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60)

-주씨 가문-

6월 중순, 대노야가 병주로 보낸 사람들이 돌아와 반근의 말이 전부 사실임을 증명했다.

“벼락이 떨어져 절반이 불에 타는 바람에 그 도관이 아예 없어졌다는군. 사람이 납치된 줄 알고, 우리가 물어보니까 도사들이 전부 도망갔다 하오.”

대노야가 서찰을 팔걸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방 안에는 대부인과 이노야 내외가 모두 있었다. 다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 표정이 이상했다.

“주씨 가문 쪽은요?”

대부인이 물었다.

“아직 회신이 없소. 전갈을 못 받은 건지, 받고도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쪽에서도 모를지 모르죠.”

대부인이 말하며 이부인을 쳐다봤다.

“애초에 주씨 노부인이 도관을 공양하는 것도 집안에서는 못마땅해 했잖아요.”

노부인이 그 도관에 거금을 몰래 묻어 둔 건 주씨 일가 사람들이 더더욱 알 턱이 없었다. 그랬다가는 노부인이 죽고 난 후 도로 가져갔을 테니까.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부인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확실한 정보면 우리가 키우도록 합시다.”

대노야가 말하자 모두들 알았다고 하고 자연스레 해산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부인은 장신구를 빼놓고 낮잠을 청하고자 했다. 이부인은 여종의 시중을 받으면서 방금 들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부인은 시집온 후 첫 3년간 집에서 시모를 공양하고 딸을 낳은 후에야 남편을 따라 병주로 갔다. 당시 그 바보는 아직 도관에서 지낼 때였다. 집안에서는 그 아이에 대해 말하는 이가 없고 남편도 전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같은 병주 땅에서 4~5년을 지내면서도 그 바보가 이부인의 삶에 나타난 적은 없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존재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나타나게 돼 있다.

“그 주씨 집안은 부잣집인가?”

이부인이 물었다.

예전에 부모님한테 듣기로는 주씨 집안의 조상은 섬변주 출신인데, 경성에 들어와 관료를 했어도 무관이었던지라 대대로 학문을 하던 이부인 집안과는 비교가 안 됐다. 당시 죽은 조강지처의 친정 자격으로 인사를 왔던 사람 역시 거칠기 그지없었다.

“돈이 꽤 많았죠.”

머리를 빗기던 여종이 얼른 대답했다. 이부인이 여종을 힐끔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넌 나보다 잘 알고 있구나.”

그 바보가 돌아온 후로 여종들은 이부인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은밀히 주씨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곤 했다.

머리를 빗겨 주는 여종은 이부인이 친정에서 데려온 사람이었기에, 여종은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았대?”

이부인이 물었다. 부인이 나무라지 않자 여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다른 건 모르겠고 그때 주씨가, 주씨가 시집올 때 혼수를 엄청 많이 해 왔다던데요.”

이부인이 여종을 흘겨봤다.

실없는 소리는. 후처로 들어오면서 예전 부인의 혼수도 안 알아봤을까 봐?

여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듣기 거슬리니 그렇겠지. 여종들끼리 수군대는 말은 훨씬 듣기 거북할 텐데.

“주 부인이 시집올 때 기세가 대단했나 봐요. 금은으로 된 장신구에 비단은 물론이고 성의 동쪽과 서쪽 시장의 목 좋은 위치에 있는 점포 두 개, 교외의 비옥한 농토까지…….”

“전부 주씨 집안에서 반년도 전에 사람을 강주성으로 보내 고르고 고른 거라는데…….”

“주 부인이 막 세상을 떴을 땐 노부인께서 혼수를 대신 관리하셨는데, 집사 부인의 말을 듣자니 점포 하나의 매출만 해도 우리 집 반년 치 지출을 넘는다고…….”

금은보화로 된 재물에 재산을 늘리기까지 하는 혼수라니. 거기에 지금 이부인의 혼수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경성 밖에 있는 가문은 아무리 지체가 높고 돈이 많은들 비교가 안 되는 법이다.

머리를 빗겨 주는 여종이 머리카락을 주우며 이것저것 털어놓자, 이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혼수를 많이 해 왔으면 어쩔 텐가.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런데…….

점포 하나의 매출이 정씨 가문 반년 치 지출을 넘을 정도라고?

“그 점포와 농토는 노야께서 관리하시느냐?”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이부인이 물었다. 그 정도 수익을 내는데, 집에선 왜 전혀 몰랐지? 녹랑이니 십삼랑이니 하는 것들을 전부 그 수익으로 먹여 살리나?

“아뇨, 아뇨.”

여종은 이부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잽싸게 눈치채고 얼른 말을 이었다.

“대부인께서요.”

대부인? 이부인은 비녀를 뽑아 탁자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형님은 왜 그런 말씀이 전혀 없으셨지?”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분가하진 않았어도 먹고 입는 용도의 지출은 전부 장부에 따로 기록했다. 지금은 노부인이 집안일을 관장하지 않고, 대부인이 도맡아 하고 있는 터였다.

“어쨌든 예전 부인의 혼수니 부인께서 언짢으실까 봐 말씀 안 하셨겠죠.”

여종이 말했다. 이부인은 콕 집어 어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속이 편치 않았다.

그 혼수는 조만간 그 바보의 소유가 될 테니 이부인 자신과 이부인의 자녀들은 쓸 수 없다. 하지만 그 수익을 생각하면…….

집안의 지출은 전부 대부인이 관리했다. 물론 수익도 굳이 대방, 이방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마음이 찜찜했다.

시집온 지 만 9년이 됐는데 그 일을 이제야 알다니. 그것도 그 바보 덕분에! 그 바보가 평생 돌아오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일인가?

“부인, 부엌에서 더위를 쫓는 탕을 가져왔습니다.”

몸종이 들어오며 말했다. 정씨 가문은 부유했지만 늘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하루 세 끼와 새참, 야식, 간식까지도 전부 양이 정해져 있었다. 최근에는 날이 무더워지면서 대부인이 부엌을 시켜 해서탕(解暑汤)을 추가하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대부인 자신은 먹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먹였다. 이부인 역시 자연스레 형님을 본받아 먹지 않았다.

그래도 아랫사람 처지에서는 물어보는 것이 도리였다. 이부인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져와라. 마침 생각나던 참인데.”

“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나갔다. 몇 걸음 걸어간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부인께서 방금 뭐라고 하셨지?

“앗, 부인이 안 드신다고 하셨나?”

몸종이 얼른 옆에 있던 다른 몸종에게 조용히 물었다. 옆에 있던 몸종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너 졸았어? 분명 드신다고 하셨잖아.”

으응? 몸종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상하네. 부인이 왜 드시는 거지?”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집안에 있는 거니까 드시고 싶으면 드시는 거지, 뭐. 안 드셔 봤자 자기만 손해잖아.”

앞서 그 몸종이 나른한 듯 말했다.

바로 그 시각, 경성의 넓은 골목에 들어선 으리으리한 주씨 저택의 대문 앞에는 17~18살쯤 된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 말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진작 마중을 나왔고, 어린 시종 4~5명이 말을 끌고 갔다. 소년은 허리춤에 있던 전대를 풀어 던졌다.

“너희에게 주는 상이다. 술이나 한잔해라.”

소년이 소리치자 어린 시종들은 서로 받으려고 난리였다.

“감사합니다, 여섯째 도련님!”

시종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주육낭은 하하 웃으며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씨 집안의 저택은 섬변주에 있는 조상의 저택을 따라 개조한 것이었다. 특히 그 가림벽은 저택에 있는 걸 철거해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는데, 운송비용만 해도 가림벽 10개에 맞먹는지라 일거에 명성을 얻었다. 덕분에 경성의 명문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이들은 노섬(老陜) 주씨로 불렸다.

주육낭이 자신의 집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처마 아래에 앉아 있었다. 긴 눈썹에 가는 눈을 가진 소년은 소매가 큰 웃옷을 입고 앞에 놓인 백자 바둑판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근처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몸종도 따라서 바둑판을 보며 재잘댔다.

“도련님, 이건 재미없어요. 차라리 쌍육을 놀아요.”

몸종들이 말하다가 주육낭의 발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두 몸종은 똑바로 꿇어앉았다가 엎드리며 예를 올렸다. 소년은 여전히 바둑판만 보는 중이었다.

“상자, 어쩐 일로 왔어?”

주육낭이 소매를 크게 휘두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바둑판을 팔걸이로 삼아 팔을 그 위에 올리자 바둑판 위에 있던 바둑알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런데도 소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심해서. 재미있는 얘기나 들을까 하고 왔지.”

“여기 재미있을 일이 뭐가 있어?”

주육낭이 물었다.

“듣자니 강주부의 자네 고모부 댁에서 사람을 보냈다던데?”

소년이 물었다. 주육낭은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몸종을 쳐다봤다. 둘은 켕기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집 식구들이 재미있긴 하지.”

주육낭이 말하며 손을 뻗어 바둑알을 만지작거렸다.

“자네의 그 사촌 누이 일이었어.”

소년이 말을 이었다.

“왜 꼼꼼히 물어보지도 않고 정씨 집안의 사람을 쫓아냈나?”

“그 쓸모없는 인간이 우리 주씨 집안과 무슨 상관이야.”

주육낭이 하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님이 충고를 안 듣고 그 바보를 살려 두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더니, 결국 당신까지 돌아가시게 됐잖아. 조부님과 조모님만 안타깝게 됐지. 조모님도 그 바보가 눈에 밟혀 고생하시고. 일찍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애지중지하며 키우셨어. 돼지를 키우면 고기라도 얻는다지만, 그런 모자란 애는 키워 봤자 하등 쓸모가 없지.”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육랑, 그 돼지만도 못한 사촌 누이는 병주에서 자랐잖아. 그런데 정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 물었다며. 혹시 자네 집안에서 그 애를 강주로 돌려보냈냐고.”

“그래, 물으면 뭐? 우리가 공손히 대답이라도 해야 해?”

주육낭이 소년을 노려보며 물었다. 소년이 바둑판 위로 긴 손가락을 뻗어 쭉 그었다.

“병주에서 강주까지. 자네 사촌 누이는 지금 정씨 저택에 있어. 자네 집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돌아간 거지.”

주육낭은 소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년이 다시 바둑판 위로 손을 뻗으며 이 점에서 저 점까지 그렸다.

“병주에서 강주까지, 어린 소녀 혼자서.”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일개 쓸모없는 인간이 그걸 어떻게 해낸 걸까?”

말을 마친 소년이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도 소년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바둑판을 거의 뒤엎을 듯 벌떡 일어섰다.

“부친은 어디 계시느냐?”

주육낭이 크게 소리쳤다. 바깥에 시립하고 있던 어린 시종이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주육낭은 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눈 깜짝할 새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당 안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소년이 살짝 손을 움직였다.

“여기도 당분간은 재미없겠구나. 집에나 가야겠다.”

소년이 말하며 손을 뻗자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얼른 일어났다. 하나는 뒤에서 나무 지팡이 두 개를 꺼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 소년을 부축했다. 마당에 있던 시종이 얼른 밖에 대고 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시종 4명이 걸상을 들고 들어왔다.

소년은 벌써 지팡이를 붙잡고 일어선 상태라 도포가 길게 내려졌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준수한 외모였지만, 안타깝게도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 안에 있는 한쪽 다리가 비틀려 있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몸종이 절뚝거리는 소년을 부축해 걸상에 앉혔다.

“도련님을 배웅합니다.”

두 몸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며 배웅했다. 시종들이 걸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정교랑의 귀환은 고요했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정교랑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인생이라는 게 본디 그런 법이다.

* * *

반근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물속으로 던지자, 연못에 물보라가 일었다.

“아씨.”

반근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저 물고기 봤어요! 연잎 아래로 들어갔어요!”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보름이 지나면서 정교랑의 몸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많이 호전된 정교랑은 더 이상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 직사광선의 햇빛은 견딜 수 없었지만 다행히 마당에는 나무가 빽빽해 서늘한 그늘이 많았다.

반근이 다가와 정교랑을 부축했다.

“아씨, 아씨도 와서 보세요. 우리 도관에 있던 물고기보다 더 예쁘죠?”

지난달에 일어난 일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정교랑이 도관의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교랑은 일어서서 천천히 연못 쪽으로 걸어왔다. 정교랑과 반근은 물가에 서서 연잎 아래에서 이리저리 헤엄치는 잉어를 바라봤다.

“여기 물고기도 먹을 수 있나 모르겠네요?”

반근이 물었다. 지난번에 따귀를 맞은 후로 또 찾아와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부엌의 음식이 하루가 다르게 형편없어졌다. 여종은 설렁설렁 일하며 이것저것 빼놓기 일쑤였고, 가져오라고 시키면 거친 목소리로 없다고 대꾸하곤 했다.

“전부 자기 집으로 가져간 게 틀림없어요.”

정교랑도 반근의 추측에 동의했다.

“제가 기록해 놓을게요.”

반근이 말하자, 정교랑은 웃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도관에서 지내던 시절 반근은 노부인의 명을 받들어 경전을 필사하며 아씨를 위해 복을 빌었다. 그러면서 도관 사람들을 따라 글을 익혔다. 정교랑은 기억력이 안 좋았기에 자신이 겪은 일을 반근을 시켜 삐뚤빼뚤한 글씨로나마 기록하게 했다. 최초의 목적은 발병 횟수를 기록하고 건강이 호전되는지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오는 길에 만난 사람과 경험한 일들도 기록해 놨다.

“은혜를 입은 일과 틈이 생겼던 일도 전부 기록해. 안 만나면 그만이지만 혹여 다시 만날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알고 있어야 괜히 어리바리하게 안 굴어.”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나무도 시들어갔다.

“아씨, 우리 그만 들어가요.”

반근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억울한 일을 한 번 겪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유로운 나날이었다. 잘 먹고 잘 자다 보니 반근의 키도 어느새 훌쩍 자랐다.

“난 낚시를 하고 싶어.”

정교랑이 말했다. 더 이상 수시로 피곤을 느끼지 않는 것도 건강이 호전된 증거 중 하나였다. 정신이 또렷하고 활발하게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타나던 두통 증상도 한결 가벼워졌다. 다만 정신이 산만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 앉아 낚시를 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란스럽고 잡히지 않는 파편화된 기억들을 더 빨리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좋죠. 물고기를 잡으면 먹을 수 있겠네요.”

반근은 신이 났다.

“아씨가 낚시도 하신다니, 정말 좋네요. 일단 여기 앉아 계세요. 낚싯대를 가져올게요.”

말을 마친 반근이 얼른 마당 쪽으로 뛰어가더니 거기 있는 여종에게 물어 낚싯대를 가져왔다. 정교랑은 반근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봤다.

“난 낚시할 줄 몰라.”

정교랑이 말했다.

연못 근처의 석가산 중턱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평평한 곳이 있었다. 나무 그늘이 지고 아래로는 물을 끼고 있었다. 거리상으로도 마당에서 멀지 않았기에 정교랑은 낚싯대를 드리울 장소로 마음에 쏙 들었다.

반근은 정교랑 뒤에 앉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화초로 각종 형태의 작은 바구니를 만들었다.

“이번엔 물고기가 걸려들었어요?”

반근이 이따금 고개를 돌려 조용히 물으면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낚시할 줄 모르시는 거 맞네요.”

반근의 말에 정교랑이 웃었다. 당연히 진짜지. 낚시를 하는 느낌을 원했을 뿐이야.

과연 정교랑이 짐작한 대로였다. 그렇게 앉아 있노라니 정신이 예전처럼 산만하지는 않았다. 아씨의 정신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며 반근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낚시는 먹고 자는 일 외에 정교랑과 반근이 반드시 하는 또 하나의 일이 됐다. 매일 오후가 되면 두 사람은 이곳으로 왔다. 정교랑은 정좌한 채 낚시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반근은 꽃과 풀을 엮으며 놀았다.

하지만 입맛을 잃은 정육랑의 나날은 편치 못했다. 집안 막내딸이 이러니 오라비들의 관심이 컸다. 정사낭이 간식을 담은 함을 들고 누이를 보러 왔다. 정육랑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축 늘어진 채 어린 몸종이 쌍육을 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육랑, 이것 좀 먹어 봐. 거리에 간식 점포가 새로 열었는데, 경성에서 온 솜씨 좋은 아주머니가 만든대. 어서 먹어 봐.”

정사낭이 말했다. 정육랑은 여전히 기운 없는 모습으로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너무 느끼해요. 오라버니, 맛도 안 봤어요?”

정육랑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정사낭이 멋쩍은 듯 웃었다.

“난 이런 거 안 좋아해. 다들 맛있대서.”

정육랑이 입을 뾰로통 내밀었다. 말을 잇기도 전에 밖에서 나막신 소리가 들리더니 정칠랑이 들어왔다. 이어 정사랑과 정오랑도 들어왔다. 다들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듯 나막신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들어와 앉았다.

“앞으로 밖에 나가지 마!”

눈이 빨개진 정칠랑이 고함을 쳤다. 속상하고 화난 모습이었다.

“왜 그래?”

정사낭이 물었다.

오랑과 육랑은 오라버니에게 인사부터 올린 후 자리에 앉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나가면 사람들이 안 비웃어요?”

정칠랑이 정사낭을 보며 말했다.

“왜 날 비웃는데?”

정사낭이 영문을 몰라 했다. 정사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씨 집안의 적자였다. 공부머리는 보통이어도 어디 가서 비웃음을 살 인사는 아니었다.

“이래서 우리 여자들만 재수 없다니까.”

정칠랑이 푸념하며 정육랑을 바라봤다.

“우리한테 바보 언니가 생긴 걸 온 성이 다 알아. 다들 우릴 비웃잖아!”

정육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야?”

“다들 어떻게 알았대? 그 바보는 집 밖에 나간 적도 없잖아!”

“원래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잖아.”

정오랑이 조용히 말했다. 정육랑이 손으로 이마를 치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모레 동 낭자네 집에 놀러가기로 했는데.”

“가면 안 돼!”

정칠랑이 소리쳤다.

“우리가 오늘 나갔다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엄씨 가문의 그 천것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한테 한 집안끼린 같은 피가 흐르는 거라며, 똑똑한 가문 자매들은 전부 똑똑하고, 바보네 자매들은 전부 바보라고 했어!”

“진짜 망했다. 엄씨 가문 그 천것이 분명 동 낭자네 집에도 갈 텐데.”

정육랑이 두 손을 비비며 정칠랑을 바라봤다.

“물론 그 바보는 네 친언니지만…….”

정칠랑은 그 말에 거의 뒤로 넘어갈 뻔했다.

“네 친언니기도 하잖아!”

정칠랑이 소리쳤다.

“너랑 비하면 좀 멀잖아.”

정육랑이 진지하게 받아쳤다.

옆에 있던 정사낭은 웃기면서도 궁금해졌다. 여자들의 수다란 늘 이렇게 우습다니까. 항상 핵심을 제대로 못 짚지.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언니인 정사랑이 화제를 돌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쨌든 정씨 집안의 사람이면 우리 모두 웃음거리가 되게 생겼어. 육랑, 특히 넌 인품과 용모를 다 갖췄다고 남몰래 질투하는 사람이 많았잖아. 다들 이번 기회에 널 비웃으려 들 거야.”

그랬다. 정육랑은 완벽에 가까운 미모로 유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바보 혈육이 그 아름답고 완벽한 그림에 시커먼 먹물을 떨어뜨리면서 그림을 망쳐 버렸다.

“진짜 재수 없어 죽겠어!”

정육랑이 씩씩거리며 손에 든 부채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우리 앞으론 누구 만나러 나가지도 못하게 됐잖아! 전부 그 바보 때문에!”

정칠랑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정사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랑, 그럼 오늘 엄가 천것이 날 모욕한 것도 내가 인품과 용모를 다 갖춰서야?”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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