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60)

-현묘-

문밖에서 거리를 청소하던 시종들의 눈에 급히 달려오는 마차 행렬의 모습이 들어왔다. 맨 앞에 있는 관졸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신분이 적잖이 높은 관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주씨 집안 시종들은 얼른 길을 열었다.

“저게 누구지?”

사람들은 의논이 분분했다. 경성에서 제일 빠른 게 바로 소식이니 정체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관리는 신임 이부(吏部) 상공 대인(相公大人) 진소였다.

진소는 소년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성년이 되면서 진사에 급제한 후 내각과 지방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강남의 명사로,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후 마침내 황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다시 벼슬길로 나온 터였다. 진소는 곧장 육부의 수장이자 관원의 임면과 영전을 관리하는 이부상서로 발탁됐다.

진 상공 대인이 경성을 떠난 3년 동안 저택을 관리해 온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 둔 터라 군데군데 망가져 있었다. 물론 집을 수리해 주겠다는 자는 대문에서부터 성문까지 줄을 설 정도였지만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진 상공 대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거리로 영접하러 나오는 이조차 없이 단출한 마차 한 대에 수행하는 노복 몇 명이 전부였다. 관부의 관졸까지 돌려보내자 진 상공의 집 대문 앞은 여염집과 다름없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아버지.”

40~50세쯤 된 진 상공이 마차에서 내리는 한 노인을 직접 부축했다.

“아버지.”

노인의 뒤에서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고 웃으며 소리쳤다.

“거리에 나가 놀고 싶어요!”

진 상공은 웃으며 여자아이를 안아 여종에게 맡긴 후, 다시 부친을 부축했다. 노인은 바삐 돌아오느라 음식을 제대로 못 챙겨 먹었는지 수척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층계를 오르던 노인은 몸이 뻐근하여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진 상공이 걱정스레 불렀다. 노인은 선 채로 잠시 꼼짝도 안 하고 있다가 겨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허리가 좀 아프구나. 좀 움직이면 괜찮겠지.”

“급히 돌아오시느라 무리가 갔나 봅니다. 소자 탓입니다.”

송구스러워하는 진 상공의 말에 노인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손으로 등허리를 꾹꾹 주물렀다. 욱신욱신 저리고 쑤시는 통증이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지긴 했지만 마차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럴 것이다. 이제 집에 왔으니 푹 쉬고 나면 괜찮겠지. 이 늙은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 아닌가. 모친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아들의 벼슬길이 지체됐는데, 자신한테도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더 이상의 영전은 희망조차 사라질 터였다.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귓가에 그 목소리가 스치는 듯하여 노인은 내디디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진 상공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면 의원을 불러 보시지요.”

노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 * *

7월 중순이 되자 강주는 가을 우기로 접어들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벌써 쌀쌀했다. 강주성 밖의 현묘산은 자욱한 비안개 속에 더욱 푸르른 모습이었고 산속에 있는 두 도관은 안개에 가려져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산에는 도관이 있기 마련이었기에 현묘산에는 현묘관이라는 도관이 있었는데, 현묘관은 다른 도관과 달리 크고 작은 두 개의 도관이 있었다.

진(晉)나라 때 지어진 대현묘관은 산기슭에 위치하여 문 두 개에 전각 세 개, 연극 무대 하나를 갖고 있으며, 산허리에 위치한 소현묘관은 산을 끼고 지어져 산문(山門: 도관의 바깥문) 하나에 전각 하나가 전부였기에 다소 협소하나 경치는 절경이었다.

두 곳 모두 여성이 수련하는 곤도(坤道) 도관으로 대현묘관의 관주(觀主)는 여제자 다섯을 거느린 여도사였고, 소현묘관은 본디 관주 여도사 한 명이 전부였는데 몇 년 전에 부모를 여읜 여자아이 두 명을 입양하여 함께 지냈다.

현묘산은 경치가 수려하다고는 하나 명산이라고 할 순 없었다. 이치상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 도관이 두 개나 있으니 시줏돈이 얼마나 들어올지는 뻔했다. 특히나 그중 한 도관은 평판도 형편없었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던 가무잡잡한 피부의 작고 통통한 여인은 회랑 아래로 걸어오는 여도사를 보더니 원수라도 본 듯 눈이 시뻘게졌다.

“이 뻔뻔한 도사 같으니라고, 내 손맛 좀 봐라.”

여인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드는데도 여도사는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시주님, 여긴 대현묘관입니다.”

여도사는 예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소현묘관을 찾아오신 게 아닌지요?”

여인은 여도사의 머리로 내리치려던 주먹을 허공에 걸어 둔 채 씩씩거리며 노려봤다.

“아무튼 하나같이 재수 없어!”

여인은 그 말만 남기고 곧장 뒤돌아 달려갔다. 여도사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딱히 도리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대청에서 40대쯤 된 여도사가 급히 걸어 나와 예를 표했다.

“관주님.”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주님, 저 소현묘관을 저대로 내버려 두면 우리 명성까지 땅에 떨어지겠어요.”

여도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관주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어쩌겠느냐. 저긴 정씨 가문에서 공양한 도관이라 시줏돈으로 생활하는 곳이 아닌걸. 뒤에 정씨 가문이 버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어.”

관주가 회랑 아래에서 산허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좋은 곳이 아까울 따름이지.”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자 여도사는 놀라 귀를 막았다.

“요즘 번개가 자주 내리치네요.”

“여느 해나 똑같지, 뭐.”

관주는 웃으며 말하고는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여도사는 산 중턱에서 반쯤 모습을 보이고 있는 도관으로 다시 한번 눈길을 돌렸다.

“매년 이렇게 내리치는데, 왜 저긴 벼락도 안 맞아?”

여도사가 투덜거렸다.

* * *

“여긴 예전에 고조부께서 마련한 곳으로 아내의 복을 빌기 위해 청성산의 여도사를 모셔와 머무르게 하셨는데, 그 뒤로 만사가 순조로웠대요. 산 아래의 대현묘관보다 더 영험해서 본명이 잊혀지고 그저 소현묘관이라고 불리죠.”

몸종의 말이었다. 가랑비와 함께 부는 바람은 서늘했다. 몸종이 창문을 닫자 들이치는 바람에 펄럭이던 검붉은 휘장이 잠잠해지면서 뒤에 있던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몸종은 휘장을 들어 올리고 지나가면서 예전과 다름없이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책을 보면서 한 손으로는 팔걸이 책상 위에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따라 쓰고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다고 할 순 없겠구나. 예전에 비하자면 글씨를 쓰는 아씨의 손놀림이 훨씬 빨라졌으니까. 한 줄을 다 쓰고 난 정교랑은 손을 멈추었다.

“지금 있는 건 청성산의 여도사가 아니지?”

“백 년도 넘은 일인데 당연히 아니죠. 그럼 뭐 진짜 신선이 되었게요?”

몸종은 웃으며 꿇어앉아 물을 한 잔 올렸다.

“그 여도사가 세상을 떠난 후로 한동안 사람을 못 모셔왔대요. 정씨 가문도 강을 파서 물길을 내는 일에 가산을 다 쓰는 바람에 이 도관을 버려두었는데 그래도 노태야께서 다시 수리하신 거죠. 지금의 관주는 우리 정씨 가문 사람으로 남정(南程) 쪽 여인이래요. 본인이 수행을 원해서 이곳으로 오게 됐다네요.”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날 도관 문으로 들어설 때 관주가 영접하러 나오긴 했다. 다만 그 관주는 집사 부인에게만 말을 전하고 자신의 앞으로 오지 않았다. 언뜻 눈으로 훑은 바로는 30대 중반쯤 된 나이에 썩 훌륭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두 눈만큼은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응.”

마음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정교랑은 짧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몸종은 그제야 말을 이었다.

“아씨, 간식 드시겠어요? 산 아래에서 싱싱한 귤을 팔길래 조금 사 왔거든요.”

정교랑은 손으로 책을 만지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몸종은 정교랑이 생각 중인 걸 알고 소리 없이 조용히 있었다.

“물엿에 굴려서 먹을래.”

정교랑이 말했다. 아씨가 말하는 음식은 언제나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지만 몸종은 토를 달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떻게 만드는지 소인에게 알려 주시겠어요?”

소현묘관은 산을 끼고 지어진 터라 터가 좁았다. 산문과 정전, 좌우의 곁채가 전부였고, 두 개의 원형 문을 이용해 드나들었다. 저쪽에는 관주와 어린아이 둘이 살고, 이쪽에는 정교랑과 몸종이 살았는데 각자 부엌을 따로 써서 서로 관여할 일은 없었다.

몸종이 이쪽으로 걸어올 때 어린아이 둘은 비를 맞으며 하수구 주변의 잡초와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낡은 옷을 개조해 만든 겉옷은 이미 흠뻑 젖어 작고 왜소한 몸에 달라붙어 있다 보니 추워 보였다.

“왜 우산도 안 쓰고 해?”

몸종이 궁금증을 못 이기고 물었다. 그 목소리에 놀란 아이들은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몸종을 보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대답도 못 한 채 쭈뼛쭈뼛 서 있었다.

“비가 별로 안 오기도 하고 둘이 게으름을 피우느라 지금껏 하는 거야.”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사람이 나왔다. 관주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두 아이를 힐끔 쳐다봤다.

“얼른 가서 불 때고 밥해야지!”

관주가 소리치자 두 아이는 황급히 달려갔다. 관주는 다시 몸종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아씨께서 무슨 분부라도?”

“도사님께 엿을 몇 개 빌리러 왔어요.”

몸종이 대답했다. 관주의 웃음을 대하자니 어째서인지 불편한 기분이 들어 말을 짧게 했다.

“빌리고 말고 할 게 있나, 같은 정씨 가문 사람끼리.”

관주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엿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몸종은 감사 인사를 마친 후 잽싸게 뒤돌아 자리를 떴다. 우산을 들고 길만 보며 걷다가 문 앞에서 누군가와 부딪친 몸종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몸종은 도롱이 차림에 삿갓을 쓴 신체 건장한 사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여자들이 사는 도관에 사내가 들어오다니!

“땔감 장수, 드디어 왔군. 어젠 왜 땔감을 안 가져왔는가?”

관주가 뒤에서 말했다. 땔감 장수? 몸종은 고개를 숙였다. 전혀 거리낌 없이 자신을 훑는 시선이 느껴져 급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 도사님께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날씨가 안 좋아 어제는 장작을 못 팼어요. 내일은 꼭 갖다 드리겠습니다.”

뒤에서 사내의 굵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 마당으로 와서 문을 닫고 나서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몸종이 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눈으로 관주를 쳐다봤다.

“쳐다보느라 아주 눈알 빠지겠네?”

관주가 문에 기대 은근히 요염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도자의 모습은 어느새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허허 웃으며 팔로 관주를 휙 감싸 안았다.

“좀 어리긴 한데 얼굴은 별로야.”

사내의 말에 관주는 입을 삐죽거렸다.

“거기서 보낸 아씨야? 소문을 듣고 특별히 보러 왔지. 앞으로 오기 불편할 것 같아서.”

“그 아씨는 바보야. 방금 그 애는 몸종이고.”

관주가 웃으며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불편할 게 뭐 있어.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마는 거지.”

남자는 웃으며 관주를 따라 들어가더니 바로 방문을 닫았다.

“몸종이 못생겼네. 여기서 키우는 어린애 둘만도 못해.”

“하여간 욕심은 많아요. 그래도 좀 기다려, 아직 너무 어리잖아.”

두 남녀의 웃음소리가 창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부엌에 있는 두 아이는 무릎을 감싸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아궁이에 불을 지핀 뒤였지만 아이들의 몸에 있는 한기를 달래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서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내일은 날씨가 좋겠구나.”

대부인은 밖을 보며 말했다. 저녁상을 차리기 전이긴 하지만 바쁜 하루가 끝난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어머니, 어머니.”

밖에서 정육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대부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식은 빚이야, 평생 따라다니는 빚.

“백모님, 백모님.”

정칠랑의 목소리도 뒤이어 들렸다. 두 소녀는 나막신을 벗고 대부인 앞에 좌우로 나란히 꿇어앉았다.

“응, 응.”

대부인은 미소로 맞이하고 아리따운 두 아이를 바라봤다.

“백모님.”

정사랑과 정오랑도 조용히 신을 벗고 들어와 한쪽 옆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그래, 그래. 다들 배고프지?”

대부인은 웃으며 물었다.

“어머니, 먹는 건 안 급해요.”

정육랑이 말했다.

“백모님, 우리가 국화회를 열려고요.”

정칠랑이 선수 쳐서 말을 꺼냈다. 정칠랑에게 말을 빼앗긴 정육랑은 정칠랑에게 눈을 흘겼다.

“넌 말하지 마,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옆에 앉아 있기나 해.”

정육랑은 모친의 팔을 잡아끌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국화회를 열래요. 동 낭자네도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그림이랑 꽃꽂이도 겨루고요.”

“낚시도요, 낚시요. 백모님, 전 낚시가 좋아요. 낚시하고 놀 거예요.”

정칠랑이 또 나서서 얘기했다.

“그래, 낚시는 칠랑이 1등일 거야.”

대부인은 웃으며 칠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낚시는 안 돼.”

정육랑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우리 집 연못은 낚시하기엔 너무 작아. 우리보다 좋은 집이 많아서 괜히 비웃음만 산다고.”

정칠랑은 배움이 느려 이제 막 글자를 익히는 중이라 서화나 꽃꽂이를 할 줄 몰랐다. 국화회에서 그림을 논하거나 꽃꽂이만 한다면 정칠랑으로서는 자신을 뽐낼 기회가 없는 셈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던 대부인의 방은 여자아이들의 소란으로 시끄러워졌다. 귓가가 얼얼해진 대부인은 얼른 집사 부인을 불러 아이들의 말을 잘 듣고 원하는 대로 준비해 주라고 명한 뒤에야 간신히 아이들을 내보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는 건너편 방에서 수시로 들려왔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한결 나았다.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까르르 웃기도 하며 유쾌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런 게 집이지, 화기애애하고.

대부인은 마음 편히 숨을 내쉬었다. 어머님 말씀을 듣길 잘했어. 그 바보는 처음부터 도관으로 보내 버렸어야 했는데, 괜히 속만 끓이고 원망은 원망대로 들었네. 원망을 들은 일이 떠오르자 대부인은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혼수 문제는 벌써 한참 논의가 오갔지만 아직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았다. 본디 주씨 가문에서는 양보를 하려고 했지만 이방에서 까탈을 부리며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트집을 잡는 바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결국 주씨 가문 사람이 아예 점포에 들어앉게 되면서 장사 매출만 급감했다.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다가 하마터면 부채를 부러뜨릴 뻔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대부인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고함을 쳤다. 밖에서 여종이 들어왔다.

“다음 달부터는 노부인 쪽을 제외하고는 부엌의 지출을 반으로 줄여라.”

여종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감히 대꾸할 수 없어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반으로 줄이라면 줄이지 뭐.”

소식을 들은 이부인은 피식 웃었다.

“잘 버텨야지. 저들은 고기를 먹는다지만 우린 국물도 못 얻어 마실 텐데.”

“그러게요. 대부인께서 주씨 가문에 농토를 돌려주는 걸 동의하시다니요. 그 농토에서 나오는 수확이 적지 않다는 건 생각도 안 하시나 봐요.”

옆에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당연히 생각 안 하겠지. 두 점포를 틀어쥔 지 오래됐잖아. 수완 좋은 사람이 맡은 데다 돈도 잘 벌리니 그걸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살점을 내어 주는 꼴인걸. 농토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 사니까.”

이부인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한 점포를 둘로 나눠 내가 절반을 가져온다 쳐도 저쪽의 장사 수완을 당해낼 수 없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느니 아예 농토로 받겠다고 하는 게 낫지.”

“네, 맞아요, 부인.”

여종은 웃으며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우리 집 남편이 농사는 귀신이거든요. 우리가 장사는 못해도 농사라면 문제없죠.”

이부인이 응 하고 대답하자 여종은 더욱 정성스럽게 시중을 들었다.

“대부인께서도 거긴 신경 안 쓰실 거예요. 우리 남편이 며칠 전에 가 봤는데 멀쩡한 땅을 아깝게 놀리고 있더래요.”

여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릴 그리 오래 속이다니요. 따지고 보면 그 바보도 우리 이방 사람인데 평생 독차지하려던 심산이었을까요?”

“자기 딸들한테 혼수로 줄 생각이었겠지.”

이부인은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 콧방귀를 뀌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차지할 거야. 딸은 자기만 있나.”

“그러니까요. 그 바보만 해도 그래요. 우리 일곱째 아씨와는 친자매 사이지만 저쪽과는 사촌 자매잖아요.”

여종이 맞장구를 쳤다.

* * *

갈등이 폭발 직전인 정씨 저택과 달리 성 밖의 현묘산은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어제 내린 비로 땅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몸종은 나뭇가지를 꺾어 잎을 떼어내고 손으로 두어 번 쓸어 보며 손에 거슬리는 곳이 없는지 확인한 후 정교랑에게 건넸다.

정교랑은 여전히 너울을 쓰고 있었지만 가리개로 쓰는 천을 걷어 올린 후였기에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받은 다음 옆에 있는 산석 위에 앉았다. 몸종은 긴장한 채로 지켜봤다.

정교랑은 한 손으로 소매를 걷고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쥔 채 바닥에 대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안타깝게도 손에 힘이 없는 듯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떨리면서 촉촉이 젖은 땅 위에 삐뚤빼뚤한 흔적을 남겼다. 도무지 글자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손가락으로는 자유자재로 글자를 쓸 수 있었지만 붓만 쥐면 여전히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정교랑은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몸을 곧게 펴 앉았다.

“아씨, 글씨 연습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종이랑 붓을 사다 드릴게요. 우리 천천히 연습해요.”

지금의 정교랑에게 종이나 붓은 소용없었다.

“됐어.”

정교랑이 일어섰다.

현묘산은 경치가 좋았고 도관은 산을 끼고 지어져 있었다. 문을 나가면 도관을 빙 둘러 산길이 나 있었는데, 먼 거리는 아니어도 지세가 험준하여 한 바퀴 돌려면 정씨 저택의 마당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이는 정교랑이 바라던 바였다. 처음에 시험 삼아 한 번 돌아본 정교랑은 산길 도는 일을 필수 일과에 포함시켰다.

정교랑이 발을 들어 걸음을 옮기면 몸종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손과 입은 여전히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부축을 받지 않으며 걷는 일은 가능해졌다. 다소 느려 보이긴 해도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인 걸 감안하면 회복 속도 역시 느리다고 볼 순 없었다. 새해엔 나는 듯 빠르게 걸을 수 있으리라.

한 바퀴를 걷고 난 정교랑과 몸종은 도관 문으로 들어섰다. 관주가 마당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바닥에 광주리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미 텅 비었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반쯤 있는 상태였다.

“아씨 오셨네.”

관주가 얼른 인사를 하며 물건이 담긴 광주리를 가리켰다.

“집에서 쌀이랑 채소를 보내 왔어. 이 사람이 거기로 들어다 줄 거야.”

정교랑이 걸어가는데도 관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종만 보며 이야기했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다가가 확인하다가 쌀 한 자루와 채소가 전부인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한데요. 왜 이렇게 적죠? 생선이랑 고기, 견과도 없잖아요.”

관주는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하인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집에서 이렇게 줬어.”

“우리 아씨의 몫이 이렇진 않을 거예요.”

몸종이 말했다.

“그럼 집에 가서 말하든가.”

하인은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광주리를 들어 안에 있던 물건을 바닥에 좌르르 쏟아낸 후 멜대 양쪽에 빈 광주리 두 개를 매단 다음 성큼성큼 걸어갔다. 몸종은 열 받아 씩씩거리며 벌써 저만치 걸어간 하인을 향해 삿대질을 했지만 뭐라 따져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관주는 한쪽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몸종은 이를 갈며 서 있다가 몸을 굽혀 주우려 했다.

“줍지 마.”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교랑은 그 한마디를 남긴 채 뒤돌아 가 버렸다. 몸을 굽히려던 몸종은 멈칫하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쌀과 채소를 힐끔 본 다음 뒤돌아 정교랑을 따라갔다. 바보가 말도 할 줄 아네, 성질도 부릴 줄 알고. 성질을 부리더라도 때를 봐 가며 부려야지. 관주는 입을 삐죽거렸다. 역시 바보라니까.

이곳으로 올 때부터 집보다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일을 맞닥뜨리고 보니 몸종은 분한 마음이 들어 어쩔 줄 몰랐다.

“망할 노비 놈 같으니라고, 어디서 감히! 사람들이 그리 팔려 가는 걸 보고도 배운 게 없나 봐요. 우리가 고자질할까 봐 겁나지도 않나?”

“감히 그런 짓을 했다는 건, 겁나지 않는단 뜻이지.”

정교랑이 말했다.

“아마도, 그 관주랑 상의를 마쳤을 거야.”

관주? 몸종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똑바로 앉았다.

“그럼 그 관주도 가담했단 말씀이세요?”

“가담한 정도가 아니라 주모자야.”

정교랑은 손으로 책을 만지면서도 펼치지는 않았다.

“따지러 갈게요!”

몸종이 일어서려고 하자 정교랑이 말했다.

“가서 뭐라고 하게? 감히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 변명거리가 있단 뜻이야. 내가 이리로 보내졌다는 건 집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는단 의미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돼. 더구나 이번엔 주씨 가문 사람도 없잖아.”

“아씨.”

몸종은 무언가 생각난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 마침 여기 있어요. 제가 그 사람들을 찾아가 볼게요.”

“안 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정교랑을 쳐다봤다.

“우리가 도관에 오기 전에, 그 사람들이 왔었어.”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내가 도관으로 보내지면 어떻게 될 거라는 걸, 그 사람들이, 모를 수 있겠어?”

“네, 그때 내버려 뒀다는 건 내버려 두겠단 뜻이죠.”

암담해진 몸종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난번 일은 우연이었을 뿐이야.”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저쪽에서 필요로 했을 때 우리가 고자질하니까, 서로 합이 맞았던 거지. 이제 저들은 원하는 걸 이미 손에 넣었잖아. 저들은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럼 방법이 전혀 없는 걸까? 몸종은 암담해졌다.

“그러니까 결국, 전부, 내가, 바보기 때문이야.”

정교랑은 말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비록 모친을 일찍 여의었다고는 하나 엄연히 정씨 가문 이방의 적녀인 자신을 무시할 사람은 감히 없을 터였다. 몸종은 눈물을 떨궜다. 그 말이 왜 이리도 가슴 쓰린 것일까.

“아씨는 바보가 아니에요.”

“그래. 원래는 천천히, 조용히 나아지려고 했어. 다른 사람이 날 어찌 대하든, 당분간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네.”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이곳이 안 좋아서 아씨의 쾌유도 지체되나 봐요.”

“아니, 우리가 있는 여긴 아주 좋아.”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난 마음에 들어.”

몸종은 어리둥절해졌다. 여기가 좋다고? 대체 어딜 봐서?

“바보가 살기엔 정말 좋은 곳이지.”

밤이 깊었다. 저쪽 곁채에는 땔감을 가져왔다던 사내와 관주가 마주 앉아 있었는데, 이때의 관주에게서는 대낮의 단정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본디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게으른 사람인지라 집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북정(北程)에서는 같은 집안사람을 절대 하인으로 부리지 않았고, 여인이 외지로 나가 살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떠오른 게 산에 있는 도관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기에 수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며 경전 몇 권을 외는 정도의 수고를 들인 끝에 그녀는 노태야의 마음을 사로잡고 관주 자리를 꿰차게 됐다.

그 후로는 남의 공양으로 먹고 마시며 지낼 수 있었다. 가난하기는 해도 근심 걱정이 없는 삶이었고, 예쁘장한 용모 덕에 근방의 사내들과 인연을 트면서부터는 더욱 자유로운 삶이 이어졌다.

“난 불편할 줄 알았는데.”

땔감 장수는 관주와 입으로 술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의외로 호강하게 됐네.”

땔감 장수는 크고 거친 손으로 탁자 위에 있는 양고기를 집어 들어 입에 넣고 우걱우걱 먹었다.

“저 바보는 딱히 쓸모가 없어. 정씨 가문에서 평생 좋은 거 먹이고 입히며 키우다가 여기로 보낸 거야. 내가 커다란 돼지를 한 마리 키우게 된 셈이지.”

관주는 웃으며 사내의 건장한 몸에 기댔다. 술을 마신 터라 얼굴이 상기됐다.

“쟤들이 먹을 건데 빼앗아 먹다가 이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사내가 물었다.

“바보잖아!”

관주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음식 가져온 사람한테 얘기 잘해 놨어. 절대 말 안 해. 그 사람한테 내가 다른 거로 보답하면 나중에 대질하더라도 당당하게 나올 거야.”

“다른 거 뭐로 보답하려고?”

사내는 웃으며 여인의 몸을 쓰다듬어 간드러진 웃음을 유발했다.

“이제 남은 건 그 몸종뿐이잖아.”

여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몸종 얘기를 듣자 사내의 눈에 굶주린 듯한 기색이 드러났다. 외모는 평범해도 어린 나이니 그 맛도 이 중년 부인보다는 좋을 터였다.

“그러다가 그 몸종이 관주가 괴롭힌다고 가서 이르기라도 하면?”

사내는 화제를 돌렸다.

“여기로 쫓겨난 걸 보면 그 몸종도 그 집에서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황련이며 꿀에 절인 대추며 맛있는 거 섭섭지 않게 챙겨 주면서 이 도관에서 자유롭게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천천히 알려 줘야지.”

여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바보를 따르며 고생하는 길을 택하겠어, 아님 나랑 팔자 좋게 즐기며 사는 길을 택하겠어?”

“그 애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난 당신이랑 팔자 좋게 즐기고 싶어.”

사내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이 침상 위에 숫처녀가 하나 늘어나 그 맛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니 몸이 후끈 달아오른 사내는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음탕한 신음 소리가 가을밤을 타고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나뭇간에 멍석을 깔아 보금자리를 마련한 두 어린아이는 몸을 웅크리고 바짝 붙어 귀를 막았다.

“언니, 우리 도망치자.”

“어디로 도망을 쳐. 도망치면 바로 죽는 거야. 여기선 그나마 며칠이라도 살 수 있잖아.”

“그럼 그다음엔?”

“일단 며칠이라도 버티는 게 우선이야. 그다음은 몰라.”

날이 밝자 밤새 한숨도 못 잔 몸종이 몸을 일으켰다. 어제 아씨의 말을 따르느라 두고 온 쌀과 채소를 생각하자 못내 아쉬웠다. 오늘 밥은 어쩐담?

“걱정할 것 없어. 가져올 사람이 있거든.”

아씨에게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을 때 정교랑은 그렇게 대답했다. 누가? 그 못된 하인 놈이 잘못을 뉘우치고 가져다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휘장 뒤 침상에 있는 정교랑은 아직 자는 중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몸종은 마당에 서서 잠시 하늘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마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 낭자, 반근 낭자.”

몸종은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잠시 주저하던 몸종은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밖에는 관주가 서 있었고, 그 뒤로 각각 쌀과 채소가 담긴 광주리를 든 두 아이가 서 있었다.

역시! 몸종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씨는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만 바보기는커녕 미래까지 내다보다니. 기쁜 표정을 짓는 몸종을 보며 관주는 우쭐함이 담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반근, 어젠 놀랐지?”

관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잠깐 스친 우쭐한 표정을 거두고 두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자, 그만 화 풀고 이 식재료 받아.”

머뭇거리던 몸종은 이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그런 사람들은 부드럽게 다뤄야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반발해.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이랑 똑같이 굴지 마. 저쪽에서 때맞춰 갖다 주는 걸 받아먹으며 사는 처지에 억울한 일 한두 번 안 당하긴 힘들지. 부족한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여기 더 오래 살기도 했고 나이도 더 많으니 먹고사는 일에 대해선 둘보다 잘 알잖아.”

관주는 다정하게 굴며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씨로부터 관주도 가담했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몸종은 관주의 호의가 진심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람을 너무 무시하잖아요.”

몸종이 툴툴거렸다. 관주에게 하는 말인지 먹거리를 가져왔던 그 하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몸종은 관주의 곁채를 쓱 둘러봤다.

“도사님은 여기 10년 넘게 사신 거예요? 진짜 고생 많으셨겠네요.”

관주가 고기 한 덩이를 들고 문밖에서 들어왔다.

“고생은 고생인데 그래도 속세의 번잡한 속박에서 벗어나니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어.”

몸종은 구역질이 나는 걸 간신히 참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 좋은 분들이 주고 간 거야. 가져가서 아씨랑 먹어.”

관주가 말했다. 주고 가긴, 고기 써는 방식이 딱 정씨 가문 부엌 솜씨랑 똑같은데. 역시 이 여인이 음식을 가로챘던 거구나. 몸종은 사양하지도 않고 냉큼 손을 뻗어 받았다.

“출가한 분한테 보살핌을 받게 되네요.”

몸종은 짐짓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출가해서 힘들긴 해도 네 고생에 비하면 낫지.”

관주의 동정 어린 말투에 몸종은 그 위선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 여인에 대한 믿음은 전달한 셈이었다.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우리 아씨랑 산책하러 가야 해요. 안 그럼 성을 내세요.”

몸종은 예를 표하는 것조차 잊고 급히 몸을 돌렸다.

“정말 딱하네. 멀쩡한 사람이 바보한테 혹사를 당하다니.”

관주가 뒤에서 혼잣말인 듯 일부러 몸종 귀에 들리도록 말하더니 목소리를 키워 말을 이었다.

“반근 낭자, 부족한 게 있으면 나한테 와서 말해.”

몸종은 손을 내젓고 문가에서 살짝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 * *

“아씨, 힘드시면 잠깐 쉬시겠어요? 사탕 귤을 가져왔는데 좀 드실래요?”

산길을 걷던 몸종이 정교랑을 향해 예의 바르게 손을 뻗었다.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고 몸종이 내민 향낭에서 백설탕이 묻은 알갱이를 꺼내 입에 넣었다. 이곳에서는 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새벽을 지난 터라 산길에는 인적이 없었다.

“점심때쯤 되면 사람이 많아져요. 일용품이나 과일을 파는 사람도 있고요. 아씨께서 드신 귤도 거기서 산 건데 저렴해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그 관주가 얘기하자고 부르면 저 또 가야 해요? 웃는 걸 보고 있자니 너무 거북해요.”

“가.”

정교랑이 말했다.

“하지만 오래 있으면 안 돼. 그 사람이 주는 걸 먹어서도 안 되고.”

몸종은 네 하고 대답했다. 맞은편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정교랑과 몸종은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맞은편 산길에서 걸어오던 여도사 셋은 등에 광주리를 멘 채 웃으며 떠들다가 이쪽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얼른 웃음을 거둔 후 살짝 예를 표했다.

“산 아래 대현묘관 사람이에요.”

몸종이 정교랑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교랑은 대현묘관의 일에 대해 잘 몰랐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몸종이 목소리를 낮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정교랑은 생각에 잠겼다.

“산 아래에 대현묘관이 있다고?”

정교랑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몸종은 정교랑을 부축하며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더니 손으로 어딘지 가리켜 주었다. 녹음 사이로 도관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게, 큰 건 아니네.”

정교랑이 말했다.

“우리 도관보다는 크죠. 원래 우리 도관이랑 합치려고 했는데 그 여인이 선수를 쳐서 뺏은 거예요.”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정말, 안타깝네.”

“그러니까요. 신선을 모시는 깨끗한 곳이 그 여인 때문에 이 꼴이 될 일도 없고 말이에요.”

몸종은 열이 받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듯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노야, 왜 그러세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사람을 살리라고? 몸종은 깜짝 놀랐다. 이 벌건 대낮에 산적이라도 나타난 건 아니겠지?

“가 보자.”

정교랑은 앞장서 가며 말했다. 몸종의 눈과 입과 발에 의지하며 지내던 예전의 정교랑과는 달랐다. 이런 기분 정말 좋아. 몸종은 급히 뒤를 따랐다. 산길을 따라 굽이를 돌자 소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대현묘관의 여도사 셋이 벌써 빙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산석 근처에 노인 하나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옆에 있는 노복은 초조한 마음에 눈물까지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죠?”

“병이 난 거예요?”

“뱀한테 물렸어요?”

여도사들이 긴장한 듯 물었다. 노복은 노인을 업으려고 애를 쓰며 물었다.

“어디로 가야 의원이 있죠?”

“아이고, 거긴 너무 먼데. 성까지 가야 있어요.”

여도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업는 것을 도와주었다.

“잠깐만요!”

위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봤다. 남색 무명천으로 지은 치마를 입은 여인 하나가 손에 향낭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의원을 찾으러 가다간 시간만 허비할 거예요.”

사람들은 뭔가 대꾸하려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했다.

“낭자께선 의술을 아십니까?”

노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천천히 먹여 보세요.”

몸종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말했다.

“몸을 옆으로 눕힌 후 가슴과 배를 쓸어 주면서 귀를 세게 꼬집어 피를 토하게 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노복과 여도사 셋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게 다야?

“그게 다예요, 그럼 곧 깨어나세요. 깨어나시면 급히 가지 말고 좀 앉아 계셔야 해요. 뭘 좀 드시고 가는 게 가장 좋고요.”

말을 마친 몸종은 손에 들고 있던 향낭을 노복에게 쥐여 주고는 뒤돌아 자리를 떴다. 노복과 여도사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몸종은 이미 굽이를 돌아 산길로 사라진 후였다.

“으응? 저기요, 낭자.”

노복이 소리쳤다.

“우리가 좀 전에 저 낭자를 봤을 땐 두 사람이었어요. 어느 댁 낭자가 산책을 나왔나 봐요.”

한 여도사가 말했다. 노복의 손에 들린 향낭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먹으라고? 노복은 안색이 창백해지다 못해 곧 정신을 잃으려 하는 노인을 보더니 이를 악물고 향낭을 거꾸로 들어 쏟았다. 백설탕에 굴린 호두알 크기의 사탕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 노야께선 천지에 부끄러운 일 안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을 해칠 사람은 없죠.”

말을 마친 노복은 손을 뻗어 노인의 입을 벌린 후 알갱이를 먹였다.

같은 시각 몸종은 이미 정교랑과 함께 소현묘관 문밖에 도착해 있었다.

“아씨, 그 사탕 귤을 먹으면 정말 사람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궁금한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던 몸종이 결국 못 참고 물었다.

“목숨이 달린 일도 아닌데, 목숨을 구했다고 할 순 없지.”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그냥 가벼운 병세일 뿐이야.”

“그럼 사탕 귤이 약도 되는 거예요?”

몸종은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찐빵은 약일까?”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물었다.

“찐빵은 당연히 약이 아니죠.”

몸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배가 고파 죽기 직전일 땐, 그게 바로 목숨을 구하는 약이야.”

정교랑이 말했다.

“아씨, 절 놀리느라 그리 말씀하셨군요.”

몸종은 웃으며 정교랑을 부축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저 어르신은 병이 난 게 아니라 배가 고팠던 거라고요.”

“아니지.”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배가 고픈 것도 병이거든.”

몸종은 풉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일에서 관심을 거두고 문 뒤에 쌓여 있는 장작을 쳐다봤다.

“우리 땔감 다 떨어졌어요. 이걸 옮기면 되겠네요.”

몸종은 몸을 구부려 장작을 주우며 말했다.

“어린 낭자가 장작을 옮기면 쓰나. 낭자가 이렇게 몸 쓰는 걸 좋아해서야, 원. 내가 할게.”

장난기 섞인 사내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몸종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정교랑도 따라서 고개를 돌리고 쳐다봤다. 언제나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던 가리개를 이제는 걷어 올리고 다니던 터라 정교랑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리 고운 외모라니!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멜대를 꽈당 소리가 나도록 떨어뜨린 채 넋을 놓고 정교랑을 바라봤다.

몸종은 상대가 그날 관주의 마당에서 마주쳤던 사내임을 알아봤다. 어린 나이였지만 대갓집에서 자란 터라 세상 물정을 일찍 터득한 몸종은 이 사내와 관주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놈은 인성이 쓰레기지. 그날도 날 대놓고 훑어보더니 오늘은 아씨를 저렇게 보네.

몸종은 뒤돌아 총총 걸어가 정교랑의 가리개를 내려뜨려 준 다음, 장작을 내버려 두고 정교랑을 부축해 다른 한쪽에 있는 자신들 거처 마당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노복은 여도사 둘과 함께 조심스레 노인을 부축해 처마 아래의 짚방석 위에 앉혔다.

“피를 닦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 여도사가 노인의 양쪽 귀에 남은 핏자국을 보며 긴장한 듯 물었다.

“괜찮소, 괜찮아.”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소식을 들은 관주가 저쪽에서 여도사와 함께 급히 달려왔다.

“관주님.”

세 여도사는 예를 표했다.

“어떻게 된 거죠?”

관주의 물음에 나머지 사람들이 사정을 설명했다.

“폐를 끼쳤구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겠소이다.”

노인이 말했다. 쇠약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관주는 얼른 예를 표했다. 산을 오르려던 사람이었구나. 관주와 여도사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현묘관의 명성이 높지 않기도 했거니와 소현묘관의 평판이 형편없는 탓에 이곳 도관을 방문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이 노인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 도관에 발을 들이지 않았겠지. 노인이 신도가 될 가망은 없어 보였지만 관주는 그래도 노인을 극진하게 대했다. 곧 식탁에 정갈한 식사가 차려졌다.

“도관이라 음식이 소박한 편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관주가 말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노인도 예의 있게 대답했다. 관주는 노인이 곧장 젓가락을 드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향낭을 쏟아 안에 있던 사탕을 천천히 입속에 가져다 넣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게 산에서 낭자가 준 환약인가요?”

관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자 노인은 웃었다.

“실은 환약이 아니오.”

노인은 한 알을 더 꺼내 관주에게 건넸다.

“도사님도 드셔 보시구려.”

환약이 아니라고? 그냥 막 먹어도 되나? 여도사들은 내심 놀랐다.

“그럴 수야 없죠.”

관주는 얼른 사양했다.

“드셔 보래도, 어서요.”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좀 쉬고 나니 차츰 기력이 돌아왔다. 나이와 신분이 있는 관주는 자제하며 먹지 않았지만 어린 도동(道童: 도를 닦는 아이) 하나가 호기심을 못 이기고 손을 뻗어 한 알을 받아 들고는 사부의 눈치를 살폈다. 관주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딱히 나무라지 않자 도동은 안심하고 입속에 넣었다. 입속에 꿀맛이 퍼졌다.

“사부님, 귤이네요!”

도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자 침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던 노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귤?”

“산 아래에서 파는 작은 귤이요.”

역시 약이 아니었군. 관주는 생각했다.

“사부님, 귤을 이렇게 먹기도 해요?”

“사부님, 귤은 그냥 먹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부잣집 사람들은 해바라기씨나 호박씨를 먹을 때도 다양한 방식으로 먹거든. 과일 정과를 만드는 방법은 더욱 번잡하고 사치스럽지. 여도사들이 나지막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입맛이 까다로운지라 소박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 당연지사였다.

“노야, 그 아씨 말씀이 식사를 하셔야 한다고……·.”

노인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노복이 얼른 나서서 조용히 말씀을 올렸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네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건 처음 보는구나.”

노인은 노복을 놀리며 손을 뻗어 귀를 만지더니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만평 네놈의 손이 이리 매운 줄은 미처 몰랐다.”

노복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야, 우스갯소리나 하실 때가 아닙니다. 얼른 식사하시고 바로 의원한테 가 봐야죠.”

“그 낭자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느냐. 그 말은 왜 안 들어?”

노인은 웃으면서도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계속했다. 여도사들은 전부 자리에서 물러났고 관주만 배석하여 노인이 밥이며 국, 반찬을 싹싹 비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도동이 물을 올렸다.

“차가 없으니 양해해 주세요.”

관주가 말했다. 나도 밖에선 함부로 차를 마시지 않소, 이리 볼품없는 도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지. 노인은 미소만 지었다.

“괜찮소이다.”

노인은 투박한 도자기 잔에 담긴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노인은 작은 도관을 둘러봤다. 푸른 벽돌에 회색 기와를 보니 주인이 공들여 수리한 티가 났지만 낡고 오래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고, 영험한 기운보다는 저속한 기운이 느껴졌다. 도관이라는 곳도 역시 오가는 사람이 있어야 영험한 기운이 깃드는 법이다.

물을 마신 노인은 또다시 사탕 귤 두 알을 꺼냈다. 잠시 머뭇거리던 노인은 결국 한 알만 먹고 나머지 한 알은 도로 넣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밖에는 벌써 나귀 마차가 당도해 있었다. 노복은 노인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했고, 관주는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 배웅했다.

“정말 고맙소.”

노인의 말에 관주는 얼른 답례했다.

“정말 고맙소.”

노인은 한쪽 옆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나귀 마차는 천천히 멀어졌다.

“저 어르신은 정말 예의가 바르시네요. 고맙단 인사를 두 번이나 하시다니요.”

도동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는 우리한테 한 인사가 아니었어. 그 낭자한테 한 인사지.”

한 여도사가 도동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으며 말했다.

“사저, 그 낭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산에 사는 선인이에요?”

도동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산나물을 뜯으러 함께 가지 않은 게 몹시 후회스러웠다. 선인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도동의 말에 여도사들은 저도 모르게 산 위를 올려다봤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 산을 환히 비추는 가운데 나무숲 사이로 숨어 있는 작은 도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순간 흥이 깼다. 저리 더럽고 불결한 여인이 있으니 선인도 떠나 버리겠지!

몸종이 솥뚜껑을 열자 푹 익은 고기가 솥 안에 들어 있었다. 몸종은 천으로 받쳐 고기를 꺼내고 밥도 한 그릇 담았다. 이어 옆에 있는 독에서 짙푸른 색의 장아찌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몸종은 아궁이의 불이 꺼졌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야 쟁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대청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아씨, 식사부터 하세요.”

몸종은 무릎을 꿇고 펼쳐 놓은 책장을 보며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책 보는 거 안 서두르셔도 돼요. 새해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한 쪽은 다 읽으실 수 있을걸요.”

정교랑은 피식 웃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이 몸종은 예전 그 애처럼 지나치게 조심스럽진 않았고 농담도 곧잘 했다.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라는 게 다 이렇다. 낯선 사람이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사람이 낯설어지고.

정교랑은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어 밥 위에 올려놓은 다음 또다시 장아찌를 집어 살짝 섞더니 입에 넣었다.

“그 사람이 관주와 정을 통하는 사내니?”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아직 시집도 안 간 규수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몸종은 아씨가 이런 쑥스러운 얘기를 꺼낼 줄은 예상 못 했다. 더구나 아씨는 오늘 밥은 좀 질다는 말을 하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렇겠죠.”

몸종의 대답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밥을 먹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반근 언니, 반근 언니.”

관주가 거둔 어린아이였다. 몸종이 일어나 나갔다.

“관주님이 잠깐 오래요.”

아이가 쭈뼛쭈뼛 말했다. 몸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안에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은 몸종을 향해 젓가락을 내저었다.

“네, 다녀올게요.”

몸종은 문을 닫고 나가 아이를 따라갔다. 둘이 자리를 뜨자 다른 한 아이가 한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좌우를 살피더니 굳은 결심을 한 듯 살금살금 걸어와 문을 반쯤 열었다. 그러더니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 후다닥 달아났다.

문소리를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들었지만 반근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잠시 있다가 식사를 계속했다.

“그 몸종을 데려다 밥을 먹는다고 해서 날 내쫓을 것까진 없잖아. 같이 먹으면 좀 좋아.”

사내는 뒷문으로 불쑥 들어오며 답답한 듯 투덜거렸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고 말이야. 난 아직 배불리 먹지도 못했는데.”

사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반쯤 열린 문을 쳐다봤다. 그 바보 낭자가 사는 곳이네. 바보 낭자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이른 아침에 보았던 생전 처음 본 눈부신 미모가 사내의 눈에 언뜻 스쳤다. 무엇보다도 바보란 말이지. 바보, 아무것도 모르는.

호흡이 가빠진 사내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가을인데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 통에 사내는 옷섶을 풀어헤쳤다. 털이 무성하고 까무잡잡한 가슴이 드러났다. 사내는 문이 반쯤 열린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낭자.”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청 안을 쳐다봤다.

“우리 강주성 생선이 엄청 유명하거든. 예전에 물이 많을 땐 우리 집 대문 밖에 나가 아무렇게나 낚싯대를 던져도 고기가 잡혔다니까.”

관주는 방금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싱싱한 생선을 가리키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몸종은 아, 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희 아씨는 식사했지?”

관주가 물었다.

“네, 지금 들고 계세요.”

몸종은 걸음을 옮기려 했다.

“별일 없으시면 아씨 시중들러 갈게요.”

“에이, 어차피 혼자 먹으니까 혼자 먹게 둬. 자, 이리 앉아. 여기서 나랑 같이 먹자.”

관주는 웃으며 젓가락을 건넸다.

“매일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이랑 찬밥만 먹다니 딱해라.”

“아니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주님.”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문밖에서 아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장작 어디 있어?”

“아저씨가 가지러 가지 않았어?”

“아, 그래? 나 반근 언니네서 아저씨 봤는데.”

“반근 언니네 먼저 가져다주나 보지. 기다려 봐.”

두 사람은 방에서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가 곧 안색이 싹 변했다. 몸종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던 몸종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눈물범벅이 된 몸종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관주 역시 곧바로 뒤따라 나오더니 손을 들어 마당에 서 있던 아이 하나의 따귀를 때렸다.

“망할 것, 왜 아저씨를 안 불렀어!”

아이를 혼낸 관주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 망할 놈이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낭자, 내가, 같이 놀아 줄까? 나비를, 잡아 주면 어때?”

사내는 대청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단정히 앉아 밥을 먹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품이 넓은 수수한 옷차림에 가지런히 풀어 놓은 흑발은 어찌나 풍성한지 바닥까지 닿았다. 소녀는 조용히 젓가락을 들며 이쪽을 쳐다봤다.

바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와 같다. 마을에서도 그런 바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저 먹고 놀며 멍청하게 웃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돌멩이를 주며 얼렀더니 사탕인 줄 알고 먹다가 이가 빠진 일도 있었다.

“이 오라비가 사탕 줄게. 사탕 먹지 않을래?”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마침내 회랑 아래까지 왔다. 소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수록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사내는 나무 난간을 짚고 엉거주춤 앉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눈앞의 소녀는 입을 씰룩이며 웃는 듯했다. 웃는 거야? 웃었지? 역시 이 방법이 잘 통하네!

사내는 목이 탔다. 이 해맑은 소녀에게선 다른 바보들처럼 역겨운 느낌이 전혀 안 드네. 그냥 보기만 하는 건 안 되겠어. 사내는 입술을 핥았다.

“낭자, 이 오라비한테 사탕이 있거든. 먹을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사내는 몸이 달았다. 사타구니 밑이 불끈 솟자 사내는 한 손으로 잡고 주무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섬돌을 짚더니 훌쩍 뛰어 올라왔다. 대청 안의 정교랑은 입에 넣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빼 손에 쥐고는 사내를 조용히 바라봤다.

문밖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렸지만 사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미 대청 안으로 들어선 사내를 본 몸종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더니 옆에 있던 빗장을 들고 달려들었다. 몸종은 말도 나오지 않는지 비명만 내지르며 사내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흠칫 놀란 사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연달아 두 대를 맞았는데 여자라 힘이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그 광기 어린 모습은 놀라기에 충분했다. 사내는 얼른 물러났다.

“오해야, 오해. 난 장작을 가져왔는데, 이 바보가 날 불렀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해서 들어온 건데.”

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이성을 잃은 몸종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 망할 놈을 패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겁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사내도 부아가 치밀었다. 어차피 조만간 내 노리개가 될 계집인데, 조그만 게 어디서 이리 방자하게 굴어! 사내가 잽싸게 손을 놀려 빗장을 낚아챘다.

“망할 년, 맞아야 정신을……·.”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가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또 들렸다.

“황이낭, 지금 뭐 하는 거야!”

관주는 아이에게 소리치는 시늉을 했다.

“어서 정씨 댁 대노야와 이노야께 알려라. 감히 정씨 가문에 행패를 부리는 놈이 있다고!”

사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여긴 정씨 가문의 소유였지! 상대는 정씨 집안 아씨고,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아랫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측실 소생도 아닌 정실부인의 혈육 아닌가! 이 일이 새어 나갔다간 맞아 죽을 터였다.

“오해입니다, 오해요. 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여길 지나는데 이분이 부르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와 본 거라니까요!”

사내는 높이 쳐들었던 빗장을 바닥에 확 내던지고는 억울하다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빗장을 빼앗기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던 몸종은 울면서 사내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관주가 얼른 몸종 앞을 막아섰다.

“황이낭, 앞으로 장작 가져올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져!”

관주는 사내에게 소리치고 나서 몸종을 달랬다.

“겁낼 것 없어, 내가 있잖아.”

네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 몸종은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관주는 깜짝 놀랐고 머리채와 얼굴을 붙잡혔다.

“미쳤네, 미쳤어. 얼른 얘 좀 말려.”

관주가 소리쳤지만 사내는 이미 도망친 후였고, 아이들은 겁을 먹은 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몸종에게 붙잡힌 관주는 여기저기 찢기고 뜯긴 후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몸종을 보고 관주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너희가 잘 지켜보고 위로해 줘. 난 저놈 도망갔나 보고 사람 불러올 테니까.”

관주가 나가자 두 아이도 겁을 먹고 재빨리 도망쳤다. 몸종은 쫓아가려다가 힘이 쭉 빠진 듯 몇 걸음 못 가고 넘어져 대성통곡을 했다.

이런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밥을 먹었다. 정교랑은 식성이 까다로워 좋아하지 않는 음식은 입에도 안 댔지만,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싹싹 비우곤 했다. 정교랑이 마지막 밥풀 하나까지 다 먹었을 즈음 몸종이 울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아씨, 아씨, 아무 일 없으셨죠?”

몸종은 울면서 묻다가 퍼뜩 생각했다. 일이 있고 없고가 다 무엇인가. 규방 여인이 이런 취급을 당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치인데 정말 꼭 ……·을 당해야 일이 있는 것일가? 몸종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으며 절을 올렸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어요.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몸종은 울며 잘못을 빌었다.

“반근!”

정교랑이 소리치자 몸종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아씨, 하실 말씀, 있으세요?”

“밥 더 줘.”

정교랑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릇은 싹 비워져 있었다. 몸종은 그릇을 하나씩 거두고 국물을 한 그릇 올려놓았다.

“아씨, 배즙이에요.”

몸종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숟가락으로 천천히 떠 먹었다. 몸종은 옆에서 또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씨, 우리 돌아가요. 우리 돌아가서 노야와 부인께 말씀드려요. 못 돌아가게 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어리석은 소리.”

정교랑이 말했다. 간신히 나왔는데 뭐 하러 돌아가.

“저 천박한 연놈이 너무 가증스러워요. 너무 가증스럽다고요!”

우느라 눈이 퉁퉁 부어오른 몸종과 달리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맷돌로 갈아 만든 배즙은 어찌나 투명한지 고개를 숙이면 배즙에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 아래로 먹물처럼 진하고 긴 눈썹과 함께 더욱 심원해 보이는 두 눈이 드러났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살려 둬선 안 되지.”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몸종을 바라보며 물었다.

“반근,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반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소인더러 나가 죽으라 하셔도 소인은 할 거예요.”

정교랑은 입을 오므리며 피식 웃었다.

“왜 네가 나가 죽어? 죽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데.”

* * *

어둠의 장막이 내릴 무렵, 정전 담벼락 모퉁이에 서 있던 몸종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산이라 그런지 가을이 되자 집에서 지내던 때보다 훨씬 추웠다. 몸종은 어깨를 움츠리며 끌어안았다. 산속의 밤은 다른 곳보다 훨씬 어두컴컴하고 조용해서 이름 모를 산짐승의 울음소리 역시 한층 더 또렷하게 들렸다.

마침내 이까지 덜덜 떨리게 됐을 즈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몸종은 얼른 숨을 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워 담벼락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몸종은 그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겉 같았다. 몸종의 몸이 또다시 떨려 왔다. 몸종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누르며 분노와 공포의 마음을 삭였다.

커다란 체구의 사람 하나와 작은 체구의 사람 하나가 저쪽 마당에서 휙 지나가는가 싶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몸종은 또다시 잠시 기다린 다음에야 몸을 떨며 도망쳤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 가며 간신히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 몸종은 잽싸게 빗장을 걸었다. 문에 기대 헉헉 숨을 몰아쉬던 몸종은 문득 회랑 아래에 선 사람의 형체를 발견하고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나야.”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가슴을 치며 몇 번이나 숨을 고른 후에야 진정했다.

“아씨, 여기 서서 뭐 하세요?”

몸종은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기대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은 버선만 신은 채로 회랑 아래에 서서 말했다.

“하늘을 보고 있었어.”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들어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밤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 별빛 하나 없었다. 몸종은 시선을 거뒀다. 저게 뭐가 예쁘다고.

“아씨, 날이 차요. 신도 안 신고 여기 서 계시면 안 돼요.”

몸종은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침상 앞에 앉았는데 몸종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씨, 그 망할 놈이 진짜 왔어요.”

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하죠?”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이 쉽겠네.”

나쁜 놈이 왔는데 일이 쉽다고? 몸종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묻지 않고 등불 아래의 아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치욕스럽고 무서운 일을 다른 여인이 겪었다면 분노와 슬픔을 못 이겨 진작 눈물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씨는 시종일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몸종은 불안에 떨던 마음이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보가 위안이 된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게다가 의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니.

“그 사람이, 안 왔다면, 그게 오히려 위험하지. 이판사판으로 나가겠단 거니까. 그랬다다면, 우리에게 시간이 없었어.”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몇 마디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랬다간 이 몸종이 계속 불안에 떠는 통에 오히려 실수를 피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왔다는 건, 겁이 난단 뜻이야. 그 여인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려는 거지. 분명 바보인 나를 상대하기 위한 대책일 거야. 이 일을 오해였다고 말하고, 널 위로하면서, 네가 이 일을 소문내지 못하도록 하겠지. 그렇다면, 저들은 우릴 괴롭히지 않을 거야. 우리는 당분간, 안전할 테고.”

말뜻을 퍼뜩 깨달은 몸종은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

“그런지 아닌지는 내일 보면 알 거야.”

정교랑은 천천히 누우며 말했다. 길게 말한 탓에 완전히 지쳐 버렸다. 몸종은 얼른 베개를 정돈하고 얇은 이불을 덮어 준 다음, 눈을 감은 정교랑을 보며 침상 앞에 앉았다. 정교랑이 방금 한 말을 생각하던 몸종은 별안간 몸을 곧추세워 똑바로 앉았다.

“아씨, 우리가 당분간 안전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다음에는요? 저들이 또 우리에게……·.”

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운 정교랑은 꼼짝도 하지 않고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잠이 든 것 같아 몸종은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이 일이 무섭기로 따지자면 아씨가 자신보다 더 무서울 텐데 이렇게 자꾸 그 일을 떠올리게 해서는 안 되지 싶었다. 몸종은 불을 끄고 휘장을 쳤다.

이제 일상의 모든 일은 몸종 혼자의 몫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장아찌를 담그는 등 낮에 못다 한 일은 전부 저녁 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부엌에 불이 켜지고 작은 형체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방 안에 있는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눈을 떴다.

“그다음? 그다음엔 아마 그자에게 기회가 없을걸.”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날이 밝았다. 오늘도 밖으로 산책을 나가겠다는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거의 울상을 지었다.

“아씨, 우리 그냥 집에 있어요.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몸종이 말했다.

“집에 있으면, 무슨 위험이 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고, 대응책도 없어. 그게 가장 위험한 거야.”

정교랑은 몸종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가자, 겁낼 것 없어.”

정말 겁내지 않아도 될까? 몸종은 덜덜 떨며 문을 열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빗장을 집어 들었다.

“아씨, 용서하십시오. 아씨, 용서하세요.”

문 앞에 꿇어앉은 사내가 쾅쾅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렸다.

“어제 일은 전부 제 잘못입니다. 아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으니 때리셔도 좋고 벌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목숨만 살려 주세요.”

사내는 울며 호소했다.

“집에 팔순 노모와 세 살 난 아들이 있습니다. 집안 식구가 전부 저 하나만 의지해 살고 있어요. 아씨,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옆에 선 관주 역시 매서운 목소리로 사내를 꾸짖으며 거들었다.

“아씨의 심기를 그리 건드리고도 살아남길 바라느냐?”

“도사님, 부디 살펴 주십시오. 어제는 정말 아씨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들어가 봤던 겁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사내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못 믿겠으면 아씨께 여쭤보세요.”

“우리 아씨께서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시니 네가 우기면 그만 아니냐. 무슨 수로 대질을 해?”

관주가 호통을 쳤다.

“그렇다고 도사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거라고 할 순 없잖습니까. 전 정말 억울합니다!”

사내는 정말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몸종은 그 광경을 보고 들으며 열이 받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바로 두 연놈이 어젯밤에 생각해 낸 대책이렷다! 아씨가 바보인 줄 알고 모든 책임을 아씨에게 떠넘기려는 것이었다. 자기네 말은 다 맞고 바보의 말은 다 틀린 거니까.

다만 저들은 아씨는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몸종은 빗장을 꼭 쥐고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한발 먼저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러 가자, 나비 잡으러 가.”

몸종은 멈칫했고 관주 역시 멈칫했지만 꿇어앉은 사내만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봐요, 보십시오. 어제도 이 말씀을 하셨어요!”

사내는 손을 뻗어 정교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제 절 부르며 들어오라고 하더니 나비를 잡아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산에는 나비가 없다고 하니까 울며 떼를 쓰셨죠. 저는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달래 드리러 들어갔는데 그때 두 분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때린 거예요!”

정말 뜻밖이었다. 이 바보가 말을 할 줄 알다니, 그것도 아주 적절한 때에 꼭 필요한 말을 해 줬어. 사내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몸종은 속으로 놀랐으면서도 아씨의 뜻을 알아듣고 빗장만 높이 쳐든 채 앞으로 더 다가서지는 않았다.

“그, 그래도 우리 집 마당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죠. 우리 아씨는 바보고 아무것도 모르시지만, 당, 당신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공이다! 관주와 사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씨가 바보인 줄 몰랐잖소.”

사내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됐네, 황이낭. 챙길 거 다 챙기면서 잔머리까지 굴리진 말라고. 자네가 식구들이랑 힘겹게 사는 형편을 아니까 장작을 대며 돈을 벌게 해 준 건데, 어디 법도도 모르고 도관을 함부로 돌아다녀!”

관주는 사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사내는 입을 삐죽거리며 못마땅한 듯 말없이 서 있었다.

“그래, 그래. 오해로 밝혀졌으니 반근 낭자도 그만 화 풀어.”

이어 관주는 사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냉큼 꺼지게. 목숨만은 살려 주지. 앞으론 장작 가져올 필요 없어.”

사내는 우물쭈물하며 뭐라고 툴툴거리더니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관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웃으며 반근 손에 들린 빗장을 빼앗았다.

“그래, 그래. 내가 내쫓았으니 앞으론 도관에 얼씬도 못 할 거야. 반근 낭자도 그만 화 풀어. 다 내 잘못이야.”

반근은 빗장을 들어 여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걸 아랫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참았다.

“놀러 가자, 놀러 갈래.”

정교랑이 뒤에서 말했다. 반근은 손을 풀며 정교랑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관주를 바라봤다.

“그래, 그래, 착하지. 이번엔 정말 많이 놀랐을 거야. 이따 저녁에 내가 음식 몇 개 해서 갖다 줄 테니까 마음 풀어.”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관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씨 모시고 놀러 갈게요.”

“그래, 그래, 가 봐.”

관주는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탄식했다.

“정말 고생이 많아.”

몸종은 대꾸하지 않고 정교랑을 부축해 가 버렸다. 두 사람이 마당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관주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뭐랬어. 바보 하나에 어린애 하나인데 달래기 힘들 것도 없지.”

말을 마친 관주는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

담벼락에 있던 두 아이가 장작 위에 천천히 앉았다.

“언니, 우리 도망치자.”

이번엔 언니도 대답이 없었다. 아직 새벽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두 아이는 바들바들 떨며 앉아 있었다.

정교랑은 도관을 두 바퀴 돌았다. 예전과 달리 이번엔 아주 천천히 걸으며 수시로 걸음을 멈췄다. 근심이 있는 몸종 역시 마음이 딴 데 가 있다 보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곤 하는 정교랑과 부딪치기 일쑤였다.

“아씨, 힘드세요?”

몸종이 부축하며 얼른 묻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 높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도관이 작게 보였다. 몸종은 정교랑을 따라 멍하니 쳐다봤다.

“저기 봐, 저기 지붕이 망가졌네.”

정교랑이 말했다. 엥? 멈칫한 몸종이 제대로 쳐다봤다. 좀 낡고 오래되긴 했어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근데 이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햇빛이 점점 밝아지자 몸종은 정교랑에게 너울을 씌워 주고 도관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입구에 채 도착하기 전, 구석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왔다. 아직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몸종은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비명을 내지르며 정교랑을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튀어나온 사람이 되레 놀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상대는 12~13살쯤 된 소년이었는데 낡은 무명 홑옷 차림으로 어리벙벙한 모습이었다.

“청매 누나?”

소년이 물었다. 몸종이 반근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청매였다.

“우리 누나는 춘란인데 누나 심부름으로 왔어.”

소년의 말에 몸종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게 뭐야?”

몸종은 소년이 건네는 쌈지를 받으며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우리 누나가 갖다 주라고 한 돈이야.”

소년이 말했다. 청매는 쌈지를 열어 안에 든 쇄은 몇 개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네 누나가 나한테 돈을 왜 주는데?”

몸종이 물었다. 몸종은 정씨 저택에 있을 때 신분이 낮았기에 공자를 모시는 몸종과는 자연히 격이 달랐다. 공자를 측근에서 모시는 몸종들은 평상시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는 집에서 쫓겨난 처지고 평생 돌아갈 길도 요원해 보이는데 돈을 보내 줬다고? 이게 무슨 뜻이지?

“누나한테 주는 건 아니고.”

소년이 말했다.

“우리 누나가 예전 그 반근 누나한테 은혜를 입었는데, 떠나기 전에 우리 누나한테 아씨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거든. 밖에 나와 지내니 고생할까 봐 돈을 좀 모아서 보내는 거야. 아씨한테 맛있는 거 해 드리라고.”

무슨 일인지 이해한 몸종은 저도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져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바보를 따르더니 정상이 아니네. 갑자기 비명을 지르질 않나, 눈물을 보이질 않나.

“네 누나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몸종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정씨 저택에 있는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아씨를 염려하는 몸종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예전 그 반근에게 부탁을 받았다고는 하나 사람이 떠나면 인정도 사라지는 법, 남에게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말이다.

“고마워할 것 없어. 난 집 뒤쪽 골목에 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날 찾아.”

말을 마친 소년은 뒤돌아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만.”

쭉 뒤쪽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소년은 멈칫하고 너울을 쓴 채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여인을 뒤돌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날 부른 거야?”

소년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래.”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돈을 돌려줘.”

몸종과 소년은 멈칫했다. 전에 있던 그 몸종에게 아직 화가 안 풀렸을 테니 그 은혜를 입고 싶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몸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 하고 대답한 후 소년에게 쌈지를 건넸다.

“왜 이러세요?”

소년은 멍한 채로 말했다.

“네가, 도와줄 일이 있다. 이건 네게 주는 품삯이야.”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과 소년은 둘 다 멈칫했다.

“뭘, 뭘 도와달라는 건데요?”

소년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여기 지붕이 망가졌거든. 미장이를 불러다가 지붕을 수리하도록 해 줘.”

정교랑이 말했다. 지붕이 망가진 게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지? 몸종은 놀라 정교랑을 바라봤다.

사내가 방 안으로 훅 들어올 때 관주는 침상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움직임 소리에 눈을 뜬 관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낮에, 어떻게 들어온 거야!”

관주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사내는 위에서 몸을 내리누르고는 웃으며 여인의 몸을 어루만졌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잖아. 어떻게 안 와. 며칠이나 안 했더니 몸이 달아 죽겠어.”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여인은 몇 번 밀어내려고 애쓰다가 안 되자 결국 부둥켜안았다.

“좀 피해 있으라니까. 내가 그 몸종을 다독이고 나면 그때 오라고.”

여인이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 애송이 몸종은 당신 손바닥 안에 있잖아.”

사내는 침상 위에 누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여인은 흥 콧방귀를 뀌며 사내를 흘겨보고 주먹을 들어 매섭게 내리쳤다.

“무슨 짓이야?”

복부를 가격당한 사내는 고통을 호소하며 소리쳤다. 여인은 사내를 무섭게 노려봤다.

“진짜 가리는 게 없네. 어떻게 바보까지 탐내냐고!”

여인이 원망하자 사내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얘기가 나오면서 자연스레 그 바보의 미모를 떠올리니 억누르고 있던 불길이 순식간에 화르르 타올랐다. 그리 예쁘게 생긴 바보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인지. 그렇담 침상에서도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고. 사내는 일어나 여인을 어루만졌다.

“바보인데 그냥 버리긴 아깝잖아.”

사내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여인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이 있는데 내가 아쉬워서 어떻게 죽어.”

사내는 웃으며 여인에게 입을 맞추고 달래 주었다.

“이 도관은 전부 당신이 좌지우지하잖아. 정씨 가문에서도 바보를 여기에 버렸다는 건 상관 안 하겠단 뜻이고. 정씨 가문에서도 내친 애를 뭐 하러 아씨로 떠받들어. 착하지, 그러지 말고 나도 덕 좀 보자.”

여인은 어루만지는 손길을 당해내지 못하고 애증의 눈길로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딱히 돈도 없었다. 이 사내를 꽉 붙잡아 두려면 새로운 맛을 보여 주는 수밖에.

몸종 하나에 바보 하나 정도는 손안에 두고 휘어잡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일이 성사되더라도 저들이 소문을 낼 리 없고 이 사내를 꼬셔 자기 것으로 만들려 애쓰지도 않을 테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몸종을 굴복시키기 전까진 일단 바보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

여인은 손을 뻗어 사내의 이마를 쿡 찍으며 말했다. 사내는 뛸 듯이 기뻤다. 선이 있으면 후가 있는 법, 선후가 어찌 되든 간에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기쁜 일이었다. 사내는 여인을 끌어안고 내리눌렀다.

“내 수완이 어떤지는 당신도 알잖아. 장담하는데 그 계집애가 일단 맛을 보면 밤낮없이 그리워하게 될 거야.”

사내는 음흉하게 웃었다. 여인은 그 말에 내심 질투가 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몸을 반듯이 누우며 사내에게 응했다.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여럿이 웅성거리는 듯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놀란 두 사람은 얼른 옷을 걸치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밖에 누구야?”

여인은 당황하여 소리쳤다.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꽤 들리는데, 설마 그 계집이 가서 고자질하는 바람에 정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낸 건가? 아니야, 애들보고 그 둘을 단단히 감시하라고 했는데 별다른 낌새는 없었잖아? 용기를 내어 마당으로 나온 여인의 눈에 광주리를 들거나 밧줄을 진 사내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건물을 수리하러 온 거예요?”

놀란 여인이 물었다.

“네.”

몸종이 뒤쪽에서 급히 나오며 대답했다.

“관주님, 우리 쪽 건물이 낡아 비가 새서 수리하려고 사람을 불렀거든요. 관주님 쪽도 같이 수리하려고요.”

돈도 안 냈는데 건물을 수리해 주겠다니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지. 그렇지 않아도 요새 비가 많이 와서 사람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그럼 같이 수리해 줘.”

뒤에 서 있던 두 아이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실망이 가득 담긴 눈길이었다. 그 소년이 온 게 기회인 줄 알았는데, 건물을 수리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돌려보내다니. 바보네, 역시 바보였구나.

건초와 마른풀을 짊어진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면서 길 위는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지 연유를 알아본 대현묘관 사람들은 산 위에 있는 소현묘관에서 지붕을 수리한다는 소식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저 여인이 돈은 또 어디서 났나 몰라.”

여도사의 말에 도동이 중얼거렸다.

“먹고 마실 걱정이 없으니 건물까지 수리하는 거겠죠.”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여도사 하나가 돌연 문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좀 봐, 저기.”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터라 밖으로 난 길이 한눈에 보였다. 12~13살쯤 된 소년이 좌우 양손에 연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연이 뭐 볼 게 있다고?”

도동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 계절엔 잘 안 보이지만 아주 드문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저 여인 말이야.”

여도사가 말했다. 여인? 모두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어린 낭자 하나가 그 소년을 맞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손에 있는 연을 들어 보이며 이 정도면 괜찮냐고 묻는 듯했다.

“어머나, 그 낭자네!”

한 여도사가 소리쳤다.

“누구요?”

도동은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그 낭자 말이야. 산에서 그 노인한테 사탕 귤을 줬던 낭자.”

여도사가 말했다. 선인이구나! 도동은 놀라며 얼른 밖으로 뛰어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급히 뛰어나갔고 관주도 따라갔다.

“그 낭자가 맞는다면 그 어르신 대신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왔을 무렵, 그 낭자와 소년은 이미 가 버린 후였다.

“저기, 낭자.”

소리쳐 부르려던 여도사는 그들이 산 위의 소현묘관 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이어 진흙 광주리를 등에 멘 사내 둘이 뒤따라 올라갔다.

“낭자, 짚은 오후나 돼서야 올 겁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안 돼요. 오후엔 꼭 끝내야 해요.”

사내들의 말에 몸종이 대답했다. 대현묘관 밖으로 나온 여도사들은 이들이 말을 주고받으며 산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 그 선인이 소현묘관에 사는 거예요?”

도동은 고개를 돌려 사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인은 그런 곳에 안 살아!”

여도사들은 곤혹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한 표정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있어 건물을 수리하는 게로구나.”

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종은 손에 연을 들고 먼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씨, 아씨. 이거 괜찮아요?”

몸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커다란 제비도 있어요.”

소년도 손에 연을 들고 뒤따라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진짜 바보네,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걸 갖고 놀아. 마당에 서서 미장이들이 지붕을 수리하는 모습을 보던 관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반근.”

잠시 생각하던 관주는 몸종을 불렀다.

“아씨 데리고 나가서 놀아. 여기 어수선하니까.”

마당에 있던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얼마 안 가 너울을 쓴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왜 안 날지?”

“아씨, 바람이 없잖아요.”

“날아야 해, 날아야 하는데.”

“청매 누나, 내가 해 볼게. 난 달리기가 빠르잖아.”

연이은 며칠 동안 산 위에서는 몸종과 소년, 그리고 그 바보가 소리치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는 연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움직였지만 얼마 날지 못하고 곧 떨어졌다. 한번은 관주의 어깨에 부딪치며 떨어진 적도 있었다.

“어이구, 지금은 이런 거 갖고 노는 계절이 아닌데. 산에서는 이런 거 갖고 놀면 안 되기도 하고.”

늙은 인부 하나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 거 모르는 애예요. 자기가 기쁘고 좋다니 내버려 두는 거죠.”

관주는 웃으며 말했다. 인부들도 이곳에서 며칠 지내며 그 낭자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엾기도 하지.”

인부들은 나지막이 수군거렸다. 바보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아무것도 모르겠지.

밤의 어둠이 내리자 인부들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방 안 있던 몸종이 긴 쇠막대를 소년에게 건넸다.

“이걸 지붕 위에 꽂아 놓으라고?”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응, 예전에 노마님이 그러셨거든. 아씨께서 계시는 곳에는 이게 있어야 한다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정신침(定神針)이야. 이게 있어야 아씨의 영혼이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대.”

몸종은 말을 덧붙였다.

“예전 그 반근 낭자가 부탁하고 간 거야.”

소년 역시 시시콜콜 따지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돈을 받았으니 일을 해 줘야지. 이렇게 큰돈을 번 건 처음이라 어른이 된 듯 우쭐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좋아, 내가 가서 할게.”

소년은 쇠막대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조용히 꽂아야 해. 남들이 못 보게. 누가 보면 효과 없어.”

몸종의 당부에 소년은 알았다고 한 후 후다닥 뛰어나갔다.

일을 마친 관주는 한숨 돌렸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 감독하는 것도 꽤 고단한 일이네, 그래도 며칠 후면 끝나니 다행이야. 관주는 두 아이에게 사람들이 가면 문단속을 하라고 시킨 후 먼저 안으로 쉬러 들어갔다. 관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사내가 술 주전자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사내는 인부들이 일하는 기회를 틈타 몰래 끼어 올라와 진흙을 개고 물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물론 이런 중노동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내려갈 때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가 아예 눌러앉기엔 그만이었다.

“사람들 아직 다 안 갔는데 왜 들어와!”

깜짝 놀란 여인은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아무도 못 봤어.”

사내는 신경도 안 쓰이는 듯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누가 좀 보면 어때? 자기 일도 아닌데 누가 나선다고.

“자, 여도사님 고생 많으셨는데 이리 와서 술 한잔하며 피로 좀 풀어요.”

사내가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관주는 사내를 노려보면서도 역시 긴장을 풀었다. 침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인간만 없으면 될 일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어쩔 텐가, 어디 말해 보라지. 왜 애먼 사람에게 오명을 씌우냐고 되레 큰소리를 치면 그만이다. 그녀에게 오명을 씌운다는 건 곧 정씨 가문에 오명을 씌운단 뜻인데, 이 강주부에서 감히 북정에 맞설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두 사람이 막 술을 따르는데 지붕 위에서 꽝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가 봐야겠네.”

관주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에이, 그 인부들이 철수하다가 깜빡한 물건이 있어서 다시 올라갔나 보지.”

사내가 말했다. 그런가?

“다 간 거 아니었어?”

“아직 하나 남았어요.”

관주가 밖을 보며 묻자 아이가 밖에서 떨며 대답했다. 사내는 관주에게 내 말이 맞지 않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두르라고 해. 날도 어두운데.”

관주가 소리치자 아이가 밖에서 네 하고 대답했다. 마당은 곧 조용해졌고 작은 도관에 어둠이 내렸다.

마당의 불빛이 희미한 가운데 몸종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아씨, 저쪽에 가서 채소를 꿔 오라고요?”

“응.”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대답했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무슨 채소인지 묻지도 않은 채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 사내가 분명 거기 있을 거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아씨가 물었을 때 몸종은 대답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못 할 일이 뭐 있겠냐고. 아씨는 죽으라고 하지 않고 심부름을 시켰다. 뭐가 됐든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들어와서 같이 술 한 잔 마시자고 하면, 한 잔 마셔야 해.”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딱 한 잔이어야 해. 더 붙잡으면, 이렇게 말해. 비가 올 것 같아서 아씨랑 같이 있어야 한다고.”

몸종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바깥의 하늘을 바라봤다. 벌써 며칠째 맑은 날이 계속됐고 푹푹 찌는 무더위는 한여름에 버금갈 정도였다. 밤이라 좀 서늘하고 달이나 별도 안 뜨긴 했지만, 비가 올 조짐은 전혀 없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네.”

대답을 마친 몸종은 밖으로 나왔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였지만 몸종에게는 한평생이라 느껴질 만큼 긴 거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긴 거리라 해도 끝은 있는 법이었다. 마당 문 앞에 서자 사내와 여인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몸종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언뜻언뜻 들리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순간 뚝 그쳤다.

“누구세요?”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몸종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말했다.

“나 반근이야. 채소 좀 빌리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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