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60)

-훌륭한 방법-

“아씨,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다 외웠어요. 근데 저들이 또 절 때리면 어떡하죠?”

반근은 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정교랑은 또다시 병풍의 글자를 쳐다보며 팔걸이 책상 위에 손으로 천천히 글자를 따라 썼다.

“넌 저들의 사람이 아니잖아.”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멍해졌다가 아, 하며 깨달았다.

“맞네요. 전 저들이 산 게 아니죠. 주씨 가문 노부인께서 사서 아씨께 주셨으니까요.”

반근은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전 아씨의 사람이에요!”

반근이 말귀를 알아듣자 정교랑은 잠자코 있었다.

“그럼 아씨, 이번에도 아씨께서 넷째 공자를 고친 거란 말은 하지 말아요?”

반근이 또다시 묻자 정교랑은 손을 멈추고 반근을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때로는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와 정말 고통스러웠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작은 공을 세우는 게, 더 나아.”

반근은 막막한 표정이었다.

“저들이 안 믿을 거야. 나보단 널 믿게 하는 게 더 쉽지. 우선 널 믿게 하고 나서 나머지는 천천히 풀어 나가면 돼.”

반근이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데 문밖에서 기다리던 여종이 귀찮다는 투로 또다시 재촉했다.

“가 봐. 피곤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어쨌거나 아씨는 아직 몸이 불편하고 말도 똑 부러지게 못 한다. 대노야와 대부인의 하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씨가 좋아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자. 일단 내가 먼저 공을 세우는 게 편할 수 있어. 둘의 삶도 나아질 테고.

반근은 퍼뜩 깨달았다. 작은 공을 세우는 게 낫다는 아씨의 말이 이 뜻이었구나! 정교랑을 따르면서 반근도 점점 똑똑해졌다.

“네, 알겠어요. 아씨, 다녀올게요.”

반근은 신이 나서 예를 표하고 몸을 일으켰다.

대노야는 대부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만 안방 여인네의 생각엔 별 관심이 없었다. 대노야가 보기엔 몸종이 혼자 생각해 낸 방법이든 누가 몸종에게 알려 준 방법이든 똑같았다. 무당이나 도사가 부리는 잔재주일 뿐이었다. 사소한 것을 떠들썩하게 일을 키우는 대부인의 태도가 틀렸을 수도 있다. 왜 나무라고 호통을 친단 말인가, 상을 줘야 마땅하지.

“이 일로 어떻게 상을 줘요? 이게 어떻게 사낭을 위해서 한 일이냐고요.”

대부인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이런 짓을 벌인 거라고요. 이번엔 요행히 들어맞았으니 다행이지만 다음번에 누가 독약을 먹이라고 하면 어쩌겠어요? 사낭에게 독약을 먹이지 않겠냐고요.”

춘란은 기겁을 하고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이 어찌 감히요, 당치 않습니다.”

대부인의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대노야와 이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게 바로 여인들의 억지 논리겠지.

“얘가 설마 그러겠소. 괜한 생각 마시오.”

대노야가 말하는데 밖에 있던 여종이 때마침 반근을 데려왔다고 고했다.

“그러니까 그……·.”

대노야는 순간 그 바보의 이름이 뭔지 생각이 안 났지만 연장자로서 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그 아이를 바보라고 지칭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말을 얼버무렸다.

“……·의 몸종 말이냐?”

“네, 소인이 교랑 아씨의 몸종 반근이에요. 노야와 부인을 뵈옵니다.”

반근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반근은 두 무릎을 꿇지 않고 한쪽 무릎만 꿇는 예를 올린 후 꿇어앉았다.

“무엄하구나!”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 몸종의 태도가 무엄하다는 것인지 이 몸종이 한 일이 무엄하다는 것인지는 대부인 자신도 몰랐다. 호통을 치고 나자 무어라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엄하게도 넷째 공자를 해치려 하다니? 아니지, 목숨을 구했잖아. 다만 너무나도 기괴한 방법으로 목숨을 구했기에 정씨 가문 안주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요.”

반근이 말했다. 지난번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교랑이 일깨워 준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서인지 반근은 갑자기 정씨 가문의 노야와 부인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네가 은밀히 춘란에게 넷째 공자를 놀라게 하라고 시켰느냐?”

대노야가 말을 이어 물었다.

“네.”

반근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면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울고 있는 춘란을 힐끔 쳐다봤다.

“저 아이를 나무라지 마세요. 전부 제가 시킨 거예요.”

“네가 어디서 왈가왈부를 해!”

대부인이 냉담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누가 그리하라고 시켰느냐? 대체 저의가 뭐야?”

반근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부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넷째 공자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죠.”

“너, 너, 그럼 왜 나한테 와서 직접 말하지 않고?”

“제가 말씀드렸으면 부인께서 믿으셨을까요?”

반근은 억울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당연히 안 믿었겠지. 대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은밀히 춘란을 부추겨? 넷째 공자를 뭐로 아는 거야?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니에요, 부인.”

반근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넷째 공자 같은 증상은 도관에서 지낼 때 많이 봤거든요. 도관에 있는 여도사들은 전부 그렇게 했어요. 간단한 방법이죠.”

대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저도 처음엔 노야와 부인께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여긴 병주가 아니잖아요. 제가 말씀드려도 안 믿으실 텐데 넷째 공자의 병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병주였으면 달랐겠죠. 청운관에서 쓰는 방법이라고 하면 다들 믿으니까요.”

반근은 눈빛을 빛내며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까지 말한 반근은 무언가 생각난 듯 이노야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노야, 이노야는 아시죠? 병주의 우리 청운관은 귀신을 잘 쫓기로 유명했잖아요.”

이노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운관을 없애지 못한 게 한인 이노야가 청운관 일에 관심을 쏟을 리가. 더구나 신에게 복을 빌고 귀신을 쫓는 일은 집안 여인네들이나 신경 쓰는 일이지 이노야 같은 벼슬아치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이노야는 콧방귀만 뀌고는 잠자코 있었고, 대노야는 어느덧 저도 모르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아주 맹랑한 계집이구나. 네가 우리한테 차근차근 설명했으면 우리가 안 믿었겠느냐?”

대노야가 입을 열었다.

“노야와 부인께서 믿으신다 해도 춘란이 믿는 것보단 못하죠.”

반근이 대답했다. 바보의 시중을 드니 몸종도 바보가 된 게 틀림없군. 감히 이따위 말을 내뱉다니! 이노야와 이부인은 반근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춘란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바보의 몸종을 믿는 게 아니었어! 귀신에 홀렸던 게야!

“넌 어찌……·.”

대부인이 화를 내려고 하자 대노야가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리 말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두 분은 집안을 맡은 노야와 부인이니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으시잖아요. 하지만 춘란은 달라요. 춘란의 신경은 온통 윗전인 넷째 공자 한 분께 가 있죠. 넷째 공자만 구할 수 있다면 놀라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 심장을 내놓으라 해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내놓을걸요.”

반근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씨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지. 노야와 부인은 속이기 쉽지 않으니 머릿속이 오로지 한 생각뿐인 춘란을 속이는 게 훨씬 쉽다고. 춘란은 뜻밖에도 반근이 이렇듯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기쁘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도 들어 바닥에 엎드린 채 엉엉 울었다. 대부인은 인상을 쓰고 대노야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여인네의 논리로구나, 여인네의 논리야.”

죄를 묻겠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대노야. 없는 말 하는 게 아니에요. 도관에 있는 여도사들은 사람을 치료할 때 가족들을 속였어요. 병자의 가족들에게 부추를 빻아 병자의 입과 코에 바르겠다고 하면, 그런 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거든요.”

반근은 웃음까지 띠고 말했다. 물론 여도사들이 그런 일을 했을 리는 없다. 그 여도사들이야 부추를 먹을 줄만 알지 부추로 병을 치료할 줄은 몰랐으니까. 부추로 병을 치료할 줄 아는 사람은 당연히 아씨였다. 그 사람들이 당시 아씨가 병풍 뒤에서 여인들의 코와 입에 부추를 발랐다는 걸 알았다면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도사들이 그랬어요.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직접 행하는 게 낫다고요.”

반근이 말했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야.”

문밖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칭찬했다.

“결과에 집중하고 방법은 묻지 말라. 과연 신의는 다르군!”

료 의원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신묘하도다, 신묘해.”

료 의원은 언제 온 거지? 급히 일어서던 대노야와 이노야는 멈칫했다. 대청 밖에는 료 의원 외에도 소년 하나가 서 있었다. 16~17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먹색 관복 차림이었는데 피부색은 거무스름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으며 손을 허리춤에 대고 칼을 뽑아 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 허리춤엔 칼이 없었지만. 자연스럽고 편한 자세인 걸 보니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그렇다면 료 의원의 제자인가? 의원의 제자가 살기를 띨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호위 무사? 하지만 호위 무사라고 하기엔 귀티가 흘렀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우리 조모님께서 정씨 가문 아씨한테 보낸 그 아이냐?”

소년이 입을 열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있는 정씨 가문 사람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꿇어앉아 있는 반근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반근은 그 눈부신 모습에 저도 모르게 멍해져 할 말을 잃었다. 소년도 반근의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제법이구나, 훌륭해.”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도한 태도로 반근을 보며 말했다.

우리 조모님? 이 경성 말씨는? 설마……·.

“방금 들어오다가 문밖에서 주씨 가문 여섯째 공자를 만났지 뭡니까. 알고 보니 두 집안이 사돈이었군요. 그래서 같이 들어왔습니다. 내 일찍이 경성 주씨 가문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지요.”

료 의원이 말했다.

집사 등이 난감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대문을 지키는 이들은 료 의원을 알았기에 출입할 때 검문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료 의원과 소년이 웃으며 함께 들어올 때도 료 의원의 사람인 줄 알았지 사돈댁 손님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주씨 집안 공자도 너무하는군.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남의 집에 버젓이 들어오다니! 사돈댁 안채에서 벌어지는 소동까지 다 지켜보고! 자리에 있던 정씨 가문 사람들은 부끄럽고 민망했다. 무장의 가문이라 그런지 역시 거칠고 근본이 없구나 싶었다.

“공자, 노마님 댁의 분이세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주육낭은 반근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됐네요, 이렇게 오시다니요. 우리 아씨를 보러 오신 거죠?”

반근은 반색을 하며 말했지만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지금껏 눈길조차 주지 않은 정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며 허리 굽혀 예를 표했다.

“주씨 집안 여섯째입니다. 사돈 어르신의 서찰을 받은 부친께서 직접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육낭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손아랫사람답군. 정씨 가문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카, 대청으로 가서 얘기하지.”

대노야의 말에 주육낭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집사의 안내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반근은 주육낭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래, 이 일은 여기까지만 하자.”

주씨 가문 사람의 등장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대노야가 말했다.

“료 의원은 사낭의 병이 그렇게 해야 낫는다고 했다. 여기 두 계집의 마음은 갸륵하나 일을 행함에 있어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었어. 공도 있고 과도 있으니 여기서 덮도록 하겠다. 그 누구도 다시는 거론치 말아라.”

“감사합니다, 노야. 감사합니다, 부인.”

춘란은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정신을 차린 반근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대부인은 어쩐지 심사가 편치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대노야와 의원 모두 두 계집이 넷째 공자를 구했다고 인정한 마당에, 자신만 뭔가 수상쩍다고 물고 늘어지면 아랫것들이 섭섭하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들 가서 일해라.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었다간……·.”

대부인은 절대 용서치 않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두 계집이 나서지 않을 경우 아들이 목숨을 잃지 않겠는가.

“먼저 내게 고하도록 해라. 아무리 황당한 방법이라 해도 너희가 좋은 뜻에서 한 말인 걸 알면 노야와 난 너희를 믿어 줄 것이다.”

대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대부인의 말에 춘란은 죽었다 살아나기라도 한 듯 안도하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대부인. 감사합니다, 대부인.”

춘란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인사를 올렸다. 반근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예도 표하지 않고 총총 가 버렸다.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아씨에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모친을 여읜 딸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는 외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이던가.

몸종들이 모두 물러가자 대노야와 이노야는 주씨 가문에서 온 사돈 조카를 보기 위해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부인과 이부인은 후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주씨 가문에서 갑자기 사람을 보낸 의도에 대해 추측했다.

“자네가 전에 귀띔을 해 줬으니 망정이지, 그 애를 도관으로 보냈으면 어쩔 뻔했나.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그 애를 보자고 했으면 둘러대느라 골치 아팠을 거야.”

대부인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 말하자 이부인은 빙긋 웃었다. 이부인으로서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낼 줄 알았으면 대부인이 아이를 도관으로 보내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다.

같은 시각 정교랑 역시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흥분하는 반근에 비해 정교랑은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물론 흥분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긴 힘들었겠지만. 반근이 정교랑 앞에 엎드려 정교랑의 팔을 붙잡았다.

“아씨, 이제 됐어요. 노마님은 안 계시지만 외숙 어르신 쪽에서 아직 아씨를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씨를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반근이 기쁘게 말하자 정교랑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여섯째 공자가 오신 거래요.”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여섯째 공자는 전에 뵌 적이 없거든요. 노마님께서 절 사셨으니 주씨 가문 사람인 셈이지만 전 여섯째 공자를 알지도 못해요.”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봤다. 주씨 가문 사람이라고 했지.

“여섯째 공자는, 몇 살이니?”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이 돌아온 후 정교랑이 말한 첫마디였다.

“한 열여섯쯤 돼 보였나? 아니다, 아니다, 한 열일곱쯤이요?”

반근은 그 젊은 공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가늠해 보았다.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와서는, 여기서 일어난 일을 한참 동안 잠자코 지켜봤다고?”

정교랑이 물었다. 아씨는 왜 이런 걸 물으시는 거지?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갑작스럽게 들리던 그 목소리와 고개를 돌려 확인했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살짝 넋이 나갔다.

“여섯째 공자께서 정말 때마침 오셨어요. 소인은 바로 겁이 달아나더라고요. 뭐랄까, 노마님께서 생전에 계실 때처럼요.”

반근이 감상에 젖어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있었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팔걸이 책상에 기댄 채 병풍에 있는 글자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왼손으로 글자를 써 보았다.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연습하니 두 손 모두 제법 말을 잘 들었다.

“아씨, 우리 여섯째 공자 보러 갈까요?”

한쪽 옆에 있던 반근은 몸을 곧추세우며 묻다가 도로 앉았다.

“아니다, 여섯째 공자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올 때까지 기다리자. 분명 올 거야.”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네가 복수할 기회가 왔어.”

반근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무슨 복수를?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 근처에 놓아둔 작은 공책을 꺼내 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낮, 여종이 또 싱싱한 무 한 바구니를 훔쳐 가는 바람에 아씨께서 못 드셨다.

주육낭이 이노야를 따라왔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으면 놀라더라고. 그래서 여기 머물게 했지.”

이노야는 말하고 나니 이런 꼬맹이한테 내가 왜 해명을 하고 있나 싶어 후회가 들었다. 어쨌거나 자기 딸인데 어디에 묵게 하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이노야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집에 있는 거면 어디서 지내든 다 좋죠.”

주육낭이 말을 이었다.

“누이가 돌아왔으니 다행입니다. 황궁보다 좋은 게 누추한 자기 집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이노야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자식이 면전에 대고 사람을 모욕해?

“지금껏 집에서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라서요. 집 생각이 많이 나네요.”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이노야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부는 어릴 때 공부하러 집을 떠나 계시고 나중엔 외지로 부임하셨으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노야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마른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내라면 천하에 뜻을 둬야지. 너도 크면 그럴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정교랑 거처의 문 앞이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과 몸종이 예를 표하며 맞이했다. 대청 처마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은 기뻐하며 노야와 공자를 불렀다. 딸이 돌아온 후 이노야가 딸의 거처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 방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방에서 나던 그 역한 냄새가 훅 끼쳐 질식할 것 같았다.

“너희 아씨는 깨어 있느냐, 잠들었느냐?”

이노야는 걸음을 멈추고 반근에게 물었다. 주육낭 역시 걸음을 멈추고 처마 아래에 선 반근을 바라봤다.

“깨어 계세요. 아씨를 모시고 나올게요.”

반근은 이노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아씨, 아씨. 저기 좀 보세요, 사촌 공자세요.”

반근은 정교랑의 팔을 부축하며 정교랑을 주육낭에게로 안내했다. 눈앞의 소녀를 본 이노야와 주육낭은 살짝 멍해졌다. 하지만 소녀의 눈부신 미모에 대해 곱씹어보기도 전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 배고파.”

정교랑의 말에 이노야는 멈칫했다.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표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다 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심한 눈빛으로 빠르게 정교랑을 훑은 주육낭은 곧바로 반근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의 팔을 붙잡고 있는 반근의 손을 보며 주육낭의 입가에 설핏 웃음기가 지나갔다.

“고모부!”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노야를 보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정교랑은 다시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바보는 정상인의 일에 간여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정교랑은 병풍 뒤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았다. 커다란 옷자락은 바닥에 질질 끌렸고 귀밑머리는 빼져나온 상태로, 조용히 그리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다면 그야말로 나무 인형이 따로 없다고 탄식했을 테지만 예외는 있었다.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대청을 힐끔 봤다.

“일개 바보가.”

주육낭은 씩씩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더니 이노야를 바라봤다.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노야는 굳은 표정이었고, 곧이어 문밖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대부인과 이부인이 급히 들어오며 물었다. 주육낭의 시종들도 달려와 부엌에서 물건을 끄집어냈다. 바닥난 쌀독과 시들시들한 무, 물에 담가 놓은 두부 반 모, 싱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선이 전부였다.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과 몸종, 반근은 전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육낭이 앞에 있는 독을 발로 홱 걷어차자 때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대부인과 이부인은 기겁을 피하며 피했다.

“이봐요, 정씨. 그래도 고모부라고 불러 줬더니만, 우리 고모님의 딸을 이따위로 대우합니까!”

소년은 씩씩거리며 소리치더니 손을 허리춤에 대며 검을 뽑아 들 태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검이 없는 걸 발견하고 뒤돌아 시종을 발로 차며 소리쳤다.

“내 검을 가져오너라!”

무관 출신인 주씨 가문은 난폭하고 거칠었다. 주먹으로 말하는 게 그 집안 가풍이었으니, 의분에 찬 소년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부인은 얼른 주육낭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육낭, 할 말 있으면 좋게 말로 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요?”

주육낭은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누이를 이따위로 대접한 겁니까? 사지 멀쩡한 보통 사람도 아니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데다 거동까지 불편한 바보를 굶기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대부인과 이부인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대노야가 돌아서며 호통을 치자, 따라오던 집사 부인들과 여종들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무능하여 아씨를 제대로 못 보살폈어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원래는 울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식재료를 보고 있노라니, 고생하며 힘겹게 돌아오던 여정도 떠오르고 돌아와서도 불안하게 지내던 나날들이며 영문도 모르고 따귀를 맞은 일까지 줄줄이 떠올랐다. 반근은 고개를 들고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우뚝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누이의 억울함조차 풀지 못한다면, 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소년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반근의 눈에선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소인의 무능 탓이에요.”

반근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을 한 대부인은 기가 차서 몸을 떨었다. 우선은 천박하게 이런 짓을 벌인 아랫것들에게 화가 났고, 다음으로는 고의로 일을 키운 바보의 몸종에게 화가 났다.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닐 텐데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아까 저쪽에서 소동을 벌일 땐 잠자코 있더니 왜 하필 여기서 이 난리를 피우느냔 말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다 내 잘못이야.”

이부인이 입을 열자, 주육낭은 냉소 어린 시선으로 이부인을 보며 말했다.

“후처로 들어오신 그분입니까? 착한 계모는 없다더니!”

이부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이부인의 명성은 끝이었다.

“육낭,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노야는 정색을 하고 호통을 쳤다.

“새어머니가 들어오면 아버지도 내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 있죠.”

주육낭이 이노야를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내가 후처한테 한마디 한 건 그리 못마땅하신 분께서 내 누이가 굶주리고 무시를 당할 땐 눈 감고 귀 막고 있으셨습니까!”

버릇이 없군, 버릇이 없어! 이게 어디 손아랫사람이 보일 태도인가! 이노야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막무가내인 사람 앞에서는 이치가 소용없다더니.

“난 그저 누이가 집에 무탈하게 잘 도착했나 보러 왔던 겁니다. 그런데 집까지 무사히 온 누이가 집에 도착해서는 이런 억울한 일을 겪고 있었군요. 어린 조카의 입장이라 말할 자격은 없지만서도.”

주육낭은 정씨 가문 사람들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떠들었다. 말할 자격이 없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너 혼자 떠들고 있잖아. 정씨 가문 사람들은 속으로 소리쳤다.

“이 길로 돌아가 집안 어르신들을 모셔와야겠습니다. 이쪽 집안 어르신들이랑 앉아서 얘기를 나누시도록!”

말을 마친 주육낭은 옷소매를 뿌리치고는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린놈도 이렇게 기고만장해서 날뛰는데 어르신들이 오면 과연 얌전히 앉아서 얘기를 나눌까? 어림없는 소리! 대노야는 험상궂은 무장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정씨 집안 대문으로 쳐들어오는 모습이 벌써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거기 서라, 얘기하고 말 게 뭐 있느냐. 못된 아랫것이 주인을 능멸했으니 내쫓아 마땅하지!”

대노야가 성을 내며 소리쳤지만 주육낭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랑은 관리를 소홀히 했으니 사당에 가서 반성하시오!”

대노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흠칫 놀라며 이부인에게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주육낭의 걸음이 그제야 멈췄다.

이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입술도 바짝 마르고 불안해졌다. 시집온 후 이런 질책을 받은 건 거의 처음이었다. 더구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토록 매서운 질책이라니. 앞으로 이 집안에서 설 자리가 있겠는가.

“네.”

이부인은 목 메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님, 이건 청랑과 무관한 일입니다!”

이노야가 얼른 나섰다.

“그래, 너도 마찬가지야!”

대노야는 이 판국에도 아내를 두둔하는 아우를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 상황을 보란 말이다! 뭐가 중요한지를 몰라!

“형님, 청랑은 몸이 안 좋습니다. 저기, 그래서 그 일은 형수님이 맡으셨고요.”

이노야는 끝까지 말을 마친 후에야 고개를 숙였다. 대노야는 당황한 표정이었고 대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관두자, 더 이상 지킬 체면도 없다.

“그래요. 내 잘못이에요. 청랑과는 무관한 일이라고요.”

대부인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주육낭을 향해 살짝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육낭, 내가 사과하마.”

주육낭도 답례로 예를 표했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이런 잘못을 안 저지르길 바랄 뿐이죠. 부처님께 시주하고 염불을 외는 것보단 가까이 있는 혈육을 보살피는 게 더 쉽게 공덕을 쌓는 길이에요.”

녀석, 말은 청산유수군. 정교랑은 입을 삐죽거리고는 시선을 아래로 두며 왼손으로 팔걸이 책상에 그림을 따라 그리는 연습을 했다. 이 시에 있는 글자는 이제 다 쓸 수 있게 됐다. 이참에 연습할 서화를 몇 개 더 가져오게 할까?

바보의 거처는 길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곧 흩어졌다. 허드렛일을 하던 여종과 몸종은 뭐라 하소연 한마디 못 하고 곧 인신매매꾼에게 끌려갔다. 당사자인 두 사람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전부 정씨 저택에서 내쫓겼다. 정씨 가문 하인들은 뒤숭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그 바보의 거처를 바라볼 때면 두려움을 품게 됐다.

소식은 금세 정씨 가문 안채로 퍼졌다. 이부인의 곁방에서 지내는 정칠랑은 넋이 나간 채로 무릎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아씨, 너무 걱정 마세요.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정말로 사당에 반성하러 가신 건 아니에요. 주씨 가문 사람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신 말씀이죠.”

유모가 위로하며 말했지만 정칠랑은 여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옆에 있던 정사랑이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하지. 백모님과 어머니는 집안의 안주인이시잖아. 손아랫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반성을 하러 가시다니. 주씨 가문 어르신들이 온다 해도 그럴 일은 없어.”

“넷째 아씨 말씀이 맞아요.”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정칠랑은 정신이 돌아온 듯 손을 풀고 꿇어앉더니 돌연 두 눈을 빛냈다.

“오라버니가 있으니 정말 좋네. 그런 오라버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

거기까지 말한 정칠랑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난 그런 오라버니가 없지만.”

처음으로 그 바보가 부럽기도 하고 살짝 분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 바보한테 그런 오라버니가 있다는 건 너무 아까워!

그런 오라버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풍성하게 차려놓은 눈앞의 음식을 보며 반근은 기쁜 표정으로 꿇어앉았다.

“아씨, 식사하세요.”

새로 온 몸종과 여종이 힘을 합쳐 식탁을 들고 왔다. 대나무 문발 뒤 침상에 있는 여인은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만 나가 봐요.”

반근의 말에 여종과 몸종이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의 입맛을 모르니 낭자가 잘 살펴 줘.”

나이 많은 여종이 공손히 말했다.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를 했다. 여종과 몸종은 물러가면서 반근이 대나무 문발을 올리고 여인을 부축해 대청으로 나오는 모습을 언뜻 봤다. 호기심이 인 몸종은 여인을 똑바로 보려고 했지만, 나이 많은 여종이 눈을 부라리며 잡아끄는 바람에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씨는 어떻게 생겼어요?”

어린 몸종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묻자 여종이 경고했다.

“바보가 뭘 어떻게 생겨! 괜히 말썽 피우지 마. 주씨 가문 공자한테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는 날엔 우리 둘 다 골치 아파져.”

이번 일로 두 가족 일곱 식구가 쫓겨났다. 주인집에서 쫓겨난 아랫것들의 말로는 뻔했다. 어린 몸종은 놀란 표정으로 몸을 떨며 더는 그쪽 방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괜히 바보의 생김새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 화를 초래할지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친 대부인은 대노야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물었다.

“뭐래요?”

“별말 안 했소. 술만 한 주전자 마시고 자러 가더군.”

대노야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기분이 언짢은 듯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대부인이라고 왜 아니겠는가. 맞은편에 앉은 대부인이 막 입을 열려는데 이노야 내외가 들어왔다. 이부인은 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에 대부인은 더욱 심란해졌다.

“형님.”

이부인이 무릎을 꿇으며 큰절을 올렸다. 갑자기 큰절을 올리자 대노야 부부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으로 붙잡았다.

“왜 이러는 거야?”

대부인이 말했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제 잘못을 형님께 떠넘겼잖아요. 엄청난 불경이고 큰 잘못이에요.”

이부인은 울면서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그 얘기가 나오자 대부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쪽에 있던 이노야도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형수님께 그리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노야는 고개를 숙였다.

“이러지 마세요.”

대부인은 이쪽저쪽을 급히 만류하며 책망하듯 말했다.

“그게 무슨 잘못이겠어, 원래 내 일이었는데. 내가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 해서 자네가 그런 일을 겪었지 뭔가.”

이부인은 대부인의 손을 붙잡으며 흐느껴 울었다.

“그래요, 한 식구끼리 그런 거 따져서 뭐 하겠소. 지금 중요한 건 남의 식구를 상대하는 일이오.”

대노야의 말에 그제야 다들 자리에 앉았다.

“저쪽 집안에서는 아직, 그, 그 애 이름이 뭐랬지?”

어차피 남이 있는 자리도 아니라 대노야는 까놓고 물어봤다. 안에 있던 세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 셋 다 그 바보의 이름이 뭔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교랑이요!”

가장 먼저 생각해 낸 이부인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주씨 집안 외조모가 지어 준 이름인 듯했어요.”

대노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이한 이름을 지어 주었군.”

대노야가 중얼거렸다. 이름을 말하는 것인지 주씨 가문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주육낭이라는 아이의 말로는 교랑이 돌아온 일을 몰랐다던데, 그 말을 믿어도 되나?”

대노야의 말에 이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모르는 게 이상하죠. 몰랐다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행패를 부립니까!”

방 안은 순간 침묵에 잠겼다.

“오늘 일에는 우리의 잘못도 있소. 저쪽에게 약점을 잡혔으니 굴욕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지. 우린 잘못을 인정했으니 주씨 가문에서 뭘 어쩔 건지 두고 보는 수밖에.”

“뭘 더 어쩐단 겁니까? 우리 정씨 가문이 저런 녀석한테 벌벌 떨어야 해요?”

이노야가 분노로 소리치자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우리가 한 수 접고 들어갔다만 저들이 적당히 물러나지 않고 일을 계속 키운다면, 우리도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수만은 없지.”

대노야가 말을 이었다.

“일개 무인에게 치욕을 당한다는 건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만 깎이는 일이 아니다. 대주 문인들의 체면이 걸린 일이야.”

자고로 무관은 천하고 문관이 귀한 법이다. 관직조차 못 받은 서생도 무관 나리를 겁내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그 혼사를 치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괜히 놀림거리만 됐어요.”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대노야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지금 부친의 잘못을 논하는 것이냐?”

예전 아내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이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대부인이 남편을 잡아끌었다.

“이노야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멋대로 넘겨짚지 마세요.”

그러면서 대부인은 이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피곤할 텐데 다들 낮잠이라도 한숨 자면서 기운을 차리죠. 괜히 웃음거리가 되면 안 되잖아요.”

이노야 내외는 인사를 올린 후 물러나 자신들의 거처로 갔다.

“며칠간 형수님 자주 찾아뵙고 문후 올리시오. 그래야 하루빨리 마음을 풀지.”

이부인은 입을 살짝 삐죽거렸다.

“사죄했잖아요. 큰절까지 올렸는데 그만큼 체면 세워 줬으면 됐죠. 따지고 보면 우리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요.”

이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이부인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지금 뭐라고 했소?”

“내가 뭘요? 내 말이 틀렸어요? 좋은 일은 형님이 다 하면서 난 욕만 먹으라고요? 그 바보는 본인이 맡아 키우겠다더니 왜 일이 생기니까 나만 욕을 먹느냐고요. 아까 당신이 먼저 나서서 내 편을 들지 않았으면 형님이 말을 했겠어요? 내가 사당으로 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겠죠.”

이부인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여긴 밖이야.”

이노야가 흠칫 놀라며 말하자 뒤따르던 몸종과 여종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부인은 옷소매를 뿌리치고는 이노야를 앞질러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노야는 두통으로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주 바람 잘 날이 없군! 잘 지내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한 집에서 숨길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방 내외의 말다툼은 곧 대부인의 귀로 들어갔고, 대부인은 한숨을 쉬며 비녀를 뺐다.

“물러가라. 이 일은 함구하고.”

여종이 네 하고 대답한 후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이방 내외가 왜 갑자기 철없이 굴지?”

대노야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침상에 반쯤 드러누운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도 참. 교랑을 내가 맡겠다고 한 걸 잊으면 어떡해요.”

대부인은 어이가 없는 듯 힘없이 말했다.

“당신이 맡겠다고 한 게 뭐? 어쨌거나 명목상 모친은 이부인이잖소. 내가 제수씨를 벌하지 않으면 주씨 가문 사람이 가만있었겠소? 그리고 내가 설마 진짜 벌을 주려 했겠냐고.”

대노야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한심해서 원.”

대부인이 침상 한쪽에 누우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교랑이 돌아온 게 문제예요. 갑자기 모든 게 변했으니 견디기 힘들겠죠.”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집에 그 애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견디기 힘들 건 또 뭐요?”

대부인이 입을 삐죽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 일을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제수씨가 너무 오랫동안 마음 편히 지냈어.”

대노야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대부인도 반박하지 않고 그저 한숨만 내쉰 후, 이번에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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