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60)

-쉬운-

“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게 생겼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주 부인은 초조해서 발을 굴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화근덩어리!”

주 노야 역시 부아가 치밀었다.

“누굴 욕하는 겁니까?”

동씨 가문 자제들이 주 노야를 에워싸며 소리치자 주 노야는 흠칫 놀랐다.

“이봐요, 주씨. 우리가 여기로 온 건 조상님들 덕인 줄이나 알아요!”

한 자제가 소리쳤다.

하긴 그랬다. 한림원의 학사이자 천자의 근신인 동 내한은 주 노야 같은 하급 무관으로서는 얼굴을 뵙기조차 힘든 상대였다. 집까지 왕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살아서 왔다면 영광이었겠지만, 죽어서 오는 건 재수 없기밖에 더할까. 저 화근덩어리는 절대 남겨 둘 수 없다! 절대!

“마차 준비해서 당장 데려가요, 당장. 무슨 일이 있으면, 정씨 가문을 찾아가고요!”

주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다.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우리 주씨 가문은 모르는 일이오. 당신들이 쳐들어온 거지.”

주 노야도 언짢은 기색으로 동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다 함께 숨을 죽였다.

“병자의 가족분?”

시녀가 마당을 쳐다보며 물었다. 몇몇 자제들이 앞으로 나섰다.

“나다, 나.”

자제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친께서는……·.”

“저희 아씨는 치료비가 비싼데, 내실 수 있겠어요?”

시녀의 물음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치료비? 지금, 치료비라고 했나?

“낼게, 낼게.”

밖에서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얼마가 되든 낼게!”

동 부인이 첩실의 부축을 받으며 달려 들어와 눈물을 훔쳤다. 자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머니.”

자제들도 눈물을 흘렸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부인. 1만 관인데요. 오늘 갖다 주시면 내일 병자를 데려가실 수 있어요.”

시녀는 웃으며 살짝 예를 표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1만 관이라……·. 주 노야 내외는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터무니없는 액수잖아. 병자는 내일 데려가라? 동씨 가문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죽은 사람을 데려가라는 거야, 산 사람을 데려가라는 거야?

“동 부인, 이런 장난에 놀아나시면 안 돼요.”

정신을 차린 주 부인이 다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저 애는 어릴 때부터 좀 괴팍해서 우리도 도리가 없었어요. 괜한 말 귀담아듣지 마시고 어서 내한 대인을 모셔 가세요.”

“걱정 마요. 일이 생겨도 주 부인한테 죄를 묻진 않을 테니.”

동 부인 역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맞아요. 우리 부인께선 노야를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실 거예요.”

첩실도 옆에서 눈물을 닦으며 거들었다. 그때 또다시 문이 열리더니 시녀가 걸어 나왔다.

“실례지만 금침 한 상자만 사다 주세요.”

시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병을 고치는 의원이 금침도 없어 사다 써야 한다니, 병사가 무기도 없이 전장에 나가 적을 맞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황당한 일 아닌가! 주 노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을 구르고,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씨 저택의 마당은 등불로 대낮처럼 밝았고, 정교랑의 마당은 사람들로 더더욱 북적였다. 가족들이 치료를 지켜보는 걸 막은 데다 동 부인도 그만 쉬러 가라는 주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터라 다들 여기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씨 가문 자제부터 며느리, 하인들까지 전부 들락거리는 통에 얼핏 봐서는 이곳이 주씨 저택인지 동씨 저택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확인해 보게.”

동 부인이 아들의 손에서 건네받은 어음을 시녀에게 건넸다.

“비전(飛錢: 중국 고대에 쓰인 환어음의 일종)이야. 1만 관에서 한 푼도 안 빠져.”

시녀가 받아 유심히 들여다보며 확인했다. 일개 시녀가 본다고 뭘 알겠어? 주위 사람들이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맞네요. 복주 진주원(進奏院)의 비전이에요.”

시녀가 웃으며 문서를 받아 잘 챙겼다. 옆에 있던 주 부인은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빼앗고 싶은 표정이었다. 1만 관이라니!

“아니, 이걸 어떻게 받아.”

주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야 못 받으시죠. 부인이 치료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공개적으로 웃으며 칼을 꽂다니. 가뜩이나 열 받고 걱정되던 차에 주 부인은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약은 사 왔어요?”

시녀는 개의치 않고 밖을 보며 물었다. 동씨 가문 자제들이 입을 모아 재촉하자 곧 하인 하나가 약포를 들고 왔다.

“왔습니다, 왔어요.”

시녀는 약포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긴 그림자가 어른거리나 싶더니 곧 병풍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무슨 약을 사 오라고 한 거야?”

아들 하나가 나지막이 물었다. 하인은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보골지(補骨脂)와 두충(杜仲)입니다.”

동씨 가문 자제들이 한참을 기다렸지만 하인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또 다른 건?”

아들이 물었다.

“그리고 호두를 사 오랬는데……·.”

하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두? 동씨 가문 자제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늘과 술도요.”

하인이 말을 이었다.

“고기는 사 오라고 안 하던?”

한 사내가 못 참고 말을 이어받았다. 동씨 가문 자제들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사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관둡시다. 약을 사 오랬든 장을 봐 오랬든 알 게 뭡니까. 애초에 이 낭자를 보러 온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니 일단 기다려 보죠. 어차피 길게 기다릴 필요도 없잖습니까. 내일이면 알게 될 테니.”

두꺼운 두봉을 내오던 주씨 가문 여종들은 회랑 아래에 서 있는 주육낭을 발견했다.

“공자님, 그만 들어가 쉬세요.”

여종 하나가 커다란 두봉을 건네며 말했다.

“모친께서도 안 들어가셨잖느냐. 여긴 외간 사내들뿐이라 형수나 누이가 오기도 불편하고. 내가 있는 게 낫지.”

주육낭이 두봉을 받으며 말했다.

“만에 하나 일이 생겨도 지켜 드릴 수 있으니.”

“효심이 지극하세요.”

여종들은 예를 올린 후 여인들에게 옷을 가져다주러 갔다. 밤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대낮처럼 환한 밤을 불안에 떨며 보냈다.

날이 밝을 무렵, 진소는 후원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 노태야는 지팡이를 짚고 두 시녀와 함께 산책 중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진소가 부르는 소리에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췄다.

“동풍이 불었습니다.”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는 멈칫하다가 실소를 터뜨리더니 곧 웃음을 거뒀다.

“누구더냐? 정초부터 딱하기도 하지.”

진 노태야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동 내한입니다.”

진소가 나지막이 고했다.

“그럴 줄 알았다. 금석을 먹다니 죽을 짓을 사서 한 게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명이 길구나. 정 낭자한테 달려갔으니.”

“금석을 먹다가 목숨을 잃은 이가 한둘이 아닌데, 살릴 수 있을까요?”

진소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연하지.”

진 노태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며 손을 뻗어 아들을 토닥였다.

“고인이 제자를 세상으로 내보냈을 땐, 명성을 망치라고 보낸 게 아니야.”

“고인 얘기가 나와서 말씀인데, 어제 새로운 소식이 왔습니다.”

“그래?”

진 노태야는 바로 관심을 보이며 옆에 있던 시녀에게 지팡이를 건넸다.

“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불과 하룻밤이었지만 소식이 빠른 사람들은 벌써 다 알고 있었다. 주씨 저택 앞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측문이 열리면서 마차 한 대가 빠져나오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마차는 빠르게 빠져나갔다.

“곡소리 들렸소?”

“남자요? 여자요?”

* * *

거리를 달리는 마차 앞으로 폭죽이 터졌다. 거리를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폭죽이 팡팡 터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뭐야? 누구네 혼례인가?”

멀리 있던 사람들까지 쳐다보며 궁금해했다.

“주점이 개업하는 것 같소.”

누군가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대답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의 한 주점 앞에 2장(丈) 높이의 가설막이 들어섰다. 비단으로 만든 조화도 눈에 띄었다.

“‘신선거’로군.”

글을 아는 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휘날리는 깃발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신선거라니, 거 이름 한번 대단하네.”

신선거를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 밖에 있던 거기 아니오? 분점을 냈나?”

“여긴 분점이 아닙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두칠이 문 앞으로 나와 직접 인사를 건넸다.

“우리 신선거는 오늘부터 여기서 영업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칠이 웃으며 공수의 예를 표하고 읍을 했다.

“우리 신선거의 과로신선은 값도 싸고 맛도 훌륭합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좋아요.”

관리인도 웃으며 거들었다.

“그러잖아도 벌써 며칠째 과로신선 맛을 못 봐서 먹고 싶었는데, 여기로 이사를 왔구먼. 앞으로 다니기 편하겠어.”

누군가가 소리치며 앞장서 들어갔다. 그 사람을 필두로 원래 신선거를 드나들던 단골에 구경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몰려들면서 이 층짜리 신선거는 금세 손님으로 가득 찼다.

“경하드립니다, 대인.”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두칠은 손님으로 가득한 건물 안과 끊임없이 몰려드는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손을 허리춤에 대고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시각 성 밖에 있는 신선거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넓은 대청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네다섯 명이 전부였다.

“뭐가 어째요? 며칠 더 상의해 본다지 않았소.”

범강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굴에 부스럼이 가득한 사내가 코를 긁으며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새 가게를 개업해서 급전이 필요해요. 살 건지 안 살 건지 확실히 얘기하십시오. 댁들이 안 사도 살 사람은 줄을 섰으니까.”

사내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계약서를 탁탁 치며 말했다.

“물론 살 겁니다.”

범강림이 서무수를 보며 말하자 서무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씁시다.”

“통쾌하십니다.”

부스럼이 난 사내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고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받아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던 서무수는 돌연 눈을 치켜떴다.

“8천 관 아니었소? 왜 갑자기 9천이 됐지?”

“형님, 경성에 신선거가 개업하면서 여기까지 덩달아 알려지고 있잖습니까. 여기가 신선거 자리였다고 하면 앞으로 장사하면서 덕을 톡톡히 볼 테니, 이 정도 가격은 올려 주셔야죠.”

부스럼이 난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날강도가 있나!”

서봉추가 탁자를 탁 치고 일어서며 눈을 부라리고 고함을 쳤다. 부스럼이 난 사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얼씨구, 억울해요? 인정 못 해? 손해 보는 거 같아서?”

사내는 손을 뻗어 계약서를 낚아챘다.

“됐어요, 관둡시다. 안 사면 그만이지, 서로 얼굴 붉힐 거 없잖아요. 정초부터 뭐 하러 그래.”

서봉추는 열이 받아 눈을 부릅떴다. 경성 건달들은 서북 부랑배보다 훨씬 지독하군! 서무수가 눈을 치켜뜨자 서봉추는 퉤 하고 침을 내뱉고는 자리에 앉았다.

“뭐요, 그냥 여기서 관두시든가. 나도 바쁩니다. 새 가게 개업해서 눈코 뜰 새도 없는데, 당신들 때문에 벌써 며칠을 허비했어요. 아님 다른 집으로 가 보시든가.”

사내가 손톱을 쑤시며 말하자 서무수가 손을 내밀었다.

“됐소이다. 계약합시다.”

계약서에 수결을 마치자 부스럼이 난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공수의 예를 표했다.

“그럼 내일 관부에 가서 같이 등기하고 잔금 치릅시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수의 예를 표한 후 먼저 나갔다.

“진짜 시골 촌뜨기들이네. 겁 한번 줬다고 바로 꼬리를 내리다니.”

부스럼이 난 사내는 동료들과 함께 문을 닫으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 거금을 주고 이 낡은 가게를 사들였으니, 얼마 안 가 알몸으로 쫓겨날 거다.”

“형님, 알 게 뭡니까. 어쨌든 문서로 딱 박아 뒀으니 우리 원망도 못 할 텐데요.”

두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경성으로 돌아온 서무수 등 세 사람은 빌렸던 말을 돌려줬다. 전부 어두운 표정이었다. 범강림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쓸모도 없지. 8천 관이라고 해 놓고 9천 관에 샀으니, 누이 얼굴을 어찌 보나.”

“우리 빌리러 갑시다.”

서무수가 돌연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향칠한테요.”

범랑김의 물음에 서무수가 대답했다.

“그 짠돌이한테 무슨요!”

서봉추가 소리쳤다.

“빌어 보기라도 해야지. 급하다는데 안 도와줄 사람은 아냐.”

“안 돼. 가더라도 내가 가. 자네가 갔다간 괜히 수모만 당해.”

그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안에서 금가아가 뛰어나왔다.

“도련님들, 오셨네요. 반근 누나가 한참 기다렸어요.”

예전 같았으면 그 말에 바로 뛰어 들어갔겠지만, 오늘은 세 사람 다 걸음을 멈췄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련님. 아씨께서 저더러……·.”

시녀가 안에서 웃으며 나왔다.

“반근, 누이한테 전해 줘. 우리가, 제대로 못 했다고.”

범강림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시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안 팔겠대요?”

“아니, 갑자기 값을 올리잖아. 아씨가 급하다고 하셨으니 지체할 수도 없고. 결국 돈이 더 들었어.”

“아씨가 급하다고 하신 게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협상을 제대로 못 했어.”

범강림과 서무수의 말에 시녀가 웃음을 지었다.

“난 또 뭐라고. 돈 좀 더 쓴 거잖아요. 아씨는 예상하고 계셨어요. 저쪽에서 돈을 많이 달라고 할수록 좋다고도 하신걸요.”

돈을 많이 달라고 할수록 좋다? 무슨 논리야?

“아씨 말씀이 손해 보는 게 곧 복이래요.”

시녀는 웃으며 비전을 꺼내 내밀었다.

“1만 관이에요. 충분하죠?”

1만! 서무수 등 세 사람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데 이게 돈이야?”

서봉추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종이를 살폈다.

“이건 비전이에요. 1만 관을 어떻게 옮기겠어요. 이건 복주 진주원 비전이니까 이걸 가져가면 저쪽에서 알아볼 거예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경성엔 참 별것이 다 있네. 서봉추는 더 묻지 않고 서무수가 비전을 받아드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아씨는 정말 돈도 많으시네.”

서무수가 중얼거렸다. 1만 관이라니. 벌써 마차에 오른 시녀는 그 말에 또 웃음을 지었다.

“아씨는 돈이 없으세요. 돈이 필요할 때 주겠다는 사람이 있을 뿐이죠. 나머지는 도련님들이 알아서 해 주세요. 너무 고민하실 거 없어요.”

서무수 등은 고개를 끄덕이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마차를 쳐다봤다.

* * *

시녀가 마당으로 들어설 무렵,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날이 밝으면 데려가도 된다고 했잖아? 왜 안에선 아무 움직임도 없는 거야?”

동 부인이 울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어서 들어가 보죠.”

밤을 새운 터라 쓰러지기 직전인 주 부인도 소리쳤다.

“잠깐만요.”

동 부인 곁에 있던 첩실이 막아섰다.

“그 시녀가 아무도 들어가지 말랬잖아요. 누구든 들어갔다간 노야께서 돌아가신댔어요!”

“그 말을 어찌 믿어!”

주 부인이 소리쳤다.

“전 믿어요!”

첩실은 누구하고든 필사적으로 싸울 태세였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필사적일 수밖에. 노야께서 살아나시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겠지만, 노야께서 돌아가시면 함께 순장될 처지가 아닌가.

시녀를 본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상황을 물었다.

“진정들 하세요. 제가 들어가 볼게요.”

시녀가 사람들을 제치고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병풍이 시선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문이 닫히고 마당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서 미소를 짓는 시녀를 보며 마당에 있는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다들 긴장 속에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또 뭐라고 하려나? 처음엔 돈을 요구했고, 두 번째는 금침을 사 오라고 했고, 세 번째는 약을 사 오라고 했다. 네 번째는 문을 나섰고 이번에는 다섯 번째인데 이번엔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을 할까?

“진작 나으셨는데 제가 외출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네요. 어서 데려가세요.”

시녀가 웃으며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고 말했다. 병풍은 이미 치워진 상태라 들것 위에 누운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기엔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노야.”

동 부인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첩실을 뿌리치고 가장 먼저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곧이어 나머지 사람들도 달려갔다. 이리 밀치고 저리 밀쳐진 주 부인은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쪽 옆에 있었고, 첩실은 얼어붙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사셨어요? 사셨어요?”

“숨이 붙어 있어요, 숨이!”

“노야께서 움직이셨다, 움직이셨어!”

“여보, 여보. 나 아완이에요. 아완이라고요. 나 알아보겠어요?”

“노야께서 물을 찾으신다. 어서 물을 가져와라! 세상에, 노야께서 물을 드시겠대!”

시끄러운 소리들이 마당에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첩실은 긴장이 확 풀린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 울었다.

같은 시각 주 노야의 방 안.

꿇어앉은 두 시녀는 분주했다. 하나는 다병(茶餠: 찻잎을 벽돌이나 원반형으로 뭉쳐 굳힌 것)을 불에 굽고, 하나는 잘 구운 다병을 찧어 부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각종 다구가 놓여 있고, 방 안에는 차 내음이 가득했다.

주 노야는 소금을 집어 차에 넣은 후 잘 섞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 훅 마셨다. 매운 풀 내음에 피로가 확 풀리는 듯했다.

“천것 같으니라고.”

주 노야가 찻잔을 쾅 내려놓았다.

“고칠 수 있는 건 안 고친다고 하더니, 고칠 수 없는 건 또 고치겠다니. 귀신을 속이라지!”

시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소리도 못 냈다.

“복수를 하는 게야.”

주 노야는 혼잣말을 하며 이를 갈았다.

“저리 소란을 피워 봤자 결국 망신을 당하는 건 저 애가 아니라 우리란 말이다! 우리 주씨 가문!”

거기까지 말한 주 노야가 탁자를 탁 내리치자 안에 있던 시녀들이 놀라 벌벌 떨었다.

“분풀이를 하려고 저러나 본데, 참으로 아둔하구나. 저리 시야가 좁아서야, 원. 제 혈육을 욕보이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아? 그리고 제가 한스러울 게 뭐 있어? 그러게 누가 바보로 태어나랬나. 오히려 한스러운 건 우리 주씨 가문이지, 주씨 가문! 저 바보가 태어난 바람에 얼마나 많은 조소와 냉대를 당해야 했는데!”

주 노야는 문밖으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저 애가 태어난 후로 사람들이 우릴 업신여겼잖아! 바보를 낳았다고! 우리 주씨 가문 혈통에 바보의 피가 흐른단 소리가 돌았어! 사내들은 장가들기 어려워지고, 여인들은 시집가기 어려워졌는데, 그게 누구 때문이야? 저 계집 때문이지!”

주 노야는 탁자를 붙잡고 일어서려고 했다.

“저 화근덩어리는 애초에 익사시켜야 했어. 저런 애를 안 죽이고 살려 두는 집이 어디 있어? 누이가 싸고도는 걸 모친이 눈감아주시는 바람에 저 애를 세상에 남겨 둔 거야!”

주 노야가 비틀거리자 시녀들이 얼른 일어나 부축했다.

“노야, 취하셨어요.”

시녀들이 두려워하며 말했다.

“내가 취해?”

주 노야는 현기증이 났다.

“좋은 차로구나! 차 일곱 잔에 취하다니! 맛좋은 술도 이만 못할 것이다!”

주 노야는 시녀를 밀치며 밖으로 걸어갔다.

“보검을 가져오너라. 저것을 베어 버리겠다. 어차피 재수 없게 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게 생겼으니, 둘이 죽는다 해도 다를 바 없겠지. 저 애를 죽이고 동씨 가문에 사죄한 뒤 강주로 가 정씨 가문을 박살 낼 것이다!”

시녀들이 놀라 주 노야를 부축하며 만류했다. 그런 실랑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주 노야가 우뚝 멈춰 섰다.

“봐라, 봐. 죽었지? 죽었더냐?”

주 노야가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곡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누가 문밖에서 들이닥치며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노야, 노야. 살았습니다, 살았어요!”

사환들과 하인들이 소리쳤다. 주 노야가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시녀들을 밀치고 문가로 간 주 노야는 문을 붙잡고 서서 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노야, 아씨께서 동 내한을 고치셨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쳐다보던 주 노야가 별안간 손으로 다리를 탁 내리쳤다.

“우리 교교!”

밖으로 달려나가던 주 노야는 문턱을 제대로 못 보고 넘어지기까지 했다. 안팎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 * *

진소가 차를 우려 부친께 올렸다.

“그때 떠돌이 도인 하나가 여도사들이 수련하는 도관 근처에 잠시 머물렀다고?”

진 노태야가 찻잔을 돌리며 물었다.

“떠돌이 도인은 아니고요. 딱히 누구라 할 수도 없는 자입니다. 사람이 아직 안 와서 소식만 대강 들었는데, 거기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 줬답니다. 근방에 사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요.”

“몇 살쯤 됐다더냐?”

“서찰에 쓰인 바로는 쉰이 좀 넘었답니다.”

진소의 대답에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오거든 확실히 물어보자.”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노태야, 노태야.”

사환 하나가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동 내한이 살았답니다!”

진소 부자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하지. 웬 호들갑이냐.”

진 노태야가 밝게 웃었다. 진소는 미소를 지으며 부친이 실수로 엎지른 차를 잠자코 닦아 주었다.

소식을 들은 경성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소 부친의 일이 놀라움을 안겨 줬던 건 사실이지만, 그때는 병이 중하여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꽤 오랜 시간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터였다. 죽을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에 병을 고쳤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도 그리 직접적으로 와닿진 않았다.

하지만 동 내한은 금석을 먹고 혼절하여 사경을 헤맸고, 경성 부잣집에서는 그런 일을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데다 워낙 병세가 급했다. 옛말에 염라대왕이 삼경에 데려간다고 하면 그 누구도 오경까지 붙잡고 있을 순 없다고 했는데, 붙잡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어디 붙잡다 뿐인가. 아예 살려 놓은 것을.

“틀림없어요. 들여갔을 땐 이미 죽은 상태였다니까요.”

“이 태의도 후사를 준비하라고 했다고요.”

“또 이 태의로군. 지난번에 진 노태야를 고칠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이 태의였는데, 이번에도 이 태의잖아. 정 낭자는 둘 다 고쳤고.”

“이 태의의 의술도 이젠 안 통하나 보네.”

“이 태의와 정 낭자가 한통속인 거 아니야?”

갑자기 화제가 자신에게 쏠리자, 안으로 들어서던 이 태의는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태의국 앞에서 잡담을 나누던 하급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난 못 믿는다. 동씨 저택으로 가자.”

수많은 사람이 동씨 저택으로 몰려왔지만, 동씨 가문 사람들은 문을 닫아걸고 아주 가까운 친척 외에는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물론 이 태의는 예외였지만.

“이 대인께서 늘 잘 살펴 주신 덕입니다. 안 그랬으면 이번에 부친께서 정말 위험하실 뻔했어요.”

동씨 가문 자제들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천자를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수려한 문장력을 자랑하는 동 내한이 아니던가. 동씨 가문 사람들의 입에선 듣기 좋은 말이 술술 나왔다. 좋은 말이야 많이 해도 나쁠 게 없으니.

“정 낭자가 그리 말했습니까?”

이 태의가 의혹에 찬 눈초리로 물었다. 동씨 가문 자제들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소리. 그 여인이 그런 말을 했다니.”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교랑의 의술이 궁금하긴 했지만 이 태의는 의원끼리 서로 자리를 피해 주는 법도를 지켰기에 정교랑과는 진씨 저택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하지만 말 한마디만 나눠도 대충 성격이 나오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낭자가 남을 칭찬한다? 어림없는 소리.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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