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60)

-과오-

가리개의 천을 든 정교랑의 귀에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가 우나 봐요?”

뒤에 걷던 몸종이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며 물었다. 이쪽 마당은 정씨 가문의 가장 북쪽으로 지대가 높은 편이었다. 본디 정찰과 방호에 쓰이는 곳이지만 태평성대라 쓸모가 없었다.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울음소리는 동쪽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노부인 쪽인가 봐요.”

몸종이 말했다.

“정씨 가문의 노부인?”

정교랑이 물었다.

“네, 집안일에는 관여 안 하시고 예불에만 전념하시는데 무슨 일일까요?”

몸종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내 알 바 아니지.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발을 들어 걸음을 옮겼다. 한 바퀴만 더 돌면 다섯 바퀴를 채우게 된다.

하지만 정교랑의 예측은 엇나갔다. 그 일은 정교랑과 관련된 일이었다. 노부인은 자신의 앞에서 흐느껴 우는 두 며느리를 보며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애초에 네 잘못이 아닌 일인데 맏이가 네게 사당에 가 반성하라는 벌을 내렸다고?”

노부인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투로 물었다. 방금 누구만 단독으로 부엌을 쓰게 해 주고 나머지는 안 된다는 일을 얘기 중이지 않았나? 왜 얘기가 여기로 튀어? 아니지, 아니지, 맨 처음엔 누가 부채를 샀다고 한 거 같은데? 꽃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엉망진창이구먼!

“다들 입 다물어라!”

노부인은 손에 든 염주를 팔걸이 책상 위에 무겁게 내려놓으며 호통쳤다. 며느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얼굴이 다소 수척하긴 해도 꽤 정정해 보이는 노부인은 두 며느리를 차례로 쳐다봤다.

“너희 마음에 응어리가 생긴 게 그 바보 때문이로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 바보의 몸종이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주씨 가문 사람이 기회를 틈타 소동을 부리고, 둘째 동서가 당시 일을 섭섭하게 여겨 자신에게 불만을 품었으니 말이다. 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일이 발단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애초에 집안일을 관리하는 형님이 그 바보의 모친이 남긴 혼수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하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주씨 가문 사람이 소동을 벌이던 때에 공연히 억울한 일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바보와 관련된 일인 건 사실이었다. 이부인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이런 망신이 있나! 그런 사소한 일로 싸우고 내 앞으로 달려왔단 말이냐! 너희 둘의 나이를 합치면 대체 몇 살인데!”

노부인은 계속해서 호통을 쳤다.

“첫째야, 네 잘못이다. 그때 네가 먼저 나서서 잘못했다고 말했어야지!”

“네, 제가 잘못했어요.”

대부인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둘째야, 네 아주버니가 왜 네 잘못이라고 했겠느냐? 네 아주버니는 사정을 알아도 주씨 가문 사람은 모르잖느냐. 그럴 때 남의 식구 앞에서 누구 잘못인지 세세히 따지고 넘어가야겠느냐? 그런 일로 섭섭하게 여기는 건 네 잘못이다.”

“네, 제가 잘못했어요.”

이부인은 눈물을 닦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노부인은 한숨을 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꽃은 둘째가 물리도록 해라. 화초는 마음이 기쁘려고 보는 것이니 귀천이 따로 없어. 보고 기쁘면 그 값이 천금이요, 안 기쁘면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이부인은 네 하고 대답했다.

“각 거처에 공급하는 식사나 간식, 과일에 대해서는 첫째 너도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라. 먹을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사치와 욕망을 다 채울 순 없다지만 먹을 것에 대해선 아끼지 마라.”

노부인의 말에 대부인은 네 하고 대답했다.

“우리 정씨 가문 형제들은 분가를 안 했지. 형제들은 밖에 나가서 일하니 별일 없지만 너희 며느리들은 부딪치며 살아야 하니 힘들기도 할 거야. 윗니 아랫니도 안 맞을 때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또 여인들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잘 보는 눈을 갖고 있지. 뭐가 있어도 입 밖으로 내긴 껄끄러워 속으로 담아 두고 있다 보니, 말 한마디면 풀릴 일로도 종국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도 해.”

노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희가 지금 속으로 어찌 생각하는지는 말 안 해도 내가 다 안다.”

노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두 며느리를 차례로 쳐다봤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상대방도 다 알 거야. 오늘 모르더라도 언젠간 알게 되지. 세상에 바보가 어디 있느냐. 그저 조금 일찍 알고 조금 늦게 아는 것뿐이야.”

대부인과 이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허리를 굽혀 네 하고 대답했다. 노부인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 바보는 하루빨리 내보내라.”

대부인과 이부인은 멈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 그러다가 주씨 가문에서 따지기라도 하면……·.”

대부인의 말에 노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못 따질 것이다.”

“며칠 전에도 그 바보 때문에 와서 소동을 벌인걸요. 그 일이 아니었으면 저랑 동서 사이에 틈이 생길 일도 없었어요.”

대부인의 말에 이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넌 저들이 그 바보 때문에 소동을 벌인 줄 아느냐?”

노부인이 노려보며 물었다. 응? 대부인과 이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설마 그 몸종 때문에 소동을 벌인 거라고?

“따분하던 차에 뭐 구경거리 없나 하고 왔는데 때마침 그 바보가 칼을 쥐어준 거야. 설마 그 바보를 위해 특별히 왔겠느냐.”

대부인과 이부인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애가 그 몸종을 왜 데려갔겠어? 그 애가 영리하게 군 게 마음에 쏙 들었던 게야. 어리석기는. 진심으로 그 바보를 위했다면 여기서 하룻밤도 안 묵고 떠났겠느냐? 그 바보가 먹고 입는 건 어떤지 말 한마디 묻기라도 했어?”

대부인과 이부인은 퍼뜩 깨달았다.

“너희가 속으로 켕기는 게 있으니 먼저 접고 들어간 거다. 켕길 게 뭐 있어! 그 바보는 정씨지, 주씨가 아니야! 우리 집 아이인데 어디서 주씨가 이래라저래라야? 간섭할 거면 데려가라고 해!”

대부인과 이부인은 얼른 몸을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그래, 겁날 게 뭐 있어! 이 집 아이인데!

“그리 말썽을 일으키는 바보를 애초에 여기 두질 말았어야지!”

노부인은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전에 있던 도관으로 돌려보내라!”

대부인과 이부인은 확실히 깨달았다.

* * *

“그 바보 때문에 노태야께서 울적해하다가 돌아가신 일이 있어서 노부인이 한스러워하셔.”

대부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미 노부인의 방에서 나온 후였다. 두 동서는 서로에게 사과하며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갔다. 이부인은 대부인을 부축하며 천천히 함께 걸었다.

“그러니 노부인께서 바보 문제에 있어선 한 치도 양보하실 수 없는 거지.”

이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내야 하나?”

대부인이 물었다.

“그래도 주씨 가문 사람이 와서 묻기라도 하면……·.”

“노부인께서 말씀하셨잖아. 저들이 와서 따지는 게 꼭 그 바보를 위해서만은 아닐 거라고.”

“사람이 싸우는 일은 결국 두 가지 때문이에요. 하나는 체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이죠.”

“체면, 이익?”

대부인의 물음에 이부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체면으로 인한 소동은 지나갔고 다음 소동은 아마도 이익 때문이겠죠.”

이부인의 손에 든 상아 부채는 어느덧 대나무 부채로 바뀌어 있었다. 이부인은 대부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예를 들자면 혼수요.”

혼수? 대부인은 멈칫했다. 여종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이부인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천것이!”

이부인은 이를 악물고 손에 든 부채를 꼭 쥔 채 대부인을 향해 억지로 웃음을 짜내 예를 표했다.

“형님,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말을 마친 이부인은 여종을 따라 뛰다시피 걸어 자리를 떴다. 대부인은 멍한 채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혼수라.”

대부인은 멀어져 가는 이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되뇌고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제 보니 혼수 때문이었구나!”

대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반근, 반근.”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대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대부인이 똑똑히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반근? 주씨 가문으로 간 그 계집이 아니더냐?”

“아니에요, 부인.”

한 여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새로 교랑 아씨 시중을 들러 간 몸종이에요. 교랑 아씨께서 반근으로 이름을 개명해 주셨어요.”

대부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바보로구나.”

대부인이 걸음을 옮기고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또다시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작고 짧게 끝난 걸 보니 누군가가 얼른 말린 모양이었다.

“또 무슨 일이지?”

대부인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여종 몇 명이 급히 알아보러 갔다. 대부인이 방으로 돌아와 앉자 여종들이 돌아왔다.

“이부인께서 이노야의 시녀를 팔아 버리신대요.”

여종들이 나지막이 고했다. 노련한 대부인은 그게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리고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저은 다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건 처음이군.

대부인은 극도의 피곤을 느꼈다.

체면 아니면 돈이라니, 생각이 천박하군. 예전엔 왜 저게 안 보였지?

결국 그 바보가 돌아와서 때문인 것이다. 한낱 바보 하나 때문에 성가신 일이 이렇게 줄줄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잔잔한 수면 위에 기름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섞이지도 않고 녹지도 않으면서 물 전체를 혼탁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바보를 집에 둬선 안 되겠어.

“그래서 도관으로 보내겠다고?”

대노야가 물었다. 몸종이 차를 올리자 대노야는 흡족한 표정으로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만녕사에 새로 온 스님이 덖은 차인데 부탁해서 좀 얻었지.”

“은자를 더 쓰면 되지, 그게 뭐 대수라고요.”

대부인의 말에 대노야는 피식 웃었다. 대노야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차였다.

“도관으로 보내는 건 내 뜻이 아니에요. 어머님의 뜻이죠.”

대청 밖에서 나이 많은 여종 하나가 들어와 대부인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전한 후 물러갔다.

“또 무슨 남세스러운 일이기에?”

대노야가 물었다.

“동서네가 노비를 팔아 버리나 봐요.”

대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이가 드니 청랑도 성격이 나오네요.”

“허튼소리.”

대노야는 못마땅한 듯 찻잔을 내려놨다.

“안 나설 거요?”

“내가 어떻게 나서요.”

대부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들어온 후로 집안이 아주 엉망진창이에요.”

“그럼 내보내면 되지.”

“주씨 가문으로도 사람을 보내 알려야 할까요?”

대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여종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대노야, 대부인,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왔습니다.”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더니, 또 왔다고? 대노야 부부는 흠칫 놀라 서로를 쳐다봤다.

이번에 온 주씨 가문 사람은 사내 넷에 여인 넷으로 지난번만큼은 아니어도 기세가 예전 주 공자에 못지않았다.

“주 노야와 부인께서 큰아씨의 혼수로 보낸 점포와 농토를 돌려받아 오라며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주씨 가문 집사의 말에 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멈칫했다.

“황당하군!”

이노야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호통을 쳤다.

“사돈어른, 고정하세요.”

집사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말을 이었다.

“전엔 교랑 아씨께서 돌아오지 않으시기도 했고 오래 못 사실 거라 생각해 따지지 않으셨는데, 이제 교랑 아씨께서 돌아오셨잖습니까. 나이가 찼으니 출가할 때 혼수를 해 가셔야 하고요.”

정씨 가문 부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바보가 출가를 한다고? 주씨 가문 사람들은 거짓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잘하는군.

“그래서 저희 노야와 부인께서 저희에게 직접 가서 큰아씨의 혼수를 정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교랑 아씨께서도 떵떵거리며 출가하시죠.”

집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집안에서 교랑의 혼수를 탐내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가?”

대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노야와 부인께선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교랑 아씨를 위하는 마음 때문이죠.”

집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하게 모르시는 거면 관부에 사람을 청해 혼수 목록과 직접 대조해 보도록 하죠. 사돈어른 내외께 괜한 오명을 씌울 수야 없잖습니까.”

“목록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을 게 뭐 있나.”

이부인이 입을 열었다.

“소상히 대조해 보도록 하게.”

어차피 자신에겐 득 될 게 없었던 일이니 좋은 구경거리가 아닌가.

“마침 잘 왔네.”

대부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가서 교랑부터 만나 보게. 며칠 후면 도관으로 요양하러 갈 거야.”

주씨 가문의 사람들은 멈칫했지만, 모든 걸 집사에게 맡기라는 당부를 거듭 듣고 온 터라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갑자기 도관엔 무슨 일로요? 소문이라도 나면 남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주씨 가문 집사가 물었다.

“뭐라고 하기는? 애초에 도사가 그 애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도관에서 지내야 무탈할 거라 했는데.”

이노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도 알지 않는가. 못 믿겠으면 경성에 좋은 의원이 많을 테니 데려가서 진맥을 맡겨 보든가!”

주씨 가문 집사는 웃으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당치 않습니다. 이노야의 혈육이니 알아서 잘하시겠죠. 소인은 잘 모르는 일이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집사가 잘못을 빌자 대노야와 이노야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씨 가문이 원하는 건 그저 이익뿐이군. 교랑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어.

“우리가 혈육인 걸 안다니 다행이군. 그래서 말인데 혼수를 그쪽에 맡기자니 마음이 안 놓여.”

대노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수씨는 세상을 떴다지만 교랑은 여기 있네. 그 애 부친은 물론이고 백부인 나도 이렇게 건재한데 어디서 주씨 성을 가진 자들이 이래라저래라야?”

이부인은 즉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부친이 있는데 어디서 백부가 이래라 저래라야? 그 혼수에 대해 제대로 따져 볼 때가 온 것이다.

다들 각자 머리를 굴리며 속으로 셈을 하기 시작했지만 하루 이틀 안에 매듭지어질 문제는 아니었다.

* * *

아랫것들은 혼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정교랑이 다시 도관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소식이 더 중요했다.

“뭐라고? 아씨를 도관으로 보낸다고?”

마당에 있던 정교랑의 몸종과 여종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도관 같은 곳에 가야 한다니, 그것도 바보를 따라가면 높은 확률로 거기서 평생 못 나올 수도 있잖아!

역시 이 바보의 시중을 드는 사람 치고 운 좋은 이가 없네. 전에 모시던 이들은 일가 전체가 쫓겨나질 않나, 이제는 평생을 도관에서 썩어야 한다고? 차라리 쫓겨나서 어디론가 팔려 가는 게 나을지 몰라. 이 바보는 정말 불운을 달고 다니는구나. 엮이는 족족 불운이 옮잖아! 마당에 있던 몸종과 여종은 허둥지둥 달려나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한편 회랑 아래에 앉은 몸종은 평온한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몸종은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얼른 들어갔다. 정교랑이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씨, 깨셨어요?”

몸종은 얼른 다가가 부축하여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을 씻게 한 후 창가 앞 팔걸이 책상에 앉혀 주었다. 이어 따뜻하게 끓인 물을 건넸다. 몸종은 그 모든 과정을 능숙하게 해냈다.

“아씨, 말씀하신 대로 하얀 연밥을 구해다가 쌀가루와 벌꿀을 넣고 찐 다음 식혀 놨어요. 잘라 올 테니 드시겠어요? 제 입맛엔 당도가 딱 적당하던데 아씨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작은 백자 접시에 담은 누르스름하고 먹기 좋게 생긴 쌀떡을 정교랑은 한두 개 집어 먹었다.

“괜찮네.”

몸종은 기쁘게 웃음을 지었다.

“짐은 다 챙겼니?”

정교랑이 물었다.

“네, 남은 건 아씨께서 보실 이 책뿐이에요. 떠나시는 그날, 소인이 직접 들고 갈게요.”

정교랑이 눈을 들어 몸종을 쳐다봤다.

“나랑 같이 가려고?”

정교랑이 물었다.

“소인이 아씨께로 왔다는 건 이미 이 집에서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단 뜻이에요.”

몸종은 웃으며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여기 남는 건 얼핏 좋게 들릴지 몰라도 어차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해요. 소인도 나이가 있으니 1~2년 후면 짝을 찾아야겠죠. 노비 신분으로 어떤 사람과 혼인할지는 안 봐도 뻔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아씨를 모시면서부터는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먹고 마시는 거나 명성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을 순 없죠. 소인은 그저 자유로우면 됐지, 딱히 바라는 거 없어요.”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길게 말하면 나 같은 바보가 알아듣겠어?”

몸종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씨, 놀리지 마세요. 아씨가 바보면 소인도 바보예요.”

정교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여 책을 봤다. 몸종도 말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앉아 아까 하던 바느질거리를 손에 들었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냐.”

정교랑이 돌연 말을 이었다. 아씨는 보통 사람보다 말이 한 박자 느리다는 걸 몸종은 잘 알고 있었다. 몸종은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문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창가 쪽에서 바라보자 정씨 가문의 하인과는 차림새가 다른 낯선 여종의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여종 역시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정교랑이 그 멍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자 정신을 차렸다.

“저기, 주씨 가문에서 아씨께 갖다 드리래요.”

여종은 몸을 굽히며 네모반듯한 함 하나를 밀어주었다.

“반근.”

정교랑이 돌연 입을 열었다. 여종은 화들짝 놀라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나 일을 기억 못 한다지 않았나? 어떻게……·.

“네, 아씨.”

몸종이 대답하며 손을 뻗어 함을 받았다. 어리둥절해진 몸종은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아씨, 먹을 거네요.”

몸종이 함을 열어 보더니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포장을 뜯어 보니 2층으로 된 찬합이었는데, 네모반듯한 격자 안에 각종 화려한 정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경성에서 유명한 간식 가게 거예요. 반, 아니 집안 식구가 아씨께서 간식을 좋아하신다며 특별히 골라 줬어요.”

여종이 이번에는 몸종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많이 먹진 마. 배탈 안 나게 조심해야지.”

몸종은 쌩긋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여종이 말했다. 이 바보가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바보 앞에 있는 건 어쩐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저기.”

또다시 입을 연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 옆에서 공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그 애한테 갖다 줘.”

여종은 멈칫하여 정교랑을 바라봤다. 그 애가 누군데? 누가 그 애야? 이 바보는 누가 누군지 아는 거야? 설마?

몸종은 벌써 손을 뻗어 공책을 여종에게 건네고 있었다. 여종이 힐끔 보니 손으로 잘라 실로 간단하게 묶은 공책인데 아주 얇았다. 여종은 글을 모르는 터라 무어라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받아 들고 예를 표한 후 밖으로 나왔다. 몸종이 회랑까지 직접 배웅을 나왔다.

“여기 언니는 이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

계단 아래로 내려선 여종은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는 듯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몸종은 여종을 향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 반근이에요.”

* * *

경성은 날씨가 서늘해 강남보다 국화가 더 많이 피었다. 주육낭의 마당은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국화들로 가득했다. 몸종들은 국화를 둘러싸고 꽃을 구경하거나 정담을 나눴다.

“두 개 더 꺾어 와라.”

진 공자의 말이었다. 진 공자는 한 손에 작은 절구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절굿공이로 콩콩 찧고 있었다. 몸종 둘이 네 하고 대답하더니 국화를 두 송이 꺾어 돌아왔다. 진 공자는 아까운 기색은 조금도 없이 꽃을 절구에 그대로 넣고 콩콩 찧어 짓이겼다.

“상자 자네가 꽃이며 잎을 이렇게 거리낌 없이 꺾는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주육낭이 회랑 아래에서 무릎을 세우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웃으며 말했다.

“이건 차를 만드는 거야. 만들고 나면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울걸.”

진 공자가 대답했다.

“괜히 쓸데없는 걸 만들고 난리네.”

주육낭이 대꾸했다. 뒤에서 몸종 하나가 총총 걸어와 무릎을 꿇고 차 두 잔을 올렸다.

“차 드세요.”

몸종이 고개를 숙인 채 말하자 주육낭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진 공자는 찻잔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꽃을 빻았다.

“난 그런 차 안 마신다, 맛없어. 내가 직접 만들어 봐야지.”

주육낭은 웃으며 말없이 있었지만 몸종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공자님도 이 차가 맛없으세요?”

진 공자는 손을 멈추었다.

“공자님도?”

진 공자는 몸종을 쳐다봤다.

“반근, 네 입맛에도 이 차가 맛없느냐?”

주육낭의 물음에 반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소인은 천박해서요.”

반근이 불안한 말투로 대답하자 진 공자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천박하지 않다, 천박하지 않아. 모처럼 뭘 좀 아는 사람을 만났구나. 좋다, 좋아.”

주육낭은 입을 삐죽거리고 진 공자에게 주려던 차까지 받아 고개를 젖혀 가며 깨끗이 비웠다. 반근은 진 공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짝 긴장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진 공자의 눈길에 반근은 늘 불안을 느꼈는데, 이번만큼은 자신을 보는 표정이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럼 어떤 차가 맛있는데?”

진 공자가 웃으며 물었다. 반근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여종 하나가 다가와 이들의 대화를 끊었다.

“여섯째 공자님.”

여종은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여종을 본 반근은 누구 앞인지 잊은 듯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쪽에서 소식이 왔느냐?”

“네.”

주육낭의 심드렁한 물음에 여종이 대답했다.

“똑바로 말을 해.”

“네, 대부인께서는 점포 하나를 둘로 나누고 농토는 전부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씨 가문 이노야께서 반대하며 교랑 아씨는 장차 그 농토에 기대 먹고살아야 한다고 하셔서 지금 다시 나누고 있습니다.”

주육낭은 냉소를 지었다.

“오래 해 먹었었는데 뱉어내려니 아깝긴 하겠지. 그럼 천천히 나누라고 해라. 우리 집 재산을 공으로 가로채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거다.”

“네, 노야와 부인께서도 그리 분부하셨습니다. 바로 그쪽에 다녀오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여종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도관으로 보내졌답니다.”

“뭐라고요? 아씨를요?”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반근은 눈가가 그렁그렁해져서 무릎을 꿇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아씨를 도관으로 보냈다고요?”

주육낭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뭘 그리 호들갑을 떨어?”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정씨 집안 아이니 저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네, 노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어요.”

주육낭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여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반근은 주육낭 뒤에서 무언가 말하려다가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진 공자는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듯 한쪽 옆에서 조용히 꽃을 빻았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뒤돌아 나가려던 여종이 걸음을 멈추고 공책 하나를 꺼냈다.

“반근, 그쪽에서 인편에 보낸 거야. 너한테 주는 거래.”

반근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일어나 신도 신지 않은 채 달려가 물건을 받더니 공책을 보고는 몸을 떨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모두가 반근을 쳐다봤다. 꽃을 빻는 데 여념이 없던 진 공자마저도 고개를 들어 힐끔 바라봤다.

“아씨, 아씨.”

반근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듯 공책을 꽉 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목이 멘 목소리로 오열했다.

“그 바보가 준 것이냐? 뭔데?”

“아씨와 돌아오던 길에 겪은 일을 소인이 기록한 공책이에요.”

반근은 울며 대답했다. 주육낭은 아 하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진 공자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아씨께서 저한테 전한 말씀은요?”

반근은 울며 고개를 들어 그 여종에게 물었다. 진 공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근을 힐끔 쳐다봤고, 여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러가거라.”

주육낭의 말에 여종은 뒤돌아 몇 보 걸어가더니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삼키는 듯했다.

“한 가지 일이 있긴 한데……·.”

여종이 뒤돌아 머뭇거리며 말했다.

“말해라.”

“그 아씨 곁에 새로 온 몸종의 이름도 반근이랍니다.”

반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잠시 멍해졌다가 곧이어 목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아씨께서 그래도 이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아직 날 그리워하시는 게 틀림없어! 주육낭은 여종과 반근을 모두 내쫓고 나자 비로소 귀가 깨끗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들 울고불고하는 게 제일 짜증 난다니까.”

말을 마친 주육낭은 진 공자 쪽을 쳐다봤다. 진 공자는 꽃을 빻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울음소리에 넋이 나간 게야?”

진 공자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공이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육낭, 정씨 가문에 갔을 때 그 바보 누이부터 보고 나서 저 계집을 본 거지?”

“아니, 그 바보를 뭐 하러 봐.”

주육낭은 긴 소매를 털고 몸을 곧추세워 앉았다.

“안으로 들어서니까 저 계집이 아주 훌륭한 연극판을 벌이고 있더라고. 정씨 가문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정말 재미있더군. 더 대단한 건 저 계집이 내가 온 이유를 알고 그 바보를 부추겨 정씨 가문 사람들한테 물을 먹인 일이지.”

주육낭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랬음 내가 정씨 가문에서 하루 더 머물며 시간을 낭비했겠나. 생각할수록 속이 다 시원해.”

“그 바보를 안 만났다고?”

진 공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뭐 잘못됐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말로는 표현을 못 하겠네.”

진 공자는 비스듬히 기대앉아 정원에 가득한 국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반근에게 보냈다는 공책 말이야.”

한참 말을 기다리던 주육낭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 애 물건이잖아. 정씨 가문엔 필요 없으니 돌려보낼 만도 하지.”

“그래. 그리고 새로 온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그래. 같은 이름이잖아.”

“정씨 가문 사람들이 그 바보를 달래려고 한 일일 뿐이야. 그런 하찮은 일을 생각하고 있다니 한심하군.”

진 공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정말 그 정씨 가문 사람들이 별 뜻 없이 한 일이면 상관없는데, 혹여 그 바보의 뜻이라면……·.”

“바보? 그러면 뭐?”

주육낭이 물었다.

“그 바보는 정말 속 좁고 뒤끝 있는 사람인 거지.”

진 공자가 박수를 치며 말하자 주육낭은 그를 힐끔 보고 고개를 젖혀 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저 계집이 정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한 일도 그 바보가 가르쳤을지 모르는 일이군.”

주육낭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진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일이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말했다. 주육낭은 다시 한번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

“상자, 내가 바보일지도 모를 일이네!”

주씨 가문의 마당은 깊은 곳에 있어서 웃음소리가 멀리 문밖까지 전해지진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