 명줄이야.”
여종들도 약병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엔 꼭 도둑이 된 기분이네.
“돈을 그렇게나 많이 받고 팔면서, 사람들 몰래 오라고 한다는 게…….”
여종 하나가 투덜대자 부인이 말을 잘랐다.
“아휴, 뭘 안다고. 정 낭자는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이 일이 여기저기 소문이라도 나 봐라.”
“소문이 나면요?”
여종이 물었다.
“어쩜 이리도 뭘 모를까!”
팽 부인은 어쨌든 원하던 보물을 얻었으니 기분이 좋았다.
“생각해 봐라. 정 낭자가 왜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겠어?”
이 조그만 약병 하나에 오천 관이나 달라고 하다니, 무려 오천 관을! 이게 약을 파는 거야? 장사하는 거잖아! 돈을 찍어내도 저리 빨리 찍어내긴 힘들지.
근데 왜 사람들이 알면 안 되지? 돈이 너무 많이 들어올까 봐?
“그 시녀가 한 말 못 들었어? 정 낭자는 아직 병중이라 이 약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만든 거라고 했잖아.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와 약을 달라고 하면 정 낭자가 그걸 어떻게 다 상대해? 정 낭자도 참 보살이지. 치료할 수 있으면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아예 주씨 저택에서 나와 따로 지내며 요양에 힘쓰는 거야.”
여종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랬군요, 그랬던 거였어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지만, 팽 부인은 말하지 않았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품 안에 있는 약병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정 낭자가 만들어내는 약의 양은 정해져 있어. 이번에는 우리 팽씨 가문이 운이 좋아 간신히 얻었지만, 조금 구한 것이니 언젠가는 다 먹을 날이 오겠지. 입소문이 나버린다면 다음번에 정 낭자가 만든 약은 우리 차지가 안 될 수도 있어.
소문내지 말아야지, 아무도 모르게. 오직 우리 팽씨 가문만 알면, 얼마나 좋아. 좋고말고.
태평거.
시녀가 비전 증서를 내밀자, 서무수가 이를 받아 오 관리인에게 전달했다.
“그럼 이제 관리인이 수고해 주시오.”
오 관리인은 지난 십수 년간 취봉루를 운영해 왔던 터라,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 관리인도 이렇게 많은 돈을 한꺼번에 다루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이걸 다 써도 되는 겁니까?”
관리인이 묻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걸로 부족하다면 알려주시오.”
오 관리인은 웃으며 비전을 정중하게 건네받았다.
“반근 낭자, 성으로 가는 길에 좀 태워 주시오.”
“그러세요. 아, 그리고 아씨께서 진 노태야께 말씀드렸대요. 적당한 때에 태평거를 언급해 달라고요.”
시녀의 말을 들은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방법도 그냥 한번 해 보자는 겁니다. 지금의 보수사는 돈만 보면 좋다고 달려들던 예전과는 다르기도 하고, 매년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 많아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거든요. 우리가 그 수조 상인만큼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아요. 부디 아씨와 주인어른께서 이 점을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씨도 그 수조 상인처럼 되길 원하진 않는다고 하신걸요.”
서무수와 관리인은 놀라서 시녀를 쳐다봤다.
“그럼 어찌?”
관리인이 물었다.
“아씨께서 말씀하시길, 부처님이 알아보실 정도로 정성 들여 공양을 올리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뭐라고? 정말 단지 공양을 위했던 거야?
“옳습니다, 정성을 들여야죠.”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마당으로 돌렸다.
이대작은 탁자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렇게 서서 가장 손에 익는 칼을 찾기 위해 죽 늘어놓은 칼들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래, 부처님이 아실 정도라면, 백성들도 당연히 알 수 있겠지. 이 세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보수사는 보름 전부터 선다회 준비로 부쩍 바빠졌다. 준비할 것이 많지만, 선다회가 관례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기에 모두가 익숙한 듯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보수사에서 지내는 승려의 수가 많아진 덕에, 일손이 모자라 어수선해질 일은 없었다.
“또 큰 건이 하나 들어왔다면서?”
뚱뚱하고 큰 귀를 가진 승려 하나가 장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천 관입니다.”
다른 승려가 말하며 비전 증서를 건네자, 뚱뚱한 승려가 비전을 쓱 훑어보고 웃었다.
“이제는 이만한 돈을 쓰는 바보도 몇 없는데, 바깥 자리로 하나 내줘야겠네.”
바깥 자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노출될 수 있기에, 제일 좋은 자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바깥 자리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공양일 뿐이잖아. 차라리 그 돈을 백성에게 뿌리면 더 이름이 날 텐데.
“아니요, 이 집은 가장 안쪽 자리를 달랍니다.”
뚱뚱한 승려가 흠칫 놀라더니 손에 쥔 비전을 흔들면서 웃었다.
“재밌군.”
“온 마음을 다해 불상 앞에서 공양을 올리겠다더군요.”
뚱뚱한 승려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종이 한 장을 북 뜯어냈다.
“좋아, 그럼 더 좋지. 이리 정성이 가득하면 부처님도 당연히 그 마음을 알아주실 테고. 대웅보전 맨 앞자리를 내줘야겠다.”
대웅보전 앞은 선다회를 진행하는 동안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곳이지만, 공양으로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이들이 선호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공양한 음식이 아니라 오직 명해선사가 차를 내리는 모습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돈을 써가면서 바보짓을 하겠다는 사람이 다 있네. 안타깝지만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 난 자비로우니까.
다음날, 날이 밝기 시작할 즈음 진씨 가문의 마차가 옥대교 저택 앞에 도착했다.
“우리 언니는 다른 언니들이랑 먼저 가서, 내가 언니를 데리러 왔어요.”
진단랑이 신이 나서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밖으로 나오고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단랑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일찍?”
“일찍이 아닌걸요. 이따 사람이 많아지면 줄까지 서서 들어가야 한다고요. 지금 가야 우리끼리 밖에서 먼저 놀 수 있어요.”
어린 단랑으로서는 열댓 가지의 선다(禪茶) 의식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 대웅보전 밖에서 조금이라도 더 노는 게 훨씬 좋았다.
“그럼 우리는 밖에서 놀면 되지.”
정교랑의 말에 진단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요? 언니는 다른 사람들처럼 선다 의식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본승흥이래’라잖아. 그러니 충분해.”
진단랑은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냥 즐겁게 앞장섰다.
“아씨께서 뭐라고 하신 거야?”
뒤에 서 있던 금가아가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옛날에 왕휘지라는 사람이 갑자기 흥이 나서 멀리 있는 지인을 보러 갔어. 꼬박 하루나 걸려서 갔지. 그런데 막상 지인의 집 문 앞에 도착하니까 별로 안 보고 싶어진 거야. 그래서 왕휘지는 그 지인을 보지도 않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대. 어떤 이가 왕휘지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그가 ‘본승흥이래, 흥진이반(本乘興而來, 興盡而返)’이라고 답했어. 본래 흥이 나서 왔으나, 이제 흥이 떨어졌으니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게 무슨 헛수고야.”
금가아와 반근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헛수고가 아니라, 그냥 그랬다는 거지. 덕분에 금가아는 좋은 거 아냐?”
선다에는 족히 여남은 가지의 의식이 있다. 정교랑이 만약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서 선다 의식을 빠짐없이 보고 나온다면, 금가아는 한참 동안 아무 데도 못 가고 꼼짝없이 문밖에 서 있어야만 할 것이다.
금가아가 헤헤 웃었다.
정교랑을 태운 진씨 가문의 마차 외에, 시녀는 다른 마차 한 대를 더 빌려 금가아와 반근과 함께 탔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자, 마차가 보수사를 향해 출발했다.
보수사 앞은 언제나 인파로 붐볐지만, 지금은 적막감만이 맴돌았다. 새로이 황토를 깔아놓은 길 위에는 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 병졸이 일렬로 쭉 서 있었다. 대웅보전에서 선다 의식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들부터 먼저 입장한 후에야 일반 백성이 들어갈 수 있었다.
오성병마사 병졸까지 질서유지를 위해 나온 이유는 황족도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밤부터 선다회를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을 막아서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왔다, 왔어.”
이 한마디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황제는 몸이 편치 않아 웬만해서는 이런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황자가 둘이나 있지만 모두 나이가 어려 궁 밖을 나서기 어려웠기에, 그간의 선다회에는 경성에 있는 친왕 두 명만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의장대의 크기와 기세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보수사 쪽을 다시 쳐다보니, 오직 천자를 위해서만 열리는 중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대황자께서 오셨네!”
대황자는 천자가 아니지만, 천자를 대신하여 온 것이니 보수사도 그에 맞는 큰 예를 표한 것이다.
소식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서로 밀고 밀치며 시끌벅적해지자, 병마사가 채찍을 몇 차례 땅에 휘둘러 소란을 잠재웠다.
황실 의장대가 지나가자 이어서 경성 안팎의 권문세가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백성들은 점점 지치고 흥이 떨어져 빨리 좀 움직이라고 속으로 재촉했다.
황궁 안. 진안 군왕은 무료하게 편전에 앉아 손에 든 책을 위아래로 던지고 있었다.
“전하, 정말 가지 않으시렵니까?”
내시가 물었다.
“안 가. 그 노승이 반나절 내내 다기나 붙들고 으쓱거리는 걸 답답해서 어떻게 보나? 차라리 다 끝나고 찾아가서 나한테만 차 한 잔 우려 달라고 하는 게 편하지.”
“오늘은 북적북적하잖습니까. 전하 혼자 차를 드시는 것은 재미가 없지요.”
내시가 한숨을 내쉬다가,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소인, 전하께서 처음으로 궁에 오신 날이 기억납니다. 밤새도록 소인의 옷소매를 놓아주시지 않아, 소인이 결국 바지에 실례를…….”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안 군왕은 점점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더니, 내처 들고 있던 책까지 바닥에 내던지고 허벅지를 치며 웃었다. 내시는 군왕을 따라 웃으면서도, 절로 눈물이 고이는지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이번에는 대황자께서 행차하셨으니, 전하께서는 행렬을 크게 거느릴 것 없이 편히 둘러보고 오시면 됩니다.”
내시가 재차 타일렀다.
“보수사에서 국수 한 그릇만 들고 오셔도 좋고요. 다른 때면 몰라도 오늘은 도저히 전하께서 혼자 계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은 채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 전부터 전하께서 별다른 묘책 없이 계속 고민하시던 일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니, 진씨 가문 사람들도 틀림없이 갈 겁니다. 그 여인이 진씨 가문 사람이어도 갈 테고, 진씨 가문의 손님이면 더더욱 가지 않겠습니까.”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섰다.
“그건 그래.”
진안 군왕이 웃으며 양팔을 넓게 벌렸다.
“여봐라,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워낙 성대한 행사다 보니, 장 노태야도 빠질 수 없었다. 장 노태야가 마차에서 내릴 무렵, 보수사 안은 이미 인파로 북적였다. 장 노태야를 뒤따르는 이는 맏손자 장성(張成)이었다.
“할아버지, 소손 내일 먼 길을 떠나면 적어도 이, 삼 년 동안은 못 돌아옵니다. 보수사의 차는 한동안 마시기 힘들겠네요.”
장성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승려가 우린 차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이조차 깨우치지 못한 녀석은 그 차를 마시지 않아도 그만이지.”
장 노태야가 손자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태야, 노태야.”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자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고 있는 몸종이 보였다.
“반근!”
장성이 놀라서 외쳤다.
“공자님.”
몸종은 아차 싶어 서둘러 장성에게 예를 올렸다.
“네가 모시는 낭자도 왔고?”
장 노태야가 웃으며 물었다.
“예.”
“차를 마시러 왔느냐?”
몸종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손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네, 그리고 태평거에서 공양을 드리러 왔어요.”
장 노태야와 장성은 몸종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람들이 어깨와 양손 가득 광주리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공양? 태평거에서?”
장 노태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널 데려갔던 게로구나.”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거? 네가 태평거에 있다고?”
장성이 놀랐는지 큰 소리로 물었다. 몸종이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성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몸종은 급한 표정으로 예를 올렸다.
“죄송하지만 얼른 일을 도우러 가야 해서요. 나중에 노태야의 시중을 들러 다시 올게요.”
장성은 멀어져 가는 몸종의 뒷모습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장 노태야에게 말했다.
“태평거가 저 애 주인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럼 차정사에 있는 그 글씨를 누가 썼는지도 알 텐데요!”
장성이 흥분해서 손을 비벼댔다.
“참으로 잘됐습니다! 할아버지, 어서 저와 함께 가서 그 글씨를 쓴 사람이 대체 어느 분인지 물어봐 주세요.”
장 노태야 역시 처음엔 놀란 표정이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과연 그랬구나. 바로 그 여인이었어, 그 여인이었다고!”
“누구요?”
장성이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저 낭자가 또 태평이라는 이름을 썼네.”
장 노태야는 장성이 물어보는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허허 웃기만 했다.
“‘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선함을 칭찬하니 이는 곧 태평이라.’ 훌륭한 이름이구려.”
언젠가 나눴던 말이 귓가에 절로 울렸다.
“태평 만두가 확실히 맛있긴 했지.”
장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태평 만두? 장성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게 태평 만두랑 무슨 상관이지? 태평거가 만두를 파는 곳도 아닌데.
장성이 잠시 멍해진 사이, 장 노태야는 말없이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갔다. 장성도 잽싸게 뒤따라갔다.
돌아온 몸종을 보면서도 오 관리인과 서무수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기에 몸종이 어딜 갔다 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보다 못한 몸종이 이대작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대작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수시로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맞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자네 연습 많이 했잖아.”
옆에 서 있던 오 관리인도 거들었다.
태평거 일행은 총 넷이었다. 서봉추는 커다란 멜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멜대의 한쪽에는 진흙 화로가 걸려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각종 요리 도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괜찮소, 괜찮아. 두부는 잘 준비해뒀소. 정 힘들 것 같으면 꽃으로 바꾸시오.”
하지 않아도 됐을 서봉추의 말이 이대작을 더욱 긴장하게 했다.
무조건 한 번에 끝내야 한다. 한 번에 되면 된 거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두 번, 세 번의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앞쪽에서 인파가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양 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태평거의 자리는 가장 안쪽이다 보니,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인파로 인해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체 사람이 많은지라 금방 길이 막혀버렸다. 가장 눈에 띄는 바깥 자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화로를 가지고 왔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멜대로 짐을 옮기는 서봉추 일행과 달리 마차로 옮겼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늘어놓고 있는 식기들도 전부 금과 은으로 만든 것이었다. 식기는 새벽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며 반짝였다.
“길 좀 비킵시다.”
서봉추가 외쳤다.
“비키긴 뭘 비켜요? 기다리라고.”
길 한가운데 서 있던 사환이 받아쳤다.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자, 오 관리인이 얼른 나서서 말리고는 사환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보게, 우린 사람도 적고 짐도 별로 없으니, 지나가도록 조금만 비켜주게나.”
사환이 곁눈질로 네 사람을 쓱 훑었다. 그러고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는지 거만한 투로 대꾸했다.
“사람도 적고 물건도 없는데, 뭐가 그리 급하실까? 좀 기다려요.”
서봉추가 사환을 발로 냅다 걷어찼다.
“꺼지라면 꺼질 것이지, 어디서 행패야.”
사환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 뒷사람에게 부딪쳤다. 뒷사람은 비단옷에 두모를 쓰고 귀에 꽃을 끼우고 있었다.
두칠이 몸을 돌려 사환의 뺨을 올려붙였다.
“눈이 멀었느냐!”
“주인어른, 그게 아니라 누가 우리 일을 훼방 놓으려고 해서요.”
사환은 뺨을 부여잡고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두칠은 눈을 치켜뜨며 사환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멜대를 진 채 호탕하게 웃고 있는 서봉추와 그 옆에 선 이대작, 그리고 오 관리인이 보였다.
“두 대인.”
오 관리인이 웃는 얼굴로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오씨? 여긴 웬일들인가?”
두칠은 오 관리인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다 한참 만에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입에 풀칠이나 해 보자고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저희 주인어른도 공양을 올리겠다고 하셔서 왔지요.”
이대작은 고개를 들어 복잡한 표정으로 두칠을 쓱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잠자코 있었다. 두칠은 그러냐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랬군. 어디 있는 점포인가?”
“성 밖에 있는 가게입니다. 저희는 대웅보전 바로 앞자리를 받았으니, 지나갈 수 있도록 편의를 좀 봐주시지요.”
오 관리인이 웃으며 공수의 예를 표했다. 대웅보전 앞자리라면 제일 싼 곳이잖아. 두칠은 미소를 띤 채 길을 내주라고 명했다.
“지나가게나.”
오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하고, 이대작과 서봉추, 몸종이 서둘러 나가도록 손짓을 했다.
“돈 많이 버시오.”
두칠이 서봉추 일행을 향해 말끝을 길게 늘어트리며 외치자, 관리인이 고개를 돌려 다시 예를 표했다. 내내 웃던 두칠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음기를 싹 거두고 침을 퉤 뱉었다.
“벌긴 뭘 벌어, 둘 다 재수가 없어서 집안을 망치는 놈들이었는데!”
대웅보전 앞쪽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시끌벅적한 바깥보다는 훨씬 조용했다. 한 해에 몇 번 안 되는 성대한 행사다 보니, 남녀노소 할 거 없이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불상 앞인지라 지나친 소란은 삼가야 했지만, 수시로 터져 나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곤 했다.
“저기 봐, 자네 누이도 왔네.”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이 고개를 휙 돌렸다. 멀리서 두 시녀와 사환 하나가 여인을 모시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앞에서 쪼르르 뛰어가는 여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뒤를 조심스레 따르는 유모도 보였다.
“단랑, 천천히 와”
자매들이 뛰어다니는 단랑에게 외쳤다. 진 부인이 손을 뻗어 단랑을 붙잡았다.
“어머니, 제가 정 언니도 같이 데려왔어요.”
진단랑이 뿌듯한 듯 자랑하자, 진 부인은 웃으며 단랑을 칭찬하고 아직 걸어오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이 진 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팔랑도 앞으로 나왔다. 나머지 자매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교랑을 살폈다. 정교랑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들었기에, 섣불리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이는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저는 안 들어갈래요. 정 언니랑 밖에서 놀고 싶어요.”
진단랑은 기대에 찬 목소리였지만 진 부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무가내로 굴면 못써.”
진단랑이 입술을 삐쭉이자 정교랑이 웃으며 진 부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같이 놀자고 했어요. 저는 본래 차를 즐기지 않으나, 십팔랑의 초대에 응하고자 나왔거든요. 좋은 날씨에 이렇게 나올 곳도 있고, 같이 즐길 사람도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해요.”
진 부인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말을 거들었다.
“어머니, 낭자가 그리하고 싶다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세요.”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잡아끌었다.
“너 올해는 소원성취했구나. 놀러 나온 것도 모자라 저 안에서 답답하게 안 기다려도 되고.”
진단랑이 배시시 웃으면서 정교랑의 옷소매를 잡았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정교랑이 다시 진 부인에게 예를 표했다. 진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여종과 몸종에게 시중을 잘 들라며 재차 당부했다.
“아, 그리고 제 간식도 주세요, 제 간식이요.”
진단랑이 보채듯 외치자 옆에 있던 여종이 웃으며 진단랑에게 찬합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 정교랑이 보냈던 간식이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진단랑은 신이 나서 정교랑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뒤에 작은 방생지(放生池) 연못이 하나 있는데, 비단잉어가 엄청 많아요. 우리 물고기 먹이 주러 가요.”
멀어져 가는 정교랑 일행을 보며 진 부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랑이 예의범절 모르는 개구쟁이도 아니고, 정 낭자와도 말이 통하잖아요. 정 낭자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같이 있겠다고 하는 것도 진심이겠죠. 더구나 오늘은 보수사의 출입이 삼엄하여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니 마음 놓고 둘러보기 좋을 때잖아요.”
진십팔랑은 진 부인의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었다.
“저 둘이 즐겁게 즐긴다니 우리 모녀도 자매들과 마음 놓고 즐겨야죠.”
진십팔랑의 그럴싸한 일장 연설에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정 낭자와 가깝게 지낸다 했네. 넌 나처럼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어머니, 놀리지 마세요.”
진십팔랑이 진 부인의 뒤를 따랐다.
“전 그저 단랑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정 낭자를 대했을 뿐인걸요.”
진씨 가문 사람들은 인파에 섞여 측문을 통해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갔다.
무수히 많은 신자의 헌납과 공양으로 만들어진 이 유명한 사원은 정전(正殿)이 아니어도 20장(丈) 넓이에 10장의 깊이를 가질 정도로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양쪽에 세워진 전각기둥은 여러 사람이 팔을 벌려 안아야 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동서 방향으로 난 기둥이 대웅보전을 반으로 갈랐다. 이미 자리가 절반 이상 채워졌고,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질서정연하게 나뉘어 앉았다.
진 공자의 인맥 덕에 주육낭도 꽤 좋은 자리에 앉게 됐다. 시야가 탁 트여 선다 의식의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자리에 앉은 사람도 전부 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저쪽에는 진(陳)씨 가문의 여인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의식이 시작되기 전이라, 진씨 가문 낭자들은 주변의 지인들과 웃으며 조용히 인사를 나눴다.
진 부인의 좌우 양쪽 자리는 줄곧 비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몇 명이 들어오더니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밖에서 악기 소리와 불경을 읊는 소리에 이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선다회가 곧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대웅보전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이 시점 이후로는 아무도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주육낭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왔으면서 왜 안 들어와, 뭐하러 간 거야? 이 여인은 어떻게 된 게 한시라도 마음 편히 있지를 못해?
꽃잎 하나가 천천히 연못 위로 떨어지자, 물속에 있던 비단잉어들이 순식간에 꽃잎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속은 걸 알아채고는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진단랑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여종과 몸종은 진단랑이 난간을 제대로 못 잡을까 봐 조심스레 살폈다.
“제가 한번 해 볼게요.”
금가아가 미리 사 두었던 물고기 먹이를 조금 떼어 내어 연못으로 던졌다.
“저 잉어 좀 봐, 듣기로는 폐하께서 직접 방생하신 거라던데.”
시녀가 잉어 중 한 마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연못 안은 잉어로 가득 차 있어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반근은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어느 게 어느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정 언니.”
연못 근처에 있던 진단랑이 정교랑 앞으로 뛰어왔다. 정교랑은 팔짱을 낀 채로 하염없이 연못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기분이 안 좋아요?”
진단랑이 주춤하면서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
“어머니가 그랬어요. 언니는 가족들한테 미움을 받아 불쌍하다면서…….”
“단랑 아씨, 농담이 지나치세요. 부, 부인께서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요.”
뒤에 서 있던 여종이 놀라 황급히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어머니가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도 여종이 말을 못 하게 하자, 어린 진단랑도 자신이 하면 안 될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내, 내 말은 겁내지 말라는 뜻이에요. 나랑 어머니, 그리고 우리 언니 모두 정 언니를 좋아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언니가 필요 없다고 해도, 우린 언니가 필요해요. 언니는 하나도 안 불쌍해요.”
이런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한데. 여종은 더욱 불안해졌다.
뒤에서 남의 얘기를 할 때는 칭찬할 수도, 흉을 볼 수도 있지만 불쌍하다는 말을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된다. 그저 지나가는 이야깃거리로 가볍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자칫하면 사람을 무시하는 거만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여인은 예민한 사람이지 않은가. 표정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찾아볼 수 없지만, 속으로는 남들이 뒤에서 뭐라고 쑥덕거리는지 신경을 쓸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행동이 좀 괴팍하긴 해도 집안사람들이 몹시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행여 말뜻이 잘못 전달되어 이 여인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야단이 날 터였다.
단랑 아씨의 시중을 잘 들라며 재차 당부하시더니, 어려서 그런지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여종의 등골에 땀 한 줄기가 흘렀다. 어떻게든 상황을 만회해 보려고 머리를 굴리던 차에 정교랑이 진단랑의 손을 붙잡았다.
“난 겁내지 않아. 그 사람들은 내가 필요 없는 게 아니야. 괜찮아.”
진단랑은 정교랑의 손을 꼭 잡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괴로워하지도 말아요. 어머니가 또 말해줬는데, 뭐든 다 아는 사람이 제일 괴롭댔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여종은 이어지는 진단랑의 말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괴롭지도 않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롭지 않은 거야. 딱히 괴로울 것도 없어.”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진단랑의 손을 이끌어 앞으로 걸어갔다. 연못 가장자리에 있는 10장 길이의 장랑을 따라 걷다 보니 불전(佛殿)이 한 채 나왔다.
“내가 바보였던 건, 엄연한 사실이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도, 그럴 만했지. 남들이 네게 잘해 준다면 행운인 거고, 남들이 싫어하며 피해 다닌다 해도, 그러려니 해야 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할 수는 없잖아. 누군가 널 싫어한다고 해서, 원한이라도 품어야겠어?”
진단랑이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사촌 언니가 날 싫어해요. 외조모 집에 갔을 때도 다른 여동생들이랑은 잘 놀아 주면서 나랑만 안 놀아 줘서 미워요.”
“미워했더니, 사촌 언니가 같이 놀아 줬어?”
“아니요.”
진단랑이 애늙은이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무시하면 돼. 차라리 그 시간에 널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노는 게 낫지. 단, 그 사람이 널 괴롭히지 않는 선에서.”
“날 괴롭히면요?”
진단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눈빛을 반짝이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진단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모르지. 난 네가 아니니까.”
“그럼 다른 사람이 언니를 괴롭히면 언니는 어떻게 하는데요?”
“그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달렸지.”
진단랑은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목에 걸려있는 금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편전의 뒷문에 도착했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편액을 올려다보자 시녀가 뒤에서 말했다.
“여기는 관음보살을 모시는 대자전(大慈殿)이에요.”
“우리 용녀(龍女) 보러 가요.”
진단랑은 앞서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을 빠르게 잊어버리고는 신이 나서 전각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정교랑에게 외쳤다.
“벽이 온통 관음보살님이에요, 다 예뻐요!”
“관음삼십이응신도예요.”
시녀가 뒤에서 나지막이 설명해 주었다. 정교랑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녀는 뒤따라오던 금가아와 반근에게 조용히 말했다.
“가서 따로 놀고 있어. 아씨는 내가 모실게. 조금 이따가 연못 근처에 자리 깔고 간식 좀 준비해. 저기 마당에 우물 있으니까, 아씨께 올릴 물도 화로로 따뜻하게 데우고.”
시녀의 지시에 금가아와 반근은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불쾌한 기색 없이 몸을 돌려 다시 연못가로 향했다.
선다 의식이 펼쳐지는 대웅보전에 목탁 소리와 불경을 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정중앙에서 좌선을 끝내고 물로 천천히 그릇을 씻는 대선사를 지켜봤다. 의식을 시작한 지 벌써 반 시진이 지난 시간이었다. 주육낭이 좌불안석하며 계속 바깥을 힐끔거리자 진십삼이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자네 뭐하나?
진십삼이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되받아쳤다.
진십삼이 속이 훤하게 보인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육낭을 바라보자, 주육낭은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했다.
주육낭은 대웅보전 안에 앉아 노승의 느린 동작 하나하나를 주시하면서도, 속으로는 정교랑이 여기까지 온 이상 벌써 가지 않고 아직 사찰에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만 계속 떠올렸다. 그럴 게 아니었다면 오지도 않았겠지.
아니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갔나? 대체 무슨 일이기에? 무슨 일이 났다고 이렇게 급하게 가?
아냐, 건방지고 괴팍한 건 그 여인이지. 항상 문제를 일으킨 건 그 여인인데, 누가 그 여인을 건드리겠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육낭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하지만 날 때부터 괴팍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주육낭은 고모를 떠올렸다. 그 왜소하고 허약한 여인이 방석 위에 앉아 자신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이던 모습을.
“자건, 고모한테 달콤한 꿀 사탕이 있어. 어서 이리 온.”
여인은 주육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고모의 방 안에 바보가 하나 들어앉아 있어서, 누구든 그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보가 된다고 했다.
“바보 거는 안 먹어요!”
어린 주육낭이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뒤돌아 뛰어나갔다. 뒤에서 꾸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불안해진 주육낭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청에 앉아 있던 여인은 변함없이 따뜻한 미소로 주육낭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모와 조모의 생김새는 똑 닮았다. 어릴 적 주육낭은 항상 조모 옆에서 잤다. 조모는 저녁때가 되면 주육낭의 발을 씻겨주면서 발가락 사이사이를 꾹꾹 주무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엄지 형은 짧고 둘째 형은 길어…….
주육낭이 깔깔대며 웃으면 조모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런 나날은 너무나도 짧았다. 곧 조모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없게 됐다. 보이는 건 언제나 눈물뿐. 혼자 있을 때도, 사람들 앞일 때도, 조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게 야위어 가던 조모의 모습은 고모와 더욱 닮아 갔다.
아버지는 조모의 부친께서 창술(槍術)에 능하셨다고 했다. 조모는 주씨 집안에 막 시집왔을 때 조부와 창술 대결을 펼친 적도 있는데, 조부께서도 신승을 거뒀을 정도로 조모의 실력은 대단했다.
조모는 기마에 능하고 창도 잘 다뤘다. 무예로 단련된 강건한 신체를 가졌으니 본디 장수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고모가 죽은 후 조모는 약을 달고 살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고모의 뒤를 따라갔다. 부모님은 그 바보만 아니었어도 고모와 조모는 지금껏 잘 살아 있었을 거라고 하셨다.
이 모든 게 그 바보 때문이다. 왜 하필 재수 없게 우리 주씨 가문에 바보가 태어났을까. 사람들이 은밀히 수군대는 말처럼, 조상들이 수없이 저지른 살상에 대한 업보일까?
주육낭은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에서 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진십삼뿐 아니라 앞뒤, 좌우에 앉은 사람들까지 주육낭을 노려봤다. 주육낭은 눈을 내리깔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바보를 탓할 수는 없지. 누군들 바보로 태어나고 싶었겠나. 누군들 바보고 싶었겠냐고.
그래서 정교랑이 자신의 혈육들을 경계하고 피하고 믿지 못하게 됐는데, 이제 와서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나.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대할 것이다. 소원해지고 틈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니, 앞을 내다보는 수밖에.
진십삼 말로는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데, 과연 정교랑이 내 진심을 봐줄까? 그리고 대체 뭘 해야 진심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
대웅보전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주육낭이 고개를 들어보니 명해선사가 물을 뿌리며 복을 나눠 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받았다. 주육낭도 몸을 숙였다.
“당시 무황께서 진제대사(眞際大師)의 호를 내리시고 자의(紫衣)를 하사하셨던 것이, 바로 이 관음전의 영험함 때문이었습니다.”
내시가 손으로 편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별 감흥이 없는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편액을 올려다봤다.
“난 빨리 국수나 한 그릇 먹고 싶구나. 이런 나무나 돌로 만든 꼭두각시가 뭐 볼 게 있다고.”
내시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속삭였다.
“불경하면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어요.”
내시는 공손하게 합장하고 중얼중얼 염불을 외웠다. 진안 군왕은 내시를 흘깃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나무나 돌로 만든 꼭두각시들이 정말 영험하다면, 내 소원이나 들어주라지.”
진안 군왕이 성큼성큼 층계를 올라 높은 문턱을 넘어 관음전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휘황찬란한 금빛의 관음불상이었다. 진안 군왕이 그 거대한 불상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엇 하며 놀라는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진안 군왕이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관음불상의 왼편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청색 옷을 입고 머리를 간단하게 묶어 올렸다. 여인 역시 누가 불쑥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피부는 백옥처럼 곱고 기세 넘치는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여인은 무뚝뚝한 표정만큼이나 굳은 자세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분명 이쪽을 보고 있는데, 눈빛에서 어떤 희비도 읽히지 않아 저 높은 곳에 있는 목석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진안 군왕은 일순간 숨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뻗어 허리춤에 있는 옥패를 만져보았다.
세상에나, 관음보살님, 정말 영험하시군요!
오늘은 선다회가 열리는 날이라 보수사에서는 전각의 출입을 엄금했다. 오직 정전 앞만 백성들이 구경하며 향을 태우고 예불을 올리도록 했다. 뒤쪽에 있는 대자전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필시 선다회 참석을 위해 왔을 것이고, 지금 이 시간에는 대웅보전에 앉아 선다 의식을 구경했어야 했다.
진단랑처럼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하면서도 구속은 싫어하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정해진 건 없기 마련이었다.
정교랑은 벽에 그려진 관음상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진단랑 등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보수사 대자전을 자신들만 드나들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여인들만 있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여종과 시녀는 힐끗거리며 소년을 몇 번 더 쳐다봤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흰색 장포를 입은 소년은 화려한 장신구 없이 허리춤에 옥패만 하나 차고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소년이었다. 백옥과도 같은 그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소년이 서 있는 모습이 꼭 정교하게 조각된 옥과도 같아서 여종과 시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 집 도련님인지 모르겠네.
소년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여종과 시녀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소년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저기.”
소년의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교랑 일행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이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교랑을 향한 웃음이었다.
아니, 어쩜 저리 무례하지?
시녀와 여종은 소년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며 재빠르게 정교랑과 진단랑 근처를 막아섰다. 정교랑이 천천히 벽에서 시선을 떼고 소년을 바라봤다.
저 여인의 표정은 늘 한결같네. 늑대 떼를 볼 때도, 사람을 볼 때도, 저 표정은 참 한결같아.
보아하니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것 같고 규방의 여인인데, 어찌 저리 침착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까? 저 여인이 놀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 아니, 놀라는 때가 있기는 할까?
이거 봐, 내가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눈도 깜짝하지를 않잖아. 눈을 저렇게 크게 뜨고 있는데, 어째서 노려보는 것 같진 않지?
아무리 감정을 숨기려고 해도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보아도 저 여인은 미동조차 없단 말이야. 그때 내가 갑자기 저 여인의 두모를 벗겼을 때와 똑같아. 딱 저렇게 꿈쩍도 하지 않는 무표정이었어.
원래 낯선 사람을 보면 저러나? 아니, 어쩌면, 난 이제 낯선 사람이라 할 수 없을지도.
소년의 미소가 점점 번져갔다.
“아, 여기 있었군요.”
밑도 끝도 없는 소년의 말에 여종과 시녀는 멈칫했다. 요즘 경성의 호색한들은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네나?
정교랑이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인사를 한 셈이었다.
“네.”
설마 아는 사이인가?
시녀도 내심 놀라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정교랑과 소년을 번갈아 쳐다봤다. 가만 보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정 언니.”
진단랑도 몸을 돌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을 차례로 쳐다보더니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역시 어린아이인지라 묻고 싶은 건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
“한 번 본 적이 있어.”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진안 군왕이 환하게 웃었다.
“정씨였어요?”
진안 군왕은 무언가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
“아, 그 저택도 낭자 거였고.”
이번에도 맥락 없는 말이 이어졌다.
“네. 원래 진씨 가문의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내 것이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낭자를 보러 찾아갔는데, 진씨 저택이 아니라길래 사람을 잘못 찾은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뭡니까.”
여종과 시녀는 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교랑의 뒤에 있던 시녀가 진안 군왕을 빤히 보더니, 짧은 탄성 소리를 냈다. 시녀는 예의도 잊은 채 진안 군왕을 향해 삿대질했다.
“아, 아, 그때 그 사람. 그 사람이네요.”
진안 군왕이 시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며 쉿, 하는 동작을 했다.
역시 아는 사이였구나. 진단랑의 여종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남녀가 유별하잖아. 인사말 몇 마디 주고받는 거면 몰라도 말이 길어지면 안 되는데. 진단랑의 여종이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정교랑이 진단랑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응? 어디 가요?”
진안 군왕이 얼른 물었다.
“가야지요.”
정교랑이 고개만 살짝 돌려서 답했다.
“왜 벌써 가는데요?”
“다 봤으니까요.”
진안 군왕이 잠시 멍해졌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대자전을 다 둘러봤으니 가는 게 맞지.
정교랑이 진단랑의 손을 잡고 대자전 밖으로 걸어갔다.
“우리 보탑 보러 가요.”
신난 진단랑이 걸음이 빨라지자 여종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진안 군왕도 뒤따라 나왔다.
“공자님.”
시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진안 군왕을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그만 따라오세요.”
진안 군왕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따라가는 거 아니다. 나도 보탑을 보러 가는 길이야.”
시녀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우리가 다 보고 나면 그때 가세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알았다.”
이자는 경성 제일의 호색한이다. 사람들 앞에서 감히 아씨의 두모에 손을 댄 인간인데, 이런 자의 말을 어떻게 믿어.
“네 아씨가 저 멀리 가셨구나.”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시녀의 뒤편을 가리켰다. 시녀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정교랑 일행이 보였다.
시녀는 정교랑을 따르고부터, 아니, 장 노태야를 따르고 나서부터 한시도 불안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여유롭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꼭 이 호색한 앞에만 서면 여유를 잃어버렸다.
시녀는 진안 군왕을 다시 한번 흘겨본 후 서둘러 정교랑을 따라갔다.
“저 계집이 참 간도 크네요.”
내시가 말했다.
“늑대 떼를 본 사람인데, 간이 작을 리가 없지.”
진안 군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 주인에, 그 아랫것인 법이지.”
어찌 됐든 간에, 저 낭자가 좋다는 말일 테지. 내시가 속으로 생각하고 웃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소인이 항상 칭찬을 듣나 봅니다.”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시가 멀어져가는 정교랑 일행을 보면서 합장했다.
“전하, 과연 영험하지요?”
영험하고말고! 진안 군왕은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영험해.”
정말 영험하잖아!
드디어 찾았어, 드디어 찾았다고. 이렇게 쉽게 저 여인을 찾아낼 줄이야!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눈앞에서 만나다니!
진안 군왕도 성큼성큼 걸어 정교랑 일행을 뒤따라갔다.
진단랑은 탑 주위를 한참 동안 뱅글뱅글 돌았다. 여종은 진단랑을 따라 같이 돌면서 어떻게 소원을 빌어야 하는지 알려 주고, 대충 아무거나 빌어선 안 된다는 귀띔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럼 내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를 위해서 복을 빌면 돼?”
진단랑이 물었다.
“그럼요, 그럼요. 그건 됩니다.”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 언니, 언니도 와서 소원 빌어요.”
진단랑이 해맑게 웃으며 정교랑을 향해 손을 흔들자, 한쪽에서 석탑을 보고 있던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정 아씨는 진인 문하의 사람이라, 부처님께 기도드리지 않아요.”
여종이 조용히 진단랑에게 말했다. 도교 이 진인 문하의 제자가 어떻게 불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겠나.
정교랑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칠층 높이의 석탑에 걸린 구리 방울을 보았다. 봄바람이 스치자, 구리 방울이 맑고 청량한 종소리를 냈다.
시녀는 탑을 돌지도, 정교랑을 따라 석탑 구경을 하지도 않았다. 불안한 듯 끊임없이 뒤를 힐끔거렸다. 예상대로 아까 그 호색한이 몸을 흐느적거리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탑은 처음 세워질 때 서북향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시녀가 얼른 진안 군왕의 말을 빼앗아 이어 말했다.
“……그 당시에 누군가가 연유를 물었더니, 이 탑을 만든 장인이 백 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바르게 세워질 거라고 대답했죠.”
그러면서 정교랑의 팔을 잡아끌어 옆쪽으로 몇 걸음 비켜섰다.
“내년이면 딱 백 년이니, 낭자가 참으로 적시에 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목청을 높이고 웃으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도 눈 안 멀었어요. 잘 보이거든요?”
시녀가 고개를 휙 돌리고는 진안 군왕을 노려보았다. 정교랑이 시녀를 따라 자신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아무 말 없이 탑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이 대꾸하지 않자 시녀는 한시름 놓고, 진안 군왕을 향해 누가 널 상대하겠냐는 눈빛을 쏘아댔다.
그런데도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그렇네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의 얼굴빛이 더욱 환해졌다.
곧게 솟은 측백나무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깍깍 울며 날아갔다. 진안 군왕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측백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경성에 온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이곳은 처음인가 보죠?”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녀는 정교랑의 옆에 꼭 붙어서서 진안 군왕이 더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키가 이 무례한 호색한보다 작은 게 몹시 분했다. 정교랑보다도 작았으니.
문득 예전에는 자신이 정교랑보다 조금 더 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나니 아씨의 키가 더 커진 것 같네. 옷도 새로 해드려야겠다.
“내가 이겼네요. 난 이번이 두 번째거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지만,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았다.
“듣자니 이 측백나무는 한나라 때 거랍니다.”
진안 군왕이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은 측백나무였다. 가지에 난 잎에는 푸르른 초록빛이 돌았다.
“내가 여기를 고작 두 번밖에 오지 않았다는 게 지금은 좀 후회되네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그를 쳐다봤다.
“지난번에 왔을 때 여기 노승이 너무 수다스러워서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내쫓았거든요. 내가 여기 여러 번 와서 이야기를 좀 더 들었더라면, 오늘 낭자한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도 많았을 테니 아쉽잖아요.”
“그리 마음 쓰실 것 없어요.”
시녀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까치발을 들어 군왕의 시선을 가렸다.
“이야기라면, 제가 아씨께 많이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가볍게 다가섰다.
“네 이야기는 네 것이고,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내 것인 게지. 완전히 달라.”
진안 군왕이 웃으며 정교랑을 봤다. 시녀는 이를 갈면서 자신도 진안 군왕을 따라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이런 유치한 기 싸움을 하는 사이, 진단랑이 탑을 다 돌았는지 쪼르르 달려왔다.
“나 배고파. 내 간식은?”
시녀가 반색하며 말했다.
“반근과 금가아한테 따뜻한 물과 함께 준비해 두라고 일렀어요. 우리 다시 연못 쪽으로 가서 먹을까요?”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다 못 먹으면 물고기한테 줘도 되겠다. 물고기들도 우리 정 언니가 만든 간식을 맛있게 먹을 거야.”
반근이 연못 옆에 방석을 가지런히 두고 고개를 들자, 반대편에서 금가아가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나뭇가지로 연못 안을 휘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장난치면 못써.”
반근이 금가아를 향해 외치자, 금가아가 헤헤 웃고는 나뭇가지를 한쪽으로 던졌다.
“아씨, 오셨어요?”
금가아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정교랑 일행을 보며 외쳤다. 여종이 진단랑의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자, 반근도 따뜻하게 데운 손수건을 정교랑에게 건넸다.
“반근 누나.”
반근이 돌아보자 시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금가아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렇게 허둥대? 개한테 쫓기기라도 했어?”
시녀는 황급히 금가아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장랑에서 걸어 나오는 내시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무엄하다!”
내시가 벌컥 성을 내며 호통을 쳤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금가아는 놀라 굳어버렸고, 나머지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행색은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보수사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는 지위였다. 소년의 언행만 봐도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티가 났다. 같잖은 말싸움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작정하고 욕한다면 무슨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었다.
시녀는 내심 불안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딱 잡아떼는 수밖에. 모르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지 않았던가.
시녀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욕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여기 있었네. 지금 누가 무엄한 건데? 누가 무례하고?”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따졌지만 내시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 사찰이 너희들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설령 무례했다 하더라도 함부로 욕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내시가 천천히 말하자 분위기가 무겁게 변했다.
“그러게.”
진안 군왕이 발을 들어 내시를 걷어찼다.
“저쪽에서 별말도 안 했는데, 네가 나서서 나를 욕할 게 뭐냐? 네가 바로 개로구나!”
걷어차인 내시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더니 얼른 웃어 보이며 굽실거렸다. 진안 군왕 덕에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영문도 모른 채 불안에 떨던 금가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섰다. 정교랑이 손을 닦은 손수건을 돌려주자 반근도 금가아를 따라 물러났다. 시녀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정교랑이 자리에 앉도록 부축해 주었다.
진단랑은 급작스럽게 긴박해졌다가 풀어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여종이 손을 꼼꼼하게 닦아주자, 진단랑은 방석 위에 앉아 곧바로 찬합에서 쌀떡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진안 군왕도 자연스럽게 다가와 연못 난간에 기대어 물속의 잉어를 구경했다.
“진씨 가문과는 친척 사이예요?”
“난 정씨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씨라……. 진안 군왕은 나지막이 읊조리더니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곧 웃음을 터트리며 정교랑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 그 정 낭자가 바로 그쪽이었군요!”
길에서 만났을 때 남쪽에서 오는 길이었고, 진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였다. 가는 길이 급하지 않았다면 밤길을 재촉하지도 않았겠지. 시간을 셈해 보면, 진씨 가문이 그 저택을 팔았던 시점도…….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의술로 이 태의를 궁으로 숨어들게 했던 그 정 낭자가 바로 이 여인이었어!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표정에,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한 눈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서울 게 하나 없어 보였다. 무지하여 두려울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어 저리 담담한 것일까?
“그렇게 대단하다면서요?”
진안 군왕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정교랑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정 언니는 당연히 대단하죠. 우리 정 언니가 최고예요.”
진단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럼. 대단하고말고.”
진단랑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진안 군왕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정교랑을 향해 손을 높이 들어 쥐고 있던 간식을 보여 주었다.
“난 이게 제일 맛있어요.”
붉은 옷을 입은 희고 통통한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청록색 떡 한 조각을 들고 있으니, 윤기 나는 떡이 더욱 달콤해 보였다.
“나도 허기가 지네.”
진안 군왕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하자, 진단랑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찬합을 잽싸게 품에 안았다.
옆에 있던 여종은 불안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려다 다시 말을 삼켰다.
정말 먹을 걸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다 큰 도련님이 설마 그러겠어, 그냥 정 낭자에게 말이나 더 걸어보려는 거겠지. 젊은이들의 수작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정교랑은 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소년과 면식이 있어 보이기도 하여 여종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시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진안 군왕을 노려봤다.
“이봐요…….”
시녀가 진안 군왕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에 진안 군왕이 말을 끊었다.
“내가 오늘 아침도 못 먹고 나왔거든요. 원래는 여기서 소면이나 한 그릇 얻어먹고 가려 했는데, 꼬마 낭자가 이렇게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정말 배가 고파서 안 되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먹어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시녀는 잔뜩 화가 난 채로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진단랑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이제 세 개밖에 안 남았다고요!”
“이따 소면을 대접할게. 대신 딱 하나만 줘, 어때?”
진안 군왕이 손가락으로 간식 하나를 가리키면서 장난스레 말했다.
“채소밖에 없는 소면은 안 먹어요. 난 고기 국수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단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더 있어.”
진단랑은 정교랑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품에 안고 있던 찬합을 쑥 내밀었다.
“그럼 하나 줄게요.”
진안 군왕은 한 손으로 소매를 걷으며 가까이 다가와 찬합에서 간식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진안 군왕이 환하게 웃으면서 진단랑을 쳐다봤다.
“정말 고맙다. 오늘이 내 생일인데, 이렇게 맛있는 것을 선물로 주다니.”
진단랑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생일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성대한 연회를 여는 건 아니지만, 잘 크라는 의미에서 온 가족이 모여 소소하게 선물을 챙기고 다 함께 둘러앉아 근사한 저녁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생일인데 왜 가족들이랑 집에서 밥 안 먹고 혼자 놀러 나왔어요?”
진단랑이 물었다.
“단랑 아씨.”
여종은 나지막이 부르며 아예 뒤에서 손을 뻗어 진단랑을 안아 일으켰다.
“아씨, 부인께서 나오셨는지 보러 가 볼까요?”
여종은 진단랑에게 말하며 정교랑 쪽을 쳐다봤다. 정교랑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뜻이기도 했다. 정교랑이 물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랬군요.”
정교랑은 반근이 챙겨온 찬합을 진안 군왕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럼, 이것도 가져가요.”
진안 군왕은 자신 앞에 놓인 찬합을 잠시 보고는 미소지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곧바로 한 손을 뻗어 찬합에서 간식 하나를 꺼내 단숨에 씹어 삼키고는 다른 한 손으로 간식 하나를 쥐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기 시작했다.
정말 배가 고팠나 보네.
그래도 그렇지, 저 호색한은 어쩜 저렇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먹을 걸 구걸한대?
아씨는 언제나 성격이 너무 좋으시단 말이지. 물론 상대방이 도발하지 않고, 상대방이 악의적으로 나오지 않는 선에서.
입에 발린 말을 못 하긴 하지만, 독설을 먼저 내뱉은 적도 없으시고, 상냥하고 스스럼없는 성격이라 대하기도 편한 분이다.
시녀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휴, 아씨는 너무 착해 빠지셨어!
“시간이 얼추 된 것 같은데, 우리도 그만 가 보자.”
정교랑이 일어섰다. 진단랑의 여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근과 금가아에게 서둘러 자리를 치우고 짐을 싸라는 손짓을 했다.
“선다회가 아직 안 파했을 거예요. 그 앞에선 안에 있는 사람 나오는 거 기다리기 힘들어요.”
진안 군왕이 찬합을 품에 안은 채 말했다.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뜨려는 자신들을 비웃는 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여종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요.”
정교랑은 눈을 들어 앞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서봉추가 화로 앞에 쪼그려 앉아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싱싱한 꽃과 과일 사이에서 텅 비어 있는 탁자는 유독 눈에 띄었다.
주위에서 예불을 올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차츰 서봉추 쪽으로 쏠렸다.
“뭐하시오?”
“여기서 화로로 밥을 짓는다고요?”
“음식 공양을 하는 겁니까?”
“음식 공양은 다 입구 양옆에 두지 않나? 여기 둬서 누굴 보여 주려고?”
“쓸데없는 소리. 당연히 부처님께 보여 드리는 거겠지.”
“누가 할 소리를. 부처가 언제 돈 내는 거 봤나? 주머니를 채워주는 사람은 다 우리 같은 구경꾼들이라고.”
“그러게, 혹시 바보들 아냐?”
“바보인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돈이 없는 거겠지. 저기 신선거 사람들 좀 봐. 저쪽에서는 벌써 큰 솥에 부어 둔 육수가 펄펄 끓고 있다고, 저런 게 진정한 공양이지!”
웃고 떠드는 소리가 사찰 내에 울려 퍼지는 불교 악기 소리와 섞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구리 솥 안에 뜨거운 육수가 끓고 있었다. 햇빛 아래서 보니 마치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동정(銅鼎) 같았다. 신선거의 점원들이 은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채소들을 하나씩 들어 솥 안으로 차례차례 넣었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선다회 구경을 오기 위해 다들 새벽부터 길을 나선 터라, 지금이 가장 춥고 허기질 때였다. 맛있는 냄새가 퍼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훌륭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두칠은 자리 뒤편에서 이 광경을 우쭐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역시 우리의 살아 있는 공양이 저기 놓인 죽은 것들보다 훨씬 눈길을 끄는군.”
두칠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정성스럽게 놓인 각양각색의 채소와 과일, 그리고 간식들이 긴 탁자 위에 가득했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는 통로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부처님 앞에서 공양하고,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복을 신선거의 과로신선을 통해 중생과 나누고자 합니다.”
옆에서 신선거의 관리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사람들은 좋다고 호응하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손을 높이 들고 외치기도 했다.
신선거, 신선거.
왁자지껄한 소란에 몰려드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솥 근처로 온 사람들은 숟가락이며 젓가락을 들고 팔을 길게 뻗어 솥 안을 휘저었다. 현장의 열기는 솥 안에서 끓고 있는 육수처럼 뜨거웠다.
한편 대웅보전 안에서는 명해선사가 첫 번째로 우려낸 차를 황금색 휘장 뒤에 있는 대황자에게 올렸다. 이어 승려 열댓 명이 불교 예악에 맞춰 움직이며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명해선사가 우린 차를 차례로 나눠 주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공손하게 찻잔을 받들고 예를 표했다.
예악 소리가 멈추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자를 배웅했다. 황자의 의장 행렬이 자리를 뜨자 승려가 선다회의 끝을 알렸고, 대웅보전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문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매년 있는 일이다 보니,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문밖의 소리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대웅보전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하나둘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명해선사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명해선사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담소를 나누며 문밖으로 나갔다.
대웅보전 앞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인파는 통로 끝에 있는 문 앞에 새까맣게 몰려 있었다.
“오늘은 저쪽이 인기가 많군요.”
“올해는 뭔가 새로운 공양이라도 있나 본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인파가 몰린 쪽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선거야.”
“신선거가 이번에 음식 공양을 한다는데, 한 번에 백 명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솥을 가져왔다더군.”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를 알게 되자, 사람들이 저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인파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신선거의 과로신선이 맛있긴 하지.”
“그럼 오늘 차도 한잔 마셨으니, 저기 잠깐 앉아 있다 갈까요?”
신선거를 주제로 웃고 떠드는 소리에, 청색 도포를 입은 한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교리 대인, 같이 가시겠습니까?”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물어보자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챙겨 주셔서 감사하오만, 집에 일이 있어서요.”
사내는 웃으며 공수의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사내가 사람들 옆으로 지나가자 몇몇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유 교리는 밖에서 식사를 잘 안 하더라고. 듣자니 집에서도 절인 생선만 먹는다던데.”
“에이, 누가 그 정도로 가난하대.”
한 사람이 입을 삐쭉거렸다.
“저 옷 좀 보라고, 한 십수 년도 더 된 옷이야. 사람들이 좀 모이는 행사다 싶으면 꼭 저 옷만 입고 나온단 말이지.”
다른 사람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대꾸했다.
명해선사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에게 예를 표하며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막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진 노태야가 명해선사를 잡아 세웠다.
“스님, 오늘따라 공양을 올리는 곳이 많습니다그려. 이쪽에도 하나 있고요.”
명해선사는 껄껄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진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진 노태야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함께 걸어갔다.
전각 앞의 층계 아래로 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 사내가 허리를 구부리고 물그릇에 손을 담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과로신선을 맛보려고 신선거 쪽으로 몰려가는 통에, 혼자 있는 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명해선사가 시선을 아래로 옮기며 물었다.
“이건?”
이 간단한 말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는 천금에 견줄 만한 가치를 지녔다. 아니, 천금보다 더 얻기 힘들 때도 있다.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오 관리인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옷깃을 털며 걸어 나왔다.
“저희 태평거에서 부처님께 성심을 보여 드리고자 공양을 왔습니다.”
명해선사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더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옆에 있던 진 노태야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탁자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뭘 만드는 건가?”
“소박한 마음을 담은 맛입니다.”
명해선사의 걸음이 멈추자 주위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멈춰 섰다. 몇몇은 같잖다는 눈치였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게 뭡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묻는 사람이 있으니 진 노태야는 잠자코 서서 사내의 손을 지켜보기만 했다.
“두부연(豆腐宴)입니다.”
오 관리인이 대답했다.
두부연?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단어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함께 보시지요.”
오 관리인이 말을 끝내고 탁자 옆으로 몸을 비켰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좀 더 가까이서 구경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고,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며 주위를 에워쌌다.
물그릇 안에 있던 하얗게 생긴 물체가 칼을 든 사내에 의해서 한 겹 한 겹 썰려 나가자, 기괴한 형상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두부를 알아.”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위주의 한 도관에서 팔았는데, 희고 보드랍지만 맛이 떫었지. 근데 그 부들부들한 걸 어떻게 조각하겠다는 거지?”
그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흥미가 돋는지 탁자 주변으로 더욱 가까이 가려 했다. 처음 운을 띄웠던 명해선사와 진 노태야가 도리어 한쪽 구석으로 밀릴 지경이었다. 진 노태야가 뭐라 더 말을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생소한 공양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두부예요.”
몸종이 한쪽 통에 담겨 있던 두부를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머나, 이렇게 부드러운 걸 가지고?”
한 부인이 손가락으로 두부를 살짝 눌러보고는 놀라며 감탄사를 뱉었다. 몸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부를 부인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콩으로 만든 거예요. 고기는 전혀 쓰지 않았고요. 한번 맛보세요.”
“이 상태로 먹을 수 있다고?”
“그럼요. 생으로도 먹고 익혀서 먹기도 해요.”
부인이 잠시 주춤하자, 옆에 있던 소년이 겁 없이 두부를 조금 떼서 입안으로 넣었다. 소년은 두부를 천천히 음미하더니 음, 음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떫은맛도 전혀 없고 좋습니다. 맛있어요.”
소년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손가락으로 두부를 조금씩 집어 맛보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대전 앞도 시끌벅적해졌다.
사람들의 소란에도 이대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에 쥔 칼을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내내 허리를 숙인 채로 이따금 칼을 바꿨다. 조각에 완전히 몰두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서서히 조용해지더니 모든 시선이 이대작에게 집중됐다.
“저것 봐, 법라(法螺: 불교 의식에 쓰이는 악기. 소라 껍데기로 만듦)야.”
한 사람이 나지막이 외쳤다.
“세상에, 정말이네!”
“아니야, 연꽃도 있고 보병(寶甁: 불교에서 꽃병이나 물병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도 있어!”
사람들이 조용히 탄성을 지르며 탁자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칼을 쥔 사내가 여인보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조각하는 모습과 물속에서 두부가 한 겹 한 겹 눈꽃처럼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행여 동작 하나라도 놓칠세라 말소리를 줄이고 심지어는 숨까지 참아가며 그를 주시했다.
“낭자가 보려던 사람이, 저 사람인가?”
진안 군왕이 물었다. 진안 군왕은 대웅보전 옆쪽 회랑 아래에 있는 인파를 보며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진안 군왕이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서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의 근처에는 두 시녀와 사환 하나가 있었다. 그들의 시선도 사람들 무리를 향하고 있었지만, 여인의 표정은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상량, 가서 사람들이 무슨 구경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라.”
진안 군왕의 지시에 내시가 얼른 대답하고 층계에 있는 인파 사이를 힘겹게 파고들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탁자의 물그릇 안에 금방이라도 꼬리를 파닥거리며 뛰놀 것 같은 황금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다.
“우와!”
내시가 저도 모르게 감탄 소리를 내자 주위의 무수한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내시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다시 탁자로 눈을 돌렸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칼을 또 하나 바꿔 들었다. 가뿐한 칼질 몇 번에 황금 물고기 옆에 조그마하게 남은 두부도 정교한 모양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멈춘 듯했다.
“어서 가 보자! 저 앞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대!”
어떤 이가 큰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본다고?”
“대웅보전 앞에서 누가 공양을 올리고 있대!”
“뭐 볼거리라도 있나?”
“거기도 먹거리라던데? 지금 막 만들고 있다더군!”
그 말에 이제 막 과로신선을 한 그릇 먹고 몸을 뜨끈하게 데워 입맛이 돈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어서 가 보자고! 또 먹을 걸 준다고 하네!”
신선거 근처에 있던 인파가 순식간에 대전 앞으로 우르르 몰려, 이쪽 자리에는 달랑 빈 그릇과 젓가락만 남겨졌다. 두칠은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화가 나서 대웅보전 쪽으로 삿대질을 해가며 욕을 했다.
“이 뻔뻔한 놈의 자식들! 죄다 날 따라 한다 이거지!”
두칠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이를 갈았다.
“어떤 놈이 훼방을 놓는지 봐야겠다!”
인파가 우르르 몰려갈 무렵, 대웅보전 앞에서는 또다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내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한참을 구부렸던 허리를 가까스로 폈다. 사내가 고개를 숙여 말없이 두부가 담긴 그릇을 보았다. 반듯했던 사각형의 두부가 법라, 법륜, 보산, 백개, 연꽃, 보병, 금어, 반장 등 불교에서 보물로 생각하는 여덟 가지 물건으로 바뀌어 각기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더 가까이서 두부 조각을 관찰하기 위해 인파가 몰려들었다.
온 신경을 집중한 이대작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해냈구나, 해냈어…….
다른 한쪽에서는 몸종이 뚜껑 달린 잔인 개완(蓋椀)에 쪄낸 두부를 꺼내 놓았다. 몸종이 또 다른 솥에 만들어 둔 양념장을 조금씩 덜어 두부 위에 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게 쪄낸 두부의 향긋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부디 부처님께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오 관리인이 앞으로 나서며 대웅보전을 향해 예를 올렸다.
사람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삽시간에 길을 트자, 장엄한 불전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나지막이 불경을 읊는 소리가 전해졌다.
명해선사가 천천히 다가가 층계 앞에 섰다. 명해선사는 탁자 위에 놓인 넓은 그릇과 그 안에 담긴 불문팔보(佛門八寶:행운을 가져오는 불교의 8가지 상징물)를 바라보았다.
“나무아미타불.”
명해선사는 합장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러고는 층계 앞에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시주님, 공양을 들고 빈도를 따라오시지요.”
신선거 쪽의 인파가 대웅보전 앞에 다다를 때쯤, 탁자 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먹을 거는?”
사람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와 큰 소리로 물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자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던 두부와 양념의 향이 느껴졌다.
“먹을 거라니!”
아직 층계 앞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불쾌한 듯 대꾸했다.
“저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일세!”
부처님께 올린다고? 먹을 수 없는 것만 부처님 앞에다 가져다 놓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그냥 나눠 주지 않나?
“명해선사께서 저 사람이 만든 공양을 부처님께 올렸다고!”
누군가가 손으로 대웅보전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는 사내 하나가 넓은 그릇 하나를 양손으로 받치고 명해선사의 뒤를 따라 천천히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한 여인도 그릇 하나를 들고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듣자니 두부로 뭔가를 만들었대!”
“두부가 뭔데?”
장엄한 불전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사내의 뒷모습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사람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명해선사께서 저리 정중하게 안내하시다니, 정말 대단하군! 저 사람이 누구래?”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서로 수군대며 묻던 질문에 누군가가 멀리서 대답했다.
“이대작!”
사람들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씩씩대며 따라왔던 두칠이 보였다. 그는 아연실색한 모습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두칠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명해선사를 뒤따라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대작!
저 무능한 놈이! 저 무능한 놈이!
이대작!
이대작은 그의 별호였다. 사실 두칠은 이대작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일개 숙수의 이름을 알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두칠의 기억 속 저 사내는 허구한 날 부엌에 틀어박혀 있었다. 매사에 굼뜨고 입바른 소리 한 번을 제대로 못 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요리 사부까지 두었지만 십수 년을 남들 다 하는 요리밖에 할 줄 몰랐고, 해가 지나도 오르지 않는 품삯을 받아 갔다.
두칠에게 이대작은 며칠 동안 나오지 않는다 해도, 아무도 그가 부엌에 없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존재감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고작 그런 사람에게, 게다가 생판 남인 이대작에게 취봉루의 지분을 떼어주기로 했다. 두씨 가문의 재산을 자손 대대로. 고작 그따위 사람에게 뭣 하러!
두칠은 할아버지가 옛정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 연세가 들어 마음이 여려졌다고 생각했다. 장사는 장사일 뿐인데. 그래서 그는 취봉루를 물려받자마자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자들부터 가장 먼저 내쫓았다.
저 무능한 놈을 내쫓을 때, 놈은 무릎을 꿇고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울기까지 했었지. 품삯도 필요 없으니,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로만 돌봐주면 된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자 같으니라고.
듣기로는 그 후에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던데, 어떻게 저렇게 완쾌했지? 심지어 사람들 앞에 나설 정도라니!
“이대작? 당신이 아는 사람이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대단해!”
앞쪽에 서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궁금한 듯 물었다.
대단해! 대단해!
두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가 대단하단 말이오?”
두칠의 질문에 다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못 봤소? 아니 글쎄, 저 사람이 방금 물그릇에서 불문팔보를 조각해 냈다니까!”
그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조각하는 동작을 흉내 냈다.
“그러게 서둘러 달려왔어야지. 난 막 도착해서 그걸 봤소. 물론 금방 들고 가 버렸지만.”
“누구는 팔보를 조각할 줄 모르나?”
두칠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에? 무려 두부로 조각했단 말이오. 저걸 할 줄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대답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두부 말이오, 두부. 두부를 본 적은 있소? 아니, 두부가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요?”
두부? 그게 뭐지? 두칠은 다시 층계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 무능한 놈의 뒷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느 집에서 올린 공양이래?”
“태평거라고 하더군.”
“태평거가 어디 있는 거요? 왜 들어본 적이 없지?”
“그러게, 공양하러 왔으면서 왜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갔지? 표식이라도 내걸지 말이야.”
“저거 하나가 끝인가? 딴 건 없고? 난 아직 구경도 못 했단 말이오. 한입 얻어먹는 건 바라지도 않네만 저게 뭔지 보여 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됐소. 이 집은 성심을 다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러 온 거지, 우리한테 뭔가를 보여 주러 온 게 아니오. 보고 싶을 때 보고, 먹고 싶을 때 먹는 걸 희귀하다고 할 수는 없지.”
보고 싶을 때 보고, 먹고 싶을 때 먹는 건 희귀하지 않다는 거야?
두칠의 얼굴이 더욱 새파래졌다. 아까는 그렇게들 앞다퉈 신선거의 큰 솥을 동내더니, 먹고 나서 입 싹 닦고 흉이나 보는 자식들아!
“두 대인.”
익숙한 목소리가 두칠의 귓가에 스쳤다. 오 관리인이 두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렸다.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저희도 마침 일이 끝나서 이제 가 보려 합니다.”
오 관리인은 두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오 관리인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두칠을 향해 공수했다.
“아 참, 두 대인. 돈 많이 버십시오.”
두칠은 지금껏 살면서 사람의 웃는 얼굴이 이토록 거북하긴 처음이었다. 새파랗게 경직된 얼굴로 서 있던 두칠은 인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내시가 진안 군왕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와 웃음 섞인 말투로 보고했다.
“조각이 어찌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던지…….”
내시는 눈웃음을 지으며 입맛까지 다셨다.
“양념장을 올린 따끈한 두부는 또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요. 직접 먹어 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진안 군왕이 그를 노려봤다.
“사람을 보러 가라고 했지, 누가 먹을 것을 보러 가라고 했느냐.”
내시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이요? 사람은 못생겼습니다. 전하와 비교도 안 됩니다.”
진안 군왕이 콧방귀를 뀌었다.
“대장부가 어찌 외모를 논한단 말이냐. 헛소리 말거라.”
진안 군왕이 시선을 다시 정교랑 쪽으로 돌리다가 돌연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여인 몇 명이 정교랑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중 한 여인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언니, 뭐 봐?”
진단랑이 진십팔랑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물었다. 진십팔랑은 시선을 거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진십팔랑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멈추고 진단랑의 손을 잡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반나절을 놀았더니 피곤하지? 어머니께서 음식을 예약해 두셨으니 우리도 얼른 가자.”
“음식?”
진단랑이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나 소면 사 준다고 했는데, 어디 갔지?”
진 부인은 진십팔랑보다 조금 더 떨어진 뒤쪽에서 걸으며 여종이 나지막이 고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아는 이였다고?”
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아는 사이였어요.”
진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저 앞에서 딸들과 함께 걷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선물한 봄옷을 입고 있었지만, 열몇 살 되는 소녀들 사이에서도 저 여인의 뒷모습은 유난히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야윈 체형 때문인지,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사람으로 보이더냐?”
진 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 공자의 나이는 정 아씨의 나이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였습니다. 준수한 외모에 여유 있는 모습이었고, 대범하면서도 도가 지나친 행동이나 경망스러운 언행과 같은 것들은 전혀 하지 않았지요.”
여종이 진지하게 회상하며 말하다가 웃음을 보였다.
“무엇보다 그 공자가 정 아씨를 보고는 아주 기뻐했습니다.”
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실례한 게 없다니 됐다. 혹여나 누가 정 낭자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낭자를 남이라 생각하지 말고 우리 집 딸들을 대하듯이 나서야 한다. 매사 챙기고 보살펴 줘야 해.”
여종이 즉시 예, 하고 대답했다.
“저 아이에게, 부디 좋은 인연이 있어야 할 텐데.”
진 부인은 다시 고개를 들어 저 앞에 있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손자 장성은 호들갑을 떨며 장 노태야의 팔을 몇 번이나 툭툭 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게 바로 태평거입니다. 저걸 태평거에서 해냈다고요!”
장성이 흥분해서 연신 외쳐댔다.
“내가 아직 귀먹을 정도로 늙진 않았다.”
장 노태야는 손자를 노려보며 옆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방금 전 몰려든 인파에 이리저리 치인 탓에 지친 기색이었다.
그 여인이 또 진기한 먹거리를 만들어냈구먼.
“할아버지, 할아버지. 반근이 아까 태평거의 주인도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뵙게 해 주세요.”
장성이 상기된 얼굴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경성이 이렇게나 좋은 곳이었네요. 떠나기가 싫어지려고 합니다.”
장 노태야도 따라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선다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백성들이 새까맣게 몰려온 탓에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방금 대웅보전 안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장 노태야가 혼잣말을 했다.
진안 군왕은 오후가 되어서야 궁문을 넘었다. 서둘러 마중을 나왔던 궁녀들과 내시들은 바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가는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하께서 저리 즐거워하시다니.”
궁녀 하나가 웃으며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나가서 노는 일이라면 항상 즐거워하시잖아. 다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시니 걱정이지. 태후마마께서 알면 또 근심하실 텐데.”
다른 궁녀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오는 내내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찬합을 바닥에 내려놓고 바르게 앉았다. 내시도 한쪽 옆에 꿇어앉아 진안 군왕과 찬합을 번갈아 쳐다봤다.
“전하, 그렇게 좋으십니까?”
“당연하지.”
진안 군왕은 짧게 한숨을 내뱉고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더니 찬합을 가리키며 자랑했다.
“봐라, 내게 준 생일 선물이야.”
진안 군왕은 ‘내게’라는 말에 특히 힘을 실었다.
그 여인은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는데, 전하께서 저리 기뻐하시네. 한데 그 여인 앞에서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말도 스스럼없이 꺼내시다니. 하긴, 전하께서 오랫동안 외로우시긴 했지.
아무리 군왕이 그런 이야기를 편하게 했다지만, 듣는 사람도 당황한 기색 없이 받아쳤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군왕의 말에 따르면 둘은 이제 두 번째 만나는 것이라는데, 어쩜 그리 오랜 친구처럼 편히 대할 수 있었을까? 생사를 함께 겪은 이들이라 그럴까?
“그 꼬맹이 말로는, 이걸 그 낭자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이어지는 진안 군왕의 말에 내시는 생각을 멈추고 미소지었다.
“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내시가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은 찬합을 열어 안에 남아 있던 간식 세 개를 들여다보았다.
“내 기억에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이걸 만들어 주신 적이 있었어.”
갑작스러운 어릴 적 얘기에 내시의 안면 근육이 살짝 떨렸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때의 맛과 비슷할지 잘 모르겠네요. 전하, 어서 한번 드셔 보시지요.”
내시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간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비슷하겠지, 간식은 다 이렇잖아. 뭐, 아닐 수도 있고. 맛이 어땠는지는 나도 진작 잊었거든.”
진안 군왕이 덤덤하게 말하고 웃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폐하와 마마께서 생일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진안 군왕은 찬합 뚜껑을 닫아 탁자 아래로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문 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내시 네 명이 양손에 커다란 판을 얹고 들어왔다. 판 위에는 금, 옥, 비단과 각종 붓, 먹, 종이와 벼루가 올려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값지고 진귀한 것들이었다.
“폐하께서 문방사보(文房四寶) 한 묶음과 옥대를 하나 하사하셨습니다.”
“태후마마께서 금으로 만든 마노 한 쌍과 개완 한 구를 하사하셨습니다.”
“황후마마께서 남해보석 12개를 하사하셨습니다.”
“현비마마께서…….”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선 후 큰절을 올렸다.
“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태평거 안. 이대작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부복했다.
“아씨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대작은 바닥에 고개를 박고 일어나지 않은 채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고마워할 게 뭐 있어요. 두부를 내가 조각한 것도 아니고.”
정교랑의 대답에도 이대작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다. 제발 자신을 내쫓지 말아 달라고, 살길을 열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이대작은 열 살 때부터 사부를 따라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오직 요리 외의 다른 것은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두 노태야가 주기로 한 취봉루의 지분을 받지 않아도 좋고, 품삯을 깎아도 좋으니, 제발 내쫓지만 말아 달라고 빌었다.
언변이 부족한지라, 그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빌 수밖에 없었다.
제발요, 제발요. 주인어른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요.
이대작은 엎드려 빌었다. 볼에 닿은 소매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하고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싸늘하게 내쳐졌다. 무능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됐을뿐더러, 급기야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이 가까워졌다. 소도 팔고, 땅도 팔고, 아내가 혼수로 가져온 밭까지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노모는 노망이 났고, 한없이 착한 아내는 몸이 허약했으며, 아이는 너무 어렸다. 그가 죽고 나면 앞으로 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땅을 다 팔고 나면 집을 팔 것이다. 아내는 친정의 강요로 개가하고, 아이는 굶어 죽거나 노비로 팔려가겠지. 노모는 집도 없이 떠돌다가 아사할 테고. 운이 좋아 마을 이웃들에게 발견되면 그나마 거적때기에라도 말아 묻어 주겠지만, 운이 나쁘면 들개들의 먹잇감이 될 터였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떠들다 이 집안 얘기가 나오면 가엾어하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더 이상 화제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차차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다름없어질 테지.
어떤 식의 결말이든 간에, 오늘 같은 결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직접 만든 요리를 손에 들고, 황실에서도 대우하는 대선사를 따라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불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스님의 예불 소리와 함께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금빛 찬란한 불상 앞에 올려두었다.
나 이대작이, 직접, 만든 요리를!
이대작이,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하게 됐어!
이 모든 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대작이 서서히 고개를 들자, 옆쪽에 앉아 있는 시녀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봐요, 병을 치료할 의원을 데려왔어요.”
어두컴컴한 방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의원을 데려왔으니 금방 나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천천히 고개를 든 이대작이 눈앞에 단정히 앉은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아씨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인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대작은 다시 고개를 떨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인, 이제 완쾌했습니다.”
병만 치료한 게 아니라, 운명까지 고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