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나눠 주다-
번화한 동쪽 시장은 보부상이 장사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해야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보부상 오씨는 짐을 내려놓고 소매로 땀을 닦으며 잠시 쉬었다. 보부상 오씨가 취급하는 물건에는 연지분이며 장난감, 과일 절임, 바늘과 실 등 없는 게 없었다.
어느 집 문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팔아야겠군, 보부상 오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땡땡이 장난감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이봐요, 여기요.”
부인 두 명이 아이의 손을 잡고 손짓하며 불렀다. 부인은 진열대 위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아이를 달래려고 애썼다. 서너 살쯤 된 아이 역시 진열대를 붙잡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과일 절임 먹을래?”
부인이 과일 절임 봉지들을 뒤적이며 물었다.
“앗, 이건 뭐지? 처음 보는 건데.”
“거기 글자 쓰여 있잖아. 뭐라고 쓰여 있어?”
다른 부인이 바짝 다가오며 물었다. 힐끗 보던 보부상 오씨는 어제 현묘관에서 받은 공물인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저게 뭐랬지? 중추절이라 뭐가 둥글다고 한 것 같은데.
“월병입니다. 현묘관의 공물이에요. 거기 여도사 말이 중추절을 맞이하여 단란하게 모이자는 의미로 만들었대요. 보세요, 달처럼 둥글잖아요.”
부인이 물건을 들고 꼼꼼히 쳐다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아이가 홱 잡아채 기름종이를 뜯었다.
“꽃이다, 꽃.”
아이가 손에 든 월병을 보며 소리치고는 한입 깨물어 먹었다.
“어머, 바로 먹으면 어떡해.”
부인이 놀라 소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입을 댄 물건을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돈을 꺼냈다.
“얼마예요?”
“아주머니, 이건 돈을 받을 수 없어요. 도관에서 보시한 건데 어떻게 돈을 받아요. 같이 복을 나눈 셈 칩시다.”
보부상 오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두 부인은 그 자리에서 실 몇 개를 골라 계산을 끝냈다. 여인들은 작은 거 하나만 챙겨 줘도 좋아한다니까. 기분이 좋아진 보부상 오씨는 멜대를 들고 딸랑이 장난감을 흔들어 소리치며 자리를 떴다. 맞은편에서 뚱뚱한 노인이 너털너털 걸어왔다. 아이가 소리쳐 부르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할아버지.”
뚱뚱한 노인은 이쪽으로 달려오던 아이를 성큼성큼 걸어가 안아 주었다. 아이의 손에 있던 월병이 사내의 얼굴에 닿았다.
“이게 뭐냐?”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달이에요.”
아이가 방금 들은 말을 전하자 노인은 놀란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이가 노인의 입에 월병을 갖다 댔다.
“엄청 맛있어요.”
노인은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먹더니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
“엇?”
월병을 삼킨 노인은 아쉬운지 월병을 한입 더 베어 먹었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골목에 또다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내 달 다 먹었잖아요.”
“착하지, 할아비가 더 사줄게. 보부상, 이봐요. 거기 서라고……·.”
마당에 들어서자 한데 모여 조잘조잘 떠드는 몸종들의 모습이 정사낭의 눈에 들어왔다. 정사낭이 심기가 불편한 듯 발을 몇 번 구르자, 몸종들이 얼른 흩어졌다.
“공자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춘란이 얼른 정사낭의 겉옷을 받으며 말했다.
“이따 손님이 오실 거다.”
정사낭의 말에 춘란은 네 하고 대답하며 물었다.
“차로 준비할까요, 술로 준비할까요?”
“차.”
정사낭이 방으로 들어가자 춘란이 따라 들어갔다.
“공자님.”
잠시 망설이던 춘란이 결국 입을 열었다.
“현묘관 몸종이 또 바뀌었어요.”
정사낭은 응 하고 대꾸한 것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교랑 아씨 쪽에 반근 대신 갔던 그 몸종도 떠났거든요.”
춘란은 한번 입을 열자 멈출 수 없는 듯 이어 말했다.
“알고 보니 어제 노야께서 그 애를 부른 게 그 일 때문이었어요. 장 노태야 댁으로 보냈대요. 그 애가 만든 간식이 입에 맞으시다며……·.”
정사낭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사람이 또 바뀌었다고? 누가 또 데려간 거야? 바보 교랑의 몸종들은 거기 남아나질 못하는 건가, 탐내는 사람이 많은 건가?
“공자님, 장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언니, 이 간식들론 부족할 것 같은데.”
한 몸종이 접시에 놓인 간식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도 몇 개 있어.”
다른 몸종이 다른 탁자에 있던 기름종이에 싼 과일 절임 몇 개를 들며 말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야?”
몸종이 받으며 물었다.
“아, 여기 글씨가 있구나.”
“다 됐니?”
춘란이 들어오며 재촉했다.
“장 공자 오셨어.”
두 몸종은 지체하지 않고 얼른 간식을 챙겨 춘란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공자끼리 담소를 나눌 때에는 몸종들이 곁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춘란 같은 측근 시녀도 문밖에 서서 대기해야 했다. 방 안에서는 시와 그림을 논하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두 공자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아쉬운 듯 자리를 파했다.
“아, 참. 사낭, 자네 집 간식이 맛있군. 우리 집 열셋째 주게 좀 챙겨 갈 수 있겠나. 그 애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거든.”
문을 나서려던 장 공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래, 그래.”
정사낭이 웃으며 물었다.
“어떤 걸 원하는데?”
“저 기름종이에 싼 복숭아.”
장 공자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대답했다. 정사낭이 몸종에게 가져오라는 명을 내렸다. 잠시 후 몸종들이 당황하며 돌아왔다.
“공자님, 이건 집에서 한 게 아니에요.”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장 공자는 뜻밖이라는 눈치였고 정사낭은 난감해했다.
“그럼 어디서 샀는지 거기 가서 사 오면 되지 않느냐.”
정사낭이 말했다.
“아닐세, 아니야. 어디서 샀는지 말해 주면 내가 가서 사겠네.”
장 공자가 얼른 웃으며 말했다. 몸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 춘란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춘란 언니가 가져온 거예요.”
춘란은 멈칫했다.
“아, 그게……·.”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대답했다.
“현묘관 간식 말씀이세요?”
“현묘관?”
장 공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같은 시각 성 안에서도 여러 사람이 같은 이름을 입에 올렸다.
“현묘관.”
그들은 손에 든 기름종이에 쓰인 꽃무늬 글자와 앞에 있는 집사를 차례로 보며 말했다.
“이게 장 노태야께서 특별히 보내신 중추절 선물이라고?”
현묘관 여도사들의 일상은 예전과 다름없으나 또 많이 달라지기도 했다. 산 위의 태평궁에 있던 몸종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 앞으론 태평궁에서 지내시겠대. 사매와 둘째 사저도 그쪽 일을 도우러 갔어. 영혜, 향불 좀 봐.”
“사저,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우리 둘이면 충분해. 어차피 사람도 별로 안 오고.”
여도사 영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사님, 도사님.”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며 들어왔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사람이 오다니. 두 여도사는 표정을 가다듬고 얼른 나가 맞이했다.
“여기서 월병을 만들었다지요?”
도관을 찾은 노인이 물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몇 명이 더 몰려왔다.
“도사님, 중추절 공물이 남았습니까?”
“도사님, 치성을 드려도 될까요?”
“도사님, 여기 식사나 간식 공양 있습니까?”
왁자지껄 수다스럽게 떠들며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두 여도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구의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두 사람으론 도관이 부족하겠는데!
떠들썩한 산 아래의 도관과 달리 산 위의 태평궁은 여전했다. 부엌에서 두 몸종이 무언가를 만드는 냄새와 조잘조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동이 걸어와 고개를 빼고 방 안을 들여다봤다. 병풍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씨, 아씨.”
도동은 겁을 먹은 듯 소리쳤다. 방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도동은 부엌으로 뛰어가 두 몸종에게 물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회랑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두 몸종이 밖을 힐끔 보며 대답했다.
“어이구, 바보가 뜀박질도 잘하네. 또 어딜 간 거야, 말도 한마디 없이.”
“잘 보고 있었어야죠.”
도동은 절박했다.
“누가 할 소린데. 그럼 너희는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뭐 했어? 남의 집 음식을 공으로 먹으려고?”
허리춤에 손을 댄 두 몸종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도동은 놀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얼른 가서 찾아.”
두 몸종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뻗자 도동은 놀라 얼른 뛰어나갔다. 문을 나서다가 하마터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뒤에서 두 몸종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동은 부끄럽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불안에 떨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부님과 사저는 저녁때 아씨 곁을 지켜야 해서 이 시간엔 경전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도동이 잠시 안으로 들어가 향불을 보고 온 사이에 아씨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 바보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아씨.”
도동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응?”
측문에서 누군가가 대답했다. 도동이 얼른 손을 들어 눈물을 닦자 그제야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무늬 없는 비단 겉옷에 붉은 치마 차림으로 흰 버선에 나막신을 신은 채 긴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정교랑이었다.
“아씨.”
도동이 얼른 다가가며 소리쳤다. 정교랑은 도동을 보며 나뭇가지로 그린 꽃을 가리켰다.
“어때?”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 어디 가셨던 거예요?”
도동이 물었다.
“산책.”
정교랑은 곧장 정자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반근 언니가 있을 땐 둘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산책을 했겠지. 도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산책하는구나.
“아씨, 다음에 나가실 땐 절 부르세요.”
뒤따라가던 도동은 짠한 마음이 들어 큰 소리로 말하다가 곧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절 부르시라고요. 혹여, 늑대라도 만나면, 잡아먹혀요.”
어느새 정자의 돌계단에 앉아 있던 정교랑은 그 말에 도동을 쳐다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정교랑은 손에 쥔 나뭇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아씨, 물 드시겠어요?”
“돌 위는 차가워요. 그만 들어가시죠.”
“아씨, 저기, 배 안 고프세요?”
도동이 수시로 물었지만 정교랑은 대답 없이 손에 든 나뭇가지로 가로획, 세로획, 갈고리, 삐침 등을 그려대는 일에 열중했다.
“아씨, 뭘 그리세요?”
도동이 호기심에 몇 발자국 다가가 고개 숙여 쳐다보며 물었다. 바닥에는 갈고리며 삐침이 이리저리 뒤섞여 글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뭇가지로 세로획과 삐침을 그리자 글자로 보였던 게 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것저것 쓰고 낙서하나 보네. 도동이 고개를 들자 정교랑이 나뭇가지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꾸어 계속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낙서네, 낙서. 도동은 그렇게 확신했다. 왼손으로 글씨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씨, 아씨.”
앞쪽에서 손 관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교랑과 도동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봤다. 방 쪽으로 급히 달려가는 손 관주의 모습이 보였다.
“사부님, 여기예요.”
도동이 소리쳤다. 손 관주는 그제야 둘을 발견하고 급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찌나 허둥대며 걸어오는지 부엌 문가에 서 있던 두 몸종은 그 모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난리 나셨네. 잠깐 안 보인다고 저리 허둥대는 꼴 좀 봐.”
한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바보 교랑 아씨가 없으면 현묘관도 끝장인걸. 저것 좀 봐. 다음 향불을 어디서 태울지도 교랑 아씨한테 물어볼 태세야.”
뜻밖에도 두 몸종의 추측이 적중했다.
“아씨, 이게 무슨 일이죠?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손 관주가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보면서도 손에 든 나뭇가지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음식 공양을 청하네요.”
“잊었어요?”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이 물었다.
손 관주는 그 질문에 멍해져서 소녀의 무뚝뚝한 표정을 쳐다보다 곧 이성을 회복했다.
“그러니까, 그저께, 산 아래에서 행인들에게 공물을 나눠 준 일이요?”
손 관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일 때문에? 설마.
“그게 하나고, 또 하나가 있어요. 반근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또다시 멍해졌던 손 관주는 그날 반근이 공물과 말린 과일을 한 바구니 가져갔던 일을 떠올렸다. 성 안에 있는 그 어르신께 갖다 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어르신은 비범한 신분 같았다. 선물을 받고 나서 반근의 체면을 챙겨 주고자 현묘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가?
“하여간 똑똑한 사람들은 그렇다니까요. 그냥 주면 먹지를 못하고, 기어이 뭐라도 해야 마음을 놓죠.”
정교랑은 손에 든 나뭇가지로 꽃을 그리며 말했다. 손발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니 기분이 정말 좋네. 얼마 안 가 말도 편히 할 수 있겠지. 정교랑이 또다시 손을 바꾸어 몇 글자를 적는 모습을 보며 손 관주는 이내 깨달았다. 담담한 모습으로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소녀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거대하고 맹렬한 기세는 잠재우기 힘들다는 것을.
반근에게 고마워하고 그 어르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면, 최종적으로 고맙단 인사를 받을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은지 조금 알리고 싶은지 물었다. 이름을 알리고 싶냐고 물은 게 아니었다. 이름을 알리는 정도는 아주 손쉬운 일이라는 듯이. 그러더니 과연 눈 깜짝할 새에 정말 이름을 널리 알리지 않았는가.
“아씨께 감사드립니다.”
손 관주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정교랑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며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아씨, 그럼 음식을 다 썼으니 더 만들어야겠죠?”
손 관주가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도사님, 또 잊으셨네요. 여긴 도관이지 음식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손 관주는 끓어오르던 흥분을 가라앉혔다.
“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입니다. 귀한 물건은 정교해야 중한 법이고요.”
정교랑은 그 말을 남기고 방 쪽으로 걸어갔다. 손 관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오랫동안 수행을 헛했군요.”
“그건 아닙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도사님은 당사자라 그렇습니다.”
손 관주는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정교랑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올 때와 비교하자면 발걸음에 한결 여유가 있고 표정도 담담했다.
정교랑과 손 관주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후 정자 근처에는 도동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방금 사부와 저 바보 교랑 아씨가 무슨 얘길 한 거지? 둘이 얘기가 잘 통하는 것 같은데?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
“사실 내가 바보였던 건가?”
도동이 중얼거렸다.
산 아래 도관에 모여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들어서는 관주를 쳐다봤다. 경건한 표정에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높이 뜬 가을 해의 햇빛이 손 관주의 몸으로 쏟아지자 눈이 부셨다. 이 낡은 도관마저 영험한 기운에 휩싸인 듯 보였다. 현묘관이 과연 다르긴 다르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와 같은 생각이 스쳤다.
나귀 마차에 탄 장 노태야는 떠들썩한 현묘관에서 시선을 거두고 마차 옆에 선 몸종을 쳐다봤다. 몸종은 슬픈 표정을 애써 억누르느라 몸까지 떨리고 있었다.
“반근, 우리와 함께 경성으로 가는 게 싫으냐?”
장 노태야의 물음에 몸종은 깜짝 놀란 듯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요. 노태야, 소인은 가고 싶어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그 말을 믿으면, 내가 바보게? 군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가거라.”
장 노태야가 산 위의 태평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몸종은 태평궁을 바라봤다. 불과 한 달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불태워 버릴 때도 힘을 보탰고 새로 지을 때도 힘을 보탰다. 이곳에서 웃고, 울고, 겁먹고, 두려워하고, 흥분했던 시간들. 지금껏 산 17년보다 한 달 동안 더 많은 경험을 했다. 가벼운 맘으로 오가던 이 길이 지금은 한 걸음 내디디는 것도 이토록 힘든 길이 되다니. 지금 안 올라가면 다시는 못 볼 테고 그럼 아씨께서 얼마나 상심하실까. 그렇다고 올라가자니……·.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생에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래도 단 한 번쯤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눈 딱 감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몸종은 산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엔 느릿느릿 걷다가 차츰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층계를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아씨, 아씨, 아씨.
* * *
두 몸종은 겁을 먹고 부엌에서 물러났다. 이 바보는 액운을 불러오기로 유명했으니 괜히 엮였다가는 재수가 없을 터였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여도사들이 시중을 드는 덕분에 두 몸종은 시늉만 해도 됐는데, 지금껏 둘을 본체만체하던 바보 교랑 아씨가 갑자기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밥 지을 준비를 하던 둘을 내쫓는 게 아닌가.
“아휴, 불을 함부로 갖고 놀면 못써요.”
둘 중 한 몸종이 부엌에 있는 소녀를 보며 소리쳤다. 겁도 나고 초조하기도 했다.
“원하는 게 뭔데요. 말하면 우리가 할게요.”
나머지 한 몸종도 거들었다. 정교랑은 몸을 돌리더니 손에 든 부지깽이로 둘을 겨누며 말했다.
“비켜.”
두 몸종은 기겁하며 소리치고 뛰쳐나왔다. 바보는 사람을 때린다고! 헐레벌떡 도망 나오던 둘은 문가에서 누군가와 퍽 하고 부딪쳤다. 두 몸종은 또다시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야? 아씨는? 뭔데 이래?”
몸종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두 몸종은 뛰어온 상대방을 멍하니 쳐다봤다.
“너, 누구야?”
두 몸종이 물었다.
“나 반근이야.”
몸종은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씨, 아씨, 반근이 돌아왔어요. 반근이 왔다고요.”
정교랑이 부엌 문가에 나타났다. 손에 여전히 부지깽이를 들고 있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반근.”
정교랑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반근을 쳐다보며 말했다.
“돌아왔구나.”
몸종은 눈물이 쏟아져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아씨의 손에 들린 부지깽이는 또렷이 보였다. 부지깽이라니……·. 아무도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 손수 밥을 지으시나? 몸종은 아예 대성통곡을 하며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정교랑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에라, 모르겠다. 정씨 가문 눈 밖에 나면 그만이지. 부모님이야 고생을 좀 하겠지만 언제는 뭐 고생 안 했나. 이제 그런 거 모르겠고 아씨의 시중이나 들을래.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때리든 욕하든 팔아 버리든 마음대로 하라지. 어쨌든 지금은 여기 있을래.
그 광경을 목격한 두 몸종은 어리둥절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도동 역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울지 마, 귀찮게.”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물을 닦았다.
“아씨, 아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할게요.”
몸종이 일어나며 말하자 정교랑이 손에 든 부지깽이로 몸종을 막으며 말했다.
“넌 거기 서서, 보고 있어.”
몸종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정교랑을 바라봤다.
“서서, 날 봐.”
정교랑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웃잖아. 아씨는 웃는 일이 드문데, 기분이 좋단 뜻이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뒤돌아 부엌으로 들어갔다.
현묘관에서 키운 조롱박은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낸 다음 잘라 놓았다. 찹쌀 반죽도 딱 알맞게 익었다. 썰어 놓은 조롱박을 달군 기름 솥에 넣자 촤르르 소리가 났다. 부뚜막 다른 한쪽에서는 밥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와 기름 섞인 연기, 튀김 소리가 부엌에 혼잡하게 뒤섞였다.
얼마 안 가 요리 하나와 밥 한 그릇, 찹쌀떡 한 접시가 놓였다. 몸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가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집중해서 지켜봤다. 정교랑이 음식을 쟁반에 담아 들고 나왔다.
“다 됐다, 밥 먹어도 되겠어.”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담. 딱 내 몫만 했네. 넌, 그냥 보고 있어야겠다.”
몸종은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
“아씨.”
몸종이 투덜거렸다.
“또 절 놀리시네요.”
방문이 닫히면서 밖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을 가렸다. 두 몸종은 놀란 마음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아 정신을 못 차린 표정이었다.
“바보가 밥도 할 줄 알아?”
두 몸종이 멍하니 서서 말했다. 도동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관주님이 저 바보 낭자에게 왜 그리 공손한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저 정씨 댁의 돈을 받아서?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관주님이 그런 이유로 그리 공손했을 린 없어. 이 아씨는,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가 아니었어!
몸종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앞에 있는 여인이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벌써 아주 오랫동안 못 봤다는 듯이. 몸종은 자신이 어디 갔었는지 말하지 않았고 정교랑 역시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마주 앉아 있었다.
정교랑은 과연 조금도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싹 비운 다음에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몸종이 일어나 밥상을 치우려고 하자 정교랑이 손을 들어 막으며 말했다.
“반근, 앉아서, 날 봐.”
몸종은 멈칫하며 정교랑이 그릇과 젓가락을 쟁반에 담고 일어나 들고 방문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문밖에 있던 두 몸종은 무섭고 두려운 눈치였다. 자신들이 왜 무섭고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이 두 몸종에게 말하고 있었다. 집에 있는 다른 아씨를 대하듯 이 아씨를 대해야 한다고.
“아씨, 저희가, 할게요.”
두 몸종이 손을 뻗으며 쟁반을 받았다. 정교랑이 둘에게 쟁반을 건네자 두 몸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부엌으로 들고 가 설거지를 했다. 정교랑은 문가에서 고개를 돌려 몸종을 쳐다보며 물었다.
“반근, 똑똑히 봤으니 알겠지?”
몸종은 영문을 모르겠는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반근, 난 이제 혼자 스스로 챙길 수 있어. 넌, 걱정 말고 가.”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아씨, 싫어요. 아씨, 저 안 갈래요.”
반근은 무릎을 꿇은 채로 다가와 흐느껴 울었다.
“넌 가야 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며 흐느꼈다.
“울지 마. 지금은, 내 말대로 해. 내 말대로, 해.”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순간 비바람이 불던 그날 밤 일을 떠올랐다.
긴말하지 마, 시간이 없어. 곧 바람이 불 거야. 지금은, 내 말대로 해. 넌 생각할 필요 없고 묻지도 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기억했다가, 그대로만 하면 돼. 말이든 행동이든 그 어떤 단계에서도 착오가 있어선 안 돼.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정교랑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내가 말했지. 밥을 하는 건 작은 도(道)고 잔재주일 뿐이라고. 마음을 쓰기만 하면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 수 있고, 넌 이제 그걸 배웠어. 그러니까, 넌 가도 돼. 가서 세상을 바꿔.”
몸종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그 말을 잊지는 않았다. 내 말대로 해, 묻지 말고.
“이건 널 위한 일이고, 날 위한 일이기도 해. 너와 나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우리가, 왜 포기를 해?”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는 몸종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네 가족을 버리고, 네 목숨을 걸고 날 보러 왔어. 내가, 당연히 갚아야지. 더 좋은 가족과 목숨으로.”
* * *
산에서 천천히 내려오던 노인은 노복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현묘관을 쳐다봤다. 현묘관을 드나드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노야, 노야께서 큰 도움을 주셨네요.”
노복이 흥분하여 말했다. 노태야가 성 안 사람들에게 돌린 선물이 아니었다면 현묘관을 누가 알았겠는가. 안다 해도 눈길 한번 안 줬을 터였다.
“바람은 힘을 보태는 것뿐이다.”
노인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는 자신의 진짜 실력에 달렸지.”
현묘관의 간식은 확실히 맛있었고 일 처리도 깔끔했다. 이 좋은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겠지. 좋은 기회가 닿았으니 현묘하도다.
“노태야, 이제 경성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월병 같은 걸 좀 달라고 해서 챙겨 갈까요?”
노복이 물었다.
“이젠 못 얻을 것 같구나.”
노인은 현묘관에서 나오는 사람을 가리키고 웃으며 말했다.
“봐라, 다들 실망해서 나오잖느냐. 손 도사는 수행에 전념할 생각인 게야. 속세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로구나.”
노복도 쳐다보고 따라 웃었다.
“도사님이 지혜로우시네요. 근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우리 몫은 있겠죠.”
노인은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산 아래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귀 마차 앞으로 온 노복과 노인은 마차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랐다.
“반근?”
노복이 소리쳤다.
“어찌……·.”
간 거 아니었어?
“노태야.”
몸종이 예를 표하며 퉁퉁 부어 빨개진 눈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노인도 놀란 표정이었다.
“천 리 길이 넘는 먼 걸음이 될 것이다.”
노인이 말했다.
“네, 방금 소인이 아씨께 말씀드렸어요. 아씨도 기뻐하셨고요.”
몸종이 대답했다.
“전엔 집에서 곧장 가는 바람에 아씨께 말씀을 못 드려서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노태야께 말씀드리자니 제가 가기 싫어서 그런다고 오해하실까 봐 차마 말씀도 못 드렸고요. 그런데 현명하신 노태야께서 소인에게 인사하러 갔다 올 기회를 주셨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노인은 몸종을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잘못 본 게로구나. 옛 주인이 그리운 게 아니라 작별 인사를 못 해 아쉬운 거였다?”
노인이 옷을 걷어 올리고 마차에 앉으며 말했다. 몸종의 표정에 암담한 기운이 언뜻 스쳤다.
“소인은 노비의 몸이에요. 아씨를 따르기 전엔 물청소와 빨래를 맡았죠. 윗전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최선을 다하는 게 소인의 본분이죠.”
몸종은 고개를 들고 노인을 보며 싱긋 웃었다.
“노야께서 소인에게 아씨의 시중을 들라고 하면 소인은 성심을 다해 아씨를 모시고, 노야께서 소인에게 노태야의 시중을 들라고 하면 소인은 당연히 성심을 다해 노태야를 모셔야 해요.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본분을 망각할 순 없죠.”
노인은 웃으며 말없이 있었다.
“아씨께서도 들으시고 기뻐하셨어요. 소인을 위해 기뻐해 주셨죠. 아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이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만약 집에 있었다면 소인은 평생 심부름이나 하는 몸종으로 지냈을 텐데, 노태야께서 소인의 손재주가 마음에 드신다니 소인 앞으로 더 정진하겠습니다.”
몸종은 산 위의 태평궁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훗날 소인이 정진하여 솜씨가 더 좋아지면 옛 주인인 아씨께서도 먹을 복을 함께 누리실 수 있을 거래요. 아씨께서 소인에게 아씨를 대신해 노태야께 미리 감사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음식을 안 주겠다고 인색하게 굴지 말라고 하시면서요.”
노인은 껄껄 웃었다.
“그래, 그래. 복은 같이 나눠야지.”
노복도 신이 나서 채찍을 들었다.
“그럼 노야, 손 도사님한테 말린 과일이랑 과일 절임 같은 거 안 얻어도 되겠네요. 우리가 가진 것만 해도 차고 넘치게 먹겠어요.”
노인과 몸종이 함께 웃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요.”
몸종은 무언가 생각난 듯 또다시 태평궁을 힐끔 보며 말했다.
“외람되지만 소인이 무리한 청을 하나 올릴까 합니다.”
노인은 몸종을 보며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노태야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아씨가 병을 앓고 계셔서 거동이 불편하세요. 아씨는 남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글을 읽고 글자를 쓸 줄 아는 몸종 하나를 아씨께 붙여 주셨으면 해요.”
몸종은 불안한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보며 노인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사실 이런 청은 저희 노야께 올려야 하지만 노야께서 소인이 괜한 일을 꾸민다고 여기실까 겁이 나서요. 그럼 몸종도 안 붙여 주시고 아씨만 괜한 원성을 들으실 수 있잖아요.”
노인은 또다시 껄껄 웃으며 물었다.
“나는 괜한 일을 꾸민다고 할까 봐 겁나지 않고?”
“노태야께선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몸종은 얼른 말을 이었다.
“노태야께선 소인이 슬퍼하는 걸 보고도 나무라거나 내쫓으시기는커녕 소인이 아씨를 뵐 수 있도록 이곳으로 데려오셨어요. 노태야, 정말 감사드려요. 노태야께선 좋은 분이세요. 노태야를 모시게 된 건 소인의 복이에요.”
노인은 몸종을 보며 감탄했다.
“너 같은 몸종을 두다니 너희 댁 아씨도 복이 많은 사람이로구나.”
이 일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통 해결이 안 되는 난제였다. 몸종을 데려가지 말자니 정씨 댁 이노야가 체면을 구겨 노여워할 게 뻔했다. 자신이 신신당부하면 당분간은 이 몸종을 어찌하지 않겠지만 자신은 조만간 떠날 몸이었다. 이 몸종의 안전을 잠시 지켜 줄 순 있을지 몰라도 평생 지켜 주긴 힘들었다.
그런데 이 몸종이 마음을 바꾸다니. 정말 자신이 잘못 봤던 것인가. 옛 주인을 모시지 못해 아쉬운 게 아니라 정말 그저 얼굴을 보고 인사하고 싶었던 거라고? 혹시,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건가?
노인은 태평궁을 바라봤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정교랑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아씨, 슬퍼하지 마세요.”
손 관주가 입을 열었다.
“날이 찹니다. 그만 들어가세요.”
“난 슬프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잘된 일이에요.”
손 관주는 쓸쓸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아이는 고생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습관이 됐나 보네.
“저 아이는, 나랑 있으면, 계속 그렇게 살겠지만, 떠나서, 저쪽으로 가면, 사람들이, 다 놀랄 거예요. 기뻐하면서, 저 애를 귀히 여기겠죠.”
정교랑이 말했다. 기본적인 맛조차 갖추지 못한 해황 등자를 천하 진미로 치켜세우며 칭찬할 정도니 큰 세상을 모르는 게지. 모시기도 쉬울 거야.
손 관주는 이해가 갈 듯 말 듯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요.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먹는 게 제일 간단하다고요. 누가 시중을 들든 난 다 괜찮아요. 더구나, 이젠 내 힘으로 먹고 마실 수도 있고요.”
정교랑의 말에 손 관주는 네 하고 공손히 대답한 후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씨의 병이 많이 나으셨네요. 그래도 아씨께서 직접 하시게 둘 수야 없죠. 저희를 시키세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몸종이 필요해요.”
정교랑은 산 아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요. 이제 저 노인은, 먹을 복이 생겼으니, 교환하면 좋겠네요. 그럼 나도 좋고 그쪽도 좋고 모두가 좋잖아요. 좋은 일이죠.”
정교랑이 손 관주를 쳐다봤다. 손 관주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랬구나. 그럼, 정말 슬퍼할 일이 아닌 건가. 두 사람은 뒤돌아 산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위로 올라오고 있는 노인을 보고 놀랐다. 물론 한 사람만 놀랐지만.
물을 건넨 손 관주가 한쪽 옆에 꿇어앉았다. 손 관주는 시종일관 조용히 물을 따르고 차를 올리며 여인을 각별히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 노태야는 내심 확신했다.
“처음 이곳을 봤을 땐 정교하게만 보이더니, 지금 다시 보니 정교한 데다 묘한 아름다움까지 있구려.”
장 노태야는 웃으며 빙 둘러보더니 정교랑의 몸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어르신이 혜안을 가지셔서죠.”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예를 표했다.
“낭자가 그리 말하니 부끄럽소.”
장 노태야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눈이 어두웠소이다, 눈이 어두웠어요. 내 방금 반근에게 군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할 때만 해도 반근이 낭자를 돌본다고 여겼소. 그런데 이제 보니 낭자가 반근을 돌보고 있었구려.”
손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알아보는 사람이 있네. 이곳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그럴 만도 하죠. 겸손하십니다.”
정교랑의 말에 장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사람들은 선입견을 갖고 있다. 이 바보가 지혜를 되찾았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해해 줘서 고맙소, 낭자.”
장 노태야는 손에 든 물그릇을 돌리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구려. 낭자의 이번 행동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소, 아니면 매정하여 내린 결정이었소?”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 말은 잔잔한 물가에 물보라를 일으키는 돌멩이처럼 평온을 깨뜨렸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면 연민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정이 떨어져 그랬다면 밉상이 아닌가.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정교랑은 눈을 들어 노인을 쳐다봤다. 똑똑한 사람은 이렇다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궁금해하는 걸 알아야 마음이 놓인다.
“어르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매정한 것이든, 제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손 관주는 사부님 앞에서 경문을 공부하던 때로 돌아간 듯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아는 거야? 각자 자기 할 말 하는 거 아냐? 손 관주는 시선을 내리깔고 물 주전자를 들어 두 사람에게 물을 더 부어 주었다.
물 드세요, 물.
“어쩔 수 없는 거라면, 사람을 돌려드리겠소이다.”
장 노태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매정해서 그런 거라면, 내 그 아이를 받고 다른 아이를 보내 드리지요.”
손 관주는 뭔가 알 것 같았다. 전에 아씨가 자신에게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은지 조금 알리고 싶은지 물었던 것과 비슷한 거네.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좋습니다. 도로 돌려보내세요.”
정교랑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 노태야는 그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순간 멍해졌다. 과대평가했나 보군. 생각했던 것만큼 속이 깊은 게 아닌데.
“내 말은, 그 아이가 마음에 들면 돌려드리겠단 거요. 새로운 몸종이 갖고 싶으면 새로운 아이도 보내 드리겠소. 교환하지 않아도 되오.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내가 낭자의 부친에게 말하면 노여워하지 않을 거요.”
장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생각엔, 노여워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정교랑이 장 노태야를 보며 말했다.
“연세도 꽤 있으신 분이, 어찌, 어린애처럼 구시죠?”
손 관주는 두려움에 숨을 들이켰다. 이 말은, 정말이지……·. 장 노태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나이 먹도록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손녀뻘은 족히 되는 사람에게서. 하지만 말은 좀 거칠어도 이치는 분명했기에 장 노태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흑백은 젊은 사람의 눈에 더 분명하게 갈릴지도 몰랐다. 아주 거리낌 없이 솔직하군. 번드르르한 말로 꾸미지도 않고 자신과 남을 속일 필요도 없이.
“그 애가, 어르신을 따라가기 싫어한 건 맞아요.”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애를 설득하고, 가르친 것도 맞고요. 어르신께 그리 말씀드리라고 했죠. 그 아이가 호의를 저버리고, 여기 남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신에게도 안 좋고, 부모와 가족에게도 안 좋은 일이죠. 제가 매정해서 그랬다고 여기신다면, 그냥 돌려보내세요. 여기 와서, 제게 이상한 말을, 늘어놓지 마시고요. 저희로선 딱히 방도가 없거든요. 어르신 눈엔, 괘씸하게 보이겠지만요. 그 아이가 어르신을 따라가면, 좋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네요.”
여인은 멍한 눈빛으로 느릿느릿 말을 마친 후 굳은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있었다면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으리라. 피곤하다, 너무 피곤해. 아프다, 너무 아파. 정교랑은 커다란 옷소매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장 노태야는 머쓱해졌다. 눈앞에 이 소녀는 이제 겨우 열댓 살이었다. 아직 어린애가 아닌가. 이제 막 병이 나았거나 어쩌면 아직 완쾌도 안 된 아이인데 이런 애한테 무슨 화를 낸단 말인가.
몸종은 결국 정씨 가문의 몸종이었다. 살리든 죽이든 팔아 버리든 그녀의 권한 밖이었다. 부친이 보내 버리겠다는데 딸이 어쩌겠는가. 이 아이가 차라리 그 기회를 이용해 더 영리한 몸종으로, 정씨 가문의 통제를 받지 않는 몸종으로 바꾼다 한들 그걸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최악의 상황에서 내린 최선의 선택이요, 부득이한 형편에 찾은 최고의 결과물이었다. 애초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건데, 정이 떨어지고말고 논할 것도 없지. 오래 살면 점점 심보가 고약해지는 법이라더니.
“그렇군, 알겠소이다. 낭자, 걱정 마시오. 내 그 아이를 잘 대해 주리다. 두 사람의 애틋한 마음을 저버릴 일 없을 거요.”
장 노태야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정교랑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어린애들 성격이란. 어릴 때부터 도관에서 자랐으니 속세와 왕래가 적었을 터, 마음이 갓난아이처럼 순수하고 곧은 것도 이해는 갔다.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쁜 게지. 정교랑의 굳은 얼굴은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장 노태야는 도리어 점점 기분이 좋아져 듣기 좋은 말까지 몇 마디 덧붙였다. 정교랑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책이요.”
정교랑이 입을 열자 장 노태야는 누가 자신에게 책을 주기라도 한 듯 기뻐했다.
“그래요, 좋소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로 골라 보내 주겠소.”
장 노태야는 장난꾸러기를 달래는 일에 성공해 기쁘고 뿌듯한 말투였다.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어르신은 좋은 분이라고요. 반근을 잘 대해 주시겠죠. 저한테도요.”
칭찬을 받자 장 노태야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 누구보다 우리에게 잘해 주시죠.”
정교랑이 말했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에 표정의 변화도 없었지만, 장 노태야의 귓가로 들어간 그 말은 마음을 울렸다. 어릴 때 버려져 불길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았고, 유일하게 아껴 주고 사랑해 주던 모친과 외조모마저 차례로 세상을 떴다. 천 리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건만 또다시 도관으로 보내졌다.
가족은 없느니만 못했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여전히 바보였다면 괴로울 일도 없었겠으나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절절히 느끼고 있으니 더 괴로울 수밖에. 이런……·.
장 노태야는 가슴에 찌르르한 통증을 느꼈다. 눈시울마저 시큰해졌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소?”
장 노태야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여기가 제 집이에요. 그 집은, 필요 없어요.”
가엾은 것! 무겁게 내려앉은 장 노태야의 마음에 곧 분노가 일었다. 부모라는 작자들이 대체 어떻기에,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그런 자가 글공부를 한 서생이라니!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라니! 제 자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자가 백성을 살뜰히 대하겠는가!
장 노태야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좋소이다. 여기가 좋으면 여기서 지내시오. 그 집은, 안 가도 그만이오. 내가 좋은 아이로 골라 보내 주겠소.”
성공이다! 노인의 두 눈에 가득했던 의심과 당혹함은 어느덧 사라진 지 오래였고, 분노와 불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똑똑한 사람은 이렇다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들어야만 마음을 놓는다.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정교랑은 몸을 굽혀 인사하며 감사를 표했다.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던 노복과 몸종은 산 아래로 내려오는 노인의 모습이 보이자 얼른 다가가 맞이했다.
“노태야, 아씨께선……·.”
몸종이 서둘러 물었다.
“슬퍼하지 않으세요?”
슬퍼하냐고? 장 노태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태평궁에서 끓어올랐던 분노는 차츰 가라앉았다. 왠지 내가 끌려다닌 느낌이로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 노태야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리석은 것.”
장 노태야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몸종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고로 정이 많으면 상처를 많이 받는 법이다. 넌 너희 아씨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구나.”
몸종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전 아씨와 비교도 안 되죠. 아씨는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몸종이 또르르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대단하고 말고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각자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면 그게 대단한 거지.”
장 노태야가 말을 이었다.
“가자. 저쪽은 네가 필요 없다지만, 난 네가 필요하다.”
뭐라고? 저쪽이라니? 누가 날 필요 없다고 했단 거지? 몸종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노태야, 그럼 이 길로 출발해 경성으로 갑니까?”
노복이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을 시켜 도련님께 알려야겠습니다.”
도련님은 바로 장순이었다. 남들 앞에선 노야라는 호칭을 썼지만 노복의 눈엔 여전히 도련님이었다. 장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또다시 산 위를 힐끔 쳐다봤다.
“그렇다면 내가 매정하게 굴도록 도와주지.”
노인은 옷소매를 거두며 손을 들었다.
“만평,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내 자고에게 서찰을 써야겠다.”
자고(子固)는 장순의 자(字)였다.
장 노태야가 산길에서 천천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정교랑은 오랫동안 서서 지켜봤다. 손 관주도 옆에 공손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손 관주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햇빛을 받아 어지러이 그림자가 진 여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도관에 벼락을 내리친 일은 직접 목도한 게 아니라 어렴풋이 추측만으로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면, 오늘은 오고 가는 대화를 친히 지켜본 터라 더욱 공포심이 생겼다.
이 어린 낭자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고, 몇 마디 말로 어르신을 설득했다. 그 몸종의 지위를 탄탄히 다져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몸종도 얻어냈다. 그것도 자기 부친의 등에 은밀하고도 깊숙이 칼을 꽂으면서.
이걸, 이걸 대체 어떻게 해낸 거지? 그 노인이 물은 것처럼 어쩔 수 없어서? 아니면 매정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서두르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며, 슬퍼하지도 않고 상처 받지도 않으며 매사를 주도면밀하게 챙긴다는 게 가능한가. 매정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겠지.
“아 참,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넋이 나가 있던 손 관주는 무의식적으로 움찔하며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내일 정씨 댁에 가서 저 몸종 둘을 돌려보내 주세요. 그리고, 시종을 하나 달라고 해요. 전에, 전에 여기서 돌아다니던 그 애로요.”
정교랑은 넋이 나간 듯한 손 관주의 모습을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말했다. 손 관주는 얼른 알았다고 대답하고, 뒤돌아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정교랑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어 손 관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산 아래를 쳐다봤다.
떠날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서 벗어나게 됐다고 기뻐하겠지. 하지만 진짜 버림을 받은 건 바로 저들이었다. 이제 올 사람들은 따돌림을 당하고 버려질까 봐 불안에 떨겠지. 하지만 이제 어마어마한 행운을 움켜쥐게 된 건 바로 그들이리라.
* * *
정교랑은 꿈에서 깼다. 실로 오랜만에 꾼 꿈이었다. 눈만 감았다 하면 잠 속으로 빠져들었고 눈을 뜨면 잠에서 깼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다 보니 꿈에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일지도.
그녀는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갈 곳도 없고 물러설 길도 없는데 사방은 점점 뜨거워졌다. 천지를 뒤덮을 만큼 큰불이었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이상하게도 겁은 나지 않고 처량한 마음만 들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가슴에 댔다. 어찌나 차가운지 금방이라도 박동을 멈출 것 같았다. 그리 큰불 속에서 도망칠 곳도 없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 그래서 겁도 안 먹고 그저 처량한 마음만 들었던 걸까? 그렇다 해도 처량한 마음이 드는 건 이상했다.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또다시 그 광경이 스쳐 지나가자 그녀의 심장 박동이 정말로 멈춰 버렸다.
“아씨?”
휘장 밖에서 나지막이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휘장이 들렸다. 16~17살쯤 된 소녀였는데 반달 모양의 눈웃음 덕에 항상 미소를 머금은 듯 보이는 시녀였다.
정교랑이 심장 박동을 회복하고 예전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씨, 악몽을 꾸셨어요?”
시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새벽빛이 들어오는 실내는 아직 캄캄했다. 정교랑이 밖을 힐끔 쳐다봤다. 아직 동쪽에 해가 뜨기 전이었다.
“괜찮아.”
정교랑이 대답했다.
“반근, 일어나야겠어.”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휘장을 들어 올렸다. 정교랑이 혼자 정방(淨房: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방 안의 불을 밝히고 작은 벽돌 화로에 물을 데우는 등 준비를 마친 다음 저도 모르게 정방을 쳐다봤다.
전에 있던 몸종은 떠나기 전 자신에게 신신당부했다. 이 아씨는 병을 앓아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세심히 시중을 들어야 해. 그런데 이곳으로 와서 며칠 겪어 보니 아씨는 옷 입기부터 시작해 세수, 양치질, 빗질 심지어 음식까지 전부 직접 하는 게 아닌가. 병을 앓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말하는 걸 싫어하긴 했지만.
아, 그래도 그 몸종의 말 중에 맞는 말도 있다. 이 아씨는 시녀에게 반근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는 걸 좋아했다. 시녀는 정씨 가문으로 갔다가 손씨 성을 가진 여도사를 따라 이곳에 오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손씨 성을 가진 여도사는 산 아래 현묘관의 관주로 정씨 가문과 사이가 좋았다. 정씨 가문의 이 아씨는 태평궁에서 지냈고 현묘관 여도사들이 챙겨 주는 일이 많았다.
손 관주를 따라 이 아씨를 처음 만나러 왔을 때, 아씨는 자신을 잠시 훑어보더니 대뜸 물었다. 이름이 있니? 부귀한 사람은 정성 들여 고르고 고른 이름을 쓰고 낮고 천한 사람은 간단하게 부르기 쉬운 이름을 쓴다. 어쨌거나 사람인데 이름이 없을 리가 있나. 병을 앓고 있다더니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는구나.
시녀는 사전에 당부를 들은 터라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알았다.
“소인은 본디 이름이 있지만 그건 아씨께서 모르시는 이름이죠. 그러니 소인은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멍해 보이는 아씨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 줄게. 반근이라고 하자, 어때?”
아씨가 물었다.
정방 문이 열리자 시녀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시녀는 얼른 일어나 옷걸이에서 두꺼운 비단으로 지은 겉옷을 가져다 정교랑에게 덮어 주었다. 정교랑은 자리에 앉아 시녀가 건넨 물을 받아 천천히 반쯤 마셨다.
“아씨, 책을 읽으시겠어요? 아니면 들으시겠어요?”
시녀는 옆에 둔 책 한 권을 들으며 물었다.
“들을게.”
정교랑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으며 대답했다.
“네.”
시녀는 공손히 꿇어앉아 등불을 마주하고 책장을 펼쳤다.
“기름값은 근당 1백을 넘지 않고도 길거리와 골목을 등불로 환히 밝힐 수 있었다. 남으로는 용산, 북으로는 신북교에 이르기까지 40리에 불빛이 끊이지 않았다. 성 안팎으로 1백만 가구가 살았으며 거리와 골목은 물론이요, 후미진 골목까지도 화려했다. 등을 내걸고 옥으로 된 난간을 만들어 두었으며 화려한 비단과 종이로 만든 등도 있었다. 이야기 마당이 펼쳐져서……·.(『서호노인 번성록(西湖老人 繁盛錄)』)”
소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진지하게 들으면서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그림을 그렸다.
“천천히.”
정교랑이 이따금 시녀의 말을 끊으면 시녀는 말의 속도를 조절했다.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이 책장은 벌써 7~8번을 반복해 읽은 상태였다. 정교랑이 시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됐어.”
정교랑은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으며 오른손을 주물렀다. 손가락은 벌써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 안 가 얇은 굳은살이 생길 것이다.
“아씨, 머리를 빗겨 드릴까요? 제가 할게요.”
정교랑이 옆에 놓은 빗을 드는 모습을 보고 시녀가 얼른 물었다.
“필요 없어.”
정교랑은 벌써 혼자 천천히 머리를 빗고 있었다.
아씨 말씀은 무조건 옳은 거야. 넌 그냥 그 말을 듣기만 하면 돼. 토 달지 말고. 시녀는 예전 그 몸종의 당부를 떠올렸다. 그 몸종만 그리 당부했다면 무시하고 넘겼겠지만 장 노태야도 같은 당부를 했다.
그 낭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라. 뭐든 원하는 대로 하게 둬. 장 노태야가 이 아씨를 그리 중시하는 게 단지 가엾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시녀는 병풍 앞에 앉아 느릿느릿 머리를 빗는 여인을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머릿결이 참으로 풍성했다. 먹처럼 진한 흑발을 묶지 않고 언제나 길게 늘어뜨리다 보니 자리에 앉으면 비단처럼 바닥에 쫙 깔렸다.
방 안의 장식은 많지 않았다. 아씨의 활동 공간은 정방과 침상, 팔걸이 책상 세 곳뿐이어서 딱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한 권뿐인 책도 이미 가지런히 놓아둔 후였다. 물잔을 씻고 작은 벽돌 화로의 불까지 끈 다음 시녀는 원래의 자리에 도로 앉았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래 몸종 둘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애들은 사주팔자가 안 좋습니다. 아씨의 요양에 좋지 않아 도로 데려왔어요.”
정씨 가문에서 손 관주를 만났을 때, 손 관주는 그렇게 말했다. 도사에게 사주팔자가 나쁘다는 평을 듣다니, 이제 그 두 몸종을 쓰겠다고 나설 이는 없을 터였다. 시녀는 장씨 가문 출신으로 글을 알았기에 때로는 가벼운 말 한마디도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두 몸종은 어쩌다가 이 여도사의 눈 밖에 났을까? 어쨌거나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걱정할 일은 병을 앓는 아씨를 모시는 일이었다. 밖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는데 시중을 들 몸종은 자기 하나뿐이라니 일에 치여 죽는 거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 생활은 한가해 죽을 맛이었다. 자신은 책을 읽어 주는 것 외에 조금의 쓰임새도 없는 것 같았다. 빗질을 마친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씨, 밥은 제가 지을게요.”
시녀가 얼른 말했다. 정교랑은 시녀를 보고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말했다.
“내가 할게.”
시녀는 자포자기하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따라나섰다. 신신당부를 받은 터라 억지로 묻고 따지며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교랑은 문가로 가더니 시녀에게 물었다. 그 물음은 시녀로서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참, 너, 뭐 먹고 싶니?”
“아씨.”
시녀는 얼른 다가갔다.
“이런 건 아랫것이 해야 할 일이에요. 아씨께서 이러시면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으면 소인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잖아요.”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
정교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미소를 지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면 기분이 안 좋아. 그럼 좋아. 네가 해.”
한시름 놓게 된 시녀는 감격하여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일을 할 수 있구나, 정말 행복해.
날이 환히 밝았을 무렵, 7~8대의 말과 함께 마차 두 대가 강주성 성문 밖에 나타났다. 성문 어귀에서는 일찌감치 남녀 몇 명이 나와 목을 빼며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마차 행렬이 나타나자 이들은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조 집사님.”
남녀가 얼른 나가 맞이했다. 맨 앞에 있던 말에 탄 중년 남자가 말을 세웠다.
“자네들이었군.”
중년 남자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사노야, 저희 가문에서 정씨 가문과 혼사를 치를 때 보낸 이들입니다.”
사내는 진소의 아우로 진씨 가문의 넷째, 사노야였다. 진소가 직접 올 수 없게 되자 정중함을 표하기 위해 아우를 직접 보낸 것이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초조한 표정으로 성 안을 쳐다봤다.
“그럼 어서 정씨 댁으로 가세나.”
진 사노야는 고개를 돌려 수행원들을 보며 물었다.
“예물은 잘 챙겼지?”
수행하는 시종들이 일제히 네 하고 대답했다.
“잠깐만요.”
조 집사가 막아서자 진 사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 집사, 지체할 시간이 없네. 이 태의가 길어야 두 달 버티신다고 했어. 길을 오가는 시간만 해도 한 달이 넘으니, 만에 하나 문제라도 생기면……·.”
진 사노야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알죠.”
조 집사는 얼른 진 사노야를 달래며 옆에 있는 남녀를 향해 물었다.
“아씨께서 어디 계시는지 아는가?”
남녀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종으로부터 집에서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터라, 자신들의 일 처리에 못마땅한 게 있어 내려온 줄 알고 급히 달려온 것인데 대뜸 아씨의 일을 물으니 뜻밖일 수밖에.
그런데 어느 아씨?
대체 어느 아씨기에 집안 제일의 대집사 조 선생이 친히 여기까지 온 거지? 남녀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교랑 아씨 말일세.”
조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교랑 아씨가 누구지? 남녀는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우리 가문에서 시집간 아씨의 딸, 교랑 아씨 말이네.”
조 집사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사실 불평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교랑 아씨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조 집사 역시 출발하기 전에 교랑 아씨의 외모며 품행,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 두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일이었다. 그럼 그 아씨 때문에?!
“성 밖의 현묘산에서 지내십니다.”
그중 한 사내가 말했다. 이곳 강주 출신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장사를 하기도 했고 강주성을 두루 돌아다닌지라 길을 알았다. 사내가 앞장설 채비를 하자 조 집사는 모두에게 성으로 들어가지 말고 말 머리를 돌리라고 했다.
“조 집사, 지금 뭐 하는 겐가?”
진 사노야가 물었다. 시간이 없다니까 어딜 간다는 거야.
“교랑 아씨께서 성 밖 현묘산에 지내시니 속히 그리로 가 청하시지요.”
조 집사가 말했다. 성 밖이라고?
“그래도 그 부모부터 뵈어야 하지 않나?”
진 사노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건 예에 어긋나는데.
“사노야.”
조 집사는 진 사노야를 쳐다보며 출발 당시 진 공자가 거듭 당부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부모를 먼저 뵈러 가실 경우, 그 아씨는 절대 안 움직일 겁니다.”
뭐라고? 진 사노야는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한편 정씨 댁에서는 중문으로 급히 뛰어 들어온 시종이 한 몸종에게 돈을 돌려주고 있었다.
“뭐야? 못 산 거야?”
몸종이 인상을 쓰며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가기 싫으니까 괜히 꾀부린 거지?”
“누나, 그런 거 아냐.”
시종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갔었는데 없대.”
“없다고?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그럼 다시 만들면 되지.”
몸종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누나, 모르는 소리 마. 현묘관 간식이 얼마나 인기인데. 게다가 애초에 수량이 적어서 하루에 내놓는 양이 얼마 되지도 않아. 며칠 전부터 예약했다가 가져간다니까.”
시종이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갑자기 사려고 하면 어디서도 못 구해.”
“그렇게 인기라고?”
몸종은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하는 수 없이 돈을 돌려받았다.
“뭐? 못 샀다고?”
정육랑이 쌍육을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말들을 엎어 버렸다.
“육랑, 무슨 짓이야. 내가 이기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정칠랑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따 다시 놀면 되지. 중요한 일 얘기하잖아.”
정육랑이 말했다.
“너 다음 달에 꽃꽂이 모임 하기 싫어?”
남들 앞에 나서서 뽐낼 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정칠랑은 곧 잠잠해졌다.
“며칠 전에 동 낭자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현묘관에서 간식을 아주 잘 만든대. 그래서 좀 사다가 먹어 보려고 했거든. 진짜 맛있으면 더 사다가 꽃꽂이 모임에 내놓으려고.”
정육랑의 말에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 등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육랑은 생각이 깊다니까.”
정사랑의 칭찬에 정육랑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못 샀다는 거야?”
정육랑이 고개를 돌려 몸종에게 따져 물었다. 몸종은 시종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어리석긴.”
정육랑이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그건 남들 사정이지. 우리가 누구야? 다시 가서 전해. 우리는 정씨 가문 사람이라고.”
몸종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황급히 뛰어나갔다.
“그러게 말이야. 현묘관은 우리 집에서 공양하는 돈으로 먹고사는 거잖아.”
정칠랑도 말을 보탰다. 사실 공양한다기보다는 정씨 가문의 작은 도관 하나를 대신 관리해 주는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의미는 같았다. 어쨌거나 관계가 있으니까. 정육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문을 나서던 시종은 급히 나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젠장, 뭘 이렇게 서둘러.”
시종이 씩씩거리며 투덜거렸다.
“서두른 사람이 누군데.”
상대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시종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을 똑바로 쳐다봤다.
“금가아?”
시종은 하찮은 녀석이라는 투로 말했다.
“뭘 이렇게 뛰어다니냐. 넌 이제 이 집 사람도 아니잖아.”
며칠 전 현묘관에서 온 여도사가 도관에 있는 아씨의 심부름을 맡을 시종을 하나 달라고 청했는데 그때 도관으로 옮겨 간 녀석이었다. 소식을 들은 녀석의 누나는 사공자 앞에서 한참을 울며 애원했지만 소용없었고, 그 일은 집안에서 이미 웃음거리가 됐다. 바보의 시중을 들게 됐으니 앞날은 끝장난 거지, 뭐.
“어디서 신경질이야!”
시종은 기가 살아 소리쳤다. 금가아가 흥 콧방귀를 뀐 후 상대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바람에 시종만 머쓱해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차례로 성 밖 현묘산에 도착했다. 시종은 간식을 사러 온 것이었고 금가아는 이곳에서 지내며 심부름을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둘 다 하인 처지였지만 의미는 달랐다. 시종은 꼴 좋다는 투로 비웃고 이기죽거렸지만 금가아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현묘관 앞을 청소하던 두 여도사가 금가아를 보고 인사했다. 시종은 입을 삐죽였다. 앞으론 나도 저 여도사들과 인사할 텐데, 뭐.
“이봐요, 도사님들. 우리 아씨께서 간식을 사 오라고 하십니다.”
시종이 손을 허리춤에 대고 말하자 두 여도사는 예를 표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시종은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예상했고, 이미 준비한 게 있었다.
“난 정씨 가문 사람입니다. 북정 사람이라고요. 우리 여섯째 아씨께서 이곳 간식을 드시고 싶대요.”
시종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정씨 가문? 두 여도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주저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니?”
안에서 나오던 손 관주가 소리를 듣고 물었다. 두 여도사는 한숨 돌렸다는 듯 얼른 뒤돌아 사정을 설명했다.
“서둘러요. 우리 아씨께서 쓰실 거라고요. 드셔 보고 맛있으면 더 많이 사실 겁니다.”
관주를 본 시종은 집을 드나들던 여도사임을 알아보고 말했다. 예의상 말은 살 거라고 했지만 자발적으로 만들어 바칠 게 뻔했다. 돈 얘기 따위는 안 꺼낼 것이다. 손 관주는 잠시 생각에 잠겨 시종을 훑어봤다.
“그랬군요.”
생각에 잠겨 있던 손 관주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진짜 없어요.”
시종은 멈칫했다. 뭐라고? 시종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손 관주가 이쪽을 지나 산 위로 올라가던 금가아를 보고 소리쳤다.
“금가아, 기다려라. 아씨께 드릴 간식 가져가.”
걸음을 멈춘 금가아가 네 하고 대답했다. 어리둥절해 있던 시종은 한 여도사가 커다란 간식 꾸러미를 금가아에게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봐요, 없다면서요? 쟤한테 주는 건 뭐예요?”
시종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건 아씨 드리려고 따로 특별히 만든 거예요. 간식 공양으로 나가는 것과 다르죠.”
손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럼, 이거로 줘요.”
시종은 금가아의 손에 있는 꾸러미를 낚아채려 하며 말했다.
“여섯째 아씨 먼저 드려야 해요.”
그러자 지금껏 잠자코 있던 금가아가 우쭐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로 시종을 훅 밀치고는 뛰어갔다. 시종은 열이 받아 발을 굴렀다.
“너 두고 봐.”
그렇게 소리친 시종은 뒤돌아 달려갔다. 산길을 오르던 사람들은 시종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 관주는 찾아오는 인파를 보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나가서 상냥하게 맞이했겠지만 이제는 보름이 다 되도록 참배객 하나 없던 시절의 그 손묘선(孙妙仙)이 아니었다. 손 관주는 그저 힐끔 쳐다본 후 금가아를 뒤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간식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면 제자들이 알아서 내쫓을 터였다. 득도한 관주는 그런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 도관이 유명한가 보군. 정씨 가문의 체면도 안 세워 줄 정도라니.”
조 집사가 물었다.
“별로 안 유명했는데 얼마 전부터 유명해졌어요.”
길을 안내하던 사내가 알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외지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더욱이 관심도 없었다.
“그럼 정씨 가문 낭자가 여기 사느냐?”
진 사노야가 물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산 위에 사세요.”
길을 안내하던 사내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그 여도사와 소년이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굽이굽이 진 숲 사이로 작은 도관이 보였다.
* * *
정교랑은 금가아가 건네는 간식 함을 받아 세 개를 골랐다. 시녀가 얼른 조심스레 받아 잘 놓았다.
“이건, 네가 가져가.”
정교랑이 자리에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금가아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어디로 가져가라고요?”
금가아가 물었다.
“네 마음대로.”
정교랑이 대답했다. 내 마음대로 어디? 한쪽 옆에 있던 손 관주가 웃으며 금가아를 끌어당겼다.
“누굴 줘도 되고 네가 먹어도 돼. 아씨께 감사하다고 인사 올려.”
금가아가 놀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거, 엄청 비싼 거죠?”
정씨 댁과 도관 사이를 자주 오가는지라 보고 들은 게 있다 보니 이 간식이 귀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이 현묘관의 간식은 신기하기도 하고 맛도 좋았다. 처음에는 부잣집에서 직접 먹는 용도로 사던 것이 나중에는 선물로 주고받는 용도로 많이 쓰이면서 차츰 온 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듣기로는 장순의 부친 장 노태야가 가장 먼저 선물용으로 썼다고 했지만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먼저 판 거라고요.”
한 보부상이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골목을 다니면서 준 건데 처음에는 돈을 안 받고 그냥 주겠다고 했어요. 근데 다들 좋아해서 서로 앞다투어 사게 된 거라고.”
현묘관에서 공양하는 간식은 하루에 많아야 세 함이 전부였는데 그중 두 함은 공물로 바치는 거라 이튿날은 되어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도관을 찾는 참배객이 얼마나 많든, 시줏돈을 얼마나 많이 내놓든 간식의 수량은 정해져 있었다. 양은 적고 구하려는 사람은 많다 보니 점점 이름이 나고 진귀해졌다.
간식 점포를 내서 장사나 할까 하고 물으러 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거금을 약조해도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다. 조용히 수행에 정진하는 곳을 방해하지 말라는 이유였다. 도를 닦으며 수행하는 도관을 세속에 물든 속된 곳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게 이곳 현묘관 관주의 지론이었다.
저 정도로 득도한 도인이 있는 곳이니 음식도 저리 맛있게 만드는 게지. 맛만 좋은 게 아니라 화를 피하고 길운이 트이고 천수를 누린다는 둥 각종기이한 효험에 관한 풍문이 더해지면서 현묘관 간식은 점점 추앙을 받게 됐다.
정씨 가문 시종이 정육랑의 이름까지 내걸었는데도 못 구할 정도로 귀한 걸 이렇게 많이 마음대로 가져가도 된다고? 그것도 내가?
“시장에 가서 지필묵 좀 사와.”
시녀가 정교랑이 원하는 물건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금가아는 알았다고 하며 종이를 받아 꼭꼭 접어 챙겼다. 그러면서도 그 간식을 가져가는 일은 주저했다.
“가져가. 이 간식들이 아씨한테는 별거 아니거든.”
손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보낼 필요가 없는 간식인데, 아까는 왠지 모르게 금가아를 불러 세우고 싶었다. 그 시종이 정씨 가문을 대며 거들먹거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웃기는 일이지. 정씨 가문에서는 우리가 자기들이 공양한 돈으로 먹고사는 줄 아나 봐? 무량천존. 이 손묘선은 세속에 영합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고. 금가아는 그제야 정교랑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점포에 가서 쪽지 보여 주고 꼭 그거로 달라고 해. 대충 비슷한 거로 사 오면 안 돼.”
시녀는 금가아를 끌어당겨 신신당부했다. 금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한 후 함을 끌어안고 뛰어나갔다.
“없다고 하면 다른 곳도 몇 군데 더 가 봐.”
시녀가 쫓아 나오며 소리쳤다. 문을 열던 금가아는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문 앞에는 4~5명쯤 되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범상치 않은 차림새였다. 문밖에 있던 네다섯 사람 역시 목소리를 낮춰 무언가를 이야기하던 중 금가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자 기겁을 했다.
“누구세요?”
금가아는 뒤로 한발 물러서며 몸으로 문을 막고 경계 태세를 취하며 이들을 쳐다봤다.
“실례지만 정씨 댁 아씨께서 여기 사시는가?”
조 집사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난 경성에서 왔네. 정씨 댁 아씨의 외가인 주씨 집안의 조 집사일세.”
“난 경성 진씨 가문에서 왔다. 여기 내 명첩이다.”
옆에 있던 진 사노야는 지체하지 않고 나서며 자신이 누군지 제대로 밝히지도 않은 채 대뜸 명첩부터 건넸다. 금가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눈치였다.
“왜 오셨는데요?”
금가아는 문에서 비켜설 생각이 전혀 없다는 태도로 물었다.
“아씨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네.”
조 집사가 말했다. 도움을? 어느 아씨한테?
“들어가서 여쭤볼게요.”
금가아는 또다시 의혹의 눈초리로 이들을 살피고는 말했다.
“문 잘 지키고 있어. 저 사람들 못 들어오게.”
문안에서 누구에게 당부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리바리한 녀석이 집을 아주 잘 지키는군. 조 집사는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문을 훑어봤다. ‘태평’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잘 지었네, 재미있는 도관이야.
진 사노야는 초조했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게 정씨 댁으로 먼저 가자니까. 거긴 곧장 들어가도 누가 뭐라고 할 일이 없는데 하필 이곳으로 먼저 온 게 문제였다. 여인들이 수행하는 도관이고 아직 출가하지 않은 여인이 거하는 곳이니 무턱대고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아씨를 뵙자고 한다고?”
마당에 서서 얘기를 나누던 손 관주와 시녀는 금가아의 말을 듣고 놀랐다. 누가 아씨를 보겠다며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뵙기를 청한다니.
“누군데?”
손 관주가 물었다.
“하나는 아씨의 외가댁에서 왔다고 하고, 하나는 진씨 가문이라고만 해서 누군지 모르겠어요.”
금가아가 손에 든 명첩을 건네며 대답했다. 외가? 주 부인의 친정이로구나! 손 관주는 기뻐하며 더 묻지 않고 명첩을 받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와 금가아도 얼른 뒤따라 들어갔다.
“주씨 가문이요?”
손 관주의 말을 들은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고 눈을 들며 말했다.
“네, 맞아요. 아씨, 외가댁에서 사람이……·.”
손 관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모릅니다.”
책을 덮은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난 자야겠어요. 아무도 안 만나요.”
손 관주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정말 몰라? 아니면 알고 싶지 않다는 건가? 주씨 가문도, 이 아씨의 심기를 건드렸나?
“아씨, 주씨 가문 사람이 아닌 사람도 있어요.”
금가아가 말했다. 손 관주는 그제야 손에 든 명첩이 주씨 가문의 것이 아님을 떠올리고 얼른 건넸다. 취주(衢州)의 진명흥이라는 자였다.
“몰라요.”
정교랑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문밖에 선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조 집사는 어리둥절했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자네는 같이 가기만 하고 나서지 말게. 진 상공 댁 사람만 이름을 고하는 게 가장 좋아. 안 그랬다간 얼굴도 못 볼 걸세.”
진 공자의 말이었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넘긴 말이었는데 이제 보니 이 아씨는 과연 주씨 가문의 체면을 세워 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눈치였다.
모른다? 그 반근이라는 아이의 말로는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던 시절에도 주씨 가문 노부인만은 알아봤고, 주씨라는 말만 들어도 기뻐했다고 했다. 멍하니 있다가도 주씨 가문 노부인이 오신다는 말만 들으면 곧 정신을 차렸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도 배우기 전에 가장 먼저 외할머니라는 말부터 배웠다고 했다.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아는 게 문제일 텐데. 조 집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문 앞에 선 시녀를 쳐다봤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지?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말씀을 올려 주게. 경성 진 상공의 부친께서 진료를 청한다고.”
조 집사가 말했다.
“진료요?”
시녀는 놀란 눈치였다. 잘못 들은 건가. 경성에서 여기까지 진료를 청하러 왔다고? 바보 아냐? 진 사노야는 무언가 생각난 듯 서찰 한 통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내 부친의 서찰이다. 아씨께서 보면 아실 것이다.”
서찰을 본 조 집사도 무언가 떠오른 듯 품속에서 얇은 공책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이것도 있네. 아씨께서 모르시겠거든 이걸 보면 아실 걸세.”
뭘 알고 뭘 모른다는 건지, 원. 아씨가 정말 알까? 시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문 앞에서 두 번이나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조 집사와 진 사노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젊은 낭자인데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니 보고 싶지 않겠지. 속히 그 부친부터 찾아가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진 사노야가 불만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하자 조 집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주씨 가문을 입에 올리는 바람에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노야, 아씨께선 어려서 병을 앓으셔서 쭉 밖에서 지내다 이제야 돌아오셨습니다. 집안사람들은 아씨께서 진료를 볼 줄 아는 것도 모르는데 섣불리 가서 그런 말을 꺼내면 실성을 하여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다고 여길 겁니다. 괜히 쓸데없는 일로 실랑이를 벌이면 시간만 지체되지 않겠습니까.”
조 집사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사정이 더 안 좋아지니 일단 기다려 보시죠. 이번엔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이번엔 조 집사가 말한 대로 문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공교롭게도 정교랑은 잠을 자고 있었지만.
“아씨께서 몸이 안 좋아 잠을 많이 주무세요. 두 분이 양해해 주세요.”
시녀가 말했다. 진 사노야는 정교랑의 일을 잘 몰랐지만 몸이 안 좋고 어릴 때부터 병이 있었다는 말을 오는 내내 들었다. 조 집사가 말을 흐리는지라 의심이 들어 시종에게 무슨 병인지 은밀히 알아보라고 했던 진 사노야는 깜짝 놀랐다.
정씨 가문의 딸이 선천적인 바보였다니! 바보가 어찌 병을 고친단 말인가! 농담도 분수가 있지! 하지만 진 노태야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씨 가문 사람은 이젠 병이 나아 바보가 아니라고 귀띔해 줬지만, 선천적인 바보의 병이 낫는 게 가능한 일인가. 어쩌면 다른 내막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이 어린 사람은 바보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힘들 수 있지만, 노태야의 눈이 틀릴 리는 없지 않은가. 이 여인이 도관에서 따로 사는 걸 보면 정씨 가문에도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싶은데. 그럼 조 집사가 정씨 댁으로 그 부모를 보러 가는 걸 막은 연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진 사노야는 생각에 잠겼다.
“도관이 누추하여 손님께 대접할 차가 없네요. 양해해 주세요.”
시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예의 바르게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과연 시녀는 예의 없게도 물 한 잔 내오지 않고 그대로 물러갔다.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 달려온 터라 몹시 시장했고, 더구나 오늘은 길을 서두르느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아직 사람을 못 만났다고는 하나 한결 마음이 놓이다 보니 부쩍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조 집사가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여긴 정씨 가문 딸이자 주씨 가문 외손녀가 사는 곳이니, 따지고 보면 한 식구 아닌가. 어려워할 것 없잖아. 조 집사는 안을 둘러봤지만 물 주전자나 물 잔조차 보이지 않았다. 종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봐도 마당은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조 집사는 침만 삼키고 도로 들어왔다.
“사노야, 물 좀 있으세요?”
조 집사가 진 사노야에게 물었다.
“참으세나.”
진 사노야는 언짢은 투로 말했다. 이 나이 먹도록 이런 고생은 처음이었다. 병이 급하면 아무나 붙잡고 매달린다더니. 정말 막다른 길로 몰린 게 아니었다면 내력도 잘 모르는 정 낭자를 찾겠다고 이리 멍청하게 달려오진 않았을 터였다.
이쪽 태평궁에 있는 사람들이 곤경에 처해 있는 동안, 정씨 가문의 정육랑은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현묘관에서 감히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정육랑이 소리쳤다.
“네, 아씨.”
몸종은 자신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가증스럽게도 우리한텐 없다고 하더니 금가아한테는 한 꾸러미나 안겨 줬대요.”
정육랑은 멈칫했다가 물었다.
“그게 누군데?”
“손 관주가 교랑 아씨의 시중을 들게 하겠다며 데려간 그 시종이잖아.”
정사랑이 대답했다. 서녀인 정사랑은 적녀와 달리 집안의 동향을 살피는 일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 사실을 아는 게 신기할 일도 아니었다.
“손 관주가 둘째 숙부님한테 가서 두 몸종의 사주팔자가 나빠서 교랑 아씨의 병에 안 좋다며 주절주절 떠들고는 도로 데려다 놨어. 둘째 숙부님은 원래 둘을 다시 골라 보내려고 했는데 때마침 장 노태야께서 몸종 하나를 답례로 보내셨지. 손 관주가 기뻐하면서 그 애가 좋겠다며 데려가겠다고 했어. 둘째 숙부님은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그 시녀가 따라가겠다고 나서기도 했고 그게 장 노태야의 뜻이란 말도 있어서 결국 보내기로 하셨지. 근데 그 손 관주가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심부름을 할 시종을 하나 더 데려가겠다고 한 거야.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들은 여인들이라 다니기 불편하다면서. 춘란은 다들 기억하지? 그러니까……·.”
“기억나, 기억나.”
마침내 끼어들 기회를 잡은 정칠랑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소리쳤다.
“넷째 오라버니의 혼을 되찾아준 그 애잖아.”
“혼을 되찾은 게 아니라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료한 거야.”
정육랑이 정정해 주었다.
“넷째 오라버니는 처녀 귀신한테 혼을 빼앗겼던 거야. 그러다 춘란의 일편단심 덕에 혼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육랑과 정사랑, 정오랑이 손을 뻗어 정칠랑의 입을 막았다.
“누구냐?”
정육랑은 눈썹을 치켜뜨고 밖을 쳐다보며 호통을 쳤다.
“누가 칠랑한테 이런 걸 가르쳤어?”
밖에 있던 정칠랑의 유모가 황급히 들어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따귀를 쳐라!”
정육랑이 소리쳤다. 유모는 즉시 손을 들어 철썩철썩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따귀를 후려쳤다. 정칠랑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랑, 왜 이러는 거야?”
“넌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고 배우지 말아야 할 말을 배웠어. 이건 노비의 잘못이야.”
정육랑은 엄숙한 표정으로 정사랑과 정오랑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여인은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해. 명심해, 스스로 비천하게 굴지 마.”
정사랑과 정오랑은 머쓱한 듯 알았다고 대답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육랑이 유모를 내보냈다.
“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정육랑이 웃으며 물었다.
“그 바보 교랑 얘기 중이었잖아.”
정칠랑이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하여간 짜증 나는 일은 다 걔랑 관련됐다니까.”
또 그 애와 관련된 거야? 방 안에 있던 자매들은 생각에 잠겼다. 전부 그 애와 관련됐잖아! 몸종을 보내고, 몸종을 달라고 하고, 또 시종을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 시종의 간식이……·.
“그러니까 현묘관에서 나한텐 간식을 안 주고 그 바보한테 줬다, 이거야?”
정육랑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랬단 말이지. 어쨌든 그녀는 간식을 구하지 못했고 그 시종은 교랑의 것이었다.
“네.”
몸종이 대답했다.
“어머니한테 가야겠어! 현묘관으로 보내는 공양을 끊으라고 할 거야!”
정육랑이 일어서더니 치마를 들어 움켜쥐며 나갔다. 잠시 앉아 있던 정칠랑도 무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섰다.
“백모님께서 또 그 바보한테 특별 대우를 해 주신 거야! 우리한텐 먹을 것도 안 주시면서!”
정칠랑이 소리쳤다.
“조모님한테 이르러 갈래!”
정씨 가문 마당을 떠들썩하게 했던 딸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로 흩어질 무렵, 현묘산에 있던 정교랑도 잠에서 깼다.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마침내 방 안으로 초대됐다. 병풍 너머로 정씨 가문 딸이 보였다. 병풍 뒤에는 소녀가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아씨, 오매와 사과를 넣었어요. 감초는 분부하신 대로 금가아가 껍질을 벗긴 자감초를 약방에서 구해 썼고 백편두를 볶아 함께 달여서 음료를 만들었죠. 맛이 어떤지 드셔 보시겠어요?”
시녀가 그릇을 받쳐 들고 두 사람 옆을 지나 병풍 뒤로 가져가며 자세히 말했다. 재료만 들었는데도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입가에 신맛이 돌고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분명 맛있겠지, 갈증을 푸는 데 그만일 거야.
그릇과 숟가락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병풍 너머로 그 여인이 음료를 몇 모금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둘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볼수록 입술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손님한테도 차 한 잔은 내주겠지? 차가 없으면 물 한 사발이라도.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은 정성껏 시중을 들고 한 사람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밖에 누군가가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이래서 집안에 어른이 없이 크면 안 된다니까! 버르장머리가 없어!
“아, 참, 아씨. 손님이 계신데 손님한테도 드려야겠죠?”
시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밖에 있던 두 사람은 안도했다.
“안 돼.”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먹을 거야.”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순간 열이 받았다.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인가!
“아씨.”
시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손님이잖아요. 조금 내어드리는 게 손님을 대하는 도리예요.”
진짜, 바보인가? 밖에 있던 두 사람은 멍해졌다.
“그럼, 손님한테 드려.”
정교랑이 말했다. 목소리는 딱딱했다. 10대 소녀의 듣기 좋은 목소리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편히 들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일단 목부터 축이고 얘기하자.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시녀가 나오더니 물 한 그릇을 진 사노야 앞에 내놓았다.
“여기요. 드셔 보세요. 저희가 직접 만든 음료인데, 전갈 똥이에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진 사노야와 조 집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 계집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똥을 먹어, 아니면 말아?
앞에 놓인 물그릇에는 눈처럼 새하얗고 맑은 음료가 놓여 있었는데, 마시면 심신이 안정될 것처럼 보였다.
“고맙다.”
진 사노야는 물그릇을 들어 단숨에 꿀꺽꿀꺽 마셨다. 좋군! 좋아! 좋아! 진 사노야의 얼굴에 있는 주름 하나하나가 물맛을 칭찬하는 듯 보였다. 시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자리를 비켰다. 옆에 있던 조 집사는 멈칫했다. 이 전갈 똥이 왜 한 그릇뿐이지? 그럼 나는?
“사노야께서는 손님이지만 조 집사는 한 식구니 안 드려도 이해하세요. 안 그럼 아씨를 달래기 힘들어요.”
시녀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모른다고 할 땐 언제고, 지금은 또 한 식구가 됐어? 조 집사는 하는 수 없이 마른 입맛을 다시며 병풍 저쪽을 쳐다봤다. 병풍 너머의 소녀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흐릿하여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숨에 물그릇을 비운 진 사노야는 온몸의 기혈이 뚫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친이 앓아누운 후로 초조하고 심신이 지쳤던 게 말끔히 사라진 듯했다.
“이게 뭐지? 이토록 맛이 좋다니.”
진 사노야가 못 참고 물었다.
“설포농피음(雪泡縮皮飮)이에요.”
대답을 마친 시녀는 고개를 돌려 병풍 뒤쪽을 보며 물었다.
“이 이름 맞죠, 아씨?”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기괴한 이름이로군. 진 사노야는 그릇을 힐끔 쳐다봤다. 한 그릇 더 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옆에 있는 조 집사의 눈빛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사람은 역시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해.
“무슨 일로 날 찾아왔죠?”
정교랑이 병풍 뒤에서 물었다. 진 사노야는 내심 기뻤다. 잘됐구나, 뭐라 운을 떼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먼저 입을 열다니. 뭔가 알 수 없는 기괴함이 있긴 하지만 말이 깔끔하고 직설적이라 괜한 수고를 덜 수 있겠어.
“낭자, 내 부친께서 목숨을 구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진 사노야가 공손히 말하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병풍 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식을 먹어야겠어.”
정교랑의 갑작스러운 말에 밖에 있던 진 사노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네.”
시녀가 얼른 대답하며 옆에 있던 선반에서 함 하나를 가져와 여인에게 바쳤다.
“아씨, 어떤 거로 드시겠어요?”
속닥속닥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도사님이 어제 보내 주신 거고, 저건 그저께 보내 주신 거예요. 이건 홍염(紅鹽: 복숭아꽃이 만개하는 계절에 생산되는 소금)을 썼고 저건 햇볕에 말린 거고요. 여기 과일 절임도 있는데 뭘 드시겠어요? 이게 뭐야, 왜 또 얘기가 거기로 흘러가? 손님이랑 대화 중이었잖아.
진 사노야는 초조하다는 눈길로 조 집사를 쳐다봤다. 조 집사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말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껏 진씨 가문으로부터 받은 극진한 대우도 있고.
“아씨, 진 노태야의 병세가 몹시 위급합니다. 천 리 길을 달려 도움을 청하러 왔으니 서둘러 목숨을 구해 주세요.”
조 집사가 공손히 말했다.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여인의 말이 끊겼다.
“진 노태야가 누구죠?”
정교랑이 물었다. 정상적으로 대답하는 걸 보니 됐다. 진 사노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부친께서 낭자께 서찰을 써 주셨는데 안 읽어 보셨습니까?”
진 사 노야는 병풍 뒤의 시녀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아, 깜빡했네요.”
시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대답했다.
“아씨께서 주무셔서 제가 받아 뒀어요. 가져올게요.”
시녀는 안에서 쪼르르 나와 팔걸이 책상을 뒤적이더니 책 속에서 서찰 한 통을 꺼냈다.
“이거 맞죠?”
시녀가 신이 나서 묻자 진 사노야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들을 테니 읽어 봐.”
정교랑이 안에서 말했다. 알았다고 대답한 후 서찰을 펼친 시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종이에는 크게 몇 글자 쓰여 있는 게 전부였는데 거칠고 떨림이 심해 매우 급히 쓴 글자처럼 보였다.
“빗길, 낡은 사당, 팥 춘권과 황주 선물, 병이라는 말을 불신하여 후회막급인 사람이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외다.”
시녀가 읽었다. 무슨 뜻이지? 시녀는 이해가 안 가는 듯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모르겠어.”
정교랑이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세 사람은 아연실색했다. 아, 참. 바보는 아니지만 몸이 안 좋아 기억력이 달린댔어. 며칠 동안의 일만 기억한다고 했지. 조 집사는 당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공책도 보여 드려. 그, 나도 하나 줬잖아. 반근 낭자가 말하기를 아씨께서 모른다고 하시면 그걸 보여 드리라고 했어. 그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안에 있던 두 여인이 동시에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저요?”
“반근?”
그 소리에 도리어 조 집사가 깜짝 놀랐다.
“제가 반근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시녀는 신이 나서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반근, 반근.”
안에 있는 정교랑도 무언가 즐거운 말을 들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두 여인의 목소리뿐인데 조 집사는 귓가가 웅웅 울리는 것 같은 기분에 머리까지 어지러워졌다.
“아니, 아니. 낭자도 이름이 반근이야? 우리 집 몸종이, 아니, 우리 집 몸종이 아니라 원래는 아씨의 몸종이었지. 아씨, 아직 기억하세요?”
뭐라는 거야? 진 사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시녀가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사실 나도 모르겠구나. 조 집사는 목이 멨다. 물 좀. 가뜩이나 목이 아프던 차에 이렇게 많이 떠들어댔으니.
“낭자는 나중에 아씨를 모시러 온 거지? 원래 아씨를 모시던 건……·.”
조 집사가 말했다.
“네, 맞아요. 전 열흘 전에 왔어요. 저희 노태야께서 보내셨죠. 원래 아씨를 모시던 몸종은 저희 노태야를 따라갔고, 노태야께서 제게 아씨를 모시라고 하셨어요.”
시녀는 열정적으로 떠들어댔다.
“저희 노태야를 아세요? 저희 노태야는 장씨 성을 가지셨는데……·.”
너희 노태야가 장씨인지 합씨인지 알 게 뭐냐! 왜 또 얘기가 여기로 샌 거야? 조 집사는 마른기침을 했다. 머릿속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 아, 그렇구나. 그래. 그, 이런 우연이 있나. 반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씨의 예전 몸종 이름도 반근이었어.”
조 집사가 얼른 말을 받았다.
“네, 맞아요. 저희 노태야께서 데려가신 몸종이 반근이에요. 그걸 알고 계셨군요!”
시녀는 놀랍고 신기한 듯 신이 나서 떠들었다. 아예 길게 얘기를 나눌 작정인지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거리가 꽤 되는데 아씨의 일에 대해 훤히 알고 계셨네요. 그 반근 언니가 정말 대단해요. 저희 노태야께서……·.”
“아니, 그 애 말고.”
조 집사가 얼른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녀의 말을 끊었다.
“너희 노태야를 따라간 애 말고, 우리 여섯째 공자를 따라간 그 애 말이야.”
시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반근이 그 댁 여섯째 공자도 따라갔다고요? 반근한테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요.”
조 집사는 목이 꽉 막혔다.
“그 반근이 아니야?”
조 집사도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대체 반근이 몇 명이야? 왜 죄다 반근이래? 이곳에 오기 전 진 공자으로부터 반근이 떠난 후 새로 들인 몸종도 이름이 반근이라는 귀띔을 들었다. 그럼 이 반근은 그 반근이 아니란 말인가? 어디서 또 반근이 튀어나온 거야? 뭐가 뭔지, 원.
“그럼 어느 반근 말씀이세요? 원래 있던 반근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시녀 역시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왜 말씀을 확실하게 안 하세요?”
울고 싶은 심정의 조 집사는 손을 뻗어 목을 움켜쥐었다.
“낭자, 저기, 일단 물 한 잔만 줄 수 있을까?”
조 집사가 결국 못 참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물을 드시고 싶으면 진작 말씀하시죠.”
시녀는 웃으며 투덜거렸다.
“아씨의 외가댁 분이니 한 식구잖아요. 여기도 내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예의 차리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뭘 어려워하세요.”
그래, 그래, 예의 안 차린다. 어려워하지 않을게. 제발 부탁이니 빨리 물 한 사발만 다오, 나 죽는다. 조 집사는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은 진 사노야는 그 모습을 보자 괜히 자기 목까지 덩달아 아픈 느낌이 들었다. 아이고, 딱해라. 그래도 난 손님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래도 이 어린 상전께서 손님을 대하는 예를 알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도 모르게 병풍 뒤를 쳐다보던 진 사노야는 단정히 앉아 있던 형체가 어느새 옆으로 누운 것을 발견했다.
“앗, 낭자. 자는 건 아니죠?”
진 사노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간신히 만나 아직 본론도 못 꺼냈는데. 물을 가지러 가려던 몸종이 앗, 하는 소리를 내며 얼른 들어갔다.
“아씨?”
몸종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조 집사는 목을 쥐고 있던 손으로 힘없이 바닥을 짚었다. 물부터 한 그릇 주고 다른 거 하면 안 될까.
후회막급이로다! 진 공자의 말을 듣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 사서 고생을 하다니, 후회막급이었다. 이 안에 앉아 있는 것보단 차라리 밖에 서 있는 게 낫지!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병풍 뒤에서 정교랑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듣는 사람은 알아서 감정을 이입했다. 성가신 얘기를 견디다 못해 한숨 자려고 했는데 또 깨우지 않았는가. 잠을 방해했으니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날, 무슨 일로 찾죠? 내가 나가야겠네요.”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이 반근인지 저 반근인지 괜히 시간만 아깝게. 지금이 그런 시답잖은 얘기로 회포를 풀 때야? 진 사노야는 정교랑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못마땅한 눈길로 조 집사를 쳐다봤다.
“낭자, 내 부친께서 전에 낭자와 길에서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기억이 안 나면, 예전에 낭자의 시중을 들던 몸종이 쓴 기록을 조 집사가 가져왔으니 한번 보세요. 보면 생각이 날 겁니다.”
정 사노야가 얼른 말했다. 조 집사는 목이 쉬어 더 이상 목소리가 안 나오는지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쓰여 있어요?”
시녀가 걸어와 팔걸이 책상에서 얇은 공책을 집어 들고 물었다. 봐, 말이며 행동이 깔끔하게 딱딱 떨어지잖아. 반근인지 아닌지를 공연히 왜 따져. 진 사노야는 또다시 조 집사를 노려봤다. 조 집사는 어찌나 입이 마르고 쓴지 아예 무감각해진 것 같았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조 집사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가?”
진 사노야가 조 집사를 보고 화를 꾹 누르며 물었다. 긴지 아닌지 대답을 하라고!
“네.”
조 집사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 아니 그 몸종 말로는 거기 쓰여 있다니까 낭자가 찾아봐.”
시녀가 병풍 뒤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씨, 제가 처음부터 읽을까요?”
처음부터 읽는다니.
“맨 마지막 몇 장만 읽으면 돼. 맨 마지막 몇 장. 처음부터 찾을 거 없어.”
조 집사가 쉰 목소리로 냉큼 입을 열었다. 사람 잡겠네. 처음부터 읽으면 처음부터 이것저것 물을 텐데, 거기 쓰여 있는 게 뭔지 누가 알아. 결국 또 나한테 물을 텐데,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벌써 공책을 펼친 시녀는 실소를 터뜨렸다.
“어머, 여기저기 돌이 나오네요. 돌돌. 이게 뭐야, 어떻게 읽으라고.”
물론 기억하는 사람은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그때 그 애한테 기록해 두라고 한 건 그 애가 잊어버리는 걸 걱정해서지, 자신이 잊어버리는 게 겁나서가 아니었다. 병풍 뒤의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안 읽어도 돼. 알아.”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있는 시녀 외에 밖에 있던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안다고? 뭘 알아?
“당신 아버지는, 두 달 전에, 발병했으니, 벌써 반신불수에, 안면 신경 마비가, 왔겠죠. 침을 흘리고, 말하는 것도 힘들 거예요. 의식이 불분명하고, 얼굴이 붉으며, 입이 마르고, 소변의 양이 적어, 찔끔거리고, 맥현삭(脈弦數: 맥상의 하나로 맥이 가야금줄을 누를 때의 느낌과 함께 빨리 뛰는 것)이 나타났겠죠.”
병풍 뒤의 여인이 딱딱한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증상을 읊었다. 시녀를 포함해 병풍 앞에 있던 세 사람은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진 사노야가 벌떡 일어나다가 앞에 놓인 물그릇을 넘어뜨려 난 소리였다.
“아니, 어찌……·.”
진 사노야는 붉어진 얼굴로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흥분과 경탄, 공포의 눈빛이었다.
“어떻게 안 겁니까?”
정말 맞힌 거야? 조 집사도 놀란 표정이었다. 전에 노야를 따라 진 노태야의 병문안을 간 일이 있었다. 의원의 진단을 직접 들은 건 아니고 휘장 너머로 힐끔 본 게 전부였지만 진 노태야의 증상은 아씨의 말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조 집사는 진 노태야가 언제 발병했는지 입이 마르고 소변의 양이 적어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랐다. 진 사노야의 반응을 보고 그 말이 맞다는 걸 알 뿐이었다.
“전에, 한 번, 뵌 적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한 번 봤다니, 그럼 반년 전에 본 거 말인가? 그때, 바로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한비자의 기록에도 있잖나. 편작은 채환공을 보자마자 병이 있는 걸 알았거늘.”
진 사노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털썩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낭자, 부디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편작? 조 집사가 놀란 눈으로 병풍을 바라봤다. 낮잠을 자려다가 시녀가 타이르는 말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그 여인은 다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품이 큰 옷에 커다란 소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소녀의 모습이 비단 병풍 뒤로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아니!”
조 집사는 쉰 목소리로 분노했다.
“날 놀린 겁니까?”
모르는 건 뭐고 한 식구는 또 뭐야. 이 몸종은 뭐고, 저 몸종은 뭐냐고. 물을 마시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고? 문 앞에서 이름을 댄 그 순간부터 이 여인과 시녀에게 철저히 놀아나고 말았다.
진 공자가 신신당부하기도 했고 노야와 공자도 가족입네 하고 이 아씨를 만나려 들어선 안 된다고 했지만, 이 정도로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몸종 하나 데려갔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굴 일이야? 일부러 멍청한 척하며 사람을 놀리면 재미있냐고!
“아씨,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이러시면 재미있습니까?”
조 집사는 자세를 똑바로 하며 꿇어앉았다. 지금껏 물 한 모금 못 얻어 마셨으니 초조하기도 하고 목이 아프기도 해서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진 사노야와 시녀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조 집사를 쳐다봤다.
병풍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옆으로 누웠던 여인이 똑바로 앉았다가 팔걸이를 붙잡고 일어서서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실내로 들어온 가을 햇살 아래 여인의 수수한 옷과 까만 흑발이 빛났다.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다만 멍한 표정에 흐릿한 두 눈 때문에 계속 보다 보면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정교랑은 조 집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조 집사를 내려다봤다.
“물론, 재미있죠.”
정교랑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 집사는 말문이 막혔다. 진 사노야는 눈빛을 반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낭자, 부디 구해 주십시오.”
진 사노야는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좋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낭자의 부모님께 바로 가서 알리겠습니다. 낭자를 경성으로 모시겠다고요.”
진 사노야는 곧바로 일어서려고 했다.
“잠깐만요.”
정교랑이 말했다. 또 뭐야?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니까. 부친께선 거동조차 못 하셔서 이렇게 청하러 온 거라고. 이러면 시간이 지체되는 걸 알면서 어쩔 수 없이. 진 사노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대인은 가지 마세요.”
진 사노야를 쳐다보던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조 집사를 쳐다봤다.
“자네가 가서 말하게.”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멍해졌다.
“난 가지 말라고요? 그래도, 될까요?”
진 사노야가 물었다. 이 낭자가, 장난이 좀 심하네?
“네, 네, 제가 가죠.”
조 집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이 아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한시라도 빨리 경성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는가?”
정교랑이 물었다. 원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지만, 정교랑의 말을 들으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조 집사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아씨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정교랑이 조 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 물부터 마시고 싶지 않나?”
* * *
“어머니, 그 사람은 도를 닦고 수양을 하면서 공덕도 쌓고 체면도 얻었다지만, 우린 뭘 얻었어요? 간식 하나 못 얻는데,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우릴 위해 기도를 올리겠냐고요.”
정육랑이 말했다. 대부인은 자신을 잡고 흔드는 딸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냥 간식이잖아. 거긴 도관이지 간식 점포도 아닌데, 수시로 간식을 만들어 파는 게 가능하겠어?”
대부인이 말했다.
“괜한 생각 마라.”
“어머니, 하나를 보면 열을 안댔어요.”
정육랑이 대꾸했다.
“우릴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단 뜻이에요. 우리한테 정성을 안 들인다고요.”
대부인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가서 물어볼게.”
정육랑은 그제야 안심하고 밖으로 나갔다. 대부인이 막 쉬려고 눕는데 여종이 총총 들어오더니 몸을 굽혀 뭐라 귓속말을 하자 대부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내가 편애를 하면 뭐?”
대부인은 무릎 위에 올려놨던 손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우리 일가가 그 애 어미의 혼수 덕분에 먹고 마시며 생활하는데, 그 딸한테 좋은 거 먹이고 입히는 게 뭐가 잘못됐어? 불공평하다니?”
대부인은 냉소했다.
“대우가 불공평하게 느껴지면 혼수를 바리바리 싸 올 수 있는 어미를 만났어야지.”
대부인의 말에 여종은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여인들의 관계란 친할 땐 아무 격의 없이 지내다가도, 일단 틈이 생기면 깨알만 한 틈도 은하수처럼 벌어져 건너갈 수 없게 되고 만다. 자매처럼 가깝던 정씨 가문 동서 사이가 불과 보름 만에 서로 얼굴조차 안 볼 정도로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 먹고 마시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네. 그 오랫동안 아무 일 없이 순조로웠던 그 일에 왜 갑자기 문제가 생긴 거야? 문제는 그 딸아이가 돌아오면서 시작됐어. 여종들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불길한 사람이야. 어딜 가든 난장판으로 만든다니까.
“앞으로.”
대부인이 입을 열자 딴생각에 빠져 있던 여종들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교랑한테 보내는 돈을 여기서 우리가 쓰는 만큼으로 올려라.”
여종들이 흠칫 놀랐다.
“부인,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한 여종이 만류했다.
“안 될 게 뭐 있어. 그 애는 바보고 병자가 아니냐. 먹고 입고 쓰는 걸 더 세심하게 챙겨 줘야지. 바보랑 비교하려 들려고? 그 돈도 전부 점포랑 농장에서 나온 돈이다. 자기 걸 자기가 먹고 쓰는 건데 그걸 누가 막아?”
병자인 게 이제야 생각났나 보네. 여종은 네 하고 대답하고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양쪽 부인들이 저기압이니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부인, 부인. 대노야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답니다.”
몸종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대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혼수를 둘러싼 지난한 다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에 왔던 그 네 명이 아니라,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새로 왔어요.”
몸종의 말에 대부인은 멈칫했다.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돌려받으려고 작심을 했구나.”
대부인은 만감이 교차했다.
“어쨌든 교랑이 있는 한 혼수는 그 애 것이다. 그 애가 정씨 성을 가진 이상 그걸 주씨에게 넘길 순 없지.”
대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종이 덧옷을 걸쳐 주자 대부인은 대노야가 있는 객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노야 부부는 자리에 없고 대노야 혼자 손님을 맞고 있었다. 이상하네, 그 부부는 왜 안 오는 거야?
“교랑을 데려가겠다고?”
대노야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혼수 때문에 온 게 아니었어? 대부인은 내심 놀랐다. 아니면 또 무슨 새로운 꿍꿍이를 생각해 낸 건지도 모르지. 결국 목적은 혼수일 거야.
“네.”
조 집사가 대답했다. 조 집사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는 몸종에게 눈짓했다.
“좋은 차구나. 한 잔 더 다오.”
대노야는 어이가 없었다. 명첩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지난번에 경성에 다녀온 집사가 거기서 봤다고 확인해 주지 않았다면, 이자가 과연 경성의 부호인 노섬 주씨 가문의 집사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차 한 잔 안 마셔 봤나? 들어오자마자 뭐라 말도 없이 차만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켜다니. 몸종은 또다시 차를 따르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렇습니다.”
조 집사는 잠시 차를 마시는 일을 멈추고 숨을 돌리며 말했다.
“곧 노부인의 기일이 돌아오거든요. 노야와 부인께서는 노부인이 생전에 교랑 아씨를 늘 마음에 걸려 하신 걸 떠올리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말을 들은 터라 그리 먼 길을 갈 정도면 몸이 많이 나았을 테니 와서 며칠 묵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대노야와 대부인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의문과 놀람이 섞여 있었다. 주씨 가문의 노야와 부인이 그런 마음을 품었다고? 두 사람은 또다시 집사를 쳐다봤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한 잔 더 다오.”
조 집사는 대노야 부부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종에게 말했다. 대노야는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사정이 그렇습니다. 대노야,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서 수일 내로 교랑 아씨를 모시고 출발하려고 합니다.”
조 집사는 몸종이 따르는 차를 보며 말했다.
“그냥 그 애만 데려가서 며칠 묵게 하겠다고?”
대부인이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그냥 사람만 데려가겠단 거야, 아니면 사람이랑 소유물도 같이 가져가겠다는 거야?
“아, 참. 그리고.”
조 집사는 무언가 생각난 것 같았다. 거봐, 올 게 왔군. 대노야 내외는 마음을 다잡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집사를 주시했다. 하지만 조 집사는 말을 잇는 대신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그, 그, 실례 좀 하겠습니다.”
조 집사가 말을 더듬었다.
“볼일이 급해서요.”
어차피 망신당한 거, 에라 모르겠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
대노야는 아연실색했고 대부인은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옮겼다. 아니, 주씨 집안에선 대체 뭐 하는 자를 보낸 거야? 그냥 단순한 실례 정도가 아니잖아. 상스럽긴. 조 집사가 시종을 따라 허둥지둥 나가자 대노야는 언짢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이랑 물건도 함께 데려갈 심산이면 꿈도 못 꾸게 해야죠.”
대부인이 말했다.
“사람을 데려간다고 물건까지 가져갈 수 있을 성싶소? 그 애가 어디에 있든 정씨 성을 가진 건 변함이 없소. 정씨 성을 가졌다면 우리 정씨 가문 사람이지.”
정씨 가문의 딸이란 말에 대부인은 밖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노야는요?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왜 안 온대요? 어쨌거나 교랑은 이노야의 딸이잖아요. 이노야가 생각을 밝혀야지. 괜히 우리만 사람 좋게 나섰다가는 좋은 소리 못 들어요.”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형제간의 우애를 중시해 온 대노야인지라 그런 불평은 귀에 거슬렸다.
“손님이 왔다더군. 임직과 관련된 일이라 하오.”
대노야가 시종을 향해 말했다.
“가서 물어보거라. 이쪽으로 올 수 있는지.”
시종은 네 하고 대답하며 후다닥 뛰어나가더니 얼마 안 가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와서는 대노야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대노야의 안색이 급변했다.
“정말이냐?”
대노야가 소리쳤다. 무슨 일이지? 대부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며 무슨 일인지 물으려는데 볼일을 본 조 집사가 돌아왔다. 대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시종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 사람을 데려가면 혼수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조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중요한 건 서둘러 사람을 데려가는 거지. 돈이나 물건을 따질 때가 아니야. 몸종 하나를 데려간 일로 시달려 죽을 뻔했는데, 모친의 혼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겠나. 조 집사는 또다시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정씨 가문 사람들이나 맛보게 하자.
조 집사는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차를 들어 또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시중을 들 사람도 따로 필요 없다는 겁니다. 저희가 다 갖춰서 내려왔으니, 교랑 아씨께선 지금 시중드는 둘만 데려가시면 충분해요.”
주씨 가문에서 정교랑을 경성으로 데려간다는 소식은 금세 퍼졌다. 시중들 사람을 더 데려가지 않는다는 말에 정씨 가문 몸종과 여종들은 재앙이 빗겨 갔음에 안도하며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춘란의 일가만 빼고.
지금 그 바보의 시중을 드는 두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춘란 일가의 귀한 외동아들이었다. 춘란 일가가 비통해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서 따라와.”
춘란은 울며 금가아를 잡아끌었다.
“내가 너 데려가서 사공자 앞에서 빌게. 어떻게든 바꿔 달라고.”
금가아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싫어, 바꾸긴 뭘 바꿔.”
춘란의 모친도 뒤에서 울고 있었다.
“우리 아들, 이건 대가 끊기는 일이야. 란아, 어서 네 동생 좀 구해다오.”
금가아가 발을 굴렀다.
“둘 다 뭐 하는 거예요. 난 경성에 가는 거지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고요.”
“거기 가면 못 돌아와. 바보를 따라가는데 무슨 살 길이 있어.”
춘란은 통곡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아씨는 바보가 아냐. 내가 말했잖아.”
금가아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짐을 챙기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다른 보따리 하나를 춘란에게 안겨 줬다.
“누나, 이건 누나 써. 대접할 곳 많잖아.”
이게 뭔데? 울던 춘란은 보따리를 열어 보며 물었다. 춘란은 사공자의 측근 시녀인지라 그래도 글자를 몇 자 알았다. 기름종이로 된 포장지에 작지만 또렷하게 ‘현묘관’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게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났어?”
춘란이 놀라 물었다. 아까만 해도 현묘관 간식 문제로 집안에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갑자기 동생이 이 많은 간식을 갖다 주다니.
“아씨께서 주신 거야. 나 먹으라는데 난 이런 거 안 좋아하잖아. 누나 가져. 누나랑 어머니가 신세 진 곳 있으면 그거로 갚기도 하고.”
금가아는 부모와 누나가 어리둥절한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갔다.
“나 간다.”
뒤에서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먹구름에 절망한 이는 춘란의 일가만이 아니었다. 이방의 거처에 있는 여종들과 몸종들은 조심조심 눈치를 살펴야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라더냐?”
대노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창백한 안색의 이노야는 눈까지 빨개진 채 앉아 있었고, 이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내양으로 결정됐다지 않았어요? 왜 갑자기 낙주(洛州)가 된 거예요?”
낙주는 중주(中州)가 아닐뿐더러 병주만도 못했다. 강주에서 가깝다는 게 그나마 유일한 장점인데 이노야가 집 떠나면 큰일 나는 젖먹이 어린애도 아니지 않은가. 누가 집에서 가까운 곳을 달랬나. 이노야가 원하는 건 승진이었다, 승진!
“누가 뒤에서 음해한 건지!”
이노야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내던졌다. 찻잔이 문 앞에 부딪혀 깨지며 쨍그랑 소리를 내자 회랑 아래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기겁하며 멀리 달아났다.
“어디서 성질을 부려! 지금이 성질을 부릴 때냐!”
대노야도 답답한 마음에 언짢은 듯 언성을 높였다. 정씨 가문도 이노야의 벼슬길을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 권세를 얻으면 더 많은 이익이 돌아오리라 고대하면서. 그런데 이제 권세를 잃게 됐으니 돈을 회수하는 일도 요원해졌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고 이부인만 소리 죽여 흐느낄 뿐이었다.
“정말 누가 술수를 부렸단 말이냐?”
대노야가 물었다.
“모르죠.”
이노야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장 답답한 게 그 지점이었다.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분명 스승님한테도 말씀을 올렸고 유 학사 쪽에서도 제 명첩을 받으셨거든요. 틀림없는 일이었는데, 어찌……·.”
거기까지 생각한 이노야는 이를 갈았다. 피라도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틀림없는 일이 결국 실패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던 게지. 아무래도 더 큰 권력이 힘을 쓴 듯싶다. 너도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내양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가 있다고.”
그리 생각하는 수밖에. 하지만 마음이 꺼림칙하단 말이다. 마음이!
“대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까지 나서셨는데도 못 눌렀다니.”
이노야가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말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아, 참.”
대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이노야한테 말할 게 있어요. 주씨 가문에서 교랑을 데려간다고 말을 전해 달라네요. 그래도 가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교랑! 그 바보! 그 바보가 집으로 돌아온 후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불길한 것!
“냉큼 꺼지라고 하세요.”
이노야는 심기가 불편한 듯 손을 내저었다.
“다시는 안 돌아오면 더 좋고요! 그 계집이 날 해친 겁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 일에 그 바보가 연루됐을 리가 있나. 이부인은 흐느낌을 멈추고 얼른 대부인을 보며 물었다.
“데려간다고요? 그럼 혼수는요?”
대부인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말게. 그걸 가져가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역시 영명하세요.”
이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작은 이익을 탐하려다 큰 손실을 볼 순 없죠.”
앞에 꿇어앉아 있는 금가아를 보며 정교랑이 물었다.
“날 따라가고 싶니?”
“당연히 같이 가야죠.”
금가아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에는 이 소녀가 연이나 갖고 노는 바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바보가 아닌 걸 알게 됐으니 멋쩍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정교랑이 금가아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너, 이름이 있니?”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정교랑은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불리든 관심을 두는 법이 없었다. 일단 관심을 가졌다 하면……·. 손 관주가 땀을 닦으며 나섰다.
“아씨, 아씨. 이 아이는 사환(使喚: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에요.”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짐을 챙겨라.”
정교랑은 그 말만 남긴 채 회랑에서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와 금가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사님, 아씨께서 금가아의 이름을 물으시는데 왜 사환이란 말씀을 올리세요? 그게 질문과 무슨 상관이죠?”
시녀의 물음에 손 관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환이잖아. 여자애도 아닌데 반근이라고 부르면 듣기 안 좋아.”
응? 뭐라고? 시녀와 금가아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방금 그 말과 무슨 상관이지? 아씨의 말과 행동만 이상한 줄 알았더니 이젠 관주도 기괴해졌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이 뜻이었구나.
진씨 가문의 일이 워낙 급했기에 그날부로 길을 재촉해야 했다.
“아씨, 걱정 말고 출발하세요. 현묘관은 아씨께서 돌아오실 날만을 기다리겠습니다.”
손 관주가 공손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태평궁이 아니라 현묘관이라. 7월부터 9월 중순까지 정씨 저택에서 태평궁으로 온 후 두 달 반 만에 그녀는 또다시 산문을 나서게 됐다. 정교랑은 입꼬리만 살짝 위로 올릴 뿐 별다른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층계를 내려갔다.
산 아래에 있는 현묘관 도사들도 새로 맞춘 도복을 입고 배웅을 나왔다. 조 집사가 주씨 가문의 수행원, 진 사노야와 함께 나와 극진한 예로 맞이했다.
전부 정교랑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만 나왔을 뿐, 정작 관계가 있는 정씨 가문에서는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손 관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세요. 어서 가세요.
저녁 무렵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뒤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훔치는 춘란을 보며 정사낭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 마라. 집안에서도 장사 때문에 경성에 갈 일이 있으니 그 인편에 서찰을 전하기 편할 거야.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금가아를 데려오도록 해라.”
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멘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예쁜 얼굴로 그게 뭐냐, 가엾어 죽겠네. 이러지 마라.”
청색 옷을 입은 공자가 옆에서 웃으며 놀리고는 정사낭을 보며 말했다.
“자네, 여자를 너무 밝히는 거 아닌가. 술도 못다 마셨는데 이 아이 때문에 이렇게 나오다니.”
“자고로 인륜의 정이 가장 큰 정이랬어.”
정사낭이 눈을 들며 앞쪽을 보며 말했다. 말하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정사낭은 자신의 동생을 배웅하겠다는 몸종이 아니었더라도 나왔어야 마땅했다. 지금 떠나는 사람은 정사낭의 누이였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람은 없었겠지? 춘란이 애원하지 않았다면 정사낭 자신도 생각 못 했을 터였다.
“춘란, 돈 좀 가져온 거 있느냐?”
정사낭의 물음에 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에서 작은 향낭 하나를 꺼냈다. 동생이 경성에서 무탈하게 지내길 바라며 그동안 모은 돈을 전부 가져온 터였다. 일개 몸종에게는 제법 큰 액수였으나 정사낭에게는 내놓기 쑥스러운 액수였다.
“장명, 얼마나 가져왔어?”
정사낭이 고개를 돌려 동행자에게 물었다. 동행자가 뒤에 있는 사환과 몸종에게 묻자 몸종이 전대를 꺼내 바쳤다. 정사낭은 동행자가 미처 새어 볼 틈도 없이 낚아채 위아래로 던져 보며 손대중으로 무게를 짐작했다.
“이따 갚을게.”
정사낭은 만족한 듯했다. 장명이라고 불린 공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하여간 통도 크지.”
이 정도 은자면 몸종 일가에겐 차고 넘치는 돈이 아닌가. 이 계집이 사낭의 목숨을 구했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공자님, 공자님. 저 사람들이죠?”
춘란이 소리쳤다. 벌써 성문을 나온 그들은 성을 둘러싼 왼쪽 대로에 있었다.
“금가아.”
춘란이 금가아를 붙잡고 울며 신신당부를 하고 손에 든 돈을 쥐여 줬다. 금가아는 쑥스럽기도 하고 잔소리도 듣기 싫은 눈치였다. 정사낭이 다가가 조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가는 길에 누이를 잘 보살펴 주게.”
조 집사는 흠칫 놀라며 소년 공자를 살폈다. 별일이군, 정씨 가문에서 배웅을 나온 사람이 있다니. 이쪽에서 이런 말을 나누는 사이 저쪽의 진 사노야도 자신의 집사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깔개를 넉넉하게 깔아라.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하니.”
“사노야, 오는 길에 추밀사(樞密使) 문씨 가문의 사람이 명첩을 보냈던데 뵙고 가실 건지……·.”
“그 사람들 만날 새가 어디 있나. 우리 행적을 모르게 하라고 했잖느냐.”
“삼노야께서 오가는 길에 불편을 겪을까 봐 역참에 연통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사노야께서 고향 친척댁에 다니러 가신다고 했고요.”
정사낭은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주위에 있던 젊은 공자가 그중 몇 마디를 우연히 듣고 순간 표정이 변했다. 추밀사? 문씨 가문? 그런 이들이 명첩을 보냈다? 대체 얼마나 지체가 높기에?
공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 있던 진 사노야도 눈치를 챘는지 이쪽을 쳐다봤다. 관리 신분은 아니었지만 가세가 대단하다 보니 일개 소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젊은 공자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내 누이를 봐야겠네.”
정사낭의 말에 조 집사는 아, 예 하고 대꾸하면서 손으로 가리킬 뿐 여인과 시녀 앞으로 직접 가진 않았다. 뒤쪽 마차에는 치마저고리 차림에 영리해 보이는 시녀가 마차의 끌채 위에 앉아 낭랑한 목소리로 손에 든 책을 읽고 있었다.
“사당 앞은 붐비고 있었다. 가마와 말이 오갔고, 대부분……·.”
교외에 세워진 마차. 이쪽에서는 일행들이 앞으로 갈 여정을 살피며 채비에 여념이 없고, 저쪽에서는 춘란과 금가아가 울고불고하며 작별의 정을 나누고 있는데,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 책을 읽고 있는 시녀의 모습은 이 슬프고 어수선한 송별도(送別圖)에서 유독 한가롭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지금이 책이나 읽고 있을 때야? 시녀 치고 제법 품위가 있네. 장씨 가문에서 보낸 아이 아니랄까 봐. 정사낭이 가까이 다가와 예를 표했다. 시녀는 눈을 들어 정사낭을 쳐다보면서도 입으로는 계속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왜 왔는지 물어볼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나는 정씨 집안 넷째다. 누이가 떠난다기에 배웅하러 왔다.”
하는 수 없이 정사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 길 떠나는 길이니 몸조심하고.”
“반근.”
마차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는 그제야 낭독을 멈추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정사낭에게 예를 표했다. 반근? 정사낭은 여자아이와 마차 안을 차례로 쳐다보고 어찌 된 일인지 눈치챘다. 아는 이름이 그것뿐이로구나.
“공자님, 저희 아씨를 배웅하러 특별히 오신 거예요?”
시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사실 특별히 왔다고 할 순 없었다. 측근 시녀가 울고불고 애원하지 않았다면 올 생각이 안 들었을 테니까.
“여기 돈을 좀 넣었다. 날이 점점 추워지니 필요한 물건이 많을 게야. 가져가서 써라.”
정사낭이 화제를 돌리며 손에 든 전대를 건넸다. 시녀는 빙긋 웃으며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다.
“고맙습니다.”
마차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시녀는 얼른 손을 뻗어 받으며 고맙다는 예를 표했다. 정사낭은 다시 한번 마차 안을 쳐다봤다. 정사낭은 지금껏 마차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고 이 시녀에게 집중했다. 바보를 돌보는 건 이 시녀일 테니 시녀에게 당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두 번의 문답에서 결정권을 가진 건 마차 안에 있는 바보 같았다.
“누이, 더 필요한 건 없고?”
정사낭이 떠보려는 듯 물었다.
“없어요.”
정교랑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고맙습니다.”
정사낭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조 집사가 다가왔다.
“공자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길을 재촉해야 해요.”
정사낭은 조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몇 걸음 비켜섰다. 시녀는 정사낭을 향해 웃음을 지은 다음 다시 마차에 올라타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행렬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자님, 배웅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마차의 차창 휘장이 들어 올려지는가 싶더니 시녀가 안에서 웃으며 인사했다.
“조심히 가라.”
마차를 쳐다보던 정사낭은 멈칫했다. 소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은 긴 머리를 내려뜨리고 고개를 돌려 앞을 보고 있었다. 이마가 봉긋 솟아 있고 코가 오뚝한 그 여인이 시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휘장이 다시 내려짐과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정사낭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대체, 뭘, 본 거지?!
“잠깐.”
퍼뜩 정신을 차린 정사낭이 마차를 쫓아가며 외쳤다.
“공자님, 천 리를 배웅해도 결국 이별할 때가 오는 법 아닙니까. 그만 들어가세요.”
조 집사가 말 위에서 공수하며 소리쳤다. 마차는 높이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빠르게 멀어졌다. 몇 걸음 뒤쫓아가던 정사낭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 맞아. 그 여인이야, 그 여인. 당연하지. 연못은 누이들의 공간이고, 바보 역시 누이가 아닌가. 그 여인이로군. 그 여인이었다니.
“이보게, 사낭. 누이와 이토록 애틋한 사이였나.”
장명 공자가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장명 공자는 멀어지는 행렬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네 누이의 외가가 어느 댁이라고?”
강주성에선 정씨 가문의 바보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좋은 일은 아닌지라 뒤에서 얘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벗 사이에서도 그 바보에 대해 대놓고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정사낭은 장명 공자가 다시 한번 물은 다음에야 알아듣고 대답했다.
“주 대노야께선 귀덕낭장(歸德郎將: 종오품하 무관)이셔.”
“겨우 그 정도라고?”
장명 공자가 놀라 대꾸했다.
“응. 조상도 무관이었는데 섬서의 지방 관리셨지.”
정사낭이 의아해하는 장명 공자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는데?”
그 정도면 추밀원의 문 상공 가문에서 친히 명첩을 보낼 지위가 아닌데. 장명 공자는 마차가 멀어져간 방향을 다시 쳐다봤다. 행렬은 눈 깜짝할 새에 작은 점으로 변해 있었다. 저리 급히 가다니.
* * *
이들 외에도 배웅 나온 사람이 또 있었다. 장명 공자는 강주에서 주씨 가문의 점포를 맡고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도 자네들 가문에서 왔나?”
“아닙니다.”
주씨 가문 사람의 대답에 정사낭도 멈칫하여 되물었다.
“그럼 누군데?”
분명 주씨 가문에서 데려간다고 했는데 주씨 가문 사람이 아닌 사람도 있다고? 잘 아는 사람이 동행한 건가?
“모릅니다. 같이 왔다는데 진씨 성을 가졌고 경성 사람이라 들었어요.”
대답을 마친 주씨 가문 사람이 후다닥 뛰어갔다. 경성의 진씨?
“진소 상공 댁은 아니겠지?”
장명 공자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정사낭은 멈칫했다. 물론 정사낭도 진소가 누군지 알았다. 정사낭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사낭은 웃으며 장명 공자의 어깨를 탁탁 쳤다.
“진소 상공 댁에서 내 누이를 친히 데리러 온다고? 차라리 옥황상제가 내 누이를 데리러 온다고 하면 더 믿음이 가겠네!”
하긴 그렇지. 장명 공자도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면서도 마차가 멀어진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대체 누구지? 정사낭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자라면서 여러 번 모습이 바뀐다더니, 정상인이든 비정상인이든 똑같군. 저리 아름답게 변하다니. 잘된 일이면서 애석한 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마음을 품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눈물을 닦고 돌아서던 춘란이 이별의 슬픔에 넋을 놓고 있는 두 공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앞이 캄캄하고 넋이 나가게 하는 것은 오직 이별뿐이리(黯然销魂者, 唯别而已)
강엄의 <별부(別賦)>
다만 배웅하는 자가 넋이 나간 것은 이별 때문이 아니고, 이별하는 자 역시 앞이 캄캄한 건 아니었다.
“아씨.”
마차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휘장을 들자 말을 타고 앞에서 다가오는 시종의 모습이 보였다.
“아씨, 조금 더 가셔야겠습니다. 수십 리 더 가면 있는 매현 역참에서 쉬시죠.”
그 말에 시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매현까지 안 쉬고 간다고요?”
시종이 그렇다고 하자 시녀는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그래.”
정교랑의 말에 시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 집사는 아씨만 동의하면 된다고 했다. 시종은 얼른 말 머리를 돌려 달려갔다. 휘장을 들어 올린 김에 정교랑은 밖을 내다봤다. 쉬지도 않고 먼 길을 달려온 참이었다.
“아씨, 바람이 차요. 휘장을 내리세요.”
시녀가 말했다.
“정말이지, 산이며 바다며, 웅장하고 아름답네.”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도 정교랑을 따라 밖을 내다봤다. 석양이 내린 도로가 비단을 깔아놓은 듯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호광(湖廣)을 지날 땐 더 아름다울 거야.”
“아씨, 휘장을 내리세요.”
시녀가 다시 한번 채근했다.
정교랑은 그 말에 자세를 바로 앉으며 휘장을 내렸다. 그 덕에 시녀는 바람을 맞지 않게 됐다.
“이 길을 지나간 적 있어.”
정교랑이 말했다. 이 아씨가 몸종과 함께 병주에서 홀로 강주로 돌아온 일은 시녀도 대강 알고 있었다. 전에 갔던 길을 다시 지나가니 감상에 젖은 건가? 풍경은 여전한데 사람이 달라져 슬픈 것일까?
“그땐, 못 봤거든. 이렇게 아름다운지.”
정교랑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시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때는 길을 재촉하며 돈을 마련하느라 풍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씨께서 돌아오는 길에 보실 풍경은 더 아름다울 거예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정교랑은 조금의 주저함이나 애매함도 없이 대답했다.
“난 반드시, 아름다운 풍경만 볼 거야.”
땅거미가 지자 손 관주는 손에 들고 있던 경서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사부님, 오늘 밤에도 태평궁에 가세요?”
도동이 물었다.
“거기서 묵어야겠다. 너희는 등불을 잘 지켜라. 날이 가물어 조심해야 해.”
도동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직접 등롱을 들고 나섰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어두운 등불에 의지해 위로 올라갔다. 태평궁은 여전했고 문을 여는 도동도 여전했다. 손 관주는 습관처럼 정교랑의 거처를 직접 둘러보며 물었다.
“오늘 닦았느냐?”
“닦았어요. 방 안에 있는 꽃도 새것으로 바꿨고요.”
도동의 대답에 손 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그렇게 해라. 방 안에 사람의 기운이 돌아야 아씨께서 돌아오셨을 때 편히 지내실 수 있어.”
도동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아씨는 이제 출발했으니 그리 빨리 돌아올 리 없지 않은가. 더구나 외가댁에서 데려간 건데.
“사부님, 아씨께서 돌아오실까요?”
도동이 물었다. 정씨 가문에서 그토록 박대하는 마당에 외가에서 거둬 준다면 좋은 일인데 뭐 하러 돌아온단 말인가. 손 관주는 대답이 없었다.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이 아씨의 존재가 없었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겨우 두 달 있다 떠난 아씨 때문에 왜 이토록 마음이 허전한 것인지.
든든한 기둥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정씨 가문에서 버림받고 도관에서 자란 여자아이를 기둥으로 여기다니, 본인이 생각해도 우스웠다. 손 관주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오시든 그렇지 않든, 이곳은 그분의 집이야.”
도동은 네, 하고 대답했다. 하긴 그랬다. 어쨌거나 태평궁은 정씨 가문의 가산이니까. 두 사제가 문을 닫으며 나오는데 산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보원산 도관 사람이 서찰을 가져왔어요.”
보원산 도관? 손 관주는 멈칫했다.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 있나? 안으로 들어간 손 관주는 등불 가까이에서 서찰을 읽은 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두 아이는 꾀가 많으니 눈여겨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손 관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처음엔 신경을 많이 썼는데 애들이 둘 다 너무 얌전하더라고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힘든 일도 열심히 했어요. 자신들의 딱한 처지에 대해 말한 적도 없고 성실하길래 그만……·.”
서찰을 가져온 중년의 여도사 역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갑자기 도망가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도 도관의 시줏돈까지 훔쳐서 달아났지 뭐예요. 겨울을 나려고 모아 놨던 돈인데.”
“그래도 싸지.”
손 관주는 언짢은 듯 대꾸했다.
“우리가 월동할 돈을 줄 거란 생각은 접어.”
중년 여도사는 헤헤 웃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숙님, 저희 사부님은 그런 뜻 없으셨어요. 그냥 말씀을 전하시려던 거예요.”
그 말에 손 관주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네 사부의 꿍꿍이를 모를 줄 알아?”
거기까지 말한 손 관주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애들 둘이 오밤중에 얼마나 멀리 갔을라고? 제대로 찾아보긴 한 거야?”
“찾아봤죠. 근방 백 리를 샅샅이 뒤졌는데 그림자도 안 보였으니 정말 기이한 일이에요. 늑대한테 물려갔으면 또 몰라도요.”
중년 여도사가 말했다. 손 관주는 손에 든 서찰을 잠자코 보며 정교랑에게 서찰을 보내야 하나 고민했지만 정교랑이 가는 길에 어디 묵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서찰을 보낼 방법이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내려가서 쉬어라. 도망갈 테면 가라지.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우리가 내쫓은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나간 건데, 죽든 살든 그 아이들 운명이지.”
손 관주의 말에 중년 여도사는 네 하고 대답했다.
“사숙님.”
무언가 떠오른 듯 또다시 걸음을 멈춘 중년 여도사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듣자니 여기 간식이 엄청 유명하다던데, 가져갈 때 제가 좀 싸가면 어떨까요? 저희 쪽에 가져가서 널리 알리면 더 좋잖아요.”
손 관주는 어이가 없는지 내가 그 꿍꿍이를 모를 줄 아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간식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우린 도관이지 간식 장사하는 점포도 아닌데 알리긴 뭘 알려.”
깊은 밤, 이따금 산바람이 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두 형체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언니, 나 못 걷겠어.”
“못 걷겠어도 가야 해.”
“언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릴 내친 사람들을 후회하게 만들 곳으로 가야지.”
캄캄한 어둠을 뚫고 등롱 두 개가 보이자 마차 행렬의 인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아씨, 역참에 도착했어요.”
신이 난 시녀가 마차 안에서 비단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는 여인을 보며 말했다.
“이미 늦었는데 그냥 길을 더 재촉하시죠.”
조 집사가 진 사노야에게 말했다. 진 사노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는 길에는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그 여인을 데려가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된 터였다.
“그 낭자한테 가서 말해 보게.”
“제가요?”
조 집사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말고 사노야께서 가 보세요.”
오는 내내 조 집사는 정교랑 앞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진 사노야도 그 사실을 익히 알았다. 도관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면 정교랑이 조 집사를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주씨 가문을 싫어하는 건가?
“저희 아씨께서 어릴 때부터 좀 기이하셨어요. 저희 노부인의 말씀만 들으셨죠. 어릴 때부터 노부인이 키우셨거든요.”
조 집사가 탄식하듯 말했다. 진 사노야는 아, 하고 대꾸했다. 주 노부인께서 키우셨다니, 그럼 주씨 가문과 아주 가까운 사이겠군. 병자는 성격이 좀 괴팍한 법이니 교랑 아씨도 그래서 그럴 게야. 진 사노야가 마차 앞으로 가서 말했다.
“어떻게 그래요, 너무 고단하잖아요. 몸이 못 견뎌요.”
시녀가 곧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신체 건강한 시녀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차를 오래 타려니 못 견딜 지경인데, 더구나 정교랑은 건강도 안 좋지 않은가. 진 사노야가 정교랑을 쳐다봤다. 진 사노야는 둘 중 누가 결정권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낭자, 부친의 병세가 실로……·.”
진 사노야가 유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두를수록 늦어요. 일을 너무 서두르면 도리어 이루지 못하는 법이죠.”
정교랑이 말했다.
그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 사노야에게 말했다.
“저희 아씨께선 극도로 피로하셨어요. 이 상태로 가면 도착해도 부친을 진료하기 힘드실 거예요.”
하긴 그렇지. 진 사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소홀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낭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어 간다는 결정을 내리자 행렬은 우르르 역참을 향해 갔다.
한밤중이었지만 역참은 몹시 떠들썩했다. 오래전에 지어져 장기간 수리하지 않고 방치된 역참에 인파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물건을 운반하는 수레와 말이 대부분이어서 공기 중에 이상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나가요, 나가. 자리가 없다니까. 다 죽게 생긴 사람은 더더욱 들일 수 없지.”
뚱뚱한 역승(驛丞. 역을 관장하는 벼슬) 두 명이 사내 네다섯 명을 내쫓았다. 사내들은 널빤지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그 위로 이불을 덮은 사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역승에게 쫓겨난 사내들이 욕을 해댔다.
“뭐가 어째? 서쪽 오랑캐도 못 이겨 도망친 탈영병 주제에 어디서 유세야?”
역승이 호통을 쳤다.
“오랑캐 종놈들 같으니라고!”
사내들은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 듯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주먹을 쥐었다.
“소란 피울 생각 마. 틀린 말도 아니잖아.”
한 사내가 나머지 사내를 제지하며 소리치고는 역승을 보며 말했다.
“여기 밖에서 하룻밤만 쉬어 가겠소이다.”
“큰형님, 하지만 셋째의 병세가……·.”
다른 사내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하자 사내는 대꾸하지 않고 입구쪽을 힐끔 쳐다봤다. 입구쪽에서는 진 사노야의 행렬이 들어오고 있었다. 커다란 말과 비단옷, 옥대에서 딱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눈치가 빠른 역승이 얼른 웃으며 맞이했다.
“대인, 묵어가시려고요?”
역승들이 살갑게 인사했다. 조 집사가 꺼내 보인 역권(驛券)에서 붉게 찍힌 관인을 확인한 역승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이런 작은 고을에서 경성의 고관대작을 맞이하다니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좋은 방이 부족한데요.”
“부족하면 그 장사치들을 내쫓으면 되지.”
역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밖에선 벌써 모닥불을 피운 사내들이 차가운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귀천에 따라 목숨값도 다르다더니!”
심한 욕설을 내뱉는 자도 있었다.
“큰형님, 셋째가 힘들 것 같아요.”
한 사내가 널빤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있는 사내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사내들이 다가가 빙 에워쌌지만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이나 흘릴 뿐 속수무책이었다.
“사람 목숨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우두머리인 사내는 더없이 비통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운명은 무슨! 운명은! 어쩔 수가 없잖아! 어쩔 수가!
“사람의 목숨은, 확실히, 하늘에 달렸죠. 이 병자는, 날 만났으니, 정말, 운이 좋네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등불이 환히 켜진 저쪽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가운데 이쪽에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저쪽의 소란이 정리되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때 차창의 휘장이 열리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인으로 보이는 형체가 이쪽을 쳐다봤다.
“의원이 있습니까?”
사내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행렬과 차림새로 짐작하건대 엄청난 부호가 분명했다. 부잣집에서 따로 의원을 두는 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정교랑의 마차 주변을 지키던 시종들은 사내들이 우르르 일어서자 긴장하며 얼른 경계 태세를 취했다.
“뭐 하는 거요?”
시종들은 경계하며 소리치는 한편 이 괴상한 아씨가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속으로 푸념했다. 재수 없는 일을 당한 사람한테 운이 좋다느니 헛소리를 해대다니,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사내들 몇 명을 상대하는 게 겁나는 일은 아니었으나 길에서 괜한 시비가 붙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이자들은 병졸인 듯합니다.”
시종들 중 우두머리가 정교랑의 마차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정교랑은 잠자코 있었다. 놀랐나 보군. 시종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했다. 저쪽 사내 역시 나머지 사내들을 다독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소란스러운 밤에 양쪽은 침묵을 지키며 대치했다. 마차의 휘장이 열리고 시녀가 먼저 뛰어내렸다.
“아씨,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저쪽 방이 정리되면 들어가세요.”
시종이 얼른 나섰지만 시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정교랑도 마차에서 내리도록 부축해 주었다. 가을밤이라 벌써 제법 쌀쌀했다. 두봉을 걸친 정교랑은 두모(兜帽)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냘파 보였다. 이 가냘픈 여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시종을 지나쳐 역참 방향이 아니라 사내들 쪽으로 갔다.
“아씨?”
정신을 차린 시종들이 소리치며 초조하게 따라갔다. 사내들은 여인이 갑자기 자신들 쪽으로 걸어오자 영문을 몰라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씨, 저기, 의원이 있습니까?”
사내들 중 우두머리가 물었다.
“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말 있다고? 사내들은 순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선을 피웠다.
“그럼, 부디 아씨께서 구해 주십시오.”
우두머리는 그래도 자제를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예를 표했다.
“좋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귀인을 만났구나! 사내들은 흥분하며 어서 이 아씨가 자기 집 의원을 불러오길 기다렸지만 아씨는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사내들은 반사적으로 길을 열었다. 널빤지 앞에서 걸음을 멈춘 정교랑은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사내를 봤다. 멈칫했던 시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굽혀 이불을 젖혔다.
“아씨?”
사내들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 어린 낭자가, 왜, 사내를 보러 온 거지? 시종들은 이미 멍한 상태였다. 그래도 기민한 몇 명은 벌써 조 집사에게 이 일을 알리러 갔다.
“뭐라고?”
역참의 방이 정리되길 기다리던 조 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 원, 하여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니까.”
조 집사는 투덜거리며 말리러 가려고 했지만, 자신이 가면 불 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씨는 틀림없이 자신과 맞서려 들 터였다.
“무슨 일인가?”
진 사노야의 물음에 조 집사는 얼른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
진 사노야는 다소 놀란 눈치더니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씩 웃었다.
“내가 가 보지.”
조 집사가 바라던 일이었다. 조 집사는 얼른 진 사노야를 보내고, 자신은 일행과 함께 역참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가만히 서서 널빤지 위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내를 내려다봤다. 사내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낡아서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봉두난발에 어찌나 꾀죄죄한 몰골인지 부모가 와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더러운 옷자락을 붕대로 삼아 칭칭 싸맨 팔다리에서는 모닥불 아래로 검붉은 얼룩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 역시 이 아씨의 의도를 몰라 멍한 채로 있었다. 병자가 뭐 볼 게 있다고 구경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더러운 몰골에 퀴퀴한 냄새가 나서 보통 사람도 고개를 돌릴 정도인데, 하물며 이분은 아리따운 아씨가 아닌가.
“아씨, 저희 형제인데 자상을 입었습니다. 의원을 여럿 찾아가 봤지만 전부 금창약으로는 못 고친다고……·.”
우두머리인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그래요. 금창약으론, 못 고친다고? 단지 병일 뿐, 명이 걸린 일도 아닌데, 못 고치긴요.”
정교랑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사내는 대단히 기뻐했다.
“고칠 수 있습니까?”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서 의원을 불러 주십시오!”
시녀는 사내를 힐끔 쳐다보고 불쾌한 듯 대꾸했다.
“여기 오셨잖아요.”
왔다고? 사내들은 흥분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어디? 주변에 있는 이는 경계 태세를 취하면서도 아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종들과 두봉을 걸친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주인어른 같은 사람이 전부였다. 좀 멀찍이 떨어져서는 역참에서 쫓겨나 난리를 치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약상자를 들고 사람의 목숨을 구하러 달려오는 이가 어디 있단 거지?
“에휴.”
시녀는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여기 계시잖아요!”
정교랑이 땅바닥에 앉아 치마를 쫙 펼쳤다. 치맛자락에는 금실로 수놓은 꽃이 있었다.
“불을 더 넣고 칼을 가져와요.”
정교랑이 소매에서 손을 빼며 말했다. 사내들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뭐라고?
“노야.”
진 사노야를 모시는 사환이 어서 말리라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거다. 무엇이 의원인지.”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환을 제지하고 흥미롭다는 눈길로 지켜봤다. 역참 입구에 있던 사람들도 곧 그 광경을 목도했다.
“무슨 일이지?”
“웬 여인이 방금 쫓겨난 사람을 치료하려나 본데.”
“그 사람? 곧 죽게 생기지 않았어?”
“어서 가 보자고. 죽은 사람을 치료한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야.”
사람들이 안으로 세 겹, 밖으로 세 겹 둘러싼지라 안쪽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크고 작은 경탄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뭔데? 무슨 일이오?”
뒤쪽에 있던 사람이 인파를 밀치며 다급하게 물었다.
“물러서요, 물러서.”
사내들은 빽빽하게 둘러싼 사람들을 뒤로 밀치며 소리쳤다. 동시에 자신들도 수시로 고개를 돌리며 놀란 표정으로 공터를 살폈다. 모닥불 옆에 자리를 깔고 앉은 여인은 여전히 커다란 두모를 쓰고 있어 불빛 아래에서 기이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여인이 손을 밖으로 드러냈다. 여인은 한 손에 칼을 쥐고 한 손으로는 널빤지 위에 누운 사내의 몸을 움켜쥔 채 이리저리 손을 놀리며 썩은 살을 발라내 한쪽 옆으로 던져 놨다.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살갗이 타며 나오는 불쾌한 악취가 겹친 그 광경은 제대로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오싹했다.
저게, 병을 치료하는 건가? 역참 밖은 시장바닥처럼 떠들썩했고, 역참 안 역시 고요하진 않았다.
“반근 낭자, 이 정도면 되나?”
시종 두 명이 잡동사니가 있는 건물에서 멍석 하나를 꺼내 왔다. 오랫동안 방치한 데다 건물이 그늘지고 습하다 보니 군데군데 썩어 있고 푸른곰팡이까지 피어 있었다.
“그래요.”
시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얼른 아씨한테 갖다 드려요.”
두 시종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멍석을 들고 뛰어나갔다.
“빨리요, 빨리. 더 찾아요, 더.”
시녀는 나머지 사람들을 재촉했다. 한쪽 옆에 선 두 역졸은 팔짱을 낀 채 실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허, 참.”
그중 한 역졸이 말했다.
“오늘 아주 별 희한한 일을 다 보는군.”
“그것도 오밤중에.”
또 다른 역졸도 이쪽에서 횃불을 들고 방을 뒤지는 사람들과 저쪽 밖에서 모닥불 주변에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대꾸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시장바닥처럼 떠들썩해.”
거기까지 말한 역졸은 오싹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밤중에 시장은 무슨 시장? 귀신이 모이는 시장이면 몰라.
“썩은 살을 발라내더군.”
“칼을 달궈서 담금질하듯이 했어.”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염왕전은 돼야 이 정도로 소란스러울 텐데. 역졸은 팔을 꽉 끌어안으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설마 진짜 귀신은 아니겠지.
닭 우는 소리가 세 번 들리고 동녘이 밝아왔다. 이리저리 구르다가 일어난 역졸은 자신이 담벼락 앞에서 잔 사실을 깨달았다. 몸 아래에는 볏짚이 깔려 있고 옆에 있던 모닥불은 꺼져 있어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던 어젯밤을 떠올렸다. 사람들을 못다 수용해 난리 법석을 떨었는가 하면 살을 바르고 병을 치료하는 광경을 목도하기도 했는데……·. 퍼뜩 정신을 차린 역졸이 사방을 둘러봤다. 정적 속에서 말이 울거나 발굽을 굴러 땅을 파내는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 사람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인파 소리는 더더욱 없었다.
날이 밝아 귀신 시장이 파한 건가. 정말 귀신이었던 말이야?
“큰형님, 큰형님, 약 달여 왔어요.”
역참 안에서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졸이 얼른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부뚜막 저쪽에서 약탕기를 들고 방으로 달려가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다가왔다.
“어서 셋째한테 먹여.”
“아직 안 깨어났는데 어떻게 먹이죠?”
“그 아씨께서 깔때기를 사용하라고 하셨잖아.”
방 안에서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들렸다. 꿈이 아니었군, 귀신을 만난 것도 아니야. 역졸은 한숨을 토했다. 어젯밤에 정말로 병을 고치고 사람을 구한 모양이네. 그런데, 살렸다고? 분명 칼과 불, 곰팡이가 핀 잡동사니 따위만 썼는데.
날이 밝자 똑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어젯밤의 일을 주고받는 한편 그 병졸들이 묵은 방을 기웃거렸다. 짐을 다 실은 마차조차 출발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살린 건가?”
“그러게. 그 난리를 치르면 병이 없던 자도 초주검이 될 것 같은데.”
마당에서 의논이 분분했다. 방 안에 있던 진 사노야는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을 뿐 한숨도 못 잤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은 진 사노야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급히 물었다.
“어떻게 됐느냐? 죽었느냐?”
밖에 있던 사환이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아직 아무 말이 없습니다. 방금 약을 주입하는 것 같았어요.”
진 사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피식 웃었다.
“그것도 약이라 할 수 있나?”
마구잡이로 뜯은 풀에 가마 밑에서 긁어 낸 재 따위를 섞어 달인 게 아닌가.
“노야, 출발할까요? 날이 밝았습니다.”
사환이 물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길을 떠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진 사노야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
뭘 기다려? 사환은 이해가 안 됐다. 왜 이렇게 느긋한 거지? 시간은 더디 흐르는 듯했고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방 안에 있는 사람 역시 이리저리 서성이며 좌불안석이었다.
“큰형님, 셋째 아우가 정말 살아날까요?”
누군가가 물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불을 덮고 잠든 사내는 말이 없었다.
“이런 거로 정말 병이 낫는단 말입니까?”
또 다른 사내가 누워 있는 사내의 근처로 다가앉으며 이불을 걷어치웠다. 사내의 옷은 이미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 주요 부위만 간신히 가릴 정도였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흰색과 초록색으로 얼룩져 소름이 끼쳤다.
“으, 추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춥긴 뭐가 추워. 지금이 어느 때……·.”
이불을 젖히던 사내는 언짢은 듯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다가 곧 멈칫하여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
사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다른 사내가 물었다.
“추, 추워.”
사내가 말을 더듬었다.
“거참 성가시게 구시네!”
옆에 서 있던 사내가 퉁명스럽게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내가 말한 거 아니라고!”
사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손에 들고 있던 솜이불이 떨어졌다.
“셋째야. 셋째가 춥다고 했어!”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우두머리인 사내가 얼른 자세를 고쳐앉더니 무릎에 얹은 손을 꽉 움켜쥐며 자리에 누운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셋째, 좀 어때?”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머지는 전부 숨을 죽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누워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 순간이 평생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순간처럼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으, 목말라.”
목이 잠긴 목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방 안에서 천지를 뒤흔들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창문까지 덜덜 떨릴 정도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기절할 뻔했다. 곧이어 우당탕 소리와 함께 사내 몇 명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쾅 부딪친 문 한쪽이 꽈당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뒹굴어 마당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어, 엇, 이봐요. 문을 고장 내면 돈을 물어내야 해요!”
마당에 서서 사내의 생사를 궁금해하던 역졸이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크지 않은 역참이라 마당은 앞뒤로 있는 두 개가 전부였다. 앞쪽에서 난 시끌벅적한 소리는 자연히 뒤쪽 마당에서도 동시에 들렸다.
진 사노야가 벌떡 일어났다. 죽은 거야, 산 거야?
“노야, 그 사내들이 아씨의 방 앞에서 감사 인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깨어났대요.”
사환이 고개를 들이밀고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과연? 정말로? 진 사노야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사내 세 명이 정교랑이 있는 방을 향해 절을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시끄럽게 하지 마요.”
시녀가 문을 열고 불쾌한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씨께선 아직 주무세요.”
사내들은 얼른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물었다. 진 사노야가 앞쪽으로 걸어왔을 무렵 사내들이 묵은 방 입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해 난리였다.
“비켜요, 비켜. 썩 꺼지라고.”
뒷마당에서 달려온 사내들이 험상궂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인파를 몰아낸 다음, 진 사노야를 안내해 방으로 모셨다. 멍석 위에 이불을 덮고 누운 사내는 미동도 않고 있었다. 두 사내가 서툰 솜씨로 물을 따랐다. 진 사노야가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다. 창백한 안색의 사내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게, 산 건가? 진 사노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진 사노야는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눈에 빛이 감돌았다. 두 눈만 보더라도 죽음의 기운은 씻은 듯 걷혀 있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쪽으로 돌아오는 진 사노야의 발걸음은 한층 가벼워져 있었고, 얼굴에도 희색이 감돌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두봉을 걸친 정교랑이 회랑 아래로 나오고 있었다.
“낭자, 잘 주무셨습니까?”
진 사노야가 웃으며 다가갔다. 두모를 쓰고 있어 얼굴을 반만 내놓은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는 듯 보였다.
“출발해도 되겠죠?”
정교랑이 물었다. 종잡을 수 없는 물음에 진 사노야는 흠칫했다. 은근히 켕기는 마음이었다.
“잘 쉬셨습니까? 그럼 출발하죠.”
해가 높이 솟았을 무렵, 마당의 소란은 잠잠해져 있었다. 사내의 상태가 어떤지 직접 확인하진 못했으나 나머지 사내들이 기뻐하는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사내가 살아났다는 걸 알았다. 마침내 일단락된 이 기이한 일은 화젯거리로 삼기에 충분했고, 다들 흡족한 마음으로 각자 갈 길을 갔다.
역참 역시 새로운 손님을 맞느라 분주하여 어제의 일은 벌써 잊히고 있었다. 쫓아 나온 사내들이 마차로 가는 정교랑을 불러세웠다. 사내들은 절을 올려 감사 인사를 표한 후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희가 돈이 없어 치료비는 외상으로 달 수밖에 없습니다. 아씨께서 오신 곳을 알려 주십시오. 추후 반드시 갚으러 가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돈이 없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씨의 딱딱한 목소리가 비꼬는 소리로 들리자 세 사내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중 한 사내가 목을 쳐들고 소리쳤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돈이 없는 게, 무슨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데, 이렇게 당당할 건, 없잖아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멈칫했다. 말이 너무……·. 거봐요, 거보라고. 이 여자가 이렇게 괴팍하다니까! 사람들 뒤에 선 조 집사가 속으로 소리쳤다. 세 사내 역시 멈칫했다. 방금 나서서 말했던 그 사내는 목까지 시뻘게져 있었다.
“저, 그게, 그게 아니고요.”
사내가 쩔쩔매며 말했다.
“그랬어요.”
정교랑의 대꾸에 주변 사람들은 또다시 멍해졌다.
“아니, 돈이 있다고 사람을 업신여기면 되겠습니까.”
평소 여자와 대화할 일이 많지 않았던 사내인지라 이렇게 어린 낭자와 말씨름을 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사내는 열도 받고 답답하기도 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돈이 없다고 사람을 업신여겨서도 안 되죠.”
정교랑은 여전히 뻣뻣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한숨이라도 내뱉으려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군. 진 사노야는 이 정씨 집안 아씨가 전에 바보였다는 사실에 문득 믿음이 갔다. 바보의 병도 나을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봉추!”
우두머리인 사내가 그 사내의 머리를 후려쳐 나동그라지게 했다. 사내는 정교랑을 향해 다시 절을 올렸다.
“크나큰 은혜에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죠. 이 은혜는 꼭 기억했다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아씨의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이때 저쪽이 시끄러워졌다. 두 사내가 널빤지를 들고 급히 달려왔다.
“큰형님, 큰형님.”
사내들이 소리쳤다. 그 광경에 사람들은 내심 놀랐다. 저 병자가 잘못된 건가? 세 사내 역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야?”
사내들이 입을 모아 물었다. 가까이 달려온 사내가 숨을 헐떡였다.
“셋째 형님이 직접 얼굴을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겠대요.”
사내들이 말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 사내가 널빤지를 내려놓자 일어나 앉으려고 버둥거리다가 도로 눕는 걸 발견했다. 사내들이 누워 있는 사내를 둘러쌌다.
“목숨을, 얻었는데, 은인의 얼굴도, 못 뵈면, 사람으로서 어찌……·.”
널빤지 위에 있는 사내가 잠긴 목소리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형제를 대신해 아씨께 다시 한번 인사 올리겠습니다.”
큰형님이라 불린 사내는 얼른 다시 무릎을 꿇고 정교랑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세 번 올렸다. 정교랑이 그 절을 받았다.
“돈이 없다고 했죠?”
이어 정교랑이 물었다. 아직도 돈 얘기야? 모두가 멈칫했다. 이번엔 진 사노야마저 더는 두고 보기 힘든지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주씨 가문의, 그 집사는요?”
정교랑이 물었다. 모두 멈칫해서 조 집사를 쳐다봤다. 사람들 뒤에 숨어 있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군. 왜 또 날 찾아? 조 집사가 얼른 다가왔다.
“아씨?”
조 집사가 입을 열었다.
“돈이 없으면, 저자의 상태를 원상태로 돌려놓을까요?”
돈을 주면 물건을 내주고, 돈이 없으면 물건을 도로 회수하는 법. 돈이 없다면 고쳐 놓은 병도 다시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 당연한 이치이자 상도덕이고 주씨 가문의 전통이었다. 조 집사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긴 했으나 주변 사람들은 똑똑히 들었다. 사내들은 안색이 싹 변해 분통을 터뜨렸다. 이거 봐. 하여간 있는 놈들은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니까.
“주씨 가문에서는, 가정교육을 그렇게 하나?”
정교랑이 조 집사를 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 집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망할, 쓸데없이 말참견은!
“저들한테 돈이 없다니, 자네가, 저들에게 주게.”
정교랑의 말에 모두가 멍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 멍해질 것도 없는 상태였다. 아씨의 말에 온갖 생각이 다 들며 만감이 교차했다. 조 집사는 토 한마디 달지 않고 허리춤에 있던 전대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어찌, 이러십니까. 어찌 아씨의 돈을 받겠습니까.”
사내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저자의 목숨을 구해 놓긴 했지만, 어떻게 될지는, 요양에 달렸어요. 고기와 생선을 먹으며 몸보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요양을 어떻게 하려고요?”
연신 돈이 없냐고 물은 게 이것 때문이었군. 사내들은 가슴이 화끈거려 얼굴까지 빨개졌다.
“이 봉추가 아씨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사내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매섭게 후려치면서 털썩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고 머리를 쾅쾅 찧으며 절을 올렸다. 어찌나 세게 머리를 박았던지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땅이 울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곧 사내의 이마에 피가 맺혔다.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조 집사 역시 이곳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은 듯 말에 올랐다. 이 여인이 과연 신비로운 의술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진 사노야 역시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가 부친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채비를 서두르더니 곧 행렬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행렬이 떠나고 나자 역참은 대번에 조용해졌다. 사내들은 그 자리에 서서 어느덧 까만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행렬을 바라봤다. 우두머리인 사내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전대를 바라보더니 옆에 있던 사내에게 건넸다.
“챙겨라.”
“곧장 성에 들어가 소고기랑 양고기, 생선 다 사 올게요.”
사내가 대답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려는데 우두머리인 사내가 붙잡았다.
“그거 말고 마차랑 말을 구해 와.”
사내가 말을 이었다.
“제일 좋은 거로.”
모두가 멈칫했다.
“큰형님, 길을 서두를 필요 없잖습니까. 셋째의 병부터 치료해야죠.”
“병을 치료해야 하니 길을 서둘러야 해.”
사내가 대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은 거 먹고 마시는 것보다 저 아씨를 따라가는 게 더 마음이 놓여.”
저 아씨로 말할 것 같으면 다 죽어가던 사람을 하룻밤 사이에 살려 놓은 분이 아닌가. 아씨를 따라가는 게 세상 최고의 양약이리라. 사내들은 그 의미를 퍼뜩 깨달았다.
* * *
하루를 달려 또다시 밤이 깊었다. 산속으로 난 작은 길은 말 두 필이 간신히 지나갈 너비라 높이 든 횃불이 길게 꼬리를 물었다.
“조 대인, 안 되겠습니다. 쉬었다 가죠. 너무 어두워서 걸음이 점점 느려집니다.”
앞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조 집사가 즉시 사람을 시켜 정교랑의 의사를 묻게 했다.
“진 사노야께 묻지 않으시고요?”
시종이 물었다.
“우리 아씨는 그분이야. 사노야는 진료를 청하는 분이고.”
조 집사가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 물어야겠나?”
시종이 입을 삐죽거렸다. 우리 아씨 좋아하네. 가까이 다가가 얼굴도 못 내미는 주제에. 정교랑이 곧 휴식에 동의했다. 군인 출신인 주씨 가문 시종들에게 야외 숙영은 더없이 간단한 일이었다. 잽싸게 천막을 치고 나무를 쌓아 모닥불을 피웠다.
밤바람이 차긴 했으나 정교랑은 모닥불 옆에 앉아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모닥불 근처에는 정교랑과 시녀 둘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피했다. 진 사노야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낭자, 술을 좀 드시겠습니까?”
진 사노야가 웃으며 물었다.
“고맙습니다.”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안 마셔요.”
예상했던 일이다. 여인 중 술을 잘 마시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진 사노야는 웃으며 술을 거뒀다.
“내 부친의 병에 대해선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진 사노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물었다.
“운이 좋네요. 보름 전이었다면 못 구했을 거예요.”
정교랑은 막대기를 들고 불을 쑤시며 말했다.
그 말인즉 지금은 구할 수 있단 뜻이로군. 진 사노야는 정교랑의 말에 몹시 기뻐했다. 어쨌거나 남녀가 유별한지라 진 사노야는 인사치레로 몇 마디를 건넨 후 자리를 비켰다.
“아씨, 방금 그 말씀이 좀 이상해요. 이번엔 소인도 모르겠어요.”
시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정교랑은 언제나 말을 간단하게 했고, 그나마도 많이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 시녀는 그 짧은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아들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름만 지체했어도 못 구했을 거라고 해야 맞지 않나요?”
시녀가 한쪽 옆에 꿇어앉아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손에 든 부지깽이로 꽃을 그리자 불꽃이 일었다.
“보름 전엔, 몇 걸음만 걸어도 지쳤어. 마차를 타고 먼 길을 왔다간, 경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었을 거야. 그런데 무슨 사람을 구해.”
의미를 깨달은 시녀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아씨의 생각은 참 기이해요.”
시녀는 생각할수록 웃기는지 아예 깔깔대며 웃었다. 언제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듯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니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시녀는 짚방석 위에 앉아 불빛에 비친 아씨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커다란 두모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턱만 살짝 보였다. 정교랑과 시녀가 이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이, 저쪽에서 빙 둘러앉아 술을 마시던 시종들이 벌떡 일어섰다.
“누가 온다.”
이 오밤중에 길을 가는 자가 있다니? 산적이나 토비 아닐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에 휩싸이면서 시종들은 창과 활을 들고 공격 태세를 취했다.
산길을 돌아 먼저 도착한 건 말 두 필이었다. 저쪽 역시 갑자기 나타난 숙영지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 누구시오?”
주씨 가문과 진씨 가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지나가는 길이오.”
말에 탄 두 사람 역시 횃불 불빛에 기대 두 손을 위로 높이 들어 위협이 될 만한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음을 알렸다. 산적이나 토비로 몰려 다짜고짜 쏜 화살에 맞아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허리춤에 있는 칼과 화살도 횃불에 또렷이 보였다. 평범한 행인은 아닌 듯싶었다.
곧이어 뒤에서 말과 마차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앞쪽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걸음을 멈췄다. 쌍방이 대치하는 가운데 밤바람이 불어 횃불이 화르르 타오르자 긴장감이 한층 고조됐다. 쌍방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계했다.
“아씨, 먼저 마차에 오르십시오.”
조 집사가 사람을 시켜 정교랑을 불렀다. 시녀도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정교랑을 부축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난데없이 아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인 듯싶었다. 양쪽은 팽팽하게 대치하느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마차에 오르려던 정교랑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늑대야!”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멈칫하여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뭐라고요?”
시녀가 물었다.
“늑대가 온다!”
정교랑은 사람들이 있는 저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시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욱 오싹하게 들렸다.
“늑대가 와요!”
시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늑대? 쌍방은 멈칫했다.
“저 여자가 또 무슨……·.”
이쪽에 있는 조 집사가 투덜거렸다. 아직 입동 전이라 산에는 먹이를 구하기 쉬웠다. 들짐승들도 한창 살이 올랐을 때라 늑대가 먹을 건 차고 넘칠 텐데, 뭣 하러 사람을 공격한단 말인가. 하지만 조 집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던 사람들이 소란을 피웠다.
“늑대다!”
“늑대 떼야!”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정말 늑대가 있다고? 공격 개시를 위해 핑계 대는 거 아냐? 조 집사 쪽 사람들은 공격에 맞설 태세를 취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우웅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사람들 역시 새파랗게 빛나는 눈 수십 개를 확인했다. 정말 늑대야! 그것도 늑대 떼!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무렵 늑대 떼는 이미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쉭쉭 하는 화살 소리가 들리더니 맨 앞에 있던 늑대 몇 마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나머지 늑대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공격은 오히려 늑대 떼의 분노를 자극한 꼴이 됐고, 늑대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세상 어느 산적이 늑대 떼 공격이라는 고육계로 사람을 유인한단 말인가. 이건 진짜 늑대 떼의 공격이었다.
“어서 막아라!”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횃불과 화살이 늑대 떼를 향해 쉭쉭 날아갔다.
정교랑과 시녀는 모닥불 옆에 포위되어 있었다. 금가아는 어느 시종에게서 받은 건지 칼을 움켜쥐고 덜덜 떨면서도 제법 그럴듯하게 둘을 지켰다. 시녀는 정교랑에게 바짝 기대며 몸을 떨었다.
“아씨, 겁, 겁내지 마세요.”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정교랑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겁 안 나.”
저쪽에 있던 사람들도 가운데 있는 마차의 말 머리를 돌려 시종들을 방패 삼아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차가 모닥불이 있는 쪽으로 길을 잡은 것이다.
“거기 서요. 사람만 오든가, 아니면 오지 마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의 가냘픈 목소리는 혼잡한 소리 속에 묻혔다. 시녀가 정교랑의 말을 듣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라 소리쳤다. 바짝 긴장하며 수비하던 시종들은 그제야 시녀의 말을 알아듣고 얼른 마차를 향해 칼과 활을 겨누었다. 저쪽 마차 주변에 있던 시종들도 지지 않고 곧바로 무기를 들어 이쪽을 조준했다.
“소리 질러.”
정교랑이 다시 말했다. 시녀는 뭐라 묻지도 않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입을 열어 소리쳤다.
“거기 서요. 사람만 오든가, 아니면 오지 마요.”
그 뜻이었어? 양쪽의 대치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여전히 경계 중이었지만.
“마차에서 내려요. 늑대 떼 때문에 말이 놀랐어요. 위험해요.”
시녀는 즉시 떨리는 목소리로 정교랑의 말을 따라 소리쳤다. 그래? 타오른 횃불 속에 저쪽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망설였다. 별안간 마차의 휘장이 들리더니 한 사람이 폴짝 소리가 나도록 뛰어내렸다.
“공자님.”
시종들이 긴장하여 불렀다. 시녀가 공자를 쳐다봤다. 자신의 아씨처럼 커다란 피풍의로 몸을 싸매고 두모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불빛 아래로 어렴풋이 보였다. 미처 모닥불을 피우지 못해 저쪽 사람들은 횃불을 높이 든 채 그 사람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늑대 떼와 대치하는 저쪽 사람들에게 쏠렸다.
횃불과 화살이 있다고는 하나 늑대 떼의 수가 워낙 많았고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터라 화살은 소용없었다. 다들 칼과 횃불을 휘두르다가 달려드는 늑대와 함께 죽어갔다. 사람들도 눈이 시뻘게졌고 이미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쌍방을 합쳐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40~50마리가 넘는 늑대 떼와 뒤엉켜 싸우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말들은 히잉 울음소리를 내며 늑대의 공격에 쓰러져 갔고 늑대에게 물린 사람들도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시녀는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죽음이 이리도 가깝다니.
“가서 도와라.”
저쪽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시종들은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공자님, 저희가 가면 공자님이 너무 위험합니다.”
“저 사람들이 못 버티면 내가 더 위험해져.”
말을 마친 공자는 이쪽을 쳐다봤다.
“난 저쪽에 가 있겠다. 저쪽엔 불도 있고 사람도 있잖아.”
공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자 시종들이 얼른 막아섰다.
“공자님, 저 사람들은 아직 누군지도……·.”
“짐승 손에 죽는 것보단 사람 손에 죽는 게 낫지.”
공자는 웃음까지 내보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라.”
시종들은 하는 수 없이 두 명만 공자를 지키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늑대를 죽이러 달려갔다. 공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정교랑 주변의 시종들은 긴장했다.
“겁낼 것 없어.”
시녀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소리쳤다.
“물러서요. 길을 가던 중 함께 위기에 처했잖아요.”
시종들은 하는 수 없이 비켜섰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모닥불 옆에 섰다. 불빛에 비친 턱은 굵었으며 피부는 뽀얗고 깨끗했다.
“고맙소, 낭자.”
그는 시녀를 향해 공수하며 인사했다. 목소리가 청량한 걸 보니 어린 소년인 듯싶었다. 시녀는 여전히 덜덜 떨면서 공자를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공자가 이쪽에 서자 곧 포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그림자가 훅 덮쳐 왔다. 시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바깥쪽에 서 있던 시종들이 잽싸게 방향을 바꾸어 칼을 내지르자 늑대가 비명을 내지르며 땅을 굴렀다. 하지만 곧이어 또 한 마리가 다가왔다. 이 늑대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시종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뒤쪽으로 난 길에서 늑대 네다섯 마리가 달려들었다. 피비린내를 맡은 늑대들은 더욱 미쳐 날뛰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군침을 흘렸다. 늑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짝 다가왔다. 이래서 늑대 한 마리를 만나는 건 겁나지 않으나 늑대 떼를 만나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하는구나.
저쪽에 세워져 있던 마차에 있던 말 역시 놀라 히이잉 울음소리를 내며 마차를 끌고 마구 달아났다. 하지만 시종들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고, 금가아마저도 기합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늑대를 베고 있었다. 시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정교랑을 끌어안았지만 정교랑이 잡히지 않았다.
정교랑은 몸을 굽혀 모닥불 속에서 불타는 장작 하나를 꺼내 늑대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시녀도 얼른 따라 하려고 했다. 혼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옆에 있던 사내도 몸이 근질근질한 듯 장작 두 개를 꺼내 늑대를 겨눴다.
“저놈들의, 코를, 태워.”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의 목소리는 소란에 섞여 들리지 않았다.
“저놈들의 코를 태워요!”
시녀가 소리를 질렀다. 사내는 시녀의 고함과 동시에 횃불을 들고 달려나가 이를 드러내고 덤비는 늑대를 향해 내질렀다. 늑대가 불을 겁내며 뒤로 물러서자, 그는 다른 손에 든 횃불로 잽싸게 늑대의 머리를 내려쳤다. 늑대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옆쪽에 있던 시종이 달려들어 칼로 찔렀다.
공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움직임 때문에 두모가 벗겨지면서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번쩍이는 불빛과 처참한 비명, 진동하는 피비린내 속에서 공자가 고개를 돌려 시녀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재미있군.”
공자가 말했다. 재미있다고? 이게 재미있어? 저자도 바보인가? 멈칫한 시녀는 몸을 돌리는 공자의 뒤로 매섭게 달려드는 늑대를 보면서 순간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었다.
화살 몇 발이 쉭쉭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그중 한 화살이 도약하던 늑대를 명중하자 늑대는 달려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모닥불 옆 시녀의 발치로 떨어졌다. 시녀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정교랑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제는 제법 민첩해진 정교랑이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던져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시녀는 늑대에게 물리는 대신 화상을 입을 뻔했다.
시녀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쉭쉭 화살 소리가 잇달아 들리며 화살이 늑대에 명중했다. 한 화살로 늑대 두 마리를 맞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쪽의 위협은 곧 잠잠해졌다. 곧이어 어둠을 뚫고 가까운 거리에 말 몇 마리가 나타났다. 말에 탄 사람들이 왁자지껄 소란스레 떠들었다.
“이렇게 늑대를 쏘며 논 건 오랜만이군!”
“큰형님, 서북에서 늑대를 잡던 때 같습니다!”
“물러서, 이 몸 걸 남겨 두라고. 이 몸이 시원하게 죽일 거니까!”
그 소리와 함께 또 한 마리의 늑대가 허리에 화살을 관통당했다. 몇 마리 안 남은 늑대 떼는 포효하며 뿔뿔이 달아났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환호하며 위기를 넘긴 일을 자축했다.
다시 세 군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아찔했던 전투를 겪은 후라 서먹했던 감정은 말끔히 걷힌 후였고 오히려 친밀감까지 들었다.
시종들은 달아났던 말들을 함께 붙잡아 오고 서로의 상처를 싸매 주며 치열했던 전투에 대해 웃고 떠들었다. 이쪽에서는 진 사노야와 조 집사가 그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서로의 내력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그저 감사 인사만 표했을 뿐이었다.
“밤길을 재촉하는 건 위험하오.”
진 사노야가 여전히 겁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엔 몰랐는데 이제 알겠습니다. 아주 재밌네요.”
소년이 대답했다. 이게, 아주 재미있다고?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멈칫했다. 열대여섯의 나이로 보이는 소년은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나 가려지지 않는 귀티가 흘렀다. 밤바람이 두려운지 두모까지 쓰고 있어 불빛 아래에서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모닥불 근처에 앉아 손에 든 나뭇가지로 불을 이리저리 쑤시고 있었다. 치기 어린 소년이 위험을 어찌 알리오.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젓고 조 집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사내들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아주 위험할 뻔했네.”
늑대에게 팔을 물린 조 집사는 상처를 천으로 싸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기가 나오자 모두가 다른 쪽 모닥불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가뭄의 단비처럼 어둠을 뚫고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 하러 온 거죠?”
소년 역시 그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듣자니 병을 치료하러 왔다던데.”
진 사노야가 대답했다.
“병을 치료해요?”
소년은 놀란 목소리로 물으며 진 사노야를 힐끔 보고 저쪽 사람을 봤다. 그 시선은 커다란 피풍의로 몸을 감싼 채 두모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인에게서 마지막으로 멈췄다.
정교랑은 시녀가 금가아의 상처를 싸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금가아는 늑대에게 다리를 물렸다.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시녀는 상처를 싸매 주며 금가아를 칭찬했다. 옆에 있던 두 사내도 금가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년 영웅이니 장차 큰일을 하겠느니 하며 치켜세웠다.
금가아가 지금껏 살면서 겪은 가장 위험한 일은 좁은 골목에서 사나운 개 몇 마리를 만났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젠 야밤에 늑대 떼와 혈전을 치르지 않았는가. 위험이 사라지자 짜릿한 기분이 들었고 칭찬까지 받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제 돌아가면 훌륭한 사내대장부가 될 것 같았다.
“상처가 많이 나았네요.”
고개를 돌린 정교랑은 마차에서 나무틀에 실려 내려진 사내를 보며 말했다. 며칠 사이에 사경을 헤매던 병자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여느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신체 건장해 보였다. 부상을 입기 전에는 꽤 튼튼한 사내였을 것이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고 얼굴에도 살짝 누런빛이 돌았지만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아씨께선 참으로 명의십니다.”
사내가 쉰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직 기력이 달리는 목소리였다.
“아씨, 저희 셋째 아우에게 무슨 약을 더 먹여야 할까요?”
옆에 있던 사내가 얼른 물었다.
“필요 없어요.”
정교랑은 그 말을 끝으로 사내들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모닥불을 쳐다봤다.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몸보신하면 충분해요.”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네. 그런 치료라면 저도 좋죠.”
웃으며 말하던 사내는 아쉽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며칠째 술과 고기 구경을 못 했더니 아주 힘들어 죽겠네요. 술이든 고기든 통쾌하게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사내를 힐끔 쳐다봤다.
“여기 술은, 물보다 조금 진한 정도지, 별거 아니에요. 그럼 통쾌하게 마셔요.”
정교랑이 손에 든 부지깽이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고기 있잖아요.”
저기? 사내들이 고개를 돌리자 늑대에게 물려 죽은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우르르 달려드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거 뭐 하려고 그러시오?”
“고기 먹습니다, 고기요.”
사내들은 이쪽에서 소리쳐 대답하며 얼른 칼을 꺼내 죽은 말의 고기를 잘라냈다. 아쉽게도 죽은 말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먹으려 들지 않는다는 게 불행 중 다행.
“말고기도 먹나?”
“맛없을 거 같은데?”
“부유하게 사시는 분들이 신선한 말고기 맛을 어찌 아시겠소. 서북 지역이었으면 우리 차지까지 돌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말고기를 굽기 시작한 사내들이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거뒀다.
“아무래도 서북의 탈영병인 듯싶습니다.”
조 집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탈영병이라. 진 사노야는 더욱 하찮게 여기는 눈치였다.
“왕보당 수하에 저런 겁쟁이들밖에 없으니, 싸움에서 패하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지.”
옆에 있던 소년은 진 사노야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없이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고기를 먹는다고?”
소년은 호기심이 이는 듯했다.
“맛있나?”
“맛없어요, 공자님.”
옆에 있던 시종이 대답했다.
“냄새가 고약하죠.”
소년은 아, 하고 대꾸한 다음 더 묻지 않고 계속해서 이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저기서 먹다니. 낭자의 체통은 어찌하라고.”
진 사노야가 말했다. 조 집사는 못 들은 듯 시선을 내리깔고 좌선에 전념했다. 저 사람들을 내쫓을 작정이라면 자신들이 나설 필요도 없다. 저 여인은 입에 못 담을 말이 없고, 별 해괴한 일도 못 할 게 없잖아. 관여하지 말고, 뭐든 그 여인 뜻대로 하게 두게. 조 집사는 이미 진 공자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조 집사가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저기, 대인. 아씨께서 여기 술이 있을 거라고 하시던데,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두 사내가 입을 벌리고 웃으며 물었다. 아씨의 말이라는데 무슨 말을 더하리오.
“빌리다니, 당치 않네. 당연히 내줘야지. 큰 도움을 입었는데 빌린다니 당치도 않아.”
진 사노야는 웃으며 시종을 향해 손짓하여 밤에 한기를 쫓을 용도로 마차에 실어 놓은 술 단지 몇 개를 가져오게 했다.
“이 대협들에게 술을 내주거라. 다들 충분히 마시도록 줘.”
숙영지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말고기를 나눠 먹으러 오는 이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그 소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한입 베어 먹고 땅에 뱉어 버렸지만 말이다.
“진짜 맛없네.”
그러더니 소년은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떠올랐는지 몸까지 떨며 옆에 있는 조 집사와 진 사노야를 쳐다봤다.
“아, 저기요. 한 말씀만 여쭙죠. 고기를 먹으면 재미가 오르나 보죠?”
뭔 개소리야. 이자가 제정신인가?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웃고 떠드는 소리가 안 들려요?”
소년은 불만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난 말이 몇 마리나 죽었나 봐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진 사노야가 가 버렸다. 조 집사 역시 혼자 남기 싫어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모닥불 옆에는 소년과 시종만이 남았다. 타오르는 불빛 아래, 위로 올라갔던 소년의 입꼬리가 차츰 아래로 내려왔다. 하나도 재미가 없단 말이지. 어둠을 뚫고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소년의 옆모습은 왁자지껄한 주변과 단절된 듯 쓸쓸해 보였다. 그때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요, 조용히. 우리 셋째 아우가 노래를 부른다고!”
노래?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나무틀에 기대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벌려 웃자 구레나룻이 더욱 무질서해 보였다.
“오늘 아주 통쾌합니다! 통쾌해요!”
사내는 손에 술 단지를 껴안고 말했다. 누렇게 떴던 얼굴은 취기가 돌며 상기되었고 두 눈도 게슴츠레해졌다.
“우린 무식쟁이라 말을 못합니다. 말을 못해요. 우린, 노래로 하죠!”
다들 떠들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못하는데 노래는 잘한다는 사내는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우리 셋째 형님은 글공부도 했다고요!”
사내 몇 명이 우쭐해하며 소리쳤다.
“시도 읊을 줄 알아요!”
글공부를 해? 시를 읊어? 사람들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글공부를 한 자 중에 이런 이는 정말 드문데.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껄껄 웃었다.
“형제의 정이여.”
사내가 갑자기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아직 병약한 상태였기에 쉰 목소리가 나왔는데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정말 부르는 거야? 사람들이 점점 조용해졌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곡조를 이루지 못해 울부짖는 소리가 나왔지만 밤의 기운이 더해지면서 흥취가 전해졌다.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이쪽에 있던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글공부를 했나 보네.”
소년이 말했다. 시종도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문득 모닥불 근처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을 쳐다봤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시녀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글공부도 하고 풍류도 아는 자군. 저 낭자를 울리려 들다니, 재미있네. 재미있어.”
다른 때였다면 어린 낭자를 놀리는 노래에 사내들이 웃고 떠들며 놀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입을 벌리고 소리 내 웃을 준비를 하고 있던 사내들마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소리를 내진 않았다.
진 사노야와 조 집사가 분명히 말하진 않았지만 이 아씨를 모시러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걸 보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알고도 남았다. 윗전들도 공손히 대하는 아씨인데 시종들 따위가 웃고 떠드는 건 말이 안 됐다.
“은인께 불경하구나.”
사내 중 큰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아씨는 딱 봐도 부귀와 권세를 갖춘 집안의 규수였다. 말로 희롱하는 건 관두고 눈길만 줘도 매질을 당할 터였다. 도발할 의도가 없었다고는 하나 말하는 사람은 별 뜻이 없어도 듣는 사람에겐 거슬릴 수 있었다. 사내는 가사가 기억이 안 나서인지 불안해진 것인지 그 구절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술 단지 좀 줘 봐.”
정교랑이 말했다. 워낙 정적 속에 있었던지라 모두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술 단지로 저놈의 대가리를 내리치려나 보네.”
조 집사는 뒤에 선 시종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
“저 아씨라면 그러고도 남지.”
시녀가 네 하고 대답한 후 술 단지를 건네자 정교랑이 받았다.
“이 녀석은……·.”
큰형이 일어나 사죄하려고 입을 여는데 정교랑이 말을 끊었다.
“칼 좀 줘요.”
마침 일어섰던 큰형은 그 말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칼을 건넸다.
“아씨, 제 아우는……·.”
큰형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낮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정교랑이 칼을 들더니 손을 뒤집어 칼등으로 술 단지를 치기 시작했다. 큰형이 하던 말을 멈췄다.
정교랑이 칼등으로 술 단지의 이곳저곳을 치자 텅 빈 술 단지에서 높고 낮은 소리와 맑고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캄캄한 밤이라 소리는 더욱 기이하게 들렸다. 소년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두모를 조금 벗고 이쪽을 쳐다봤다.
“격부(擊缶: 물장구. 물이 든 동이를 두드려 소리를 내는 일)?”
“천, 고, 의, 풍, 류, 를, 즐, 기, 리.”
정교랑이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라기보다는 말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딱딱하고 평온하다 보니 소리에 길고 짧음만 있을 뿐 다른 기복은 없었다. 주변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목소리가 작은 정교랑의 노랫소리가 퍼져나갔다.
“지기를, 위, 해, 모든, 걸, 내던지고.”
칼등으로 술 단지를 치자 정교랑의 목소리처럼 느린 장단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정교랑의 마음에도 파란이 일었다. 지기, 그녀에게도 지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잊었다. 웃게 하고 울게 하던 그 모든 일을 잊었다.
“목, 숨, 까, 지, 바, 치, 리, 라.”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모로 얼굴을 가리고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기억이 있고 경험이 있으니 기쁨과 분노가 있는 게 당연했다. 이토록 분노가 치미는 건 어째서일까?
끓어오른 파란이 세차게 가슴을 쳤지만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고 목소리 역시 무미건조했다. 그녀는 우리에 갇힌 야수와 같았다. 아니, 야수만도 못했다. 포효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까.
낮고 무거운 술 단지 소리와 한 자씩 읊는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특히 ‘목숨까지 바치리라’는 구절을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리니 더욱 감동이 끓어올랐다. 주먹을 꽉 쥐는 사람도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사내는 갑자기 기억이 떠오른 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방금 불렀던 구절을 반복했다.
“천고의 풍류를 즐기리.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목숨까지 바치리라.”
사내가 정교랑의 노래를 받아 불렀다. 사내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자 더욱 거칠어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내심 놀라며 가락을 따라 불렀다. 저 사내가 아무렇게나 부르는 노래를 이 아씨가 맞춰 부르다니! 정교랑은 계속해서 손으로 술 단지를 두드리며 사내와 곡조를 맞췄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아씨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함께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큰 소리로 호응하며 잘한다고 소리치는 이는 없었다. 아씨의 노랫소리를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고운 얼굴, 백발이, 되어도, 사랑하는 이 마음은, 늙지 않네.”
정교랑이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여전히 딱딱하고 기복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술 단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남다른 정취를 자아냈다. 여인의 목소리와 단조로운 술 단지 가락일 뿐인데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듯 곡절이 느껴졌다. 목소리 때문일까? 술 단지 가락 때문일까? 아니면 가사 때문에?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귓가로 들어온 그 가사에 쓸쓸한 마음을 느꼈다.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집에는 내 입신양명을 기다리는 노모가 계시고, 옆집에는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벗이 있다. 동쪽 거리의 술 시장도 아직 못 가 봤고, 아직 공을 세우지도 못했다. 부모의 은혜와 사모하는 연인, 충효와 인의……·. 느릿느릿 이어지는 가락 소리에 가장 먼저 나섰던 셋째마저 멍하니 넋이 나갔다.
“인생은 연기처럼 부질없으니 스쳐 지나 없어지는구나!”
사내는 돌연 목청을 높였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정교랑이 노래를 이었다.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멍하니 넋을 놓았다.
상관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지라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할지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비틀비틀 힘겹게 왔을지라도.
상관없다. 근심과 걱정은 필요 없다. 이제는 걸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든, 무엇이 다가오고 또 떠나가든.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일 뿐이나 그녀가 있는 한 끝없이 이어지리라.
정교랑이 칼을 든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팍 소리를 내며 술 단지를 쳐 엎어 버렸다. 술 단지에 있던 술이 이리저리 튀면서 불꽃이 일었다. 곡이 마무리되면서 노래도 끝났다.
“통쾌하네.”
정교랑이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아래로 향하게 꺾어 건넸다.
“통쾌하네!”
정신을 차린 셋째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놓아둔 술 단지를 들어 고개를 쳐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통쾌하네! 진 사노야 역시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술 주전자를 들어 고개를 젖혀 가며 마셨다.
통쾌하네! 술을 마시지 않고 있던 조 집사도 흥분을 억누를 수 없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차를 빼내 술을 대신해 병째 마셨다.
통쾌하네!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소리치며 각자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탁탁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술 단지 두드리는 소리와 남녀가 쉰 목소리로 부른 노랫가락, 모닥불에서 나는 타닥타닥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를 치른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깟 늑대 몇 마리 죽여 놓고선 ‘풍소소 역수한(風蕭蕭 易水寒: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다. 장부가 큰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남을 뜻하는 말로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기 전에 읊은 시)’을 찾네.”
소년은 모닥불 근처에 앉아 천천히 말했다. 모두를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고 그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술이 바닥나고 고기도 다 먹었다. 모닥불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모든 게 변함없었다. 하지만 저 모닥불 옆에 석상처럼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우아하고 고상하면서도 거친 사내들과 어울려 술 단지 장단에 노래를 부르는 여인이라니. 거칠고 투박하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대범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뭐 볼 게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내 몇 명이 맞은편 모닥불 근처에서 이쪽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년은 정교랑처럼 커다란 피풍의를 두르고 두모를 푹 눌러 쓰고 있어 밤바람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년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고 물었다.
“아씨인가, 아니면 마님이신가?”
소년이 궁금한 듯 물었다.
“보아하니 아씨인가 본데, 왜, 노부인 같지?”
어디가 노부인 같단 거야?
“이 자식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사내들이 불쾌한 듯 말했다.
“아니라고?”
소년은 몇 걸음 더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싫지?”
너무 무례하네! 사내들이 우르르 일어서자 소년의 시종들도 저쪽에서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괜찮아요. 내가 병을 오래 앓아서 정상과 좀 달라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들었냐? 아씨께선 비정상이셔!”
한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소년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께서 비정상이라는데 웃긴 뭘 웃어!”
사내는 더욱 열이 받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사내가 그 사내의 따귀를 후려치며 호통쳤다.
“봉추! 비정상은 너지! 어디서 아씨를 욕해!”
맞은 사내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네? 내가 무슨 아씨를 욕해요.”
사내의 멍한 모습에 소년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가까이 다가와 한쪽 옆에 앉았다.
“아니, 이봐요. 어이, 거기. 여기 앉지 마요.”
사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남, 남녀칠세부동석이라잖소. 내외하셔야지.”
소년은 더욱 흥미롭다는 듯 손으로 두모를 살짝 들어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쪽은 남자가 아닌가 보네?”
사내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얻다 대고……·.”
사내가 소년을 가리키며 욕을 하려고 했다.
“여섯째.”
나무틀에 기대 있던 사내가 제지했다.
“말을 삼가라. 소리 지르지 말고.”
사내들은 입을 다물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년을 노려본 다음 정교랑 양옆으로 우르르 앉아 그 소년과 정교랑을 떨어뜨려 놓았다. 저쪽에 있던 진 사노야도 그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씨한테 마차에서 쉬라고 하지 그러나?”
진 사노야가 조 집사를 보며 말했다. 조 집사는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네, 그것도 좋죠.”
조 집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걸음을 옮기지 않고 말할 테면 직접 가서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갈증 때문에 고생 한번 했다고 겁내는 꼴 하고는. 노섬 주씨 가문이 그래도 용맹무쌍한 줄 알았더니 별 볼 일 없군. 진 사노야는 속으로 타박하며 모닥불 옆에 앉았다. 이쪽 모닥불 근처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세상인심은 알 수 없고 야박한 법이죠. 오욕칠정을 다 겪은 병자에게 나이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모 아래로 갸름한 턱이 보였다. 무슨 뜻이지?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모닥불을 보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웃는 건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가?
“아씨.”
옆에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씨도 병을 앓고 계시면서 저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셨군요.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부처의 마음씨를 가지셨습니다. 훗날 필시 복을 받으실 겁니다.”
정교랑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글공부를 했나 보죠?”
정교랑이 물었다. 화제 전환이 너무 빠르잖아. 사내들은 어리둥절했다.
“글공부라고까지 할 순 없고 글자를 몇 자 익힌 게 전부입니다.”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왜 그만뒀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가난해서요.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군에 들어가 급여라도 받아야 가족을 먹여 살리죠.”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교랑은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시선을 거두고 모닥불을 쳐다봤다.
“그럼 낭자는 왜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겁니까?”
그 소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화제가 바뀐 거야? 아니지. 이 소년이 멋대로 끼어든 거잖아? 한 사내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못 견디겠는지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글공부를 했다던 사내가 그나마 조금 빨리 반응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소년을 쳐다봤다.
“난 그때 병세가 심해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었고 옆에는 여기 형제들밖에 없었어요. 역참에서도 쫓겨난 마당이라 갈 곳도 없는 데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었죠. 따르는 이들도 없었고요. 공자, 이 아씨께서 도움의 손길을 왜 뻗으셨겠습니까?”
사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구레나룻까지 세우며 노기를 드러냈다.
“대형의 미모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소년이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이봐요!”
나머지 사내들도 분통을 터뜨렸고, 개중에는 벌떡 일어서는 자도 있었다. 이 건달 같은 놈이 입을 함부로 놀리네. 은인을 불경하게 묘사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은인의 은혜를 비웃기까지 하다니. 하여간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이들은 가증스럽다니까!
“이보시오, 공자. 공자는 인정 많고 정의로운 이를 못 봤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오.”
병을 앓았다던 사내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 * *
** 작가의 말. 정교랑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1994년에 방영한 타이완 드라마 <칠협오의> 주제곡에서 가져왔습니다. 장융샹이 작사한 곡입니다. 우연히 들었는데 절로 가슴이 벅차올라 이 장면에 가사를 쓰기로 했습니다. 여러분도 검색해서 들어보세요. 저도 모르게 손으로 탁자를 치며 박자를 맞추게 되더군요. 느낌이 있는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