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60)

-마음-

진씨 가문 집사는 진지하게 예를 표한 후 정 아씨에 대해 묻는 대신 범강림 등을 깍듯이 대하며 명첩을 건넸다. 그러고는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단자와 선물을 일일이 대조했다. 범강림은 선물 받는 일을, 서무수는 말을 책임졌다. 다소 서툴긴 했지만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들은 잠시 후 문밖으로 나가 진씨 가문 집사를 배웅했다.

“아이고, 어머니.”

서봉추가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이 봉추가 이 나이 먹도록 새해 선물은 처음 받아 보오.”

일부는 선물이 뭔지 보러 갔고, 일부는 명첩을 확인해 보라며 서무수를 재촉했다.

“누군데요, 누구.”

서무수가 명첩을 펼쳤다.

‘취주 진박.’

모르는 이름이었다. 서무수가 안을 다시 살펴보니 봉투가 두 개 더 들어 있었다. 작은 봉투에는 축의금과 함께 이름이 남겨져 있었다.

‘진소.’

서무수가 손에 들고 있던 단자를 떨어뜨리자 범강림이 잽싸게 손을 뻗어 단자를 받았다.

“셋째야? 누군데 그래?”

“이부시랑 진 상공이요.”

서무수가 중얼거렸다. 조정의 대소 신료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누구나 아는 고관대작은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이부시랑은 관료의 승진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분이 아니던가.

“그럼 폐하와도 연이 닿는 분이잖아.”

놀란 범강림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안쪽을 쳐다봤다. 안에 있는 시녀는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고 있었고, 옆에 있는 정교랑은 이따금 무어라 중얼거렸다. 여느 집 여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서무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명첩을 잘 챙겨 넣으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이, 우린 무슨 답례를 보내는 게 좋을까? 경성은 처음이라 이곳 풍속을 잘 모르겠네. 누이가 좀 알려 줘.”

서무수가 다른 건 묻지 않으며 명첩을 건넸다. 정교랑이 서무수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라버니, 나도 경성은 처음이에요.”

그러더니 시녀를 쳐다봤다.

“반근은 경성이 익숙하지만요.”

서무수는 저도 모르게 시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녀가 경성을 잘 안다고? 정교랑은 경성 사람이 아니고? 뭐지?

“그렇군요.”

서무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범강림을 부르며 말했다.

“지난번에 누이가 남겨 준 돈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반근에게 맡겨 사도록 하죠.”

“내가 돈을 갖고 있어. 같이 사러 가자.”

범강림이 몸을 일으키자 서봉추도 따라나섰다.

“나도 같이 갑시다. 나간 김에 점포에 들러 옷도 좀 수선하게요.”

“겸사겸사 새해에 쓸 물건들도 사야겠어요.”

시녀가 말했다.

“그래, 도부(桃符: 새해 아침에 마귀를 쫓기 위해 문짝에 붙이는 작은 나뭇조각)랑 폭죽도 사고.”

“술도요, 술도.”

“조상님께 제사 지낼 때 쓸 향촉도요.”

“다 같이 갑시다. 아직 경성 구경도 못 했잖아요.”

형제들이 웃으며 일어섰다. 목소리를 낮추려 애쓰지 않았다면 천장이 들썩였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서무수가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조용히 앉아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처음 안 후로 지금까지 이 여인은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이 정도로 기분을 드러낸 건 드문 일이었다.

“시끄럽지? 다들 거친 사내들이라 법도 같은 걸 몰라.”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봤다.

“가족끼리, 법도 따질 필요 없어요. 떠들썩해야 경사죠. 고마워요, 오라버니들. 어려워하지 않고, 서먹하게 대하지 않아서요.”

서무수는 수염을 만지려고 손을 갖다 대다가 수염을 깎았음을 뒤늦게 깨닫고 어색하게 턱만 두어 번 쓰다듬고는 웃음을 지었다.

“매번 이러면 어려워할 수밖에 없어.”

“오라버니 말이 맞아요.”

정교랑이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 * *

거리는 폭죽 터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새해가 다가오자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시녀는 토끼 모양 등을 들고 장난치는 아이를 피해 규원거로 들어갔다. 점원은 시녀를 보더니 반갑게 맞이했다.

“왔군요. 한 공자께서 누이가 오면 부르라고 하셨어요.”

시녀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얼마 안 가 커다란 두봉을 걸친 한원조가 나왔다. 문밖에 있던 점원이 얼른 마차를 대령했다. 시녀는 마차에 올랐고 한원조는 말에 올랐다. 이들은 의원 한 사람과 함께 성 밖으로 향했다.

“낭자, 말씨를 들으니 강남 출신 같군.”

한원조가 말을 걸었다. 날씨가 화창하여 시녀는 휘장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커다란 두봉으로 꼭꼭 싸매고 있는 탓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아 한원조와 이야기를 나누기엔 딱 좋았다.

“네, 강주 사람이에요.”

시녀는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엔 오래 있으려고?”

한원조가 또 물었다.

“그건……·.”

시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윗전 뜻을 따라야죠.”

한원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시녀가 말을 이었다.

“아시나 모르겠네요. 신선거는 중서문하성 비각 전사 유 교리와 왕래가 있어요.”

한원조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한원조를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렇군.”

한원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알았다.”

한원조는 말을 세우거나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계속해서 경성 풍속을 물었다. 시녀 역시 별다른 내색 없이 웃고 떠들 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술집이 보이자 한원조가 말의 고삐를 조이며 손짓하여 하인을 불렀다.

“어찌 물어야 하는지 알지?”

한원조가 물었다. 쭉 같은 길을 걸어온지라 하인도 시녀와 한원조의 대화를 들은 터였다. 하인은 질문의 의도를 대번에 알아듣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좀 물읍시다. 여기 취봉루란 곳이 있소?”

하인은 고개를 들어 밖에 있는 편액을 바라보면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다른 지방의 말씨였다. 아직 밥때가 아닌지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계산대 근처에 서 있던 점원들은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외지 분인가 본데 취봉루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3년 전에 우리 공자님께서 지나가던 길에 이곳에서 밥을 한 끼 드셨는데, 그 맛을 못 잊으신답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찾아왔지요.”

하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3년 전이면 과거가 있던 해였다. 올해 다시 응시하려는 서생도 많으니 이상할 게 없었다.

“외지 분이 기억력도 참 좋으십니다. 여기가 바로 취봉루예요.”

“지금은 신선거로 이름이 바뀌었지만요.”

“신선도 잊기 힘든 맛이죠.”

점원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웃고 떠들며 하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하인은 잡담을 나누는 척하며 잊지 않고 물어야 할 말을 물었다. 이어 식당에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자 그 틈에 몰래 빠져나왔지만, 주의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하인은 재빨리 한원조와 시녀 쪽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안 멉니다. 저쪽 송가촌(宋家村)이래요.”

하인이 한쪽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고했다.

“마을 어귀에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문 앞에 커다란 홰나무가 있는 집이 있답니다.”

한원조와 시녀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었다. 겨울철이라 벌판이 휑하다 보니 눈에 확 띄었다.

이대작은 본명이 아니고 요리를 배우면서 불린 별칭이었다.

“우권을 보러 왔소?”

나무처럼 바싹 마른 노파가 흐린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땅을 보러 온 게 아니고?”

한원조가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하자 시녀가 웃으며 나섰다.

“저희는 땅 사러 온 사람 아니에요. 병이 났다기에 저희 공자님께서 도울 게 없나 하고 오신 거예요.”

시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노파는 눈이 침침하고 귀가 잘 안 들리는 듯했다.

“그거 아주 좋은 땅이에요. 많이 쳐 주셔야 해.”

노파도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에 있던 아낙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울고 있었는지 눈이 빨갰다.

“어머님, 누구 왔어요?”

아낙은 시녀를 보고 멈칫하더니, 한원조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공자님, 어쩐 일이세요?”

역시 한 공자와 함께 오니 일이 훨씬 수월하네. 시녀는 한원조를 힐끔 쳐다봤다. 역시 아씨는 주도면밀하셔. 그런데 아씨는 그냥 불쌍한 사람이라 도와주시는 건가? 그날 식당 앞에선 왜 안 나서시고?

시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원조는 벌써 여인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한원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내의 힘없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땅 팔지 마시오. 그건 당신이 혼수로 가져온 밭이잖소. 나 죽으면 개가해야지 혼자 어찌 살려고!”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자 아낙은 얼른 손으로 닦았다.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땅 사러 온 거 아닙니다.”

“뭐라고?”

문가에 서 있던 노파가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노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물었다.

“땅 사러 온 게 아니오? 그럼 뭐 하러 왔는데?”

시녀는 노파를 쳐다보며 입을 삐죽거리고 큰 소리로 대꾸했다.

“우린, 도와주러 온 거라고요.”

한원조가 객잔으로 돌아왔을 무렵은 이미 오후였다. 좌불안석인 채로 기다리고 있던 두 동료는 돌아온 한원조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네가 정말 유괴라도 됐으면 우리가 자네 부모님을 어찌 봤겠나.”

동료들의 놀림에 한원조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 앉은 한원조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유괴범도 아니고 협박도 안 했어.”

한원조가 웃으며 찻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 부인과 사내를 보러 같이 갔었지. 그 시녀가 돈도 주고 의원을 불러 치료도 해 줬어. 그 사내의 병이 심각한 건 아니더라고. 마음이 울적해서 그렇지. 마음 풀도록 잘 달랬으니 큰일은 없을 거야.”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한원조가 화제를 돌리며 두 사람을 보고 씩 웃었다.

“신선거가 중서문하성 비각 전사 유장, 즉 유옥탁과 관계된 것 같아.”

두 동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헙, 숨을 들이켰다. 다들 성인인지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원조!”

동료들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야.”

계속 찻잔을 빙빙 돌리던 한원조는 그래도 표정이 괜찮았다.

“원조, 대체 누가 자네를 공격 무기로 쓰려는 거지?”

“누구든 간에 이 일은 여기서 그만둬. 누가 와서 뭐라고 하든 말일세. 원조, 자네는 불의한 일을 보고 나서서 도와준 것뿐이야. 이제부턴 시험 준비에 열중해. 나머진 신경 쓰지 말고.”

“경성 조당의 일은 우리 같은 애송이가 알 수 있는 게 아냐. 흥미로운 연애담이 나오려나 했더니 이건……·. 눈 내리는 겨울밤의 애정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로군.”

동료들이 걱정을 늘어놓았다.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쾅 소리가 나며 창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기겁하여 쳐다봤지만, 바람의 소행이었다. 한원조는 도리어 웃음을 터뜨리며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유쾌한 표정으로 일어나 창을 닫았다.

“너무 깊이 생각할 것 없어. 그냥 불의를 보고 도와준 단순한 일일 수도 있지. 안 그럼 신선거와 유 교리의 관계를 왜 귀띔했겠나?”

“세상에 그리 단순한 일이 어디 있나.”

동료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원조는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동료들이 쳐다보자 한원조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그저 불의를 못 참고 그 부인을 도와준 거야. 그때 유 교리와의 관계를 알았어도 나섰을 걸세. 단순하잖아?”

한원조는 미소를 지었고 두 동료도 웃기 시작했다.

“원조, 자네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 시녀의 윗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 모르지.”

한원조가 웃으며 말하자 두 동료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거나 원조, 이 일은 여기까지로 해. 누가 또 찾아오면 어떻게든 피하라고.”

동료들이 진지한 얼굴로 타일렀지만 한원조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북풍이 불었다. 장난기 많은 두 점원이 눈밭으로 폭죽을 던져 눈보라를 만들고 있었다. 한원조는 그 모습에 웃으며 창문을 단단히 잠가 바깥에서 들리는 폭죽 소리를 차단했다.

* * *

수왕부는 장례를 마친 후였지만 상중인지라 붉은색의 화려한 장식은 생략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집에 비해 새해 분위기가 덜했다.

진안 군왕이 수왕비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돌아오라고 널 재촉하신다니 정말 잘됐구나. 새해가 되면 바로 돌아가거라.”

수왕비는 기쁜 표정이었지만 진안 군왕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부왕 곁을 더 지켜야 합니다. 최소 반년은 지나야……·.”

“너도 참,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수왕비가 말을 끊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반년에 돌아가는 여정까지 생각해 보아라. 그럼 근 일 년이나 경성을 비우게 돼. 일 년이면 태후마마와 폐하도 너와 서먹해지실 거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였다.

“너도 이제 다 컸는데 감정을 앞세워서야 쓰겠느냐. 군왕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봉지도 못 받았으니, 폐하의 마음을 잃어선 안 된다.”

수왕비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진안 군왕은 예를 올리며 알았다고 했다.

“대황자와 이황자는 아직 어리다. 그나마 넌 궁에서 황자 대우를 받으며 함께 먹고 자고 했으니 정이 남다르지. 그건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야.”

수왕비가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은 엎드려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었다. 감격과 친근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수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우의 국공 작위도 확실히 매듭지어야 하고.”

수왕비는 흐뭇하면서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네 아우의 국공 지위는 네 군왕 지위에 못 미치잖니. 네 형제들이 왕부에 남아 있는 건 예법에 안 맞아.”

진안 군왕은 수왕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네. 소자, 바로 상경길에 오르겠습니다.”

* * *

대문으로 들어온 시녀는 찬바람에 두봉을 바짝 여미며 걸어갔다. 마주치는 여종들이나 몸종들은 다들 깍듯하게 길을 비켜섰다.

“반근 낭자.”

웃으며 말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길을 비켜서려다가, ‘반근’이라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리따운 시녀가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몸종은 멍해졌다.

“반근 낭자, 어디 다녀오나 봐?”

여종 하나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시녀는 그렇다고 하며 웃음을 지었다.

“네. 날이 추워서 어멈도 바쁘죠?”

“아니야, 바쁘긴.”

여종은 웃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기야 하지, 곧 새해잖아.”

“고생이 많네요.”

시녀가 웃었다. 여종은 밝게 웃으며 시녀가 모퉁이를 돌아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세상에, 저 낭자는 어쩜 저렇게 붙임성이 좋을까. 곱기도 하지.”

그러더니 옆에 있는 이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여편네들 말로는 성격이 불같다던데 전혀 아니야.”

“그러게요.”

옆에 있던 몸종도 멀어져가는 시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동의했다.

“듣기론 부인과 일곱째 아씨한테도 말대답을 했대요. 그런데 직접 보니까 예절을 모르는 사람 같진 않아요.”

시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여종들과 몸종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시녀의 시선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감싸고 걸어오던 몸종에게서 멈췄다. 몸종은 추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저기, 언니.”

시녀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몸종은 못 들은 척 종종걸음으로 시녀를 지나쳐 가 버렸다. 시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웃으며 두봉을 바짝 여민 시녀는 마당 안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반근은 한참을 걷고 나서야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문 앞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전에는 밤에만 어쩌다 마주치곤 했는데, 저게 바로 아씨의 새 반근이구나. 훌륭하네. 얼굴도 곱고 말도 잘하고……·. 반근은 멍하니 한참을 보다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몸종들은 시녀가 보이자 예를 표했다. 주 부인이 새로 보낸 몸종들이었다. 웃어른이 내린 걸 거절할 수는 없는지라 정교랑은 전부 남겨 두기로 했다. 일을 시키고 말고는 별개의 일이었지만.

시녀가 웃으며 몸종들에게 인사했다. 두 몸종이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시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들은 또 말없이 문을 닫았다. 병풍 앞의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책을 보고 있었다.

“아씨, 잘 처리했어요. 의원이 봤는데 목숨은 지장 없대요. 돈도 줬고요. 의원 말로는 마음의 병이래요. 한 공자가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병세가 한결 좋아지더라고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들이 널 기억하겠지?”

정교랑의 물음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인이랑 한참을 얘기했으니 분명 기억할 거예요. 한 공자와 함께 가서 딱히 의심하지도 않고요. 절 믿는 눈치였어요.”

“그거면 충분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씨, 이젠 뭘 할까요?”

시녀가 궁금한 듯 묻자 정교랑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것도 안 해. 이미, 다 했잖아?”

시녀는 놀랐다가 곧 실소를 터뜨렸다.

“아씨, 이게 다예요?”

“이게 다야.”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안 그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안 그럼 뭐? 시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책 읽는 거 들을래.”

시녀는 정교랑의 말에 네 하고 대답한 후 책을 받았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읽었더라……·.”

시녀가 책을 펼치며 혼잣말을 했다.

“한식을 전후하여 호수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배가 많아졌다.”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정말 기억력이 좋으세요.”

시녀가 웃으며 책을 펼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첫 번째 배, 두 번째 배, 세 번째 배, 네 번째 배, 다섯 번째 배……·.”

그믐 전날은 명절 맞이로 가장 바쁜 날이었다. 바깥양반들은 조상께 제를 올릴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안주인들은 자식들의 옷을 챙기고 앞으로 며칠 동안 이어질 연회 준비로 바빴다. 아직 나이가 어린 이들은 한담을 나누며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렸다.

명절 분위기 속에서도 조용히 지내던 정교랑과 시녀가 문밖으로 나섰다.

“이런 때에 외출을 한다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 부인이 물었다. 예전의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은 이미 벗어던진 뒤였다.

“내일이면 그믐이잖아. 교교, 또 어딜 가겠단 거야?”

정교랑은 뒤돌아 주 부인을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부인, 내일이 그믐이라 저희 아씨께서 나가시겠단 거예요.”

시녀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부인, 잊으셨어요? 저희 아씨는 주씨도 아닌데, 외조모님 댁에서 그믐을 보내게 하시려고요?”

시집간 여식은 친정집에서 그믐을 보낼 수 없다는 법도가 있긴 했다. 그런데 외손녀도 안 되나?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밖에 나와 있다지만 그래도 명절인데 저희 아씨께서도 조상님께 제는 올려야 하잖아요. 경성에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면 돼요. 그래야 두 집안 조상님들이 제삿밥 앞에서 당황하시는 일이 없죠.”

“아무리 그래도, 괜찮을까?”

주 부인은 결정을 못 내리겠는 눈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육낭은 사환이 들고 있던 채찍부터 낚아챘다.

“어머니는 일 보십시오.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갈 테면 가라. 집에 있어 봤자 말썽이나 피우지. 주 부인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떠들썩하던 거리엔 인적이 드물어졌다. 새해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행인만 이따금 보였다. 주육낭이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소리를 들은 사환이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아씨, 오셨어요?”

사환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이 왔구나.”

두 사내가 손을 비비며 따라 나왔다.

“돼지머리를 삶고 있었어.”

“넷째 도련님, 다섯째 도련님, 돼지머리도 삶을 줄 아세요?”

시녀는 놀란 목소리로 물으며 정교랑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그럼.”

두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 어서 들어가자. 날씨가 춥네.”

한쪽 옆에 주육낭이 서 있었지만 다들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영락없는 마부 취급이었다. 소리를 듣고 안에서 또 몇 명이 달려 나왔다. 누이를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겨운 목소리로 서로 누이와 오라버니를 불러댔다.

주육낭은 웃고 떠드는 남녀를 힐끔 보고 냉소를 짓더니, 들고 있던 채찍을 휙 내던졌다. 눈치 빠르고 몸이 날렵한 사내가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았다. 웃음소리가 뚝 그치고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주육낭은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정교랑은 못 본 척 시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들도 곧 정신을 차렸다.

“누이의 외가는 대체 어떤 댁이야. 마부도 저리 늠름하네.”

“그러게. 아까 휙 던질 때 보니까 팔심이 장난 아니야. 긴 창이었으면 아주 사람을 꿰뚫을 정도였어.”

사내들이 떠들어대며 마차를 몰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금가아! 장난치지 말랬지!”

여인의 고함 소리는 떠들썩하던 마당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었다. 사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문을 닫았다. 문에는 악귀를 쫓는 두 문신(門神)인 신다(神茶)와 울루(鬱壘)의 부적이 걸려 있었고,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붉은 등롱은 명절 분위기를 더했다.

거친 사내들뿐이었지만 집 안팎은 깨끗하게 청소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예법을 지키기 위해 정교랑의 방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반근이 고생이네.”

방을 정리하고 나오는 시녀를 보며 서무수가 말했다.

“아직 경성이 익숙하지 않아서 하녀를 함부로 들이기도 뭣하고.”

범강림도 거들었다.

“별로 안 힘들어요. 새 집이고 아씨께서 계속 지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걸레질만 한 번씩 하면 되는데 고생은요. 고생은 도련님들이 하셨죠. 새해 준비를 잘 해놓으셨네요.”

“다들 외로운 처지라 뭐든 직접 하다 보니 이런 건 익숙해.”

시녀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대꾸했다.

안에 등불을 여섯 개나 켜 놓고 회랑 아래에도 등롱을 두 개나 건 덕에, 안팎은 대낮처럼 밝았다. 시녀는 금가아, 사내들과 함께 음식을 바삐 옮겨 담았다. 곧 음식을 들여갔다. 금가아도 문가에 작은 탁자를 놓은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시녀가 금가아에게 건넨 건 차였다.

“누나, 나도 술 마실래.”

“넌 밤에 문도 지켜야 하는데 무슨 술이야. 멀쩡한 정신으로도 길을 잃었으면서 술까지 마시면 어쩌려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금가아의 얼굴이 빨개지자 방 안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금가아가 아직 경성을 잘 모르긴 하지만, 이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야. 반근, 너무 놀리지 마.”

범강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큰 도련님 말씀이 맞아요.”

금가아가 신나서 말했다. 시녀는 웃으며 정교랑 뒤로 가서 앉았다. 서무수가 정교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 상공 댁에 보낼 새해 선물은 내가 직접 갖다 줬는데, 진 상공은 댁에 안 계셨어. 진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하면서 누이에게 줄 새 옷을 전해 줬지. 주는 거니까 받아야 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누이 대신 받아 놨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뜻대로 해요.”

“진 부인이 누이더러 명절 지나면 놀러 오래.”

서무수가 말했다. 진씨 저택에서 보고 겪은 일을 떠올리니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진 상공 댁 문턱을 넘어 보다니. 막 경성에 도착했을 때 전에 알고 지내던 형제들을 찾아봤지만, 대부분 성을 지키는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문간방에서 푸대접만 당했을 뿐, 대청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그러던 자신이 눈 깜짝할 새에 진소 상공 댁 대문을 넘었다. 게다가 진씨 가문 안주인, 다시 말해 고명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하기까지. 서무수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쳐다봤다.

등불 아래에 있는 정교랑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았다. 처음 만난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이 없었다. 세상사는 전혀 모른다는 듯한 표정. 기쁠 일도, 슬플 일도, 노여워할 일도, 원망할 일도 없다는 듯이.

범강림이 나서서 건배를 제안하면서 떠들썩한 연회가 시작됐다. 정교랑이 자리하긴 했지만 사내들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술 몇 잔을 걸친 터라 스스럼없이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됐다.

음식은 얼마 먹지도 못했으면서 술을 비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결국 시녀는 술을 아예 단지째 들고 왔고, 술을 못 마시게 했던 금가아도 분위기에 섞여 몇 잔 들이켰다.

“세상에, 이렇게 성대하게 차려놓고 새해를 맞이할 날이 오다니.”

서봉추는 술잔을 들고 불콰해진 얼굴로 취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이어 고개를 젖혀 가며 술을 들이켰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술보다 몸에 흘린 술이 더 많았다.

“그러게, 몇 달 전만 해도 쫓기는 목숨이었잖아. 망할 관군들한테 붙잡혀 감방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오다니. 경성에서 술을 다 퍼마시고.”

다른 형제도 서봉추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동조했다. 그 말에 서무수가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맞은편의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아무 말도 못 들은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문밖을 보고 있었다.

서무수가 그만하라고 소리치려던 걸 간신히 삼키는데,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취한 서봉추가 곯아떨어지면서 술잔을 떨어뜨린 소리였다. 다른 형제들을 보니 대부분 만취해 있거나 누워 있었다. 탁자에 기댄 채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금가아마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누이한테 웃음거리가 됐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봤다.

“기분 좋아요. 웃음거리 보여 줘서.”

멈칫하던 서무수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서무수가 정교랑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정교랑은 앞에 있던 물잔을 들었고, 두 사람은 각자 잔을 비웠다.

시녀는 방 안에 있는 화로에 숯을 더 넣고 밖에 나가 아궁이를 살폈다. 방 안은 따뜻했다. 술에 취해 잠든 사내들은 한기를 느끼기는커녕 잠꼬대를 하며 옷을 풀어헤치기도 했다.

“늦었는데 누이도 이만 가서 쉬어.”

서무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믐이니 밤을 새워야죠. 안 자요.”

“그럼 날이 추우니 누이도 술 한 잔 마시지.”

서무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 술은, 맛없어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는 웃으며 혼자 마셨다.

“술이 맛없다는 거야? 아니면 이 술이 맛없다는 거야?”

서무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 술이요.”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맛없어요.”

서무수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격부를 하며 노래까지 부르던 누이가 어찌 술을 못 마시나 했네.”

웃음소리와 함께 밖에서 이따금 들리던 폭죽 소리가 점점 커졌다. 사내들도 잠에서 깨 몽롱한 채로 밖을 쳐다봤다.

“새해다, 새해. 폭죽 터뜨리러 갑시다, 어서요.”

서봉추는 소리치며 비틀비틀 뛰어나갔고, 잠에서 깬 나머지 사내들도 웃으며 따라 나갔다.

마당에 피운 모닥불에 대나무를 하나씩 던지자 폭죽 소리를 내며 터졌다. 시녀는 귀를 틀어막고 웃으며 정교랑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반근, 누이한테 두봉 갖다 줘. 바람이 차네.”

서무수가 말했다. 시녀는 혀를 날름거리고는 얼른 안에 들어가 두봉을 가져다 정교랑에게 걸쳐 주었다.

“반근 누나, 누나도 하나 태우면서 복 받아.”

금가아가 대나무를 들고 소리쳤다. 시녀도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웃으며 치마를 들고 다가갔다. 회랑 아래엔 서무수와 정교랑만 남아 나란히 서 있었다.

“오라버니도 가서 놀아요.”

“난 글공부를 했잖아. 이런 거 안 해.”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교랑은 또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 참.”

서무수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소매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건넸다.

“새해잖아. 가진 것 중에 딱히 좋은 게 없네. 누이한테 주는 새해 선물이야. 약소하지만 받아 줘.”

나한테 주는, 새해 선물? 정교랑은 서무수의 손을 잠시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받았다. 모닥불과 등롱에 비춰 보니 은으로 만든 빗이었는데, 오래되고 소박한 양식이었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건데, 난 갖고 있어도 쓸 데가 없네.”

서무수가 어색해하며 말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아니, 말을 잘못했어. 선물은 진심을 전하는 거라고 하지. 이건 내가 가진 물건 중에 가장 귀중한 거야. 누이가 받아 줬으면 해.”

정교랑은 빗을 들어 머리에 꽂더니 고개를 들어 서무수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마당에서는 연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고, 이웃집과 거리에서 나는 폭죽 소리도 함께 어우러졌다. 어느덧 동녘이 밝아오며 새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 황궁에서 황제를 알현한 이들이 줄지어 나왔다. 예복을 갖춰 입은 이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가 궁문 밖 길가로 나온 후에야 긴 한숨을 토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궁문 밖에서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며 반갑게 웃고 떠들었다. 모처럼 찾아온 명절 휴가에 술 약속을 잡기도 했다.

진소의 부인도 인파에 섞여 있었다. 며느리를 대동하고 온 다른 집 부인들과 달리 어린 몸종 하나만 데려온 진 부인은 쓸쓸해 보였다.

“경사네요.”

고명 부인의 예복을 차려입은 동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밝은 표정이었다. 점잖은 진 부인도 그 말에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진 부인의 맏며느리는 회임을 하여 함께 입궐하지 못한 터였다.

진소의 집안은 손이 귀했다. 진소의 형제는 본디 넷이었지만 첫째와 둘째가 연이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진소와 진 사노야만 남게 됐다. 진소는 혼례가 늦기도 했거니와 여기저기 부임지를 전전하느라 나이가 꽤 찬 후에야 아들을 보고 첩실을 셋 들여 간신히 삼남 사녀를 두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맏아들의 부인과 시첩이 동시에 회임하고 진 노태야의 중병도 완치됐으니 실로 집안의 경사였다.

하지만 경사는 어디까지나 집안 식구들끼리의 일이고, 남들이 알면 시기를 살 만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밖에는 소문내지 않고 가까운 이들에게만 알린 터였다.

“듣자니 이 태의가 그 댁 며느리를 살피고 있다면서요.”

동 부인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태의잖아요. 그분을 모셔 온 건 잘한 일이에요.”

동 부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을 집으로 모셔 올 수 있으면, 아마 진 부인도……·.”

얼굴이 붉어진 진 부인은 동 부인을 살짝 밀어냈다.

“동 언니, 점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네요.”

동 부인은 입을 가리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별안간 앞쪽이 조용해졌다. 진 부인과 동 부인도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앞쪽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던 어린 낭자를 본 두 여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엄숙하고 경건한 겨울 황궁이었건만 낭자의 예복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낭자는 짙은 청색의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두모를 쓴 모습이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봉이 휘날리면서 안에 입은 암청색 옷자락이 드러났다. 금실로 수를 놓고 비단으로 허리를 동여맨 후 긴 옷소매를 앞으로 엇갈리게 두자 흡사 물 위로 떨어지는 먹물처럼 색이 번져 나가는 듯했다.

낭자가 걸어오자 다른 여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저쪽의 사내들도 저도 모르게 힐끔거렸다. 뉘 집 낭자가 저리 단정하면서도 우아하고 선녀처럼 아름다울까.

“어머니.”

진 부인을 본 낭자는 소리쳐 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낭자는 손을 뻗어 진 부인을 부축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반쯤 드러냈다.

“십팔랑.”

그제야 자신의 딸을 알아본 진 부인이 깜짝 놀랐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길?”

“숙모님과 언니들이 마음이 안 놓인다며 저더러 마중을 나가래요.”

진십팔랑이 손난로를 건네주며 이미 식어 버린 진 부인의 손난로를 받았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찬바람을 맞으며 한나절을 서 있었던 진 부인은 따뜻한 난로가 손에 들어오자 따스함과 안도를 느꼈다.

“그래.”

진 부인은 사랑이 지극한 눈길로 딸을 쳐다봤다.

“세상에, 십팔랑. 며칠 못 본 사이에 또 이렇게 컸구나.”

동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놓고 진십팔랑의 손을 잡으며 위아래를 꼼꼼히 훑었다.

“장화를 신어서 그래요.”

진십팔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동 부인은 웃으며 진십팔랑을 처음 본 것처럼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래도 많이 컸지, 이제 열네 살인데.”

동 부인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서 마차에 오르죠. 날도 추운데.”

진 부인은 동 부인이 그만 쳐다보도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두 부인이 앞에서 걸어가고 진십팔랑은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 수많은 시선이 진십팔랑에게 집중됐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진씨 가문 여식이라고?”

“나이가 꽤 찼네.”

* * *

마차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며느리와 여종들, 몸종들이 줄줄이 나왔다. 진 부인은 옷을 갈아입고 탕을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십팔랑, 그 옷은 누가 지은 거야?”

식사를 하던 진 부인이 함께 모여 웃고 떠들던 딸들을 보며 물었다. 두봉을 벗고 겉옷만 입은 진십팔랑이 웃으며 일어났다.

“제가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 예뻐 보여요?”

꽃처럼 싱그러운 나이의 풋풋한 소녀가 점잖은 색의 옷을 입으니 그것대로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정초에 입기엔 좀 수수하구나.”

그러면서도 진 부인은 웃기만 할 뿐 나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십팔랑, 이거 정 언니 옷 따라 만든 거잖아!”

여종을 따라 들어오던 단랑이 옷을 보더니 대번에 외쳤다. 그 말에 다들 퍼뜩 깨달았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의문이 풀린 것이다.

“십팔랑,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만 해 입었네.”

“빨리 말해. 한 벌만 지은 거야? 아니면 여러 벌?”

낭자들이 십팔랑을 에워싸고 조잘조잘 떠들면서 방 안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진단랑도 그 사이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운 진씨 저택과 달리 옥대교 근처 정교랑의 저택은 조용했다. 부모 형제가 없다 보니 세배를 하거나 고향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날이 밝을 무렵 제사를 지낸 후 정교랑과 서무수 등은 각자 쉬러 갔고,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오후였다.

서무수 등은 몸을 씻고 면도를 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대문을 열어 두었다. 몇몇은 마당에서 웃고 떠들고 몇몇은 대문 밖으로 나가 거리 풍경을 봤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정교랑과 시녀가 나오고 있었다. 둘 역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마당에 있던 사내들은 순간 넋을 잃었다.

“누이, 새 옷 입으니까 못 알아보겠어!”

서봉추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그 말에 대문 밖에 나가 있던 사내들까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정교랑은 새하얀 비단 치마에 붉고 긴 저고리를 입었는데, 소맷부리와 치맛자락엔 커다란 금빛 자수가 있었다. 언제나 길게 내려뜨리고 있던 머리는 낮게 틀어 올리고, 붉은 비녀 대신 작은 은빗을 꽂았다. 은빗을 쳐다보던 서무수가 시선을 거뒀다.

“역시 나이가 어리니 이렇게 입는 게 더 예쁘네!”

서봉추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게 좋아, 이게. 매일 점잖은 거만 입으니까 차가워 보이잖아. 어쩔 땐 좀 무섭다니까.”

범강림이 눈을 부라렸다.

“말을 할 줄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 누이는 어떻게 입든 다 예쁘니까.”

시녀는 빙그레 웃으며 정교랑의 옷을 쳐다봤다.

“진 부인이 보내 준 새 옷이에요.”

시녀가 서무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가져오신 셋째 도련님께 감사드려요.”

서무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웃기만 했다. 정교랑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녀가 식사를 가져왔다. 서무수는 잠시 머뭇거리며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셋째 오라버니.”

정교랑이 부르는 소리에 서무수가 얼른 돌아섰다.

“다들 식사는 했어요?”

“먹었어, 먹었어.”

정교랑의 물음에 서무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오라버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서무수가 눈빛을 반짝이며 안에 단정히 앉은 여인을 쳐다봤다. 여느 때와 다른 차림새지만 화려한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여전히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두운 옷을 입지 않아도 그 위엄엔 변함이 없었다.

마당에 있던 형제들은 전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새로 이사 왔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서북 말씨 같네?”

“귀도 참 밝으십니다.”

대문 앞에는 이웃 사람들도 나와 있었다. 잘 모르는 사이긴 했지만 새해 덕담을 나누며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서무수가 맞은편에 앉은 정교랑을 쳐다봤다.

“누이, 무슨 일인지 편히 말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성 밖에 있는, 신선거라는 식당에 좀 다녀와요.”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아마 식당을 내놓을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가 멈칫했다.

“오라버니들이 사들여요.”

서무수가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무언가 숨은 정보를 읽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여인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뜻을 전할 때를 제외하면, 늘 표정이 없었다.

“알겠어.”

서무수가 대답했다.

형제들은 정교랑의 마차가 길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은 후에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새해 첫날이 이렇게 지나간 것이다. 형제들이 왁자지껄 밥을 지으러 간 사이, 범강림과 서무수가 단정히 앉았다.

“우리더러 식당을 사라고?”

범강림 역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서서 식당을 사래요.”

서무수가 말을 고쳐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범강림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그냥 누이가 식당을 사려는 거 아닐까요?”

생각에 잠겼던 서무수가 불쑥 말을 내뱉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웃어 버렸다. 범강림도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 * *

한가한 정월엔 시간이 빨리 흘렀다. 어느덧 정월 초이레가 다가왔고, 경성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친척들을 보내고 났으니 이제는 지인들과 왕래할 차례였다. 떠들썩한 집들에 비해 객잔에 기거하는 서생들은 쓸쓸한 면이 있었다.

“거리 구경 안 갈래?”

한 동료가 손을 책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추위를 쫓으려는 듯 손을 비비고 발을 굴렀다. 뒤에 있던 한원조와 다른 동료도 책을 내려놓았다.

“어제 구경했잖아. 돌아다녀 봤자 똑같을 텐데, 뭐 돌아다닐 게 있다고.”

한원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 미인이 또 찾아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고?”

동료가 웃으며 놀리자 한원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긴 하네. 그 미인은 이대로 자취를 감춘 건가?”

옆에 있던 동료가 말했다.

“허튼소리 마, 미인은 무슨 미인. 아마 어르신일 거야. 시녀는 강주 말씨를 썼는데 경성 생활에 익숙했어. 얘기를 들어보니 경성에 있을지 강주로 돌아갈지 아직 모른대. 아마 고향을 그리는 노인일 거야.”

이미 한원조에게 그날 있었던 대화를 자세히 들은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어르신한테 딸이나 손녀가 있을지 모르잖아.”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그 농담에 적막했던 방 안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근데 진짜 이상하네. 왜 갑자기 안 오는 거지? 정말 그냥 그 부인을 도우려던 게 전부야?”

한 동료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뭐랬어.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니까. 자네들이 괜히 일을 삼고 있는 거지.”

한원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때 문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세. 차정사로 글씨를 보러 가자고.”

같은 객잔에 묵던 다른 서생들이었다. 지루하게 공부에 몰두하고 있던 세 사람은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옷을 걸치고 나섰다.

“매화를 보며 시를 감상하는 거 아니었나? 갑자기 글씨라니?”

“소문 못 들었어? 지난 연말에 누가 차정사에 훌륭한 글씨를 남기고 갔대. 아주 독창적인 다섯 종의 서체를 남겼다더군. 장강주 선생까지 직접 보러 갈 정도라네.”

“그랬군. 글씨 보러 갔다가 운 좋으면 장강주 선생과 마주칠 수도 있겠는걸?”

서생들은 웃고 떠들며 문을 나섰다. 거리는 인파로 떠들썩했고 이따금 폭죽 소리가 들렸다. 두봉을 단단히 여미고 나서던 한원조가 동쪽 거리를 힐끔거렸다. 정말, 그뿐이었을까?

“원조 형.”

누군가가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한원조는 얼른 동료들과 함께 서쪽으로 걸어갔다.

같은 시각 정교랑은 진씨 저택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새해인데 식사라도 하고 가죠.”

직접 배웅을 나온 진 부인이 정교랑을 붙잡았다. 정교랑은 말없이 예를 표하는 것으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주육낭이 마차를 몰고 오자 진씨 가문 자매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며 수군거렸다. 진씨 가문 여인들은 마차가 골목을 벗어난 후에야 몸을 돌렸다.

“어머니, 정 언니가 입은 옷 말이에요. 어머니가 보내 주신 거죠?”

진단랑이 신이 나서 물었다. 정교랑이 진씨 저택 문 안으로 들어올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보내 준 선물을 직접 입고 나타난 것은 최고의 답례였다. 진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 정 낭자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니?”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예뻐요. 정 언니는 뭘 입어도 예쁘잖아요.”

진단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뒤에 있던 언니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십팔랑이 입은 건 정 언니 것만큼 안 예쁘지만.”

자매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십구랑, 다시 말해 봐. 새로 지은 옷, 너는 안 줄 줄 알아.”

진십팔랑이 짐짓 화난 척 소리쳤다. 진단랑은 언니가 무섭지 않은지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어머니가 만들어 주세요.”

자식들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진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남편의 벼슬길도 순조롭고 시부의 병환도 완쾌된 후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한 새해였다.

* * *

마차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주육낭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리면서 들고 있던 채찍을 휙 던지고 가 버렸다. 정교랑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 손님이 많이 오셨네요.”

저쪽에 세워져 있는 마차들을 보며 시녀가 말했다.

“매일 그래. 새해잖아.”

여종은 웃으며 은근히 뻐기듯 대꾸했다. 정교랑은 여종을 힐끔 본 후,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돌아왔으니, 부인을 뵈어야겠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여종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길을 안내해 줘요.”

부인을 뵙는다고? 밖에 나갔던 자식들이 집에 돌아오면 부인을 뵙고 문후부터 올리는 게 도리긴 했다. 하지만 정 낭자는 지금껏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갑자기 가겠다니. 여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기쁜 일 아닌가. 여종은 반색을 했다. 이래서 식구는 식구라니까. 서먹할 게 뭐 있어. 처음엔 낯설어도 차차 익숙해지는 거지.

“아씨, 이쪽으로 가세요.”

여종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 주씨 가문은 예년보다 더욱 떠들썩했고, 찾아오는 이가 특히 많았다. 아랫것들이야 영문을 몰랐지만 주 노야 내외는 뻔히 알고 있었다.

“백모님, 집에 새로 온 동생이 있다던데 왜 안 보이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젊은 여인 하나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맞아요. 새해인데 같이 얘기하면 좋잖아요.”

옆에 있던 부인도 거들고 나섰다. 요 며칠 주 부인은 똑같은 말을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집에 없어. 출타했거든.”

주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경성에 지인도 있어요?”

부인이 의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진씨 댁 있잖아.”

주 부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웃는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긴 했지만. 지난번엔 몸이 안 좋아서 잔다고 했고 이번엔 진씨 댁에 갔다고 했다지만, 다음엔?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 부인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분명 눈치를 챌 텐데. 아니나 다를까 부인 하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도 참. 그 보물덩어리를 꼭꼭 숨긴 건 아니고요? 우린 진 상공 댁만 못하니, 그 보물을 볼 수 없단 거잖아요.”

“우린 진씨 가문만 못하니, 만나지도 못한단 거예요?”

다른 부인도 웃으며 거들었다.

이거 봐, 이거 봐. 괜히 욕먹을 줄 알았다니까. 주 부인의 웃는 얼굴이 더욱 경직됐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알다시피 진 노태야께서 이제 막 쾌차하셨잖아요. 마음이 안 놓이니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죠.”

주 부인이 말했다.

“그럼 나중에 돌아오거든 꼭 우리 집에도 데려와야 해요.”

부인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끝까지 확답을 받아내려 했다.

“알았어요. 부인이 귀찮아하지 않는다면요.”

주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부인, 사촌 아씨께서 돌아오셨어요.”

주 부인의 얼굴은 대번에 굳어졌지만 그 부인은 반색했다.

“어머나, 너무 잘됐다. 어서 모셔 와.”

그 부인의 말이었다.

아이고, 왜 하필 지금 돌아와. 왔으면 온 거지, 이 눈치 없는 건 왜 이리 달려와 고하고 난리야! 그 계집의 성격이 괴팍한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기 싫다고 하면 때려서 데려와야 하나? 괜히 망신살만 뻗치는 꼴이잖아!

주 부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사촌 아씨께서 부인께 문후 올리러 오신대요.”

부인의 표정을 못 본 여종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 부인의 표정은 편해지기는커녕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귀신에 씌었나,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다른 여인들은 주 부인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젊은 여인과 색시들은 바깥쪽을 두리번거렸고, 나이가 있는 부인들도 호기심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밖에서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밝고 아름다운 옷차림에 멋스러운 행동거지, 오목조목한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표정이 없고 두 눈에 생기가 없긴 했지만. 여인들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찬란한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잊히고 오싹함이 느껴지는 서늘한 두 눈만이 인상에 남았다.

전에 바보였다더니 아직 그게 남아 있네. 고운 얼굴이 아깝구먼.

“외숙모님.”

정교랑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목소리도 이상하네. 자리에 있던 젊은 여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안타까워했다. 반면 나이든 부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놀란 주 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정 낭자, 듣자니 진 노태야를 고쳤다던데 정말 대단하네요.”

주 부인은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교교, 힘들지? 우선 가서 쉬어. 넌 몸도 안 좋잖니.”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에이, 이렇게 만났는데 웃어른이란 사람이 선물 하나도 안 주면 내가 뭐가 돼요.”

한 부인이 정교랑을 손짓해 부르며 손에 차고 있던 금팔찌를 풀었다. 정교랑이 미동도 하지 않아 그 부인의 행동만 머쓱해졌지만.

거봐, 얘는 최소한의 예의도 안 통한다니까. 주 부인은 속으로 외쳤다.

“정 낭자, 듣자니 병을 고칠 줄 안다면서요. 우리도 좀 부탁해도 될까요?”

다른 부인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주 부인은 숨이 턱 막혔다. 예의를 모르는 건 이 바보만이 아니었네.

“물론, 되죠.”

정교랑이 그 부인을 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부인은 경악했다. 된다고? 전에는 안 된다고 했잖아? 주 부인이 바라고 또 바라던 말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여기서 듣게 되다니. 그것도 갖은 핑계를 대며 둘러댄 직후에.

문안 인사를 와야 할 땐 안 오고, 안 와도 될 땐 온다. 수락해야 할 땐 안 하고, 수락을 안 해도 될 땐 한다. 얘는 참, 어쩜 이렇게 말썽이야. 일부러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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