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 44화 (44/160)

교랑의경 6권

-경악-

우리 아씨는 화를 잘 안 내시지만, 일단 화가 났다 하면…….

고집 세고 늘 제멋대로였던 주육낭이 지금 어떻게 되었던가.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편히 발 뻗고 자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아씨, 그랬던 거군요. 역시 고명하세요.”

시녀는 배시시 웃으며 정교랑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내가 고명하다니?”

정교랑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씨, 말씀 안 해 주셔도 이젠 다 알겠어요.”

시녀가 뾰로통한 투로 대꾸했다.

정교랑이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솥에서 두부 한 조각을 건져 올렸다.

“내가 뭐랬니? 진작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득을 취하겠냐고.”

아씨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아씨가 이것으로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취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아씨는 진작 말했는데, 다들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잊었을 뿐이다.

“그 애가 안 온다고 했다고요?”

주 부인이 물었다.

“당연한 일이잖소.”

주 노야는 언짢은 투로 소매를 뿌리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됐어요, 밖에서 살고 싶으면 나가 살라 그래요. 어린 주제에 체면은 챙기려고 하나 보네.”

주 부인은 개의치 않은 듯 앞에 놓여있던 종이를 펼쳐 들었다.

“노야, 혼사에 필요한 것들을 여기에 정리했어요. 한번 보시고…….”

주 노야는 고개를 번쩍 들고 미간을 찌푸린 채 부인의 말을 끊었다.

“내가 한 얘기 못 들었소? 그 아이가 거절했단 말이오. 진씨 가문은 안 된다고 했소.”

주 부인은 쯧 소리를 냈다.

“진씨 가문이 안 되기는,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죠? 내버려 두세요. 혼인은 대사인데 그 애가 어딜 끼어들어요.”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보기엔 정녕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소. 심지어 경성 권세가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혼사 얘기를 꺼냈을 때, 정교랑은 확실히 다른 여인처럼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주 노야를 무시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혼담을 꺼낸 게 어느 집안이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묻지 않았던가.

“아니면, 이미 골라놓은 더 좋은 신랑감이 있을지도 모르지.”

주 노야가 말했다.

더 좋은 신랑감이라고? 설마 내 아들 육낭을 말하는 건가? 주 부인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눈썹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이 경성에 어디 진씨 가문만 한 집이 또 있나요? 그 애는 지금 허세를 부리는 거예요! 진씨 가문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일로 협박해 시집가려고 하니 눈에 거슬릴 게 뻔하잖아요. 지금 체면 차린다고 한번 거절해 보는 거니까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신경 쓰지 않으면 어쩌려고? 당신이나 내가 혼사를 치르는 것도 아닌데.”

주 부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침 뱉는 시늉을 했다.

“됐어요, 여인네들의 일이니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어서 가서 외숙부 역할이나 제대로 해요.”

“뭘 하라는 말이오?”

“강주에 가셔야죠. 가서 교교의 사주단자도 가져오고, 정씨 가문에서 혼수도 받아와요. 눈 똑바로 뜨고 당신 누이가 가져간 혼수 싹 다 가져와요. 경성 관습에 따라 2만 관을 내놓으라고 해요. 무려 진씨 가문으로 시집보내는 거예요. 교교의 혼수가 넉넉해야 무시를 안 당하죠.”

근래 들어 여인이 시집갈 때 드는 혼수 비용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가문이 혼수를 더 많이 하는지 비교하는 일도 심해졌다.

기존 경성의 관습으로는 혼수로 1만 관이면 충분했지만, 작년만 해도 이미 2만 관까지 뛰어버린 상태였다. 딸아이 하나 시집보내는 데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다.

“우리 집에 딸이 적었으니 망정이지, 원.”

주 노야가 혼자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주 노야가 말했다.

“하긴, 이런 큰일에는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 봐야겠지? 다만 정씨네 사람들이 호락호락할 것 같진 않군.”

주육낭은 옥대교 저택이 시야에 들어오자 걸음을 멈췄다.

“얼른 가.”

마차에 탄 진 공자가 옆에서 재촉하는데도 주육낭은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 자네는 저 애가 눈에 차지 않는 거야?”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고 뚱한 목소리로 묻자 진 공자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낭자의 눈에 안 차는 거지. 예상대로라면 낭자가 이미 거절했을 걸세.”

주육낭은 그러냐는 투의 탄성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한걸음 내딛다 다시 되돌아왔다.

“그럼, 자네가 저 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알고 저 애가 거절한 건가?”

진 공자가 한숨을 내쉬면서 주육낭을 쳐다봤다.

“아니야.”

진 공자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주육낭을 번갈아 가리키더니 말을 이어갔다.

“난 자네의 나쁜 벗이잖나. 나한테 호감도 안 생길 텐데 다른 마음은 더더욱 생각할 것도 없지. 자네에게는 더더욱 호감도 없고, 다른 마음도 없을 거야. 주자건, 걱정 좀 그만하고, 얼른 문이나 두드리러 가!”

“내가, 내가 무슨 걱정을 했다고!”

주육낭은 얼굴이 굳어져 씩씩거리더니 성큼성큼 대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달라 외쳤다.

“뉘신지요?”

대문 너머에서 사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환은 벌어진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더니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반근 누나, 그 흉악한 마부가 또 왔어!”

주육낭은 자신이 누구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문 열어라.”

주육낭이 한 손으로 대문을 짚고 소리쳤다. 대문 안에서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쾅 소리가 들렸다. 안쪽에서 무언가로 대문을 막아버린 것이다.

주육낭은 사환이 괘씸하여 발로 힘껏 대문을 찼다.

“공자님.”

대문 너머에서 여성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께선 지금 댁에 안 계셔요.”

주육낭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디 갔느냐?”

“소인, 그건 모릅니다.”

반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육낭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다가 마차 앞으로 되돌아갔다.

“기다리게.”

진 공자는 알겠다 하고 마차에서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여유롭게 읽기 시작했다. 주육낭은 애꿎은 채찍만 이리저리 휘두르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때 마차 한 대가 정교랑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시녀 하나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다.

아까 그 사환이 싱글벙글하며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저건 누구지?”

진 공자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진소 상공 댁 사람이야.”

주육낭의 말에 진 공자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을 펴들었다.

“이건 저희 부인께서 보내드리는 봄옷입니다.”

시녀가 웃으면서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진십팔랑이 마차 안에서 휘장을 걷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만든 신발도 한 켤레 넣었어. 낭자께서 집에 있을 땐 버선을 즐겨 신으시길래 특별히 실로 짠 것이야.”

반근은 서둘러 보따리를 받들며 예를 표했다.

“소인, 아씨께 감사드려요.”

진십팔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휘장을 내렸다.

흔들거리며 출발한 마차는 거리에서 건장한 흑마와 스쳐 지나갔다. 아직 서늘한 봄 날씨 때문인지, 흑마를 타고 있는 소년은 암청색 두봉을 두르고 다홍색 방한용 두모를 쓰고 있었다.

커다란 두모에 얼굴이 가려졌지만, 사람들은 두모의 색깔만 봐도 이자가 관료 가문의 자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이 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소년은 방금 스쳐 지나간 마차를 뒤돌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마차가 왔던 방향을 살펴보았다. 잠시 멈칫했던 소년이 말 머리를 돌렸다. 소년의 뒤를 따르던 열댓 명의 사람들도 모두 말 머리를 돌려 진씨 가문의 마차 뒤를 따라갔다.

“정 아씨께서 안 계시니, 아씨도 오늘 푹 쉬셔요.”

마차 안에서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씨께서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진십팔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이야.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럼 오늘 차정사에 가시면 꼭 여유롭게 즐기셔야 해요. 오랜만에 친한 아씨들과 함께 모이고 모르는 사람도 없는 자리니 마음 놓고 계실 수 있잖아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같은 기회가 흔치 않지. 가서 정 낭자가 벽에 남긴 글씨를 제대로 감상해야겠어. 항상 올 때마다 사람이 많아 차분히 보지도 못했는데.”

시녀가 원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또 글씨 연습하시려고요? 정말 한시도 쉬지를 않으시네요.”

성문을 빠져나간 마차는 얼마 가지 않아 차정사에 도착했다. 화창한 봄 날씨 덕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차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차정사 뒤편에 있는 공터에 마차를 세웠다.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자마자 화살 하나가 매섭게 날아와 마차에 꽂혔다. 시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마부와 사환들도 놀라 우왕좌왕하면서 마차 주변의 사방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어떤 자식이 감히!

소년이 활을 거두자 두모에 가려지지 않은 반쪽 얼굴에 의기양양한 웃음이 보였다.

“군왕…….”

옆에 있던 호위도 군왕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간이 떨어질 뻔했다. 군왕 무리를 발견한 주변 사람들이 분노의 눈길을 쏘아댔다.

진안 군왕은 그저 웃으면서 손에 있는 활을 빙글 돌리며 사과의 뜻을 표했다.

“재주가 부족했소. 제비를 쏘려던 것인데 엉뚱한 곳을 맞혔구려.”

진안 군왕이 큰소리로 외치고 말을 몰아 왔다.

경성은 치안이 훌륭했고, 더구나 이곳은 인파로 떠들썩한 장소였다. 강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고개를 내저을 뿐, 좀 전과 같은 긴장감은 사라졌다.

저 권문세가의 자제들은 어찌 봄만 되면 육예(六藝)를 뽐내겠다고 저리들 활을 쏴대는지 원.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못 하고.

진안 군왕이 말을 탄 채 마차 옆으로 다가가 휘장을 쳐다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낭자를 놀라게 했구려. 정말 미안하게 됐소.”

진안 군왕은 도자기처럼 하얀 이가 보일 정도로 입을 벌려 웃음을 지었다.

분명 놀랐겠지? 갑자기 날아온 화살은 늑대 무리보다 몇 배는 더 무섭지.

시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휘장을 들어 올렸다. 시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소년을 힐끔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두모에 가려져 얼굴이 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두모 아래로 보이는 은은한 미소는 퍽 매력적이었다.

“괜찮아요. 공자님께서도 다음에는 조심하세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진십팔랑은 갑자기 날아든 화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덮치며 비명을 내지른 시녀 때문에 놀란 상태였다.

말을 마치고 아직 소년의 용모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소년의 말이 갑자기 앞다리를 들며 펄쩍 뛰었다. 주인이 고삐를 급하게 끌어당긴 것 같았다.

“어이구, 깜짝이야!”

진안 군왕은 한 손으로 두모를 잡으며 경악한 표정으로 마차 안의 여인을 쳐다봤다.

누구지? 이런, 사람을 잘못 따라왔어!

진안 군왕은 저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 머리를 돌려 차정사를 벗어났다. 열댓 명의 호위들도 군왕의 뒤를 우르르 쫓아갔다.

올 때도 쏜살같이 오고, 갈 때도 급하게 화살같이 가버리니, 남아 있는 사람들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뭐에 그리 놀란 거지? 이 진소가 그 정도로 못 생겼나?

마차 안의 진십팔랑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여 아랫입술을 깨물며 휘장을 확 내려버렸다.

“집으로 가자.”

진십팔랑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했다.

태평거 앞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서생들은 얼큰하게 취한 모습으로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다가 하나둘씩 말을 타고 흩어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흥겨워 보이는 광경을 호기심으로 쳐다보다가, 이따금 서생들에게 다가와 직접 묻기도 했다.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여긴 식당이지요!”

서생들이 취기 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아 참, 여기는 보통 식당이 아니라오. 아주 좋은 글씨도 있고, 맛있는 요리도 있는 곳이지요.”

좋은 글씨? 행인들은 좋은 글씨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맛있는 요리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대체 무슨 음식이기에 서생들이 이렇게 열광하지? 뭐 특이한 게 있나?

손님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는 뭘 팝니까?”

“고기 요리 두 개 시켜서 먹어 봅시다.”

“술은 뭐가 있소?”

서무수가 시선을 거두고 마차를 쳐다봤다. 정교랑이 서무수를 향해 웃으며 예를 표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누이,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 봐.”

“일이 많아 도련님들께서 많이 바빠지시겠어요. 사람을 더 쓰는 건 어때요?”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 시녀가 정교랑 옆에서 말했다.

“그건 오 관리인과 상의해 보고 결정해야지.”

서무수가 대답했다. 정교랑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휘장을 내렸다. 서무수는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정교랑 일행을 배웅하고 뒤돌아섰다.

서생들이 가득했던 태평거 문 앞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됐고, 식당 안에는 다른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어떤 일들은, 막상 해 보면 쉽단 말이지.”

서무수는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했다. 혼잣말을 들은 범강림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

서무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차는 길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성문에 가까워지자 시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아씨, 주 노야께서 말씀하신 혼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시녀가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봤다.

“아씨.”

시녀가 정교랑 옆으로 바짝 붙어 말을 이어갔다.

“주 노야 입장에서 진씨 가문과의 혼사는 경사예요. 주 노야 내외분들은 아씨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실걸요.”

시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사람들이 아씨의 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어준 적이 있나?

혼인이라는 대사는 중매를 통하거나 부모의 뜻대로 치러지는 게 일반적인 도리이긴 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아씨의 친가와 외가 모두 믿을 구석이 못 된다는 점이었다. 이런 부모와 친척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 몰라.

시녀는 진씨 가문에 대해 잘 알았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씨 가문이든 정씨 가문이든 혼담이 들어온 사실을 알면 반대는커녕 좋아 어쩔 줄 모를 게 분명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 다른 집이었다면, 걱정했을 거야. 근데 진씨 가문이라면.”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리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밖을 가리켰다.

“나 대신, 걱정해줄 사람이 있거든.”

시녀는 정교랑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듯 밖을 내다봤다.

저택 앞에는 마차 한 대와 말 한 필, 그리고 주육낭이 우뚝 서 있었다.

회랑 아래에서 자리를 마련하느라 분주한 시녀의 모습은 길 가던 행인들에게도 한눈에 들어왔다. 마차와 말은 안으로 들이지 않고 밖에 세워 둔 채, 대문만 활짝 열어 놓았다. 외간 사내가 여인 혼자 거하는 방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떳떳하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회랑 아래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녀가 바쁜 탓에 반근이 차와 물을 준비했다.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물이 든 잔 세 개를 가지런히 두고 서둘러 물러났다.

“아버지가 오셨었다고?”

주육낭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육낭은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알고 있겠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육낭은 입을 열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거봐.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네는 늘 낭자에게 폐를 끼치잖아.”

진 공자는 주육낭의 말을 이으면서 정교랑에게 예를 표하고 사과했다.

“이럴 필요 없어요. 원하는 사람이 없는 게, 진짜 골칫거리지요.”

두 사람은 멈칫했다. 이 여인은 정녕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나?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다니.

주육낭이 정교랑을 노려보자 진 공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는 염려 마십시오.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럼 제일 좋고요.”

대답을 마친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교랑이 배웅하려 하자 근처에 있던 사환 둘이 재빨리 지팡이를 들고 진 공자에게 향했다. 사환 하나는 진 공자를 온몸으로 부축하고, 다른 사환은 균형을 잡아주며 진 공자의 지팡이를 바로 세웠다.

주육낭은 그제야 깨달은 듯싶었다. 그저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진 공자에게는 사환 둘도 모자라 지팡이까지 필요하다니…….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소리쳤다.

“정교랑, 내가 어떻게 해야 다리를 고쳐 주겠어?”

정교랑은 아무 말 없이 주육낭을 바라봤다. 주육낭 또한 핏대가 선 얼굴로 정교랑을 노려봤다.

“육낭, 자네가 이럴 땐 정말 재미없어.”

진 공자는 주육낭과 정교랑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대문 밖으로 향했다. 마당에 깔린 청석길에 나무 지팡이가 부딪치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주육낭은 옷소매를 휙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 진 공자의 뒤를 따라 나갔다.

“아씨, 따뜻한 물을 받아두었으니 씻고 쉬세요.”

시녀가 말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사환이 저택 대문을 닫아 바깥의 소란을 차단했다.

진안 군왕이 내궁문으로 급히 걸어 들어왔다. 누구라도 마주칠세라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고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막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 옆에서 사람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형님.”

진안 군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어린 장난꾸러기가 보였다.

“형님, 무슨 나쁜 짓 했어요? 놀라기는!”

이황자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찔리는 게 있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아직 어린 이황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옆에서 시중을 드는 내시 둘은 바로 알아채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궁 밖에서 바람 좀 쐬다 온 게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죠.”

진안 군왕은 표정을 수습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건 그렇고, 오늘 할 공부는 다 마치셨습니까?”

한창 노는 걸 좋아할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공부를 시작했으니, 이황자는 공부 얘기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이황자는 더 이상 진안 군왕의 일을 캐묻지 않고 울상을 지으며 진안 군왕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배우는 게 너무 많은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이따 밤에 황후마마께서 오늘 배운 걸 물어보신대요. 형님이 좀 구해 줘요.”

진안 군왕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와주면, 뭘 해 줄 건데요?”

형제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같이 걸어갔다. 멀리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위(瑋) 군왕이 아직까지도 아우와 함께 논다니.”

진안 군왕보다 한참 키가 작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소년이 말했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대황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를 벗지 못했지만, 엄격한 황궁의 가르침 덕에 비슷한 또래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존귀한 기품을 풍겼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지적받다 보니, 대황자는 일부러 더 성숙한 척을 하곤 했다.

“군왕께서는 천성이 순진하고 고민거리도 없는지라 이황자님과 잘 어울려 노시죠.”

곁에 있던 내시가 웃으며 거들었다.

“음, 역시 군왕이 살기 편해. 나처럼 부황을 따라 정사를 돌볼 필요도 없고.”

대황자는 감탄하는 말투로 말했지만, 우월감을 드러내는 표정은 숨기지 않았다.

“전하, 조심해야 할 말씀이십니다.”

내시들이 웃으며 말하자 대황자가 손을 휙 내저었다.

“가자, 부황께서 기다리신다.”

말이 끝나자 대황자는 뒷짐을 지고 꼿꼿한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궁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은 태후의 귀로 들어갔다.

“어딜 갔었다고?”

“성 밖에 활을 쏘러 가셨답니다.”

내시가 웃으며 대답했다. 태후는 다른 내시를 보며 물었다.

“그게 어찌 허둥댈 일이더냐?”

이 내시는 조금 전 진안 군앙과 마주쳤던 이황자의 내시였다.

“마마, 잠깐 사고가 있었나 봅니다.”

내시가 예를 표하며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소인이 군왕을 수행하는 시종에게 물어봤더니, 길목에서 어떤 낭자의 마차와 우연히 마주치셨답니다. 그러더니…….”

내시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다 머뭇거렸다.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낭자? 그래서 어쨌단 게야? 어서 말하지 못할까!”

내시는 깜짝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고 앞으로 몇 걸음 기어갔다.

“활로 낭자의 마차를 쏘았다고 합니다…….”

내시가 거의 들리지 않을 크기로 말했다.

“그리고?”

태후가 재촉했다.

“그, 그리고는 군왕께서 도망치셨다 들었나이다.”

“그게 전부냐?”

내시는 들었던 이야기를 차근히 곱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집안의 낭자라더냐?”

“진소 상공 댁의 낭자라고 합니다.”

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의로 그런 것이냐? 아니면 실수로?”

“실수였을 겁니다. 그때 하필 제비 한 마리가 날아다녔는데, 군왕께서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잡지 못하자 마음이 초조해지셨는지 제비를 쏜다는 것이 그만……. 그 바람에 군왕께서 쏘신 화살이 진씨 가문의 마차에 꽂혔다고 들었습니다. 군왕께서도 크게 놀라셨는지, 낭자에게 사과하던 도중 도망쳐 버리셨다 합니다. 주변 시종들에게 이 일에 대해 입단속을 단단히 하라고 이르셨고, 특히 마마께는 더욱 비밀로 하라고…….”

내시가 태후의 눈치를 보고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군왕께서도 참 장난이 심하셨지요.”

태후는 잠시 멈칫하다가 미소를 보였다.

“어쩔 수 있나, 군왕의 성격인 것을. 됐다, 이 일은 다시 꺼내지 말거라.”

내시가 태후에게 예를 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마마, 군왕께서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시지요.”

태후 옆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가 차를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태후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받았다. 실내에 잠시 적막함이 감돌았다.

“그나저나 진씨 가문의 몇째 딸인지 모르겠구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태후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진 상공이 화가 단단히 났겠어.”

벌건 대낮에 감히 이부 진 상공 댁의 마차에 활을 쏘는 자가 있다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을까.

“기필코 찾아내라! 어떤 몹쓸 놈이 감히!”

진소는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내던지며 호통을 쳤다. 마차에서 뽑아낸 문제의 우전(羽箭)이었다.

집사가 얼른 화살을 집어 들었다. 평범한 우전으로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표식이 있었다. 집사가 네 하고 대답하며 물러났다.

신선거는 경성에 있는 다른 식당들처럼 정오가 되어서야 개장을 했다. 문을 열자마자 손님들이 몰려 들어왔다. 이곳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곳이자, 상인들의 만남의 장이나 지인들의 모임 자리가 되기도 했다.

정오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점원은 이제 막 신선거로 들어오려는 손님 넷을 저지하며 자리가 없다고 했다.

“별실은 아직 남았는데 안으로 드시겠어요?”

점원이 웃으며 물었다. 별실은 당연히 탁자 자리보다 비싸니 네 사람은 서로 눈치를 봤다. 그중 하나가 대청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새 좌석이 또 몇 자리 줄었구려. 저쪽은 텅텅 비었던데 탁자 갖다 놓고 좌석 몇 개 더 만들면 안 되겠소?”

점원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휴, 안 됩니다. 손님들이 너무 시장통 같다며 좌석 간격을 좀 넓게 해 달라고 하셔서요. 별실에서 드실 게 아니라면, 조금 이따 다시 오시지요.”

네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식당 밖으로 나왔다.

“시장통 같은 소리 하네. 일부러 별실로 들이려고 저러는 거지.”

한 사람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인기가 많으니 별수 없지.”

다른 하나가 손을 비비면서 거리로 눈길을 돌렸다.

“이걸 어쩐다? 어디 가서 밥을 먹어야 하지?”

“과로신선을 먹으러 온 건데, 못 먹게 됐으니 아무 데나 가서 대충 때우자고.”

다른 이가 대꾸했다.

길거리에 식당은 많이 있으니, 네 사람은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서 앉았다. 이제 막 주문하려는데 반대편 좌석에서 큰소리가 오갔다.

“아휴, 어쩜 이리들 아둔하시오. 불만 있으면 된다지 않소. 숯불 화로든 술을 데우는 난로든 다 상관없소. 열을 가할 수만 있으면 되니까. 그 위에 솥만 하나 올리면 끝이오. 질솥도 괜찮고. 아, 대신 육수는 꼭 사골육수를 써야 하오.”

“손님, 이게 무슨 조리법인지요?”

“그냥 편한 대로 즐기는 조리법일세! 어서, 어서 가져오게나!”

한바탕 소란에 식당 사람들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잠시 후 종업원이 가져온 것들을 보고 사람들이 더욱 놀랐다.

“아, 채소 한 단이랑 생닭도 좀 주시오. 닭은 토막을 쳐 주기만 하면 되오.”

점원이 하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가져왔다.

“이것을 어떻게 먹으려고 그러시오?”

지켜보던 구경꾼 하나가 불쑥 물었다. 점잖은 복장을 하고 서로 마주 앉아 있는 이 식객 두 명에게서는 분명히 문인의 기개가 느껴지는데, 먹는 건 어째…….

문인 중 하나가 손으로 채소를 팍팍 찢어 작은 솥에 넣자 다른 하나는 썰어 놓은 닭고기를 통째로 솥에 부어버렸다.

“이렇게 먹지요. 먹고 싶은 것을 원하는 대로 먹으면 그만인 것을, 그러니 ‘낙득자재(樂得自在: 편한 대로 즐기는 것)’라 부릅니다.”

문인이 웃으며 답했다.

“이건…… 신선거의 과로신선과 비슷해 보이는데요?”

다른 한쪽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끼어들었다.

“신선? 그건 신선들이 먹는 건가 보지, 이건 그냥 평범한 인간이 먹는 거요.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뿐이지.”

문인은 웃으면서 식당 안쪽을 쓱 훑더니, 술 한 잔을 들어 솥 안에 부었다. 끓는 육수 때문에 술 향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마주 앉은 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번에 류천 형은 산초 양념 때문에 이틀이나 입술이 퉁퉁 부르텄으면서도 연신 중독되는 맛이라 하지 않았나? 오늘은 자네가 술을 넣었으니, 술을 마시지도 않고 취하겠네그려.”

웃고 떠드는 이들의 모습과 사방으로 퍼지는 맛있는 냄새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들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펄펄 끓고 있는 솥으로 향했다.

“이보시오.”

좀 전에 신선거에서 나왔던 네 사람이 점원을 불렀다.

“우리도 저쪽과 똑같은 것으로 줘보게나.”

점원이 놀라서 멈칫하더니 네, 하고 대답했다. 이들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같은 걸 주문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지, 그렇지. 하나씩들 추가해서 먹는 재미를 느껴 보시오. 채소 한 단에 육수 한 솥, 거기다 닭이나 오리 한 마리면 값도 얼마 안 나가잖소.”

문인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며 말을 이어갔다.

“주인장, 허튼 돈 받아갈 생각은 마시오. 저 태평거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양심적이던지, 채소와 육수는 돈도 안 받았지 뭐요. 고깃값만 원가로 쳐서 냈으니까 그렇게 아시오.”

그러고 보니 정말 얼마 안 내도 되겠네? 식당에 있던 사람들도 따라서 아우성을 쳐댔다. 진작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인은 그 광경에 눈빛을 반짝이며 문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손님, 다른 곳에서도 이 요리를 판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소, 성 밖에 있는 태평거였소. 아, 그들이 파는 거라고 할 수는 없지. 손님 하나가 급하다면서 직접 해 먹은 거니까. 태평거에서 원래 팔던 요리는 아니고, 그 손님이 원하는 대로 줬던 거요. 이 요리의 묘미는 직접 해 먹는 재미에 있소. 원하는 대로 해 먹는 것 말이오. 맛있어도 좋고, 설령 맛이 없다 하더라도 만들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잖소.”

식당 주인의 물음에 문인은 흥겹게 답했다.

“이것들을 가지고 나간다면 봄날의 소풍이 따로 없을 거요. 탁 트인 하늘 아래에 맨땅을 자리 삼아, 푸른 채소 한 단에, 사냥한 짐승과 술 한 단지를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문인은 들떠서 이미 한껏 풍류를 즐기고 있는 모습으로 술잔을 높이 들어 잔에 있던 술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게 바로 풍류지.”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점원을 불렀다.

“손님들께 채소를 가져다드려라.”

이어 주인은 손님들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돈은 안 받습니다. 저희 점포에서도 채소와 육수는 무료로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조리한 고기도 아니니, 고깃값도 원가만 받고요.”

안에 있던 사람들은 쾌재를 부르며 너도나도 덩달아 주문하기 시작했다. 몇 푼 하지도 않는 거, 낙득자재 즐겨보세!

낙득자재라. 식당 주인은 입꼬리를 올리고 계산대에 서서 네 글자를 음미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으리으리한 신선거가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점포를 쳐다보자, 숯불과 솥을 바쁘게 옮기는 점원들이 보였다. 수많은 솥에서 끓어오르는 육수 덕에 식당 안은 수증기로 자욱해졌다.

솥 하나에 불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다. 무엇보다도 돈이 별로 안 든다. 돈 없는 사람도 물론 돈을 신경 쓰지만, 돈 많은 사람 역시 돈이 많다고 불평하는 일은 결코 없다. 문득 이 조리법을 처음 알린 이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무심코 한 일이라면 그저 소탈한 이겠지만, 작심하고 한 일이라면…….

신선거가 정말 독한 사람을 만났구먼.

식당 주인의 미소가 점점 더 진해졌다. 식당 주인은 다시 한번 신선거 쪽으로 눈길을 돌려 바람에 나부끼는 오색찬란한 휘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끝을 천천히 늘리며 혼잣말로 흥얼거렸다.

“신선보다 좋은 게 인간이지, 낙득자재 자유롭다네.”

취기가 오른 몇 사람은 휘청거리며 식당 밖으로 나오다 식당 주인이 흥얼거리는 말을 듣고 몽롱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주인장, 거 끝내주는 노래구려.”

취객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관리인의 말을 되뇌더니 돌연 계산대를 팍 치며 외쳤다.

“신선보다 좋은 게 인간이지, 낙득자재 자유롭다네! 가사 좋다!”

식당 주인이 취객을 부축했다.

“손님께서 부르시니 맛이 제대로 삽니다.”

취객이 눈을 가늘게 뜨고 헤헤 웃으면서 비틀비틀 걸어 문을 나섰다.

“……신선보다 좋은 게 인간이지……, 낙득자재 자유롭다네…….”

높낮이가 다른 취객들의 노랫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진 부인은 앞에 앉은 진 공자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봤다.

“십삼낭, 봄 날씨가 한창 포근한데, 왜 밖에 나가서 놀지 않고?”

금방이라도 진 공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밥은 챙겨 먹었냐고 물어볼 듯한 말투였다. 머쓱해진 진 공자가 무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열여섯 나이면 이제 어린아이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진 부인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옆에 꿇어앉은 여종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 십삼낭이 다 크긴 했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도 이제 다 컸습니다. 제 뜻대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물론 제 혼사를 포함해서요.”

진 부인이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면서 옆에 있던 여종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이를 어째, 누가 고자질을 했구나.”

여종들은 부인을 따라 웃지 못하고 난감해했다.

“부인께서 도련님 말씀을 한번 들어보셔요.”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진 공자에게 말했다.

“십삼, 이것 봐라. 다들 네 편이야.”

진 공자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똑바로 모친을 쳐다보자 진 부인도 웃음을 거뒀다.

“정 낭자가 네게 뭐라고 하던? 널 탓하더냐?”

진 부인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빼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면, 정 낭자가 네 몸뚱이는 필요 없다고 했어?”

진 공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머니, 그만하시지요.”

진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않으며 말했다.

“십삼낭, 이 어미는 널 돕는 거야.”

“어머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정 낭자는 아직 화가 나 있어요. 우리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 낭자를 협박하는 꼴이 되니 정 낭자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질 겁니다. 더군다나 저와 정 낭자 모두, 그런 마음은 전혀 없어요.”

진 부인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잘났다니? 우리 가문도 눈에 안 찰 만큼?”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더 중요합니까, 남들 눈에 보이는 제 체면이 더 중요합니까?”

진 부인은 애써 웃음 지었다.

“당연히 네가 제일 중요하지. 남들이 널 어떻게 보든 간에 난 상관없어.”

“그렇다면 어머니, 지금 절 위해 기뻐하셔야 합니다.”

“이 어미는 항상 널 보며 기뻐한단다.”

진 공자가 다정한 눈빛으로 모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라면 다들 그렇겠죠?”

진 부인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 공자에게 물었다.

“아들, 그게 무슨 말이니?”

진 공자가 가볍게 한숨을 토하고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 낭자의 모친께서는 본인이 낳은 아이가 바보인 걸 알면서도, 익사시키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제가 불구라는 걸 알고도 절 버리지 않으셨죠.”

진 공자가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다.

“오직 어머니들만이 저희와 같이 몸이 온전치 못한 이들도 보물처럼 여겨주십니다.”

진 부인은 코끝이 찡해져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야 당연하지.”

진 부인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낳아 키운 자식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인걸.”

진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진 공자를 바라봤다.

“됐다. 그 정 낭자를 탓하지 않을 것이니, 그 낭자를 감싸려 하지 않아도 돼.”

“소자는 진심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 부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진심이라 해도 목적도 없이 괜히 하는 말은 아니겠지. 세 살 적부터 어미에게 꼬박꼬박 대들어 온 너인데, 이 어미가 널 모를까?”

진 공자가 하하 웃자 여종들도 어려워하지 않고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결론은, 그 낭자가 동의하지 않은 게로구나?”

진 부인이 다시 물었다.

“네, 그러니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정 낭자가 네 다리를 고쳐 주기도 싫고, 너와 한평생을 보내는 것도 싫다고 하더냐?”

“어머니,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진 부인이 잠자코 진 공자를 바라봤다.

“의술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치지 않습니다. 정 낭자가 이 혼인에 동의하더라도 제 다리를 고쳐 줄 리는 없죠.”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진 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혼인은 연을 맺는 것이지, 은혜를 입는 게 아닙니다. 그 낭자가 혼인 때문에 제 다리를 고쳐 준다면 제 마음이 불편할 테고, 제가 다리를 고치는 일로 그 낭자와 혼인한다면 그 낭자의 마음도 불편할 겁니다. 고쳐 줘도 우린 당연한 일이라 여길 테고, 못 고치면 원수가 되겠죠. 고쳐도, 못 고쳐도 문제는 남습니다. 부부 사이에 틈이 생길 테니 화목한 부부로 지낼 수 없죠.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을 텐데, 과연 이걸 어찌 경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얘기를 들은 진 부인과 여종들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그렇구나.”

진 부인은 고민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 낭자가 이 혼사를 거절했으니, 제게는 아직 다리를 고칠 기회가 있습니다.”

진 공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 낭자가 저를 불쌍하게 여겨서든 돈을 벌기 위해서든, 제 병을 치료해준다면 저는 그에 맞는 값만 치르면 됩니다. 그럼 정 낭자와 저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진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진 공자를 보며 호탕하게 말했다.

“그럼 이 혼사는 없던 일로 하자꾸나.”

진 부인은 여종에게도 일렀다.

“사람을 시켜 주씨 가문에 말을 전하거라. 우리 쪽에서 갑작스럽게 혼담을 꺼냈는데, 명해선사(明海禪師)께서 십삼은 혼례를 일찍 올리는 것이 큰 해가 된다 하셨다고 말이다. 정 낭자에게 누를 끼칠 수 없으니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 해라.”

여종이 네 하고 대답했다.

진 공자는 웃으며 감사를 표하고 물러갔다. 진 공자가 문가로 걸어갔을 때쯤 진 부인의 따뜻한 목소리가 진 공자를 불러세웠다.

“십삼, 네 말에 또 한참을 헤맸구나. 실은, 그 낭자가 너를 마음에 두지 않은 게지

옥대교 정교랑의 저택 서재 안.

진십팔랑은 붓까지 내려놓은 채로 한동안 탁자만 쳐다보며 넋을 놓았다. 고개를 돌리자 한결같이 수수한 차림의 정교랑이 보였다. 붓을 쥔 정교랑은 천천히 글씨를 쓰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잠시 고민했으나 붓을 다시 들지는 않았다. 그저 눈앞의 글씨를 감상하는 척하며 정교랑이 붓을 내려놓을 때까지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따스한 봄날, 두 여인은 문을 열어놓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진십팔랑이 말하면 정교랑은 대답만 했다.

“날씨가 점점 풀리고 꽃도 만개할 시기라, 곧 경성에서 시회(詩會)가 열릴 것 같아요. 낭자께서도 같이 가 보실는지요?”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시는 쓸 줄도, 감상할 줄도 몰라요. 말하는 걸 즐기지도 않고요.”

진십팔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 가지 않으셔도 좋아요. 사실 별로 재미있는 곳은 아니거든요. 말로는 시를 쓰고 감상하는 자리라지만, 실상은 남들 먹고 입는 걸 비교하고 소문이나 퍼뜨리기 바쁜 곳이죠.”

특히 근자에 열린 시회에 모인 여인들이라면 자신의 얘기를 하며 웃고 떠들 게 분명했다. 처음 보는 이가 난데없이 마차에 화살을 쐈는데 정작 본인은 놀라지 않고, 화살을 쏜 이가 휘장을 걷더니 놀라 줄행랑을 쳤으니. 시회에 모인 사람들이 그 일에 또 무슨 과장을 섞으며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십팔랑이 옷자락을 쥐다 못해 찢을 기세로 잡고 있으니 시녀가 정교랑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진 아씨께서 근심이 있으신가 봐요.”

“누군들 근심이 없을까.”

정교랑도 시녀 쪽으로 슬며시 몸을 기울여 답했다. 시녀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아씨께도 근심이 있으세요?”

정교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녀는 초조해졌다. 혹시 주제넘은 얘기를 했나? 아씨께 이런 농담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없어.”

정교랑이 다시 몸을 기울이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시녀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아직 마음이 없으니까.”

정교랑이 이어서 답했다. 시녀가 멈칫하는 사이, 옆에서 책상을 정리하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여인은 단정히 앉아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다기엔 한없이 공허한 눈빛이었다.

마음이 없다니. 십수 년을 바보로 지내는 동안, 과거의 기억은 정교랑의 마음속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마주한 이들과 그동안 겪은 수많은 일은 그녀의 마음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일은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으니.

고민이 있을 수가 없지.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이마의 땀을 닦는 척하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진십팔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한 추태를 보인 것 같아 서둘러 고개를 들어보니 정교랑과 시녀는 단정히 앉아 있었고, 정교랑의 손에는 책까지 들려 있었다.

진십팔랑의 기척에 정교랑과 시녀가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지 추측해 보려는 뜻은 전혀 없는 눈빛이었다.

“이제 가야겠어요. 내일 다시 올게요.”

진십팔랑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정교랑은 진십팔랑에게 예를 표하며 입을 뗐다.

“무슨 일이 있는 거면, 애써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

진십팔랑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봤다.

“일이 있으면 있는 거지, 아무렇지 않은 척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정교랑은 몸을 일으켜 먼저 밖으로 나가며 말을 덧붙였다. 진십팔랑은 잠시 주춤하더니 곧 정교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바깥 일로 소란스러운데.”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죠.”

이때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회랑 앞의 벚나무를 스쳤다. 만개한 벚꽃잎이 바람을 타고 춤추듯 회랑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진십팔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정교랑을 뒤따랐다.

이 저택에 온 손님은 주인을 따라 버선만 신고 집 안을 거닐었다. 정교랑과 진십팔랑은 버선만 신은 채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꽃잎 위를 사박사박 걸었다.

진십팔랑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칭찬을 받든 모욕을 받든 놀라지 말라고들 하잖아요. 마음이 불편한데, 내 마음이 불편한 걸 남들이 알아볼까 봐 겁나요. 그래서 억지로 아무 일 없는 척 이렇게 온 거예요.”

정교랑이 계단 앞에 멈춰 서서 입을 다문 채로 짧게 음, 하는 소리만 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짧은 대답은 그간 짓눌려왔던 진십팔랑의 답답한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낭자는 모를 거예요. 어제는 화가 나서 죽을 뻔했어요.”

시녀는 두 사람이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멀찍이 물러난 상태였다. 진십팔랑이 어제 있었던 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난 이제 어떡해야 하죠?”

한참을 들은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진십팔랑에게 말했다.

“난 병이 있어요.”

진십팔랑은 정교랑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난 소리 내어 크게 웃을 줄 몰라요. 그러니 대신 한 번 웃어 줄래요?”

진십팔랑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입을 벌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보며 웃는 소리를 형용하자 진십팔랑은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진십팔랑은 웃으며 정교랑의 말을 따라 하다가 그대로 웃음이 터져 하하 웃어 버렸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봐요, 이 정도일 뿐이에요.”

진십팔랑이 멈칫했다.

“남들이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기보단, 낭자가 먼저 이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네요. 이렇게 웃으면, 그 일도 겨우 이 정도일 뿐이에요.”

말을 마친 정교랑이 돌아섰다.

“그 일도, 겨우 이 정도일 뿐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진십팔랑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가 싶더니 웃음이 번져 나갔다.

“생각해 보니 정말 웃기는 일이네! 어디서 굴러온 망나니야!”

진십팔랑은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 * *

진안 군왕이 펄쩍 뛰어오르며 물었다.

“누가 왔다고?”

“진소 상공께서 오셨습니다.”

내시가 답했다.

“마마,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습니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고 다음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예를 표하더니 급히 자리를 떴다. 미처 대답도 못 한 태후는 그 모습에 잠시 멈칫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저 놀란 것 좀 봐라.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저 아이는 도둑이 되기도 글렀구나.”

태후가 웃으며 말하자 궁녀도 웃으며 답했다.

“군왕께서 좀 짓궂으시긴 했어요. 진 대인께서는 군왕의 죄를 물으러 오신 거죠?”

웃음을 머금은 태후가 내시에게 손을 뻗어 명했다.

“들라 하라.”

진소는 대전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화가 가득한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내시 하나가 화살 한 촉을 태후 앞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놓고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꿇어앉았다.

외신(外臣)은 무기를 소지한 채 입궐할 수 없다는 규율이 있었으니 내궁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궁문 밖에서부터 시위에게 맡겨져 한 단계 한 단계 검열을 거친 뒤 전달된 화살이었다.

내시도 태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본궁은 어릴 적에 이걸 가지고 투호를 하곤 했소.”

태후가 화살을 보며 웃음 지었다.

“마마!”

진소가 태후의 말을 끊었다.

“이는 궁에서 쓰이는 화살이온데, 저희 집안의 마차에 꽂혀 있었습니다.”

태후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알겠소, 진 대인. 본궁이 사과하면 되잖소. 아직 어린아이라 장난이 심했구려.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마마, 진안 군왕께서도 이제 성인이십니다. 황자도 성인이 되면 궁 밖으로 나가는데, 군왕께서는 어찌 아직도 궁에 계시는 겁니까.”

진소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태후의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옆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숨소리를 죽였다.

진안 군왕의 거처를 궁 밖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어사 한 명이 상소문을 올린 일도 있었다. 격노한 태후는 어사의 죄를 물어 벌하려 했지만, 황제의 중재로 간신히 넘어갔다.

그 사건 이후로 2년 동안 잠잠했다가 최근 들어 다시 이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이는 집안일이니, 밖에서 왈가왈부할 것 없소.”

태후가 냉랭하게 말했다.

“황실의 일을 집안일이라 할 순 없습니다. 전부 천하의 일이지요.”

진소 또한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올렸다.

진안 군왕이 전각 안에 앉아 구슬을 한 움큼 쥐고는 허공에 하나씩 던졌다. 그러고는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태후께서 화가 잔뜩 나셨지요. 그런데 진 대인께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마께 터무니없는 말에 미혹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말은 좀 심했네.”

진안 군왕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또 그다음엔?”

“진 대인께서 씩씩거리며 돌아가셨습니다. 태후께서도 심기가 불편하셔서 폐하를 모셔오라 명하셨고요.”

“진 대인도 참. 내가 실수 좀 한 걸 갖고, 그렇게 화를 내며 날 내쫓으려 하다니.”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실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폐하께서 오신 후부터는 감히 더 듣지 않고 물러났습니다.”

“잘했어. 들을 건 듣고, 듣지 말아야 할 건 듣지 말아야지. 듣지 않는 것도 듣기 위한 거지만 말이야.”

진안 군왕이 웃으며 손을 내젓자 내시가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옆에 서 있던 내시가 군왕에게 다가가 초조한 듯 물었다.

“군왕, 이번 일을 태후마마께 굳이 알린 이유가 있으신지요? 진 대인이 대로하여 길길이 날뛰잖습니까. 진씨 가문 낭자의 체면을 위해 태후께서 군왕에게 혼인을 명하면 어떡하시려고요?”

진안 군왕이 손을 멈칫하는 순간, 가지고 놀던 구슬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쉬워서 못 할걸?”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하며 다시 웃었다.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고개까지 젖혀 가며 웃었다. 진안 군왕은 바닥에 흩뿌려진 구슬들을 집어 다시 허공에 던졌다.

“아쉬워서 못 하지! 아쉬워서 어떻게 그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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