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60)

-보답-

삼월, 봄비가 내린 후 날씨는 한결 따뜻해졌다.

정교랑의 작은 서재에 있던 진단랑이 붓을 내려놓았다. 진단랑은 코를 비비고는 맞은편에서 여전히 진지한 모습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정교랑과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잠시 망설이던 진단랑은 치마를 들고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마당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였고, 화단에는 파릇파릇 푸른 싹이 돋아나 있었다. 진단랑이 심호흡을 했다.

“단랑 아씨.”

문 앞 회랑 아래에 앉아 버선을 짓고 있던 시녀는 진단랑을 보고 얼른 일어났다.

“다 쓰셨어요?”

진단랑은 쪼르르 달려와 자리에 앉더니 마당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난 한 장 썼어.”

진단랑이 손목을 흔들었다.

“난 집에서 숙제 마치고 나서 온 거야.”

진단랑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기껏 왔는데 놀지도 못하고 글씨 연습을 해야 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지.

“아씨는 아직 어리니 한 장 쓴 것도 잘하신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씨들께서 글씨 연습을 마치고 같이 놀아 주실걸요.”

시녀가 바느질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간식 가져다드릴까요? 어제 아씨께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

진단랑은 손뼉을 치며 좋다고 하고, 안에서 쟁반을 들고 오는 시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접시 몇 개에 사각형, 원형, 마름모꼴 간식이 담겨 있었다. 색상도 노란색, 흰색, 검은색으로 다양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우와.”

진단랑은 시녀가 건네는 은수저를 받아 신이 나서 먹기 시작했다. 진십팔랑과 정교랑이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나왔을 무렵, 진단랑은 이미 접시를 깨끗이 비운 후였다.

“단랑 아씨, 그만 드세요.”

시녀가 접시를 빼앗으며 말했다.

“간식을 밥처럼 드시면 안 되죠.”

“착한 언니야, 하나만 더 먹을래.”

진단랑이 은수저를 들고 애걸했다.

“단랑, 무례하게 굴지 마.”

진십팔랑이 나섰다.

“언니, 정 언니가 만든 간식은 엄청 맛있어.”

진단랑이 진십팔랑을 붙잡고 눈빛을 반짝였다.

“알아.”

진십팔랑이 웃었다.

진 노태야가 진단랑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정교랑을 만난 일은 이미 집에서 여러 번 언급된 이야기였다. 물론 진단랑이 팥 춘권을 얻어먹었다는 세부적인 내용도 빠지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식탐을 보이거나 게걸스럽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가정교육을 받은 정단랑이었다. 더구나 진씨 가문은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잊지 못하는 걸 보면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없는 훌륭한 맛이 틀림없을 터였다.

진십팔랑은 시녀가 들고 있는 쟁반으로 눈길을 돌렸다. 쟁반에는 죽통 두 개만이 남아 있었다.

“죽통으로 만든 각서(角黍: 찹쌀을 싸서 찐 음식)예요.”

시선을 느낀 시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맞아, 엄청 맛있어. 안에 대추랑 밤도 들었어.”

진단랑도 거들었다. 이쪽에 있던 정교랑이 손에 든 물잔을 내려놓았다.

“아씨, 나가시려고요?”

시녀는 얼른 간식을 내려놓고 물었다. 요즘 들어 정교랑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진십팔랑과 글씨 연습을 한 후 옥대교 저택으로 갔다가 거기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그 말을 들은 진단랑은 먹을 것에 연연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언니, 우리 집에 가서 놀아요.”

“다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나랑 같이 놀러 나갈래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정교랑과 진단랑, 진십팔랑은 밖으로 나가며 얘기를 나눴다.

“삼월이라 나들이 가기 좋은 때거든요.”

진십팔랑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정 언니, 우리 같이 놀러 나가요.”

진단랑이 정교랑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문 밖으로 나가 보니 진씨 가문의 마차는 벌써 대기 중이었지만, 주씨 가문의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아씨, 부인과 아씨들께서 다들 출타 중이시라…….”

여종 하나가 불안해하며 말했다.

“마차가 한 대도 없다고요?”

시녀가 언짢은 듯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아랫것들이 타는 마차만 남았는데…….”

“그럼 내 거 타요. 가는 곳으로 데려다줄게요.”

진십팔랑이 얼른 나섰다.

“그래요.”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눈 깜짝할 새에 봄이 온 듯했다. 거리에는 생기가 넘쳤고, 머리에 꽃을 꽂고 지나가는 사내들도 점점 많아졌다.

“아씨, 앞쪽 길이 막혔습니다. 다른 길로 가시죠.”

마부가 말했다. 휘장을 들고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시녀는 얼른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쪽에는 과연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세상에, 깜빡했네요.”

시녀는 퍼뜩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오늘은 방이 붙는 날이에요.”

정교랑도 바깥을 쳐다봤다.

“아직 국자감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사람이 이렇게 많네?”

진십팔랑의 물음에 시녀는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밤부터 와서 자리를 맡는 사람도 있는걸요. 저 앞 거리는 사람으로 발 디딜 틈도 없어요. 방을 보려는 수재들은 일부고, 구경 온 사람과 사윗감을 찾으러 온 사람이 더 많죠.”

시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진십팔랑은 올해 처음으로 경성에 온 터라 그런 풍속에 대해 들어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진십팔랑이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맣게 몰려든 인파가 길을 따라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저 안쪽에서 환호와 고함 소리가 수시로 들려왔고, 이따금 울음소리도 들렸다.

시녀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좌우를 살핀 다음 마부에게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려 주었다.

“반근은 경성을 아주 잘 아네요.”

진십팔랑은 바깥에 있는 시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오래 살았거든요.”

“엇, 언니도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진단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정교랑은 바깥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진십팔랑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진단랑을 제지하고,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밖을 쳐다봤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젊은 사내 하나가 반근 옆으로 와 섰다.

“이런 우연이, 또 보네.”

한원조가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방을 보러 오셨어요?”

시녀 역시 웃으며 물었다. 다정하고 공손한 태도였다. 아씨께서 이 공자를 위해 그토록 애를 쓰신 걸 보면, 아씨께 중요한 인물이 틀림없었다.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삼 년 후를 기약해야겠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공자님.”

시녀의 위로에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심 안 해. 출중한 재주를 갖춘 것도 아닌데, 한 번에 붙을 리가 없지.”

한원조가 크게 울적해하지는 않는 걸 보고 시녀도 마음을 놓았다. 한원조가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아씨들과 나왔어요.”

시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마차에 있는 정교랑은 한원조와 만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원조가 옆으로 물러섰다.

“곧 경성을 떠날 거야. 경성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럼 여기서 작별하자.”

한원조가 예를 표했다.

“옹주께 안부 전해 다오.”

시녀도 얼른 답례했다. 한원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걸어갔다. 옆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이 얼른 따라붙었다.

“공자님.”

시녀가 불렀다. 한원조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언제 떠나세요?”

“닷새 후쯤.”

한원조는 공수하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 저 마차에 탄 낭자가 남편감을 구하는 그 낭자려나 모르겠네.”

동료들이 웃으며 놀렸다. 한원조가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시녀와 마차는 그새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원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동료의 말 때문인지, 시녀가 찾아왔을 때 했던 오해가 생각나서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이젠 그럴 걱정 안 해도 돼.”

한원조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낙방한 수재를 누가 데려가겠나.”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씁쓸한 웃음이었다.

“저 마차는…….”

한 동료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마차가 왜?”

다른 동료가 물었다.

“아무래도 진소 상공 댁 마차 같은데.”

동료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진 상공? 다들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물론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 나도 생각났어. 어쩐지 표식이 눈에 익더라.”

여럿이 맞장구를 쳤다. 순간 한원조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한원조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진씨 가문?

“원조, 진 상공 댁의 사위가 될 뻔했군.”

동료의 말에 한원조는 정신을 차리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소리 마, 그런 일 없으니까.”

이 일 덕에 다들 울적한 마음이 조금은 가신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른 쪽 거리.

또 한 일행이 걸음을 멈추고, 같은 방향으로 몰려가는 인파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앞이 국자감이라 방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많군. 길을 열기 힘들겠어.”

맨 앞에 있던 두 사람이 말 머리를 돌렸다. 의장대가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군왕, 국자감을 지나기 힘들어 돌아서 가야 할 듯싶습니다.”

“돌아서 가자.”

마차 안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위들이 명에 따라 마차를 돌리고 막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마차의 휘장이 휙 들어 올려졌다.

“잠깐.”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두가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진안 군왕이 한쪽 옆을 바라봤다. 물을 건너는 돌다리가 있는 곳이었다. 오늘은 방이 붙는 날이라 경성 사람들이 다들 국자감으로 몰려간 탓에 언제나 북적이던 다리 어귀는 오히려 썰렁했다.

다리 어귀에 있는 저택 앞에 마차 한 대가 서 있고, 시녀들이 여인 둘과 여자아이 하나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한 여인을 본 진안 군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왔다 가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 여인이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어서 진십팔랑과 진단랑은 얼른 그러겠다고 했다. 세 사람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니, 뉘 집 마차가 길을 막고 서 있어!”

사내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씩씩거렸다. 쭉 마차를 이용했고 밖에서 걸어 다닐 일도 없었던지라 두 여인은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였다. 고함 소리에 두 여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인들의 얼굴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였다.

“이 자식이, 길 똑바로 안 보고 다녀?”

진씨 가문의 하인이 인상을 쓰며 넓은 큰길을 가리켰다.

“왜 굳이 마차 앞으로 와서 난리야?”

말을 탄 사내는 콧방귀를 뀌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마차에 달린 표식을 쳐다봤다.

“윗전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꼴 하고는.”

사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말을 몰아 지나갔다.

“진짜 뭐하는 인간이야! 아씨, 어서 들어가세요.”

시녀가 투덜거리며 정교랑을 부축했다.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마차도 안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대문이 닫혔다. 진안 군왕은 시선을 거뒀다.

“군왕, 진 상공 댁의 마차입니다.”

시위 하나가 다가가 나지막이 고했다.

“안다.”

진안 군왕이 휘장을 내렸다.

“가자.”

시위의 손짓에 마차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흔들리는 마차 안, 소년의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번졌다.

안다. 진소, 진십팔랑. 그렇게 기괴한 얼굴은 잊고 싶어도 잊기 힘들지.

봄비가 촉촉이 내리면서 마당에 올라온 새싹의 푸르름이 한층 짙어졌다. 쟁반을 든 몸종이 부엌에서 급히 나왔다.

“언니, 우산 씌워 줄게.”

반근이 얼른 우산을 들고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자갈이 깔린 작은 길을 지나 층계를 올랐다. 반근이 회랑 아래에서 우산을 접고 문을 열었다.

“아씨, 다 됐어요.”

몸종이 말했다. 몸종이 안으로 들어가자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는 정교랑의 모습이 눈가에 들어왔다. 반근은 문밖에 잠시 서 있다가 몇 걸음 물러나 회랑 아래에 서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아씨, 어떠세요?”

“이건, 불이 좀 셌네.”

“아, 네, 맞아요. 기억해 뒀다가 다시 해 볼게요.”

“이건 잘했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씨.”

“나한테 고마울 게 뭐 있어. 네가 정성을 들인 건데.”

방 안에서 묻고 답하는 대화가 들렸다. 이따금 몸종이 까르르 웃는 소리도 들렸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만약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 안에서 아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사람은 나였겠지. 하지만 세상에 만약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을 소중히 여기는 수밖에.

반근은 심호흡을 하고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이미 깨끗하게 빨아 불에 말린 옷을 챙긴 다음, 인두에 숯을 넣어 주름을 펴고 옷을 개켰다.

장씨 저택 안.

시녀가 우산을 접자, 회랑 아래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이 웃으며 맞이했다.

“소심 언니, 비도 오는데 어쩐 일이야?”

“노태야를 뵈러 왔어.”

웃으며 대답하고 대청으로 들어가려던 시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리고 당부했다.

“반근이라고 불러 줘.”

몸종들과 여종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반근이란 이름이 그렇게 좋은가? 왜 둘 다 서로 반근이라고 불러 달래.

대청에 있던 장 노태야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절을 올리는 시녀를 바라봤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네가 아직 이 옛 주인을 잊지 않았다니.”

장 노태야가 껄껄 웃자 시녀도 따라 웃었다.

“노태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인이 매정해 보이잖아요.”

시녀는 웃으며 얇은 공책 하나를 건넸다.

“소인만 노태야를 염려하는 게 아니라 아씨께서도 염려하세요.”

장 노태야가 웃으며 쳐다봤다. 직접 만든 서책이었다. 가장자리의 가위질이 삐뚤빼뚤했다.

“노태야께서 차와 함께 드시도록 아씨께서 간식 만드는 방법을 직접 적어 주셨어요. 입맛이 없으시면 조금씩 여러 번 드시래요. 술보다는 차를 많이 드시고요. 여기 적힌 간식들은 아씨께서 노태야를 위해 직접 준비한 거예요. 노태야의 어지럼증에 좋을 거래요.”

장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물었다.

“말해 봐라. 원하는 게 뭐냐?”

시녀도 따라 웃었다.

“올해 낙방한 수재 하나가 있는데, 노야를 무척 존경하세요. 아씨께서 노야의 경서 해석본을 구할 수 있는지 물으셨어요.”

장 노태야는 호기심이 이는 듯 자세를 바로 앉았다.

“정씨 가문 사람이더냐?”

시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신기한 일이로구나. 너희 아씨가 그리 선량한 마음씨를 쓰다니.”

장 노태야가 웃었다.

“노태야.”

시녀의 목소리는 제법 당돌했다.

“저희 아씨는 늘 선량하세요.”

장 노태야는 껄껄 웃으며 명을 내렸다.

“여봐라.”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얼른 대답했다.

“노야한테 가서 소심에게 책 한 권 내려 주라고 해라.”

몸종이 네 하고 대답하자 시녀도 따라 일어섰다.

“저도 같이 갈게요. 노태야께 부탁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노야를 뵙고 직접 감사 인사를 올리는 게 도리죠.”

장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가져가라. 노야더러 부엌에 주라고 하면 될 게야.”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하며 공책을 받았다.

시녀가 회랑 아래에서 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한 후 자리를 뜨자 서재에 있던 장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야, 저기…….”

몸종의 손에는 시녀가 준 공책이 들려 있었다. 종이 몇 장을 잘라 묶은 것으로 모양새는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 딱히 제목도 없고 일고여덟 장 정도 되는 얇은 책자였다.

“부인한테 갖다 주고 부엌에 주라고 해라.”

장순은 받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장순의 부인 곁에도 글을 아는 몸종이 있었기에 숙수를 가르치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늦겨울의 한기가 물러가고 봄비가 내리는 경성에는 독특한 운치가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성문을 드나드는 인파는 적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비가 내렸기에 한원조 등은 말을 타는 대신 마차를 두 대 빌렸다. 마차 한 대에는 세 사람이 함께 타고, 다른 한 대에는 서동(書童: 서생의 공부를 도우며 서책과 지필묵 등을 정리하던 하인)들이 탔다. 서생들의 말에는 경성에서 사들인 특산물이 실려 있었다. 큰 포부를 안고 올라오던 때와 달리 세 서생의 얼굴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괜찮아, 삼 년 후에 또 오면 되지.”

한원조가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

“그래, 그래.”

한 동료가 웃으며 휘장을 걷고 일어나 몸을 밖으로 빼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성문이나 한 번 더 봐 둬야겠다.”

한원조와 동료가 웃으며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동료가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원조, 자네를 배웅 나온 사람이 있구먼.”

동료가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시녀는 우산을 펼 새도 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공자님, 빗길인데도 출발하셨네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요.”

한원조는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며칠 안 사이지만, 어쨌거나 경성에 지인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수고스럽게 배웅을 나오다니.”

한원조가 웃으며 예를 표했다.

“선물 드릴 게 있어서 특별히 왔어요.”

시녀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자 한원조가 의아해하며 받았다. 논어였다. 귀하다고 할 순 없는 책이었지만 조판으로 찍어 낸 책이 아니라 손수 쓴 필사본이었다. 글씨는 작은 해서체로 바르고 곧게 쓰여 있었다.

한원조의 시선이 겉표지 아래쪽으로 향했다. 강주, 자연(子然). 이건!

한원조는 놀란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가 생긋 웃으며 예를 표했다.

“아씨께서 공자님이 무사히 돌아가길 바라신대요.”

시녀는 한원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마차에 올랐다. 정신을 차린 한원조가 소리쳐 불렀지만 벌써 저만치 멀어진 마차를 붙잡을 순 없었다.

한원조는 책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있다가 빗방울이 떨어지자 얼른 정신을 차리고 행여 젖을세라 물기를 닦았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두 동료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한원조의 손에 들린 책을 쳐다봤다.

“강주 선생이 직접 쓰신 거라고?”

“아니, 이것도 진 상공 정도는 돼야 얻을 수 있는 건가?”

“아냐, 아냐. 저 시녀 말로는 아씨라고 했어.”

“그러게 사윗감이 될 준비를 하라니까!”

“낙방했으니 사위로 안 들이려나?”

“원조, 이번에 돌아가면 자네 혼사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웃고 떠들었다. 정신을 차린 한원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소리 말게. 정의를 위해 나섰을 뿐이야.”

“원조, 비록 낙방했다지만 그래도 자네는 이번 경성행에 수확이 풍성하군.”

동료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원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진소 상공이 눈여겨본 것으로 추정되는 데다 장강주 선생이 직접 쓴 논어 해설집까지 얻었다. 참, 무슨 주점인지 어딘지의 지분도 얻었고.

“그 숙수를 편드는 말 몇 마디를 한 덕에 이런 행운을 얻었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내가 나서는 건데 말이야.”

“착한 일을 하면 보답을 받는다더니. 이젠 자네를 의협심만 넘치는 얼간이라고 놀리지 말아야겠어.”

동료들이 웃으며 말했다. 한원조도 따라 웃으며 여전히 당혹스러운 눈길로 성문을 쳐다봤다. 시녀의 마차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정말 그때 도와준 일 때문일까? 착한 일을 해서 보답을 받은 거다?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시녀가 마당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반근 누나.”

금가아가 시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시녀가 회랑으로 들어오자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반근이 물통과 걸레를 들고 나왔다. 방을 청소하고 나오는 길인 듯했다.

“언니.”

반근이 예를 표했다.

“아씨는 나가셨어?”

시녀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응, 그…….”

반근은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뭐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몸종의 이름도 반근이었기에.

“반근 누나랑 같이 점포에 갔어.”

금가아가 도와줬다. 다 같은 반근이긴 하지만 이 반근들도 지금 말하는 반근이 어느 반근을 가리키는지 알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금가아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가야겠다.”

시녀는 곧장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이봐요, 마부. 이리 돌아와요.”

나가는 시녀를 보며 반근의 눈 속에 부러움이 스쳤다. 두 반근은 전부 아씨를 위해 할 일이 있는데, 나만……. 반근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걸레를 보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나도 할 일이 있었지!

“금가아, 불 좀 더 때 줄래? 아씨의 침구를 다려야겠어. 눅눅해지지 않게.”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성 밖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주점은 비까지 내리자 더욱 적막해 보였다.

텅 빈 대청 안. 서무수 등이 자리를 치우고 정교랑과 마주 앉았다.

“이게 문 위에 걸 편액이라고?”

서무수가 정교랑이 건네는 글씨를 받으며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무수가 펼쳐 보니 네모난 종이에 ‘태평’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며칠 전에 쓴 건, 마음에 안 들어서, 며칠 더 연습했어요. 이게 그나마 내놓을 만하네요.”

“좋네, 좋은 글씨야.”

서무수가 말했다. 범강림 등 형제들도 고개를 빼고 들여다봤다. 어차피 봐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훌륭하다고 했다.

“그리고, 숙수를 불러와요.”

맨 뒤에 앉아 있던 서봉추가 얼른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질렀다.

“이대작!”

범강림이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낮춰 나무랐다.

“왜 소리를 질러! 조용히 해, 누이 놀랄라.”

서봉추는 헤헤 웃으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이 서봉추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라?”

서봉추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이의 웃음이 예전보다 좋아졌네!”

예전보다 좋아져? 무슨 뜻이지? 다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정교랑은 다소 놀라고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가 곧 웃음을 지었다. 도자기로 만든 듯 딱딱해 보였던 소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지면서 입가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호선이 그어졌다.

“아씨, 웃을 수 있으시네요!”

옆에 있던 몸종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해져 소리를 질렀다.

“아씨, 더 나아지셨어요.”

누이는 말수가 적고 표정이 뻣뻣했다. 서무수 등도 그것이 병 때문인 건 알고 있었지만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누이가 자신의 병에 대해선 속수무책이라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거 잘됐네. 누이, 이제 금방 낫겠어.”

다들 웃으며 기뻐했다.

“네, 어쨌든 좋아질 거예요. 점점 더 좋아져요.”

정교랑이 또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대작은 후원에서 손으로 가슴을 쓸며 침을 삼켰다.

“주인어른이 부르는데 어서 가야지. 여기서 뭐 하나?”

늙은 관리인이 말했다.

“형님, 주인어른이 절 자르려는 걸까요? 보시다시피 장사가 영…….”

이대작이 울상을 지었다.

“장사가 안 되는 건 입소문이 안 나서야. 예전 취봉루는…….”

늙은 관리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대작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늙은 관리인의 말을 끊었다.

“또 시작이십니다. 그놈의 취봉루 얘기 좀 그만해요.”

이대작의 표정이 환해졌다.

“자르려고 부르는 건 아닐 겁니다. 자르려면 형님부터 먼저 자르겠죠.”

기분이 좋아진 이대작이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앞쪽으로 걸어갔다.

“뭐라는 거야!”

늙은 관리인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 취봉루도 자네 먼저 자르고 날 잘랐거늘.”

이대작은 감히 고개도 못 들고 꿇어앉으며 예를 표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만든 음식, 먹어 봤어요.”

정교랑의 말에 이대작의 가슴이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듣기론 이 여인이 주인들의 누이라는데, 슬쩍 봤던 첫날부터 오늘까지 은밀히 지켜본 바로는 친누이라면 귀신이 웃을 노릇이었다.

주인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동생을 다정하게 대하고 애지중지 아껴 주는 오라비나 하찮게 여기는 오라비는 있어도, 이토록 공손한 오라비는 없지 않은가.

이대작이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촌뜨기 숙수라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촌사람 특유의 눈치가 있어서 이 여인이야말로 이 점포의 진짜 주인이라는 걸 금세 알았다.

음식이 어떻단 거지? 드디어 진정으로 숙수의 운명을 틀어쥔 자가 입을 열었다.

“이건…….”

정교랑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몸종을 쳐다봤다.

“넌, 이름이 뭐지?”

몸종은 멈칫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씨, 소인은 반근이잖아요.”

몸종은 억울한지 애걸하는 투였다. 아씨께서 날 버리시려나? 갑자기 왜 이러셔? 갑자기 이름을 물으시다니?

놀란 이대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슬쩍 훔쳐보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열네다섯 나이에 피부는 도자기처럼 희고 눈은 컸다. 점잖은 색 치마에 검은 비단으로 된 덧옷을 입은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쪽을 보는 여인의 시선이 느껴지자 이대작은 놀라 얼른 고개를 떨궜다.

“이 아이한테 새로운 음식을 몇 개 배워요.”

정교랑은 계속해서 몸종의 이름을 묻거나 이대작의 음식이 어떤지 평가하는 대신 간단하게 말했다. 이대작은 고개를 들며 이해할 수 없는 듯 엥, 하는 소리를 냈다.

몸종은 얼른 꿇어앉으며 이대작에게 예를 표했다.

“반근이에요.”

이대작이 얼른 답례했다.

“아씨께서 새로운 요리 몇 개를 가르쳐 주라고 하셨어요. 제가 이곳 부엌에 남을게요.”

이대작은 그제야 이해했다. 이 사람이 새로 온 숙수구나! 역시 난 잘리는 거였어!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주육낭은 말고삐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행랑에 있던 남녀가 오만불손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당신네 보러 온 거 아니에요. 우린 정 낭자를 보러 온 건데, 왜 자꾸 핑계를 대며 막느냐고요.”

본디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던 주육낭은 그 말에 홱 고개를 돌렸다. 주육낭은 손을 허리춤에 얹고 고개를 쳐들며 따지던 사내의 멱살을 확 잡았다. 사내는 하도 갑작스러워 미처 방어도 못 한 상태였다.

“왜 이러는 거요?”

매일 무예를 단련하는 데다 혈기 왕성한 소년이다 보니 중년 사내의 다리는 금세 허공에 뜨게 됐다. 옆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던 여인은 주육낭에게 옷깃을 잡혀 문 앞으로 끌려갔다.

“똑똑히 보시오. 이 위에 뭐라 쓰여 있소?”

주육낭이 소리쳤다. 저 높이 걸린 편액에는 ‘주택(周宅: 주씨 저택)’이라고 쓰여 있었다. 연초에 칠을 새로 한 덕에 아름답게 빛났다.

“썩 꺼져!”

주육낭이 사내를 홱 밀치며 소리쳤다. 사내는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인간들이 또 오거든 절대 안으로 들이지 마라.”

주육낭이 무거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행랑에 있던 사람들이 얼른 대답했다.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부모의 거처에 당도해서야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풀었다.

“공자님, 부인은 손님과 함께 계십니다.”

여종이 나와 맞이하며 나지막이 고했다.

“또 누가 찾아왔더냐?”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며 묻자 여종은 웃음을 지었다.

“그분을 찾아온 건 아니에요. 뭐, 그분 때문에 온 거긴 하지만요.”

다들 그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게 누군지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뻔히 알았다. 그럴 수밖에. 지금 주씨 저택을 찾아오는 이는 전부 그녀 때문에 오는 이들이었으니.

주육낭이 심호흡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대청 문이 열리면서 여인 둘이 나왔다.

“부인, 잘 생각해 보세요. 저희 부인께서도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에요.”

여인들이 떠들었다. 문은 이미 닫힌 상태였다. 여인들은 몸을 돌리고 불쾌한 듯 입을 삐죽였다.

“외숙모지 부모도 아니잖아. 혼사를 꼭 외숙모가 결정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여인들은 속삭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주육낭이 두 여인을 힐끔 쳐다봤다.

“무슨 일로 온 자들이냐?”

여종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나지막이 고했다.

“정 아씨의 혼담을 넣으러 왔대요.”

주육낭은 멈칫했다. 혼담?

“정 아씨도 열네 살이니 혼담이 오가도 이상할 건 없죠. 저 사람들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뻔해요. 여인이 시집간다는 게 사실 평생 마음 편히 살자고 가는 거잖아요. 사실 정 아씨처럼 병을 앓았던 이는 더더욱 좋은 사람을 찾기 힘들죠. 시집가 봤자 무슨 마음이 놓이겠어요.”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저만치 걸어가는 여인들과 모친이 있는 대청을 차례로 쳐다봤다.

시집이라……. 여인이 원하는 건 마음 놓고 기댈 곳 아니던가. 주육낭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양옆으로 늘어뜨렸던 주먹을 꽉 쥐었다.

태평거 안.

이대작은 풀이 죽은 채로 몸종과 함께 물러갔고, 곧이어 늙은 관리인이 불려 왔다.

“주인어른, 가장 중요한 건 입소문입니다. 입소문을 내려면 신기한 게 있어야 하지요.”

관리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솔직한 말씀으로 당초 취봉루가 명성을 얻은 건 두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장맛 덕분입니다. 장 덕분에 음식 맛이 좋았거든요. 그러다가 다른 집에서도 차츰 장맛에 신경을 쓰면서 취봉루도 별다를 게 없어졌지요. 벌이도 하루하루 줄었고요. 손자가 물려받고 나서 과로신선을 만들어낸 덕에 다시 흥하게 된 거고요.”

마차를 타고 달려와 급히 들어오던 시녀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과로신선을 자기들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정교랑이 힐끔 쳐다보자 시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주인어른, 요즘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집에 숙수를 두고 있습니다. 밖에서 먹을 때보다 훨씬 제대로 만들어 먹죠. 그러니 나와서 먹을 땐 신기한 걸 원하기 마련입니다. 그저 배나 채울 요량이면 이런 주점에 들어올 게 아니라 노점에서 먹으니까요. 그러니 우리 같은 주점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줌과 동시에, 모처럼 나와서 먹는 만큼 신선한 맛을 맛보게 해 줘야 합니다.”

늙은 관리인은 눈앞에 있는 소녀를 보며 속으로 개탄했다. 어느 댁 낭자이기에 주점을 열어 노는 게야, 이게 뭐 재미있다고. 주점이 재미있어 보이나?

“그렇군요.”

정교랑이 늙은 관리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말이에요.”

옆에 있던 서무수도 늙은 관리인을 보며 웃었다. 이 늙은이는 늘 고분고분 순종적인 데다 귀도 어둡고 사리 판단도 어려워 보였는데, 뜻밖에도 속으론 훤히 알고 있었다. 평소에 서무수 형제들에게 말을 아낀 건 이들이 진짜 주인이 아님을 눈치챘기에 괜한 수고를 들일 필요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진짜 주인이 나타나니 숨기고 있던 실력을 드러낸 것이다.

주인에게 인정을 받은 셈인데도 늙은 관리인은 웃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안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어르신.”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늙은 관리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재(孫才) 저 녀석, 왜 또 온 게야.”

이쪽에서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르신, 저기……. 아니,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사내였다. 뼈가 앙상한데도 머리는 커서 얼핏 보면 대나무 장대 위에 공이 얹혀 있는 듯 흔들거렸다. 낡은 도복을 입고 있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안을 살피던 사내는 여인이 있는 걸 보고 놀라 몸을 움츠렸다.

“어딜 함부로 들어와!”

서봉추가 소리를 지르며 문가로 가 섰다.

“몰랐어요, 몰랐습니다.”

사내는 겁먹은 목소리였다. 물건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서 장사하는 거잖아요. 문을 열었으면 손님을 맞이해야지, 어떻게 이래요?

정교랑이 말했다. 서무수가 서봉추를 노려보고 일어나 문가로 갔다.

“손 형, 미안하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문밖에 선 사내가 얼른 대답했다.

“말씀 좀 여쭈려고요. 오늘 두부는 안 필요하세요?”

“이보게, 손재.”

늙은 관리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밖에 대고 말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해. 그 두부인지 뭔지는 맛없어서 못 먹는다니까. 와서 팔 생각 관두고 아예 만들지도 마. 그냥 착실히 농사나 짓는 게 나아.”

관리인은 정교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낭이랑 같은 마을 사람인데, 본디 도사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도관이 없어지면서 돌아왔죠. 누구한테 괴상한 손재주를 배웠는지 콩으로 두부인지 뭔지를 만들어서는 여기저기 팔러 다니는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요. 나이도 있으면서 먹고살 생각도 안 하고…….”

관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죠.”

안에 있던 사람들은 흠칫 놀라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들어와요. 아씨께서 사신대요.”

시녀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손재는 고함 소리에 놀라 후다닥 달아나려다가 간신히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전전긍긍한 모양새였다.

시녀가 두부 광주리에서 두부 한 모를 꺼내 정교랑에게 올렸다. 정교랑은 숟가락으로 떠서 한입 맛보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녀가 눈치를 채고 가래통을 가져오자 정교랑이 입에 있던 것을 뱉었다.

“아씨, 저도 먹어 봤습니다. 먹을 수는 있지만 도무지 맛이 없어요.”

늙은 관리인이 말했다. 입을 닦은 정교랑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젊은 도사를 쳐다봤다.

“직접 만들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손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제, 제 사부님테 배웠어요. 단약을 만들다가 만든 거예요. 맛은, 맛은 좀 없지만, 그, 그래도 몸에 좋은 겁니다.”

사내는 말을 더듬거렸다.

“손재, 몸에 좋은 거면 자네 사부님도 단약을 먹고 죽진 않았을 게야.”

늙은 관리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대로 말해. 괜한 말 하지 말고.”

손재는 머쓱해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정교랑이 일어나 몇 걸음 다가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정교랑은 손재의 광주리 앞으로 가더니, 젖은 천을 들추고 그 안에 든 두부를 유심히 쳐다봤다.

“아씨, 두부를 사시겠습니까? 진짜, 진짜 좋은 거예요.”

정교랑이 손재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 팔래요?”

손재는 멈칫했다가 곧 몹시 기뻐했다.

“팔게요, 팔겠습니다. 팔려고 만든 두부예요.”

손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정교랑이 손재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당신 팔래요?”

응? 손재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영문을 몰랐다.

“이봐요, 우리 아씨가 물으시잖아요. 당신을 팔 거냐고요.”

말뜻을 알아들은 시녀가 물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의미를 이해하고, 곧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손재도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저를 사시겠다고요?”

손재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손재는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고는 편안한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으로 코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올해로 스무 살입니다. 여섯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사부님을 따라 도관에서 지내면서 열여덟 살까지 제를 올리고 경전을 읽었어요. 그러다 사부님이 돌아가신 후로 시주도 끊기고 중놈들한테 땅까지 빼앗기는 바람에 결국 짐 싸서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래도 이 한 몸 기거할 곳은 간신히 남았는데 해마다 재해가 끊이지 않으니 농사도 못 짓겠더라고요. 제가 딱히 손재주는 없지만 사부님을 따라 단약을 만들며 두부 만드는 재주는 익혔거든요. 전에 사부님과 사형제들도 두부 덕에 굶어 죽진 않았으니 두부를 만들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가난한 이는 돈이 없어서 못 사고 부자는 입맛이 까다로워 안 먹으니 도통 팔리지 않네요.”

손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큰 머리를 흔들어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저러다 머리가 툭 떨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이 손재가 다른 재주는 없어도…….”

손재는 돌연 자세를 곧추세우며 흥분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봤다.

“차 우리기, 물 긷기, 장작 패기, 불 때기, 말 돌보기, 여물 준비하기부터 시작해 침상 정돈, 이불 개기, 옷 짓기, 밥하기에 이르기까지 다 할 줄 압니다. 도관에서 십수 년을 살면서 다른 건 몰라도 남 시중드는 거 하나는 도가 텄죠. 하인으로 쓰실 거면 아주 제대로 고르신 겁니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값어치는 제대로…….”

낯부끄러워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

“본인 꼴 좀 제대로 보고 얘기해. 값어치를 제대로 하긴.”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자 손재가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댁보단 나은 것 같은데.”

손재는 중얼거리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하인이 될 필요는 없어요. 그 손재주를 사겠단 거예요.”

손재는 멈칫했다가 자신의 두부 광주리를 쳐다봤다.

“두부를 만드시려고요?”

말뜻을 이해한 손재가 놀라 물었다.

“그래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게요. 이 두부는 이제 손씨 것이 아니라, 정씨 거예요. 알아들어요?”

모두가 이해했다.

“그럼, 아씨. 값은 얼마나 쳐주실 겁니까?”

손재는 자세를 바로 앉으며 눈알을 굴렸다.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손재주를 팔라는 것이렷다. 그렇다면 흥정을 제대로 해야지.

“이 두부로 말할 것 같으면, 경성 땅에서 오직 제 사부님만이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것으로…….”

손재가 말을 이었다.

“독창적인 재주라고 해 봤자 배도 못 채우면서.”

늙은 관리인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들어 머리를 쥐어박았다.

“좋다 좋다 하니까 진짜인 줄 아네.”

“어르신, 이건 사고파는 거잖아요. 흥정도 안 할 순 없죠.”

손재는 머리를 감싸 쥐며 투덜댔다.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값은 편히 말해요. 우선 두부 만드는 도구를 다 가져와요.”

정교랑은 서무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셋째 오라버니, 후원을 정리해서, 두부방을 만들어 줘요.”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바로 가서 치울게. 내일이면 다 돼 있을 거야.”

정교랑은 모두에게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사람들은 마차가 빗속으로 사라진 후에야 돌아섰다.

“가서 짐 챙겨 오지 않고 뭐 하시오? 어디서 친한 척이야! 자기가 뭐라고 배웅을 왜 나와!”

서봉추가 함께 배웅을 나온 손재를 힐끔 보며 소리쳤다. 손재는 입을 삐죽거리고 도롱이와 삿갓을 갖춰 쓴 다음 짐을 챙겼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야. 마차를 몰고 데려가서 짐을 챙겨 와라.”

범강림이 명했다. 사내들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후원에서 마차를 끌고 와 함께 갔다.

“이제 주점 안 하고 두부 만드는 거로 업종을 바꾼 거요?”

슬그머니 빠져나온 이대작이 늙은 관리인을 끌고 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걱정 말게. 요리를 가르쳐 줄 사부까지 데려왔는데 주점을 안 하겠나?”

늙은 관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 취봉루도 처음엔 주점을 열지 말고 아예 장을 만들어 팔라는 말이 많았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이대작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놈의 취봉루, 취봉루.

“형님, 형님이 보기엔 이 태평거가 그때의 취봉루 같소이까?”

이대작의 물음에 늙은 관리인은 수염을 만졌다.

“취봉루는 취봉루고 태평거는 태평거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나. 어서 가서 일하게나. 열심히 배우지 않다가 음식 평가조차 제대로 못 받으면, 취봉루가 됐든 태평거가 됐든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야.”

정교랑이 돌아왔을 무렵, 주육낭은 이미 한참을 기다린 후였다.

대청은 장식이 단출했다. 금이나 옥 장식은 없고 소박하게 꾸며져 있어 여느 방과 다름없었다. 휘장 하나가 침상과 대청 사이를 갈랐다. 세워진 병풍 앞으로 자리가 깔리고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두꺼운 책이 올려져 있었다.

대주번성록.

주육낭이 몸을 숙여 살펴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저자에 도는 이야기책일 뿐 규방 여인들이 즐겨 읽는 경서는 아니었다. 구석에는 향로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단향목이 타고 있었다. 밖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 냄새와 섞여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정교랑의 거처에 있는 몸종들과 여종들은 집안의 다른 아씨들을 모시는 이들과 다름이 없었다. 몸종과 여종은 회랑 아래에 조용히 꿇어앉아 있을 뿐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다른 자매들의 거처에 비해 이곳은 훨씬 조용했다. 정교랑 본인처럼.

주육낭이 한숨을 내쉬는데 문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여인이 우산을 쓰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회랑 아래에 있던 여종과 몸종이 일어나 맞이하며 시녀 손에 들린 우산을 받았다. 나막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정교랑은 단정히 앉아 있는 주육낭을 못 본 듯 굴었다.

“아씨는 씻으셔야 해요. 공자님, 다른 누이의 거처로 가지 그러세요?”

시녀가 말했다. 우산을 쓰긴 했지만 정교랑의 머리와 어깨는 비에 젖어 있었다. 시녀는 정교랑의 덧옷을 벗겨 주었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군. 여기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정리했다. 넌 마음 편히 지내면 돼. 계략 같은 거 세울 필요 없어. 이 주복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시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정교랑도 시선을 옮겼다. 주육낭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뭐라는 거예요?”

시녀는 이해할 수 없는 듯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난 저 사람이 아니잖아, 모르지.”

정교랑의 대답에 시녀는 까르르 웃었다.

“아씨, 우리 씻으러 가요.”

* * *

“뭐라고?”

주 부인의 방 안.

눈앞에 꿇어앉은 주육낭을 보며 주 부인은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주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다부진 표정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였다.

“소자 올해로 열여섯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혼인하겠습니다.”

주 부인이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옆에 있던 여종은 웃음을 참으며 주 부인의 등을 쓸어 주었다.

“부인, 공자님도 어린 나이는 아니시죠.”

여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남녀가 열네다섯이 되면 혼인을 하고, 스물이 되면 늦었다고들 하는 때였다. 물론 만혼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서생은 과거 급제를, 무인은 공명을 가정 꾸리는 일보다 중시했다.

주 부인은 아들을 쳐다봤다. 여인이자 어머니로서 아들이 그저 혼인을 하고 싶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육낭, 어느 집 규수를 마음에 뒀느냐?”

주 부인이 불쑥 물었다. 대놓고 물으니 예상대로 아들의 얼굴에 난처하고 쑥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저는…….”

주육낭은 머뭇거렸다. 이런 남녀 간의 문제를 입에 담기는 껄끄러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사촌 누이와 혼인하겠습니다.”

주 부인과 여종은 너무 놀라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주 부인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다시 물었다.

“정교랑과 혼인하겠습니다.”

주육낭은 눈을 크게 뜨고 힘주어 말했다. 주 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봤다.

“아이고, 야단났네!”

주 부인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넘어갔다.

“썩 내쫓아라!”

“부인!”

여종이 놀라 비명을 지질렀다. 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주 노야가 집으로 급히 돌아왔다. 의원도 함께 모셔 갔다는 집사의 귀띔이 아니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을 모셔 갔다는 말은 주 부인에게 빨리 가 봐야 함을 의미했다. 온 경성 사람이 부러워하는 신의가 집에 있건만 하루가 멀다고 밖에서 의원을 모셔 가니 우스운 노릇이었다.

“주 형, 나 대신 뭐 하나만 알아봐 주시오.”

동료 하나가 주 노야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도 궁금합니다.”

다른 이들도 간절히 부탁했다.

“효과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 상관없소.”

“금석보다 비싸답니까?”

다른 이가 덧붙여 물었다.

“금석만큼 비싸도 금석보다 훨씬 좋을 겁니다. 잊지 마시오. 이 진인은 도조(道祖)가 아니십니까.”

몸을 튼튼히 하고 수명을 늘려 준다고 하여 요즘 사대부와 부잣집에서 떠받드는 금석은 도사들이 만든 단약이었다. 도교의 창시자인 이 진인이 남긴 비술이라면 가장 정통일 수밖에 없었다.

말이 다소 두루뭉술했지만 주 노야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금석을 먹고 목숨을 잃을 뻔한 동 내한은 이미 몸을 회복하여 사람들을 만났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신기함 외에도 동 내한에게는 놀라운 일이 또 있었다. 안색과 용모였다.

동 내한이 금석을 먹은 것은 몸이 안 좋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염라대왕 앞에 한번 다녀오더니 기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얼굴의 혈색이 좋아지고 길을 걸을 때도 다리에 힘이 들어갔으며 듣기론 집에 있는 아내와 첩실들도 퍽 만족한다고 했다. 더욱 기이한 것은 본디 하얗게 셌던 귀밑머리가 다시 검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죽었다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젊음을 되찾고 회춘까지 하다니!

주 노야는 껄껄 웃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집사가 초조해 죽겠다는 얼굴로 잡아끌며 재촉하지 않았다면 좀 더 자리를 지키며 그 열광적인 분위기를 즐겼을 터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마차에 오른 주 노야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물었다. 집사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부인의 불안증이 도지셨습니다. 속히 가 보시지요.”

집사의 말은 모호했다.

“불안증이 도지면 뭐? 교교가 집에 있지 않은가.”

주 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바로 그 교교 때문에 도지신 건데요……. 집사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길을 재촉했다.

주 노야가 대청에 들어섰을 무렵, 의원은 이미 문진을 마치고 밖에서 약을 짓고 있었다. 빙 둘러앉은 집안 여인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여인들의 시선은 수시로 주육낭을 향했다.

주육낭은 대청 입구에 꼿꼿하게 앉아 있으면서 굳은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상에 누운 주 부인은 눈물을 흘리고 곁에는 여종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부인, 우시면 안 돼요. 의원이 말했잖아요. 계속 조급해하시면…….”

“맞아요. 마음을 조급히 가지시면 안 돼요.”

주 노야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오?”

주 노야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주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노야, 난 이제 못 살아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주 노야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당신의 그 잘난 외조카한테 물어봐요!”

주 부인은 앙칼지게 소리치고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꼈다.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자코 있는데 밖에 있던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그 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소자 홀로 결정한 겁니다.”

주 부인은 기가 막혀 몸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그 불여우한테 눈이 멀었구나. 어디서 그 애 편을 들어!”

매섭게 소리친 주 부인이 숨을 헐떡이자 여종들이 황급히 달래 주었다. 밖에 있는 자식들도 주육낭을 에워쌌다.

“오라버니, 말을 가려서 해요!”

“오라버니, 어머니 돌아가시는 꼴을 보려고 이래요?”

주 노야는 안팎에서 오가는 말에 더욱 어리둥절하여 탁자를 내리쳤다.

“다들 입 다물어라. 대체 무슨 일이야?”

“아버지, 여섯째 오라버니가 정교랑을 아내로 맞이하겠대요.”

어린 딸은 모친이 숨을 헐떡이자 못 참고 일어나 소리쳤다. 주 노야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주 노야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아버지, 소자는 정교랑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

주육낭 본인이 입을 열었다. 주 노야는 멈칫하며 아들을 쳐다봤다.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 천것을 내쫓아요! 당장 내쫓아!”

주 부인은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그 계집한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 진작 알았어요. 내 아들을 꾀다니!”

“그 애는 무관한 일입니다. 제 결정이라고요.”

주육낭이 다시 말했다.

“왜 그 애와 혼인하겠단 게냐?”

주 노야는 놀란 표정으로 아들을 주시했다. 아들도 여색에 홀릴 나이가 되었던가? 여색? 그 아이의 용모가 뛰어났었나?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움켜쥐었다.

“매일 같이 들어오고 같이 나가더니, 오라버니를 유혹하는 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주씨 가문의 어린 낭자 하나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입 다물어!”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고 호통쳤다. 주 낭자는 겁먹기는커녕 더욱 눈을 치켜떴다.

“아직 뭘 어찌한 것도 아닌데 우린 말도 못 한단 거예요? 오라버니, 며칠 사이에 아주 정신이 홀렸나 봐요!”

안에서는 주 부인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밖에서는 자식들이 다투는 소리가 주 노야의 귀에 웅웅거렸다.

“모두 입 다물어라.”

주 노야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삽시간에 안팎이 조용해졌다. 다들 조용히 주 노야를 쳐다보며 결단을 기다렸다. 주 노야는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들 물러가라.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그 누구도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자식들은 밖에서 허리를 굽히며 네 하고 대답한 후 우르르 빠져나갔다. 주육낭이 머뭇거렸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할 말이 있거든 다음에 해.”

형 하나가 나지막이 말했다. 주육낭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야 형제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여종들도 따라 나간지라 안에는 주 노야 부부 두 사람만 남았다.

주 부인은 침상에 누운 채 손수건을 들고 흐느껴 울었다. 주 노야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부인을 쳐다봤다.

“부인, 사실…….”

주 노야가 주저하며 입을 열려는데 주 부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도 꾸지 마요!”

주 부인은 빽 소리를 지르며 주 노야의 말을 끊고는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우리 육낭은 팔자도 참 박복하죠. 제 맏형처럼 음보로 순탄하게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니 저 스스로 공을 세워야 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당신을 따라 고된 훈련을 받았고 앞으로도 외지의 군영을 떠돌아야 해요. 그런데 힘을 실어줄 장인을 찾아줄 생각은 못 할망정 그 바보랑 엮어 줄 생각을 해요? 아니, 당신, 차라리 우리 모자를 죽여요!”

“내가 먼저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잖소.”

머쓱해진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 애는 이 집에 못 둬요.”

주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기껏 좋게 마음먹고 평생 데리고 살려 했더니, 돌아온 거라곤 그런 악랄한 마음뿐이네요. 감히 내 아들을 넘보다니. 당신이 말 안 하면 내가 못된 외숙모 노릇을 하는 수밖에요. 직접 가서 내쫓을게요.”

주 부인이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주 노야가 얼른 붙잡았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면서 뭘 서두르시오. 뭐라 말해야 할지 생각을 좀 해 봅시다. 이렇게 경솔하게 굴다가 말이라도 새어 나가면 우리 육낭도 명성이 떨어지잖소.”

주 부인은 분통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 또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주씨 저택 전체에 기이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시녀가 고개를 돌리자 여종 둘이 얼른 시선을 피하며 총총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거뒀다.

“뭐지? 하룻밤 사이에 다들 이상하네.”

시녀는 중얼거리며 문안으로 들어섰다. 벌써 회랑 아래로 나와 서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아씨, 나가시려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 시녀는 저도 모르게 다시 주변을 살폈다.

“아씨, 집안사람들이 좀 이상한 거 안 느껴지세요?”

시녀가 방금 지나간 두 몸종을 쳐다보며 물었다. 두 몸종은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듯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바짝 붙어 뭐라 시시덕거리며 지나갔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중문 앞으로 마차 두 대가 다가왔다. 막 마차에 오르려던 주 낭자는 정교랑과 시녀를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마차는요? 이번 마부는 누구죠? 육공자께서 마부를 해 주시려나?”

시녀가 여종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 있던 주 낭자가 성을 벌컥 냈다.

주육낭이 정교랑의 마부 노릇을 하는 건 집안에서 신기할 일도 아니었다. 바보가 도망치지 못하게 주육낭이 감시하는 것임을 모두가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못 막아도 주육낭은 막을 수 있으니까.

예전이었다면 주 낭자 역시 그런 말을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하필 어제 주육낭이 그런 소동을 벌인지라 그 말에 울화가 치밀었다. 저 바보가 작정하고 오라버니를 유혹한 건가?

“퉤, 정말 뻔뻔하네!”

깜짝 놀랐던 시녀는 곧 눈을 치켜떴다.

“그래요. 남의 걸 빼앗는 건 참 뻔뻔한 짓이죠!”

시녀는 손을 허리에 대고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잘 욕하셨어요!”

이 시녀가 되바라진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감히 욕까지 해댈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주인인 정교랑은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시녀가 하는 욕은 곧 그 주인이 하는 욕을 뜻했다. 그런 일을 벌이고도 이토록 제멋대로 날뛰다니.

주 낭자는 오랫동안 꾹꾹 눌러 왔던 울분이 폭발했다.

“정씨 가문에서는 아랫것을 이렇게 가르치는구나. 아래위도 없네, 정말 뻔뻔해!”

“맞아요. 정씨 가문 아랫것들은 뻔뻔해요. 주씨 가문의 윗전도 뻔뻔하고요. 그러니 사돈으로 아주 딱이네!”

시녀는 손을 허리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앙칼지게 받아쳤다. 주 낭자는 열이 받아 발을 굴렀다. 남도 모자라 자기 자신까지 욕하다니.

“너, 너.”

주 낭자는 말문이 막혀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얌전한 규방 규수인지라 이렇게 막무가내인 계집은 처음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심한 말 한 번 들은 일이 없고, 부모님도 무섭게 꾸짖은 일 한 번 없었는데 어린 시녀한테 삿대질을 당하며 욕을 먹다니.

주 낭자는 발을 구르고는 울음을 터뜨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 낭자의 여종들과 몸종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넋이 나가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따라 들어갔다.

“마차!”

시녀가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중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종은 놀라 몸을 부르르 떨며 반사적으로 마차를 끌고 왔다. 시녀가 정교랑을 부축해 마차에 올랐다.

“일개 무인의 여식이 어딜 감히! 정말 배운 것도 없지!”

시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싸움 잘하고 욕 잘하는 이는 저자에 있는 무지하고 막돼먹은 촌부가 아니라, 다섯 수레의 경서를 읽고 그 뜻을 익힌 어사대의 까마귀라 하지 않았던가.

안 싸우면 몰라도 싸우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졌다. 무장은 그저 용맹하다지만 문신은 욕에 도가 튼 이들이어서 한번 물렸다 하면 이가 뼛속으로 세 푼이 들어갈 정도였다. 글씨 한 자에 생사가 결정되고, 피를 보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죽였으니 그 흉악무도함으로 견줄 자가 없었다.

대유학자면서 점잖고 올곧은 장순 같은 이도 학문을 논할 때는 뭇 유생들과 살벌한 설전을 벌였으며, 욕을 해대던 어떤 늙은 유학자는 피를 토하고 혼절하기도 했다.

“저기요.”

시녀가 마차의 휘장을 들고 소리치자 앞쪽에 있던 마부가 기겁을 하며 몸을 떨었다.

“번거롭겠지만 약방 앞에 잠깐 세워 줘요.”

시녀는 미소를 머금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좀 전의 앙칼진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한 눈웃음도 지어 보였다. 마부는 몸을 떨며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약방 거리를 지난 마차는 가장 큰 약방 앞에 세워졌다. 안으로 들어갔던 시녀는 얼마 안 가 약포 몇 꾸러미를 들고 나왔다.

옥대교 근처로 오자 금가아가 마차를 빌려 기다리고 있었다. 시녀와 정교랑은 빌린 마차를 타고 곧장 떠났다.

저 낭자는 매번 어딜 가는 거지? 주씨 가문 마차를 마다하고 매번 평범한 마차를 빌려 타다니, 주씨 가문 사람들이 알까 봐 저러나. 아니면 남들한테 들킬까 봐?

마부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오라버니, 들어가세요. 문간방에 앉아 쉬면서 목도 좀 축이고요.”

반근이 불렀다. 정신을 차린 마부는 마차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마부는 이 몸종이 주씨 가문 출신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며칠 전에 죽네 사네 하며 소동을 벌였던 그, 그, 이름이 뭐더라?

“반근 누나, 여기 널어 둔 이불 내가 걷는다?”

금가아가 마당에서 소리쳤다.

그렇지, 반근! 그런데 아까 그 시녀도 반근이었던 것 같은데? 마부는 저도 모르게 밖을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죄다 반근이야? 요괴 하나가 분신술을 써서 여럿이 된 건가? 그 아씨는 이 진인의 제자고 염라대왕과 교분이 있는 사이니, 요괴를 만들어 시중을 들게 하는 것쯤이야. 자유자재로 안색을 휙휙 바꾸는 걸 보면 요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마부는 또다시 몸이 떨렸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아니지, 아니지. 태을천존이시여, 지켜 주시옵소서. 결례를 범할 뜻은 없었나이다.

정교랑의 마차가 태평거 밖에 도착했을 무렵은 이미 오시(午時)였다. 이번에는 대청이 텅 비어 있지 않고 길 가던 행인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여긴 뭘 팔지?”

한 사내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청소는 깨끗하게 해 놨는데, 음식 맛은 어떨지 모르겠군.”

“전채(前菜)와 고기 요리가 있습니다. 술로는 경성에서 유명한 춘양과 옥경, 벽계가 있고 관주의 술과 술지게미도 있습니다.”

주문 담당을 맡은 무원산 형제의 넷째가 나섰다. 좀 서툴긴 해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술술 읊었다.

“작은 점포인데도 갖출 건 다 갖췄군.”

행인 둘이 웃었다.

“그럼 전채와 고기 요리 두 개, 탕 하나 주시오. 관주도 한 주전자 먼저 주시고.”

넷째는 네 하고 대답한 후 부엌으로 주문을 전하러 갔다. 계산대 옆을 지나는데 늙은 관리인이 잡아끌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렇게 비단옷을 입고 와서 자리에 앉을 때 서로 겸양하며 예의를 차리는 손님한테는 좋은 술 중 하나를 바로 올리면 됩니다.”

차림이 번듯한 행상인 데다 한쪽이 접대하는 것으로 보이니 애초에 선택의 기회를 주지 말고 곧장 좋은 술을 가져오란 뜻이었다. 넷째는 고맙다며 알았다고 했다. 음식 주문 하나에 이토록 심오한 학문이 숨어 있을 줄이야.

정교랑과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녀가 늙은 관리인을 보며 생긋 웃자, 늙은 관리인도 웃으며 공손히 맞이했다.

후원의 건물 앞에는 서무수 형제가 서 있었다. 서봉추가 들어가려고 하자 손재가 막았다.

“여긴 단약을 만드는 곳입니다. 아무나 못 들어가요. 군대로 치면 사령관의 막사 같은 곳이죠. 보고 싶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손재가 커다란 머리를 흔들며 말하자 서봉추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가짜 도사 나부랭이가 단약은 무슨! 귀신을 속이라지!”

서봉추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가짜 도사 아닙니다. 도첩(度牒: 관청에서 도사에게 부여한 출가 증명서)도 있다고요!”

손재 역시 눈을 부릅뜨며 되받아쳤다. 발걸음 소리에 가장 먼저 고개를 돌린 서무수는 정교랑이 보이자 웃음을 지었다.

“누이 왔구나.”

정교랑 역시 서무수를 보며 웃었다. 얼굴이 한결 좋아져서 이제는 웃는 것도 제법 티가 났다.

“고생이 많아요, 오라버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

서무수는 웃으며 편히 대했다. 정교랑도 그 말에 웃음을 짓고, 고개를 돌려 손재를 바라봤다.

“준비는 다 됐어요?”

손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문을 열었다.

“보십시오, 아씨. 준비를 마쳤습니다.”

정교랑이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아무나 못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서봉추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아씨는 아무나가 아니잖습니까.”

손재는 말대꾸를 하면서 서봉추가 화를 내기 전에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협소한 건물 안에는 돌절구와 항아리, 나무틀, 헝겊, 무거운 돌 등의 물품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새로 벽돌을 쌓아 만든 아궁이도 있었다. 정교랑이 쓱 둘러봤다.

“내가 보는 앞에서 만들어 봐요.”

손재는 멈칫하며 놀랐다.

“아씨, 금방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으니 만들어 봐요.”

손재가 눈알을 굴렸다.

“아씨, 제가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 두부를 만드는 손재주는 경성에 오직 저 하나만 가졌습니다.”

손재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당초 우리 도관에서 만든 두부로 사부님과 사형제들이 먹고 살았는데, 근방에 살던 중놈이 사부님의 비술에 눈독을 들였어요. 제 사부님은 도학에만 정진하는 분으로 중놈들의 위세에 굴복하지 않고자…….”

밖에 있던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이고, 저 자식이 아직도 값을 올리고 싶어서 저 안달이네. 우리 누이한테 저걸 왜 보여 준다고…….”

정교랑이 서봉추를 보며 웃었다.

“오라버니, 진정하고 말하게 둬요. 공정하게 사고파는 게, 상도덕이에요.”

서봉추는 콧방귀를 뀌며 그제야 손을 거두었다. 손재가 멋쩍어하며 웃었다.

“아씨, 제가 호의를 무시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고……. 아무튼 이 기술은 사부님이 아무에게나 전수해 주신 게 아닌데, 제가…….”

손재가 눈을 껌뻑이며 말을 더듬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끊었다.

“알겠으니, 만들어 봐요. 공짜로 보겠다는 게 아니에요.”

손재는 목적을 달성한 듯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씨를 믿겠습니다요.”

손재는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아씨께서 보실 걸 알고 어제 콩을 불려 놨습니다. 이제부터 두부 만드는 법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밖에 있는 식탁 위에는 전채가 담긴 접시와 뜨거운 차 한 주전자가 놓였다.

“손님, 몸부터 녹이세요.”

넷째가 웃으며 말했다. 두 손님이 앞에 놓인 접시를 쳐다봤다. 접시에 놓인 네 가지 모양의 간식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술은?”

“이게 있잖습니까. 저희 간식은 차와 함께 먹을 때 그 맛이 가장 뛰어납니다. 술과 함께 먹으면 맛이 희석되죠. 일단 드셔 보세요. 술은 이따 뜨거운 요리와 함께 나올 겁니다.”

두 손님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작은 점포인데 꽤 다양한 게 있구먼. 요리를 빨리 내오시오. 한담을 나누며 풍류나 즐기자고 들어온 게 아니오. 길을 서둘러야 하오.”

넷째는 웃으며 알았다고 하고 물러갔다.

“자, 먹어 보십시다.”

손님 하나가 다른 이에게 차를 따라 주고, 젓가락을 들어 백설탕에 굴린 공 모양의 것을 집어 입에 넣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맛에 음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훌륭해.”

다른 이도 얼른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조금 맛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놀란 표정으로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하고 달콤한 맛이 조화롭게 어울리는군. 역시 차와 잘 어울려.”

냉채 접시는 얼마 안 가 깔끔히 비워졌다. 본디 양이 많지 않아 네 가지 모양의 간식을 하나씩 맛봤을 뿐이었다.

“먹을 게 들어가니 더 시장기가 도네.”

한 손님이 저도 모르게 부엌 쪽을 쳐다보며 웃었다. 요리가 빨리 나오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커다란 솥에서 콩국이 보글보글 끓으며 뜨거운 김이 올라오자 건물 안에 냄새가 퍼졌다. 손재는 아궁이 옆에 앉아 불을 때면서 수시로 일어나 거품을 걷어냈다.

“아씨, 지금도 먹을 수 있습니다. 콩국을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손재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여인을 쳐다봤다. 벌써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여인은 조용히 앉아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듯 손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두부는 만들기 쉬워 보여도 한두 번 본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고 노련한 솜씨가 필요한 일이었다. 손재는 우쭐한 마음을 안고 일부러 편하게 행동했다.

크지 않은 식당이었기에 냄새는 금세 앞쪽 대청으로 퍼졌다. 앉아 있던 두 손님은 저도 모르게 젓가락질을 멈췄다.

“또 뭘 만드는데 이렇게 냄새가 좋지?”

한 손님이 킁킁거렸다. 다른 손님은 화로 위에서 막 거른 술을 한 사발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는 서둘러 음식을 집었다. 식탁 위에는 어느덧 전채 접시가 치워지고 고기 요리 두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요즘 먹는 고기 요리는 양고기와 나귀고기, 닭고기와 오리고기가 전부였다. 소는 금지령이 내려 먹을 수 없었고, 돼지고기는 떳떳하게 내놓고 먹을 만한 음식이 못 됐다. 새우나 생선, 게는 경성에서 몹시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식탁 위에 놓인 고기 요리는 배추와 무,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넣고 끓인 평범한 요리와 달랐다. 고기를 얇게 썰어 무언가를 넣고 볶았는데 입맛에 딱 맞아 쉴 새 없이 젓가락이 갔다. 넷째가 쟁반 하나를 들고 왔다.

“손님, 탕 나왔습니다.”

꽤 오목한 도자기 아래로 불이 붙은 숯이 깔린 덕에 그릇에 담긴 탕은 여전히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국수 몇 가닥과 함께 여린 채소들이 수시로 떠오르며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이건 무슨 탕이오?”

“쌀국수입니다.”

넷째는 그릇과 젓가락을 들어 직접 덜어 주며 대답했다. 쌀국수라고? 신기하군!

이 점포에 들어와 앉을 때부터 하나하나가 다 신기했다. 역시 경성 근교라 다르긴 다르구나. 두 손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깐.”

손재가 솥에 있던 콩국을 떠 그릇에 담고 나무 막대를 들어 휘휘 저으며 옆에 있던 물그릇을 들어 그릇에 부으려 할 때였다. 지금껏 소리 없이 조용히 있던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손재는 하마터면 물그릇을 그릇에 빠뜨릴 뻔했다.

“뭘 넣은 거죠?”

정교랑의 물음에 손재가 헤헤 웃었다.

“아씨, 이게 바로 두부의 모양을 만드는 핵심입니다. 역시 똑똑하시네요. 그런데 안다 해도 그것만으론 안 됩니다. 많이 넣느냐 적게 넣느냐가 관건입죠. 많이 넣으면…….”

“이리 가져와 봐요.”

정교랑이 말을 끊으며 손을 뻗었다. 손재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가져갔다. 정교랑이 받아 냄새를 맡고는 손재에게 돌려줬다.

“역시 아니구나.”

역시 아니라니 뭐가? 손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해 봐요.”

정교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마지막 쌀국수 한 가닥까지 건져 먹고 나자 그릇에는 국물만 조금 남았다. 마지막 술 한 모금을 마신 후에야 두 사람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흡족한 듯 숨을 내쉬었다. 취기 때문인지 음식에서 나온 김 때문인지 먹으면서 흘린 땀 때문인지,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혈색이 좋아 보였다.

“작은 식당인 줄 알았더니 음식은 아주 제대로군.”

한 손님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경성은 화려하고 볼 게 많소이다.”

다른 손님 역시 웃으며 대꾸하고 계산하기 위해 손짓을 했다.

“경성에 가면 얼마나 눈이 확 뜨일지 기대되는구려.”

늙은 관리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다 합쳐서 1관입니다.”

손님 하나가 흔쾌히 돈을 꺼내 지불하고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봤다.

“식당도 깔끔하고 맛도 좋은데 어찌 이리 썰렁하오?”

“이제 막 개업을 해서 아는 사람이 적습니다.”

웃으며 대답하던 늙은 관리인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받은 돈 1관에서 몇 푼을 꺼내 손님에게 찔러 주었다.

“두 분께선 길을 가는 분이니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입소문 좀 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손님은 껄껄 웃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매매와 거래를 중시했다. 늙은 관리인이 돌려주는 돈이 얼마인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그만 넣어 두라며 화끈하게 손을 내젓지도 않았다. 오히려 손을 뻗어 덥석 받았다.

“장사할 줄 아시는구려. 장사는 걱정할 일 없겠소이다.”

넷째와 늙은 관리인은 문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다섯째는 벌써 말을 끌며 나오고 있었다.

“여물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딱 봐도 털에서 반들반들 윤이 나고, 먼 길을 달려 온 고단한 기색이 한결 덜해 보였다. 두 손님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노둣돌을 밟고 말에 오르더니 다시 한번 편액을 힐끔 쳐다봤다.

“태평거.”

한 손님이 소리 내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을 달려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관리인, 왜 돈을 덜 받은 거요?”

관리인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던 넷째는 까놓고 물어봤다. 늙은 관리인은 근심거리도 아니라는 듯 허허 웃었다.

“넷째 주인어른, 저런 상을 몇 개쯤 차려야 돈을 벌 것 같습니까?”

넷째는 답을 몰랐다.

“여덟 상은 차려야 돈이 됩니다. 돈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래 봤자 저이의 돈을 저이에게 돌려줬을 뿐입니다.”

“그래도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게 좋은 거 아니오?”

넷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늙은 관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돈을 벌고 싶으면 푼돈에 연연해선 안 됩니다. 욕심내지 않을수록 더 많은 걸 얻죠.”

넷째가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아무튼 관리인이 알아서 하시오. 난 요리를 내는 것부터 열심히 익히고 말할 테니.”

“반근.”

정교랑의 부름에 문밖에 있던 시녀는 얼른 네 하고 대답하며 종이 꾸러미를 안고 들어왔다. 손재는 벌써 두부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고 있었다.

“내일이면 드실 수 있어요.”

손재가 손을 털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게 바로 두부 만드는 법입니다. 손재주뿐 아니라 체력도 필요한 일이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만들어 봐요.”

나무틀을 짚고 서 있던 손재는 손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시 하라고요?”

손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씨, 이런 두부는 오래 두면 못씁니다. 만들어도 먹을 사람이 없고요. 어쨌거나 콩인데 괜히 낭비잖습니까.”

“한번 낭비하지 않으면, 영원히 낭비하게 돼요.”

정교랑은 시녀가 건네는 종이 꾸러미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만들어 봐요. 헛수고시키지 않을 테니까.”

손재가 입을 삐죽거렸다.

“네, 아씨가 좋으시다면 됐습니다.”

몸을 팔지는 않더라도, 이 아씨와 놀아 주면 돈 몇 푼은 벌 수 있을 테니 일단 눈앞의 생계부터 해결하자.

손재는 불린 콩을 갈며 이따금 여인을 쳐다봤다. 여인은 먼젓번처럼 뚫어져라 보지 않고, 시녀에게 물을 길어오게 하여 무언가를 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 손재는 묵묵히 할 일을 했다. 다 끓인 콩국을 쏟아붓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시큰거리는 팔을 주물렀다. 나무 막대를 들어 휘젓고 물그릇을 들 때였다. 또다시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이걸 넣어요.”

시녀가 물그릇을 건넸다.

“그건 안 됩니다.”

손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씨, 이건 장난치는 게 아닙니다. 무언가를 넣을 땐 다 규칙이 있어요.”

“넣으라면 넣어요. 웬 말이 그리 많아.”

시녀가 대꾸했다. 손재는 혀를 차면서도 도리가 없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미리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번엔 제가 하는 대로 안 했으니 두부가 안 만들어질 겁니다.”

“알았어요, 잘난 척 좀 적당히 해요.”

시녀는 콧방귀를 뀌며 물그릇을 건넸다. 손재는 하는 수 없이 받아 물그릇을 쳐다봤다. 자신의 것과 완전히 달랐기에 냄새를 맡아 봤다. 기이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뭐지? 손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으라고요.”

시녀가 재촉했다. 손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움직였다. 얼마 안 가 또 한 덩이의 두부 위에 돌이 얹혔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정교랑은 별다른 말 없이 서무수 등과 인사를 나눈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주씨 저택에 도착했을 무렵엔 등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아씨, 물을 끓여 놨어요. 갈아입을 옷을 가져올게요.”

안으로 들어가던 시녀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낯선 여종 몇 명이 회랑 아래에 앉아 있다가 정교랑과 시녀를 보고 웃으며 예를 표했다.

“아씨, 오셨어요?”

시녀는 놀란 표정으로 여종들을 훑어본 다음 안쪽을 쳐다봤다. 보따리 몇 개가 가운데 놓여 있고, 방 안의 장식과 배치는 이미 나갈 때와 달라져 있었다.

“누가 멋대로 아씨의 방에 들어가래요!”

시녀는 눈을 치켜뜨고 소리치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침구며 옷도 전부 정리되어 있었다. 탁자는 치워졌고, 지필묵과 책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이랬어요? 누가 아씨의 물건을 건드렸어?”

여종은 서두르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정교랑을 향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아씨, 이 방이 좀 낡았어요. 곧 봄철 우기인지라 불편하실까 봐 부인께서 수리를 좀 하신답니다. 우선 아씨의 댁에 가서 계시다가 수리가 끝나거든 다시 옮겨 오세요.”

시녀는 퍼뜩 깨닫고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지금, 쫓겨나는 건가?

집사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주 부인의 거처로 들어갔다.

“정리는 다 해 줬고?”

주 부인이 물었다.

“노야, 부인.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합니다.”

집사가 쭈뼛쭈뼛 말했다.

“뭐라고?”

주 부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쳤다.

“아씨의 저택을 간신히 찾았는데, 거기 사환이 문을 지키며 절대 못 들어가게 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어요.”

집사의 말에 주 부인은 피식 웃었다.

“관부에 신고한다고 소리치는 통에 무턱대고 들어갈 수도 없고요.”

집사는 고개를 숙인 채 쭈뼛거렸다. 오성병마사까지 동원해 대로에서 소동을 벌인 마당에 또다시 그런 소동을 벌여 남들 눈에 띌 순 없었다.

“그럼 내버려 두게. 기껏 생각해서 정리해 주려 했더니, 싫다면 관둬야지. 그 애는 돌아왔는가? 정리를 끝냈으면 가라고 하게. 나한테 절하러 올 것 없다고 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여종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대청에 앉은 여인을 쳐다봤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씨, 괜한 생각 마세요. 여기서 오래 지내시려면 수리를 해야 해요. 집이 작으니 여기서 비좁게 지내시느니 잠시만 나가 계세요. 수리가 끝나면 돌아오시고요.”

여종이 웃으며 타일렀다.

“괜한 생각 안 해.”

정교랑은 웃는 여종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내가 왔던 방식으로, 떠나려는 거야.”

왔던 방식으로 떠난다? 여종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 댁 육공자께서 아씨를 모셔 왔으니, 육공자더러 우릴 데려다주라고 해요.”

시녀가 말했다.

주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약그릇을 내던졌다. 문밖에 등을 들고 서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찍소리도 못 냈다.

“진짜 뻔뻔하기도 하지. 육낭과 우리 사일 이간질하려는 거예요! 그래도 체통을 지켜 떠나게 해 주려고 했건만 본인이 싫다니, 우리도 사정을 봐줄 필요 없겠네요. 여봐라, 묶어서라도 끌어내라.”

“그게 무슨 말이오!”

주 노야가 호통을 쳤다.

“오늘 묶는다 치면, 내일도 묶을 수 있겠소? 그 애는 이제 온 경성에 이름을 날린 아이인데, 그런 소동을 벌여 내보내면 우리가 남들 얼굴을 어찌 보겠소!”

“얼굴을 어찌 보냐고요? 그 애 본인도 창피한 게 없다는데 우리가 뭐가 겁나서요!”

주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악을 썼다.

“기껏 좋은 뜻에서 거둬 주고 평생 데리고 살 마음까지 먹었더니, 호랑이를 집으로 들인 꼴이네요. 내 아들을 유혹하다니,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어도 싸죠. 신선을 만나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사특한 요괴를 만났겠지! 화근덩어리예요, 화근덩어리!”

주 노야는 고함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려 몸을 일으켰다.

“집안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밖에 알려서야 쓰겠소? 내가 가서 말하리다.”

정교랑의 마당에 있던 여종들은 모두 물러갔다. 대청에 싸 둔 짐보따리는 여전히 그대로 놓여 있고, 정교랑과 시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당황도 분노도 없는 얼굴이었다.

주 노야는 자리에 앉아 한참을 침묵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갖가지 말을 생각해 보았다.

“방을 수리해야 하는데 다른 자매들이랑 함께 지내기 어려워서 말이다.”

고개를 든 주 노야는 여인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자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교교, 잠시 나가서 지내거라. 집에서 지내긴 불편할 게다. 대신 걱정 말거라. 집에 있으나 밖에서 지내나 똑같아. 이 외숙부가 있지 않느냐.”

주 노야는 눈 딱 감고 본론을 꺼냈다. 정교랑이 그 말에 주 노야를 쳐다봤다.

“이번에 내쫓았다가, 나중에 또 억지로 데리러 올 건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데려올 필요도 없었는데. 억지로 데려오지 않고 그 저택으로 보낸 다음 간간이 가서 보살펴 주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후회막급이로다!

“교교, 그게 무슨 말이냐. 내쫓다니. 여긴 네 외가고 난 네 외숙부다. 여긴 네 집이야. 언제든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아무도 강요 안 해.”

정교랑은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외숙부님께서 그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동의한 건가? 도리어 주 노야가 멈칫했다.

잘된 일이다. 집안 조용할 날 없이 소란이 벌어지니 부인도 심기가 불편하고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관계가 좋아지고 개선되기는커녕 하루하루 더 감정만 쌓이던 차였는데, 이제 따로 지내게 됐으니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외숙부이니 돈도 좀 챙겨 주고 자주 들여다보며 관심을 쏟으면 무쇠가 아닌 이상 마음이 열리겠지. 아직 어린 소녀인데 더 틀어질 게 뭐 있겠는가.

“여봐라, 아씨를 집으로 모셔다 드려라.”

주 노야가 일어나며 명하자 문밖에 있던 여종들이 급히 들어왔다.

“됐다. 거기도 있을 건 다 있어. 내가 가져왔던 물건만 가져가면 돼.”

여종들이 멈칫하는 사이, 시녀가 보따리 하나를 달랑 들고 따라 일어섰다. 시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보따리를 뒤져 책 한 권을 꺼내 손에 들었다.

“아씨, 우리 가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모를 쓴 다음 문을 나섰다.

회랑 아래에 건 등롱이 봄바람에 흔들렸다.

“부인, 보냈습니다.”

여종 둘이 들어와 예를 표하고 말을 전했다. 주 부인은 한숨을 토하고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아무것도 안 가져갔습니다. 돈도 안 가져갔어요.”

여종의 말에 주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냉소했다.

“그 애가 돈이 없다더냐? 어디 우리 집 돈에 관심이나 있겠어?”

“사람도 안 데려간대요. 노야께서 직접 데려다주셨는데, 마차에서 내리더니 문을 닫으며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는 바람에 다들 그냥 돌아왔다네요.”

“싫으면 관두라지!”

콧방귀를 뀌던 주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노야는?”

“서재로 가셨어요.”

여종이 답했다.

“좋을 대로 하라지.”

주 부인은 손을 내저으며 여종에게 나가라고 하며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를 내보냈으니, 이제 나도 한시름 놓게 됐구나.”

주 부인은 창밖을 쳐다봤다. 더없이 고요한 밤이었다.

새벽빛이 밝을 무렵, 주씨 저택의 연무장에 처음으로 주육낭이 나오지 않았다.

“여섯째 아우는 슬픔을 못 이겨 자리에 누웠나?”

“무슨 소립니까. 어제 어머니께서 우리더러 자릴 피하도록 그 앨 데리고 나가 술을 먹이라고 하셔서, 들이붓다시피 했어요. 업혀 들어왔으니 일어나긴 힘들겠죠.”

“그렇게 안 봤는데 여섯째 아우가 어린 나이에 그런 마음을 품었다니.”

“한동안 꽤 상심해 있겠죠.”

형제들이 창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 문이 열렸다. 하지만 이번엔 대청에서 무관심한 눈길로 쳐다보는 그 여인도 없고, 눈을 치켜뜨며 따지고 드는 시녀도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사람만 없을 뿐.

주육낭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앞에 놓인 탁자를 발로 걷어차자 탁자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애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 애는 아무 관련 없어요. 저 혼자 결정한 겁니다!”

주육낭이 소리쳤다.

“제가 그 애한테 빚을 졌다고요! 그 애한테 평생 갚아야 합니다!”

“네가 뭘 빚졌는데? 뭔데 평생을 들여 갚아! 네가 빚을 져? 내가 너한테 빚을 졌지! 그 애 때문에 감히 내게 이리 대들다니! 분명히 말하지만, 그 애를 이 집으로 들일 생각은 마라. 네가 뭐라 말하든 어림도 없어!”

주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치자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물러가거라. 네 혼사는 우리가 주관할 것이니,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마!”

주 노야가 무거운 목소리로 명하자 주육낭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급히 말을 달려 밖으로 나가던 주육낭은 마침 마차에서 내리려던 진 공자와 부딪칠 뻔했다.

“육낭!”

진 공자가 말 위에 탄 소년을 보고 소리쳤다. 말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또 왜 저리 화가 났어?”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

사환이 물었다. 진 공자는 주씨 저택의 대문과 주육낭이 사라진 방향을 차례로 쳐다봤다.

“금방 들어올 것 같진 않구나. 이만 돌아가자.”

사환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휘장을 내리고 말 머리를 돌렸다.

진 공자의 마차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사환이 가마 의자를 가져와 진 공자를 부축해 태운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다가 진 공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십삼이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왔지?”

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그러게요. 방금 육공자를 뵈러 주씨 저택에 간다며 나가셨는데요.”

여종이 대답했다. 부인은 웃음을 띤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주육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부인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불쑥 말했다.

“어디서 우연히 들었다. 주씨 가문에 십삼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지?”

대청에 앉은 진(秦) 부인은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아 천천히 마셨다. 시선은 문밖 회랑에 꿇어앉은 사환에게 가 있었다.

“네가 십삼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지?”

진 부인이 물었다. 일반적으로 공자를 모시는 사환은 심부름을 시키는 용도로 썼지만, 진 공자는 몸이 불구인 탓에 사환이 심부름꾼 외에 지팡이 노릇까지 했다.

이들은 진 공자가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앉고, 눕고, 걷는 일을 도왔다. 밖에 있던 사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일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더냐. 소상히 말해 봐라.”

진 부인의 명에 사환은 몸을 떨며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네가 뭐라고 할지 안다. ‘소인은 모릅니다’라고 하겠지.”

진 부인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태도로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십삼이 너희에게 뭐라고 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잘 안다. 그 애의 말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마 그 애도 자신의 당부가 소용없다는 걸 알았을 게야. 난 그 애의 어미다. 그 애에 대해 알아야 해. 그 애는 날 속일 수 없다. 너희 아랫것들은 더더욱 그렇지. 걱정할 것 없다. 그냥 아는 대로 말하면 돼. 십삼도 너희에게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명한 건 아닐 게야. 그 일은 잊으라고 했겠지. 그저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똑똑한 어머니에 똑똑한 자식이네. 뭐하러 아랫것의 입을 빌리는 거야. 그냥 두 모자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시지.

“너희에게 묻고 나서 얼추 알게 되면, 그 애한테 가서 직접 물어볼 것이다.”

진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괜히 넘겨짚으며 말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 재미없게.”

사환은 머리를 조아렸다.

“부인,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릅니다. 며칠 전에 공자께서 주씨 저택에 가셨다가 그 댁 육공자와 사촌 누이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셨습니다. 그때 육공자의 사촌 누이가 불쑥 말했어요. 공자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요.”

“주육낭의 사촌 누이?”

진 부인은 호기심 어린 말투로 웃으며 물었다.

“그냥 해 본 말이겠지.”

“아닙니다, 부인. 주씨 저택에 신선을 만난 낭자가 산다는 소식이 경성에 파다한데, 못 들으셨어요?”

사환은 흥분한 어조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여종 하나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몸을 숙이고 진 부인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진 부인이 퍼뜩 깨달은 표정을 지어다.

“그래?”

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성에 소문이 파다하고 이 태의도 증언했대요.”

진 부인은 웃는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 내한이 회춘했단 말이지? 그럼 첩실을 또 들이겠구나.”

진 부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생각에 잠겼던 부인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자 여종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종 둘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부인에게 언행을 주의하라고 일깨워 주었다.

문밖에서 고개를 들었던 사환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선인의 말이라면 필시 고칠 수 있겠지. 여봐라, 주씨 저택으로 가야겠다.”

진 부인이 일어서려 하자 여종들이 얼른 말렸다.

“부인, 그 말을 정녕 믿으세요?”

“당연히 믿지.”

진 부인의 말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우리 십삼의 다리만 고칠 수 있다면 신선을 만나 득도한 게 아니라, 그 여인이 구천현녀(九天玄女: 중국 신화 및 도교의 여신)라 해도 믿을 거다. 기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향불을 올릴 거야.”

십삼공자의 다리는 진 부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즐겁게 지내지만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샜는지 모른다. 여종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듣기론 그 낭자가 십삼공자께 화풀이를 하며 안 고쳐 준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다른 때라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해도 그냥 넘겼겠지만, 그 낭자는 정말이지……. 누가 2만 관을 가져와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도 딱 잘라 안 고친다고 했대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요.”

진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돈을 좋아하지 않는 이였구나.”

진 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만한 재주를 가졌는데, 돈 따위가 대수일까.”

진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음을 지었다.

“돈을 좋아하는 게 아니면, 일이 쉬워지지.”

진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여봐라, 주씨 저택에 혼담을 넣으러 가야겠다.”

여종들은 오랫동안 진 부인을 모신 이들이었다. 평생을 모셨건만 이랬다저랬다 하는 부인의 심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의원을 청하러 가겠다더니 이젠 갑자기 혼담을 넣으러 가겠다고? 안에서 시중을 들던 여종들이 멈칫하여 진 부인을 쳐다봤다.

“누구한테요?”

진씨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서 깊은 명문 귀족으로, 혼사를 맺으려면 동등한 가문이거나 약간 낮은 정도의 가문이어야 했다. 진씨 가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주씨 가문은 약간 낮은 정도가 아니라 낮아도 한참 낮았다.

진씨 가문의 방계와 맺어 주시려나? 그렇다면 그럭저럭 성사될 만하지만.

“우리 십삼 말이다. 그 정씨 가문 낭자에게 혼담을 넣을 거야.”

진 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여종들은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십삼낭이라니! 진씨 가문의 적계 혈통이 주씨 가문의 외조카에게 혼담을 넣는다니! 가문의 급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사람만 놓고 봐도…….

“부인, 말도 안 됩니다. 정 낭자는 과거에 바보였는걸요!”

“그럼 더 좋지.”

진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십삼이 똑똑하니 조금 아둔한 사람을 찾으면 한시름 놓지 않겠느냐.”

여종들은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렸다.

“부인, 농담이시죠?”

“내가 십삼을 두고 농담을 해?”

진 부인은 여종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사람을 줘야지. 여인은 일생이 순탄하길 바라지 않느냐. 화목하게 지낼 남편과 믿고 의지할 만한 가정이 있길 바라지.”

진 부인이 문밖을 쳐다봤다. 얼굴의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우리 십삼을 고칠 수만 있다면, 믿고 의지할 만한 가정을 만들어 줄 것이다.”

서봉추가 후원에 있는 문을 홱 걷어차자, 바닥에 곯아떨어져 있던 손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이 자식, 아직도 안 일어났어? 지금이 몇 신데. 술을 훔쳐 마시더니 쥐 죽은 듯 자네.”

손재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항변했다.

“술 아닙니다, 술 아니라고요. 술지게미를 먹었어요. 그건 물이나 마찬가진데 물 한 사발도 못 먹습니까?”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때릴 태세를 취하자 손재는 얼른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서둘러라, 우리 누이가 왔다.”

서봉추는 때리는 대신 소리만 버럭 지르고는 뒤돌아 나가 버렸다. 손재는 얼른 옷을 갖춰 입고 얼굴을 쓱쓱 문질러 닦은 다음 따라 나갔다. 정교랑은 벌써 마당에 서 있었다.

“아씨, 일찍 오셨네요.”

손재는 얼른 예를 표했다.

“두부는 다 됐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손재는 헤헤 웃으며 얼른 옆쪽 문을 열었다.

“다 됐습니다, 다 됐어요. 제가 만든 두부는 분명 아무 문제 없을 텐데, 아씨께서 명한 대로 만든 그건 저도 장담 못 합니다.”

손재는 중얼거리며 두부 위에 올려 둔 돌덩이를 치우고 보자기를 걷었다. 손재가 우쭐한 표정으로 네모반듯한 두부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아씨.”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에게 가져오도록 했다.

“사실 그렇게 못 먹을 맛도 아닙니다. 다들 먹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죠. 몸에 좋은 거예요.”

손재는 직접 한 모를 잘라 그릇에 담고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정교랑에게 가져가는 대신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저것도요.”

시녀는 옆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씨, 간수를 안 넣으면 두부 모양이 안 나옵니다.”

돌을 치우고 보자기를 걷던 손재가 멈칫했다. 하얗고 부들부들하며 네모반듯한 두부가 있었다. 정교랑이 걸어와 두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네. 딱 알맞게 넣었어.”

정교랑은 소매를 걷고 칼로 한 모를 잘랐다. 시녀가 얼른 그릇을 대고 받았다. 손재는 여전히 멍한 채로 두부를 쳐다봤다. 정교랑이 눈짓하자 시녀는 그릇 두 개를 손재에게 건넸다.

“먹어 봐요.”

손재는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두 그릇을 쳐다보더니 숟가락도 쓰지 않고 곧장 손을 뻗어 한 모씩 쥐었다. 왼쪽 것은 자신이 만든 두부였다. 오른쪽 것도 자신이 만든 두부였으나 간수를 친 건 아씨였다.

손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우선 자신이 만든 것부터 입에 넣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손재는 두부를 삼키고 오른손을 쳐다봤다. 우선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힘든 일이라도 하는 듯 입안에 욱여넣었다. 손재는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 정도 값이면, 만족하려나?”

정교랑은 손재를 보며 담담히 물었다. 이 정도 값이라, 이 정도 값……. 손재는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시녀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더니 약포를 펼쳐 보여 주었다.

손재는 그 약포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아씨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물에 탄 다음 자신에게 넣으라고 했다. 이거야? 이게 무쇠를 황금으로 만드는 그 비법인가?

손재는 머리카락이 곤두서 저도 모르게 연신 침을 삼키며, 시녀가 건네는 약포를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받지 못했다.

“팔 거예요? 안 팔 거예요?”

손재주를 사겠다던 아씨의 말이 이 뜻이었구나. 두부를 만들 사람을 찾는다면 자신 말고도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이 아씨의 수중에 있는 비법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것이었다.

두부를 만드는 핵심은 간수를 치는 데 있다. 손재주라고 해 봤자 몇 번 보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가서 돈 몇 푼 쥐여 주고 내쫓은 다음 아씨가 자신의 아랫것을 시켜 두부를 만들게 한다면, 손재의 쓸모는 그것으로 그만이다. 하지만 이 아씨는 그렇게 하는 대신 그 비법을 자신에게 주겠단다.

손재주를 팔아 노비가 되는 대신 비술을 얻고 하나뿐인 신기한 기술을 손에 쥔다면 그야말로 수지맞는 거래가 아닌가. 손재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약포를 받은 다음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사겠습니다요!”

손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점심 무렵의 태평거 앞은 여전히 썰렁하고 마차도 없었지만, 대청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다들 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맛있게 먹고 있었다. 서무수는 그래도 음식 앞에서 자제했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체면을 벗어던진 상태였다. 서봉추는 아예 고개까지 젖혀가며 그릇에 담긴 부드러운 두부를 입에 털어 넣었다.

“우리 집사람이 살아 있을 때 달걀찜을 아주 잘했어요. 이 연두부를 먹으니 달걀찜을 먹을 때처럼 부들부들하네요.”

늙은 관리인은 그릇에 담긴 연두부를 숟가락을 들고 퍼먹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맛을 음미했다.

넷째가 뒤쪽에서 휘장을 들어 올리더니 쟁반 하나를 들고 왔다. 안에는 백옥처럼 하얀 두부 위로 양념장을 올린 요리가 담겨 있었다.

“자, 이렇게 만든 것도 한번 먹어 보시오.”

넷째가 음식을 미처 내려놓기도 전에 형제들이 달려들어 숟가락을 뻗었다. 서무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일어나더니 함께 먹지 않고 뒤쪽으로 갔다.

후원의 회랑 아래에는 정교랑이 앉아 있었다. 정교랑은 몸종이 들고 있는 접시를 쳐다봤다.

“찌고 볶고 튀기는 요리를 다 만들었어요. 각기 특색이 있고 맛도 다 달라요.”

몸종이 흥분하여 말하자 옆에 선 시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전 양두부(酿豆腐)를 양념장에 찍어 먹는 게 제일 좋아요. 아씨는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

고개를 든 정교랑은 걸어오는 서무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어느 게 좋아요?”

“다 좋아.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음식에 이렇게 다양한 요리법이 있을 줄이야.”

늙은 관리인도 따라 나왔다. 문발이 움직이면서 대청에서 신나게 먹고 마시는 분위기가 함께 전해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두부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관리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몸종을 힐끔 쳐다봤다.

“낭자의 음식 솜씨를 전수받아 만든 새로운 요리와 새로운 맛 덕에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 데다, 이제는 두부처럼 신기한 먹거리가 더해졌으니 태평거가 이름을 알리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 시간이 빨라야 할 텐데 말입니다. 늦으면 안 돼요.”

부엌에서 나오던 이대작이 관리인의 말을 듣고 대꾸했다. 이 점포에서 빨리 돈을 벌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고용된 이들인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나머진, 관리인이 수고해 줘요.”

정교랑의 말에 늙은 관리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별말씀을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예전…….”

이대작이 무거운 헛기침을 하며 늙은 관리인을 노려봤다. 늙은 관리인은 허허 웃음을 터뜨리고 시녀와 몸종도 입을 가리며 따라 웃었다.

마당에 꽈당 소리가 들리더니 손재가 두부방에서 뛰어나왔다.

“콩은요? 콩이 모자랍니다. 어서 가서 콩 좀 사 오세요! 방금 만든 두부 한 판을 다 먹었잖아요! 이럼 장사를 어떻게 합니까.”

돈을 벌고 싶어 혈안이 된 사람이 또 있군. 서무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쳐 사람을 불렀다.

“주인어른, 두부방을 좀 더 확장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나중엔 모자랄 것 같은데요.”

늙은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정교랑의 말에 모두 멈칫했다.

“아씨, 이런 좋은 음식을 내놓으면 다들 열광할 겁니다. 그럼 엄청 많이 팔릴 텐데요. 여긴 너무 작아서 밤낮을 쉬지 않고 일해도 얼마 못 만들 겁니다.”

손재가 얼른 나섰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주점을 열었지 두부 공방을 연 게 아니에요. 없으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엔 일찍 오는 수밖에.”

늙은 관리인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허허 웃었다.

“맞습니다, 그렇죠. 예전…….”

저쪽에서 이대작이 또 눈을 부라리자 늙은 관리인은 얼른 말을 바꿨다.

“그 신선거의 과로신선도 예약하지 않으면 못 먹지 않았습니까.”

다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먹지 못할수록 궁금증은 커지고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 터였다. 손재 한 사람만은 그래도 아쉬운 눈치였다.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안 번단 건지.”

손재가 중얼거렸다.

“천천히 가야 하는 법이다.”

늙은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쪽에서 늙은 관리인이 어떻게 음식을 올리고 어떻게 음식을 만드는지 주점과 식당의 규율에 대해 설명하고 당부하는 동안 서무수는 정교랑을 배웅하러 나갔다.

“새 요리를 만들어 새로운 모양으로 내려면, 돈이 또 많이 들 거야.”

서무수가 말했다. 예전과 달리 돈 얘기를 꺼내는데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돈은 나한테 맡기고.”

정교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 일이 있거든, 언제든 거기로 날 찾아와요.”

옥대교의 저택으로 돌아왔다고? 서무수는 멈칫했다.

“저들이 누이를 괴롭힌 거야? 누이, 알다시피 우리 형제는 딱히 재주도 없고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야. 누이를 돕기는커녕 폐나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지. 하지만 한 번쯤 깽판을 치며 분풀이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오라버니, 걱정 마요. 날 괴롭혔다면, 깽판 한 번 치며 분풀이하는 정도로 간단하게 끝낼 순 없죠.”

서무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가 똑똑한 거야 알지. 하지만 이건 알아 둬. 누이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딱히 도움은 안 되지만 함께 있을 순 있어.”

정교랑은 서무수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마차 한 대가 문 앞에 서는 모습이 주육낭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발길질을 해대도 종일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렸다. 사환과 몸종이 달려 나왔다.

“아씨, 아씨.”

사환과 몸종은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을 에워싸고 기뻐했다. 여인의 무뚝뚝한 얼굴에 설핏 웃음이 번졌다. 딱딱하고 경직된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이었다.

주육낭은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내던지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육낭을 본 반근과 금가아는 화들짝 놀라 얼른 정교랑 앞으로 막아서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공자님, 무슨 일이시죠? 우린 떠날 때 그쪽 주씨 가문 물건 하나도 안 가져왔어요. 적당히 좀 하세요.”

시녀는 한발 앞으로 나서며 눈을 치켜떴다. 오밤중에 내쫓겼는데 하루도 안 가서…….

주육낭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의 주먹을 꽉 쥐자 으드득 소리가 났다.

“널 도로 데려가려고 왔다.”

시녀는 피식 웃었다.

“우리가 그 댁에 가고 싶어 할 줄 알아요?”

시녀는 눈을 치켜뜨며 손을 내저었다.

“공자님, 정신 차리세요.”

시녀는 정교랑을 부축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금가아는 이 집에 있는 유일한 사내로서 왜소한 체구로 대문 앞에 버티고 섰다. 반근은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여인이 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주육낭은 다시 앞으로 걸음을 한 발 내디뎠다.

“정교랑.”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난, 너와, 혼인할 것이다.”

말을 마친 주육낭은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 앞에 남겨진 사람들은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뭐라고? 혼인을 해? 누가 누구랑 혼인한다고?

금가아는 입을 떡 벌렸고, 반근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으며,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표정 변화가 없는 건 정교랑뿐이었다.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게 뭔데? 정신을 차린 이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시녀는 멈칫했다가 퍼뜩 깨달았다.

어쩐지 그 여종들과 몸종들이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하더라니, 그래서 주 부인이 우릴 내쫓았구나. 어쩐지, 어쩐지.

“퉤, 정말 뻔뻔하네요!”

시녀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저 사람이 아씨의 명예를 더럽힌 거였어요!”

“이것도 나쁘지 않네. 그 집에 들어간 것도 저 사람 때문이고, 나온 것도 저 사람 때문이니, 나름대로 완벽해.”

시녀가 발을 굴렀다.

“아씨,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아씨의 명예를 더럽혔는데!”

“내 명예는, 아무나 더럽힐 수 없어.”

정교랑은 고개를 돌리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튿날 아침, 주씨 저택의 연무장에는 주육낭이 나와 있었다. 굳은 얼굴로 부친과 장창을 들고 맞서던 주육낭은 대련할수록 점점 더 활력과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챙챙 소리와 함께 뒤로 몇 걸음 물러섰지만 손에 든 장창이 날아간 건 아니었다. 주육낭은 안정적인 자세로 창을 땅에 짚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주 노야는 장창을 내던지고는 사환과 시녀가 건네는 수건을 받아 땀을 닦으며 주육낭을 힐끔 쳐다봤다.

“아버지, 그 애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애는…….”

주육낭이 이를 악물며 입을 열었지만, 주 노야는 그대로 뒤돌아 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주육낭은 분을 못 참고 손에 들고 있던 장창을 땅 위로 매섭게 내리꽂았다.

요리가 치워지고 탁자도 옮겨졌다.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차를 마시며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이야기했다. 주육낭은 문가에 꿇어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탁자에 있는 음식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상태였다.

“공자님, 조금이라도 드세요.”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주육낭은 잠자코 있는데 주 부인이 눈썹을 치켜들며 쳐다봤다.

“상 치워라, 먹지 마.”

여종은 아무 소리도 못 한 채 네 하고 대답한 후 탁자를 옮겼다.

“나이가 몇인데 여인네들이 하는 울고 떼쓰고 목매다는 짓거리를 따라 하다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지!”

주 부인의 호통에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여종 몇 명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노야, 부인, 진(秦)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진씨 가문? 어느 진씨 가문 말이냐?”

주 노야가 물었다.

경성에서 유명한 진씨 가문이라면 잘 알았지만, 자식들만 왕래가 있었을 뿐 집안끼리 알고 지낸 건 아니었다. ‘진’이라는 말에 주육낭도 고개를 들고 여종을 쳐다봤다.

“공주부의 진씨 가문이요. 천중(川中) 진씨 가문, 승의랑 진씨 가문 말입니다.”

여종은 쉬지도 않고 줄줄 말했다.

역시 진 공자의 가문이었군. 주 노야와 주 부인이 주육낭을 쳐다봤다. 미간을 찌푸리던 주육낭은 곧 무언가 생각난 듯 퍼뜩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진 공자의 부모가 그 일을 안 게로군. 그 정도 말이라면 놀라 달려올 만도 했다.

“무슨 일이냐? 육낭을 찾아온 게야?”

주 노야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너 이 녀석, 진씨 가문 십삼낭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혼담을 넣으러 왔습니다.”

대청 안. 범상치 않은 차림에 온화하고 점잖은 표정의 여종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 노야와 주 부인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진씨 가문이 주씨 가문과 사돈을 맺겠다?

“혼담?”

주 부인이 흥분과 기쁨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물었다.

“누구하고?”

“저희 십삼공자와 귀댁의 외조카 정 낭자의 혼담입니다.”

여종은 웃으며 사주단자를 내밀었다.

정, 낭, 자! 그 절름발이가 그 바보를 마음에 뒀다니!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진씨 가문에서 의원을 청하러 왔다고 말하면 나서서 해명할 생각으로 기다리던 주육낭 역시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진 부인은 자리를 뜨고 주 노야 내외는 대청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게 진짠가?”

주 부인이 물었다. 주 부인의 시선은 앞쪽에 놓인 사주단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 주 부인은 감히 손을 뻗어 확인해 보지도 못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손 하나가 사주단자를 홱 낚아채자 주 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그 사주단자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주육낭의 손에 들려 있었다. 주육낭이 펼쳐 보자 단정한 글씨로 진십삼의 이름과 휘, 사주팔자가 쓰여 있었다.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그래, 신경이 쓰인 거였어. 마음이 움직였겠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나? 마음이 안 움직일 수가 있어? 다리를 고쳐 준다는데, 정상인과 똑같아진다는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값지겠지. 다만 그 대가를 진십삼이 치러선 안 된다. 이건 내 일이니까!

주육낭은 사주단자를 들고 일어섰다.

“무슨 짓이냐?”

주 부인이 소리쳤다.

“돌려주러 가겠습니다!”

이 애들이 여인을 두고 다투는 건가? 주 노야와 주 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바보가 두 녀석을 다 홀렸단 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정말이지,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니까……. 이 진인을 만난 게 아니라 불여우 요괴를 만난 게로군.

“거기 서라, 못 간다!”

주 부인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가져와!”

“십삼이 이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혼인하면 될 일입니다!”

주육낭은 사주단자를 움켜쥐며 얼굴이 벌게진 채 대꾸했다.

“못난 놈!”

주 노야가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쳤다.

“다시 한번 허튼소리를 지껄였다가는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주마!”

주 부인이 얼른 다가가 주육낭의 팔을 붙잡았다.

“육낭, 세상에 좋은 여자는 차고 넘쳐. 이 어미가 더 좋은 여인으로 찾아 주마. 너와 진 공자는 돈독한 사이인데 일개 여인 하나에 의가 상해서야 쓰겠어? 그 여자가 뭐라고, 친구가 가장 중하지. 황당한 일 벌이면 절대 안 돼.”

주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자 주육낭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해하셨습니다! 이것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인데?”

주 부인은 주육낭을 끌어 자리에 앉히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들, 이 어미도 안다, 알지. 연정 한 번 안 품는 사내가 어디 있겠느냐. 다만 너도 장성하면 알 거야. 아내는 현명한 여인을 얻어야지. 아, 아니, 내 말은 진 공자가 교교와 혼인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머니, 십삼이 혼담을 넣은 건, 그 애를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주육낭이 주 부인의 말을 끊었다.

“그 애가 십삼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해서죠!”

주 노야와 주 부인은 또다시 멈칫했다.

“뭐라고? 그 절름발이를 고칠 수 있다고?”

주 노야가 입을 열었다.

절름발이, 절름발이. 다들 진 공자의 신분과 가문을 생각해 그 앞에서는 공손하고 예의 있게 대했지만, 뒤에서나 속으로는 비웃고 하찮게 여겼다.

주육낭도 알고 진 공자도 아는 일이었다. 이건 진 공자가 무엇을 하든 얼마나 잘하든, 혹은 아무것도 안 하든, 바꿀 수 없고 평생 따라다닐 일이었다. 본디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려 한 일이지만 이제 바꿀 기회가 생겼다. 누군들 놓치고 싶을까. 누군들 기꺼이 놓치겠는가.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멋대로 지껄인 소리려니 했겠지만, 그 여인은 달랐다. 죽을 사람을 두 번이나 살린 비술을 지녔으니 그 말에 믿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홀연히 비추었으니, 그것이 설사 불이라는 걸 안다 해도 불나비처럼 무작정 달려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 고쳐 주겠대요.”

주육낭이 천천히 말했다. 손에 들린 사주단자가 구겨지며 소리가 났다.

“제가 그 애한테 진 빚 때문에요. 십삼과 전 가까운 사이인데, 그 아이는 제가 싫으니 십삼에게 화풀이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실은 너희가 그 애를 마음에 둔 게 아니다? 그저 진 공자의 다리를 고쳐 주고 싶은 마음뿐이고?”

주 노야는 멍한 채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전 그 애한테 반한 게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 애한테 반하겠습니까?

주육낭은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주육낭의 눈앞에 그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뚝뚝하고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쁨도 노여움도 슬픔도 상처도 없이.

“저, 저는, 그 애가 평생 믿고 의지하게 해 줄 겁니다.”

주육낭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의지할 곳이 없을까 걱정하지 않았던가. 소원하게 대하는 혈육을 원망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댈 곳을 만들어 주고 살갑게 대해 주면 될 일이다.

주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주육낭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둔한 것! 그 수작을 너까지 믿는단 말이냐!”

주육낭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모친을 쳐다봤다. 주 노야도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하여간 사내들은 똑똑하다고 자만할 줄만 알지, 결국 여인의 손아귀에 놀아난다니까.”

주 부인은 어리둥절한 두 부자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주육낭의 손에서 사주단자를 낚아채 똑바로 폈다.

“고칠 수 있네 없네 한 게 결국 이것 때문이야.”

“어머니, 그, 그건 아닐 텐데요.”

“아니긴?”

주 부인은 냉소를 지으며 손에 든 사주단자를 쳐다봤다.

“목숨 하나에 1만 관이니 이제 돈 걱정은 없는데, 시집갈 만한 좋은 사내가 없지 않느냐. 다들 그 애더러 바보라고 하더니 이제 보니 우리 집 사람들의 머리를 다 합쳐도 그 애 하나를 못 당하는구나. 너희에게 농간을 부린 게야. 두 녀석이 얼간이처럼 덫에 걸려 싸우고 있으니, 원!”

“어머니, 그 아인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이 그런 여인에게 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되자 주 부인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그 여인의 편을 드는 아들의 모습은 도무지 지켜볼 수 없어 또다시 눈을 치켜떴다.

“네가 뭘 안다고! 넌 이 일에서 빠져라. 그런 말을 꺼낸 걸 보면 진씨 가문으로 시집가고 싶은 게야. 그 집으로 시집을 못 가면 차선책으로 아둔한 널 붙잡으려 했겠지. 진씨 가문에서 그 애 바람대로 혼담을 청해 왔으니 넌 쓸데없이 나서서 남의 경사에 훼방 놓지 마라. 어쨌거나 이건 좋은 혼사야.”

주육낭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주 부인은 또다시 웃으며 아들의 팔을 어루만졌다.

“우리 아들, 그 뛰어난 의술을 지닌 교교가 진 공자의 다리를 고쳤다고 생각해 봐. 진씨 가문은 먹고살 걱정이 없는 집안이고, 우리도 혼수를 많이 챙겨 보내는 데다, 넌 진 공자와 교분이 두터우니 더없이 좋은 일 아니냐. 진 공자는 다리를 고쳐서 좋고, 네 누이는 좋은 남편이 생겨서 좋으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그런가? 주육낭은 침묵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진십삼이 그 아이한테, 잘하긴 했어. 십삼은 똑똑하니 그 간사한 여인에게 쉽게 속을 리도 없고. 이것도, 나쁘진 않네.

아들의 표정을 읽은 주 부인은 흡족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든 극에 달하면 그 반대로 움직인다더니, 교교가 바보로 오래 산 끝에 하루아침에 똑똑해졌구나. 정말 대단한 일이야.”

주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똑똑하든 바보든 알 게 뭔가. 어쨌든 우리 집에 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뭘 멍하니 있어요? 어서 가서 교교를 데려오지 않고.”

주 부인이 주 노야를 보며 말하자 주 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이제 막 옮겨 갔는데.”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데려오라니…….”

“혼담이 오가는 마당에 밖에 둘 순 없죠. 수리는 안 해도 되잖아요. 어차피 곧 출가할 테니까. 그 애의 사주단자부터 가져오는 게 우선이겠네요.”

“그럼 강주에 다녀와야겠군. 오고 가고 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텐데. 그리고 정씨 가문엔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하긴요. 그냥 사주단자를 내놓으라고 해야죠.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어요. 그 사람들이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 단, 혼수는 한 푼도 빠지면 안 돼요. 경성 풍속대로 최소 2만 관은 해 보내야죠.”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부모를 보며 주육낭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게, 그 여인의 뜻대로 된 건가?

오시(午時)가 지났을 무렵, 서생 세 사람이 태평거에서 나왔다. 넷째와 늙은 관리인이 미소를 지으며 배웅을 나왔다.

“과로신선이 없는 건 아쉽지만, 여기서 만든 것도 참 신기하고 흥미롭군요.”

한 서생이 취기가 달아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입소문 좀 많이 내 주세요.”

서생들은 하하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아주 능청스럽군.”

한 서생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돈 몇 푼 쥐여 주고, 우리더러, 이 뭐냐……. 태평……의 손님을 끌어 달라? 우릴 거지로 보나?”

나머지 서생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늙은 관리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말하고 있던 서생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멍한 눈으로 편액을 쳐다봤다.

“태평.”

서생이 중얼거렸다.

“네, 여긴 태평거입니다.”

늙은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태평!”

젊은 서생은 돌연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편액을 가리켰다. 다들 깜짝 놀랐다.

“순화 형, 왜 그러시오?”

다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늙은 관리인 역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표구해 달아 건 편액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걸 보라고, 태평!”

젊은 서생은 흥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목소리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평성세는 만백성의 복이지.”

동료 하나가 무심코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건 시로 응수한 건가? 아니면 사(詞)? 부(賦: 한나라와 육조 시대에 성행했던 문체의 일종)라고 해야 하나? 시작이 좀 이상한데.”

바깥의 시끌벅적한 소란에 서무수 등이 급히 뛰어나왔다.

“수재들이나 되어 가지고,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주정이야!”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서생 세 명 중에는 손으로 편액을 가리키는 이도 있었고, 허공에 대고 손짓을 하는 이도 있었으며, 편액 밑에서 제자리를 돌며 휘청거리는 이도 있었다.

잠시 쉬어가려 했던 행인 몇몇은 가게 앞 난리통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는지, 다시 말고삐를 바로잡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감히 우리 장사를 방해해? 내가 가서 쓴맛을 좀 보여줘야지.”

서봉추가 소매를 걷어붙이자 서무수가 노려봤다.

“됐고, 들어가서 손재 콩 가는 거나 도와.”

이어 다른 형제들까지 다독여 들여보내고 나자, 문 앞에는 흥분한 표정으로 세 서생을 쳐다보고 있는 서무수와 늙은 관리인만이 남았다.

“이보시오, 이 글씨는 누가 쓴 겁니까?”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한 서생이 관리인을 붙잡고 물었다. 글씨? 늙은 관리인과 서무수의 시선이 동시에 편액으로 향했다.

“주인어른께서 주신 건데요.”

관리인이 서무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 서생도 관리인의 시선을 따라 서무수를 쳐다봤다.

스물여섯이나 일곱 정도 돼 보이는 사내는 청색 장포를 두르고 있어 문인의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체격이 좋고 뼈마디가 툭 불거진 게 제법 거칠고 용맹스러워 보였다.

“이 글씨를 직접 썼다는 말이오?”

세 서생 모두 놀라워했다.

차정사의 글씨는 차정사보다 더 이름이 났을 정도로 경성에서 그 명성이 높았다. 매일같이 글씨를 감상하러 가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면서도 글씨를 쓴 이가 시종일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그 신비로움이 배가된 터였다.

눈앞의 이 사내도 제법 멀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게, 그 글씨를 쓴 장본인이라 해도 어울리겠군.

“이것 말이오? 내가 아닙니다.”

서무수는 글씨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글씨가 왜요?”

서무수가 의아해서 물었다.

“글씨가 너무 좋습니다! 도대체 글 쓴 분이 누굽니까? 한 번 뵐 수 있겠습니까?”

세 서생이 서무수에게 다가가 그를 에워쌌다. 목소리에 감탄과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이 글씨가 그렇게 좋다고? 서무수는 다시 편액을 힐끔 쳐다봤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 번 뵐 수 있는지는 그분께 여쭤봐야 하고요.”

서무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알고 있었군! 세 서생은 매우 기뻐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수고스럽겠지만 주인장께서 여쭤봐 주십시오. 한 번 뵐 수 있는지요.”

세 서생이 예를 올리자 서무수도 급히 답례했다.

“어서, 어서 가세나. 얼른 그들에게 일러주어야지.”

세 사람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한 서생이 품에서 돈 몇 푼을 꺼내 관리인에게 쥐여 주었다.

“싹 입 닦고 갈 수야 없지요.”

관리인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세 사람은 멀리 가 버렸다. 관리인은 손에 쥐어진 돈 몇 푼을 보고는 당황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굳이 이쪽에서 돈 들일 필요 없겠소. 저들이 알아서 태평거를 널리 알려줄 테니.”

서무수가 웃으며 말했다. 관리인은 고개를 돌려 다시 편액을 올려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 몇 글자가 돈보다 값지다니.”

정교랑은 손에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진십팔랑도 두어 글자를 더 쓰고 붓을 거두었다.

“낭자, 이번에 쓴 건 어때요?”

진십팔랑이 앞에 있던 종이를 가까이 가져가며 물었다. 정교랑이 몸을 돌려 힐끔 쳐다보았다.

“형태만 비슷하네요.”

진십팔랑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만 해도 꽤 괜찮은걸요. 적어도 예전에 쓰던 글씨보다는 배로 좋으니.”

진십팔랑은 정교랑 앞에 놓인 종이를 보면서 동경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언제쯤 낭자 같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연습을, 많이 해야 해요.”

정교랑이 답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는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글씨 연습이 끝났음을 알아차리고 차와 다과를 들여왔다. 시녀는 들어오면서 정교랑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의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 박여 있었다. 붓을 들 수 없을 때도 항상 탁자 위에서 끊임없이 글씨 연습을 하여 생긴 것이다.

“스승님이 내주시는 과제를 하고 자수 놓는 시간 외에, 밤마다 글씨 연습을 한 시진씩 더 하고 있어요.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정교랑은 물잔을 들고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정교랑은 이어서 소매를 들어 잔을 반쯤 가리고 물을 마셨다. 직설적인 표현에 놀라 잠시 멍해졌던 진십팔랑이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낭자, 낭자는 정말 솔직하네요.”

정교랑은 말이 없었다. 정교랑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진십팔랑도 알고 있었다. 찻잔을 들던 진십팔랑은 또 생각난 게 있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3월 20일은 보수사의 대선사 법회예요. 미리 자리를 예약해 뒀으니 낭자도 같이 가는 게 어때요? 불경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지만, 낭자는 평소 마시던 차가 입에 맞지 않다고 했잖아요. 보수사의 대선사께서 직접 우린 차가 유명하대서, 낭자와 같이 맛보았으면 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이 낭자는 가는 말이 솔직하고 진심이면, 오는 답도 시원하네. 진십팔랑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간식들 좀 단랑 아씨께 전해 주세요. 기름진 게 아니니 많이 드셔도 괜찮을 거예요.”

시녀가 미소를 지으며 찬합 하나를 건네자 진십팔랑이 찬합을 받으며 답례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찬합 위에는 도장까지 박혀 있었다. 진십팔랑은 손을 뻗어 만져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태평.”

진십팔랑에겐 이미 익숙한 정교랑의 서체였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네요.”

진십팔랑을 배웅하고 난 시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진씨 가문 아씨께서 먼저 말씀을 안 하셨다면 나라도 아씨께 말씀 올리려고 했어. 명해 대선사의 차는 엄청 귀해서 한 잔도 얻기 힘들거든. 대선사의 차 한 잔 얻으려고 시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시녀는 회랑 아래에 서서 마당의 화초를 보면서 금가아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금가아가 그 말에 이를 깨물었다.

“차 한 잔이 그 정도라고?”

“반근.”

방 안에서 정교랑의 부름이 들렸다. 마당에 두 개의 대답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반근은 다시 회랑 아래에서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닦았다.

“아씨, 시킬 일이 있으세요?”

“점포에 다녀와야겠어.”

시녀는 네, 하고 답했다.

“제가 마차 빌리러 갈게요!”

소리치고 밖으로 달려나가던 금가아는 문을 열고 나서야 문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금가아는 화들짝 놀랐고 밖에 있던 사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교교.”

주 노야는 짐짓 위엄 서린 모습으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금가아가 급히 문 앞을 가로막으며 주 노야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노야, 오셨어요? 무슨 일이세요?”

시녀가 물었다.

“문 앞에 세워 두려는 게냐?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씨께서 나가시려던 참이라서요.”

시녀가 금가아를 재촉했다.

“얼른 장씨네 가서 마차 빌려 와.”

금가아는 얼른 대답한 후 주 노야를 비집고 뛰어나갔다. 그 바람에 주 노야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때 정교랑이 밖으로 나왔다.

“어딜 가려고?”

주 노야가 물었다. 시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설핏 웃었다.

“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도 할 겸 나가려고요.”

정교랑이 답했다. 주 노야는 괜히 마음이 찔려 억지로 웃어 보였다.

“바깥바람 쐬는 것도 좋지, 좋아.”

주 노야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교교, 집수리할 장인들을 불렀는데 지금은 수리하기 좋은 때가 아니라며 겨울로 미루라고 하더구나. 사정이 그러하다며 네 외숙모가 나더러 널 데려오라고 했다.”

시녀는 눈을 흘기며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정교랑도 주 노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노야, 지금 농담하세요?”

시녀가 물었다. 주 노야도 이 상황이 농담이기를 바랐다. 강제로 데려다 놓았다가 내쫓을 땐 언제고 이젠 또 금세 도로 데려가겠다고 왔으니, 주씨 가문이야말로 바보가 된 듯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왜 이 애랑 엮이기만 하면 사사건건 일이 꼬이고 전전긍긍 애가 닳게 되는 거야?

이렇게 된 이상 눈 딱 감고 말하는 수밖에.

“농이라니, 지금 수리하지 않는다면 않는 게지. 속히 짐 챙겨 돌아가자꾸나.”

주 노야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아니라니 뭐가? 혹 거처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러는 거라면, 칠랑의 거처와 바꾸면 되고…….”

정교랑이 입을 열자 주 노야는 들뜬 마음에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죠?”

정교랑이 주 노야의 말을 끊고 물었다.

“혼사를 논하려 한다.”

주 노야는 정교랑을 어떻게든 구슬려서 데리고 올 마음밖에 없었다. 거처에 대해 묻는 줄 알고 은근히 기뻐하며 온 신경이 거기에 쏠려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질문이 들어오자 그만 생각도 하지 않고 답을 해버렸다.

혼사? 시녀는 깜짝 놀랐다.

주 노야도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지만,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온 세상 여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혼사 아니던가.

“교교, 집에 가서 외숙모와 같이 이야기하자꾸나. 이런 얘기는 밖에서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아.”

주 노야가 목소리를 낮춰 타일렀다.

“제가 올해 몇 살이죠?”

정교랑이 주 노야를 보며 묻자 주 노야는 멈칫했다. 자기가 몇 살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 바보는 오랫동안 정신을 놓고 살았으니 세월 가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나저나, 얘가 몇 살이었더라?

주 노야는 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집안이 사이가 틀어졌을 때가 세 살 즈음이었지, 아마? 아니, 더 어렸었나?

주 노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혼사를 치를 때가 되긴 했구나. 잊을 뻔했네.”

주 노야는 기억을 되짚으며 열넷, 열다섯 즈음에서 나이 계산을 그만두고 한숨을 돌렸다.

“그래, 집으로 직접 찾아와 혼담을 꺼낸 이가 있단다. 교교, 혼례처럼 중대한 사안은 집에서 함께 논해야지.”

주 노야는 다시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금가아가 임대한 마차와 마부를 데려왔다.

“혼인은 큰일이니, 신중해야죠.”

정교랑은 마차 쪽에 잠시 기다리라는 눈짓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어느 집안이죠?”

보통의 여인네들은 혼사 얘기가 나오면 부끄러워 자리를 피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정중하게 묻는 경우는 처음이라 도리어 주 노야가 당황했다.

“그러니까, 진(秦)씨 가문이다.”

주 노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육낭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기도 하고 우리 집안과도 왕래가 있었으니, 교교 너도 본 적이 있을 게다.”

“그 절름발이요?”

시녀가 불쑥 입을 열자 주 노야는 무안한 듯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절름발이라니, 치료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주 노야는 목소리를 낮춰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따금 느껴졌다. 이렇게 대문 앞에서 혼사 얘기를 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들어가서 얘기하자.”

“됐어요. 그 집안이라면, 더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거절하세요.”

주 노야는 경악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정교랑이 걸음을 옮기며 나가려고 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주 노야는 급히 막아섰다.

“교교, 무려 진씨 가문이다.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진씨 가문은…….”

어려서 잘 모른다? 이 애가 일부러 꾸민 짓이 아니었나?

“반근.”

정교랑이 반근을 불렀다. 곁에 있던 시녀가 얼른 눈치채고 돌아섰다.

“진씨 가문은 천주(川州)의 명문가로 삼 대에 걸쳐 총 열아홉 명의 진사를 배출했어요. 종가의 진중(秦中)은 평원 팔 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공주와 혼인했으며, 경성에 공주부도 하사받았죠. 현재 차남 진안(秦安)은 진중의 적손으로 팔품 조정 관료입니다. 부인 역시 분주(汾州)의 부(富)씨 집안 따님이시고요. 육공자께서 가깝게 지내는 분은 진안의 넷째 아들로 집안에서 항렬은 열셋째예요.”

시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읊어댔다. 주 노야는 시녀의 모습에 놀라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역시 부인 말이 맞았군. 집안 내력까지 이토록 소상히 조사했다니. 이름이 뭐고 어느 해에 공주와 혼인했는지까지 다 알잖아. 역시 이 바보를 만만하게 봐선 안 되겠군. 아니지, 아니지. 이 바보는 방금 거절하라고 했는데? 동의한 게 아니라?

“교교…….”

정교랑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주 노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노야, 돌아가시지요.”

시녀가 휘장을 내리며 말했다.

마차를 불러세워도 소용이 없으니, 주 노야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쾅 소리가 났다. 사환은 어느 틈에 안으로 들어갔는지 누가 들어오기라도 할세라 잽싸게 문을 걸어 잠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명색이 외숙이라는 자가 말을 전하는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것도 모자라, 물 한잔은 고사하고 문전박대까지 당하다니. 무엇보다도 혼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지 않았는가.

거절했으렷다?

주 노야는 수염을 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주씨 저택의 대문으로 들어서던 진 공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대문 앞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이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사람들이 예의가 없네.”

사환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공자께서 주씨 가문과 왕래하며 지낸다지만, 어쨌거나 진씨 가문의 사람이다. 어엿한 진씨 가문을 감히 주씨 가문 따위가 업신여기다니. 절름발이라고 비웃는 것 또한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 남들이 이상한 눈빛을 보낸다면 그것은 필시 공자의 다리 때문이었다.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사환을 꾸짖었다.

“남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것이 먼저다. 그간 주씨 저택을 수차례 드나들었지만, 아랫것들이 오늘같이 예의 없는 경우는 없었다. 오늘 유독 다른 걸 보면 내 다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연유가 있는 게로구나.”

사환은 그제야 깨닫고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하늘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힐 뿐이지.”

진 공자는 가마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말을 이었다.

“남이 괴롭히는 게 아니라면, 스스로가 자신을 괴롭게 하지. 조금 전처럼 남의 시선을 이상하다 느껴 부아가 치밀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단정을 짓고 진짜 연유를 알아보지 않아. 그러다 시일이 흘러 깨닫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하늘 탓을 하지. 진실은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고 싶어 하는 자에게만 보일 것이다.”

사환은 들으면서도 알쏭달쏭했지만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윗전은 어릴 때부터 거동이 불편했기에 보통 사람들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가마가 주육낭의 거처에 도착했다. 주육낭은 전갈을 듣고 회랑 아래에 나와 서 있었는데, 주육낭도 표정이 좀 이상했다.

“사소한 일이 아닌가 보네.”

진 공자가 웃으며 사환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주육낭이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여길, 왜 왔어?”

“내가, 여길, 오면 안 되나?”

진 공자가 주육낭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자신이 여길 오면 안 된다는 건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무슨 일로 왔든 간에, 혼담을 넣었으면 지켜야 할 예절은 지켜야지. 지금 자네가 이 집에 오는 건 적절치 않아.”

주육낭이 껄끄러운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이런 일을 사내대장부가 입에 올리기엔 좀 껄끄럽잖아? 남녀 사이의 일인데, 껄끄럽지. 주육낭은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 공자는 놀라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주육낭이 지금껏 진 공자를 알고 지내면서 이런 표정을 본 것은 딱 두 번뿐이다. 첫 번째는 주육낭이 정교랑과 함께 밥을 먹고 오는 길에 마주쳤을 때였다.

두 번 다 그 여인 때문이다. 아마 이런 것들이 여인네들이 떠들어대는 인연이겠지.

“뭐가, 뭐가 됐든 간에 말이야. 십삼, 앞으로 그 애를 잘 대해 줘.”

주육낭은 멋쩍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애가 영악하고 계략에 능하긴 하다만, 의지할 곳이 없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니겠어. 그러니 자신이 의지할 곳을 찾고 싶었겠지. 자네가 그 의지할 곳이 돼 준다면, 그, 그 애도 안정을 찾지 않겠나.”

말을 마친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진 공자의 모습을 보자 순간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네가 이렇게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었어. 내가 하면 되는 것을, 왜 혼자 초조해져서 나서고 난리야!”

주육낭은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진 공자가 실소를 터뜨렸다.

“자네가 이렇게 구구절절 한참을 말하긴 했는데, 도대체 내가 뭘 했는지부터 먼저 알려주면 안 되겠나? 혼담이라니, 누가?”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그에게 물었다.

“지금 누구한테 묻는 거야?”

“당연히 자네한테 묻는 거지.”

진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게 힘들었는지 회랑 아래에 털썩 걸터앉았다.

“내 사촌누이에게 혼담을 꺼낸 게 아니었나? 아직 혼사도 결정 나지 않은 마당에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어떡하라는 거야.”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고는 진 공자의 반대편에 앉자 진 공자가 다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주육낭, 자네 지금 농담하나?”

3월의 날씨는 아직 서늘했지만, 주육낭은 몸에 오른 열기를 쫓으려 손으로 부채질을 해댔다.

“그럼 지금, 자네는 아직 모른다는 말이야?”

회랑 아래에서 시중을 들던 몸종과 진 공자의 사환은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회랑 아래에 좌우 양쪽으로 앉은 채였다.

“알았다면, 내, 내가……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진 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정말이지, 내 어머니께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예전에도 진 공자의 모친은 그에게 온갖 기괴한 민간요법을 행하고는 했다. 진 공자를 어르고 달래 가며 재를 태운 물을 탕약으로 지어 먹이거나, 어디서 구해온 건지 집안의 악귀를 쫓아낸다는 물건들을 진 공자의 방 안에 몰래 두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진 공자가 열 살이 되기 전에 행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을 할 때면 매번 진 공자의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

하지만 열 살이 넘자 더 이상 어르고 달래는 정도에 넘어가 주지 않을 걸 알았는지, 아니면 아들이 호전될 거라는 기대를 버린 건지, 모친은 그 이후로 기괴한 민간요법 따위를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잠잠했던 모친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다니.

소란이 있었던 날, 정교랑은 진 공자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진 공자는 이 일을 모친에게 숨길 수 없으리라 예상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다. 모친이 자신을 불러 에둘러 묻거나, 다른 이유를 들어 정교랑을 청해 오면 그때 모친께 확실히 설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친이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뜸 사람을 집안으로 들이겠다고 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친은 악귀를 쫓기 위해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던 석상보다 사람 하나를 집안으로 들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여기시는 거겠지.

“내가 방심했어.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어머니께서 집착을 내려놓으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던 거였군.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흠칫 놀랐다. 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거지?

“그런 일을 누가 쉬이 포기할 수 있겠나.”

주육낭이 조용히 말하다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강주에서 온 그 바보 때문에!”

진 공자는 주육낭의 모습에 또 웃음이 났다.

“자네랑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야. 어서 이 일부터 해결해야지. 안 그럼 나중엔 정말 입도 못 열게 될 거야.”

진 공자는 몸을 일으키다가 멈칫했다.

“아, 우선 정 낭자부터 만나서 설명을 해야겠어. 자네가 가서 통보 좀 해줘.”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이제, 여기 안 살아.”

그 말에 진 공자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정 낭자는 이런 일로 쉽사리 화를 낼 사람이 아니지 않나?”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진 공자가 주육낭의 얼굴을 훑어보고 물었다.

“육낭, 방금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됐다고 한 말, 자네가 나서려고 그랬던 거였군. 그렇다면 혹시, 자네가 이미 일을 저지른 거야?”

속내를 들킨 민망함에 주육낭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래, 맞아. 정교랑이 집을 나간 건 자네와 무관한 일이야.”

진 공자는 그 말을 듣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녀석, 어떻게 몸으로 때울 생각을 해?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해낸 거야?”

진 공자는 다시 제자리에 앉으면서 덧붙였다.

“혹시 일찍부터 정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 한마디에 주육낭은 꼬리를 밟힌 짐승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다 자네를 위해서 그런 거였어. 자네만 아니었으면 그런 애 거들떠볼 일도 없어!”

주육낭은 눈을 치켜뜨고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진 공자는 미소를 머금고 주육낭을 쳐다봤다.

“아니면, 제일 좋고.”

진 공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진 공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더니 엄숙하고 연민 어린 표정이 드리워졌다.

진 공자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니면, 제일 좋아.”

태평거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녀는 휘장부터 들어 올렸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시녀는 저도 모르게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시녀의 말에 정교랑도 휘장 밖을 쳐다봤다. 태평거 앞에 모인 열댓 명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

시녀가 긴장한 기색으로 정교랑을 돌아봤다.

“아닐 거야.”

정교랑이 답했다.

마차가 방향을 틀자 식당 앞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대부분 평범한 차림의 사내들이었다. 나이대는 다양했으나 하나같이 문인의 기풍을 지녔으며, 손에 종이와 붓을 든 이가 많았다.

그리고…….

“오라버니들도 밖에 없잖아.”

정교랑이 말했다. 하긴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서무수 등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서자 시녀는 정교랑을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태평거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봤다. 그중 하나가 외쳤다.

“거 길 좀 틉시다, 장사에 방해되면 안 되잖소.”

정말 무슨 소란이 있는 건 아닌가 보네. 시녀는 정교랑을 부축하여 안으로 곧장 들어가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봤다. 식당 안은 계산대에서 장부 정리를 하는 관리인만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밖에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시녀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아씨께서 오셨군요.”

관리인은 웃으며 정교랑을 맞이하고는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밖을 힐끔 쳐다봤다.

“글씨를 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글씨를 보러 왔다고? 시녀는 고개를 돌려 밖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씨께서 차정사에 남겼던 그 글씨는 이제 경성에서 제일 유명한 글씨가 됐다던 진십팔랑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편액에 쓰인 글씨도 아씨께서 손수 쓰신 것이니 이렇게 빨리 알아보는 이가 있겠지.

문밖에 있던 두 사람이 들어와 관리인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상을 밖에다 차려줄 수 있겠소?”

상을 밖에다 차려달라고?

“당연히 되지요.”

관리인은 웃으며 손님께 답하고 고개를 돌려 안쪽을 향해 외쳤다.

“여기 탁자 좀 옮겨 주십시오.”

관리인이 밖으로 나와 말했다.

“어디 보자, 탁자를 어떻게 둬야 좋으려나.”

관리인이 흔쾌히 상을 밖에다 차려준다고 하자, 밖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주인장, 이 편액을 밖에 걸어두자니 너무 아깝소.”

“맞소, 어떻게 비바람을 맞게 둔단 말이오? 아까워서 원!”

“실내에 걸어 둬야 하오!”

모두 한 마디씩 거들며 외쳤다. 관리인은 그저 허허 웃기만 하고 서무수 등 일곱을 지휘하여 탁자를 옮기며 자리를 만들었다.

밖에 있던 서생 열댓 명은 모두 노천 식당에 자리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에 식당 앞이 왁자지껄해지자 길을 지나던 이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넷째 혼자 주문받기도 벅차서 말을 돌보는 이만 제외하고 다른 형제들도 합세하여 주문을 도왔다.

“아씨, 이 글씨가 간판이 되었네요.”

시녀는 웃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식당에서 글씨를 간판 삼는다는 말은 처음 들어.”

정교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시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정교랑 옆에 앉았다. 대청에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사람들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저 서생들도 참, 밖에서 먹을 생각을 하다니. 날이 따뜻해서 망정이지, 눈 내리는 한겨울이었다면 어떻게 먹으려고 저래?”

서봉추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럼 더 좋죠. 눈 위에 둥글게 둘러앉아 술과 함께 글씨를 감상하고, 거기에 발하공까지 곁들여진다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누이, 발하공이 뭐야?”

서봉추가 물었다.

“과로신선이요.”

시녀가 왜 모르냐는 듯이 대꾸했다.

“과로신선?”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시녀가 고개를 돌려 보니, 기다리다 못해 아예 탁자를 직접 옮기고자 안으로 들어온 서생들이었다. 서생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댁들도 과로신선을 아시오? 신선거의 과로신선은 어찌나 맛있는지, 주머니 사정만 아니라면 매일 가서 먹고 싶을 정도지요.”

시녀는 콧방귀를 끼고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맛있는 음식이야, 누군 만들 줄 모르나.”

“누군 만들 줄 모르냐고?”

서생 중 하나가 귀를 쫑긋 세우며 관리인을 향해 물었다.

“여기 과로신선도 파시오?”

관리인이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은 관리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안 팝니다.”

관리인도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하긴, 그건 신선거의 별미잖아. 신선이 특별히 알려준 비방인데, 아무 집에나 다 있을 린 없지.”

서생들은 딱히 개의치 않고 웃으며 다시 탁자와 방석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대청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시녀만은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아씨, 그 집에서 그러는 것도 너무 괘씸하지 않아요? 분명 아씨 건데 어쩜 그리 뻔뻔하게 자기들 것인 양 장사하는지. 게다가 아씨가 사실을 밝히기까지 했잖아요. 이럴 줄 알았음 그때 돈을 달라고 할 걸 그랬네요.”

정교랑은 탁자에 팔을 올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 것을, 어떻게 이득을 취하겠어.”

아씨께선 또 이렇게 말씀하시네! 아씨도 여인이다 보니 마음이 여려 이런 일을 피하시는구나.

시녀는 여전히 씩씩거렸다. 정교랑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봄날에 노천 식사라니, 겨울의 설경 정취에 못 미치지만, 나쁘지 않네.”

정교랑은 문득 시녀에게 말했다.

“반근, 우리도 밖에서 먹자.”

시녀는 멈칫했다가 재빨리 네, 라고 답했다.

정교랑이 밖으로 나오자 서생들은 그녀를 몇 번 더 힐끔거렸을 뿐,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여인의 외출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집 밖을 나서는 양갓집 여인들이 많아진 때였다. 여인들이 산책을 나와 꽃을 감상하거나, 친척이나 지인을 찾아가거나, 시 모임에 나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부귀한 가문에서는 문학도 하나의 소양으로 삼은 덕에, 여인들도 책을 읽으며 시를 쓰는 일을 자랑거리로 삼기도 했다. 경성에는 시, 서예,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는 여인도 꽤 여럿 있었다.

차정사에 쓰인 글씨를 보러 가는 여인도 많다 보니, 새로 나온 ‘태평’이라는 두 글씨에 여인들이 관심을 보인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이 여인이 보인 행동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맞아요, 이러면 되잖아요. 여기서 평소에 숯불 위에 올려두는 은쟁반 대신 깊이가 얕은 솥으로 바꾸기만 하면 간단해요.”

시녀는 점원 역할을 하는 사내를 시켜 탁자 위에 솥 하나를 올려두었다. 솥 아래의 도자기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리고 두부랑 시금치, 배추도 갖다 주세요. 아, 고기는 어떤 고기가 있어요?”

시녀가 이어서 물었다.

“닭이랑 오리, 양고기랑 당나귀 고기가 있는데…….”

사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손님들을 대하듯이 깍듯하게 대했다. 시녀는 정교랑에게 물어본 다음 답했다.

“그럼 오리고기로 부탁드릴게요.”

사내는 큰소리로 주문을 외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가 시킨 음식들이 차례로 탁자 위에 놓이자, 편액을 쳐다보던 서생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쏠렸다.

“저기서 뭘 먹는 거지?”

“얼핏 보기에는 꼭…….”

수군대던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시녀가 썰어둔 고기를 솥에 넣자 서생들은 놀라 웅성거렸다.

“저건 과로신선이잖아!”

“맞아.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확실히 과로신선의 모양이 나오네!”

“뭐? 여기에 과로신선이 있다고?”

서생들이 앞다퉈 주문을 하겠다고 점원을 불러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식당 안의 사내들은 순간 멍해졌다가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와 주문을 받았다.

“우리도 과로신선 하나 갖다 주시오.”

몇 서생들이 한꺼번에 말했다. 넷째는 당황하며 다시 물어봤다.

“과로신선이요? 신선거의 그 과로신선 말씀입니까?”

서생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태평거입니다. 과로신선은 안 팔아요, 할 줄도 모르고요.”

넷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서생들은 멈칫했다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 사람들은 뭘 먹는 거요?”

서생들이 가리킨 쪽에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 식당의 깃발 아래에 자리한 정교랑과 시녀가 있었다.

아직 초록빛이 물들여지지 않은 회화나무 아래에 두모를 쓴 여인과 고운 미모의 시녀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고,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이 있었다. 야외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고작 밥을 먹는데 이런 정취가 느껴지다니, 정말 신기하군.

“아, 저거요? 저건 저 낭자가 직접 만들어 먹는 거라 저희도 뭔지 잘 모릅니다.”

넷째가 말했다.

직접, 만들어 먹는다고? 서생들은 놀란 표정으로 잠시 앉아 고민했다. 잠시 후 음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몇 명이 용기를 내어 정교랑 쪽으로 다가갔다.

“실례지만 낭자, 혹시 이게 신선거의 과로신선이오?”

시녀는 언짢은 표정으로 서생들을 힐끗 쳐다보고 답했다.

“과로신선은 무슨. 저희 아씨께서 급히 가셔야 해서, 요리하는 시간을 기다릴 시간이 없기에 직접 만들어 먹는 것뿐이에요. 불 위에 올린 솥 하나에다 사골육수 좀 부어서 채소나 고기를 넣어 삶으면 그만인걸요. 귀찮아서 간편하게 먹으려는 것뿐이지, 부끄러워서 어디 내세울 만한 요리는 아닙니다. 공자께 웃음거리가 됐네요.”

시녀는 말이 끝나자마자 탁자 위의 시금치 한 단을 손으로 아무렇게나 뜯어 솥에 던졌다.

향긋한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보글보글 끓는 하얀 육수 속의 푸른 채소와 보기 좋게 익은 고기며 두부가 퍽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주인장, 우리도 솥 하나만 갖다 주시오.”

“아, 채소도 좀 주고…….”

문밖에 서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관리인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공자님들, 이미 주문하신 건 무를 수 없습니다, 이것만 주문하시면 저희는 본전도 못 건져요.”

그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씨, 이건 저희 장사를 망치는 꼴이에요.”

채소 한 단, 오리 한 마리, 생두부 한 접시, 육수 한 솥. 딱히 조리가 필요 없는 것들이라 정성 들여 만든 요리만큼 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옆에 있던 서생들이 하하 웃으며 관리인에게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요, 이미 주문한 건 무르지 않습니다.”

관리인은 원하는 답을 듣자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육수 한 솥에 채소 몇 접시는 얼마 하지도 않으니, 그건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오리와 닭은 사 온 값만 받고 드리고요.”

관리인의 시원시원한 태도에 서생들은 좋다고 외쳤다. 훌륭한 글씨에 신기한 요리가 있는데 돈도 받지 않겠다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서생들은 흥이 올라 큰 소리로 시를 읊어 댔고 몇몇은 활을 가져와 버드나무 맞히는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태평거 앞은 서원이나 학당처럼 시끌벅적했다.

시녀가 서생들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정교랑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웃음이 가득한 정교랑의 얼굴이 보였다.

“오호, 아씨…….”

시녀는 정교랑의 의중을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이번 일로 아씨는 서생들에게 과로신선의 맛도 보여주고, 직접 해 보면 간단한 요리라는 사실도 알려 주셨다. 특히나 풍류를 즐기는 서생들 사이에서 이 조리법은 유행처럼 빠르게 퍼져 나갈 것이다. 경성에 있는 신선거의 영업에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힐 테지.

아씨는 마음이 약하고 성가신 일을 피하는 분이 아니셨어.

됨됨이가 제대로 된 자였다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칠이라는 자는 뻔뻔하게도 조리법이 자기 것인 양 행세하는 것도 모자라 뒷배를 들먹이면서 경고까지 해댔다. 스스로 무덤을 판 게지.

* * *

작가의 말

두부는 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단약을 만들다가 발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청이록(淸異錄)>을 연구한 일본 학자는 당나라 말에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고요. <청이록>은 송나라인이 썼고, 송나라 시기 시사(詩詞) 문헌에도 두부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당나라와 유사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므로 통용되는 학설에 근거하여 두부가 아직 요리에 쓰이기 전인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교랑의경>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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