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거리에는 더 많은 사람이 흩어져 잃어버린 사환을 찾아다녔다.
시끄러운 인파 사이를 헤매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불빛으로 반짝이는 거리는 천상의 낙원 같았지만, 금가아에겐 그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그 집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만 아씨는 오지 않았고, 진씨 가문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진씨 저택이 어딘지 찾아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길 가던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 진씨 가문이 어느 진씨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진씨 가문? 경성에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행인은 웃으며 그리 말했다. 금가아는 소매로 코를 닦았다. 눈 내린 겨울밤이라 그런지 다리가 쑤셔 왔다. 오는 길에 늑대에게 물린 상처로 인한 통증이었다. 진씨 저택에서는 아씨가 극진한 대우를 받은 덕에 금가아 같은 아랫것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특별히 방을 마련해 주고 삼시 세끼를 대령했음은 물론이고 옷을 빨아 주는 사람도 따로 있을 정도여서 주인 나리가 된 기분까지 들었다. 그 결과, 금가아는 경성에 온 지 20일이 다 되도록 집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 댁 주인이 진씨 성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똑바로 보고 다녀!”
술주정뱅이가 소리를 꽥 지르자 놀란 금가아는 허둥지둥 비켜섰다. 그러다가 실수로 옆에 있던 나무에 부딪히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 속엔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도 섞여 있었다. 머리를 문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금가아는 자신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전에 있던 저택보다 훨씬 떠들썩했다. 등불이 대낮처럼 환히 밝혀져 있었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와 노랫소리, 악기 소리가 들렸으며, 연지분 향기와 술 냄새, 음식 냄새가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맴돌았다.
금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주에서는 정월 대보름 명절 때도 이리 호화찬란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여인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방금 전 웃음소리를 냈던 그 여인이었다. 금가아가 어리둥절한 눈길로 고개를 돌리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 네다섯 명이 골목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겨울밤인데도 얇은 옷차림으로 새하얀 가슴을 드러낸 상태였다.
금가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놀라 얼른 손으로 가렸다. 그 어리바리한 모습에 여인들은 또다시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뜨렸고, 흐느적거리는 그 몸놀림에 가슴이 출렁거렸다. 옆에 있던 사내는 침까지 흘리며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봉추!”
옆에 있던 사내가 머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사내는 정신을 차렸다.
“망측하게 무슨 짓이냐!”
봉추라 불린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을 닦은 후, 어쩐지 민망해져 눈길을 거뒀다. 대신 봉추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로 나무 옆에 있는 금가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 홍등가를 돌아다녀! 싹수가 노랗네!”
봉추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다가 갑자기 놀란 듯 눈을 비볐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낯이 익지?”
봉추가 중얼거렸다.
“봉추, 괜한 말썽 피우지 말고 속히 가자. 묵을 곳부터 찾아야지.”
옆에 있던 사내의 재촉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니, 금가아?”
내 이름을 부르다니! 아씨가 보낸 사람이겠지? 잽싸게 고개를 돌리는 금가아의 눈에 커다란 머리통이 쑥 들어왔다. 놀란 금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금가아라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던 사내들도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금가아 못지않게 놀랐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너희 아씨는?”
그 사람들이었다. 금가아는 눈앞에 선 일곱 사내를 쳐다봤다. 딱 두 번 본 인연이 전부지만 늑대 떼에 맞서 혈전을 치른지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없이 막막하고 아득하던 순간에 아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니 금가아는 순간 꾹꾹 눌러 왔던 설움과 두려움이 복받쳤다.
“아씨를 잃어버렸어요!”
금가아가 목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밝아올 무렵, 좁은 방 안에서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있던 금가아는 하품을 했다. 옆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술 냄새와 발 냄새와 땀 냄새도 모자라 기름지고 달짝지근한 음식 냄새까지 섞인 방 안 공기에 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금가아는 자신의 발 위에 턱 올려진 사내의 팔을 조심스레 들어 옮긴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 종이를 붙인 창살 사이로 들어온 빛에 방 안은 한층 따스해 보였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잠든 사내들의 모습은 더없이 괴이했지만.
금가아는 살금살금 문가로 걸어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작고 평범한 마당엔 아직 햇빛이 들지 않았고, 나무와 처마에 걸린 홍등은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여인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자 금가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쪽 마당 문 앞에서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남녀가 작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대인, 내일 또 오셔야 해요. 대인이 안 계시면 밤에 잠을 못 이뤄요.”
“예쁜아, 내 그것이 그리워 그러지?”
장난 섞인 웃음과 쪽쪽 입을 맞추는 소리에 금가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여인의 벗은 몸이 또다시 눈에 들어오자 금가아는 화들짝 놀라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찌 이런 해괴망측한 곳에……·.
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사내들은 습관처럼 허리춤을 더듬었다.
“금가아, 너였구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내가 문가에 놀란 모습으로 서 있는 금가아를 보고,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강림 형님, 우리 어서 아씨 찾으러 가요.”
둘의 말소리에 더 많은 사내들이 정신을 차렸다.
“날이 밝았네.”
잠에서 깬 사내들은 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옆에 있던 술 단지를 흔들어 보고 낙담해 내던지기도 했다.
“제길, 향칠 이 배은망덕한 놈. 힘들 땐 좋은 말로 알랑거려 놓고 이제 와선 은자 몇 푼 쥐여 주며 우릴 내쫓다니. 우리가 무슨 비렁뱅인 줄 알아?”
사내가 욕을 해댔다.
“이깟 푼돈으론 유곽에서 잠이나 자는 거지, 계집은 구경도 못 해. 어쨌든 우린 탈영병이고 죄를 지은 몸이니 군에 다시 들어갈 생각은 접어야지. 집에 가서 농사나 짓는 수밖에.”
다른 사내도 일어나 앉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향칠을 찾아온 이유가 뭐요? 사건을 재조사해 명예를 회복하려는 거잖소. 그놈은 우리가 도망치도록 내몰았소. 일부러 우릴 탈영병으로 만들어 누명을 씌운 거라고. 사건을 조사하기는커녕 우릴 내쫓아 버리다니.”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향칠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한 거야.”
수염이 덥수룩하고 여전히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신중한 목소리엔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다른 사내들과는 확연히 다른 서생의 기품이 느껴졌다. 책을 몇 권 공부한 적 있다던 그 병자였다.
“셋째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오? 애초에 우리가 아니었으면 향칠 그놈은 목숨도 부지하지 못했을 텐데, 경성 대부호의 데릴사위가 되어 관료 노릇을 할 수나 있었겠소?”
옆에 있던 사내가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하긴, 마씨 성을 가진 부자는 본디 셋째 형님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향칠이 그 댁 마씨 처자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알고 셋째 형님이 핑계를 대 거절했으니.”
다른 사내도 동조했다. 셋째는 웃으며 손을 거두고 일어나 앉았다.
“우릴 관아에 발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은혜는 갚은 거야. 자기 일도 아닌데 누가 나서려 들겠나? 세상인심이 그러니 따지고 들 것 없어.”
“나서서 돕는 사람이 없다고요?”
한 사내가 한쪽 옆에 멍하니 있는 금가아를 힐끔 쳐다봤다. 잠시 멈칫했던 사내는 상대가 누군지 그제야 떠오른 듯했다.
“목숨을 구해 준 그 아씨가 있잖습니까.”
아씨 얘기가 나오자 안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금가아를 쳐다봤다.
“그래, 그렇지. 이렇게 쉽게 아씨를 찾다니.”
“이 녀석이 아씨를 잃어버렸다지 않았어?”
시끄럽게 떠드는 사내들을 제지하고, 셋째가 금가아 앞으로 가 앉았다.
“금가아, 네 아씨의 저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떠올려 봐라. 같이 가서 찾아보자.”
사내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막 입을 열려는데, 문가에 앉아 있던 사내가 돌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금세 조용해졌다.
“큰형님,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문 앞에 앉아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사내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군이 뭔가를 찾고 있다. 혹시 향칠 그놈이……·.”
안에 있던 사내들은 순간 굳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키는 이만 하고 강주 말씨를 쓰는 녀석이다.”
마당 문 앞에 선 병졸이 손짓을 하면서 유곽 여주인에게 대충 그린 용모파기를 건넸다. 유곽 여주인이 얼른 받아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낯이 익긴 하네요.”
귀밑머리를 푼 채 옆에 서 있던 기녀가 바짝 다가섰다.
“아, 그 애네요. 어젯밤에 왔던 아이예요. 사내들 사이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어요.”
병졸들은 크게 기뻐했다. 밤새 찾아다녔는데, 드디어 실마리가 보이는구나.
“아주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었어요. 기녀를 끼고 놀고 싶었나 본데 돈이 없어서 술상만 내갔죠.”
상황을 떠올리던 기녀는 어젯밤에 손님을 못 받은 일이 떠올랐다. 사내들에게 공을 들였건만 헛수고한 꼴이 됐으니 병졸들에게 전하는 말에 과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사내들 틈에 끼어 있다가 저기 담벼락에서 몸을 웅크리고 울더라고요. 납치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험상궂은 사내, 울고 있는 아이, 유곽에 왔으면서도 여인을 들이지 않은 사실. 병졸들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용모파기에선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젯밤부터 지금껏 경성의 수많은 사람을 들볶은 아이였다. 하급 병졸인지라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순 없었으나 듣기론 진 상공 댁도 관련됐다고 했다. 진씨 가문 공자들도 어젯밤에 이 아이를 찾아 거리를 휘젓고 다닌 터였다.
뉘 집에서 잃어버린 귀공자려나?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공자라면……·. 병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후, 허리춤에 찬 칼을 꽉 쥐며 천천히 물러났다. 공을 세울 기회다!
* * *
“금전(金田) 골목?”
주육낭이 보고하러 온 하인에게 되물었다.
“네, 관아와 오성병마사 사람들이 전부 갔습니다.”
하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시녀는 밝은 얼굴로 정교랑의 팔을 붙잡았다.
“아씨, 아씨, 이제 찾았어요.”
기뻐하던 시녀는 곧 놀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망할 녀석, 어쩌다 그런 곳엘 간 거야.”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봤다.
“거긴 홍등가예요.”
시녀가 정교랑에게 바짝 다가서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씨께 아뢰옵니다. 관아 사람들 말로는 금가아가 납치되어 끌려간 듯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얼른 고했다.
“납치요?”
시녀가 놀라며 긴장했다.
“그럼, 가서 자세히 좀 알아봐요. 그 애 안 다치게.”
같은 시각, 금전 골목에 있는 유곽의 문 앞은 병졸들로 빽빽했다. 유곽 여주인이 떨리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병졸들은 발소리를 죽여 잠입했다. 문 앞에 선 병졸이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기녀 말로는 어젯밤에 늦게까지 술 마시고 놀다가 새벽녘에야 잠들었으니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했다. 병졸들은 똑바로 서서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칼을 손에 들고 기합을 내지르며 일제히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공무 수행 중이다. 순순히 죄를 고하면 죽이진 않겠다.”
와글와글 시끄럽던 실내는 금세 조용해졌고, 병졸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뒤쪽 창문이 활짝 열려 있고 찢어진 기름종이만이 바람에 나부끼며 코를 고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망쳤다!”
“역시 도적놈들이었어!”
“어서 쫓아라!”
* * *
골목 어귀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사내가 등 뒤로 손을 흔들자, 사내 몇 명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이 망할 경성은 웬 골목이 이리 많은지. 성문은 어느 쪽이오?”
“지금은 성문으로 못 나간다. 이미 병졸이 쫙 깔려 있을 거야.”
앞쪽에서 걷던 셋째가 대꾸했다.
“셋째 말이 맞다.”
뒤쪽에 걷던 첫째가 좌우를 살피며 말했다.
골목을 나가자 시끌벅적한 장터가 보였다. 새벽녘인데도 몹시 활기찬 모습이었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사람들은 일곱 사내와 아이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사내들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머리를 숙였다. 앞쪽에서 걸어가던 셋째가 돌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사내들끼리 부딪치고 말았다.
“저기 있다!”
큰길가에서 뛰어오던 병졸 무리가 이쪽을 보며 소리쳤다.
“어서 가자”
셋째의 말에 사내들은 얼른 돌아섰다. 금가아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길을 잃었을 뿐인데 관부에 쫓기는 몸이 되다니.
“우리랑 같이 가면 금가아에게도 괜히 불똥이 튈 거다. 적당한 곳에서 떨구고 가자.”
첫째가 말했다.
“강림 형님.”
금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널 잃어버렸어도 너희 아씨께선 반드시 널 찾아내실 것이다. 네가 경성에 있기만 하면 분명 찾아내실 거야. 우리랑 같이 움직이다 너까지 감방에 들어가면 다시는 아씨를 못 볼 수도 있어.”
셋째가 걸음을 재촉하며 타이르자 금가아도 더는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조용히 따라갔다.
“저기 장작더미가 있으니 넌 저기 숨어라.”
첫째가 옆에 있던 금가아를 떠밀며 말했다. 금가아가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쪽에서도 병졸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있다, 찾았어!”
병졸들은 시끄럽게 소리치며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제 더는 금가아와 선을 그을 수 없게 되자 셋째가 금가아를 홱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이 집 담 넘어.”
일곱 사내가 각자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셋째가 금가아를 들어 올리자 먼저 담을 넘은 사내가 붙잡아 주었다. 양쪽에서 달려든 병졸들이 집 바깥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거긴 왜 가냐고!”
주육낭이 정교랑의 손을 홱 낚아채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힐끔 쳐다봤다.
“보려고요.”
“보긴 뭘 봐. 그냥 여기서 기다려, 소란 피우지 말고.”
주육낭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정교랑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주육낭을 빤히 쳐다봤다. 싸리나무를 지고 죄를 청하러 왔던 그 소년의 나체를 볼 때처럼. 주육낭은 갑자기 손이 화끈거려 손을 뿌리쳤다.
“언제나, 이렇게 아둔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둔한 건 너지!”
주육낭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래요. 난 원래 바보죠.”
시선을 거둔 정교랑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만 난, 아둔하지 않아요.”
담벼락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가아는 겁나고 막막한 표정이었다. 앞쪽에서는 사내들이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옆쪽에서는 이 집 식구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밖에서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겁내지 마시오. 우리가 숨을 곳이 없어 부득이하게 댁들을 인질로 삼은 거요. 잠시 시간을 끌려는 것일 뿐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셋째가 이 집 식구들을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런 위로가 통할 리는 없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식구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울며 애원했다.
“셋째야, 시답잖은 말 집어치워. 넌 금가아를 데리고 빠져나가라.”
첫째의 말에 셋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봉추한테 데려가라고 하십시오. 난 몸이 안 좋아 못 버텨요.”
“난 못 갑니다!”
한 사내가 바로 소리치며 단도를 움켜쥐었다. 바깥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는 놈들은 들어라. 사람을 내놓으면 죄를 추궁하지 않겠다.”
물론 그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네, 왜 자꾸 사람을 내놓으란 거야.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무슨 사람을 내놔? 우리가 우릴 내놓는 게 말이 돼?”
그 말에 셋째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문 밖엔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물 샐 틈 없이 들어찬 사람들은 저마다 추측을 내놓았다.
“엄청난 대도(大盜)래요.”
“사람을 백 명도 넘게 죽인 산적이라지.”
* * *
“뭐라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저쪽에서 주육낭에게 현재의 대치 상황을 설명하던 관리가 이쪽을 쳐다봤다. 저 여인이 여긴 뭐 하러 왔지? 주육낭을 따라온 것 같은데, 무슨 사이야? 주육낭이 여인을 말리거나 꾸짖는 대신 고개를 돌리자 관리는 얼른 눈치를 챘다.
“일가족 네 명을 인질로 잡고 있어 강공을 펼치긴 힘듭니다.”
관리가 공손한 말투로 고했다.
“사람만 내놓으면 아무 죄도 추궁하지 않겠다고 해요. 돈도 줄 수 있고요.”
시녀가 말했다.
중요한 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안에 있는 사람이 그 말을 믿겠느냔 말이다. 여인들이 이런 일을 어찌 알겠나. 하지만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처음에, 그자들을 알아본 사람이, 뭐라고 했죠? 내가, 그 사람을 만나 봐야겠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금전 골목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곧 유곽 여주인이 불려 왔다.
“저희도 몰라요, 저희는 장사하는 처지니 사람 가리지 않고 손님이면 다 받죠. 유괴범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유곽 여주인은 울고불고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죠?”
정교랑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시녀가 유곽 여주인을 다그치며 정교랑의 말을 받아 물었다. 앙칼지긴. 유곽 여주인이 입을 삐죽거렸다.
“별다른 건 없었고 외지 사람인데 험상궂게 생겼어요. 키가 크고 수염이 났더라고요. 애가 막 우니까 그 사람들이 협박했어요. 뭐라더라. 울지 말라면서, 울면 다신 너희 아씨를 못 볼 거라고……·.”
유곽 여주인은 과장을 섞어 말했다. 그놈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흉악했는지 말해야 협박을 당한 자신들이 면죄부를 받을 테니까.
“몇 사람이었죠?”
정교랑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일곱 명쯤이었나……·.”
유곽 여주인이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정교랑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곽 여주인을 밀어제치고 곧장 골목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녀는 놀라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갔다. 주육낭이 정교랑의 팔을 확 붙잡았다.
“적당히 해.”
주육낭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둔하네요.”
“그래, 너 잘났다!”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꾸했다.
“그건 납치가 아니에요. 도움이죠.”
주육낭은 정교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당 안에 있던 셋째가 갑자기 허벅지를 탁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런! 오해였어!”
사내들이 고개를 돌렸다.
“오해라니?”
첫째가 물었다.
“문 열어요.”
셋째가 대답도 없이 대뜸 소리치자 다들 놀라 얼어붙었다.
“셋째 형님,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잔 겁니까!”
사내들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셋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패배를 인정하자는 게 아니야. 이건 그냥 웃어넘길 오해라고!”
셋째가 다시 소리쳤다.
“문 열어!”
이번에는 셋째의 목소리가 아니라 밖에서 들리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집 안팎이 일순 조용해졌다.
“문 열어.”
대문 안팎에서 동시에 소리쳤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금가아가 벌떡 일어섰다.
“아씨!”
금가아가 소리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셋째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두봉으로 몸을 감싼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봤다. 사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자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뒤따라왔던 주육낭은 그 광경에 표정이 굳어졌다.
정교랑은 문을 열고 모두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우리 집이긴 한데, 실은 저도 처음 와 봐요.”
그러면서 손을 들어 금가아를 두어 번 때렸다.
“너 이 녀석, 왜 멋대로 돌아다녀! 깜짝 놀랐잖아!”
이제 마음을 놓게 된 금가아는 우는 대신 헤헤 웃었다. 정교랑이 한 번 더 들어오라고 권하자 사내들은 얼른 예를 표했다.
“저희가 어찌 감히요. 아씨,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세요.”
정교랑이 이번에는 주육낭과 진 공자를 쳐다봤다.
“마음이 안 놓이면, 들어와서 기다려도 돼요.”
그 말에 사내들이 놀란 눈빛으로 주육낭과 진 공자를 바라봤다. 마음이 안 놓여? 남녀가 한 방에 있어서? 보아하니 두 소년은 준수하고 귀티가 흐르는 게 이 아씨와 비슷한 분 같네. 친척이거나 아니면……·. 사내들은 어쩐지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저희는 안 들어가도 돼요.”
첫째가 말했다. 주육낭은 냉소를 던진 후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들어가요.”
정교랑이 손짓을 하며 재차 권했다. 사내들은 영문을 모르겠는 눈빛으로 주육낭과 진 공자의 뒷모습을 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과 사내들이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익숙한 금가아가 시녀를 도와 모두에게 물을 올렸다.
“준비를 못 했네요. 차도 없어요.”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사내들은 얼른 답례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내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머물기 좋은 곳입니다, 좋은 곳이에요.”
한 사내가 칭찬했다.
“그러게요. 이제 좀 경성답네요. 어젯밤 그 유곽은……·.”
맞장구를 치던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내가 등짝을 후려치면서 말이 끊겼다. 다른 사내들의 노기 어린 눈빛에 사내는 목을 움츠리고, 얼른 물을 마시며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