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주씨 가문 대문 앞에는 여전히 마차가 끊이지 않았지만 주 부인의 객청은 텅 비어 있었다. 처음엔 그래도 안주인인 주 부인에게 인사하러 오는 이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곧장 정교랑에게로 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게다가 정교랑은 과연 몸이 안 좋은 듯했다. 기껏해야 하루에 몇 명 보는 게 전부였다.
“몸이 안 좋아서 집중할 수가 없네요. 제대로 진료하지 못할 바에야 진료를 안 하는 게 낫죠.”
깍듯하면서도 이치에 합당한 말이었다.
“하긴, 경성의 태의들도 진료를 늘 보는 건 아니잖아.”
“맞아. 성 서쪽에 있는 그 여도사는 질문도 오전에만 받는대.”
“아휴, 정 아씨는 여도사가 아니잖아.”
“여도사나 마찬가지지. 침도 안 놓고 그저 듣기만 하잖아. 그냥 듣기만 하고 무슨 병인지 알다니 여도사나 박수무당과 비슷하지 않아?”
“맞아. 정 아씨는 이 진인 밑에서 수학한 제자란 말도 있잖아.”
뒤에서 두 여종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서가던 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부인, 주 부인부터 만나러 가시겠어요?”
여종이 물었다.
“방금 보니까 마차가 벌써 마차가 여러 대 왔더구나. 더 지체할 순 없지.”
잠시 머뭇거리던 부인이 말했다.
“우린 정 낭자를 보러 온 거잖아. 어차피 주 부인이 진료할 것도 아닌데.”
거길 만나러 가서 뭐해, 시간만 지체되지. 따지고 보면 주 부인 때문에 지체된 시간이 얼마야? 다들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여종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정교랑의 처소로 향했다.
이제 주씨 저택에서 가장 떠들썩한 곳은 정교랑의 처소가 됐다. 정교랑의 마당엔 여종이 여럿 서 있었고 회랑 아래와 대청 안에도 사람이 있었다. 차를 올리고 물을 따라 주는 몸종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거처가 너무 좁네.”
부인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돈도 많은 노섬 주씨 가문이 이러면 안 되지.”
그 말은 곧 주 부인의 귀로 들어갔고, 주 부인은 울화가 치밀었다. 주 노야가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주 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 두 몸종의 시중을 받으며 무언가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방 안에 약 냄새가 가득했다.
“정초부터 뭘 먹는 게요?”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약 먹어요.”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갑자기 무슨 약을 먹는단 거요? 손님도 많이 오는데 여기 들어앉아 약을 먹고 있다니.”
“그 손님들은 내가 신경 쓸 필요 없거든요.”
주 부인은 이를 갈며 약을 들이켰다. 입맛이 썼다.
“안주인이란 사람이 손님이 오는 걸 신경 안 쓴다고?”
“나보다 더 안주인 노릇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뭐 하러 나서요!”
주 부인은 열이 받는지 점점 언성을 높이며 약그릇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몸종은 놀라 덜덜 떨며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우리 주씨 가문 여식 아니오. 왜 애한테 신경질이야?”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내를 쳐다봤다. 하여간 여인들은 식견이 짧다니까. 그저 시시콜콜 따지려고 들지.
“저 좋은 일 하면서 왜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드냐고요.”
주 부인은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 여인이 이 집에 들어온 후부터 자신은 점점 궁지로 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 애가 뭘 했기에?”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 부인은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뭘 했지?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사사건건 훼방을 놓지 않았는가. 어디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니 속수무책일 수밖에. 정상인과는 완전히 다른 여인이었다. 얼핏 보기엔 어리숙하고 멍청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다. 잡히지도 않고 종잡을 수도 없이.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주 부인은 가슴을 움켜쥐며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몸종이 얼른 다가가 등을 두드리고 가슴을 쓸어 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교교가 집에 있으니, 무슨 병인지 그 애한테 봐 달라고 하면 되잖소.”
차라리 말을 말지. 그 말을 들은 주 부인은 더욱 울화가 치밀어 숨도 못 쉴 듯 기침이 나왔다. 주 부인은 옷깃을 움켜쥐며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애가, 그 애가 집에 있어서……·.”
화병에 걸린 거라고요! 물론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황당한 말이기도 했거니와 주씨 가문 안주인이란 사람이 외조카한테 무시를 받아 이 꼴이 됐다고 하면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성급히 굴지 마시구려. 교랑이 병을 잘 고치면 차차 명성이 높아질 거요. 그런 애가 우리 집에 있으면 결국 당신 체면도 올라가고, 우리 주씨 가문의 체면도 올라가지 않겠소.”
가슴을 두드리는 주 부인의 안색은 몹시 안 좋았다.
“그러길 바라야죠.”
그 여인이 이 집 문턱을 넘어선 그날부터 주 부인은 계속 불안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이 종국에는 거대한 풍랑을 일으켜 주씨 가문을 덮칠 것 같았다.
“여봐라. 강주로 사람을 보내라.”
주 부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여종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강주로 사람을요?”
“정씨 가문에 가서 알아봐.”
“뭘 알아보는데요?”
여종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주 부인은 손수건을 꽉 쥐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바보에 관한 모든 일을 알아봐라. 알아야겠다, 그 애가 정씨 가문에서도 이렇게 말썽을 부렸는지.”
* * *
정교랑이 문진(問診)을 시작한 지 사흘이 흘렀다. 정교랑의 거처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부인 하나가 휘장을 들고 나오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뭐래요? 정 낭자가 약 지어 줬어요?”
사람들의 물음에 부인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은 의혹의 눈길로 서로를 쳐다봤다.
“또 약을 안 지어 줬어요? 뭐라는데요?”
그 부인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똑같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지난 며칠간 사람들은 바람대로 정 낭자를 만나 어딜 치료하고 싶은지 소상히 얘기했다. 정 낭자는 아들 얘기든 딸 얘기든, 남편 얘기든 다른 친척 얘기든 사람들이 얘기하도록 조용히 들어 주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경청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약을 지어 주지도 않고 무슨 병인지 알려 주지도 않는데 이게 무슨 진료야? 그냥 수다를 들어주는 거잖아?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다음은 어느 분 들어가시겠어요?”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나와 물었다. 부인 하나가 시녀를 보고 일어섰다.
“내가 들어갈게.”
부인은 사람들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뭐라고 하나 봅시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간은 다들 귀부인인지라 예법을 중시하기도 했고, 정 낭자의 진료에 나름의 원칙이 있다고 여겨 좀 이상해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물어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부인이 측방으로 들어가자 팔걸이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 듯한 여인이,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가 보였다. 자리에 앉은 부인은 정교랑과 인사를 나눴다.
“무슨 병인지, 환자의 나이는 몇인지, 소상히 얘기해 봐요.”
정교랑이 말했다. 부인도 법도를 아는지라 일단은 차분히 얘기했다. 얘기를 마친 부인의 눈에 여전히 책을 보고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얘기를 제대로 듣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부인, 얘기 다 하셨어요?”
시녀가 물었다.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부인, 가세요.”
시녀가 일어나 길을 안내했다. 이번 부인은 순순히 따라 나가지 않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 낭자, 우리 남편한테 무슨 약을 써야 할까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몰라요.”
부인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낭자? 방금 뭐라고 했어요?”
“부군의 병은, 내가 못 고쳐요. 그러니, 어떤 약을 써야 할지 모르죠.”
정교랑이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부인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우르르 들어와 정교랑을 둘러싸고 질문을 해댔다. 정교랑은 시종일관 고칠 수 없다는 말로 응수했다.
“낭자, 그럼 며칠간 우릴 갖고 논 거예요?”
“그러게요. 신의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못 고친다는 거예요? 딱히 희귀한 병도 아니잖아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정교랑은 단정히 앉은 채 조용히 책만 봤다.
“이게 원칙이라고요.”
시녀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원칙? 그래, 직접 찾아가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해서 우리가 왔잖아. 근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차라리 말을 말 것이지. 며칠 동안 허둥지둥 달려와 기다렸던 걸 생각하니 열이 오른 부인이 소리쳤다.
“네, 저희 아씨의 치료엔 원칙이 있다고요. 다들 아시는 거 아니에요?”
시녀 역시 놀라며 반문했다.
“방금 말씀하신 건 첫 번째 원칙이고요.”
첫 번째? 그럼 두 번째도 있어? 사람들이 놀라 서로 눈치를 살폈다.
“두 번째는 뭐요?”
누군가가 물었다. 시녀는 잠자코 있고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교랑은 긴 머리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두 눈동자로 사람들을 훑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쳐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놀랐다가 곧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 장난해? 제정신인가?
마당에 있던 귀부인들은 주 부인의 거처로 우르르 몰려갔다. 처음엔 궁금해서 보러 왔더니 안 만나 줘서 실망하게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료를 받는다면서 상냥하게 굴기에 다들 좋아하며 달려왔다. 하루에 대여섯 사람만 받는다기에 흥분된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이 여러 사람이 며칠 동안 실없이 놀아난 꼴이잖아! 실망이 놀람과 기쁨, 흥분과 초조로 이어졌다가 다시 실망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갖고 놀아?
대청이 발칵 뒤집어졌다. 언제나 온화하고 단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귀부인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폭발해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그동안 언니로 대우했는데, 동생을 이렇게 대하는 언니가 어디 있어요?”
“강구랑, 우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잖아. 이제 진 상공 댁과 연줄이 닿게 됐다고,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요?”
약을 먹고 막 잠들었던 주 부인은 갑자기 여러 사람이 몰려와 고성을 질러대자 머리까지 어질어질했다.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야? 머리도 아픈데 여인들이 뭐라고 따지는 건지 알 길이 없으니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왜들 이러는 건지……·.”
주 부인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게요. 주 부인이야말로 우리한테 어떻게 이래요. 정초부터 이러면 재미있어요?”
부인 하나가 씩씩거리며 따졌다.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
주 부인이 가슴을 치며 물었다.
“이 댁 딸인데 주 부인과 상관이 없으면, 우리랑 상관있단 거예요?”
다른 부인이 따졌다. 이거 봐, 이거 봐. 그 계집 앞에선 웃는 얼굴만 보이면서, 문제가 생기니까 나한테 와서 따지네. 주 부인은 가슴을 쥐고 기침을 했다.
“그 애가 안 고친다고 하면 그 애한테 따져야지, 왜 나한테 이래요?”
주 부인은 열불이 났다.
“그런 원칙이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죠. 일부러 우리 골탕 먹인 거잖아요!”
부인들도 열을 냈다. 원칙이라니? 들을수록 알 수 없는 얘기에 주 부인은 머리가 웅웅 울렸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고?
“그건 나도 몰랐어요.”
주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이미 분노를 주체할 수 없게 된 부인들의 귀에 그런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무튼 정말 잘났네요. 아주 제멋대로야. 우리가 자진해서 놀아나 줬으니, 누굴 탓해.”
격분한 부인들은 주 부인의 해명을 듣지도 않은 채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 부인은 손을 뻗어 붙잡으려 했지만 누굴 붙잡아야 할지도 알 수 없고, 계속 기침이 나오는 통에 그저 가슴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어서 노야께 집으로 오시라 해라. 큰일이 났어!”
주 부인이 비틀비틀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주씨 저택 대문 앞에 있던 마차들이 속속 빠져나가면서, 그 대담하고 오만방자하며 바보 같은 말도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한가한 정월은 사람들 사이의 왕래가 빈번한 때였다. 각 집의 안채와 사랑채에서 퍼지는 각종 유언비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넓게 퍼졌다.
진 상공의 부친을 고쳤다거나 신선을 만났다는 소문이 먼저 퍼지긴 했지만, 그 황당한 말을 이기진 못했다. 더구나 이젠 정교랑을 직접 본 사람도 많아진 터였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녀였고, 바보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리해 보이지도 않았다. 의술을 배운 적 없으니 감히 그런 말을 내뱉겠지.
신선의 비술 같은 건 백성과 부녀자, 아이들이나 듣고 화제에 올릴 뿐, 고관대작이나 대갓집에서는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는 공자의 말씀을 따랐다.
“노섬 주씨 가문이 명성을 얻으려고 아주 발광을 하는군!”
“사람 하나 고쳤다고 주씨 가문이 그리 날뛰다니.”
“노섬 주씨란 이름을 너무 오래 쓴 것 같군. 여러 해가 되도록 발전이 없으니. 이참에 이름을 바꾸는 게 낫겠어. 이를테면……·.”
“이를테면 아둔 주씨?”
“하하하……·.”
주 노야는 앞에 있던 탁자를 확 밀쳐 버렸다. 대청 안팎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목을 잔뜩 움츠렸다. 방 안에서 들리는 주 부인의 기침 소리가 점점 격렬해졌다.
“내가 뭐랬어요, 내가. 그래도 기어이 믿더니……·.”
주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주씨 가문을 망치려고 아주 작심한 애라니까요! 우린 이제 경성에서 못 살아요!”
주 부인이 여종을 재촉했다.
“어서 짐을 챙겨라. 짐을 챙겨. 당장 떠나자. 섬주로 돌아가야겠어.”
주 부인이 이런다고 당장 짐을 챙기러 갈 수도 없는 여종들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로 주 부인을 위로하고 달랬다.
“저것이 여길 집으로 여기긴 하는 건지!”
주 노야가 발길질로 화분대를 엎어 버리며 소리쳤다.
“쟤가 여길 집으로 여기는 거 같아요?”
주 부인이 안에서 소리쳤다. 이어 격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저 앤 우릴 원수로 여기고 있어요!”
“천것 같으니라고, 당장 불러와라!”
주 노야가 호통을 쳤다.
“냉큼 불러와.”
여종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왔다.
“저, 그게, 안 오겠답니다.”
여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천것이! 주 노야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대청을 빙 돌더니 벽에 걸려 있던 보검을 집어 들었다.
“저런 화근덩어리를 남겨 봤자 어디에 쓰겠느냐!”
주 노야가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놀란 여종들과 몸종들이 무릎을 꿇고 팔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며 말렸다.
주육낭이 발로 문을 뻥 차며 들어오자 안에 있던 시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자님.”
시녀는 얼른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마침 말씀드리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저희 아씨께서 나가신다니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굳은 얼굴로 따지러 왔던 주육낭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정교랑, 당장 나와!”
주육낭이 휘장 뒤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웃고 있던 시녀는 주육낭의 표정을 보고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른 몸종들처럼 불안해하거나 겁을 먹진 않았다. 그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휘장 옆에 섰다.
휘장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자 시녀가 휘장을 들었다. 늘 입던 수수한 옷으로 도로 갈아입고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봤다.
“너 미쳤어?”
주육낭이 소리쳤다.
“아니요.”
정교랑이 대답하며 걸어 나왔다.
“안 미쳤으면서 왜 그런 미친 소릴 해?”
주육낭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무슨 원칙이 그래! 괜히 일 만들려는 거면 좀 그럴듯하게 지어내!”
정교랑은 주육낭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나한테 그런 원칙이 있는 거, 몰랐어요?”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바보가 아니잖아!”
정교랑이 냉소 짓는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쪽한테, 반근이 있지 않나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반근이라는 이름에 옆에 있던 시녀는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할 뻔했다.
“가서, 물어봐요. 이 정교랑이, 멋대로 말을 지어내고, 날조하는 사람인지.”
정교랑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뭐라 묻기도 전에 천천히 말을 이으며 느릿느릿 다가가 주육낭을 쳐다봤다.
“가서, 물어봐요. 이 정교랑이,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 정교랑은, 바르고 올곧은 사람이에요. 찾아가서 치료하는 일이 없고,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쳐요. 내 말에 한 치라도 거짓이 있다면……·.”
정교랑은 어느덧 주육낭 앞에 서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 이제 막 피어나는 소녀 앞에 서 있었지만, 시선에서 결코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난 벼락을 맞아 죽을 거예요!”
정교랑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듣던 주육낭은 귀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굳은 얼굴에 무안과 분노가 스쳤다. 정교랑은 벌써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교랑, 일이 커질까 겁나지도 않아?”
주육낭이 소리를 지르자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바라봤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내는 유일한 표정이었다. 주육낭은 그 표정에서 기쁨이나 희열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무뚝뚝한 얼굴에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두 눈은 보는 이를 오싹하게 했다.
“난, 일이 커지지 않을까, 겁날 뿐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 * *
마차가 주씨 저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번 마부는 주육낭이 아니었다.
“길 알아요?”
시녀가 휘장을 걷고 물었다. 마부는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大桶) 거리로 가면 더 가까워요.”
시녀는 길을 제대로 알긴 하냐는 눈빛으로 마부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댁 육공자는 매번 멀리 돌아갔거든요.”
말을 마친 시녀는 휘장을 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부는 입을 삐죽거렸다.
옥대교까지 가려면 대통 거리를 통하는 게 가깝긴 했다. 거기서 보초(寶鈔) 골목을 가로질러 가는 게 가장 가깝고 마차와 사람도 드물었다. 강주에서 온 촌뜨기가 그런 것도 알아? 상경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경성 토박이보다 더 잘 아네. 과랑 아씨의 여식이 신선을 만났다더니, 곁에 두는 몸종도 보통내기가 아니군. 마부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재촉해 떠났다.
마차 안의 시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주씨 가문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예요?”
“당연하지. 우리 아직 안 쫓겨났잖아.”
시녀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아씨, 장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나 가 볼까요?”
무언가 떠오른 듯 시녀가 물었다. 정교랑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필요 없어. 아직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잖아.”
시녀가 헤헤 웃었다.
“아씨를 얕보려는 뜻은 없었어요.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알아. 난 희망을, 남에게 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뿐이야.”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 있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정교랑의 방문으로 옥대교 저택이 분주해졌다.
“누이, 이게 대체 며칠만이야.”
서봉추가 소리쳤다. 정교랑은 마중 나온 사내들에게 예를 표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직접 말을 끌고 가던 서봉추는 어안이 벙벙한 마부의 표정을 보고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봐!”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채찍을 빼앗고는 말을 몰아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마부가 얼른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어이, 뭐 하는 거야?”
고개를 돌린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마부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니, 저, 저는……·.”
마부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저리 가, 저리. 법도를 모르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서봉추는 턱을 쳐들고 마부를 훑어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 그 마부에 비하면 어림없네. 예전 그 마부는 법도를 잘 알아 문턱 한 번 넘는 일이 없었어. 귀퉁이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잘 좀 본받아.”
서봉추가 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밖에 남겨진 마부는 어리둥절했다. 예전 그 마부? 정 아씨가 출타할 땐 늘 육공자가 직접 데려다주셨는데. 육공자를 마부로 여기는 거야? 문턱도 안 넘으셨다고? 그리고 저 사내들은 뭐야? 여기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네.
다른 사람들은 누이에게 줄 식사를 준비하러 나가고, 안에는 범강림과 서무수, 서봉추만이 남았다. 정교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가격을 8천 관(貫)까지 깎았다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고집 있는 녀석이 아니야. 그것도 며칠을 실랑이한 끝에 간신히 깎은 거야.”
범강림이 혀를 내둘렀다.
“8천 관이라니. 내 평생 그리 큰돈은 구경도 못 해 봤는데.”
“맞아. 그 자식이 아주 우리 덕에 한몫 챙기려는 거야. 그 식당에서 대박이 났다나. 목이 좋아서 돈을 엄청 벌었대.”
서봉추도 혀를 내둘렀다.
“일 년이면 투자금 회수할 거라는데, 그 정도면 재상 대인보다 돈을 많이 버는 거잖아.”
서봉추가 서무수를 쳐다봤다.
“셋째 형님, 재상 대인의 수입이 술집만도 못해요?”
서무수는 잠자코 있는데 정교랑 뒤에 꿇어앉아 있던 시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평(平) 상공의 녹봉이 한 달에 3백 관쯤 되니까, 2년은 꼬박 모아야 술집을 살 정도겠네요.”
다들 깜짝 놀랐다.
“재상을 해도 그것밖에 못 벌어? 딱해라.”
서봉추는 놀란 눈치였다. 그저 녹봉이나 받자고 재상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시녀는 빙긋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범강림과 서무수도 서봉추를 내버려 두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확실히 저렴한 가격은 아니야. 급한 게 아니면 우리가 천천히 협상해 볼게.”
서무수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요. 그깟 돈이, 무슨 대수라고요.”
8천 관인데? 그깟? 대수가 아니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정교랑을 쳐다봤다. 시녀마저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누이, 재상 대인보다도 돈이 많네.”
서봉추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가장 값나가는 게 목숨이잖아요.”
정교랑이 일어나며 말했다.
목숨? 세 사람은 정교랑을 쳐다봤지만 시녀는 퍼뜩 깨달았다.
“아, 아씨, 뭔지 알겠어요.”
시녀는 예의도 잊고 소리쳤다. 아씨께서 하신 모든 일이, 이제 보니 이걸 위해서였구나!
* * *
주육낭은 술을 아예 동이 째 들고 입에 들이부었다. 진 공자가 지팡이로 주육낭을 후려치는 바람에 주육낭의 옷으로 술이 쏟아졌다.
“뭐야? 또 같이 퍼마시려고?”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진 공자는 그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게 왜 내 말을 안 들어? 기어이 쫓아가서 시비를 걸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때릴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으면서. 치욕을 자초한 셈이잖아.”
“그 애가 우리한테 시비를 건 거지! 무슨 원한이 그리 대단하다고 끝도 없이 이래?”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뭘 그리 성을 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냉소를 지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진씨 가문에서 좀 치켜세워 주니까 제가 정말 신선이라도 된 줄 아나? 욱해서 삐딱하게 나가나 본데, 이래서 저한테 좋을 게 뭐야? 여인네가 돼서 그리 경망스러워서야 어떻게 살려고?”
진 공자는 찻잔을 들며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오라비인 자네가 지켜 주면 되지.”
“진십삼낭!”
주육낭은 분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질렀다.
“농담 안 할게, 농담 안 해.”
진 공자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보기엔 별일도 아니야. 진짜 욱해서 오기를 부리는 건지, 정말 자신이 있는 건지 물어보면 되잖아?”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내가 누굴 말하는지 알잖아. 내 앞에서 모르는 척하지 마.”
진 공자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여봐라.”
주육낭이 소리쳤다. 문밖에 있던 몸종이 얼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근을 불러오너라.”
주육낭의 말에 몸종은 멈칫했다.
“공자님, 어느, 반근이요?”
몸종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주육낭은 술잔을 꽉 쥐어 으스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그 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작심하고 움직였어!”
언제 어디서나 남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주려는 것 같았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존재감을.
주육낭이 탁자로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의 진 공자는 차를 우리고 있었다. 주육낭의 시선을 의식한 진 공자가 웃음을 지었다.
“이 차는 맛이 없어. 나도 술을 마셔야겠네.”
진 공자가 눈썹을 꿈틀이며 말했다.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진 공자를 노려봤다.
“너희 육공자의 반근을 불러오너라.”
진 공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문가에 있는 몸종에게 명했다. 몸종이 네 하고 대답한 후 뒤돌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