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60)

-빗길-

천둥번개가 지나가고 콩알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대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러더니 곧 자욱한 물안개가 꼈다.

길가의 삼신 사당(娘娘廟)에는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가뜩이나 비좁던 건물이 한층 소란스러워졌다. 사람은 많고 건물은 좁다 보니 처마 아래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방으로 튀는 빗방울이 머리와 몸을 적시자 거친 말을 하며 밀고 밀치다가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복이 많은 편이었다.

화로에 불을 피우는 이도 있었다. 사방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술을 데울 때 쓰는 작은 벽돌 화로였다. 무명 적삼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조심스레 술을 데웠다. 술 냄새가 퍼지자 사람들이 쳐다봤다.

“좋은 술이로군.”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술을 데우는 소녀는 이런 행동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녀는 술 주전자를 들더니, 이번에는 작은 철 쟁반 화로 위에 올려놨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함에서 간식을 4개 꺼내 쟁반 위에 올려 둔 다음 술 주전자를 들고 불상 근처로 갔다.

사람들은 그곳에 나귀 마차가 한 대 세워져 있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역시 여기 들어온 사람은 복이 많다니까. 나귀마저도 비를 피하고 있다니.

“아씨, 황주를 데워 왔어요.”

소녀가 말하면서 술을 한 잔 따랐다.

마차의 휘장이 살짝 들리더니 손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넓은 소매 아래로 손가락 끝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술잔을 받아 들고 휘장을 내렸다.

소녀가 몸을 돌렸다. 이쪽의 화로 위에 올려놓은 간식에서도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못 참고 입을 열면서 철 쟁반 위에 있는 약간 누르스름하면서도 속이 붉은 춘권을 바라봤다. 모양새만으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

불탁 근처에 앉아 있던 4~5살쯤 된 여자아이가 못 참고 소리쳤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고 있는 아이는 그 작은 철 쟁반에서 초롱초롱한 눈을 잠시도 떼지 못했다.

여자아이가 기대고 있는 사람은 일흔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갈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가 칭얼대자 노인은 그 마음을 알겠는 듯 난처해하면서 아이를 안아 주었다.

“단랑, 집에 가서 네 아버지를 보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하고 싶으냐?”

노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으며 여자아이의 주의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음식을 앞에 둔 꼬마를 유혹할 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기대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소녀는 이미 춘권 4개를 작은 접시에 담아 나귀 마차에 탄 사람에게 건네고 있었다. 이번엔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이 손을 뻗어 하나만 집었다.

“반근, 저 꼬마 먹게 갖다 줘.”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뻣뻣한 목소리였다. 반근이라고 불린 소녀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몸을 돌리더니 접시를 여자아이 앞으로 가져왔다.

방금 여인의 말소리에 노인은 이미 일어서 있었다.

“아니, 미안해서 어쩌죠.”

노인이 미안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반근은 이미 접시를 여자아이에게 넘긴 후였다. 소녀는 먹고 싶으면서도 할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듯 보였다.

“어르신, 어려워하지 마세요. 같이 길을 떠나는 길동무니 이것도 인연이죠.”

반근이 웃으며 손을 뻗어 여자아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노인이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그 여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반근, 어르신께 황주 한 잔 올려.”

“미안해서 안 돼요.”

노인이 얼른 말했다. 반근은 자신의 윗전 말만 듣는 듯 직접 술을 따라 건넸다.

가벼운 대접을 거듭 사양하면 오히려 옹색해 보이는 법이다. 노인은 웃으며 술잔을 받아 단숨에 털어 넣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긴 해도 황주를 마시는 일은 드물었다. 한입에 들이켜니 온몸의 혈이 확 통하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등 부위의 은근한 통증도 한결 줄어든 것 같았다.

노인은 술잔을 돌려주며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여자아이도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은 후 접시에 있던 춘권을 냠냠 먹기 시작했다.

“언니, 정말 맛있어요. 이거 이름이 뭐예요?”

여자아이가 물었다.

“팥 춘권이야.”

반근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린 낭자가 솜씨도 좋구려.”

노인이 칭찬을 했다. 꼬마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이든 자신마저도 먹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반근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규방의 여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열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것은 아니었다. 음식도 여자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기에 간식을 만들 줄 아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소녀는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이 간식을 가르쳐 준 낭자가 석 달 전만 해도 말조차 할 줄 모를 정도의 장애를 안고 있었다는 걸 노인이 안다면,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마 더 놀라워하겠지.

“역시 똑똑한 낭자로군.”

노인은 자연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 나귀 마차를 힐끔 쳐다봤다.

“아까 전에도 낭자가 큰비가 쏟아질 거라며 묘당에서 쉬어 가라고 말해 주지 않았으면, 우리 손녀와 난 길을 재촉하다가 비를 쫄딱 맞았을 거요. 정말 고맙소.”

반근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답례하고, 남은 간식거리를 전부 여자아이에게 준 다음 몸을 돌려 식기들을 정리하러 갔다.

대화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큰비가 내릴 걸 저 낭자가 먼저 알아서 미리 이곳으로 와 비를 피했다고? 언제 비가 내릴지 아는 사람도 있나? 더구나 방금 비가 내리기 전엔 날씨가 맑아 비가 올 기미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의론이 분분해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이쪽 나귀 마차에 있는 주인과 몸종을 흘끔거리는 눈길에도 놀라움이 더해졌다.

듣자니 별자리의 모양을 보고 과거와 미래를 아는 사람도 있다던데, 저 작은 나귀 마차에 탄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낭자가 바로 그런 사람인가?

거친 사내 하나가 궁금증을 못 참고 까치발을 든 채 고개를 길게 빼며 이쪽을 쳐다봤다.

“거 낭자는 비가 내릴지 어떻게 아셨소? 신선이 알려 주기라도 했소이까?”

묘당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밖으로 전해지면서 밖에 있던 사람들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금세 번져나갔다.

반근은 부아가 치밀었다. 모두가 낭자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웃음소리가 그치고 다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을 무렵, 마차 안에서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선이 아니라 하늘이 가르쳐 준 겁니다.”

그 말에 조용해졌던 묘당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여인의 목소리는 뻣뻣했지만 몹시 엄숙하게 들렸다. 말투가 전혀 농담 같지는 않았는데, 이 여인은 혹시 농담을 이런 식으로 하나?

거친 사내가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어이, 낭자. 하늘이 언제 비가 그칠지도 알려 줍디까?”

묘당 안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자들의 언사가 무례하긴 하지만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니, 낭자도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오.”

노인이 여자아이를 안고 나귀 마차 옆에서 말했다.

윗전과 몸종의 말투부터 먹고 앉는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평민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런 귀한 분들이 놀림거리가 되다니 필시 불쾌한 마음이 들 터, 더구나 여인 둘뿐이니 분을 못 참을 것 같았다.

노인은 좋은 뜻에서 따스한 말을 건넸다. 반근은 열이 받았지만 대꾸할 수 없었다. 아씨가 말을 삼가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웃음소리가 또다시 잦아들었다.

“하늘이 말하기를 곧 그친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또다시 전해졌다.

이 낭자가 정말 작정하고 농담을 하는 건가. 웃음소리가 그치자마자 또다시 사람을 웃기려 들다니. 다들 웃고 있을 때 말했으면 이 정도의 파급 효과는 없었을 텐데.

묘당은 또다시 전에 없이 소란스러워졌다. 비를 피하는 일로 아웅다웅하던 사람들도 마음이 누그러져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러더니 웃음소리가 갑자기 밖에서부터 뚝 그쳤다.

“앗, 비가 그쳤어!”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소리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곧 묘당 안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눌러 버렸다. 모두가 일제히 밖을 바라봤다.

억수 같이 내리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바뀌어 있었다. 모두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때, 날이 활짝 갰다.

기이할 정도의 적막이 지나가고, 묘당 안은 또다시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추자, 텅 비어 있던 도로는 땅 밑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사람들이 불어나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다.

낡은 묘당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은 웃으며 헤어졌지만, 오늘 본 광경은 며칠 동안 화제로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경성 태사국에 있는 상공들은 비바람을 정확히 예측한다던데.”

“그 낭자도 상공들처럼 대단한 분인가?”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낡은 묘당에는 반근과 낭자, 노인과 여자아이만 남았다. 반근은 진작 짐 정리를 마친 상태였고, 마부는 짐을 실으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인 역시 여자아이를 등에 업고 문을 나섰다.

“낭자는 비바람을 부를 줄 아네요!”

어린 여자아이는 반나절 동안 어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래도 맛있는 간식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나귀 마차 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게 됐다.

우리 아씨는 선인의 계시를 받은 거라고. 반근은 약간 우쭐해하며 싱긋 웃었다.

“아니란다. 하늘을 보는 거지.”

마차 안에서 또다시 말소리가 들리더니 휘장이 반쯤 걷혔다.

이때 이들은 이미 묘당의 입구까지 와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걷어 올린 휘장으로 약간 그늘이 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차 안에 탄 여인의 모습은 보였다. 소녀였다.

저렇게 어리다니! 노인은 흠칫 놀랐다. 젊다는 말도 안 어울릴 정도였다. 겨우 13~14살쯤 됐으려나.

“아침에 길을 나서는데 솜구름이 있었거든.”

정 낭자가 할아버지 등에 업혀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여자아이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노인은 알아들었다. 구름을 보며 비를 예측하고 비를 보며 맑은 날씨를 예측한 것이다.

“낭자는 참으로 박학다식하시오, 참으로 박학다식하셔.”

노인이 거듭 칭찬했다. 정 낭자는 안에서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하며 노인을 바라봤다.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정 낭자가 갑자기 말했다. 정 낭자 일행보다 앞서 출발하던 노인은 그 말에 멈칫했다.

“낭자, 병도 볼 줄 아시오?”

“약간요.”

정 낭자가 대답했다. 살짝 구부정한 노인의 등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다른 사람의 눈엔 그저 노인이 여자아이를 업고 있는 탓에 등을 살짝 구부리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알고요?”

노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웃으며 묻자 정 낭자는 도리어 말을 아꼈다.

“몰라요.”

정 낭자의 대답에 노인은 또다시 멈칫했다.

“하지만 내가 치료할 수 있어요.”

정 낭자가 말했다.

“어떻게 치료한단 거요?”

노인은 웃으며 물었지만 이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우리 아씨한테 병을 고치려면 진료비를 먼저 내야 해요.”

반근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 말에 노인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낭자, 고마웠소. 어린애를 업고 가려니 힘에 부쳐서 이 늙은이는 먼저 갑니다.”

노인은 말을 끊으며 고개를 까딱해 인사하고, 먼저 묘당 문을 나서서 길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부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아씨, 이런 식이면 장사가 안 됩니다. 뭐 하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슨 병인지 모른다니요. 모른다 해도 고칠 수 있는 병이면 병명이야 아무렇게나 지어내도 되잖습니까.”

반근이 불쾌한 듯 마부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장사하는 거 아니거든요?”

마부가 입을 삐죽대며 투덜거렸다.

“장사하는 게 아니면 진료비는 왜 달라고 하시나?”

“그야 돈이 필요하니까요…….”

반근은 야유하는 듯한 마부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서둘러 출발이나 하죠. 해가 지기 전에 저 앞의 성엔 들어가야 묵어 갈 거 아니에요.”

“나도 두 사람을 위해 하는 소리예요.”

마부도 약간 겸연쩍은 듯 한마디 덧붙이고는 나귀를 재촉해 문을 나섰다. 마차가 흔들거리며 묘당 문을 빠져나왔다. 햇빛에 눈이 부신 정 낭자는 휘장을 내렸다. 반근도 마차에 앉자 마부는 마차를 몰며 앞쪽으로 나아갔다.

밤이 깊었을 무렵, 나귀 마차가 마침내 한 객잔 앞에 멈춰 섰다. 점원이 하품을 하며 나와 맞이했다. 반근이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한참을 진지하게 꼬치꼬치 묻더니, 마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시중들기 힘드네. 그 많은 객잔에서 이것저것 캐물으며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하다가 날이 저물었으니. 품삯도 하루 치 더 주고 하루 더 먹여 주고 재워 줘야 하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마부가 투덜투덜 불평하며 나귀 마차를 끌고 뒷마당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쪽은 돈 버니까 좋잖아요.”

반근이 마부를 향해 불만을 터뜨렸다. 정 낭자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 있었다. 반근이 얼른 손을 뻗어 부축했다.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낭자의 키는 몸종보다 약간 컸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닿는 긴 너울을 쓰고 있었다. 안에 입은 옷은 소매가 짧은 겉옷인 갈색 반비(半臂) 차림이었고, 몸을 감싸는 어두운색 치마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수수한 차림으로 봐서는 낭자의 나이가 적지 않을 텐데, 체형은 또 가냘파 보였다.

이때 대청 안은 이미 손님들의 움직임이 잦아든 후였다. 뒤쪽 객방의 불도 거의 다 꺼져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대청의 등롱 아래를 걷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이 건물에 기대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다가 저도 모르게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대단한 미인이군.”

다른 한 사람도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지만, 정 낭자가 방문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원랑의 눈이 점점 예리해지네. 너울을 쓰고 있는 뒷모습만 보고도 용모를 알다니.”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원랑이라고 불린 남자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외모만 훌륭하다고 해서 미인인 건 아니지.”

원랑이 말하며 그 낭자가 있는 방을 쳐다봤다. 방 안의 등불이 어두운 게 벌써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 * *

반근이 어두운 등불 아래 앉아 진지하게 돈을 셌다.

“아씨, 은자 3냥밖에 안 남았어요.”

정교랑은 침상 머리맡에 몸을 기댔다. 등불이 어둡다 보니 정교랑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일 마차 빌리는 값에 식사 두 끼 먹고, 해 지기 전에 강주성에 들어가면 딱 맞겠네.”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마차값과 밥값 등의 가격을 훤히 꿰고 있었지만, 정교랑만큼 계산이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반근은 값만 기억해 뒀다가 보고하고, 정교랑의 일정 안배를 기다리는 식으로 움직였다.

“아씨, 하룻길인데도 마차를 바꿔야 해요?”

반근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정교랑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응.”

“마부가 말이 너무 많긴 했어요.”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정교랑이 의식적으로 이렇게 마차를 바꿔 가며 여러 대로 이동하는 것은 자신의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방법을 쓰려면 여정에 들어가는 돈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이 보기엔 불필요한 지출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방법을 쓰는 거지? 뭔가를 피하는 듯한데, 뭘 피하는 걸까?

정교랑이 피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피하는 걸까?

정교랑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혼란스럽고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 기억들은 대체 뭘까?

침상에 있는 아씨가 또다시 멍해지는 모습을 보고, 반근은 조심스레 전대를 정리한 다음 등불을 끄고 자리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지난달에 병이 한 번 발작한 후 지금껏 길을 오면서 아씨는 한 번도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 이제 곧 집에 도착하니 더는 길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고, 의지할 곳도 생기게 된다. 반근은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약간은 설레는 기분을 안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정교랑과 반근이 마차를 타고 성문을 빠져 나가던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됐을 무렵이었다. 길 위는 오가는 인파로 북적여 정교랑의 나귀 마차 정도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급보요, 급보.”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오자 행인들이 잽싸게 비키며 길을 텄다. 장병 한 무리가 나는 듯이 지나갔다. 급히 비켜서면서 붐비는 통에 마차 한 대가 길가의 웅덩이에 빠질 뻔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비단 관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급히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시종들이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마차 안에는 노인 한 사람과 아이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 단랑도 말을 탈래요.”

여자아이가 손을 벌리며 남자에게 소리쳤다. 노인이 손을 뻗어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밖은 더워. 이따 시원해지거든 말 타게 해 줄게.”

노인은 여자아이를 달래며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다. 얼른 길을 서둘러라. 네 공무를 그르쳐선 안 돼.”

“이 불효자 때문에 아버지까지 고생하시네요.”

남자는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 마라. 어서…….”

노인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추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남자가 영문을 몰라 하며 소리쳤다. 아버지의 시선은 앞쪽의 어느 곳을 향해 있었다. 남자도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엔 나귀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15~16살쯤 되어 보이는 몸종이 마차의 휘장을 걷고 초조한 표정으로 안에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다시 그 나귀를 보니 방금 전 소동으로 다리를 다친 듯했다. 마부가 쪼그리고 앉아 살펴보고 있었다.

그 낭자로군.

노인은 잠시 망설였다. 저들도 강주부에 가는 길인가?

전에 길에서 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더디게 걷는 모습을 본 낭자는 선뜻 자기 마차에 타라고 하면서, 길을 서둘러야 비를 피한다고 했다. 처음엔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서 하는 말로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말을 믿진 않았지만 선의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몸종이 마차 바깥자리에서 여자아이를 안고 타게 하여 동행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동행을 권해야 하나? 이쪽엔 마차 한 대가 더 있었고, 어쨌거나 저 나귀 마차보다는 빠를 터였다.

하지만…….

노인은 그때 낭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치료할 줄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고 진료비를 받는다고 했지.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

남자가 약간 초조한 듯 소리쳤다. 노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다, 길을 서두르자.”

중년 남자는 부친의 무탈한 표정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여자아이를 타이르고 뒤돌아 말에 올랐다. 호위대가 길을 열면서 이들은 곧 길 앞쪽으로 나아갔다.

마차의 휘장이 바람에 흩날리자 노인은 무심코 밖을 바라봤다. 그 작은 나귀 마차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낭자의 딱딱한 목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노인은 손으로 허리를 짚어 보고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 낭자는 열댓 살 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어. 잔재주를 좀 익힌 게지.

마차의 행렬이 길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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