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60)

-일이 커지다-

“반근.”

눈썹이 가늘고 얼굴이 긴 몸종 하나가 웃으며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 반근은 쭈뼛거렸다.

“내가 할게.”

몸종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반근의 손에 든 다반(茶盤)을 받았다. 반근은 몸종이 주육낭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서서 바라봤다. 이제 공자님은 자신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파격적으로 아껴 주시더니.”

“원래 공자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건 수풍 언니네 셋뿐이었잖아.”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시치미 떼는 것 좀 봐.”

회랑 아래에 선 몸종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반근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불편했다. 떠나자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남자니 여기 남으면……·.

“내가 무슨 여인네도 아니고 차를 마시겠다고 했으면 차나 마시는 줄 알 것이지, 이 따위 주전부리를 왜 가져와! 갖다 버려라!”

방 안에서 주육낭의 호통에 이어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더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어 뒤돌아 총총 가 버렸다. 갈까? 어디로 가지? 갈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자네는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어. 차라리 형님들을 찾아가 한바탕 겨루면 좀 나을 거야.”

진 공자는 팔걸이 책상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작은 책자를 넘겨 보며 말했다.

“내가 왜 자신한테 화가 나?”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진 공자는 대꾸하지 않고 있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뭘 웃어!”

주육낭은 심기가 불편한 듯 두 눈을 치켜떴다. 진 공자는 주육낭의 분노를 못 본 척 넘기고 공책 위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늘 문 앞에서 여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장씨 댁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아씨께서 돌을 가져왔냐고 물으셨다.’”

진 공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미있네. ‘돈’을 뜻하는 글자를 쓸 줄 몰라 ‘돌’이라고 썼어.”

주육낭은 흥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에 앉아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육낭.”

진 공자는 주육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 책자를 일찍 봤다면 이런 소동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 얘기를 꺼내자 주육낭은 초조해졌다.

“내가 무슨 소동을 일으켜? 젊고 혈기 왕성한 나이니 예쁜 여인에게 마음이 혹하는 게 당연하지. 저 아이가 마음에 들어 데려온 게 무슨 잘못이라도 돼? 그 애의 것을 빼앗은 일에 대해선 나중에 사과하면 그만이야. 몸종 여러 명 더 붙여 주면 되지, 뭐.”

진 공자는 피식 웃었다. 당시 사건의 경위를 듣고 나서 직접 반근을 데리고 진소의 저택으로 가 보니 진소의 부친은 과연 정신이 들자 반근을 알아봤다. 반근의 말이 틀림없음을 알게 된 주육낭은 곧장 강주로 가 정교랑을 데려오려 했지만 진 공자가 말렸다.

“지금은 자네가 가면 안 돼. 이미 그 여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가 봤자 벽에 부딪힐 거야. 지금 진소 상공 댁에선 그런 사정을 기다려 줄 여유가 없으니 그 댁 일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야. 어쨌거나 이건 자네 집안 내부의 일이니, 밖으로 전해지면 일이 커져.”

그 말에 주육낭 등은 코웃음을 쳤다.

“일이 커질 게 뭐 있나? 일개 몸종을 가지고 뭘 어쩌겠다고? 그래 봤자 한낱 몸종일 뿐인데 무슨 일이 커져?”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여인이 뭘 어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자네 주씨 가문은 책자의 왼쪽 장에 올라갔을 거야.”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책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오른쪽 책장에는 기억해야 할 은혜가, 왼쪽 책장에는 기억해야 할 원한이 쓰여 있었다.

“우리가 뭘 어쨌는데?”

주육낭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냥 몸종을 데려온 것뿐이잖아? 그게 무슨 대수라고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해!”

진 공자가 주육낭을 쳐다봤다.

“하나하나 가르쳐 가며 갈고 닦아 키운 든든한 오른팔을 난데없이 누군가에게 빼앗겼어.”

진 공자는 눈앞에 있는 책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입장 바꿔 자네라면, 오른팔을 잃은 원한이 사무치지 않겠어?”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가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책자에는 병으로 걸음조차 걸을 수 없던 소녀가 천천히 몇 걸음씩 걷고, 의식을 자주 잃던 소녀가 차츰 의식을 회복하고, 말도 못하고 웃을 줄도 모르던 소녀가 한 글자씩 내뱉으며 문장을 이루는 말을 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먹어야 할 약, 벌어야 할 돈, 해야 할 말, 가야 할 길, 피해야 할 위험에 대해 정교하게 계획을 짜고 하나하나 가르쳐 세심하게 인도했다. 진 공자는 반근이 정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당차고 야무지게 굴었는지 묘사하던 주육낭의 말을 떠올렸다. 이어서 말이 느리고 행동이 굼떠 바보로 여겨지는 여인이 보였다. 바보일까? 진 공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인은 어떤 모습이었어?”

진 공자가 불쑥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나중에 직접 보면 알 거 아냐.”

주육낭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네 말대로 진 상공 댁 사람이 그 애를 데리러 가는 편에 우리 집사 하나만 딸려 보냈어. 그러니 우리 주씨 집안의 체면을 깎겠다고 안 오는 일은 없겠지.”

눈앞에 그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봤던 멍한 얼굴이 훅 스쳐 지나가고 이번엔 비웃음을 짓는 듯한 표정이 나타났다. 제 딴에는 잘났다고 그 몸종을 데려왔던 건데, 그 여인의 눈엔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을까. 주육낭은 차를 들고 벌컥벌컥 마시며 분을 삭였다. 진 공자가 그 모습을 쳐다봤다.

“이 차가 맛없어서 못 먹겠다고 한 게 그 여인이었군.”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차를 마시던 주육낭은 사레가 들렸다. 이 차, 앞으로 다신 안 마셔!

노인은 시종이 올리는 차를 받아 단숨에 비웠다. 노복이 손수건을 건네자 노인은 이마를 가볍게 닦고 눈을 들어 눈앞의 도관을 바라봤다.

“그래, 들어가서 쉬었다 가자.”

노인은 시종이 또다시 차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급히 막았다.

“따르지 마라. 뒀다 간식이랑 먹어야지.”

마당 문으로 들어선 세 사람은 곧장 정전으로 향했다. 도교를 믿지 않음에도 노인은 시줏돈을 바쳤다. 도동은 신이 나서 노인 일행을 곁채로 안내하고 자리를 내줬다.

“오늘은 싱싱한 생선을 얻어서 반근 낭자 주려고 가져왔다.”

노인은 웃으며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시종이 얼른 대광주리를 건넸다.

“쌀도 가져왔고.”

노인이 덧붙였다.

“시주님, 여기서 식사하시려고요?”

도동이 웃으며 묻자 노인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 현묘관이 참 좋구나.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면 땀이 흠뻑 나는데, 그냥 돌아가자니 좀 아쉽거든. 등산하고 나서 이곳에 들러 좀 씻고 밥도 한 그릇 얻어먹으면 기분이 어찌나 상쾌한지 현묘할 정도라니까.”

“무량천존.”

한쪽 옆에서 걸어 나온 손 관주가 웃으며 예를 표하자 노인도 얼른 답례를 표했다.

“시주님의 말씀 덕분에 우리 현묘관이 더욱 영험해질 듯합니다.”

얼마 안 가 도동이 간식거리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반근 언니가 생선을 찌고 있다고 차부터 드시래요.”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바로 시종에게 차를 따르라고 한 후 간식을 집어 들었다.

“오, 이번엔 복숭아로구나.”

노인은 웃으며 쟁반에 있는 간식을 가리켰다.

“산 아래의 복숭아는 맛이 없다고 아씨가 안 좋아하셔서 반근 언니가 설탕에 굴렸대요.”

도동이 말했다.

“마음을 쓰면 세상 만물이 다 아름답지.”

노인은 손에 든 복숭아를 보며 감탄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마음을 쓰는 일이란다.”

과일 절임 하나에 뭐 그리 심오한 말을?

“배고픈 병도 진짜 병이네요.”

도동이 사저의 어깨에 달라붙어 소곤거렸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수수한 옷을 입은 평범한 외모의 몸종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몸종을 보더니 웃으며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도동은 몸종의 손에 들고 있는 찬합을 낚아채듯 받았고, 손 관주는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다.

“어르신, 오래 기다리셨어요.”

몸종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몸종을 보고 노인이 웃으며 일어났다.

“당치 않소이다. 내가 낭자에게 폐를 끼쳤지.”

한쪽 옆에 있던 시종은 코를 벌름거리며 자기 댁 노태야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온화한 모습을 보인 게 언제였나 생각해 봤다. 명문 귀족에서부터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사람이 예를 표하고 공손하게 대했지만 언제나 본체만체하던 노인이었다. 그런데 볼품없는 일개 시녀를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맞이하다니, 식탐에 눈이 멀어 체면 따위는 내던진 듯했다.

“금가아(哥兒: 남자 이름 뒤에 붙여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 또 어디 가는 거야.”

춘란이 소리쳤다. 잽싸게 빠져나가던 소년은 두 걸음도 채 못 가 멈춰 서더니 앞쪽 마당으로 급히 들어오는 소녀를 보며 물었다.

“누나, 어쩐 일로 왔어?”

“지난번에 사공자께 어렵사리 말씀을 올려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더니 왜 안 갔어?”

“안 간다니까, 나 바빠.”

하나뿐인 동생이 이러니 춘란은 기가 막혔다. 전에는 돕고 싶어도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지만 이젠 사공자 앞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얻게 되어 기회를 틈타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 준 터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알고 보니 동생은 아예 가지도 않았다지 뭔가.

“너도 이제 다 컸잖아, 왜 이렇게 밖으로만 돌아.”

춘란은 동생의 팔을 붙잡으며 혼을 냈다.

“이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마음이 놓이시겠어?”

“나 돈 벌고 있어.”

금가아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런 가축들 시중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네가 어디서 돈을 벌어? 또 누구한테 속는 거겠지.”

춘란은 믿지 않았다.

“청매 누나네 건물 수리하는 곳에서 보조로 일한다니까. 하루에 1문(文)이나 받아.”

금가아는 웃으며 우쭐한 듯 말했다. 청매? 누구지? 멈칫했던 춘란은 그제야 청매가 떠올랐다.

“그 바보의 시중을 드는 애?”

소현묘관을 수리하는 일은 춘란도 알고 있었다.

“그건 대현묘관 관주가 맡아서 하는 일 아니었어? 청매가 거기에 말을 넣을 수 있나?”

“그건 나도 모르겠고 아무튼 청매 누나가 나보고 가서 하랬어. 그 일꾼들도 내가 구해 준 거야. 지난번 수리할 때도 내가 구해 준 건데 이번에 또 사람을 찾는다니까 십장이 고맙다며 따로 사례금도 줬어.”

금가아가 방 쪽으로 턱짓을 하며 말했다.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가서 물어봐.”

방에서 나오던 춘란의 모친은 그 말에 놀란 듯 물었다.

“뭐라고? 네가 사공자한테 말씀을 올려 금가아를 보낸 게 아니었어?”

“난 그 계집한테 돈이나 몇 푼 주라고 말씀드린 게 다예요. 그 바보를 살뜰히 보살펴 주면 반근한테 은혜를 갚을 수 있으니까요.”

춘란은 뭔가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금가아가?”

“그 손 관주라는 사람이 사공자의 체면을 봐서 손을 썼나?”

춘란 모친의 추측은 그랬다. 대현묘관 관주가 자발적으로 바보 낭자를 맡겠다고 나섰고, 그게 노야와 부인의 마음과 딱 맞아떨어졌다는 건 집안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좋은 일을 따냈겠지. 듣기론 노야가 그 관주에게 한꺼번에 80냥이나 내주었다고 했다.

집수리에 돈이 들어 봤자 얼마나 들겠는가. 엄청난 콩고물이 떨어질 게 뻔했다. 수많은 사람이 한밑천 잡겠지만 손 관주를 잘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쪽에서 뭐라 암시를 주기도 전에 손 관주는 벌써 사람을 구해 일을 시작했다. 꽤 알려진 인물들조차 미처 나서기 전이었으니 춘란 가족은 언감생심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횡재가 그들 앞으로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춘란의 모친은 지금껏 사공자의 시중을 드는 춘란의 체면을 봐서 일을 준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딸은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사공자께선 글공부에 열중하시느라 이런 속된 일엔 관여 안 하세요. 그리고 부인께서 아직 저한테 화도 안 풀리셨잖아요. 사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올리러 가셨다간 그 일을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저까지 야단을 맞을걸요.”

춘란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청매 누나가 나한테 시킨 거라니까, 왜 안 믿냐고.”

금가아는 짜증이 나는 투로 말했다.

“아무튼 나 간다, 나 바빠. 곧 공사 끝나.”

금가아가 뛰어나갔지만 춘란은 붙잡지 못했다.

“청매?”

춘란은 실소를 터뜨렸다.

“걔가 뭐라고. 바보의 시중을 들면서 뭔 유세를 그렇게 떨어?”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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