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새벽빛이 들어오며 방 안이 밝아지자 단랑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유모를 보며 멈칫했던 단랑은 버선만 신은 채로 걸어와 창을 힘껏 밀어 열었다. 찬바람과 함께 눈송이가 날려 들어왔다.
“와, 정말 눈이 오네! 언니 말이 맞았어!”
그 소리에 잠들어 있던 유모가 깼다.
“아이고, 아씨. 이러다 풍한 드세요.”
유모는 호들갑을 떨며 단랑을 들어 창가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같은 시각 정교랑의 처소에서도 시녀가 휘장을 들며 창문을 열고 있었다. 한기 섞인 바람에 손이 아플 정도였다.
“엇? 눈이 오네.”
시녀가 밖을 보며 신이 나서 외쳤다. 병풍 뒤에서 나온 정교랑은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밖에는 쌀 알갱이 같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씨, 바람이 차요.”
시녀가 얼른 다가와 두봉을 걸쳐 주었다.
눈이 온다. 정교랑은 밖을 보며 처음으로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눈이 오던 날에 잊지 못할 일이 있었나? 눈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을까? 절에서 붓을 들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부친의 기억처럼,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잡힐 듯 말 듯한 뭔가가 있긴 했다.
정교랑은 손을 뻗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순간 가슴이 떨렸다. 손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녹는 눈송이처럼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소가 진 노태야의 방으로 들어왔다. 정교랑이 앉아 처방을 읊어 주자 시녀가 붓을 들어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 정말이에요. 눈이 내려요.”
진단랑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언니가 며칠 후에 눈이 올 거라더니 정말 눈이 내려요!”
진소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단랑은 신이 나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더니 곧 정교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눈이 오는 것도, 하늘이 언니한테 말해 준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야, 밑도 끝도 없이. 진소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여인이 며칠 내로 눈이 온다고 했다고? 이미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늘을 보고? 부친이 길에서 이 낭자를 만났다며 한 얘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도 비가 올 것이라고 하니 비가 오고 비가 그칠 것이라고 하니 비가 그쳤다고 했다. 오로지 부친의 병세에만 정신이 쏠려 있던 터라 담아 두지 않았는데, 이 여인이 정말 하늘을 보고 날씨를 읽는 비술이라도 가졌나? 태사국 사람들처럼?
하지만 태사국 사람들도 열 번에 한두 번 맞힐까 말까였다. 하늘을 보고 날씨를 예측하려면 천문과 지리에 두루 능통해야 하고, 책도 수없이 많이 읽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노력은 삼 할뿐이요, 천부적인 재능이 칠 할을 차지했다. 개국 당시의 원 태사 상공처럼 말이다. 그리 대단한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인데.
부친께 문안을 올리고자 딸을 내보낸 후 정교랑과 인사를 나누던 진소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낭자, 스승이 어느 분이십니까?”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스승은 있겠지. 의술도 알고 하늘도 볼 줄 아는데, 그런 게 날 때부터 지니는 기술은 아니지 않은가. 바보를 가르쳐 키워 내다니, 대체 어떤 성인이기에? 바보였던 정교랑의 병도 혹시 그 고인(高人)이 고쳐 주신 건가?
정교랑의 침묵에 진소의 마음은 용솟음쳤다. 그래, 틀림없어. 분명 그럴 거야! 아무렴, 고인이지! 고인이고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던 의문이 단번에 풀리는 듯했다.
“내가 만약,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대인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소를 보며 말했다. 진소의 표정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진소에게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기억이 안 나죠?”
“도관이 벼락을 맞은 일이 있어요. 나도 벼락에 맞았는데, 요행히, 목숨을 건졌죠. 깨어나 보니, 지난 일이 기억나지 않았고요. 기억나는 것도 있고, 잊은 것도 있죠.”
진소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랬군요, 이해했습니다.”
진소의 목소리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언젠간 나아질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아지겠죠.”
정교랑과 시녀는 진소에게 작별을 고한 후 처소로 돌아왔다. 우산을 받쳐 든 시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아씨, 저 대인이 뭘 이해했다는 거죠?”
정교랑은 내리는 눈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건, 나도 몰라. 이해했으면 됐지.”
시녀는 어리둥절한 채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니까, 사실 말 같은 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야.”
정교랑은 손을 뻗어 흩날리는 눈송이를 받았다.
나들이를 다녀온 후 진씨 가문 낭자들이 또 나들이를 가자고 청해 왔으나 정교랑은 전부 거절했다. 정교랑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용기가 있는 낭자는 없었다. 정 낭자는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날 나들이에선 딱 세 마디 한 게 전부야. 아니지, 세 단어라고 해야 하나. 단랑, 이쪽이야, 좋아.”
한 낭자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했다. 방 안에 앉은 자매들은 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어때서?”
한 낭자가 다른 자매들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말만 많지, 무슨 쓸모가 있어? 조부님의 병을 고칠 수가 있나, 멀리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모시러 오는 사람이 있길 하나?”
자매들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십팔랑, 우린 비웃자는 뜻 없었어.”
먼저 말했던 낭자가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없으면 됐어. 누가 누구를 비웃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야.”
“그래, 그래. 오늘 오후에 같이 조부님 병문안 가자.”
한 낭자가 웃으며 이야기를 원만하게 매듭짓자 다른 낭자들도 좋다고 했다. 막 일어나 마당 문 앞으로 왔을 때쯤 정교랑이 시녀와 함께 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들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오전에 진료를 마치지 않았나?”
여인들은 계속 머뭇거리기만 할 뿐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진 노태야의 거처에는 진소 부부와 단랑이 있었다. 이들 역시 정교랑이 이런 시간대에 찾아오자 놀란 눈치였다.
“혹시 부친의 병세가……·.”
진소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물었다.
“아무 일 없어요. 내일부터는 침을 안 맞으셔도 돼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치료비를 정산해 주세요. 이만 떠날까 합니다.”
정교랑의 말이었다.
떠나겠다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깜짝 놀랐고, 진 노태야마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니, 떠나려고요?”
“당연히 떠나야지.”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지금껏 조용히 지냈다. 매일 침을 놓고 약을 지으러 올 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간을 쭉 자기 거처에서 보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하루하루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진씨 가문 사람들은 정교랑의 존재조차 잊을 뻔했다.
“아씨, 좀 더 머무시지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나섰다.
“삼낭, 그건 안 될 말이다. 낭자가 여기 머문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어. 낭자가 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낭자가 떠나도 될 만큼 내 병세가 좋아진 게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소도 더는 강하게 붙잡지 못했다.
“그럼 강주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진소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한동안, 경성에 있다가, 돌아갈까 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성에 있기만 하면 됐다. 어쨌든 부친의 병세는 이제 막 호전된 참이었다. 정교랑은 마음을 놓으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쉽겠는가.
그날 저녁, 진 부인이 치료비를 보내 왔다. 하지만 정교랑은 봉투를 들고 직접 찾아왔다. 정교랑이 얼마를 달라고 밝히지 않았고 진 부인 역시 얼마를 주겠다고 밝히지 않았지만, 봉투에 든 돈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 부인은 불안했다. 적다는 뜻인가?
“부인,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난 경성을 잘 모르니, 세 들어 살 만한 집을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진 부인은 놀란 표정이었고, 밖에 꿇어앉아 있던 주씨 가문 여종과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세상에! 진 부인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바로 떠오르지 않네요. 그럼 일단 여기서 지내시다가 좋은 집을 찾으면 그때 옮겨 가세요. 그래야 더 정성을 들여 고를 수도 있고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부인께 부탁을 드리는 건, 이 일이 급하기 때문이에요.”
진 부인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이 낭자는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데다 말수도 적지만, 입을 열 때면 늘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진소 부부의 말을 들은 진 노태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말대로 해 주어라.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 찾으려 들면 아무리 급해도 찾을 수야 있으니까.”
말을 마친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더 물어볼 것 없이 옥대교 근처에 있는 우리 저택을 그 낭자에게 팔아라. 가구 같은 게 전부 갖춰져 있으니 바로 들어가 살 수 있지 않느냐.”
진소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 낭자에게 팔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팔아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반복하자 진소는 알았다고 했다.
소식은 금세 주씨 가문으로 전해졌다. 진씨 가문의 첫 반응과 마찬가지로 주씨 가문 역시 소란스러워졌다.
“정말 그리 말했단 말이냐?”
주 노야가 호통치자 앞에 있던 여종들은 덜덜 떨었다.
“네, 네, 노야. 진 부인께서 진 노야와 상의하여 정 아씨의 집을 사 주셨대요.”
주 노야는 노발대발했다.
“이런 몹쓸 것! 집안 어른은 안중에도 없구나!”
“노야,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소문이라도 나면 남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어요.”
주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에는 치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모두 의원을 불러온 일을 함구했다. 하지만 진 노태야의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면서 주씨 가문은 자신들이 진 노태야의 완쾌와 관계됐다는 사실을 은밀히 퍼뜨리던 차였다.
주 부인은 사흘에 한 번씩 진씨 저택을 찾았다. 이따금 정교랑을 보기도 했지만 못 보더라도 소문을 퍼뜨리는 데 문제될 건 없었다. 하급 무관이 상공 댁의 문턱을 무시로 넘나든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랫것들을 매정하게 내치면서까지 진씨 가문의 의심을 피한 터였다.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간 줄 알았건만,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 외조카는 먹기만 하고 줄행랑을 놓는 개와 다름없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애초에 누구 덕에 지금껏 편히 산 건지 관심도 없어. 이런 근본 없는 계집을 봤나!”
격노한 주 노야는 당장이라도 진씨 저택을 찾아가 못된 조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했지만, 주 부인이 막았다.
“노야, 그 애는 바보인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요. 진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안면 몰수하고 소란을 피울 순 없잖아요.”
“먼저 안면 몰수한 게 누군데?”
주 노야가 씩씩거렸다.
“아직은 돌이킬 여지가 있어요. 어쨌든 진씨 가문에서도 그 애가 우리와 가깝지 않다는 걸 알잖아요. 경성에 와서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으니, 집을 주어 곁에 두게 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어요.”
주 노야는 이를 악물었다.
“그다음은? 거기 들어가서 사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거기 들어가 살면, 그때 불러오면 되죠.”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냉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 계집이 대놓고 망신을 줘도 참고 또 참다가, 웃는 낯으로 알랑거려 데려오라고? 그까짓 게 뭔데! 그 계집이 뭐라고! 제 몸엔 주씨 가문의 피도 흐른다는 걸 몰라?”
문밖에 있던 주육낭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확 풀어 버리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
* * *
한밤중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새벽녘이 되자 제법 많이 쌓였다.
“경성은 겨울이 되면 눈이 엄청 내려요.”
시녀가 챙겨놓은 짐을 보며 말했다. 짐이라고 해 봐야 보따리 한 개가 전부였다. 정교랑이 직접 지은 옷 몇 벌과 빗 등이 들어 있었다. 주 부인이 보낸 옷은 이미 시녀가 진씨 가문 몸종들에게 나눠 준 후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짐은 단출했다.
경성은 땅값이 비쌌다. 진씨 가문에서 받은 치료비는 딱 저택 하나와 맞바꿀 정도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진씨 가문에서 반은 팔고 반은 거저 줬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았다. 정교랑은 얼핏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듯 보였다.
“마차가 준비됐나 보고 올게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이 내리는 창밖을 쳐다봤다. 우산을 들고 나가던 시녀의 눈에 이쪽으로 뛰어오던 금가아가 보였다.
“금가아, 저쪽 새집에 가서 정리 좀 해.”
금가아의 다리 상처는 어느덧 많이 나은 상태였다. 금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타고 가려던 참이야.”
금가아가 작은 나귀 마차를 가리켰다.
“가서 불 좀 때 놓고 있어.”
시녀가 당부했다.
“물도 끓이고. 눈은 나중에 쓸어도 되니까.”
“누나, 걱정 마요. 우리도 같이 가서 청소해 주고 올게요.”
마차를 몰던 두 사환이 말했다. 시녀는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는 정교랑을 위해 준비한 마차를 보러 갔다. 준비된 마차는 평소 진 부인이 쓰던 마차였는데, 아랫것들에게 명하여 새롭게 꾸며 놓은 터였다. 시녀는 다시 한번 확인을 마친 후에야 안심하고 정교랑을 부르러 갔다.
“아씨, 가시죠.”
문밖에 있던 여종이 우산을 들고 공손하게 말했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두모를 썼다. 진소 내외와 집안 식구들이 전부 나와 배웅했다. 진 노태야는 병환으로 추운 날씨에 나오기 힘든 터라 어제 미리 작별을 고한 터였다.
“계속 경성에 있을 거라고 하니, 나중에 내가 다 낫거든 보러 오시구려. 오늘이 꼭 마지막일 필요는 없잖소.”
진 노태야가 호쾌하게 말했다.
여인의 모습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다. 검은 두봉을 걸치고 푸른 우산으로 진눈깨비를 막고 있었다. 걸음을 걸을 때 보이는 진한 색상의 옷자락이 주변의 다른 색을 덮어 버렸다.
“나도 저런 옷 한 벌 지을래.”
진씨 가문 여인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정교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듯이. 다들 넋이 나간 채로 걸음을 옮겼다.
“언니.”
진단랑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정교랑을 잡고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니한테 놀러 가도 돼요”
“응.”
정교랑이 진씨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얘기가 잘 통했다. 전에 만난 인연이 있으니 그렇겠지. 옆에 있던 어린 낭자들은 부러움이 담긴 눈길로 시선을 교환했다. 분명 또래인데 왜 저 여인 앞이면 겁을 먹게 되는 걸까. 같이 나들이도 한 번 다녀왔지만,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어 교류는 많지 않았다.
마차는 중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진 부인은 정교랑이 마차에 오르도록 직접 살펴 주었다.
“그쪽은 다 정리해 놨어요. 가서 부족한 게 있으면 나한테 연통해요.”
진 부인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휘장이 내려지면서 시선을 가리게 되자, 아쉬운 듯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마차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다. 진 대인 등 사내들은 따라 걸으며 배웅했고, 나머지는 전부 그 자리에 서서 눈으로 전송했다.
“정 낭자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혼처는 있나?”
진 사노야의 부인이 문득 중얼거렸다.
“아직 어리긴 한데, 그래도 혼담이 오갈 나이가 되긴 했지.”
진소의 부인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보단 그나마 정교랑을 가장 잘 알았기에 일부러 입을 연 것이었다.
“전에는 아팠다 치고 이젠 다 나았지만, 아직 혼처는 없는 것 같던데.”
혼처가 없다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린 낭자들은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했고, 소년들은 짐짓 외면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 깊게 들었다.
“형님, 그럼……·.”
진 사노야의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하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여종과 사환이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누가 정 아씨의 마차를 막고 있어요.”
뭐라고? 모두들 멈칫했다. 누가 막는단 거지? 감히 진씨 저택 앞에서 마차를 막는다?
“황당하군. 대체 누구냐?”
진소가 얼른 나가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길에는 고개를 쳐든 소년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허리춤에는 칼까지 찬 상태였다.
“주씨 가문의 육낭입니다.”
소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씨 가문? 진소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혼내려고 달려들던 가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래?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대인, 누이를 데려가고자 왔습니다.”
주육낭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휙 몸을 날려 마부를 밀어내고 마차에 앉더니, 차고 있던 칼로 말의 엉덩이를 육중하게 내리쳤다. 놀란 말이 히이잉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진 공자는 말을 듣고 붓을 멈췄다.
“뭐라고? 육낭이 사람을 낚아채?”
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거리가 난장판이 됐겠군.”
진 공자는 기괴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려다가 꾹 참았다.
“녀석, 난 또 무슨 방법을 생각해 냈나 했더니 그거였군.”
고개를 가로젓던 진 공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되는데, 불난 데 기름을 끼얹는 형국인걸.”
진 공자가 사환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주씨 가문으로 돌아갔다더냐?”
“아직이요, 길가에 있어요.”
사환은 결국 풉 웃음을 터뜨렸다.
“진씨 가문 사람들이 나와 쫓아가면서 난장판이 되는 바람에 오성병마사 위병들이 나와 막았거든요.”
거리에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 물 샐 틈 없을 정도가 됐다.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아 다급하게 상황을 물었고, 웃고 떠드는 소리와 욕하는 소리가 뒤섞인 거리는 한층 시끄러워졌다.
위병이 땀을 닦으며 앞에 있는 사람과 마차를 쳐다봤다.
“저자가 댁의 마차를 훔쳤다고 했소?”
위병은 질문을 던지며 손가락으로 주육낭을 가리켰다. 진씨 가문 집사와 가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제일 간단하고, 말이 되지. 저자가 자기 사촌 누이를 훔쳤다고 하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괜한 억측을 낳을 뿐이다.
“주 공자가 그 댁 마차를 훔쳤다?”
위병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주육낭은 줄곧 마차에 앉아 있었다. 앞이 막히긴 했지만 내릴 뜻은 없다는 투였다. 마차 안은 시종일관 조용했다. 아무도 타지 않은 것처럼.
“어찌 된 일인지는 그만 물어보십시오. 이건 우리 집 마차란 말입니다.”
진씨 집안 집사가 마차에 달린 표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 집 거잖습니까. 우리 집이요.”
사환들이 주육낭을 가리키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저 사람은 우리 집 사람이 아니에요.”
위병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쓴웃음을 지었다. 경성에서 일하기 힘든 게 이런 경우 때문이라니까. 무슨 일이든 난다 긴다 하는 인물들이 엮여 있으니 원. 귀덕낭장 댁 사람이 이부상서 댁 마차를 훔치다니,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마차를 훔친 거야, 사람을 훔친 거야?”
“마차에 사람이 있나?”
거리에 있던 건달들이 떠들며 비웃었다.
하긴, 마차를 뭐 하러 훔치겠나. 위병들의 시선이 슬쩍 마차를 훑었다. 역시나, 괜한 억측을 낳게 생겼군. 걱정하던 일이 닥쳐오자 진씨 가문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그때 안에서 불쑥 나온 손 하나가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려 사람들을 기함하게 했다. 과연 섬섬옥수였다.
“죄송해요. 진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마차는 꼭 돌려드릴게요.”
진씨 가문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쫓아오면서도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괜히 쫓아온 건 아닌 듯했다. 최소한 정 낭자가 대인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정교랑이 주씨 가문으로 가기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주씨 가문 공자가 마차를 빼앗으며 난동을 부리자 체면을 불구하고 달려들 작정이었다.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지 말라고 따지기라도 해야지.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어쨌거나 핏줄은 중한 법이고, 이들은 어디까지나 남이니까.
“누이를 집으로 데려가는 길에 그 댁 마차를 좀 썼기로서니 이렇게 쩨쩨하게 굴 일입니까.”
줄곧 잠자코 있던 주육낭도 입을 열었다. 뭔가 내막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이제는 이 연극을 끝내야 할 때였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쉬쉬하며 흩어졌다. 먼발치에 있던 사환 두 명이 흩어지는 인파를 보며 신이 나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 공자님, 이제 가셔도 돼요.”
말에 타 있던 젊은 공자도 시선을 거두었다.
“역시 경성이구나.”
경성의 화려한 모습을 처음 접한 놀라움이 서린 얼굴이었다.
“이 넓은 거리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붐비다니.”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바람이 불자 눈 안개가 날렸다. 젊은 공자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호호 입김을 불며 손을 녹였다.
“원조!”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젊은 공자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있던 점포에서 젊은이 두 명이 뛰어나와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
“하, 자네들도 왔군.”
한원조가 웃으며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내리고는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자네가 늦은 거지. 유곽에서 사랑을 속삭이느라 오기 싫었던 건 아니고?”
두 사람은 한원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우리가 객잔 잡으면서 자네가 묵을 방도 함께 빌렸으니 망정이지, 걱정이 늘 뻔했네.”
한원조는 고맙다고 하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경성에서 동문끼리 모이게 됐으니, 술이나 실컷 마셔 보자고.”
“좋지. 경성엔 유명한 술집이 많으니 골라 보자.”
“아까는 무슨 소란이 있었던 거야?”
“모르겠어. 아무튼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잖아.”
세 사람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주육낭은 중문 앞에서 말을 세웠다. 문안은 벌써 시끌벅적했다.
“육낭, 네가 누이를 데려왔다고?”
“교교, 우리 아가, 돌아왔구나.”
주씨 부부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뛰어나오더니 마차를 보며 반색을 했다.
“누이가 고단할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선 쉬게 해 주세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나중에 하시고요.”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말한 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차 안은 시종일관 조용했다. 주씨 부부가 시선을 주고받은 후, 주 노야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손짓을 했다. 구경하러 나왔던 자식들과 시종들이 잽싸게 흩어졌다. 바보가 떼를 쓰기 시작하면 큰일이 아닌가.
“교교.”
주 부인이 다가가 휘장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지 우선 내려서 얘기하자. 응?”
마차 안으로는 단정히 앉아 있는 시녀가 먼저 보였고, 그 뒤로 옆으로 누워 있는 형체가 보였다. 주 부인은 놀라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교랑!”
주 부인은 엉겁결에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쉿.”
시녀가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아씨 주무시니까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
잔다고? 마차에서 잠을 잔다니? 연기하는 거겠지.
“마차 안에서 어떻게 자. 들어가서 자게 해.”
“괜찮아요. 아씨께선 몸이 안 좋으셔서 매일 낮잠을 주무세요. 어디서든 주무실 수 있어요. 길게 주무시지도 않고요. 자는 걸 깨우면 몸이 불편하세요.”
시녀가 나지막이 말하며 밖으로 눈을 돌렸다.
“부인, 아씨께서 깨어나시면 그때 말씀하세요. 오래 안 걸려요.”
그래? 저 말이 진짜일까? 돌아온 여종과 몸종 말로는 매일 낮잠을 자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굳어진 분위기 속에서, 마차와 땅 위로 눈이 사락사락 내렸다. 잠깐 서 있었는데도 주 부인은 발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여긴 너무 춥잖아. 아무래도 들어가서 자는 게 낫지.”
주 부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가 다 대비해 놨거든요.”
시녀가 마차 안에 있는 난로와 정교랑이 덮고 있는 커다란 두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녀의 발도 두봉 속에 있었다. 주 부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하자 시녀가 또다시 쉿 하는 동작을 했다.
“바람이 차요. 우선 휘장을 내릴게요.”
시녀가 휘장을 내렸다.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혀 밖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부인?”
우산을 들고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불렀다. 들어갈까요? 아니면 여기서 함께 있을까요? 여종이 눈빛으로 묻자 주 부인이 눈을 부라렸다. 눈치도 없는 아둔한 것. 외숙모 노릇을 이따위로 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텐데! 하지만 기다리자니……·. 주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가서 손난로와 발 쬐는 화로를 가져오너라.”
주 부인이 나지막이 명했다.
다행히 시녀의 말은 사실이어서, 여종이 손난로와 화로를 가져오기도 전에 정교랑은 잠에서 깼다. 시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 부인이 얼른 휘장을 들어 올렸다.
“교교.”
주 부인은 눈물까지 흘렸다.
“여기가, 어디죠?”
정교랑이 시녀가 건네는 뜨거운 물을 받으며 물었다.
“집에 왔어. 착하지, 마차는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마차는, 안 추워요.”
정교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난 춥다고. 주 부인은 발을 굴렀다. 얘는 정말 바보야, 뭐야. 말을 알아듣고 의사를 전달하는 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단 말이지. 지금 추운지 안 추운지 따지잔 말이 아니잖아.
“그래, 교교. 이제 집에 도착했으니 안으로 들어가자. 눈이 많이 내리잖니.”
주 부인은 어서 가마를 가져오라며 여종들을 재촉했다. 손난로와 화로를 가지러 갔던 여종이 돌아오고 가마도 대령했다. 주 부인이 애걸복걸한 끝에 정교랑이 마침내 마차에서 내렸다.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을 뿐더러 두모 속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려고 했다는 듯이, 중간에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는 듯이. 이런저런 말을 한가득 준비했던 주 부인은 도리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교교,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주 부인은 자신의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난로며 화로를 전부 가마에 실은 후,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안으로 들어갔다.
“교교, 진씨 저택의 거처와 똑같이 꾸몄으니 낯설지 않을 거야. 마음에 드니?”
주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잡고 층계를 오르며 물었다.
“여긴 내 거처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야. 무슨 일이든 편히 말해.”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종 둘이 왔다.
“부인, 노야께서 오시래요.”
주 부인은 웃으며 정교랑의 손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집에선 마음 편히 가져. 어려워하지 말고. 난 네 외숙한테 가 봐야겠다. 이따 같이 보러 올게.”
말을 마친 주 부인이 여종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정교랑과 시녀는 처음부터 줄곧 말이 없었다.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있던 여종 둘이 얼른 문을 열었다. 실내의 따뜻한 온기는 회랑에서도 느껴졌다.
“아씨, 들어가세요.”
여종들이 공손히 말했다. 정교랑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째 공자님, 이게 무슨 일이세요?”
정교랑과 시녀가 몸을 돌렸다. 시녀가 먼저 헙 하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육낭이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주육낭은 웃통을 벗은 채 싸리나무를 등에 지고 눈 속에 섰다. 주육낭이 몸을 돌리고 서자 탄탄한 등과 싸리나무가 정교랑의 눈에 들어왔다.
“육낭이 세 가지 죄를 지었기에 사죄하러 왔습니다.”
육낭은 포권의 예를 취한 후,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낭자의 병세를 살피지 않고 시녀를 빼앗은 죄가 하나요, 낭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붙잡아 둔 죄가 둘이요, 낭자가 강제로 이 사죄를 듣게 하는 죄가 셋입니다.”
눈밭에 선 소년의 헐벗은 상반신 위로 어느덧 눈송이가 쌓이고 있었다. 몸 위로 내린 눈이 녹는 속도는 점점 더뎌졌다. 주변에 있던 여종들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덜덜 떨면서 감히 말리지도 못했다.
정교랑은 부끄러운 눈빛이나 피하려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로 소년의 벌거벗은 등을 훑었다.
“나한테 이걸 보여 주려고, 어머니가, 자리를 피하도록 했군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자 주육낭이 몸을 돌아섰다. 역시 바보는 아니었군. 일부러 모친이 자리를 비우게 한 걸 알아채다니.
“난……·.”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돌아서더니 싸리나무 채 하나를 뽑아 몸을 힘껏 후려치며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을 쳐다봤다. 사실 정교랑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뜻밖에도 자주 봤던 얼굴처럼 낯이 익었다.
회랑 아래에 두봉을 걸치고 선 여인은 어느덧 두모를 벗은 후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주육낭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육낭의 벗은 가슴을 쳐다봤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주육낭의 가슴 근육은 붉게 달아올랐다. 여인이 저런 눈빛으로 사내를 훑어보는 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주육낭이었다. 보통은 옆에 있는 시녀처럼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던가. 정교랑은 주육낭의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정교랑은 두봉 속에서 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주육낭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벗으니까, 못생겼어요.”
주육낭은 자신이 이런 짓을 벌였을 때 처할 상황에 대해 갖가지로 추측했었다. 그 추측 속에서 여인은 울거나 화를 내거나 냉소를 짓거나 비웃는 말을 내뱉었다. 아니면 진 공자처럼 음흉한 마음을 숨기고 웃으면서 겉으로는 화해하는 척, 자책의 말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난 꿈쩍도 안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터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여인은 울거나 떼를 쓰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초조해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 섬섬옥수로 자신을 가리켰다. 넌, 못생겼어! 못생겼다고!
어디가 못생겼다는 거야! 네 눈이 이상한 거지! 아니지, 아니지. 멋있는지 보여 주려던 게 아니잖아!
여인이 계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옆에서 눈을 가리고 있던 시녀도 손을 벌려 손가락 틈으로 훔쳐봤다. 순간 굳은 결심이 와르르 무너진 주육낭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정교랑의 거처가 시끄러워졌다.
“이게 무슨 짓이니, 육낭. 이 추운 날씨에.”
주 부인은 눈물을 보이며 여종들에게 얼른 옷을 입히라고 명했다.
“어머니, 상관 마세요.”
주육낭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더니 싸리나무 채를 뽑아 또다시 몸을 후려쳤다. 주 부인과 아랫것들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우리 아들.”
주 부인이 달려가 주육낭을 끌어안고 빨갛게 부어오른 매 자국을 보며 통곡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주육낭은 늠름한 소년의 몸이었지만 여인 몇 명이 달려들어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결국 싸리나무를 내려놓고 두봉을 걸치게 됐다.
“육낭, 저 애는 네 누이동생이야. 형제자매 간에 말로 못 풀 일이 어디 있어.”
“네가 이런 짓을 벌이면 네 누이만 난처해져.”
“너 때문에 네 누이가 놀랐겠다.”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보이던 주 부인은 정교랑이 시종일관 조용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놀라서 눈물을 보이거나 불안에 떨었을 텐데. 주 부인은 고개를 들고 교교를 부르며 회랑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회랑 아래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주 부인이 멈칫하자 여종 하나가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열린 문 사이로 그 안에 앉은 정교랑이 보였다. 정교랑은 시녀의 말을 들으며 실내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교교.”
주 부인이 주육낭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육낭을 꿇어앉혔다. 상의를 입지 않은 터라 꿇어앉으면서 두봉이 벗겨져 벌거벗은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병풍에서 시선을 거둔 정교랑이 다시 손을 뻗어 주육낭을 가리켰다.
“벗고 있네요.”
정교랑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주 부인마저 민망해하며 서둘러 아들을 가려 주느라 말이 꼬이고 말았다.
“너도 참, 이게 무슨 짓이냐. 형장을 짊어지고 사죄하러 오다니. 네 누이가 이런 걸 알기나 하겠어?”
주 부인이 목소리를 깔고 나무라자 주육낭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지하게 사과하러 온 거니까, 바보 시늉하지 마!”
주육낭이 몸을 곧추세우며 소리쳤다.
“옷 벗는 게, 사과예요?”
정교랑은 멍한 표정으로 더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시치미 떼지 말라고!”
주육낭이 벌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서자 주 부인이 얼른 잡아 앉혔다.
“육낭,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얘가 이런 걸 알겠니. 사내 녀석이 이 꼴을 해서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니 얼마나 놀랐겠어? 얘가 너 같은 사내인 줄 알아?”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고집을 부리며 말없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얘가 너 같은 사내인 줄 알아? 정교랑 역시 주육낭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 공자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탁자에 있던 술잔이 흔들렸다. 방 안에 있는 주육낭은 여전히 상반신을 탈의한 상태였다. 몸종 하나가 등에 난 매 자국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뜻밖이네. 형장을 짊어지고 가 사죄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진 공자가 웃었다. 꿇어앉은 주육낭은 연고 때문에 화끈거려서인지 얼굴과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한 채였다.
“이 눈보라 속에서 호기롭게 죄를 청하러 갔는데, 어린 낭자한테 희롱당하는 소년 공자가 됐다는 건 더더욱 뜻밖이고.”
진 공자는 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어린 낭자 때문에 소년 공자가 창피를 당해 돌아오다니.”
주육낭 옆에 있던 몸종은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주육낭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바보 시늉을 하더라고.”
주육낭이 냉소를 지었다.
“그게 뭐 어때서? 자네가 무모하게 막무가내인 시늉을 하니까 저쪽도 바보 시늉을 하는 수밖에.”
“바보 시늉을 하든 말든, 어쨌거나 우리 집으로 발을 들였어.”
진 공자는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놓아두었던 지팡이를 들어 주육낭을 힘껏 내리쳤다. 힘을 주어 때리긴 했지만 주육낭을 다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화들짝 놀란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상자, 자네 미쳤나! 날 왜 때려!”
“야만스러워서 때린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진 공자 역시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고는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고 지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주육낭이었지만 이유도 없이 맞는 건 물론 원치 않았다.
“왔으면 술이나 마실 것이지, 왜 술주정을 하고 난리야!”
주육낭이 일어서며 몸을 피했다. 그런데도 진 공자는 지팡이를 내려놓지 않고 쫓아가 패려고 들었다.
“이 야만스러운 자 같으니라고,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내가 괴로워서 그런다! 줘 패지 않고는 분이 안 풀릴 거 같아서!”
소리치던 진 공자는 사환을 부르더니 주육낭을 쫓아가 패도록 자신을 부축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몸종과 사환은 이 소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언제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로 말소리조차 크게 내는 법이 없던 진 공자인데, 갑자기 술주정을 하며 주육낭을 때리니 말이다.
“내가 누굴 업신여겨!”
주육낭 역시 영문을 몰라 소리쳤다. 정말 술이 과해서 이러나? 아니면 집에서 열 받는 일이라도 있었나? 딴 사람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자네 말이야, 자네가 날 업신여겼다고.”
진 공자가 소리쳤다. 진 공자는 술기운이 올라와서인지 붉어진 두 눈으로 지팡이를 내던졌다. 물론 주육낭이 지팡이에 맞은 건 아니었다. 주육낭은 한 발 옆으로 비켜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는, 정 낭자를 업신여겼어. 그건 날 업신여긴 것이기도 하지.”
진 공자가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뭐라고?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그 애가 자네랑 무슨 상관인데!”
주육낭이 투덜거렸다. 혹시 저번에 농담으로 한 말에 정말 마음이 동했나? 진 공자가 고개를 들어 주육낭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그 여인? 그 여인이 곧 나고 내가 곧 그 여인이야. 동병상련의 처지지.”
진 공자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여인을 보러 가야겠어.”
몸종과 사환은 깜짝 놀랐다. 그건 좀 아닌데.
* * *
“부인, 부인. 진 공자께서 술에 취해 육공자와 싸우시고는 정 낭자 거처로 가셨어요.”
여종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지 않은 채로 앉아 있던 주 부인이 또다시 벌떡 일어섰다. 간신히 주육낭을 돌려보내고 정교랑을 어르고 달래 돌아간다는 말이 안 나오도록 했더니, 이젠 또 그 녀석이 난리네. 집안 형제자매도 아니고 진 공자는 외간 사내잖아!
주 부인은 속이 뒤집어졌다. 집으로 데려오면 뭐 하나, 한시도 마음 편할 때가 없는걸. 도리어 속만 끓이지.
“어서 가라, 어서 가서 막아.”
주 부인은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진 공자와 주육낭은 벌써 정교랑의 거처 앞에 와 있었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가 두 사내를 보고 얼른 뒤돌아 고했다.
“아씨, 벌거벗고 있던 사람이 또 왔어요.”
시녀는 소리치며 손을 들었다. 바로 눈을 가리겠다는 듯이. 시녀가 외치는 소리에 주육낭은 다리를 비틀거렸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계집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분해 씩씩거리며 돌아가려고 했지만 진 공자가 어깨를 붙잡았다.
“이번엔, 심지어, 두 명이네.”
시녀의 목소리에 이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육낭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딱딱한 목소리가 어쩐 일인지 주육낭의 귀에는 조소로 들렸다. 그 윗전에 그 아랫것이네. 그 계집의 목소리겠지. 역시 귀에 거슬려. 목소리가 시녀만도 못하잖아.
진 공자가 고개를 들자 문 안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제법 굵어진 눈송이가 흩날렸다.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품이 큰 옷을 입은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더없이 눈부셨다.
이 사람이 바로 도관에 10년 가까이 버려져 있다가, 홀로 천 리 길을 돌아온 정 낭자로구나. 이 사람이 바로 날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뚝딱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내는 정 낭자로구나. 이 사람이 바로 차와 음식에 까다롭고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정 낭자로구나.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진 공자가 손을 내밀었다. 멀리서 보니 절을 하는 듯 보였다. 중심을 놓친 진 공자는 기우뚱하며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사환과 주육낭이 얼른 붙잡았다. 이들은 비틀거리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낭자, 같이 한잔하러 왔습니다.”
진 공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듯 따로 인사를 하거나 예를 표하지 않고,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시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정교랑도 진 공자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절름발이가 옷을 벗으면, 멋있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회랑 아래에 있던 사환은 어찌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렇게 호방한 낭자라니! 주육낭이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계속 바보 시늉을 하려나 본데, 내가 진짜 확 다 벗어 버리면 어쩌려고?”
시녀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하였나니. 정교랑은 주육낭에게로 눈길을 돌려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주육낭은 숨이 턱 막혀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 핏대가 섰다.
“낭자, 이 야만스러운 놈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네요. 내가 낭자와 함께 한잔해야겠습니다.”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함께요?”
진 공자는 주육낭의 방에서 가져온 술잔을 들며 말했다.
“함께 슬픔을 나누자고요.”
함께? 슬픔을 나눈다?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낭자는 손발이 있지만 이 야만스러운 놈한테 묶여 있으니, 나처럼 손발에 불구가 있는 사람과 다름없는 처지 아닙니까. 자유를 얻을 수 없으니 마음속에 분노가 쌓일 수밖에요. 달리 도리가 없지요!”
진 공자는 껄껄 웃으며 술을 비웠다.
“함께 슬픔을 나눕시다. 이 슬픔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웃는 진 공자를 보며 옆에 있던 시녀는 짠한 마음이 들었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누가 주씨 가문으로 오고 싶다고 했나. 이 야만스러운 자의 겁박 때문에 붙잡혀 왔거늘, 이젠 또 사과를 하겠다며 윽박을 지르니 말이다. 정작 뭘 잘못했는지, 아씨가 왜 슬퍼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씨의 마음속엔 답답한 게 많을 터였다. 여인의 몸에 묶인 것도, 혈육이라는 자들의 속박도. 말할 수 없고 싸울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그래도 다행이네, 다행이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시녀가 손을 들어 눈을 가리자 눈물이 떨어졌다. 이 공자는 그래도 괜찮네.
주육낭이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려 있어 안에 있는 사람들도 흩날리는 눈송이를 내다볼 수 있었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겼어, 너무.”
진 공자는 여전히 술잔을 쥔 채 웃으며 주육낭과 하늘을 번갈아 가리켰다.
“내가 하늘과는 못 싸우지만, 자네와도 못 싸울 줄 알아?”
진 공자는 또다시 지팡이를 들어 내리쳤다.
“진상자, 적당히 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진 공자의 지팡이를 훅 빼앗았다.
“육낭, 아직도 뭘 틀렸는지 몰라? 자네는, 사람을 너무 업신여겼어.”
옆에 있던 시녀도 주육낭을 노려봤다. 맞아, 입으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잖아!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다짜고짜 네 시녀를 빼앗아 왔다. 내 잘못이야. 화가 나고 원망스럽거든 나한테 풀어. 조모님과 고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주씨 가문에 분풀이하진 말라고.”
“조모님과 고모님을 생각한다면서, 자네는 누이를 이렇게 대해?”
진 공자는 이미 비어 있는 술잔을 쥐며 말했다.
“술을 따라라, 술을. 낭자와 함께 슬픔을 달래야겠다.”
“그래, 우리가 사람을 업신여겼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어떻게 대해 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
“낭자가 자네를 용서하지 않고 어떻게 사죄하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으니 낭자의 잘못이라는 거야? 자네는 억울하고?”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좋은 말도 나쁜 말도 다 자네 차지로군. 육낭, 사람을 이렇게 업신여기나.”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요, 내 말이. 아씨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눈앞에 있는 이 공자가 할 말을 대신 해주네. 아씨의 설움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니.
“난 그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야. 분풀이를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해.”
주육낭은 몸을 바로 앉으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맞은편의 정교랑은 말 한마디 없이 줄곧 조용히 앉아 있었다. 주육낭이 쳐다보자 침묵을 지키던 정교랑은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뭐야, 아직도 안 벗었네요?”
상념에 젖어 있던 시녀는 그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교랑, 아직도 안 끝났냐고!”
주육낭이 한쪽 무릎만 꿇은 채 일어나며 소리쳤다. 진 공자도 따라 웃었다.
“안 끝났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향해 술잔을 내던졌다.
“냉큼 꺼져. 여기서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진상자, 자네까지 왜 이래!”
주육낭이 씩씩거리며 술잔을 휙 낚아챘다.
“꺼지라고! 자네가 이런 작자였다니, 내가 눈이 삐었지. 냉큼 안 나가면 다시는 아는 척 안 해.”
진 공자가 문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노려보다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마당의 문밖에는 어느새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우산도 안 들고 선 탓에 거의 눈사람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육낭, 진 공자 혼자 안에 있는 거야? 아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주 부인이 다급하게 아들을 붙잡았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이참에 저 바보가 달라붙었으면 좋겠네!”
주육낭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 부인은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큰 소리를 낼 순 없었다.
“쟤도 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달라붙긴. 진씨 가문이 그리 만만한가?”
달라붙을 수만 있다면, 우리 집안 딸들도 진작 수를 썼겠지. 그런데 진 공자가 뭐 하는 거지? 정말 취했나?
방 안에 남은 진 공자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 주육낭을 보며 기쁜 기색이었다.
“저런 자는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합니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겨요.”
진 공자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낭자, 마음 풀어요.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낭자가 아니라 저자입니다.”
정교랑은 그러냐는 눈빛으로 진 공자를 쳐다봤다.
“그야 그렇죠.”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갔는데, 그쪽은 아직도 옷을 안 벗고 있네요?”
무서워라. 진 공자의 사환은 머리를 목 속으로 집어넣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정말 바보잖아!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진 공자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가 보고 싶다면 벗어도 상관없습니다.”
진 공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몸이 온전치 않아 볼품없지만요.”
* * *
밤의 어둠이 내릴 무렵, 눈이 그쳤다. 걸어 놓은 홍등이 비추는 마당은 반짝반짝 더없이 아름다웠다. 여종들이 서둘러 문을 열자 실내의 따뜻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주 부인이 지친 기색으로 들어오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소? 아직도 난동을 부리는 거요?”
주 노야가 서둘러 물었다. 여종은 주 부인의 두봉을 벗겨 준 후, 얼른 자리에서 물러나 문을 닫고 나갔다.
“아니요.”
주 부인은 자리에 앉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정교랑과 시녀는 이 집에 발을 들인 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주 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피로를 느꼈다.
“작은 부엌을 마련해 줬더니 둘이서 밥을 해 먹고는 자러 갔어요.”
주 노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에는 진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진 노태야의 진맥을 위해 내일 정교랑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 집에서 나온 게 오늘이거늘 뭐하러 내일 또 데려가겠다는 건지.
떠날 건지 남을 건지 정교랑의 의사를 물으러 온 게 분명했다. 정교랑이 진 노태야의 진료를 핑계로 떠나겠다고 하면, 주씨 가문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주 노야는 울화가 치밀었다. 아들이 괜한 소동을 벌여 정교랑과 진씨 가문의 심기까지 건드리게 되지 않았는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와중에, 뜻밖에도 정교랑이 진씨 가문 사람에게 왕진은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가야 할 때가 되면 자신이 직접 가 보겠다면서.
간신히 체면은 지키게 됐군. 주 노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게 다 육낭 덕이에요.”
주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 몸을 어찌나 세게 후려치는지 못 보셨죠? 세상에, 이 엄동설한에. 그깟 몸종이 무슨 대수라고 그 계집이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지 모르겠어요. 혹여 육낭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잘못될 게 뭐 있소, 그깟 상처 가지고.”
주 노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음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차를 마셨다.
“집안만 평온하면 됐소, 그거면 돼.”
집안의 평온이라. 주 부인은 불과 하루 만에 정신없이 벌어진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앞으론 집안이 평온하겠지?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불안은 뭘까?
같은 시각, 침상에 누워 있던 정교랑과 시녀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아씨, 금가아를 깜빡했어요!”
시녀가 소리쳤다. 이어 방 안과 온 마당에 불이 환하게 켜지더니 곧 주씨 저택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뭘 하려고?”
막 잠자리에 들었던 주 노야 내외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이 밤중에 어딜 나간단 거야?”
“사환 하나를 잃어버렸다면서 그 시녀가 찾으러 가겠대요.”
여종이 말했다.
“무슨 사환을 말이냐. 사환을 잃어버리다니?”
주 부인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떠나려는 핑계일 테지. 어디서 농간을 부려! 내 어쩐지 쉬이 넘어간다 했네. 아주 사람을 들들 볶는군. 절대 내보내지 마라!”
주 노야의 호통에 여종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주육낭이 두봉을 걸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염려 마십시오. 어딜 가든 제가 같이 따라가면 그만입니다.”
“육낭, 몸도 성치 않은데 이 겨울밤에 어딜 간다는 게야.”
주 부인이 걱정했지만 주육낭은 손을 내저은 후 서둘러 나갔다.
회랑 아래에 그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시녀만 서 있을 뿐이었다.
“공자님께 폐를 끼치다니요. 마차만 준비해 주시면, 제가 진씨 가문에 가서 알아볼게요.”
시녀만 간다? 그 여인은 안 가고?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안쪽을 쳐다봤지만, 불 꺼진 방은 어두웠다.
“아씨는 주무세요.”
시녀가 말했다. 정말 사환을 찾으려던 건가? 바보 시늉에 도가 튼 여인인데, 그 말을 어찌 믿어!
“서둘러 사람을 찾는다지 않았느냐? 속히 가자.”
주육낭은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낮에 눈이 내렸는데도 겨울밤의 경성은 여느 때처럼 활기찼고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주육낭은 마차를 직접 몰며 진씨 저택으로 내달렸다. 당초 금가아는 옮겨 가려던 저택으로 먼저 가 있었다. 그런데 정교랑과 시녀가 갑작스럽게 주씨 저택으로 끌려가면서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모두 경황이 없어 금가아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진씨 저택에서 그 아이를 도로 데려왔을 수도 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아이에게 연통을 해 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나왔다.
“주씨 가문에서 데려간 줄 알았죠. 저희도 안 가 봤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본 끝에 집사가 허벅지를 탁 치며 이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니, 사람을 보낸 것도 댁들이고 그 집을 빌려준 것도 댁들인데, 우리가 무슨 수로 데리러 가?”
부아가 치민 주육낭이 집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주육낭, 네가 파렴치한 짓을 안 벌였다면 이런 일이 생겼겠냐!”
진씨 가문의 소년 하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해댔다.
“세밑이라 경성에 유괴범도 많은데, 그 사환은 이제 겨우 열두 살이고 경성은 처음이야.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정 낭자한테 뭐라 할지 어디 두고 봐야겠다!”
옆에 있던 소년들도 거들고 나섰다. 정 낭자는 원치 않게 주씨 가문으로 끌려갔지만, 어쨌거나 혈육인지라 달리 하소연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 딱한 사정에 모두 울분을 느끼던 차였다. 주육낭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차갑게 웃으며,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이겠다는 눈빛으로 마당을 훑었다.
“우선 사람부터 찾아요. 못 찾으면 그때 따지고요!”
시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마차가 눈길을 내달렸다. 어슴푸레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시끄러운 발소리가 고요한 주씨 저택의 아침을 깨웠다. 시녀는 새빨갛게 언 얼굴에 붉어진 눈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교랑은 의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앉아 책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평상시처럼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진 않았다.
“아씨.”
시녀가 울먹였다.
“말부터 하고 울어.”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애써 눈물을 삼켰다.
“여러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금가아가 문 앞에 서 있다가 골목으로 갔대요. 그 길을 따라가며 수소문했더니 코를 훌쩍이며 진씨 저택이 어디냐고 묻는 걸 본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진씨를 말하는지 모르니 못 찾았겠죠.”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거기까지 말한 후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진씨 저택도 못 찾고, 주씨 저택도 어딘지 모르고, 원래 있던 집도 잃어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단 거네.”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너무 염려 마세요. 관아에 고해서 찾고 있어요. 성문도 단단히 지키고 있으니 성을 나가진 못했을 거예요.”
정교랑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씨, 아씨도 나가시려고요?”
시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래, 내가 찾으러 가야겠다. 내가 잃어버렸으니, 내가 되찾아와야지.”
정교랑이 출타한다는 말에 주 노야 내외는 또 초조해졌다.
“역시 도망치려던 핑계였군. 그깟 사환 하나 잃어버린 게 별거냐. 찾으면 찾는 거고 못 찾으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마당 문으로 온 정교랑은 길을 막아선 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들이, 날 막는 건가?”
집사는 아씨의 무뚝뚝한 표정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주 부인과 주 노야가 달려왔다. 주 부인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의 손을 붙잡았다.
“교교,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날이 춥잖니. 저들이 찾게 두고 넌 그냥 집에 있어.”
“안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얘는 말하는 게 어쩜 이렇게 단호하지?
“이게 웬 소란이냐. 가서 사환 몇 놈을 사다 주어라.”
주 노야가 웃어른의 위엄을 갖추며 집사에게 명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 노야를 쳐다봤다. 상경한 이후 외숙을 이렇게 똑바로 직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주 노야 역시 조카의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두 눈은 어릴 때랑 똑같군. 소름 끼칠 정도로 추해. 특히 저 흰자위를 주체하지 못하고 번득일 땐.
“날, 못 가게 막는 건가요?”
정교랑이 주 노야를 보며 묻자 주 노야는 멈칫했다. 등에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정말 정이 안 가는 아이야. 주 노야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주육낭이 들어왔다.
“못 가게 하는 사람 없다.”
주육낭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밤을 새운 피로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마차에 올라라. 내가 데려다주겠다.”
“육낭!”
주 노야와 주 부인이 동시에 소리쳤다. 하나는 부아가 치미는 목소리였고, 하나는 걱정이 되는 목소리였다.
“일개 사환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니. 관아에 고해 온 성에서 찾고 있으니 그거면 됐지, 왜 너희까지 직접 가겠다는 게야?”
주 부인은 아들을 잡아끌고 정교랑 앞으로 와서는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붙잡았다.
“교교, 넌 몸도 안 좋잖아. 육낭, 밤새 돌아다녔으면서 어딜 또 나가겠다는 거야.”
주육낭이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도 주육낭을 쳐다봤다. 둘 다 같은 색 두봉 차림에 털이 달린 두모를 쓰고 있어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괜찮습니다.”
주육낭은 주 부인에게서 손을 빼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멈칫했던 주 부인이 소리쳐 부르는 사이, 정교랑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뺀 다음 따라 나갔다.
“가게 두시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주 노야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육낭이 감시하고 있으니 도망은 못 치겠지.
옥대교 근처에서 여러 해를 산 유사(劉四)였지만, 이곳이 이렇게 시끄러운 건 처음이었다.
“대체 몇 번이나 묻는 겁니까. 그 애는 동쪽으로 갔다니까요. 처음 보는 얼굴이라 눈여겨봤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기억도 못 했어요.”
유사는 똑같은 말을 또 반복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질문만 벌써 네 번째였다. 그 애가 대체 누구기에? 뉘 집에서 잃어버린 공자님이신가? 관아도 모자라 병마사까지 나서서 사람을 찾다니? 그래 보이진 않던데. 겁먹은 얼굴에 처음 상경한 듯 촌티가 좔좔 흐르는 행색이었어. 기껏해야 말이나 먹이는 사환으로 보였는데 말이지.
“이쪽 길을 따라갔어요? 아니면 저쪽?”
정교랑이 물었다. 유사는 아씨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두모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살짝 보이는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목소리는 좀 귀에 거슬리는데,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네.
“묻지 않느냐, 어서 대답해라.”
주육낭이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겁먹은 유사가 늠름한 소년을 쳐다봤다. 이 소년은 누군지 알겠다. 어젯밤에 왔었으니까.
“이쪽이요. 아니, 저쪽이었나……·.”
유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쪽 같습니다.”
유사가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또 아닌 것 같다.
“저쪽이요, 저쪽입니다. 저쪽 길을 따라갔어요.”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주육낭이 따라갔다.
“마차에 올라라.”
정교랑이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주육낭이 정교랑의 팔을 홱 잡아챘다.
“마차를 타라고.”
주육낭이 답답한 듯 소리치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말없이 쳐다보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대치하는 사이,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지고, 숙취에 시달리는 얼굴의 진 공자가 몸을 내밀었다.
“내 탓입니다, 내 탓이에요.”
진 공자는 인사도 없이 대뜸 공수의 예를 표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에 술타령을 하는 바람에 이 꼴이 됐군요.”
“이게 자네랑 무슨 상관이라고!”
주육낭이 손을 풀고 진 공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사이, 정교랑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새벽빛 속으로 걸어가는 작은 형체를 바라봤다.
“낭자, 뜻밖의 상황은 늘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진 공자는 다시 한번 예를 표한 후, 고개를 들어 걱정되는 눈길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자책이라는 말에 정교랑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시녀는 다시 한번 코끝이 찡해졌다.
금가아를 잃어버렸다. 주육낭이 갑자기 마차를 납치하며 소동을 벌인 걸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금가아를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자책이 들 수밖에. 아씨의 자책은 더 클 것이다.
“아씨, 다 소인 때문이에요. 소인이 금가아를 깜빡했어요. 소인의 잘못이에요.”
시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며 정교랑의 소매를 붙잡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 공자를 쳐다봤다.
“이 세상에, 뜻밖 같은 건 없어요. 잘못한 건, 잘못한 거죠.”
앞으로 걸어가는 정교랑과 시녀를 보며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진 공자가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도 진 공자를 쳐다봤다.
“저 애가 그리 무서워? 이렇게 굽신거리긴.”
진 공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슬픔을 함께 나누는 거야. 육낭, 자네는,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