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옥대교 저택 밖.
마차 옆에 쪼그려 앉은 마부가 조심스레 안쪽을 쳐다봤다. 사내들은 보이지 않고 사환 하나만 뛰어나왔다.
“아씨, 언제 이사 오세요? 도련님들이 떠나셔서 저 혼자 있으려니 심심해요.”
금가아가 말했다.
“외가댁이 있는데 거기서 안 지내면 아쉽잖아. 그러지 말고 너도 주씨 저택으로 가자. 거긴 사람이 많아서 시끌시끌해.”
시녀의 말에 금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난 그냥 여기서 아씨 집이나 지킬래.”
“자기 자신이나 잘 지키시지.”
시녀가 놀렸다. 마당에서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자 정교랑이 안에서 나왔다.
“마차를 빌려 와. 가게에 가 봐야겠어.”
시녀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 다리 근처에 말과 마차를 빌려주는 사람이 많았기에 시녀는 금세 마차 한 대를 빌려 왔다.
“마차 대놓고 여기서 기다려요. 아씨랑 나갔다 올 테니까.”
시녀가 주씨 집안 마부에게 말했다. 주씨네 마부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르는 정교랑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씨는 자기 마차가 있는데 왜 안 쓰시는 거지?”
마부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사환에게 물었다.
“그쪽이 마차를 잘 못 모나 보죠.”
금가아가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마차가 흔들흔들 거리를 지나갔다. 정월은 지났지만 아직 봄이 오기 전이었다.
“아씨, 여기 좀 보세요.”
시녀가 마차의 차창 너머로 떠들썩한 거리 풍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경성 구경도 못 하셨잖아요. 언제 구경 안 나가세요?”
정교랑이 밖을 봤다. 점포며 행인, 거리 풍경이 지나갔다. 떠들썩하고 번화한 거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어머나, 아씨. 저기 좀 보세요. 저기 한 공자가 있어요.”
시녀가 바짝 다가가며 휘장 너머를 가리켰다. 정교랑이 쳐다보자 맞은편에서 서생 네다섯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든 사람도 있고 어린 사람도 있었는데,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흔들리는 마차가 이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씨, 한 공자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시녀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집을 나와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시녀는 싱긋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한 후 자세를 바로 앉았다.
마차가 멈춰 서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보고 얼른 나와 맞이했다.
“누이 왔구나.”
마차에서 먼저 폴짝 뛰어내리는 시녀를 보며 서봉추가 말했다.
“어떤지 좀 봐.”
누이? 이 사내들에게 누이도 있었나? 뒤따라 나오던 이대작이 놀라 쳐다봤다.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두모를 쓰지 않아 길게 내려뜨린 검은 머리칼이 그대로 드러났다. 얼굴이 백옥처럼 고왔다. 놀란 이대작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한쪽 옆으로 숨었다. 이대작은 사람들이 들어간 후에야 다시 나왔다.
“대작, 집에 가려고?”
서무수의 물음에 이대작은 그렇다고 했다. 아직 개업 전이었지만 이대작은 매일 나와 부엌을 치우고 집기를 정리했다.
“이 쌀가루랑 채소 가져가시오.”
서무수가 대청에 쌓아 놓은 먹거리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어르신. 전에 가져간 것도 아직 못다 먹었어요.”
이대작은 손사래를 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서무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권하지 않았다. 서무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대작은 그제야 몸을 똑바로 펴고 열린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여인 주변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괜찮아 보여? 이쪽 장식은 괜찮아?”
시끄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소개한다기보다는 조언을 구하는 듯했다. 저 사내들의 가게인데, 왜 저 여인한테 장식에 대해 묻지? 이대작이 잠시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낭, 성에 들어갈 건가?”
이대작이 얼른 고개를 돌리자 달구지를 모는 이웃이 보였다.
“네, 네.”
이대작은 소리치며 이웃을 향해 달려갔다.
위층에 있던 정교랑은 창에서 시선을 거뒀다.
“괜찮네요.”
뒤에 있던 서무수 등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기(銀器)도 전부 준비해 놨어. 술은 경성에서 정식으로 판매하는 춘양과 옥경, 벽계 세 종류로 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각자 일을 보러 가고, 범강림과 서무수만이 별실에 남아 소상히 보고했다.
“돈을 많이 썼어.”
범강림이 한마디 덧붙였다.
“많이 써야, 많이 벌죠. 백은을 써야 황금을 얻는 법이에요. 다른 거 없어요.”
“그래, 누이 말이 맞아.”
범강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청에서 쓸 것도 전부 마련해 놨어. 술은 성 서쪽에 있는 관주(官酒)를 만드는 곳에서 받기로 했지. 술지게미도 달라고 했어.”
“그런 건 나도 잘 몰라요. 관리인을 찾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작뿐 아니라 취봉루의 오랜 관리인도 쫓겨났다는데, 연륜이 꽤 있는 것 같더라고. 내가 이대작이랑 직접 찾아가 설득했더니 오겠다고 했어. 집이 멀어서 정월을 보내고 온다니 아마 며칠 내로 당도할 거야.”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오거든, 그 사람한테 맡겨요. 진심으로 대하고요. 직업이 다르면 모르는 게 많잖아요.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경영은 그 사람한테 맡겨요.”
서무수가 웃었다.
“누이, 걱정 마. 우리는 누이 대신 가게를 잘 지킬게. 절대 함부로 안 끼어들고.”
“내 가게가 아니에요. 우리 거죠. 난 돈을 냈고, 오라버니들은 힘을 보탰잖아요. 일도 나서서 처리했고요.”
가게의 지분은 셋으로 나누기로 했다. 범강림은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서무수의 설득 끝에 결국 받기로 했다.
“누이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큰돈을 들여 가게를 샀는데,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라고? 그럼 뭐 때문이지? 그 숙수를 위해서? 아니면 갑자기 튀어나온 한 공자를 위해서?”
서무수는 멀어져가는 정교랑의 마차를 보며 말없이 있었다.
누가 알랴. 저 여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하고 싶은 걸 해낼 능력도 있지 않은가. 그거면 족하지, 이유를 알아 무엇할까.
정교랑의 마차가 떠날 무렵 이대작이 탄 달구지는 막 성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규원거는 그다지 큰 객잔이 아닌 데다 성 안으로 자주 들어올 일이 없는 이대작은 경성 지리에 어두웠다. 그래도 전에 그 시녀에게 길을 물어본 덕에 물어물어 찾아갈 수 있었다.
정월이 지나자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아지다 보니 객잔도 전처럼 썰렁하진 않았다. 한원조는 이대작을 보고도 누군지 못 알아보다가 이대작이 주절주절 사정을 설명한 후에야 기억해냈다.
“별것 아니니 담아 두지 마십시오.”
한원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생이자 은인을 만난 이대작은 흥분했다. 가뜩이나 말주변이 없는 사람인데 더 말이 안 나와 그저 고맙다는 말만 반복한 후 상기된 얼굴로 문서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한원조가 놀라 물었다. 이대작이 쭈뼛쭈뼛 사정 얘기를 하자 한원조와 두 동료는 영문을 몰라 했다.
“반년간 품삯을 안 주고 이 지분으로 대신한다고요? 사기당하는 거 아닙니까?”
한 동료가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대작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주인어른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관리인도 제가 잘 아는 사람으로 불렀고, 가게도 잘 꾸며 놨습니다. 당분간 품삯은 못 받지만 먹고 마시는 건 매일 가져가니 식솔을 굶길 일도 없고요. 저한테 사기를 치긴요, 제가 가진 게 없는걸요.”
한원조 등 세 사람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빙긋 웃었다. 하긴, 들어 보니 사기 같진 않네. 오히려 선행 같은데.
“그럼 다행입니다. 이건 받을 수 없으니 가져가십시오.”
한원조가 문서를 도로 내밀었다. 이대작은 한사코 거절하다가 아예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은공, 은공이 아니셨다면 전 진작 죽었을 겁니다. 가족 건사도 못하고요.”
이대작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저리 애원하는데 안 받는 것도 죄야.”
동료까지 나서 설득한 끝에 한원조는 결국 문서를 받았다. 이대작은 원하던 대로 되자 큰 부담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거듭 감사를 표하며 자리를 떴다.
“이럴 수가. 별것도 아닌 일로 지분까지 얻었네. 경성 한번 왔다가 식당을 얻게 됐어. 기쁜 일이야.”
동료들이 하하 웃으며 문서를 받아 살폈다. ‘태평거(太平居)’라는 글자가 보였다. 평범한 이름이었다. 가 봐서 알지만 위치도 썩 훌륭한 건 아니고. 과로신선과 오랫동안 쌓아온 명성이 아니었다면 별 볼 일 없을 곳이었다. 한 해나 버틸지 알 수 없는 터에 지분 배당이라니. 배당금을 받는다 한들 몇 푼이나 되려나?
“어마어마한 재산은 됐으니 장강주 선생의 수업이나 듣게 해 줬으면 좋겠군.”
동료는 탄식하며 한원조에게 문서를 돌려줬다. 그 얘기가 나오자 한원조도 웃음기를 거두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인연이 없었던 게지. 우리끼리 열심히 공부하세나.”
한원조는 옷자락을 걷고 자리에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문서를 책 속에 대충 끼워 넣은 한원조가 책장을 넘겼다.
* * *
2월 초의 경성은 여전히 추웠고, 눈발까지 흩날렸다. 주씨 가문 하인들은 서둘러 길 위에 쌓인 눈을 치웠다. 기침 소리가 새어 나오는 주 부인의 거처에서는 문을 열자 진한 약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부인.”
여종이 꿇어앉아 예를 올린 후 명첩을 올렸다.
“진 상공 댁 따님들이 정 낭자를 뵈러 왔답니다.”
마침 주 부인은 몸종이 올린 약을 먹으며 가슴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 애를 찾아오는 사람은 내게 알릴 필요도 없다!”
주 부인이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종은 황급히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이제 정월도 지나갔고 진 노태야의 병도 나았는데 그 애를 여기 둬서 뭐 해요? 그냥 돌려보내요.”
주 부인이 주 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말해 봤는데 안 가겠다고 하오.”
주 노야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여긴 우리 집이잖아요. 내쫓아 버려요.”
“내쫓아?”
주 노야가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내보낸 후에 그 애 병이 나아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게 되면?”
주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주 노야는 빙긋 웃으며 짧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린애 생각이야 뻔하지.”
“내가 보기에 우리가 그 애 덕 보긴 힘들 것 같아요. 그 애가 온 후로 좋은 일은 하나도 없고 웃음거리만 된 거 봐요. 할아버님께서 물려주신 노섬 주씨의 명성이 오래도록 이어졌는데, 그 애가 온 후 두 달 만에 아둔 주씨로 바뀌었잖아요.”
주 노야가 눈썹을 꿈틀하더니 손으로 수염을 잡아당겼다. 아둔 주씨라…….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진짜잖소. 지금은 병이 났다고 했지 못 고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말이오. 병이 났으면 나을 때도 있겠지. 바보의 병도 나았는데, 딱히 병명도 없는 병쯤이야. 그 애도 알고 우리도 아는 일이오. 남들도 속으로 뻔히 알고 있고.”
주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 나서 못 고친다고 했지, 앞으로 못 고친다고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결국 토라져서 저러는 거 아니겠소? 우리가 일찍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토라진 게지. 내버려 두면 결국 풀릴 거야. 혈육이라고 해 봤자 친가와 외가가 전부 아니오. 정씨 가문에서 버림을 받은 마당에 그만한 능력이 생겼으니, 우리가 잘해 주도록 허세를 부리고 싶겠지.”
주 노야는 다리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야 이러쿵저러쿵해도 핵심은 결국 명성이오. 법을 어기고 나쁜 짓을 하여 오명을 남기지 않은 이상 걱정할 것 없어.”
얘기를 듣던 주 부인은 갑자기 가슴이 뛰어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 얘긴 그만해요, 그만.”
주 노야가 이해할 수 없는 듯 쳐다봤다.
“뭘 말이오?”
주 부인은 가슴을 부여잡고 몸종이 올린 물을 마시며 간신히 기침을 억눌렀다.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이요.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또 덜컥 내려앉네요.”
주 부인이 숨을 몰아쉬었다.
“매번 괜찮다고 했잖아요, 괜찮다고. 근데 어땠죠? 매번 우리만 가슴을 졸이는 걸 좀 봐요.”
주 노야가 껄껄 웃었다.
“매번 똑같군. 난 널 존중했는데 넌 날 무시했다, 난 너한테 빌었는데 넌 아니었다. 그런 게 뭐라고.”
주 노야가 일어나면서 옷깃을 털자 주 부인도 얼른 일어나 배웅했다.
“집에 있는 여인한테 딱히 무슨 일이 생기겠소? 당신도 딱히 일 없으면 그 애한테 가지 마시오. 먹고 마시고 쓸 거나 잘 챙겨 주고, 뭘 하려고 하든 내버려 두시구려. 그 애는 마음 편해서 좋고 당신도 열 받을 일 없어 좋잖소. 약 잘 먹고 몸부터 추스르는 게 가장 중요하오.”
주 노야가 말했다. 주 노야를 배웅하고 난 주 부인이 자리에 기대앉자 몸종들이 다리와 등을 안마해 주었다.
“강주로 보낸 사람들은 아직 안 돌아왔더냐?”
주 부인이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지금 오는 길일 거예요.”
여종의 대답에 주 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이번 보름엔 보수사(普修寺)에 향유를 스무 근 더 보내라. 사악한 기운을 쫓아야지.”
“정 아씨는 진인을 만난 게 아니었습니까? 도관에 시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종의 물음에 순간 욱한 주 부인은 팔걸이 책상에 놓인 손난로를 들어 내던져 버렸다.
“누가 그 앨 위해 시주한대! 그 애를 진짜 떠받들기라도 하란 말이냐!”
방 안에서 잘못을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단랑이 차 한 잔을 다 마시는 동안 옆에 있는 진십팔랑은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십팔랑, 정 언니는 조금 있으면 깰 거야.”
진단랑이 눈을 찡긋하며 나지막이 속삭이자 진십팔랑이 웃어 주었다.
보통은 손님이 오면 자고 있던 주인도 얼른 일어나는 게 예의지만, 정교랑은 그러지 않았다. 다른 집에 갔을 때 주인이 이런 식이었다면 푸대접을 받았다고 여기거나 고의로 그런다고 생각해 즉시 자리를 뜨고 다시는 왕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정말 그저 단순하게 자는 것일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야 하는 어린애 같은 사람이니까.
“응, 알아.”
진십팔랑도 목소리를 낮춰 대꾸했다.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진단랑이 언니에게 입 모양으로 ‘깼나 보다’ 하는 말을 전하자 진십팔랑이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거두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렸다. 품이 큰 홑옷 차림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화장기 없는 얼굴의 정교랑이 걸어왔다. 양쪽은 자리에 앉길 기다렸다가 예를 표했다.
“불쑥 찾아왔으니 양해해 주세요.”
진십팔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시녀가 건넨 물을 받으며 대답했다.
“정 언니, 몸은 좀 괜찮아요?”
진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대답했다. 정교랑을 보자 진십팔랑은 자매들과의 논쟁과 할아버지의 말씀이 절로 떠올랐다. 이 여인은 병을 핑계로 사람들을 피하고 병을 안 고쳐 주고 있다. 신기한 능력이 있고 어마어마한 돈이 걸린 일인데 왜 안 고친다고 하는 걸까?
정교랑이 진십팔랑에게 시선을 돌리자 진십팔랑은 당황하며 시선을 옮겼다. 방 안 분위기는 다소 어색했지만 다행히 진단랑이 쉬지 않고 조잘조잘 떠들었다.
“정 언니, 십팔랑이 저한테 언니 보러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진단랑이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십팔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날 무슨 일로, 찾아왔죠?”
진십팔랑은 당황스러웠다.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둘 다 어쩜 이렇게 직설적이야. 이걸, 뭐라고 답한다? 진십팔랑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여인을 쳐다봤다.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보고 있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천천히 물을 마시면서.
“그게, 낭자한테 글씨를 배우고 싶어요.”
진십팔랑은 눈 딱 감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진단랑과 시녀 모두 흠칫 놀랐다.
“십팔랑, 정 언니한테 글씨를 배우겠다고?”
진단랑이 소리쳤다.
“응.”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난 진십팔랑은 딱히 조심스러워하지도 않고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이 십팔랑은 정 낭자의 묵보(墨寶: 남의 글씨를 높여 이르는 말)를 흠모합니다. 외람되지만 가르침을 주세요.”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정교랑의 물음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낭자의 글씨에 대해 경성에 소문이 쫙 퍼졌어요. 단랑의 말이 아니었다면 낭자의 글씨인 줄도 몰랐을 거예요.”
시녀는 깜짝 놀랐다. 그 글씨에 대해 경성에 소문이 쫙 퍼져? 시녀는 글씨를 잘 몰랐다. 그때도 좋은 글씨라고는 생각했지만 어떻게 좋은 건지 말로 표현할 순 없었다. 하지만 시녀는 세상 사람들이 서체에 얼마나 열광하는지 잘 알았다. 한림원엔 시서(侍書) 학사가 있고 국자감엔 서학(書學) 박사가 있었으며, 이부의 인선에서도 서체는 아주 중요했다. 장씨 가문에서도 서체를 놓고 부자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장 노태야는 서체를 몹시 좋아했지만 노야인 장순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체는 그저 글을 쓰는 데 필요할 뿐인데 다들 서체를 너무 추앙하는 나머지 주객이 전도되어 글은 부수적인 게 됐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장순은 제자들에게도 해서체로 힘차고 바르게 쓰면 될 뿐이라며 글씨를 잘 쓴다고 하여 좋은 관직에 가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어쨌거나 경성에 소문이 쫙 퍼질 정도라니, 아씨의 글씨는 아주아주 훌륭한 게 틀림없었다.
“낭자의 글씨는 일반적인 해서나 행서, 초서와 크게 달랐어요. 한 자 한 자 아주 독창적이었죠. 행서로 쓴 ‘산사는’은 붓끝을 눕혀 쓰는 와필과 붓끝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봉이 들어갔고, 초서로 쓴 ‘매화가’는 글씨가 가늘면서도 힘이 있고 기묘했어요. 다시 행서로 쓴 ‘피기를’은 순박하면서도 꾸밈없는 아름다움이 있고, 해서로 쓴 ‘기다릴’은 물이 흐르는 듯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웠죠. 초서로 쓴 ‘뿐이네’에서는 회소(懷素: 당대의 서예가)의 작풍이 느껴지면서도 대범하고 웅건했어요. 전체적으로 이왕(二王: 왕희지와 그 일곱째 아들 왕헌지)의 작풍에서 각자의 장점만 취하여 형태나 기백이 뛰어나니 실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글씨죠.”
단랑은 이제 막 글씨를 익히기 시작했고 시녀 역시 시사를 조금 아는 정도라 진십팔랑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멍해졌다. 말을 마친 진십팔랑이 흥분된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경문을 막힘없이 술술 외운 후 스승의 평가를 기다리는 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말을 잘하네요. 그런데, 무슨 뜻이죠?”
흥분했던 진십팔랑의 표정이 순간 경직됐다. 아무래도 준비가 부족했나? 아니면 핵심을 짚지 못한 건가. 진십팔랑이 멈칫하는 사이 진단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맞아, 언니, 그게 다 무슨 뜻이야?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해?”
못 알아들었다? 진단랑은 못 알아듣는다 치고 정교랑도 정말 못 알아들은 걸까?
못 알아들었다고…….
“낭자, 웃음거리를 보였네요.”
진십팔랑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안 웃었어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못 알아들었죠.”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낭자, 실은 저도 잘 몰라요.”
진단랑과 시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교랑도 아마 놀랐을 것이다. 아니, 안 놀랐으려나. 어쨌거나 정교랑의 표정은 늘 무뚝뚝했다.
“할아버지와 부친 그리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듣고 달달 외운 거예요. 하지만 그분들이 좋다고 해서 저도 좋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잘 모르긴 하지만 좋은 건 확실했어요.”
진십팔랑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이 말도 좀 이상하네. 다들 좋다고 하는데 안 좋을 수가 있나? 혼자만 별로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지.
진십팔랑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더욱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서둘러 올 게 아니라 며칠 더 준비하는 게 나았으려나.
“내 글씨도, 별로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정 낭자, 겸손하시네요.”
“난, 겸손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십팔랑, 하려던 말이 대체 뭐야?”
진단랑이 진십팔랑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정 언니한테 글씨를 배우겠다고?”
진십팔랑은 심경이 복잡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사실 제 글씨는 정말 별로거든요. 왕희지와 왕헌지, 안진경의 글씨를 익혔지만 못 쓰겠어요. 스승님께서 요령을 말씀해 주셔도 못 알아듣겠고요. 글씨에 깃든 기품과 운치를 말씀하셨지만 봐도 모르겠어요. 사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거기까지 말한 진십팔랑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칭찬의 말을 죽어라 외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니 역시 안 되겠죠. 낭자에게 웃음거리를 보였네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아니에요.”
애초에 알아듣지 못했으니 우스울 것도 없는 게 당연하죠. 옆에 있던 시녀가 속으로 정교랑의 말을 대신했다.
“아휴, 언니.”
진단랑이 진십팔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동그랗게 뜬 눈을 반짝였다.
“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정 언니의 글씨가 좋아 보이고 언니의 글씨가 별로면 정 언니한테 배우면 되지. 별거 아니잖아. 웬 말을 그리 많이 해?”
진십팔랑은 그 말에 초조해졌다.
“아니야. 내 생각에 정 낭자의 글씨가 좋다는 게 아니라 남들이, 다들 좋다고 했어. 그래서 나도 배우고 싶은 거야.”
진십팔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정교랑을 보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 진소(陳素)가 경솔했습니다.”
진십팔랑의 이름은 소(素)였다.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게, 뭐가 경솔해요? 원래 이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십팔랑은 멈칫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반의법을 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쪽의 진단랑은 벌써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맞아. 다들 좋다고 한 게 아니면, 뭐 하러 배워?”
진단랑이 언니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까? 진십팔랑은 어리둥절해졌다.
“정 언니, 며칠 전에 어머니랑 놀러 갔다가 왕씨 가문의 동생을 봤어요. 머리를 두 갈래로 예쁘게 묶었더라고요. 근데 우리 어멈은 못한대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 가서 물어보랬어요.”
진단랑이 재잘재잘 떠들며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봐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예쁘죠?”
“안 예뻐.”
정교랑이 말했다.
“정 언니! 어디가 안 예뻐요?”
방 안에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분위기가 따스해졌다. 진십팔랑은 나이 차가 있는 두 사람이 진지하게 묻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멈칫했다가 쿡 웃음이 나왔다.
“정 낭자.”
진십팔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엄숙하지는 않은 모습으로 정교랑을 향해 가볍게 예를 올렸다.
“이 진소가 글씨는 잘 모르지만 좋아하긴 해요. 어떤 글씨가 좋은지는 잘 모르지만 제 글씨가 안 좋다는 건 잘 알고요. 그러니 제가 글씨 연습을 하도록 낭자께서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제 글씨가 제 마음에도 들고 남도 우러러보는 글씨였으면 좋겠어요.”
정교랑과 진단랑이 말을 멈췄다.
“내 글씨는, 안 좋아요.”
고개 숙인 진십팔랑은 순간 실망했다. 역시 거절이구나.
“나도 연습 중이에요. 괜찮다면, 나랑 같이, 공부해요.”
“감사합니다, 낭자.”
진십팔랑이 몹시 기뻐하며 예를 표했다.
주씨 저택을 나와 마차에 앉은 진십팔랑은 흥분을 감추기 힘든 얼굴이었다.
“정 낭자랑 얘기하는 건 정말 진 빠지는 일이네.”
진십팔랑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쳤다. 진단랑이 눈을 찡긋하며 쳐다봤다.
“뭔 소리야, 언니가 말하는 게 더 진 빠지지. 그냥 글씨를 배우는 건데 뭔 말을 그렇게 많이 해?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듣게.”
기분이 좋아진 진십팔랑은 손을 뻗어 진단랑의 코를 비틀었다.
“뭘 안다고.”
진단랑이 얼른 피했다.
“십팔랑, 정 언니랑 글씨 연습할 때 나도 같이 올 거야.”
진십팔랑은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얼른 동생의 팔을 붙잡았다.
“단랑, 정 낭자의 말 기억하지? 이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자리를 뜨기 전 진십팔랑은 정교랑에게 차정사 글씨를 정 낭자가 썼다고 말해도 되는지 넌지시 물었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정 언니는 왜 말하지 말란 거지?”
진단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안 좋다고 생각하나 보지. 정 낭자는 병을 치료한 일로 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하잖아. 간신히 덮었으니 이 일이 또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 게 당연해.”
“뭐가 안 좋아?”
진단랑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재물은 밖으로 드러내지 말란 말도 있잖아. 정 낭자는 몸도 허약하고 나이도 어려. 지금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졌다간 못된 마음을 먹은 자들이 문제 삼을 수도 있어. 그건 정 낭자한테 안 좋지.”
진단랑은 눈을 껌벅거리며 여전히 막막한 얼굴로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대여섯 살짜리 꼬마가 그 이치를 어떻게 알겠어. 진십팔랑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명심해. 정 낭자는 남이 아는 걸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진십팔랑은 어린아이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 글씨를 잘 못 썼다고 생각하거든.”
진단랑은 퍼뜩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내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못 쓴 글씨를 남이 알면 창피하지.”
진십팔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는 앞으로 더 잘 쓰길 기대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말하지 마. 네가 말하면 정 낭자가 기분이 상해서 너랑 안 놀 거야.”
그건 진단랑이 가장 겁내는 일이었다. 진단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씨 자매를 보낸 시녀는 정교랑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아씨.”
시녀가 정교랑 앞으로 가서 앉았다.
“아씨, 아씨의 글씨가 그렇게 훌륭한 거였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진십팔랑이 자신은 잘 모른다고 했지만, 진십팔랑의 말은 다른 이가 정교랑의 글씨를 보고 묘사한 게 틀림없었다.
“글씨일 뿐인데, 잘 썼으면, 어떻고, 못 썼으면, 또 어때?”
정교랑이 물었다. 그야 그렇지만……. 시녀는 멈칫했다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죠, 아니에요. 좋으면 좋죠. 꼭 어쩌자는 게 아니더라도요.”
정교랑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씨.”
시녀는 또다시 입을 열며 눈웃음을 지었다.
“소인은 이제야 알겠어요. 반근 낭자가 떠날 때 왜 그리 슬퍼하고 아쉬워했는지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시녀를 쳐다봤다.
“왜 그랬는데?”
시녀는 풉 소리 내어 웃었다.
“아씨, 반근 낭자는 아씨한테 요리하는 법을 배웠는데, 소인은 아씨 곁에서 뭘 배워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요.”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시녀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배워.”
입을 가리고 웃던 시녀는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췄다.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無爲)의 도는 도교 이 진인의 도가 아니던가. 아씨께서 정말 신선을 만나 이 진인에게 가르침을 얻으셨나?
* * *
“병을 안 고친다고?”
신선거. 평복 차림의 사내는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네, 병이 났다고 합니다. 인화당의 의원도 사실 확인을 해 줬고요. 아무래도 신선을 만난 건 아닌가 봅니다.”
두칠의 말에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신선? 요즘 세상은 참 신선도 못 해먹겠다. 무슨 일이든 신선을 붙잡고 늘어지며 덕 좀 보려고 난리니.”
사내는 토끼고기를 탕에 넣고 흔들었다가 양념장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옆에 앉아 있던 관기가 손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양념장 자국을 닦아 주었다.
“주씨 집안에서 가진 게 만병을 치료하는 비술은 아닌가 보구나.”
사내는 또 다른 관기가 올리는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감탄을 내뱉었다.
“회선루의 술맛은 과연 으뜸이로다.”
“네, 네, 할아버님. 이 술을 들인 후로 장사가 더 잘되고 있어요.”
두칠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주씨 집안에선 아무도 안 왔지?”
사내가 물었다.
“네, 그날 이후로는 아무도 안 왔습니다.”
두칠은 말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 여인 말처럼 그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건가? 그래서 주씨 가문도 개의치 않고? 그때는 개의치 않았다지만 신선거의 장사가 점점 잘되는 걸 보고도 그럴 수 있나? 이 세상에 돈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본디 자신이 벌어야 할 돈이었다면 더더욱. 말도 안 된다. 마음을 꾹 억누르며 움직이지 않는 거라면 더 대단한 사람인데.
두칠은 더욱 공손하게 웃었다.
“할아버님이 계시니, 주씨 가문도 눈이 먼 게 아니고서야 어쩔 수 없겠죠.”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내가 웃었다.
주씨 가문에서 눈이 벌게져서 이 일을 문제 삼으러 찾아왔다면, 눈이 벌게진 병을 고쳐 줄 방법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성가신 일이었다. 어쨌거나 관직에 몸을 담고 있기도 했거니와 인맥을 동원하려면 곡절이 생기기 마련이니. 보아하니 주씨 가문의 비술도 그저 그런 것 같은데 재물까지 들여가며 애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주씨 가문에서 눈치 있게 굴면 성가신 일이 많이 줄 터였다.
“전에 하던 가게는 팔았다고?”
사내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물었다.
“네, 할아버님. 팔았습니다.”
두칠은 신이 난 목소리였다. 사정을 잘 아는 이면 4~5천 관에 샀을 식당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외지 사람을 만난 덕에 크게 한몫을 챙기게 됐다.
웃음이 번지려는 찰나 마음이 떨려 왔다. 앞에서 관기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는 사내를 보고 있노라니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흡사 누군가가 피를 빨아들이는 듯이.
“할아버님, 이번 달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인편에 배당금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그래, 하고 대꾸하고는 흡족하게 고기를 집어 탕에 넣고 흔든 후 입으로 가져갔다.
2월 보름. 눈이 몇 번 더 내린 후 경성의 날씨가 화창해졌다. 쌀쌀한 공기 속에 차츰 봄기운이 느껴졌다.
진십팔랑의 마차가 중문에 멈춰 서자 여종 둘이 얼른 나와 맞이했다.
“아씨, 서두르세요. 부인께서 입궐하시는 길에 아씨를 데려가신대요.”
입궐? 진 부인은 연말에 국부인(國夫人)으로 책봉됐다. 품계와 신분은 결코 낮지 않았지만 황족이 아닌지라 큰 명절을 맞아 알현하러 갈 때를 제외하면 황궁은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슨 일로 입궐을?”
진십팔랑은 놀라며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두 여종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삼갔다. 저쪽에서 이미 고명복으로 갈아입은 진 부인이 걸어오자 진십팔랑이 얼른 다가갔다.
올케는 임신 중이라 태교가 중했다. 아이를 키우기 힘든 시절이라 순조롭게 출산하는 건 열에 다섯이고, 다섯 중에서도 둘은 요절하곤 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고 집 밖에 나가는 일은 딸들이 함께했다.
진 부인은 딸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딸은 여전히 정교랑의 옷을 따라 지은 소매가 넓고 품이 큰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안 갈아입어도 되겠다.”
진십팔랑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모친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마차에 탄 후에야 진십팔랑이 물었다. 진 부인은 웃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현비(賢妃)께서 회임을 하셨어.”
궁중 비빈의 회임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사였다. 가뜩이나 손이 귀한 황실에 황제까지 병을 얻은 터라 조정의 인심이 흉흉했는데, 비빈의 회임 소식이 들려왔으니 실로 기쁜 일이었다.
“그럼, 외명부 부인들이 축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거예요?”
진십팔랑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황후가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니고. 진 부인이 방금 전 두 여종처럼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비마마께서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갑자기 참새가 드시고 싶으시대. 황궁 숙수들이 만들어 올렸지만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더구나. 나더러 숙수를 데리고 가 직접 만들어 주라는 태후의 전갈이 왔어.”
진십팔랑의 표정 역시 묘해졌다. 웃고 싶은데 감히 웃을 수 없었다.
“현비마마께선 참 지극한 총애를 받으시네요.”
진십팔랑이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황제가 동의한 일이 분명했지만 천자가 돼서 신하에게 숙수를 보내라고 직접 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어사언관(御史言官)이 떠들어댈 게 뻔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이리 일찍 돌아와?”
진 부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진십팔랑은 그날 집으로 돌아와 정 낭자와 함께 독서를 하겠다고 했다. 정교랑이 책 읽는 걸 즐겨 듣는다는 사실은 진소 부부도 잘 알았다. 그래서 진십팔랑이 정교랑에게 가 책을 함께 읽는다는 줄 알고 자연스레 동의했다.
“낭자는 어릴 때부터 사정이 딱해 경성에서도 가까이 지내는 형제자매가 없을 텐데, 그래도 너랑 가까이 지내려 하는구나. 가 보거라.”
진십팔랑은 부모의 오해에 딱히 해명하지 않고 말을 얼버무리며 알았다고 했다.
“정 낭자가 오늘 외출한다면서 내일 오라고 했어요.”
“어딜 갈 데가 있다고?”
진 부인은 궁금해했지만 진십팔랑이 고개를 가로젓자 더는 묻지 않았다. 마차는 어느덧 황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현비는 태교에 힘쓰기 위해 태후의 궁에 머물고 있었다. 전갈을 들은 태후가 즉시 일어나려고 하자,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소년이 먼저 일어섰다.
“위낭(瑋郞), 넌 먼저 돌아가거라.”
태후가 소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소년이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신 궁을 떠난단 말을 입에 올리지 마. 네 부왕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상관없다. 네 부왕도 황실 사람인데 꺼릴 게 뭐 있느냐. 염려 말고 궁에서 지내다가 내년에 대황자와 함께 출궁하거라.”
태후가 주변 궁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누구든 진안 군왕의 출궁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간 쫓아내 버리겠다.”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궁인들은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소년은 다시 예를 올린 후 물러갔다. 기분이 좋아진 태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 있던 늙은 궁인의 팔을 붙잡았다.
“역시 저 아이는 복덩이야. 이번에도 돌아오자마자 황상의 병세가 좋아지고 현비도 회임을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저 애를 궁에서 내보내 봉지로 가게 하라는 진언을 올리는 이가 있다니.”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진언을 올리는 이가 무슨 꿍꿍이인지 본궁이 모르겠느냐? 혜귀비(惠貴妃)의 가족더러 얌전히 지내라고 해라.”
궁인들이 네 하고 대답하자 태후가 표정을 풀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가 그리 맛있다지? 본궁도 먹어 봐야겠다.”
태후는 웃으며 문을 나와 안쪽에 있는 궁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나오던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추고 다소 기이한 표정으로 측문을 쳐다봤다. 궁녀 둘이 두 여인을 안내해 안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앞쪽 외명부 여인의 예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외명부 여인 옆에서 걷던 소녀도…… 눈에 띄었다. 뒷모습일 뿐이었지만 그런 의복은 진안 군왕이 지금껏 살면서 딱 두 번 본 것이었다.
처음 본 건 늑대 떼가 사방에서 포효하던 모닥불 근처였다. 밤바람이 그 소녀의 두봉을 스치자 불빛 아래로 보이는 암회색 옷이 유독 눈에 띄었다.
“군왕?”
궁인이 나지막이 부르자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내디뎠다.
“누구지? 현비마마의 가족인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이부 진소 상공 댁의 가족입니다.”
궁인도 웃으며 대답했다. 소년 군왕의 밝고 명랑한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쌀쌀한 한기가 한결 덜했다.
“아, 진씨 가문.”
진안 군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긴 눈썹이 저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이런 인연이? 또 만나다니. 밖을 나다닐 땐 아무렇게나 입어도 상관없다지만 귀인을 뵈러 입궐하면서도 저리 어두운 색의 옷을 입는 걸 보면 과연 기이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었다.
불이 붙은 모닥불 속으로 죽통을 던지자 여기저기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귀를 막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가 문 앞에 선 사내들에게 공수하며 무어라 말했다.
거리가 멀어 내용까지 들리진 않았고, 사람들이 식당 안으로 우르르 들어간 후로는 동작도 표정도 볼 수 없게 됐다. 다만 깃대에 달린 깃발이 2월의 찬바람에 흔들리면서 함께 나부끼는 ‘태평거’라는 세 글자는 멀리서도 보였다.
“아씨, 안 들어가 보세요?”
시녀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옆에 선 정교랑에게 물었다.
“아씨의 가게가 개업하는 거잖아요.”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똑같지.”
시녀는 웃으며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다가 땅 위에 올라온 풀을 보며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냈다.
“싹이 났네요. 아씨, 이것 좀 보세요.”
정교랑은 두모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고개를 숙여 쳐다봤다.
“그래, 봄이 왔구나.”
태평거 앞의 뜨거운 열기는 금세 사라졌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구경하러 왔던 이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들어가는 이가 없었다. 길 위에는 사람과 마차, 말이 끊이지 않았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길을 재촉하거나 힐끔 쳐다보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반근.”
정교랑이 불쑥 불렀다. 아직 풀을 보고 있던 시녀가 얼른 일어나며 네 하고 대답했다.
“너희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나 가봐.”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깜짝 놀랐다. 처음 이 아씨의 시중을 들게 되었을 때, 이 아씨는 종잡을 수 없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눈치를 살피고 의중을 알게 됐다. 표정은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 말뜻을 헤아리면서 아씨의 생각도 대강 알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경성에 올라온 후부터는 달랐다. 아씨와 차츰 호흡이 잘 맞게 된 것과 별개로 심중은 점점 더 헤아릴 수 없었다.
이를테면 아씨가 처음에 안 고친다고 했을 때, 죽을 사람만 치료만 한다는 건 짐작조차 못 했다. 도련님들에게 이 식당을 사들이라고 한 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위해서인지 도련님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 숙수를 위해서인지, 또 아니면 한 공자의 선의에 보답하기 위해서인지 알 길이 없다.
아씨가 지금 하는 말은 먼 훗날에야 어떤 일과 들어맞았다. 시녀는 말이 적으면 단순하다고 여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말이 적을수록 단순하지 않았다.
지금껏 아씨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고 차분히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노태야를 입에 올리다니, 혼자서는 해결 못 할 일이라도 만난 건가? 무슨 일이지? 시녀는 긴장되고 겁이 났다.
“네.”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정교랑과 시녀는 결국 태평거에 들어가는 대신 마차를 타고 성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마차는 옥대교 어귀에서 빌린 것이었다. 일찍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왔는데도 거리는 인파로 붐볐다.
“보수사 보름 법회네요. 아씨, 구경 가시겠습니까?”
빌린 마차의 마부가 묻자,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길을 가리켰다.
“보수사 북문으로 지나가요.”
그러면서 시녀는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구경하시겠어요?”
정교랑은 미동도 하지 않고 단정히 앉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평소에 편히 오는 게 나아요. 장터에서도 승려와 비구니가 생활비를 충당하려고 파는 물건이 대부분이고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누이가 잘 아네요.”
마부가 북적이는 인파 사이를 지나가며 덧붙였다.
“승려들이 예쁜 첩실까지 먹여 살려야 하니 시줏돈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그래도 감히 데리고 나오진 못하잖아요. 관부에서 잡아다 강제 노역을 시키니까.”
타지 말씨를 쓰면서 경성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터라 마부는 놀란 눈으로 시녀를 다시 훑어봤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데, 아내까지 들인 승려들한테 돈이 부족해야 얼마나 부족하겠습니까. 글을 배워서 경문을 읽을 줄 알았거나 언변이 좋았거나 차를 잘 우렸다면 나도 승려가 됐을 겁니다. 이렇게 고생하며 살지 않고.”
“경문을 읽고, 훌륭한 언변을 갖추고, 차를 잘 우리는 것 또한, 고생 없이, 거저 얻는 건 아니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마부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말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어서 벙어리인가 했는데, 말을 할 줄 알긴 아네.
“맞는 말씀입니다요. 뭐든 다 고생이죠. 그래도 그냥 마시는 차인데 보수사 대선사(大禪師: 승려의 법계 가운데 하나)가 우린 차는 한 잔에 2백 관이나 받으니 말입니다.”
마부가 웃으며 투덜거리자 정교랑이 대꾸했다.
“거기서 파는 건 차가 아니라 참선이니까요.”
마부가 혀를 낼름거렸다. 아씨가 워낙 진지한 통에 뭐라 받아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자 한 자 떼어 놓고 보면 못 알아들을 말이 없는데도 합치면 도통 이해가 안 갔다. 평범하게 쓰는 흔한 말이건만 듣다 보면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시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웃고는 휘장을 내린 후, 바깥 풍경을 손으로 짚어 가며 정교랑에게 설명했다. 보수사 북문을 지나 후문을 도는데도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금가아가 갖고 놀게 귀뚜라미를 사다 줘야겠어요.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내린 시녀는 마부더러 앞쪽 어귀에 마차를 세워 놓으라고 하고, 꽃과 새, 물고기, 곤충 등을 파는 노점으로 갔다. 노점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시녀가 돌아보자 청포를 입은 젊은 사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원조였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시녀를 살폈다.
“공자님, 시험을 마치셨겠네요. 시험은 어떠셨어요?”
시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아무래도 삼 년 후를 기약해야겠어.”
한원조가 웃었다.
“3월에 방이 붙으면 꼭 먼저 알려 주세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한원조는 잠자코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보수사에 향불 올리러 온 건가?”
한원조의 물음에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 아씨랑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아씨? 한원조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마차가 여러 대 세워져 있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임대 마차였고 표식을 단 고관대작이나 부잣집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공자님은 향불 올리러 오셨어요? 지금은 좀 늦은 거 아닌가요? 시험 전에 성현들께 향불을 올리셨어야죠.”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지만 경성으로 시험을 보러 온 서생들은 남몰래 혹은 대놓고 공자묘를 찾아가 참배하곤 했다. 나머지 수재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운이나 좋게 해 달라고 절 올리러 왔어. 이번에 시험 전에 장강주 선생의 수업을 들었다면 붙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이번 시험관이 한림학사 모순 대인인데, 장강주 선생과 동문이시거든.”
시녀가 한원조를 쳐다봤다.
“우리 노야…… 아니, 장강주 선생께서 수업을 여셨어요?”
시녀가 놀라며 물었다.
“응, 시험 전 보름 동안.”
동료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쉬운 듯 대답했다.
“아쉽게도 우리는 자리를 못 얻었지만.”
시녀가 아, 하고 대꾸한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서 일 봐. 우린 절 올리러 갈게.”
한원조의 말에 시녀가 얼른 예를 올렸다. 걸어가던 한원조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의도가 불순하다 여겨 뭐라 거절하고 안 만나 줄지 다 생각해 놨건만, 뜻밖에도 상대가 찾아오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이 먼저 나서서 인사를 했으니 말이다.
“공자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옹주께 고맙다고 전해 줘.”
한원조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 숙수가 찾아와 일자리를 찾았다고 하면서, 옹주께서 선심을 쓰셨다고 했거든.”
옹주? 시녀가 멈칫하며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한원조는 벌써 동료들과 함께 저만치 가고 있었다. 한원조는 곧 인파와 함께 후문을 통해 보수사로 들어갈 터였다. 어리둥절한 모습이던 시녀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옹주?”
시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귀뚜라미통 두 개를 들고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던 시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퍼뜩 깨달은 표정으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씨, 이제 알겠어요.”
시녀가 마차에 앉아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옆에 둔 귀뚜라미통을 보면서 메마르고 감정 없는 눈길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뭘 알아?”
정교랑이 물었다.
“이렇게 하시는 거 한 공자를 위해서죠?”
시녀가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불의를 위해 나섰던 그 정의감을 위해서요. 그 선의와 의협심을 위해서, 맞죠?”
남을 돕고자 한다면 앞으로 좋은 일이 줄줄이 생기도록, 먹고 입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이상으로 완벽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단순하고 화끈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누가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누가 남을 돕기 위해 이토록 공을 들일까.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하면서.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가서 하면 돼. 남이 이뤄 줄 필요는 없지. 남이 이뤄 준 건 남의 것일 뿐 그 사람 게 아니야.”
시녀는 멈칫했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앞에 하신 말씀이면 충분해요.”
당신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가서 해라. 당신이 좋아하는 거라면 당신 마음대로 다 해라. 난 그저 당신을 돕고 응원하겠다. 당신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당신이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당신이 계속 정의로운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던 시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달아올랐다. 살면서 이런 도의를 경험한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아씨.”
시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아씨를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저 입 안을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다시 태후 침궁에 들어섰을 때, 곁에는 한 사람이 늘어 있었다.
“형님.”
금빛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여섯 살 난 사내아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느껴져요?”
진안 군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사내아이를 쳐다봤다.
“뭐가요?”
“맛있는 냄새요.”
“전하, 먹을 것 좀 그만 생각하세요.”
진안 군왕이 하하 웃었다. 문밖에 있던 궁인이 맞이했다.
“이황자님, 군왕.”
궁인들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침궁에 있던 태후가 기뻐하며 손짓을 했다.
“마마, 무슨 맛있는 걸 드시기에 이렇게 냄새가 좋아요?”
이황자가 태후 앞에 앉으며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먹보, 그저 먹을 것만 밝히지. 네 부황이 알면 발전이 없다고 또 나무랄 게다.”
“마마, 전하께서 음식을 좋아하는 걸 보니 쑥쑥 크시려나 봅니다.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옆에 있던 진안 군왕이 웃었다. 진안 군왕 역시 무심결에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정말 좋네요. 어떤 맛있는 걸 드셨습니까?”
태후가 웃으며 궁인에게 눈짓을 했다.
“둘 다 먹보구나. 진씨 가문에서 보낸 튀긴 참새를 가져오너라.”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씨 가문이요?”
“진소의 집 말이다.”
“마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진 대인의 부친이 좋아지셨다죠?”
“그래.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강주에서 신의를 모셔 와서 며칠 만에 고쳤다더구나.”
어느새 궁인이 참새 두 접시를 가져와 이황자와 진안 군왕 앞에 차려 놓았다.
“대단하네요. 못 고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안 군왕이 물었다. 그런 일에 관심이 없는 이황자는 벌써 참새를 먹고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지 않느냐. 나무라자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편히 지내다 보니 태의들 실력도 퇴화한 것 같다.”
태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민간엔 정말 신의가 있는 모양이야.”
“마마, 맛있어요. 더 먹을래요.”
벌써 두 개를 먹은 이황자가 손에 기름기를 묻히고 말했다.
태후는 얼른 궁인을 시켜 닦아 주도록 했다.
“더 남았다. 진 부인이 숙수를 궁에 남겨 두고 갔어. 어전방 숙수가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 앞으로는 너희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먹을 수 있을 게야.”
“아, 저도 봤습니다. 진 부인이 숙수를 데려왔군요. 찬모도 데려오고요.”
진안 군왕이 참새를 들고 먹으며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자 태후가 웃었다.
“아니다. 그 애는 진 부인의 여식이야.”
태후가 웃으며 옆에 있던 궁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랬지? 옷차림이 아주 독특하더구나. 얼굴도 예쁘장하고.”
“이름은 ‘소’고, 집에서 열여덟째라고 합니다. 올해 열네 살이고요.”
궁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궁인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입을 닦았다.
진소, 진십팔랑이라?
잠시 한담을 나눈 진안 군왕은 태후의 침궁에서 태교 중인 현비를 생각해 이황자에게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모후께서 전하의 공부 내용을 물으실 겁니다.”
진안 군왕의 말에 이황자는 시무룩해졌다.
“마마.”
이황자가 태후를 보며 몸을 배배 꼬았다.
“착하지, 어서 가거라. 황후가 다 널 위해 그러는 거야. 스승님께 열심히 배우라고.”
태후가 웃었다.
“온 김에 참새를 싸 가세요. 마마 덕에 인심 좀 쓰면 좋죠.”
진안 군왕의 말에 이황자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도 웃으며 궁인에게 싸 주라고 명한 후, 자애로운 미소로 진안 군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 보거라. 이황자는 아직 어리니 네가 잘 돌봐 주고. 나중에 너와 대황자 모두 출궁하면 외로울 게야.”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괜한 걱정이세요, 마마. 곧 아우가 생기지 않습니까.”
태후가 활짝 웃었다.
“그래, 네 상서로운 말대로 됐으면 좋겠구나. 현비에게 가서 전하거라. 군왕이 함께 놀 아우를 기다리고 있다고.”
웃으며 말을 전하러 갔던 궁인이 금은보화가 담긴 함을 들고 왔다.
“현비마마께서 군왕께 상으로 내리신답니다.”
“감사합니다, 마마.”
진안 군왕은 웃으며 함을 받고 태후를 보고 말을 이었다.
“마마, 현비마마께선 이런 걸 주시네요.”
태후가 멈칫했다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얌체 같은 것, 또 본궁의 주머니를 탐내지?”
태후가 궁인에게 눈짓했다.
“상을 내려라.”
진안 군왕은 이황자를 황후에게 데려다준 후에야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는 태후와 함께 지냈지만 장성한 후부터는 내외하기 위해 궁의 가장 서쪽으로 옮겨온 터였다.
진안 군왕의 거처는 정무를 보는 곳과 가깝고 후궁에서는 먼 곳이었다. 본디 태조 황제의 서재였는데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하고 쭉 비워 뒀다가 진안 군왕에게 하사하면서 다시 사람이 살게 됐다. 여러 해를 거치면서 나무가 우거진 탓에 겨울에는 그나마 낫지만 여름에는 빽빽한 초목이 하늘을 가리고 해를 가려 적막해 보이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진안 군왕은 상으로 받은 두 함을 병풍 앞에 내려놓고 조용히 쳐다보다가 돌연 다가가 손으로 쳐 엎어 버렸다.
“전하.”
내시가 놀라 부르며 급히 문을 가리고 조심스레 좌우를 살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아무도 없다. 놀라는 꼴 하고는.”
“군왕, 놀라게 이러지 마십시오.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방심하시면 안 돼요.”
내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편히 말했다. 말투를 듣자니 군왕과 퍽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진안 군왕이 옷을 털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알았으니 물러가라.”
진안 군왕이 바닥에 흩어진 보물로 손을 뻗었다. 팔걸이 책상에 몸을 기댄 진안 군왕은 비스듬히 기대앉아 보물들을 하나씩 건들건들 들어 올리며 미소를 머금고 쳐다봤다.
내시는 네 하고 대답한 후 문을 닫고 나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문과 창문의 격자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대청에 자리를 깔고 앉은 소년의 몸에 얼룩이 졌다.
2월 말의 이른 새벽,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안개가 걷히기 전인데도 주씨 저택의 연무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주씨 가문의 모든 사내들은 무예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는 주씨 가문뿐 아니라 모든 무장 가문의 전통으로, 이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단련했다.
지천명이 가까워지는 주 노야는 반팔 차림으로 긴 창을 들고나와 날렵하고 화려한 몸놀림을 구사했다. 맞은편에서 응수하는 주육낭은 웃통을 벗은 채 은창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형이나 아우들도 옆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초봄의 기운 속에서 다들 웃통을 벗은 채 땀을 비 오듯 흘렸다.
탄성 소리와 함께 주육낭이 들고 있던 창이 허공을 갈랐다. 주육낭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육낭, 아직 멀었구나.”
주 노야는 껄껄 웃으며 손에 든 장창을 바닥에 꽂았다.
“그래도 잘했다. 내가 너만 할 땐 네 할아버님의 창에 번번이 걸려 쓰러졌어.”
부자 대결이 끝나자 다른 형제들도 각기 승부를 가른 다음, 차례로 활시위를 몇 번씩 당기면서 새벽 단련을 끝냈다. 연무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사환들이 우르르 달려와 윗전의 땀을 닦아 주고 옷을 챙겨 주었다. 주육낭은 홀로 사슬에 묶인 돌을 몇 번 더 던진 후에야 수련을 끝내고 걸어 나왔다.
사내들이 새벽 단련을 마치자 곧 주씨 가문의 아침 식사 시간이 시작됐다. 주 노야와 관직에 나간 두 아들은 식사를 마친 후 관청으로 출근하고, 나머지 자녀들은 각자 흩어졌다.
“육낭, 오늘 우리랑 보수사에 가자.”
자매들이 주육낭을 불렀다.
“안 갈래. 그렇게 번잡한 곳 딱 질색이야.”
주육낭은 딱 잘라 거절했다.
“됐거든요?”
여동생 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바보가 가자고 하면 분명 갈 거면서.”
“여섯째 아우는 그 애랑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그 애를 감시하는 거야. 도망칠까 봐.”
다른 자매가 웃으며 대꾸했다.
“도망을 친다고? 집에 들러붙어 절대 안 가려 들걸.”
자매들이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데, 누군가가 말을 잘랐다.
“쉿, 쉿, 조용히 해. 진씨 가문 낭자가 왔어.”
다들 걸음을 멈추고, 여종이 한 여인을 안내해 걸어오는 모습을 쳐다봤다. 자매들은 걸음만 멈췄지만, 앞서 걸어가던 주육낭은 몸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진 낭자와 여종이 지나갔다. 이쪽의 자매들도 인사를 건네지 않고 저쪽의 진 낭자도 예를 표하지 않은 채로 양측은 서로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문신 집안 낭자들은 본디 무장 가문과 왕래가 적었고, 주씨 자매들도 굳이 인사치레를 하려 들지 않았다.
“진 낭자가 저 애랑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네.”
자매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예 말을 안 할 수도 있지.”
다른 하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진십팔랑이 마당 문 안으로 들어섰다. 여종은 안에 통보만 하고 곧장 가 버렸다. 진십팔랑 역시 누가 나와 맞이하길 기다리지 않고 곧장 층계를 올랐다. 옆에 있는 측실 문 앞에 서자 두 시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측실은 소박하게 꾸며 놓은 서재였다. 숯이 활활 타고 있는 화로 두 개가 초봄의 한기를 쫓아 주었다. 서재에는 좌우 양쪽으로 낮은 탁자 두 개가 놓여 있고, 지필묵 외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솜옷 위에 걸치는 덧옷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 진십팔랑은 자신의 자리인 왼쪽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십팔랑은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펼쳐 놓고 돌로 만든 서진으로 잘 눌러 놓은 다음 몸을 살짝 틀어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을 다 갈았을 무렵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문이 열렸다. 버선만 신은 발이 먼저 안으로 들어왔고, 이어 사람 전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말도 없고 인사도 없이 고개만 살짝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교랑은 한쪽 옆에 앉아 진십팔랑이 먹을 갈고 붓을 들기를 기다렸다. 진십팔랑이 글씨 한 장을 썼다.
정교랑이 붓을 들자 진십팔랑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정교랑이 붓을 쥐고 손을 놀리는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을 진지하게 관찰했다. 글씨를 쓰고 난 정교랑이 진십팔랑에게 종이를 건네자 진십팔랑이 받아 탁자 위에 놓고 모사를 시작했다. 정교랑은 홀로 글씨 연습을 하다가 잠시 후 몸을 돌려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팔이 너무 높아요.”
정교랑은 이따금 한두 마디 하면서 진십팔랑의 자세나 붓놀림을 교정해 주었다. 한 시진이 지나자 시녀가 물 한 잔과 차 한 잔을 들여왔다. 오늘 글씨 연습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차를 마신 진십팔랑이 옆에 있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낭자, 차를 안 좋아해요?”
처음 만난 이후로 매번 볼 때마다 이 여인은 물만 마실 뿐 차를 마시지 않았다.
“아니요.”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여기 차는 내 입맛에 안 맞아요.”
진십팔랑은 다소 의아해하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찻잔을 쳐다봤다.
돈이 많은 주씨 가문은 보수사 승려가 파는 다병(茶甁)을 샀는데 이는 현재 경성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싼 것이었다. 또 경성에서 돈이 있는 가문은 물도 경성 밖 낙매산(落梅山)에서 길어온 샘물에 소금과 육두구를 섞어 썼다. 그러다 보니 차를 우리는 몸종의 솜씨가 평범해도 맛은 일품이었다.
입에 안 맞는다? 남북의 차이 때문인가?
“우리 집은 남방의 복주와 항주에서도 차를 가져와요. 인편에 보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만 저희 아씨는 댁에서도 차를 안 드셨어요. 지금의 차를 안 좋아하세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의 차를 안 좋아한다? 그럼 예전 걸 좋아한단 건가? 아니면 이후의 것? 진십팔랑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조용히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다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은 진십팔랑은 인사를 표하고 물러났다. 이제 정교랑이 낮잠을 잘 시간이었다.
정교랑의 시녀가 또다시 마차를 타고 외출한다는 전갈에 주 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허구한 날 밖으로 나도니 여자애가 아주 낯도 두껍네요.”
주 부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목이 따끔거렸다. 간신히 잠잠해졌던 기침이 또 올라왔다.
“그렇게 밖에 있는 게 좋다니 밖에 집을 마련해 줘요. 그래야 죽을 사람 둘러업고 우리 집으로 달려오는 일도 없죠. 재수가 없어서 원.”
거기까지 말한 주 부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진씨 가문에서 그 애한테 집을 내주지 않았어요?”
주 노야가 인상을 쓰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당초 거기 가서 살겠다는 걸 우리가 못 가게 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내쫓는단 말이오? 밖에 나가고 싶다면 나가게 두지, 그게 뭐라고.”
“그건 아니죠. 남들은 그 애만 보는 게 아니에요. 우리 주씨 가문이 여식을 제대로 못 가르쳤다는 말이 돌면, 괜히 우리 딸들까지 피해를 본다니까요.”
주 부인이 인상을 썼다.
“우리 딸들도 시집을 가야 하는데.”
“그래도 내쫓는 건 보기 안 좋소.”
“뭐가 안 좋아요? 그냥 내팽개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인들과 여종, 몸종을 여럿 딸려 보내면 되죠.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니 언제든 금방 다녀올 수도 있고요. 그 집은 위치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어디 나갈 때도 편해요. 서로 싸울 일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으니…….”
“잠깐.”
주 노야가 말을 끊고 물었다.
“그 애를 보내겠다는 거요? 아니면 우리가 이사를 나가겠단 거요?”
주 부인이 주 노야를 노려보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그 앨 평생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 애 것이 곧 우리 것 아니에요?”
“알았소, 생각해 보리다.”
주 부인은 주 노야를 채근하는 대신 여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애들이 또 어딜 나가려는 거지? 육낭은 안 따라가고?”
“그 몸종만 나갔어요.”
“시골 계집이 싸돌아다니긴, 길도 잘 모르면서. 유괴나 안 당하게 조심할 것이지.”
주 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유괴나 당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계집이다.
시녀는 보수사 밖에 마차를 세운 후 홀로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북적이는 인파를 지나 곧장 후문으로 간 시녀는 능숙하게 길을 찾아갔다. 시녀가 어느 집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조금 열리더니 노인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늘 읊던 인사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명첩을 주시면 소인이 대신 받아 놓겠습니다. 저희 노야께서는 지금 손님을 안 만나시니 며칠 후에 다시 오시지요.”
주절주절 읊조리던 노인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소심!”
“아저씨.”
늙은 문지기가 문을 활짝 열고 흥분하여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시녀를 살폈다.
시녀는 본디 물건과도 같아 내키는 대로 교환하고 증여하는 일이 흔했지만, 오래 함께 지내다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었다. 윗전의 결정을 놓고 가타부타하는 이는 없어도 하인들끼리 있을 땐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심은 어느 집으로 갔으려나, 잘 지내나 모르겠네. 멀리 떨어져 있으니 평생 다시 보긴 힘들겠지.
그런데, 그 소심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소심, 너 설마, 도망쳐 나온 건 아니지?”
문지기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무거운 표정으로 소심의 뒤쪽을 살폈다. 마차도 없이 홀로 찾아온 걸 보면, 아무래도…….
“아저씨,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저 경성 온 지 좀 됐어요. 오늘은 윗전의 명으로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나 보러 온 거고요.”
소식은 금세 전해졌다. 안으로 들어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심!”
몸종 하나가 안에서 달려 나왔다. 몸종은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을 반짝였다.
“아씨께서 돌아오셨구나! 아씨도 오셨어?”
단정히 꿇어앉은 시녀가 중앙에 앉은 노인에게 절을 올렸다.
“그래, 그래.”
장 노태야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어서 일어나거라.”
옆에 있는 몸종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씨께선 언제 경성에 오신 거야? 왜 경성으로 왔어? 노야께서 쫓아내신 거야?”
몸종이 눈물을 펑펑 쏟자 시녀와 장 노태야가 웃었다.
“반근, 너희 아씨를 너무 얕잡아보는구나. 누가 너희 아씨를 내쫓을 수 있단 말이냐?”
장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왔으면서 왜 날 안 찾아왔어?”
몸종이 울며 물었다.
“이렇게 왔잖아.”
시녀가 웃으며 몸종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반근, 울지 마. 사정을 아는 사람은 네가 옛 주인이 그리워 이러는 걸 알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노태야께서 널 괴롭히시는 줄 알아.”
장 노태야는 허허 웃음을 터뜨리며 소심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아, 날 띄워줄 것 없다.”
몸종도 정신을 수습하고 얼른 눈물을 닦았다.
“노태야, 추태를 보였네요.”
몸종은 목멘 목소리로 노태야를 향해 예를 올리고, 이어 시녀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역시 언니가 똑똑하고 말도 잘하네. 난 아둔해.”
시녀가 헤헤 웃었다.
“걱정 마. 명석하신 노태야 앞에선 우리 모두 같은 처지야.”
장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너희 아씨 앞에서도 이렇게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느냐?”
“저희 아씨도 명석하세요. 저도 아씨 앞에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걸요.”
시녀가 한숨 쉬는 시늉을 하자 몸종도 함께 웃었다.
“그래, 새 주인은 그만 치켜세워라.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온 거야? 언제 왔어?”
“연말에 왔어요. 지금은 아씨의 외조모님 댁에서 지내고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하자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잘 지내셔?”
몸종이 물었다.
“잘 지내시지.”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남이 잘 대해 주든 말든 아씨는 잘 지내실 수 있어.”
잘 못 지내신단 말이네. 집에서도 사람을 내팽개쳐 둔 채 혼수만 놓고 다퉜으니. 사람을 데려와 놓고 춥지 않고 배곯지 않게만 하면 다인가. 개나 고양이는 따뜻하고 배만 안 곯아도 잘 지낸다지만, 어쨌거나 사람은 개나 고양이와 다르지 않은가.
몸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집안에 바보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온 가족의 수치였다. 열에 아홉은 갓난아이일 때 익사시키는 길을 택했다. 익사로 죽지 않은 갓난아이는 오점과도 같아서, 두 집안 사람들의 몸에 딱 달라붙어 수시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러는 동안 뼛속 깊이 혐오가 스미다 보니 두 집안 모두 아이에 관해서라면 진저리를 쳤다.
“세속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의연해질 수 있고, 바라는 바가 없으면 모든 게 해결되느니라.”
장 노태야가 몸종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 아씨는 아무 일 없으니 괜히 걱정할 것 없다.”
몸종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래, 난 이만 가야겠다.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는지 보고 오라고 보내신 건데 너무 오래 머물렀네.”
몸종은 못내 아쉬운 듯 무언가 더 물어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장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더 붙잡거나 캐묻지 않았다.
“그래, 가 보거라.”
시녀는 예를 표하고 일어난 후 몸종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몸종은 못내 아쉬워하며 시녀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그만 보거라. 금방 볼 수 있을 게야. 그동안 네 아씨에게 무슨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지나 생각해. 아씨한테 보여 줘야지. 아씨를 떠난 후 네 솜씨가 이만큼 늘었는데 후회하는지는 않는지.”
몸종이 기뻐하며 웃었다.
“노태야, 제 솜씨가 아무리 많이 늘었어도 아씨한테 배운 거예요. 아씨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네 아씨가 최고고 천하제일이야. 견줄 자가 없단다.”
장 노태야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몸종 역시 생긋 웃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주씨 저택.
빨랫감이 담긴 통 두 개를 허드렛일을 하는 몸종 두 명이 힘겹게 옮기고 있었다.
“언니, 힘든데 좀 쉬었다 하자.”
반근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무 막대에 걸린 두 나무통은 명백히 반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뒤에 있던 몸종은 심드렁하게 몸을 굽히며 나무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이쪽 길로 가? 먼 길을 돌아가려니 힘들어 죽겠네.”
반근은 웃으며 고생했다고 하고 무심결에 옆쪽 집을 쳐다봤다. 열린 마당 문 사이로 몸종 몇 명이 모여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모든 습관이 그대로였다. 곁에 있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반근 언니.”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 반근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고운 자태의 시녀가 걸어오자 옆에서 지나가던 몸종들과 여종들이 웃으며 인사했다. 반근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나무 막대를 들어 올렸다.
“어서 가자, 어서. 늦으면 양 어멈한테 또 혼나.”
다른 몸종이 심드렁하게 막대를 들어 올렸다. 앞쪽의 반근이 하도 급하게 걷는 바람에 몸종이 비틀거렸다.
“야, 천천히 가. 급하면서 괜히 길을 돌아가자고 해서는.”
몸종이 투덜거리며 따라갔다.
세탁방 안.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던 여종들은 반근과 몸종이 다가오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에 놓인 나무 함지를 반사적으로 가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여종들이 인상을 썼다.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다 이제야 와?”
여종이 무거운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반근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몸종이 어깨를 주무르며 불평을 쏟아냈다.
“쟤 때문이에요. 쟤가 꾸물거려서 오래 걸렸어요.”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나무통을 수조 앞으로 옮겼다.
“알았으니 넌 이만 가서 쉬어.”
여종이 몸종을 노려보며 말했다. 몸종은 신이 나서 고맙다고 인사한 후 뒤돌아 뛰어갔다. 여종이 수조 앞으로 옷을 꺼내놓는 반근을 쳐다봤다.
“넌 방에 있는 옷 챙겨 나와.”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하고 젖은 손을 몸에 쓱쓱 문지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은 다른 여종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어쩌지?”
여종은 고개를 숙이며 앞에 있는 나무 함지를 쳐다봤다. 나무 함지에 담긴 치마 두 벌에 얼룩덜룩 물이 들어 있었다.
“부인께서 제일 아끼시는 치마야.”
다른 여종이 말했다.
“누가 나서서 잘못을 책임져야 해.”
그 말에 다들 눈을 피했다.
“보아는 어렵사리 부인을 모시게 됐고, 그 어미는 새로 부엌일을 맡게 됐어. 그 애 동생이 조 집사의 부인과 가깝기도 하고. 이번에 보아를 감싸주지 않으면 그 애가 벌 한 번 받는다고 다가 아니야. 일가족이 두고두고 벼를걸.”
“그럼 어떡해? 우리가 책임질 순 없는 노릇이잖아.”
“다른 사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 세탁방 식구들만 해도 따지고 보면 이리저리 안 얽힌 사람 있어?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누구는 저래서 안 되고 다 어렵지.”
여종들은 일순 침묵에 빠졌다. 그때 누군가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방 쪽을 쳐다봤다.
“적당한 사람이 하나 있긴 하네.”
다들 멈칫하여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작고 왜소한 형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보따리를 안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어둠이 내리고 태평거 안은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지만 대청에 손님이라곤 없었다. 계산대에 기대앉은 두 사내는 밖에서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등롱을 멍하니 바라봤다. 멀지 않은 도로에서는 이따금 마차가 지나갔다.
“아무도 안 오려나 보네.”
사내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문 닫읍시다.”
“밤샘 영업을 해야지. 손님 오시면 어쩌려고.”
“여긴 경성으로 가는 길목이에요. 경성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인데 성문이 닫혔잖아요. 오밤중에 누가 또 오겠습니까.”
먼저 말했던 사내가 대꾸했다. 두 사내가 실랑이를 벌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셋째 형님.”
사내들이 부르는 소리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닫자.”
두 사내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일어나 불을 끄고 문단속을 했다. 서무수는 옆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이대작과 노인 하나가 일어나 맞이했다. 자리에 앉은 서무수는 장부를 펼쳐놓은 범강림을 쳐다보며 물었다.
“매일 정산해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범강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이대작이 불안해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어른, 이제 막 개업했으니, 아직은, 장사가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이대작이 말을 더듬었다.
“입소문이 나야죠. 취봉루도 오랜 시간을 들여 단골을 모았어요.”
노인이 말했다. 이대작이 소개한 옛 관리인이었다.
“오(吳) 관리인, 주인어른의 말씀부터 들어보죠.”
이대작이 나지막이 부르며 눈짓을 했다. 취봉루 얘기 좀 그만하라고.
노인의 장점은 경험이 많다는 것이고 단점은 늘 과거만을 얘기한다는 것이었다. 옛 주인과 비교하길 좋아하고.
서무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관리인의 말이 맞소. 차차 입소문을 내면 되겠지.”
오 관리인이 하하 웃었다.
“주인어른이 잘 아시는군요. 당초에…….”
오 관리인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대작이 옆에서 쿡 쑤시자 취봉루 얘기를 접어 두기로 했다. 범강림과 서무수는 못 본 체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대낭도 오랫동안 음식을 만들어 요리는 문제가 없는데, 신선거가 워낙 인기 있어서 말입니다. 여기 사람들을 다 데려갔어요. 그러니 명성은 차차 쌓아야죠.”
오 관리인의 말에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꽤 됐군. 그만들 가서 쉬시오. 매일 걱정이 많구려.”
이대작과 오 관리인이 자리를 떴다.
“저들이 우리보다 더 걱정이구나. 장사를 접을까 봐 그러겠지.”
범강림이 웃었다.
“그래서 그리 걱정하는군요.”
서무수가 장부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 상태로면 확실히 계속 장사하긴 힘들겠소.”
“입소문이 중요해. 입소문이 안 나면 누이한테 도움도 안 되잖아. 장사까지 맡겼는데 면목이 없네.”
서무수가 잠시 침묵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형님, 사실 누이는 우리한테 도움 받을 생각 없을 겁니다. 누이가 우릴 돕는 거죠. 우리한테 고마운 일이고.”
“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싸우는 거 말고는 도움 될 게 뭐 있겠느냐.”
범강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다, 우리는 싸움도 잘 못 하지.”
“우리가 누이를 돕는 길은 조용히 이 점포를 지켜 주는 것뿐이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얌전히 주인 노릇을 하는 겁니다. 억지로 뭘 하려고 근심할 필요 없소. 그러다 오히려 누이한테 폐만 끼칠 테니까.”
범강림이 웃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우린 누이를 위해 이 가게를 잘 지키기만 하면 돼. 지금은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나중에 입소문이 나면 못된 놈들이 와서 시비를 걸 거야. 그럴수록 우리가 잘 지켜야지.”
하지만 나쁜 놈들이 와서 시비를 거는 날이 오기나 할지, 그런 날이 오더라도 이들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주씨 가문 하인들은 벌써 분주했다. 세탁방 하인들의 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건 반근이었고, 가장 늦게 나가는 것 역시 반근이었다.
반근은 방 안에 있는 화로부터 살피고 다른 몸종들이 여기저기 내던지고 나간 빗이며 거울 등을 잘 정리한 후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야 밥 먹는 곳으로 갔다.
다른 이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각자 일하러 갔을 시간이었다. 밥이 담긴 나무통은 아직 남아 있었고, 한쪽 옆에는 그릇이며 젓가락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반근은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고르고 나무통에 남은 음식을 퍼담아 급하게 한술 떴다. 식사를 마친 반근은 다른 사람이 먹고 나서 쌓아 둔 그릇이며 젓가락을 정리해 부엌으로 가져다주었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습관이 됐기에 작고 왜소한 몸으로 빈 그릇이 담긴 광주리를 들고 일어서면서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다. 반근은 차 두 잔 마실 정도의 시간 안에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일하러 나가곤 했다.
막 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반근!”
반근은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손에 든 광주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반근의 품삯으로는 배상하기 힘든 액수였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언니, 무슨 일이야?”
반근은 세탁방 수조 근처에 선 두 몸종을 보며 물었다. 몸종 하나가 분노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어제 네가 치마를 물에 담갔지?”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탁방의 일 대부분은 반근의 몫이었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좀 봐!”
다른 몸종이 수조에서 건져 올린 옷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반근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벽빛 속에 얼룩덜룩 물이 든 치마가 보였다. 반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반근은 차디찬 물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벌을 더 건져 올렸다. 무지 치마에 얼룩덜룩 물이 들어 있었다.
“이건 부인께서 가장 아끼시는 치마라 따로 빨아야 해. 너 같은 천것이 감히 이 옷에 손을 대?”
먼저 말했던 몸종이 따귀를 후려치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따귀를 맞은 반근은 바닥으로 쓰러졌고, 손에 움켜쥐고 있던 치마와 함께 넘어지면서 옷까지 젖게 됐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큰일 났어요, 큰일!”
몸종들의 외침이 귓가에 어지러이 울리고, 달려오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반근은 땅바닥에 앉아 손에 든 치마를 이리저리 잡아당겨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얼룩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세탁방 마당에 선 사람들이 방 안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강 어멈은 손에 들고 있던 치마를 바닥으로 내던진 후, 무릎을 꿇고 앉은 반근을 무거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떻게 된 일이냐?”
옆에 있던 여종이 먼저 나섰다.
“강 어멈, 이건 저희 세탁방의 잘못입니다.”
여종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너희 잘못이지, 그럼 우리 잘못이란 말이냐?”
강 어멈이 호통을 치자 옆에 있던 여종은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부인께 숨길 수 없는 일이다. 뭐라고 말씀드릴지 잘 생각해라.”
강 어멈이 쌀쌀맞게 말하고 나가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 나갔다. 여종 둘이 반근을 데리고 따라 나갔다.
가는 길에 쳐다보는 이목이 많았지만, 반근의 귀에는 뭐라 떠드는지 들리지 않았다. 반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뭐라고 말하지? 뭐라고 해? 잘못했을 땐, 뭐라고 해야 했더라?
그때 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소인이 어떻게 해야 했는데요?
말해야지.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저 사람들이 와서, 날 부르도록.
어째서요? 그래도 어떻게 아씨한테로 미뤄요?
왜냐하면, 난 네 아씨니까.
지난번에 잘못했을 때 아씨께서 가르쳐 주셨다. 아씨의 가르침이 떠올랐지만 더 이상 기댈 아씨가 없었다.
날이 밝을 무렵 장씨 저택의 몸종은 벌써 몇 번이나 나와 대문 앞을 두리번거렸다.
“반근, 대체 뭘 기다리는 거야?”
늙은 문지기가 궁금한 듯 물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몸종은 긴장과 불안, 흥분이 섞인 표정이었다.
“아직 날이 차다. 들어가 있어. 누가 오거든 알려 줄게.”
늙은 문지기가 웃으며 말하자 몸종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반근 언니.”
뒤에서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몸종이 돌아보니 시녀 둘이 웃으며 다가와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장 부인을 모시는 두 시녀였다. 시녀들은 웃으며 예를 표했다.
“시간 괜찮아?”
몸종은 노태야의 시중을 드는 찬모일 뿐 장씨 저택의 찬모는 아니었다. 장 노태야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명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몸종이 웃으며 물었다. 완곡한 거절의 뜻이었지만 두 시녀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더욱 다정하게 애걸하다시피 했다.
“착한 언니야, 어제 노태야께서 드신 탕이 부인 입맛에 맞으셨나 봐. 한가할 때 한 그릇 더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몸종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대문 쪽을 쳐다봤다.
“할 일이 있으면 우리한테 시켜.”
두 시녀가 얼른 말했다.
“아냐, 아냐. 이렇게 하자. 좀 이따 노태야께 간식을 만들어 드릴 건데, 그때 부인께 올릴 탕도 끓일게.”
두 시녀는 환히 웃으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수고 좀 해 줘, 언니. 우리가 뭐 도울 거 있으면 말만 하고.”
몸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만들다가 뭐가 잘못됐는지 노태야께서 안 좋아하신 간식이 몇 접시 남았는데, 그냥 버리긴 아깝더라고. 먹는 것 좀 도와줄래?”
몸종이 웃으며 물었다. 몸종은 이제 더 이상 정씨 가문의 그 지극히 평범하고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시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면 모두가 경청했고 그녀가 웃으면 다들 따라 웃었다. 예전엔 윗전을 모시는 몸종들이 어찌나 그렇게 말을 잘하고 영리한지 부럽기만 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편하고 쉬운 일이었다.
두 시녀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잘못 만들었다고? 노태야께서 안 좋아하시는 건 노태야의 입맛이 까다로워서지 이 몸종이 잘못 만들어서가 아니다. 집에서도 노태야의 찬모가 만든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반근 언니, 좋은 비단실이 있는데 치마 만들어 줄까?”
“반근 언니, 듣자니 집으로 물건을 보내고 싶어 한다며. 우리 오라버니가 마침 남쪽에 갈 일 있는데 그 편에 보내.”
두 시녀는 몸종의 팔을 잡아끌며 환히 웃었다. 몸종과 시녀들이 웃고 떠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시녀는 아침 식사를 마친 정교랑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시녀가 작은 은빗을 꽂아 주었다.
“다 됐어요. 예쁘네요.”
시녀가 꼼꼼히 살펴보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
“아씨를 제대로 못 모셨다고 반근이 절 원망하진 않겠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넌, 이름이 뭐니?”
시녀는 멈칫하여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소인은 반근이잖아요.”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씨, 왜 기억을 못 하세요?”
정교랑은 말없이 시녀를 힐끔 쳐다본 후 걸음을 내디뎠다. 시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토닥였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아씨께서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놀라 식은땀이 다 났다고 하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녀는 또다시 멈칫했다. 왜 이렇게 겁이 나는 거지? 왜 이렇게 아씨의 질문 한마디에 가슴이 쿵쾅대는 걸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려나?
이미 문을 나서고 있는 정교랑을 보며 시녀는 불현듯 나가기 싫어졌다.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만 같았다. 시녀는 아씨의 바로 앞에 걷거나 바짝 뒤따라 걷지 않고 처음으로 아씨를 쳐다봤다. 아씨의 걸음은 느렸지만 한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아씨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뒤따라갔다.
중문 밖에는 벌써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마차에 오를 무렵 주육낭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손에는 삼 척 길이의 반곡궁(反曲弓: 뒤로 휘어진 활)을 들고 있고 이마에는 아직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지금 나가겠다고?”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묻자 시녀가 힐끔 보고 웃으며 물었다.
“공자님, 저희를 데려다주시려고요?”
주육낭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여인은 누가 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또 어딜 가려고?”
주육낭이 이를 악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밥 먹으러, 가요.”
밥 먹으러! 이 여인이 좋아하는 그 밥을 사 주러 멀리 나간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숙수 앞에서 현란한 솜씨를 선보이는 바람에 관우 앞에서 칼을 휘두른 격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굳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예전 일을 들어 비꼬려는 게 틀림없었다. 주육낭은 이를 갈며 정교랑을 노려보다가 반곡궁을 어깨에 메고 정교랑을 지나 성큼성큼 가 버렸다.
오시(午時) 무렵은 주 부인이 집안일을 챙겨 묻는 시간이라 마당에 여종들이 모여 있었다.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문밖에 있던 시녀들이 얼른 문을 열었다. 여종들이 줄줄이 나왔다.
“인신매매 업자를 불러라.”
우두머리인 여종이 말했다. 마당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은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뭐라고? 팔아 버리겠단 거야?
“어멈, 어멈.”
놀란 반근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제가 잘못했어요. 절 때려도 좋고 욕하셔도 좋으니 제발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내쫓지 마세요.”
우두머리인 여종은 성가신 눈치였다. 다른 누군가가 얼른 손짓하자 여종 둘이 달려들어 반근을 붙잡았다.
“부인, 부인, 제가 잘못했어요. 때리고 욕하고 벌하셔도 달게 받을게요. 제발 팔지 마세요. 내쫓지 말아 주세요. 전 가기 싫어요.”
반근은 힘껏 발버둥 치며 여종들을 뿌리치고 대청 쪽으로 달려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부인은 몸이 안 좋으시다!”
회랑 아래에 있던 여종이 매몰차게 소리쳤다.
“이런 사소한 일로 어찌 부인을 놀라시게 해!”
마당에 있던 여종들은 얼른 달려들어 반근을 붙잡더니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입에 재갈을 물린 후 끌어냈다. 난 가기 싫어, 가기 싫단 말이야! 반근은 발버둥을 치며 점점 멀어지는 대청의 문을 바라봤다. 손을 뻗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눈물이 차올라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
같은 시각, 장씨 저택 안.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소심!”
늙은 문지기가 문을 열며 큰 소리로 부르자 소심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저씨, 저 이제 소심 아니에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시녀는 소리를 죽여 말하고는 겁이 나는 듯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마차는 조용했다. 시녀의 이름은 대부분 주인이 지어 주는데, 주인마다 취향이 달랐으므로 이름을 바꾸는 것 또한 흔한 일이었다. 늙은 문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데?”
“반근이요.”
“반근?”
늙은 문지기는 멈칫했다.
“반근을 찾아왔다고? 아니면 네 이름이 반근이라고?”
그러더니 퍼뜩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참. 노태야께서 너희를 교환했다고 하셨지. 이제 보니 반근이 기다리던 게 네 주인이었구나. 그랬던 거였어. 자, 어서 들어와.”
늙은 문지기가 뒤에 있던 사환에게 소리쳤다.
“반근이 아침나절 내내 기다렸다. 어서 가서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고 해라.”
사환이 네 하고 대답한 후 뛰어갔다. 시녀는 난감했지만 똑 부러지게 설명하긴 힘들었다. 아예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아저씨, 노태야께 알리세요. 저희 아씨께서 오셨다고요.”
시녀는 그 말만 남긴 후 서둘러 마차로 돌아갔다.
알리라니, 노태야께서 만나 줄지 안 만나 줄지도 모르는데 아주 단정을 지어 말하네? 늙은 문지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시녀가 시킨 대로 말을 전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녀가 두봉를 걸치고 두모를 쓴 여인을 부축해 마차에서 막 내리자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뛰다시피 걸어오던 몸종은 막상 문가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췄다. 이미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 아씨, 노태야께서 안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노태야의 곁에서 손님 접대를 맡고 있는 여종이 웃으며 공손하게 맞이했다. 몸종은 그들의 뒤에서 서서, 시녀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을 쳐다봤다. 두봉으로 전신을 감싼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몸종은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몸종은 아씨를 처음 만나던 때를 떠올렸다. 아씨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침상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몸종이 자신의 아둔함을 자책하자 아씨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몸종이 도관으로 함께 가겠다고 말하던 때도 기억났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냐.
그때 아씨는 그렇게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냥 무심코 한 말이 아니었다. 아씨는 자신이 말한 걸 실제로 이뤘다. 몸종이 아둔하다는 말을 안 들을 정도로 훌륭한 손재주를 가르쳐 줬고, 먹고 입을 것을 줬으며, 명성과 지위를 얻게 해 줬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게 해 준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아씨.”
마침내 소리쳐 부르며 달려나간 몸종은 절을 올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대문 앞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장씨 저택은 크기가 자그마했다. 울음소리는 곧 담을 넘어 장순의 서재까지 들렸다.
“무슨 일이냐?”
경서를 연구 중이던 장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에는 여종과 몸종이 많지 않았고, 다들 너그럽고 상냥한 성격이라 울음소리는 고사하고 사소한 말다툼조차 거의 없는 집이었다. 장순은 사람을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곧 울음소리가 그쳤다. 장순은 고개를 내저으며 계속해서 공부에 몰두했다.
장 노태야의 대청 안.
정교랑은 두봉과 두모를 벗고 단정히 꿇어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별고 없으셨는지요.”
정교랑이 예를 올렸다. 상석에 앉은 장 노태야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했다.
“낭자, 별고 없으셨소?”
양쪽이 자리에 앉자 문밖에 있던 장씨 가문 몸종이 차를 올렸다.
“우리 아씨는 물을 드세요.”
문가 좌우에 꿇어앉아 있던 몸종과 시녀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장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같은 시각, 주씨 저택.
주육낭은 앉아 있는 진 공자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높이 들었다.
“그래, 바로 이 활일세.”
진 공자가 말했다. 주육낭이 활을 훅 던지자 근처에 있던 시녀가 흠칫 놀랐다. 어쨌거나 진 공자는 불구의 몸인데, 이렇게 무겁고 긴 장궁(長弓: 보병이 주로 쓰는 긴 활)을 받을 수나 있으려나?
주육낭은 진 공자와 교류할 때 상대가 불구라는 사실을 거의 잊은 것처럼 굴었다. 손을 뻗어 장궁을 낚아채던 진 공자는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다리가 잘 안 움직이다 보니 얼핏 봉변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진 공자는 불쾌한 기색 전혀 없이 도리어 웃으며 장궁을 들어 힘껏 당겨 보았다.
활시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 공자의 준수한 외모가 딱딱하게 경직될 정도로 이를 악물고 힘을 주자 마침내 활시위가 조금 당겨졌다.
“훌륭하네, 훌륭해. 그저 그런 사냥용 활보다 훨씬 힘이 있어. 가세나, 이거로 버드나무 가지를 쏴 봐야겠어.”
주육낭은 앉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또 누이 생각이 나?”
주육낭이 진 공자를 노려봤다.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장궁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다면 그보다 대단한 건 없다고 했네.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죄야.”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니 도리어 놀란 것은 진 공자였다.
“내 잘못도 있어. 내 편견 때문이지. 병주에서 강주로 돌아왔을 때 기이하다고 여기면서도 바보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곤 생각 안 했어. 그때 자네에게 언질을 줬다면…….”
진 공자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자네랑 무슨 상관이야!”
주육낭은 빽 소리를 지르며 말을 끊었다.
“자네가 정말 신선이라도 된 줄 알아? 무슨 수로 그걸 생각해? 그건 편견이라고 할 수도 없어.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고, 바보에서…….”
바보에서 다 나은 것도 모자라 명석한 사람이 됐다. 누가 믿어? 누가 믿겠냐고! 세상 사람들이 믿을까? 그러니 신선을 만났다는 풍문이 도는 거겠지.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찻잔을 들었다.
“달랠 필요 없어. 난 자네와 달라. 잘못은 인정한다고. 자학 같은 거 안 해. 난 내가 알아서 잘 챙기니 걱정 마.”
주육낭은 잠자코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자네는 연민과 인정이 없는 게 잘못이야.”
연민의 마음이 있었다면 주육낭이 사촌 누이를 보러 가지 않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말이라도 몇 마디 건넸겠지. 그랬다면 사촌 누이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을 테고, 그럼 지금과 같은 오해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점은 인정해.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난 똑같이 했을 거야.”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바보는 주씨 가문에서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는 오점이었다. 깔끔하게 죽여 없애지 못한 게 한이었으니. 그 바보는 주씨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켰고 조모님과 고모님이 평생 울적한 삶을 살게 했다.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진 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사실이야. 둘 사이의 갈등을 풀 수 없는 단단한 매듭이기도 하지.”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주육낭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 공자를 쳐다봤다.
“십삼. 자네는 날 두 번이나 도와줬어. 애초에 자네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그 애를 경성으로 데려오는 게 그리 쉽진 않았을 거야.”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아니, 아닐세. 내 공이라고 할 수도 없어.”
진 공자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마침 그 여인도 올 생각이 있었어. 난 기껏해야 일이 수월하도록 좀 도왔을 뿐이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쳐다보고 웃으며 물었다.
“이런 걸 좌절감이라고 해야 하나?”
주육낭은 가타부타 말없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십삼. 자네가 술에 취한 척 울분을 호소한 일도 날 도운 거였어. 나 대신 할 말을 해 줬지.”
주육낭이 다시 고개를 들어 진 공자를 쳐다봤다.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씩 웃었다.
주육낭은 심호흡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십삼,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해야 그 애와의 매듭을 풀 수 있을까?”
“그건 말이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나한테 묻지 말고 자네 자신한테 물어야지. 자네는 어떻게 풀고 싶은데?”
주육낭은 한숨을 내쉬고 문밖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고 싶냐고? 중요한 건 그 애 생각이겠지.”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문이 열리고 반근이 떠밀려 들어왔다.
“어서 네 짐 챙겨.”
여종이 말했다.
“좋게 끝내자. 남의 집에 가서 열심히 일하면 다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어. 그래도 내가 널 좋게 봐서 이만한 줄 알아.”
정신 없는 채로 떠밀려 들어온 반근은 침상을 붙잡고 앉았다.
“동쪽 거리의 인신매매 업자를 불러라.”
“집안에 일손이 부족하니 하나 더 사라고 해.”
“애초에 내가 세탁방으로 보내면 안 될 애라고 했는데 그냥 보내서 이 사달이 났잖아. 아씨와 공자를 모시던 애들은 고생을 안 해 봐서 할 줄 아는 일이 없다니까.”
“그때 팔아 버렸어야 했는데.”
여종들이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 반근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로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야, 빨리 챙기라니까.”
여종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반근이 무릎걸음으로 걸어갔다.
“아주머니들, 제발 부탁드려요. 저, 뵙고 싶은 분이…….”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굴 뵈려고?”
인상을 쓰며 묻던 여종은 곧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단념하고 얌전히 따라가는 게 좋을 거다. 육공자를 뵐 생각은 접어 둬. 집안 사내들은 여인네들의 일에 관여 안 해. 육공자 앞에서 빌면 육공자께서 널 남겨 두라고 부인께 빌 줄 아나 보지? 그땐 아마 인신매매 업자한테 파는 정도로 간단히 끝나지 않을 거다.”
반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육공자를 뵈려는 게 아니에요. 저, 저는…….”
하지만 말은 입 안을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씨를 뵙겠다고? 무슨 낯으로? 상황이 딱해지니까 아씨가 뵙고 싶어져?
반근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바닥에 엎드려 흐느꼈다. 관두자, 관둬.
“아주머니들, 저, 옷 갈아입고 머리 좀 빗을게요.”
반근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 꼴로 나가면 흉하잖아요. 남 보기에도 안 좋고요.”
여종들은 반근을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서둘러라.”
문이 닫히고, 홀로 앉은 반근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아씨는 잘 지내고 훌륭한 몸종도 곁에 있다. 듣자니 주씨 가문 노야와 부인께서도 전혀 홀대하지 않는다고 하고. 어쨌거나 아씨는 아주 잘 지내신다.
이젠 걱정할 게 없다. 그리고 무슨 자격으로 걱정한단 말인가. 그래도 얼굴 한 번 못 뵙고……. 하기야 뵈면 또 어쩔 텐가. 아씨는 이미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그게, 더 나을지 몰라.
반근은 단정히 꿇어앉아 정교랑의 거처를 향해 머리를 세 번 조아려 절을 올렸다.
진 공자는 가마에 앉아 다시 한번 장궁의 활시위를 당겼다.
“반년은 수련해야 자유자재로 다루겠네.”
진 공자가 신이 나서 말했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주육낭도 손에 활을 들고 있었다.
“육낭, 지금 자네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그 여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일이야. 멀리 떨어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자유롭게 두라고. 자네가 가서 잘못을 시인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아.”
진 공자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자네와 그 여인 사이의 일은 대부분 자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거잖아.”
“지금은 그 애가 일부러 일을 만들고 있어!”
주육낭이 씩씩거렸다.
“교제엔 진심이 중한 법이야.”
진 공자가 손에 든 활로 주육낭을 쳤다.
“자네 가슴에 대고 진심인지 물어봐. 그 여인한테 물어보지 말고.”
주육낭이 뭔가 말하려고 몸을 돌리는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여종들과 몸종들이 허둥지둥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빨리 와, 누가 죽으려고 목을 매달았대!”
“몸종 하나가 죽었다고?”
소식을 들은 주 노야가 놀라 물었다. 안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해대던 주 부인도 조용해져서는 부축도 받지 않고 걸어 나왔다. 갑자기 몸종이 죽다니? 진짜 불길하게! 죽을 사람을 둘러업고 집으로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집에서까지 사람이 죽어 나가네!
“무슨 일이냐? 어떻게 죽은 거야? 갑자기 왜 죽어?”
노비는 물건이라 사고팔 수도 있고 교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비는 사람이기도 한지라 당연히 죽을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주인 마음대로 죽였다가는 관부에 가서 추궁을 받아야 했다.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성가신 일이었다. 삼사의 계상(計相: 재정을 주관하는 벼슬)도 시녀를 장살했다가 어사에게 들켜 외직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앞길을 망친 일이 있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성가신 일이 많이 생기지? 전에는 하루하루가 평온했는데! 이게 다 그 애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주 부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 얘기를 입 밖으로 낼 때가 아니었다.
“어서 말해라, 어떻게 된 일이야?”
주 부인이 여종을 보며 다그쳤다.
“부인, 다행히 바로 발견하여 죽지는 않았답니다. 안 죽었대요.”
여종의 말에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죽었으면 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주 부인이 물었다.
“그게, 세탁방에서 부인의 치마를 망가뜨린 아이랍니다. 본디 팔아 버리려고 했는데 마음을 잘못 먹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목을 맸대요. 다행히 밖에 있던 이가 바로 발견해서 제때 구했고요.”
여종의 말에 주 부인은 진노했다.
“이런 천것을 봤나. 잘못한 것만도 죄인데, 죽음으로 협박하려 들어!”
“죽고 싶으면 죽으라지. 안 죽었으면 내다 버려라. 뭐하는 계집이야!”
주 노야도 화를 내며 옷소매를 뿌리쳤다.
하인들 처소의 마당에서는 여종들과 몸종들이 모여 이쪽 방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얼마 안 가 몸종 하나가 들려 나왔다.
“아주 잘나셨네. 감히 죽으려 들다니.”
“가기 싫으니 저러겠지. 그래도 소용없어. 노야께서 내다 버리라고 하셨잖아.”
여종들과 몸종들은 거리낌 없이 떠들어대며 열을 올렸다. 여종들과 몸종들은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다가 기겁했다.
“여섯째 공자님!”
다들 황급히 예를 표하며 길을 열었다. 들것을 들고 나오던 사환과 사내들도 걸음을 멈추었다. 주육낭이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살아 있는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어요.”
집사가 대답했다. 들것 옆에서 내려다보니 귀밑머리는 헝클어진 채 창백한 안색으로 두 눈의 초점을 잃은 시녀가 보였다. 주육낭은 순간 이 시녀의 모습이 원래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생겼었나? 이렇게 생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몸종에게는 주씨 저택에서도 눈길 한 번 준 일이 없는데, 이런 애를 강주에서부터 데려왔다고? 눈이 삐었었나?
“죽으려고?”
주육낭이 들것 위의 시녀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쓸모없는 것!”
주육낭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쓸모없는 것!”
“쓸모없는 것!”
시녀들이 들어와 정교랑 앞에 놓인 낮은 탁자를 옮겼다. 탁자 위에 놓인 그릇과 접시들은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아씨.”
시녀가 물 한 잔을 올렸다. 물잔을 받은 정교랑은 고개를 돌리고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린 후 입가심을 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던 몸종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음식이 아니라 알록달록한 간식을 들고 왔다.
“아씨, 태평 만두를 가장 좋아하셨잖아요. 제가 새로 몇 종류 만들어 봤어요.”
무릎을 꿇은 몸종은 흥분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돼지고기 수육 만두고, 이건 채소 만두예요.”
옆에 있던 시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수시로 정교랑도 쳐다봤다. 정교랑은 접시 위에 시선을 두면서도 말없이 있었다. 시녀가 얼른 손을 뻗어 정교랑이 속을 볼 수 있도록 만두를 갈랐다.
“아씨, 드셔 보세요.”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몸종이 긴장된 표정으로 쳐다봤다.
“여전히, 향이 너무 진해.”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순간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헤, 이보시오, 낭자.”
이미 완전히 존재감이 사라졌던 장 노태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대충 먹을 만하면 그냥 넘어가시구려. 입맛이 너무 까다롭군. 성의를 생각해야지.”
정교랑이 몸종을 힐끔 쳐다봤다.
“네가 만든 만두는, 별로야.”
장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었고 몸종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네, 소인이 아둔했어요.”
몸종의 목소리에는 부끄러움과 함께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몸종이 고개를 들어 또 다른 간식을 내밀었다.
“아씨, 이거 드셔 보세요. 이건 수수 가루로 만든 경단이에요.”
정교랑이 힐끔 쳐다봤다. 시녀는 정교랑의 표정을 꼼꼼하게 살피며 이번에는 먼저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았다. 정교랑은 자세를 바로 앉고 장 노태야를 쳐다봤다.
“잘 먹었습니다.”
정교랑은 장 노태야를 향해 예를 올린 후 다시 몸종을 쳐다봤다.
“네가 준비한 식사는, 훌륭했어. 하지만 간식은, 본디 입이 심심해서 먹는 거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간식을 만들려면, 식사보다, 훨씬 정교하게 해야 해.”
몸종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아씨.”
몸종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가르침에 감사드려요, 아씨.”
시녀가 놀라며 몸종과 정교랑을 차례로 쳐다봤다.
“이 손재주를 아씨가 가르쳐 주셨어?”
몸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빛냈다.
“난 아무것도 할 줄 몰랐어. 아씨께서 내게 가르쳐 주셨지.”
시녀가 웃으며 정교랑에게 물었다.
“아씨, 대체 못하시는 게 뭐예요?”
정교랑은 침묵을 지켰다.
“그래, 둘 다 조용히 좀 해라. 새 사람이든 옛 사람이든 간에 누가 나한테 차 한 잔 따라 주지 않으련?”
장 노태야가 짐짓 화난 말투로 말하자 시녀와 몸종은 웃음을 지었다.
“난 시를 쓸 줄 몰라.”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멈칫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건 시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아까 침묵한 게 아니라 이 세상 일 중에 할 수 있는 게 뭐고 못하는 게 뭔지 속으로 생각 중이었나?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몸종이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자세를 바로 했다.
“밥을 먹었으니 그만 가야겠어요.”
장 노태야도 웃으며 자세를 바로 앉았다.
“정 낭자, 밥을 먹으러 온 거였소?”
“네.”
정교랑이 몸종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밥은, 먹을 만하네.”
장 노태야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하지.”
“그래서, 제가 어르신의 몸종을 좀 빌리고 싶어요.”
정교랑의 말에 장 노태야는 멈칫했고 시녀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단 한 사람, 몸종만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씨, 절 도로 데려가시려고요?”
몸종이 소리쳐 물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계속해서 장 노태야를 쳐다봤다.
“이 아이랑, 교환할게요.”
정교랑이 시녀를 가리켰다. 시녀의 안색이 변했다. 아씨가 왜 이름을 물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오늘 문을 나서면서 왜 그리 불안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아씨, 제가 싫으세요?”
시녀는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고 엎드려 엉엉 울었다.
서재에 있던 장순은 울음소리가 들리자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썼다. 오늘 대체 왜 이러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두 번이나 울음소리가 들리다니.
“저도 음식 할 수 있어요, 아씨. 아씨께서 가르쳐 주시면 저도 분명 할 수 있을 거예요.”
시녀가 정교랑을 붙잡고 울자 몸종도 표정이 복잡해졌다. 몸종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교랑의 다른 옷소매를 붙잡았다. 눈물 앞에 마음이 약해진 아씨가 말을 번복할까 봐 겁이라도 난다는 듯이.
장 노태야가 손을 뻗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은 나다.”
장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젠 몸종한테도 버림받는 처지가 된 것이냐?”
시녀와 몸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장 노태야를 향해 엎드리며 죄를 고했다.
“노태야, 그런 게 아니고요.”
시녀와 몸종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두뇌 회전이 빠르던 시녀조차도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 본디 말주변이 없던 몸종은 더더욱 말이 나오지 않았다.
“됐다, 그만 울어라. 똑똑히 못 들었느냐? 빌려달라고 했어, 교환한다고. 빌려줬으면 돌려줘야 하고, 교환이라 함은 주고받는단 뜻이다.”
거기까지 말한 장 노태야가 손을 내저었다.
“빌려주고 교환하고 할 것 없이 필요하거든 다 데려다 쓰시구려. 여기 남아서 매일 훌쩍이기라도 하는 날엔 다들 내가 몸종을 구박하는 줄 알 거요.”
울던 시녀와 몸종이 웃음을 지었다.
“노태야.”
시녀와 몸종은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장 노태야의 옷소매를 하나씩 붙잡았다.
“노태야는 역시 최고예요.”
장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달 후에 돌려드리죠.”
정교랑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후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장 노태야는 어디에 쓰려고 빌리는지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배웅했다.
“아, 참.”
장 노태야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정교랑을 불러 세웠다.
“방금 이 세상 일 중에 시 쓰는 것만 못한다고 했소?”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손님이 갔다는 소식을 들은 장순이 찾아왔다. 장 노태야의 맏손자인 장 대공자 역시 와 있었다.
“할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여기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던데요. 찬모인 반근이 떠나게 돼서 운 거예요?”
장 노태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떠나야 할 사람은 안 울고 남게 될 사람이 울었지.”
장 대공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꿇어앉았다.
“할아버지, 아까 반근의 주인이 왔던 거예요? 어느 댁 낭자죠?”
반근이 어제부터 대문간을 서성이며 왔다 갔다 한 탓에 반근의 옛 주인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온 집안 사람이 다 알았다. 노비가 옛 주인을 보면 두려워하는 게 보통이고 기뻐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정씨 가문의 낭자다. 거기도 강주 사람이지.”
장순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기에 부친의 무탈함을 확인한 후 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아버지.”
장 대공자가 뭔가 생각난 듯 부친을 불렀다.
“오늘 제가 누굴 봤는지 아세요?”
장순이 걸음을 멈췄다.
“예부의 합격자 명단 소식이라도 들었느냐?”
삼 년에 한 차례 열리는 과거가 끝났다. 벌써 이월 말이니 삼월이면 방이 붙을 것이다. 응시자 중에는 장순의 제자도 있었다. 다들 지인의 시험 결과를 궁금해했기에 은밀히 정보를 주고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게 아니고요, 동 내한을 봤습니다.”
장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종유를 먹고 신선이 되려 했던 그자 말이냐? 거의 승천할 뻔했다지 않았어?”
장 대공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말씀 한번 매정하게 하시네요.”
장 노태야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지 않았다.
“전에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더라고요.”
장 대공자가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1만 관을 주고 신선의 손에서 목숨을 사 왔답니다.”
장 노태야는 더욱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 진짜예요. 오늘 보니까 보름 만에 전보다 원기가 더 왕성해졌더라고요. 하얗게 셌던 귀밑머리가 다시 검어진 게 제일 신기했어요.”
장 대공자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그 신의가 그렇게 신통하대요. 듣자니 도교 이 진인의 가르침을 받았다는데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친답니다.”
장순은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나 자리를 떴다.
“얘야, 너도 이제 임직하러 갈 몸이 아니냐. 그런 허황된 말을 귀담아들으면 못쓴다.”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다들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진짜였어요. 전보다 훨씬 기력이 왕성해 보였습니다.”
“세상엔 비술이 많은 법이다. 그게 뭐 그리 신기하다고 호들갑이야.”
장 노태야는 그 화제를 그만 얘기하고 싶은지 근심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아이의 솜씨에 입맛이 길들여졌는데, 다른 이가 한 게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 한 달이라…….”
정교랑의 마차가 옥대교에 멈춰 섰다.
“아씨, 여기서 지내세요?”
몸종은 보따리를 끌어안고 마차에서 내려 저택을 훑어보며 물었다.
“아니, 여긴 아씨의 저택이고 아씨는 외조모님 댁에서 지내셔.”
시녀는 달려 나온 금가아를 보며 웃었다.
“둘은 한 식구였으니까 잘 알지?”
“청매 누나!”
금가아가 대번에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누나도 경성에 온 거야?”
몸종이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금가아, 또 내 이름을 잊었구나.”
전에는 청매라고 불렀고 아씨를 따른 후부터 반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씨를 모신 지 얼마 안 되어 정씨 저택에서 이사를 나간 탓에 정씨 가문 하인들은 대부분 몸종의 새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다.
“반근 누나.”
금가아가 몸종과 시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휴, 반근 누나가 둘이 됐네. 똑같이 부르면 헷갈리지 않을까?”
“안 그래.”
몸종과 시녀가 동시에 말했다. 그러더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 이름은 됐으니 원래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 우린 이만 돌아가야 해. 둘은 여기서 지내.”
시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일 올게. 너한테 맡길 일이 있어.”
정교랑이 마차의 휘장을 들고 몸종을 보며 말하자 몸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잘됐네, 이제 너랑 같이 있을 사람 있겠다.”
시녀가 금가아를 보고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금가아와 몸종은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너무 잘됐다, 청매…… 아니, 반근 누나. 누나도 와서.”
“그래, 너도 아씨를 따라왔구나.”
두 사람은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주씨 저택.
마당으로 들어서던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시녀도 멈칫하여 대청 쪽을 바라봤다. 몸종들은 회랑 아래에 조용히 시립해 있고, 활짝 열린 문 안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신선이 돌아오셨군.”
주육낭이 냉소했다. 정교랑이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공자님, 또 무슨 일이세요?”
시녀가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
“저희 아씨의 규방인데, 함부로 들어오시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그러더니 시녀는 주육낭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깜박했네요. 여긴 공자님의 댁이고 우린 얹혀사는 건데 말이죠.”
시녀는 예를 표하는 시늉을 하며 사죄했다.
“소인이 무례를 범했으니 용서하세요.”
“시끄럽다! 어느 안전이라고 네가 입을 열어!”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자리에 앉아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럼, 그쪽이 말해 봐요.”
주육낭이 바닥에 있던 검을 발로 탁 차올려 손에 쥐고 정교랑에게 건넸다.
“신선이면 어진 마음이 있겠지?”
정교랑은 시녀가 건네는 물을 받고 주육낭을 힐끔 쳐다봤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주육낭이 정교랑의 팔을 홱 낚아채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아씨!”
시녀가 놀라 소리치며 얼른 부축하려고 했다. 정교랑의 손에 있던 물이 바닥에 엎질러졌다. 끌려나가느라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정교랑이 금세 중심을 잡고 따라 나간 덕에 봉변을 당하진 않았다.
“공자님, 왜 이러세요?”
시녀는 따라가며 막으려 했지만 주육낭이 밀치는 바람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마당에 있는 여종들과 몸종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문 채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시녀는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일어나 뒤따라갔다. 길에서 마주친 여종들과 몸종들은 황급히 놀라 비켜서며 주육낭이 정교랑을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서 부인께 고해.”
여종과 몸종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주육낭이 방문을 발로 찼다. 낮고 어두운 하인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 쪽에 있는 침상에 여인 하나가 누워 있을 뿐이었다.
“신선, 어진 마음이 있다면 이 검을 들고 가서 통쾌하게 보내 줘라!”
주육낭이 정교랑을 안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보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챙 하는 소리를 냈다. 침상 위에 누운 여인은 이미 의식이 없는 듯, 검 소리가 나는데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교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똑바로 선 채 자신의 팔만 천천히 주물렀다.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아씨!”
울며 따라 들어온 시녀는 문가에 선 주육낭을 들이받고 곧장 달려가 정교랑의 팔을 확인했다.
“육낭!”
진 공자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리더니 두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걸어왔다.
“이게 웬 소란이야!”
“그래, 내가 소란을 피웠다! 애초에 내가 네 시녀를 데려가면서 소란을 피웠어. 내가 매정하고 의리가 없었지. 그리고 저 애도!”
주육낭이 몇 걸음 걸어가 침상 위에 누운 여인을 가리켰다.
“이 애도 마찬가지야. 널 버리고 날 따라 도망쳤지. 얘도 매정하고 의리가 없었어. 그래, 우리가 둘 다 매정하고 의리 없이 굴었다. 바보인 네가 어떻게 지내든 신경 안 썼어. 이젠 복수했으니 됐냐? 얘가 자결하겠다고 목을 맸단 말이다.”
자결하겠다고 목을 맸다는 소리에 시녀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뚝 그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정교랑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 고생해도 싸고 죽어도 싸. 진작 죽었어야 했다.”
침상 위의 반근이 흐느껴 울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육, 괜히 일 만들지 말랬지!”
진 공자가 소리치며 들어와 정교랑을 쳐다봤다.
“오늘 낭자의 몸종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다가 그만 못된 마음을 먹고 자결을 시도했답니다. 낭자와는 무관한 일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위로할 것 없어. 누가 위로해 달래?”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고 싶었던 광경이 이거지? 넌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서 자기한테 미안해하기를. 빌어먹을, 아마 좋아하기도 모자랄걸?”
“주육, 입 다물어!”
진 공자도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정 낭자, 얘가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나서 이러는 겁니다. 반근도 생각을 잘못했고, 육낭도 생각을 잘못했어요. 그 잘못된 생각으로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매듭을 풀지 않으면 끝나지 않겠죠. 이들의 업보고 인과응보입니다. 육낭이 어리석었으니 너무 언짢아하지 마세요.”
진 공자는 그러면서 옆에 있던 시녀를 재촉했다.
“어서 너희 아씨를 모시고 돌아가라.”
시녀가 얼른 정교랑을 부축했지만 정교랑은 걸음을 옮기는 대신 뒤돌아 침상을 쳐다봤다. 낡고 해진 이불을 덮은 작은 형체가 구석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지는지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방 안은 고요했다.
“아씨, 아씨.”
반근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침상 위에서 쿵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깼다.
“아씨, 제가 아씨를 버리고 갔어요. 육공자를 따라가고 싶었거든요. 제가 아씨를 버린 거예요. 아씨를 뵐 낯이 없어요. 마지막 인사조차 못 올리고 떠났죠. 이 반근이 아씨를 떠났어요. 이 반근이 아씨를 버렸다고요…….”
아씨, 반근이 말씀도 안 드리고 떠났어요. 반근이 아씨를 버린 거예요. 아씨, 반근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다고요…….
반근은 결국 엎드려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안팎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정교랑이 손을 뻗었다.
“물.”
다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정교랑의 손에 들려 있던 물잔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물을 마시려다가 주육낭에게 끌려 나오면서 물을 쏟게 됐지만, 물잔은 여전히 손에 꼭 들린 상태였다.
아무리 큰 위기가 닥치고 아무리 속수무책의 상황이 와도, 아씨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인내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었으니, 자신을 통제하는 일은 포기하는 일이 없었다. 마차에서 납치될 때도 그랬고, 비틀비틀 끌려가면서도 그랬다.
시녀는 왈칵 눈물이 나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좀 봐!”
진 공자가 굳은 얼굴로 소리치며 또다시 지팡이로 주육낭을 내리쳤다. 시녀는 어수선한 방 안에서 물을 찾았지만, 낡은 주전자며 그릇은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물 가져와.”
시녀는 울면서 앙칼진 목소리로 밖에 대고 소리쳤다.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가 곧 물을 가져왔다.
자리에 앉은 정교랑은 잔을 받고 천천히 물을 마셨다. 반근은 엎드려 울고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한쪽 옆에 서 있었지만, 진 공자는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 육낭이 이리 아둔하게 군 건 뜻밖의 일 때문입니다. 마음이 급했어요.”
잠시 침묵하던 진 공자가 입을 열었다.
“뜻밖? 얘가 이렇게 만든 거야!”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자 진 공자는 다시 지팡이로 주육낭을 쳤다
“아직도 남 탓을 해? 아직도? 누가 가라고 떠밀었어? 저 몸종을 데려온 것도 누가 떠밀어서 한 일이야? 본인이 자초한 화인데 누굴 원망해! 황당한 소리!”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잘못했어. 우리 주씨 가문이 다 잘못했다고!”
주육낭이 소리치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 이제 다 밝혀진 일인데 계속 이렇게 시치미 뗄 거야? 그래,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속 시원히 말해 줄 순 없어?”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주육낭을 쳐다봤다. 눈밭에서 싸리나무를 지고 와 죄를 청한 후로, 이 여인이 주육낭을 똑바로 직시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굳은 얼굴의 주육낭도 팽팽한 시선으로 맞섰다.
“사실 그쪽이 한 일은, 미안하다고 할 수 없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주육낭은 코웃음을 쳤다.
“어떤 게 진짜 미안한 일인지, 알고 싶어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낮고 어두컴컴하며 싸구려 연지와 조악한 향분 냄새가 섞인 방 안에서 자리에 앉은 소녀와 꼿꼿이 선 소년이 대치하고 있었다. 서 있는 건 분명 자신인데, 이번에도 상대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육낭은 몸을 더욱 곧추세우며 소녀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팽팽한 시선으로 받아쳤다.
한쪽 옆에 있는 시녀도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실수를 세 번 거듭하면 안 된다고 했던 아씨의 말이 떠올랐다. 주육낭이 아씨 앞에서 시비를 건 게 벌써 세 번이 넘었는데, 그럼 아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까?
“정 낭자, 낭자의 뜻은 잘 압니다. 이들이 아둔했어요. 낭자의 말을 못 알아듣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았죠. 그러니…….”
진 공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보며 말을 잘랐다.
“그래도 저 사람은, 여전히 당신의 친구예요. 그렇죠?”
진 공자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멈칫했다가 곧 빙긋 웃었다.
“당신은, 저 사람이 잘못한 걸 알아도, 저 사람을 나무라는 대신, 계속 돕겠죠.”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언제나, 저 사람을 도왔어요. 술을 마실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곡진히 위로하고 있잖아요.”
동병상련을 느끼며 함께 울분을 토로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대립하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한 것도 사실이었다. 진 공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역시 잘 아는군요.”
진 공자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 낭자, 저 녀석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잘못한 건 아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겁니다.”
“저 사람한테, 정말 잘해 주네요.”
“인생을 살면서 친구 하나를 얻긴 어려운 법이죠. 특히 나 같은 친구라면요.”
진 공자가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하하 웃었다.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다리를 고쳐 줄 수 있어요.”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멈칫했고, 주육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진 공자 역시 웃음을 뚝 그쳤다.
“뭐라고? 네가 고칠 수 있다고?”
주육낭이 다급히 물었다. 정교랑은 주육낭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 고쳐 줄 거예요.”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믿기지 않는 눈길로 쳐다보다가 미처 기뻐하기도 전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멈칫했다. 주육낭이 서슬 퍼런 얼굴로 소리쳤다.
“어째서?”
이를 악물던 주육낭은 무언가 떠오른 듯 다그쳐 물었다.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그 망할 원칙 때문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정교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봤다.
“왜냐하면, 그쪽이 싫거든요.”
“그게 쟤랑 무슨 상관인데?”
주육낭이 소리를 질렀다. 정교랑이 진 공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도 인생에서, 친구 하나를 얻는 게, 기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시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독하다, 정말 대단해!
방 안 전체가 질식할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진 공자가 돌연 손을 들어 예를 표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 대단하십니다.”
“주씨 가문 육공자가, 내게 한 일은, 괜히 근심할 것 없어요. 그건 미안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죠.”
정교랑은 주육낭을 보며 손으로 진 공자를 가리키고 천천히 말했다.
“봐요. 이게 바로 진짜, 미안한 일이니까.”
울컥한 주육낭의 표정이 싹 변했다. 주육낭은 바보가 아니었으니, 여인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고도 남았다.
“정교랑!”
주육낭이 소리치며 앞으로 다가섰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채로 주육낭을 쳐다봤다.
“본디 아무 일 없었는데, 괜히 일을 만드네요. 이러면, 마음에 들어요?”
무시가 최고일 것 같아 무시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응어리를 풀고 서로 솔직히 마주하는 게 무시보다 나을 것 같았다.
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고는 새것을 세울 수 없고, 아픔이 없으면 새로운 것도 없다고 했다. 깔끔하고 통쾌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이 여인을 자극한 꼴이 됐다.
수많은 말과 수많은 행동과 수많은 생각도 이 여인의 한마디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천하의 이치는 구구절절한 장광설에 있지 않고 핵심적인 한마디에 있다고 했던가.
방 안의 세 사람이 대치했다. 정교랑은 무관심한 표정이고 주육낭은 분노한 표정이었으며 진 공자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잘못했습니다.”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정교랑을 향해 공수했다.
“자네가 뭘 잘못해! 괜히 얘랑…….”
주육낭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주육낭을 힐끔 쳐다봤다.
저 여인은 고칠 수 있다, 저 여인은 고칠 수 있어…….
불구인 진 공자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 정상인처럼 걷고, 뛰고, 멋대로 활보할 수 있다. 주육낭은 몸을 떨었다. 입 밖으로 나오려던 분노의 말은 여인의 시선 속에 쏙 들어갔다.
“기분이, 어때요?”
정교랑은 이대로 끝내지 않으려는 듯, 주육낭을 보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기분이 어떠냐고? 욕하고 싶어도 욕할 수 없고, 가슴속에서 열불이 솟구쳐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 고양이가 쥐를 갖고 노는 기분?
물론, 쥐의 기분을 묻는 것이렷다. 주육낭은 손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주육낭, 입 다물어.”
진 공자가 다시 정교랑을 쳐다봤다. 진 공자의 표정은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의 술렁거림이 지나간 후 곧 평소로 돌아왔다. 다리를 고칠 수 있지만 고쳐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예 들은 적도 없다는 듯이.
“정 낭자, 이제 알겠습니다. 낭자는 주육낭에게 전혀 신경을 안 썼군요. 아예 안중에도 없었어요. 어디 육낭뿐이겠습니까. 주씨 가문 전체도 안중에 없었겠죠. 이번에 화가 난 건 주육낭이 반근의 잘못을 낭자 탓으로 돌려서입니까?”
“아니에요.”
정교랑은 옆에서 울음소리도 못 내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반근을 힐끔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내 물건이, 마음에 든다면 가져가요. 난 화 안 나요. 내 물건이, 떠나고 싶다면, 떠나라죠. 난 신경 안 써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뿐이니까요. 다만, 가져가는 건 좋아해서고, 떠나는 건 더 잘 지내기 위해서인데, 가져가 놓고 짓밟으며 학대하는 건, 정말이지, 눈 뜨고 못 보겠어요.”
“저 애 스스로 자신을 학대한 거야!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야!”
주육낭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봤다.
“난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하는데,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죠?”
주육낭은 정교랑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낭자.”
진 공자도 일어나 가볍게 웃으며 예를 표했다. 정교랑도 답례했다.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차와 술을 마시고 있었던 듯 정다운 분위기였다.
“아, 참.”
사환의 부축을 받아 문가로 걸어가던 진 공자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이해 안 가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정교랑이 쳐다봤다.
“왜 몸종에게 반근이란 이름을 지어 주는 걸 좋아하죠?”
진 공자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듣기 좋아서요.”
정교랑이 답했다.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뜨리고는 공수하여 예를 표하고 나갔다.
주육낭은 마당 문밖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진 공자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저 애가…….”
주육낭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애가 괜한 소릴 한 거야. 아마, 일부러, 그렇게 말했겠지. 고칠 수 있을 리 없어. 저 앤 말을 독하게 하잖아.”
진 공자가 손을 뻗어 툭툭 쳤다.
“육낭, 여인네의 그깟 말 한마디에 이렇게 겁을 먹은 거야?”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정말 자네를 잘못 봤군.”
“하지만 네 다리잖아!”
주육낭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쳤다.
“네 다리!”
“내 다리는 곧 내 운명이야.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편히 살 수 없어.”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주복, 난 내려놓을 거야. 내가 편하다는데, 자네가 날 편치 않게 만들어야겠어?”
주육낭의 이름은 복(箙), 자는 자건(子键)이었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곧 질책과 같았다. 주육낭은 입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육낭, 자네가 졌어.”
진 공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다시 웃으며 주육낭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지면 진 거지, 그게 뭐라고. 창피할 것도 없어. 그냥 내려놔. 적어도 자네와 저 여인의 응어리는 여기서 매듭짓게 됐잖아. 그거면 됐지.”
주육낭은 진 공자를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다신 얘기 꺼내지 마.”
진 공자가 손을 들며 말을 이었다.
“알아. 저 낭자의 칼은 아주 정확하고, 확실하고, 매서웠어. 자네의 마음속 울분을 풀기 힘들겠지. 하지만 육낭, 혼자 털고 일어나. 본디 가장 상심했어야 할 내가 어떻게든 자네 기운 내게 하려고 애쓰게 하지 말고. 그랬다간 진짜 친구 자격도 없어.”
진 공자가 하하 웃으며 주육낭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주육낭도 따라서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입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말이 나오진 않았다.
“가세, 가자고. 전엔 어떻게 화해할지 생각하느라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지만, 이젠 화해가 필요 없게 됐으니 내려놔도 되잖아. 드디어 사냥을 갈 수 있겠군. 어서 가세.”
진 공자가 사환의 부축을 받아 먼저 걸어갔다. 따라가려던 주육낭이 고개를 들자 저 앞에서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진 공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화살 두 발이 날아와 두 눈에 꽂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통증이었다.
난 네 다리를 고칠 수 있다! 네 다리를 고칠 수 있어! 하지만 넌 저자의 친구니 고쳐 주지 않을 것이다!
너 때문에 저 사람은 다리를 못 고친다. 이것이야말로, 정녕, 미안한 일이지!
주육낭은 고개를 홱 돌리며 씩씩거렸다. 곧추세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못된 것! 독하고 악랄하구나! 참으로 지독해!
시녀는 휘장을 내리고 바깥 대청에 조용히 앉아 있는 반근을 쳐다봤다. 눈물은 이미 그친 상태였지만 여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시녀를 본 반근은 얼른 예를 표했다.
“아씨는 주무셔.”
시녀는 얼른 답례하며 한쪽 옆에 꿇어앉아 반근을 쳐다봤다.
“아씨는 낮잠을 주무시는 습관이 있거든.”
반근이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지.”
반근이 중얼거렸다.
“알아…….”
안다는 말을 내뱉자 또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왔다.
“우선, 좀 씻을래? 옷도 갈아입고?”
시녀가 반근을 훑어보며 나지막이 묻자 반근이 자신의 행색을 살펴봤다. 목을 매기 전에 옷을 갈아입긴 했지만 한바탕 소동을 벌인 탓에 이미 지저분해져 있었다.
고개 숙인 반근의 시야로 앞에 있는 시녀의 깔끔하고 단정한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옷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녀는 행동거지도 우아하고 말투도 사근사근했다. 초라한 자신이 부끄러워 반근은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고, 고마워, 언니.”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체구가 비슷해 보이네.”
시녀도 전전긍긍하는 반근의 태도를 인지하고 얼른 시선을 거두며 화제를 돌렸다.
“옷 가지러 갈 필요 없어. 괜찮다면 우선 내 옷 입어.”
“나, 나야 당연히 괜찮지. 언니가 안 괜찮으면 몰라도.”
고개 숙인 반근이 쭈뼛쭈뼛 말했다.
“그래, 어려워할 것 없어.”
시녀가 웃으며 어깨를 토닥여 주고 일어났다.
“물 데우라고 할게. 잠깐만 기다려.”
반근은 나가는 시녀를 쳐다보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얼른 고맙단 말을 덧붙였다.
몸종이라고는 하지만 딱 봐도 그냥 몸종 출신은 아니었다. 적어도 엄한 통제 속에서 지낸 일은 없는 듯했다. 시녀는 마음 편히 가지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씨가 부르시나 듣고 있어. 얼마 안 주무시고 일어나시거든.”
반근은 얼른 알겠다고 했다.
시녀는 옷을 갈아입고 나온 반근을 보며 감탄했다.
“역시 딱 맞네.”
웃으며 다가가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던 시녀는 목 주위에 남은 멍 자국을 보고 못 본 척 옷깃을 세워 가려 주었다. 반근은 고개를 숙였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마음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이리 앉아. 머리 말려 줄게.”
시녀는 웃으며 반근을 앉히고 수건을 받아 머리를 털어 주었다. 반근은 괜찮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반근은 자리에 앉았고 자신은 다른 쪽 머리를 털었다. 시녀는 수시로 말을 걸어 주면서 반근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해 주었다.
“언니, 전에 집에서 누굴 모셨어?”
반근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진짜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고 그저 얘깃거리가 필요했다.
“나? 난 우리 집에서 노태야를 모셨어.”
노태야? 반근이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안쪽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근.”
두 개의 대답이 동시에 울렸다. 시녀가 반근을 쳐다보자 반근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씨 깨셨네. 내가 들어가 볼게.”
시녀는 가볍게 웃으며 반근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들어갔다. 반근은 흔들리는 휘장을 멍하니 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
정교랑이 물을 마시고 나자 시녀가 손을 뻗어 잔을 받았다.
“토란죽을 끓였는데 드시겠어요?”
“연근 넣었니?”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녀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방에는 정교랑과 반근만이 남았다. 반근은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녀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반근은 또다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 왔다.
“너도 알 거야. 내가 전에는,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 지금은, 말하는 걸 안 좋아해.”
정교랑이 말했다.
“소인, 알아요.”
반근이 목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입을 열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감히 울 수 없어 꾹 참았다. 찢어졌던 입술에서 또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반근은 얼른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닦았다.
정교랑이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너, 다시 돌아오고 싶니?”
낯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럴 순 없었다. 하지만……. 반근이 바닥에 엎드렸다.
일찍이 마음이 가는 대로, 멋대로 잘못을 저지른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더 해도 되지 않을까?
“소인 돌아오고 싶어요.”
반근은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돌아와.”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차오른 눈물에 시야가 흐릿해져 눈앞에 있는 여인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 곁엔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자코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넌 집에 가 있어.”
집? 반근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던 금가아는 깜짝 놀랐다.
“반근 누나, 또 왔네.”
금가아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마차에서 내린 시녀는 웃으며 정과 꾸러미를 던져 주었다. 안에 있던 몸종도 소리를 듣고 나왔다. 미처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는 또 다른 몸종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소개 안 해도 다들 아는 사이지?”
시녀가 웃으며 반근을 가리켰다. 몸종과 금가아는 반근을 쳐다보더니 멈칫했다. 반근은 정씨 저택에서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다. 몸종이 온 지 며칠 만에 떠난 터라 이미 기억이 흐릿했다. 더군다나 금가아는 아예 본 적도 없었다.
“혹시, 반근?”
어리둥절해하던 몸종이 누군지 알아보고 외쳤다. 금가아도 그 말에 퍼뜩 깨달았다.
“아, 원래 아씨를 모시다가 다른 사람 따라 도망친 그 반근 누나구나!”
반근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시녀가 금가아를 찰싹 때리며 꾸짖었다.
“얘가 뭐라는 거야. 반근 낭자는 주씨 가문 사람이니 주씨 가문으로 돌아오는 게 당연하지.”
금가아도 자신의 말이 당돌했던 걸 깨닫고 멋쩍어했다.
“저기, 우리 누나가 많이 고마워했어.”
금가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수습할 말을 찾았다.
“우리 누나가 그때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 나한테 아씨를 잘 모시라고 했거든.”
반근이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네 누나라면…….”
“춘란 누나 말이야, 사공자를 모시던 춘란. 누나가 사공자의 병을 고쳐 줬잖아.”
얘도 병을 고칠 줄 알아? 하긴 그러니 아씨의 시중을 들었겠지. 몸종과 시녀가 반근을 쳐다봤다. 다른 건 몰라도 눈치는 많이 늘어난 반근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니야.”
반근이 금가아를 쳐다봤다.
“내가 사공자의 병을 고친 게 아니야. 아씨께서 고치셨어. 난 아씨를 대신해 가르쳐 줬을 뿐이고.”
금가아는 놀랐다가 금세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여긴 아씨가 사들인 집이야.”
시녀가 반근을 잡아끌었다. 어쩐 일인지 반근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싶진 않아 이름은 빼고 말했다.
“금가아 혼자 지내서 많이 심심한가 봐. 여기서 지내면서 청소 좀 도와줘.”
거기까지 말한 시녀는 반근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바짝 다가갔다.
“금가아가 아직 어려서 철없는 말을 잘해. 이해해 줘.”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알아. 난 아씨의 말씀만 들을 거야. 괜한 생각 안 해. 사실은 사실이니까. 현실도 인정 안 하고 남의 말을 두려워하면 제대로 살 수 없어.”
시녀가 웃으며 손을 토닥였다.
“그래야지. 다 같은 반근이니 이 이름값을 해야 하잖아.”
시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휴, 내가 또 내 칭찬을 했네. 비웃지 마.”
반근이 웃었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웃음이었지만 눈 속에 담겨 있던 불안은 많이 걷혀 있었다. 반근은 마차를 타고 떠나는 시녀를 바라봤다.
“마침 밥을 짓고 있었는데 많이 했거든. 셋이 먹어도 충분하겠다.”
몸종은 웃으며 말하고는 금가아에게 소리쳤다.
“가서 장작 가져와.”
금가아가 알았다고 하고 뛰어가려는데, 반근이 한발 먼저 움직였다.
“내가 할게.”
반근이 마당으로 들어갔다. 몸종도 웃으며 따라 들어가고, 금가아는 맨 뒤에 남아 대문을 닫았다. 두 사람이 늘었으니 북적북적하겠네. 그런데…….
“반근이 너무 많아.”
금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부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