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2권
-미인-
정사랑은 망했다고 혼잣말을 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옆에 있던 정육랑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이제 겨우 8살이잖아. 무슨 인품과 용모를 논해?”
정칠랑이 입을 삐죽거리고 정육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내가 육랑보다 더 예쁘다고 했어.”
“누가 그래? 어린애 달래려고 하는 말을 곧이들어?”
정육랑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정사낭이 더는 못 듣겠는지 일어나며 먼저 가겠다고 했다. 누이들은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에 정신이 팔려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사낭은 나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서 여자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사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원을 가로질러 밖으로 걸어가면서 남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집안에 새 누이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진작 들었다. 새 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 사촌 누이에 대해서는 인상이 약간 남아 있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어린아이는 침상에 누운 채 멍하니 있으면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유모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아이를 보던 정사낭은 흰자위만 드러내고 있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고 놀라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정사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문득 정수리 위쪽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정사낭은 멈칫했다. 서로 내외할 필요가 없으니 집안 자매들은 마당 근처의 처소에서 지내면서도 평소에 이곳으로 자주 와 놀곤 했다.
하지만 아직 출가하지 않은 누이들은 전부 한 곳에 모여 떠들고 있지 않은가. 아마 몸종들이겠지. 정사낭은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멀지 않은 곳의 산석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스치는 걸 봤다.
빨간 치마에 풍성한 머릿결, 맵시 있는 몸매.
자세히 보니 구불구불 이어진 길 위의 산석에 15~16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자아이는 헤헤 웃으며 손을 뻗어 버드나무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웃는 모습이 맑고 예뻤다.
짓궂은 계집이구나.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느 누이의 몸종이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정사낭은 여자아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여자아이는 버들가지를 쭉 늘어뜨리더니 몸을 돌리며 무릎을 꿇었다. 정사낭이 의아해하며 지켜보는데, 여자아이가 비켜서면서 또 한 여인이 나타났다.
무심코 보던 정사낭은 눈앞에 폭죽이 터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풍성하고 검은 머리카락, 가느다랗고 긴 속눈썹, 깊고 심오한 눈동자, 오뚝한 코, 앙 다문 얇은 입술, 가늘고 긴 목, 검은색으로 소박하게 차려입은 옷이 반짝이는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정사낭은 어느새 방금 전 본 빨간 치마의 여자아이를 까맣게 잊었다. 정사낭의 눈에는 이 소박하고 검은 여인뿐이었다. 지금껏 오색찬란한 색이 가장 화려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것은 색채가 없는 무색이었다.
정사낭이 원래 있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데, 그 여인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여인은 기쁨도 노여움도 없는 잔잔한 눈길로 정사낭을 조용히 지켜봤다. 정사낭은 그런 눈빛을 처음 보았다. 그 눈빛은 밤의 색처럼 어둡고 진했으며 깊은 심연처럼 그윽하고 심오했다.
“앗, 누구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간 치마가 갑자기 시선을 막아서면서 정사낭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사낭은 허공에 붕 뜬 듯한 느낌으로 앞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죠? 깜짝 놀랐네. 저 사람은 왜 말을 안 하죠? 아씨……·.”
집에 온 손님인가?
정사낭은 한달음에 안마당을 빠져나왔지만 아직도 온몸이 화끈거렸다. 곧장 탁자 앞에 앉아 찻물을 단숨에 들이켠 후에야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사낭, 어디 갔었어?”
누군가 들어오며 물었다.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사낭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너 왜 이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게?”
“그게, 방금 집에서 엄청난 미인을 봤어.”
정사낭이 웅얼거렸다. 들어오던 사람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집에서 미인을 못 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는 웃으며 한쪽 옆에 앉았다.
“누가 감히 우리 집 누이들을 보고 미인이 아니래?”
정사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앉은 사람을 똑바로 봤다.
“셋째 형님.”
정사낭이 얼른 예를 표했다.
“완전 넋이 나갔네?”
정삼낭이 웃으며 말했다.
“여긴 누이들 없으니까 연극 그만해도 돼.”
정사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다가 돌연 말을 아꼈다. 그 정도 미인을 혼자만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운이란 말인가.
“셋째 형님, 무슨 일이에요?”
정사낭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듣자니 동씨 집안 셋째 낭자가 묵수각에서 시회를 연다기에 너와 함께 갈까 하고 특별히 왔다. 네가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정삼낭이 웃으면서 정사낭의 손을 잡아끌며 나가자고 했지만 정사낭은 흥미가 안 생기는 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에는 동씨 집안 셋째 낭자가 정사낭의 눈에 독보적인 미인이었지만, 방금 그 여인을 보니 세상에 저런 미인이 또 있나 싶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근데 오늘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정삼낭은 놀랐다. 과거 정사낭이 동씨 집안의 재색을 겸비한 셋째 낭자를 얼마나 쫓아 다녔던가. 그런데 안 간다고?
“정말 미인을 본 거야?”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지고는 밖으로 나온 정삼낭은 하인에게 알아본 끝에 정사낭이 방금 전 누이들이 지내는 연못 쪽에 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섯째 낭자와 일곱째 낭자께서 또 싸우셨답니다. 여섯째 낭자께서 일곱째 낭자께 못생겼다고 하셔서요.”
어린 시종이 히히 웃으며 알아온 소식을 전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는 육랑과 칠랑에 대해선 다들 이미 습관이 된 터였다. 정삼낭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구나. 미인들의 싸움에 놀랐던 게야. 어쩐지 축 처져 있더라니.”
정삼낭은 마음이 놓이는 듯 덧붙였다.
“난 또 진짜 대단한 미인한테 홀린 줄 알았네!”
* * *
반근은 낚싯대를 산석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정교랑을 부축해 내려왔다. 사실 낚싯대라기보다는 장대에 가까웠다. 걸려드는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씨,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반근이 또 물으며 가리개를 들어 정교랑에게 씌워 주었다.
산석에서 마당 입구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교랑은 그 정도의 햇빛도 견디기 힘들었다.
반근은 자신과 아씨가 함께 본 사람에 대해 거의 생각 없이 물어봤다. 자신과 아씨가 함께 이 집에 들어왔고, 따지고 보면 정씨 저택에 들어온 후 아씨보다는 자신이 훨씬 더 많이 외출했는데도 말이다.
반근의 마음속에서 아씨는 이 세상에 모르는 일은 없었다. 과연 반근의 아씨는 반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저쪽에서 걸어왔어.”
정교랑이 말하며 손을 천천히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나이는 15~16살쯤 됐고 평상복을 입은 걸 보면 손님이 아니야. 긴장을 풀고 편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시종도 아니지. 아버지에겐 그 정도 나이의 아들이 없으니 대부인 소생의 공자일 거야.”
반근이 아, 하며 문득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정말 아는 게 많으세요.”
반근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반근을 보며 입을 약간 오므렸다.
“너.”
반근이 손을 들어 약간 서툰 움직임으로 반근의 이마를 쿡 찔렀다.
“여기로 생각해. 그럼 금방 알 수 있잖아.”
반근이 히히 웃었다.
“아씨께서 생각하시잖아요. 그러니 전 생각 안 해도 되죠.”
“내가, 평생 너 대신, 생각할 수 있겠어?”
정교랑이 말했다.
“아씨. 전 평생 아씨를 따를 거예요. 절 버리시면 안 돼요.”
반근이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어느새 마당의 문 안으로 들어왔다. 문지방에 앉아 돌멩이를 쥐고 놀던 14~15살쯤 된 몸종이 그 말을 듣고 풉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바보는 어차피 탐내는 사람도 없어. 바보가 바보 따라다니면 평생 노처녀로 늙는 거지, 뭐!”
몸종은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바보는 너지. 우리 아씨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분이야!”
반근이 반박했다.
“똑똑하신 분, 조씨 아주머니가 오늘 휴가 내서 못 온대. 문을 지키느라 쌀이랑 채소 가져오는 걸 깜빡했으니, 밥은 두 분이 알아서 해 드셔.”
말을 마친 몸종은 돌멩이를 던지고 뛰어갔다. 반근이 소리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씨, 사람을 너무 무시하네요. 우리 노야께 가서 일러요.”
반근이 말했다.
“이런 일로 고자질할 거 없어.”
정교랑이 말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정을 뻔히 알 텐데도 안 물어보잖아. 우리가 고자질해 봤자 굴욕을 자초할 뿐이야.”
반근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듯 말 듯한 얼굴로 따라 들어갔다.
“그럼 그냥 넘어가요? 정말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게 말이지.”
정교랑이 말했다.
“단언하긴 어려워.”
응? 무슨 뜻이지?
반근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씨가 알면 된 거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반근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면 된다.
“아씨,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두부랑 완두랑……·.”
반근이 손을 꼽아가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