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60)

-어찌하나-

정씨 가문의 등불은 거의 밤새 켜져 있었다. 두 정씨 형제와 부인들이 전부 대노야의 방에 모였고, 여종이 정신을 깨우는 탕을 달여 가져왔다.

“잠들었느냐?”

대부인이 묻자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둘이 차례로 잠들었어요.”

“짐은 확인했고?”

대부인이 또다시 물었다.

“네. 별다른 건 없고 은자도 없었어요. 옷가지 몇 벌과 화로, 빈 찬합 외에 딴 건 없었습니다.”

여종이 대답했다.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네 사람은 약간 갸웃했다.

그 정도 물건만 가지고 병주에서 강주까지 왔다고? 교외에 있는 대불사에 분향하러 가려고만 해도 그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대부인이 손을 내젓자 여종들이 차례로 물러갔다.

“집을 떠난 지 하도 오래돼서 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잘 안 나네요.”

대부인이 이노야를 보며 말했다.

“안 그래요?”

주씨와 혼인 후 2년이 되도록 태기가 없어 온 집안이 초조해하던 중 주씨가 간신히 회임을 했다. 딸이긴 했지만 온 집안이 기뻐했다. 그때만 해도 생전에 있던 노태야가 직접 이름까지 지어 주었지만 여섯 달이 채 못 되어 문제가 드러났다.

“다른 아이는 눈동자가 사람을 따라가는데, 아기씨는 멍하니 계셨어요. 다른 아이는 다 앉을 줄 알 때에도 아기씨는 못하셨고 뒤집기만 간신히 하셨죠. 허약하게 태어나셨나 보다 하고 먹는 것에 더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문제는 점점 늘어났어요. 멍한 눈빛으로 침을 흘리며 말도 못 하셨죠. 그러다 돌이 되었을 때 결국 지적 장애를 가졌다는 확진을 받았고요.”

유모가 자리에 앉아 그때 일을 나지막이 고했다. 정칠랑은 연자줏빛 옷을 입고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아직 8살인데도 상당한 미모의 호감형이었다.

“모자라단 말이야?”

정칠랑의 말에 유모가 얼른 쉿 하는 동작을 취했다.

“아이고, 아씨. 목소리 좀 줄이세요.”

“싫어.”

정칠랑은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옆에 있던 베개를 던져 버렸다.

“바보 언니라니,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봐!”

방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밖에서 당직을 서던 몸종들은 몸을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응석받이로 자란 정칠랑은 성격이 제멋대로였다. 성깔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렸다.

한편 이노야도 심기가 불편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다 보니 마구 성질을 부릴 수 없을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때 저 애 어미가 죽은 후로 곧장 도관에 보내 버렸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애 아버지는 넌데, 네가 못 알아보면 우리가 알아보란 말이냐?”

대노야가 무거운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그럼 되겠네요.”

이노야가 말했다. 열 받은 대노야가 또다시 일어나 보검을 뽑으려 하자 대부인이 얼른 말렸다.

“그때 도사가 식구들한테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6~7살 때 보냈는데 그 사이에 얼마나 달라졌겠어요. 곁에 두고 키운 게 아니면 못 알아보죠.”

대부인이 말했다. 여자는 자라면서 여러 번 바뀐다고 하지 않는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잠시 침묵했다.

“그런데 저 둘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래요?”

이부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때 주씨 가문 노부인이 목돈을 남겨 줬거든. 그걸 도관에 묻었는데 도관이 재앙을 입자 반근이 그걸 꺼내서 마차와 마부를 샀나 봐. 모자란 애 하나랑 어린 몸종 하나니 오는 길에 속이려 드는 사람이 없었겠어? 구슬려 삶는 통에 돈을 다 뜯겼겠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밖이 조용해지자 반근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어갔다. 대나무 문발 저쪽의 정교랑은 몸을 옆으로 누운 채 숨소리조차 안 내고 있었다.

“아씨.”

반근이 나지막이 부르며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노마님이 우리한테 돈 남겨 주신 거 없잖아요. 아씨께서 병을 치료할 줄 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정교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근은 정교랑이 잠든 줄 알고 다시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정교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근이 반색을 하며 몸을 돌렸다.

“아씨, 아씨도 안 주무셨네요. 잠이 안 오시죠?”

반색은 소리를 낮춰 물었지만 기쁨을 억누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우리, 집으로 왔어요.”

정교랑이 웃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웃을 뿐 입가의 움직임은 아주 미미했고, 밤이다 보니 더더욱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

정교랑이 대답했다.

“아, 아씨. 얼른 주무세요. 내일 아주 많은 사람을 보게 될 거예요.”

반근이 소리를 죽여 말하자 정교랑은 응 하고 대꾸한 후 눈을 감았다.

창을 통해 밤바람이 들어왔다. 조용한 밤이었지만 사람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안에 있는 둘에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반근이 이번엔 금세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편안히 잠자리에 든 것이다. 정교랑은 반근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누우려고 했지만 몇 번 시도해 보다가 결국 포기해야 했다.

집에 왔다니. 여기가 정말 집인가? 정교랑은 눈을 감고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정씨 가문 네 사람의 논의도 일단락을 짓게 됐다. 말을 하려고 해도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오늘 밤 당장 병주 주씨 집안으로 사람을 보내 물어 봐라.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물어봐.”

대노야가 손을 내저으며 결정을 내렸다.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온 이노야 부부는 각자 씻고, 이노야가 서재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이부인이 막아섰다.

“소첩이 잘못했어요.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소란을 피웠네요.”

이부인이 몸을 낮춰 남편에게 직접 차를 올리며 고개를 숙이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가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노야도 한층 표정이 누그러져 응 하고 대꾸했다. 차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재로 가지도 않았다.

이부인이 다가와 손을 뻗어 남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이낭, 나도 사리는 아는 사람이에요. 정이 깊어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지금껏 내가 언제 시샘하고 질투한 적 있어요? 밖에서 오밤중에 사람이 찾아왔다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겁도 났지 뭐예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약점이라도 잡히면 어쩌나 하고요. 이낭, 우리 모자는 당신이랑 한 몸이에요.”

이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노야를 보며 말했다.

이노야가 상처한 후 맞이한 후처는 동평주 팽씨 가문의 낭자로 이노야보다 6살 어렸고 이제 막 아들을 얻은 상태였다. 매혹적이고 우아한 자태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인데, 이런 말까지 해 가며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이노야의 노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신도 참. 화낼 만도 하지. 당신 눈엔 내가 그리 방탕한 사람이오?”

이노야는 자리에 앉으며 차를 받았다. 두 부부가 마침내 화해를 하고 다정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오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부인이 말했다.

“모자란 아이니 골치 아파질 것도 없소. 먹여 주고 재워 주면 됐지.”

이노야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하품을 했다. 취기가 올라와 잠이 쏟아졌다. 이부인이 잠깐 망설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바보의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다른 일이 떠오른 것이다.

“이낭, 그런데 아까 대노야랑 얘기할 때 말이에요. 녹랑, 십삼랑 어쩌고 하던데 그게 다 누구예요?”

옷을 벗고 침상에 눕던 이노야가 움찔했다.

방금 전 소동을 벌이면서 예전에 밖에서 만나던 여인들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형님한테 이미 관계를 끊었다고 말했던 건데, 울고불고하던 이부인이 그걸 듣고 기억하다니!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다. 그 애가 오밤중에 뜬금없이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사달이 벌어졌겠는가!

바보 따위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어? 아니지! 저 바보가 오자마자 집안에 성가신 일이 줄줄이 벌어졌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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