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부끄럽소이다.”
사내는 공손하고 겸손하여 더욱 돋보였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단랑은 정교랑과 시녀가 저쪽 벽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얼른 뒤따라갔다. 가까이 가 보니 벽 여기저기에 시가 몇 수 쓰여 있었다.
“언니, 언니도 시를 지을 줄 알아요?”
단랑이 정교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물었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또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이 느껴지는 걸 보면 부잣집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부잣집의 교양 있는 여인들은 공부도 하고 글도 익혔으니 시에 정통한 이도 드물지 않았다. 안주 이씨 가문의 이랑도 글재주로 이름을 떨치지 않았던가. 시를 아는 여인을 보자 사내들은 흥미로운 눈치였다.
“몰라. 읽어 봐.”
정교랑이 옆에 있는 시녀를 보며 말했다.
시녀가 벽에 있는 시들을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나지막이 읊기 시작했다. 글도 안 읽혔나 보군, 안타깝네. 사내들은 시선을 거두고 관심을 돌렸다.
정교랑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아씨, 어떠세요?”
시녀가 물었다.
“난 시를 쓸 줄 몰라서, 모르겠어.”
“난 할 줄 알아요. 할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단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는 새하얀 공간이 많이 남은 벽을 보며 헤헤 웃었다.
지난해 차정사는 매화가 만개했을 무렵이 가장 떠들썩했다. 문인들이 가장 많이 다녀간 때기도 했다. 새롭게 칠한 이 벽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해가 지나고 와 보면 이 벽은 시로 빼곡할 것이다.
“잘됐네. 난 글씨를 쓸 줄 아니까 넌 시를 지어. 난 글씨를 쓸게, 어때?”
정교랑은 새하얀 벽을 보자 마음이 울렁거렸다. 손은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글씨 연습을 한 지는 꽤 됐는데, 붓으로 써도 가능할지 모르겠네?
“좋아요, 좋아.”
단랑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참 꾸밈이 없다니까. 뭐든 일단 내뱉고 말지, 겸손하거나 뺄 줄 몰라. 개구쟁이 꼬마가 재잘대는 모습을 본 사내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그럼 우린 잠시 매화나 보러 가세나.”
시를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던 사내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천천히 먹을 갈고 난 시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진지하게 생각에 빠져 있는 단랑을 쳐다봤다.
진씨 가문은 시와 예에 밝은 가문이었기에 어린아이에게도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다. 그래도 단랑 같은 여자아이는 어쨌거나 남자아이보다는 요구가 덜한 편이었다. 이제 막 삼경(三經)을 익히기 시작했을 어린아이에게 시문을 짓는 일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라버니와 스승, 부친과 조부가 시를 논하는 걸 보고 들은 적은 있겠지.
정교랑은 담담한 표정으로 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린 매화를 감상하러 왔어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될 거예요.”
시녀가 단랑을 보며 나지막이 일깨워 주자 단랑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 생각났어.”
단랑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매화 감상, 산사. 산사에 매화를 보러 왔네.”
시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다음은요?”
“매화, 매화라……·.”
단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매화를 굳이 또 쓸 필요는 없어요.”
시녀의 말에 단랑은 입을 삐죽거렸다.
“못하겠어.”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단랑을 쳐다봤다.
“괜찮아. 한 구절만 해도 돼.”
정교랑이 손을 내밀자 시녀가 얼른 붓을 건넸다.
“방금 말한 그 구절을 쓰겠다고요?”
단랑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내가 말한 것도 시로 쓸 수 있어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쥐었다. 처음에는 조금 떨렸다. 분명 힘이 들어갔는데 왜 떨리는 거야, 왜. 코가 시큰거렸다. 글씨를 쓰자, 글씨를 쓰는 것뿐이잖아.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새하얀 벽을 바라봤다.
“단랑, 네가 쓴 시를, 내가 몇 글자, 바꿔도 될까?”
정교랑의 물음에 단랑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좋아.”
시녀는 문득 떨리는 마음으로 벽 앞에 붓을 들고 선 정교랑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떨리는 건지 시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이 떨려 먹물이 조금 흘러내렸다. 시녀는 속으로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벽에 글씨를 쓰는 건 본디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아씨는 붓으로 글씨를 써 본 일이 없지 않은가.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뭘 이렇게까지 하실까, 안 쓰면 그만이지. 손발을 움직일 수 있고 병을 치료하여 몸이 나았으면 됐지, 글씨 같은 건 쓸 줄 알든 말든 뭐가 중요하냔 말이다.
“아둔하긴, 글씨 하나를 제대로 못 쓰다니. 내 딸이라고 하지도 마라!”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은 정교랑은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지, 누굴까. 정교랑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손목을 꺾었다. 막힘없이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옆에 있던 시녀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글씨를 보며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질식할 것 같은 순간, 그 여인의 손이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녀는 숨을 내쉬고 손을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평생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건만 실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산사는……·.”
시녀는 천천히 따라 읽었다.
“매화가……·.”
단랑도 읽었다.
“피기를……·.”
시를 읽던 시녀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녀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단랑이 이어 읽었다.
“기다릴……·.”
단랑이 고개를 쳐들고 읽었다.
“뿐이네.”
마지막 어절을 읽은 정교랑은 붓을 거둔 후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섰다. 새하얀 벽에 쓰인 커다란 글자가 눈에 확 띄었다. 정교랑도 보고, 시녀도 보고, 단랑도 봤다. 한 사람은 속이 탁 트였고, 한 사람은 놀랐고, 한 사람은 그저 조용했다.
아버지.
당신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는 아직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난 기다릴 수 있어요. 기다려요. 내가 모든 걸 기억해 낼 때까지. 그때까진 나도 즐겁게 살 거예요.
“가자, 매화 보러 가야지.”
정교랑은 옷소매를 흔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뒷문으로 나갔다. 이미 시에 흥미를 잃은 단랑은 정교랑의 말에 신이 나서 따라갔다. 멍하니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린 시녀도 편전에 자신만 덩그러니 남은 사실을 깨닫고는 얼른 뒤따라갔다. 정교랑의 일행이 뒷문으로 나가는 동안 우르르 들어오는 무리도 있었다. 이들은 여러 지방의 말씨로 웃고 떠들었다.
“장강주 선생께서 우리 같은 응시생을 위해 새해에 학당을 열고 경문을 가르치실 거라더군.”
“수학하려는 이가 워낙 많아서 청강할 기회가 있으려나 모르겠소.”
“지금은 아직 일러요. 정월에 와야 매화가 만개하지. 이 벽도 아직 흰 부분이 많이 남아 있잖소.”
“문명 형, 그럼 어서 한 수 지어 주십시오. 이어서 내가 한 수 지을 터이니. 천고에 남을 작품을 남겨 보십시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흰 벽 앞으로 몰려들던 사람들은 순간 멈칫했다.
“누구지? 이럴 수가!”
시라기보다는 문구에 가까웠다. 딱 한 구절만 써 놓다니, 이게 뭐지?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山寺待梅開).”
누군가가 큰 소리로 읽었다.
“첫 구절이라고 볼 순 없고, 좋게 봐야 마지막 구절인데. 이 구절만 덩그러니 써 놓다니, 이게 대체 뭐야!”
문밖에서 또 누군가가 들어왔다. 소란을 듣고 다가와 보더니 따라서 발을 굴렀다.
“누가 이런 장난을. 멀쩡한 벽을 망쳐 놓다니.”
“지키는 승려가 없으니 아무나 들어와 낙서하지.”
고개를 내젓고 탄식하는가 하면 쯧쯧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 속에서 누군가가 놀라는 소리를 내며 벽에 쓰인 글씨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이 서체는, 대체 뭐지? 처음 보는 서체인데?”
사내는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글씨를 따라 써 보았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글씨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벽에 큼지막하게 쓰인 글자라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것 좀 보시오. 글자 하나하나가 다 달라!”
“오묘하군, 오묘해. 과연 거침이 없고 붓놀림이 자유자재로군.”
“안타깝네. 첫 글자의 첫 획에 망설임이 있어서 글자 전체에 힘이 빠졌어.”
“네 살 때부터 여러 서첩을 두루 익혔건만, 이 다섯 종의 서체는 처음 보는구려.”
자그마한 편전에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끄러운 소란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법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까지 서로 물어보기에 바빴다.
“누가 묘한 시를 썼다고?”
“아직 매화가 절정에 이르진 않았으니, 훌륭하긴 해도 잠시일 뿐이지. 얼마 안 가 더 좋은 게 나올 거요.”
누군가는 놀라며 감탄했고, 누군가는 태연했고, 누군가는 하찮게 여겼다. 멀리서 매화를 보러 온 사람들도 이곳의 소란을 들었다.
“경림 형, 우리가 방금 들어갔을 때 시는 딱 네 수뿐이었습니다. 다들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데, 혹시 경림 형의 시가 아닐지요?”
경림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는 흥분을 감추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부끄러운 재주라오.”
“어쩐지 경림 형의 시는 다르더라니까요.”
다른 이들도 거들며 치켜세웠다. 시 한 수로 이름을 날린 이는 적지 않았고, 거물로 인정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사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다니 호흡이 가빠질 수밖에. 곁에 있는 동료들은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덩달아 흥분되기도 했다. 일거에 명성을 얻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나, 그런 유명 인사의 벗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서 가서 물어봅시다, 어서요.”
사내들이 서둘러 도착했을 무렵, 편전은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말씀 좀 물읍시다.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누군가가 심호흡을 하고는 시치미를 떼며 궁금한 듯 물었다.
“누가 훌륭한 시를 썼어요.”
앞쪽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사내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경림이라는 자는 얼굴까지 살짝 붉어진 채 내려뜨린 손을 꽉 쥐었다.
“무슨 시입니까? 누가 지었죠?”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앞에 선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흘겼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나도 못 봤단 말이오.”
보지도 못했으면서 덩달아 흥분할 건 뭐람. 사내들은 속으로 깔보며 투덜거렸다. 앞뒤로 몇 번 질문이 오간 후 마침내 답을 얻었다.
“이름을 안 남겼어요.”
이름을 안 남겼다고? 시를 지어 놓고 이름을 안 남기다니. 장님 보라고 추파를 던지는 꼴이 아닌가. 사내들은 멈칫하여 경림을 쳐다봤다.
“난, 난 이름을 남긴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림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너무 작아서 못 봤을 수도 있지.”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추측을 내놓았다. 묻고 또 물어도 앞쪽에선 이렇다 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사내들은 눈을 흘겨 가며 가까스로 문 앞까지 왔지만 더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건 우리 학형이 쓴 시라고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앞에서 길을 막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감격과 존경의 눈빛이 아니라 냉대의 눈길이었다.
“허튼수작 작작 부려요.”
사람들이 일제히 말했다.
“우리도 아직 못 봤단 말입니다. 못 비켜요.”
“정말 우리 학형이 쓴 시라고요!”
사내들은 격분하여 다시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여기서 보는 건 시가 아니라 글씨란 말이오.”
앞에 있던 사람이 비웃었다.
“당신네들이 쓴 시는 저분의 글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시가 아니야? 글씨라고? 사내들은 까치발을 들며 앞에 있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벽을 쳐다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山寺待梅開)
짧디짧은 구절이건만 호방한 기개와 처연한 분위기와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함이 깃든 글씨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입말로 간단히 쓰인 말인데도 필치에 거침이 없었다. 용이 꿈틀대는 듯 생기가 넘치고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라네. 매화가, 피기를 기다리네!
이쪽의 편전은 떠들썩한데, 저쪽의 정교랑과 단랑은 벌써 진씨 가문 낭자들과 함께 산문을 나서고 있었다.
시라고 할 수 없는 시를 남긴 후, 시를 지은 진단랑은 이미 뒤로 빠져 있었고 글씨를 쓴 정교랑은 기분이 탁 트여 어느덧 근심이 사라져 있었다. 저쪽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인 두 사람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진 공자도 주육낭과 함께 갔던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진씨 저택은 경성의 정중앙 지대에 있었다. 조모인 방녕공주는 세상을 뜬 후였지만 진씨 가문은 여전히 황실에서 하사한 공주부(公主府)를 소유하고 있었다. 정자와 누대, 누각이며 화원과 작은 길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가 정교하고 아름다워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저택이었다.
하지만 공주부에 거하는 이는 진 공자의 일가뿐이었다. 진씨 가문의 조상은 본디 천주(川州)에 살았다. 진 공자의 부친이 경성에서 임직하지 않았다면 진 공자의 일가도 이곳으로 옮겨오진 않았을 터였다.
돌아온 진 공자는 여느 때처럼 부모님부터 찾아뵙고 문후를 올리고자 했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세밑이라 바쁘세요. 열셋째 공자님, 진지는 드셨는지요?”
여종의 물음에 진 공자는 손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키고는 웃으며 말했다. 사환 하나가 꿩 두 마리를 들고 있었다.
“내가 잡은 거야. 이따 삶아 먹으려고.”
십삼공자는 불구의 몸이었지만 유순한 성격이었다.
“조심하세요, 손 다치지 마시고요.”
진 공자는 웃으며 가마 의자에 탔다. 사환들이 가마 의자를 들어 진 공자의 마당으로 옮겨 갔다.
마당에 있던 여종과 몸종은 이미 전갈을 듣고 칼이며 화로, 솥 등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진 공자는 간단하게 몸을 씻은 후 마당으로 나와 직접 꿩을 잡고 손질했다. 입구에 있던 여종이 진 공자의 마당으로 들어서던 두 여인을 막으며 나지막이 고했다.
“여섯째 아씨, 일곱째 아씨. 열셋째 공자님께서는 꿩을 잡아 음식을 준비하고 계세요.”
두 여인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십삼낭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뭐든 자기가 직접 해 먹으려 들다니, 불결하게.”
“그러게 말이야.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쓰는 것도 모두 제 손으로 하겠다지 뭐야. 집에 시중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두 여인은 안을 들여다보며 피비린내라도 나는 듯 코를 틀어막았다.
“그럼 됐어, 다음에 다시 오자.”
두 여인은 몸종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떴다. 여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마당을 힐끔 쳐다봤다.
“물부터 끓여야지. 뜨거워야 털이 잘 빠져.”
사내의 낭랑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그러게. 하필 저런 기괴한 습성을 가지셨담.”
여종이 나지막이 한탄했다.
“하긴.”
다른 여종이 맞장구를 치며 눈썹을 꿈틀하고는 손으로 다리를 탁탁 쳤다.
“이런 사람들은, 다 조금씩 기괴한 면이 있어.”
먼저 말했던 여종이 기겁하며 손을 찰싹 때리고는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부인의 귀에 들어갔다간 경을 쳐.”
여종은 쉿 하는 동작을 하며 목까지 수그렸지만,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마당 안은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진 공자가 버섯을 가져와 질솥 안에 넣었다.
“다 됐다. 반 시진 후에 꺼내 와라.”
진 공자가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렸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지팡이를 잡으려 손을 뻗는 진 공자를 쳐다봤다. 일할 때 걸리적거려 한쪽으로 치워 뒀던 터라 손이 닿지 않았다. 몸종이 얼른 지팡이를 가져와 건넸다.
미소를 짓고 있던 진 공자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지팡이를 받은 후 몸종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갈아입을 깨끗한 옷을 든 몸종 네 명과 진 공자의 옷을 벗겨 주는 몸종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벗은 진 공자는 맨 마지막 한 겹만 남겨 놓고는 부축을 받으며 씻으러 들어갔다.
몸을 씻고 나자 진 공자가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몸종 두 명이 뒤쪽에 꿇어앉아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공자님, 탕을 다 끓였습니다.”
문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 공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몸종들이 진 공자의 긴 머리를 잡아당기고는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다. 물러가라.”
진 공자는 웃으며 손을 내젓고는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다.
“어서 가져오너라, 어서.”
뜨거운 버섯 꿩탕이 놓이자 맛있는 냄새가 확 퍼졌다.
“맛있구나, 맛있어.”
진 공자는 웃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수저를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두 몸종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게 맛있다고? 고기 구경 못 하는 사람들이야 맛있게 먹겠지만 명색이 진씨 가문에서 이깟 꿩탕이 무슨 대수겠는가.
몸종들은 흰옷을 입은 소년 공자가 바닥까지 길게 드리운 장발을 내려뜨리고 소매를 걷으며 탕을 먹는 모습을 쳐다봤다. 모락모락 나는 김에 백옥 같은 피부가 가려져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만든 거다. 내가 만들었어, 내가. 내가 직접, 만들었지.”
진 공자는 고개를 숙이고는 고기를 맛있게 뜯어 먹었다.
멀리 나가 즐기고 왔으니 오늘 밤은 단잠을 자겠지.
돌아온 정교랑은 언제나처럼 진 노태야에게 침을 놓으러 왔다. 나들이는 어땠냐는 질문이 빠질 순 없었다.
“괜찮았어요.”
정교랑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차정사는 과연 영험한 곳인가 보오.”
진 노태야가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낭자가 표정이 한결 좋아졌으니 말이오.”
시녀가 정교랑을 눈여겨 쳐다봤지만 멍한 표정은 여전했다. 보통 사람의 눈엔 딱히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전에는 근심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구려.”
근심? 시녀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다시 쳐다봤다. 저 표정에서 근심을 읽어낸다?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만 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금침을 집어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주 부인은 피곤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또 핑계를 대고 안 만나 줍니까?”
따라 들어온 주육낭이 물었다. 주 부인은 여종이 건넨 차를 받으며 대답했다.
“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지. 어쨌든 난 할 만큼 했다. 나머진 그 애 일이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소자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주 부인이 얼른 붙잡으며 만류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일개 계집이 아니냐. 그 계집이 뻔뻔하게 나오며 모르는 척해 놓고, 우리 잘못으로 떠넘기는 게 더 경우 없는 일이지.”
주 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부모님의 거처에서 나와 연무장에서 무예 수련을 하고, 흠뻑 젖은 모습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 됐다. 막 밥그릇을 드는데 진 공자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들어왔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언제나 느릿느릿 걷는 진 공자였기에 이리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주육낭이 몸을 곧추세워 앉았다.
“육낭, 자네가 좋은 구경을 망쳤어.”
진 공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주육낭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제 차정사에서 좋은 시가 나왔다네.”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입을 삐죽였다. 하여간 이렇게 한가한 이들이나 하루 종일 시 타령이지.
“무슨 좋은 시를?”
주육낭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진 공자가 시를 읊었다. 주육낭은 탕을 들고 진 공자가 이어 읊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다음은?”
주육낭이 탕을 마시며 물었다.
“없어.”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마시던 탕을 풉 하며 내뿜었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 공자는 그 바람에 옷이 다 젖게 됐다. 그런데도 진 공자는 개의치 않으며 미소까지 머금은 채 시 구절을 다시 음미했다.
“이게 좋은 시라고?”
눈을 치켜뜬 주육낭은 닦아 주려는 몸종을 뿌리치고 손수건을 받아 수염을 직접 닦았다.
“날 놀리려고 이러나? 내가 무인이긴 하지만, 우리 주씨 가문도 엄연히 글 선생을 두고 있는 집안이라고! 그런 시는 나도 짓겠네, 어디 한번 들어봐.”
주육낭은 손수건을 내던진 후 시를 읊었다.
“뜨거운 차는 마시기를 기다릴 뿐이네.”
주육낭이 잠시 후 덧붙였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뜨거운 차는 마시기를 기다릴 뿐이네. 어때? 잘 맞잖아.”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둔하긴.”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사환이 조심스레 내미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좋은 시군.”
주육낭은 종이에 쓰인 시를 읊으며 붓을 들고는 자기가 지은 구절을 덧붙이고자 했다. 금상첨화가 아닌가. 진 공자가 코웃음을 치며 탁자를 밀었다.
“글씨를 보라고.”
글씨가 거기서 거기지, 뭐 볼 게 있다고.
“내가 방금 모사해 온 거야. 형태는 비슷해도 거기서 직접 보는 오묘한 맛은 없어.”
진 공자도 글씨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보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아 멍하니 모사만 하는 이도 있다니까. 차정사에선 행여 글씨를 망칠까 봐 푸른 천까지 걸쳐 놨지. 괜히 망신당할까 봐 이젠 벽에 시를 남기려는 자도 없고.”
거기까지 말한 진 공자는 웃으며 감탄했다.
“올해 시회(詩會)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이 글씨가 나오면서 이미 끝나 버렸어.”
그렇게 좋은가? 주육낭이 탁자에 놓인 글씨를 쳐다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뜯어보니 나머지 글자는 평범한데 첫 글자만큼은 마음을 들끓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주육낭의 시선이 첫 글자에 멈췄다. 용맹하게 돌진하는 군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부친의 세대는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주육낭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태평성대인지라 용맹무쌍한 군대에 관해선 어르신들의 묘사나 연무장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 실제 느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꿈에도 나올 정도로 애타게 바라는 일이어서, 꿈에서 깨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그런 감정을, 글씨에서 느끼다니. 주육낭은 손을 뻗어 글씨를 가볍게 쓰다듬어 보았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주육낭의 동작을 보며 진 공자는 웃음을 지었다.
“난 이 기다린다는 글자가 더 좋아.”
진 공자도 손을 뻗어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이 글씨는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달라. 평범한 이 구절을 이토록 오묘한 맛이 나도록 쓰다니, 대체 누구의 재주인지.”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이름 남기는 거 아니었나?”
주육낭은 놀란 눈치였다. 진 공자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도 없고 누가 썼는지 본 사람도 없어. 벼슬에서 물러난 노옹이라는 말도 있고, 큰 뜻을 품은 서생이라는 말도 있지. 공을 세울 때만을 기다리는 무장이란 말도 있고.”
진 공자가 웃으며 종이 위의 글씨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내 눈에 필력은 좀 부족해 보여. 힘이 모자란다고 해야 할까. 여인의 기운이 느껴져.”
주육낭이 다시 쳐다봤다.
“추측할 필요 없어. 이런 글은 이름을 얻기 위해 쓰는 거잖나. 이미 우쭐해 있을 테니 자진해서 모습을 드러내겠지.”
진 공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글씨를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참, 그러고 보니 어느덧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 자네 사촌 누이는 돌아온다고 하던가?”
진 공자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돌아오든 말든 알 게 뭐야, 괜히 기분만 잡치게!”
주육낭이 급격히 정색하며 언짢아하자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