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北程)-
나귀 마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정교랑이 강주성에 도착했을 무렵, 성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반근이 정씨 집안을 들먹인 후에야 위병들은 반신반의하며 통과시켜 주었다.
강주성 내에는 성을 가로지르는 강이 있었다. 그 강은 과거 물난리가 났을 때 정씨 온 집안이 나서서 뚫은 물길이었다. 그 후로는 홍수가 나도 강주성의 물길이 둘로 나뉜 탓에 더 이상 물난리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고, 조정에서는 정씨 집안의 의로운 행동을 높이 사며 비석과 패방(牌坊)을 세워 줬을 뿐 아니라 강 서쪽의 3분의 1을 정씨 집안 소유로 해 주었다. 그 일로 정씨 가문은 속칭 서하 정씨로 불리었다.
정씨 일족은 이곳에 거주한 후 세 개의 궁형(弓形) 모양 교각을 중심으로 둘로 나뉘게 되었다. 교각의 남쪽에 사는 이들을 남정, 교각의 북쪽에 사는 이들을 북정이라 했는데, 두 정씨의 혈연관계는 이미 3대 이상을 건너게 되었다.
북정은 분가하지 않으면 재산을 나누지 말라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지금껏 가산을 지켜왔지만, 남정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뒤섞여 사는 상태여서 북쪽은 부귀하고 남쪽은 그에 의탁해 사는 처지였다.
정교랑의 부친이 바로 북정에 있는 현재 종가의 이노야였다. 성문에서 반근이 북정의 집안사람임을 밝혔을 때 위병들이 신속히 통과시켜 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남정이었다면 그리 신속하진 않았을 터였다.
이제 강물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맹렬한 기세로 범람하지 않았다. 여름철에도 수위가 얕아 배조차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밤이면 강가에 수양버들이 드리워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경관을 보기에는 좋았다.
강 건너편에 서서 높디높은 청색 담장을 보며 반근이 흥분하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씨,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정교랑은 흰 기와가 있는 그 청색 담장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검은 기와의 지붕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 딱 봐도 최소 다섯 채 깊이는 되어 보였다. 웅장한 패방은 이쪽에서도 보였는데, 밤이라 글씨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저쪽이 정문이에요.”
반근이 정교랑을 인도해 다리를 건너며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노마님을 따라 두 번 와 봤어요. 아씨께선 3살 때까지 집에서 자라셨고요.”
3살까지 집에서 자랐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지적 장애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데.
정교랑은 반근의 손에 손을 올려 짚고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정씨 집안의 땅이다 보니 괜히 길가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가 근처에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정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남녀노소 다양하게 있었다. 어린애들은 장난을 치며 놀고, 여인들은 강가에서 빨래를 하며 조잘조잘 웃고 떠드느라 왁자지껄했다.
정교랑과 반근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특히 밤인데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 가리개를 드리운 여인의 모습이 보이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여긴 전부 남정 사람들이에요. 대부분은 일족의 보살핌 덕분에 살아가죠.”
반근이 나지막이 말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리를 건너 북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밤중에 두 여인이 뭘 하려는 거지? 정씨 집안 안식구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손님? 여인 둘이 오밤중에 손님으로 온다고?
이쪽에서 더위를 식히며 쉬고 있던 사람들은 곧 의론이 분분해졌다.
정씨 집안의 대문은 물론 닫혀 있었다. 크고 붉은 등롱이 비추는 ‘적선지가(積善之家: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의 편액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과거 조정에서 하사한 편액이었다. 이 대문은 평상시에도 열려 있는 일이 없었다.
반근이 정교랑을 데리고 서쪽의 두 번째 문 근처로 갔다. 이곳은 정씨 일가 사람들이 평상시에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씨.”
반근이 손을 들며 뒤에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등불 아래에 선 정교랑의 옷이 나부꼈다.
“두드려.”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흥분된 마음으로 정씨 집안의 문을 두드렸다.
대부인은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내일 길을 떠나야 해서 몸종들과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이 옷은 너무 화려해. 자줏빛 갈색 옷으로 가져와라.”
대부인이 말하자 커다란 옷궤 근처에 있던 몸종이 그 말에 얼른 옷을 꺼냈다. 대부인은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드는 듯 답답해했다. 그러더니 결국 박달나무 색상의 옷을 골랐다.
“아무래도 이게 낫겠구나. 눈에 띄게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칙칙해 보이지도 않아.”
대부인이 말했다. 밖에서 몸종 하나가 급히 들어와 말했다.
“대부인, 집사가 왔습니다.”
집사? 대부인은 멈칫했다. 이 늦은 시각에 내외하지도 않고 집사가 오밤중에 여길 오다니?
“대노야는 쉬시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대노야는 오늘 날짜에 맞춰 첩실 방으로 들었을 터였다.
“집사가 대부인께 먼저 허락을 받을 일이 있대요.”
몸종이 말했다. 대부인도 이제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시어머니는 이미 연로하여 집안일은 거의 대부인에게 넘겨 준 후였다. 그렇다면 내키지 않아도 피할 수 없는 법.
“들라 해라.”
정 대부인이 말했다. 몸종의 시중을 받으며 객청으로 나가자, 집사가 얼른 예를 표했다. 집사는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대부인이 물었다.
“밖에 여인이 왔습니다.”
집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대부인은 가볍게 부채질을 하며 꿈틀하는 눈빛을 가렸다.
뒤에 있던 나이 많은 여종이 눈치 있게 얼른 손을 내저으며 몸종 몇 명의 자리를 물렸다. 이제 측근 두 사람만 남아 시중을 들게 됐다.
“이노야를 찾아왔답니다.”
집사가 말을 이었다. 대부인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자기 집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노야도 한 집안이기는 하나 그래도 엄연히 달랐다.
“이노야께서 돌아오신 지 반년도 안 됐는데.”
대부인이 말하며 손잡이 달린 부채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병주에서 왔답니다.”
집사가 얼른 말했다. 대부인은 탁자 위에 부채를 탁 내려놓았다.
곧 대노야가 불려왔는데, 문에 들어서는 모습부터 심기 불편해 보였다. 첩실과의 다정다감한 시간을 질투한 아내가 고의로 불렀다고 여기다가, 집사까지 와 있는 걸 보고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던 것이 집사의 말을 듣더니 순식간에 안색이 변했다.
“황당하군! 내쫓아 버려!”
대노야가 소리쳤다.
“대노야, 병주에서부터 왔다니 일단 이노야한테 물어보세요.”
대부인이 말했다.
“뭘 물어본단 말이오? 이렇게 황당한 일을 아우한테 맡길 순 없어!”
맏형이자 일족을 이끄는 대표로서 대노야는 노발대발했다. 대부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대노야를 설득하는 한편 사람을 시켜 이노야를 모셔오게 했다.
“이부인은 모르게 하고.”
대부인이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심부름을 갔던 여종은 이노야께서 아직 집에 안 돌아오셨다며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중이라고 했다.
“이부인께서 급한 일이면 사람을 보내 모셔 오겠다고 하셨어요.”
여종이 덧붙였다. 대노야는 그 말에 속이 터졌다.
“종일 술만 퍼마시다니, 체통을 지켜야지!”
대노야가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데려와라!”
대부인은 다른 곳으로 생각이 미쳤다.
“그 여인은 어디 있느냐?”
“아직 문 앞에 있습니다.”
대부인이 묻자 집사가 대답했다.
“문에 세워 두지 마라. 소란스러워지면 곤란해. 우선, 이리 데려와라. 좀 보자.”
대부인이 말했다.
“안 되오. 안으로 들일 생각 말고 나가서 보시오.”
집사는 어느 쪽 말을 들어야 할지 난처해졌다. 문 밖에서 몸종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인께서 오시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흠칫 놀랐고,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발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24~25살쯤 된 부인이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이 총명해 보이는 여인이 우선 대노야 내외를 향해 예를 올렸다.
“조정 일이 끝나 동료들과 한잔하시나 봐요.”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남편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온 것이다. 대노야는 그 말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이리 현숙하고 온화한 부인을 집에 두고 밖에서 무슨 황당한 일을 벌이고 다닌 게야.
“그래, 별일 아닐세.”
대부인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그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구먼. 어서 가 봐. 희는 벌써 잠들었겠네. 자네도 어서 가서 쉬게.”
이부인이 새해 직전 적장자를 낳으면서 이방도 마침내 한숨을 돌리게 됐다. 이부인은 웃으면서 그 말에 대꾸하지도 그렇다고 물러가지도 않았다. 방 안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형님, 여기까지 왔는데 숨기지 마세요. 다들 아는데 저만 모르니 낯을 못 들겠네요.”
이부인이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미 목메어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한 집에 살면서 집안에 일어나는 일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대노야와 대부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청랑, 서두를 거 없어. 아직 확실히 물어본 게 아니니 괜한 생각 말아.”
대부인은 하는 수 없이 이부인을 잡아끌며 나지막이 위로했다. 둘이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문 밖에서 돌아온 이노야의 소리가 들렸다.
“형님, 절 찾으셨다고요?”
사람도 들어오기 전에 목소리부터 전해졌다.
진청색 도포를 입은 이노야는 술 냄새와 함께 웃으며 들어왔다가, 방 안에 사람이 여럿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다들 계셨네요. 무슨 좋은 일입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내가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 일이라뇨? 정동, 정이낭, 아주 좋은 일을 벌이셨나 봐요!”
이부인이 이노야에게 덤벼들었다. 이노야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는 바람에 얼굴에 붉은 손톱자국을 남기게 됐다.
늘 온화하고 상냥하던 이부인이 이렇게 화끈하게 손을 쓸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정신을 차린 대부인은 얼른 이부인을 잡아끌었고, 대노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밖에 있던 나이 많은 여종들은 얼른 어린 몸종들이 자리를 피하도록 했다. 오밤중에 찾아오는 손님 치고 좋은 일이 없는 법이다.
나이 많은 여종들은 이날 정교랑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서 일어난 소동을 몇 년 후까지도 기억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