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60)

-진료-

“정 낭자.”

진소는 다소 느릿느릿 앞으로 나가 예를 표했다.

“내 부친께서……·.”

정교랑이 진소의 말을 잘랐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어요. 우선 좀 쉬어야겠네요.”

사람들이 모두 멈칫했다.

“교랑.”

주 노야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우리 아씨께서 기력이 없으면 어떻게 병을 보시겠어요? 노야, 이미 오래 기다리셨잖아요. 조금 더 기다려도 상관없지 않나요?”

시녀가 말을 끊더니 진소를 보며 말했다.

방문이 닫히자 주씨 부부가 뒤돌아 진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봤다.

“아니, 쟤가 참……·.”

주 부인은 몹시 송구한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긴 먼 길을 왔잖아요. 우리였어도 못 견뎠을 거예요. 바깥채에서 잠시 쉬면서 기다리죠.”

진소의 부인이 얼른 주씨 부부를 안내하며 말했다. 진 상공 댁의 객청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발을 들일 꿈도 못 꿀 곳이었다. 주씨 내외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시중을 들 여종과 몸종들만 남고 나머지는 자리를 떴다. 무작정 기다리자니 초조해진 이들은 진 사노야와 조 집사에게 오는 길에 있었던 얘기를 들으며 여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초겨울이라 날이 일찍 저물었다. 진씨 가문의 대청은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숯불도 대령한 후였다. 실내는 따뜻했다. 십여 명이 모여 앉아 숨을 죽이고 진 사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가까이 가 보니 저 낭자가 칼로 살을 도려내는데……·.”

거기까지 들은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두 손으로 옆에 있던 아이의 귀를 막았다.

“단랑, 듣지 마라. 밤에 잠 못 자.”

여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아요, 안 무섭다고요.”

단랑은 쪼르르 빠져나와 아예 앞으로 가서 앉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숙부를 쳐다봤다. 그렇게 하면 당시의 광경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더니 누더기 조각과 썩은 풀로 환자를 싸매고……·.”

“그리 중상을 입은 사람을 칼로 도려내 피를 보면 단독(丹毒: 다친 피부로 세균이 들어가 붓기나 통증을 일으키는 병)의 위험이 커지지 않습니까?”

주 노야가 끼어들었다. 주 노야는 군인 출신이라 칼이나 창에 다친 상처에 대해 잘 알았다.

“아닙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숙부님, 빨리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병이 나았어요?”

단랑이 재촉하자 진소가 나서서 훈계했다.

“단랑, 무례하게 굴지 마라. 네 숙부는 먼 길을 와서 고단해.”

단랑은 어려서 몰랐지만, 어른들은 진 사노야의 표정에서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이미 읽어낸 터였다.

“숙부님, 고생 많으셨어요.”

단랑이 제법 그럴듯하게 예를 표했다. 진 사노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단랑.”

진 사노야가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더 기괴한 약을 처방해 달이게 했는데, 이튿날 아침이 되니 사람이 깨어났습니다.”

“대단하네요.”

단랑이 신이 나서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병자가 열흘 후엔 우릴 쫓아오기까지 했더군요.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는 데다 부축을 받으면 걷기도 하고 기댈 곳이 있으면 앉기도 했어요. 말도 하고 노래도 했죠. 벌써 완쾌하여 우릴 도와 늑대 떼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완쾌되기까지, 도움을 청하던 사람이 도움을 베풀기까지, 불과 열흘밖에 안 걸렸다니. 참으로 신묘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고 나이 어린 낭자들은 서로 손을 붙잡으며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과연 신의로군, 신의야.”

진소는 연신 칭찬을 해대며 주씨 내외를 향해 예를 표했다. 주씨 부부는 서로를 쳐다봤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물론 놀랐지만, 얘기를 소상히 듣고 보니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더 이해가 안 갔다. 그 바보가, 어떻게 신의가 된 거지? 세상에 이런 기이한 일이 있나?

“전에 도사님이 우리 교랑에게 장차 큰 길운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집안에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도관에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요.”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했지만 주 부인은 옛일을 거론하며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정말 맞았네요. 우리 시누이만 가엾게 됐죠.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지.”

처음엔 정 낭자의 일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지금은 진씨 가문 사람들도 알아볼 만큼 알아본 때라 내막을 잘 알았다. 일부러 병주까지 사람을 보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얘기는 못 들었다. 바보의 병이 나았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병까지 치료하게 되다니.

“신선의 비방을 얻었나 보군.”

사촌 형 하나가 옆에 있는 진소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이 되긴 하지. 부디 그 비방으로 부친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여인의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알 게 뭔가.

“우리 집 얘기는 그만하시오. 진 노태야의 병부터 구하는 게 우선이지.”

주 노야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야, 정 낭자께서 오셨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웠다. 곧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오더니, 두봉과 두모를 벗은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허리로 길게 드리운 흑발에 검은 비단으로 지은 덧옷, 어두운색 비단 치마까지, 수수하면서도 더없이 단정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안팎으로 불을 환히 밝혀 둔 터라 그 아름다움을 똑바로 직시할 수 없었다.

훌륭한 외모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이었다. 아주 어리군. 진씨 가문 노야들에게 든 두 번째 생각이었다. 의원은 경험으로 말하는 법인데 이리 어린 낭자에게 무슨 경험이 있나? 막다른 길에 몰린 게 아니었다면, 방금 신통한 치료법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보자마자 희망을 접었을 터였다.

“병자는, 어디 있죠?”

정교랑이 입구에 서서 물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얼른 일어났다.

“낭자, 나를 따라오십시오.”

단랑이 자신을 잡고 있던 여인의 손에서 벗어나 따라왔다.

“언니.”

단랑이 부친의 곁에서 걷고 있는 정교랑을 보며 소리쳤다. 진소의 부인이 얼른 붙잡아 세웠다.

“단랑, 어서 들어가.”

진소의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언니, 나 알아보겠어요?”

“모르겠어.”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이 단랑을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모른다고? 하긴, 길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친 인연이 전부고 어린애인데 기억이 날 리가. 진소가 얼른 부인에게 단랑을 데려가라고 눈짓했다.

진 노태야의 방 쪽으로 오자 여종들이 얼른 문을 열었다. 진 노태야는 벌써 두 달째 병석에 누워 있었다. 자식들이 정성을 다하고 몸종들이 세심히 보살폈다고는 하지만 방 안에서 풍기는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낭자가 말한 병세가 맞습니다.”

진소는 나막신을 벗고 정교랑을 침상 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부친께선 두 달 전에 발병하신 게 아니라 한 달 반 전에 넘어지면서 병이 드셨어요.”

“아니에요.”

정교랑이 딱 잘라 말했다.

“두 달 전, 밤에 코피를 쏟았어요.”

밤에 코피를 쏟아? 진소 부부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는데 옆에 있던 여종이 아, 소리를 냈다.

“네, 맞아요.”

여종은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두 달 전쯤 며칠 동안 노태야께서 밤마다 코피를 쏟으셨어요.”

“왜 말하지 않았느냐?”

진소가 급히 물었다.

“노태야께서 별일 아니라고 하셨고 정말 별일이 아니기도 했거든요. 물로 씻고 나면 금세 멎었고, 사흘 정도 그러신 게 전부였어요.”

여종이 당황하며 말했다. 이 아씨의 말대로 그때 노태야께서 병이 나신 건가. 여종은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 노태야의 병을 못 고쳐서 제때 아뢰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게 되면 끝장이다. 여종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시인했다.

“말했으면, 뭘 할 수 있었죠?”

정교랑의 물음에 진소가 난처해졌다. 하긴, 말한들 뭘 할 수 있었겠나. 날이 건조하여 코피가 났다고 여기고 말았겠지. 그게 병의 시작일 줄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일어나라.”

진소가 말했다.

“부친께서는 연로하시니 무슨 일이든 예사로 봐선 안 된다. 부친께서 자식들을 아끼는 마음에 내색하지 않으셔도 너희까지 숨기려 들진 마라.”

여종은 감격하여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 옆으로 와 있었다. 양쪽에 켜진 궁등이 침상 위에서 의식 없이 누운 노인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진소 부부가 따라와 긴장하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행여 진료에 방해가 될까 봐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방 안이 어찌나 조용한지 모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생각이 안 나요.”

정교랑이 불쑥 내뱉자 진소 부부는 멍해졌다.

“낭자, 무엇이 생각 안 난단 겁니까?”

진소가 긴장하며 물었다. 신선의 비방이 생각 안 난단 건가?

“이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 안 난다고요.”

정교랑은 노인을 보고 고개를 돌려 여종의 손을 붙잡고 휘장 근처에 선 단랑을 쳐다봤다. 반근이 떠난 후 정교랑은 그동안 일어났던 일과 인명, 장소를 전부 기억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반근이 떠나기 전의 일은 종이에 기록된 일만 기억할 뿐이었다.

진소 부부는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봤다. 시간을 끌더니 아직 진료는 시작도 안 했군.

“낭자, 내 부친께선……·.”

진소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최근 보름 동안 의식을 찾는 일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매일 인삼탕에 의지해 겨우 연명하고 계시죠.”

정교랑이 손을 뻗자 진소가 얼른 이불 속에서 부친의 손을 빼내 주고, 맥을 짚는 모습을 지켜봤다. 방 안은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잠시 후 정교랑이 손을 떼자 진소 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곧이어 긴장한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어떠냐는 말조차 물을 수 없었다.

“금침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일단 침을 놔서 깨어나게 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몹시 다급한 듯 나막신조차 벗지 않고 다다다 달려 들어왔다.

“만들 필요 없습니다. 만들 필요 없어요. 여기 있습니다.”

한 노인이 휘청거리며 말했다. 뒤이어 아이 하나가 약상자를 끌어안고 달려 들어왔다.

“신의께선 어디 계십니까?”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진소 부부가 얼른 나서며 맞이했다.

“이 태의, 늦은 시각에 어찌 오셨습니까?”

“신의께서 오시면 몇 시가 됐든 날 부르라니까요. 이런 일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이 태의가 계속해서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신의는요?”

저쪽에 있는 정교랑은 일어나기는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진소가 이 태의를 안내했다. 단랑은 어느 틈에 침상 옆으로 와 꿇어앉아 있었다.

“언니, 할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어요?”

단랑이 정교랑의 옷깃을 붙잡으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8월 15일에 같이 등불놀이 보러 가겠다고 하고선 안 가셨어요. 사촌 언니가 정월 대보름 때는 분명 같이 가실 수 있대요. 언니, 사람들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거래요. 그럼 정월 대보름 때 저랑 등불놀이 보러 갈 수 있어요?”

네다섯 살 꼬마는 아직 삶과 죽음을 몰랐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단랑을 보며 말했다.

“갈 수 있어.”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나으실 거야. 정월 대보름 땐 등불을 보러 가실 수 있지.”

단랑은 환히 웃으며 침상에 엎드려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언니가 곧 나으실 거래요. 우리 같이 등불놀이 보러 가요.”

단랑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진소의 부인이 얼른 다가가 단랑을 붙잡았다.

“이분이 바로 정 낭자입니다.”

진소가 이 태의에게 먼저 소개한 후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이분은 태의원의 이 태의십니다.”

정교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고 이 태의도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분이? 대인들께서 모셔 온 그 정 낭자라고요?”

이 태의는 무심결에 놀라 소리쳤다.

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 여인을 보긴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 노태야의 손녀뻘 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진씨 가문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모셔 온 낭자일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교랑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금침이 있다고요? 빌려줘요.”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대청에 있는 주씨 부부는 좌불안석이었고, 함께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자리가 편치 않았다. 다들 속으로는 진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진 사노야의 여정에 관한 일만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듣는 사람도 마음이 딴 데 가 있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니, 내용이 엉망진창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를 상황이었다.

“여러 사람이 늑대의 다리를 물었죠.”

젊은 여인 하나가 풉 웃음을 터뜨리자 다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진 사노야 역시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머쓱해했다.

“진맥은 어떻게 됐나 모르겠군.”

진 사노야가 화제를 돌렸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말입니다.”

주 노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칠 수 있든 없든 일단은 겸손하고 볼 일이다. 문밖에서 여종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침을 놨습니다. 정 낭자께서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의식을 회복할 거라고 하셨어요.”

여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앞다투어 밖으로 나갔다. 진소 부부가 정교랑과 함께 오고 있었다.

“교교, 어떻게 됐어?”

주 부인이 다급히 다가서며 물었다.

“고칠 수 있니?”

“당연하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침을 놨고 약도 처방했다. 이 태의가 지키고 있어.”

진소가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진 사노야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기다려야죠.”

정교랑의 대꾸에 진 사노야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이 여인은 참, 언제나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단 말이지.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돌아가자. 고단하겠네.”

주 부인이 정교랑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난 더 기다려야 해요. 깨어나면 약도 살펴야 하고요.”

주 부인은 곤혹스러웠다.

“낭자는 여기서 묵어요. 거처도 다 정리해 놨어요.”

진 부인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차마 미안해서 말을 못 붙였는데, 여기 남아 약을 살피겠다니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래요, 여기서 지내십시오. 그래야 다들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진소도 거들며 주씨 부부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게 좋죠, 그게 좋겠습니다.”

주씨 부부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럼 어서 돌아가 쉬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이들까지 붙잡아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집안에 병자가 있어 다들 초조하고 어수선하니 말이다. 주 부부는 시중들 여종 넷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주씨 부부가 자리를 뜨자 정교랑은 곧장 쉬러 가겠다고 했다. 진소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안내하게 했다.

“아, 참.”

정교랑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한밤중에 깨어날 경우, 약만 드시게 하면 돼요. 날 깨울 필요 없어요.”

진씨 가문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곧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 * *

주씨 저택에는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마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섰다. 마차의 휘장이 올려지고 여종이 주 부인을 부축해 내리더니 휘장이 내려지면서 더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주육낭은 답답한 듯 콧바람을 내뿜었다. 거처로 돌아오자 대청에서는 진 공자가 화로에 술을 데우고 있었다. 방 안에는 술 냄새가 가득했다.

“어때? 괜히 나가서 기다렸지?”

진 공자가 옷을 걷어 올리며 자리에 앉는 주육낭을 보며 말했다.

“부모님을 마중 나가는 건 응당 해야 하는 일이야.”

주육낭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며 말했다. 진 공자는 웃으며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진 노태야께서 오늘 밤에 깨어나실 수도 있다며 거기 남겠다고 했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긴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진 공자가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은, 자네 집에 발을 안 들일 거야.”

주육낭이 비웃었다.

“들이거나 말거나.”

“백부님과 백모님께선 뭐라셔?”

진 공자가 물었다.

“별말씀 없으셨어, 그렇지 뭐. 고모님과 많이 닮았다고 하시더군.”

주육낭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아, 자네 고모님은 미인이셨는데.”

진 공자가 웃었다. 주육낭은 술잔을 돌리며 멍하니 있었다. 부친은 당연히 별말씀 없으셨지만, 모친은 여느 여인들처럼 과장된 묘사를 늘어놓았다. 마차에 내릴 때부터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까지, 전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얘기했다. 어찌나 소상한지 그 여인이 눈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정씨 댁에서 한 번 봤을 때처럼,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는 그 모습처럼, 그 여인은 딱딱한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주육낭은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조 집사를 불러서 오는 길에 있던 얘기를 들어보자고. 재미있을 거야.”

진 공자가 말했다. 옆에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얼른 대답하고 사람을 부르러 밖으로 나갔다.

“뭐 재미있는 게 있다고. 집에 안 가?”

주육낭은 진 공자를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오늘 밤엔 안 갈 거야.”

“그 애한테 뭐 재미있는 게 있다고 자네까지 우리 집에 눌어붙어? 그렇게 관심이 생기면 장가들어 데려가든가.”

그 말에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진 공자의 조모는 방녕공주였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지금의 황제와 가까운 사이였다. 부친 역시 풍류를 알고 글재주가 뛰어나기로 이름났으며 진씨 가문도 명문가였다.

진 공자가 불구라고는 하나 아무나 사돈을 맺을 상대는 아니었다. 주육낭의 말은 그 결함을 비웃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결함이 있는 바보나 짝으로 어울린단 뜻이 아닌가. 주육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 난 그런 뜻 아니었어.”

시무룩한 표정의 주육낭을 보며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뜻 아닌 거 알아. 그만한 미인이면 인연이 없는 게 걱정이지.”

주육낭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몸종이 조 집사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왔다.

“고생 많았네.”

주육낭은 조 집사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조 집사는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고생은 무슨요. 집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아주 편합니다.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어요.”

조 집사가 꿇어앉으며 대답했다. 먼 길을 다녀왔으니 집 생각이 간절했겠지.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 공자는 피식 웃었다.

“왜? 정 낭자 때문에 꽤 애를 먹었단 말로 들리는군.”

진 공자의 물음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괜한 생각 마. 무슨 일이든 그 애랑 엮으려 들다니, 걔가 무슨……·.”

주육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 집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 공자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조 집사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말했다. 주육낭의 목소리는 거기서 뚝 그쳤다. 답답하기도 하고 딱히 도리가 없다는 듯 술잔을 들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괜한 생각을 하는 게 아냐. 자네가 생각하기 싫은 거지.”

진 공자는 답답해하는 주육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 같은 건 없어. 차이가 있다면 생각을 하려 드느냐, 하고 싶지 않느냐 정도지.”

“그냥 묻고 싶은 거 물어. 괜한 사람 엮지 말고.”

주육낭이 노려보며 말했다. 시선은 조 집사에게로 옮겨 갔다. 몸종이 조 집사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사실 정씨 댁 아씨께서 괴상하시긴 한데……·.”

문을 닫아 초겨울의 한기를 막았다. 노야와 공자들의 방이 밝고 따스한 데 반해 아랫것들의 방은 어둡고 싸늘했다. 반근은 손을 비비며 등불 가까이 다가앉아 옷을 기웠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여종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더니 여종들이 초겨울의 한기를 몰고 들어왔다. 그 바람에 등불이 꺼지려 하자 반근이 얼른 손으로 가렸다.

“소월이 서둘러 가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기는 건데.”

“이기긴. 소월은 경사를 앞두고 있어 재물운이 대단한걸.”

“소월은 참 운도 좋지. 부인께서 조 집사에게 주시다니. 조 집사가 얼마나 유능해. 나이는 좀 많아도 집안 안팎의 대소사를 다 관장하잖아.”

“이번에 돌아오면서 큰 공까지 세웠으니, 혼례를 올리고 나면 소월은 부인의 시중을 드는 집사 부인이 되겠네.”

몸종들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으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방 안은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조 집사가 돌아왔어?”

반근이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든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조차 지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몸종들은 그제야 반근을 쳐다봤지만, 대부분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힐끔 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그중 하나가 머리끈을 입에 물고 대답했다.

“저녁 무렵에 성으로 돌아왔어. 방금 노야와 부인께서 함께 돌아오셨고.”

“그, 그럼 우리 집 아씨도 오셨겠네.”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눈물까지 왈칵 쏟아졌다. 이번에는 몇 사람이 웃었다.

“너희 집 아씨? 너희 집이 어딘데? 넌 누구 집 사람이고?”

그중 하나가 경멸한다는 투로 말했다.

“여긴 자기 집이 아닌가 보네? 우리 집에서 고생이 많네요, 낭자.”

방 안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근은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 난……·.”

반근은 한참 웅얼거렸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오밤중에 웬 눈물 바람이야?”

한 여종이 소리쳤다.

“그러게, 하루 종일 표정이 썩어 있어. 누구한테 돈이라도 떼먹혔나.”

또 하나가 소리쳤다. 방 안은 와글와글 소란스러워졌다. 주눅이 든 반근은 자신의 침상으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당겨 눈물을 닦았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됐어, 다음에 어멈한테 말해야겠다. 남의 집 언니한테 좋은 곳 찾아 주라고. 여기서 우리 같은 사람이랑 어울리게 하다니, 미안해서 안 되겠네.”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거리를 허둥지둥 챙기며 몸을 떨었다.

“야, 바느질할 거면 다른 데 가서 해. 우리 이제 잘 건데 불 켜 놓으면 어떻게 자란 거야. 우린 너처럼 할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이 아니야. 낮엔 일하느라 바빠.”

방문이 닫히고 등불의 불이 꺼지자 안팎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반근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옷을 끌어안고 두리번거리며 몸을 떨었다. 아씨, 아씨……·.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진 노태야의 방은 네다섯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팔걸이 책상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는가 하면 팔짱을 낀 채 꼿꼿이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이 태의만은 침상 근처에 앉아 수시로 손을 뻗어 맥을 짚어 보았다.

“침을 놓는 방법이 기이하던데, 그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이 태의가 중얼거렸다. 침상 위에 누운 진 노태야는 여느 때처럼 입을 벌리고 곤히 잠든 채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이 태의는 창밖을 봤다.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는데, 늦어도 아침이면 깨어난다지 않았나? 왜 아직도 안 깨어나시지?”

이 태의는 잠시 중얼거리더니 발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고 발로 차 아이를 깨웠다.

“얘야, 일어나라.”

아이는 비몽사몽 간에 일어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얼른 침상을 붙잡았다.

“사부님, 사부님.”

아이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웅얼거렸다.

“몇 시예요?”

“곧 묘시다.”

이 태의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며 대답했다. 소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소매로 입가를 닦은 후 바로 앉았다.

“묘시라니, 곧 날이 밝겠네.”

이 태의는 아이를 바라봤고, 아이도 이 태의를 바라봤다.

“넌 어떻게 입도 안 벌리고 말을 하느냐?”

이 태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부님, 사부님이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아이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삼낭, 삼낭?”

침상에서 들어 올려진 손 하나가 옆에 있던 아이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이가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는 바람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잠에서 깼다.

진 노태야 방의 소란은 금세 마당으로 전해졌다.

“깨어나셨대요!”

“정말 깨어나시다니!”

“세상에. 늦어도 아침엔 의식을 회복하실 거라더니, 정말 그 말대로 됐네요!”

진소는 흥분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명했다.

“어서 가서 정 낭자를 모셔 오너라.”

여종들이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진소의 부인이 막았다.

“여보, 정 낭자가 깨어나시면 자신을 깨우지 말고 약을 드시게 하라고 했잖아요.”

진소가 발을 굴렀다.

“뻐기려고 한 그런 말을 어찌 곧이들으시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을 보여 주려던 거요.”

진소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을 그렇게 했다고 곧이곧대로 들으면 쓰나? 속히 가라, 속히.”

진료와 약 처방에 용이하도록 진교랑의 거처는 진 노태야와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저쪽에서는 날이 밝기도 전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이쪽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마당에 있는 등도 다른 곳보다 적었고, 방 안은 더욱 캄캄했다. 안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는 듯했다.

물론 여느 때처럼 조용한 건 정교랑과 시녀뿐이었고, 주씨 가문 여종 넷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얼른 밖으로 나와 쳐다봤다. 진씨 가문 여종들이 다가오자 주씨 가문 여종들은 긴장하며 물었다.

“언니들, 어떻게 됐어요?”

“아씨께선 과연 신의세요, 신의.”

진씨 가문 여종들은 입을 모아 칭찬하며 사뭇 공손해진 태도로 주씨 가문 여종들을 대했다.

“노태야께서 의식을 회복하셨어요. 어서 아씨를 모셔 가야 해요.”

정말 신통하네! 주씨 가문 여종들은 크게 기뻐했다. 자신들을 극진한 예로 대하는 진씨 가문 여종들의 태도를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언니들, 잠시만 기다리세요. 모셔 올게요.”

주씨 가문 여종들이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채 두 걸음도 걷기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역시 못 잤나 보네. 하긴 저쪽 동정이 걱정됐겠지. 괜히 태연한 척하기는. 주씨 가문 여종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다가가 예를 표하려 할 때였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죠?”

시녀의 불쾌한 듯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씨한테 어서 말씀 좀 전해요. 노태야께서 깨어나셨대요.”

여종들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깨어나셨으면 깨어나신 거죠. 약 드시게 하라고 말했잖아요. 아씨 깨우지 말고요.”

시녀가 목소리를 깔며 호통을 쳤다. 자리에 있던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여종들은 모두 멈칫했다.

“반근 낭자.”

주씨 가문의 여종 하나가 웃음기를 거두고 불쾌한 듯 경고했다.

“낭자는 이런 진료에 대해 잘 모르잖아. 속히 아씨께 말씀부터 올리고 허락받아.”

시녀는 콧방귀를 뀌며 밖으로 두 걸음 나왔다. 물론 소란스러운 소리가 안으로 들리지 않도록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걸, 그쪽은 알아요?”

시녀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런 무례한 계집 같으니라고! 여종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 부인을 가까이서 모시며 총애를 받는 여종들한테, 생질녀를 모시는 시녀 따위가 이토록 무례하게 굴다니!

“정씨 가문에서는 아랫것을 이따위로 가르치나?”

여종 하나가 굳은 얼굴로 따졌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녀가 침을 탁 뱉고는 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기서 정씨, 주씨 타령이 왜 나와요? 얼른 가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어안이 벙벙해진 여종들은 곧 격분했다.

“이 천것이 왜 이렇게 무례해. 매맛을 봐야겠네.”

진씨 저택만 아니었다면 이토록 무례한 시녀는 진작 따귀를 얻어맞았을 터였다. 시녀는 회랑 아래에 서서 네 여종을 쳐다봤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인 데다 등불은 점점 꺼지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뭐가 어째요? 때리겠다고요?”

시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무례하게 굴었으니 맞아야겠네.”

진씨 가문 여종들은 이미 멍해진 상태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한편 방 안에서 서성이던 진소는 수시로 밖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아직인 게야, 어째서.”

진소가 중얼거렸다.

“왔습니다.”

문밖에서 여종이 소리쳤다. 다들 반색을 하며 맞이하러 나갔지만, 여종 둘만 급히 돌아왔을 뿐 뒤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진소 등은 놀란 눈치였다.

“그 시녀 말이 아씨께서 쉬시니 방해하면 안 된답니다. 깨어나셨으면 약을 드시게 하래요. 아씨께서 일어나면 오실 거라면서요.”

여종이 쭈뼛거리면 말했다. 진소의 부인은 저도 모르게 남편을 힐끔 쳐다봤다. 거보라고요, 말한 대로 해야 한다니까. 진소는 어리둥절했다. 이 낭자가 대체……·.

“그리고……·.”

여종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도로 삼켰다.

“뭐냐?”

진소의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방금 아씨를 부르러 갔던 일로, 주씨 가문 사람들과 그 시녀 사이에 소동이 벌어졌어요.”

여종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 시녀는 네 사람더러 돌아가라고 했고요.”

돌아가라고 했다는 말은 정중한 표현이었고, 실은 냉큼 꺼지라고 했다. 뭐라고? 진소가 옷소매를 뿌리쳤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진소의 부인이 남편을 다독였다.

“내가 가 볼게요.”

진소의 부인은 여종의 안내를 받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진소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우선 약부터 드시게 하죠.”

이 태의는 정교랑의 구술에 따라 시녀가 받아 쓴 처방을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약을 달이러 뛰어나갔다.

“삼낭, 삼낭. 그, 그 낭자가 왔느냐?”

진 노태야가 침상에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진소가 얼른 다가가 하도 수척하여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닌 부친을 쳐다봤다. 사내는 쉽게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지만 그건 슬픈 일을 겪어보지 못해 하는 말이리라.

“네, 아버지.”

진소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무릎을 꿇고 부친의 손을 잡았다.

“제 불효 탓입니다. 이리저리 바삐 다니시느라 이렇게 되셨어요.”

“셋째 아우, 그런 말 말게.”

사촌 형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낭자가 말하지 않았나. 숙부님께선 오래전부터 지병이 있으셨다고. 자네를 따라오는 길에 정 낭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속수무책이었을 거야.”

방 안에 있는 다른 형제들도 맞장구를 쳤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이제 희망이 생겼잖아요. 그 낭자가 고칠 수 있다고 했으니 이제 됐습니다.”

“약은? 어서 약을 재촉해.”

정교랑이 쉬고 있는 방 밖에서는 여종 네 명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부인까지 오시게 소란을 피우다니……·.”

여종들이 고개를 숙였다. 진 부인은 이들을 훑어보기만 할 뿐 잠자코 있었다.

“노태야의 병이 중하죠. 잠이야 조금 더 자든 덜 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한 여종이 말했다.

“이 일은 저희 집안일입니다. 부인께 부끄럽네요.”

“저희 아씨께서 아직 어리시고 저 몸종도 어려서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뭘 모르죠. 부끄럽습니다.”

또 다른 여종도 말을 거들었다. 진 부인은 잠시 주저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의 집안일이긴 한데……·. 진 부인의 눈앞에 어젯밤 주씨 가문 사람들이 떠난 후 정 낭자가 보인 표정과 말이 떠올랐다.

주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는 병자를 봐야 해서 갈 수 없다고 하더니, 그들이 떠나자마자 쉬러 가겠다고 했다. 이 낭자는 진씨 가문 사람들을 위해 예의상 남은 것 같지 않았다. 주씨 가문으로 가기 싫은 것이다. 진 부인은 소매 속에 있는 손을 꽉 쥐었다.

“이렇게 하지. 자네들 먼저 돌아가게. 우리는 낭자께 진료를 청해야 하는데 낭자의 심기가 불편하면 자네들은 식구니까 괜찮을지 몰라도 우린 상황이 난처해져. 내 입장을 헤아려 주는 셈 치고 자네들이 좀 섭섭하더라도 낭자 말대로 하게.”

여종들은 기가 막히겠는 표정이었다.

새벽빛이 차츰 실내로 들어와 안을 환히 비췄다. 정교랑이 몸을 뒤척이다가 비단 이불 속에서 팔을 뻗었다.

“아씨, 물 드시겠어요?”

시녀가 휘장 밖에서 물었다.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녀가 휘장을 걷고 들어와 꿇어앉더니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정교랑이 일어나 앉아 물을 마셨다.

“왜, 잠을 못 잤어?”

정교랑이 물었다. 시녀는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전 아씨 같은 복이 없어서 잠자리가 바뀌면 한 이틀은 지나야 제대로 자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교랑이 물잔을 건넸다.

“복이라고 할 것도 없어.”

정교랑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어디에 있든, 나한텐, 다 똑같거든.”

전부 모르는 곳이고 낯선 곳이다. 시녀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르면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시녀는 일어서는 정교랑을 부축했다. 정교랑이 노태야의 일에 대해 묻지 않았기에 시녀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는 여종과 몸종들만 애가 탈 뿐이었다.

“아직 안 일어나셨나?”

“저쪽에선 벌써 약을 드셨어. 노야께서 또 가 보라고 하셨는데.”

“괜히 재촉하지 마. 주씨 가문 사람들도 쫓겨난 거 봐.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간 너도 쫓겨날 거야.”

밖에서 수군대는 사이에 문이 벌컥 열리자 여종들은 얼른 입을 다물고 몸을 곧추세웠다.

시녀가 문을 열자 문밖에 있던 여종과 몸종이 얼른 예를 표했다. 시녀도 답례했다.

“고생이 많네요.”

시녀는 미소를 머금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실로 교양 있고 사리에 밝은 모습이었다. 방금 전만 해도 손을 허리에 대고 침까지 뱉으며 연장자인 여종들을 쫓아내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희 아씨께선 식사하셔야 해요.”

“네, 네, 준비해 놨어요.”

시녀의 말에 여종이 얼른 대답했다.

“너무 번거롭게 하실 필요는 없고요.”

시녀가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오미 고기죽, 산초 소금 순무채무침, 산초 소금 등자 참새볶음이면 돼요.”

여종들은 아연실색했다. 뭐라고? 무슨 죽? 산초 소금? 등자를 볶기도 하나? 이게 번거롭지 않다고? 고기죽에 오미는 또 뭐야? 참새라고? 거기에 산초 소금과 등자를 넣어 볶아? 뭐야, 대체 어떻게 먹겠다는 거야.

진 노태야의 방에 있던 진소 형제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진 노태야는 약을 먹은 후 또다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태의가 곁을 지키며 맥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진소 형제는 벌써 정 낭자를 불러오려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느릿느릿 일어난 것도 모자라 차려 놓은 밥은 안 먹고 새로 주문을 하다니, 정 낭자는 참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인,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이 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어제 낭자가 침을 놓는 걸 보니 힘을 많이 쏟는 듯했습니다. 침의 깊이에 추호의 실수도 없었던 덕에 노태야께서 단번에 깨어나셨겠죠. 치료에 더욱 전념해야 하니 오늘은 더 많은 힘이 들 테고요. 급병의 치료 효과는 더디 나타나는 법이니 서두르셔선 안 됩니다. 낭자가 저리 태연한 걸 보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대인, 기뻐하시는 게 옳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낭자의 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침 한 번 놓은 일로 오랫동안 의식이 없던 노태야를 깨울 정도였으니 오죽 힘을 쏟았을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자식으로서 부친의 병이 근심되어 그러지요.”

진소의 말에 이 태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러실 만합니다.”

이 태의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찡긋하고는 말했다.

“말하고 보니 저도 배가 좀 고프군요.”

하긴, 이 태의도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어서 식사를 올려라.”

진소의 부인이 얼른 나섰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태의는 다급하게 소리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정 낭자가 주문한 것으로 똑같이 먹겠습니다. 이름을 들으니 맛있을 것 같아서요.”

오미 고기죽과 산초 소금 순무채무침, 산초 소금 등자 참새볶음이라.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속으로 그 이름을 읊어 봤다. 알록달록 먹음직스럽고 아삭아삭한 요리가 눈앞에 차려진 기분이었다. 맛있게 생겼네.

“다들 밤 새느라 고생 많았는데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아무렇게나 대충 때웠지. 부엌에 가서 그대로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라.”

진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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