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60)

-솔직-

같은 시각 진 노태야의 거처는 창을 활짝 열어 놓은 상태였고, 나무창도 반쯤 열려 있었다. 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 두 몸종이 온실에서 새로 꺾은 꽃을 가져다가 대청에 장식해 두었다. 꽃향기를 머금은 방 안에는 숯불 냄새와 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몸이 마비된 후로 침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났던 악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꽃을 놓아둔 몸종은 방 안에 있는 윗전을 방해할세라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물러났다.

정교랑이 마지막 금침 하나를 천천히 돌렸다. 진소 형제는 옆에서 각각 부친의 어깨와 팔을 잡고, 부친과 함께 몸을 떨었다.

“다 됐어요.”

정교랑이 금침을 함에 넣었다. 진 노태야는 진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시원하군, 시원해.”

진 노태야가 소매로 얼굴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 약을 드시면, 오후에는, 침상에서 내려와서, 몇 걸음 걸으실 수 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씨 부자 셋은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다고요?”

진씨 부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저 목숨이나 부지하길 바랐을 뿐 다시 걸음을 걷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더구나 마비된 게 벌써 한참 전 일인데, 이렇게 빨리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다니?

“아, 물론, 내려오기 싫으면, 그냥 누워 계셔도 되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씨 부자는 정교랑의 괴이한 말투에 이미 습관이 된 터였다.

“고맙소, 낭자.”

진 노태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앉은 채로 예를 표했다. 흥분한 진소 형제 역시 얼른 따라서 예를 표했다. 정말 잘됐군, 참으로 신묘해!

안에 벌여 놓은 옷을 보며 정교랑은 잠자코 있었다. 시녀는 손짓하여 여종과 몸종을 물린 후 정교랑이 옷을 벗도록 도왔다. 안에 입은 흰옷은 벌써 흠뻑 젖어 있었다.

“아씨, 주씨 가문에서 보낸 옷들이에요. 받을까요, 말까요?”

“받아.”

시녀는 고개를 돌려 바닥을 힐끔 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호전되면서 진씨 가문을 찾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병이 중할 땐 문병을 안 와도 되지만, 병세가 호전됐을 땐 필히 문병을 와야 하는 법이다. 찾아오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 모두에게 기쁜 일이었다.

“부인, 동 대인 내외께서 노태야의 병문안을 오셨어요.”

여종이 급히 들어오며 말했다. 벌써 안에 들어와 있던 부인 네 명은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나, 이런 우연이. 동 대인 내외도 오셨구나.”

진 부인이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사실 우연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어제도 온 사람이 많았으니까. 진 부인은 웃으며 동 부인을 맞이해 대청으로 안내했다. 집사 부인이 진 부인에게 잠깐 할 얘기가 있다는 눈치를 보였다.

“부인, 오늘도 식사를 대접할까요?”

집사 부인이 나지막이 묻자 진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당장 갈 마음은 없어 보이더구나.”

안으로 들어온 동 부인이 공손히 예를 표했다.

“방금 보니 노태야께서 정말 많이 좋아지셨더라고요. 축하드려요. 큰일을 겪었으니 복을 많이 받으실 거예요.”

“맞아요. 이제 마음 푹 놓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겠네요.”

다른 이들도 거들었다.

“그래요, 이제 솔직히 얘기해 보죠. 노태야의 병문안 말고 다른 용건은 없어요?”

진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호전되면서 부친상의 근심을 던 남편 덕에 진 부인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참새를 먹고 싶어요.”

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진 부인은 실소를 터뜨렸다. 진소가 노태야의 병문안을 왔던 벗이자 동료와 술을 몇 잔 걸친 후로, 요즘 집안에선 산초 소금 등자 참새볶음을 즐겨 먹었고 자연스레 주안상에도 자주 올랐다. 벗들은 그 음식을 무척 좋아했으나 아픈 사람을 두고 음식을 칭찬하며 치켜세우진 못했다. 그 음식을 먹으러 오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해서였다.

집으로 돌아가 똑같이 참새 요리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진씨 저택에서 먹을 때만큼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맛이 자꾸 떠올라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내다 보니 소문이 금세 퍼졌다. 호기심이 많은 이들은 일부러 밥때를 맞춰 병문안을 왔고 원대로 음식을 먹은 후에는 과연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진씨 저택에서 만든 참새 요리에 관한 소문은 그렇게 점점 널리 퍼져나갔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점점 좋아진 후에는 다들 어려워하지 않고 병문안을 온 김에 함께 모여 음식을 먹었다.

“아, 참.”

부인 하나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모셔 온 신의를 소개해 주실 순 없어요?”

그렇지. 먹는 것보다 신의가 더 중요하지. 진씨 가문에서는 진 노태야의 병세에 관해 함구령을 내렸으나, 경성에서 숨길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길어야 두세 달 버틸 거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뜻밖에도 어디선가 모셔 왔다던 신의가 사나흘 만에 병을 고쳤다. 그만한 신의니 다들 서로 안면을 트지 못해 안달이었다. 진 부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어요.”

“결정하라는 게 아니라 소개를 해 달라고요. 의원이면 진료를 해야 할 텐데 계속 얼굴을 안 보일 순 없잖아요?”

동 부인의 말에 진 부인은 더욱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의원 같지 않아요.”

의원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 부인들은 어리둥절했다. 진 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뭐라 말하기 힘든 처지라고 했다.

“어쨌든 진료를 안 받아요.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도 완곡하게 거절하더군요.”

완곡하게 거절했다는 표현은 예의상 한 말이고, 실은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은 노태야의 병에 전념해야 하니 노태야께서 완쾌하시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

부인들도 웃으며 얘기를 마무리했다. 진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병을 치료하면 여기저기서 치켜세우며 떠받들 텐데 이런 일을 거절할 사람은 없겠지. 식사를 마친 후 손님들을 기분 좋게 배웅하고 난 진 부인은 마음이 편해졌다.

“단랑은?”

“정 아씨 쪽에 계세요.”

진 부인의 물음에 여종이 대답했다. 사실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정 낭자가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사람들과 살갑게 지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집안사람들은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는데, 단랑만큼은 매일 정교랑에게 놀러 갔다. 열댓 살 먹은 낭자와 네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어떻게 어울려 논다는 건지.

“정 낭자한테 성가시게 굴지 못하게 해.”

여종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 낭자는 뭘 하는데?”

진 부인이 또 묻자 여종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옷을 만들어요.”

* * *

“언니, 정말 대단해요.”

단랑은 존경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교랑은 비단을 바닥에 쫙 펼쳐 놓고 손에 든 가위로 거침없이 비단을 갈랐다. 시녀는 한쪽 옆에서 헝클어진 실을 풀었다.

“그래, 내가 좀 대단하지.”

정교랑이 말했다. 문밖에 있는 회랑 아래에 공손히 앉아 있던 여종과 몸종이 눈을 마주쳤다. 또 시작이네. 크고 작은 둘이서 아주 쿵짝이 딱딱 맞아.

“언니, 오늘 점심에도 참새를 볶았는데, 전 한꺼번에 다섯 개나 먹었어요.”

단랑이 작은 손을 쫙 펼쳤다. 정교랑이 단랑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맛없던데.”

“응? 엄청 맛있는데요.”

단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새는 말이지. 그러니까 참새를……·.”

정교랑은 가위와 바느질거리를 든 손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참새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단랑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부엌에 가서 전해. 거리에 가서, 생선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라고. 그럼 알 거야.”

단랑은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네, 기억해 둘게요.”

신이 난 단랑은 또다시 정교랑을 쳐다보며 감탄했다.

“언니, 진짜 대단해요.”

“그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언니, 아버지와 숙부님이 그러는데 언니는 신의래요. 언니는 신의예요?”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은 손을 멈추고 똑바로 앉았다.

“내가 보기엔, 그보단, 찬모에 가까운 것 같아.”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어느덧 겉옷의 형태를 갖춘 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침모일 수도 있고.”

* * *

구주(衢州), 수왕부.

수왕은 벌써 입관 후 땅에 묻혔지만, 수왕부의 장례는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밤이 되자 내걸린 흰 등롱이 커다란 수왕부를 대낮처럼 밝혔다. 수왕비가 있는 대청의 문밖에는 시종들이 늘어서 있었다.

“군왕.”

예를 갖추며 인사하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자, 시립해 있던 시종들이 술렁였다. 흰 상복에 흰 띠를 묶은 소년이 성큼성큼 들어오자 옷깃이 바람에 날렸다. 소년은 듬직한 체구에 엄숙한 표정이었는데 눈 주위가 빨갛고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랑 앞에 꿇어앉아 있던 시녀 둘이 손을 뻗어 문을 열자 문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소년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왕.”

남녀가 양옆 두 줄로 꿇어앉아 있었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상복을 입고 꿇어앉아 일제히 예를 표했다.

수왕은 친왕(親王)이었기에 그 자손에게는 국공(國公)의 지위만 세습됐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황제에게 특별히 책봉을 받은지라 같은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엄연히 신분이 달랐다.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진안 군왕은 정중앙에 꿇어앉아 우선 수왕비에게 예를 올리고 형제들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 한 식구끼리 서먹하게 이러지 말자.”

수왕비의 말에 자녀들은 일어나 앉았다.

“종낭, 듣자니 어젯밤에 밤새 부왕의 위패를 지켰다며?”

수왕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먼 길을 달려와서 사흘을 통곡했잖니.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폐하께 어찌 말씀 올리려고.”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실로 괴로울 뿐입니다.”

진안 군왕은 목멘 목소리로 엎드려 말했다. 수왕비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어서 일어나거라. 그런 말은 됐어.”

저쪽에 있던 형제들이 자리를 내주자 진안 군왕은 예를 표한 후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실내는 다시 숙연해졌다.

“부왕께서 안 계신다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수왕비의 말에 자녀들은 네 하고 대답했다. 수왕비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이런저런 당부일 게 뻔했다. 수왕비가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그 소리와 함께 소년이 들어왔다. 상복 차림의 소년은 열셋쯤 된 나이에 진안 군왕과 생김이 비슷했다. 소년이 들어오자 자리에 있던 수왕비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예도 생략한 채 곧장 수왕비 앞으로 가 앉았다.

“황낭, 또 어디 갔었어? 이제야 돌아오다니?”

수왕비가 소년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니, 고방에 갔었어요. 부왕께서 제게 주신 그 서화를 찾으려고요. 전에 제가 꾀를 부리자 부왕께서 경고의 의미로 서화를 주셨는데 제가 일부러 숨겼거든요. 이제 부왕께서 안 계시니, 제가……·.”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수왕비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착하기도 하지. 부왕도 네 마음을 아실 거야. 슬퍼하지 마라.”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안을 둘러보더니 진안 군왕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형님.”

소년이 일어나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도 미소로 답례했다. 잠시 한담을 나눈 후 진안 군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 일찍 쉬어야지.”

수왕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집에서 서먹하게 굴 것 없어.”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한 다음 형제자매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면서 시선이 가려졌지만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어머니, 어머니도 쉬셔야죠.”

“형님, 어젯밤에 누가 내 옥지팡이 가져가는 거 봤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먹한 분위기였던 형제자매들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진안 군왕은 대청을 등진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군왕?”

회랑 아래에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불렀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안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찌나 씩씩하게 걸어가는지 왕비 처소의 문밖에 있던 시종들은 뛰다시피 걸어야 간신히 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듯 계속 앞을 향해 직진했지만, 두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뒤따르던 시종은 진안 군왕이 먼저 걸음을 멈출 때까지 찍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였다.

“참.”

진안 군왕이 사방을 둘러봤다.

“내 거처가 어디지?”

진안 군왕은 또다시 활짝 웃었다. 옆에 달아 놓은 흰 등롱이 진안 군왕의 하얀 이를 비췄다.

“내가 너무 어릴 때 떠났어. 집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기억이 안 나네.”

시종은 웃으며 길을 안내했고, 다 함께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밤이 깊어지자 수왕부는 더욱 고요해졌다. 밤하늘의 별빛과도 같은 흰 등롱에서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왕부 일각에서 기이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올빼미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지만 소리가 차츰 줄어들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시종이 발로 툭 치자 널브러져 있던 사람이 데굴데굴 굴렀다. 실내엔 불빛이 적어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주 질긴 놈입니다, 군왕. 아직도 실토를 안 하네요.”

진안 군왕이 어두운 벽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흰 상복을 입은 채, 손에 든 흰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충직한 놈이구나.”

진안 군왕은 손수건을 내리더니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초주검이 된 사내를 바라봤다. 시종이 발로 툭 치는데도 그 사람은 이리저리 구르기만 할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진안 군왕은 바닥에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희미한 등불 아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사실 말하든 말하지 않든 상관없다. 누가 날 해치려 했는지는 알 필요 없거든. 누가 날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안 거로 충분해.”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저었다.

“더 물을 것 없다.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 그래도 충절은 지키게 해 줘야지.”

시종은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곧이어 시종 두세 명이 나오더니 초주검이 된 사내에게 발길질을 했다. 희미한 등불 아래로 사내의 두 다리가 드러났다. 하얀 뼈가 그대로 보이고 핏줄과 살덩이가 조금 남아 있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긴 듯했다.

이번에는 사내가 발길질에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을 내뱉었다. 시종 하나가 멱살을 잡으며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료 나리, 염려 마십시오. 군왕께서 대답 안 하셔도 된답니다.”

사내는 무언가 눈치챈 듯 힘껏 발버둥을 치며 상복 입은 소년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시종은 사내의 혀를 단칼에 잘라 버렸다. 피가 확 튀자 진안 군왕이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손수건을 가볍게 내저었다. 피비린내를 쫓기라도 하듯이.

료 집사가 까무러쳤다. 진안 군왕은 료 집사를 힐끔 쳐다본 후 뒤돌아 나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회랑 아래에 걸린 등롱을 치며 소리를 냈다.

소년이 쳐다본 밤하늘엔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등불에 비친 옥 같은 얼굴에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하늘을 쳐다보던 소년은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흰 등롱 아래 흰 상복을 입은 형체가 더없이 쓸쓸한 모습으로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 * *

날이 밝을 무렵, 진소는 벌써 궁문을 나와 황성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조회가 끝나고 왁자지껄 떠들며 나오던 문무백관이 일사불란하게 길을 열었다. 두 달 가까이 휴가를 냈던 이부의 진 상공이 다시 입조한 첫날이었다. 앞뒤, 좌우에서 수많은 눈길이 진소에게 쏠렸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길도 있고 시기하는 눈길도 있었다.

방금 조회를 마친 후, 조회를 주재한 대황자가 친히 진소를 불러 폐하의 부름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진소를 얼마나 믿고 신뢰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진소가 부친상을 치르는 동안 그 자리를 대신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기회가 사라지게 됐다.

태의도 속수무책이던 병을 고치다니. 진소는 운이 좋기도 하지. 진소는 그런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소의 머릿속은 온통 방금 폐하를 알현한 생각뿐이었다. 황제는 대황자를 물린 후 진소와 단독으로 정사를 논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몸이 안 좋다던 황제는 정신이 맑아 보였고 황제가 진소를 얼마나 신임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이름을 날린 진소는 부침이 없이 성장했다. 진사 급제를 하자 황제는 진소를 발탁하여 경험을 쌓게 했다. 곧이어 중임을 맡길 생각이었지만 모친이 병사했다. 물론 기복출사(起復出仕: 관례를 깨고 상중에 벼슬함)를 명할 수도 있었으나, 황제는 진소의 명성을 지켜 주고자 그리하지 않았다. 진소가 마침내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와 중임을 맡기려던 때에 그 부친이 또……·.

실로 천만다행이었다. 황제도 안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농담을 건네지도 않을 터였다.

“경성의 참새는 씨가 마를 지경이라더군. 진씨 가문의 비법 덕에 말이야. 다음엔 짐도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를 맛보게 해 주게.”

진소는 웃음을 터뜨렸다. 글재주로 일찌감치 조야에 명성을 날린 자신이지만, 요리로 경성 백성에게까지 이름이 날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백성들 사이에서 진참새라는 별호로 불리는 게 아닐까? 신동에서 참새라니, 그 격차가 커도 너무 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 여인을 집으로 들인 후 부친의 병세가 좋아졌다. 가장 먼저 참새를 먹고 싶다고 한 것도 그 여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찬모들도 그런 요리를 만들진 못했을 것이다. 상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상스러운 음식에서 그리 훌륭한 맛이 날 줄이야. 지나치게 속된 것은 극도로 우아하다고 했던가. 생각할수록 기괴하고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진소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부친의 거처로 갔다. 마당 문을 들어서자마자 활짝 열린 대청 문안에 앉아 있는 노인과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수척하긴 했지만 정정한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과 소매가 크고 수수한 옷을 입고 흑발을 내려뜨린 채 단정히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둘은 바둑판을 두고 마주 앉아 있었고, 바둑판 옆에는 붉은 옷을 입고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진소는 대혁도(對奕圖: 대국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와 같은 정경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듯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낭자, 바둑을 둘 줄 아시오?”

진 노태야가 물었다. 정교랑은 벌써 한참 동안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이 안 나요.”

생각이 안 난다? 할 줄 안 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진 노태야는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쌍육을 놀 줄 알아요. 할아버지, 언니랑 같이 쌍육 놀아요.”

단랑이 두 사람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노인은 검은 돌을 내려놓은 후 잠시 있다가 흰 돌을 내려놓았다. 알고 보니 노인 혼자 즐기는 중이었다.

“아버지.”

단랑이 문 앞에 선 부친을 단번에 알아보고 신이 나서 소리쳤다. 진소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부친에게 문후를 여쭌 후 정교랑에게 인사했다. 정교랑도 답례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너무 많이 걷는 건 안 돼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죠. 지금 병이 재발하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저 역시 못 고쳐요.”

진 노태야는 껄껄 웃으며 손으로 다리를 툭툭 쳤다. 걷고 싶은 유혹은 실로 컸다.

“닷새만 더 침을 맞으면, 약만 드셔도, 회복될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두 부자는 크게 기뻐했다. 이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뻤고, 완쾌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정말 고맙습니다, 낭자.”

진소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정교랑은 두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도록 먼저 일어났다. 단랑도 따라서 일어났다.

“단랑, 낭자를 귀찮게 하지 마라.”

진소의 당부에도 단랑은 신이 나서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고 걸어 나왔다.

어느덧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다.

“며칠 후면 눈이 내리겠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요? 너무 잘됐다. 우리 산으로 눈 구경 가요.”

단랑은 신이 나서 말했다. 얼마 안 가 맞은편에서 여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낭자 네다섯 명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과 진단랑을 본 여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교랑은 진씨 저택에 들어온 후 밥을 늘 혼자 먹었고, 진 노태야와 자신의 거처만 오고 갔다. 처음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집안사람들도 얼굴조차 보지 못했기에 교류는 더더욱 없었다. 교류하는 이로 따지면 진 노태야와 진소 내외, 단랑이 전부였다.

정교랑을 보며 여인들은 알 수 없는 어색함을 느꼈다. 황족과 귀족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진씨 가문의 여인도 여염집과는 달랐다. 행동거지와 기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태가 났다. 더구나 이제는 외부 연회에 참석할 나이가 된 터라 수줍어하는 일은 있어도 어색해하는 건 처음이었다.

“언니들, 어디 가려고?”

단랑이 먼저 달려와 물었다.

“차정사에 매화 보러 갈 거야.”

한 여인이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매화가 피었어?”

단랑이 놀라 물었다.

“응, 차정사의 겨울매화가 올해 일찍 피었대.”

단랑은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나도 갈래, 나도.”

단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교랑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정 언니, 언니도 같이 가요.”

진단랑의 초청에 진씨 가문 낭자들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정교랑은 대답이 없었다.

“정 낭자, 별일 없으면 같이 가요.”

진씨 가문의 낭자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꼬맹이의 초청에 응낙하긴 어려웠겠지. 정교랑이 낭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단랑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같은 시간 강남 지역엔 겨울비가 내려 날씨가 더욱 쌀쌀했다. 정육랑이 쿵쾅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집사 부인과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대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아랫것 앞인지라 정육랑은 깍듯하게 예를 표했다. 요즘 들어 기분이 좋은 대부인은 딸을 불러 앉혔다.

“그자들이 소란을 떠는 바람에 활기를 잃지만 않았어도 점포 수익이 더 늘었을 거예요.”

집사 부인이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장사도 모르면서 장사를 망칠 줄만 알지. 그래서 그자들은 떠났고?”

“손 놓고 관여하지 않고 있긴 한데 아직 떠나지는 않았어요.”

“내버려 둬라. 몇 사람 밥 더 먹인다고 신경 쓸 필요 없어.”

대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두고 보라지. 점포가 내 손에 있는 한 사업은 날로 번창할 거야. 따지고 보면 그 댁에서 해온 혼수를 불려 주는 셈이지. 우리 가문은 일부러 장사를 망치는 일 따위 안 해.”

“그런데 농장 쪽 장부는 이부인께서 보시겠대요.”

집사 부인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대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키지 않은 길이었지만 이노야는 결국 부임지로 떠났다. 이부인은 집과 가깝다는 핑계로 이번에는 자식들과 함께 따라가지 않고 집에 남았다. 말로는 노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양육하는 데 힘쓰기 위함이라고 했다.

4권에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