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60)

-도리-

찬합에 든 음식을 차려놓은 반근은 예를 표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주육낭 뒤에 앉았다.

“먹어. 지난번에 먹었던 게 바로 이거야.”

주육낭이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진 공자는 웃으며 소매를 걷고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접시에 놓인 노란 튀김 하나를 꺼내 입에 넣더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이렇게 정교한 맛을 내다니, 어떻게 만든 거야?”

진 공자는 주육낭을 무시한 채 뒤에 있는 반근을 보며 물었다.

“별거 없어요. 그냥 반죽에 벌꿀을 넣고 주무른 다음 기름에 튀긴 것뿐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깟 간식 하나 가지고 그리 허겁지겁 먹기는.”

주육낭은 하찮다는 투로 말했다.

“상자, 자네 부친 말씀마따나 뭔가에 빠지면 헤어나올 줄 모른다니까.”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그깟 간식? 그깟 간식이 아니야. 벌꿀만 더 넣었을 뿐인데 우리가 전에 먹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야.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난 찬모가 아니잖아.”

주육낭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자 진 공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마음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야. 마음을 쓰면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모든 게 남과 다르거든.”

“그런 일에 마음을 써서 뭐 하게? 잔재주일 뿐인걸.”

주육낭은 계속해서 코웃음을 쳤다.

“아니면 이런 작은 일에도 그토록 마음을 쓸 정도니 그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거나.”

진 공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은 도(道)나 큰 도나 모두 도야. 작은 게 모이면 커지니 작은 도도 함부로 봐선 안 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도 있잖아.”

주육낭은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고는 튀김이 놓인 접시를 진 공자 쪽으로 밀어주었다.

“먹어, 먹어, 전부 다 먹어. 어서 먹고 그 입 좀 막아.”

주육낭이 소리쳤다.

“자네처럼 억지를 부리는 자와 논쟁을 하려 했으니 내가 화를 자초한 거지. 승려 각공(覺空)이 왜 자네만 보면 벙어리처럼 구는지 이제야 알겠군! 불법 설파를 포기할지언정 자네 같은 수다쟁이 불존(佛尊)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던 거야.”

진 공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라니. 자네도 본인 말이 억지인 걸 알면서 그럴듯하게 꾸며대곤 하잖아. 하여간 남의 잘못만 보이지, 본인 잘못은 인정도 안 하고.”

“그 입 다물어, 다물라고. 계속 떠들면 나 확 가 버린다.”

주육낭은 성가신 듯 소리치고는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며 호통을 쳤다.

“이게 다 네가 만든 이 간식 때문이다. 괜한 말썽을 일으키잖아.”

반근은 공자가 자신에게 농담을 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중히 여기니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거겠지. 반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네, 소인의 잘못이에요.”

진 공자도 웃으며 술을 마시고는 물었다.

“반근, 이 간식은 이름이 뭐냐?”

고개 숙인 반근의 귓가로 전에 나눴던 비슷한 대화가 울리는 듯했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난, 모르겠어.”

그 소리가 맴돌았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진 공자는 반근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주육낭은 성가신 듯 혀를 내둘렀다.

“그냥 먹는 거잖아. 뭔 이름이 있다고 이름을 찾아.”

그렇지. 그런데 이 아인 왜 이름이 없다고 하지 않고 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거지? 모른다는 말인즉 이름이 있다는 뜻이고,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주인이 있다는 의미다. 이 간식의 주인이 이 아이가 아니었나? 그럼 누구? 진 공자는 더 캐물으려 했지만 주육낭이 말을 끊었다.

“난 자네랑 술 마시러 온 거야. 식(食)을 논하러 온 게 아니라고. 따분해 죽겠네.”

주육낭은 술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라주며 질린다는 듯 말했다.

시(詩)를 논한다는 말을 식을 논한다는 말로 바꾸다니, 제법인걸!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서생과 무인, 절름발이와 신체 건장한 젊은이. 바로 남들이 보기엔 하등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절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거칠면서도 세심한 구석이 있고 고상하면서도 속된 면모가 있으니 호흡이 척척 맞을 수밖에.

진 공자는 술을 주전자째 들어 고개를 젖혀가며 벌컥벌컥 마셨다. 주육낭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진작 그랬어야지.”

술이 세 순배쯤 돌자 두 사람 모두 불콰하게 취해 한껏 흥이 올랐다. 주육낭이 성 밖으로 말을 타고 산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병으로 걸음을 못 걷는 진 공자 또한 말의 능력에 기대 잠시나마 자유롭게 활보하는 쾌감을 즐길 수 있어 말 타는 것을 좋아했다. 곧바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시종을 부르고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와 술집을 나왔다. 반근도 따라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난 말 탈 줄 모르는데.”

반근은 기쁘면서도 불안해했다.

“뭘 겁내, 공자님께서 가르쳐 주실 텐데.”

다른 몸종이 히히 웃으며 대꾸했다. 반근은 얼굴이 빨개진 채 그 몸종과 웃고 떠들었다.

거리에는 사람도 많고 마차도 많았다. 늠름한 소년과 아리따운 시녀의 행차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앞쪽에서 위압적인 호령으로 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던 인파는 신기할 정도로 쫙 갈라지면서 길을 텄다.

“누구지?”

술기운이 알딸딸한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붐비는 인파 사이에 껴 있으려다 보니 이리저리 흔들려 부아가 치밀었다.

“이 몸이 성 밖으로 나가야겠다는데, 어디서 감히 길을 막아.”

주육낭이 고삐를 틀어쥐고 말을 내달리려는데 앞쪽 마차에 있던 진 공자가 얼른 휘장을 들고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진안군왕(晉安郡王)의 행렬이야.”

취기가 확 달아난 주육낭은 휙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길을 비켜섰다. 인파에 밀려 뒤로 물러난 반근은 잘생기고 늠름한 주 공자와 총명하고 기품 있는 진 공자가 이토록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의아했다. 반근의 눈에 이 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들마저 이토록 공손하게 만드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고관대작이야?”

반근이 궁금증을 못 이기고 옆에 있던 몸종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역시 촌에서 온 계집이라 어쩔 수 없네.

“군왕(郡王)이셔. 황제의 친척이지.”

몸종이 대답하자 반근은 아, 하고 대꾸했다. 황제의 친척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네. 군왕의 마차가 코앞으로 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몸을 밀치며 군왕을 보려고 애썼다. 황제의 친척을 볼 수 있다니, 역시 경성은 대단한 곳이구나. 반근도 흥분을 안고 까치발을 들며 군왕을 보고자 했다.

황족만 달 수 있는 표식이 달린 마차에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의 위병들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마차가 흔들리면서 단정히 앉아 있는 군왕의 옆얼굴이 이따금 보였다. 가지런히 묶은 머리에 진지한 표정이었는데 콧대가 특히 높았다.

어찌나 순식간에 지나갔는지 반근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휘장에 가려져 있으니 제대로 볼 수 없을 수밖에. 마차가 저 멀리로 사라지자 이쪽 거리는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반근과 몸종도 얼른 진 공자의 마차 옆으로 따라붙었다.

“많이 봐 둬, 좋은 기운 얻게.”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말 위에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씩 웃었다.

“좋은 기운은 여자들이나 받는 거지. 우리 사내들한테 뭐 좋을 게 있다고.”

진안군왕은 수왕(秀王)의 장자로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입궁했다가 황후의 품에 안긴 적이 있는데 그 후 얼마 안 가 황후가 회임을 했다. 자손이 귀했던 황제와 태후가 크게 기뻐했음은 물론이었다. 이후 황후는 황자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석 달 만에 요절했다. 이듬해에는 진안군왕이 또다시 상경하여 귀비의 품에 안겼는데 얼마 안 가 귀비도 회임을 하여 태후와 황제를 기쁘게 했다. 그때부터 진안군왕은 황실의 복덩이로 여겨졌고 당시 5살이었던 진안군왕을 황궁으로 데려와 키운 게 벌써 10년이었다.

10살을 넘기면서 비빈의 품에 함부로 안기는 게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태후의 곁에서 자랐다.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 뭐가 있는 것인지 진안군왕이 황궁에서 지낸 후로 황제의 자손이 번성하여 벌써 자녀가 열이나 됐다. 황자는 두 명에 불과했지만 나이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부친이 된 황제로서는 그 정도도 흡족해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진안군왕은 황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비빈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보내 주는 동자라는 뜻에서 ‘송자동자(送子童子)’라고 불렸다. 어린아이일 때는 이런 칭호를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명색이 군왕이라는 자가 황궁에서 자라며 곧 성년의 나이인데도 그리 불린다면 웃을 일이 아니었다. 듣기로 진안군왕은 부친의 봉지(封地)로 돌아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저분도 가엾지.”

벌써 저만치 멀어진 행렬을 보며 진 공자가 중얼거렸다.

자고로 황실의 일은 논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일행은 빠르게 성문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주육낭과 진 공자가 머물렀던 술집으로 7~8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점원은 기겁을 했다.

“누구신지……·.”

여럿이 우르르 달려 나와 묻자 우두머리인 집사가 손을 휙 내저었다. 술집 주인은 손을 뻗어 집사가 던진 은자를 잽싸게 낚아챘다. 제법 묵직하군, 통이 크네.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주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앞에 있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너울을 쓴 여인 둘과 여자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너울을 쓴 채 아이를 손잡은 여인이 대답했다.

같은 시각 강주의 현묘관은 시끌벅적한 속세와 달리 더없이 조용했다.

“반근.”

나무 아래의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말하자 몸종은 나뭇가지 끝을 손수건으로 감싸 건넸다. 나뭇가지를 건네받은 정교랑은 느릿느릿 부들방석 위에 앉아 힘겹게 글자 하나를 썼다. 몸종은 그게 무슨 글자인지 몰랐으나 그래도 그게 글자라는 건 알았다.

“어머, 아씨, 쓰셨네요. 글자를 쓰셨어요.”

몸종이 흥분하여 외쳤다. 마지막 획을 느릿느릿 마무리하고 난 정교랑은 그제야 손을 떨며 숨을 토했다. 곧이어 두 번째 글자를 쓰려고 했지만 손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여서 좀처럼 써지지 않았다. 정교랑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뭇가지를 쥔 손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못 쓰겠어, 못 쓰겠네.”

“아씨, 벌써 한 글자를 쓰셨잖아요. 잘하셨어요. 내일이면 두 글자를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정교랑 앞에 앉은 몸종이 정교랑의 무릎을 주무르며 기쁘게 말했다.

“서두르지 마세요. 서두를 것 없어요.”

정교랑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난 안 서둘러.”

정교랑은 땅 위에 쓴 글자를 나뭇가지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이 글자를, 너무 못 썼단 뜻이야.”

몸종은 땅 위의 글자를 다시 쳐다봤다. 반듯하고 똑바른 게 아주 훌륭해 보였다.

“아주 예쁜데요. 집에 있는 공자님들의 쪽지에 있는 글자보다 훨씬 나아요.”

정교랑은 나뭇가지로 몸종의 이마를 톡 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교랑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아씨, 이게 무슨 글자예요.”

“태.”

몸종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태’요?”

몸종은 다시 한번 발음해 보다가 퍼뜩 깨닫고 물었다.

“태평할 때 ‘태’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네요. 아씨께서 많이 연습해서 편액을 직접 쓰시면 되겠어요.”

몸종은 손뼉을 치며 물었다.

“태평, 태평, 너무 좋은 이름이네요. 태평을 기원한단 뜻이에요?”

“아니야.”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내가 태평 만두를 좋아해서지.”

태평 만두? 멈칫했던 몸종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쪼그려 앉아 있던 몸종은 웃느라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아씨. 그럼 우리 오늘 저녁엔 태평 만두 먹어요. 도사님들한테 부탁해서 양의 간이랑 이것저것 사다 놨어요.”

정교랑도 좋다고 했다. 마당 안으로 들어오던 손 관주는 검은 비단으로 된 겉옷에 긴 흑발을 내려뜨리고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과 무릎께에 꿇어앉아 환히 웃고 있는 몸종을 바라봤다. 흡사 가을 경치를 감상하는 여인을 그린 미인도 같았다.

녹음이 짙푸른 나뭇가지나 밝은 옷을 입고 맑게 웃는 몸종은 이 그림의 핵심이 아니었다. 극도로 수수한 옷차림에 무표정한 채 멍하니 있는 여인이 핵심이었다. 손 관주는 잠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런 여인을 정씨 가문에선 왜 나 몰라라 하고 내치는 건지.

“무량천존(無量天尊: 도교에서 예를 표할 때 하는 말).”

정교랑과 몸종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 관주에게 답례했다.

“아씨, 며칠 후면 저쪽 일이 마무리됩니다. 더 손볼 곳은 없는지 한번 가 보세요.”

“네.”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몸종과 손 관주의 부축을 받으며 함께 가 보니 소현묘관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앞쪽 전각은 엄숙하고 경건해 보였고 뒤쪽의 거처는 그윽하고 품위가 있었다. 마당 입구에 선 몸종은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뇌우가 내리치던 밤이 불과 얼마 전에 있었다. 당시 몸종은 덜덜 떨며 바깥마당에 있는 사다리를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서 몸을 바짝 엎드리고 앞으로 기어가며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날이 갠 후에도 그녀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 악몽과도 같았던 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팔각정 주변에 새 흙을 깔고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쉭쉭 소리가 났다. 손 관주와 정교랑의 대화가 귓가로 들려왔다.

“괜찮아 보이세요? 화초를 더 심을까요?”

“괜찮네요.”

손 관주가 공손하게 묻자 정교랑이 대답했다. 몸종은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을 부축해 앞으로 걸어갔다. 두 아이가 뛰어나와 정자 안에 공손하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씨, 앉으세요.”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상냥하게 말했다. 소현묘관에 일이 일어나고 정교랑과 몸종이 산 아래로 옮겨가면서 두 아이도 따라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가 소현묘관이 수리에 들어가면서 손 관주 혼자 이곳저곳 관리하는 게 힘에 부치자 두 아이는 자신들이 돕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요 며칠 묘춘과 묘령 두 아이가 쓸고 닦고 하면서 청소했어요.”

손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한쪽 옆에 쭈뼛쭈뼛 서 있었다.

딱하기도 하지, 그 여인이 아무렇게나 데려다가 가축 대하듯 키웠으니. 기분 좋으면 무시하고 기분 나쁘면 때리고 욕하며 화풀이하고. 무량천존, 그 화근덩어리는 이제 죽었어. 손 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아씨를 따르면 좋은 날이 올 게야.

“아씨, 이 두 아이는 원래 이곳 사람이었으니 어찌 처리할지 아씨께서 결정하세요.”

소현묘관은 이제 정교랑의 구역이었다. 수행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게 옳겠지만 정교랑 쪽에도 시중들 사람이 필요했다. 정교랑은 두 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처리하죠.”

두 아이는 살짝 고개를 들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 놀람과 기쁨이 드러났다.

“아씨,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아이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꿇어앉아 고개 숙여 연신 절을 올렸다. 이 아씨만 따르면 이제 좋은 날이 올 거다. 너희에게도 드디어 좋은 날이 왔구나. 손 관주 역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 관주.”

정교랑이 손 관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잘 아는 도관이 있습니까?”

손 관주는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는데요.”

“이 둘을 그리로 보내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뭐라고? 두 아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손 관주와 몸종 역시 흠칫 놀랐다. 어째서?

“아씨, 아씨. 저희가 뭘 잘못했다면 벌을 주시고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저희를 내쫓지 마세요.”

두 아이는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로 호소했다.

“사실 너희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어.”

정자에 앉은 정교랑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채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길을 찾으려 하고, 살아남고자 목숨 걸고 도박을 하기도 해. 개미 같은 미물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사람인들 오죽할까. 그러니 너희가 한 일은, 잘못이라고 볼 수 없어.”

무슨 뜻이지? 손 관주는 이해가 안 가 저도 모르게 몸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종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씨, 아씨. 저희가, 저희가 뭘 했는데요?”

한 아이가 고개를 들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며 말했다.

“그 관주의 손에 자란 건 저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관주와 지내면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그런 못된 심보는 안 배웠어요. 아씨, 부디 살펴 주세요.”

아이들은 더 이상 정교랑을 보지 않고 몸종과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은 바보니까 좋아했다가 화냈다가 이랬다저랬다 하겠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 몸종과 손 관주는 이치를 알 거야. 이치로는 저 바보가 윗전이라지만 최종 결정은 이 두 사람이 하겠지.

몸종과 손 관주도 울고불고하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두 아이가 그 여인의 제자라고는 하나 나이도 아직 어리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 제자라는 게 맘에 안 든다고 내쫓기에는 실로 가엾지. 손 관주가 말을 거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날, 너희가 마당 문을 열어서 그 사내가 들어오도록 유인했지?”

정교랑의 말에 두 아이는 공포에 떨며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정말 바보가 아닌 거야?

순간 몸종의 낯빛도 싹 변했다. 그날 문단속을 확실히 하고 간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 호색한이 대담하게도 문을 열고 들어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간에서 수작을 부린 자가 있었어!

그날 그 문이 닫혀 있었다면 아무리 호색한이라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생각까지는 못 했을 터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슬쩍 엿봤다가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겠지. 작은 구멍 하나에 둑이 무너지듯 결국 그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을 터였다.

세상에, 누가 일부러 덫을 놓았다니! 세상에, 그 속이 시커먼 계집이 아니라 이 가엾은 것들의 짓이었다니! 어떻게! 어떻게 이래! 어떻게! 어떻게 감히!

“너희!”

소리를 빽 지른 몸종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으로 두 아이를 가리켰지만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 관주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일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리를 피할 수 없어 그저 고개만 숙였다. 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며 머리를 쾅쾅 찧으며 정교랑을 향해 절을 올렸다.

“아씨, 아씨. 저희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우리 언니가 보고 있다가 바로 사람을 부르러 갔어요. 절대, 절대로……·.”

한 아이가 울며 말했다.

“그래, 너희는 아주 잘했어. 정씨 가문이 나서서 처벌할 수 있도록, 그 사내가 내 심기를 건드리게 하면서도, 때맞춰 사람을 불러와서, 일이 수습하지 못할 지경으로 번지는 걸 막았지.”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그런 짓을 벌인 것도, 아마 막다른 길에 몰려서였을 거야.”

두 아이는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아씨, 혜안으로 살펴 주세요. 부디 사정을 살펴 주세요.”

두 아이가 울며 말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하는 부탁이었다.

“당연히 사정을 살펴야겠지. 하지만.”

정교랑이 둘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속이 좀 좁거든.”

두 아이는 또다시 놀라 고개를 들고,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정자에 단정히 앉아 있는 그 여인을 바라봤다.

손 관주가 오자 회랑 아래에 앉아 버선을 깁고 있던 몸종이 급히 손 관주를 향해 손짓을 했다. 손 관주는 얼른 발소리를 죽이고 회랑 아래로 걸어와 앉았다.

“아씨는 주무셔?”

손 관주가 나지막이 묻자 몸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몸이 안 좋고 기력도 온전치 않으셔서 낮엔 반 시진씩 주무셔야 해요.”

몸종이 손에 든 바늘과 실을 계속 움직이며 말하자 손 관주는 아, 하고 대꾸했다.

“어쨌든 좋아지시고 있잖아. 요양하면 점점 더 좋아지실 거야.”

손 관주는 웃으며 덧붙였다.

“주 부인께서 올리신 간절한 기도가 헛되지 않았네. ”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지.”

손 관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쳐다봤다. 얼마나 영리한 아이인가. 게다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가.

“그 두 아이는 벌써 보냈어. 보원산에 있는 도관이야. 거기 관주가 나랑 동문수학한 사이니까 아씨께서 마음 놓으셔도 될 거야.”

마음을 놓으라니, 무슨 마음을 놓으란 거지?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바느질을 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손 관주는 바느질 솜씨가 좋다고 칭찬 몇 마디를 던진 후 돌아갔다. 몸종이 바느질거리를 들고 잠시 멍하니 있는데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몸종은 얼른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에 앉아 있었다. 몸종은 정교랑을 똑바로 앉혀 주고 물을 한 잔 올린 다음 머리를 빗겨 주었다.

“아씨, 관주님이 그 두 아이를 벌써 보내셨대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응 하고 대꾸한 후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봤다. 방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 두 아이가 불쌍하단 생각이 드니?”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요. 불쌍한 사람에겐 미운 구석이 있는 법이죠. 딴에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만에 하나가 있잖아요. 만에 하나 아씨께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셨으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몸종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듯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요 며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말 그랬다면, 우리 모두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규방 여인이 치욕을 당한 일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정씨 가문에서는 사정을 아는 이를 모조리 죽여 입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 두 아이가 밖에서 조심스레 살폈겠지. 만에 하나 너나 관주가 오지 않았더라도 그 아이들이 들이닥쳤을 거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아, 하고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둘 다 아주 잘했어.”

정교랑은 책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두 아이가, 똑똑하긴 해.”

몸종은 이해가 안 가는 듯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아씨. 그 두 아이가 마음에 드세요?”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몸종을 바라봤다.

“난 바보일 뿐, 미치광이는 아니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또 절 놀리시네요.”

“놀린 거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난 속이 좁다고.”

정교랑은 책장을 한 장 넘기며 말했다.

“나를 속이고 짓밟고 이용한 사람을 어떻게 곁에 둘 수 있겠어.”

그렇지. 아씨를 속이고 짓밟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그 두 아이는 다른 도관으로 보내졌을 뿐이니,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 생선을 새로 샀는데 어떻게 드시고 싶으세요?”

몸종이 한결 홀가분해진 말투로 물었다.

“무슨 생선인데?”

“커다란 청어예요.”

정교랑의 물음에 몸종이 대답했다.

“부엌에 있는 재료는?”

정교랑이 또다시 물었다.

“파랑 달걀이 있어요. 어제 산에서 딴 버섯이랑 목이도 있고요.”

몸종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대답했다.

“그리고 또……·.”

“됐어.”

정교랑이 말을 끊었다.

“어죽을 만들자.”

몸종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단정히 꿇어앉아 진지하게 듣고 기억할 준비를 했다.

* * *

밤의 어둠이 내릴 무렵, 경성에 있는 진소의 집에서는 드디어 돌아온 집사가 자세한 사정을 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씨께서 그 계집의 이름을 불렀던 걸 누군가가 기억하셔서 그 이름을 댔더니, 운 좋게도 그 집 점원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계집이 자기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 점원이 씩씩거린 일이 있어 기억에 남았다더라고요.”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했던가. 진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우연이 있나, 우연에 우연이 겹치다니.

“그래서 어느 댁 낭자인지는 알아냈는가?”

“당시 별실에는 공자님만 두 분 계셨답니다.”

진소의 물음에 집사가 대답했다. 공자라고?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계집이 낭자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나이가 열네다섯 살쯤 된 낭자랬는데, 왜 갑자기 공자로 바뀐 거지? 진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두 공자님께서도 경성의 유명 인사란 사실이지요.”

집사가 말을 이었다.

“한 분은 노섬 주씨 가문 공자님이고, 한 분은 다리를 저는 진 공자님이십니다. 반근이 두 분 중 누구의 몸종인지는 점원도 모른답니다.”

주씨 가문과 진씨 가문이라. 진소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면 내 명첩을 들고 가 알아보면 되겠군.”

집사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둘 다 평민 백성의 집안은 아닌지라 함부로 찾아가 몸종의 일을 묻는 건 곤란했다. 노야의 명첩을 들고 가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집사는 네 하고 대답한 후 뒤돌아 나갔다.

술을 마시고 말까지 타다 돌아온 진 공자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누워 쉬고 있었다. 밖에서 몸종들이 떠드는 소리가 진 공자 귀에 들렸다.

“방금 누가 누굴 찾았다고 했느냐?”

진 공자가 휘장을 들며 묻자 몸종들이 얼른 들어와 휘장 앞에 꿇어앉았다.

“공자님께 아뢰옵니다. 진소 상공 댁에서 사람을 보내 저희에게 반근이라는 이름의 몸종이 있는지 물으셨어요. 기이한 일인데 이유는 잘 모르겠고요.”

진 공자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 진소?”

진 공자가 이어 물었다.

“반근이라고?”

몸종들은 공자가 그런 어투를 쓰는 일이 드물었기에 흠칫 놀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휘장을 들어올렸다.

“네, 진 상공의 명첩이에요. 반근이 저희 집 몸종이냐고 물었어요.”

몸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진 공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손을 뻗어 침상 옆에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주씨 저택으로 가자.”

지금? 몸종들은 놀라 밖을 쳐다봤다.

한편 주육낭은 기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부친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연무장에서 권법을 연마하고 있었던 터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걸어왔다.

“바람이 찬데 풍한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주육낭의 모친은 걱정스러운 듯 말하며 몸종을 시켜 땀을 닦을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주육낭의 부친이 성가신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물러가라.”

주육낭의 모친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몸종들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네가 데려온 아이가 보통이 아니더구나.”

부친의 말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투나 행동거지가 남다른 면은 있지만, 뜯어보면 별다를 것도 없습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늘 화법이 직설적이었다. 말을 마친 주육낭이 부친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방금 진 상공 댁에서 사람을 보내 왔다.”

주육낭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런 고관대작 유학자가 주씨 가문을 찾아왔다고? 혹시 국본을 세우는 일 때문인가?

황제는 어느덧 연로했고 몸이 허약해 병치레가 잦아 태자 책봉은 시급한 문제였다. 황자 둘을 놓고 조정에서는 의논이 분분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화가 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다른 이들은 골치가 아프다며 피하려고 했지만, 주씨 가문은 이를 엄청난 기회로 여겼다.

애석하게도 무장은 지위가 낮았고 주씨 가문의 관직 역시 무장 중에서도 낮은 축에 속했다. 조부의 선견지명으로 경성에 올라와 일거에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이 넓은 경성 바닥에서 주씨 가문에 대해 아는 자는 이미 없었을 것이다. 이들을 포섭하고자 손을 내미는 이가 없는 마당에 무턱대고 찾아가 각오를 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먼저 찾아와 주다니, 그것도 그런 엄청난 거물이.

“진 상공께선 선택을 하신 겁니까?”

주육낭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빛냈다.

“누구를 따른답니까?”

금방이라도 옷소매를 걷고 누가 됐든 일단 달려들어 덤빌 태세였다. 자고로 부귀영화는 위험 속에서 얻는 법이라고 했다. 앞뒤를 살피고 이것저것 재며 몸을 사리는 게 꼭 안전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크게 한바탕 붙고 나면 성패가 어찌 되든 속은 시원할 터였다.

주육낭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집사가 가져온 명첩을 받아들 당시 자신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육낭, 괜한 생각을 하는구나.”

부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진씨 가문에서 그 몸종에 대해 물었다.”

멈칫했던 주육낭이 물었다.

“반근이요? 무슨 일로요?”

주육낭의 부친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물으려던 참이다.”

그 계집이 진 상공을 알았단 말인가? 말하지 않은 일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그저 영리하고 기민한 덕에 그 바보를 데리고 천 리 길을 이동해 집까지 데려다줬다고 여겨 딱히 더 묻지는 않았건만.

“제가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주육낭은 곧장 뒤돌아 나갔다. 문밖에서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노야, 진 상공께서 오셨습니다.”

명첩을 보내 확인하자마자 이렇게 빨리 직접 찾아왔다? 주씨 부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토록 중요한 계집이었단 말인가? 주씨 부자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객청으로 나가 맞이했다. 두봉(斗篷: 머리 부분을 덮는 쓰개가 달린 옷) 차림의 진 상공은 벌써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고, 여자아이를 안은 노복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

주육낭의 부친이 얼른 허리 굽혀 인사하며 진 상공을 맞이했다. 인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진 상공이 두봉을 벗으며 맞절을 했다.

“귀댁의 낭자께 목숨을 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목숨을 구한다니? 주육낭의 부친은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어느 낭자 말씀이십니까?”

주씨 가문 3형제 슬하에 있는 7남 8녀 중 딸 다섯은 이미 출가한 상태였고 집에는 셋이 남아 있었는데, 막내는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그런 딸에게 진 상공의 목숨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반근이란 계집이 시중을 드는 낭자 말입니다.”

진소가 말했다. 반근이 시중을 드는 낭자?

“반근은 우리 육낭의 시중을 드는데요.”

주육낭의 부친은 말하면서 객청 밖을 내다봤다.

“아, 저기 오는군요.”

진소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두 몸종이 등을 들고 한 몸종을 안내해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주육낭도 회랑 아래까지 나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급히 걸어오는 몸종을 보고 신이 나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언니.”

반근은 흠칫 놀랐다. 이 집에서 저 아이를 또 볼 줄이야.

“너는……·.”

막 입을 열려던 반근은 공자와 노야가 한자리에 있는 걸 보고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언니, 우리 할아버지가 언니를 봐야겠대.”

여자아이가 달려와 반근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반근 낭자, 큰비가 내리던 날 사당에서 낭자의 아씨가 술을 나눠 주며 병세를 물었던 노인을 기억하시오?”

진소는 자신의 딸과 반근이 서로 아는 듯한 낌새를 보고 구면이라 확신한 후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반근은 갑작스레 다시 나타난 여자아이 때문에 혼란스럽던 찰나에 낯선 사내로부터 그 일에 관한 질문을 받자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그날, 큰비, 낡은 사당, 마차, 화로에 데운 술, 고단했던 여정. 아씨는 병으로 지난 일을 금세 잊으시고 자신은 이제 아씨 곁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지난 일을 다시 언급할 이는 평생 없을 줄 알았기에,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런데 누구세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소는 자신의 질문을 인정하는 반근의 대답에 내심 크게 기뻤다.

“그 노인이 바로 내 부친이시오. 그 아씨의 혜안을 부친께서 미처 모르셨던 것 같소. 병환이 깊어 병석에 앓아누우셨는데, 부디 아씨께서 구해 주셨으면 하오.”

진소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극진한 예를 표했다. 일개 몸종에게 이런 예를 표하다니, 진소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주씨 부자는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고 반근 역시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노인, 병환, 아씨, 그 모든 게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아씨요? 어느 아씨요?”

반근은 멍한 채로 중얼거렸다. 때마침 도착한 진 공자는 그 대화를 듣고 순간 모든 걸 깨달았다. 그동안 뭔가 이상하다고,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의문이 단숨에 풀려 버렸다.

“네게 간식 만드는 법을 알려 준 그 아씨 말이다. 그 아씨도 차를 싫어한댔지. 너와 천 리 길을 함께 해 집으로 돌아간 그 아씨 말이야.”

진 공자는 앞에서 부축하던 시종들을 제치고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직접 걸어왔다.

* * *

곁방 안. 주육낭과 진 공자는 앞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반근을 쳐다봤다.

“그때 길에서 만났는데 아씨께서 어르신의 병을 빨리 치료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진료비를 받겠다고 하자 그 어르신께서는 웃으며 아씨의 말을 믿지 않고 가 버리셨죠. 그런데, 그런데 정말 병이 나셨네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주육낭은 머릿속이 어지러운 듯 반근의 말을 끊었다.

“아씨의 말, 아씨의 말이라니. 어느 아씨가 말했단 말이냐?”

진 공자는 한숨을 쉬었다.

“육낭, 믿지 않으려고 하지 마. 어느 아씨인지 뻔히 알잖아.”

주육낭은 그래도 고집스럽게 반근을 쳐다봤다.

“우리 집 아씨요.”

반근이 주육낭을 보며 대답했다.

“그 바보?”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 바보가 병을 치료한다고?”

“우리 아씨는 바보가 아니에요. 병에 걸리셨던 건데 조금씩 나아지고 계세요.”

반근이 절절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아씨는 병을 볼 줄 아세요. 엄청 대단하시죠, 대단하세요.”

주육낭은 놀란 눈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허튼소리! 황당하군!”

주육낭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일개 바보가! 일개 바보가!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반근은 주육낭의 호통에 놀라 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반근.”

진 공자가 말을 받아 반근을 보며 물었다.

“내가 묻겠다. 병주에서 강주까지 어떻게 돌아왔지?”

반근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가다가 쉬었다가 하면서 돌아갔어요.”

처음 데려왔을 때 물어봤던 건데? 대답도 했잖아?

“여비 말이다. 여비는 어찌 구했고?”

진 공자가 물었다.

“그게, 아씨께서 병을 치료하며 마련하셨어요.”

반근이 대답했다.

“허튼소리!”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저의를 품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너희 여비는 내 조모님께서 남겨 주신 돈이 아니었느냐?”

그래서 안 물어봤던 거다. 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뻔한 일을 뭐 하러 물어? 이 계집이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반근은 당황하여 주육낭을 쳐다봤다. 공자님이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알 것 같기도 했다.

* * *

“아씨,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노마님이 우리한테 돈 남겨 주신 거 없잖아요. 아씨께서 병을 치료할 줄 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주육낭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반근을 내려다봤다. 눈앞에 여인 하나가 떠오르는 듯했다. 넋을 놓고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그날의 그 여인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그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그 자신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말해 봤자 너희처럼 멍청한 인간들은 안 믿을 거야. 그녀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며 높은 곳에서 주육낭을 내려다봤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주육낭이 휙 몸을 돌려 병풍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 것이었다. 서화가 그려진 6폭 병풍이 와르르 쓰러지자 밖에 있던 몸종들이 깜짝 놀라 들어왔다가 주육낭의 호통에 도로 나갔다.

“반근.”

진 공자는 멍하니 있는 몸종을 한숨을 쉬며 바라봤다.

“노야께 가서 진 상공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려. 너희 아씨는 아직 강주에 있다고.”

반근은 네 하고 대답했다. 분노하는 주육낭을 보자니 두렵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육낭, 이번엔 자네가 큰 잘못을 저질렀어.”

진 공자는 주육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잘못을 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옷소매를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

“저 애가 나한테 말을 안 하는데 바보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무슨 신선도 아니고.”

주육낭을 보던 진 공자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가 잘못 말했네. 자네는 잘못이 없고.”

진 공자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주육낭을 쳐다봤다.

“자네, 아주 큰 사고를 쳤어.”

마차는 곧장 현묘관 앞으로 가 멈춰 섰다. 마차를 몰던 노복과 시종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한 사람은 마차에 타고 있던 노인을 부축하고 한 사람은 마차에서 커다란 대광주리를 꺼냈다.

“배고픈 병에 걸린 어르신이 또 오셨어요.”

문 앞에 있던 도동이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노인은 껄껄 웃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도관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도관의 간식이요?”

영접하러 나왔던 손 관주는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현묘관의 음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해졌나?

사찰이나 도관에서 공양하는 음식은 본디 참배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워낙 유명하다 보니 돈을 내고도 밥 한 그릇 얻어먹기 힘들 정도였으며 아예 그 사찰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성 밖의 만녕사는 음식으로 이름을 날렸고 복주의 보타사는 간식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유명 사찰이나 도관의 일이었고 작고 평범한 사찰이나 도관은 끼니 해결조차 힘든 상황이라 신도들에게 식사나 간식을 공양하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겸손하실 것 없소이다. 내 이번에는 거저 얻어먹자는 게 아니오. 자, 식재료는 내가 가져왔으니 수고스럽겠지만 조리만 좀 해 주시오. 이 늙은이의 배고픈 병을 치료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손 관주는 얼른 예를 표하며 사죄했다. 해황 등자라니, 먹어보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데 대관절 어떻게 조리하라는 건지. 음식을 해서 신도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야 기꺼이 그 고생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사부님, 전에 반근 언니가 만든 거예요.”

도동이 말했다. 경문을 읽던 여도사들도 밖으로 나왔다가 노인을 보고 기뻐하며 어찌 된 일인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손 관주와 노인은 그제야 저간의 사정을 이해했다.

“은인이 여기 사셨구려.”

노인은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도사님께서 말씀 좀 전해 주시오. 직접 만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소이다.”

부엌에서 반죽을 하고 있던 반근은 얘기를 듣더니 의아해했다.

“어느 어르신이요?”

반근은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저한테 고맙단 인사를 한다고요?”

“그래요. 전에 그 어르신이 산에서 쓰러지셨을 때 사탕 귤을 주며 귀를 꼬집고 어쩌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여도사는 반근을 존경의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진짜 착한 사람이네,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일마저 마음에 담아 두지 않다니. 몸종은 퍼뜩 깨달았다.

“아, 그분이요. 감사 인사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반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죠.”

그 바보? 멈칫했던 여도사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정말 착한 몸종이네, 이토록 윗전을 잘 섬기다니.

“그리고 저번에 줬던 그 등자랑 게살인지 뭔지 그거도요. 어르신이 드시고는 엄청 좋아하셨어요.”

화제를 돌린 여도사가 기쁘게 말하며 대광주리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거 봐요. 반근 주라고 이것도 특별히 가져오셨어요. 저번에 먹은 음식에 대한 보답이래요.”

몸종은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광주리를 쳐다봤다. 그 안에는 둥그렇고 농익은 등자와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 몇 마리, 술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이게 목숨을 구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아니에요. 그 어르신은 해황 등자를 반근이 만들었다는 걸 모르셨거든요. 이건 그냥 지난번 먹은 음식에 대한 보답이지, 지지난번에 목숨을 구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아니에요.”

여도사가 얼른 설명했다. 지난번과 지지난번, 보답이면서 그 보답은 아니라니. 아리송한 말에 몸종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알았어요.”

몸종은 대광주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씨는 해황 등자가 먹고 싶다고 했지만 몸종이 산 아래로 내려가 구해 온 식재료가 별로라 입에 안 맞는다며 먹지 않았다. 그 후로 따로 언급이 없었기에 몸종도 잊고 지냈는데 때마침 이렇게 식재료가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몸종이 말했다. 여도사는 대광주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몸종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산속의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졌다. 전에 있던 대나무 문발을 치우고 한기를 막기 위해 종이로 된 문으로 바꿔 단 후였다. 여도사는 몸종이 문을 여는 동안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얼핏 봤는데 책을 보고 있는 듯했다. 바보도 책을 읽나? 여도사는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문이 닫히면서 시선을 가렸다.

“아씨, 이것 좀 보세요. 받을까요, 말까요?”

자초지종을 설명한 몸종이 공손히 물었다. 책을 내려놓은 정교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대광주리를 쳐다봤다.

“어디 좀 보자, 물건이 어떤지.”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얼른 대광주리를 가까이 가져가 등자며 게, 술 등을 하나씩 꺼내 보였다. 정교랑이 하나씩 들고 살펴봤다.

“이게 괜찮구나. 이것도 괜찮고.”

마음에 드는 게와 등자를 한쪽 옆에 빼놓은 정교랑은 마지막으로 술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더니 얼른 한쪽 옆으로 치워 버렸다.

“술 때문에 사레 드셨어요?”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긴장한 채로 몸을 곧추세우며 물었다.

“아니, 냄새가 역해서. 이것도 술이라니.”

물그릇에 있던 물을 다 마신 노인은 작은 술 주전자를 들어 그릇에 조심스레 따른 다음 조금씩 천천히 마셨다.

“어르신.”

옆에 있던 도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약이 잘 안 넘어가세요?”

노인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약이라니?”

“그럼 어르신은 왜 그렇게 조심스레……·.”

도동의 말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얘야, 맛이 끝내주는 술이라 아까워서 그런다.”

“노태야, 그런 술을 그리 많이 내주셨어요? 집에 있는 술을 다 털어 오셨잖아요.”

시종이 한쪽 옆에서 아까운 듯 불만을 토로했다.

“해황 등자를 만드는 데 술도 들어가요?”

“어리석은 것아, 당연히 술이 들어가지. 내가 먹어 봐서 알아.”

노인은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맛은 맛좋은 술과 어울려야 하는 법이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돼. 좋은 술만 있으면 아름답지 않거든.”

이쪽에서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저쪽에서 여도사가 대광주리를 등에 지고 돌아왔다.

“또 없어요?”

“있어.”

도동이 얼른 묻자 여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다고? 근데 왜 안 보이지?

“반근 언니가 뭘 이런 걸 가져오셨냐며 해황 등자를 만들어 사례하겠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직접 만들어서 갖고 오겠다네요.”

여도사의 말에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잘됐다고 손뼉까지 쳤다.

“그런데 말이죠.”

여도사가 대광주리를 건네며 말했다.

“술이 안 좋대요. 새 술을 가져와야 맛이 제대로 날 거래요.”

“술이 안 좋다고?”

노인은 멈칫했다.

“뭐야, 우리 집 최고의 술이라고요. 이게 안 좋으면 이 세상에 좋은 술 같은 건 없어요.”

시종이 발끈해서 따지자 여도사는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나, 나도 그런 건 잘 몰라요. 반근이 말한 거예요. 이 술은 안 좋다고 새로 담근 술을 가져와야 맛이 날 거랬어요.”

요리를 할 때 쓰는 술은 새로 담근 술이 잘 어울렸다. 이 술이 안 좋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음식에 쓰기엔 안 좋다는 뜻이었다. 퍼뜩 깨달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조예가 깊다니 음식에 얼마나 정통한지 알겠군. 그러니 그렇게 훌륭한 맛을 내지.

“그랬군, 그랬어.”

노인은 얼른 시종을 재촉했다.

“냉큼 가서 새로 담근 술을 가져오너라.”

몸종은 방금 꺼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황 등자를 정교랑 앞에 조심스레 차려 놓았다.

“아씨, 이번엔 어떤지 드셔 보시겠어요?”

몸종은 기대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정교랑이 젓가락을 들어 조금 짚더니 초간장에 찍은 다음 맛을 보았다.

“이 술도 새로운 맛이 조금 나는 정도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아닌가? 몸종은 낙담했다.

“산골마을이라 술이 너무 형편없나 봐요. 제가 성에 나가서 좋은 거로 구해 올게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내 입맛엔, 최고의 술도, 별다를 게 없구나.”

“그 어르신이요? 그냥 평범해 보였는데 최고의 술을 가져오셨단 말이에요?”

몸종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근심 걱정이 없어야 음식을 따지는 법이야. 맛좋은 음식을 위해 공들여 고른 식재료를 들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걸 봐. 보통 사람이 그럴 수 있겠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예전엔 부엌에서 밥 한 그릇만 얻어도 기뻐 어쩔 줄 몰랐으니 맛이 있고 없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씨를 모시고 난 후에야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음식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해 뭣하겠는가.

“그럼 아씨도 근심 걱정이 없는 분이겠네요.”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걸이 책상에 기대 문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있었다. 예전엔 애지중지 자라 사치스럽게 살았던 사람이었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입맛이 까다롭겠지. 그렇다고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인 건 아냐.

흐릿하고 아득한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이 어지러이 겹쳐졌다. 가까이 다가가 확실하게 보려고 할 때면 두 눈이 따갑고 쓰렸다. 그녀는 자신이 정교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누구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정교랑은 눈을 감았다.

“가서 그 어르신을 만나. 품위가 있는 분이니 같이 맞춰 드려.”

몸종은 아씨의 메마른 목소리 속에서 뜻밖에도 쓸쓸함이 묻어나자 내심 놀랐지만, 더 이상 물을 수 없어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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