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60)

-행위-

“아주머니가 고생이 많으시네요.”

반근은 마당에서 예를 표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낭자, 별말을 다 하네.”

여종이 예의 바르게 답례했다. 반근은 곧장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아씨, 아씨. 물어봤더니 사촌 공자는 술을 자신 후 오수에 드셨대요.”

반근이 기쁘게 말했다. 정교랑은 낮잠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 중 자는 시간이 이미 충분히 길었기 때문이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책을 한 권 보고 있었다.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이 소동을 벌인 후 식사를 하는 동안 반근에게 가져오라고 한 책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잘 몰랐는데, 여종에게 얘기를 들은 시종들이 노야에게 고한 후 노야의 서재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가져왔다. 이 정도면 한동안 재미있게 갖고 놀겠지. 설마 바보가 책을 읽으려는 건 아닐 테니, 구기고 찢으며 놀기엔 딱이야, 하면서.

‘대주번성록(大周繁盛錄)’.

정교랑은 손가락으로 책 표지를 쓰다듬으며 책 제목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반근이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겉으로 표가 나진 않았지만 정교랑은 몹시 기뻤다.

“아씨, 사촌 공자가 깨면 아씨를 보러 오실 거예요.”

앞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손을 팔걸이 책상 위로 올리며 책을 가리고 말했다. 정교랑은 반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씨.”

반근은 도로 앉았다가 곧 몸을 똑바로 펴며 꿇어앉았다. 흥분되면서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촌 공자를 뵈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정교랑은 음 하고는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이 잘 안 나오시죠? 서두르실 것 없어요.”

반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사촌 공자께서는 인내심 있게 들어주실 거예요.”

정교랑이 가볍게 응 하고 대답했다. 사실 딱히 말할 것도 없는데.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책을 계속 보려고 했다.

“사촌 공자께서 계시는 한, 저들이 아씨를 무시할 일은 없어요.”

반근은 흥분되고 마음도 놓이는 듯 말을 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마님 댁부터 갔다가 돌아올 걸 그랬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더니 불쑥 말했다.

“네가 말했었지, 한원조라는 사람에 대해서.”

반근은 갑작스러운 말에 멈칫했다. 한원조? 정교랑은 반근이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공책을 꺼내 펼치더니 그중 한 줄을 가리켰다.

동강에서 길을 지나던 한원조 공자가 억울한 일을 나서서 도와주었다.

반근도 생각난 듯 아 소리를 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정교랑의 물음에 반근은 사건의 경위를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지난번에 비해 오늘은 좀 더 간략하고 빠르게 말했지만 말이다.

“아씨, 여섯째 공자는 한 공자보다 조금 어려 보이셨어요.”

반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반근, 한 공자가 말했지. 이 정도 수고쯤이야 누구나 도울 수 있는 일이니 은혜랄 것도 없다고.”

정교랑은 반근이 주육낭으로 화제를 돌리는데도 끌려가지 않았다. 반근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씨, 생각나셨나 봐요. 아씨께서 그러셨죠. 세상에 쉬이 도울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누구나 기꺼이 나서진 않는다고요. 그러니 한 공자의 도움을 잊지 않도록 저더러 기록해 놓으라고 하셨어요.”

반근이 헤헤 웃자 정교랑이 반근을 바라봤다.

“그래, 반근. 한 공자 같은 사람을 만나는 우연은 많지 않아.”

반근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아씨는 생각이 느리니 다른 게 생각나셨겠지. 주육낭의 도움이 고마워서 한원조를 떠올리셨거나. 틀림없어. 아씨는 한번 다른 생각으로 빠지면 바로 못 돌아오시잖아.

“네, 사촌 공자가 와서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반근은 웃으며 팔걸이 책상을 잡고 일어섰다.

“아씨, 손님 맞이할 차를 보러 갈게요.”

반근은 깡충깡충 뛰어나갔다. 정교랑은 나가던 반근이 되돌아와서 회랑 아래에 둔 나막신을 신고 부엌으로 다다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교랑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여 책을 봤다.

한낮이 되어 반근이 끓인 차가 식고 또 식는데도 주육낭은 오지 않았다.

“아직 안 일어나셨나?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건가?”

물론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점심 휴식을 끝낼 무렵, 정교랑의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정교랑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바람이 창가 근처 탁자에 올려둔 책의 책장을 넘기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반근이 조심스레 들어와 책을 살펴보고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햇빛 아래 푸르른 녹음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던 반근은 몸을 일으켰다.

“난 여섯째 공자를 뵈러 다녀올게. 아씨 좀 부탁해.”

반근이 새로 온 몸종에게 소리 죽여 말했다. 새로 온 몸종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로 나이는 16~17살쯤이었다. 몸종은 반근의 말에 멈칫하며 살짝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보의 시중을 든 적은 없단 말이야. 바보가 일어나 울며 떼라도 쓰면 어쩌지? 사람을 때리진 않나? 물을 먹여 줘야 하나? 간식은 뭘 줘야 하지? 옷은 혼자 갈아입을 수 있나?

반근은 성가신 듯 몸종을 노려봤다.

“금방 갔다 올 거야. 넌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들어갈 필요 없으니까. 아씨께서 깨셔도 내가 없으면 그냥 누워 계실 테니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반근이 소리 죽여 말하자 몸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걱정되는 듯 당부했다.

“언니, 빨리 와야 해.”

반근이 밖으로 나갔다. 반근은 몇 사람에게 물은 후에야 주육낭이 쉬는 곳을 알아냈지만, 주육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자는 이노야를 뵈러 가셨습니다.”

문밖에 있던 어린 시종이 말했다. 하긴, 아씨의 부친부터 만나 뵙는 게 맞지. 반근은 기뻐하며 이노야의 거처로 갔지만 마당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공자가 나오거든 자신이 직접 아씨께 모셔 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주육낭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초조해진 반근은 이노야 거처의 문을 지키는 시종에게 물어본 끝에야 이노야와 주 공자가 대노야한테 간 사실을 알게 됐다. 반근은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고 대노야 쪽으로 달려갔다.

반근이 초조한 만큼 정교랑의 거처에 있는 몸종도 안절부절을 못했다.

“아주머니, 들어가 봐야 할까요? 안 들어가도 될까요?”

몸종은 당황스러운 듯 여종을 잡아끌며 물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밖에 앉아 있었지만,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고요함이었다.

“그 애가 괜찮다고 했으니 들어가지 말자.”

여종도 확신이 없는 말투로 주저했다.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몸종은 문밖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어차피 이렇게 여기 묵을 테니 내일 말해도 되잖아.”

한편 반근은 대노야 거처의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안에서 시종이 나왔다.

“뭐라고? 여섯째 공자께서 가신다고?”

반근은 깜짝 놀랐다.

“오늘 오셨는데 벌써 가신다니?”

대노야와 이노야는 떠난다는 말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바로 가려고?”

대노야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밤엔 사람이 적어 길을 서두를 수 있잖습니까.”

주육낭은 도도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지만 이노야는 속으로 경멸했다.

“말 한마디 전하겠다고 이렇게 급히 왔다가 서둘러 돌아가다니, 정말 고생이 많군.”

대노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아, 실은 어른들의 말씀을 전하고 누이가 무탈한지 보는 것 외에 다른 용무도 하나 있습니다.”

주육낭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올 것이 왔구나! 대노야와 이노야는 속으로 움찔했다. 말을 빙빙 돌리더니, 이제야 여기 온 진짜 목적을 말하는군.

“말하게.”

대노야가 말했다. 주육낭은 몸을 곧추세우며 두 손으로 무릎을 만졌다.

“그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 * *

그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대부인은 며칠 전에도 똑같은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교랑의 몸종 말이죠?”

대부인의 물음에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왔다고요?”

“그렇다고 하더군.”

모두의 예측을 뛰어넘는 요구였다.

“길게 생각할 것 없어요. 달라면 줘 버려요. 어차피 우리 집 몸종도 아니잖아요. 임기응변이 중요하죠. 그 애가 먼저 입을 열면 우리도 응수하고, 잠자코 있으면 우리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그 몸종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애도 그래요. 돌아온 후로 수많은 말썽을 일으켰어요. 우리 집에서 거둘 수 없는 아이에요.”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서 그 아이에게 전해라. 진짜 주인에게 가라고.”

명을 받은 여종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안 가 되돌아왔다.

“대노야, 대부인. 가서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계집이 밖에 있다가 여섯째 공자를 만났어요.”

대부인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잘됐구나. 그 집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겠지.”

대부인은 부채질을 하며 대노야를 바라봤다.

“글쎄 모르겠네요. 그 계집이 이번엔 간다고 할지.”

“공자를 따라 집으로 가자고요?”

반근이 놀라 묻자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됐네요! 얼른 가서 아씨께 말씀드릴게요.”

반근은 반색하며 뒤돌아 달려가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공자, 노야께서도 허락하셨어요?”

“넌 이 집 사람도 아닌데 저들이 허락하고 말 게 뭐 있느냐.”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반근은 멈칫했다.

“하지만 아씨는 이 댁 분이잖아요.”

주육낭은 더욱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씨는 무슨, 난 너를 말하는 거다.”

“네?”

반근은 멍해진 채 주육낭을 바라봤다.

“저희 아씨랑 같이 가는 게 아니에요?”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주육낭은 반근을 뜯어보며 성가시다는 투로 말했다.

“너희 아씨의 성이 주씨더냐? 냉큼 짐부터 챙겨라.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할 것이다.”

말을 마친 주육낭은 성큼성큼 걸어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선 반근의 귀에 웅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교랑은 반근이 몸종에게 당부할 때 진작 잠에서 깼다. 가만히 누워 있기 갑갑하여 혼자 일어났더니 밖에 있던 여종과 몸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둘이 소곤거리며 논의하는 소리가 정교랑의 귀에도 들렸다.

정교랑은 조용히 책을 펼쳤다. 병풍에는 그림과 겨우 두 줄의 글이 전부였지만 책 속에는 글자가 빼곡했다. 빽빽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자 정교랑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마음속이 혼란스러워져 잠시 눈을 감고 있자 조금 괜찮아졌다.

볼까, 보지 말까? 조용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정교랑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나절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역겨운 느낌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가리며 글자를 한 줄씩 보자 글자가 눈앞에서 어지럽게 날뛰는 일도 없었다. 딱 한 줄만 봤지만 말이다.

한나절 동안 이 정도 봤으면 충분해. 정교랑은 고개를 들었다. 밖은 이미 저녁 무렵이라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밖에서 여종과 몸종이 초조하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왜 아직도 안 오죠?”

“일하러 가야 하는데.”

“그 아이 윗전은 바보라서 사람이 지켜야 해요.”

“그냥 우리가 들어가 볼까.”

정교랑은 조용히 창밖을 보며 책을 덮었다.

“아무도 없느냐.”

정교랑이 소리치자 밖에서 수군대던 소리가 뚝 멈췄다. 마당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긴장한 모습으로 바들바들 떨며 들어왔다.

“아씨.”

몸종은 무릎을 꿇고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정교랑이 몸종을 보며 말했다.

“네.”

몸종은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석양 아래 반짝이는 햇빛이 눈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의 몸으로 쏟아지자 순간 눈이 부셨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다니. 그리고 냄새도 안 나잖아. 사람들이 하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네!

* * *

반근이 문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아씨는 일어나셨어?”

반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에 있던 몸종이 고개를 돌려 반근을 바라봤다. 반근의 말이 뚝 멈췄다.

“아씨, 끓인 물을 가져왔어요.”

몸종은 시선을 거두며 말한 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뻗어 찻잔을 팔걸이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으려 할 때였다. 정신을 차린 반근이 재빨리 다가가 정교랑 앞에 꿇어앉았다.

“아씨께선 차가운 물을 드셔야 해.”

반근은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들고 확인해 보려 했다.

“괜찮아. 내가 잠깐 기다리면 돼.”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손을 거두며 앉았다.

“아씨, 옷을 갈아입으시겠어요?”

반근은 또다시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내가 갈아입혀 드렸어.”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몸종이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 흥분된 어조로 얼른 대답하자 반근은 아 하고 대꾸했다. 정교랑은 찻잔을 들어 물을 천천히 마셨다.

“아씨,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반근이 또다시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은 반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반근은 시선을 내리깔고 정교랑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냉면.”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정교랑의 말을 들었다.

“네, 바로 만들러 갈게요.”

몸을 일으킨 반근이 막 섬돌로 내려서려는데 밖에서 여종이 들어왔다.

“반근 낭자, 중문에서 주 공자의 사람이 다 됐냐고 묻던데?”

순간 몸이 경직된 반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주머니, 공자께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아씨한테 냉면부터 만들어 드려야 한다고요.”

정교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반근 언니, 바쁘면 가서 일 봐. 부엌일은 내가 할게.”

몸종이 옆에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반근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치자 몸종은 화들짝 놀라 반근을 바라봤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반근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근은 뒤돌아 고개를 숙인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됐어. 가거라.”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뒤돌아 꿇어앉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문밖에 있던 여종과 회랑에 있던 몸종은 영문을 몰랐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씨, 아씨.”

반근은 흐느껴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며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다가갔다.

“저 안 갈래요, 안 가요. 가서 여섯째 공자께 말씀드릴게요.”

반근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달려갔다.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몸종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반근은 어느새 멀리 뛰어갔고, 문밖에 있던 여종이 그 뒤를 따랐다. 몸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머리를 풀고 품이 큰 어두운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은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변함없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먹고 입고 싸고 잘 줄 알면 충분하지 뭐. 희로애락이니 뭐니 바보는 그런 거 모르나 보네.

“부엌에 전해. 난 냉면을 먹고 싶다고.”

정교랑이 말했다. 거봐, 맞잖아!

“네.”

몸종이 대답했다. 이 바보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도 아니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도 아니야. 사람을 패거나 소란을 부리지도 않지.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니 먹고 마실 것 챙겨 주고 옷 갈아입는 시중이나 들면 그만이야. 이렇게 모시기 편한 윗전이 있나. 몸종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정교랑은 커다란 방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손에 찻잔을 꼭 쥐고 미동도 하지 않는 채로.

울고불고하는 반근을 보며 주육낭은 인상을 썼다.

“연지분을 바른 영웅인 네가 아까운 마음이 들어 데려가겠다고 한 것인데 이리 울고불고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주육낭은 고삐를 잡고 말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영웅? 나를 말하는 건가? 공자께서 날 이렇게 높이 보셨어? 하지만……·.

“그래도 저희 아씨는 어쩌고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네가 없으면 정씨 가문엔 다른 아랫것이 없다더냐?”

주육낭은 우스운 듯 말했다. 똑똑하고 영리하긴 한데, 너도 여인이라 성가신 건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저희 아씨는 어릴 때부터 저와 함께하셨거든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너와 함께했다고 다른 사람이랑은 같이 못 살아?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느냔 말이다.”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 세상에 누가 떠나면 못 사는 사람이 있기나 하다더냐? 네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그건 자기기만이야!”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정씨 가문 사람도 아니잖아. 주씨 가문에서 샀으니 주씨 가문 사람이지. 그럼 돌아가야 해.

“갈 것이냐, 말 것이냐? 난 길을 서둘러야 한다. 가기 싫으면 관둬라. 네가 아쉬워서 이러는 줄 아느냐? 널 이런 곳에 버려두는 게 아까웠을 뿐이야!”

반근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어 말 위에 앉은 소년을 바라봤다. 높은 곳에서 반근을 내려다보는 그 소년은 석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반근은 고개를 돌려 문 안을 바라봤다. 아씨는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 하지만 옆에서 일깨워 주지 않으면 사나흘 내의 사람과 일밖에 기억 못 하시지. 그렇다면 사나흘 후엔 반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하실 거야.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

“네.”

반근은 목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인은 공자의 말씀을 따를게요. 소인은 아무것도 없어서 챙길 짐도 없어요.”

마침내 석양이 지자 저녁 빛이 대지를 덮었다.

몸종은 실파와 두부를 고명으로 올린 냉면을 청자 면기에 담아 팔걸이 책상 위에 차려 놓고, 간단한 반찬 접시 두 개와 빈 그릇, 젓가락까지 올린 후 정교랑 앞으로 들고 갔다.

방 안은 어느덧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날아드는 날벌레는 아래로 내려뜨린 대나무 문발이 막아 주었다. 정교랑은 눈앞에 차려진 식탁을 보고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밥을 혼자 먹을 줄은 아나 모르겠네. 몸종이 잠시 머뭇거리며 옆에 있는 여종을 바라보자, 여종이 몸종에게 눈짓을 했다.

몸종이 손을 뻗어 젓가락을 집어 들으려 할 때였다. 정교랑이 한발 먼저 손을 뻗어 젓가락을 들더니 한 손으로는 소매를 잡고 한 손으로 천천히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몸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여종을 향해 뿌듯한 듯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문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네다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곽 낭자가 어쩐 일이에요?”

몸종과 여종이 웃으며 맞이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이 웃으며 뒤에 있는 이를 가리켰다.

“저 아이도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예요.”

몸종 하나가 굳은 얼굴로 서서 건성으로 예를 표했다.

“웬 사람을 또 보내요?”

“아, 아씨랑 같이 왔던 그 애가 떠났거든요. 부인께서 둘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할 것 같다며 하나를 더 보내 주셨어요.”

곽 낭자가 대청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인은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식사 중이었는데, 식사를 멈추고 이쪽을 쳐다볼 기미는 전혀 없었다. 바보 노릇도 나쁠 건 없지, 성가신 일이 없으니까.

곽 낭자는 오래 있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바로 뒤돌아 나갔다. 남아 있는 몸종과 여종은 여전히 놀란 상태였다.

“그냥 가 버렸다고?”

새로 온 몸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더니 그 말에 쉿 소리를 냈다.

“안 가면요? 평생 여기서 지내라고요? 좋은 곳으로 갔어요. 공자가 직접 와서 데려간다는데 안 가는 게 바보죠.”

몸종과 여종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제야 이해했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냥 가 버리다니.”

몸종은 고개를 돌리고 대청 안에 있는 정교랑을 힐끔 바라봤다. 등불 아래의 여인은 여전히 느릿느릿 식사 중이었다.

“그래도 오래 모신 분인데 와서 고개 숙여 인사라도 한마디 하고 가지.”

몸종이 투덜거렸다.

“했어요. 문밖에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는걸요.”

새로 온 몸종이 말했다.

“그렇게 인사하면 뭐 해요. 바보가 뭘 안다고.”

주씨 가문 공자가 밤길을 재촉해 떠나며 몸종까지 데려갔다는 소식은 금세 안채로 전해졌다.

“자기 아씨를 끔찍이도 챙기더니? 부엌에 와서 간식을 만들래도 싫댔잖아. 더군다나 여긴 같은 집이고. 근데 뭐야, 이번엔 냉큼 가 버려? 천 리도 넘은 길을 이렇게 그냥 간다고?”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쉬울 게 뭐 있어. 그 계집이 영리한 거지. 사람은 다들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걸. 바보의 시중을 들어 봤자 평생 그 모양 그 꼴일 테지만, 그 공자를 따라가면 앞으로의 삶이 달라지잖아.”

정오랑이 천천히 말했다.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파악한 정육랑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주위에 있는 몸종들을 분노 어린 눈으로 쓱 훑었다.

“너희들 중에 그따위로 바람이 나서 주인을 버리고 가는 계집이 나오기만 해 봐라. 누굴 따라가든 내 기필코 쫓아가 요절을 내겠다.”

정육랑이 고개를 쳐들고 앙칼지게 말하자 몸종들은 놀라 얼른 무릎을 꿇으며 당치도 않은 말씀이라고 빌었다.

“바람나는 게 뭐야?”

정칠랑이 궁금한 듯 물었다.

“바람이 나면 왜 주인을 버려?”

참, 8살짜리 아이가 한 방에 있었지. 자매들은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리며 부채질을 했다.

“따분해 죽겠다. 연못에 가서 놀자.”

정육랑이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다른 자매들은 따라서 일어섰지만 정칠랑은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긴 귀신이 있잖아.”

“없어, 넷째 오라버니는 병에 걸렸던 거야.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근심이 쌓였던 차에 연못에서 바람을 쏘다가 병에 걸렸던 거라고. 료 의원이 그랬어!”

정육랑은 눈썹을 치켜뜨며 정칠랑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한 번만 더 우리 오라버니에 대해 허튼소리 지어내 봐. 너랑 안 놀 줄 알아!”

정칠랑은 억울하기도 하고 열이 받기도 했다.

“나도 너랑 안 놀아!”

정칠랑은 발을 구르며 소리친 후 신도 신지 않은 채 가 버렸다. 유모와 몸종들은 늘 있던 일이라는 듯 나막신을 들고 얼른 뒤쫓아갔다. 정육랑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가자. 그 바보가 이젠 연못에 안 나오니까 안심하고 놀아도 돼.”

어느새 날이 밝았다. 대나무 문발 밖에 있는 간이 침상에서 자던 몸종은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 물었다.

“아씨, 일어나셨어요?”

문 안에서 응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종은 몸을 일으켜 얼른 머리를 빗질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에 앉아 있었다.

“아씨,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몸종이 말했다. 정교랑의 시중을 드는 일을 시작한 건 이제 겨우 사나흘밖에 안 됐지만 몸종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너무나도 단순한 일이었으니까. 아씨는 떼도 안 쓰고 조용해서 시중들기가 너무 편하네. 아, 밥 먹는 것만 빼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끓인 물을 마시고 나자 몸종이 정교랑 앞으로 음식을 가져왔다.

“아씨, 어떠세요?”

몸종이 조심스레 묻자 정교랑은 눈으로 쓱 식탁을 훑더니 잠시 침묵했다. 이젠 모든 음식을 안채 부엌에서 가져왔지만 여기 있는 작은 부엌을 없앨 순 없었다. 왜냐하면……·.

“이 생선은 참기름에 좀 더 지져. 밥은 국에 말아 끓이고.”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식탁에 있는 음식들을 찬합에 넣어 들고 나갔다. 마당에 있던 다른 몸종은 머리를 감는 중이었다.

“물부터 길어 오고 씻어. 아씨께 밥을 새로 지어 올려야 해.”

몸종이 말하자 머리를 감던 몸종은 성가신 듯 대꾸했다.

“밥 다 됐잖아? 뭘 더 해?”

“안 드시겠다고 이렇게 저렇게 다시 해 오래.”

머리를 감던 몸종은 머리를 털며 다가와서는 찬합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바보가 뭘 알아, 대충 달래서 먹이지. 진짜 아씨 모시듯 시중을 드네.”

이어 손을 뻗어 찬합을 받으며 말했다.

“나한테 맡겨.”

머리를 감던 몸종은 젓가락을 들어 생선을 뒤집고 옆에 있던 국에 밥을 말아 두어 번 아무렇게나 뒤적였다.

진한 머릿기름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정교랑이 창가에서 고개를 들자 낯선 몸종이 보였다.

“아씨.”

몸종은 정교랑을 부르다 말고 창가에 단정히 앉아 있는 아씨를 보며 흠칫 놀랐다. 이 방 안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고 아씨를 제대로 본 것도 처음이었다. 바보인 게 아까운 미모네.

“아씨.”

몸종은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으며 찬합에 있는 생선과 음식을 차려 놓았다.

“말씀하신 대로 생선을 지졌어요. 국도 끓였고요.”

정교랑은 식탁에 있는 음식을 쓱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그 몸종을 쳐다봤다. 편하게 행동하던 몸종은 정교랑의 눈빛에 어째서인지 긴장이 됐다. 역시 바보는 사람을 겁먹게 한다니까. 몸종이 정교랑을 보며 미소를 짜냈다.

“소인이 먹여 드릴까요?”

몸종이 쭈뼛거리며 말하자 정교랑은 몸종을 힐끔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피식 웃었다.

“난 바보가 아니야. 바보는 너지.”

몸종은 실소했다. 진짜 바보잖아. 정교랑이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엎어 버렸다. 국에 만 밥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바닥과 식탁, 맞은편에 있던 몸종의 몸으로 음식이 튀었다.

“앗, 뜨거워.”

몸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겨우 며칠 마음 편히 지내던 대부인은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교랑 아씨 말씀으로는 그 아이가 밥을 먹다가 덴 거라고 하셨어요.”

여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몸종은 교랑 아씨께서 엎으신 거라고 하고요. 나머지는 전부 밖에 있어서 본 사람이 없어요. 부인, 누구 말을 믿으시겠어요?”

“누구 말을 믿냐고?”

대부인이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으며 여종을 바라보더니 돌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주씨 가문 사람이 떠났다고 평생 안 올 줄 아느냐? 그저 먹고 마실 줄밖에 모르는 아이 시중이 그리 힘들어? 누굴 바보로 아는 게야! 어딜 감히!”

여종은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네, 네. 고정하세요, 부인. 고정하세요. 알겠습니다. 소인이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여종은 얼른 일어나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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