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 아닌-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던 주육낭은 부모님의 마당에서 여종 넷이 울며 쫓겨나는 모습을 목도했다.
“쓸모없는 것들.”
주 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그 애는 대체 왜 그럴까요?”
주 부인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주육낭이 예를 표한 후 꿇어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주육낭이 물었다. 속으론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바보가 진 부인을 시켜 여종들을 내쫓았다지 뭐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주 부인이 말했다.
이럴 수 없을 것도 없지. 이러는 게 처음도 아니고. 주 노야 내외는 조 집사가 정 낭자와 그 시녀에게 우롱당한 일에 대해 잘 몰랐지만, 주육낭과 진 공자는 조 집사에게 소상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속 좁은 여인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화가 났으면 저한테 풀 일이지 왜 주씨 가문에 맞선답니까.”
주육낭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주 노야가 눈썹을 치켜뜨며 앉으라고 호통쳤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가장 중요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때 여종 둘과 몸종 둘, 총 네 사람이 들어와 꿇어앉았다.
“가서 아가씨를 잘 모시고, 공손하게 예를 지켜라. 뭐든 시키는 대로 하고, 명이 없으면 움직이지 마.”
주 부인의 말에 네 사람은 네 하고 대답했다. 조 집사가 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옷을 한 바구니 들고 힘겹게 문을 나서던 반근은 맞은편에서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던 몸종들과 부딪칠 뻔했다.
“뭐야, 똑바로 보고 다녀.”
몸종들은 기분이 나쁜 듯 소리쳤다. 반근은 얼른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그 정 아씨는 왜 이렇게 시중들기가 까다로운 거야.”
“송 어멈 같은 사람들은 지근거리에서 부인을 모셔 제법 위신이 있는데, 말 한마디로 내쫓다니.”
쿵 하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두 몸종은 고개를 돌려 옷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뜨린 반근을 쳐다봤다.
“언니들, 저기 그 정 아씨란 분이……·.”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두 몸종은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그중 하나가 반근을 알아보고 옆에 있던 몸종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때 공자님이 같이 가겠느냐고 물으니까 진짜 따라오겠다고 하더래. 자기는 본디 주씨 가문 사람이라고 했다나.”
“아, 걔구나. 노부인께서 애초에 자기를 왜 사셨는지도 모르네.”
“그 속은 자기만 알겠지.”
두 몸종은 반근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수군거렸다. 반근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불안에 떨었다.
“얼른 가자. 송 어멈처럼 재수 없는 일 당하기 전에.”
“그래, 난 쫓겨나서 섬주로 돌아갈 맘 없어.”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총총 걸어갔다. 반근은 눈물이 그렁한 채 몇 걸음 따라가다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멀어져가는 두 몸종을 쳐다봤다.
“아씨는, 아씨는 모시기 까다로운 분이 아니야. 아씨는 다정한 분이셔. 그저, 그저 그분께 잘해 드리기만 하면, 그분도 너희한테 잘해 주실 거야.”
결국 주저앉은 반근은 무릎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반근의 몸은 더욱 작아졌다.
한 번도 만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로 진씨 저택의 부엌은 부산스러웠다. 초겨울이라 참새가 많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환들을 시켜 참새를 한 포대 잡아다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상에 올렸다. 정교랑은 한입 먹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씨, 입맛에 안 맞으세요?”
시녀가 얼른 물었다.
“난 또, 경성의 대부호라기에, 부엌이 훌륭한 줄 알았네. 그냥 돈 좀 있는 집 정도지, 제대로 된 음식을 할 수준은 아니야.”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은 시녀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네 집만도, 못하네.”
정교랑의 말에 시녀가 헤헤 웃었다.
“아씨, 제 집이 아씨 집 아닌가요?”
정교랑은 시녀가 말을 알아들었단 걸 눈치채고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리며 잠자코 있었다. 정교랑은 죽과 순무채를 느릿느릿 먹은 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탁자에 있는 참새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참새 몇 마리만 더 다오.”
이 태의가 빈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옆에 있는 아이는 참새 한 마리를 들고 맛있게 뜯어 먹고 있었다. 얼른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가던 여종이 도로 들어왔다.
“정 아씨께서 오셨어요.”
이 태의는 먹던 걸 내팽개치고 얼른 손을 쓱쓱 닦으며 일어섰다. 이 태의가 아이를 발로 툭 차자 아이는 못내 아쉬운 듯 손가락을 쪽쪽 빨며 따라왔다.
“아버지, 아버지.”
진소가 침상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부친을 불렀다.
“정 낭자가 왔습니다.”
진 노태야가 희미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흐리멍덩한 눈을 이쪽으로 돌려 어두운 옷을 입고 침상 옆에 꿇어앉은 여인을 쳐다봤다. 컴컴한 방 안에 어두운 옷을 입고 있는데도 여인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단정히 꿇어앉아 있었다. 그날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을 때 보였던 얼굴처럼.
“낭자, 내 병을 치료할 수 있겠소?”
진 노태야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할 수 있어요. 다만……·.”
‘다만’이라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이 낭자는 참 일도 느리고 말하는 것도 느리고, 답답해 죽겠어!
“그때보다, 값이 좀 비싸요.”
정교랑이 말했다.
창과 문이 활짝 열려 밝아진 진 노태야의 방에는 예전 같은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정교랑이 함에서 금침을 꺼내자 옆에 있던 이 태의가 머뭇거렸다. 어제는 일이 급하여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쳐도, 오늘까지 옆에서 보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정 낭자,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 하오?”
이 태의가 물었다. 진 노태야 같은 불치병엔 본인만이 아는 비기를 쓸 터인데 다른 의원 앞에서 함부로 보여 줄 순 없지 않은가. 어린 후배야 먼저 입을 열기 어렵다지만 선배로서 규율을 무시할 순 없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의 말에 이 태의는 몹시 기뻤다.
“봐도, 배울 수 없거든요.”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거 말 좀 안 쉬고 단숨에 할 수 없나? 이 태의의 얼굴이 굳어졌다.
“낭자, 누구 문하에서 배웠소?”
이 태의가 또 물었다. 천하에 이름난 명의를 대부분 아는 이 태의였기에 누가 키운 제자인지 궁금해졌다. 정교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난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말하기 싫으면 말 것이지, 참. 이 태의는 옷소매를 떨치며 한쪽 옆에 앉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해를 사든 말든 정교랑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온전하고 상세한 말을 할 수 없음에 초조해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습관이 됐다.
알아들을 마음이 있으면 알아들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뭐라 말하든 못 알아들을 테니 내버려 두자. 정교랑이 손을 뻗자 시녀가 얼른 소매를 걷어 주었다. 진소 역시 침상에 있는 부친의 옷을 벗겨 주었다.
“어제는, 의식이 없어서, 통증을 못 느끼셨어요.”
장침 하나를 꺼낸 정교랑이 진 노태야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정신이 온전하니, 아프실 거예요.”
진 노태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낭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게, 가장 고통스럽다오.”
진 노태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생각일 뿐이죠. 진짜 고통이 느껴지면, 그렇지 않을걸요.”
말을 마친 정교랑이 침을 찔러 넣었다. 부친의 머리맡에 꿇어앉아 있던 진소는 부친이 내지르는 비명을 똑똑히 들었다. 고통을 못 이긴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고, 내려놓았던 두 손은 비단 이불을 꽉 움켜쥐었으며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너무 아프군. 진소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이 태의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 태의는 정교랑이 침을 놓는 방법을 보며 그 힘을 가늠했다. 봐도 배울 수 없다니. 흥, 이 세상에 못 배우는 일이 어디 있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도무지 가늠이 안 됐다. 가볍고 편하게 침을 놓는 듯 보이지만 어느덧 여인의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진 노태야는 침 24개를 다 놓을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절반쯤 놨을 무렵 의식을 잃었다. 진 노태야가 의식을 되찾았을 무렵 정교랑은 침을 정리하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감각이 없는 게 낫죠?”
정교랑의 물음에 진 노태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살려고 애쓰긴 싫고 죽는 건 또 아쉬워 비통하다더니.”
정교랑은 진 노태야의 말에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대꾸하지 않았다.
진 노태야가 가냘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낭자, 만약 그때 내가 치료를 부탁했으면 이렇게 해 줬을 거요?”
한쪽 옆에 있던 진소와 진 사노야 등은 정교랑을 향해 눈짓을 했다. 병자에겐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의원이라면 응당 알고 있으리라.
“그럴 리가요. 그때는 침을 놓을 필요도 없었어요. 황주 세 잔에 환약 하나면, 충분했죠.”
충분했다니. 진소 형제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구나.”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자 진 노태야가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황주 두 잔이면 됐겠네요. 그땐, 이미 한 잔을 드린 후였잖아요.”
낭자, 참 친절도 하시구려. 진소와 진 사노야는 정교랑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켰다. 정교랑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진씨 부자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고, 곧이어 약이 들어왔다. 진소 형제가 약시중을 들었다.
“저 낭자를 잘 대해 줘라. 한순간 실수로 뭘 놓칠지 아무도 몰라.”
진소 형제는 알았다고 했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진 사노야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주씨 가문이 더 절절히 느낄 겁니다.”
진 노태야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이와 관련된 얘기를 듣지 못했다.
“저 낭자의 내력에 관해 소상히 말해 봐라.”
진 노태야가 말했다.
조 집사가 여종 둘, 몸종 둘을 데리고 진씨 저택의 문으로 들어서자, 맞은편에서 막대기와 그물을 든 사환들이 뛰어왔다.
“화신묘(火神廟: 불의 신을 모시는 사당)로 가자. 그쪽 뒤에 많아.”
“서쪽 시장에 빈집이 많잖아. 거기가 더 많을걸.”
사환들은 길도 제대로 안 보고 떠들어대다가 하마터면 조 집사와 부딪힐 뻔했다.
“너희 뭐 하는 거니?”
조 집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참새 잡으러 가요.”
길을 안내하던 사환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참새를 잡으러? 지금 이런 때에? 원, 짓궂기도. 진씨 가문은 아랫것을 단속하는 사람이 없나? 아무리 집안에 우환이 있어 다들 어수선하기로서니 너무 난장판이네.
정교랑의 거처로 온 조 집사는 또 제지당했다.
“아씨께선 주무시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시녀의 말에 여종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봤다.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오수에 들 시간도 아닌데 무슨 잠을 자? 사람을 치료하러 왔으면서 어떻게 집에서보다 더 편히 지내? 이래도 되는 거야?
여종들은 저도 모르게 조 집사를 쳐다봤다. 조 집사는 알았다고 공손히 대답하고는 초조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회랑 아래에 차분히 꿇어앉았다.
“누이도 고생이 많을 텐데 들어가서 쉬어.”
조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 조 집사는 집안 부인들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여종들에게도 이토록 깍듯하게 대한 일이 없었다. 주씨 가문에서 온 여종들과 몸종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얼른 함께 꿇어앉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전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얼마 안 가 정교랑이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그자들이 뭘 몰라 아씨께 대들었기에 팔아 버렸습니다.”
조 집사가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말했다. 문이 열려 있기에 고개를 살짝 들자 그 안에 앉아 물을 마시는 정교랑이 보였다.
“새로 뽑은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조 집사가 말을 이었다. 여종들과 몸종들이 얼른 앞으로 몇 걸음 나와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알았네.”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 말에 정교랑은 조 집사를 힐끔 쳐다봤다.
“사야 할 물건이 좀 있네. 내 시녀를 함께 데리고 가게.”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는 기뻤다. 데려가라는 뜻은 곧 돈을 쓰라는 말이다. 조 집사는 돈 쓰는 게 겁나지 않았다. 도리어 정교랑이 자신들의 돈을 쓰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좋아, 좋아. 조 집사는 시녀를 데리고 진씨 저택의 문을 나섰다.
“옷을 지을 천을 사야 해요.”
시녀가 손에 든 목록을 보며 말했다. 정교랑은 침을 놓을 때마다 옷이 땀으로 푹 젖었다. 원체 옷을 간소하게 입기도 했거니와 경성으로 올 때 가져온 두세 벌이 전부라 갈아입을 옷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 불찰이구나, 내 불찰이야. 집에 침모가 있으니 데려다주마.”
조 집사가 말했다. 사내가 이런 일까지 살필 생각이 났을 리가. 여인들의 일은 여인이 나섰어야지.
셋째 아씨가 성 밖의 백림사에 갈 때가 떠올랐다. 부인은 새벽이슬이나 비에 옷이 젖을까 염려하여 몸종과 어멈에게 갈아입을 옷을 넉넉히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역시 가족이 최고라니까. 어미 없는 아이는 참 딱하기도 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조 집사는 등에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지금껏 당한 거로 부족한가? 쓸데없이 나서기는. 시녀가 입을 열었다.
“됐어요. 아씨의 옷은 간단하거든요. 직접 지으신대요.”
그 바보가 바느질도 해? 옷을 직접 만든다고? 조 집사는 떨떠름한 생각이 들었다.
* * *
진씨 저택의 오후는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죽음의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아 조용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고요함이었다. 진 노태야가 의식을 회복하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진씨 저택은 한가롭고 평안해졌다.
햇빛이 좋은 날,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 앉아 있었다. 팔걸이 책상에 기대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짚고 한 손으로는 손길 가는 대로 글자를 썼다. 여종과 몸종은 한쪽 옆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밖에서 마당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네다섯 살쯤 된 여자아이인데 겁을 먹은 듯 안을 힐끔 보고는 몸을 움츠렸다가 잠시 후 또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종과 몸종은 뻔히 보면서도 못 본 척했다.
“단랑.”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여자아이는 기뻐하며 바로 마당 문 뒤에서 걸어 나왔다.
“날 찾아오다니, 무슨 일 있니?”
정교랑이 물었다. 쪼르르 달려온 단랑은 나막신을 벗고 단정히 꿇어앉더니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아무 일 없어요.”
단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하여간 어린애들은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른다니까. 여종과 몸종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 일 없으면 뭐 하러 와. 아무렇게나 지어서 둘러대면 되지.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아무 일 없어야지.”
정교랑은 손을 바꿔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단랑이 물었다.
“언니, 뭐 하는 거예요?”
정말 어린애들은 거리낌이 없구나. 남이사 뭘 하든 뭔 상관이야. 괜히 바보를 비웃는다고 여기면 경을 칠 텐데.
“글씨 써.”
정교랑이 말했다.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글씨를 쓰는 거라고? 그런 말은 어린애나 믿지. 한쪽 옆에 있던 여종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아이는 그 말에 감탄했다.
“언니는 왼손으로도 글씨를 써요?”
단랑이 놀라 물었다.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다 손인데, 당연히 쓸 수 있지.”
정교랑의 말에 단랑은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맞네요. 그렇죠.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단랑이 말했다. 왜냐면 넌 그냥 아이니까, 바보가 아니라. 여종과 몸종은 머리를 더 깊숙이 수그려 넣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이 바보는 정말 병이 나은 거 맞아? 아직 아닌 건가? 왜 바보 같은 말만 늘어놓는 거야. 그 시녀는 왜 안 오는 건지. 몸종과 여종은 불안했다.
정교랑이 손님인 단랑과 환담을 나누고 있던 시각, 진소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내와 함께 진 노태야의 방에서 나온 진소는 객청으로 들어와 앉았다.
“정말 다행일세. 폐하께서 마음을 많이 쓰셨네.”
사내는 기쁜 얼굴이었다. 진소가 예를 표하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폐하께 근심을 끼치는 죄를 지었군.”
“이게 어떻게 자네의 죄겠나.”
사내는 손을 뻗어 진소를 붙잡아 일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으셨으니 됐네, 나으셨으니 됐어.”
진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어디서 모셔 온 의원인가.”
사내는 호기심이 생기는 듯 물었다.
“강주 사람인데 부친과 길에서 한 번 만난 인연이 있네. 그때 숨은 병이 있다고 짚어 줬다더군. 물론 부친께서는 몰랐지만.”
진소는 참으로 다행이라는 투로 말했다.
“아, 대단한 자일세. 잠깐 보고도 숨은 병을 알아내는 신의라니.”
사내가 놀라워했다.
신의라고? 신기하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단 말이지. 진소는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한번 볼 수 있겠나?”
사내의 물음에 진소는 머뭇거렸다.
“날 보겠다고요?”
정교랑이 앞에 있는 진소를 보며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진소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자는 내 동료입니다. 교분이 두터운 사이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죠?”
정교랑이 진소의 말을 끊으며 묻자 진소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서둘러 해명하려는 진소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 낭자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장난꾸러기처럼 괴팍하단 말이지. 뭐든 자기 맘대로고 다른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아. 하지만 장난꾸러기가 맞는다 한들 별수 있나?
“낭자가 신묘한 의술을 가졌다는 소문을 들어 얼굴을 익히고 싶답니다.”
진소가 말했다.
“난 얼굴 익히고 싶지 않아요. 쉬어야겠어요.”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진소는 땀을 닦으며 돌아갔다.
“정 낭자가 침을 놓은 후 많이 고단했나 보군. 공교롭게도 자러 갔다지 뭔가.”
진소의 해명에 사내는 개의치 않고 허허 웃었다.
“노태야의 병이 중하지, 노태야의 병이 중해. 나중에 보세나.”
사내가 일어서며 작별을 고하는데, 진소가 사내를 붙잡았다.
“모처럼 얼굴을 보지 않았는가. 근심이 사라졌으니 우리도 한잔해야지.”
진소가 한숨을 쉬며 사내의 팔을 툭툭 쳤다.
“오랫동안 쌓인 근심을 털어놓고 싶기도 하고.”
집안일이며 정사며 온갖 근심 속에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는 진소였다. 사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준비해라.”
진소의 명에 사환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 술안주로 그 참새를 한 접시 가져오너라.”
사내는 진소의 명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참새라니? 술안주로 쓸 만큼 고기가 되나?”
“그 오묘한 맛은 고기에 있지 않아.”
진소는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글쎄 먹어 보면 안다니까.”
시녀는 주인장이 건넨 천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물었다.
“이게 가장 좋은 무늬 비단이라고요?”
“네, 맞아요. 낭자, 이게 요즘 가장 유행하는 천마 문양 비단이에요.”
가장 값비싼 것이기도 했다.
“이거로 주세요.”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주인장은 기뻐하며 점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위금(緯錦)이랑 서금궁릉(瑞錦宮綾) 있나요?”
시녀가 쪽지를 꺼내 내용을 보며 말했다.
뭐라고? 주인장은 멈칫했다.
“위금이요? 서금궁릉? 그런 건 처음 듣는데요.”
“촉금(蜀錦: 사천 지방의 비단)이래요.”
시녀가 또다시 쪽지를 보며 덧붙였다.
“촉금이 있긴 한데 전부 경금(經錦: 경중직 비단)이라서요.”
시녀는 쪽지를 쳐다봤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무거나.’
“그럼 저거로 주세요.”
시녀가 몇 가지 꽃문양을 짚으며 말했다. 천을 고르고 나자 더 이상 관여할 일이 없어진 시녀는 밖으로 나와 기다리며 거리를 살폈다.
“경성은 참 떠들썩하지? 시간이 촉박하지만 않았어도 구경을 좀 시켜 줄 텐데.”
조 집사의 말에 시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경성은 익숙해요.”
조 집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익숙하다니? 처음 온 거 아냐? 정씨 가문 시녀가 경성에도 와 봤나?
“조 집사?”
한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 집사가 쳐다보고는 놀라 뛰어갔다.
“여섯째 공자님.”
조 집사는 얼른 예를 표한 후 가마 의자에 탄 소년에게도 인사했다.
“진 공자님.”
두 사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 집사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 아씨의 물건을 사러 나왔습니다.”
정 아씨? 점포를 쳐다보던 주육낭의 눈길이 입구의 마차 옆에 선 여인에게 머물렀다. 가마 의자에 있던 진 공자도 따라서 쳐다보다가 몸을 곧추세웠다. 그럼, 저 사람이?
“반근 낭자.”
조 집사가 얼른 이쪽을 보며 소리쳤다. 저게 바로 수없이 생성된다는 그 반근? 진 공자가 흥미로운 듯 쳐다봤다.
“우리 여섯째 공자님이셔.”
조 집사가 친절하게 소개했다. 시녀는 살짝 놀란 듯 주육낭을 쳐다봤고, 주육낭도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눈썹만 살짝 움직였을 뿐 예를 표하지 않고 딱히 공손한 기색도 없이 옅은 미소만 보였다.
“집사님, 시간도 꽤 됐는데 일이 있으면 보러 가세요. 전 이만 갈게요.”
시녀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곧장 뒤돌아 마차에 올랐다. 조 집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주육낭 역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웃음을 터뜨린 건 진 공자뿐이었다.
“조 집사, 내 당부를 또 깜빡했군.”
조 집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또 괜한 말을 했군요.”
“우선 저 애를 데려다주게.”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조 집사는 알았다고 한 후 마차를 따라갔다. 마차는 거리에서 유유히 사라져갔고, 그 시녀는 시종일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저 몸종, 어떤 것 같아?”
진 공자가 웃으며 물었다.
반근, 반근. 그냥 사람일 뿐이고, 그냥 이름일 뿐이다.
“원수라도 본 얼굴이네. 우리 집 돈을 쓰고, 우리 집 사람을 부리면서 왜 저리 흡족해하지?”
주육낭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육낭, 원수의 돈을 쓰고 원수의 사람을 부리면, 당연히 흡족하지 않겠나?”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은 화를 꾹 누르고 조 집사를 시켜 거리에서 무엇을 샀는지 주 부인에게 소상히 보고하도록 했다. 주 노야는 그런 일 하나 꼼꼼히 챙기지 못했다며 주 부인을 나무랐고, 주 부인은 억울했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할 말이 없긴 했다. 두 부부는 잠시 말다툼을 하고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각자 자러 갔다.
주 부인은 측근 여종과 밤새 논의한 끝에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튿날 주 부인은 아침 일찍 직접 고방으로 가 새해 명절에 딸들 주려고 준비한 새 옷을 챙겨 여종들과 몸종들을 대동하고 진씨 저택을 찾았다.
우선은 노태야의 안부부터 묻는 게 도리였다.
“많이 좋아지셔서 일어나 앉으실 수도 있어요.”
진 부인은 주 부인을 맞이하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쳤단 말이야? 주 부인은 몹시 기뻤다.
“하늘이 노태야를 도우셨네요.”
“그러잖아도 댁으로 사람을 보내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낭자를 한동안 여기 더 있게 하고 싶어서요. 낭자가 여기 있어야 우리도 마음이 놓이잖아요. 진료하고 약을 짓기도 편하고요.”
“저도 그리 생각했어요. 그래서 갈아입을 옷을 좀 챙겨 왔죠.”
주 부인은 뒤에 있는 몸종과 여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가 병 때문에 어릴 때부터 좀 성격이 괴팍했어요. 사람들이랑 왕래하는 걸 꺼리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희와도 좀 서먹해요.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저희가 말하고 타일러도 안 들어요. 어릴 때부터 병을 앓았고 모친을 일찍 여읜 데다 혼자 외롭게 큰 점을 생각해서 좀 언짢은 게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주 부인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보였다. 정교랑이 주씨 가문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진 부인도 알고 있었다. 남의 집안일이라 함부로 넘겨짚으려 하지 않았는데 주 부인이 먼저 얘기를 꺼내니 오히려 마음이 풀리면서 가깝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진 부인이 차를 권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치도 않아요. 부인, 차 드세요.”
‘차 들어요’와 ‘차 드세요’는 비슷한 말 같아도 그 친밀함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주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주 부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흡족한 표정으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정 낭자가 노태야께 침을 놓으러 가서요. 좀 기다렸다가 보고 가세요.”
“그럼 그냥 갈게요. 딱히 용건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니 물건 건네고 아랫것들에게 당부 몇 마디만 하고 가면 돼요.”
주 부인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노태야의 치료에 전념해야 하는데, 오히려 절 보면 마음이 분산될 것 같아서요. 부인께서 보살펴 주시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요.”
진 부인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인걸요. 염려 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