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60)

-무례-

“그런 일을 농담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소년은 적의를 잔뜩 품은 사내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말한 게 아니오. 저 여인이 말한 거지.”

사내들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씨, 저희 형제 일곱은 모두 동향입니다. 무원산에서 왔죠. 저희의 천한 이름은 기억하실 것 없으니 은인인 아씨의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은혜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병을 앓은 사내는 그 소년을 상대하지 않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아씨께선 제 형제를 구하고 은자까지 주셨잖아요.”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죠.”

“아씨께 장생위패(長生位牌: 은인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드는 위패)라도 세워 드려야 하는데.”

사내들은 왁자지껄 감사를 표했다. 정교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도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쉬러 갔다. 정교랑이 길을 재촉하느라 고생하는 걸 알기에 무원산 형제들도 더 방해할 수 없어 쫓아가 묻진 않았다.

“아씨께선 과연 자비로운 분이야. 은혜를 베풀고도 의연히 기억할 필요 없다 하시네.”

병을 앓은 사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하여간 글공부한 사람들은 말투에서 먹물 냄새가 난다니까.”

한동안 잠자코 있던 소년이 옆에서 또 입을 열었다.

“진부하기만 하고 별것도 없으면서.”

사내들이 분노로 노려봤지만 소년은 태연하게 가 버렸다.

“저 자식, 귀한 집 자제처럼 생겼으면서 하는 짓은 꼭 무뢰한 같네.”

한 사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병을 앓은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세상 부자 중에 무뢰한이 아닌 자도 있나?”

반문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한 말이었다. 떠들썩했던 숙영지가 조용해졌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데다 늑대와 혈투를 벌이기도 했고 술까지 마셔 피로가 몰려왔다. 당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피풍의로 몸을 싸매고 머리를 잔뜩 수그려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동녘이 밝아올 무렵, 숙영지는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세 무리 모두 출발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마차 소리와 욕설을 퍼붓는 소리, 말하는 소리가 짙은 새벽 안개와 함께 뒤엉켜 있었다.

“이제 날 따라올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무원산 7형제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 상처는 이미 고비를 넘겼어요. 며칠 마음 편히 요양하면 되지만, 이렇게 먼 길을 가는 건 안 좋아요. 말했다시피, 병은 고칠 수 있어도, 목숨은 어쩔 수 없어요.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들면, 내가 옆에 있다 해도, 구할 수 없다고요.”

무원산 7형제는 송구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한 표정으로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댁들이 안 와서, 내가 목숨을 잃었다면, 그쪽도 아마 목숨을 잃었겠죠.”

정교랑이 말했다. 한기가 도는 새벽이라 두봉으로 몸 전체를 싸매고 있어 입과 턱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게, 하늘이 공평하단 걸까요?”

말을 마친 정교랑은 별다른 말 없이 손짓하여 조 집사를 불렀다. 조 집사도 이번엔 훨씬 기민해진 터라 손을 모으고 공손히 명을 기다릴 뿐 괜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에게 돈을 내주게.”

정교랑이 말했다. 조 집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대를 꺼내 사내들에게 건넸다. 무원산 형제들은 조 집사가 건네는 전대를 보고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어찌 아씨의 돈을 받겠습니까. 송구해서 못 받습니다.”

사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돈은, 쓰기 위한 거잖아요. 사내대장부라면, 이럴 거 없어요.”

병을 앓은 사내는 엄숙한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큰 은혜에는 인사를 하지 않는 법이죠.”

사내가 손을 뻗어 전대를 받았다.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시녀와 함께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사내들은 전대를 들고 정교랑을 눈으로 배웅했다.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아씨께선 참으로 좋은 분이야.”

수많은 말 중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요, 천금은 다 써 버려도 다시 돌아오는 법. 쇠를 두들기려면 자신이 더욱 단단해져야 하지. 우리 형제들이 은혜를 갚으려면 하루빨리 자립해야 하네.”

병을 앓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은인께서 경성으로 가신다니 나중에 우리가 가서 찾으면 되지. 방금 은밀히 얘기를 들어 보니 한쪽은 진씨 가문이고 한쪽은 주씨 가문이라 하더군. 아씨께선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은인은 충분히 찾을 거야.”

사내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환호하고는 나무틀을 들어 사내를 마차에 태웠다. 사내들은 어젯밤처럼 떠들며 서둘러 출발했다. 산골짜기는 금세 조용해졌다.

시녀는 시선을 거두고 정교랑을 부축해 마차에 올랐다.

“목숨을 구한 은혜면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용모는 알아 둬야지. 안 그럼 배은망덕하지 않나?”

소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움직임에 따라 두모를 눌러쓴 얼굴이 보였다 가려졌다 하는데, 새벽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저 무뢰한이! 여인의 외모를 보겠다고 저리 거침없이 굴다니! 주변에 있던 시종들이 분노로 노려봤다.

“은혜를 베푼 적 없는데, 뭐가 배은망덕하단 거죠?”

정교랑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은혜가 없다니요? 그럼 저들을 왜 치료해 줬습니까?”

소년은 가까이 걸어오며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교랑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 사람은 병이 깊어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었어요. 곁에는 형제들뿐이고, 역참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쫓겨났죠. 그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어요. 7척 장신의 사내가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내가, 그때, 왜 도와줬을 것 같아요?”

정교랑이 물었다.

“왜죠?”

소년이 정교랑을 보며 반문했다.

“그러면, 상쾌하지 않나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상쾌하다. 속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소년이 수없이 듣고 쓰고 말해 본 말이었다. 그런데 그 명료한 단어를 이런 식으로 말하니, 왠지 뭐랄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소년만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사내들처럼 막막했을 터였다.

사람이 너무 똑똑한 것도 안 좋아. 고개를 든 소년은 머리를 살짝 돌리고 받침에 올라 마차에 타려는 여인을 쳐다봤다. 두모가 살짝 벗겨져 소년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두 눈은 맑고 코는 오뚝했으며 눈썹은 길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움이 느껴졌다.

저 어린 공자가 꽤 준수하게 생겼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했다. 정신을 차린 소년 공자는 남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얼른 두모를 똑바로 썼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리고 치마를 들며 마차에 올랐다.

“낭자, 잠시만요.”

소년이 소리쳐 불렀다.

“낭자께선 나도 구해 주셨잖습니까.”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자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내 마차 말입니다.”

소년이 말했다. 마차가 뭐? 사람들이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시종들이 마차 한 대를 해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 늑대 떼의 습격에 놀란 말이 마차를 달고 마구 내달린 일이 있었다. 어제는 밤이라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마차 바퀴가 반쯤 망가져 있었다.

“낭자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도 늑대 떼에 물렸을 겁니다.”

소년이 말했다. 정교랑 주변의 시종들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정교랑과 시녀를 차례로 쳐다봤다. 마차에서 내리라고 소리친 일은 시종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녀가 소리치지 않았나? 정교랑이 소년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건, 또 그렇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소년이 앞으로 한 발짝 성큼 다가가 정교랑의 두모를 벗겼다. 여인의 용모가 소년의 앞에 나타났다. 소년은 눈앞에 있는 얼굴을 응시했다.

이 소녀라고 딱히 별건 없는데. 보통 사람보다 피부색이 좀 더 하얗고, 얼굴이 좀 더 예쁘긴 하지만. 다만 두 눈이 얼굴에 비해 유달리 튀어 보였고 딱딱한 표정까지 더해져 조금 기이하게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아. 소년은 멍하니 있었다. 정말, 병자인가?

워낙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고 소년의 동작이 빨랐기에 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이 소년이 이토록 경망스럽게 굴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멈칫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시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서 시종들도 재빨리 움직이며 소리쳤다.

“이런 호색한이 있나, 무례하다!”

소년 옆에 있던 시종들도 이미 소년을 보호하고 나선 후였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인의 얼굴은 기억해야 하거든.”

소년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웃으며 말했다. 놀라고 분노하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정교랑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시녀는 열이 받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듯 떨리는 손길로 정교랑에게 다시 두모를 씌워 주었다. 이쪽에 있던 진 사노야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 사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소년에게 어서 출발하라는 뜻을 표했다.

“낭자, 나도 낭자가 구한 건데 그 일은 상쾌하지 않았습니까?”

소년은 웃으며 물러서는 한편 손을 살짝 흔들었다. 정교랑이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공자, 걸음을 멈추세요.”

시녀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소년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다. 정교랑이 손짓을 하여 소년을 불렀다. 그리 무례한 일을 당하고도 놀라거나 화내지 않고 가까이 오라고 부르다니? 하기야 늑대 떼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저만한 일에 겁을 먹을 리가.

소년은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노려보는 주변의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교랑 앞에 가서 섰다. 소년의 키는 여인보다 살짝 컸으나 여인이 나무 받침 위에 올라선 탓에 여인이 살짝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됐다.

“공자를 구한 건, 별로 상쾌하지 않았어요.”

정교랑은 소년을 보며 손으로 천천히 두모를 벗겨 얼굴을 드러냈다.

“두 번은 구해야, 통쾌하다고 할 수 있죠.”

소년은 무슨 말이냐는 눈길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어제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오늘 처음 본 데다 말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인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소년 역시 손으로 천천히 두모를 벗으며 물었다. 입꼬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정교랑이 몸을 살짝 굽혔다.

“어젯밤, 늑대 떼는, 누군가가, 유인한 거예요.”

정교랑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소년은 순간 오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어떨 것, 같아요?”

정교랑이 몸을 곧추세우고 소년을 보며 물었다.

또 한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출발하고 소년의 행렬만 남아 산골짜기는 더욱 조용해졌다.

“군왕(郡王), 이만 출발하시죠.”

옆에 있던 시종이 아직도 넋이 나간 듯한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응, 하고 대꾸하고는 두모를 들어 올리며 오던 방향을 쳐다봤다. 산골짜기에는 말발굽 소리가 은은하게 메아리치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군왕, 저 낭자가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이토록 넋을 놓고 계시다니요?”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다른 이들의 공손한 태도와는 달리 사뭇 편한 사이로 보였다. 소년과 정교랑은 가까이 서서 속삭였기에 그들의 마지막 대화는 둘 외에 아무도 못 들은 터였다. 소녀는 몸을 돌려 사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군왕은 황궁에서 근심 걱정 없이 자라서인지 잘 웃고 성격도 좋았다.

“나보고 어느 댁 공자냐면서 혼처가 있느냐고 묻더군.”

소년이 웃으며 대답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군왕께선 용모가 수려하시니 반하지 않을 낭자가 있겠습니까.”

집사는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부왕께선 내 혼례를 못 보고 가셨네.”

소년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간 웃음소리가 그치고 모두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군왕,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집사가 눈물을 두어 방울 짜내며 말했다.

“군왕의 효심은 하늘에 계신 왕야께서도 아실 겁니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시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픈 표정으로 시종이 끌고 온 말을 건네 받았다.

“마차가 고장 나서 가는 길이 불편하실 듯한데, 수로로 바꿔서 가면 어떨지요?”

집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수로로 가면 빙 돌아가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지 않았나. 군왕의 건강이 우선이지. 이리 먼 길을 다닌 일이 없고 놀라기까지 하셨어.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걱정하실 게다.”

집사는 불안하고 걱정된다는 투였다.

“그럼 료 집사 말대로 하자.”

소년이 편히 대꾸했다.

“평안히 가는 게 중요하지.”

집사는 기뻐하며 앞으로 가서 명을 전달했다. 걸어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보며 소년은 냉소를 지었다. 어디 봐야겠네, 누가 내 목숨을 노리는지. 고기였던 자가 어느덧 고기를 잡는 자가 됐건만, 그 고기를 잡으려던 자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니 상쾌한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소년은 웃음을 거두고 자신이 왔던 방향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한 집안은 진씨고 한 집안은 주씨라는데, 그 여인은 주씨일까, 진씨일까? 소년은 손을 뻗어 두모를 쓰고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힘차게 달려나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큰길과 작은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리니 경성은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졌다.

“조 대인, 물건을 사 왔습니다.”

시종들이 크고 작은 꾸러미를 들고 객잔의 문안으로 들어왔다. 조 집사 등은 정청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가져가라, 가져가. 빨리 먹어야 길을 서두르지.”

조 집사의 말에 시종들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께선 뭘 드시죠?”

식탁 위에 즐비하게 차려진 산해진미를 보며 누군가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이런 게 입에 안 맞으신다고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생하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먹고 마시는 일은 그럭저럭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경성까지는 이제 며칠 정도의 여정밖에 남지 않은 터라 다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단숨에 경성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진 사노야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곳에서 잠시 묵어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성대한 식사까지 대접했다.

모두에게 익숙한 구역으로 들어온 터라 평판이 좋은 객잔을 골라 간판 요리들을 주문했건만, 그 아씨는 한입 먹어 보고는 맛이 없다고 했다.

“별로야.”

그러더니 정교랑은 기괴한 목록을 줄줄이 읊어 주며 재료를 사 오라고 한 후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무슨 말이야? 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저 아씨는 참 까탈스럽기도 하지. 진 사노야는 길을 서둘러야 하니 아쉬운 대로 참아 달라고 완곡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쉬겠다고 한 건 댁들이에요.”

정교랑이 진 사노야를 보며 말했다. 정교랑의 짧은 말에 시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씨께선 오는 내내 참고 견디셨어요.”

시녀는 언짢은 듯 말을 이었다.

“다들 고되게 길을 서두를 때도 아씨께선 불평 한마디 안 하셨다고요.”

그건 그랬다. 정교랑은 확실히 오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진 사노야 등은 정교랑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늑대 떼를 만났던 그날 밤만 하더라도 다른 여인 같았으면 놀라 울고불고했을 텐데, 이 여인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앉아야 할 땐 앉고 노래를 불러야 할 땐 부르면서. 고생은 잘 참고 견디면서도 때로는 응석받이처럼 까탈을 부리니 그야말로 모순이었다. 물건을 가져다주고 돌아온 시종이 조 집사에게 정산한 내용을 보고했다.

“돈을 참 빨리도 쓰시네.”

조 집사가 말했다.

“두 여인이 먹으면 얼마나 먹기에?”

진 사노야는 웃으며 자신의 시종을 손짓해 불렀다.

“내가 내겠네, 내가.”

그럴 수야 있나. 조 집사가 얼른 막으며 웃었다.

“별로 안 들었습니다. 별로 안 들었어요.”

“아씨께서 쓰신 건 많지 않아요. 그 무원산 형제들에게 준 돈이 많죠.”

시종들도 해명하듯 거들었다.

“괜찮습니다. 아씨께서 마음이 착하셔서 그렇죠.”

조 집사가 말을 덧붙였다. 조 집사는 아씨가 돈을 쓰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뜻밖에도 통 크게 쓰고 있었다. 돈을 쓰게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사람으로 여긴단 뜻이니 그거면 됐다. 떠날 때 노야와 공자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주라고. 그까짓 돈이 대수인가. 사람이 중하지, 돈이 별거라고.

시녀는 잘게 다진 재료를 건넨 후 정교랑이 솥에 넣는 걸 지켜봤다. 작은 솥에서 재료들이 와그르르 구르며 뒤섞였다.

“아씨, 아씨는 정말 착하세요. 그 무원산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주셨잖아요.”

시녀가 말했다. 정교랑은 옆으로 가서 숟가락으로 참기름과 간장 등 양념을 배합한 다음 다진 실파를 솔솔 뿌려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받으면서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따 솥을 열고 토끼고기를 살짝 데친 다음 찍어 먹어.”

시녀는 정교랑의 말뜻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앞에 놓인 작은 화로에 올려 둔 노구솥과 아주 얇게 썰어 담아 둔 고기, 푸릇푸릇한 채소를 쳐다보고 솥에서 나는 고추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확 돌았다.

“내 돈도 아닌데, 좋은 일에 쓴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잖아.”

정교랑은 자신의 양념장도 한 그릇 더 만든 후 자리에 앉았다. 시녀가 히히 웃으며 정교랑을 따라 토끼고기를 집어 솥에 넣었다. 솥에서 나온 증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별실에 확 퍼졌다. 시녀가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 소리와 정교랑의 말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뜨거워. 양념장 찍어서 식혀 먹어.”

“네, 진짜 맛있어요.”

“맛있다고 볼 순 없지. 좋은 술도 없고.”

“아씨, 이렇게 먹는 건 뭐라고 해요?”

정교랑은 잠시 침묵하다가 솥 안에서 이리저리 뒹구는 채소와 고기를 보며 천천히 세 글자를 내뱉었다.

“발하공(拨霞供. 하남 지역의 전통 음식. 토끼고기 샤브샤브와 유사함).”

* * *

술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난 진 사노야는 더 즐기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길을 서둘러야 했다. 부친이 완쾌하셔야 형제들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시종들은 이미 마차와 말을 돌보며 채비를 시작했다.

“채소며 고기, 술을 많이 샀는데 언제 다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시종이 진 사노야에게 나지막이 고했다. 솥에 한꺼번에 넣고 끓이지 않는 이상 따로 볶기만 해도 시간이 꽤 들 터였다. 진 사노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는데 저쪽에서 문소리가 나더니 정교랑과 시녀가 걸어 나왔다.

“낭자, 잘 드셨습니까?”

진 사노야는 내심 놀라며 물었다.

“내가 잘 먹었으면 좋겠어요, 못 먹었으면 좋겠어요?”

정교랑은 한 손으로 두모를 쓰고 진 사노야를 보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게 뭔 소리야! 이 여인은 참 말문이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진 사노야가 무안해하는 사이 옆에 있던 조 집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 웃었다.

남이야 잘 먹었든 못 먹었든 관심도 없잖아. 오로지 길을 서두르는 일에만 관심을 쏟으면서 괜한 걸 물었으니 자업자득이지. 진 공자의 말씀이 맞았네. 이 여인한텐 긴말하지 말고 뭐든 뜻대로 하게 둬야 해. 여인과 시녀가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젓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잘 못 먹었으니 성질을 부리는 거겠지.”

진 사노야는 별실의 문을 열어 봤다.

“남은 음식이 얼마나 되나 보자. 싸가서 가는 길에 먹어도 되고.”

진 사노야의 목소리는 문을 연 후 곧 멈췄다. 별실에 있는 낮고 화려한 탁자에는 중앙에 구리 솥이 놓여 있고 옆으로 접시만 네다섯 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옆쪽 바닥에는 잡다한 용기들이 놓여 있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아 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지만 접시는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실내에 남아 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진 사노야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냄새가 좋네, 맛있는 냄새야. 이 많은 걸 다 먹었단 말이야? 진 사노야는 놀란 표정이었다. 어떻게 다 먹었지? 고기와 채소를 많이 사 왔다고 했는데, 만들면서 먹은 건가? 자신들과 똑같은 속도로?

“무엇을 만들어 줬느냐?”

진 사노야는 그릇을 정리하러 들어온 점원에게 물었다.

“저희는 안 만들었습니다. 아씨께선 토끼고기를 씻어 잘게 저미고 간장이나 식초 같은 양념을 달라고 하셨어요. 칼과 솥, 접시를 준비해 달라고 하셨고요.”

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하며 역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안을 살폈다. 이 여인이 설마 생식을 하나?

진 사노야가 더 캐물으려는데 밖에서 시종이 공손히 들어와 채비를 마치고 출발만 기다리는 중이라는 뜻을 전했다. 아씨를 기다리자고 해 놓고선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게 한 꼴이 됐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 묻지 않고 두봉을 받아 걸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행렬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 안 가 별실에서 들린 고함 소리에 밖에서 그릇을 정리하던 점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너무 맛있어요! 진짜 신기하게 먹는 방법이에요!”

손님이 남긴 음식을 훔쳐 먹은 것도 모자라 저렇게 방정을 떨다니. 잘리고 싶어 환장했네. 점원들은 계산대에 있던 관리인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녀석이 무슨……·. 응? 그러니까 전부 솥에 넣고 끓였다고? 그럼 맛이 뒤섞일 텐데 맛있을 수가 있나?”

“일단 드셔 보시라니까요.”

“너무 맛있네. 훌륭하구나, 훌륭해.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을 불러와라. 대체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먹는 건지 와서 보라고 해.”

경성 성문이 보였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인파가 많았다.

“도착했군. 드디어 도착했어.”

전갈을 받고 일찌감치 성문에 나와 기다리던 진씨 가문 사람들이 이들을 영접했다.

“넷째 아우!”

“형님, 형님도 나오셨습니까.”

진 사노야는 얼른 말에서 내려 마중 나온 사촌 형을 쳐다봤다. 사환을 먼저 보내 부친의 병세를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떨리는 마음에 사촌 형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을 터였다.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진 사노야는 형의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속히 가게, 어서.”

진 이노야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야.”

진 사노야가 흥분을 억누르고 말에 오르자, 시종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길을 열었다.

같은 시각, 거리에는 또 다른 일행이 나와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은 팔짱을 낀 채 늠름하게 서 있었고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은 걸상에 앉아 있었는데,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 유독 이목을 끌었다.

“공자님!”

조 집사는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운 후 말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주육낭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조 집사는 바로 알아듣고 말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속히 가게. 부모님께서도 진가 저택에 계시네.”

주육낭의 말에 조 집사는 네 하고 대답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간지라 조 집사는 지체하지 않고 정교랑의 마차를 호송해 바짝 따라갔다. 그 마차는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고 휘장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거들먹거리기는.”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냉철한 거겠지.”

진 공자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오히려 내가 떨리는군.”

진 공자의 눈길이 마차를 쫓았다. 표정은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눈 속에는 생기가 더해져 있었다. 그래, 대체 어떤 여인이지? 빠르게 성문으로 들어간 마차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마차는 진씨 저택의 중문으로 곧장 들어갔다. 여종들은 받침대를 놓아 주었고 주위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마차를 쳐다봤다.

“교교.”

시녀가 휘장을 젖히자 머리에 비취 장식을 가득 단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아씨의 이름이 교랑이니 교교처럼 친근하고 느끼한 이름은 가족이나 부르는 거겠지. 경성의 가족이라면 주씨 가문밖에 없는데, 그럼 주씨 가문 부인인가? 시녀는 부인을 훑어본 다음 몸을 돌려 뒤쪽을 향해 말했다.

“아씨, 천천히 내리세요.”

얘가 아니었구나. 부인은 눈물을 닦는 척 얼른 손을 거두고 다시 마차 안을 쳐다봤다. 먼저 내린 시녀가 손을 뻗자 커다란 두봉으로 몸을 싸맨 사람이 나오더니, 시녀의 부축을 받아 내렸다. 두모로 얼굴을 가린 데다 석양이 진 무렵이라 어두워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교교.”

부인은 울며 시녀를 밀어내고 가까이 다가서며 정교랑을 확 끌어안았다.

“부인, 지금은 우실 때가 아니에요.”

시녀가 말했다.

“진 노태야부터 뵙는 게 중요하오. 얘기는 나중에 집에 가서 합시다.”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말했다. 부인은 그제야 눈물을 닦고 정교랑을 보며 손을 잡아끌었다.

“착하지, 어서 가자.”

부인은 정교랑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채에서는 진소와 백부, 숙부 집안 형제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고, 방문 앞에 있던 여인들도 이쪽을 쳐다봤다. 다들 복잡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부친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 말을 과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에는 병세가 약해 치료가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태의조차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황인데 저 여인이 과연 치료할 수 있을까? 추측과 의심과 기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이미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셨군요.”

여종 몇 명이 먼저 나서서 말을 걸었다. 진소는 불현듯 발이 무거워져 걸음을 내디디지 못했다. 감히 내디딜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염없이 기다릴 때는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이제 확실하게 결론이 날 텐데, 만에 하나……·.

주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잡고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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