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
정씨 저택 이방의 동쪽 뜰은 연못과 붙어 있었다. 대방과 이방이 함께 쓰는 화원이자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 좋은 곳으로 집안의 어린 낭자들 거처는 모두 이 근처에 있었다.
여종들이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오가며 시중을 들었다. 단지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한 건물 앞을 지날 때는 걸음을 멈추고 힐끔힐끔 보며 한두 마디 수군댄다는 것이었다.
어젯밤 급히 치워진 이 방에 한 여자가 들어와 살게 됐다. 듣기로는 이 댁 적장녀라고 한다.
“우리 서열이 뒤로 하나씩 밀리는 거야. 칠랑은 이제 팔랑이 되는 거지.”
12살의 정육랑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안에서 함께 밥을 먹던 어린 소녀 둘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았다. 유모가 당황해하며 급히 끼어들었다.
“여섯째 아씨, 동생을 놀리지 마세요.”
육랑은 대방의 적녀로 서녀가 아니었기에 정칠랑이 함부로 꾸짖을 수 없었다.
밤새 화가 쌓인 정칠랑은 그 말에 욱해서 젓가락을 내던지고 울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모도 기겁을 하고 뒤쫓아 나갔다. 우는 정칠랑을 보며 정육랑은 메롱 혀를 내밀고는 깡충깡충 뛰어갔다. 방에 남아 있던 두 소녀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바보 기억나?”
정사랑이 물었다.
“걔가 집을 떠날 때 우린 겨우 2살이었는데, 기억이 나겠어?”
정오랑이 말하며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바보를 기억할 게 뭐 있어. 이렇게 생겼잖아.”
정오랑은 말하면서 장난스레 혀를 내밀고 흰자위를 까뒤집으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정사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젠 내가 정오랑이네.”
정사랑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정오랑을 가리켰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두 자매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다시 한번 까르르 웃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이부인은 식사도 걸렀다. 조금 더 자려고 했는데, 딸의 울음소리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너한테 칠랑 하라고 한 사람 없어. 네가 칠랑이야. 영원히 칠랑이라고.”
이부인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칠랑이 모친의 옷소매를 잡았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모친의 다짐을 받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안정됐다.
“난 바보 언니 필요 없어요. 남들이 비웃는단 말이에요.”
정칠랑이 또다시 몸을 배배 꼬며 칭얼거렸다.
그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정씨 집안 전부가 같은 생각일 거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 바보를 도관에 버린 게 벌써 7~8년인데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이부인은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만해, 칠랑. 시끄럽게 할 게 뭐 있어. 좀 봐라, 이게 어딜 봐서 대갓집 규수의 모습이야? 계속 이러면 너도 그 바보 언니랑 똑같아지는 거야. 남들한테 웃음거리가 된다고!”
이부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에 정칠랑은 생각할 수도 없는 악몽인 듯 모친을 보며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정씨 저택의 이방은 이른 아침부터 아수라장이었다.
소식은 금세 대방으로 전해졌다. 마찬가지로 밤새 잠을 못 이룬 듯한 대노야와 대부인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노야는 남자라 좀 그렇고, 동서는 시집을 늦게 와서 그 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두 사람이 물어보게 하느니 내가 데려다가 물어봐야겠어요.”
대부인이 말하자 대노야가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 아침은 먹었다더냐?”
대부인이 여종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얼마 후 여종이 돌아와 대답했다.
“아직 자고 있답니다.”
대부인은 어이가 없었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뜬다고는 하나 바깥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눈이 부실 정도로 안팎을 비추고 있을 무렵이었다.
“모자란 애가 보통 사람들처럼 생활하길 바라시오? 먹고 자는 것밖에 모를 텐데.”
대노야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덧붙였다.
“물어보지도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시오.”
정교랑과 반근은 정씨 저택으로 돌아온 첫날 편안히 푹 잤다. 집에 도착하자 몇 달간 전전긍긍하던 걱정거리가 싹 사라져 마음이 푹 놓인 덕에 반근은 그 어느 때보다 단잠을 잤다.
몇 달 전 정신이 돌아온 후 처음엔 밤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정교랑도 이제는 제법 잘 잤다. 특히 어젯밤엔 밤새 꿈 한 번 꾸지 않고 단잠을 잔 걸 보면, 집에 도착해서 마음이 편한 게 맞긴 맞나 보다 싶었다.
어쨌거나 정교랑과 반근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래서 일어나 씻고 난 후 다 식은 식사를 받고도 별다른 반감은 들지 않았다.
“새로 와서 잘 모르겠지만 이 댁은 아침식사를 일찍 하거든. 아궁이에 불이 꺼져 다시 지피기 힘들어. 식구가 워낙 많기도 하고 작은 부엌에서 밥을 따로 해 먹는 법은 없거든.”
회랑 밖에서 나이 많은 여종이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반근에게 해명하며 하늘을 쳐다봤다.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리든가. 점심밥을 할 때가 거의 다 됐으니까.”
늦게 일어났다고 비꼬는 말이었지만, 반근은 눈치채지 못했다.
“괜찮아요. 제가 데워 먹으면 되죠.”
반근은 말하며 여종을 향해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직접 데워 먹는다고? 여종은 멈칫했다. 그러더니 반근은 과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대청에 화로 두 개를 늘어놓고 찬합을 열었다. 안에는 주걱과 밥공기, 젓가락 등등 식기구가 전부 갖춰져 있었다. 갖춰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모양새도 매우 정교해서 몇 개는 여종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바보가 이렇게 정교한 물건을 쓴다고?
여종이 그릇들을 멍하니 바라보자 다른 여종 하나가 뒤로 와서 손으로 쿡 찔렀다.
“어때 보여?”
나중에 온 여종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지막이 물으면서 건물 안쪽을 곁눈질했다. 먼저 온 여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오지 않았어, 나도 안 들어가 봤고. 창이 열려 있으니 몰래 가서 봐.”
여종이 웃으며 소리 낮춰 말했다. 둘은 곧 조그마한 소리로 함께 웃었다. 반근이 음식을 데우고 찬합에 차례로 담아 방으로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두 여종은 따라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렸을 때 모습은 나도 기억나. 밥도 혼자 못 먹고 오줌도 못 가리니 겨울엔 옷을 다 못 빨아서 종일 몸에서 냄새가 났지. 그래서 돌아가신 선부인께서 방 안에 향을 피워 놓곤 했는데, 그 모자란 아이가 재채기를 해대는 거야. 재채기를 할 때마다 오줌을 지리곤 했어.”
다른 쪽에서 물청소를 하며 모여서 웃고 떠들던 여종들은 그 대목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선부인도 참 안되셨지 뭐야. 애초에 저런 애를 남겨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처음에 노태야께서 익사시키라고 하셨는데 돌아가신 선부인이 말리신 거잖아. 울고불고 하며 안 된다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셨어. 노태야께선 열 받아서 사흘을 앓아누우시고는 겨우 단념하고 그 후로 이방 일에 일절 참견 안 하셨지.”
“어른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없다니까. 선부인이 저 천치한테 발목이 잡히는 바람에 이노야의 마음이 돌아서서 그 후론 아이를 못 얻으셨잖아. 도리어 몸만 상해서 일찌감치 세상을 뜨셨지. 저 애를 살려 둬서 고생하게 하느니 애초에 독하게 마음먹고 죽였으면 진작 환생해서 잘 살았을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애초에 선부인이 안 돌아가셨으면 지금의 새 부인이 들어오셨겠어?”
그 말에 여종들은 또다시 깔깔대며 웃고는 화제를 새 부인에게로 옮겨 갔다.
“다들 선부인이랑 지금 계신 부인 중에 누가 더 좋아?
죽은 사람과 비교하는 건 이부인이 가장 꺼리는 일이자 후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정씨 집안과 혼담이 오가던 때부터 이부인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초혼으로 만나 서로에게 하나뿐인 사랑이길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생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당시 부친이 죄를 지어 가세가 기울다 보니 혼기를 놓쳐 결국 재취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 젊고 잘생긴 데다 벼슬길도 순조로워 다행이었다. 손위 동서는 친절했고 시모는 불교에 심취해 있어서, 시집와 보니 며느리가 아니라 이 집 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제 적자까지 낳았으니 혼례 전에 걱정했던 일들은 차차 잊혀갔다.
하루하루 더 좋아지는 나날을 보내던 중 뜻밖에 이런 일이 터지면서, 마음속에 억누른 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도 연거푸 튀어나오게 됐다.
이다음에 죽으면 이부인과 남편은 함께 안장될 수 없고, 중간에 관이 하나 놓일 터였다. 이부인은 조금 아래쪽 위치에 놓여야 했다. 남편과 수십 년을 함께하고 아들딸을 낳아 후손을 이었어도, 채 몇 년도 함께 살지 못한 여인에 못 미치는 것이다. 단지 조금 먼저 시집왔다는 이유로, 단지 남편이 처음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조강지처라는 이유로.
이부인은 몸을 떨었다. 딸이 아침부터 울어대며 말한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 퍼졌다. 난 바보 언니 필요 없어요.
바보. 이 모든 게 바보로 인해 생긴 골칫거리다. 왜 병주에서 죽지 않았으며, 여긴 또 왜 돌아왔단 말인가!
* * *
반근이 찬합에 있는 것들을 꺼내놓았다.
“아씨, 음식 준비됐어요.”
반근이 신이 나서 말하자 정교랑이 힐끔 쳐다봤다.
“음식은 재료 수보다 정성이 더 중요하지.”
정교랑이 손을 뻗어 증편 하나를 가리켰다. 반근이 얼른 조금을 떼어내자 안에 든 대추가 드러났다.
“와, 도관에서 먹던 증편보다 훨씬 훌륭하네요.”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맛없어.”
정교랑이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한입 먹고는 먹지 않았다.
아씨가 몸이 나아진 후로 많이 먹진 않아도 입맛이 몹시 까다로워진 탓에, 이동을 제외하고는 버는 돈 대부분을 먹는 데 썼다. 어떻게 그렇게 정교한 음식들을 떠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를 들어 아씨가 먹고 싶어 하는 냉면은 청괴엽즙과 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돼지고기에 기름을 넣고 볶아 만들어야 했는데, 들어가는 재료는 많지 않아도 음식 한 냄비 만들 정성을 국수 한 그릇에 쏟아야 했다.
다행히 아씨는 식사량이 많지 않아 어떤 날은 하루에 간식 몇 점이면 충분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 집에도 못 왔을 것이다.
정교랑이 찬합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이걸 데워 와. 이 증편을 잘라 탕에 넣고 끓이면 돼.”
이런 일이 이미 익숙해진 반근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신이 나서 음식을 들고 나갔다.
* * *
“너 엎드려 봐, 얼른 엎드려 보라고.”
정육랑이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어린 몸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린 몸종이 쭈뼛쭈뼛 불안해하며 말했다.
“아씨, 우리 그만 돌아가요. 부인께서 찾으실 거예요.”
정육랑이 몸종에게 쉿 동작을 했다.
“조용히 해! 바보 놀라게 하지 마!”
정육랑이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어린 몸종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씨, 보지 마세요. 바보는 사람을 때린다니까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 바보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여긴 내 집인데 겁낼 게 뭐 있어. 얼른 엎드리라니까. 내가 올라가서 바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래.”
정육랑이 손짓을 하며 몸종에게 빨리 엎드리라고 재촉했다. 어린 몸종은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엎드렸다. 정육랑이 벽에 기대 몸종의 등을 밟고 올라서서 창턱을 붙잡고 창 안을 바라봤다.
발걸음 소리에 놀란 정육랑이 움찔하며 쪼그려 앉자, 어린 몸종은 흔들흔들하다 하마터면 정육랑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씨, 전병 다 됐어요. 이것부터 드세요, 증편죽 끓이고 있어요.”
정육랑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자 검푸른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이면서 튀김 냄새가 훅 끼쳤다.
“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정육랑은 입맛을 다시며 창을 붙잡고 까치발을 섰다. 왼쪽의 대나무 문발 뒤에 사람 두 명이 마주앉은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씨, 탕 떠 올게요.”
“아씨, 입맛에 맞으세요?”
방 안에서 어린 몸종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내는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 외에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바보는 말을 못하나 보다.”
정육랑이 고개를 돌리며 새로운 소식을 얻어 흥분이 되는 듯 몸종에게 속삭였다. 몸종은 겁이 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몸을 바들바들 떨며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아씨, 우리 얼른 가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아직 어떻게 생겼는지 못 봤단 말이야. 콧물은 얼마나 줄줄 흘리는지, 눈이랑 입이 비뚤게 달린 건 아닌지…….”
정육랑이 말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던 때였다. 커다란 두 눈이 정육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육랑은 으악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어린 몸종 역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놀라 함께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정육랑이 쓰러진 쪽을 쳐다보며 놀라 연거푸 비명을 지른 다음 정육랑을 필사적으로 잡아끌며 도망쳤다.
정교랑이 허둥지둥 멀리 도망치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아씨, 저게 누구죠?”
반근이 일어서며 놀라고 걱정되는 얼굴로 물었다. 정교랑은 굳은 표정이었다. 반근은 투덜거리다가 화로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 아차 하고는 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나도 누군지 모르겠어.”
정교랑이 그제야 대답했다. 말을 마친 정교랑도 조금 답답해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벌써 이리저리 한참을 생각했는데, 입으로는 이제야 내뱉는 것이다.
이 답답한 입아, 다음 생엔 차라리 나무 입으로 태어나라. 속 터져 죽겠다.
머릿속에서 말 한마디가 번뜩 스치더니, 정교랑은 극심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뼛속을 가르고 나오는 통증인 듯 두 귀가 웅웅 울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손을 뻗어 창턱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치는데, 손을 뻗기엔 이미 늦은 때였다.
찬합을 들고 흐뭇하게 들어오던 반근의 귀에 꽈당 소리가 들렸을 때, 정교랑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뒤였다. 찬합이 바닥에 떨어지며 나는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이어지면서 마침내 앞쪽 문가에 있던 여종들까지 주목하게 됐다.
* * *
대부인이 오고, 모셔왔던 의원은 방금 떠난 참이었다.
“별일 아니래요. 그냥 좀 놀란 거라 쉬시면 괜찮대요.”
여종이 말했다.
이부인은 얼굴이 누렇게 떴다. 겨우 하루 반나절 만에 눈가에 진 그늘을 가릴 수 없게 됐다.
“집에 멀쩡히 잘 있다가 갑자기 놀라다니요.”
이부인이 해명인 듯 질문인 듯 대부인에게 힘없이 물었다.
“자리가 낯설어 그렇겠지. 그런 애들은 머리가 꼭 태어난 지 몇 달 된 아기 같아. 아무것도 모르지.”
이부인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그러더니 또다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여종을 보고 말했다.
“동물 구경하듯 큰아씨를 구경하러 간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앞으로 또 그랬다가는 몽둥이찜질을 해서 팔아 버리겠다. 거리엔 구경거리가 널렸으니 실컷 볼 수 있을 게야.”
여종들은 몸을 움츠리고 두 손을 공손히 한 채 말없이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그 바보를 구경하러 가거나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떨어 벌어진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다.
여종들이 곧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그런 게 아니라고 떠들어대자, 이부인은 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대부인이 이부인을 보며 말하자 이부인은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자신도 자신이 왜 우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울고 싶었다.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뿐이었다.
“칠랑은 이제 법도를 배워야 하고 희는 아직 어린데, 이노야는 부임을 준비해야 하잖나. 우리 집은 딸 셋을 벌써 출가시켰고 육랑 하나 남았지. 집 안팎의 대소사는 자네 아주버님이 주관하셔서 난 한시름 놓았어. 그 모자란 아이는 일단 내가 맡음세.”
대부인이 생각 끝에 말하자 이부인이 일어나 예를 표하고 울먹이며 말했다.
“형님한테 폐를 끼칠 수야 없죠. 어쨌든 제가 할 일인데요.”
“됐네. 한 식구끼리 네 일 내 일이 어디 있어.”
대부인이 손을 뻗어 이부인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어쨌든 한 지붕 아래 살잖아. 행랑어멈한테 맡기면 잘할 거야. 다른 건 염려 말고 자네는 마음 잘 추슬러서 애들 훈육에 힘쓰도록 해. 그래야 이노야가 안심하고 부임지로 가시지. 우리 정씨 집안은 이노야 벼슬에 의지해 사는걸.”
이젠 더 이상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이부인은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마음속 근심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았다.
밖에서는 하녀들이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빨리 말해 봐, 어떻게 생겼디?”
여종들은 운 좋게 비명소리를 듣고 정교랑의 시중을 들러 갔던 여종 주위를 에워싸고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생김새는 돌아가신 선부인을 빼다 박았더라고.”
한 여종이 쯧쯧거리면서도 경탄을 담아 이야기했다. 나이 든 여종 몇 명은 주씨 부인의 고운 외모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니 안타깝지 뭐야. 가만히 서 있다 말고 갑자기 쓰러지다니.”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멍청하더라고. 아무리 봐도 넋이 나간 거 같아서 정신이 들었는데도 들었는지 모를 정도였어. 가져갔던 밥도 안 먹었던데, 혼자 밥 먹을 줄은 아나 모르겠네.”
이쪽에서 여종들이 탄식하는 동안 저쪽에서는 집안 낭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은 이렇게 크고…….”
정육랑이 말하며 얼굴에 손을 대고 커다랗게 그렸다. 앉아 있던 자매들이 놀라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 눈동자가 없어!”
정육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덧붙이고는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떴다. 여자아이들은 으악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다.
“너무 무섭다, 너무 무서워.”
“육랑, 다신 보러 가지 마. 바보는 사람도 막 때린대!”
정육랑이 약간 우쭐해하며 손을 양 허리에 대고 대답했다.
“난 겁 안 나. 난 오라버니가 있잖아. 날 때렸다간 오라버니한테 때리라고 시킬 거야.”
이방의 아들은 아직 젖먹이인 희 하나뿐이었지만, 대방은 아들이 셋이나 있었다. 여자아이에게 오라비의 보호는 부러운 일이었다. 친오라버니와 사촌 오라버니 사이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또각또각 나막신 소리가 울렸다. 정칠랑은 나막신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정육랑이 가장 아끼는 화조어문석에 자국을 남겼다.
“육랑, 그 바보가 이젠 네 언니야.”
정칠랑이 작은 둥글부채를 흔들며 두 어깨에 얇은 비단을 두른 채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씨는 모자라지 않아요.”
반근이 고개를 조아리고 급히 말했다. 앞에 있던 대부인이 손을 들어 반근의 말을 제지했다.
“난 칠랑 안 할래요, 칠랑 안 할 거예요.”
이쪽에서 정육랑이 앉으면서 앞쪽에 있는 쌍육 놀이판을 밀치는 바람에 촤락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 정육랑의 고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소란피우지 마라.”
대부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도 모친이 무섭기는 한지 정육랑은 입을 삐쭉거리며 더는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방 안이 좀 조용해지자 대부인은 한숨을 돌리고 옆에 있는 여종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씨가 올해 몇 살이지?”
“14살은 되셨어요.”
반근이 대답했다. 대부인이 불쾌한 기색으로 반근을 힐끔 보자, 여종도 불만의 눈길로 반근을 훑었다.
성격도 급해라,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부인께 아뢰옵니다. 단오를 지나면 14살이세요.”
여종이 말했다.
“넷째 아씨와 다섯째 아씨보다 반년 빠르시죠.”
대부인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때 앞뒤로 연이어 애가 들어섰지.”
당시 정씨 집안 이방의 주씨가 회임했다는 소식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씨는 남을 후히 대접하며 아이를 위해 복을 쌓는 한편 첩실들의 피임약까지 중단시켰다. 그래서 주씨가 임신하고 반년 후 이방의 두 첩실 역시 아이를 갖게 됐다.
그때 온 집안이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노태야께선 책까지 들춰가며 이름을 지었는데, 뜻밖에도…….
대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뻐했던 것만큼 낙담도 컸다. 다들 이방의 장녀를 정씨 가문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나이에 따라 순서를 매길 때에도 애써 잊었던 것이다.
“그 애 이름이…….”
대부인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물었다.
“교랑이에요, 교랑. 우리 아씨는 교랑이에요. 외가의 노마님께서 지어 주셨죠.”
반근이 기뻐하며 얼른 대답했다.
교랑이라.
대부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럼 그대로 교랑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사돈 노부인의 성의도 있으니 말이다.”
대부인의 말에 정육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됐다, 이름을 바꾸지 않아도 돼.
“대부인, 순서로 따지면 우리 아씨께서 넷째가 되시는데, 그럼 평상시에 호칭할 땐…….”
반근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정씨 집안의 아이인데 그 순서를 따르지 않으면 정씨 집안의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듣기에도 거슬렸다.
“교랑이라고 하라면 교랑이라고 할 것이지, 망할 것이 왜 말을 못 알아들어?”
정육랑이 소리쳤다. 반근은 자기 아씨보다 약간 어린 듯한 아씨가 대부인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 걸 보며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씨한테 누가 되는 일을 할 순 없었다. 반근은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다.
“바보한테 이름은 무슨!”
정육랑이 비웃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반근은 몸을 엎드린 채 주저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씨는 다 나으셨어요. 이제 모자란 분 아니에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정말이에요, 대부인. 우리 아씨는 정말 나으셨어요.”
반근이 얼른 말했다.
“말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낫길 뭘 나아!”
정육랑은 콧방귀를 뀌고 작은 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할 줄 아세요. 할 줄 아신다고요. 아씨도 말할 줄 아세요.”
반근이 얼른 대부인을 보며 말했다.
“대부인, 기억하시죠? 그때 대문 앞에서 우리 아씨가 아버지를 부르셨잖아요.”
대부인은 퍼뜩 기억이 떠올랐다. 대문의 등롱 아래에서 그 여자아이는 가리개를 들어 올려 예를 표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행동이 뻣뻣하고 목소리도 딱딱해서 줄을 연결한 인형 같았지만 말이다.
“네가 잘 가르쳤더구나. 앞으로도 네 아씨를 잘 가르치도록 해라.”
대부인이 담담히 말하며 반근을 힐끔 봤다.
“넌 주씨 집안 출신이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가로저었다.
“주씨 집안 노마님께서 소인을 사신 건 맞아요. 하지만 바로 아씨께 주셨으니 주씨 집안 사람이라고 할 순 없죠.”
그렇다고 우리 정씨 집안의 사람도 아닌데. 대부인은 길게 말하기 귀찮은 듯 나이 많은 여종을 쳐다봤다.
“그 집에서 지내게 하고 나이 많은 여종이랑 물청소할 몸종을 보내 줘라. 부엌일할 몸종도 보내고.”
여종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넌 물러가라. 가서…… 교랑의 시중을 잘 들고.”
대부인이 반근을 보며 말하자, 반근이 네 하고 대답하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아씨는 이제 모자라지 않으세요. 부인과 노야들께서도 한번 만나 보세요.”
만나 보기도 전부터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대부인은 응 하고는 잠시 있다가 곧 냉담하게 말했다.
“그 애는 몸이 안 좋으니 안 보는 게 좋겠다. 푹 쉬라고 해라.”
반근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여종이 짜증난다는 듯 반근을 노려보고는 먼저 일어섰다.
“가자.”
여종이 반근에게 일어서라고 재촉했다. 반근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물러났다.
“앞으로 주의해라. 다들 그 건물엔 절대 가지 마. 걸리는 날엔 도관으로 보내 버릴 줄 알아!”
대부인의 말이 방 안에서 들려오자 반근이 씩씩거렸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 어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정식으로 못 만나고, 그것도 모자라 자매들마저 접근 금지라니. 차라리 집 밖으로 격리를 시키시지.
“우리 아씨는 정말 모자란 분 아니에요.”
반근을 데리고 나온 여종은 말하기도 귀찮은 듯 눈을 들어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누굴 바보 취급하는 거야.
반근이 방으로 돌아오자 교랑은 창가 앞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씨?”
반근이 조용히 불렀다.
어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아씨는 빨리 깨어났고, 장애를 가진 상태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다만 말수가 더 적어졌을 뿐이다.
“차.”
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기뻐하며 네 하고 대답하고는 다른 한쪽에 있는 낮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차를 우려서 가져왔다.
교랑의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반근이 숟가락을 들고 떠먹여 주었다. 교랑은 한입 먹고 나더니 인상을 썼다.
“맛없어, 차가 아니야.”
교랑은 입을 다물고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아씨, 차는 다 이래요.”
반근이 말했다. 아씨의 입맛은 점점 까다로워졌다.
“아니야.”
교량이 단순명료하면서도 고집 있는 말투로 말했다. 반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교량은 보양에 힘쓰기 위해 자신의 약을 직접 지으면서, 차를 마시는 대신 끓인 물이나 황주만 마셨다. 이젠 약을 안 먹어도 되는데, 그래도 계속 끓인 물이나 술만 마셔야 하나?
“아씨, 정말이에요. 드시다 보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반근이 타일렀다. 예전엔 먹고 싶어도 못 먹었던 좋은 차였다.
교랑은 먹고 마시는 일에 조금도 타협이 없었다. 반근은 몇 마디 권하다가 포기하고 반쯤 남은 차를 바라보다가,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정말 궁극의 맛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교랑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단정히 앉아 있었다. 반근은 끓인 물 한 잔을 따라 올리면서 교랑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봤다.
창밖에는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꽃 넝쿨과 겹겹이 포개진 비취석이 있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연못도 반쯤 보였다. 넝쿨이 가리지만 않았어도 수려한 절경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절경이 뛰어나다고 한들 정교랑과 반근을 위해 남겨 두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아씨, 마음이 괴로우세요?”
반근은 요 며칠의 일을 떠올리고는 의기소침하게 물었다. 예전에 바보였을 땐 남들이 미워하고 싫어해도 지각을 못 했지만, 지금은 바보가 아니라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들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까.
“괴로워.”
교랑이 이번엔 빠르게 대답했다. 괴롭다는 말에 반근은 또다시 긴장했다.
“아씨,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 막 돌아왔으니 다들 낯설어서 그래요. 익숙해지면 괜찮겠죠. 아씨는 정씨 집안 딸이고 다들 아씨의 가족이잖아요.”
반근이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위로하는데도 교랑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보며 괴로움을 느낄 뿐이었다. 슬프고 괴로운 마음이 어제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왜 괴로운지 모르겠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