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4권
-나들이-
낯선 외지에 나와 있다 보니 업신여길까 봐 걱정된 건지, 정씨 집안에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흥미가 떨어진 건지 주씨 집안에서 온 사람들은 혼수를 놓고 다투는 일을 그만뒀다. 그러면서도 경성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아씨의 혼수를 잘 간수하는지 직접 보기 위함이라고 했다. 정씨 가문으로서는 기쁠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이노야의 벼슬길에 먹구름이 드리웠는데, 조금이나마 근심이 걷혔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부인한테 맡겨라. 이제 곧 세밑이구나. 노부인께서 이노야의 방한복을 걱정하셨어. 장부 대조가 끝났으니 사람을 골라 노부인의 시중을 드는 매향과 함께 다녀오도록 해라.”
노부인의 시중을 드는 매향? 여종들은 눈을 마주치며 뭔지 알겠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매향은 바느질 솜씨도 좋고 진중한 사람이니, 이노야 쪽에 가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노부인께서도 마음이 놓이시겠지.”
집사 부인과 여종들은 한쪽 옆에서 따분해하며 앉아 있는 정육랑을 보고 서둘러 물건을 정리해 물러났다.
“어머니, 제가 말씀드린 현묘관 간식은 얻었어요?”
정육랑의 물음에 대부인은 그제야 생각난 듯 여종을 불러 물었다.
“그게, 섣달이라 달라는 사람이 많아서 벌써 한참 전부터 예약을 받았다네요. 그래서……·.”
여종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우리 집 몫은 없다는 거야?”
정육랑은 몸을 곧추세우고 여종을 다그쳐 물으며 대부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어머니, 보셨죠? 그 사람들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일찍 말해도 우리한텐 안 준다고요!”
대부인도 놀란 눈치였다.
“정말 없다고?”
“네, 부인. 달라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요. 시장에서도 현묘관 간식은 한 상자에 은자 열 냥을 받아요.”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렇게 비싸?”
대부인은 더욱 놀랐다. 현묘관이 언제 그렇게 바뀌었지? 그러고 보니 현묘관 관주를 본 게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시줏돈을 받으러 오지도 않았고?”
집안에 왔을 때도 못 본 건가?
“주지도 마세요.”
정육랑이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부인, 현묘관에서는 처음에 딱 한 번 돈을 받았고, 그 뒤로는 받으러 온 적 없어요.”
한 상자에 열 냥이나 하는 간식도 없어서 못 살 정도인데, 그깟 시줏돈을 누가 신경 쓰겠나. 대부인은 표정이 굳어졌고 정육랑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랬구나. 남의 밑에 있지 않은데, 누가 눈치를 보려 들겠는가.
“상관없다.”
대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서 사 오너라. 돈을 더 쓰면 그만이지.”
정육랑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늦었어요. 이제 못 산다고요! 매화 구경 가면서 간식도 못 들고 가면 비웃음을 당할 거예요! 간신히 그 바보를 내쫓아 놀림을 안 받게 됐는데, 또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됐어요!”
“우리 딸.”
대부인은 마음이 아픈 듯 딸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그런 말 마라. 넌 재색을 겸비하기로 강주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야. 다들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난리지 누가 널 무시해. 육랑, 남들이 비웃는 건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네 바보 자매를 생각해 봐. 그 애가 다과회를 연다 한들 누가 신선이라고 떠받들겠어?”
정육랑은 풉 웃음을 터뜨렸지만 금세 다시 울상을 지었다.
“봐, 너도 알잖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건 너라는 사람이지, 어떤 물건이 아니야. 걱정 마라, 걱정 마.”
대부인이 웃으며 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육랑이 최고야. 너 싫다는 사람 있으면, 너무 질투가 나서 그러는 게지.”
정육랑은 그제야 울적한 마음을 떨치고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어머니. 저 자마금(紫磨金: 자색을 띤 순수한 황금)으로 만든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할래요.”
정육랑은 애교를 부리며 대부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래.”
대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스러운 딸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두 모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딸들이 정교랑과 함께 매화를 보러 간다는 말에 진소 부부는 긴장이 됐다. 딸아이를 처음 집 밖 나들이에 보내는 심정과 비슷했다. 뭘 입혀야 하나, 뭘 챙겨야 하나, 누굴 딸려 보내야 하나, 춥지는 않을까,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남한테 무시라도 받으면 어쩌나 등등 여러 가지 고민으로 마음이 불안했다. 결국 진 노태야께 물어보기로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진 부인의 물음에 진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무슨 생각이냐고? 너희가 괜한 생각을 하는 게지. 10대 소녀가 아니냐. 노는 걸 좋아할 나이야.”
진소 부부는 깨달음을 얻은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지, 잊고 있었네. 그 여인은 이제 열네다섯밖에 안 된 소녀지, 나이든 노파가 아니었다.
“사람들을 몇 명 딸려 보내겠습니다. 애들 형제들도 두엇 보내고요.”
진소가 말했다.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은 후 두봉을 걸치고 시녀와 함께 나와 보니 진씨 가문 낭자가 두 명 더 늘어나 있었다.
“이쪽은 십랑, 여긴 십이랑, 이쪽은 십팔랑이에요.”
단랑은 신이 나서 일일이 소개했다. 몇몇은 어색해했고 몇몇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여인들은 하나하나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인사를 했으니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토시가 정말 예쁘네요, 낭자.”
연장자인 십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상이나 장신구는 말문을 열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날씨가 별로 안 추우니 손난로보다 토시가 더 좋죠.”
다른 낭자도 거들었다. 낭자들의 담소와 함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낭자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나왔다. 중문 밖으로 나와 보니 마차 네 대 외에도 말에 탄 소년 예닐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진씨 가문 낭자들은 깜짝 놀랐다. 준수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두봉을 걸치고 말에 타 있던 소년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데려다주라고 하셨어.”
집안 자매들이 나들이 갈 때 형제들이 데려다주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형제가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준수한 소년들이 둘러싼 마차 네 대가 거리를 지나는 모습은 눈에 확 띄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나들이를 나오는 이는 점점 늘어났고, 그중에서도 특히 부잣집 여인이 많았다.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진씨 가문의 행렬은 이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준수하고 생기 넘치는 소년들이 앞뒤로 호위하는 가운데, 바람결에 나부끼는 휘장 너머로 여인들의 화려한 장신구가 보이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인들이 길을 비켜섰다.
“아직 매화가 만개할 때도 아닌데, 진씨 가문이 갑자기 웬 나들이지?”
행인들은 의아한 눈치였다.
관리 가문 사람들이 출타할 땐 몰지각한 이들로 인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자 마차에 표식을 달았다. 일반 백성은 잘 모르지만, 부잣집이나 글공부를 한 서생, 부잣집에 아첨하는 자, 말썽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시정잡배들은 표식을 머릿속 깊이 숙지하고 있었다. 진씨 가문의 행렬을 알아보는 사람은 금세 늘어났고 마차를 피해 가는 사람도 늘어났다.
“혹시 참새 때문인가?”
누군가가 자못 심각한 말투로 툭 내뱉자 주변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는 이미 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참새 같은 야생 동물은 시골의 무지렁이가 고기 맛을 보고 싶을 때나 먹는 음식이지 대갓집 식탁엔 오를 일이 없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퍼진 후 이를 모방한 요리를 내놓는 경성의 술집이 늘었지만 딱히 별다를 게 없는 맛이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를 먹어 본 사람들은 진씨 가문의 요리엔 비방이 따로 있다고 했다.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 말이었다. 진 상공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져 갔다. 천금을 내놓으며 진씨 가문의 비방을 사겠다는 술집까지 나왔다고 했다.
그 흥미로운 광경에 진 공자는 인파 속에서 웃으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자네의 사촌 누이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야.”
웃고 있던 주육낭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자네도 참. 오로지 그 애 생각뿐이군. 내가 들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어쩌려고 이래?”
진 공자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그런데 생각할수록 아쉽네. 자네 노섬 주씨 가문이 참새 요리로 이름을 날릴 기회를 진씨 가문에 빼앗겼으니 말이야.”
주육낭이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야?”
주육낭이 말을 달려 앞으로 가자 진 공자도 따라갔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가 정말 진씨 것인 줄 아나?”
진 공자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고 딱 자네 누이가 오자마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어. 자네가 빼앗아 온 몸종의 튀김 솜씨를 잊지 마.”
또 그 여인인가! 생각이 난 주육낭은 굳어진 얼굴로 말고삐를 당겼다.
“먹는 것밖에 모르는군!”
“더없이 일품이었지.”
진 공자가 말을 덧붙였다.
“어디에 있든 기쁘고 흡족할 거야. 훌륭한 솜씨를 가졌으니.”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진 공자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여인은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 누이가 있는 걸 영광으로 여겨.”
주육낭이 말 머리를 돌렸다.
“매화 구경은 안 가겠네. 고목에 뭐 볼 게 있나? 여인들이나 좋아하지. 난 사냥하러 갈래.”
주육낭이 말을 재촉해 떠났다.
* * *
경성 교외 팔리진은 차정사가 있는 곳이었다. 이맘때면 유람객의 발길로 소란스러웠다.
“……·그 선인은 복숭아씨를 떨어뜨리고는 홀연히 떠나갔지. 그제야 깨달은 사람들이 소리쳐 부른 거야. ‘잠시만요, 멈추십시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
한 소년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잠시 차(且)’에 ‘멈출 정(停)’을 쓰는 ‘차정사’만이 남게 됐지.”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넷째 형님, 그 얘긴 재미없어요. 이 차정사는 본디 비석이 세워졌다가 후에 절이 세워졌는데, 그 비석에 내력이 있습니다. 그 비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으응?”
말을 이어가던 소년이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말을 멈췄다.
“정 낭자는?”
모두들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과연 푸른 두봉을 걸친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단랑이랑 불상을 보러 저쪽으로 갔어요.”
한 소녀의 말에 소년들은 소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가 보자, 우리도.”
소년들이 입을 모아 말하자 소녀들이 손을 뻗어 붙잡으며 말렸다.
“열두째 오라버니, 하던 얘기 아직 안 끝났잖아요.”
“더 얘기하고 말 것도 없어. 경성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야.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알걸.”
소년의 말에 소녀들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소년들과 소녀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됐다.
한편 같은 시각 서쪽 편전은 떠들썩한 정원과는 사뭇 단절된 분위기였다.
“언니, 이리 와 봐요. 여기 불상이 엄청 무섭게 생겼어요.”
단랑은 신이 나서 소리치며 앞으로 뛰어갔다. 정교랑은 느릿느릿 그 뒤를 따랐고, 시녀도 옆에서 수행했다.
편전에 있던 네다섯 사람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모두 여인인 걸 보고는 예의 있게 시선을 거뒀다. 경성은 개화한 곳이었고 곧 새해인지라 나들이를 나온 여인이 많았다. 여름에는 너울로, 겨울에는 두모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단랑은 불상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정교랑의 시선은 서쪽 벽을 향했다. 금강역사와 금강신 등이 지키는 다른 벽과 달리 이쪽 벽은 텅 비어 새하얗기만 했고 구석에는 필묵까지 놓여 있었다.
“문인 나그네가 시를 쓰도록 한 거네요.”
시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때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경림 형의 시가 아주 훌륭합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붓을 내려놓고, 벽에 쓴 시를 다시 한번 조용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