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어둠이 내릴 무렵, 주 부인은 방으로 들어갔다. 주 노야가 술기운에 홍조를 띤 얼굴로 팔걸이 책상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다리와 등을 안마하던 시녀 둘이 얼른 예를 표했다. 주 부인의 뒤에 있던 여종이 손을 내젓자 시녀들이 물러갔다.
여종이 들고 있던 명첩들을 바닥에 내려놓자 그 소리에 주 노야가 눈을 떴다. 주 노야는 취기가 남아 있는 피로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다. 그리고 여종이 건네는 뜨거운 물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내일은 생당 집에서 초대했으니, 당신이 아이들 데리고 다녀오시구려.”
새해 같은 큰 명절에 지인과 상관, 동료 접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경성이었다. 누가 누굴 초대하고, 누구 집에 누가 왔다는 소식에 이목이 집중됐고, 이를 왕래의 근거로 삼았다.
“못 가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 좀 보세요.”
주 부인은 바닥에 둔 각양각색의 명첩을 손으로 가리켰다. 주 노야는 놀란 표정이었다.
“이게 다 뭐요? 아직 안 간 곳들이오?”
예년 이맘때라면 인사가 거의 마무리될 시기였다.
“당신의 그 잘난 외조카 덕분이죠.”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주 노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이게 뭐 안 좋소?”
주씨 가문에서 그 여인들을 초대한 건 이와 같은 상황을 위함이었다. 친척 혈육임을 알리고, 진씨 가문이 은혜를 입었음을 알리고, 병을 고치는 신선의 비방을 얻었다는 구실로 더 많은 이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주 노야에게 부끄러운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 여인 덕분인 건 맞으니까. 주 노야는 손을 뻗어 명첩들을 확인했다. 과연 전혀 왕래가 없던 사람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그 아이가 병을 치료하러 가지 않겠다는 것도 이해는 되지. 어쨌거나 아직 혼례도 안 치른 규수잖소. 집안 형편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남들 눈 걱정할 것 없소. 공평하게 아무도 안 보면, 누구 병은 고쳐 주고 누구 병은 안 고쳐 준다는 말도 안 나올 테고.”
“보겠대요.”
주 부인이 말했다.
“안 보겠다는데 어쩔 거야. 저쪽에서 부탁하는 처지……·, 뭐라고?”
주 노야는 하던 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주 부인을 쳐다봤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그랬어요. 자긴 병을 고칠 수 있다고요.”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주 노야는 멈칫했다가 곧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럼 더 좋지.”
“좋긴 뭐가요.”
주 부인은 울적한 표정이었다.
“어찌나 시원스럽게 대답하던지 나만 죄인이 됐어요. 그 여인들이 내 뒷담화하는 거 못 봤죠? 치료해 주지 말라고 내가 막았던 것처럼 여기더라니까요.”
그것 때문이군. 하여간 여인들은 사소한 걸 따지고 든다니까. 주 노야는 껄껄 웃었다.
“괜찮소, 괜찮아. 마음대로 떠들라지. 나중엔 저들이 당신한테 부탁하러 올 거요.”
주 노야는 갑자기 힘이 불끈 솟는 듯 술을 더 가져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길 바라야죠. 이제 제발 문제 좀 안 일으켰으면 좋겠어요.”
주 부인은 탁자에 술을 차려 놓으며 말했다.
“우리 애들 키울 때도 무인 집안이라 애들이 짓궂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렇게 골칫덩어리인 애는 없었어요. 그러니 정씨 가문에서도 그 앨 집안으로 안 들였겠죠.”
정씨 가문에서 그 애를 집안으로 안 들였다……·. 거기까지 말한 주 부인은 말을 멈췄다. 뭔가 중요한 정보란 생각이 들었다.
“노야, 혹시 정씨 가문에서도 그 애가 너무 성가셔서 집으로 안 들이고 도관으로 보낸 거 아닐까요?”
“정씨 가문?”
주 노야는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 아둔한 게지. 그자들이 뭘 알겠소? 저들이 내 누이를 죽음으로 몰았으니 저 바보, 아니, 저 아이 마음에 원한이 안 생겨? 그러니 그 집으로 안 간다고 버텼겠지. 아니면 경성으로 오는 이유를 굳이 숨길 필요가 없잖소. 진 상공 댁 초청으로 오는 걸 정씨 가문에서 알았으면 어쨌겠소? 아마 죽은 정 노태야까지도 무덤에서 기어 나와 따라붙었을걸?”
정씨 가문 얘기가 나오자 주 노야는 예의를 집어던졌다. 하긴 그렇지. 주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 바보, 아니, 그 아이한테 잘 일깨워 주시오. 당초 제 어미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겪었는지, 우리 집안은 또 얼마나 억울했는지. 특히 정씨 가문 때문에 화병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그 애 외조모님이 그리 일찍 돌아가시진 않았을 거라고.”
요점은 간단했다. 그 아이에게 누가 혈육이고 누가 원수인지 알려 주라는 것.
“정씨 가문으로는 절대 못 돌려보내. 경성에 있다가 좋은 집에 시집가서 잘 살아야지.”
주 노야가 말했다.
“시집을 갈 수 있을까요?”
주 부인이 놀라 물었다.
“왜 시집을 못 가? 앞을 못 보고 다리를 절어도 다들 잘만 시집가는데. 그리고 지금은 멀쩡하잖소.”
주 노야가 노려보며 대꾸했다. 여종이 술안주를 내오자 주 부인이 소매를 들어 술을 따라 주었다.
“시집을 안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해요.”
주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집을 안 가? 여인이 시집을 안 가면 어디에 써? 주씨 집안에 쓸모없는 사람은 필요 없어.
주노야가 노려보자 주 부인은 웃으며 술을 따라 주었다.
“저런 애가 좋은 집을 어디서 찾아요? 모친을 여의고 집안과는 상극인 데다 바보로 여러 해를 살았잖아요. 지금이야 어디서 신선의 비방을 얻었는지 병을 고칠 줄 안다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과는 달라요. 좋은 집에서 저 아이가 눈에 차겠어요?”
주 부인이 ‘좋은 집’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주 노야도 알아들었다. 좋은 집은 물론 주씨 가문에 도움이 되는 집이었다. 주 노야는 잠자코 술을 마셨다.
“그냥 집에 두는 게 나아요. 당신이랑 내가 잘 먹이고 보살펴 주면 되죠. 우리가 가고 나면 아이들이 고모를 봉양하고요. 남의 집에서 설움을 당하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겠어요?”
주 노야는 퍼뜩 깨달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게 좋겠군. 역시 당신이 세심하구려. 역시 외숙모라 달라.”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주 부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자, 부인도 고생 많았잖소. 내가 한 잔 따라 주리다.”
주 노야가 술 주전자를 들어 주 부인에게 따라 주었다. 주 부인은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주 노야 부부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겨울밤을 보냈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주 부인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 같은 마차 타기 싫어요. 쳐다보기만 해도 속이 안 좋다고요.”
“그럼 가지 말든가.”
여인이 불만을 토로하자 주 부인이 대꾸했다.
“안 돼요. 교(喬) 낭자의 다도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데요. 간신히 구경하게 됐는데 어떻게 안 가요.”
여인은 모친의 옷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어머니, 마차 한 대 더 내주시면 되잖아요. 저 여자 혼자 타게 하면 더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주 부인은 딸을 노려보며 똑바로 앉으라는 눈짓을 한 후, 자신도 얼른 자애롭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온 건 여종이었다.
“부인, 정 아씨께서, 안 가신답니다.”
여종은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주 부인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거봐, 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주 부인은 함께 가자고 설득하기 위해 다시 외조카의 대청으로 왔다. 자리에 앉으려던 주 부인은 문득 설득이고 뭐고 그냥 가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명색이 외숙모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니. 아주 콧대가 하늘을 찌르네? 하지만 주 부인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안 간다는 거야? 가기로 했잖니. 왜 말에 신용이 없어?”
주 부인이 앞에 앉은 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앞에 앉은 여인은 천천히 밥을 먹고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체통을 지켜야지!
“내가 언제, 간다고 했죠?”
정교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병을 고쳐 주겠다며?”
주 부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수십 년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지내며 쌓아온 경험이 아니었다면 진작 폭발했을 것이다. 정교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이어 나갔다.
“부인, 저희 아씨 말씀은 병을 고칠 순 있지만 직접 가시진 않는단 뜻이에요.”
옆에 있던 시녀가 말했다.
“부인과 아씨께서 말씀하시는데, 네가 어느 안전이라고 끼어들어?”
주 부인 뒤에 있던 여종이 소리쳤다.
“어멈, 부인, 진정하세요. 소인이 법도를 몰라 그런 게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선 눌변이라 말씀을 많이 안 하세요. 그래서 소인이 아씨 대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 정교랑의 말수가 적긴 했다. 그랬구나, 말을 못하는 거였어. 하긴, 바보였던 애가 하루아침에 정상인이 될 순 없겠지. 귀신이 아니고서야. 여종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했고, 주 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안 가면 병을 어떻게 고치게?”
주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 아씨께서 병을 치료하실 땐 두 가지 원칙이 있어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었기에, 주 부인은 시녀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첫째, 직접 찾아가서 고치지는 않으세요. 찾아오길 기다리시죠.”
무슨 원칙이 이래!
“그럼 진 상공 댁은……·.”
주 부인이 중얼거리자 시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끊었다.
“물론 진 상공 댁 같은 경우는 별개로 논해야죠.”
진 상공 댁 같은?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말을 나더러 전하라고? 뭐라고 해? 당신네는 진 상공 댁만큼 대단하지 않으니, 모셔 갈 자격이 없고 해? 제정신이 아니거나 경성을 뜰 생각이 아니고서야!
“교교, 억지 좀 부리지 마. 그 원칙이란 것도 어차피 네가 정한 거잖아.”
주 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정한 거라, 고칠 수 없어요. 말에 신용이 있어야 하잖아요.”
주 부인은 또다시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원칙을 깨면, 병 못 고쳐요.”
원칙을 어기면 병을 못 고친다? 이거 협박이야? 원칙대로 안 하면 병자를 보지도 않겠다고? 주 부인은 여전히 태연하게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여인을 보고 이를 악물며 일어나 나갔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주씨 가문 자녀들이 부모님께 문후를 올리러 왔다. 주육낭은 조금 늦게 왔는데, 들어와 보니 누나 하나만 앉아 있었다. 방 안 분위기는 다소 침울했다.
“당신도 참, 안 간다고 하면 내버려 두시오. 원칙대로 하는 건데 화낼 게 뭐 있소?”
주 노야가 말했다. 주육낭은 주 부인의 눈가가 붉은 걸 그제야 발견했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아무 일 아니다.”
주 부인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아들을 안심시켰다.
“무슨 일이겠어. 강주에서 온 그 바보 때문이지.”
옆에 있던 누나가 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 입으로 허풍은 다 떨어 놓고, 이제 와서 잡아떼니 어머니만 나쁜 사람이 되잖아. 오늘 밖에서 사람들이 어머니를 놓고 얼마나 이기죽거렸는지 몰라.”
“칠랑, 입 다물어. 그만 가서 쉬어라.”
주 부인이 말했다.
“두 분이 그 애를 너무 오냐오냐하셔서 그래요!”
일어나 나가던 주칠랑은 주육낭을 보더니 옷소매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너도 마찬가지야!”
주칠랑이 나갔는데도 주육낭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모친은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애가……·.”
주육낭과 주노야가 동시에 입을 열었기에 주육낭이 말을 멈췄다.
“부러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닐 게요.”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 며칠 사람들을 만나며 얘길 들어보니, 그 애가 병을 고치는 건 신선에게 받은 비방 덕분이라더군.”
“아버지.”
주육낭이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황당한 말을 누가 믿는다고! 아무리 모친을 위로하기 위함이라지만 너무 터무니없었다.
“신선이 아니라면 여기저기 유랑하는 도사나 거사일 수도 있고.”
주 노야는 취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껄껄 웃었다. 아내가 만난 여인들이 냉소와 조롱을 보낸 데 비해, 주 노야가 만난 사내들은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생각했다. 덕분에 주 노야는 요즘 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진 상공 같은 거물과 연이 닿게 됐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고인을 집에 두고 있으니.
“그 바보, 아니, 교랑이 나아진 건 고인 덕분이라더군.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바보로 지낸 탓에, 여기가 여전히 안 좋아서 그렇지.”
주 노야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래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오. 본인도 잘 모른다고 했대.”
주 부인과 주육낭은 그 말에 멈칫했다.
“아니,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어요?”
주 부인이 물었다. 화제의 주인공이 본인들 집에 묵고 있는데, 본인들만 그 일을 몰랐다.
“어디겠소? 진 상공 댁이지.”
진소 부친의 병세가 좋아지면서 지위가 탄탄해진 덕에, 진씨 저택은 끊임없이 드나드는 손님들로 떠들썩한 새해를 맞이했다. 손님이 가득 찬 문간채는 술집이나 찻집처럼 시끌벅적했다. 진씨 가문 문간채의 차 맛이 떨어지고 진소 역시 이들을 접견하는 일이 없었지만, 발 디딜 틈 없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들은 진소를 보기 위해 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관료 사회의 관습이었다. 왔다 갔다는 것으로 성의를 표하기만 하면 되니까. 문간채의 관료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웃고 떠들며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한담을 나눴다.
“정 낭자는 고인을 만난 거라더군. 듣자니 신의 편작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오. 정 낭자는 도관에 살았다니 거기서 이 진인(眞人: 도교에서 도를 깨쳐 깊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 여기서는 노자를 가리킴)을 만났겠지.”
오가는 잡담 중에 이런 말들이 퍼지기도 했다. 언제, 누구 입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진 노태야의 병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는 곧 병을 고쳤다는 강주 처자에게로 옮겨 갔다. 이야기가 나왔다 하면 논쟁이 끝나지 않아 문지기를 잡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강주 처자가 어떤 선인을 만났다던가?”
차에 물을 따라 주던 문지기들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한 말씀 마세요. 그런 일 없습니다.”
문지기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새어 나가는 소문을 막을 순 없었다. 진 노태야의 거처에 있는 진소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그런 말들이 왜 나온 걸까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네가 말한 거 아니었느냐?”
진 노태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진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고인이라고 했지, 신선이란 말 같은 건 한 적 없습니다.”
“바보의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의술을 가진 고인이면, 신선이나 마찬가지지.”
진 노태야가 웃었다. 진소는 어이가 없었지만, 부친의 농담을 알아들었다.
“아버지,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내가 소문낸 거 아니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난 그저 노복들과 한담을 나눈 것뿐이야. 누가 소문냈는지 누가 알아? 아무튼 난 요양 중이니 내가 소문낸 건 아니다.”
진소는 실소를 터뜨렸다. 부친이 넌지시 시킨 게 아니라면 누가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냈겠는가.
“공자께서 괴력난신(怪力亂神: 귀신에 관한 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말라 하셨다. 나는 모르는 일이고, 물은 적도 말한 적도 없어.”
진 노태야는 손을 내저으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정 낭자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뿐이다.”
유학을 공부하는 제자들이야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지만, 이 세상에 유학자가 그리 많다던가. 더구나 이런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일을 두고. 모르긴 몰라도 올 새해 명절을 계기로 정 낭자의 명성은 온 경성에 널리 퍼질 것이다.
“아버지, 이게 정 낭자한테 좋을까요?”
진소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 낭자가 신선을 만난 게 다른 사람이 신선을 만난 것보단 낫지.”
진 노태야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웃었다.
“이 세상에 행운을 줍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 행운이라는 게 어디 그리 쉽게 주울 수 있는 것이라더냐.”
주 노야의 말이 맞았다. 부인들의 말투에 날이 서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씨 가문을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주씨 가문을 찾아오는 마차는 전보다 더 많아졌다. 본디 넓었던 대문 앞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어수선해졌지만 좁다고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문지기들은 기쁜 얼굴로 어깨에 힘이 주며 마차 세울 곳을 찾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이웃들이 구경하러 오면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명절 쇠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불평하며 은근히 뻐기기도 했다.
주 부인의 객청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문이 울릴 지경이었다. 화제는 대부분 정교랑이었다.
“어렸을 땐 바보였다면서요?”
“맞아요. 예전에 내가 과랑(戈娘)과 친했잖아요. 혼례를 올린 후에도 몇 년간은 경성에 올 때마다 날 찾아와 만나곤 했어요.”
부인 하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씨 가문의 자녀들은 무기의 글자를 따 이름을 지었는데, 딸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교랑 모친의 이름은 과(戈: 창을 의미)였다. 집안 서열로는 다섯째인지라 ‘오랑’이나 ‘과랑’으로 불렸다.
“그러더니 그 아이를 낳은 후부턴 안 보러 왔어요. 서신 왕래도 끊겼고요.”
그 부인은 낙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다들 자식이 있는 처지인지라 그런 얘기가 나오자 하나같이 마음 아파했다. 부인들은 함께 탄식했지만 젊은 여인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지 계속해서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세상에, 정말 부처님이 도우셨네요.”
“부처님이 아니라 진인이라니까요.”
“대체 진인이에요? 부처님이에요?”
“이따 올 거잖아요. 물어보면 알겠죠.”
거기까지 말한 여인들은 밖을 쳐다봤다.
“주 부인이 간 게 언젠데, 왜 아직도 안 오죠?”
여인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허세를 부리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주 부인이 점점 우리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아요.”
입을 삐죽거리며 불평을 털어놓는 이도 있었다.
“이제 진 상공 댁 부인과 왕래하는 사이가 됐잖아요. 우리 같은……·.”
이와 같은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주 부인은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그런 얘기가 나오리라 짐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은 걸핏하면 주 부인이 화제에 올랐다.
“네가 말한 원칙대로 했다. 네가 안 찾아가도 되고 사람들이 찾아왔어. 이제 어쩔 거야?”
주 부인은 노기를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교교, 너 이 외숙모를 일부러 괴롭히는 거지?”
휘장 뒤 침상에 누운 여인은 말이 없었다. 윗전 앞에 공손히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던 시녀는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부인, 저희 아씨는 누굴 괴롭힐 만큼 기력이 넘치지 않으세요. 아씨는 원칙대로 하는 분이에요. 터무니없거나 쓸데없는 말씀은 안 하시죠.”
시녀는 불안해하기는커녕 도리어 기분 나빠했다.
“저희 아씨는 매일 꼭 낮잠을 주무세요. 아시잖아요.”
알다마다, 이 집에 들어오던 첫날부터 그놈의 낮잠 때문에 날 눈밭에 세워 뒀잖아.
“그 낮잠은 어쩜 이렇게 시간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는지.”
주 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세상사는 본디 우연으로 이루어지잖아요. 우연이 아니었다면, 저희 아씨께서 오늘 부인 앞에 계시지도 않았을걸요.”
시녀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열 받은 주 부인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부인, 기다리는 부인들께 뭐라고 하죠?”
얼른 뒤따라가던 여종이 나지막이 물었다.
“뭐라고 하긴, 잔다고 해야지.”
주 부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여종이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갔다.
“그런데, 그래도 될까요? 부인께서 일부러 뻐기신다고 여길 텐데요.”
그래, 어쨌든 우리 집 애잖아. 손님이 오셨는데 안주인이란 사람이 아이를 부르기는커녕 잔다고 하다니. 진짜 잔다고 쳐도 깨우면 그만 아닌가. 웃어른이란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괜히 허세 부리는 게 아니고서야. 주 부인은 손을 쥐며 이를 갈았다.
“어쩌다 저런 화근덩어리가 집안에 들어와서!”
주 부인은 대청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문이 열리면서 주 부인의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부인들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주 부인은 못 들은 척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 애 몸이 아직 안 좋아요. 방금 약을 먹고 잠들었다네요. 다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주 부인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을 바라보는 표정들에 묘한 구석이 있었다.
“진 노태야의 병을 치료할 때도 몸이 그렇게 안 좋았대요?”
젊은 부인 하나가 웃으며 물었다. 주 부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땐 진씨 가문에서 머물렀으니 나야 모르죠. 그건 진 부인께 여쭤봐요.”
주 부인은 이번에도 웃으며 대꾸했다. 이 젊은 부인의 남편은 주 노야보다 품계가 높았지만, 높아도 진 부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높진 않았다. 그럼 나한테도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지!
주 부인이 그런 수모를 당할 이유는 없었다. 언제나 호탕하고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으며 온화하다는 인상은 이미 잃은 후였지만. 이게 다 그 천것 때문이야.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두 부인 사이에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말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집에 애들이 아직 어려서 먼저 일어날게요.”
그 젊은 부인이 지체 없이 일어나자 두세 명이 따라 일어섰다. 나머지 부인들은 주 부인을 쳐다봤다. 기분 나쁜 표정이 역력했다. 주 부인은 단정히 앉아 있었지만 역시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 버리면 원수가 될 텐데. 좋은 인연을 맺으려던 게 이런 꼴이 될지 누가 알았겠나.
그때 문밖에서 여종의 소리가 들렸다.
“부인, 반근 낭자 말이 아씨께서 일어나셨답니다.”
일어나 갈 준비를 하던 여인들은 멈칫했고 주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우연도 참. 그 젊은 부인은 주 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여종들이 얼른 문을 열었다.
“우리 애도 깼을 것 같네요. 정 낭자는 다음에 뵈러 오죠.”
젊은 부인은 관심 없다는 듯 냉담하게 말했다. 그때 문 앞에 있던 시녀가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부인, 저희 아씨를 뵈러 오셨어요?”
낭랑한 목소리에 용모도 예쁘장한 게 대갓집 시녀로 더없이 제격인 모습이었다.
“너희 아씨를 보는 게 쉽지 않구나.”
일개 시녀에게 깍듯할 필요는 없는지라 젊은 부인은 직설적으로 툭 내뱉고 문을 나섰다.
“부인, 그럼 직접 가시면 되잖아요.”
시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은 큰일 났다고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근, 무례하구나!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만나러 와야지, 어디 부인들더러 오라 가라야?”
주 부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녀는 웃으며 예를 올렸다.
“사실 부인들께서 저희 아씨를 보시려는 건 진료를 위해서잖아요.”
시녀는 회랑 아래에 서서 자리를 뜨려는 젊은 부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안에 남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부인들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희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자의 일은 사적인 것이라 남들 앞에서 논하기 어렵다 하셨어요. 문을 닫고 따로 앉아 자세히 얘기해야지, 드러내놓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요.”
하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선 말도 많이 나오기 마련인데 남들 앞에서 태연하게 진료를 받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곧장 낭자를 찾아가 남들 안 보는 곳에서 얘기하는 게 낫지.
젊은 부인은 웃으며 두봉을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네 아씨께 안내해라.”
시녀는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하고는 안에 있는 주 부인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린 후에야 뒤돌아 길을 안내했다. 실내 분위기는 대번에 밝아졌다.
“우리도 가 봐요.”
부인들이 일어나며 말했다.
“서두를 것 없어요. 한 명씩 가야죠.”
나서서 순서를 정하는 이도 있었다. 여인들은 누가 먼저 가고 그다음에 누가 가자며 웃고 떠들었다. 안주인인 주 부인은 한쪽에 내버려 둔 채로.
저희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자의 일은 사적인 것이라 남들 앞에서 논하기 어렵다 하셨어요.
주 부인의 귓가에 그 시녀의 말이 울려 퍼졌다. 주 부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너희 아씨가 말하긴! 너희 아씨가 언제 그런 말을 해! 세상에,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천것이 있다니! 그리 대범하게 망발을 지껄이다니!
“주 부인, 다음부턴 이런 말 일찍 좀 전해 주세요. 괜히 오해하지 않게.”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주 부인을 보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말했다. 주 부인은 목이 따끔거리는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