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60)

-풍문-

정월의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가난하든 부자든, 좋은 옷을 입었든 그렇지 않든 다들 깔끔한 행색이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새해의 길운을 위해서기도 했다. 관부에서 담벼락이나 다리 어귀, 다리 밑에 살던 거지들을 쫓아낸 터라 거리도 모처럼 깨끗했다.

“경성이 크긴 크네요. 북적북적해요.”

몸종은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두꺼운 두봉으로 몸을 감싸고 두모까지 쓴 데다 두 손에 손난로까지 쥐고 마차에 앉아 있으니 더없이 따스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몸이 따뜻해서인지 그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는 외모에서도 생기가 느껴졌다.

몸종은 행인들을 쳐다봤고, 행인들도 몸종의 일행을 쳐다봤다. 검은 당나귀가 끄는 마차였다. 옆에는 노복이 마차를 몰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많아도 정정해 보였다. 볼품없는 행색이었지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반근, 경성엔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어.”

노복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몸종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직 경성에 들어가지도 않았다고요? 그럼 여기는……·.”

“여긴 경성 밖이야. 저 앞을 봐라.”

노복이 채찍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성벽이야, 경성 성벽. 저 성벽을 지나야 경성에 들어가는 거지.”

몸종이 몸을 곧추세우고 쳐다봤다. 눈앞에도 집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더 멀리 내다보니 과연 반짝이는 성이 있었다. 웃으며 앞쪽을 가리키던 노복이 문득 멈칫하더니 채찍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노복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도련님? 몸종은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눈에 들어온 건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마차 옆으로 와서 섰다.

마흔다섯쯤 되어 보이는, 마른 체격의 중년 사내였다. 평범한 차림의 푸른색 옷이라 눈에 띄는 행색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올곧고 박학다식해 보이는 기질이 있었다. 글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중년 사내가 단정히 예를 올렸다. 세간에서 장강주 선생으로 불리고, 삼천 제자를 거느린 장순, 장자연이었다. 서생들은 장순의 얼굴 한 번 뵙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대화라도 나눌라치면 감격해 어쩔 줄 몰랐지만, 노복과 몸종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노태야, 노야께서 마중 나오셨어요.”

몸종이 얼른 고개를 돌려 휘장을 걷었다. 마차 안에 있던 노인이 쳐다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이 노야를 뵈옵니다.”

몸종은 그제야 예를 올렸다. 장순은 몸종을 힐끔 보더니 놀란 눈빛을 드러냈다.

“소심은 노태야께서 다른 이에게 주셨어요. 이 애는 그분께서 노태야께 주셨고요.”

노복이 웃으며 설명했다. 몸종이 장순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장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장순은 마디뼈가 툭 튀어나온 커다란 손으로 말고삐를 잡아 부친의 마차를 직접 몰았다. 몸종과 노복은 마차를 따라 옆에서 걸으며 경성으로 향했다.

장씨 저택은 시끄러운 번화가의 골목 안에 있었다. 피로가 싹 가신 모습의 장 노태야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옆에는 아들과 손자들이 있었다.

“할아버지, 또 어디로 놀러 다녀오셨어요? 어떻게 새해에도 안 돌아오세요.”

맏손자는 부친을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지만 또래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산수를 즐기며 자유롭게 돌아다녔지. 망신살 뻗치는 일도 있었고.”

장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돈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산양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장순 부자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손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장 노태야가 아들과 손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운 동안 경성에 재미있는 일은 없었고?”

“폐하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이황자께서도 공부를 시작하셨고요.”

장순이 말했다.

“이황자께선 올해 여섯 살이니 공부를 하실 때가 됐지.”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신선하다고 할 일도 아니었지만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진지했다.

황제에겐 황자가 둘뿐이었는데 대황자는 귀비 소생이고, 이황자는 품계가 낮은 비빈 소생이었다. 새해가 되면서 하나는 열한 살, 하나는 여섯 살이 됐다. 아직 어린 나이라고는 하나 조당에서는 벌써 국본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황제는 병약했다.

“폐하께서 아버지의 진급을 준비하셨어요.”

손자가 말을 보탰다. 장 노태야가 그러냐는 눈빛으로 장순을 쳐다봤다.

“너더러 이황자를 가르치게 하시려고?”

장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양했습니다. 과거에 응시할 서생들에게 경문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말에 신용이 없어서야 쓰겠습니까.”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할아버지,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손자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소리쳤다.

“여봐라, 내 서재에 가서 차정사 작품을 가져오너라.”

차정사 작품? 장 노태야는 영문을 몰라 했다.

“할아버지, 얼마 전에 누가 차정사에 글씨를 남겼습니다. 한번 보세요. 분명 걸작이라고 하실 겁니다.”

손자는 신이 나서 말했지만 장순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순은 바른 서체를 중시하고 육예(六藝)를 고루 아낄 뿐 어느 하나에 푹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잠시 후 사환이 잘 표구한 족자를 가져오자 손자가 받아 조심스레 펼쳤다.

“이게 그 무명씨가 쓴 글자라고?”

일어나 족자를 받아 들고 보던 장 노태야는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손자가 웃으며 설명했다.

“어떠세요? 할아버지, 훌륭하죠? 새로운 서체가 다섯 종인데, 고상하면서도 힘이 있고, 아름다우면서도 소탈하며 대범하니 저마다 독특한 멋이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몸종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동시에 은은한 향이 퍼졌다.

“노태야, 간식 드세요.”

몸종이 말했다.

“반근, 이리 오너라.”

장 노태야가 손짓했다. 반근은 쟁반을 내려놓고 장 노태야 뒤로 갔다.

“이 글씨를 봐라.”

장 노태야가 말했다. 옆에 있던 장순 부자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장 노태야가 몸종을 교환한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일개 몸종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심은 장 노태야를 오래 모신 아이였다. 착하고 영리하여 무척 아끼는 아이였는데 갑자기 바꿔 버렸다고 해서 뜻밖이라 여기던 차였다. 이 아이에게 글씨를 보라고 하시다니, 시, 서, 화에 능한 아이인가?

“노태야,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몸종이 물었다. 장순은 다행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아직 수양이 부족한 손자는 실소를 터뜨렸다. 손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다가 앞에 놓인 쟁반에 시선이 꽂혔다. 청자로 된 네모난 접시 위에는 참깨를 묻힌 황금빛 공 모양 간식이 놓여 있었다. 저게 무슨 간식이지?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라고 쓰여 있구나.”

장 노태야는 그중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반근, 이 ‘기다린다’는 부분 글씨를 봐라. 눈에 익지 않느냐?”

몸종은 다시 한번 골똘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태야, 전 먹을 거라면 같은 음식에서도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지만, 글씨는 도저히……·.”

몸종이 웃었다. 내가 잘못 봤나? 장 노태야는 다시 글씨를 쳐다봤다. 강주 현묘관에서 본 ‘태평’이라는 글자와 비슷해 보이는 건 왜일까? 고개를 숙여 다시 쳐다봤다. 비슷하긴 했지만 이 글씨가 더 잘 쓴 글씨인 건 분명했다. 더구나 그 낭자는 아직 강주에 있을 테니, 차정사 벽에 글씨를 남겼을 린 없지 않은가. 장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훌륭한 글씨구나, 훌륭한 글씨야. 아직 여린 면이 있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아. 무엇보다도 새롭고 신선하구나.”

장 노태야는 감탄하며 쟁반으로 손을 뻗었다.

“자, 간식 맛 좀 봐라. 반근이 아주 맛있는 간식을 만들었어.”

장순은 하나를 집어 맛만 봤지만, 손자는 어려워하지 않고 두 개를 집어 먹었다.

“네, 맛있네요. 진짜 새로운 맛이에요.”

손자가 칭찬하며 몸종을 보고 물었다.

“이건 이름이 뭐냐?”

“그냥 기름과자예요.”

몸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산양현에서 반근이 간식을 만들어 판 덕에 간신히 살았다.”

장 노태야는 웃으며 자신도 하나 집어 먹었다. 이제 보니 찬모였구나. 손자는 퍼뜩 깨달았다.

“아버지, 어지럼증은 좀 괜찮으십니까?”

장순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많이 좋아졌어. 이젠 거의 도지는 일이 없구나. 다 반근 덕분이지.”

장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장순 부자가 몸종을 쳐다봤다.

“많이 드시면 병이 도지는 일이 없으시거든요.”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먹는 것으로 병을 고친다? 말을 야무지게 하네. 장순 부자는 웃어넘겼다.

같은 시각 진씨 저택의 진 노태야도 간식을 먹고 있었다. 점점 숙련된 솜씨로 튀겨내는 참새 요리는 먹음직스럽고 맛도 좋았다. 진 노태야가 다시 젓가락을 가져다 대는데, 누군가가 접시를 휙 가져갔다.

“할아버지, 정 언니가 튀긴 거 많이 드시면 안 된댔어요.”

진단랑이었다.

“하나만 더 먹자, 하나만.”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진단랑은 상의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접시를 꽉 붙잡고 내주지 않았다. 그때 진소가 들어오자 진 노태야는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단랑이 소리쳐 부르며 일어나더니 손을 벌리고 한 바퀴 빙 돌았다.

“보세요. 어머니가 지어 주신 새 옷이에요.”

진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드러냈다. 엄한 아버지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감정 표현이었다.

“정 언니의 옷을 따라 만들었어요.”

진단랑은 우쭐한 투로 말했다.

“십팔랑도 한 벌 있고 저도 한 벌 있어요. 이거 입고 나가면 다들 우릴 에워싸고 물어보는데 아무한테도 안 알려 주기로 십팔랑이랑 약조했어요.”

옆에 있던 여종은 진단랑의 얘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진소 부자가 대화를 나누도록 진단랑을 데리고 나갔다.

“아버지, 정 낭자가 했다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진소가 물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죠? 아직 어려서 그런지.”

진소는 근심스러운 말투였지만 진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진 노태야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곧 죽을 사람이었잖느냐.”

진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런 원칙이 어디 있답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일단 고치기라도 하고 말하든가.”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엔 아주 훌륭하구나. 생각해 봐. 죽어가던 날 고쳐서 이름이 조금 났고, 내가 신선 얘기를 퍼뜨리면서 이름이 멀리 퍼졌다. 주씨 저택에서는 찾아가서 고치지 않는단 말로 이름을 더 널리 알렸지. 그러더니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단 말로 소란을 일으켰어. 이제 모든 게 준비됐으니, 동풍만 불면 된다.”

진소가 멈칫했다. 그럼 이 모든 게 그 어린 낭자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것이다? 나이 어린 처자의 경솔한 허언이 아니라? 정말 그럴까? 아니면 그냥 우연?

진소는 침묵을 지켰다.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버림을 받은 데다 바보로 알려진 외로운 여인이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친족을 떠나 살아갈 수도 없어.”

진 노태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확실히 기구하고 가엾은 낭자였다. 진 노태야가 갑자기 씩 웃었다.

“명성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명성이요?”

진소는 부친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를테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가졌다는 명성 말이다. 이제 분위기는 한껏 띄워졌으니 곧 죽을 사람만 찾아오면 되겠구나. 동풍이 부는 순간, 그 여인은 경성에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 될 거야.”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또 씩 웃었다.

“상경한 지 불과 달포 만에 이만한 일을 해내다니, 이것만 봐도 인물이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올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못 고치면요?”

진소가 물었다. 늘 안정을 추구하는 진소였다. 매사에 주도면밀했고 조금이라도 소홀한 부분이 있으면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그 어린 낭자가 인물이라는 거다. 재주와 지략을 갖춘 데다 필사적이기까지 하니, 실로 보기 드문 인재야.”

똑똑한 사람은 누구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겼기에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낭자는 달랐다.

고치지 못할 경우 명성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요, 지금보다도 못한 상황이 된다. 그런 일을 벌이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진 노태야를 고친 일만으로도 평생 안온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 혼사에서 적잖은 도움이 될 터였다. 여인이 좋은 집으로 시집가면 평생 근심의 반은 사라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거기서 그칠 수 없는 듯했다. 희망을 남에게 거느니 자기 자신을 믿으려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은 남을 믿지 않고, 모든 걸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려 하는 법.

어렸을 때부터 몸이 불편하고 버림까지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던 진 노태야는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정말 궁금하구나. 그 낭자는 대체 어떤 고인을 만났던 걸까?”

진 노태야가 진소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병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 도사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곤 그 낭자와 접촉이 별로 없었던 이들뿐입니다. 물어봐도 똑같은 말만 하고요.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찾는 중이라 어떤 분을 만난 건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자.”

* * *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반근은 두려움에 떨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자네는 저 애를 어찌 세탁방으로 보낸 거야?”

진 공자는 앞에 있는 몸종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주육낭에게 물었다. 반근은 동상으로 부르튼 손을 얼른 소매 속으로 넣었다.

“공자님과 무관한 일이에요. 소인이 자원해서 갔어요.”

반근이 말했다. 주육낭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물어볼 거면 빨리 물어봐.”

싫은 기색을 감추지 않은 목소리였다. 반근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반근, 그게 말이다.”

진 공자는 주육낭을 노려본 후 몸종을 보며 친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너희 아씨의 말을 못 믿어서 문제가 생겼어.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아 너에게 물어보려고 불렀다. 오해인지 아닌지……·.”

“오해예요, 분명 오해일 거예요. 저희 아씨는 절대 남을 안 속이세요.”

진 공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말했다. 절대 남을 안 속인다라. 옆에 있던 주육낭은 냉소를 지었다. 너무 잘 속이는 거겠지.

“너희 아씨가 의술을 펼칠 때 무슨 원칙이 있느냐? 이를테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말을 이어받았다.

“네, 있어요. 저희 아씨께선 절대 진료하러 찾아가는 일이 없으시고,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치세요.”

반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역시, 그랬군. 진 공자는 놀란 눈치였다. 그 여인은 매사 제멋대로 같지만,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구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가 황당해 보여도 그 어떤 허점을 찾을 수 없어.

“이루의 밝은 눈과 공수자의 뛰어난 기술이 있어도, 원을 그리는 기구와 자를 쓰지 않으면 네모와 원을 그리지 못한다(離婁之明 公輸子之巧 不以規矩 不能成方圓. 맹자) 하였지.”

진 공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랬던 게로군.”

진 공자가 반근을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반근, 넌 여기서 자유롭지 않으니 나와 함께 가자.”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만, 소인은 가고 싶지 않아요.”

시녀의 거취는 시녀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 공자가 물어서도 안 되는 말이었고, 시녀가 대답해서도 안 될 말이었다. 진 공자는 웃음을 지었고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러가거라.”

반근은 예를 표한 후 여전히 겁먹은 모습으로 물러났다.

밤의 어둠이 주씨 저택을 뒤덮었지만, 정월이라 여기저기에 등불이 켜져 있어 저택은 대낮처럼 밝았다. 반근은 여느 때처럼 정교랑의 마당 밖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에 서서 아직 문을 닫아걸지 않은 마당을 쳐다봤다. 반근은 나무껍질을 붙잡고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회랑 아래에서 여인 하나가 나왔다. 교차하는 명암 속에서 아리따운 형체가 드러났다. 저게 바로 그……· 반근이구나. 반근은 몸을 바짝 웅크리고, 문 너머에서 뭐라 말하는 시녀를 쳐다봤다. 두 여종은 공손한 기색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한 후 서둘러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반근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이 늦은 시간에 반근 낭자가 뭘 하려는 거지?”

“뭘 하든 우린 시키는 일이나 서둘러 하자.”

두 여종이 웃고 떠들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가면서 마당 문을 닫은 탓에 반근의 시선이 가려졌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돌아 발걸음 내딛던 반근이 비틀거렸다. 추위 속에 서 있었던 탓에 발이 꽁꽁 언 것이다. 반근은 허리를 숙이고 한참을 주무르며 발을 녹인 후에야 어깨를 감싸 안고 자신의 거처로 뛰어갔다.

돌아가던 반근은 야간 순찰을 맡은 여종을 마주쳐 검문을 받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문이 잠겨 있었다. 반근은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욕설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미 불이 꺼진 방을 걸어가다가 무언가에 부딪쳤다. 또다시 욕설이 들린 후에야 방 안이 고요해졌다.

날이 밝았다. 마차 한 대가 모퉁이를 돌아 멈춰 섰다.

“큰 도련님, 셋째 도련님.”

시녀가 휘장을 들며 소리치더니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범강림과 서무수가 나란히 다가왔다.

“누이가 온 거야?”

두 사내가 마차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요. 아씨께서 이 음식을 갖다 주라고 하셨어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범강림과 서무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한테 그 일은 얘기가 거의 다 됐다고 전해. 언제 계약을 쓰느냐만 남았어.”

서무수가 말했다. 다시 말해 돈은 언제 마련되냐는 뜻이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예를 표한 후 돌아갔다.

사람과 마차가 스쳐 지나갔다. 거리를 걷던 한원조가 걸음을 멈췄다.

“원조, 무슨 일이야?”

동료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방금 그 몸종을 본 것 같아.”

한원조가 뒤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마차는 벌써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사라진 후였다.

“몸종이라니?”

동료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한원조는 그저 웃고는 앞장서 걸어갔다. 동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따라가려는데, 갑자기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비켜라, 비켜.”

어느 댁 호위가 몽둥이를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호령하며 길을 열고 있었다. 거리의 행인들이 재빨리 비켜섰다. 맞아 봤자 재수 없는 건 자신이었다. 호위를 시켜 길을 열 정도면 보통 신분이 아닐 테니 억울해도 발고하긴 힘들었다.

“저게 누굽니까?”

한쪽 옆으로 비켜선 한원조와 동료가 물었다.

“외지 분이시오?”

옆에 있던 사람이 두 사람을 쓱 쳐다보며 물었다.

“과거 보러 온 수재구먼. 경성에 왔으면 대갓집 표식 정도는 외워 둬야지.”

한원조와 동료가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 저게 어느 댁 표식인데 그러십니까?”

두 사람의 물음에 노인은 자신의 식견을 뽐내려는 듯 우쭐해 대답했다.

“잘 들으시오. 저건 동(童) 내한 댁 마차라오.”

노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쑥덕거리며 웃었다.

“동 내한이 또 종유(鐘乳: 춘약)를 하도 먹어서 제정신이 아닌가?”

내한(內翰)은 내제인 한림원의 학사로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며 조서의 초안을 쓰는 직책이었다. 한원조도 종유에 대해 알았다. 집안 웃어른 중에도 복용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금석(金石) 단약은 부잣집에서나 먹을 수 있었다.

“종유는 삼천 냥이라지.”

노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경성에서는 딱히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한원조와 동료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다.

내달리던 마차는 어느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대문 앞으로 나와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은 마차가 멈춰 서자 우르르 달려갔다. 사내들이 소리쳤다.

“이 대인, 이 대인.”

마차의 휘장이 올려지고 아이가 먼저 내렸다. 이어 이 태의가 비틀비틀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요, 어서.”

마중 나온 사람이 재촉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사람이 늙으면 동작도 느려지는 법이다. 사람들은 들쳐 업고 달려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지만, 노인은 태의국 한림의관(翰林醫官)이었다. 태후가 자색 예복까지 내린 의관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마당 안에는 곡소리가 요란했다.

“울긴 뭘 울어! 불길하게!”

대청에 있던 사내가 나와 소리치자 마당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이 태의가 안으로 들어갔다. 경황이 없다 보니 대청에 있던 여인들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 대인, 우리 노야께서 왜 이러시는 거죠?”

동 내한의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이 태의를 안내했다. 이 태의가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오십 대의 뚱뚱한 사내가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사내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떨며 쉰 목소리를 냈다.

이 태의는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곧장 주위부터 둘러봤다. 예상대로 옆에 있는 탁자에 비단 함이 올려져 있고, 그 안에는 도자기 병이 쓰러져 있었다.

“또 종유를 복용하셨습니까?”

“네, 남쪽에서 새로 가져온 거예요.”

동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주 좋은 거였는데, 드신 지 며칠도 안 돼서 갑자기 저리되셨어요.”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말했잖습니까. 그런 물건은 안 드시는 게 가장 좋다고요.”

“대인, 노야는 다리에 병이 있는데 그 약이 아주 잘 들었어요. 그걸 안 드시면 걸을 수가 없었다니까요.”

동 부인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이 태의는 고개를 가로젓고, 여전히 침상에 누워 쉰 목소리로 괴상한 소리를 내는 동 내한을 쳐다봤다. 아이가 약상자를 열어 건넸다. 이 태의는 금침 하나를 꺼내더니 침상 앞에 꿇어앉아 한 손으로 동 내한의 머리를 붙잡고 한 손으로 침을 찔러 넣었다.

방 안에 소리가 뚝 멈췄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네요, 신의.”

밖에서 감탄 어린 말들이 쏟아졌다.

“신의는 무슨.”

이 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일어서서 침상에 누워 몸을 떨고 있는 동 내한을 바라봤다.

“겸손의 말씀이세요, 대인.”

동 부인이 얼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아들들도 예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할 것 없습니다. 후사를 준비하십시오.”

이 태의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헉, 숨을 들이마셨다.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대인!”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방법이 없어요. 체통을 지켜 떠나실 수 있도록 침을 놓았을 뿐입니다. 저리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다 죽는 건, 실로……·.”

이 태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여러 번 목격한 태의였기에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 태의가 아이에게 손짓했다.

“아니면 다른 의원을 불러 보시든지요.”

태의국의 태의도 도리가 없다는데 어디서 의원을 불러온단 말인가. 동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부친을 구할 도리가 없는 이상, 이제는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장례를 치르는 것이 중했다. 동씨 가문 아들들은 웃어른을 모셔 오고, 외지로 나간 형제들에게 서신을 보내느라 분주해졌다. 밖에 있던 여인들은 소식을 듣고 또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언니들, 우린 이제 어쩌면 좋아요?”

고운 외모의 이십 대 첩실 몇 명이 부둥켜안고 와들와들 떨었다. 동 내한이 살아 있는 동안엔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지만, 동 내한이 죽고 나면 이제 집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처지가 될 터였다. 동 부인은 이들을 팔아 버리거나 남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남에게 가는 건 상관없지만 아이를 낳은 첩실들은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첩실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노야께서 돌아가신다니, 고칠 수 없는 병이라니……·. 첩실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들 그 얘기 못 들었어?”

첩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쓸데없는 소리를 해? 남 얘기 할 때가 아니잖아. 내 코가 석 자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단 사람 얘기 말이야! 그럼 노야는 돌아가실 분이니 고칠 수 있잖아.”

울고 있던 사람들이 뒤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첩실은 안쪽을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부인, 부인.”

자리에서 일어난 첩실이 소리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야께 그 사람을 불러 주세요.”

장례를 논하고 있던 이들은 깜짝 놀라 쳐다봤다가 첩실인 걸 확인하고 벌컥 성을 냈다.

“부인, 신선을 만났다는 정 낭자 말이에요.”

첩실은 쫓겨나기 전에 얼른 소리쳤다.

“진 상공 댁 노태야를 고친 정 낭자요. 강주에서 온 이 진인의 제자 말이에요. 그 사람은 고칠 수 있어요. 곧 죽을 사람만 고친다고 했대요!”

동씨 가문 사람들도 그런 풍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웬 소란이야.”

침상 앞에 꿇어앉은 동 부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편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부인, 정말이에요. 바깥에 소문이 파다해요. 부인, 일단 해 보세요.”

첩실은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고 울며 애원했다.

“부인, 노야의 치료를 맡겨 보세요. 부인도 노야께서 이렇게 돌아가시는 건 원치 않으시잖아요. 고칠 수 있다는데 일단 시도는 해 봐야죠!”

어차피 노야가 죽으면 끝날 운명인데, 이런 말로 부인의 심기를 건드린들 무엇이 대수겠는가. 반면 노야의 병이 낫는다면 부귀영화를 계속 누릴 수 있을뿐더러 자신은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된다.

과연 동 부인은 그 말에 대노했고 아들들도 얼굴이 굳어졌다.

“천것 같으니라고. 여봐라, 끌어내라.”

아들들이 소리쳤다.

“부인, 신선을 만난 정 낭자가 있잖아요. 다른 사람은 못 고쳐요. 그 낭자는 죽을 사람만 고친다고 했어요. 제발 부탁드려요. 일단 노야의 진료를 맡겨 보세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죠.”

첩실은 동 부인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했다.

“노야께서 돌아가시면 우리도 좋은 날 끝이에요. 셋째와 넷째 아드님도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벼슬에 나가야죠.”

그 말에 대청에 있던 사내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동 내한의 신분이면 자손들에게 음보 혜택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장자까지만 가능했고, 나머지 아들은 글공부를 하여 과거를 보거나 부친이 더 공로를 세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과거를 위한 글공부는 힘들었다. 동 내한이 천자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라고는 하나 공을 세우는 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가. 이력이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이 유일했다. 그럼 자식들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도 음보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다면, 자손들의 앞날은 부친이 살아 있을 때보다 못할 게 뻔했다.

“정 낭자가 정말 고칠 수 있을까?”

아들 하나가 물었다. 첩실은 기뻐하며 머리를 쾅쾅 찧었다.

“한번 해 보세요.”

첩실의 애원에 그 아들이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럼 불러 보자.”

나이가 많은 이가 결정을 내렸다.

“잠깐.”

동 부인이 소리치는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첩실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아들들도 머뭇거리며 모친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 낭자는 병자를 볼 때 원칙이 있단다. 찾아가서 치료하는 건 절대 안 해.”

동 부인은 울며 침상을 가리켰다.

“어서 너희 아버지를 모셔 가라!”

대청의 문이 벌컥 열렸다.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웃어른으로서 이토록 제멋대로인 정교랑을 더 이상 가만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다만 정교랑은 다른 정상적인 아이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웃어른 앞에서도 공손함이 없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밝고 상냥하게 대하지도 않을뿐더러 불안한 표정도 찾을 수 없었다. 자리에 앉아 예를 표한 후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뭔가를 묻거나 먼저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반응에 주 노야는 가슴속 가득한 울분을 표출하지 못한 채 그저 한숨을 토할 뿐이었다.

“교교, 네가 어릴 때 병을 앓자 네 부친과 조부는 널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네가 있었겠느냐? 이제 널 데려오기까지 했는데 왜 이렇게 말썽을 피워? 우린 그렇다 쳐도, 네 외조모가 너한테 잘해 준 건 다 잊은 거야?”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찌 이리 소란을 피워!”

“소란 피운 적 없어요.”

정교랑은 책장을 한 장 넘기며 대꾸했다. 글자나 몇 자 아는지 모를 애가 책 보는 꼴 하고는. 주 노야는 언짢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

“교교, 경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집 생각 안 나?”

주 부인이 화제를 돌리자 정교랑은 주 부인을 힐끔 쳐다봤다.

“안 나요.”

진짜 양심도 없네. 아예 주씨 가문에 들러붙으려는 거야. 주 노야와 주 부인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래, 경성은 대보름 행사가 아주 떠들썩하지. 대보름 구경하고 돌아가.”

주 부인이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정교랑은 주 노야 내외를 힐끔 쳐다본 후 잠자코 있었다. 그때 문밖에 있던 여종이 다급히 들어왔다.

“노야, 부인, 큰일 났습니다. 누가 쳐들어왔어요.”

뭐라고? 주 노야와 주 부인이 기겁했다. 경성에서 남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가는 상황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주씨 가문은 죄를 지은 적 없다고!

“노야, 노야. 동 내한 댁에서……·.”

곧이어 달려 들어온 건 집사였다. 어찌나 허둥댔는지 모자까지 떨어뜨리며 달려왔다. 집사의 손에는 명첩이 들려 있었지만, 집사가 미처 고하기도 전에 네다섯 사람이 들것을 들고 들이닥쳤다.

“비켜요, 비켜.”

사람들이 소란을 피웠다. 동 내한이 누군지 주 노야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이들은 벌써 대청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세상에, 죽은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면 어떡해요!”

주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들것 위의 사내는 안색이 창백하고 두 귀가 뒤로 축 늘어져 있어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으로 보였다. 연륜이 있고 웃어른들의 임종을 여러 번 지킨 주 부인은 대번에 상태를 파악했다. 정초부터 사람이 죽는 것도 불길한데, 그것도 남의 집 사람이라니!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명첩을 들고 왔던 집사는 사람들 틈에 저만치 뒤로 밀린 후였다. 집사가 명첩을 들고 소리쳤다.

“노야, 동 내한께서 정 아씨께 치료를 받겠답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사내 몇 명이 읍을 했다.

“정 낭자, 저희 부친을 구해 주십시오.”

“이미 죽게 생긴 걸 구하긴 뭘 구해요? 어서 가서 칠성판(죽은 이를 안치하는 침상. 임종에 즈음하여 숨을 거두기 전에 병자를 이 침상으로 옮김)이랑 옷이나 준비해요! 밖에서 돌아가시게 할 순 없잖아요!”

주 부인이 소리쳤다.

“이 댁에선 죽을 사람만 치료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씨 가문 자제들이 소리쳤다.

“우리가 한 말이 아니오.”

주 노야가 가장 먼저 나서며 옆을 가리켰다.

“저 어리고 무지한 아이가 농을 한 거지!”

소란스러운 실내에서 단 한 사람만은 시종일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든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쳐다봤다.

“병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나가요.”

“교교, 네가 미쳤구나! 이 사람은 금방 죽어! 이걸 네가 어떻게 고쳐!”

주 부인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주 노야도 따라 호통을 쳤다.

“소란 피우지 마라!”

동씨 가문 자제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의심이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매달려 보는 수밖에. 이 여인이 못 고치더라도, 치료조차 안 받고 돌아가시게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나중에 소문이 나더라도 최소한 불효의 오명은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낭자.”

맏이로 보이는 자제가 예를 표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자제들도 감사를 표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청에는 주 노야 내외만이 남았다.

“이 사람 죽는 거, 기다려요?”

정교랑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난 사람이 있으면, 안 고쳐요. 죽어도, 나 원망 마요.”

죽으면 우리 탓이란 거야? 이게 무슨 논리야! 주 노야 내외는 기가 막혔다. 한편 밖으로 나간 동씨 가문 사람들은 초조해 죽으려 했다.

“노야, 부탁드립니다! 사람 좀 살려 주세요!”

동씨 가문 사람들이 소리쳤다. 분노를 숨길 수 없는 목소리였다. 여전히 대청에 서 있는 주 노야 내외를 원수 대하듯 보고 있었다. 주 노야 내외는 분통이 터졌지만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시녀가 문을 닫았다.

* * *

작가의 말: ‘종유는 삼천 냥’이라는 표현은 백거이의 시 중 ‘종유는 삼천 냥이요, 금비녀는 열두 개라(鐘乳三千兩 金釵十二行)’라는 구절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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