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남매-
“아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의 무지로 아씨께서 걱정하셨겠네요. 폐를 끼쳤습니다.”
셋째가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정교랑은 자세를 바로 하고 의관을 정돈한 다음, 사내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사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몸을 옆으로 틀거나 비켜섰다. 일부는 허둥지둥 답례를 올리기도 했다.
“아씨, 이러시니 저희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첫째가 소리쳤다. 시녀도 놀란 눈치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예의 바른 아씨였지만 누군가에게 이리 큰절을 올린 건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씨야말로 이 사내들의 은인이 아닌가. 은인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예를 표하다니?
정교랑은 예를 마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정교랑이, 오라버니들의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막 예를 표하려던 셋째를 비롯하여 사내들이 멈칫했다. 뭐라고?
“말도 안 됩니다!”
안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마당까지 전해졌다. 겨울인데도 아직 얼지 않은 화단 물길에서 나는 물 흐르는 소리가 대나무와 돌 사이를 맴돌며 퍼졌다.
사내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인을 보며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아씨는 제 목숨을 구한 은인이십니다. 이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어떤 놈들이고 아씨가 어떤 분인데요.”
다른 사내들도 맞장구를 쳤다. 단정히 앉은 정교랑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내들의 반대와 거절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요점은 간단했다. 아씨는 자신들의 은인이고 자신들과 격이 다른 분이니, 감히 그럴 순 없다는 것.
가만히 있는 정교랑을 보며 시녀도 무언가를 눈치채고 더 이상 놀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을 더 따라 주었다. 밤새 술을 퍼마시다가 잠에서 깨자마자 도망치고 이리저리 숨었던 터라 사내들은 마침 갈증이 났다.
“아무튼 아씨,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씨는 관두고 아씨의 시중을 드는 이 누이만 해도 저희와 비교할 바가 안 됩니다.”
사내는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시녀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누이. 한 잔만 더 주시오.”
시녀는 웃으며 말없이 물을 따라 주었다. 셋째가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아씨, 사실 이 일은 저희가 아씨를 도운 게 아닙니다. 저희가 아니었다면 금가아는 진작 아씨를 찾았을 거예요.”
셋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은 담아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이 사내가 똑똑하네. 시녀가 고개를 들어 셋째를 쳐다봤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고개를 들어 셋째를 봤다.
“그건, 괜한 생각이에요. 난 그저, 오라버니를 갖고 싶을 뿐인걸요.”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다……·. 사내들은 흠칫 놀랐다. 정교랑이 사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은혜를 갚는다지 않았어요? 누이로 맞아 보살펴 주면서, 평생 은혜를 갚는 게, 더 성의 있지 않나요?”
그런가? 사내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근데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단 말이지.
“그럼 큰형님이 결정하십시오.”
사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큰형이라 불린 사내는 셋째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셋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씨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첫째가 말했다. 정교랑이 사내들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들.”
이제 막 발을 들인 집이었지만, 집 안엔 웬만한 물품이 다 갖춰져 있었다. 작은 서재에는 종이와 붓, 먹은 물론이고 향까지 있었다. 시녀가 물건들을 가져왔다.
“아씨, 직접 쓰시겠어요?”
시녀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오라버니들 쓰는 걸 도와.”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종이와 붓을 사내들 앞으로 가져왔다.
“내가 하겠소.”
셋째가 손을 내밀었다. 시녀는 셋째가 글공부를 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글도 쓸 줄 알겠거니 여기고, 그 말대로 낮은 탁자를 밀어준 후 본인은 먹을 갈았다. 셋째가 붓을 들어 의남매를 맺는 글을 썼다.
“오늘, 무원산 형제 범강림, 범석두, 서무수, 서사근,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가 조상님 앞에 고합니다.”
“오늘 강주 정가(程家) 교랑이 친족 앞에 고합니다.”
안에 있는 향로에 향을 꽂은 후, 정교랑과 셋째가 그 앞에 나란히 서서 각자 손에 든 종이를 펼쳐 들고 읽었다. 정교랑이 이름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임을 알렸다. 정교랑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낭송을 마치고 머리를 조아린 후 종이를 향로에 넣고 태웠다.
“이제, 이 누이가, 오라버니들을 뵈옵니다.”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갑자기 누이가 생긴 사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며 예를 올렸다. 셋째 서무수가 손을 뻗어 양쪽을 붙잡아 주었다. 이쪽에서는 시녀가 금가아를 데려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공자님들을 뵈옵니다.”
당황한 사내들이 펄쩍 뛰었다. 공자님이라는 호칭은 평생 처음 듣는 것이었다. 다만 서무수만은 단정히 앉아 절을 받았다.
“이 서무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는데, 24년을 살다 보니 누이가 생기는 날도 오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18년을 살면서……·.”
서봉추도 얼른 따라 소개했다. 갑자기 금가아가 놀라는 소리를 내고는 서봉추를 쳐다보며 물었다.
“봉추 형님, 열여덟밖에 안 됐어요?”
우락부락하게 생긴 서봉추는 머리가 크고 어깨가 둥글었으며, 덥수룩한 수염은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서봉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열여덟이 뭐? 내가 이래봬도 사내대장부라고.”
금가아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우리 아버지보다도 나이 들어 보여요.”
“네 아버지는 나 같은 대장부가 아니겠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딱딱하고 서먹하던 분위기를 녹였다. 조금씩 어색함을 내려놓는 사내들을 보며 정교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 오라버니가 생겼다.
노둣돌(말에 오르내릴 때 편하도록 대문 앞에 놓는 큰 돌)에 기대 채찍을 이리저리 흔들던 주육낭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 공자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주육낭을 쿡 찔렀다.
“아, 왜? 자네는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어서 돌아가.”
주육낭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 공자가 웃으며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자네를 찾나 본데.”
골목으로 나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시녀는 이쪽에 있는 주육낭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주육낭은 몸을 곧추세우고 채찍을 휘휘 저으며 시녀를 쳐다봤다.
“급히 나오느라 돈을 안 가져왔네요. 공자님, 돈 좀 꿔 주실 수 있어요?”
시녀가 예를 표한 후 웃으며 말했다.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주육낭은 그 시녀의 웃음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시녀는 초조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상관없어요.”
시녀가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기 공자님은 기개가 남다르시죠. 혹시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너희 아씨께서 날 그리 치켜세우는데, 당연히 빌려줘야지.”
진 공자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천금을 주고 사는 게 웃음이라지. 난 천금을 주고 칭찬을 샀으니 그 값으로 충분하구나.”
진 공자가 사환에게 돈을 가져오라는 눈짓을 했다. 하지만 이미 주육낭이 시녀에게 돈이 담긴 쌈지를 던져 준 후였다. 시녀가 손을 뻗어 쌈지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아씨께선 여기 공자님들과 식사를 마친 후에야 돌아가실 거예요. 공자님 먼저 가세요.”
말을 마친 시녀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공자님들? 그 무뢰한들이 공자님이라고? 사실 진짜 무뢰한은 나라고 모욕하는 건가?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봐, 간단한 말로 사람을 모욕한다니까.”
하지만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로 트집 잡을 사람은 아냐. 공자님이라고 불렀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진 공자는 저쪽에 있는 저택을 쳐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쉽네, 들어가 볼 인연이 없으니.”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이쿠, 미안해라. 나 때문에 미인과 가까워지지도 못 하고.”
진 공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번에 내가 좋은 곳을 알아냈어. 아주 신기한 음식을 먹는 곳이지. 우리 먹으러 가세. 자네 누이는 자네를 아끼지 않지만, 난 자네를 아끼잖아.”
* * *
오시(午時), 정교랑의 저택 안. 반쯤 열린 종이 문 사이로 실내의 맛있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안에 있는 사내들은 그릇을 받쳐 들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금가아가 고기 한 접시를 끌어안고 부엌에서 뛰어왔다.
“누이가 있으니 정말 좋네.”
서봉추가 음식을 입에 물고 솥에 있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건지며 말했다.
“진짜 맛있다.”
게걸스럽게 먹는 다른 사내들과 달리 큰형 범강림과 셋째 서무수는 점잖은 편이었다.
“누이, 이제 그만해. 이거로 충분하다니까.”
시녀와 함께 접시에 고기와 요리를 나눠 담던 정교랑은 그 말에 이쪽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라버니, 어려워 말아요. 충분하긴요.”
범강림과 서무수가 옆에서 게걸스럽게 먹는 형제들을 쳐다봤다. 접시며 그릇을 금세 싹싹 비울 것 같은 모습에 두 사내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기쁜걸요.”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채소들을 가지런히 잘라 준비했다.
“이렇게 떠들썩한 건, 오랜만이에요.”
사 온 채소와 고기를 바닥낸 후에야 점심 식사가 끝났다.
“좋은 술이 없어 아쉽네요.”
정교랑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옆에 있던 술 주전자를 탁 쳤다.
“이게 좋은 술이 아니면 뭐야. 누이가 계속 그리 말하면 우리가 불편해.”
정교랑은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물을 마셔도 취하는 법이지.”
서무수가 고개를 젖혀 가며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정교랑이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사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따라 일어섰다.
“그래, 그래, 이만 가 볼게. 누이한테 너무 오래 폐를 끼쳤네.”
“아니요, 오라버니들은 여기서 지내요. 난 외조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사내들은 멈칫했다가 곧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 그래. 누이의 음식을 먹고 누이의 술을 마신 것도 모자라, 누이의 집에서 지내다니.”
사내들의 말에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누이라면서요. 가족이 됐는데, 서먹하게 굴 것 없잖아요?”
서무수가 사내들의 말을 제지하고 진지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누이, 아까 금가아한테 얘기 들었어. 원래 여기서 지내려고 했다면서.”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우릴 오라비라 여긴다면 무슨 일이든 편히 말해. 오라비들 걱정시키지 마시고.”
금가아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이쪽저쪽의 사람들이 섞여 난장판이 되자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금가아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씨도 빼앗겼는데 너까지 잃어버리면, 우리 진씨 가문은 경성에서 얼굴을 못 들 거야.”
“이게 다 주가 놈 때문이다. 그놈이 아수라장을 만드는 바람에 금가아 널 까맣게 잊었어.”
“너희 아씨는 협박에 못 이겨 그리로 가신 거야.”
사내가 뜻밖에도 하급 사환들이 금가아를 붙잡고 한 말을 귀담아들은 터였다. 나머지 사내들도 정신을 차리고 서무수와 정교랑을 차례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누가 누이를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다들 얼굴이 시뻘게져 묻자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들, 괜한 걱정이에요.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요. 남들이 내가 괴롭힘을 당한다고 여길 뿐이죠.”
정교랑은 서무수를 보며 다시 생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난 그저,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라고.”
서무수 등은 정교랑이 시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배웅했다. 이 저택에 남은 금가아는 안팎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셋째야, 누이의 일을 함부로 추측하는 건 안 좋아.”
범강림이 불쑥 입을 열자 서무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그저, 이 일이 좀 불가사의해서 그랬어요.”
확실히 불가사의한 일이긴 했다. 서북에서 도망쳐 나온 후 셋째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됐다. 그러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씨 덕에 목숨을 건졌고, 그 아씨는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생명의 은인과 결의를 맺고 의남매가 되었다.
* * *
아씨는 외모가 출중했다. 말한 적은 없지만 가세도 대단할 것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까지 지녔다. 자신들 같은 천것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분이니, 교류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누이가 됐다? 말한들 믿을 사람이 있을까? 본인들도 믿어지지 않는데.
“무수, 말했잖아.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라고. 괜한 추측 마. 누이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거기까지 말한 범강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우리가 뭘 해 줄 수 있겠나.”
범강림이 거친 두 손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이 목숨? 어차피 누이가 구해 준 거니까, 줘도 그만이야.”
범강림이 서무수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자네 목숨은 우리 게 아니라고.”
서무수도 웃음을 터뜨렸다.
“네, 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 보오. 책 몇 권 읽었다는 자부심으로 이치에 안 맞는 일을 보면 괜히 넘겨짚으려 들어 긁어 부스럼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향칠을 의심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오해는 안 했을 거 아닙니까.”
서무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뒤에서 형제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방이 엄청 많네. 한 사람당 하나씩 써도 되겠어요.”
“잘됐다, 이젠 넷째가 코 고는 소리 안 들어도 되잖아.”
“거 무슨 소리요, 코 골아서 잠 못 자게 하는 게 누군데!”
“난 이 방 쓸게요.”
“여긴 내가 쓸 거야. 넌 다른 방 찾아봐.”
범강림과 서무수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제, 누이가 생기고 집도 생겼다.
저녁해가 서산으로 넘어갔을 무렵, 주육낭과 진 공자는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옆을 보니 접시가 여러 개 쌓여 있고 노구솥 안에는 탕이 끓고 있었다.
“재미있긴 하네.”
주육낭의 말에 진 공자가 웃었다.
“풍치 있으면서 소탈하기도 하고.”
“근데 이름을 잘못 지었어. ‘과로신선(過路神仙: 길 가는 신선)’이라고? 무슨 이름이 이래, 우습잖아.”
옆에서 시중을 들던 사환이 웃었다.
“공자님, 이게 길 가던 신선이 주고 간 비방으로 만든 음식이라서 그래요. 관리인 어르신이 미처 음식 이름을 못 물어서 이런 이름을 붙였죠.”
주육낭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기꾼들이 허풍은.”
주육낭이 몸을 일으키자 진 공자도 사환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바깥쪽 대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화로 주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있었고, 실내는 음식 냄새와 노구솥에서 나는 수증기로 자욱했다. 문밖에서는 마차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자리가 없어요, 자리가 없다고요.”
입구에 있던 점원은 밀려드는 사람을 막으며 계속 소리쳤다.
“내일 일찍 오세요, 내일요.”
문 앞에 걸린 깃발은 새것으로 바뀌었고, ‘신선거(神仙居)’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먹는 방법이 좀 신선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까지 바꾸다니. 아버지 대에서 물려준 이름까지 버리면서.”
주육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채찍을 받은 후 몸을 훌쩍 날려 말에 올랐다.
“사람 욕심이란 게 원래 끝이 없잖나.”
진 공자는 깃발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몰며 앞서가는 주육낭을 향해 소리쳤다.
“육낭, 이리 맛있는 음식이면 자네 누이도 좋아할 거야. 내가 여기서 자네 누이한테 식사 대접을 하면 틀림없이 좋아하겠지?”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유심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 애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지?”
등을 내걸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은 곧장 정교랑의 거처로 향했다.
“공자님.”
문밖에 선 여종이 불안해하며 예를 올렸다. 정 아씨가 들어온 후, 집안 식구들은 한시도 마음 편할 때가 없었다. 들어오던 첫날부터 추운 겨울날 부인을 반나절이나 밖에 세워 두더니, 육공자가 형장을 지고 죄를 묻는 소동을 벌이게 했다. 간신히 날이 저물자 이번에는 사환이 없어졌다며 자그마치 사흘이나 법석을 떨었으니……·.
아이고, 언제나 집안이 좀 잠잠해질지. 육공자가 오다니 이번엔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모르겠네.
다행히 주육낭은 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 대신 마당 문 앞에 서서 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방 안에는 등불이 따스하게 켜져 있었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바둑을 두며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거기 갈 필요 없어. 자네 누이는 자네 집으로 돌아갔을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난 알고 싶거든. 그래서 아는 거야. 자네는 알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고. 자네가 생각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육낭, 자네 누이를 멀리하면 더 소원해지기만 해. 소통할 생각을 해야 자네를 쳐다보고 자네의 말을 들으려 하겠지. 안 그럼 답이 없어. 다시는 횡포 부리지 마.”
진 공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주육낭은 주먹을 꽉 쥐고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종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당직 교대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흩어졌다.
얼마 안 가 또 다른 형체가 마당 문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형체는 누구에게 들킬세라 이리저리 몸을 숨겼다.
아씨, 이거 드시겠어요? 맛이 없으세요? 아씨,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반근은 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봤다. 어디선가 본 광경이고 언젠가 들어 본 대화 같았다. 다시 아씨를 보게 됐다. 이제 아씨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지만. 반근은 손수건을 꽉 쥐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시야가 흐릿해진 반근은 차가운 벽을 손으로 짚으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거 누구요?”
문 안에 있던 여종이 눈치를 채고 소리를 빽 질렀다. 반근은 황급히 뒤돌아 후다닥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여종이 등을 들고 나와 문밖을 살폈지만 겨울바람 소리만 쉭쉭 들릴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온 것도 모자라, 이젠 부정한 것들까지 달려드는 건가? 여종은 오싹함에 몸서리를 치며 생각을 떨치려는 듯 퉤퉤 침을 뱉고 문단속을 했다.
날이 환히 밝았다. 주 부인이 대청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정교랑이 방에서 나왔다.
“교교, 조봉대부(朝奉大夫) 댁의 부인께서 친히 찾아오셨더구나. 어서 가서 그 댁 어린 낭자가 무슨 병인지 좀 봐.”
주 부인의 말에 정교랑은 주 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예도 올리지 않고 문후도 여쭙지 않는군. 관두자, 그런 법도를 알기나 하는지 모르지. 주 부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니 널 모셔 가려는 게지.”
주 부인이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안 가요.”
정교랑은 시녀가 건네는 물을 받으며 대꾸했다.
“왜 안 간다는 건데?”
주 부인은 초조했다.
“내가, 왜 가야 하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넌 병을 치료할 줄 알잖아. 너는 신의고.”
“난, 신의가 아니에요. 어떤 병은, 고칠 줄 알지만, 어떤 병은, 못 고쳐요.”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천천히 물을 마셨다.
이게 무슨 말이야!
“교교.”
주 부인은 바짝 다가앉으며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뒤끝 있게 굴지 말고.”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고 주 부인을 보며 말했다.
“틀렸어요. 뒤끝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죠.”
주 부인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 저희 아씨는 오늘 진 노태야 댁에 약을 지으러 가셔야 해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마차 좀 준비해 주세요.”
시녀가 정교랑의 손을 부축하며 말했다.
나더러 마차를 준비하라고? 주 부인은 기가 막혀 시녀를 쳐다봤다. 내가 누군데! 너희는 누구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차를 준비하지 않으면? 진 노태야 댁에 왕진을 가지 말란 소린데? 내가 진 노태야 댁에 왕진 가는 걸 막는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찌 됐소?”
답답한 마음에 실내를 이리저리 서성이던 주 노야는 주 부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얼른 다가서며 물었다.
“오씨 댁 부인이 아직 기다리고 있소. 서둘러 짐을 챙겨 따라가라 하시오.”
주 부인은 안색이 어두웠다.
“서두르긴요, 가서 빌기라도 하란 말이에요?”
“무슨 말이오?”
주 노야가 멈칫하며 인상을 썼다.
“안 가겠대요.”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가?”
주 노야는 잘못 들었나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 안 가겠단 거요?”
“안 가겠다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아요.”
주 부인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덧붙였다.
“묶어서 강제로 데려가기라도 하게요?”
감옥에 처넣는 것도 아니고 병을 치료하는 일이니 강제로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망할 계집.”
사태 파악을 한 주 노야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방금 오 부인한테는 진 노태야 댁에 왕진 갔다고 말씀드렸어요. 오늘은 돌려보냈다 치고, 내일은 어쩌죠? 오 부인은 돌려보냈지만 다른 부인들이 또 찾아오면요?”
주 부인이 자리에 앉았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래, 다른 일도 아니고 병을 고치는 일이다. 욕하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데려간다 한들, 고칠 수 있는 병이어도 고칠 줄 모른다고 잡아떼면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 애를 이 집에 데려온 게 엄청난 경사인 줄 알았는데, 이게 뭐예요? 우린 이제 완전히 진씨 가문 눈 밖에 났어요. 진 노태야의 병이 호전되면서 그 애 명성이 더 높아졌으니 찾아오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겠죠. 우릴 찾아오는 것이니 우리 주씨 가문의 일인데, 그 망할 계집이 번번이 안 간다고 해 봐요. 다들 우리한테 분풀이할 거라고요!”
주 부인이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럼 어쩌겠소. 내쫓기라도 해?”
주 노야가 언짢은 말투로 대꾸했다.
“내쫓으면 우리 주씨 가문이 뭐가 돼요?”
뭐가 되냐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겠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주 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으로선 그 계집을 때릴 수도 혼낼 수도 없소. 어르고 달래서 비위를 맞춰야 그나마 쓸모 있게 굴겠지.”
“그 바보가 아주 상전이 됐네요.”
주 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한숨을 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주 노야 내외의 당초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거야?
* * *
중문 밖으로 나온 시녀는 준비된 마차를 보고 쿡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님, 또 우리 아씨의 마부가 되어 주시려고요?”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시녀를 힐끔 보고는 옆에 있는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곧이어 고개를 돌린 주육낭은 손에 든 채찍을 흔들며 잠자코 있었다. 정교랑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정교랑이 왔다는 소식에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문밖으로 마중을 나오던 진씨 가문 공자들은 마차에 앉은 주육낭을 보며 냉소했다.
“주 공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겠나?”
“됐어, 여기 주 공자는 마차를 지켜야지. 한눈팔다 사람 잃어버리면 어떡해.”
주육낭은 조소와 비아냥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마차를 몰아 자리를 떴다. 정교랑은 문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진씨 가문 여인들이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특히 가장 먼저 뛰어나온 건 단랑이었다.
“언니.”
쪼르르 달려온 단랑이 정교랑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할아버지랑 나랑 언니 보고 싶어 했어요.”
“날 안 보는 게 제일 좋아.”
정교랑이 말했다. 이때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나온 진 부인이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마침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진 부인은 정교랑과 나란히 걷고, 나머지 낭자들은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낭자들은 정교랑의 옷이며 머리 양식을 꼼꼼히 뜯어보며 속삭였다.
“왜 안 보는 게 좋다는 거야? 돈 벌면 좋잖아?”
옆에 있던 낭자가 눈을 흘겼다.
“정 낭자는 의원이잖아. 의원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겠어?”
낭자들은 그 의미를 퍼뜩 깨닫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 낭자도 참, 몇 마디 더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우리가 말이 너무 많았던 거지. 열 마디를 떠들어도 진짜 핵심은 한 마디 정도잖아.”
먼저 말했던 낭자가 대꾸했다.
“그야 상대가 못 알아들을까 봐 그렇지. 그럼 오해를 사잖아.”
누군가가 반박하고 나섰다.
“오해하면 뭐?”
먼저 말했던 낭자가 쏘아붙이자 상대는 말문이 막혔다. 하긴, 오해하면 어쩔 텐가. 병이 중한데 치료할 생각이면 와서 빌지 않고 배겨?
“정 낭자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 말도 이해하겠지. 정 낭자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정 낭자가 신경 쓸 바 아니고.”
진씨 가문의 낭자는 진 부인과 함께 진 노태야의 거처로 간 여인을 보며 감탄 어린 말을 내뱉었다.
“저리 자유롭게 살다니, 무슨 바람이 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