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60)

뜻밖

대부인은 월말이면 장부를 대조했다. 벌써 몇 년째 대부인이 맡고 있는 일이어서 눈을 감고 듣기만 해도 대강 알 정도였다.

“왜 지출이 지난달보다 이렇게 많이 늘었지?”

대부인이 눈을 뜨며 물었다. 앞에 일렬로 무릎을 꿇고 있던 집사 부인들이 얼른 장부를 넘기며 살폈다.

“대부인께 아룁니다. 이부인 쪽의 부엌에 해서탕이 1인분 늘었습니다.”

한 집사 부인이 말했다. 해서탕은 값이 얼마 안 나갔다.

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껏 안 먹던 이부인이 왜 갑자기 해서탕을 먹지?

저쪽에서 다른 부인 하나가 또 입을 열었다.

“이부인께서 계절 의복을 추가로 해 입으셨어요.”

대부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에서는 사계절 의복을 정기적으로 지었는데, 왜 명절도 아니고 환절기도 아닌 이때에 갑자기 옷을 추가로 지어 입지?

하지만 아랫것들 앞인지라 의문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그랬다간 말이 와전될 것이다. 특히 형님과 동서 사이라면 더더욱.

“내가 깜빡했구나. 내가 그러라고 한 건데.”

대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집사 부인들은 웃으며 대부인께서 관리하시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다 기억하겠느냐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훤히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대방에 복종하던 이방이 마침내 변한 것이다.

탕약 한 그릇, 옷 한 벌이라고 예사로 볼 일이 아니었다. 여인에게는 아주 작고 미세한 움직임이 가장 진실한 움직임인 법이다. 여러 가지 자잘한 소식들이 정씨 집안 저택에 은밀히 퍼져나갔다.

장부 대조를 마친 대부인은 이번 달도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심신이 피곤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늘 마음이 묵직했다. 연이어 이어지는 사건 속에 마음이 편할 때가 없었다.

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이랬지?

“어머니, 어머니.”

밖에서 정육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바보랑 한 집에 살기 싫어요!”

아, 그렇지. 바보!

대부인은 퍼뜩 깨달았다. 그 바보를 집에 들인 후부터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바보가 있은 후로 정씨 집안엔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바보는 어릴 때부터 집안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노태야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생모도 속을 끓이다가 숨을 거뒀다. 정씨 집안 식구들은 외출도 제대로 못했다.

바보를 도관으로 보내자 집안 분위기는 대번에 좋아졌다. 대방은 사업이 번창했고 이방은 벼슬길이 탄탄대로였으며 현숙한 후처를 들이고 아들딸을 보게 됐다. 정씨 집안은 승승장구했고, 안팎으로 술술 풀려 다들 잘 지냈다.

그런데 하필 그 바보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바보가 돌아오던 날 밤, 언제나 상냥하고 화목하던 이방 부부는 대방 내외 앞에서 대판 싸웠다.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한 동서에게도 그런 성격이 있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대부인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한숨만 쉬지 마시고 얼른 저 바보를 내쫓으세요!”

정육랑이 모친의 팔을 흔들며 소리치자 대부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또?”

대부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 그 바보 때문에 전 이제 외출도 못 해요.”

정육랑은 억울하기도 하고 열도 받는 듯 말했다.

“오늘 동 낭자네 집으로 꽃구경 갔다가 놀림을 받았어요. 우리 집에 바보가 돌아온 걸 온 성 사람이 다 알아요.”

강주부 크기의 땅에선 사소한 일도 금세 쫙 퍼지는데 하물며 정씨 집안의 일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겠는가. 아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

“우리 집 일을 처음 아는 것도 아니잖아. 상대하지 마라, 더 성가셔져. 한동안 바깥출입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실컷 떠들고 나면 아무도 말 안 해.”

정육랑이 겁쟁이처럼 몸을 사려야 한다니, 이런 치욕이 또 없다.

“어머니, 그럼 저 평생 집 밖에 안 나갈래요. 시집도 안 가고요! 누구한테 시집을 가겠어요! 바보 자매가 있는 신부를 누가 데려가요!”

말을 마친 정육랑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뛰쳐나갔고, 대부인이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대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랑은 성격이 너무 제멋대로야.”

대부인이 말했다.

“부인, 여섯째 아씨의 걱정도 일리가 있어요.”

여종이 말했다.

“너도 어린애처럼 굴려고?”

대부인이 여종을 보며 말하자, 여종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바깥에서 여자아이들끼리 웃고 떠드는 소리라고 하지만, 그런 얘기가 많이 돌수록 안 좋은 건 사실이죠. 특히 우리 아씨들은 전부 혼담이 오갈 나이잖아요.”

대부인이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으며, 부채를 흔들던 손을 멈추었다. 바보 자매를 둔 게 영예로운 일이 아닌 건 사실이다. 특히 훌륭한 집안일수록 가리고 따지는 게 많은 법.

저녁 무렵 대부인은 대노야와 이 일을 논의했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소. 이미 있는 사람을 없다고 말한다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바깥에서 뭐라 하든 일단 말을 아낍시다. 주씨 집안도 생각해야 하잖소.”

대노야가 퉁명스레 말했다.

“아니면 이번에도 어디로 보내든가요. 도관이 병주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집에도 있고.”

“보낸다 해도 그런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인데 뭐가 다르겠소.”

대노야가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감탄했다.

“전남(滇南)에서 온 전차는 역시 훌륭하다니까. 너무 비싸서 그렇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요. 우리 집이 이만한 차 하나 못 마셔요?”

대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내가 동서랑 상의해서 조만간 날을 잡아 내보낼게요. 전에 도사도 도관에서 요양하는 게 그 애한테 좋다고 그랬잖아요.”

한낱 바보에게 신경 쓸 대노야가 아니었다.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부인이 문제였다. 더 이상 무슨 일이든 형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던 예전의 이부인이 아니었다.

“좀 더 기다려 보죠. 지금 내보내는 건 안 좋아요.”

대부인으로선 뜻밖이었다.

“뭘 기다려?”

대부인이 물었다.

“주씨 집안 쪽에서 아직 소식이 안 왔잖아요. 그쪽에서 특별히 사람까지 보냈는데 우리가 곧장 도관으로 보내 버렸다가 그걸 꼬투리 잡아 시끄럽게 하면 큰일인걸요. 저쪽에서 뭐라고 나오는지 기다렸다가 보내죠.”

대부인은 퍼뜩 깨닫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건 그렇다고 말했다.

주씨 집안에서 사람을 돌려보내며 무슨 준비를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

대부인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부인은 입을 약간 오므렸다.

“내보내 봤자 어차피 우리 이방 사람이잖아. 명색이 내가 그 아이 어미인데 나중에 소문 나 봤자 손가락질 받는 건 나일 테고. 뭔데 자기만 이득 보고 좋은 소리까지 들으려는 거야.”

이부인이 투덜거리며 둥글부채를 탁자에 탁 내려놓고는 여종에게 말했다.

“이 부채가 별로네. 듣자니 진보방에 새 부채가 나왔다던데 가서 몇 개 골라 와라.”

도관으로 보내는 일은 잠시 미뤄 두기로 했지만, 그래도 대부인은 정교랑의 거처를 바꾸기로 했다. 딸 정육랑이 정말로 두문불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칠랑의 말로는 그 바보가 마당에서 지내는 통에 놀랄까 봐 마당에서 놀지도 못한다고 했다.

정교랑은 어디서 지내든 상관없었기에 순순히 짐을 옮겼다.

정씨 집안의 사람에게 누가 거처를 옮기는 건 큰일 축에도 못 들었다. 하지만 누가 병이 났다면 그건 큰일이었다.

대노야가 정사낭의 거처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방 안에는 벌써 몇 명이 서 있었다. 정사낭의 유모는 우느라 일어나지도 못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병이 나?”

대노야가 물으며 침상을 보니 정사낭이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는데 이미 숨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 의원 말로는 넷째 오라버니가 상사병에 걸린 거래요.”

정육랑이 얼른 대답했다. 숨기기 힘든 웃음기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상 근처에 주저앉아 있었다.

“여섯째 아씨, 그게 아니라 넷째 도련님은 귀신에 들리신 거예요.”

정사낭의 유모가 울며 말했다.

아주 엉망진창이군. 대노야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대부인의 근심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갔다.

정사낭의 병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고, 의원들이 줄줄이 다녀갔지만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나오는 터였다.

아들이 하나뿐인 이방에 비해 대방은 아들이 넷이나 됐지만 많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가업을 이어야 하고, 적출이든 서출이든 정씨인 이상 다들 대노야의 귀한 보배였다.

더구나 정사낭은 적출로 대부인의 작은아들이었다. 느지막이 얻은 자식이라 더없는 총애를 받았다.

대노야는 한숨을 쉬었고 대부인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보였다. 정씨 집안에 무거운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늘 아웅다웅하며 싸우던 정육랑과 정칠랑도 요즘은 잠잠했다. 자매들이 모여도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오라버니의 병세를 근심했다.

집안에 오라비가 많으면 시집을 가서도 기를 펴고 살 수 있다. 집에 있는 오라비들은 훗날 자매들의 든든한 뒷배가 될 터였다.

“연못에서 귀신에 들린 거래.”

정칠랑은 기겁을 하며 정오랑을 끌어안았다.

“병이 난 거겠지. 겁주지 좀 마, 육랑.”

정사랑이 말하자 정육랑이 말을 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병에 걸려? 셋째 오라버니 말로는 넷째 오라버니가 연못에서 미인을 본 후로 저렇게 된 거랬어.”

거기까지 말한 정육랑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연못에 갑자기 미인이 왜 나타나? 그게 귀신이 아니고 뭐겠어?”

“나 이제 연못 근처에서 안 살 거야!”

놀란 정칠랑은 비명을 지르더니 유모를 부르면서 울며 뛰쳐나갔다.

방 안에 남은 자매들은 그런 정칠랑 때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칠랑이 나간 후 방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분위기가 기이해졌다.

“하여간 겁도 많아. 난 어머니한테 갈래.”

정육랑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는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정사랑과 정오랑이 눈을 마주쳤다.

“언니, 우리 방 같이 쓰자. 우리가 함께 서두르면 어머니 생신 선물로 드릴 휘장도 더 빨리 만들 수 있잖아.”

정오랑이 말하자 정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칠랑이 연못 근처에서 모친의 곁방으로 이사하자 정육랑도 모친의 집안일을 돕는다는 구실로 대부인의 방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사랑과 정오랑 자매는 한 방을 썼다. 매일 밤 마당을 대낮처럼 훤하게 비추는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연못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몸종들조차 연못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더위를 피하기에 좋았던 연못은 더욱 서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대노야와 이노야는 초조해 어쩔 줄 몰랐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하인들을 벌해도 소문이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소문을 잠재울 쉬운 방법은 두 사람도 알고 있었다. 딸들의 거처를 다시 연못 근처로 옮기고 정사낭의 병이 얼른 완쾌하면 될 일이다.

전자는 두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신속하게 해낼 수 있었지만 딸들이 울며 매달리고 부인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 터였고, 후자는 더욱 역부족이었다. 더 좋은 의원을 수소문하는 것 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 * *

“아씨, 다들 여기에 귀신이 산다던데요.”

반근이 정교랑을 부축하고 조심스레 좌우를 살피며 연못으로 다가왔다. 정교랑을 부축한다기보다는 정교랑의 뒤에 숨어서 온다는 표현이 맞았다.

“낚시는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아씨는 겁 안 나세요?”

“뭐가 겁나? 귀신이 사람을 겁내는 게 맞지.”

“네? 어째서요?”

반근이 묻자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반근은 아씨가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 알고 기대에 차 기다렸다.

“말 안 할래, 귀찮아.”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입을 뾰로통 내밀고 말했다.

“제가 아둔하다고 말씀 안 해 주시는 거죠?”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반근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신이 나서 산석을 가리켰다.

“아씨, 우리 낚싯대가 아직도 여기 있네요!”

신이 난 반근은 그렇게 외치며 먼저 뛰어 올라갔다. 정교랑은 느릿느릿 걸어가며 겁에 질렸던 반근이 폴짝폴짝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게 아니야.”

반근이 천천히 말했다.

“지금으로선 말을 안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을 해도 긴장이 풀리고 말을 안 해도 긴장이 풀리니, 말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었다.

정교랑은 낚싯대를 붙잡고 산석에 앉아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평정을 되찾았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자신은 말하기 좋아하고 말을 잘하는 모습이었지만 기쁘고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그 기억들을 찾을 때면 마음속에 슬픔과 괴로움이 번졌다.

“아씨, 이쪽으로 햇빛이 드네요.”

화초와 나뭇가지를 갖고 놀던 반근이 눈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려 주었다. 정교랑은 그제야 살갗에 타는 듯 뜨거운 통증을 느끼고 따라서 손을 들며 햇빛을 피했다.

귀신은 햇빛을 무서워한다고들 하던데, 그럼 이러는 자신이 귀신이란 말인가?

햇빛이 돌연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아씨, 가리개를 쓰세요.”

반근이 한쪽 옆에 둔 가리개를 들어 정교랑에게 건넸다.

“조금만 더 놀다가 그만 들어가요.”

여전히 햇빛이 무섭긴 했지만 정교랑이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정교랑의 건강이 날로 호전된다는 뜻이니 좋은 현상이었다.

정교랑은 응 하고 대답한 후 계속해서 낚시에 몰두했다.

연못은 과연 전보다 훨씬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14~15살쯤 된 몸종 하나가 앞쪽 모퉁이로 걸어오더니 무서워서 더는 못 가겠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제발……· 공자를……· 살려 주세요……·.”

몸종은 바들바들 떨며 붉은 종이에 불을 붙였지만 겁에 질린 터라 제대로 되지 않았다. 서두르려 할수록 불이 붙지 않았고, 불이 잘 붙지 않자 몸종은 이곳의 음산한 기운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 악순환에 겁을 집어먹은 몸종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너 뭐 하니?”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몸종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새까만 형체였는데 손에 막대까지 들고 있었다.

“귀신이야!”

몸종이 비명을 질렀다. 몸종은 도망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었다.

반근 역시 그 비명에 놀라 정교랑을 와락 끌어안았다.

“귀신이야!”

반근도 따라 소리치며 주변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반근을 툭툭 치더니 자신을 가리켰다.

반근은 그제야 깨달았다. 몸종이 가리개를 쓴 아씨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반근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자신도 방금 전 놀라 정교랑을 끌어안았던 일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제야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몸종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몸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세히 쳐다봤다. 그 새까만 형체는 가리개를 쓴 사람이었다.

“당신들 뭐야! 왜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놀라게 해!”

몸종도 소리쳤다. 열도 받고 무섭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나랑 아씨는 여기서 낚시 중이었어. 갑자기 달려와 놀라게 한 사람은 너잖아.”

반근이 말했다.

아씨라고?

이 댁 아씨들은 무서워서 이쪽에 못 오는데, 그렇다면 이 아씨란 사람은……·.

“아, 그 바보구나!”

몸종이 퍼뜩 깨닫고 소리쳤다.

“바보는 너지!”

반근이 즉시 반박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넷째 공자를 모시는 몸종으로서 이렇게 버릇없는 애들은 가차 없이 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넷째 공자는 곧 세상을 떠날 사람이었다. 목숨이 없다면 바보만도 못하지 않은가.

몸종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넷째 공자를 모셨는데, 넷째 공자가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쫓겨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동안 측근 시녀로서 열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며 지냈는데,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랫것의 삶을 어찌 견딘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저 여자아이는 바보를 모시는 하녀 같았다. 바보라고는 하나 어쨌든 멀쩡히 살아 있는 목숨이니 내쫓길 염려는 안 해도 된다.

몸종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반근은 당황했다. 내가 뭐 혼내기라도 했나?

“너 왜 울어? 얼른 뚝 그쳐.”

반근의 말에도 그 몸종은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아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반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은 손을 들어 가리개를 걷고, 대성통곡을 하는 몸종을 바라봤다.

“우리 음식 부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겠구나.”

정교랑이 반근을 보며 돌연 나지막이 말했다.

반근은 손수건 하나를 그 몸종에게 건네며 물었다.

“임종이 가까워진 거야?”

그 몸종은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몇 번을 닦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바보 몸종의 손수건을 썼다가 나도 바보가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좋은 뜻에서 준 걸 대놓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몸종은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 애써 눈물을 삼켰다.

“그런 건 아니고.”

몸종이 말을 이었다.

“노야께선 함구를 명하며 여기저기서 의원을 수소문 중이시지만, 오는 의원들마다 탕약 처방조차 제대로 못 하더라고. 부인께선 울다가 벌써 몇 번이나 까무러치셨어.”

반근은 아, 하고 나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넷째 공자께선 왜 그러시는 건데? 멀쩡하셨던 분이 왜 갑자기? 언제부터 그런 거야?”

몸종은 낯선 사람 앞이라 되레 마음이 놓이는지 차분히 대답했다.

“처음엔 얼굴이 빨개졌다가 나중에 하얘지셨다고?”

반근은 확인하듯 물었다.

“응, 그래서 열이 나는 줄 알았지. 풍한과 발한에 쓰는 약을 드셨는데 땀을 비 오듯 흘리시는 거야. 옷이 물에 푹 담근 것처럼 젖어서 계속 갈아입혀 드려야 했어.”

거기까지 말한 몸종은 말을 멈추더니 산석 위에 앉아 여전히 가리개를 쓰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미동도 없이 석상처럼 조용히 있었다.

“저 사람은……·.”

몸종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반근에게 물었다.

“저렇게 앉아 있어도 괜찮아?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냐?”

데려다주긴. 그럼 아씨께서 너희 넷째 공자의 병을 어찌 고치시라고? 반근은 속으로 투덜댔다. 진짜 복에 겨운 줄을 모르네.

“괜찮아. 우리 아씨는 저렇게 앉아 있는 걸 좋아하셔.”

반근은 몸종을 채근했다.

“그다음엔? 또 무슨 증상이 있으셨는데?”

바보니까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저 먹고 잘 줄밖에 모르겠지. 몸종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정신이 이상해지셨어. 춥다고 했다가 덥다고 했다가, 헛소리를 줄줄 늘어놓으셨지.”

말을 잇던 몸종은 못 참고 눈물까지 쏟았다.

“우리 넷째 공자처럼 멋있는 분이 갑자기 딴사람처럼 변하셔서는……·.”

멋있는 게 밥 먹여 주나. 자신이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반근은 얼른 말을 끊었다.

“그래서 의원은 뭐라고 했고?”

이 계집은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넷째 공자의 몸종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반근을 바라봤다.

“병이 난 거면 의원이 뭐라고 말은 했을 거 아냐. 전혀 방법이 없다면 그게 의원이야?”

“의원들이 전부 모른다고 한 건 아니었어.”

몸종은 어느새 의혹을 잊은 듯 반박하며 말을 이었다.

“근심이 지나쳐 머리를 상했다고도 하고 마음을 다쳤다고도 했어. 또, 또, 간을 다쳤다나 비장을 다쳤다나. 여하간 내장 쪽이 다 상했다는데 어디 부딪치지도 않고 내장을 왜 다쳐?”

거기까지 들은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몸종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움직였어!”

“우리 아씨도 사람인데 당연히 움직이시지!”

반근이 기분 나쁜 듯 대꾸하자 몸종은 멋쩍어했다.

“아씨, 들어가시려고요?”

반근이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 묻자 정교랑이 대답했다.

“응.”

“말도 해!”

몸종은 또다시 놀라 비명을 지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가리켰다.

“야, 우리 아씨는 벙어리가 아니라고!”

반근은 기분이 나빴다. 이 인간들은 대체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는 거야!

몸종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교랑을 훑어봤지만 가리개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듣자니 바보는 눈코입이 비뚤어졌다던데. 정교랑이 주는 암시를 눈치챈 반근은 기분 나쁘지만 꾹 참고 몸종을 잡아끌었다.

“언니,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반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몸종을 잡아끌며 몇 발자국 걸어갔다.

“나한테 넷째 공자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있어.”

반근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

“뭐라고?”

몸종이 놀라 소리를 치자 반근은 얼른 조용히 하라며 눈치를 줬다.

“조용히 해.”

“그 말이 참이야?”

몸종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네, 네가, 병을 치료할 줄 알아?”

* * *

아씨가 외출조차 못 하던 예전엔 병자를 직접 볼 수 없어서 병의 증세만 듣고 치료를 해 왔다. 반근이 거리에서 어떤 불치병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아씨에게 전하면, 아씨가 이야기를 듣고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 결정했다. 그러면 또다시 반근이 나가 그 병자의 가족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자기 집으로 와서 병을 치료하도록 구슬리곤 했다.

이런 식의 의심 섞인 질문을 상대하는 일에 도가 튼 반근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치료를 하겠어. 알다시피 난 도관에서 자랐잖아.”

바보가 도관에서 자란 건 온 식구가 다 아는 사실인지라 몸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관에 있는 도사들은 대체로 의술을 조금씩 알거든. 사람들 병 고쳐 주는 걸 많이 봤는데 꽤 영험했어. 못 믿겠으면 병주에 가서 물어봐.”

반근은 진지하게 말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거기까지 가서 물어보겠나. 몸종은 반신반의했다.

“내가 돌아가서 처방을 써 줄게. 한번 해 봐.”

반근의 말에 잠자코 있던 몸종이 물었다.

“방법을 알면 노야와 부인께 가서 직접 말씀드리지 않고?”

“난 의원이 아니잖아. 게다가 ……·의 몸종이고.”

반근이 아직 산석 쪽에 서 있는 정교랑을 힐끔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노야와 부인께서 날 믿으시겠어? 하지만 넌 달라. 넌 어릴 때부터 넷째 공자를 모셨으니 정이 남다르잖아. 그러니 여기까지 달려와 몰래 기도를 올렸겠지.”

반근의 말을 들은 몸종은 반근의 손을 와락 붙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언니는 가서 시도만 해 봐. 그 방법을 쓰고 혹여 넷째 공자께서 잘못되시면 내가 시킨 일이라고 지목하면 되잖아.”

반근은 몸종의 손을 꼭 붙잡고 말을 이었다.

“넷째 공자께서 잘되시면 그건 언니의 지성에 하늘이 감복한 거야. 나와는 무관한 일이지.”

거기까지 말한 반근은 몸종의 손을 더 꽉 붙잡으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넷째 공자의 병을 고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몸종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몸종의 눈빛이 절로 빛났다.

몸종의 신분으로 최상의 결과는 넷째 공자의 측실이 되는 것이지만, 그 운은 장차 넷째 공자의 부인이 될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하지만 넷째 공자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몸종은 호흡이 가빠지면서 반근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좋아. 그럼 일단 해 볼게.”

몸종의 말에 반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종이에 써서 갖다 줄게.”

“서둘러야 해.”

몸종이 재촉하자 반근은 알았다고 한 후 서둘러 돌아섰다. 돌아선 반근은 정교랑을 향해 메롱 혀를 내밀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가리개 속 정교랑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반근은 마당으로 나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씨, 정말 고칠 수 있으세요?”

정교랑이 반근을 힐끔 보자 반근은 헤헤 웃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맞아야겠네요. 아씨께서 고치실 수 있다면 고치실 수 있는 건데.”

정교랑이 자리에 앉자 반근은 팔걸이 책상과 지필묵을 준비해 처방을 쓸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아씨.”

반근은 결국 못 참고 물었다.

“이렇게 좋은 처방을 정말 저 아이한테 주시려고요? 우리가 직접 노야와 부인께 말씀드려서 신임을 얻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아니야.”

정교랑이 말했다.

“어째서요?”

반근이 물었다. 반근은 자신이 묻지 않는다면 아씨가 말을 잇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말하는 것보다 행하는 게 쉬운 일도 있거든.”

정교랑의 말은 사실이었다. 반근은 아씨를 보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대낮에 정사낭의 처소를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울다 지친 대부인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탕약으로 버티다가 결국 대노야에 의해 강제로 옮겨졌다.

근처 의원들은 이미 전부 다녀간 후였고 멀리서 오는 의원들은 아직 오는 길이었다. 쓸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다 썼으니 이젠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몸종은 측문 밖에서 여인이 건네는 종이봉투를 받았다.

“춘란, 정말 이대로 하려고?”

여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잡아끌며 소리 낮춰 묻자, 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의 잘못이라 해도 꾐에 넘어가 주인을 해친 죄는 씻을 수 없어.”

“어머니, 걱정 마세요. 약을 먹일 때 그 계집을 불러올 거예요. 일이 틀어져도 어차피 증인이 있잖아요. 우리가 방심한 틈에 약을 쓴 거니까 우린 무관한 일이라고 하면 돼요.”

춘란이 나지막이 물었다.

“처방전은 태웠죠?”

“태웠어.”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약포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아주 흔한 처방이라 딱히 별난 것도 없대.”

“시키는 대로 해야죠.”

춘란의 말에 여인은 주저하는 표정으로 소리 낮춰 물었다.

“그 애는 왜 널 돕는 건데? 그 애한테 좋을 게 전혀 없잖아.”

춘란이 입을 살짝 삐죽거렸다.

“좋을 게 왜 없어요? 걔도 살길 찾으려는 거죠. 그 바보를 따라 봤자 미래가 안 보이잖아요. 이번에 날 도왔다가 잘되면 내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할 거 아니에요. 아버지랑 어머니도 남몰래 그 애를 도와주실 테고요. 무슨 꿍꿍이인지 훤하죠.”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갈게요.”

춘란이 말했다.

“이 보조 약재도 있잖아.”

여인이 얼른 소리 낮춰 말하며 커다란 소매 속에서 가면을 하나 꺼냈다.

“거리 점포에서 가장 추한 것으로 골랐어.”

춘란이 손을 뻗어 가면을 받았다. 여인은 딸의 손을 잠시 힘주어 잡았다가 마지못해 놓아 주고, 들어가는 딸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춘란은 부엌에 앉아 보글보글 끓는 약탕관을 바라봤다. 마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춘란의 가슴은 더욱 쿵쾅거렸다. 일어서서 살펴보니 몸종 하나가 마당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넌 어디 애니?”

한 몸종이 묻자 반근이 대답했다.

“우리 아씨께서 넷째 공자를 보고 오라고 하셨어.”

넷째 공자가 병이 난 후로 병문안을 오는 사람은 많았다. 형제자매라 해도 매일 올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랫것을 시켜 가 보게 하곤 했다. 이 댁 어느 아씨의 시중을 드는 몸종인가 보군 싶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그 몸종이 물었다. 춘란은 반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약을 받쳐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국, 화로 좀 봐 줘.”

춘란의 말에 몸종은 알았다고 한 후 반근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내가 문발 들어 줄게.”

반근이 얼른 다가서며 웃자 춘란은 응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이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아, 참. 이것 좀 봐 줘, 보조 약재 가져올게.”

들어가자마자 그 말만 남기고 도로 나간 춘란은 부엌을 한 바퀴 돌더니 화로를 보고 있는 몸종에게 무어라 말했다. 긴장하는 춘란의 모습을 보며 안에 있는 반근은 피식 웃었다. 긴장할 게 뭐 있어. 아씨가 처방한 약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그깟 상사병이 뭐라고.

반근은 편안한 마음으로 방을 둘러봤다. 정씨 집안에 돈이 많긴 한가 보네. 궁색한 티가 전혀 안 나는 방이야. 침상으로 시선을 돌리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쳤다. 안으로 들어오던 춘란과 다른 두 몸종은 반근 때문에 깜짝 놀랐다.

“조용히 해.”

몸종들이 나무라자, 반근은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고 침상에 있는 사람을 살폈다. 그때 그 공자네! 동시에 반근은 기쁘기도 했다. 역시 아씨 말씀이 맞았구나. 정씨 가문 대방의 공자였어.

집안에 먹구름이 가득한데 저 계집은 뭐가 좋다고 희희낙락이야.

“그만 가 봐. 의원 말로는 공자께서 조용히 쉬셔야 한 대.”

몸종들은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

반근은 응, 하고 자리를 떴다.

“어느 아씨의 몸종인데 저렇게 버릇이 없어.”

몸종들은 불만 섞인 말투로 수군거렸다. 저 계집이 이제 확실히 인상을 남겼네. 춘란은 반근이 일부러 그렇게 반응했음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로 성의를 보이다니. 처방에 대한 춘란의 확신이 더욱 굳건해졌다.

“약 드시게 공자를 부축해 드려.”

몸종들이 정사낭을 부축해 일으키자 춘란은 이미 눈조차 못 뜨게 된 정사낭의 입으로 간신히 탕약을 떠넘겨 주었다.

차츰 어둠이 내렸다. 정사낭은 침상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난 후로 몸종들이 밤에는 가능한 몸을 사리며 움직이지 않는 통에 더욱 음산해 보였다.

침상 근처에 선 춘란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고 몸도 절로 떨려왔다. 약은 벌써 먹였고 이제 성공 여부는 밤에 쓸 보조 약재에 달렸다. 사람의 인생에는 언제나 선택할 길이 있고 넘어야 할 고비가 있는 법이다.

“공자, 공자.”

춘란은 나지막이 소리쳤다.

“공자, 공자를 뵈러 왔어요.”

피곤한 정사낭은 긴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얼마 전에 목으로 넘긴 탕약 덕분에 피곤한 기운이 한결 덜하긴 했지만 대신 무력감이 몰려왔다. 온몸이 붕 떠오를 듯 힘이 빠졌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공자, 공자를 뵈러 왔어요.”

날 보러 왔다고? 누가 날 보러 온 거지? 정사낭은 예전처럼 눈을 뜨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로 눈이 떠졌다. 어두운 등불 아래 시야가 흐릿했다.

“공자!”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정사낭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푸르뎅뎅한 귀신 가면이 바짝 다가왔다. 놀라 비명을 내지른 정사낭은 흰자위를 보이며 까무러쳤다.

정사낭의 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을 들은 이부인은 얼른 가 보려고 했지만 정칠랑은 이부인의 팔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울며 떼를 썼다.

“어머니, 귀신이 나온단 말이에요. 가지 마세요.”

이부인은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딸을 마냥 달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집 안에 있는 여종들을 죄다 불러 정칠랑 곁에 붙여 주고 나왔다. 이부인이 정사낭의 거처 마당으로 달려왔을 즈음 안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잘못된 건가?”

이부인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저리 장성한 아들이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 심정이 오죽할까. 한 식구로서 정말이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 마음이 아팠다. 방 안으로 들어선 이부인의 눈에 꿇어앉아 부들부들 떨며 우는 춘란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 물건은 어디서 난 것이냐! 뭘 하려던 거야!”

대노야가 호통을 치며 손에 든 물건을 바닥으로 매섭게 내던졌다. 산산조각이 난 가면의 파편에 얼굴을 맞은 춘란은 울부짖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부인이 영문을 몰라 하는데 밖에서 대부인의 곡소리가 들렸다.

“누가 또 대부인한테까지 알렸어?”

대노야가 역정을 냈다. 여기서는 아들이 사경을 헤매고 저기서는 아내가 앓아누웠으니 집안 꼴이 아주 엉망진창이다.

“아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마지막 모습도 못 보게 해야 속이 풀리겠어요?”

여종들에게 들려 안으로 옮겨진 대부인이 울며 힘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부인은 얼른 다가가 위로하며 대부인을 정사낭의 침상 옆으로 부축해 주었다.

“별일 아니라니까. 허튼 생각 마시오.”

대노야가 말했다. 대부인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침상 위에 미동도 없이 누운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아, 어찌 이리 어미를……·.”

대부인은 아들에게 달려들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사낭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깜짝 놀랐잖습니까!”

정사낭이 대부인에게 눌려 있던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앉자 이부인과 근처에 서 있던 여종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깜짝이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돌연 어안이 벙벙해졌고, 대부인 역시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들아, 너, 너……·.”

대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백한 안색이긴 했지만 정사낭의 눈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위에서 누르는 모친의 중압감을 못 버티고 도로 누웠지만 말이다. 줄곧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춘란이 벌떡 일어섰다.

세상에! 세상에! 진짜 나았네! 진짜 깨어났어! 이 방법이 진짜였구나! 이건 대운이야!

“공자, 공자.”

춘란은 침상 옆으로 달려가 꿇어앉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정말 깨어나셨네요! 소인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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