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60)

-중추절-

노태야가 찻잔을 들자 유박과 이노야는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공손히 말하자 노태야는 그러라고 했다.

이노야와 유박이 장씨 고택에서 나왔다.

“형님, 이번엔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유박이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옥곤 아우, 당치 않은 말씀일세.”

이노야는 다소 굳은 표정이었지만 억지로 웃어 보였다.

“길을 서둘러야 해서 회포를 풀긴 어렵겠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유박은 손을 뻗어 이노야의 어깨를 탁탁 쳤다. 유박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혔다. 도중에 장순의 문하로 들어가긴 했지만 글공부를 하면서도 무예를 놓지 않았다. 이노야는 유박의 손힘에 아파 이를 악물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이번 일로 이제 동주 유씨 일족과 연줄이 생기게 됐군. 특히 유박은 떠나기 전 이노야가 어디로 부임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고 대답을 들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딱히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헤어질 때도 웃는 낯이었다.

“된 거예요?”

이부인은 남편이 벗은 웃옷을 받으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유옥곤 그자가 거칠기는 해도 세심한 면이 있으니 필시 숙부님께 서찰을 쓸 거요. 스승님의 천거에 유 학사의 조력까지 더해졌는데도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벼슬 관두고 농사나 지어야지.”

이노야가 웃으며 말하자 이부인은 기뻐했다. 성사됐으면 됐다. 장차 남편 덕에 고명 부인(誥命夫人)이 될 꿈을 꾸는 이부인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잘됐네요. 장 노태야께 감사드려야겠어요.”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이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 노태야께서 체면을 보아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줬으니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노태야께선 내 체면을 봐주신 게 아니오.”

이노야가 자리에 앉으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듯 말했다.

“우리 집의 시녀 덕이지.”

당시 문지기는 그 시녀가 ‘노야’라고 부르는 걸 보고 표정이 급변했다. 그러더니 이노야가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자 전처럼 한마디 툭 내던지고 문을 닫는 게 아니라 들어가 여쭙겠다고 했고,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이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노야는 알고 있었다. 그 시녀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걸.

“시녀요?”

이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노야가 사건의 경위를 들려주자 이부인은 좋아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을 지었다.

“그땐 나도 누구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소.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이노야가 말을 이었다.

“집에 있는 아랫것들을 모조리 불러 보시오. 대체 누군지 알아내야지.”

“우리집 시녀가 어떻게 함부로 바깥을 나다니겠어요. 게다가 남의 집까지 드나들다니요.”

이부인이 말했다.

“노야,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하긴 그렇지.

“그럼 집 안에 있는 시녀가 아닌가?”

이노야가 말했다. 집 안이 아니면 어디지? 이노야 부부는 얼떨떨했다.

“아씨, 아씨 말씀이 맞았어요. 그 어르신은 보통 분이 아니더라고요.”

몸종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서둘러 이야기했다.

“오늘 거기서 노야를 만났지 뭐예요.”

몸종은 찬바람이 들어오는 걸 감지하고 얼른 가서 문부터 닫았다. 정교랑은 책을 내려놓고 몸종을 보며 대꾸했다.

“그래?”

“노야께서 그 어르신 댁 문 앞에서 아주 공손하시더라고요.”

몸종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어르신이 노야한테 말해서 우릴 도로 데려가라고 하면 노야도 틀림없이 따르실 거예요.”

“도로 데려가?”

정교랑이 몸종을 보며 말했다.

“간신히 빠져나와 이런 자유를 얻었는데, 거기 돌아가서 뭐 해.”

“아씨.”

몸종은 긴장하며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가 정교랑의 무릎을 주물렀다.

“우리가 지금은 여기 산다지만, 아씨는 도교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시잖아요.”

정교랑의 입가에 웃음이 드러났다.

“인생살이 자체가 전부 수행이야.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을 거야.”

정교랑이 몸종의 손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넌 마음 편히 먹고, 그런 일 생각하지 마. 우선 그 여도사들한테 가서 네가 과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줘. 내일 중추절 달맞이 때 쓸 수 있게.”

몸종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 말씀하시면 제가 만들게요. 우리 먹으면서 달맞이해요.”

몸종이 신이 나서 말하자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여긴 산이 높고 공기가 맑아서, 달맞이하기 좋겠구나. 아마도 집은, 그리 즐겁지 않겠지만.”

정교랑이 문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빽빽한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가 더없이 고풍적이었다.

중추절 당일,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정씨 저택 역시 초롱을 달고 오색천으로 집안 곳곳을 장식하며 떠들썩한 분위기로 명절을 맞이했다. 거리에서 등불놀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정씨 가문 노부인과 함께 달맞이를 했다.

달맞이를 마치고 나서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달구경을 했다. 정육랑은 꽃꽂이를 선보였고, 정오랑과 정육랑은 함께 만든 꽃신을 노부인께 올리기도 했다. 정칠랑은 달맞이 그림을 그려 보여 주는 등 일가는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노부인이 노복들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하던 그때, 여인들이 앉아 있던 탁자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나이가 든 여종 하나가 접시를 깬 것이었다. 보통 이런 일은 대부인까지 나설 필요 없이 집사 부인이 처리하면 됐다. 집사 부인이 가서 목소리를 낮춰 꾸짖자 여종은 얼른 무릎을 꿇고 깨진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 찰나, 품속에서 둥글둥글한 과일 몇 개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이 망할 것이 도둑질까지 했네.”

가까이 서 있던 여종이 놀라 소리치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다들 도둑질이라는 단어는 똑똑히 들었다. 노부인이 굳어진 얼굴로 대부인을 힐끔 봤다.

“물건을 훔친 게 아니에요.”

다른 한쪽에 있던 정칠랑이 소리쳤다.

“이 사람은 내 시중을 드는 어멈이에요.”

다들 멈칫하는 사이, 노부인은 더욱 일그러진 얼굴로 대부인을 쳐다봤다.

“이젠 저런 자까지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거냐?”

노부인이 물었다.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사람은 그래도 근본이 있는 자들인데, 이런 일을 저지른 걸 보면 집안 꼴이 엉망이라는 뜻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조모님.”

정칠랑이 일어나며 소리쳤다.

“물건을 훔친 게 아니에요. 이따 가져가서 먹게 제가 챙기라고 했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소인의 손버릇이 문제예요. 식탐이 있어 과일을 훔쳤어요. 일곱째 아씨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당황한 여종은 얼른 무릎을 꿇고 쾅쾅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잘못을 빌었다. 너무 급히 죄를 시인하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노부인은 무거운 얼굴로 대부인을 보며 손에 든 찻잔을 탁자 위로 꽝 내려놓았다. 정적을 뚫고 귀가 찢어질 정도로 무거운 소리가 났다.

달구경은 일찌감치 끝났고 아이들 역시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지만, 노부인의 마당에는 등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여종들과 몸종들은 공손히 서 있었고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다른 사람 일이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아랫것의 일이다. 좋아하는 과일을 평소에 충분히 먹질 못해 칠랑이 떼를 쓰고 귀찮게 하니까, 그 아랫것이 이참에 챙겨 두려고 한 거야. 누가 그러라고 시킨 일이 아니란 말이다.”

“맞아요, 조모님. 황 어멈이 저한테 이걸 챙겨도 되겠느냐고 물어서 그러라고 했어요. 황 어멈이 훔치려던 게 아니에요. 제가 알아요.”

“다 제가 자식을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어머님, 형님을 나무라지 마세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노부인의 방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부인이 소리 죽여 울기까지 했다.

“누가 고의로 네게 망신을 준 것이란 말이냐? 고의면 뭐? 네가 먼저 아둔한 짓을 했으니 망신을 줄 기회가 생긴 거야. 따지고 보면 너 스스로 망신을 준 셈인데, 누굴 원망하느냐?”

노부인의 호통이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밖에 있는 여종과 몸종들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점점 퇴보하기도 한다더니, 네가 그 꼴이구나. 화를 풀 데가 없어서 먹는 음식을 제한해? 생각하는 꼴 하고는. 팔자 좋게 산 지 너무 오래됐나 보구나.”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집안 애들이 음식을 훔치게 해?”

“돌아가서 제대로 반성해라!”

대부인은 방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며 나왔다. 몸종과 여종들은 고개를 땅속으로 파묻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밝은 달이 휘영청 떴건만 정씨 가문의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좋은 중추절에 이게 웬 난리인지.”

연못 근처에 두 소년이 마주 앉았다. 각자의 옆에 있는 몸종이 술을 따라 주었다.

“한 식구래도 어쩔 수 없지. 윗니, 아랫니도 안 맞을 때가 있는걸.”

정삼낭이 정사낭과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두 사람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둘째 숙부님이 곧 부임하시면 숙모님도 따라가시겠죠. 눈앞에 있을 땐 불평하고 원망해도, 따로 떨어져 있으면 각별해지는 법 아닙니까.”

정사낭이 웃으며 말하자 정삼낭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니 숙부님이 이번엔 내양 자사로 가신다지? 정사품하에서 정사품으로 영전하셨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삼낭은 정사낭을 바라보다가, 정사낭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한 곳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챘다. 정사낭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연못 맞은편의 석가산이 보였다.

“또 그 미인 생각이 나?”

정삼낭이 웃으며 물었다. 정사낭이 연못에서 미인을 만났다가 정신이 나갔던 일은 집안에서 공공연한 웃음거리가 됐다. 성격 좋은 정사낭은 얼굴을 붉히지 않고 웃음으로 넘길 뿐이었다.

“미인 얘기를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요.”

정사낭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춘란을 쳐다봤다.

“도관에 있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내일 먹을 걸 챙겨서 갖다 줘라. 그래도 명절인데.”

춘란이 네 하고 대답했다.

“일개 바보가 뭘 어떻게 지내. 계절 지나가는 것도 모를 텐데.”

정삼낭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애가 알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우린 알잖아요.”

정사낭이 웃으며 대꾸했다. 정삼낭도 무의식적으로 그 석가산을 힐끔 쳐다봤다.

“돌아가신 숙모님께서 전에 내게 참 잘해 주셨어. 늘 웃는 낯으로 엿을 챙겨 주곤 하셨지. 그 동생이 태어난 후론 다신 그 웃음을 볼 수 없었지만 말이야. 듣자니 돌아가실 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안 감길 정도였대.”

정삼낭이 말했다. 그 아이가 마음이 걸리셨겠지. 부모의 마음이란. 순간 두 사람은 씁쓸한 마음이 들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춘란, 내 몫도 네가 함께 챙겨다 줘라.”

정삼낭의 말에 춘란은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숙모님이 정말 좋은 분이긴 했죠.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오늘 같은……·.”

정사낭은 적절치 않은 말임을 깨닫고 얼른 말을 삼켰다.

“쇄은을 넉넉히 가져다줘라. 날이 추워지니 채워 넣을 것도 많을 거야.”

헛기침을 하고 난 정사낭이 춘란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춘란은 또다시 네 하고 대답했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 바보의 귀환은 집안 식구들의 마음속에 자국을 남겼다.

한편 같은 시각 현묘관에서는 달구경이 한창이었다. 손 관주가 직접 와서 초청하자 정교랑도 흔쾌히 동의하고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와 달맞이 법회에 참석했다. 탁자 위에는 공물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차려져 있었고, 손 관주와 제자들도 새 도복으로 갈아입어 몹시 흥이 난 상태였다. 물론 최고의 날이라고 할 순 없었다. 더 좋은 날은 이제부터니까.

그 생각을 하니 손 관주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로 단정히 앉은 정교랑은 멍한 무표정 상태였지만 눈에선 웃음기를 읽을 수 있었다. 밝은 달 아래 현묘관 안에는 7명뿐이었지만 오붓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아씨, 술 드실 수 있으세요?”

손 관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먹죠.”

정교랑의 대답에 손 관주는 기뻐하며 얼른 술을 따랐다.

“그런데, 여기 술은, 안 먹어요.”

이어진 정교랑의 말에 술잔을 든 손 관주의 손만 머쓱해졌다. 이곳의 박주를 정씨 가문의 명주와 비교할 순 없겠지. 언짢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사람이 주제 파악을 잘하면 기분 나쁠 일도 없는 법이다. 대신 손 관주는 과일과 쌀떡을 정성스레 올렸다.

다른 쪽에 앉아 있는 여도사들은 그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선은 관주가 그토록 정성을 다하며 조심하는 게 놀라웠고, 말로만 듣던 저 바보의 행동거지도 놀라웠다. 정씨 가문 바보 낭자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건 처음었는데, 좀 뻣뻣하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운 것 외에는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아씨가 말도 알아들어요?”

궁금증을 못 참은 도동이 몸종에게 물었다. 몸종은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우리 아씨의 병은 벌써 나았어.”

바보로 태어난 사람의 병이 낫기도 하나? 그게 가능해? 다들 의아해하며 진지한 눈길로 그 조용한 여인을 쳐다봤다. 바보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상인과는 좀 달라 보였다. 이를테면 말을 아주 적게 하고 목소리가 메마르고 딱딱했으며 자리에 앉은 후 오랫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해 일어서자 손 관주도 얼른 따라 일어섰고, 관주가 일어서자 나머지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이것들을.”

정교랑이 앞에 놓인 간식과 말린 과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도관 앞에서 행인들에게 나눠 줘요.”

이렇게 많이? 현묘관은 끼니도 제대로 챙기기 힘든 도관이었다. 신도가 많아 법회 한 번 열면 재물을 두둑이 챙기는 커다란 사찰이나 도관과는 달랐다. 이 정도 양이면 현묘관에서 한 달은 족히 먹을 텐데, 이걸 그냥 나눠 주라고? 그건 너무 낭비잖아.

“네.”

하지만 손 관주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직접 길을 안내해 정교랑을 배웅했다.

이튿날 아침, 보부상 오씨는 아침밥도 거르고 일찌감치 성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현묘산을 지나는 길에 여도사 몇 명이 현묘관 밖으로 나와 서 있는 게 보였다.

소현묘관이 문란한 행실로 명성을 날린지라 대현묘관 여도사들은 거의 바깥출입을 안 했었다. 오늘은 웬일로 저렇게 많이 나와 있지? 게다가 새 도복까지 차려입고. 소현묘관이 벼락에 맞은 일은 풍문으로 알고 있는데, 소현묘관이 없어졌으니 이제 대현묘관이 그 전통을 잇겠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보부상 오씨는 저도 모르게 흐흐 웃었다. 저속한 생각에 어느덧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이거 같이 드세요.”

저쪽에서 도동이 상냥하게 인사하며 기름종이에 싼 물건을 들고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뜻이지? 길을 가던 다른 행인들도 인사를 받았지만 왠지 다들 꺼리는 눈치였다.

“우리 현묘관 중추절 법회 공물입니다. 보시하는 거예요.”

손 관주가 예를 표하며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보고만 있을 뿐 섣불리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보부상 오씨는 탁자 위에 놓인 말린 과일과 간식들을 보자 또다시 배가 고파졌다. 맛은 없겠지만,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

“고맙소, 고맙소이다.”

보부상 오씨가 큰 소리로 인사하며 가장 먼저 손을 뻗었다.

여도사들의 물건을 받으러 가는 사람이 나오자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오씨, 그러다 사족을 못 쓰게 되면 어쩌려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 소리치자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여도사들은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손 관주만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악인이 사라지고 없으니 악명이 오래 갈 리 없지.

“겁 안 납니다.”

보부상 오씨가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걸음을 내디뎠는데 물러날 순 없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잖아.

“가져가세요.”

손 관주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고 간식 몇 개를 직접 건넸다. 작고 둥그렇게 구운 과자 위에 꽃무늬까지 새겨져 있었다. 두껍고 실한 게 처음 보는 과자였다. 보부상 오씨는 저도 모르게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도사님, 이게 뭡니까?”

“월병이에요.”

손 관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8월 15일이 중추절이잖아요. 달처럼 둥근 이 월병엔 상서로움이 깃들어 있죠.”

한 사람이 받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받아 갔다. 시종을 데리고 걸어오던 춘란은 현묘관 앞이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물건을 받아 손에 든 기름종이 포장을 살펴봤다.

“이거 과일 절임이니?”

“네, 낭자. 우리 현묘관에서 공양하는 과일 절임이에요. 중추절이라 복을 나눠 주는 거예요.”

춘란의 물음에 도동이 제법 깍듯하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 이 작은 도관에 좋은 물건이 있겠어, 그냥 복이나 바라는 거겠지. 춘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름종이로 싼 물건을 시종이 들고 있는 대광주리에 던져 넣었다.

“소현묘관은 저쪽으로 가는 거니?”

춘란이 물었다.

“낭자, 소현묘관은 이제 소현묘관이라고 안 불러요. 태평궁이라고 부르죠.”

도동이 정정해 주며 춘란을 살폈다. 참배하러 온 사람 같지는 않은데……·.

“태평궁?”

춘란은 의아한 눈치였다.

“이름을 이상하게도 지었네.”

“안 이상해요, 태평하란 뜻을 담은 거예요.”

도동이 얼른 대답했다. 춘란은 입을 삐죽이고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누굴 찾아오셨는데요? 반근 언니는 외출했어요.”

도동의 말에 춘란은 걸음을 멈추고 도동을 쳐다봤다.

“이렇게 일찍? 그, 아씨는 안 돌봐도 돼?”

춘란이 놀라서 묻자 도동은 직접 앞장서서 걸어가 산문을 열어 주었다. 이쪽에서 문을 지키고 있던 여도사 역시 문이 열리며 낯선 사람이 보이자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반근 언니를 찾아왔대요.”

길을 안내하던 도동이 얼른 말했다.

“반근 언니는 아침 일찍 성에 나갔는데요.”

여도사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난 정씨 댁 사람인데 먹을 거랑 돈을 가져왔어요. 그럼 일단 둘이 받아 둬요.”

춘란의 말에 여도사와 도동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부님이 아씨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나이가 더 많은 여도사가 뒤쪽의 마당 문을 조심스레 보며 말했다. 마당 안은 고요했다.

“이건 방해가 아니에요. 아씨 댁에서 온 사람이잖아요. 일단 말은 전해야죠.”

도동이 말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안에서 여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동은 신이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병풍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인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안으로 들어가던 도동은 그 눈길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어요. 물건을 가져왔대요.”

도동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천천히 말했다. 이 정도면 바보라도 알아들었겠지?

같은 시각, 강주성으로 나온 몸종은 노태야의 댁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몸종이 이름을 대자 문지기는 반갑게 문을 열어 주었다.

“이걸 월병이라고 한다고?”

노태야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네, 어르신. 드셔 보세요. 어제 만든 거예요. 관주님이 법회도 여셨어요.”

몸종도 웃으며 대답했다.

“많이 드셔야 해요. 그래야 만수무강하고 모든 일이 뜻대로 이뤄지시죠.”

노태야가 껄껄 웃자 옆에 있던 노복도 따라서 웃었다.

“어서요, 노야. 어서 드셔 보세요.”

노복이 재촉하자 노태야는 웃으며 월병을 작은 크기로 잘라 입에 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했다.

“그 마음이 고맙군. 나한테까지 특별히 챙겨다 주고.”

“어제 중추절에 공양할 음식을 많이 만들었어요. 관주님께서 시주님들한테 전부 나눠 주라고 하셨어요.”

몸종은 웃으며 바구니 안에서 기름종이에 싼 각종 간식도 꺼내 놓았다.

“전부 산에 나는 야생과일로 만든 과일 절임이로군.”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몸종은 오래 있지 않고 물건을 내려놓은 다음 웃으며 인사했다. 노복은 몸종이 마당 문을 나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돌아왔다. 방에 있던 노태야는 벌써 월병 하나를 다 먹은 참이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노태야는 연신 감탄을 하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노복은 뭐가 아쉽다는 건지 묻지 않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노태야는 탁자 위에 쌓인 간식들을 보더니 엇, 하며 뭔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들었다.

“현묘관.”

노인이 손에 든 종이 포장지를 보며 말했다. 노복도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포장지에는 ‘현묘관’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만평, 내 명첩을 들고 가서 이 과일 절임을 성 안의 지인들에게 나눠 줘라. 현묘관에서 중추절을 맞아 재를 올렸기에 그 복을 나눠 가지는 의미라고 전하고.”

노복은 놀란 표정이었다 이 과일 절임은 별게 아닐지 몰라도 노태야의 명첩과 함께 보낸다면 그건 보통 의미가 아니었다. 현묘관이 이제 이름을 날리겠군. 노태야가 그 시녀의 체면을 봐서 현묘관을 띄워 주시려나 보네.

“네.”

노복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한 후 얼른 과일 절임을 챙겼다.

몸종은 노태야의 결정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어느덧 친해진 문지기와 인사를 나눈 후 장씨 고택의 문을 나섰다. 골목으로 막 꺾어질 무렵 옆쪽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나.”

소리치는 소리에 몸종은 깜짝 놀랐다. 낯이 익은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 봤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 난 정씨 댁 사람인데 누나는?”

시종이 물었다. 이노야는 이부인의 의견을 따라 집안 아랫것을 모조리 불러 장씨 고택에서 손님 대우를 받는 시녀를 찾아내는 대신 시종을 장씨 고댁 근처에 대기시키는 길을 택했고, 마침내 몸종과 마주치게 됐다.

“난 교랑 아씨를 모시는 반근이야.”

몸종은 그 시종이 누군지 그제야 알아보며 대답했다. 그날 이노야를 따라 노태야를 찾아왔던 아이였다. 시종은 이제 떠올랐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방에서 시종의 말을 듣던 이노야와 이부인도 퍼뜩 깨달은 눈치였다. 그 아이였구나. 역시 집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어.

“장 노태야는 어찌 안다더냐?”

이노야가 물었다.

“현묘산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어요. 그 어르신이 밥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마침 그 아이가 만든 간식들이 그분 입맛에 딱 맞아서 알게 됐대요.”

시종이 대답했다. 간식? 이부인은 멈칫했다.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우연이 있나, 왜 그 바보 옆에 있는 애들은 전부 음식 솜씨가 좋지?

“그 계집의 말이 참인 것 같아요? 거짓인 것 같아요?”

이부인의 물음에 이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노태야는 쉽게 속아넘길 수 있는 분이 아니오. 아마 거짓은 아닐 거요.”

“그 아이의 솜씨가 노태야의 입맛과 맞아떨어진다면, 그 아이를 노태야께 드리죠.”

이부인이 말했다. 좋은 생각인데. 이노야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을 내렸다.

“여봐라, 현묘관에 가서 그 계집을 데려오너라.”

* * *

현묘관 안.

춘란은 성가신 듯 손을 내저었다.

“나한테 뭘 묻겠단 거야? 물건 가져다줬잖아. 넌 청매한테 춘란이 왔다 갔다고 전하기만 하면 돼.”

도동은 쭈뼛거렸다.

“아씨께서, 물, 물으시겠대요. 이름이 뭔지, 누가 가져다주라고 한 건지요. 왜 보낸 건지도요.”

도동이 우물쭈물하며 방금 들은 말을 전했다. 바보가 쓸데없이 말은 또 많네. 춘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물어서 뭐 하려고?”

그걸 누가 알겠어요. 도동은 어리벙벙한 모습으로 말했다.

“언니, 그냥 들어가서 말씀을 올리세요.”

“나 바빠.”

춘란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투였다.

“나 간다.”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선, 아씨한테 뭐라고 대답하라고? 도동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 아예 길을 막아섰다.

“아무튼, 대답 똑바로 하고 가요.”

춘란은 눈앞에 선 이 대담한 꼬맹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야, 너 정말……·.”

춘란은 말문이 막혔다.

“아씨께서 물으시잖아요. 확실하게 대답 안 하면 나만 사부님한테 혼난다고요.”

도동은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보를 모시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야. 춘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는 수 없이 도동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책? 춘란이 멈칫하는 사이, 그 여인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그 가리개 아래로 이토록 눈부신 미모가 있었구나. 춘란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누가 네게 이 물건을 전하라고 했지?”

여인의 뻣뻣한 목소리에 춘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반사적으로 예를 표했다. 집안의 다른 아씨를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댁의 사공자십니다. 그리고 삼공자도요.”

춘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손함이 담긴 말투로 대답했다.

“이유는?”

정교랑이 물었다.

“다른 건 아니고 중추절이라 아씨 생각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춘란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먹을 것과 말린 과일이에요. 쇄은도 좀 가져왔고요. 공자님께서 날이 추워지니 아씨께서 더 사야 할 게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말을 마쳤는데도 눈앞의 여인은 조용히 있었다. 춘란은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이 아씨가 실은 바보가 아니었나? 바보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든 춘란은 정교랑과 눈이 마주쳤다. 문안은 밝았지만 문밖은 어두웠다. 검은 눈동자보다 흰자위가 훨씬 큰 눈은 더없이 밝게 빛났다.

“그렇다면, 고맙구나. 내 기억해 두지.”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며 시선을 책 위로 돌렸다. 뭘 기억해? 기억하면 어쩔 건데? 멈칫했던 춘란은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기억했다가 은혜를 갚기라도 하려고?

춘란은 현묘산에서 얼굴도 못 본 그 몸종을 정씨 저택의 문 앞에서 마주쳤다. 평소에 이런 하급 몸종들과 왕래할 일이 없다 보니 춘란은 처음에 이 몸종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근 낭자라고 부르는 시종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너 집에 와 있었구나.”

춘란이 몸종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음 괜히 거기까지 갔다 왔네.”

몸종은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에야 무슨 일인지 이해하고 감격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원래 집에 올 생각은 없었는데 길 가다가 불려온 거야. 이노야께서 날 찾으신대.”

몸종의 말에 춘란은 아, 하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함께 안쪽 마당으로 향했다.

“전에 금가아를 통해 돈을 보내 준 건 고마웠어. 살펴 줘서 정말 고마워, 언니.”

몸종이 말했다. 원래 잘 아는 사이도 아닌지라 춘란은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금가아도 네가 챙겨 줘서 고맙다고 그러더라.”

춘란이 말했다.

“금가아가 일을 잘하잖아. 그 애한테 맡기면 나도 안심이 돼.”

몸종의 대답에 춘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종을 쳐다봤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인데, 이 아인 정말 자기가 챙겨 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그런 말을 나누는 사이 어느덧 갈림길에 다다랐다. 몸종은 작별의 예를 표했고, 춘란은 그 몸종이 다른 쪽으로 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정말 저 애의 체면을 봐준 건가?”

춘란은 혼잣말을 했다. 일개 바보의 시중을 드는 몸종인데? 춘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면을 봐준 거라면 아마도 정씨 가문의 체면이겠지.

“언니, 왔구나. 공자님께서 그 대부 먹을 준비하라셨어.”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린 몸종이 신이 나서 말했다. 사공자는 먹을 좋아했는데, 그 보물들의 관리는 전부 춘란 소관이었다. 춘란은 그 말에 웃으며 먹을 챙겨 서재로 들어갔다.

“공자님, 물건을 가져다줬어요.”

춘란이 말했다. 정사낭은 순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날 술을 마시며 한 말이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춘란의 설명을 들은 다음에야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잘했다.”

정사낭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꾸했다. 춘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씨도 봤어요.”

그 아씨는 집안 아씨들처럼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고 이름도 모르는지라, 춘란은 순간 뭐라 호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사낭은 응 하고 가볍게 대꾸한 후 앞에 놓인 서화에 집중했다.

“아씨께선 말을 하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얼굴도 엄청 예쁘셨고요.”

춘란이 이어 말했다.

“사정을 몰랐다면 정말 바보라고 생각 안 했을 거예요.”

정사낭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 애는 지능이 부족할 뿐이지, 외모가 부족한 건 아니다. 숙부님과 돌아가신 숙모님의 외모가 추하지 않은데 그 애가 못생겼을 리가.”

춘란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까 보니 이노야께서 그 아씨의 몸종을 부르셨다던데, 무슨 일인지 아세요?”

“무슨 일이든 그쪽 일이겠지.”

정사낭은 붓을 놓고 몸을 일으켜 춘란을 쳐다봤다.

“먹을 갈아라.”

춘란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먹을 가는 일에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 이쪽 방 안에서는 이노야와 이부인 앞에 몸종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문밖의 회랑 아래에는 노복 부부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꿇어앉아 있었다.

“절 보내신다고요?”

몸종은 놀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야, 부인,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고칠 테니 제발 보내지 말아 주세요.”

몸종은 황급히 절을 올리며 눈물까지 쏟았다.

“어리석은 것아, 거기 가면 넌 이제 호강하는 거야.”

밖에 있던 늙은 여종이 보다 못해 거들었다.

“어서 노야와 부인께 감사 인사를 올려.”

몸종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장 노태야께서도 알고 계신다. 널 그 집으로 보내는 것 말이다. 네 음식 솜씨가 그분 입맛에 맞는다니 그 집으로 가서 찬모로 지내라.”

이노야가 말했다.

“소인은, 소인은 그저 아씨를 모시고 싶을 뿐이에요.”

몸종이 절을 올리며 대답했다.

“이 어리석은 것아. 바보의 시중을 오래 들더니 너도 바보가 됐어?”

밖에 있던 늙은 여종이 못 참고 나서며 목소리를 낮춰 야단을 쳤다. 이노야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늙은 여종은 얼른 절을 올리며 몸을 움츠리고 더는 나서지 못했다.

“너 그 노태야께서 어떤 분인지 모르지?”

이부인이 눈앞에 있는 몸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썩 특출난 외모도 아니고 어리바리한 걸 보니, 집안에서도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는 몸종일 처지였다. 나이가 차면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여종으로 살겠지. 저 밖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앉아 있는 늙은 여종처럼 말이다. 그 자식들도 숙명을 피해 가진 못할 것이다.

“장 노태야는 대유학자 장순의 부친이시다. 너는 장순이 누군지 모를지 몰라도 밖에 나가 보면 이름 좀 있고 책깨나 읽었다는 벼슬아치 중에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그분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만 3천이다. 천자께서도 그분께 예를 표하고 가르침을 얻으셨어. 그 이름도 유명한 장강주 선생이셔. 우리 강주부에 사람이 많아도 그런 호칭을 얻은 이는 그분 한 분뿐이야.”

그 볼품없는 노인이 그리 대단한 분이셨다니! 거기까지 말한 이부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청매, 그런 집에 가서 노태야의 예쁨을 받는 찬모가 되는 것이다. 가고 싶으냐, 가고 싶지 않느냐?”

아씨의 말씀을 듣고 신분이 범상치 않은 분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범상치 않은 분일 줄은 몰랐다. 노인이 사는 집도 딱히 눈에 띄진 않았는데. 몸종은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밖에 있는 몸종의 부부는 아예 넋이 나가 있었다.

착하지, 우리 딸. 그런 댁으로 가면 하급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건 물론이요, 이 강주부에서 널 무시할 사람은 없을 거야. 정씨 가문과 장씨 가문은 격이 달랐고, 몸종과 찬모 역시 엄연히 달랐다. 몸종은 평생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찬모는 평생 할 수 있다. 부잣집에서 일하는 찬모는 집안에서도 지위가 높았고 때로는 남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솜씨 좋은 찬모를 모셔다가 그럴듯한 연회상을 준비하는 건 체면을 세우기에 썩 좋은 일이었다. 두둑한 금일봉을 따로 챙겨 받는 건 물론이다.

밖에 앉아 있던 몸종의 부모는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딸이 그런 집으로 가면, 자신들까지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앞으로 정씨 댁에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당연히 가고 싶지요.”

늙은 여종이 절을 올리며 기쁘게 소리쳤다.

“노야와 부인께 감사드립니다. 어여삐 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늙은 여종은 아예 무릎걸음으로 걸어가서는 멍하니 있는 여종을 밀며 소리 낮춰 말했다.

“어서 노야와 부인께 감사 인사 올려. 거기 가면 잘해야 한다. 노야와 부인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돼. 네 성(姓)이 무엇인지도 잊지 말고.”

몸종은 여종에게 밀려 앞으로 넘어지다시피 하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야, 부인, 소인은……·.”

“됐다,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거기 가거든 본분을 잘 지켜라. 앞으로 넌 장씨 댁 사람이지만 우리 정씨 가문을 잊으면 안 된다.”

이노야가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노야.”

몸종은 얼른 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인은 갈 수 없습니다.”

방 안이 고요해졌다. 이노야와 이부인은 놀란 눈치였다. 뭐라고?

“이 망할 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서 가식을 떨어. 노야와 부인의 말씀이시다. 넌 무조건 따르기만 하면 돼.”

늙은 여종은 또다시 몸종을 앞으로 밀며 야단을 쳤다.

“어머니,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소리 마세요.”

몸종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이노야 내외를 바라봤다.

“노야, 부인. 소인은 솜씨 같은 거 없어요. 소인이 만든 건 전부 아씨가 가르쳐 주셨어요. 하찮은 재주로 노태야께 갈 순 없습니다.”

또 이 말이로군. 이부인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건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눈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몸종이 예전 그 몸종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똑같이 불안에 떨면서, 똑같이……·. 헛소리를 하고 있어.

“너도 주씨 성을 가진 줄 아느냐?”

이부인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몸종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었다.

“내 너를 부른 것은 내일 장 노태야 댁으로 가라고 알려 주기 위해서다. 가고 싶은지 네 의사를 물으려고 부른 게 아니야.”

이부인은 위압적인 태도로 몸종을 쳐다봤다.

* * *

저녁 무렵, 손 관주는 도동을 데리고 급히 태평궁으로 향했다.

“뭐라고? 반근 낭자가 아직도 안 돌아와?”

손 관주의 물음에 문을 지키던 여도사는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데, 왜 아직도 안 올까요?”

“성에 있는 그 노인 댁에 월병을 가져다드리러 간다지 않았어? 진작 올 때가 됐는데.”

손 관주는 초조해하며 손을 비볐다.

“네가 사저들과 함께 성으로 마중을 나가라.”

여도사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손 관주는 도동을 데리고 정교랑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든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씨.”

손 관주가 얼른 예를 표했다.

“반근 낭자가 장을 보러 멀리 나갔나 봅니다. 아직도 안 돌아왔네요.”

정교랑은 시선을 거두고 손 관주를 바라봤다.

“아닙니다. 오늘 밤엔, 안 돌아올 거예요.”

멈칫했던 손 관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께선 어디 갔는지 알고 계셨군요. 괜히 놀랐네요.”

손 관주가 도동에게 사저들을 도로 불러오라고 명하며 말했다.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손 관주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곤 했는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씨, 뭘 보세요?”

손 관주도 따라서 쳐다보며 물었다. 서쪽 하늘로 석양이 지면서 가을 노을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하늘이 뭐 볼 게 있다고요?”

손 관주가 물었다.

“별거 없죠.”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그런데 예전엔, 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손 관주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정교랑을 쳐다봤지만 정교랑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바보가 아닌 건 확실한데 어딘지 모르게 기이하단 말이야. 보통 사람과 달라. 손 관주는 얼른 따라 들어갔다.

“아씨, 반근 낭자가 없는데 뭘 드시겠어요? 제자들을 시켜 만들겠습니다.”

“그래요.”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을 짚고 방석 위로 앉으며 대답했다.

“연근 버섯 백합 고기찜, 칠보 야채죽, 마 호병을 먹어야겠어요.”

뭐, 뭐, 뭐? 손 관주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먹는 건가? 아리송하게 들리는 이름들이 선계의 음악처럼 마음을 어지럽혔다. 세상에, 이 아씨는 평소에 뭘 먹고 사는 거야.

“아씨, 아씨.”

손 관주는 난처해하며 정교랑을 다급하게 부르고는 벌써 자리에 앉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저는, 할 줄 모르는데요.”

“모른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봤다.

“배우면 되죠.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먹는 게 가장 앞에 오잖아요. 그만큼 가장 간단하고 쉬운 일이죠.”

먹고 입고 자는 것에 그런 의미가 있었나? 손 관주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날이 밝을 무렵, 현묘관에서 여도사 둘이 급히 나왔다.

“내가 거기 남는다니까 사부님은 마음이 안 놓인다며 기어이 본인이 남으시겠대.”

“반근 낭자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말도 없이.”

“그러게 말이야. 반근 낭자야 가든 오든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 낭자는 바보잖아. 그렇게 내팽개치고 가 버리면 어떡해. 말도 한마디 안 하고.”

“어젯밤에 식사 준비하느라 아주 죽을 뻔했어. 고기랑 채소를 하도 다져서 아직도 팔이 쑤신다니까.”

“넌 다지기만 했지. 난 호병 만드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다고.”

“근데 맛있긴 진짜 맛있더라. 역시 부잣집 사람은 먹을 줄 안다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얼른 가자. 아침엔 또 무슨 이상한 게 먹고 싶다고 할지 모르겠네.”

두 여도사가 대화를 나누며 산으로 올라가려는데 앞쪽에 사람들이 보였다.

“진짜 재수도 없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사람을 바꿔?”

“에이, 이번엔 재수 없어서가 아니지. 청매는 대운이 트인 거야.”

“그래. 청매는 재수가 좋지, 재수 없는 건 우리고. 바보의 시중을 들러 오게 됐으니.”

“에이, 따지고 보면 그 청매가 이 바보 낭자를 모시다가 좋은 기회를 만난 거잖아. 여기 오는 게 그리 재수 없는 일만은 아니야.”

일행 중 여자 둘이 웃으며 소곤거렸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일행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시주님.”

두 여도사가 예를 표했다. 일행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두 여도사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후 말을 아끼며 천천히 뒤따라 올라갔다.

일행이 태평궁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도동은 갑작스레 여러 명이 찾아오자 어리둥절하다가 뒤에 있는 여도사 둘을 발견하고 반갑게 나와 물었다.

“반근 언니는 돌아왔어요?”

“아직도 안 돌아왔어?”

도동의 물음에 여도사들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반근이라고?”

일행 중 집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세 사람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 애는 이제 안 옵니다.”

마당에 있는 두 몸종은 못마땅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바짝 달라붙어 투덜거렸다.

“이 애들이 새로 온 몸종이에요.”

관사가 앞에 있는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손 관주와 뒤에 있는 제자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반근 낭자는요?”

손 관주가 물었다.

“노야께서 장 노태야 댁으로 보내셨어요.”

집사가 영광이라는 투로 대답했다. 집안 노비라는 게 본디 언제든 쉽게 팔 수 있는 물건 같은 존재이니 팔아 버리거나 선물로 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손 관주는 잠자코 있으면서도 내심 두려움에 떨였다.

“장 노태야에 대해선 다들 아시죠? 반근 말로는 여기서 알게 된 인연이라던데. 그 애 음식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대운이 텄지 뭡니까. 그리 높은 곳으로 옮겨 가게 되다니.”

집사의 말이 이어졌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손 관주와 제자들이 퍼뜩 깨달았다.

“그 배고픈 병에 걸린 어르신!”

“정말 잘됐네요. 그 어르신이 반근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했나 봐요.”

“내가 뭐랬어. 반근 언니가 드디어 고생에서 벗어났네.”

“반근 언니가 무지 좋아하겠다.”

여도사들은 오랫동안 바라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지자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소곤거리는 한편 그 장 노태야라는 분이 누구인지 묻기도 했다. 일개 몸종에게 그런 대운이 트였으니 정씨 가문 하인들로서는 부러울 따름인지라 여기저기 수소문해 알게 된 내용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두 몸종이 장 노태야의 신분에 대해 약간의 과장을 섞어 이야기하자 여도사들은 더욱 환호작약하며 천존께 감사를 올렸지만, 손 관주만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냥 가 버렸다고? 아씨는 어쩌고?”

손 관주가 중얼거렸다.

“여기 몸종 둘을 보냈잖아요.”

관주의 말을 들은 집사는 성가신 듯 대꾸하고 옷을 털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난 이만 가야겠네요. 그럼 도사님께서 애 좀 써 주세요.”

손 관주가 얼른 막아섰다.

“이런 일은 아씨께 직접 말씀을 올려야죠. 어쨌든 난 정씨 가문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씨와 그 몸종은 누가 봐도 사이가 좋았다. 아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을 떠맡을 순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아씨의 심기를 건드릴 순 없지. 집사는 실소를 터뜨렸다. 일개 바보한테 그걸 말하라니, 알아듣기나 하나?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으세요. 어서 따라오십시오.”

손 관주는 안쪽으로 앞장서 걸어가며 재촉했다. 집사는 하는 수 없이 두 몸종을 데리고 따라 들어갔다. 마당 안쪽으로 들어가자 수수한 옷을 입고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긴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우고 손에는 나뭇가지를 든 채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아씨.”

손 관주가 공손히 불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바보 교랑 아씨? 관사와 두 몸종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을 살폈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그 아씨가 고개를 들었다.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뢸 게 있대요.”

손 관주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뒤쪽에서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손 관주가 고개를 돌렸다. 집사와 두 몸종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안타까워라. 저리 고운 외모를 갖고 바보로 태어났다니. 안타까워하는 집사에게 손 관주가 재촉을 했다.

“아씨, 노야와 부인께서 새로 보내신 몸종들입니다.”

정신을 차린 집사가 가엾다는 듯한 말투로 두 몸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집사를 보며 말없이 있었다. 이 바보가 전에 있던 몸종의 이름을 반근이라고 불렀지. 지능이 달려서 그 이름이 제일 익숙한가 보네. 그러니 맨 처음의 몸종이 떠난 후 새로 온 몸종에게도 반근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겠지. 집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반근입니다. 이 아이들 둘 다 반근이에요.”

집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의 입가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좋네.”

이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한편 성 안의 장씨 고택 대문 앞에서는 집사가 옆에 있는 몸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뚝 그쳐.”

집사는 무거운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경고했다.

“좋은 일 망치지 마라. 연로한 네 부모를 생각해야지.”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고 문지기가 경계의 눈빛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씨 댁에서 왔습니다. 노야께서……·.”

집사가 얼른 웃는 낯으로 공손히 말했다. 하지만 문지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아니, 사람을 데려왔어요. 사람을 데려왔다고요. 어르신, 문 닫지 마세요.”

집사는 필사적으로 문을 밀며 몸종에게 소리쳤다.

“냉큼 이리 와.”

몸종은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갔다. 몸종을 본 문지기가 곧바로 손을 푸는 바람에 집사는 넘어지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빚쟁이를 보고 피하듯 굴던 문지기가 만개한 국화처럼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반근 낭자, 낭자였군. 무슨 일인가? 마침 낭자 얘기 중이었는데.”

장 노태야는 찻잔을 내려놓고 앞에 선 집사와 몸종을 쳐다봤다.

“노태야께서 여기 홀로 계시는데 마침 이 아이의 솜씨가 입맛에 맞으신다기에 저희 노야께서 노태야를 모시라며 보내셨습니다.”

집사는 공손히 말씀을 올리고 몸종을 힐끔 쳐다봤다.

“소인이 미처 몰랐어요. 노태야께서……·. 결례가 많았습니다.”

몸종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 그리고 결례를 범한 적 없다.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것을.”

장 노태야가 말을 이었다.

“여기 남아 찬모를 하고 싶으냐?”

“사실 소인의 솜씨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몸종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계집애가 자기 솜씨가 아니라 아씨가 가르쳐 줬다는 괴상한 말을 늘어놓더니, 여기 와서도 똑같은 말을 하려고 구네. 오기 싫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장 노태야는 별로 개의치 않고 웃으며 차를 마셨다.

인연이 될 일을 원한을 살 일로 만들어 버리면, 내 가만있지 않겠다.

이 천지 분간 못하는 것아. 내가 널 헛키웠구나. 우리 가족의 운명이 달린 일이야. 여차하면 우리 다 죽어.

몸종의 귓가에 이노야의 호통과 부모의 우는소리가 메아리쳤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소인이, 원하는 일입니다.”

몸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 * *

어둠이 내리자 산어귀에는 인적이 드물어졌다. 아무래도 안 올 모양이었다. 문밖에 나와 있던 손 관주는 몸을 돌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찌하누, 어찌해.”

손 관주가 혼잣말을 했다.

“사부님, 뭘 보세요? 뭘 그렇게 오래 보시는 거예요?”

도동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손 관주가 안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아씨를 뵈러 가야겠다.”

사부님이 지키거나 여도사 둘을 시켜 지키는 통에 종일 사람이 끊인 적 없었는데, 이 저녁에 또 가겠다고? 거긴 몸종도 둘이나 있는데? 도동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부님을 따라갔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새로 온 몸종 둘이 정자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는 호박씨 부스러기가 한가득 널려 있었다. 한편 부엌에 있는 두 여도사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내가 하마.”

손 관주가 쟁반을 받으려 하자 여도사들이 말렸다.

“사부님, 저희가 할게요.”

저쪽에서 몸종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할까?”

한 몸종이 웃으며 말하면서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이 하게 내버려 둬. 우리 집 덕에 먹고살잖아. 저런 거라도 해야지.”

다른 한 몸종이 웃으며 떠들었다. 손 관주는 못 들은 척하며 방문을 열었다.

“아씨, 흰죽 다 됐어요.”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수고가 많네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손 관주가 웃으며 꿇어앉아 그릇과 젓가락을 챙겨 주었다.

“아씨, 드세요.”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사님, 이름이 뭐예요?”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