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속이다-
반근이 자리를 뜬 후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힘없는 여자아이를 이 캄캄한 밤에 색마가 있는 걸 뻔히 아는 관주의 거처로 보냈으니 얼마나 대담한 일인가. 상식적으로 정씨 가문의 지위를 생각해 보면 두 연놈이 경거망동은 못 할 것이나 세상에서는 상식 밖의 일도 수없이 벌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긴박하지 않았다면, 정교랑 역시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진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마저 잦아든 듯했다. 몸종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받아들고 고개를 젖혀가며 술을 마셨다. 방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생은 착하네, 정말 착해.”
관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사내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하고 웃으며 말했다.
“용서해 줘서 고맙소, 낭자. 정말 고마워.”
“이만 갈게요.”
술잔을 내려놓은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후 일어나 가려고 하자, 사내는 초조한 기색으로 관주에게 다급하게 눈짓을 했다. 모처럼 이 시간에 이 낭자를 만났고 간신히 구슬려 마음을 돌려놨는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동생.”
관주가 손을 뻗으며 몸종을 붙잡자 몸종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어머, 뭐야. 추워?”
몸종의 격한 반응에 도리어 관주가 놀라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무지 더운데.”
“밤엔 좀 쌀쌀하지. 낭자는 얇게 입어서 좀 추울 거야.”
사내가 옆에서 얼른 말을 거들며 자리로 와서 술을 한 잔 따랐다.
“얼른 앉아. 술 더 마시면 따뜻해질 거야.”
사내는 다정하게 술을 권했다. 저 굶주린 꼴 하고는. 관주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이 계집을 걷어차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는 수 없이 몸종의 팔을 잡아당겼다. 몸종은 안색까지 새하얗게 질렸다.
“그게, 돌아가 봐야 해요.”
“돌아가긴 뭘 돌아가. 아직 시간도 이른데.”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 말을 해야 할까? 지금 해도 될까? 몸종은 저도 모르게 문밖을 내다봤다.
“비가 올 것 같아서 아씨한테 가 봐야 해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관주와 사내는 멈칫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비가 와, 하늘도 이렇게……·.”
사내의 웃음소리가 채 그치기도 전에 갑자기 번개가 번쩍 밤하늘을 가르더니 우르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천둥이 쳤다. 방 안에 있던 두 여인은 놀라 비명을 질렀고 사내 역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소리가 귀에 울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을 무렵 천둥과 번개는 벌써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후였다.
“우리 아씨는 천둥을 제일 무서워하세요. 얼른 가 봐야 해요.”
몸종은 소리치다시피 말하고는 관주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관주 역시 아이들에게 밖에 널어놓은 것들을 거둬들이라고 소리치기에 바빴다. 벌써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달려 돌아온 몸종은 심장이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 숨을 돌리다가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을 발견했다.
“아씨.”
몸종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달려갔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비가 왔어! 정말로 비가 왔다고! 세상에, 아니, 우리 아씨는, 비바람도 부릴 줄 아는 거야?
정교랑은 손을 뻗으며 몸종을 막았다.
“아직 안 끝났어.”
몸종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이 손에 든 물건을 건넸다. 종이 연이었다.
“아씨?”
몸종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이어지며 빗줄기도 점점 거세지는 때였다.
“날 부축해 그쪽으로 가자.”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숨이 턱 막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씨, 안 돼요.”
몸종이 정교랑의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나마 몸놀림이라도 자유로운 자신은 어떻게든 빠져나오겠지만 아씨는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지 않은가.
“날 데려다준 다음 넌 핑계를 둘러대고 빠져나와.”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말문이 턱 막혔다.
“긴말하지 마, 시간이 없어. 곧 바람이 불 거야. 지금은, 내 말대로 해. 넌 생각할 필요 없고 묻지도 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기억했다가 그대로만 하면 돼. 말이든 행동이든 그 어떤 단계에서도 착오가 있어선 안 돼.”
정교랑은 몸종에게 울 기회를 주지 않은 채 팔을 붙잡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우린 다 죽는 거야.”
몸종은 입을 악물고 몸을 떨며 정교랑을 바라봤다.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해 관주의 마당으로 들어섰을 무렵, 바람은 더욱 거세고 천둥 역시 더욱 자주 쳤다.
“관주님, 저희 아씨께서 천둥 번개를 겁내세요. 번개가 너무 무섭게 치네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방 안에 있던 관주와 사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둘은 도로 돌아온 몸종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특히 그 바보까지 데려왔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방 안에 엉거주춤 서 있는 교랑의 모습이 바깥의 번갯불에 언뜻언뜻 보이며 더욱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산에선 이맘때면 늘 저래. 겁낼 거 없어. 금방 잦아들 거니까.”
정신을 차린 관주가 정교랑과 몸종에게 얼른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정교랑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자기도 따라 앉으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얼른 입을 열었다.
“이런, 창문이랑 문을 안 닫고 왔네.”
몸종은 후다닥 뛰어나갔다. 관주는 아이들에게 시키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몸종은 미처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달아나 버렸다. 일어나려는 관주를 사내가 붙잡았다.
“오늘 밤엔 당신이 저 애 잘 지켜.”
사내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긴 했지만 들어도 그만이라는 투였다. 바보인데 들으면 뭐 어때. 멈칫한 관주의 시선이 사내의 눈길을 따라갔다. 사내의 욕정 넘치는 시선은 방 안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바보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
관주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떴다.
“지금은 안 된다고 했잖아.”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도 가만있으면 내가 그러고도 사내야?”
사내는 언짢은 듯 대꾸하고는 관주를 손으로 밀어제쳤다.
“이 비바람은 하늘이 내려 주신 복이야. 이걸 거절했다간 벼락을 맞지.”
몸을 일으킨 사내가 정교랑 쪽으로 왔다. 정교랑이 따라서 벌떡 일어서자 사내는 놀라 걸음을 멈췄다. 관주와 사내는 그 바보가 창가로 걸어가는 모습을 어리둥절한 채로 쳐다봤다. 바보가 손을 뻗어 창문을 열자 광풍과 함께 비가 안으로 들이치며 침상의 휘장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어머, 창문 열면 안 돼요.”
관주가 다급히 소리쳤다.
“재미있어.”
정교랑은 뒤돌아 관주를 보며 생긋 웃었다. 등불에 비친 그 웃음에 사내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얼른 창문을 닫으러 가려는 관주를 잽싸게 붙잡아 막았다.
“그래요, 재미있으면 놀아야지.”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관주를 밀쳐내는 한편, 입맛을 다시며 정교랑 옆으로 가더니 그 옆에 있는 창문까지 열어젖혔다. 정교랑이 또다시 웃었다.
“재미있다.”
정교랑의 말에 사내는 몹시 기뻐했다.
“그럼, 내가 아씨랑 같이 놀아드릴까?”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은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문 쪽으로 가서 문도 활짝 열어젖혔다. 더욱 거세진 비에 바닥이 순식간에 물로 흥건해졌다. 관주는 열이 받아 이를 악물었다.
“장난 좀 그만 쳐. 밖에 비 오잖아. 여기서 어떻게 자라고.”
사내는 정교랑의 손을 잡아 보려고 몸에 힘을 줬다.
“누가 여기서 자래, 얼른 나가서 그 계집이나 잘 달래.”
사내는 답답하다는 투로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의 눈은 정교랑의 가슴께를 향하고 있었다. 바보라도 자랄 건 다 자랐네.
여인은 이 사내를 걷어차 버리고 싶은 마음에 달려들다가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탁, 탁, 소리가 두 번 나더니 광풍에 따라 흔들리는 거친 밧줄 두 개가 창문과 문을 때리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바람이 많이 부네. 지붕 고칠 때 쓰는 밧줄까지 바람에 내려왔어.”
관주에 말에 사내도 고개를 돌려 밖을 봤다. 밧줄 두 개가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가 싶더니 한 줄은 창문을 넘어 방 안까지 들어왔다. 정교랑이 밖으로 나갔다.
“어이, 어이.”
퍼뜩 정신을 차린 사내가 급히 소리쳤다.
“나가지 마요, 비 오고 천둥 치잖아.”
정교랑은 벌써 마당으로 몇 걸음 내디딘 후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 보니 정교랑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거센 빗줄기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씨!”
빗속에서 몸종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서 들어와요.”
관주의 목소리도 들렸다. 관주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몸종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자 얼른 소리쳤다.
“둘 다 빨리 들어와. 이렇게 비 오고 천둥도 치는데 밖에 있으면 안 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방을 뒤흔들 정도로 큰 천둥소리가 들렸다. 바닥도 흔들리고 관주의 몸도 부르르 떨렸다.
몸이 떨렸다?
이어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여인의 눈에 창가 쪽 바닥에서 불덩이가 치솟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게 뭐야?”
관주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아씨를 데려오고자 밖으로 나가려던 사내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시간, 산 아래의 대현묘관에서도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부님, 사부님. 저기 좀 보세요. 소현묘관이 벼락에 맞았어요!”
비 내리는 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듯한 벼락이 산 중턱에 내리꽂히며 소현묘관의 지붕을 쩍 갈랐다. 굉음과 함께 불덩이가 치솟더니 퍽 퍽 소리가 두 번 연달아 들렸다.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이미 온몸이 까맣게 탄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도관 지붕으로 화염이 치솟더니 맹렬하게 타올랐다. 지붕 위에 꽂힌 쇠막대에 묶여 이리저리 휘날리던 종이 연도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채 아래로 떨어져 불타는 방과 하나가 됐다.
천둥과 번개는 이어졌지만 최고조에 달했던 아까에 비하면 한결 잠잠해진 상태였다. 관주의 방은 벌써 반쯤 불타 있었지만 내리는 비에 차츰 불길이 잡혔다. 불빛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형체들을 비췄다.
넷이었다.
두 아이는 불길이 치솟음과 동시에 부엌에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불안에 떨던 두 아이와 달려오던 몸종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앉으라고 소리치는 정교랑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산에 내리는 폭풍우는 빠르게 왔다가 빠르게 물러갔다. 천둥소리가 좀 더 잠잠해지자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비를 워낙 많이 맞은 탓에 일어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반근.”
정교랑이 힘없이 말했다.
“이제 됐어.”
몸종은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불탄 방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이자 몸종은 기다시피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몸종은 사다리에서 내려와 곧장 달려오다가 마당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정교랑의 외침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얼마나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던가. 자신은 마당 문가에 쭈그려 앉았는데도 무언가 이상한 물체가 몸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더 가까운 곳에 있었던 정교랑은 오죽했을까.
“아씨, 괜찮으세요?”
몸종이 울며 소리쳤다.
“괜찮아.”
정교랑은 몸종을 붙잡으며 힘없이 대답하고는 몸종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몸종은 지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몸이 덜덜 떨렸다.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한다기보다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두 걸음쯤 내디뎠을 때 산문 밖에서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끄러 왔어요. 안에 계세요? 무사한 거예요?”
여인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문밖에서 전해졌다. 문 안에서는 불타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 다 타 죽은 거 아닐까요?”
도롱이에 삿갓을 쓴 여도사들이 대야며 나무통, 빗자루 등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관주는 산문에 이어 문 안쪽으로 보이는 화염과 연기를 차례로 바라봤다. 소현묘관 관주의 행실이 바르지 않다고는 하나 세상 만물엔 생명이 있는 법인데 어려움에 처한 걸 뻔히 알고도 돕지 않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문을 부숴라.”
관주의 말에 여도사들은 일제히 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내가 구령을 붙일게.”
관주가 옆에 서서 말했다.
“하나, 둘, 셋.”
여도사들은 문에 몸을 부딪칠 태세를 취하고 얍 기합을 넣었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여도사들의 기합 소리가 놀라움으로 바뀌면서 여도사들은 문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인지 문을 연 아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어! 그 여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이제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여인이 죽어 버리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이는 점점 더 큰 소리로 웃더니 급기야 배를 잡고 쪼그려 앉아 웃어댔다. 이리저리 포개진 채 비를 맞고 있던 여도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도관이 벼락을 맞아 불탔는데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너무 놀라서 정신이 나갔나?
몸종은 얇은 이불로 정교랑을 꽁꽁 싸매 주고 곧 뜨거운 생강탕을 내왔다. 두 사람 모두 천천히 몇 모금 마신 후에야 안색이 돌아왔다.
“아씨, 이따가 뜨거운 물을 끓여서 더 우릴게요.”
놀란 탓인지 추운 탓인지 알 수 없지만 몸종은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몸종이 얼른 일어나 밖을 내다보자,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여도사가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시주님.”
관주가 예를 표하자 몸종도 얼른 답례를 했다.
“정 관주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불길은 잡혔고요. 저기, 그 정 관주 외에, 그러니까, 다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여도사가 오밤중에 사내와 함께 죽어 있었다는 말은 도무지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어쩌면 좋을까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서 이불을 싸매고 멍하니 있는 소녀와 넋이 나간 채 떨고 있는 이 어린 몸종을 보고 있노라니 관주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럼 정씨 댁 노야께서 처리하게 하죠.”
몸종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은 듯 아, 아, 소리를 내더니 정교랑을 돌아봤다. 아씨는 너무 지치셨어. 돌아온 후 지금껏 한마디도 안 하셨잖아. 관주의 말대로 해도 될까?
정교랑이 관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도사님.”
문밖에 있던 관주는 내심 놀랐다. 이곳 소현묘관에 정씨 가문 바보가 산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바보가 말도 할 줄 알았다니. 게다가 목소리에서도 바보스러운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관주가 얼른 예를 표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도사님께서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관주는 멈칫했다.
“네. 염려 마세요, 아씨. 제가 정씨 가문에 알려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벼락이 내리치는 걸 봤으면 정씨 가문에 알리는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자신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소현묘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그 안에서 사내가 죽은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는 뜻이었다. 정씨 가문의 체면과 명성을 지켜 주겠다는 의도였다.
“아닙니다. 관주님께서는 본 대로 말씀하세요. 관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잘 알지만 굳이 숨기실 것 없어요.”
관주는 정교랑을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보? 바보랬는데?
“도사님, 소현묘관이 갑자기 벼락을 맞아 불에 탔으니 아무래도 대현묘관에서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이 낭자가 바보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관주 본인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자 관주는 흥분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관주는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아씨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간밤에 산에서는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지만 성 안은 비가 그 정도로 오지는 않았다. 폭우가 내리긴 했지만 금세 물러갔고 강주성의 새벽은 여느 때처럼 활기찬 모습이었다. 말 몇 마리가 시장을 가로질러 질주하여 평화롭던 거리를 소란스럽게 만들면서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대노야는 객청에서 한참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집사가 문밖에서 허둥지둥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떠하더냐?”
대노야가 다급히 묻자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대노야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가문에 먹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가문의 불행이로다!”
대노야는 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대부인은 몸종을 물린 후 직접 차를 올렸다.
“아무도 모르니 별일 없을 거예요.”
대부인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못 참겠는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랬대요?”
대노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봤더니 근방 마을에 사는 사내였소. 그 집 여인이 남편을 찾고 있다더군. 집사가 은자를 쥐여주면서 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했지. 아직 애도 없겠다, 싱글벙글하며 돈을 받고는 논밭을 팔아 개가했다고 하오.”
대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를 수 있으면 최대한 누르는 게 좋죠.”
대부인은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
“이번에 손 관주한테 큰 신세를 졌네요.”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아직 거기 있는데 이런 일이 났으니, 나 원. 데려와야 하나?”
대노야의 물음에 대부인은 침묵을 지켰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도리상 데려오는 게 마땅하지만……·.
현묘관 여도사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집 안에 금세 퍼졌다. 정육랑도 사건의 경위를 알 정도였다.
“세상에, 잘 있다가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어?”
정칠랑은 고개를 돌려 밖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중을 드는 유모를 부채로 가리키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멈이 그랬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요괴 같은 놈들이 벼락을 맞는 거라고. 세상에, 그럼 그 관주가 산에 사는 불여우고 요괴인가?”
하여간 아직 애라니까. 방에 있는 자매들은 할 말을 잃은 눈빛으로 정칠랑을 쳐다봤다.
“산에선 원래 뇌우가 자주 내려. 그래서 산불도 자주 나잖아. 흔한 일이야.”
정육랑이 말했다.
“그럼 왜 예전엔 벼락도 안 맞고 잘 지내다가, 바보가 가니까 벼락을 맞아?”
정칠랑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더니 돌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뭔가 알아낸 듯 부채를 마구 흔들었다.
“아, 아, 아, 바보네. 그 바보야. 틀림없이 그 바보가 화를 불러들인 거야!”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도 의론이 분분했다.
“그 바보 때문이야.”
“하여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다 운수가 사나웠어. 걔가 집에 들어온 후부터 따져 봐. 재수 없는 일을 당한 사람이 몇이나 되나.”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고, 당씨네 일가와 소국네 가족이 모조리 쫓겨난 것도 바보 때문이었어. 셈해 보니 벌써 10명은 족히 되네.”
“그 도관으로 간 지 며칠 만에 멀쩡히 잘 지내던 관주가 벼락에 맞아 죽다니, 쯧쯧쯧.”
조잘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오자 길을 안내하던 여종은 정색하고 발을 구르며 헛기침을 하여 웃음소리를 쫓았다.
“도사님, 이쪽이에요.”
여종은 뒤에 있는 여도사를 향해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손 관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방금 들은 여종들의 수다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 바보 때문에 벌써 몇 사람이나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단 말이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집안의 안주인과 시중을 들던 여종과 몸종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그 바보의 심기를 건드렸겠지.
순간 손 관주는 오싹했다. 그 바보의 심기를 건드려? 그래서 그 여인이, 재수 없게 벼락을 맞아 죽었다?
“도사님.”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손 관주는 자신을 부르는 여종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 관주는 자신이 벌써 대부인의 방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얼른 예를 표했다.
“관주한테 큰 신세를 졌네요.”
대부인은 일어나라는 손짓과 함께 웃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손 관주는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우리 집 도관이라고는 하나 그곳을 관리하는 문제는 수행하는 분들이 더 잘 알겠지요. 노야와 나는 그 도관을 손 관주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대부인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며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 짐작은 했지만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확인하니 손 관주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두 분의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손 관주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 세상엔 생각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 요원해 보이던 일이 눈 깜짝할 새에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손 관주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산에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여기까진 흔한 일이다. 매년 이맘때면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올해는 하룻밤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현묘관이 벼락을 맞았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사람을 구하고 불을 끄러 갔다. 그러다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빗속에서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여인을 봤고. 그 여인은 자신에게 이제 소현묘관은 대현묘관에서 맡아 줘야겠다고 했다.
그 여인! 손 관주는 오싹한 듯 또다시 몸을 떨었다.
“부인께 말씀드릴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하시지요.”
“소현묘관에서 지내던 아씨께서 많이 놀라신 듯한데 제가 의술을 좀 압니다. 제가 보살펴 드리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행을 도우면 건강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부인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건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보살이 아닌가. 대부인은 환하게 웃었다. 나무아미타불, 그 바보가 집에 없으니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구나.
대부인은 곧장 대노야한테 알리는 한편 이노야 내외를 불러 관주의 제안을 전했다.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손 관주는 진정한 수도자군. 진중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손 관주에게 맡기도록 하자.”
대노야의 말에 이노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도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도관에서 지내면 좋죠.”
“소현묘관의 화재 피해가 심각하다고 하니 수리하도록 돈을 내주시오.”
대노야는 대부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일을 누구한테 맡길지, 어떻게 수리할지는 전부 손 관주 재량으로 맡기고.”
인부를 부르고 수리를 하다 보면 떡고물도 생기는 법이다. 이번에 손 관주에게 크게 신세를 지기도 했고, 사정을 알고 그 바보를 자발적으로 맡아 주겠다고 나섰으니 대노야로서도 보답을 해야 했다. 그 점엔 다들 이견이 없었다. 대부인은 손 관주에게 알리러 가고 대노야 역시 집사를 시켜 돈을 준비하게 했다. 이노야 내외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요.”
이부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긴 뭐가?”
이노야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요즘 이노야는 임명을 못 받고 있는 상태였다. 물어보면 윤허한다고 했지만 직첩을 받기 전까지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병주의 그 도관도 벼락을 맞더니 이번에 간 도관이 또 벼락을 맞았잖아요. 정말 뭔가 있는……·.”
이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소!”
이노야가 언짢은 듯 말을 끊었다.
“멀쩡하던 당신까지 무지한 아랫것들이 떠드는 말을 믿다니!”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먼저 가 버리자 이부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뒤따라갔다.
* * *
정교랑을 부축해 내려온 몸종은 산 아래의 대현묘관으로 갔다. 손 관주는 직접 길을 인도했다. 사전에 관주의 명을 받은 여도사들은 방에 숨어 있었지만 어린 여도사 몇 명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창가에 기대 창틈으로 밖을 바라봤다.
“진짜 그 낭자네! 산에서 봤던 그 두 낭자야.”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씨 가문 사람이었구나.”
“저 낭자가 진짜 바보였네.”
“너희는 늦게 들어와서 모르겠지만 난 정씨 가문의 예전 주씨 부인을 알아. 소현묘관에 종종 올라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여기도 들어와서 절을 올렸거든. 저 아이의 복을 빌기 위해서였지. 매번 안에서 한참을 울다 나오는 게 어찌나 가엾던지.”
여도사들은 너울을 쓰고 가리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소곤거렸다. 물론 그 시선이 최종적으로 머무는 곳은 옆에 있는 그 몸종이었다.
“저 아이는 심성이 곱네.”
“심성이 곱지 않으면 저 바보의 시중을 들러 오지도 않았겠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싫다고 난리였을걸.”
“맞아, 정색하고 쌀쌀맞게 굴었을 텐데 엄청 살뜰하게 보살피잖아. 저 바보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어.”
손 관주는 부들방석을 손수 꺼내 자리를 만들어 주고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해 천천히 앉혀 주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야 자신도 옆에 꿇어앉았다.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정씨 가문에서도 아씨를 잠시 이곳에 머물게 하라고 하셨고요.”
손 관주는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감사드립니다, 아씨.”
그 흥분은 정씨 가문 집사가 준 은표를 받아 들었을 때부터 쭉 존재한 것이었다. 정씨 가문에서 소현묘관 수리를 자신에게 맡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실로 뜻밖의 기쁨이었다. 소현묘관을 수리하고도 넉넉히 남을 만한 돈이었다. 시줏돈이 별로 안 들어오는 도관의 관주로서 늘 돈이 궁했는데 이 돈이면 한동안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 더는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낡고 해진 도복도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시작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첫걸음은 이미 내디뎠다. 어쨌거나 소현묘관은 정씨 가문의 가산인데 그 정씨 가문과 신세를 지고 은혜를 갚는 일이 있었다. 오고 가는 게 있으면 정도 쌓이는 법이니 앞으로 왕래가 잦을 것이다. 정씨 가문과 튼튼한 인연을 맺었으니 앞으로 도관을 찾는 이들도 자연히 늘어날 터였다.
물론 거기까지는 손 관주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건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생각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는데 이 낭자는 자신의 생각은 물론이고 뭘 말할 건지도 훤히 아는 듯했다. 손 관주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낭자를 바라봤다.
정교랑은 이미 너울을 벗은 후라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손 관주가 정교랑의 생김새를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지난번엔 밤이기도 했고 워낙 경황이 없어 제대로 못 봤기 때문이다.
손 관주는 아직 정씨 가문의 주씨 부인을 기억했다. 지금 보니 확실히 어머니를 많이 닮긴 했네. 아버지의 모습도 보이고. 너울을 벗자 머리칼 사이로 까만 눈썹이 드러났다. 버들잎처럼 가늘고 칼처럼 긴 눈썹은 커다란 눈과 잘 어울렸지만 안타깝게도 흰자위에 비해 검은 눈동자가 작다 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어 오래 보긴 힘들었다. 손 관주는 고개를 숙였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씨.”
손 관주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관주님은 자비로운 분이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폭우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까지 내리치는 요란한 날씨에 명성도 형편없는 소현묘관을 위해 위험을 무릅써 가며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온 걸 보면 손 관주는 확실히 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더 겸양을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손 관주는 감사를 표했다.
“일단 여기 머물다가 저쪽 수리가 끝나면 그때 옮겨 가세요.”
손 관주는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누추한 곳이라 아씨께서 많이 불편하시겠네요.”
정교랑은 말없이 답례만 표했다. 손 관주가 밖으로 나오자 일찌감치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시름 놓은 듯한 사부의 얼굴을 봤다.
“관주님, 그 바보 무서워 보여요?”
나이가 가장 어린 제자가 나서서 물었다. 울고 때리고 떼를 써서, 달래도 안 되고 타일러도 안 듣고 말도 안 통하는 그런 거? 그 바보는 말이지, 관주는 고개를 돌려 안을 힐끔 쳐다봤다. 나이도 어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데도 그녀에게는 감히 말을 붙이기도, 오래 쳐다보기도 힘든 그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손 관주는 이번 일이 저 바보와 관련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벼락불을 인력으로 조종할 수가 있나?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데? 신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생각은 손 관주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정말 무서워.”
손 관주가 중얼거렸다.
하늘빛이 차츰 밝아질 무렵, 이노야는 벌써 한참을 골목에 서 있었다. 뒤에 있는 어린 시종 둘은 예물이 가득 찬 함을 들고 있었는데 서 있느라 다리가 저릿저릿한 눈치였다. 문을 두드리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문을 두드려도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 이노야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인근의 평범한 민가와 다를 바 없는 저택이었으나 이 자사(刺史) 나리마저도 깍듯이 예를 갖춰야 하는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이노야의 스승인 장순의 고택이었다. 그냥 고택이었으면 별 신경을 안 썼겠지만 지금은 이 안에 노인이 살고 있었다. 장순의 노부가 경성에서 돌아온 것은 한 달 전쯤의 일인데, 고향 생각이 나서 한동안 옛집에 머물까 하여 특별히 찾아왔다고 했다.
해가 반짝 뜨자 이노야는 시종을 시켜 다시금 문을 두드리게 했다. 이번에는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세요, 이렇게 일찍?”
낡고 오래된 문이 열리더니 앞도 잘 안 보이고 거동도 불편해 보이는 늙은 하인이 나왔다. 일찍이라니! 벌써 해가 중천인데. 하지만 이노야는 웃으며 예를 표했다.
“정동이오. 선생의 제자였지. 선생의 부친께서 오셨다기에 인사차 왔소이다.”
장순은 강주와 위주에서 학당을 열고 수십 년 동안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지금은 경성으로 불려가 태학에서 수업을 하고 있어 제자가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지금은 고택을 비운 지 오래고 집안 식솔들 역시 대부분 경성으로 옮겨 갔지만 여전히 매년 수많은 학생이 이 고택을 찾아오고는 했다. 공부하러 오는 이도 있었고 지나가다가 들르는 이도 많았다.
특히 장순의 노부가 돌아온 후로는 찾는 이가 전보다 한층 많아졌다. 장순의 노부가 성가심을 견디지 못하고 버럭 성질을 내지 않았다면 아마 그 열기는 지금까지도 계속됐을 것이다.
늙은 하인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눈치로 대답했다.
“저런, 노선생께서는 아침 일찍 출타하셨습니다.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일찍! 이노야는 놀랐다.
같은 시각. 정교랑은 아침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종이 찬합을 들고 왔다. 흰죽과 밑반찬 외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찐 등자가 있었다. 덮개를 열자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몸종이 수저를 들고 그 안에서 누런 게알을 조심스레 꺼내 정교랑에게 올렸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더니 초간장에 살짝 찍어 한입 먹고는 내려놓았다.
“아씨, 뭐가 잘못됐어요?”
몸종이 당황하여 물었다.
“등자가 푹 익지 않았고 게알도 충분하지 않아. 술도 좋은 술이 아니고. 제대로 된 맛이 아니라 목에서 안 넘어가네.”
몸종의 표정을 본 정교랑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솜씨 좋은 숙수라도 쌀이 없으면 밥을 못 짓지. 네 잘못이 아니야.”
몸종은 한결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제가 성에 가서 좋은 재료로 골라 올게요. 집에서 보내는 거로는 안 되겠어요.”
정교랑은 수고스럽게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대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재료로 다시 만들어 봐. 재료가 별로면 공들일 필요도 없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정교랑이 흰죽과 밑반찬을 천천히 다 먹도록 기다렸다가 찬합을 정리했다. 식사를 마친 정교랑은 책을 집어 들고 전에 읽던 부분을 이어서 읽었다. 집에서 챙겨온 <대주번성록> 한 쪽을 드디어 다 읽었다.
몸종은 일어나서 휘장을 걷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봤다. 여느 때처럼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날 밤 일은 일어난 적도 없었다는 듯이, 두 사람이 죽임을 당한 일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사람이 죽었어. 죽었다고, 사람이 죽었단 말이다. 그것도 둘씩이나.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다니. 몸종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씨.”
결국 몸종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응 하고 대답했지만 몸종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늘이 만든 화는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초래한 화는 피할 수 없는 법이지.”
정교랑은 책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내버려 두면 하늘이 거두는 수밖에. 그 여인은 스스로 초래한 화로 벼락을 맞은 거야. 하늘이 목숨을 거둔 셈이지. 명심해.”
몸종은 얼른 돌아서서 무릎을 꿇었다.
“네, 소인 명심할게요. 아니, 소인 잘 알겠습니다.”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몸종은 이제 알았다. 사람을 죽일 때 굳이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하늘도 마음대로 부리는 방법이 있었다.
몸종은 시종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붕에 쇠막대를 꽂고 종이 연을 걸어 두며 밧줄을 내려뜨렸다고 해서 어떻게 벼락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건지. 또 몸종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비가 오고 번개가 칠 거라는 걸 아씨는 어떻게 미리 알았던 건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는 확실하니까. 무조건 아씨의 말만 들으면 된다.
찬합을 들고 밖으로 나오던 몸종은 물을 길어오던 여도사 둘과 마주쳤다.
“반근 언니.”
여도사들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이 낭자로 말할 것 같으면 전에 사람 목숨을 구한 선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며칠 같이 지내며 지켜보니 과연 붙임성이 좋고 마음씨도 착한 낭자였다. 도관 사람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모두 그 몸종을 좋아했다. 몸종은 두 여도사를 향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정교랑과 몸종은 여전히 부엌을 단독으로 쓰며 밥을 따로 해 먹었기에 몸종은 여도사들이 길어온 약수를 물독에 넣을 수 있도록 안내해 줬다. 부엌에 퍼져 있는 맛있는 냄새에 여도사는 궁금증이 일었다.
“와, 맛있는 냄새.”
그 여도사는 참지 못하고 킁킁 코를 벌름거렸다. 몸종이 아, 하더니 찬합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간식인데 가져가서 먹어요.”
두 도사는 놀라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씨 드리세요.”
“아씨께서 안 좋아하세요. 많이 만들었는데 그냥 두면 아깝잖아요.”
몸종이 말했다. 이렇게 냄새가 좋은데 안 좋아한다고? 역시 바보라 입맛도 보통 사람과 다른 모양이네. 몸종의 말도 있고 냄새가 워낙 좋아 두 여도사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찬합을 받았다.
* * *
노인은 상쾌한 기분으로 산에서 걸음을 내디뎠다. 뒤에는 지난번에 따라왔던 노복 외에 어린 시종이 하나 더 있었다.
“노야, 돌아갈 수 있으시겠어요?”
노복이 물었다.
“의원이 별일 없을 거라고 했으니 별일 없겠지. 이번엔 나오기 전에 밥을 든든히 먹었으니 별일 없을 게다.”
노인은 웃으며 말했지만 노복은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많이 안 드셨잖습니까.”
노인은 허허 웃으며 못 들은 척 넘기고 손을 뻗어 산허리를 가리켰다.
“며칠 사이에 산림까지 변했구나. 지난번 왔을 땐 저 도관이 수리를 하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노인이 화제를 돌렸다.
“저 도관이 벼락을 맞았거든요.”
시종은 신이 난 투로 말했다.
“그 관주는 불여우가 둔갑한 거라 벼락을 불러들였대요. 그날 벼락이 무시무시했다고 그러더라고요. 뇌공(雷公: 천둥을 맡고 있다는 신) 나리를 직접 봤다는 사람도 있어요.”
하여간 민간에 도는 말은 늘 이렇게 과장이 섞여 있는 법이다. 노인은 껄껄 웃고 나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현묘관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현묘관을 보자 그날 먹은 사탕 귤이 떠오르며 입가에 신맛이 돌았다. 집으로 돌아간 후 부엌 찬모에게 똑같이 만들어 보라고 했지만 딱히 별다를 게 없어 보이던 사탕 귤인데 좀처럼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아파서 더 맛있게 먹었던 것인지 그 간식에 따로 비법이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기왕 왔으니 저기 가서 물 한 사발 얻어 마셔야겠다.”
노인은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며 말했다. 노인이 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비질을 하고 있던 도동이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배고파서 병이 났던 어르신이네요.”
도동이 버릇도 없이 불쑥 말해 버리자 옆에 있던 여도사가 얼른 손을 뻗어 제지하며 앞으로 나가 노인을 맞이했다.
“시주님.”
여도사는 예를 표했다. 노인 역시 도동의 말을 들었지만 그저 씩 웃어 넘길 뿐이었다.
“이번엔 배가 고파서 온 게 아니고 물이나 한 사발 얻어 마실까 해서 왔소.”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도동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빗자루를 내던지고 노인이 앉도록 얼른 자리를 깔아 준 다음 물을 뜨러 갔다.
“사매, 내가 무슨 좋은 걸 가져왔나 좀 봐.”
여도사 둘이 찬합을 들고 뒤쪽에서 웃으며 걸어 나오다가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고 역시 엇, 하며 놀랬다.
“어르신, 오셨네요. 마침 잘 오셨어요.”
그중 한 여도사가 얼른 인사했다.
“지난번에 산에서 만난 낭자가 여기 있거든요.”
노인과 노복은 깜짝 놀랐다.
“아, 그렇다면 잘됐군.”
노인은 얼른 일어서려고 하다가 그 낭자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도로 앉았다.
“수고스럽겠지만 한번 볼 수 있겠냐고 도사님께서 물어봐 주시오.”
여도사는 네 하고 뒤쪽으로 갔다. 곧이어 도동이 물을 떠왔다. 물을 받아 마시려던 노인은 문득 맛있는 냄새가 훅 끼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눈길은 여도사의 손에 들린 찬합에서 멈추었다. 막 뚜껑을 열어 사매에게 보여 주려던 참이었다.
“도사님, 그게 뭐요?”
노인의 물음에 여도사는 웃으며 찬합 안에서 둥그런 등자 하나를 꺼냈다.
“등자네요.”
여도사는 잘라 놨던 등자 껍질을 도로 덮어 만든 뚜껑을 열며 말했다.
“안에는 고기가 들어 있고요.”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배고픔이 엄습했다. 여도사는 노인의 상태를 알아보고 웃으며 하나를 올렸다.
“드셔 보세요. 이게 무슨 고기죠?”
노인은 등자를 받아 쓱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해황(蟹黃: 게의 배속에 들어 있는 누런 알)이로군.”
게살을 이렇게 조리하다니 기발하군. 노인은 젓가락을 들어 한입 먹고는 환하게 웃었다.
“훌륭하구려, 훌륭해.”
노인은 훌륭하다는 말만 남기고는 더 이상 말할 새도 없이 등자를 먹어 치웠다. 멈칫하던 노복과 시종은 곧 크게 기뻐했다.
“정말 잘됐네요. 노야께서 드디어 입맛이 도시나 봐요!”
시종이 말했다. 여도사 셋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 어르신한테 또 배고픈 병이 도졌군. 배고파서 병이 난 게 틀림없어. 여도사들은 탁자 위에 놓인 속이 텅 빈 등자 세 개와 손수건을 받아 입을 닦고 있는 노인을 연달아 봤다.
“여기에 흰죽 한 그릇을 같이 먹으면 더 좋겠는데.”
노인은 더 먹고 싶은데 아쉬운 듯 말했지만 도관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차밖에 없는데 드시겠어요?”
여도사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그럼 모처럼 먹은 진미의 맛이 희석될 거요.”
해황 등자 세 개로 배를 채운 노인은 기운이 나는 듯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이거면 됐소. 어서 집에 가서 흰쌀을 끓여야겠군. 진하게 끓여서 채소 무침이랑 한 그릇 해야겠소.”
노인이 한시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 서두르자 노복과 시종은 얼른 길을 안내했다. 한동안 식욕을 잃었던 노인에게 이렇듯 간절한 밥생각이 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여도사가 뒤쪽에서 급히 달려왔다.
“시주님, 이걸 어쩌죠. 그 낭자가 나가셨네요.”
여도사가 미안한 듯 말했다. 노인은 아차 한 듯 손으로 머리를 치며 자신이 왜 거기 앉아 있었는지 그제야 떠올렸다.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해황 등자 세 개에 까맣게 잊었구나. 나갔다고? 떠났단 말이지?
“공교롭게 됐구려.”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 낭자는 어느 댁 분이오?”
여도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실 어느 댁 낭자라고 하긴 좀 그래요.”
도동의 대답에 노인은 이해할 수 없는 듯 음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어느 댁 부인이신가?”
산촌에 사는 아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알면 말해 주시오. 그래야 사람을 보내 사례라도 하지. 의원 말로는 그날 제때 구했으니 망정이지, 늙은이라 한참을 병석에 누워 있을 뻔했다고 했소.”
그 사탕 귤의 효능이 그리 뛰어났단 말이야? 여도사들은 놀랐다. 그 몸종이 마음씨만 착한 게 아니라 손재주도 좋네.
“실은 낭자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몸종이에요.”
여도사의 대답에 노인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느 집 몸종인데 그리 영특한 거요?”
“북정 사람입니다. 이름은 반근이고요.”
노인이 호기심에 묻자 여도사가 대답했다. 노인은 또다시 아, 소리를 내고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 얼른 가시죠. 어느 댁 낭자인지 알았으니 사례하기도 쉽잖습니까.”
노복이 재촉했다. 모처럼 노인의 식욕이 돌아왔는데 지체할 순 없었다. 그러다가 먹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노인은 껄껄 웃으며 여도사들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여도사 셋은 마차를 타고 떠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기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기개가 범상치 않은 분 같아. 정말 정씨 가문에 사례하러 가면 그 댁에서도 반근 언니의 능력을 높이 살 테니 평생 바보의 시중을 들 일도 없겠네.”
한 여도사의 말에 나머지 두 여도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개가 범상치 않다고요? 엄청 가난한 분 아니에요? 매번 올 때마다 저렇게 굶주려 있잖아요.”
문 안으로 들어온 도동은 탁자 위에 놓인 물그릇과 등자 껍질을 보며 말했다.
“이게 정말 그렇게 맛있나?”
도동은 궁금증이 생기는 듯 등자 껍질을 들고 이리저리 쳐다봤다. 등자 껍질은 어느덧 차갑게 식었고 안에 들어 있던 고기는 다 먹은 뒤라 아까처럼 맛있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찌고 나서 색이 죽은 과일의 시큼한 향만 날 뿐이었다.
“그러게, 반근 언니 말로는 그 댁 아씨도 안 먹겠다고 했다는데. 바보도 안 먹는 게 맛이 있을 수가 있나?”
“네? 이것도 반근 언니가 만든 거예요?”
도동이 놀라며 물었다. 아까는 사저들이 찬합을 가져오는 걸 보면서도 제대로 묻지 못했다. 노인이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 재주 좋은 몸종의 솜씨였구나.
“반근 언니가 저 어르신의 배고픈 병을 두 번이나 고쳐 줬네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만하네. 이 좋은 소식을 어서 반근 언니한테 알려야겠어요.”
얼른 안쪽으로 뛰어가려는 도동을 다른 여도사가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말하지 마.”
“왜요? 이거 좋은 일 아니에요? 이번 기회에 그 어르신한테 부탁하면 여기서 떠날 수 있잖아요.”
도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은혜를 갚겠다고 말하는 건 쉬워. 하지만 그걸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나이가 많은 여도사가 말했다.
“일단 반근한텐 말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어르신이 진짜로 고맙단 인사를 하면 반근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말만 그렇게 해 놓고 깜빡해 버리면 어떡해. 반근이 모르고 있어야 기대도 안 하지. 그래야 괴로워할 일도 없고.”
확실히 그랬기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근 언니에게 좋은 소식이 있길 기다려야겠네요.”
도동이 웃으며 말했다.
산허리에 있는 소현묘관은 뚝딱뚝딱 소리로 시끄러웠다. 불에 탄 관주의 방은 손 관주의 뜻에 따라 새로 짓지 않고 싹 밀어 공터로 만든 다음 작은 정자를 지었다. 물론 손 관주의 뜻은 곧 정교랑의 뜻이었다.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 없이 낡은 건물을 새로 칠하고 보수하는 수준인 데다 손 관주가 품삯을 제때 넉넉하게 주는 덕에 공사 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15일이면 들어갈 수 있어요.”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정교랑은 산석에 앉아 있었다.
“곧 8월 15일이지?”
“네.”
정교랑의 물음에 반근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소현묘관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이젠 소현묘관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지. 대와 소를 합쳐 큰 것은 ‘현묘’라 하고 그에 부속된 작은 것엔 ‘태평(太平)’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빠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7월에 집을 나와 8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소현묘관에서 태평관으로 바뀌기까지 한 달여의 시간은 확실히 빠르게 흘러갔다.
중추절이 가까워지자 경성 거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술집과 찻집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가 없다시피 했고 자식들과 함께 노인을 모시고 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리에는 여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부잣집 마차가 줄을 이었으며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 물건을 파며 외치는 장사치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반근 언니, 서둘러.”
한 몸종이 불렀다. 노점 앞에서 넋을 놓고 설탕 공예를 구경하던 반근은 얼른 대답한 후 찬합을 꼭 끌어안고 인파를 헤치며 몸종을 따라갔다.
“거리가 떠들썩하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15일이 임박하면 훨씬 더 떠들썩할걸.”
몸종은 웃으며 반근의 팔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언니는 그때 나와서 실컷 보면 되겠다. 우린 집에서나 달을 구경할 테지만.”
“내가 어떻게 나와. 다들 똑같은 처지인데.”
반근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어. 여섯째 공자께서 언니를 그리 좋아하시는데. 언니가 놀러 가자고 말만 하면 분명 데리고 나오실걸.”
몸종이 웃으며 말하자 반근은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공자님은, 그러니까 공자님은……· 나도 몸종일 뿐인걸.”
반근은 우물쭈물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게 무슨 감정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몸종은 무슨. 공자님은 누구랑 식사하러 갈 때도 언니를 잊지 않고 데려가시잖아.”
“그야 공자님께서 기름과자(炸果子: 밀가루를 발효시켜 길쭉한 모양으로 만들고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 음식)가 드시고 싶어 그러지.”
반근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 과자는 언니만 만들잖아. 그거면 됐지. 집안에 몸종이 한둘도 아닌데 공자님이 기억하시는 몸종이 몇이나 되겠어.”
몸종은 웃으며 반근의 팔을 잡아끌었다. 비위를 맞추려는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섞여 있었다.
“그러니 공자님께서 언니를 그리 먼 곳에서 데려오셨겠지.”
* * *
주육낭이 강주에 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면서 꽃다운 나이의 아리따운 몸종을 데려온 일은 집안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력을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그 몸종은 부모와의 논의 끝에 주육낭의 측근 시녀가 됐다.
측근 시녀 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집안에서도 최소 3년은 갈고닦으며 재주를 익혀야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아이가 그토록 공자의 총애를 받으니 화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말로야 주씨 가문 노부인이 생전에 계실 때 사서 정씨 가문 바보에게 증여한 몸종으로, 이제 바보가 집으로 돌아가게 됐으니 자연스레 주씨 가문으로 돌아온 것이라지만 그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이던가. 믿는 사람이 바보지.
반근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본디 말주변이 뛰어나지도 않았거니와 어릴 때부터 도관에서 자란 탓에 집에서 생활해 온 몸종들과 어울릴 때면 주눅이 들었다. 주육낭의 체면을 봐서 다들 살갑게 대해 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고 떠드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아씨께서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으려나? 아씨라는 말이 떠오르자 반근은 갑자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속에 놓인 무거운 저울추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했다.
아씨는, 잘 계실까? 그리 버려두고 혼자 왔는데 슬퍼하진 않으실까? 어쩌면 이 세상에 반근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으셨을지도 모르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땐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생각도 제대로 안 해 보고 바로……·.
“어이, 드디어 왔구나.”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올려다보니 2층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소년이 눈썹을 치켜뜨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소년의 태도는 도도하고 거만했다. 마음속에 걸려 있던 저울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올라가요.”
얼른 대답하고 술집으로 들어간 반근은 점원의 안내에 따라 시끌벅적한 중앙을 지나 2층 별실로 향했다. 막 층계를 오르려는데 맞은편에서 여인 몇 명이 걸어왔다. 대체로 오색 비단으로 만든 너울을 쓰고 있었는데 그중 두 여인은 5~6살쯤 되었을 법한 여자아이와 각각 손을 잡고 있었다. 반근이 몸을 비켜서는데 그중 한 여자아이가 어머, 하며 놀라는 소리를 냈다.
“언니? 그 언니네!”
아이의 말에 여인들은 영문을 몰라 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반근의 눈앞에 반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 어머.”
반근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여자아이는 더욱 반가워하며 작은 손을 들어 보였다.
“비도 부르고 바람도 부르는 아씨의 몸종이잖아!”
반근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퍼뜩 깨달았다. 비 오는 날, 낡은 사당, 노인에 의지해 팥 춘권을 게걸스럽게 먹던 여자아이. 다만 지금 아이의 곁엔 노인이 없고, 반근의 곁엔 아씨가 없었다. 순간 반근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너구나.”
반근은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꼬마야, 너도 경성으로 왔니?”
아이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잡고 있는 여인의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언니, 이 언니는 나랑 할아버지가 길에서 만난 언니인데 진짜 대단해. 비도 막 내리게 하고 맛있는 것도 만들 줄 알아.”
아이는 아이답게 조잘조잘 떠들었다. 옆에 있던 여인들은 이 아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인연을 다시 만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반근을 힐끔 보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반근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반근도 얼른 인사했다.
“언니, 이름이 뭐야? 어디 살아? 난 단랑이라고 해, 어디 사냐면……·.”
아이는 흥분해서 떠들었지만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여인이 아이를 가볍게 잡아끄는 바람에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몸종도 저쪽에서 재촉했다.
“반근 언니, 빨리. 공자님이 기다리시잖아.”
양쪽에서 재촉하는 바람에 반근과 여인들은 다시 예를 표하고 헤어졌다. 아이는 못내 아쉬워하며 걸음을 옮겼다. 길 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더라도 결국엔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법이다.
“우리 단랑 아씨도 아는 사람이 계셨네.”
함께 가던 여인들이 아이를 놀리자 아이는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라던 환경을 떠나 경성으로 왔으니 어린아이로서는 외로울 만도 했다. 특히 할아버지까지 병석에 누우셨으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이 떠오르자 아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집에 가자, 얼른. 할아버지한테 가서 말씀드릴래.”
아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 할아버지라는 말에 여인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마차에 올랐다. 거리를 가로질러 외진 골목으로 접어든 마차는 평범해 보이는 민가 앞에 멈춰 섰다. 평범해 보이는 집이었으나 마중을 나오는 이가 적지 않았고 기세도 제법 대단해 보였다. 아이는 여종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나 할아버지한테 갈래.”
아이가 소리치며 마당을 향해 뛰어가자 여종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이는 작은 체구로 여인을 가볍게 따돌리고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상대방이 잽싸게 붙잡은 덕에 그나마 걸려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아이는 코를 부여잡으며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용서하십시오. 이 늙은이가 꼬마 아씨를 못 봤네요.”
백발의 노인이 몸을 휘청이며 얼른 아이를 달랬다. 노인의 옆에 선 사내가 엄숙한 표정에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랑, 무례하구나.”
진씨 가문은 가정교육이 엄격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4살 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만 5살인 단랑도 벌써 언행에 관한 예절을 익힌 터라 부친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얼른 노인에게 깍듯히 예를 표했다.
“제가 결례를 범했어요.”
단랑이 잘못을 시인하자 노인은 미소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아버지, 저 할아버지 보러 가고 싶어요.”
단랑이 부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가지 마라. 방금 약을 드셨어. 괜히 가서 깨우면 안 돼.”
전전긍긍하며 걸어오는 여종을 향해 진소가 손짓을 했다.
“아씨를 데려가라.”
여종은 얼른 다가와 아이를 잡아끌며 타이르고는 안아서 데려갔다. 진소가 가볍게 숨을 토하자 노인은 그런 진소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내밀었다. 뒤에 있던 시종이 얼른 약상자를 가져왔다. 노인은 그 안에서 자기(磁器)로 된 병을 하나 꺼내 진소에게 건넸다.
“이걸 쓰십시오.”
진소가 반색을 하며 노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 태의, 이 약을 부친께 쓰면……·.”
진소의 떨리는 목소리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인께서 쓰시라는 겁니다.”
노인은 자기로 된 병을 쥔 진소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 대인의 근심이 과중하니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이 약으로 원기를 보충하면 식욕 부진과 불면증이 좀 나을 겁니다.”
말을 마친 노인이 이번에는 진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대인,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병자를 가족으로 둔 이에게 태의가 건강을 챙기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으라는 말을 하다니 다소 기이하게 들릴 법도 했지만 진소는 눈치가 빨랐다. 부친의 병은 갑작스럽게 넘어지면서 시작됐다. 연로한 나이라 근육이 다치거나 뼈가 부러지진 않았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부친은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고 의원들도 푹 쉬면 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쉬어도 좋아지기는커녕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처음엔 몸을 일으키지 못했고 곧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더니 얼마 안 가 대소변도 혼자 처리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보내는 날이 길어졌다.
정정하던 노인이 병석에 누워 부지불식간에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가 되기까지는 불과 보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빠르고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이었다.
의원이 수없이 다녀갔지만 병의 원인으로 내놓는 진단조차 전부 말이 달랐다. 나중에는 의원조차 섣불리 청하기 힘들어졌다. 부친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당에서 진소의 부친상에 관한 일이 논의되기 시작해서였다. 벌써 진소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천거하는 상소가 황제에게 올려갔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제 겨우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큰 뜻을 펼치기도 전에 또다시 떠나야 한다니. 이번에 떠나면 또 3년이다. 3년, 3년, 인생에 3년이 몇 번이나 있단 말인가. 진소로서는 마음이 편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의 병환과 자신의 앞날, 집안의 장래에 관한 근심으로 이 학식 있고 기개 넘치는 문인은 날로 야위어갔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소문은 더욱 빠르게 퍼져 나갈 터였다.
진소는 손에 든 병을 꽉 쥐었다. 이 약은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켜 주고 진중한 모습으로 보이게 해 줄 터였다. 일개 태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진소는 노구를 이끌고 비틀비틀 문을 나서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군가로부터 가져다 주라는 부탁을 받았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마음을. 진소는 자기로 된 병을 꽉 쥔 채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서 있었다.
시녀가 약을 내오는 틈에 자그마한 형체가 방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약 냄새와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지만 단랑은 개의치 않고 휘장 뒤편부터 확인했다. 노인은 침상 위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단랑이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다가갔다. 침상 위에는 비단 이불을 두 겹으로 덮은 노인이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입으로 미약하게 후후 내쉬는 숨소리만이 그나마 노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직 병환과 죽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단랑은 할아버지가 피곤하여 오래 쉬어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단랑은 침상 옆에 꿇어앉아 인형을 높이 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가 뭘 샀는지 좀 보세요.”
아이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천천히 잠에서 깬 노인이 고개를 돌리고 흐린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모처럼 의식이 또렷했다. 손녀딸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 단랑이구나.”
노인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깨자 더욱 기뻐하며 시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할아버지, 얼른 좋아지셔야 해요.”
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흔들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우리 15일에 등불놀이 구경 가요. 할아버지 목말을 타고 구경할래요. 높이 보여 주세요.”
노인의 흐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좋아지긴 힘들 것 같구나. 단랑, 이 할아비는 너와 등불놀이에 갈 수 없어. 더는 네 곁에 있을 수 없단다.
“아, 참. 할아버지, 저 오늘 그 언니 만났어요.”
단랑은 손에 든 인형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팥 춘권을 줬던 그 언니요.”
노인은 어리둥절했다. 팥 춘권이라.
“할아버지, 기억하시죠? 그, 길에서 만났잖아요. 비 오는 날에, 아씨가 비 올 거라고 하니까 비가 오고, 안 올 거라고 하니까 안 오고. 그 아씨, 그러니까 그 아씨의 몸종이요. 저한테 팥 춘권을 줬잖아요. 엄청 맛있는 거.”
아이의 말이라 내용이 뒤죽박죽이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보니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지러운 말이었지만 노인의 귀에는 더없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들렸다. 그 낭자라면……·. 그 낭자!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노인은 벌떡 일어났다. 물론 힘이 없다 보니 팔을 휘저으며 어어, 하는 소리를 내뱉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 낭자!”
노인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깜짝 놀란 아이는 버둥거리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문밖에 있던 이들이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다. 곧 진소도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뜬 부친의 모습을 보자 진소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안 되는데, 이렇게 빨리……·.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버지.”
진소가 잽싸게 달려가 부친의 손을 붙잡자 부친 역시 아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손에는 전에 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삼낭, 그 낭자를……·.”
노인은 아들을 보며 힘을 주어 소리쳤다.
“살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