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60)

-기억-

불과 며칠 사이에 정교랑의 몸종이 셋이나 바뀌었다. 주씨 가문으로 도망친 몸종 외에 나머지 둘은 팔려갔다.

정씨 가문은 가풍이 엄하고 선조의 유훈을 따라 아랫것에게 관대했다. 부리던 사람을 연달아 파는 일은 요 몇 년간 전례가 없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두 번이나 일어나니 집안 전체가 뒤숭숭해져 다들 몸을 사렸다.

하인을 두 번이나 팔았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갔다. 전부 정씨 가문 이방의 그 바보와 관련된 일이었다. 다른 집 바보들은 외모가 추하고 희로애락을 몰라 누군가를 때리고 욕하는 일이 없다던데, 정씨 가문의 바보는 아랫것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에 능했으니 하인들과 몸종들로서는 두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바보의 뒤엔 든든한 외가가 버티고 있어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됐다. 정씨 가문 바보의 시중을 들려면 따돌림을 당하는 건 물론이요, 엄청난 심리적 부담과 함께 일가 전체의 앞날을 짊어지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언니, 언니. 일찍 왔네. 우린 무서워서 시중들러 못 들어가겠어.”

“언니, 우리 언니는 아직 젖먹이도 딸려 있어. 팔려가면 못 살아.”

겁에 질린 얼굴로 애원하는 새로 온 두 몸종의 말에 원래 있던 몸종은 난감했다.

“사실 아씨는 그런 분이 아니야.”

그 몸종은 억울한 일을 당해 팔려 간 게 아니야. 그 계집이 먼저 아씨를 우롱했으니 그런 일을……·. 사실 다른 아씨를 윗전으로 모셨다 해도 그런 짓을 했으면 무거운 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다른 아씨를 모셨다면 목숨이 백 개라 해도 그런 짓은 감히 못 했겠지. 남을 무시하고 깔보다가 되레 자신이 당한 것이다. 그런데 우롱을 당했다는 걸 바보가 어떻게 알았지? 혹시 바보가 아닌가? 몸종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언니, 언니. 언니는 보살이잖아. 우리 집 식구들은 언니만 믿을게.”

두 몸종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걸복걸하자 몸종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에 들어가서 시중드는 일은 너희가 안 해도 돼. 물청소 깨끗이 하고 물 끓여서 부뚜막도 닦아. 아씨 시중은 내가 들게.”

몸종의 말에 나머지 두 몸종은 무슨 사면이라도 받은 듯 연신 감사를 표했다. 몸종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조롱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두렵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된 그 바보가 여느 때처럼 조용히 앉아 손에 든 책을 넘겨 보고 있었다. 몸종이 끓인 물을 따르고 꿇어앉아 잔을 건넸다.

“아씨, 물 드세요.”

정교랑은 응 하고 손을 뻗어 물잔을 받았다. 몸종은 팔걸이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몸종이 처음 왔던 날 펼쳐 놓았던 책장과 같은 부분이었다. 아씨의 희고 가느다란 손이 같은 줄 글자를 계속 만진 탓에 그 부분은 마모가 되어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아씨, 오수에 드시겠어요?”

몸종의 물음에 정교랑은 몸종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어나게 부축해 줘.”

몸종이 얼른 손을 내밀며 정교랑을 부축했다.

“나가서 좀 걸어야겠어.”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모여 떠들고 있던 몸종들은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가 어두운색 치마에 푸른 비단 윗옷을 덧입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대청 중앙으로 나온 여인을 보고 멍해졌다.

잠시 후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몸종들은 부엌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기억에 남는 건 그 여인의 새하얀 얼굴뿐이었다. 구체적인 외모에 대해서는 미처 볼 새도 없었을뿐더러 감히 쳐다볼 담력도 없었다. 괜히 봤다가 해치려 했다며 누명이라도 씌우는 날엔 목이 달아나지 않겠는가.

몸종은 별안간 마당이 조용해지자 멋쩍어했다.

“부엌 뒷정리를 하느라 바쁜가 봐요.”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들었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 늦여름 매미가 이따금 울어댔다. 정교랑이 눈을 찡그리자 몸종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정교랑이 아래로 내려서도록 부축해 주었다.

“너울을 가져와. 난, 햇볕을 쬐면 안 돼. 불편해.”

몸종은 아, 하더니 불안에 떨며 말했다.

“소인이 몰랐네요. 소인의 죄를 용서하세요.”

“괜찮아. 내가 말해 주면, 다음부턴 기억할 수 있잖아.”

“네, 소인이 기억할게요.”

몸종은 기쁘게 대답하고 얼른 들어가 너울을 가져와 정교랑에게 조심스레 씌워 준 다음 정교랑을 부축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깜짝 놀랐네.”

“대낮에 밖에는 왜 나와? 괜히 여러 사람 마음 졸이게.”

두 몸종은 그제야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은 멀리 나가지 않고 자신의 마당만 한 바퀴 빙 돈 다음 문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시겠어요?”

옆에서 조심스레 부축하던 몸종은 정교랑이 더 이상 걷지 않자 얼른 물었다.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몸종은 무어라 더 묻지 못하고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있던 몸종들은 이번에도 얼른 몸을 숨겼다.

그 후로 정교랑은 매일 산책을 나왔는데 멀리 가지는 않고 집 주변만 빙 돌았다. 날이 지나자 몸종들도 익숙해져서 매번 놀라 피하지는 않았다. 정교랑은 한 바퀴에서 두 바퀴로, 두 바퀴에서 세 바퀴로 차츰 걸음을 늘려갔다. 보름쯤 지나자 무더위가 물러가고 초가을이 왔다.

“아씨, 피곤하시죠? 쉬시겠어요?”

몸종이 물었다. 이제는 정교랑을 부축하지 않고 조심스레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됐다. 벌써 세 바퀴를 돈 정교랑은 문 앞에 서더니 너울의 가리개를 들어 얼굴을 드러냈다. 희고 고운 피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안 힘들어, 더 걸을래.”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뒤를 따랐다. 정교랑은 네 바퀴를 돈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고 피곤한 듯 몸종에게 몸을 기댔다.

“아씨, 뭘 이렇게까지 하세요. 피곤하면 쉬시죠.”

몸종이 말했다. 한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몸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조용한 아씨를 좋아하게 됐다. 변덕이 죽을 끓는 다른 아씨들의 시중을 드는 것에 비하면 소문은 좀 무섭게 났지만 이 아씨를 모시는 게 훨씬 쉬웠다. 아씨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정교랑은 멈춰 서서 뒤를 힐끔 돌아봤다.

“안 힘들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다. 느리고 더디지만 보답은 있기 마련이다. 계속 이렇게 단련해 나가다 보면 곧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는 안 힘들지. 몸종은 잠시 기다리다가 정교랑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이것으로 대답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얼른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준비해 둔 뜨거운 물로 정교랑의 목욕을 돕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몸종이 정교랑의 머리를 말려 주는 동안 정교랑은 계속해서 책을 들여다봤다.

정교랑의 뒤에 서 있던 몸종은 정교랑이 예전 그 줄의 글자 위에 왼손을 올리고 조금씩 이동하는 한편 팔걸이 책상 위에 올려 둔 오른손으로 천천히 따라 쓰는 것을 지켜봤다. 시간이 지나자 정교랑은 두 손을 바꾸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게 책을 보는 건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방 안은 조용했다. 정교랑은 조용히 앉아 글자를 어루만지며 따라 쓰는 동작을 했다. 몸종은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씨는 말씀을 잘 안 하셔. 먹고 마시고 옷을 갈아입는 듯 꼭 필요한 일 외에는 말을 아끼시지.

몸종은 반근을 떠올렸다. 반근이 있었을 땐 아씨와 반근이 수시로 마당에 나와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반근이 말했지만 말이다. 반근이 떠난 후 아씨는 훨씬 조용해졌다. 조용히 산책을 나와 마당을 돌고 조용히 책을 보며 손가락으로 따라 쓰는 게 전부였다.

반근이 떠난 걸 알기는 아는 건가? 혹시 슬퍼하는 건가?

“아씨, 아직 반근을 기억하세요?”

불쑥 질문을 던진 몸종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겁을 먹었다. 듣자니 바보는 사람을 잘 기억 못 한다던데. 정교랑의 손이 멈췄다.

“기억해.”

정교랑은 뚜렷하진 않지만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얼굴에 한층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보며 몸종은 멍해졌다. 웃는 건가? 옅은 웃음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게 웃을 수 있구나. 그런데 왜 웃는 거지?

“아씨, 저기, 그러니까 반근은……·.”

정신을 차린 몸종이 우물쭈물 말을 더듬자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반근이라는 계집이 다른 사람을 따라 떠나 버린 것을.

그 순간 정교랑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면 예전에 기억할 수 없었던 건 병 때문에 기억력이 안 좋아서인가, 아니면 믿을 구석이 있기에 기억하기 귀찮았던 것인가. 순간 정교랑은 병이 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정교랑은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도 병은 없었다. 그저 조화가 잘 안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점을 깨닫자 정교랑의 몸 회복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어찌 잊겠는가.

“아씨, 반근은 떠나기 전에 밖에서 아씨한테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렸어요.”

몸종은 아씨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걸 왜 말하고 있지? 아씨를 위로하려고? 반근이 말도 없이 아씨를 버리고 떠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기쁨이나 슬픔은 느껴지지 않는 짧은 대답이었다. 몸종은 문득 마음이 놓여 옆에 꿇어앉았다.

“아씨, 제 생각에는요.”

몸종은 무언가를 더 이야기하거나 반근이 전하는 말이라며 말을 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난 슬프지 않아. 슬픈 건, 그 애지.”

* * *

“반근!”

누군가가 밖에서 불렀다. 회랑 아래에 앉아 새로 나온 꽃가지를 전지하던 몸종이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탁했던 돼지 간이랑 양 간을 가져왔어.”

어린 몸종 하나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들어와서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 기름종이에 싼 꾸러미를 건넸다. 몸종은 웃으며 일어나 꾸러미를 받았다.

“세상에, 언니야. 이런 걸 뭐 하려고? 무서워라.”

어린 몸종은 혐오스러운 듯 말했다.

“아씨께서 드실 거야.”

몸종의 대답에 그 어린 몸종은 입을 삐죽거렸다.

“안채 부엌에서 보내오는 멀쩡한 음식은 안 먹고 이런 걸 먹겠다니, 진짜 바보네.”

문밖에 서 있던 나이 많은 여종은 그 대화를 듣고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이름은 물론이고 대화 내용도……·.

한 달 전의 이곳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몸종들이 왔다가 쫓겨가고 또 왔다가 쫓겨간 일은 아예 일어난 적 없는 듯했다.

“넌 안 무서울지 몰라도 난 무서워. 나 갈게.”

어린 몸종이 손을 흔들고는 얼른 뛰어나갔다. 몸종은 기름종이 꾸러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불 지펴 놨어.”

부엌에 있던 두 몸종이 말했다. 두 몸종 역시 고개를 빼고 손에 든 물건을 쳐다보며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드러냈다.

“정말 이걸 먹으려고?”

“그럼 네가 아씨께 다른 거 드시겠냐고 물어볼래?”

몸종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됐어.”

한 몸종이 웃으며 몸을 움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넌 이름까지 바꿨다지만 난 내 이름 바꾸고 싶지 않거든.”

다른 몸종도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내가 나이기만 하면 되지.”

몸종은 웃으며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

밀가루 반죽은 잘 발효됐다. 정교하게 만든 작은 공예 화로에 불을 올려 달구고 푹 삶은 간은 잘게 빻았다. 부엌에 앉은 세 몸종 중 둘은 소를 넣어 만두를 만들고 하나는 화로에 넣어 구웠다.

“희한하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안채 부엌에서 보낸 호병(胡餅: 밀가루 안에 팥을 비롯한 각종 소를 넣어 둥근 달 모양으로 구워낸 빵)은 안 먹고 굳이 이걸 먹겠다니. 이런 건 원래 개 먹이로 주는 거잖아.”

투덜거리던 두 몸종이 돌연 말을 멈췄다. 맛있는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다.

“앗, 뜨거워라. 뜨거워.”

몸종은 다 구워진 월병을 대나무 쟁반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냄새 좋다.”

두 몸종은 저도 모르게 다가와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작은 월병 두 개를 바라봤다. 한 몸종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반으로 가르며 물었다.

“간 좀 볼래?”

두 몸종이 안에 든 소를 보며 머뭇거리는 동안 그 몸종은 벌써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오!”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몸종은 오물거리며 말하더니 얼른 또 한입 베어 먹고 뜨거운지 후후 입김을 불었다.

“나도 먹어 볼래. 내가 소를 만들었으니까 맛은 봐야지.”

한 몸종이 못 참겠는지 기름기 묻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고는 남은 반 개를 한입에 넣었다.

정교랑의 마당 밖에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지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때 부득이하게 마당 밖을 지나던 몸종 두 명은 길을 재촉하다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머, 맛있는 냄새.”

“그러게.”

한 몸종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하자 다른 몸종도 코를 킁킁거리며 마당 쪽을 쳐다봤다. 두 몸종의 눈이 마주쳤다.

“또 바보 줄 음식을 만드나 보네. 진짜 다른 아씨들보다 더 까탈스럽다니까.”

두 몸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뭘 먹여야 입에 맞을지도 모르고.”

몸종은 찬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탁자에 음식을 차린 다음 창 안으로 옮겼다.

“아씨, 드세요.”

몸종은 공손하게 말하며 탁자를 밀어주었다. 창가 앞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두 눈을 감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소녀는 눈을 뜨고 구부렸던 다리를 내려 똑바로 앉았다.

“아씨, 입에 맞는지 드셔 보세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손을 뻗어 작은 월병 하나를 집은 다음 월병을 쪼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이미 맛을 본 몸종은 완성작에 대해 자신이 있는 터라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향이 너무 진해.”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나만 입에 넣고 손을 내려놓았다. 몸종은 아, 하고는 이해가 안 가는 듯 다시 물었다.

“저기, 향이 안 좋으세요?”

“안 좋아, 너무 흩어져 있어. 안에 머금어야지. 향은 맡는 게 아니라 먹는 거야.”

정교랑은 숟가락으로 죽을 천천히 떠먹으며 말했다. 그런 걸 다 따지다니, 아씨 입맛은 까다롭기도 하지. 대체 어떻게 자란 거야! 애지중지 키운 금지옥엽도 이 정도는 아닐 거 같은데? 몸종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진짜 반근의 손재주가 뛰어났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인이 아둔했네요.”

몸종이 몸을 굽히며 말했다.

“괜찮아, 잔재주일 뿐이야. 내가 아둔하지 않게 해 줄게.”

정교랑은 몸종을 쳐다보지 않고 잠시 말없이 있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몸종은 희색만면한 얼굴로 다시 몸을 굽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반근이 아씨의 마음에 감사드려요.”

정교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천천히 밥을 먹었고, 몸종은 조심스레 시중을 들며 반찬을 집어 주었다.

“아씨, 이건 이름이 뭐예요?”

몸종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무도 안 먹는 질 낮은 식재료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되네요.”

정교랑은 초록색 대나무 쟁반 위에 있는 누르스름한 월병을 힐끔 바라봤다.

“태평.”

무심코 말을 내뱉은 정교랑은 곧 말을 멈추고 기억 속 그 이름이 점점 뚜렷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태평 만두.”

“태평이요?”

몸종은 소리 내어 말해 보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상서로운 이름이네요. 매일 이걸 먹으면 영원히 태평하겠어요.”

그럼 이걸 못 먹으면 태평하지 못한가?

* * *

“어머니!”

정칠랑이 소매를 걷은 채 들어오며 소리쳤다. 이부인은 정칠랑을 향해 얼른 쉿 하는 동작을 했다.

“네 동생 방금 잠들었어.”

옆에 있던 유모가 이부인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몸을 굽혀 물러났다. 일곱째 아씨가 있는 한 아이가 여기서 편히 자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 백모님의 편애가 너무 심해요!”

정칠랑은 모친의 곁에 꿇어앉아 모친의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또 왜? 백모가 누굴 편애했는데?”

이부인이 물었다. 물론 자기네 식구를 편애했겠지. 이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배 앓아 낳은 자식도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두 집안은 그저 형제 사이 아닌가.

전엔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맏형수는 어머니와 같다고 여겼다니. 어머니긴 어머니지, 그저 친어머니가 아닐 뿐.

“그 바보요!”

정칠랑이 말했다.

“그 바보?”

이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부채를 들어 살살 부채질을 했다.

“또 뭘 잘해 줬는데?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면서.”

옆에 있던 측근 여종이 마른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애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법이다.

“네 백모는 그 아이를 보살펴 주는 거야. 그 아이는 아픈 사람이니 편애하는 게 당연하지.”

이부인이 둘러댔다.

“그 애는 바보지, 넷째 오라버니처럼 병이 난 것도 아니잖아요. 매일 이것저것 맛있는 거 해 먹어 봤자 뭐 하냐고요! 아픈 사람은 맛있는 거 먹고 몸보신하면 병이 낫는다지만, 바보가 맛있는 거 먹고 몸보신한다고 정상이 되겠어요?”

정칠랑은 모친의 팔을 끌어안고 소리쳤다.

“어머니, 저도 해 주세요! 제가 우리 집에서 그 바보만도 못해요?”

정칠랑이 이리저리 흔들자 이부인은 어지러워졌다.

“그쪽은 부엌을 따로 쓰는 거야?”

이부인이 여종에게 물었다.

“그런가 봅니다. 하루 세 끼 외에 간식도 두 번씩 먹고요.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가서 과일이며 고기를 사 오는데, 우리가 평소에 쓰는 걸 먹지 않고 전부 따로 산대요.”

“어머니, 저도 부엌을 따로 쓸래요. 안채 부엌에서 만드는 거 먹기 싫어요.”

정칠랑이 얼른 말했다. 공용의 돈을 쓰는 거라면 집안의 다른 아이들은 왜 그렇게 안 하지? 공용의 돈을 쓰는 게 아니라면 선부인의 혼수겠지. 혼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번 세세하게 따져 볼까? 이부인은 부채를 쥔 채 잠시 침묵했다.

“그래, 그 애가 먹는다면 너도 먹어야지. 뭐가 먹고 싶은지 부엌에 가서 얘기해.”

이부인은 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또 월말이 다가왔다. 대부인의 거처 분위기는 전보다 긴장감이 돌았다. 탁! 소리가 나자 안에 꿇어앉은 집사 부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내가 이 집을 관리하는 게 아니란 말이더냐?”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뜨며 호통을 쳤다. 바닥에는 장부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대부인, 이부인께서 직접 분부하셨어요. 그래서……·.”

몇몇 집사 부인들이 몸을 굽힌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 부인들은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까딱 잘못 말했다가는 집안의 불화를 야기하는 빌미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청랑이야? 청랑이 왜 점점 철없이 굴지? 따지고 싶진 않지만 또 못 본 척 넘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번엔 멋대로 옷을 지어 입고 장신구를 사더니 이번엔 멋대로 산해진미를 추가해? 자기 돈으로 샀다면 상관없지만 이건 엄연히 공금이 아니던가. 다음엔 또 뭘 살지 모를 일이다.

“이부인을 모셔와라. 너희는 모두 물러가고.”

대부인이 말했다. 집사 부인들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조심스레 장부를 챙겨 줄줄이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집사 부인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혀를 내둘렀다. 멀리 피하는 게 상책이야.

이부인은 대부인이 불렀다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형수님이 당신을 왜 찾지?”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책을 보고 있던 이노야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며칠 못 봤다고 내가 보고 싶은가 보죠.”

이부인이 웃으며 일어서자 이노야는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어서 가서 정다운 담소를 나누시구려.”

책을 보던 이노야는 이부인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품을 했다. 그때 밖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공기마저 상쾌한 가을날에 듣는 웃음소리는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이노야가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들리던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마당에 있던 여종이 이노야를 미처 못 본 채 피식 웃으며 물었다.

“밖에 누구지?”

입구에 서 있던 여종이 입을 삐죽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동원(東院)의 이낭(姨娘) 쪽 사람이야.”

“그 이낭은 참 안목도 좋아.”

먼저 그 여종이 웃으며 말했다. 두 여종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 * *

이부인은 여종과 몸종을 대동하고 여유를 부리며 걸어갔다. 대부인의 거처로 가려면 연못을 지나야 했다.

“며칠 사이에 국화가 피었구나.”

이부인은 연못의 국화를 보며 말했다.

“네, 올해는 국화가 일찍 피었네요.”

여종이 웃으며 말하자 이부인은 걸음을 늦추었다.

“그래, 예쁘구나. 구경 좀 해야겠다.”

뒤에 있는 여종들은 초조하기도 하고 이해도 안 되는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부인께서 일이 있다며 부르셨는데? 왜 이리 느긋하지? 물론 이부인에게 주의를 줄 만큼 멍청한 여종들은 아니었다. 이부인이 뭐 바보도 아니고!

“어머니.”

뒤에서 정칠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부인이 돌아보자 정칠랑 등 여자아이 몇 명이 꽃구경을 하는 게 보였다.

“재미있게 놀렴.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고.”

정칠랑은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알았다고 소리치고는 모친이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재미 하나도 없네.”

정칠랑이 손에 든 꽃가지를 연못 속으로 던져 버렸다. 정오랑과 정사랑은 정육랑에게 국화를 골라 주고 있었다.

“동 낭자네 집에서 다회를 연대.”

정육랑이 말했다.

“그럼 뭐 해. 우린 갈 수도 없잖아. 괜히 갔다가 놀림만 당하지.”

산석 위에 앉은 정칠랑이 국화를 보며 말했다.

“저 바보는 언제 가는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가긴 어딜 가.”

정오랑이 대꾸했다.

“우리 집 국화는 예쁘게 피었는데 동 낭자네는 아니잖아. 동 낭자가 다회를 연다면 우린 국화회를 열자.”

정육랑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언니, 밖에 나가도 놀림을 받는 처지에 사람을 집으로 불러들여 바보를 보여 주려고 이래?”

정칠랑이 입을 삐죽거리며 반쯤 핀 국화를 꺾어 짓이긴 다음 땅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하긴.”

정육랑은 김이 빠진 듯 맞장구를 쳤다.

“왜 아직도 도관으로 안 보내는 거야. 아버지 말씀으로는 예전에 도사가 그랬대. 도관으로 보내면 좋아질 거라고.”

정칠랑이 국화를 틀어쥐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정칠랑은 정원을 가득 수놓은 국화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꽃구경 중이었구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매들은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반갑게 웃었다.

“넷째 오라버니!”

한 달 못 본 사이에 정사낭은 많이 야위었지만 그래도 활기찬 모습으로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자매들은 정사낭을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넷째 오라버니, 겁도 없이 정원까지 오다니요. 여자 귀신한테 잡혀갈까 봐 겁 안 나요?”

정칠랑이 웃으며 말하자 나머지 자매들이 얼른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정사낭은 신경 안 쓴다는 듯 웃었다.

“겁 안 나. 귀신은 못된 사람을 무서워하거든. 지난번에 못 잡아갔으니 이젠 감히 못 올걸.”

정사낭은 웃으며 정칠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넷째 오라버니. 귀신은 무섭게 생겼어요?”

정칠랑은 호기심이 생기는 듯 신이 나서 물었다.

“안 무섭게 생겼어.”

정사낭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넷째 오라버니가 천천히 산책하며 기분 전환하도록 우린 저쪽 가서 놀자.”

정오랑이 말했다. 정칠랑은 여자 귀신에 관해 더 묻고 싶었지만 언니들이 전부 자리를 뜨는데 혼자 남아 놀고 싶지는 않아서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

“공자, 힘드시죠. 그만 들어가세요.”

춘란이 말했다.

“안 힘들다.”

정사낭은 멀지 않은 앞쪽을 보며 말했다.

“좀 더 걷자.”

춘란은 네 하고 정사낭을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 거대한 산석 근처로 온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고 춘란을 보며 무언가 말하려고 하던 정사낭의 눈에 멍하니 그 산석을 쳐다보고 있는 춘란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이 아이도 산석을 쳐다보지?

산석 위에 단정히 앉아 무심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 여인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정사낭이 눈을 깜빡이자 금세 사라졌다.

“춘란, 네가 여기 와서 여자 귀신한테 빌었다지?”

정사낭이 문득 물었다.

“그럼 너도 여기서 뭘 봤느냐?”

춘란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소인은 여기에서 방도를 알려 준 사람을 만났어요. 공자를 구할 방도요.”

정사낭은 실망한 듯 아 하고 대꾸했다. 어쩌면 그 여인은 정말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땐 이미 병이 났던 때니까.

“그 주씨 가문의 계집 말이구나.”

정사낭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애한테 고맙단 인사도 못 했는데 떠났네.”

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춘란은 다시 산석을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그 몸종의 모습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가리개로 몸을 가리고 있던 그 바보 낭자의 모습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춘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 이제 막 몸이 나으셨으니 그만 들어가세요. 날씨가 쌀쌀해졌어요.”

정사낭은 알았다고 한 후 춘란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걸어갔다.

같은 시각 이부인은 마침내 대부인 앞에 앉았다.

“형님, 여기 국화가 참 예쁘게 피었네요.”

이부인은 병풍 앞에 놓아둔 국화를 보며 말했다.

“정원에 많이 피었으니 마음에 들면 얼마든 꺾어 가.”

대부인이 말했다. 이부인은 몸종이 올리는 차를 받아 입을 축였다.

“우리 집 국화가 예쁘긴 해도 최고라고 할 순 없죠. 성에 새 꽃장수가 왔는데 이름나고 진귀한 국화가 많더라고요. 다들 앞다투어 사려고 난리인데 저도 운이 좋아 두 아름을 구했어요. 며칠 후에 가져다준다니 그때 와서 보세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대부인은 이름나고 진귀하다는 말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얼만데?”

대부인이 물었다. 이름나고 진귀한 꽃이면 보통 비싼 게 아닐 텐데!

“별로 안 비싸요, 300관(貫: 엽전 1,000개를 꿴 꾸러미)이에요. 형님, 그걸 마당에 두고 다 함께 꽃구경을 하면……·.”

이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부인이 청랑, 하고 이름을 불렀다. 이부인은 대부인을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꽃을 환불하게.”

대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형님이 아직 못 보셔서 그래요. 보면 틀림없이 마음에 드실 거예요.”

이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만졌다. 새로 산 상아 부채였는데 재질이 부드럽고 매끄러워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었다.

“계약금도 벌써 줬는데 환불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대부인은 이부인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리 마음에 들면 자네 돈으로 사게. 사고 싶은 거 마음껏 사라고.”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부인은 웃으며 부채질을 했다.

“다 같은 식구 아닌가요. 전 이 집안 돈을 쓰면 안 된단 거예요?”

“자네!”

열 받은 대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팽청랑이 시집온 후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동서가 왜 이러지? 어딘지 괴이해졌어. 귀신에 씌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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