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5권
-보상-
이 태의는 동씨 가문 자제들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동 내한을 보러 갔다. 동 부인과 첩실만이 방 안을 지키고 있었다. 안주인 외에 방 안을 지키는 유일한 여인이 된 첩실에게서 피로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고생을 하고 싶어 하는 여인들은 밖에도 줄을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자격을 얻은 건 첩실뿐이었다. 이제 첩실은 노야와 부인이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 된 터였다. 죽어가는 노야를 살린 은인이니 훗날 노야가 죽는다 해도 첩실을 팔아 버리기는커녕 잘 봉양할 것이다.
침상 앞에 꿇어앉은 첩실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어제의 눈물과 다른,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 대인, 오셨습니까.”
동 부인이 첩실에게 비키라는 눈짓을 했다. 이 태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침상을 살폈다. 동 내한은 창백한 안색에 비몽사몽인 듯 보였다. 이 태의는 맥을 짚은 후 혀를 살폈다.
“정말, 귀신같군.”
이 태의가 혼잣말을 했다.
“대인, 어떻습니까?”
동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 낭자는 확실히 좀 이상했다. 치료하기 전에도, 후에도 가족들은 일절 만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을 데려가라면서 약을 줬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터였다.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좀 더 지켜보죠.”
이 태의가 말했다.
“정말 잘됐어요, 부인.”
첩실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태의께서 못 고친다고 하신 말씀은 틀렸지만, 나았다고 하신 말씀은 맞을 거예요. 노야는 이제 괜찮으세요.”
이게 뭔 소리야. 이 태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왜 날 끌어들여! 하여간, 정 낭자 때문에!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 낭자가 무슨 약을 줬습니까?”
이 태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동부인이 얼른 손짓하자 첩실이 도자기 병을 가져왔다. 안으로 불러 들어가 보니 들것 위에 누운 동 내한과 약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정 낭자는 이미 휘장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휘장 너머에서는 몇 마디 속삭이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연신 고맙다고 하던 동 부인과 첩실은 곧 시녀에게 쫓겨났다. 정 낭자가 극도로 피로한 상태라고 했다.
“정 낭자 말이 매일 아침 한 알씩 드시게 하래요. 따뜻한 술과 함께 넘기게 한 후 밥을 드시게 하고요.”
“이 상태로 식사를 하실 수 있습니까?”
이 태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밥을 드실 수 없을 땐 따뜻한 물을 드시게 하랍니다.”
동씨 집안 아들이 보충 설명을 했다. 이 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자기 병을 열어 봤다. 새까맣고 비린 냄새가 나는 약이었다. 이 태의는 손에 살짝 묻혀 입에 대 보았다.
“두충?”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태의가 약을 조금 더 꺼내려고 했다. 동 부인이 아까운 듯 약병을 빼앗았다.
“대인, 딱 정해진 양만큼만 줬을 거예요.”
……그리고 엄청 비싸다고요!
이 태의는 입을 삐죽거리고 손에 남은 약을 입에 넣으며 작별을 고했다. 문을 나서려던 이 태의가 고개를 돌려 침상 위에 누운 동 내한을 다시 쳐다봤다. 아직은 병세가 심각하지만 사흘 후면 깨어날 것이다. 정말이지…….
“정말 신선의 비방이라도 얻었나?”
이 태의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동씨 가문 첩실의 말마따나 최근 이 태의가 죽을병이라고 했던 예측은 두 번이나 빗나갔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는 걸 알아보는 눈은 아직 정확했다. 이 태의는 동씨 저택을 나오면서 동 내한이 살아난 게 틀림없다고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
주씨 저택은 또다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됐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나 대문을 넘지 못했다.
“우리 집이 어떤 집인데!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집이 아니야!”
이제 기침을 하지 않게 된 주 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말했다.
“가서 전하거라. 우리 교교는 고단하니 병을 치료하려거든 다음에 다시 오라고.”
여종들이 나가 말을 전하자 대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즉시 뿔뿔이 흩어졌다. 놀란 건 도리어 주 부인이었다.
“전부 갔다고?”
주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묻자 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별다른 말도 없이?”
주 부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와서 애원도 안 하고? 듣기 좋은 말도 안 하고? 만나지 말랬다고 그냥 가?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치료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란 말이야! 애걸복걸 안 해?
“정 낭자의 원칙이 확고하니, 안 들을 도리가 없죠.”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대요. 나머진 데려가도 소용없다니까.”
“갑시다. 일단 가서 기다려 봐요. 나중에 정 낭자를 직접 뵙고 빕시다.”
“동 내한을 들여갔을 때도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요. 고친다고 하더니 대번에 고쳤죠. 주씨 가문 사람들은 그때도 막아섰고요.”
대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흩어졌다고 했다. 여종의 보고를 들은 주 부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래도 우리 집이잖아. 난 안중에도 없나 본데, 그렇다면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지!”
소식은 점점 멀리 퍼져나갔다. 권세가와 관료들에게 퍼지더니 금세 저자로 퍼졌다. 어느 집이나 하인은 있기 마련이고, 하인들끼리는 친인척인 경우가 많았다. 저자에서 도는 말은 권세가에서 도는 말보다 훨씬 속되고 황당한 것이었다.
“사람을 들여보내라고 하더니, 그 주씨 가문 낭자가 딱 잘라 묻더래요. ‘1만 관 있어요? 없어요? 있으면 가져오고, 없으면 사람 도로 데려가요.’”
“1만 관이요? 그렇게나 비싸?”
“비싸긴요. 염라대왕과 협상을 한 건데 그 정도면 싼 거지.”
“염라대왕?”
“얘기 못 들었어요? 그 낭자는 이 진인의 제자라 음양을 소통할 수 있대요. 그게 아니면 죽어가던 사람을 어떻게 고치겠어요? 염라대왕한테 가서 사람을 달라고 한 거지.”
“맞아요, 나도 들었어요. 그 낭자는 꼭 밤에 아무도 없을 때만 병을 치료한대요. 그리고 술이랑 고기, 채소 같은 걸 달라고 한다나. 그날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다 봤대요. 아주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었다니 아마 염라대왕이 왕림했던 거겠죠.”
“그 낭자가 염라대왕과 같이 한잔하면서 협상한 게 아니겠어요?”
찻집에 앉아 있던 서생들은 옆 탁자에서 하는 말을 도저히 그냥 들어줄 수 없었다.
“정말 황당하군.”
서생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찻잔을 쾅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놀라 쳐다보던 사람들은 과거를 준비하는 수재들인 걸 알아보고 개의치 않으며 목소리를 죽여 계속 수군거렸다.
“경성에선 관료 집안까지도 박수무당과 무녀를 찾나 보군.”
수재 하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누가 무당이래? 의원이라잖아.”
다른 수재가 웃으며 대꾸했다.
“의원이라니, 병도 못 고치는 의원이 어디 있어! 허튼수작이지!”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야지. 함부로 허황된 말을 해서야 쓰나.”
찻집 점원이 찻잎을 가루로 빻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젊은이 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병을 고치는 신묘한 일을 본 적이 있어.”
그 말에 탁자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원조, 자네가 봤다고?”
한원조는 찻집 점원이 건네는 차를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 고모님께서도 목숨이 위급하셨거든.”
한원조는 옛일을 떠올려 봤다. 목숨이 위급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염습을 마친 후였으니 사람들 눈에는 임종 직전의 동 내한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고모님을 살렸어.”
뭔가 신기하고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자세히. 어떻게 치료했는데?”
수재들의 재촉에 한원조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갔을 때 고모님은 이미 살아나신 후라 어떻게 고치는진 못 봤어.”
사람들은 다시 볼멘소리를 하며 수군댔다.
“그 동 내한을 치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한원조가 불쑥 묻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찻집 점원을 쳐다봤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의 사람이랍니다.”
찻집 점원은 신이 나서 정보를 전했다. 주씨라니, 그럼 아니네.
“아니긴 뭐가?”
누군가가 한원조의 혼잣말을 듣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한원조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고모님을 고친 그 사람은 정씨였지, 아마.
그런 말이 오가는 사이 밖에서 서생 몇 명이 들어왔다.
“다들 여기 있었군. 어서 서둘러. 좋은 소식이야. 장강주 선생께서 학당을 열고 수업을 하신대.”
그 말에 수재들이 벌떡 일어섰다.
“차정사라는군. 차정사에서 장강주 선생의 수업을 위해 방을 몇 칸 내줬대.”
“어서 가세나, 어서. 인원이 정해져 있을 테니 서둘려야 해.”
왁자지껄한 소란과 함께 찻집에 있던 서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절반이 텅 비었다.
“하여간 수재들이라고 해서 치켜세울 것도 없어. 저 허둥지둥 나가는 꼴 좀 보라고. 성현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네.”
수재들에게 멸시의 눈초리를 받았던 사람이 이때다 싶은지 바로 경멸의 말을 쏟아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찻집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글공부하는 사람 치고 장강주 선생의 수업에 흥분하지 않을 사람은 없죠. 저리 서둘러 가도 들어가 앉을 운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요. 장강주 선생은 하늘의 별과 같은 분이라 아무나 가르침을 얻을 순 없죠.”
“그럼 주씨 가문의 낭자도 하늘에서 내려온 별과 같은 분이겠네요. 그러니 이 진인께 가르침을 얻었겠죠.”
“이를 말입니까. 염라대왕과 알고 지내는 게 어디 원한다고 될 일이에요?”
저자에서는 학식이 높은 장강주 선생에 비해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묘한 의술을 지닌 신의가 더 관심을 끌었다. 화제는 금세 주씨 가문의 낭자에게로 돌아갔고, 찻집 점원은 빙긋 웃으며 계속해서 차를 우렸다.
마차에서 내린 주 노야는 술에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비틀비틀 걸으며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취했어요?”
주 부인은 주 노야를 부축해 눕히는 시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가서 술 깨는 탕약을 달여 오너라. 계피 많이 넣고.”
시녀가 밖으로 나가자 주 부인은 방 안에 퍼진 술 냄새를 쫓기 위해 향을 한 대 더 피웠다.
“어디 갔었어요? 웬 술을 이렇게 마셔요.”
주 부인이 주 노야 앞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운풍루에 갔었소. 누가 청한 자리였는지 아시오?”
“누군데요?”
“어전 충좌고도군이었소! 내 조부님과 그자의 조부님은 섬주에서 함께 전장을 누빈 사이인데도 그자는 우리 주씨 가문을 무시해 왔지. 하지만 이젠 그자가 날 존중해도 내가 그자를 무시할 수 있게 됐소!”
주 노야는 손으로 허벅지를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와 진씨 가문, 동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해 날 포섭하려나 본데, 늦었어! 제까짓 게 뭐라고!”
주 노야는 취한 눈으로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한텐 교교가 있어!”
주 부인은 입을 삐쭉거리며 주 노야를 눕혀 주었다.
“그래요. 당신한텐 이제 교교가 있으니 그 사람들 신경 안 써도 돼요.”
“아, 참. 우리 교교를 보러 가야겠군. 뭘 좋아하는지 뭐 필요한 건 없는지 살펴서 다 사 주시오, 다. 우린 돈 많잖소. 원하는 대로 다 사 주시구려, 다!”
주 노야가 일어서려 하자 주 부인이 얼른 붙잡았다.
“아이고, 일단 좀 쉬세요. 아까 넘어진 것도 아직 성치 않은데 또 넘어지면 못써요. 당신의 교교를 위해 두 번이나 넘어지면 아주 볼 만하겠네요.”
주 노야는 그래도 일어서려고 했지만, 취기가 올라오는 바람에 허허 웃으며 도로 누웠고 금세 곯아떨어졌다.
한편 교교가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동씨 가문 사람들이 병자를 데려간 후, 밖에서 펼쳐진 떠들썩한 일들은 이곳과 무관한 듯했다. 여종 하나가 문밖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야?”
안에 있던 여종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부인께서 깼냐고 물으셔서.”
여종이 나지막이 물었다. 이제 아랫것들은 따로 주의를 주지 않아도 이곳에 오면 절로 목소리를 낮추게 됐다. 동 내한이 실려 나간 일로 놀란 것은 바깥세상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주씨 가문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죽을 사람을 살려내다니!
진 노태야의 경우에는 직접 본 게 아니었다. 은근히 놀라긴 했지만 엄청난 충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엔 모두가 직접 목도한 것이다. 정말 신의야! 정녕 신선의 제자였어!
“아직.”
여종이 대답했다.
“이틀이나 주무셨잖아.”
소식을 알아보러 왔던 여종은 놀란 눈치였다.
“황천길에서 사람을 끌고 왔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겠지.”
여종은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어서 가, 가라고.”
씩씩거리며 돌아서던 여종은 몇 보 걷기도 전에 주육낭과 부딪쳤다.
“아직 안 일어났다고?”
주육낭이 다짜고짜 물었다.
“네, 의원이라도 부를까요?”
여종이 얼른 되물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의술을 가진 신의가 의원을 부른다? 주육낭의 표정이 괴이해졌다.
“불러!”
진 공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딱 잘라 말했다.
“의원을 부르라고?”
주육낭이 우습다는 듯 물었다.
“그래.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
진 공자는 주육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육낭, 귀신이니 신묘니 하는 말은 과하면 못써. 아둔한 백성이나 하는 소리지, 성인군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지. 전에는 명성을 얻기 전이니 사람들이 호기심에 떠들어대도 상관없었지만, 이번 일로 정 낭자는 경성에서 명성을 얻었잖아. 뒤에서 어떤 말이 돌든 공식적으로는 떳떳한 명성이어야 해. 안 그럼 정 낭자에게 안 좋아.”
주육낭은 잠시 침묵하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좋은 뜻을 알아주기나 할지 모르겠네.”
진 공자는 빙긋 웃으며 차를 빻는 공이를 집어 들었다.
“좋은 뜻이면 다 알게 돼 있지.”
여종이 의원을 부르러 나가려 하자, 진 공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씨가 이틀이나 못 일어났으니 서둘러 의원을 부르도록 해라. 유명한 의원을 데려올 필요는 없고, 가장 유명하고 큰 약포에서 아무나 하나 데려오면 된다. 서두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주씨 가문 하인들은 동작이 잽쌌다. 차 한 잔을 채 마시기도 전에 의원이 주씨 저택의 대문을 넘어 정교랑의 거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에요?”
문을 여는 시녀의 얼굴에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녀는 여종을 훑어본 후 노인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마지막으로 대문 밖에 뒷짐을 지고 선 주육낭을 쳐다봤다.
“아씨께서 오래 안 일어나셨잖아. 노야와 부인께서 걱정이 크시거든. 그래서 의원을 모셔 왔어.”
여종이 조심스레 말했다. 시녀는 눈빛을 번뜩이며 두 사람을 훑었다.
“기다려 봐요. 아씨께서 깨어나셨나 보고 올게요.”
시녀가 문을 닫고 들어간 후 얼마 안 가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시녀가 공손하게 말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대문 밖에 서 있던 주육낭은 의원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뒤돌아 가 버렸다.
실내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어두컴컴했다. 안내를 받은 노인이 침실로 들어가자 침상에 옆으로 누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아씨, 의원이 왔어요. 맥을 짚을게요.”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손을 꺼내자 꿇어앉은 의원이 손을 쳐다봤다. 소녀의 작디작은 손은 앙상했다. 어둠 속에서 보니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생기가 없고 거칠어 보였다. 굳은살이 있는 손가락까지 있었다.
늙은 의원이 얼른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맥을 짚고 잠시 후 손을 바꿨다. 방금 전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왼손 역시 몇몇 손가락에 굳은살이 있었다. 어떤 연유로 왼손과 오른손 손가락 모두에 굳은살이 난 거지?
“안색을 보도록 휘장을 걷어 주시오.”
시녀가 네 하고 대답한 후 휘장을 걷었다. 비단 이불을 덮은 왜소한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지하게 살피고 난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휘장을 내렸다.
밖에는 벌써 소식을 들은 주 부인이 와 있었다. 주 부인은 의원이 밖으로 나오자 미처 앉기도 전에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부인, 조용히 해 주세요. 저희 아씨께선 아직 주무세요.”
시녀가 말했다.
“다 너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진작 말 안 했어?”
주 부인은 눈썹을 치켜뜨며 호통을 쳤다.
“자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란 말이 나와? 이러니 내가 마음을 못 놓지. 교교가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 수나 있어?”
시녀는 주 부인을 흘겨본 후 고개를 돌리고 상대하지 않았다.
“의원, 어때요?”
시녀가 의원을 보며 물었다. 의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아씨께서는 심신이 피로하여 호흡이 약합니다. 아마 어지럼증 때문에 일어나시기 힘들 겁니다.”
시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창백하고 손톱의 색도 옅습니다. 맥박에도 힘이 없고요. 기혈이 허한 증세입니다.”
정말 병이 났다고?
“그 애는 신의인데? 어찌 병이 난단 말인가?”
주 부인이 뜻밖의 말에 놀라 소리쳤다.
신의?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상 쪽을 바라봤다. 드리워진 휘장이 시선을 가렸지만 의원의 눈엔 방금 전 본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열네다섯의 나이에 창백하고 초췌한 안색은 맥을 짚을 필요도 없이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주씨 가문의 한 낭자가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일은 약포에서 이미 들은 터였다. 기인이 비방을 얻은 일은 신기할 것도 없었다. 성 밖에 사는 한 노파는 의술을 전혀 모르면서도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술로 머리에 난 독창을 고치는 법을 알았지만, 의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씨 가문에서 의원을 모셔 가는 것만 봐도 의원들의 추측엔 틀림이 없었다.
“의원도 스스로 고칠 순 없는 법이지요.”
의원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밥을 먹는 사람인 이상 병이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신선이 아니고서야.”
의원은 일부러 주 부인을 힐끔 쳐다보며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의원의 의도를 알아들은 주 부인이 눈썹을 치켜떴다. 이 늙은이가 감히 우리 교교의 명성을 망치려 들다니!
간신히 신의로 이름을 알리게 됐는데, 이 보잘것없는 돌팔이 의원 나부랭이가 가타부타하는 꼴을 어떻게 봐?
“본인의 의술이 보잘것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말게.”
주 부인은 콧방귀를 뀐 후 냉담하게 말했다. 의원의 의술을 폄훼하는 말은 최대의 금기였으니 의원으로서는 성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내 의술은 보잘것없으니 고명한 분을 찾아보시든가요.”
늙은 의원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대꾸했다.
“여봐라, 당장…….”
시녀가 주 부인의 말을 끊으며 발을 굴렀다.
“부인, 저희 아씨께선 병이 나셨는데 의원을 내쫓으시다니, 대체 저의가 뭐죠?”
내가 저의를 품어? 그냥 자는 것일 뿐 괜찮다고 했잖아? 왜 갑자기 내가 무슨 저의를 품은 게 돼? 주 부인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시녀는 주 부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의원을 붙잡았다.
“저희 아씨는 불치병만 고치지 다른 건 못하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세요.”
이 말엔 그래도 진심이 담겼군. 의원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진정하시오.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고 푹 쉬면 나을 거요.”
의원이 약을 처방해 주며 말을 이었다.
“기혈을 보해야 하오. 인삼영양탕을 적절히 복용하는 게 좋소.”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의원을 모셔 가 약을 지어 와요.”
시녀가 옆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에게 말했다. 여종들과 몸종들은 멈칫하여 주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지 말고 교교가 직접 약을 처방하도록 하는 게 어떨까?”
주 부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부인, 저희 아씨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시녀의 말에 주 부인은 벌컥 화를 냈다.
“너희 아씨가 저 꼴이 됐는데 이제야 알려? 그러고도 이리 당당해?”
“어머니,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주육낭이 문밖에서 말했다.
“우선 약부터 지으시죠.”
주육낭은 여종을 시켜 마차를 준비해 의원을 배웅하도록 했다. 의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작별을 고하고 나갔다.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진 주 부인도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이게 사람을 놀리는 게 아니면 뭐야? 이건 안 고친다, 저건 안 고친다 하다가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치겠다더니, 이젠 사람을 고쳐 놓고는 자기가 병이 났대. 아주 사람을 들들 볶아!”
“어머니, 이것도 좋은 듯합니다.”
주육낭이 진 공자의 말을 전하자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이게 더 좋구나, 이게 더 좋아. 귀신이니 신선이니 하는 말은 황당하지 않느냐. 우리 주씨 가문은 떳떳하다고.”
주 부인은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인네로서는 귀신이니 뭐니 하는 얘기에 더 믿음이 가기 마련이었다.
“하여간 여인네들이란. 저들이야 뭐라 하든 저들 일이고, 어쨌든 우리 교교가 죽은 사람을 살린 건 명백한 사실이오. 그거면 충분해. 일이 생기면 저들이 와서 빌게 돼 있어.”
약을 받고 진료비를 낸 후 주씨 가문의 여종이 자리를 떴다. 그러자 약포가 들썩거리며 늙은 의원 주위로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정말 그 낭자를 치료해 줬어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의술을 가졌으면서도 자기 병은 못 고치나 보죠?”
“몇 살이나 됐어요? 어때 보여요?”
각종 질문이 쏟아지는 통에 늙은 의원은 간신히 몸을 빼냈다.
“병자의 일을 어찌 함부로 말하겠소. 그런 얘기들은 관두시오.”
의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늙은 의원은 예를 지켰지만, 주씨 가문의 정 낭자가 의원을 불러 약을 지었다는 사실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정 낭자가 귀신과 소통한다는 풍문과 금세 뒤섞였다.
“귀신과 소통하니 죽은 사람을 살리겠지.”
“웬 헛소리요? 그럴 리 없소. 자기 병도 못 고치는데 무슨.”
“그야 귀신과 소통하느라 기혈을 소진해서 그렇지.”
“마치 본인이 귀신과 소통한 것처럼 말하는군. 뭘 안다고.”
찻집 점원이 정 낭자 얘기를 꺼내자 여기저기서 말들이 나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아예 싸울 기세로 달려드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새로운 추측을 내놓았다.
“그 낭자는 신선을 만났잖소. 신선에게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전수받았을 뿐, 자신은 신선이 아닌 거요. 그러니 죽을 사람만 고칠 수 있고, 나머지 병은 못 고치는 게지. 자기 자신도 못 고치잖소.”
그 말은 양측 모두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귀신설을 믿지 않는 이도 비술이라는 관점엔 동의했고, 귀신설을 믿는 이도 신선을 만났다는 점에서 만족을 표하면서 이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얻었다.
몇 번의 우여곡절과 반전이 이어지면서 주씨 가문의 정 낭자는 정월이 채 가기도 전에 경성에서 열에 다섯은 아는 인물이 됐다. 사람도 많고 매일 새로운 소식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경성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모든 일을 야기한 정교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주씨 저택에서 일체의 외부 접촉을 끊은 채 요양에 힘쓰고 있었다.
회랑 아래에 선 시녀가 여종이 가져온 채소며 고기를 하나하나 점검했다.
“싱싱한 시금치는 없어요?”
“이것도 이 겨울에 간신히 찾은 거야.”
여종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찾았어야죠. 성 동쪽 점포엔 있을걸요?”
여종은 숨이 턱 막히는 듯 우물쭈물 대답했다.
“가 봤는데 다 팔렸대.”
“다음부턴 일찍 가요. 이것 때문에 국물 맛도 제대로 안 나겠어요.”
여종은 고개를 숙이며 알았다고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시녀를 쳐다봤다.
“원하는 대로 사다 줘라.”
사정을 들은 주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돈이야 쓰면 되지, 돈이 무슨 대수라고. 우리는 정씨 가문처럼 돈돈 하면서 먹을 것으로 우리 교교를 박대하지 않아. 그깟 돈…….”
거기까지 말한 주 부인은 손거울을 내려놓더니 머리를 빗고 있던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는 차를 마시던 주 노야를 바라봤다.
“노야, 그 1만 관 말이에요. 교교가 갖고 있긴 좀 그렇겠죠?”
1만 관! 주 노야가 손을 멈췄다. 요 며칠 바빠 그걸 깜빡했군. 그 큰돈을 어린애한테 맡길 순 없지.
경성 밖 송가촌.
정월 하순의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낡은 집 마당에서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낭(大郎), 왜 나왔어요?”
거름 광주리를 등에 진 아낙이 들어오다가 문가에 선 사내를 보며 말했다.
“이제 괜찮소. 계속 쉬고만 있을 순 없지.”
이대작이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봄인데 슬슬 농사일을 시작해야지.”
아낙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를 부축해 앉혔다.
“소를 빌리면 우리 친정집에서 도우러 올 사람이 있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이대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일 필요 없소.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자네 친정에서 기꺼이 도와줄 리도 없고. 돈을 꾸러 갔을 때도 울면서 돌아오지 않았소.”
이대작의 말에 아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튼 너무 염려 말아요. 방법이 있겠죠. 그래도 병은 나았잖아요.”
“좋은 분을 만난 덕분이지.”
이대작이 문밖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은인의 존함은 기억하고 있소?”
아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수재래요. 지금 가서 인사하느니 과거에 급제하거든 그때 찾아가서 감사를 전해요.”
거기까지 말한 두 사람은 씁쓸해졌다. 고마움을 어찌 표한단 말인가. 지금 형편으로는 일가족이 봄을 날 수나 있을지 걱정인데.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참, 대낭. 취봉루가 문을 닫았대요. 이사를 갔다네요.”
얼른 화제를 돌리려던 아낙은 말을 뱉어 놓고 후회했다. 하필 그 얘길 꺼내다니! 역시나 이대작의 표정은 더욱 암담해졌다.
“그렇구려.”
“아마 팔았나 봐요. 새로 온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렇소? 또 식당을 열려나.”
이대작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식당을 열든 말든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당 분위기는 또다시 어두워졌다. 부부는 딱히 이야기를 나눌 흥이 나지 않아 멍하니 문만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 * *
새해엔 마을을 찾아오는 친척이 꽤 있었지만, 나귀만 타고 와도 훌륭하지 마차는 구경도 힘들었다. 누구네 친척이려나. 이대작 부부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마차가 이대작의 집 대문 밖에 멈춰 섰다.
마차의 휘장이 들리더니 밝고 화사한 치마를 차려입은 여인이 내렸다. 황량한 겨울인지라 하얀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대작 부부의 시선에도 문득 생기가 돌았다.
시녀는 좌우를 살피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했다. 길을 물으러 왔나?
그때 시녀가 이대작 부부를 보며 활짝 웃었다.
“기억이 틀렸나 했네요.”
시녀는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오더니 예를 표했다.
“언니, 저 기억하시죠?”
기억하고말고, 은인과 함께 왔었잖아. 의원까지 불러 준 은혜를 어찌 잊을까. 이대작 부부가 얼른 일어났다.
“공자님과 함께 왔었잖아요.”
아낙의 말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함을 내밀었다. 이대작 부부는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정초에 찾아오면서 빈손으로 올 순 없죠.”
시녀는 웃으며 함을 내려놓았다. 이대작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그제야 자리를 내주려 했지만, 앉을 만한 자리가 딱히 없었다.
“괜찮아요. 실은 오라버니한테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네, 네. 말씀만 하십시오.”
이대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자와 잘 아는 사이면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이미 꼴이 이러하니 해치려 들 사람도 없고.
“아는 친구들이 경성에 올라왔는데 마침 신선거 자리를 내놨더라고요. 그래서 거길 사들였어요.”
이대작 부부는 깜짝 놀랐다.
“거길 댁들이 샀다고요?”
시녀가 빙긋 웃었다.
“저희가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이요. 외지 사람인데 서북에서 돈을 모아 상경했죠. 형제들의 생계가 막막하니 가게라도 열어 먹고살려나 봐요.”
이대작 부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근데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그 사람들이 여기 사정을 잘 모른다며 저한테 숙수를 구해 달라는데, 오라버니가 생각나더라고요. 한 공자를 통해 전에 숙수를 하셨단 얘길 들었는데, 부엌을 좀 맡아 주실 수 있어요?”
시녀의 물음에 이대작 부부는 멍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잖아도 먹고살 길이 막막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니. 한 공자라……. 이번에도 한 공자가 도움을 주는 것이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어디 간들 숙수 하나 못 찾겠는가.
“고맙습니다.”
이대작 부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두 사람이 얼른 예를 표했다. 정말 귀인을 만났구나.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지.
시녀가 손을 비비며 문 안으로 들어설 무렵, 하늘에서는 또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안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병이 나는 바람에 등불놀이 못 보러 가서 너무 아쉬워요. 난 할아버지랑 같이 갔었는데 엄청 화려했어요.”
문밖에 있던 몸종이 시녀를 보고 다가와 공손히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 있는 진단랑은 작고 정교한 꽃등을 들고 있었다.
“봐요. 언니 주려고 특별히 산 거예요. 어때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시녀가 다가가 꽃등을 받았다.
“정말 예쁘네요.”
시녀도 감탄했다. 옆에 있던 여종은 진단랑에게 그만 가야 한다고 했다. 진단랑은 못내 아쉬운 눈치였지만 가족들이 신신당부한 터라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다 나으면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다 나았어. 염려 안 해도 돼.”
정교랑이 말했다. 배웅하러 대문 밖으로 나간 시녀는 마차가 보이지 않은 후에야 돌아섰다.
“아씨, 다녀왔어요. 다 잘 처리했고요.”
시녀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도련님들도 그쪽으로 옮겨 가셨어요.”
얘기가 나오자 시녀는 저도 모르게 불평을 쏟아냈다.
“그 두칠이란 자가 정말 지독해요. 가게를 아주 싹 비웠더라고요. 기둥까지 뽑아갈 정도로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탓할 것 없어.”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인을 불러다 싹 수리했어요. 셋째 도련님 말로는 2월 보름쯤이면 얼추 될 거래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작도 동의했어요. 제가 같이 가진 않았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도련님들이랑 만났을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셋째 오라버니한테 잘 전했지?”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했어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무렵, 마차 행렬이 거리를 질주했다. 선두에 달리던 두 사람이 말고삐를 당기고 거리를 둘러보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기이하네. 취봉루가 여기 아니었나?”
식당은 한쪽 문만 열려 있고 사람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밥 짓는 연기도 나지 않고 떠들썩한 인파도 없이 쓸쓸한 모습이었다.
“문 닫았어요.”
길가에서 말을 끌고 가던 노인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문을 닫아요?”
말에 타고 있던 사람은 더욱 놀랐다.
“경성으로 옮겨 갔어요. 아주 대박이 났거든.”
노인이 무리를 살피며 말했다.
“이런 부자 손님들만 오시니 대박이 안 나기도 힘들지.”
노인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탄식을 내뱉고는 소를 끌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랬군. 두 사람이 말 머리를 돌렸다.
“군왕, 취봉루가 문을 닫았답니다.”
두 사람은 마차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럼 쉬지 말고 곧장 성으로 들어가자.”
마차 안에서 소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행렬이 대로를 질주하면서 눈보라가 일었다. 서봉추가 문밖으로 나와 좌우를 살피면서 멀어져가는 인파를 쳐다봤다.
“그래도 여기가 위치는 괜찮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이대작이 그 말을 듣고 따라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경성에서 가깝다고는 하지만 멀어도, 가까워도 문제죠. 어쨌거나 지나가는 손님은 꽤 많아요.”
병을 앓고 난 터라 아직 초췌하긴 했지만 한결 생기가 도는 얼굴이었다.
“요리가 맛있는 게 더 중요하지.”
서무수가 이대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숙수가 잘 좀 해 주시오. 우리 형제들은 이런 거 잘 모르니까.”
이대작은 황공한 듯 얼른 예를 표하며 겸손하게 굴었다.
“주인어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이거 미안해서, 원.”
무슨 일이지? 하루 사이에 뜻밖의 일이 너무 많이 생기네.
“어려워 마시고 편히 말씀하십시오.”
이대작이 공손하게 말했지만 서무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대청을 가리켰다.
“자, 들어가서 얘기하지.”
이대작이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어둑해진 무렵이었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나와 목이 빠지게 이대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아내가 물었다.
“한 은공의 소개인데 가짜일 리가 있소?”
이대작은 아이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어서 밥부터 차리시오. 먹고 나서 얘기합시다.”
아내는 긴말하지 않고 밥을 차려 왔다. 전에는 마을에서 이대작네 형편이 좋은 편이었지만 병을 앓으면서 수입이 끊긴 탓에 지금은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차려 온 밥상이라고 해 봐야 수제비가 전부였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아내에겐 겸상할 자격이 없었다. 남편과 시모가 식사를 마치고 아이에게 밥을 먹인 후에야 부엌에서 부랴부랴 한술 뜨는 게 전부였다.
“어떻게 됐는데요? 어떤 사람이에요? 정말 식당을 열겠대요?
정리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아내가 물었다. 이대작은 등잔불 앞에 앉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이거, 문서예요?”
아내의 물음에 이대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합의 인감도 있소.”
아내는 몹시 기뻐하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식당이나 할 사람 같진 않아 보였소. 군인 같더군.”
이대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서북에서 왔다고 했잖아요.”
아내는 바느질거리를 손에 들으며 말을 이었다.
“식당을 사들여 제대로 운영해 보려는 것 같으니, 당신은 음식이나 잘하면 돼요.”
이대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개업한대요?”
한시름 놓게 된 아내의 바느질 손놀림이 경쾌해졌다.
“아직 수리 중이오. 보름이면 될 거요. 나도 같이 공사를 감독했는데 공을 많이 들이더군. 전부 새것으로 바꿨소. 방 안엔 꽃무늬가 있는데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더라고. 방마다 다른 꽃이 놓여 있었소. 아주 훌륭해.”
아내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남편은 여전히 손에 든 문서를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글도 모르면서. 읽어 준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아내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 이건 내 것이 아니오.”
이대작이 말했다.
아내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 장이 더 있네요?”
그제야 남편의 손에 든 문서가 두 장이라는 걸 발견한 아내가 물었다.
“이건……?”
“이건 은공께 드릴 거요.”
이대작의 말에 아내는 더욱 놀랐다.
“은공이요?”
“실은 이것도 원래 내 것이지만.”
이대작은 문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은공께 드리기로 했소.”
눈을 동그랗게 뜬 아내가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를 내려놓았다.
“주인장들이 가진 돈을 전부 털어 가게를 사고 수리를 하는 거라면서, 처음 몇 달 동안은 품삯을 주기 어려울 거라고 했소.”
아내가 순간 얼어붙었다.
“품삯을 안 준다고요? 그, 그럼…….”
“대신 지분을 나눠 주기로 했소. 반년 이후부터는 품삯을 주고 말이오. 대신 그전까지 집에서 먹을 건 전부 거기서 가져올 거요.”
아내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막막한 표정이었다.
“지분을 나눠 주는 게 그리 쉬울까요?”
아내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당초 노태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만 차일피일 미룬 통에 결국 손자한테 쫓겨나게 됐잖아요. 그 일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 꼴이 되지도 않았죠.”
“나도 그리 말했는데 주인장이 웃으며 자기들은 작은 가게라 돈 몇 푼 못 벌 거라고 그러더군. 다 함께 먹고 살면서 마음 편히 지내면 그거로 족하다 했소. 말이 좋아 지분이지 품삯만도 못할 거요.”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지 사람인 데다 이쪽 업계는 문외한이면서 식당을 사들였으니 장사는 안 봐도 뻔했다. 애초에 예전의 취봉루와는 비교가 안 됐다.
“근데, 그게 은공과는 무슨 관계죠?”
아내가 또 물었다.
“그 주인장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과거 얘기가 나왔소. 서북에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병을 얻어 죽을 뻔했는데 길에서 도움을 받았다더군. 내 이야기를 듣고도 무척 감동했소. 우리처럼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은인의 은혜를 못 잊지. 주인장들은 그런 일이 있었으니 더더욱 나를 숙수로 써야겠다고 했소. 그게 은혜를 갚는 길인 것 같다나. 물론 별개의 일이지만 말이오.”
이대작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서북 사내들이 참…….”
“정말 진국이네요.”
“그 주인장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보은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하기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이대작이 손에 든 계약서를 보며 말했다. 아니, 그때 누가 제안을 했던가? 아무렴 어쩌랴.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그럴 마음이 있었으니 상관없다.
“이 지분을 한 공자께 드린들 뭐 어떻소. 어차피 몇 달 후면 품삯을 받을 텐데, 이 지분이 대수라고. 한 공자께서 안 계셨다면 지분은커녕 품삯도 못 받았을 테니 깔끔하게 한 공자께 드리는 게 낫지.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대장부의 도리 아니겠소!”
이대작은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장면이 떠오르는지 통쾌해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보며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아내의 얼굴을 본 이대작은 헛기침을 한 후 자세를 바로 앉았다.
“당신이 보기엔 별로인 것 같소?”
아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대낭, 당신 정말 다 나았네요. 방금 얘기할 때 생기가 넘쳐 보였어요. 그토록 생기 넘치는 모습은 처음 봐요.”
남편의 부드러운 눈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에 존경심이 드러났다.
“아주 잘한 일이에요. 우리가 없이 살긴 해도 기회가 왔으면 은혜를 갚아야죠.”
이대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들이 전부 제대로 된 사람들 같았소. 진심으로 장사해 보겠다는 생각도 있고. 나도 열심히 해야지.”
이대작은 고생으로 거칠어진 아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날 만나 고생이 많구려.”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이 나한테 잘하잖아요.”
두 부부는 누추한 방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따스한 겨울밤을 보냈다.
동녘에 해가 뜨면서 새벽빛이 밝아 왔다. 정교랑은 주 부인이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모습을 보였다.
“교교, 좀 괜찮니?”
주 부인이 정교랑의 안색을 살피며 다정하게 물었다.
“안색은 많이 좋아졌네.”
사실 정교랑의 안색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긴 힘들었다. 언제나 똑같았으니까. 정교랑은 네 하고 가볍게 대답하며 고개를 까닥여 감사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의원을 불러다 줄까? 약은?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주 부인의 질문엔 끝이 없었다. 정교랑은 세 마디 당 한 마디 꼴로 대답했다.
“돈은 걱정하지 마. 우리 주씨 가문이 다른 건 몰라도 먹고 마시는 건 얼마든지 써도 돼. 네 아버지처럼 먹는 거로 너 섭섭하게 안 해. 네 오라비가 돌아와서 하는 말 듣고, 네 외숙이 당장이라도 네 아버지를 찾아가 따진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주 부인은 눈물이 글썽해 한숨을 지었다.
“세상에, 네 어머니가 해 간 혼수로 먹고살면서 널 그리 대하다니.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친족이니 뭐니 신경 안 쓰고 당장 널 데려오는 건데.”
정교랑은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건 걱정 마. 그 사람들한테 빼앗기진 않을 테니. 너 시집갈 때 우리가 보태서 해 줄게.”
주 부인이 화제를 돌렸다.
“네 돈은 내가 관리하마. 그냥 보관해 둬도 좋고 점포를 몇 개 늘리는 것도 좋지. 교교, 외숙과 외숙모가 너 먹고 입을 걱정 안 하고 떵떵거리며 살게 해 줄게.”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동씨 가문에서 준 비전을 가져오렴. 돈을 그냥 거기 두긴 아깝잖니. 우리 집에서도 잘 관리할 수 있어.”
주 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필요 없어요.”
주 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교교, 네 돈을 탐내는 게 아니니 걱정 마. 넌 아직 어려 간수하기 힘들잖아. 내가 대신 보관할게. 나중에 줄 거야.”
주 부인은 웃음을 짜내며 설득했다.
“네가 갖고 있으면 괜히 보관하는 비용만 들잖아. 이 외숙모가 관리할게. 돈이 돈을 낳는 거야. 나중에 너 다 줄게.”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다시 말했다. 얘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세? 주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시녀가 말을 받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희 아씨께서 필요 없다니 이제 그만하시죠? 이러다 아씨께서 울기라도 하시면 남들이 비웃어요.”
저 천것이! 격분했던 주 부인이 곧 냉정을 되찾았다.
“교교, 널 위해 이러는 건데 싫어?”
주 부인이 물었다.
“싫어요.”
정교랑이 주 부인을 보며 말했다.
“나 배고파요.”
배고파? 나 배고파요? 지금 말이야? 무슨 배가 고파?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멈칫하던 주 부인은 무언가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듯 정교랑을 쳐다봤다. 주육낭의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강주에서 돌아온 아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던 때의 목소리였다.
“절 보자마자 딱 한 마디 하더군요. 그 말에 정씨 집안이 발칵 뒤집혀 망신을 톡톡히 당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러더군요. ‘나 배고파’.”
나 배고파……. 참으로 꼭 필요한 때에 딱 맞는 사람 앞에서만 하는 말이었다.
주 부인은 눈앞에 검은 머리를 길게 드리우고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 검은 두 눈은 깊은 심연처럼 속을 알 수 없어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했다.
이 바보가, 감히 날 협박하다니!
주육낭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길에서 만난 여종들과 몸종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서면서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소년을 쳐다봤다.
“공자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누가 또 공자님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 아침 댓바람부터.”
“요즘 통 기분 좋은 일이 없으신 거 같아.”
“정 아씨 쪽에 가시나 본데.”
반근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불안한 표정으로 저쪽을 바라봤다. 아씨…….
“야, 서둘러. 밥값은 해야지?”
다른 몸종이 못마땅한 듯 소리쳤다. 반근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방망이를 움켜쥐며 다른 몸종과 힘을 합쳐 풀을 먹일 이불보가 담긴 광주리를 들어 올렸다.
“정교랑, 무슨 도둑이라도 막아? 싫으면 싫은 거지, 뭐 하러 어머니 심기를 그리 건드려?”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며 주육낭이 소리쳤다.
“공자님, 저희 아씨는 병이 나셨어요.”
시녀가 눈썹을 치켜뜨며 따졌다.
“내 앞에서 연극하지 마. 그런 거짓말은 남들한테나 하라고!”
주육낭이 소리쳤다.
“정교랑, 그깟 몸종 때문에 이래? 우리가 너한테 관심을 안 줬다, 이거 아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주육낭은 앞에 앉은 여인의 그 무뚝뚝한 표정을 보며 가슴속에 열불이 치솟았다. 모친 때문에 분노로 화가 난 건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뜻에서 한 것도 네 눈엔 악의로만 보이지. 까놓고 말할 순 없어? 이렇게 꽁해 있지만 말고?”
“그깟 돈이 무슨 대수라고. 우리가 그걸 탐낼 거 같냐!”
“우리가 농간을 부린다 치자. 정교랑, 넌 네가 잘났다고 여기잖아. 아무것도 겁날 것 없지 않아? 네 눈에 우리 주씨 가문은 지긋지긋하기만 한 거 아냐?”
“정교랑, 네가 이제 명성 좀 얻었다고 우리가 네 덕 좀 볼까 욕심내는 줄 아는데, 앞으로 네 비바람을 막아 줄 건 우리 주씨 가문이야. 가족의 보호가 없으면 여기저기서 물어뜯기고 잡아먹히게 돼 있어!”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고 얼굴이 시뻘게진 채 따지고 드는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이 한 말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다.
“누가 날 먹어요?”
주육낭은 이를 갈았다.
“계속 시치미 떼든가!”
주육낭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리자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꿇어앉은 시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씨…….”
“괜찮아.”
정교랑이 문밖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또 내 심기를 건드리네. 같은 실수를 세 번 거듭하면 안 되는데.”
같은 실수를 세 번 거듭해? 육공자가 경솔하고 무례하게 군 일? 세 번이 넘으면 뭐? 시녀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글씨 연습해야겠다. 책 읽어 봐.”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옆에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경성, 저잣거리.
아직 밥때도 안 됐는데 신선거는 벌써 인파로 북적였다. 노래를 부르며 술을 따라 주는 기녀와 다과를 파는 소리, 웃고 떠들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과 노구솥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까지, 대청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일 층은 저마다 자리를 찾아 앉아야 해서 다소 복잡했지만, 별실로 꾸며진 이 층은 조용하고 품격이 있었다. 점원들이 차와 술을 들여가고 내올 때만 열린 문틈으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별실로 들어간 두칠은 얼른 문을 닫았다. 커다란 별실이었다. 맞은편에 화초 병풍이 놓여 있고, 뒤에 앉은 두세 사람이 병풍 너머로 어렴풋이 보였다. 두칠은 더욱 웃음을 짜내며 병풍을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넓적한 얼굴에 큰 귀, 하얀 얼굴에 긴 수염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오십 대의 사내는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할아버님.”
두칠이 앞으로 걸어가 꿇어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두 관기(官妓)가 술 주전자를 건네자, 두칠이 직접 받아 술을 올렸다.
“할아버님께서 살펴 주신 덕분에 술을 팔 수 있게 됐습니다.”
술은 관부에서 관리했기에 주점에서 술을 팔려면 관부에 세금을 내야 했다. 사내는 술잔을 받아 들며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그래, 하고 대꾸했다.
“좋은 술도 아니고. 관부에서 파는 술은 맛이 제대로 빚은 술만 못해.”
사내가 딱 한 모금만 마시며 말했다.
“회선루에서 빚은 술이 맛있더구나. 거기 비법을 알아 와라.”
“하지만 회선루는…….”
기뻐하던 두칠이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점을 열고 직접 술을 양조겠다는 허가를 받으려면 관부의 뒷배가 필요했다. 더구나 술을 빚는 비법은 그 가치가 천금에 달하니 말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사중승 우문청이 실각했다.”
사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두칠은 바로 이해했다. 우문청은 회선루의 뒷배였다. 뒷배가 쓰러졌으니 이익을 나눠 먹을 때가 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두칠은 얼른 큰절을 올렸다. 과로신선에 맛좋은 술까지 있는데 신선거가 돈을 쓸어모으지 않기도 힘든 일 아닌가! 하지만 대박이 나면 눈독을 들이는 인간들이…….
“할아버님, 지난번에 말씀드린 일 말입니다. 만에 하나…….”
두칠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무슨 일?”
사내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과로신선의 진짜 주인이요.”
두칠이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
사내는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뭔 대수라고. 언급할 가치도 없다.”
“하온데 주씨 가문이 요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진 상공에 이어 동 내한과도 연줄이 닿은 데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선까지 집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두칠이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선?”
사내는 더욱 냉소를 지었다.
“군자는 괴력난신을 멀리해야 하느니라. 시정잡배들의 입은 못 막는다 쳐도, 저들까지 나서서 인정한단 말이냐? 어엿한 조정 관료가 그런 말을 대놓고 떠벌리다니. 내 눈엔 주씨 가문의 저의가 의심스럽구나. 저 과로신선도 신선이 준 거라고 하더냐? 저들만 쓸 수 있고 남들은 못 쓴대?”
거기까지 말한 사내가 손 닦던 물수건을 탁자 위로 탁 내팽개쳤다.
“어딜 감히!”
사내의 입가에 탐욕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감히 그리 나온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감히? 나쁘지 않다고? 두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 재미있군.”
사내는 혼잣말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동 내한을 치료한 후 곧바로 정교랑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그 놀라운 일에 대한 경탄이 수그러든 건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정교랑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교랑의 확고한 원칙 때문에 벌떼처럼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곧 죽을 사람은 많지 않았고, 1만 관을 감당할 정도의 재력을 가졌으면서 곧 죽을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았다. 물론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늦겨울 새벽, 조용했던 주씨 저택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어서 신의를 불러 주십시오.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주 노야 내외는 두통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번번이 다 죽게 생긴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네요, 재수가 없으려니.”
주 부인이 푸념했다. 동씨 가문의 일을 겪으면서 주씨 가문도 교훈을 얻었고, 한층 대담해졌다. 이제 누가 됐든 무슨 이유든 간에 주씨 저택의 문턱을 함부로 넘을 순 없게 됐다.
“왜 막는 거요? 우린 주씨 가문을 찾아온 게 아니오. 정 낭자를 찾아온 거라고. 냉큼 비켜서시오.”
문밖에 선 사람들은 기세를 높여 소리쳤고, 여인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주 부인은 그 소리에 열이 받아 또다시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주씨 가문은 빠지라니! 이것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대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도록 그냥 둘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명첩을 받고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교랑은 병이 났어요.”
마당에 선 주 부인이 말했다. 주 부인은 명첩에 쓰인 별 볼 일 없는 이름을 보고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정교랑이 병을 얻어 의원을 부른 일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때마침 시녀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부인, 저희 아씨께서 출타하셔야 하니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순간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출타할 정도면 아픈 게 아닌가 본데?
주 부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일찍 말하든가, 늦게 말하든가, 하필 이때 말하다니. 주 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교랑은 왜 이렇게 사사건건 나한테 맞서고 드는 거지?
“정 아씨, 정 아씨.”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정교랑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이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지라 주 부인은 하는 수 없이 이들에게 길을 안내했다. 이들은 중문에서 정교랑과 마주쳤다. 정교랑은 두모를 살짝 들어 올리고 실려 온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지금은 못 고쳐요. 다른 사람한테 데려가 봐요.”
사람들은 멈칫했고, 주씨 가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못 고친다고? 왜 또 못 고쳐? 원칙에 안 맞아 안 고치는 게 아니라, 못 고친다고 했지? 이게 무슨 뜻이야?
“아씨, 아씨.”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 아버지는 힘드실 것 같습니다. 아씨, 제발 자비를 베푸세요.”
“돈 있습니다. 돈도 가져왔어요! 1만 관이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니, 1만 5천 관도 상관없습니다. 2만 관도 괜찮아요. 아씨, 제발 살려 주십시오!”
2만 관이라니! 주씨 가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교랑은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고개를 까닥여 예를 표했다.
“난 병이 나서, 병자를 고칠 수 없어요.”
병이 났다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의가 병이 나? 그저 저잣거리에 떠도는 풍문 아니었어? 아니, 그래도…….
“낭자, 낭자, 제 부친께서……. 방법 좀 생각해 주십시오. 돈은 있습니다.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몇몇이 소리쳤다. 정교랑은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잠자코 있었다.
“못 알아들었어요?”
몰려드는 사람들을 막으며 시녀가 언성을 높였다.
“아씨께서 편찮으셔서 못 고친다고 하셨잖아요. 아씨는 편찮으시면 병을 못 고치세요. 어서 모시고 가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뒤쪽에서 두봉을 싸매고 있는 여인은 과연 앞으로 나설 뜻이 없어 보였다. 상황 파악을 끝낸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아이고, 진짜 독하네!”
“죽는 걸 보고도 안 구하겠다니!”
“주씨 집안은 참 모질기도 하지!”
“주씨 집안은 사람을 가리는군. 우리가 진씨 가문이나 동씨 가문만 못하다고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안 구하겠다네!”
뭐가 주씨 가문이 독하고 모질다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이게 주씨 가문과 무슨 상관이지?
울화통이 치민 주 부인은 또다시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안 고친다던 병을 갑자기 고친다고 하질 않나, 원칙에 안 맞으면 안 고친다더니 또 뚝딱 고쳐 놓고, 이제 와선 또 안 고치겠다니! 아주 사람을 들들 볶아 죽이는구나! 어쩜 이렇게 뻔뻔해! 왜 못 하는 말이 없어! 병이 나? 병이 났으면 얌전히 누워 있어야 할 거 아냐. 최소한 그럴듯하게 보이긴 해야 하잖아! 다른 사람들이 무슨 바보인 줄 알아? 저 화근덩어리!
“그다음엔?”
진 노태야가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방법이 없으니 결국 다른 의관으로 데려갔죠.”
사환 하나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죽었대?”
몇몇 낭자들이 긴장하여 물었지만 진단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럴 뻔했죠. 다행히 그 댁 사람들이 잽싸게 태의국으로 쳐들어갔나 봐요. 태의 네다섯 사람이 한나절을 매달린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했대요. 원기를 상한 데다 어혈로 종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봐, 애초에 죽을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정 언니가 그래서 안 고친 거야. 원칙에 안 맞잖아.”
진단랑이 말했다.
“태의들의 의술이 좋아서 살린 걸 수도 있잖아?”
낭자 하나가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면 처음부터 죽을 사람이 아니라 안 고치겠다고 했어야지. 왜 병이 나서 못 고친다고 해?”
정단랑은 입을 삐죽이며 잠자코 있었다.
“의원은 부모의 마음을 가졌다던데, 어떻게 딱 잘라 안 보겠다고 하고 진짜 안 보냐.”
다른 낭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 원칙을 말한 건 본인이야. 본인한테 병이 나면 안 고친다는 건 원칙에 없었잖아. 본인이 원칙을 어긴 꼴 아냐?”
“언니가 병이 나서 못 고친다는데 뭐 어때? 그리고 언니는 의원도 아닌걸.”
진단랑이 나섰다.
그렇지. 정교랑은 의원이 아니었다. 두 자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도…….
“의원은 아니지만 병을 고칠 수 있잖아.”
잠시 침묵했던 낭자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으면서 안 하는 건 도의가 아니지.”
“정 언니는 병이 났잖아. 고치고 싶어도 못 고치는 거야.”
진단랑이 억울한 듯 반박했다.
“그 말을 누가 믿어?”
두 자매가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쪽 옆의 진 노태야는 입씨름을 하는 손녀들을 꾸짖지 않고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진십팔랑이 냉소를 지으며 자매들을 훑어봤다.
“이제 보니 정 낭자가 왜 말을 많이 안 하는지 알겠다.”
진십팔랑이 불쑥 입을 열자 자매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말해 봤자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다들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잖아. 정 낭자가 뭐라고 말하든 믿지도 않고.”
두 자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못마땅한 투로 따졌다.
“십팔랑, 너 그게 무슨 뜻이야?”
“정 낭자가 병이 나서 못 고친다는데 그 말을 안 믿고 함부로 추측하고 있잖아. 도의니 아니니 하는데, 그건 언니들의 도의지 정 낭자의 도의가 아니야. 왜 본인들의 잣대로 낭자를 구속하는 거야?”
두 자매는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따지려 해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 애초에 할아버지와 정 낭자가 낡은 묘당에서 만나 문진한 일이 없었다면, 숙부님이 강남까지 천 리 길을 내려가 청한다 한들 낭자가 왔을까요?”
진십팔랑이 미소를 짓고 있는 진 노태야를 보며 물었다. 손녀들의 시선에 진 노태야는 자세를 바로 앉았다.
“물론.”
진 노태야가 심호흡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안 왔겠지.”
진 노태야는 그 여인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투와 목소리를 따라했다. 예전이었다면 어떻게 고쳤을 거냐고 묻자 지금보다 훨씬 쉽게 고쳤을 거라고 하여 말문을 막히게 했을 때처럼.
각박해 보이고 매정해 보이다가도 올곧아 보였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닐 뿐, 거짓도 위선도 속임수도 허풍도 아부도 없으니.
“그럼 할아버지, 정 낭자가 원망스럽진 않으세요?”
진십팔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정 낭자가 할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전제라면요.”
남의 일이면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면?
손녀들이 진 노태야를 쳐다봤다. 아직 어린 진단랑은 언니들의 논쟁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원망’이라는 말은 알았다. 순간 긴장한 진단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 노태야를 보며 팔을 잡아 흔들었다.
“나라면 일단 생각을 했을 게다. 원망해 봤자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원망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더냐?”
“물론 그건 아니죠.”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나머지 자매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남을 원망하는 건 쉽지만 그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차라리 내가 왜 그런 일을 겪었나 생각을 해야지. 정 낭자가 안 고친 게 아니라 내가 정 낭자의 원칙에 안 맞았기 때문이다. 정 낭자가 날 못 고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병이 나 고생한 거야. 인과관계는 확실히 해야지.”
진 노태야는 크고 작은 손녀들을 쭉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든 매사 원인과 결과를 자신에게서 먼저 찾도록 해라.”
“행하여 만족을 얻지 못하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하나니, 자기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돌아온다(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而天下歸之 - 맹자)고 했죠.”
진십팔랑의 말에 진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여인이라 벼슬길에 나가 백성을 구제할 순 없겠지만,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것이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잘 살피며 남편의 내조를 잘하고 자식을 잘 훈육해야 한다. 늘 이 점을 명심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하지 말아라.”
손녀들이 얼른 공손히 예를 올렸다.
“조부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는 너희가 내게 질문했으니, 이번엔 내가 너희에게 질문하마. 만약 너희라면 2만 관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 고치겠느냐? 안 고치겠느냐?”
무려 2만 관이다. 2관이 아니라! 자매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현재 경성에서 혼수를 제일 많이 해 간 여인이 대략 10만 관을 가져갔으니, 2만 관이면 웬만한 집 여식의 혼수로 충분한 액수였다. 2만 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원칙과 도의도 봐야겠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도 봐야 한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는지도 봐야 하고.”
손녀들은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돌아가서 맹자의 <이루장구(離婁章句)> 상편과 <등문공(滕文公)> 하편을 각각 열 번씩 필사하도록 해라. 스승에게 시험을 보게 할 테니.”
손녀들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일어나 작별 인사를 올렸다. 뒤따라 나가던 진십팔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할아버지.”
진십팔랑이 눈빛을 빛내며 나지막이 물었다.
“아까 질문하실 때 전제를 빠뜨리신 거 아니에요? 그 병은, 고칠 수 있는 거였나요?”
진 노태야는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진짜든 가짜든, 가짜든 진짜든, 얽매일 필요 있겠느냐. 그만 가거라.”
진십팔랑은 더 묻지 않고 웃으며 예를 표한 후 나갔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매들이 천천히 걸어갔다. 진단랑이 울상을 지으며 진십팔랑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언니, 나도 필사해야 해?”
“넌 안 해도 돼. 글씨 연습부터 해.”
진십팔랑이 웃으며 대꾸했다.
“맞아, 맞아. 글씨 연습해서 정 언니처럼 멋진 글씨를 쓸 거야.”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진십팔랑은 멈칫했다.
“단랑, 정 낭자가 글씨를 잘 써?”
진십팔랑이 나지막이 물었다.
“응, 우리가 차정사 벽에 글도 남겼어.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기도 했는걸. 시는 내가 짓고 글씨는 정 언니가 썼다고 했더니 다들 안 믿으면서 날 놀리셨어.”
진단랑은 순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우뚝 멈춰 섰다.
“단랑, 저번에 우리 같이 갔을 때?”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읊었다. 진단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어린 나이인 데다 시일이 꽤 흐른지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무엇을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아버지가 서재에 둔 글씨야.”
진단랑이 말을 얼버무렸다.
“정말?”
진십팔랑이 다시 물었다.
“언니, 믿지도 않으면서 뭐 하러 물어! 아까 다른 언니들한테 뭐라고 했으면서 자기도 똑같네. 자기 생각만 믿지 내 말은 안 믿잖아.”
진단랑이 입을 삐죽이며 발을 구르자 진십팔랑이 웃었다.
“믿어, 믿어.”
진십팔랑은 몸을 굽히고 진단랑을 보며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단랑, 너 다음에 정 낭자한테 갈 때 이 언니도 데려가 주라. 어때?”
“좋아.”
진단랑이 호쾌하게 수락했다. 저쪽에서 진단랑의 유모가 다가왔다.
“아씨, 낮잠 주무실 시간이에요.”
진단랑은 언니들과 작별을 고한 후 유모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진십팔랑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준비를 해야겠네.”
진십팔랑은 흥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십팔랑, 뭘 준비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앞서가던 자매들이 돌아보며 물었다. 진십팔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필사할 준비 말이야. 난 글씨가 별로라 미리미리 써야 해. 안 그럼 스승님한테 벌 받을 거야.”
“그럼 어서 가자.”
자매들도 웃었다.
치료비 2만 관을 거절했다는 소문은 하루 만에 쫙 퍼졌다. 그 일로 손녀들을 훈계한 진 노태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얘깃거리를 좋아했다.
지난번에 염라대왕의 심기를 건드린 일로 신선의 비방을 도로 빼앗겼다는 설도 있고, 그 사람은 죽을 정도가 아니었으니 원칙상 고칠 수 없었다는 설도 돌았다. 거기에 돈이 적었다는 설이나 주씨 가문보다 신분이 낮기 때문이라는 설까지…….
무슨 말이 돌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좋은 말은 전부 정교랑 차지고 짜증 나는 말은 주씨 가문이 죄다 뒤집어썼으니 주 노야 내외로서는 참기 힘들었다. 이게 우리랑 뭔 상관인데? 열이 받은 주 부인은 나았던 기침병이 다시 도졌다. 하인들 사이에서도 의논이 분분했다.
“사촌 아씨께서 노야와 부인을 열 받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시는 건가? 아니면 진짜 못 고치는 건가?”
“당연히 노야와 부인을 열 받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지.”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못 고칠 병이 어디 있어?”
여종들과 몸종들이 수군대는 말에 옆에 있던 이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아니에요.”
다들 멈칫해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리니 한겨울인데도 소매를 걷은 채 이불보를 널고 있는 몸종이 보였다. 손이 꽁꽁 얼어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시선이 쏠리자 몸종은 피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네가 뭘 안다고.”
어멈 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에요. 아씨가 그러시는 이유가 있어요.”
반근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이유? 노야와 부인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지.”
“아니에요. 아씨께선 예전에도 그러셨어요. 노야와 부인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예전? 여종들과 몸종들이 반근을 꼼꼼히 쳐다봤다.
“아, 너 걔구나.”
반근을 알아본 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하긴, 원래 그 바보의 시중을 들었으니.”
“바보 아니에요! 그 누구보다 똑똑하신 분이에요! 알지도 못하면서!”
반근이 고개를 들고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사람들은 멍해졌다. 소리를 지르고 난 반근은 더럭 겁이 나는지 뒤돌아 뛰어갔다.
“뭐야, 진짜 이상한 애네.”
“저러니 아무도 안 데려간다고 하지.”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달음에 마당을 달려 나온 반근은 나무 아래에 서서 눈물을 닦았다. 저들은 몰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씨, 몸조리를 더 하셔야죠. 이렇게 서두르실 필요 없잖아요.”
“이번엔 이웃 부인의 병을 고치느라 전보다, 한곳에 며칠 더 오래 머물렀잖아. 이러면, 안 좋아.”
이러면 왜 안 좋은 건지, 전엔 반근도 몰랐다. 아씨를 따라다니면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씨를 떠난 후로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반근이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곳이 됐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덕분에 이제는 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일도, 아씨의 이해할 수 없었던 말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네가 가진 걸, 저들은 못 가졌어. 그런데 저들을 위해 쓰진 않겠다고, 네가 고집을 부렸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죄야.”
“그리고, 난 바보야.”
“여기로 생각해. 그럼 알 수 있잖아.”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작은 공을 세우는 게, 더 나아.”
“우선 널 믿게 하고 나서, 나머지는 천천히 풀어나가면 돼.”
“반근, 한 공자가 말했지. 이 정도 수고쯤이야, 누구나 도울 수 있는 일이니, 은혜랄 것도 없다고.”
“반근, 한 공자 같은 사람을 만나는 우연은 많지 않아.”
반근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아씨의 마지막 가르침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아쉽게도 그땐 몰랐지만.
반근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땐 아둔하여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여인 둘이서 먼 길을 떠날 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재능이 많으면 시기를 사고, 사람이 너무 좋으면 화를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한 걸음 물러서고, 한 걸음 비켜서야 했다. 물러서고 비켜서는 건 겁나서가 아니라 더 잘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아씨는 병을 고쳐 명성을 크게 얻었으니 이미 충분해. 지금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게 더 나아. 아씨는 늘 그러셨어. 병주를 떠나던 그 순간부터 한결같으셨지.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신 거야. 남들이 뭐라 수군대고 소리치고 소동을 부리든, 개의치 않으셨지.
“우리 주씨 가문이 뭘 잘못했어! 고친다고 말한 것도 그 애고, 안 고친다고 말한 것도 그 애야.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주육낭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씩씩거렸다.
“그 여인은 외로운 처지고, 주씨 가문은 외가 혈육이잖아.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어른의 과오가 되는 게 당연한 이치지.”
진 공자가 웃으며 대꾸하자 주육낭은 냉소를 지었다.
“그럼 잘난 건 저 스스로 똑똑해서고?”
“아니면 정씨 가문 덕이거나.”
진 공자는 분기탱천한 주육낭의 얼굴을 웃으며 쳐다봤다.
“다 작심하고 저러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사건이 전부 다! 고치는 것도 안 고치는 것도 전부 제 뜻대로잖아.”
진 공자가 풉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저 여인이 자네 집안 뜻대로 하겠어? 육낭, 저 여인이 바보인지 자네 집안이 바보인지 모르겠군. 뻔한 일 아니야? 뭘 그렇게 괴로워해?”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꽉 쥐었다.
“어디 갔다더냐?”
주육낭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묻자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여종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정 아씨께선 출타한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진 모르고요.”
아파서 병도 치료 못 한다고 해 놓고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해? 사람을 바보로 아는 거야?
주육낭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문밖을 바라봤다. 애초에 그 여인을 협박해 집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여인에겐 우습게 보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걸 바랐는지도 모르지. 협박이라. 대체 누가 누굴 협박한 거지? 누가 누굴 꼼짝 못 하게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