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23화 (23/160)

교랑의경 3권

-정교-

현묘산으로 온 금가아의 눈에 소현묘관 앞에 서 있는 손 관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손 관주 외에도 노인과 노복이 있었다. 그들은 인부 둘이 문 위에 있는 글자 두 개를 탁본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청매 누나도 있었는데 손 관주가 청매 누나를 보며 공손하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보라고, 청매 누나의 체면을 봐준 거라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금가아는 옆쪽 문으로 들어갔다.

“반근 낭자, 사나흘 후면 수리가 얼추 끝날 거야. 아씨랑 같이 옮겨와도 돼. 가구랑 장식품도 다 도착했어. 더 필요한 게 있나 들어가 봐.”

몸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봤어요, 관주님께서 잘 준비해 주셨어요.”

손 관주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가 좋다고 한 건 곧 그 아씨께서 좋다고 했단 뜻이니, 아씨께서 좋다고 했으면 좋은 것이다. 옆에 있던 노인이 의아해했다.

“내가 좀 들어가 봐도 되겠소?”

노인의 물음에 시종과 노복은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여인이 거주하는 도관에 뭐 볼 게 있다고. 더구나 이 도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판이 형편없던 곳 아닌가. 노태야도 참. 손 관주가 얼른 몸종을 쳐다보자 몸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세요.”

손 관주가 그제야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며 안내했다. 노인이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앞쪽엔 정전 하나뿐이라 별다를 게 없자 곧 뒤쪽 후원으로 갔다. 후원 마당에는 아직도 인부들이 남아 분주한 모습이었고 바닥에는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감탄했다.

소현묘관에 이토록 정교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니. 작긴 해도 운치가 있는 구도였다. 방 하나에 양쪽으로 곁방이 있고 마당에 작은 정자까지 갖춘 데다 푸르른 대나무와 돌길도 있었다. 딱히 별다른 장식물이 없는데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석가산을 지나가자 본채가 보이고, 반쯤 열려 있는 종이문 사이로 바닥과 창문, 문 등을 걸레질하는 두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6폭짜리 미인 병풍과 긴 팔걸이 책상, 새하얀 깔개, 발이 긴 화로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게 이 몸종의 지휘 아래 꾸민 방이라고? 그러니 저 관주가 아까 그리 물어봤을 텐데.

어쨌거나 규방 여인의 거처인데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노인은 한번 쓱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려 산문을 바라봤다. ‘현묘관’이라고 쓰여 있던 글자는 지워지고 새로 탁본할 두 글자는 아직 색을 칠하기 전이었다.

“태평.”

노인은 소리 내 읽어 보았다. 좋은 이름이고 글씨도 잘 썼지만 노인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태평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정교하다기보다는 처음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가 쓴 글씨 같았지만 필획 하나하나는 더없이 현묘해 보였다. 노인이 아는 그 어떤 필체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태평. 도사님께서 이름을 아주 잘 지으셨구려.”

노인은 웃으며 손 관주를 바라봤다. 멈칫했던 손 관주는 곧 노인이 ‘태평경(太平經: 도교 경전 중 하나)’을 떠올렸음을 눈치채고 얼른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제가 태평경을 자주 읽는 건 사실이지만 이름에 쓸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손 관주가 몸종을 보며 말하자 노인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이해했다. 아까 본 그 마당을 이 몸종이 설계한 듯 보였으니 이름도 직접 지었겠지.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태평이란 이름의 경서도 있었군요. 그럼 태평이 그 경서에서 온 말이에요?”

태평이라는 말의 의미를 취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나 보군.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선함을 칭찬하니 이는 곧 태평이라.’ 경서는 인간의 도리에서 왔으니 경서에서 그렇다고 하면 그렇겠지.”

몸종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 아씨께서 좋아하시는 만두가 태평 만두거든요. 신기하네요.”

몸종이 웃으며 말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종을 쳐다봤다. 무슨 뜻이지? 저 태평이란 이름이 그냥 태평이라는 만두를 좋아해서 붙인 거란 말이야? 그건 좀, 너무 속된 것 같은데.

* * *

중추절이 가까워지자 정씨 가문도 명절 준비로 바빠졌다. 하지만 이방의 분위기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밖에서 저녁 식사를 들여왔지만 마주 앉은 이노야 내외는 밥생각이 들지 않았다.

병주 자사에서 물러나 돌아온 이노야는 순리대로라면 벌써 진급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부에서는 도통 소식이 없었다. 아는 이에게 부탁해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이번엔 틀림없이 진급할 테니 걱정 말라는 소식만 돌아올 뿐이었고 사실상 직첩을 받기 전까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드디어 확실한 소식이 왔는데 다름 아닌 내양(箂陽) 자사였다.

같은 자사라고 해도 병주는 인구 2만 호 미만의 하주(下州)였고 내양은 인구가 2만 5천 호 되는 중주(中州)였으니 정사품하에서 정사품으로 진급한 것이었다. 더구나 내양은 물자가 풍족하고 평화로운 땅이었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도 동시에 들려왔다. 이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또 있다는 소식이었다.

“조정에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은사인 장순 스승님이 태학에 계시다고 했잖아요. 그분이 나서서 천거하게 해 보세요.”

이부인이 말했다. 관직에 있진 않았지만 장순은 이름난 대유학자였다. 학당을 운영하며 길러낸 제자만 3천 명으로 명성이 자자한 분이었다.

“그렇소. 내 생각도 같소. 스승님께 서찰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오겠지.”

이노야가 말했다.

“스승님의 부친이 여기 계시잖아요. 마침 명절이 돌아오니 인사라도 가 보세요.”

이부인의 말에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다만 노태야께서 손님을 안 받으시니, 원.”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이군.”

“그럼 여러 번 찾아가 봐요. 계속 안 만나 주진 않으시겠죠.”

“그래요, 밥부터 먹읍시다.”

이노야가 젓가락을 들며 말했지만 이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안 먹고?”

이노야의 물음에 이부인은 식탁 위의 음식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내가 먹는 걸 고까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뭐 하러 먹어요.”

또 무슨 일이지? 이노야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번번이 사달을 일으키던 그 바보도 내쫓았는데 왜 아직도 집안이 평안하지 않은 거야?

* * *

현묘관 안.

몸종은 세탁한 옷을 개키고 있었다.

“아씨, 그 어르신이 식재료를 안 가져오셨던데 뭘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이따 성에 다녀오려고요. 그 어르신이 태평 만두를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갖다 드리는 길에 채소랑 고기를 좀 사 올까 해요.”

몸종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며칠째 안 왔다고? 아쉽네, 그분이 고른 과일이며 채소, 고기가 썩 괜찮았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른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어?”

정교랑이 물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게 느리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잠시 정교랑을 기다리던 몸종은 뜻밖에도 그런 말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다. 정교랑 본인은 웃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이따금 남을 웃기곤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진지하게 말하는 게 핵심이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네, 네, 소인 안 웃을게요.”

그러면서도 몸종은 웃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교랑은 뭐가 그리 웃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소인은 아둔해서 채소며 고기를 잘 못 골라요.”

한바탕 웃고 난 몸종이 자책하듯 말했다.

“아둔한 건 아냐. 마음이 없을 뿐이지.”

“아씨, 소인은 꾀부린 적 없어요.”

몸종이 깜짝 놀라 얼른 해명했다.

“전부 정성 들여 고른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은 한숨을 쉬었다. 몸종은 무슨 말인지 몰라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정교랑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발은 그런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말하는 건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혀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서두르지 말자, 서두를 것 없어. 말은 많이 안 해도 돼, 할 수 있는 거로 충분해.

“넌 먹고 싶은 마음이 없고, 어떻게 먹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어떤 게 좋을지, 어떤 맛을 내야 할지 안 떠오르지. 음식에 마음이 없단 거야. 네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몸종을 보며 말했다. 몸종은 무슨 뜻인지 퍼뜩 깨닫고 눈시울을 붉혔다.

“아씨, 소인은 우둔해요. 아씨께서 설명해 주셔야 해요.”

몸종이 허리를 구부리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그것도, 네가 기꺼이 들을 건지에 달렸어.”

정교랑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마음을 써. 사람이 마음을 쓰지 않으면, 자기가 듣고 싶은 거만 듣거든. 한쪽 말만 듣는 거지.”

몸종은 정교랑을 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려요, 아씨. 어떤 게 마음을 쓰는 건지 잘 알겠어요.”

몸종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일어나 똑바로 꿇어앉았다.

“그럼 마음을 쏟아 정성 들여 식재료를 고를 분이 없으니, 아씨께서 뭘 드시고 싶은지 마음을 쏟아 생각해 보세요. 소인이 마음을 쏟아 만들게요.”

정교랑이 몸종을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삐죽였다. 이번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티가 났다.

“마음을 쓰면, 다 맛있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이 웃으며 일어났다.

“아씨, 기다리고 계세요.”

몸종이 웃으며 나갔다.

손 관주는 벌써 한나절을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식사를 가져온 제자들은 문밖에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부님이 왜 저러시지? 산에서 내려오신 후로 계속 한숨만 푹푹 내쉬시네.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제자들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수리에 들어간 비용 때문인가?”

다른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을 꾸미는 데만 해도 건물을 수리하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갔잖아.”

제자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바보 주제에 뭘 그리 좋은 물건을 써?”

의아해하던 제자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도복을 못 바꿀 것 같아!”

제자가 불만스레 말했다. 어쩐지 사부님이 의복에 관해 일언반구 없으시더라. 그때 방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오던 관주는 곧 걸음을 멈추고 도로 들어갔다.

“사부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두 제자는 아예 따라 들어가서 물었다.

“우리 도관과 관련된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다.”

손 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말씀을 해 보세요.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봐요.”

제자들은 밥상을 차리는 일을 제쳐 두고 손 관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손 관주가 입을 열었다.

“우리 도관이 이름을 날릴 기회가 있거든.”

도관이 이름을 날리는 건 물론 좋은 일이었다. 두 제자가 얼른 물었다.

“사부님, 어떤 기회인데요?”

손 관주는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식사 공양.”

두 제자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식사 공양으로 이름을 날리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강주성만 해도 좋은 예가 있었으니 바로 성 서쪽에 있는 만녕사였다.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유명한 숙수가 불문으로 귀의한 후 수행에 정진했는데, 부처님의 도움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숙수의 음식 솜씨는 그 절에서 일취월장했다. 사찰 내의 승려들에게 칭찬을 받던 게 어느덧 사찰을 찾는 참배객의 입으로 번지더니 날로 명성을 얻어 지금은 식사 공양을 위해 사찰을 찾는 참배객들이 줄을 설 지경이 됐다.

식사를 공양하고 돈을 받는 건 아니었으나 공짜로 밥을 먹는 이는 거의 없다 보니 공덕함을 몇 개 더 놓아둘 정도였다. 이름을 날리자 사람들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찾아오자 더욱 이름을 날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지금의 만녕사는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유명한 사찰이 됐다. 하지만 속세에 달관한 이름난 숙수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만녕사가 잡은 기회는 얻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식사 공양을요?”

두 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부님, 이제야 간신히 기름기 들어간 음식을 먹게 된 마당에 누가 우리 음식을 먹고 싶어 하겠어요.”

“우리 솜씨로는 당연히 안 되지.”

손 관주가 문밖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배워야 해.”

배운다고?

“누구한테 배워요?”

제자가 물었다.

“반근 낭자 말이야.”

“반근 낭자가 한 음식이 정말 그리 맛있어요?”

제자들의 물음에 손 관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너희는 그 어르신이 정말 등산하다가 힘들어서 쉬러 들어오는 줄 알았어? 반근 낭자가 가져오는 과일이랑 음식을 먹기 위해서야.”

제자들이 퍼뜩 깨달았다.

“하지만 반근은 곧 산 위로 옮겨 가잖아. 왔다 갔다 하며 음식을 가져오긴 힘들 거야.”

손 관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뭘 그런 일로 근심을 하세요. 반근 언니한테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어보면 되죠.”

한 제자가 말했다.

“그래도, 될까?”

손 관주는 주저했다. 한나절 동안 고민하던 게 바로 이 문제였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반근 언니는 마음이 착하니까 분명 동의할 거예요.”

제자가 말했다. 반근이 착한 건 알지.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건 반근이 아니야. 손 관주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난 못 하겠어.”

손 관주가 중얼거림에 제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사부님, 뭘 어려워하세요? 반근 언니는 말이 잘 통하잖아요. 되든 안 되든 한번 물어보는 건데 뭐 어때요.”

“그러다가 언짢아할까 봐. 그럼 대현묘관도 이름을 바꿔야 할지 몰라.”

손 관주가 중얼거렸다.

8월 14일, 손 관주는 제자들을 이끌며 법회를 열었고, 정교랑과 몸종은 새로운 거처로 옮겨 왔다. 손 관주가 도동을 시켜 후원으로 가는 길을 지키게 했다.

“넌 얌전히 이곳을 지키고 부르지 않는 한 뒤쪽으론 절대 가지 마라. 단, 후원 청소엔 정성을 다해야 해.”

손 관주는 당부의 당부를 거듭했다. 대현묘관을 비워도 됐다면 아마 관주 자신이 태평궁으로 들어와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 이곳은 이제 소현묘관이 아니라 태평궁이라 불렸다. 하나의 산에는 하나의 도관만 있는 법, 이제 태평궁은 현묘관의 소속이었다.

손 관주는 산 아래를 쳐다보며 상쾌한 듯 숨을 토했다. 평생 이루지 못할 꿈인 줄 알았던 게 이제는 현실이 됐다. 지금은 정씨 가문 여식의 것이지만 어쨌거나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이니 머지않아 이곳을 떠날 것이다.

문밖에서 서성이는 손 관주의 모습이 회랑 아래를 청소하러 나왔던 몸종의 눈에 들어왔다. 손 관주가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는 듯 보여 몸종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씨는 일어나셨고?”

손 관주가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몸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 관주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지낼 만은 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구해다 줄게.”

“좋아요, 아주 좋아요.”

손 관주의 말에 몸종이 대답했다.

“드시라 해라.”

문 뒤쪽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몸종이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손 관주 역시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네 하는 대답과 함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돈이 많이 들었죠?”

정교랑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손 관주가 받아온 돈 중 도관 수리에 들어간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정교랑의 거처를 장식하는 일에 들어간 돈이 대부분이었다. 바닥에 깐 깔개며 침상, 창문의 휘장 등이 전부 새것으로 바뀌었다.

“당치 않습니다. 본디 낭자께서 얻으신 돈인걸요.”

손 관주가 얼른 대답했다.

“난, 사리에 밝은 사람이 좋아요.”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잘했어요.”

칭찬인가? 손 관주는 은근히 뿌듯했다. 나이로 따질 것 같으면 자신이 이 소년보다 곱절은 많건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녀고 앞에 있는 이 소녀는 노회한 할멈 같았다. 손 관주는 실소가 나왔다.

“내가 뭐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 말해요.”

정교랑의 말에 옆에 있던 몸종은 흠칫 놀랐다. 아씨 쪽에서 먼저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놀라기는 손 관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저는, 그러니까, 반근이 제 제자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게 하면 어떨까요?”

손 관주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몸종은 멈칫했다.

“요리를 배운다고요? 뭐 하시게요?”

몸종이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그 어르신께서 반근 낭자의 음식 솜씨를 좋아하시는데, 이제 낭자는 이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잖아. 계속 성가시게 할 순 없으니, 아무래도……·.”

손 관주가 쑥스러워하며 둘러댔다. 원하는 게 뭔지 직설적으로 말하기는 뭣하지 않은가.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어요? 조금 알리고 싶어요?”

정교랑이 손 관주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크게? 조금?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짐작하고 있는 건가? 손 관주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름을 조금 알리고 싶은 거면, 도와줄 수 있어요. 조림, 볶음, 튀김 등의 조리법과 채소, 생선, 고기, 과일, 차, 술 등을 고르는 비법을 알려 주죠.”

정교랑의 말에 손 관주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그 음식들이 실은 반근의 솜씨가 아니었단 말인가?

“저 애 솜씨는 맞아요. 난 그저, 조언을 살짝 했을 뿐이죠.”

정교랑이 말했다. 살짝 조언한 정도인데, 그 노인이 삼시 세끼를 여기서 못 먹어서 안달이야? 손 관주는 흥분이 됐다. 말을 제대로 꺼냈구나!

이름을 조금 알리는데도 저리 많은 걸 알려 준다니,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릴 수 있겠네. 그럼 이름을 크게 알리려면……·.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으면, 아까 말한 것 중에 딱 하나만 골라요.”

정교랑의 말에 손 관주와 몸종은 또다시 어리둥절해졌다. 하나? 한 종류? 그런데도 이름을 크게 알릴 수 있다고?

“도사님.”

정교랑이 손 관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엇을 위해 수행하죠?”

무슨 말인지 퍼뜩 깨달은 손 관주는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도사님의 수행은, 큰 도와 작은 도를 위해서겠죠. 하지만 작은 도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일 뿐 주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대소를 구분할 줄 모르면, 도는 멀어지는 법이지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렇지. 여긴 도관이지 주점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행을 원하는 것이지 명성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도사지 숙수가 아니었다. 명성에 눈이 멀어 정도를 잊다니. 식사 공양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은들 현묘관은 무엇이 되겠는가. 명성만 얻었을 뿐 몸에 걸친 도복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 웃음거리가 되면 명성이 얼마나 가겠는가. 이것저것 배워 이름을 조금 알리는 정도가 옳았다.

“감사합니다, 아씨.”

손 관주는 진심으로 머리 숙여 예를 올렸다. 정교랑은 손 관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어요. 고마워하려면 본인에게 해야죠. 내게 1척(尺)의 존경을 보내면, 나는 1장(丈: 1장은 10척과 같음)으로 갚는 게 도(道)입니다.”

한편 이노야는 장순의 고택에 벌써 세 번째 찾아온 참이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다른 사내가 동행했다. 서른 남짓한 나이의 그 사내는 키가 크고 신체가 건장했는데, 서생 같은 옷차림에서 문관의 기운이 느껴졌다.

“노태야께선 집을 자주 비우시나 보네요.”

사내가 섬서와 감숙 지역의 말투가 묻어나는 말로 입을 열었다.

“옥곤 아우, 하필 때를 잘못 맞춰 왔군.”

이노야는 이곳 토박이 행세를 하며 거침없이 말했다.

“노태야는 늘 은둔을 좋아하시지. 스승님의 제자가 워낙 많다 보니 찾아오는 이도 적지 않거든. 그래서 일부러 피하시는 걸세.”

옥곤이라 불린 사내는 부러움의 눈빛을 담아 이노야를 쳐다봤다.

“대인은 이곳에 사시니 자주 뵐 수 있겠네요. 전 스승님께 3년을 수학하고 곧장 서북 지역으로 가는 바람에 스승님께서 상경하신 후론 벌써 몇 년째 통 뵐 일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죄인을 호송하며 지나는 길에 잠깐 들른 거고요. 스승님의 고택을 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노태야를 귀찮게 해 드릴 순 없으니 이만 가죠.”

이노야는 다급하게 사내를 붙잡았다.

“옥곤, 서두르지 말게. 모처럼 왔는데 그래도 얼굴은 뵙고 가야지.”

이노야는 다소 절박한 투로 말했다. 이 유옥곤, 즉 유박이라는 자는 동주 유씨 가문의 사람으로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한직에 있다지만 그 숙부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 우녕(佑寧) 3년에 장원급제를 하여 지금은 한림원 대학사로 있는 유평이었다.

이노야는 유박이 장순 문하의 제자임을 일찍부터 알았다. 다만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같은 시기에 수학한 제자가 아니다 보니 통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만난 것이다. 그러니 교분을 맺을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있겠는가. 이노야는 스승의 부친을 뵙고 싶었지만, 선물만 두 번 들여보냈을 뿐 본인은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노야는 유박을 꼭 데리고 들어가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노태야를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보고 싶지 않으시다니 그만하시죠.”

유박이 말했지만 이노야는 손을 풀지 않으면서 문지기에게 물어보라며 시종을 채근했다. 시종은 내키지 않아 발을 질질 끌면서 노야가 웬 허풍을 저리 떠는지 이해할 수 없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주 뵈러 오기는, 이번 달에만 세 번째 오는 건데도 문간조차 못 넘고 있으면서.

그 문지기는 상대조차 안 해 주는 자가 아닌가. 반기지 않을 게 뻔한데 또 가서 물어보라니, 괜히 본전도 못 찾을걸. 시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걸어갔다. 문 앞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자 시종은 얼른 걸음을 멈추었다. 안에서 바구니를 든 여자애 하나가 나왔다.

“낭자, 조심히 가. 내가 얼른 마차 불러 줄게.”

나이가 들어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안 들리는 문지기가 다 빠진 이까지 드러내고 환히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아저씨. 별로 멀지도 않고 동쪽 시장에 들렀다 가야 해요. 그냥 걸어가면 돼요.”

볼품없어 보이는 어린 시녀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쓰나! 노태야 드리려고 특별히 먹을 것까지 싸 왔는데 걸어가게 두면 손님에 대한 예가 아니지!”

그 말을 들은 시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먹을 것 하나에 이런 시녀가 손님 대접을 받는다고? 대체 어느 댁 시녀인지, 대단하네.

* * *

장씨 고택의 문이 열리자 이노야는 몹시 기뻐하며 얼른 유박을 이끌고 다가갔다.

“노태야께선 댁에 안 계십니다.”

이노야를 본 문지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거짓말! 문밖에 선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노인장, 보다시피 몇 번이나 왔는데……·.”

이노야는 비위를 맞추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어린 시녀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총총 다가와 예를 표했다.

“노야, 노야도 오셨네요?”

노야? 이노야는 멈칫해서 눈앞에 있는 시녀를 바라봤다. 날 부른 건가? 이노야가 미처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유박이 몹시 반가워하며 경탄의 눈빛으로 이노야를 바라봤다.

“대인, 이제 보니 댁에 있는 시녀까지도 노태야 댁을 드나들고 있었군요. 대단하십니다.”

유박이 한층 짙어진 섬서와 감숙 말씨로 말했다. 그 말이 이노야의 귓가에 웅웅 울렸다. 우리 집 시녀가 스승님의 고택을 드나들다니! 우리 집 시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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