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60)

-교랑-

강남땅에 못 미친 곳이었지만, 이곳도 여름엔 비가 많이 내렸다. 어젯밤에 휘몰아치던 비바람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바뀌었다. 가뜩이나 습하던 마당에 이끼가 또 늘었다.

삐걱 문소리가 나더니 유지로 만든 우산을 들고 바구니를 옆에 낀 몸종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나막신이 돌길을 밟자 딸각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종이 우산을 회랑에 내려놓고, 문 안쪽을 보며 아씨를 불렀다.

문 안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병풍 뒤에 옆으로 누운 사람 형체가 보였다.

몸종의 고운 얼굴은 사람들 앞에서처럼 당찬 표정이 아니었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바구니를 들고 옆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총총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병풍을 돌아 들어가자 누워 있던 소녀가 일어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몸종은 내심 기뻐하며 보다가 또다시 실망했다. 소녀의 두 눈은 여전히 흰자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입가에 침을 흘리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영락없는 바보였다.

“아씨.”

몸종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낮은 탁자 위에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훌쩍였다.

“아씨.”

소녀는 반응이 없었다.

“교랑, 교랑. 이 외할미가 밥 먹여 주마.”

몸종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호칭을 바꿔 말하자, 소녀가 약간 미동을 보이더니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였다. 몸종이 기뻐하며 그릇을 들고 조심스레 숟가락을 가져다 댔다. 숟가락이 소녀의 입가에서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소녀가 입을 벌려 음식을 삼켰다.

몸종은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고 또 한 숟가락을 떠서 가져갔다. 소녀는 연달아 네 입을 먹더니, 또다시 숟가락을 가져다 대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해. 몸종은 그릇을 내려놓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날 교랑이라고 불렀지.”

문득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몸종은 기뻐하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소녀의 눈동자는 일반인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에 비하면 여전히 흰자위가 크고 검은 눈동자가 작다 보니, 뚫어져라 쳐다본다면 오싹한 느낌이 드는 눈이었다.

“아씨! 깨셨네요!”

몸종은 소녀의 넓은 옷소매를 움켜쥐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소녀가 가냘픈 숨을 토해내고 눈동자를 움직였다. 여전히 멍한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선 차츰 생기가 돌고 있었다. 소녀가 사방을 둘러봤다. 자신이 있는 곳이 낯선 듯했다.

“반근, 이번이 이번 달 몇 번째 발작이었어?”

소녀가 가냘픈 목소리로 힘없이 물었다.

“아씨께 아뢰옵니다. 세 번째예요.”

몸종 반근이 얼른 대답하자 소녀가 응 하고 대꾸했다.

“지난달엔 몇 번이었지?”

소녀가 또다시 물었다.

“네가 말해 줬는데, 기억이 안 나네.”

“기억 안 하셔도 돼요. 소인이 기억하고 있어요.”

반근이 밝게 말했다.

“다섯 번이에요.”

소녀는 또다시 응 소리를 내고는 낮은 탁자 위에 손을 올려 머리를 괸 채 병풍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눈동자가 작아 넋을 놓고 있는 듯 보였다.

몸종은 순간 또다시 긴장하며 소녀를 조심스레 응시했다.

“그렇다면 내 병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구나.”

소녀가 말했다. 반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낫고 계세요. 낫고 계시고말고요.”

소녀는 입을 약간 오므린 채 살짝 웃으려고 하다가 곧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반근, 내가 누군지 또 기억이 잘 안 나. 예전 일도. 네가 다시 말해 줘.”

“네, 네.”

반근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소녀 앞에 꿇어앉았다.

지금은 대주(大周) 건원 5년. 소녀는 정(程)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교랑(嬌娘: 미인이라는 뜻)이다. 강주 서하 정씨 일족으로 부친이 병주 자사(刺史: 감찰관)에 임명되면서 일가가 병주에서 지냈으나, 반년 전 임기를 마쳐 강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교랑은 병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성 밖에 있는 도교 사원인 도관에서 홀로 지내게 됐다.

“사실 아씨께선 6살 때부터 쭉 도관에서 자라셨어요.”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내가 모자란 채로 태어나서?”

소녀가 물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듯싶기도 하고, 의문을 품고 생각에 잠긴 듯싶기도 했다.

반근이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더니 곧 무언가 떠오른 듯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뇨, 아뇨. 아씨께선 병을 얻으신 거예요, 병이요. 보세요, 지금은 나으셨잖아요.”

소녀의 얼굴에 있는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난 왜 그런 일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지?”

소녀가 읊조리듯 말했다.

“10년 넘게 앓으셨으니 기억 안 날 만도 하죠. 그래도 노마님은 기억하셨잖아요.”

반근이 약간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노마님.

소녀의 머릿속에 자신을 향해 환한 웃음을 내보이는 백발의 노파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교랑은 착하기도 하지.

“외할머니.”

소녀가 나지막이 불렀다.

그 소리에 온통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순간 격렬하게 요동쳤다. 여러 가지 감정과 모습들이 뒤얽힌 듯한데,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았다. 머리를 뚫는 듯한 두통에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씨, 아씨.”

반근은 고통에 일그러지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얼른 몸을 일으켜 소녀를 부축했다. 반근은 다급히 소리치며 소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기억 속에서도 소녀를 이렇게 위로해 주는 두 손이 있었다. 반근의 손놀림에 소녀는 차츰 정서적 안정을 되찾았고 곧 통증도 잦아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불명확한 감정만이 머릿속에 뒤죽박죽인 채로 남아 있었다.

“난 정교랑이고 지적 장애를 앓았어. 모친을 일찍 여의고 부친께선 재가하셨지. 날 마음에 안 들어 하셔서 선인의 가르침을 구하도록 도관으로 보내 요양하게 하셨어. 그 후엔 날 버리고 떠나셨고.”

마음이 안정을 찾으면서 소녀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은 다소 사라졌지만 강경해진 목소리는 딱딱하게 들렸다.

반근은 고개를 숙였다.

말로는 병으로 몸이 허약해 먼 길을 떠날 수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보내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이 모자란 아이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씨 집안의 치욕이었다. 정교랑 모친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의원이 지적 장애를 확진한 한 살 때 이미 익사를 당했을 터였다.

지적 장애아를 돌보는 고단함에 시가의 냉대와 조소가 겹친 탓에 정교랑의 모친은 교랑이 6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씨 집안은 좋은 핑곗거리라도 생긴 듯 아이를 도관으로 보내 버렸다.

그래도 교랑은 외조모의 보살핌 덕에 도관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1년 전 그 외조모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외숙 내외는 남의 아이한테 거금을 들일 순 없다며 도관으로 보내는 돈을 끊어 버렸고, 때마침 부친인 정 자사마저 병주를 떠나게 되면서 아이 혼자 도관에 남게 됐다. 말로는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천 리 길을 온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란 말인가.

정교랑을 버리고 가려는 게 분명했다. 정교랑은 그 후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됐다. 사실 정씨 집안에선 이 아이를 버린 지 오래였다.

방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반근, 그래도 네가 내 곁을 오래 지켜 줬구나.”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 목숨은 노마님이 구해 주신 거예요. 노마님과 약조했어요. 평생 아씨를 모시겠다고요.”

정교랑의 모친이 죽은 후, 외조모는 정씨 집안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윗전이 믿음을 안 주는데 아랫것들이 정성을 쏟겠는가. 그래서 특별히 교랑에게 여종 둘을 붙여 주었다. 나이가 많은 여종 하나와 어린 여종 하나가 정교랑 곁에서 쭉 시중을 들었다. 그러던 것이 나이 많은 여인은 1년 전 병사했고, 이제 반근 혼자만 남은 것이다.

소녀가 반근을 보며 입가를 씰룩였다. 반근은 이미 그런 표정에 익숙했다.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려는 것이다. 반근이 얼른 싱긋 웃어 보였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웃는 것조차 이리 어렵단 말인가. 소녀는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무래도 몸이 자신의 몸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걸음걸이도 안정적이고 말도 할 수 있다. 가끔 병이 도져 의식을 잃기도 하고 햇빛을 싫어해 어둡고 습한 곳에 지내야 하지만, 어쨌거나 몸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정교랑.

소녀는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피부를.

자신이 자신에게 이런 낯선 감정을 느낀다는 게 정말이지 이상했다. 머릿속에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정교랑의 기억들. 그리고 더 기이한 기억들. 이를테면 병을 치료한다든가.

어떻게 병을 치료하는 거지?

“반근, 의원은 다들 어릴 때부터 공부해서 병을 치료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정교랑이 몸을 반듯이 앉으며 물었다. 이 간단한 동작도 일반인에 비하면 굼뜬 티가 났다.

“나는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났으니, 배웠을 리가 없는데.”

정교랑을 보는 반근의 눈빛도 막막했다.

석 달 전 뇌우가 내리치던 밤이 떠올랐다. 번개가 도관을 반으로 쩍 갈랐다. 다행히 반근과 정교랑이 묵는 곳은 도관에서 가장 낡은 건물이라 짚과 흙벽돌로 지은 덕에 둘은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건물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번개를 맞은 불이 정교랑과 반근의 발치에서 타올랐다. 정교랑은 난생처음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 후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은 정교랑은 변했다. 아니, 좋아졌다.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게 됐고, 침도 더 이상 흘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아씨, 예전 그 도사 말이 맞았네요. 집을 나와 식구들과 떨어져 도관에서 지내면 대운이 트인댔잖아요.”

반근이 흥분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런가?

정교랑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근육이 굳은 탓에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로 내가 좋아졌다 해도 갑자기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될 순 없잖아?”

하긴 그렇다.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이상한 일이긴 하다.

“아.”

반근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정교랑은 반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반응이 느린 탓에 여전히 약간은 멍해 보였다.

“아씨, 신선이 아가씨를 고쳐 주신 거잖아요. 그러니 아가씨께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도 대수로운 일은 아니죠.”

반근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응? 정교랑이 멈칫했다. 그럼 이게 신선이 내려 준 선술이란 말인가?

“아씨, 기이할 것도 없어요. 건주의 양대년 아시죠?”

반근은 말하고 나서 곧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씨는 지능이 모자라는 분이니 당연히 모르시지.

반근도 노마님이 살아 계실 적에 도관에 다니러 온 여자들과 담소를 나눌 때 들은 얘기였다. 도관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지내다 보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소한 일도 한번 들으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몇 살이 되도록 말을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를 읊었다지? 금계에 사는 한 농민의 자식은 다섯 살 때 갑자기 시를 짓게 되었고 말이야.”

응? 정교랑은 또다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놀라움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대단했다니!

“네, 맞아요. 아씨, 어른들이 그러셨어요. 이건 선인의 계시(啓示)라고요.”

반근이 기뻐하며 정교랑을 보고 두 손을 꼭 쥐었다.

“아씨, 아가씨도 계시를 받은 거예요. 아가씨는 넋이 나가 있을 때가 많으셨는데, 이제 선인 덕분에 넋을 되찾은 거죠.”

아, 그런 건가. 정교랑은 반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씨, 그 도사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어요. 어쩌면 노야도 아씨를 고의로 버리신 게 아닐지 몰라요!”

반근은 말하면서 퍼뜩 깨닫고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씨, 우리 도관으로 돌아가 봐요. 노야께서 데리러 오셨을 거예요.”

응? 그럴까? 하지만 정교랑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동작이 생각을 못 따라가는 탓에 어떤 생각에 대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게 됐다.

“우린 이미 멀리 왔으니 도관으로 가 봤자 좋을 거 없어. 곧장 집으로 가는 게 덜 번거롭지.”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자 반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늘 자신의 보살핌 아래 생활하던 아씨가 쾌차한 후부터는 주관이 뚜렷해졌다. 병이 가끔 발작하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더없이 마음이 놓였다.

굳은 표정의 정교랑은 말없이 있었다. 반근은 이미 여러 날 동안 그 습관을 지켜봤다. 아씨는 지금 열심히 생각하며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근은 재촉하지 않고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우리에게 지금 돈은 얼마나 있지?”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은 매일 두 번씩 돈을 세는 터라 정확히 알고 있어 얼른 대답했다.

“이번에 장씨 집안에서 받은 돈까지 합치면 은자 10냥이요.”

집을 빌리는 것부터 시작해 병을 치료하고 자신이 먹을 보약과 음식을 사려면 돈이 들었다. 정교랑이 버는 돈은 매번 금세 바닥이 났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돈이 없으면 길을 멈추고 벌면 될 일이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본가도 점점 가까워지겠지.

가족들을 만나고 태어난 집으로 돌아가면 이 혼란스럽고 이리저리 조각난 기이한 기억들도 정리가 될 것이다.

“한동안 길을 갈 수 있겠구나.”

정교랑이 말했다.

“얼른 가서 마차를 구해 오너라. 오늘 밤에 떠나자.”

지금 당장? 오늘 밤에?

반근은 약간 놀랐다. 오래 머무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는 오늘 이동을 결정하면 내일 준비해서 모레 출발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바로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아씨, 몸조리를 더 하셔야죠.”

반근이 불안해하며 말했다.

“이렇게 서두르실 필요 없잖아요.”

정교랑이 천천히 얼굴을 움직였다. 고개를 가로저을 생각이었지만 이번엔 도무지 힘들 것 같아 포기해 버렸다.

“이번엔 이웃 부인의 병을 고치느라 전보다 한 곳에 며칠 더 오래 머물렀잖아.”

정교랑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 안의 혀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말을 줄여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러면, 안 좋아.”

안 좋다고? 뭐가 안 좋다는 거지? 반근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정교랑은 말없이 반근을 바라봤다. 조금 생기를 회복한 눈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인 물처럼 어둡고 깊었다. 반근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네, 소인 그리할게요.”

반근은 대답을 마치고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은 고요를 되찾았다. 밖에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습한 기운이 찬바람을 타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기운이었다. 정교랑은 몸을 옆으로 누워 넋을 놓고 있었다. 또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정교랑이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기억들을 놓치지 않고 정리하려 들면 극심한 두통으로 뒤죽박죽이 되고 지적 장애 상태로 돌아가기도 했다. 오히려 이렇게 멍하니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으면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좋아졌고, 병으로 인한 발작도 차츰 줄었다.

일 처리가 빠른 반근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물론 수중에 돈이 있는 덕이 컸다. 전에는 도관에서 병주부를 나오는 짧은 여정에 7일이 걸리기도 했다.

“아씨, 짐 챙겼어요. 마차는 저녁에 온대요.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그럼 밤새 길을 재촉할 수 있어요.”

정교랑은 침상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신나서 몸을 일으키던 반근은 그제야 문 밖에서 누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보시오, 신의(神醫)가 계시는 곳 맞소?”

반근이 아직 열리지 않은 반쪽 문을 열고 보자 문 밖에 있는 사내 둘과 여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반근이 다가오는 걸 보더니 문턱 위에 앉은 여인이 크게 신음 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아이고, 사람 좀 살려요.”

반근은 인상을 썼다. 저리 멀쩡한 정신으로 무슨 병이 있다고. 더구나 아씨가 더는 진료를 안 받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병은 우리 아씨께서 못 고치세요. 다른 의원한테 가 봐요.”

말을 마친 반근이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쾅 소리가 들리더니 둘 중 한 사내가 손으로 문을 쳤다.

“왜 못 고쳐? 다른 사람들은 다 고쳐 주더니 왜 우리만 못 고친대? 돈 없다고 무시해?”

사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반근은 사내의 험악한 모습을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이 댁 아씨는 신선의 계시를 받은 범상치 않은 분이 아닌가.

“아니에요. 우리 아씨는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만 치료한다고요. 이쪽 부인은 멀쩡…….”

멀쩡하단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사내가 휙 몸을 돌려 그 부인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차는 게 보였다.

반근과 부인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부인은 피까지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다 죽게 생겼네. 고칠 수 있겠냐?”

사내가 다시 뒤돌아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창백해진 반근을 노려보며 험상궂게 말했다.

이건 병을 치료하러 온 게 아니야. 트집을 잡으러 온 거야!

반근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안에 있는 아씨를 떠올리고 곧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창백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아씨께서 아까 말씀하신, 안 좋은 일인가?

어떡하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반근은 놀란 표정을 숨기며 문 앞을 굳건히 지키고 섰다.

“무슨 짓이냐니? 병을 치료하라고!”

사내가 소리치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노려봤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며? 이제 다 죽게 생겼는데, 그래도 안 고칠 테냐? 사람 목숨이 우스워?”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다 죽게 생겼다니, 그럼 어서 관아로 가 고해야지.”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곳은 동강의 명문대가인 장씨 집안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사는 곳으로, 외부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비어 있는 집 몇 채는 습하고 눅눅하여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기에, 이쪽엔 소란스러운 일이 생겨도 구경하러 올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장씨 집안이 초상을 치르는 중이어서 아무나 함부로 와서 서성일 리 없는데,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이 나타나 빈정대기까지 하다니?

“어떤 겁 없는 새끼가…….”

두 사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봤다.

언제 온 건지 세 사람과 말 한 마리가 물가를 지나고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젊은이는 긴 소매의 여름 도포 차림에 삿갓을 쓰고 있었다. 긴 여정으로 고초를 겪으며 말을 재촉해 달려온 듯 보였다.

“무엄하다. 감히 우리 도련님께 이리 무엄하게 대하다니!”

젊은 도령 옆에 있던 시종 둘이 사내들의 고함에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도련님? 젊은이의 행색을 다시 보니 평범한 백성은 아닌 듯 보였다. 두 사내의 얼굴에 약간의 두려움이 서렸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씀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한 사내가 말했다.

“내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젊은 도령은 말하며 손을 뻗어 삿갓을 벗었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사람을 이리 우롱하다니. 소육, 이곳 동강의 현승(縣丞) 진 대인께 내 명첩을 들고 가 묻거라. 고을을 대체 어찌 다스리는 것인지!”

도령의 말을 들으며 불안해하던 두 사내는 도령의 입에서 현승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더욱 허둥댔다. 자세히 보니 젊은 도령은 초상집인 장씨 저택의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장씨 집안과 교류하는 이들은 전부 권세가인 걸 생각하면 이 도령의 신분도 보통은 아닐 터였다.

“좋아. 여기 도령이 현승을 찾아가겠다니, 우리가 먼저 발고하러 가자고!”

한 사내가 빠르게 반응했다. 분노로 씩씩거리며 소리치고는 곧장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다려!”

다른 한 사내도 반응이 조금 느리긴 했지만 바로 뒤따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 앞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만 남게 됐다. 반근은 정신을 차리고 그 여인을 불안해하며 바라봤다.

“아씨, 어떤 부인이…….”

반근이 이를 악물고 몸을 돌리며 안을 향해 소리치며 여인의 상태를 설명하려던 때였다. 도령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소육, 사람이 죽었구나. 어서 들고 관아로 가서 검시관에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인이 툴툴거리며 일어나 도망쳤다. 여인은 바닥에 찰캉 소리를 내며 떨어진 물건을 주울 새도 없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젊은 도령과 두 시종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반근은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호기심에 저도 모르게 몇 걸음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그건 철판이다. 저 부인이 입으로 내뿜은 건 아마도 닭의 피일 게야.”

젊은 도령이 말했다. 반근이 젊은 도령을 보며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는 됐다. 내 고모님 댁 앞에서 몹쓸 무뢰배들이 행패를 부려 체면을 깎게 할 수야 없지.”

말을 마친 젊은 도령은 더 이상 반근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말을 재촉해 출발하려 했다.

“반근.”

집 안에서 정교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이 얼른 고개를 돌리는데, 몸을 채 돌리기도 전에 정교랑의 말이 이어졌다.

“존함을 여쭈어라. 훗날 은혜를 갚아야지.”

반근은 곧장 동작을 멈추고 말을 달려 출발하는 도령 쪽으로 쫓아갔다.

정교랑이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얼마나 큰지 도령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도령이 뒤쫓아오는 반근을 웃으며 바라봤다.

“이 정도 수고쯤이야 누구나 도울 수 있는 일이니 은혜랄 것도 없다.”

웃으며 말을 마친 도령은 반근을 기다려 주지 않고 말을 재촉해 떠났다. 시종들도 잰걸음으로 뒤따라갔다. 반근이 몇 보 더 따라가자, 도령이 장씨 저택의 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이 걱정된 반근은 얼른 돌아왔다. 정교랑은 여전히 병풍 뒤에 앉아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숨까지 약간 헐떡였다.

“아씨!”

반근은 놀라며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정교랑이 반근을 보며 괜찮다는 눈빛을 드러내자 반근은 비로소 안도했다. 아씨의 지적 장애가 발작한 건 아니었다.

일각쯤 지난 후, 정교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소리를 질렀더니 힘들더구나.”

정교랑이 자신의 방금 전 상태에 대해 해명하자 반근은 기쁘면서도 속상했다.

“아씨, 놀라셨죠.”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니야.”

정교랑이 말을 덧붙였다.

“그럴 만도 하지.”

못된 놈들이 들이닥쳤는데 그럴 만도 하다니? 반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교랑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실은 설명해 주고 싶은데 말하는 게 너무 힘들어 그만둔 것이었다.

반근도 곧 생각을 떨쳐 버렸다. 아씨만 괜찮다면 안심이다.

“그 도령은 장씨 저택 대문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고모님 댁이라고 했어요. 나이는 17~18살쯤 되어 보였고요.”

반근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티도 안 날 정도의 끄덕임이었다.

“장씨 집안 노부인의 연세에 그리 젊은 조카가 있을 리는 없으니 며느리 한씨의 친정 조카겠지.”

정교랑이 말하면서 반근을 쳐다봤다.

“세상에 쉬이 도울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누구나 기꺼이 나서진 않아. 반근, 내 기억력이 안 좋으니 네가 대신 기억해 둬.”

반근은 대답한 후, 무릎을 꿇은 채로 옆에 있는 작은 탁자 앞으로 갔다. 탁자 위에는 간단한 지필묵이 있었다. 반근이 붓을 들어 천 위에 몇 글자를 공들여 적었다.

“아씨, 지금 바로 출발하나요?”

반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서두를 것 없어.”

정교랑이 대답했다. 아씨가 급하지 않다면 반근도 급할 게 없다.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힘겹게 몇 글자를 이어 썼다.

* * *

바로 그 시각 성 안 동쪽 시장에 있는 한 저택 안에서는 두 사내와 아까 그 여인이 바닥에 꿇어앉아 무릎을 조아리고 있었다.

“너희 잘못만은 아니다.”

방 안의 등나무 의자에 청포를 입고 앉아 있던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문 앞에 꿇어앉아 있던 세 사람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아버지.”

한 사내가 급히 들어왔다.

“그 도령은 숙주 한씨로 오늘 조문을 하러 오는 길이었답니다. 그 정 낭자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고요.”

청포를 입은 남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씨 집안이나 한씨 집안을 뒷배로 둔 것만 아니면 된다.

“내가 경솔하긴 했다. 장씨 집안 며느리 한씨의 초상이니 조문객이 많을 터, 이런 때에 성급히 굴어선 안 됐어.”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하자.”

세 사람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아버지, 정 낭자의 의술이 정말 그리 고명하답니까? 그럼 필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겠지요. 정 낭자에게 처방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면…….”

남자가 약간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로 의술이 고명한 게 아니다. 지금까지 치료한 사례들을 보면, 증상이 비슷한 점은 전혀 없었어. 그런데 전부 실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았지. 탕약을 지어 준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고. 이건 의술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을 소생시키는 방술을 아는 게 틀림없어.”

청포를 입은 남자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남자는 잠자코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조가당(曹家堂)에서 그 방술을 얻는다면 실로 큰 복일 겁니다.”

남자가 방술을 이미 손에 넣은 듯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집엔 윗전과 몸종 둘뿐이라고 했지?”

청포를 입은 남자가 재차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윗전과 몸종 둘뿐이고, 정 낭자의 병자는 전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안으로 들어간 자들도 전부 마당에 머물러야 했지. 정 낭자는 입조차 열지 않아서 용모나 나이조차 아는 이가 없다. 그림자로 봤을 땐 20~30대쯤 된 부인이라고 들었고.”

청포를 입은 남자가 웃음을 띠고 덧붙였다.

“상관없다. 며칠 후에 우리가 직접 가 보면 되지.”

남자가 나막신을 벗고 버선발로 들어가 방석에 앉았다.

“아버지. 장씨 집안이나 한씨 집안에서 막으면 어쩌죠?”

남자가 물었다. 장씨 집안이나 한씨 집안 모두 이들 같은 일개 상인이 건드릴 가문이 아니었다.

“외지 사람이고 무연고인데 뭘 막아?”

청포를 입은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어쨌든 장씨 저택 근처고, 그 댁은 속세에서 벗어나 고상하게 은거하며 지내는 집안이니 다음번엔 더욱 신중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러자 남자는 근심이 사라진 듯 환한 얼굴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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