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녀(嫡長女)-
반근은 자신이 두드린 문의 안쪽에서 윗전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일을 몰랐다. 반근과 정교랑이 문 앞에 서 있는데도 들어오라는 소리조차 없었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주위 노복들의 눈빛도 이상했다. 뭘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피하는 눈치였다. 반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들 이러지?”
반근이 약간 긴장하며 정교랑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우릴 보는 눈빛이 좀 이상하죠?”
정교랑이 마당 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들이 네 말을 오해했구나.”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이해를 못 했다. 방금 전 반근은 문지기에게 이노야를 찾아왔다며 병주에서 온 친척이라고 했다.
“그 말이 오해할 게 뭐가 있죠?”
반근은 이해할 수 없어 하며 묻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씨가 오해라고 했으면 오해가 틀림없지. 그러자 반근은 조금 불안해졌다.
“무슨 오해를 한 건데요? 아씨께서 진작 저한테 주의 좀 주시죠.”
입이 머리를 못 따라가다 보니 정교랑은 침묵을 지켰다.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을 짓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정교랑은 마당 안을 쳐다봤다. 나이 많은 여종 네다섯이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왔다. 반근은 그 모습을 보고 흥분하며 얼른 다가가 맞이했다.
“아주머니들, 이노야께서…….”
반근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종 둘이 급히 반근을 에워쌌다.
“이노야께선 댁에 안 계십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어디 가서 하루 묵었다가 내일 다시 오세요.”
여종들은 좌우에서 반근을 막아섰다. 반근은 깜짝 놀랐다.
“왜 이래요?”
반근이 소리치며 막 입을 열자 더러운 헝겊 조각이 입으로 쑤셔 넣어졌다. 반근은 멍해졌다.
“오해하셨어요.”
반근이 울며 소리쳤다. 역시 아씨의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난 이노야의 딸이다.”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 쪽으로 걸어오던 두 여종은 멈칫했다.
뭐라고?
* * *
방 안에서는 이부인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고 있었고, 이노야는 방금 전 실랑이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났지만, 그렇다고 이런 때에 몸종을 불러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름간 사당에서 지내며 반성해라. 바깥출입은 금지다!”
대노야가 서슬 퍼런 얼굴로 호통을 쳤다.
“아직 젊은 나이고 그 자리에 있다 보면 접대도 피할 수 없잖아. 노느라 만난 여인들이지. 그런 일로 마음 쓰면 안 돼.”
대부인이 이부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지막이 위로했다. 이부인도 일을 더 키우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눈물을 닦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래. 이 얘긴 그만하자고. 사람이야 쫓아버리면 그만이지. 없었던 일로 해.”
대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노야를 바라봤다.
“이노야, 다시는 이런 황당한 일 만들지 마세요. 본인 생각은 안 하더라도 아들 생각은 하셔야죠.”
이노야의 얼굴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난처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밖에서 두 여종이 급히 들어와 예를 표하고 말했다.
“노야, 부인.”
“잘 처리했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아니요.”
여종은 대답하면서 이노야를 힐끔 보며 주저했다.
“말로 해서 안 들으면 입을 막아서라도 끌어내야지. 일한 게 몇 년인데 이런 일 하나를 제대로 못 해?”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여종은 당황하며 알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이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노야의 따님이라고 하세요.”
그 말에 평온을 되찾았던 이부인이 벌떡 일어섰다.
“정이낭, 여인이랑 애까지 낳았어요? 해도 나무하네요!”
이부인이 소리치며 이노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엔 대부인이 잽싸게 손을 뻗으며 막았지만, 기우뚱하며 하마터면 같이 쓰러질 뻔했다.
여종들이 얼른 나서서 부축했다. 방 안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 * *
반근은 정교랑 옆에 서서 잔뜩 경계 중인 여종들을 쳐다봤다.
“이제 오해가 풀린 거죠?”
반근이 정교랑에게 소리 낮춰 묻자 정교랑이 대답했다.
“말을 전하는 사람이 제대로 전하지 않거나 듣는 사람이 제대로 안 들을까 걱정이지.”
병주에 정씨 집안의 딸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이 집에 있으려나?
정교랑은 마당을 쳐다봤다. 높은 가림벽이 시선을 막아 그 안에 있는 저택이 어떤 모습인지는 볼 수 없었다.
“아니라고!”
이노야가 분노로 소리치며 이부인을 밀쳐냈다. 바닥에 쓰러진 이부인은 대부인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대노야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벽에 걸려 있던 보검을 뽑아 들었다. 여종들은 화들짝 놀라 급히 무릎을 꿇으며 대노야를 말렸다. 대부인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말리느라 발바닥에 불이 났다.
“누가 날 음해하는 건지 내가 직접 가 보지!”
격분한 이노야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어딜 보러 가. 그랬다간 이 집에 발도 들일 생각 마라!”
대노야가 목소리를 떨며 호통쳤다. 이노야는 못 들은 듯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아주버님, 형님. 얼른 보려고 뛰어 나가는 것 좀 보세요.”
이부인이 울며 말했다. 대부인이 급히 일어섰다. 여인을 보러 갔다간 정말 시시비비를 가리기 힘들어질 것 같다.
“걱정 말게. 내가 있는 한 남을 우리 집에 들이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누구라도 안 돼!”
말을 마친 대부인은 이부인을 더 위로할 새도 없이 급히 뒤쫓아나갔다.
* * *
이노야가 문 앞으로 왔다. 멀리 등롱 아래에 두 여인이 서 있고 여종 몇 명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정말 찾아온 이가 있단 말인가?
이노야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자신이 방탕하긴 해도 밖에서 아이를 낳은 기억은 없는데? 언제 실수를 했나? 실수를 했다 한들 죽어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아마 저쪽도 증거가 없긴 마찬가지일 터. 그게 아니라면 지금에서야 찾아왔을 리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노야의 발걸음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노야는 굳은 얼굴로 기세등등하게 걸어갔다.
“노야께서 오시네요!”
반근이 한눈에 알아보고 기뻐하며 소리쳤다. 정교랑도 진작 이노야를 발견한 터였다.
이노야는 서른 남짓한 사내로 호리호리한 체형에 보통 키였다. 가까이 다가오자 희고 깨끗하며 각진 얼굴이 보였다. 잘생기진 않았어도 못생긴 얼굴 역시 아니었다. 이노야의 뒤로 대부인이 급히 따라왔다.
“너희는 무슨…….”
이노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반갑게 앞으로 나섰다.
“노야, 저 반근이에요.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왔어요.”
이노야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반근? 누구지?
“아씨, 아씨. 이쪽이 아버지세요. 아씨의 아버지요.”
반근이 다시 정교랑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기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해서 왈칵 눈물이 나왔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누가 아버지란 말이냐!”
이노야가 소리쳤다.
“어디서 온 여인들이오? 사람을 잘못 찾아왔나 본데.”
대부인 역시 앞으로 나서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반근은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손을 뻗어 가리개를 벗었다.
“아버지.”
정교랑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이 여인의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긴 한데.
이노야와 대부인은 멈칫했다.
“누구라고? 왜 멋대로 아버지라고 불러?”
이노야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노야, 잊으셨나 봐요. 도관에 가 있으면 우릴 데리러 온다고 하셨잖아요. 도관이 벼락을 맞아 불이 나는 바람에 저랑 아씨가 직접 길을 나선 거예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우르르 꽝! 밤하늘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이노야와 대부인은 갑자기 퍼뜩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멋대로 아버지라고 부른 게 아니었어! 진짜 딸이었구나!
* * *
대노야도 멈칫했다.
“그, 모자란 아이?”
대노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네, 대노야. 병주 도관에 보냈던 큰아씨께서 돌아오셨어요.”
여종이 말했다. 대노야는 탁자 위에 보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애구나.”
대노야가 읊조리며 한숨을 쉬더니 또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도 왔느냐?”
여종은 순간 경황이 없어 주씨 가문 사람이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부인이 생각해 냈다. 주씨 일가는 이노야의 예전 부인의 친정이었다. 이부인이 시집오기 전, 굴욕적이지만 손윗사람 신분의 주씨 가문 사람을 만난 적 있었다. 친정의 세력이 아니었다면 이부인 자신도 주씨의 위패 앞에 차를 올렸어야 했을 터였다.
이부인은 눈물을 그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쥐었다.
그 딸이로구나.
정씨 가문 이방의 적장녀가 돌아온 것이다.
“뭐? 적장녀?”
내당 깊은 곳에서 머리를 풀고 누워 있던 정칠랑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한테 언니가 생겼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정칠랑의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붉게 물들인 손톱 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내가 이방의 장녀가 아니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