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
정교랑이 돌아오면서 벌어진 성가신 일들이 일단락되었다. 이노야는 과거 방탕하게 지내던 시절 가까이했던 여인들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을 며칠간 공을 들인 끝에 원만히 해결했고, 이부인은 이 까다로운 ‘딸’ 문제에 대해 잠시 손을 떼게 되었다.
정육랑과 정칠랑 역시 이름을 바꾸는 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그 바보는 갇힌 신세니 겁낼 일도 놀랄 일도 없다.
대부인은 이방 내외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됐고, 가정이 화목하니 더 이상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다.
지난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조용하고 평온하던 일상으로.
반근과 정교랑도 잘 지냈다. 이리저리 떠돌며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먹고 입는 것도 풍족했다. 게다가 자신들만 쓰는 작은 부엌까지 생겼으니 아씨의 까다로운 식성도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아씨, 아씨. 이럼 돼요?”
반근이 외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눈을 감고 있어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반근은 어느새 문 앞으로 와서 소리치고 있었다. 손에 밀가루 반죽을 들고 있는데 누르스름한 게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정교랑이 눈을 뜨고 쳐다봤다.
“벌꿀을 한 숟가락 더 넣고 꾹꾹 눌러 뭉치면 돼.”
반근은 신이 나서 네 하고 대답했다.
“아, 맞다.”
반근이 뛰어가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아씨, 젓가락으로 펴 놓은 다음엔…….”
정교랑이 팔걸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왼손과 오른손의 손가락 두 개를 뻗으며 허공에 대고 몇 가지 동작을 해 보였다. 느린 동작이었지만 반근은 꼼꼼하게 봤다.
“알겠어요.”
반근은 뒤돌아 얼른 부엌으로 뛰어갔다. 정교랑이 입을 약간 오므리며 웃음을 짓고, 계속해서 팔걸이 책상에 기댔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진짜 예쁘네요. 이걸 정말 제가 만들었다니.”
반근이 기뻐하며 놀라워했다. 반근은 날실 같은 황금색 튀김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낮은 탁자 위에 펼쳐 놓고는 신이 나서 감상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하나를 집더니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달콤하고 바삭바삭하여 입에 살살 녹았다.
“난, 모르겠어.”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이런 조리법을 생각해 내다니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반근도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잠시 침묵했다. 이건 생각해 낸 게 아니라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잔재주 가지고 뭘.”
정교랑이 몇 입 먹고는 더 이상 먹지 않자 반근이 물을 따라 건네며 물었다.
“그런데, 아씨. 정말 차는 안 드세요?”
“그런 차는 안 먹어.”
정교랑이 물을 들고 천천히 마시며 말했다. 반근이 혀를 내두르고 도리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아씨는 어떤 차를 드세요?”
천천히 물을 마시고 난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정교랑의 기억은 회복되지 않았다. 기억이 스스로 반응하지 않는 한 정교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려고 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예를 들어 밀가루 음식을 보면 머릿속에서 그 조리법이 떠오르는 때도 있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때도 있었다. 또 예를 들자면 차는 아무리 마시려 해도 입에 안 맞았다. 머릿속에서 먹기 싫다는 강한 거부 반응이 있을 뿐, 어떤 차를 마시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인 듯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모르겠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반근은 이미 낮은 탁자를 옮기고 있었다. 반근에게는 항상 반 박자 느린 아씨의 답변이 익숙했다.
“아씨, 낮잠 주무실 시간이에요.”
정교랑은 반근의 말에 응 하고는 정교랑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서 대나무 문발을 넘어 침상으로 갔다. 방 안은 곧 조용해졌다.
밖에서 여종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쳐다봤다. 대나무 문발 너머로 침상 위에는 여인이, 침상 아래에는 그 몸종이 곤히 잠든 모습이 보였다. 다시 가운데 쪽을 보니 탁자 위에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간식이 놓여 있었다. 가느다란 것이 겹겹으로 얽혀 있는데 어떻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종은 저도 모르게 눈빛을 반짝이고는 까치발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손을 뻗어 작은 간식 하나를 집어 입에 넣자 감탄이 절로 나오며 정신이 확 들었다.
방 안에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역시 바보는 바보네. 그저 먹고 자는 것만 알아.”
여종은 소리 죽여 중얼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괜히 먹을 것만 축내지.”
여종은 안을 몇 번 힐끔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간식을 쟁반째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쪽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허드렛일을 하는 어린 몸종이다. 어린 몸종은 날마다 놀러 나가기 바빠 이 시간엔 그림자도 안 비춘다.
여종은 음식을 들고 이리저리 좌우를 살피며 문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이라 연못에 있는 연꽃도 축 늘어져 있고, 숲에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낮잠을 잘 시간이라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쟁반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간 여종은 마당을 지나 측문으로 빠져나와 좁은 골목을 걸어 자기 집으로 향했다.
“이봐.”
갑자기 정수리 위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종은 순간 걸음을 멈추고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야.”
여자아이가 소리쳤다. 고개를 든 여종은 그제야 석가산(石假山. 뜰에 돌을 쌓아 올려서 만든 산) 위에 지은 작은 정자에 서 있는 세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섯째 아씨, 일곱째 아씨, 다섯째 아씨.”
여종이 얼른 몸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나이는 정오랑이 가장 많은데도 맨 마지막에 부른 것은 여종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적서의 구분 때문이었다.
“늙은이가 뭘 그리 수상쩍게 움직여?”
정칠랑이 말했다. 정육랑은 여종의 손에 들린 쟁반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정칠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뭘 들고 있는 거야? 또 남의 거 훔쳐가는 거지!”
정육랑이 말했다. 정육랑은 이제 12살로 혼기가 찼다고 할 수 있는 나이였고, 어머니에게서 집안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여종들의 손버릇이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절도죄가 씌워지면 가볍게는 매질을 당한 후 쫓겨나고, 무겁게는 관아로 넘겨진다. 여종은 놀라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여섯째 아씨, 소인이 어찌 감히요. 이건 교랑 아씨께서 먹고 남아 버리시는 건데, 소인이 보기에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 같아 집에 있는 손자나 줄까 하고 챙긴 거예요. 훔쳐온 건 절대 아닙니다.”
여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칠랑은 그제야 그 노비가 정교랑의 처소에서 일하는 여종임을 알아챘다. 그 바보가 꼴 보기 싫다 보니 이 여종까지 덩달아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 바보 거구나. 내버려 둬.”
정칠랑이 정육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옆에 있던 정오랑이 입을 오므리며 웃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간 여종들은 하나같이 약삭빠르다. 바보에게로 미루면 어차피 대질할 수도 없으니 자기한테 유리한 법이다.
정육랑은 바보의 사람이라는 말에 불쾌한 마음이 들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 금빛 찬란한 간식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에서 그 바보의 방 안을 쳐다볼 때 맡았던 맛있는 냄새가 갑자기 떠올랐다.
“이봐, 그거 이리 가져와 봐.”
정육랑이 쟁반을 가리키며 말하자 여종은 잽싸게 움직였다.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겠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고, 더 이상 추궁만 당하지 않아도 감지덕지였기에 곧바로 공손하게 바쳤다.
“이걸 뭐 하게?”
정칠랑이 코를 가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다 바보한테 병 옮아.”
정오랑은 여종이 내미는 쟁반을 받아 웃으며 정육랑 앞으로 가져오더니 물었다.
“동생, 이거로 뭐 하고 놀게?”
“우리 이거 물고기한테 주러 가자.”
정육랑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물고기도 바보 돼!”
정칠랑이 소리쳤다.
“바보가 되면 더 좋지. 낚시하기 쉬워지잖아.”
정육랑이 웃으며 말하고는 치마를 손으로 걷고 연못 쪽으로 갔다. 정칠랑이 뾰로통 입을 내밀며 일부러 협박하듯 소리쳤다.
“그럼 나 언니랑 안 놀아.”
정육랑은 겁날 거 없다는 듯 정오랑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정오랑이 웃으며 정칠랑을 잡아끌었다.
“바보의 음식을 먹어도 바보가 되진 않아. 어차피 걔 것도 아니잖아. 우리 집 것이지.”
정오랑이 웃으며 말하자 정칠랑은 그제야 응 하고 대꾸하고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여종은 기회를 틈타 후다닥 도망쳤다.
바삭바삭한 간식을 조금 떼어 물 위로 흩뿌리자 곧 연못 아래에 있던 비대한 물고기가 와서는 먹어치웠다.
“이게 뭐지? 평소에 못 보던 건데?”
정육랑은 물고기에게 간식을 던져 주면서 손에 묻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모르겠어, 나도 처음 봐.”
정오랑이 말했다.
“그 바보한테 주는 거니까 우리가 먹는 거랑 당연히 다르겠지.”
정칠랑은 몇 걸음 멀찍이 떨어진 채 코를 가리고 서 있었다. 정육랑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간식을 조금 떼어 자신의 입에 넣자 정칠랑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
정육랑도 곧 소리를 질렀다.
정오랑으로서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 바보는 부엌을 단독으로 쓰는데 숙수를 딸려 주지 않고 허드렛일 하는 늙은 여종 하나와 어린 몸종 하나만 붙여 줬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나이 든 여종과 몸종이 무슨 요리를 하랴 싶지만 바보한테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겠는가. 먹고 배만 채우면 그만이지.
처음 보는 음식이고 이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음식도 아닌 것으로 보아 아마 그 바보의 부엌에서 만든 것일 터였다. 맛이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런데 웩웩거리며 토할 줄 알았던 정육랑이 예상 밖으로 또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 게 아닌가.
“맛있다!”
정육랑이 음식을 입에 물고 말했다. 정칠랑과 정오랑은 대갓집 규수의 자태를 잃은 정육랑의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육랑이 바보가 됐어!”
정칠랑이 소리치며 치마를 들고 뛰어갔다.
대부인의 귓가에 사흘 만에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막내딸은 몇 년 더 데리고 있다가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빨리 보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거 먹고 싶어요. 나도 이거 먹을래요.”
정육랑이 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앞에 놓인 작은 탁자에는 쟁반에 간식이 놓여 있었는데 끄트머리가 조금 부서져 있었다.
“육랑, 넌 이제 12살이야. 어디서 이렇게 식탐을 부려.”
대부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왜 편애를 하시냐고요. 바보한테만 맛있는 거 주고 저한텐 안 주셨잖아요.”
정육랑이 뾰로통 입을 내밀며 덧붙였다.
“걔한테 육랑을 시키고 절 칠랑으로 만들려고 그러시죠!”
대부인은 머리가 아팠다.
“뭔데 그렇게 맛있단 거야?”
대부인이 간식을 조금 떼어내 입에 넣더니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훌륭하구나.”
모친이 칭찬하는 걸 본 정육랑은 더욱 골을 냈다. 대부인은 시끄러워 못 견디겠는 듯 말했다.
“가서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봐라.”
정교랑 처소의 여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전전긍긍하게 됐다. 이런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에게는 방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어린 낭자들을 속일 순 있어도 주인마님까지 속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끝장이구나, 곧 쫓겨나겠어.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다. 괜히 음식 하나 잘못 먹어서 이게 웬 고생이야.
여종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바닥에 바짝 부복해 있었다.
“이걸 네가 만들었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여종은 두 번을 듣고서야 무슨 질문인지 알아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반근 그 애가 만든 거예요.”
여종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반근?
한참을 생각한 대부인은 누군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주씨 집안 노부인께서 그 바보의 시중을 들라고 붙여 준 아이면 정성 들여 고르고 고르셨겠지. 바보가 원하는 거라곤 그저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는 것뿐일 테니, 몸종의 음식 솜씨가 훌륭한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어머니, 그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정육랑이 단정히 앉으며 말했다.
* * *
대부인이 이부인을 대신해 정교랑을 맡기로 했지만, 그래도 대부인은 이부인한테 직접 가서 의견을 구했다.
“형님, 제 쪽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얼마든 데려가셔도 돼요. 더구나 교랑은 형님이 맡고 계시니 더 말할 것도 없죠.”
이부인이 말했다. 권한 내에 있는 일이라고 해서 전부 도의에 들어맞는 건 아니다. 말 한마디 덧붙이는 건 힘 드는 일도 아니고, 이래야 괜히 틈 생길 일이 없다.
대부인이 시집온 후 수십 년 동안 터득한 경험이다.
“그래도 이노야의 여식이 데리고 있는 아이니 큰어미로서 말은 하는 게 좋지.”
대부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방 내외가 이런 일로 기분 나빠할 리는 절대 없다는 걸 대부인도 알고 있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여기서 더 말을 보태면 오히려 억지스러워진다. 대부인은 화제를 돌렸다.
“그 아이를 불러서 요리 솜씨가 어떤지 좀 보려고.”
애초에 이부인은 일개 몸종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바보의 몸종이 아닌가. 그래도 손위 동서가 하는 말이니 동의했다.
“그 애가 한 밥 먹으면 바보가 될걸.”
정칠랑이 말했다. 모친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 자매는 병풍 뒤에서 쌍육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애가 바보인 건 아니잖아.”
정육랑이 어린애 같은 말에 코웃음을 치며 놀이판을 밀어냈다.
“내가 이겼다. 봐, 난 그 쟁반에 있는 튀김 다 먹었는데도 널 이겼잖아.”
정칠랑이 불만스레 입을 내밀며 놀이판을 마구 흔들어 버렸다.
“나 진짜 바보가 됐나?”
정육랑이 작은 부채를 흔들며 일부러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칠랑을 이겼지? 칠랑 네가 그 바보보다 더 멍청했구나?”
정육랑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깔깔대며 웃었다. 정칠랑은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육랑! 또 동생 괴롭히지!”
대부인의 노여운 목소리가 병풍 앞에서 전해졌다. 유모들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육랑을 나무라며 칠랑을 달랬다. 두 자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라 다들 태연했다.
시끌벅적해진 가운데 반근까지 불려왔다.
“너희 아씨는 뭐 하고 있니?”
본분을 다하고자 이부인이 묻자 반근이 반색을 하며 신이 나서 대답했다.
“아씨는 주무세요.”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자다니. 이부인이 입을 오므렸다. 역시 바보는 바보인 게야.
“이걸 네가 만들었느냐?”
대부인은 한낱 몸종에게 예의 차릴 필요 없다는 듯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육랑이 먹다 남긴 튀김을 여종이 반근 쪽으로 밀어 보여 줬다.
반근은 앗 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기 음식을 누가 훔쳐 먹은 걸 이제야 눈치챈 게로군. 여종과 대부인은 그 표정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씨께서 밥을 잘 안 드셔서 소인이 준비한 간식이에요.”
정신을 차린 반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여종이 와서 이부인이 자신을 찾는다고 했을 때, 반근은 기뻐하며 교랑에게 이부인이 아씨를 보려는 게 틀림없다고 말했었다.
“간식.”
하지만 정교랑은 두 글자를 내뱉었다. 당시 그 말을 못 알아들은 반근은 아씨가 간식을 더 드시려는 줄 알고 가져다주려고 했지만, 여종이 가자고 재촉을 하는 통에 허드렛일을 하는 몸종에게 간식을 올리라고 분부만 하고 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 간식이 여기 있었다니! 아씨가 간식이라고 한 건 부인이 간식 일로 불렀을 거라는 뜻이었나? 아씨가 그걸 어떻게 알고?
세상에, 아씨는 역시 신선의 계시를 받은 분이야. 똑똑해도 너무 똑똑하다니까!
반근은 기쁘고 흥분되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은 대부인과 이부인, 여종들이 흔히 보는 표정이었다. 집안 몸종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불려와 대답할 때, 곧 이어질 기쁨을 기대하며 흥분하는 표정이었다.
좋은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이리 기뻐하는 게로군. 대부인이 살짝 웃었다.
“아주 훌륭하더구나.”
대부인이 문간 밖에 서 있는 여종을 향해 말했다.
“도랑자, 이 애를 데려가 부엌의 주랑자 밑에서 간식을 만들게 해라.”
여종이 네 하고 대답하고는 반근을 보며 눈치를 줬다.
“부인께 감사 인사 올려야지.”
주랑자는 이 집에서 간식을 제일 잘 만드는 찬모였다. 그 밑에서 요리를 배우는 건 수많은 몸종이 간절히 바라는 일이었다.
반근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약간 멍해졌다.
“감사합니다, 부인.”
반근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더러 뭘 하라고요?”
“저것 봐. 진짜 바보네. 말귀도 못 알아들어!”
정칠랑이 병풍 뒤에 앉아 말했다. 정육랑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네가 와서 내 간식을 만들라고.”
정육랑이 반근을 보며 고개를 살짝 쳐들고 말하자, 반근은 그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소인은 우리 아씨를 모셔야 해요.”
반근이 멍하니 말했다.
“교랑한테는 몸종을 둘 더 보내 주마.”
대부인이 대답한 후 한마디 당부를 덧붙였다.
“찬모도 하나 보내고.”
이 정도면 됐겠지.
“형님, 거기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해요?”
이부인이 물었다.
“어쨌든 아픈 아이잖아. 여럿이 있으면 좋겠지.”
대부인이 말했다. 반근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부인의 뜻은 저더러 앞으로 우리 아씨를 모시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정칠랑이 앞으로 나와 반근을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역시 멍청하다니까. 말도 못 알아듣네. 바보의 시중을 들면 그 사람도 바보가 되나 봐.”
정칠랑이 우쭐해하며 정육랑을 힐끔 쳐다봤다.
“언니, 진짜 저 애가 만든 음식 먹을 거야? 잘 생각해.”
정육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반근이 입을 열었다.
“아씨, 우리 아씨는 모자란 분 아니에요.”
이번에는 정칠랑과 정육랑이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풉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에요. 우리 아씨 다 나으셨어요.”
반근이 말하며 간식을 가리켰다.
“이건 제가 그냥 만든 게 아니라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셔서 만든 거예요.”
반근의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뜻만은 모두가 알아들었다.
“언니, 언니한테 안 간다잖아.”
정칠랑이 웃으며 말하자 정육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간식 만들어 주기 싫어?”
정육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눈썹을 치켜세우고 묻자 반근이 당황했다.
“소인은…… 소인은 사실 간식을 만들 줄 몰라요.”
반근이 우물쭈물하며 덧붙였다.
“전부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칠랑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정육랑은 부아가 치밀었다.
“따귀를 쳐라!”
정육랑이 소리치며 손에 들고 있던 둥글부채를 매섭게 내던지고는 발을 구르며 더 크게 소리쳤다.
“따귀를 치라니까! 따귀를 쳐!”
반근은 겁에 질리고 여종들도 멈칫했다. 하지만 곧 한 여종이 그 분부에 따라 손을 높이 쳐들고 반근의 두 뺨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그만해라.”
대부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여종은 손을 거두고 공손히 서 있었다.
반근의 뺨은 퉁퉁 부어올랐고,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반근은 주씨 노부인에게 팔려 한동안 훈육을 받은 후 도관으로 보내져 정교랑의 시중을 들었다. 도관 생활이 고생스럽긴 했지만 주씨 노부인의 돈이 있었기에 도관 사람들은 정교랑과 반근을 괴롭히지 않았다. 정교랑도 바보다 보니 조용히 지냈고 일상에서도 말이 없었다. 따로 관리하는 윗전도 없다 보니 지금껏 크도록 누군가에게 맞은 건 처음이었다.
“싫으면 관둬라, 물러가거라.”
대부인이 냉담하게 말했다. 반근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어서 부인께 감사 인사 올리지 않고!”
여종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반근은 허둥지둥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비틀대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어머니, 꺼지라고 해요. 꺼지라고. 난 저 애 우리 집에 있는 거 보기 싫어요!”
뒤에서 정육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근이 궁지에 빠진 모습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오가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반근은 뺨이 얼얼하고 화끈거리는 것만 느껴질 뿐 창피한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우뚱하며 갈팡질팡하다가 하마터면 발을 접질릴 뻔한 반근은 그제야 자신이 황급히 도망치느라 이부인 쪽에 나막신 한 짝을 떨어뜨리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가지러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근은 나막신 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허둥지둥 걸어갔다.
돌길을 걷자니 발이 아파왔다. 고개 숙인 반근에게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 *
정교랑은 벌써 한참 동안 병풍만 보고 있었다. 병풍에는 간단한 나무와 미인도가 그려져 있고 글자도 한 줄 쓰여 있었다.
정교랑이 보는 건 바로 행서체로 쓰인 그 글자였다. 정교랑은 입술을 움직이며 글자를 천천히 따라 읽었다. 정교랑은 병풍을 뚫어져라 보며 팔걸이 책상에 올려놓은 손을 천천히 움직여 그 글자를 따라 써 보았다.
글자를 알았고 쓸 줄도 알았다. 아마 꽤 능숙하고 글씨도 훌륭하게 썼을 것이다. 손가락이 굳어 손놀림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선 거침이 없었다.
이게 정말 바보의 기억이라고? 바보가 신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이럴 수 있나?
넌 누구니? 난 누구지?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반근이 돌아온 것이다. 정교랑은 손동작을 멈추었다. 하지만 반근은 곧장 들어오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에 넣어 둔 설탕이 어느덧 걸쭉한 액체가 되어 있었다. 반근이 썰어놓은 복숭아를 넣고 이리저리 굴린 다음 건져 내고 한쪽에 하나씩 놓아 식혔다.
거울이 없는 반근은 물동이 속에 있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한참 비춰 보고, 머리를 빗고 또 빗은 다음 얼굴에 재를 묻혔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반근은 물동이를 보며 씽긋 웃었지만 눈에는 운 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반근은 눈을 찡그리며 몇 번을 이리저리 굴려 본 다음, 아예 손으로 눈을 몇 번 문지르기도 했다. 복숭아가 어느덧 다 식었다. 반근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쟁반을 들고 방 안을 향해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어갔다.
“아씨, 아씨. 이번에 만든 건 어떤지 드셔 보세요.”
정교랑은 반근을 쳐다봤다. 반근이 싱글벙글 웃으며 무릎을 꿇고 팔걸이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다음, 일어나 대나무 꼬치로 하나를 집어 정교랑의 입가로 건넸다. 정교랑은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
“어떠세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은 말없이 천천히 먹었다. 반근도 서두르지 않고 정교랑이 먹는 모습을 싱글벙글 쳐다보며 어떻게 만들었는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좋아.”
다 먹은 정교랑이 대답했다. 반근은 기쁘게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만지더니, 깜짝 놀라며 무언가를 발견한 시늉을 했다.
“이런, 손에 재가 묻었네요. 아씨, 제 얼굴에도 묻었어요?”
“응.”
“이런, 창피해 죽겠네. 어차피 볼 사람도 없으니 그냥 안 씻을게요.”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그래.”
반근이 복숭아를 또 하나 집어 정교랑에게 먹여 줬다. 정교랑은 두 개를 더 먹은 후 그만 먹겠다고 했다.
“복숭아씨 아직 남았지?”
정교랑이 갑자기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또 뭐 드시고 싶으세요?”
“그걸 갈라서 복숭아씨의 알맹이를 가져와 봐. 절굿공이로 찧으면 돼. 이리 가져와.”
반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나갔다. 바닥에는 진창을 밟았던 발이 남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정교랑의 시선이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아씨, 이렇게 하면 돼요?”
반근이 앞에 앉아 복숭아씨를 빻으면서 수시로 물었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생강도 있니?”
정교랑이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있다고 대답했다.
“가져와서 껍질을 벗겨.”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시키는 대로 했다.
“아씨, 생강은 필요 없고 생강 껍질만 필요한 거예요?
반근이 조심스레 생강을 까서 그릇에 껍질을 담으며 물어봤다.
“생강은 필요 없어.”
정교랑은 눈을 감은 채로 반근이 콩콩 빻는 소리를 들었다.
“다 됐어요.”
반근이 손을 멈추고 기대에 차 물었다.
“아씨, 이걸 어떻게 할까요? 끓일까요, 볶을까요, 찔까요, 튀길까요?”
정교랑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반근이 영문을 몰라 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더 가까이 와.”
정교랑이 다시 말했다.
반근이 그릇을 안고 다가가 정교랑과 마주보고 앉았다.
정교랑이 한 손의 소매를 걷고 한 손으로 그릇에 있는 재료를 쥐어 뭉치더니 반근의 얼굴에 발라 주었다. 반근은 깜짝 놀랐다. 차갑기도 하고 끈적거리기도 하고 쿡쿡 쑤시는 통증도 있었다.
“아씨?”
반근이 놀라 말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느린 동작으로 반근의 얼굴에 계속 펴 발라 주었다. 왼쪽을 다 바르고 난 다음에는 오른쪽에도 발라 주었다.
반근은 차츰 움직임을 멈췄다.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점점 많아지더니 얼굴에 바른 거무스름해진 죽으로 번졌다. 정교랑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거 바른 거 좀 말리고 나서 울어. 안 그럼 새로 한 그릇 빻아야 해.”
반근이 입을 삐쭉 내밀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아씨, 소매로 그러지 마세요. 더러워져요.”
반근의 말에 정교랑이 응 하고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괜찮아, 네 소매잖아.”
놀라 고개를 숙이던 반근은 정말 자기 소매가 맞는 걸 그제야 확인하고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반근이 울음과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정교랑을 불렀다.
밤의 어둠이 내렸을 무렵, 반근은 거울을 대고 얼굴을 살펴봤다. 얼굴은 예전과 다름없이 희고 보드라웠다.
“아씨.”
반근이 기뻐하며 정교랑을 불렀다.
“이렇게 빨리 낫다니요!”
정교랑은 침상에 누워 잠든 듯했다.
“아씨.”
반근은 교랑이 잠들지 않은 걸 알고 침상 아래의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풀며 말했다.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난 죽은 사람도 살릴 정도인데, 그깟 따귀가 대수겠어?”
정교랑이 말했다. 따귀 얘기가 나오자 반근은 풀이 죽은 채로 정교랑의 침상 근처에 엎드렸다.
“아씨, 그 사람들은 왜 절 때렸을까요?”
반근이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네가 가진 걸, 저들은 못 가졌어. 그런데 저들을 위해 쓰진 않겠다고, 네가 고집을 부렸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죄야.”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말을 내뱉은 후 정작 정교랑 자신도 멍해졌다. 머릿속에 또다시 그 시끄러운 소리가 꽝꽝 울렸다.
네가 너무 잘났으니까. 넌 너무 잘났어. 그러니까, 넌 죽어 마땅해.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 주위를 잡으며 헉헉 숨을 헐떡였다.
반근이 깜짝 놀라 얼른 똑바로 꿇어앉고, 정교랑이 숨을 제대로 쉬도록 도우며 아씨를 연신 불러댔다. 다행히 정교랑은 혼절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헐떡이더니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번에 느낀 감정은 저번 같은 괴로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분노로 인한 아픔은 슬픔으로 인한 아픔과 비교가 안 된다. 이런 아픔은 그녀를 혼절시키기는커녕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 뿐이었다.
“아씨.”
반근이 울며 소리쳤다.
“전부 소인의 잘못이에요.”
“잘못이지.”
정교랑이 말하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잘못이야.”
“네, 소인이 잘못했어요.”
반근이 울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정교랑은 속으로 그 말이 잘못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는 동작이 너무 힘들어 말하지 않았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거듭 평정을 되찾은 후, 반근은 정교랑을 부축해 다시 눕혀 주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벌레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반근은 무릎을 꿇은 채로 한참을 있다가 정교랑이 무탈한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 누웠다.
“네가 잘못했어.”
정교랑이 돌연 입을 열었다. 설핏 잠이 들었던 반근은 놀라서 또다시 눈을 떴다.
“네?”
반근은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자신이 아까 한 말에 대한 대답인 걸 그제야 깨닫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해했다.
“네가 틀렸어.”
정교랑이 야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소인이 어떻게 해야 했는데요?”
반근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말해야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저 사람들이 와서, 날 부르도록.”
정교랑이 말했다.
“어째서요?”
반근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 아씨한테로 미뤄요?”
“왜냐하면, 난 네 아씨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씨의 말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으니까 네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정교랑이 아무 말 없자 반근은 자리에 누웠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반근은 베개를 문지르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교랑이 또다시 말을 이었다.
“난 바보야.”
바보는 무슨 짓을 하든 이해를 받는다.
이번엔 반근의 반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반근의 코 고는 소리뿐이었다.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