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60)

-자재(自在)-

태후궁.

태후는 황제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

나이가 쉰 정도 된 황제는 수척한 모습이었다. 병약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다행히 정신은 맑아 보였다.

“짐이 보기에는 위낭도 나이가 제법 들었고, 진 대인의 가문도 나쁘지 않으니…….”

“사낭.”

태후는 말을 뱉으려다 잠시 멈추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동자(童子. 동정인 남자)의 몸이어야 귀한 것이오. 그게 깨지면…… 좋을 게 없소.”

황제가 멈칫했다. 곧 태후의 말뜻을 이해한 황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계속 혼자 지내게 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본궁도 그 정도로 무심한 사람은 아니오. 몇 년만 더 붙잡아 둡시다. 대황자가 혼례를 올리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이라도…….”

황제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려면 몇 년이나 더 지나야 하지 않습니까?”

“고작해야 오, 육 년이오. 우리 방씨 가문 사내 중엔 혼례를 늦게 올린 이가 많잖소. 노왕(魯王)은 서른이 되어서야 가정을 이뤘지만, 남들처럼 자손을 많이 봤지. 문제 될 게 없소.”

노왕은 병 때문에 혼례를 치를 수 없어 계속 미뤘던 것인데, 그걸 비교하다니.

황제는 쓴웃음이 나왔지만, 직접적인 수혜자이자 강산과 사직을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으니 진안 군왕이 자식을 데려다준다는 허무맹랑한 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때가 되면 꼭 위낭에게 좋은 신붓감을 골라주셔야 합니다.”

황제가 결론을 짓자 태후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따지고 보면 본궁이 직접 키운 아이나 다름없잖소.”

갑자기 태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나저나 진소가 괘씸하군!”

효성이 지극한 황제였지만, 내명부의 말에 휘둘려 정사를 돌볼 정도는 아닌지라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위낭도 참 장난이 심했지요. 진 대인이 화가 날 만합니다. 대신 나중에 어마마마께서 진 낭자에게도 좋은 혼처를 구해 주십시오.”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고리타분한 저 신하들은 걸핏하면 본궁을 가리켜 욕을 해대고 있소. 그러면 천하 사람들은 잘했다고 칭찬을 하지. 본궁은 저자들을 상대하며 본궁을 밟고 이름을 드높일 기회를 주고 싶지 않소. 진소의 여식이 누구와 혼인을 하든 좋을 대로 하라지. 다만 우리 가문으로 시집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오.”

아마 저쪽에서도 원치 않는 일일걸요. 황제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조정의 중신과 호족들은 점잖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들은 황실과 혼사를 맺으면 앞길을 망치기라도 하는 듯 한사코 안 된다며 몸을 낮췄다. 황실과 혼사를 맺고 싶어 하는 이는 널리고 널렸으니, 훌륭한 신하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굳이 혼담을 넣어 체면을 구길 필요는 없었다.

혼사 문제로 근심하는 것은 비단 황실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천자에겐 천자의 번뇌가 있고 보통 사람에겐 보통 사람의 근심이 있기 마련이었다.

진씨 가문의 여종 두 명이 물러나자 주 부인은 참았던 울화가 치밀어 올라 찻잔을 거칠게 바닥으로 내던졌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게야?”

주 부인이 소리쳤다.

“어머니.”

진씨 가문 사람들이 물러나자 밖에서 기다리던 주육낭이 급히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으며 예를 표했다.

“이건 진 공자의 뜻입니다. 진 부인께서 번복하며 식언을 하시는 게 아니고요.”

주육낭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주 부인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퍼뜩 스쳤다.

“이, 이 못난 놈!”

주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주육낭에게 호통을 쳤다.

“진씨 가문에서 그 애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그 애와 혼례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으냐? 꿈도 꾸지 말거라!”

주육낭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애와 혼인할 생각 없습니다. 어머니, 그 아이는 진씨 가문과 어울리지 않아요.”

주 부인이 혀를 찼다.

“내가 널 낳았는데, 네 알량한 속셈도 못 알아볼 것 같아? 그 애는 진씨 가문의 그 절름발이와 안 어울리고 너랑 어울린다, 이 말이지?”

주육낭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소리쳤다.

“어머니, 자꾸 절름발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 모습을 본 주 부인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저 봐라, 저 봐. 이젠 그 천것 때문에 나한테 말대꾸까지 하네!”

“어머니, 그 애가 십삼의 다리를 고치게 하려면, 진씨 가문으로 시집보내선 안 됩니다. 진씨 가문도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 때문에 번복한 것이니 괜히 넘겨짚지 마십시오.”

일어서며 말을 내뱉은 주육낭은 곧장 돌아서서 성큼성큼 나갔다. 주 부인은 더욱 울화가 치밀어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다.

주 노야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주 부인이 울먹거리며 이야기를 마치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 노야가 물었다,

“그럼 강주는 안 가도 되는 거요?”

“가야지, 왜 안 가요? 어쨌든 시집은 보낼 거예요. 진씨 가문이 아니더라도 다른 집에 보내면 되죠. 꼭 보란 듯이 시집보낼 거라고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봄비는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몇 사람이 신선거 앞으로 와 멈춰 섰다.

“비 오는 날에는 여기 와서 먹는 게 최고지.”

한 사람이 말했다.

“에이, 여긴 별 재미 없어, 비싸기도 하고. 내가 더 좋은 곳을 알고 있지, 따라오게나.”

다른 한 사람이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그래도, 과로신선이 맛있잖나.”

“낙득자재도 과로신선이랑 똑같아. 오히려 더 맛있지.”

소매를 당기던 이가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의 소매까지 붙잡고 길을 안내하려 했다.

“어서 가세, 어서. 간 김에 득월루(得月樓)에 새로 들어온 기녀도 구경하고. 신선거에는 과로신선만 있지 기녀는 못 부르잖나.”

최근 들어 이런 대화가 부쩍 많이 들렸다.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점원들은 실랑이하던 무리가 결국 발길을 돌리자 서로 눈짓을 했다.

“어서 가서 관리인께 말씀드려.”

점원 중 하나가 재빠르게 식당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신선거의 어느 방 안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보고 와, 얼른 가서 알아보라고! 낙득자재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

분을 칠한 두칠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고, 구레나룻에 꽂힌 꽃도 심하게 흔들렸다.

정교랑이 방에서 걸어 나오자, 금가아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뛰어오며 물었다.

“아씨, 아씨께서 저희를 데리고 장 구경 가신다면서요?”

정교랑은 이미 진(陳) 부인이 보내준 봄옷으로 갈아입었다. 선명한 주황색 치마에 금색 해당화가 수놓아진 저고리의 봄옷이었다. 진 부인도 그녀가 수수한 색의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른이 보기에 그 나이대의 여인에게는 산뜻하고 고운 색이 잘 어울렸다. 그래서 수수함과 화려함이 잘 어우러진 옷을 선물한 것이다.

정교랑은 외출을 위해 머리를 올려 묶었으면서도 은빗 하나만 꽂았다. 시녀가 뒤따라와 정교랑의 머리에 두모를 씌우며 금가아를 놀렸다.

“그래, 넌 안 가고 싶어? 아니면, 또 길 잃을까 봐 그러는 거야?”

소년은 계집에게 놀림을 받자 기분이 상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반근 누나, 놀려도 소용없어.”

금가아가 다시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대문을 열었다. 정교랑이 발을 내딛자 시녀도 뒤따라 나섰다. 별안간 무언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반근이 회랑 아래에 목을 웅크리고 서 있었다.

“반근, 어서 가자.”

시녀가 웃으면서 반근에게 손짓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 ‘반근’이 누굴 칭하는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반근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 나는 집 지키고 있을게.”

“무슨 집을 지켜. 요즘 같은 태평성대에 도둑이 들면, 관아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목이 달아날 텐데.”

시녀가 웃으며 반근을 회랑 아래에서 잡아끌었다.

“가자, 가. 아씨께서 특별히 우리를 데리고 나가시는 건데, 아씨 체면 좀 살려드려야지.”

반근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주눅 든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시녀를 따라 나왔다.

“나는 길 안내해야 하니까, 반근이 옆에서 아씨 좀 부축해드려.”

시녀는 반근의 대답도 안 듣고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참 좋아. 여기서 나가면 바로 경성에서 제일 북적북적한 저잣거리라니…….”

잠시 머뭇거리던 반근은 정교랑이 시녀를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얼른 옆으로 따라붙었다. 금가아는 맨 뒤에 있다가 신이 나서 문을 잠그고 이들을 따라갔다.

경성에 온 지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지만, 정교랑과 아랫것들이 함께 장 구경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봄날이 한창 포근하여 꽃이 만개할 시기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잠화(簪花: 머리에 꽂는 꽃)를 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거리에 즐비한 점포에서는 호객행위를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다리 아래에 있는 구멍은 성문 밖까지 이어져 있대. 그리고 안에 엄청 큰 호랑이가 산대.”

지나고 있는 다리의 아래를 가리키며 시녀가 말했다. 금가아가 손에 있는 과일을 입에 쑤셔 넣으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반근 누나 또 나 놀리는 거지? 호랑이는 다 산에 있는데 어떻게 경성 안까지 들어와?”

“놀리는 거 아니야.”

정교랑 옆에 꼭 붙어 걷던 반근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내가 듣기로는 정말 있었어.”

금가아와 시녀, 정교랑 모두 반근을 쳐다봤다. 갑작스럽게 이목이 집중되자, 퍼뜩 정신을 차린 반근은 순간 불안해졌다.

듣기로는…….

그때는 반근이 경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주육낭의 호감을 얻은 시녀이기에, 모두가 그녀를 친절하게 대했다. 같이 장 구경도 나가고, 경성의 경치 좋은 곳도 보고, 저잣거리에서 오가는 갖가지 소문도 전해 듣고.

하지만 그때의 반근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반근은 코끝이 찡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듣기만 들어봤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

시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웃으면서 팔을 흔들며 보챘다.

“착한 언니, 얼른 얘기해 줘.”

반근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듣기로는 어느 부자 상인이 잡아다 키우는 거였는데, 어느 날 도망쳐버렸대. 그때 그 호랑이를 찾겠다고 온 경성을 다 뒤졌지만 못 찾아서 한동안 야간 통행금지령도 내렸고. 놀랍게도 이 다리 아래의 구멍에서 한 달 넘게 있었대.”

“그럼 그 호랑이는 뭘 먹고 살았지?”

금가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물이 말라 있을 때라, 쥐나 들개가 안에 있었나 봐. 한 달 뒤에 왔던 폭우로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호랑이가 뛰쳐나와 발견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숨어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를걸.”

반근이 말을 마치며 고개를 슬쩍 들었다.

“하하, 정말 재미있네!”

금가아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재미있죠, 아씨?”

시녀가 웃으며 정교랑에게 물었다. 반근은 다시 긴장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응, 재미있네.”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근은 그제야 긴장을 조금 풀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반나절이나 지났네, 밥 먹으러 가자.”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시녀와 반근은 좌우 양쪽에서 정교랑을 보호했다.

“경성에서는 어느 집이 맛있어?”

시녀가 반근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었다.

“가 본 곳이 어디, 어디야?”

경성에 먼저 와 본 사실에 관한 질문이었기에 반근은 방금 전처럼 자괴감을 느끼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다 대답했다.

“난 춘풍도와 류당거만 가 봤어.”

“아, 그 두 곳?”

시녀는 손을 내저었다.

“거기 술 파는 기녀들이 정말 간사하지. 아씨, 아니면 춘이화에 갈까요? 거기가 술은 별로지만 위치도 좋고 나오는 요리도 꽤 괜찮아요.”

어느덧 저잣거리에 도착한 정교랑 일행은 식당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여기면 돼. 굳이 제대로 된 집으로 갈 필요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하긴, 맞는 말씀이네요. 아무리 잘해도 태평거만 하겠어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하자 금가아와 반근도 같이 웃었다. 네 사람은 근처 가장 가까운 곳으로 편히 들어갔다.

“낭자, 이쪽으로 드시지요.”

점원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식당이라 층이 하나뿐이고 별도로 마련된 방은 없었다. 식당 내부는 전부 좌석으로 채워져 있었고, 손님 몇 명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정교랑 일행은 식당의 가장 안쪽에 자리했다.

시녀가 점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고기 요리 두 개, 채소 요리 두 접시랑 차 한 잔, 물 한 주전자면 돼요.”

점원이 주방을 향해 큰소리로 주문을 외치며 걸어갔다.

보통 식당에서는 정식이 나오기 전에 냉채가 먼저 나온다. 유명한 식당에서는 냉채를 몹시 정갈하게 만들고 비싼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반 식당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는 그저 일반 식당이니 간단하게 꿀에 절인 과일이 나왔다.

새로운 손님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장, 여기 낙득자재 있습니까?”

시끌벅적한 가운데 튀어나온 이 말에 시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한쪽에 자리한 세 사람이 점원에게 주문을 하고 있었다. 점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있습니다, 있지요. 낙득자재 한 상이요? 채소로 드릴까요, 고기로 드릴까요? 매운 탕과 맑은 탕이 있고, 채소는 열 가지와 네 가지 중 고르시면 됩니다.”

점원이 유창하게 설명하자, 손님들은 익숙한 듯 잠시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본 시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툭 내뱉었다.

“이, 이, 이 낙득자재라는 게 벌써 이렇게 종류가 많아졌다고?”

“그야 당연하지요. 괜히 낙득자재겠습니까. 내가 먹고 싶은 대로 시켜서,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게 맛인데.”

바로 옆 탁자에서 시녀의 말을 들은 손님이 대꾸했다. 시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저쪽에서 주문하던 세 사람이 자연스럽게 점원에게 대답했다.

“고기 들어간 것으로, 맑은 탕에 채소는 열 가지요.”

정교랑이 바로 옆쪽에 앉아있던 손님을 쳐다보며 물었다.

“채소를 그리 많이 시키면, 분명 비싸겠죠?”

단정하고 어여쁘게 생긴 어린 낭자가 물어오니, 옆에 있던 사내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요, 안 비쌉니다. 채소 몇 단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낭자. 이건 그저 곁들이는 음식일 뿐이죠. 이것만 주문하면 이 식당은 적자가 나서 문을 닫아야 할걸요? 다들 술도 주문하고 요리도 몇 개 시켜 먹곤 합니다.”

사내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손을 높이 들어 점원에게 외쳤다.

“여기 낙득자재 하나요. 채소만 넣고 끓인 매운 탕에 채소 세 가지요.”

주문을 마친 남자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낭자도 하나 시켜서 맛보는 건 어떻습니까? 간단하고 편하게 먹는 것인데도 맛은 좋아요. 저기 신선거에서 파는 과로신선보다 더 좋다니까요. 아, 과로신선은 알죠?”

사내는 말하는 도중에 혼자 이마를 탁 치더니 말을 이어갔다.

“과로신선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낭자도 알고 있겠죠. 그렇지만 오늘 이 낙득자재를 한번 먹어 본다면 이게 그 유명한 과로신선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정교랑이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젓가락을 들었다.

시녀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통쾌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퍼졌네요? 그리고 종류가 엄청 많아졌어요. 이게 불과 며칠 만에 일어난 일이라니.”

시녀가 중얼거렸다. 정교랑이 젓가락으로 냉채를 들어 한입 먹었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거지.”

천천히 말하는 정교랑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두칠이 무거운 표정으로 안에 들어섰다. 고급스러운 연화방 안에는 연령대가 다양한 열댓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두칠이 씩씩거리며 들어오자, 무표정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

“두 대인, 돈을 쓸어 모으셔야 할 시간에 저희를 불러서 무슨 할 얘기라도?”

앉은 사람 중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먼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두칠은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돈을 쓸어 모아요?”

두칠은 냉소를 짓더니 갑자기 옷자락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이 두칠이 주인장분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어찌 이 두칠의 생계를 끊으려 하시는지요!”

단도직입적인 말에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웃고 있던 사람은 여전히 웃었고, 무표정인 사람은 그대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두 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아까 처음으로 입을 열었던 연장자가 말했다.

“동종 업계 장사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망하길 바라는 원수지간이 되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누굴 망하게 할 수 있으면,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도 두칠을 냉랭하게 쳐다보며 코웃음 쳤다.

“두 대인, 다들 어린아이도 아닌데, 그런 철없는 얘기는 하지 맙시다. 장사가 안 되는 이유는 우리한테 물을 게 아니라 스스로한테 물어봐야죠.”

방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포씨 가문 십칠 형님은 우리 집 망하라고 매일 저주한 적 없소이까?”

어떤 이가 장난스레 말했다.

“일단 자네 집에 있는 포씨 가문 저주 인형부터 없애 버려. 그럼 우리도 관둘 테니까.”

냉랭하게 말했던 이가 대꾸했다.

언뜻 보기에는 시비를 걸고 말싸움을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긴장감이 사그라드는 분위기였다. 방 안이 곧장 웃음소리로 메워졌다.

웃지 않는 건 두칠뿐이었다. 점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던 두칠이 목청을 높여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다 아실 거 아니오. 이 두칠은 여기에 자리를 새로 열면서, 여기 앉아 계신 그 누구의 요리도 따라 하지 않았소! 근데 지금 여러분들을 좀 보시오. 집집마다 신선거의 과로신선을 팔고 있잖소.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방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두 대인, 괜한 말씀 마십시오. 우린 과로신선을 만들 줄도 몰라요.”

사람들이 웃으며 말하자 두칠은 냉소를 지었다.

“‘신선보다 좋은 게 인간이지, 낙득자재 자유롭다네.’ 이 노래가 경성 바닥에 울려 퍼지고 나서 낙득자재를 먹어 보지 않았다는 사람이 없소이다. 내가 눈멀고 귀먹은 줄 아시오? 다들 해도 너무하십니다.”

“두 대인도 낙득자재를 이미 알고 있다면서 뭘 더 물어보려는 거요?”

한 사람이 웃음기를 거두고 냉담하게 말했다.

잔뜩 흥분한 탓에 두칠의 얼굴에 발라져 있던 분이 떨어져 내렸다. 두칠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낙득자재라는 게 뭐요? 바로 우리 식당에서 파는 과로신선 아니오!”

“그게 어떻게 당신네 거요? 솥이 당신네 건가, 아니면 불이 당신네 거요? 솥과 불은 당신네 식당만 써야 하고 남들은 쓰면 안 된단 말이오? 솥과 불을 쓰는 것 외에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소. 가격은 더 말할 것도 없지. 당신네 식당의 신선 값이 한 푼, 두 푼 할 때가 있긴 했소?”

방 안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냥 두 대인에게 툭 까놓고 말하리다. 낙득자재는 팔기 위해서 만든 요리가 아니오. 가서 소문 좀 들어보시구려. 애초에 처음 시작도 손님들이 달라는 대로 주다 보니 그렇게 된 거요. 어떻게 만드는지, 뭘 원하는지, 어떻게 먹는지는 다 손님들이 가르쳐 줬지. 그러니 우리가 돈을 받기 민망할 수밖에. 재료야 몇 푼 하지도 않는 것을. 두 대인, 생각해 보시오. 정말 우리끼리 생각해낸 거라면 이런 식으로 팔 수 있었겠소?”

한 노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두칠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듣기로는, 서생들이 야외에서 대충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이런 요리법을 만들었다더군. 그건 확실해요. 그 서생들 중 누군가가 두 대인의 과로신선을 먹어 보고는 그런 조리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노인은 양 손바닥을 보이며 어찌할 도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죄를 묻는다면 너무 억울하잖소. 정 그리 화가 나거든 그 서생들을 찾아가 보시구려.”

두칠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두 대인, 여기 앉은 사람들은 모두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쌀쌀맞던 포씨 가문 사내가 일어나 말을 이어갔다.

“손님이 주문하는데, 우리가 없다고 할 수도 없잖소. 장사는 원래 다들 그렇게 하는 거지. 아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신선거에서 정식 요리를 새로 낼 때, 내 식당의 어떤 요리와 겹치더라도 이 포십칠은 절대 따지지 않으리다. 기껏해야 저주 인형이나 하나 더 만들 뿐이지.”

방 안은 또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맞소, 맞소. 우리 집도 그러리다. 난 포십칠보다 점잖은 사람이니 뒤에서 딴짓도 안 하겠소.”

“류 대인,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그 집 식당에서 근래에 새로 내놓은 조화불이 우리 집의 도장불과 너무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렇소, 근데 그게 뭐? 당신네는 당근으로 불상을 조각해도 되고, 난 하면 안 된다는 거요?”

방 안의 사람들이 서로 농담과 욕을 섞어가며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질문을 신경 쓰지 않자 두칠은 제 성에 못 이겨 소매를 뿌리치며 나가 버렸다.

이 노련한 장사치들 앞에서 무언가를 따져 봤자 소용없다는 건 두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찍소리 않고 참으면 억울해서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서생?”

두칠이 이를 꽉 깨물고 통로에 있는 꽃 선반을 걷어찼다.

“어떤 망할 놈이 내 장사를 망치려는 게야!”

꽃 선반이 쓰러지면서 쿵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근래에는 별실이 대부분 비어 있었기에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두칠은 통로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면, 저희도 정식 요리를 팔까요?”

관리인이 물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칠이 호통을 쳤다.

“이제 와서 정식 요리를 팔라고? 숙수를 어디서 데려올 건데?”

관리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주인어른, 다른 식당들은 여러 가지 정식 요리를 내올 뿐 아니라 낙득자재도…….”

관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칠이 찻잔을 내던졌다.

“낙득자재는 무슨! 우리 과로신선을 흉내 내는 거지! 이 뻔뻔한 인간들!”

내던져진 찻잔은 관리인의 어깨에 맞았다. 고통에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날아오는 찻잔을 감히 피할 수도 없었다.

“주인어른, 지금은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이미 팔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막을 방법은 없잖습니까.”

관리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차피 식당에서 판다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데다, 쓰는 식기도 다를 게 없다. 한 집에서 어떤 요리를 한다고 해서 다른 집에서 못 팔게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두칠은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힘껏 탁자를 내리쳤다.

“그럼 좀 비싸게 팔든가! 제길, 고작 그 값을 받고 팔다니!”

그들이 낙득자재를 파는 가격은 신선거의 특제 양념장 하나 가격만도 못했다.

“분명히 고의로 그런 거다! 애초부터 이걸로 돈 벌 생각은 하지도 않았겠지. 다들 나 하나 짓밟아 보겠다고…….”

“그, 그럼 우리도 가격을 내리면요?”

관리인이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두칠이 다시 관리인을 향해 호통쳤다.

“뭐가 어째? 당나귀한테 머리라도 차였나? 이 판국에 가격을 어떻게 내려? 값이 싸지면 어디 신선이라고 말할 수나 있고? 그냥 인간이 먹는 거랑 똑같은데, 뭐 하러 굳이 여기 와서 먹어! 아무 집이나 들어가도 똑같은데! 얼간이 같으니라고, 애초에 자네를 왜 데려왔는지 모르겠네. 어머니께서 자네가 원숭이처럼 영리한 사람이라고 하시길래 데려왔더니만 이게 뭐야, 퉤!”

지금의 관리인은 두칠의 외가 쪽 사람이었다. 두칠의 식당에서 갑자기 떼돈이 벌려 숙부들과 재산싸움이 벌어졌을 때,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얻어 보고자 두칠 편에 서서 여러 가지 방안을 내며 조언에 힘쓴 자였다. 그때 두칠의 눈에 띄어 어머니의 바람대로 신선거의 관리인 자리를 맡긴 터였다.

“내 양조부를 뵈러 가야겠다!”

두칠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두출의 호통에 얼굴에 빨갛게 달아오른 관리인이 얼른 두칠을 막아 세웠다.

“주인어른, 법은 다수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닙니다. 지금 한두 집에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경성의 모든 식당과 술집에서 만들어 파는데, 그들이 유 대인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경성은 중서문하성 비각의 천하가 아니다. 자연히 유 교리 한 사람이 한 말이 곧 법으로 통할 리도 없는 곳이다.

두칠이 다시 옷소매를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럼 말해 보게, 어찌해야겠나?”

관리인이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절대로 가격을 내리지 말고, 신선거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야 해. 신선은 남다르다는 걸 보여 줘야지. 비싸게 팔면서 아무나 먹고 싶다고 해서 먹을 수 없다는 걸 알리고, 그렇게 이름을 알리고 또 알리다 보면…….”

이리저리 서성이며 돌아다니던 관리인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주인어른! 그겁니다!”

관리인은 스스로도 놀란 듯이 크게 기뻐하며 두칠 앞에 꿇어앉았다. 두칠은 그저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 이 얼간이가 정말로 좋은 묘책을 생각해 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게 뭔데?”

두칠이 못 미더운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어른, 주인어른.”

흥분한 얼굴의 관리인이 두칠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3월 20일에 경성 보수사에서 대선사 법회를 열 겁니다.”

그야 온 경성 사람이 다 아는 일이지. 두칠은 언짢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거기 가서 시주나 할 기분 아니다.”

“가셔야 합니다, 꼭 가셔야 해요. 그것도 아주 요란하게 가셔야 합니다. 양조부께도 부탁드려 함께 가셔야 해요!”

두칠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관리인을 쳐다봤다.

“주인어른.”

관리인이 눈을 빛내며 두칠에게 바짝 다가갔다.

“음식 공양이요!”

두칠이 퍼뜩 깨닫고 손을 들어 탁자를 내리쳤다.

같은 시각, 태평거에서도 탁자를 치는 소리가 울렸다. 오 관리인이 서무수를 진지하게 쳐다봤다.

“주인어른, 이건 좋은 기회입니다!”

서무수도 구미가 당기는 듯, 관리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소. 관리인이 하라는 대로 하리다. 말해 보시오. 어떻게 하면 되겠소?”

“사실 말하자면, 원래 보수사가 차정사보다 유명하진 않았습니다. 전 왕조 때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는 저잣거리의 낡은 전각에 불과했지요. 오래된 측백나무 이십여 그루와 눈먼 노승 한 분만이 향불을 지키고 있었고요.”

늙은 관리인이 회상하는 얼굴로 말했다.

방 안에 있는 서무수와 범강림은 경성 사람이 아니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방금 불려 들어온 이대작도 경성 근방에서 자랐지만, 부엌에 틀어박혀 일만 하다 보니 경성의 풍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몸종은 서무수 무리보다도 경성에 늦게 올라왔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관리인의 말에 집중했다.

“후에는 정혜대사(淨慧大師)께서 경성에 머무르며 보수사에 계셨어요. 그분은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불법을 설파하셨죠. 그렇게 20년이 지나니 잡초만 무성하고 낡아빠진 전각이었던 보수사가 지금의 불상 가득한 전당이 되었지요.”

앉아 있는 사람들은 불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20년 동안 들인 노고에 감복하여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규율이나 불교도리에 관해서는 저 역시 무지합니다. 정혜대사께서는 3월 20일에 입적하셨죠. 그 후로 보수사에는 매년 3월 20일이면 대선사 법회를 여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오늘날의 명해선사는 차를 잘 우려서 법회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셨고요. 명해선사의 선차 한 잔은 천금보다도 얻기 힘들 정도죠.”

“차? 우리가 먹는 차 말이오?”

범강림이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요리는요? 요리라고 다 똑같은 맛이 나지는 않잖습니까.”

늙은 관리인이 웃으면서 답하자 범강림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형님, 뭘 하려는 겁니까? 우리도 가서 차 한 잔을 받아오면 돼요? 좀 있으면 식당에 손님들 오실 텐데, 별일 없으면 전 이만…….”

이대작이 중간에서 불쑥 끼어들자 늙은 관리인이 이대작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반근 낭자가 있는데, 자네가 뭘 바쁘다고 난리야. 내가 지금 심심해서 불법 설파하는 줄 알아?”

이대작이 입을 삐쭉거렸다.

오 관리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명해선사의 차에 대해 더 말하겠습니다. 그분의 차 한 잔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수조 장사를 하는 상인 하나는 무려 만 관을 들여 보수사에 음식 공양을 하고 차 한 잔을 얻었다지요.”

“만 관이요?”

이번엔 몸종도 옆에서 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차 한 잔을 위해서요? 그만한 값어치가 있어요?”

관리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웃었다.

“정말 차 한 잔이 그 정도 값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 관으로 온 경성에 명성을 날렸으니 그만한 값어치를 했다고 봐야지요.”

서무수가 관리인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관리인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관리인의 뜻은 우리도 가서 음식 공양을 해야 한다는 거요?”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도 음식 공양을 해야 합니다.”

“근데 우리가 만 관을 무슨 수로 구해요?”

이대작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 세상 모든 일을 무조건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오 관리인은 서무수를 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주인장께서 아씨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십시오. 보수사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요.”

이 세상에서 돈보다 더욱 강력한 게 바로 연줄 아니던가. 그리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어딘가 연줄이 있을 테지.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가 가서 누이와 한번 얘기해 보겠소.”

“근데 말이오, 우리 태평거도 저 정도면 이름을 꽤 날리지 않았나?”

범강림이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는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일세, 여기. 저 편액 좀 보게나.”

범강림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 글씨가 곧 온 경성에 이름을 알리지 않겠소.”

그런데 굳이 그런 수고까지 들일 필요가 있나?

관리인도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어른, 글씨는 참으로 좋은 글씨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식당이니 음식으로 알려지는 게 바로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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